# 162
12화
마구 웃으면서도 그의 검은 여전히 갈지혁의 움직임을 따라오고 있었다. 기습을 할 수도 없었다.
웃음을 멈춘 그가 입을 열었다.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군요. 겨우 그런 놈들의 수하일 것 같습니까? 독황독립문은 곧 제 것이 될 겁니다. 무당, 화산, 소림…… 모두 제 앞에 무릎을 꿇게 되겠지요.”
가만히 있던 갈지혁이 물었다.
“한 가지만 묻겠다.”
“얼마든지.”
“지금 중원에 퍼진 역병도 네놈 짓이냐?”
“역시 갈지혁이군요.”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다. 맞다고 대답한 것은 아니지만 어투와 표정을 보아하니 맞는 모양이었다.
혹시나 했던 일이 맞아떨어지자 갈지혁은 기가 막힌 표정이었다. 그토록 많은 일들이 전부 눈앞에 있는 이 젊은 사내가 벌인 것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역병이 아닌 독이었다.
그걸 안 순간부터 갈지혁은 정체불명의 뒤를 쫓는 자를 생각했다. 혹시 자신을 쫓는 자가 그 역병을 만들어 낸 자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그게 맞아떨어졌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지.”
“궁금한 게 너무 많군요.”
“나와 만난 적이 있나?”
“딱 한 번. 당신이 사독문에 갇혀 있을 때 지대익과 함께 갔던 적이 있지요.”
“그렇군.”
분명 처음 보는 자인 것 같긴 한데 뭔가 낯이 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물었다.
대답을 들으니 갈지혁은 단리문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사독문에 찾아왔던 그는 강해 보였다. 그랬기에 덤비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의 갈지혁은 그때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그때는 단리문이라는 자가 이토록 강한 줄은 몰랐다.
하지만 자신이 이같이 높은 경지에 오르자 그의 실력이 이제야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이제 이야기는 그만. 너무 오래 기다렸습니다. 더는 못 기다리겠군요. 성격이 급한 편이라. 단화초와 당신의 목숨을 거두어가겠습니다.”
말을 마친 단리문의 신형이 갈지혁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갈지혁 또한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내며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카앙!
검끼리 부딪쳤다.
비록 겉핥기에 부족할지 모르지만 갈지혁 또한 검을 익혔다. 만병지왕이라는 검 정도는 어느 정도 알아 둬야 한다는 일악천의 말 때문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갈지혁은 이토록 방어를 하기 위해 종종 검을 사용하곤 했다.
검을 막아 내는 순간 단리문의 손목이 비틀렸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무공을 모르는 자들도 펼칠 수 있다는 가장 초보적인 초식이라는 횡소천군(橫掃千軍)을 단리문이 펼친 것이다.
다소의 변화가 있었지만 그 기본은 분명 횡소천군이었다.
그렇지만 갈지혁은 어렵사리 그 공격을 받아 냈다. 그러자 갑작스럽게 검이 위로 향하더니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횡소천군에 이어서 이번에는 태산압정(泰山壓頂)이었다.
이 또한 간단한 내려치기로 기본적인 초식의 하나였다. 단리문이라는 인물이 펼치기에는 다소 부족해 보인다.
그렇지만 그 두 가지의 기본적인 초식 안에 숨겨진 수많은 변화들이 갈지혁을 압도했다.
분명 이것은 무당파의 삼절황검(三絶荒劍)이다.
‘무당파의 무공을 익혔다. 이놈이 설마?’
얼마 전 무당파에 일어난 참극에 대해 들었다. 독을 쓰는 자가 무당파 무인들을 죽였다는 그 소문 말이다. 그리고 그자는 원래 무당의 속가제자였다고 한다.
눈앞에 있는 자와 너무나 일치한다.
‘이놈이다!’
그렇지만 더 이상 상념을 이어가기에는 상대의 검이 너무나 날카로웠다.
잠시 가벼운 초식으로 몸을 푸는 듯했던 단리문의 검이 매서운 공세를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검으로 방어를 하던 갈지혁은 이내 쓸모없는 짓이라고 판단했다.
검술의 차이가 너무나 심했기에 오히려 거치적거리기만 했다. 오히려 검 때문에 공격할 기회를 잡지 못하는 것이다.
갈지혁은 과감하게 검을 집어던졌다.
타앙!
옆으로 검을 쳐내는 순간 갈지혁의 손바닥이 녹색으로 물들었다.
팍!
갈지혁이 손바닥을 움직이려는 순간 단리문 또한 검을 들지 않은 왼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의 손에서도 장법이 터져 나왔다.
갈지혁의 독장과 단리문의 장법이 부딪쳤다.
그런데,
“큭!”
갈지혁이 밀렸다.
그는 가슴에 이는 통증을 억지로 눌렀다.
다행스럽게 두 개의 힘이 상쇄되기는 했지만 밀려나는 힘에 갈지혁은 뒤로 물러서고야 말았다.
무당의 십단금이다.
“십단금을 막아 내다니.”
단리문은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봤다.
아직도 저릿저릿하다.
갈지혁이 내상을 입은 것에 비하면 아무렇지도 않은 부상일지 모르겠지만 그것만으로도 단리문은 그에게 감탄했다.
무당파의 인물들도 십단금을 막아 내지 못하고 그대로 쓸려 나갔다. 그 많은 자들이 말이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자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장으로 막아 냈다. 그것도 파괴력이 떨어진다는 독장으로 말이다.
오랜만이다, 이렇게 상대할 만한 적수를 만난 것은.
‘하지만 죽여야 할 놈이지.’
아쉽다.
만약 된다면 수하로 거두고 싶은 생각까지 들 정도다.
그렇지만 단리문은 안다. 지금 눈앞에 있는 놈만큼은 천하가 반으로 갈라져도 그의 수하로 들어오지 않는다.
그런 놈은 아예 싹을 잘라 버리는 것이 낫다.
갈지혁은 착잡한 심정으로 단리문을 바라봤다. 독장이 이렇게 쉽게 무너지는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가슴에 이는 통증을 생각하며 이를 꽉 깨물었다.
문제는 가슴에 입은 타격뿐만이 아니다.
갈지혁의 기세가 약해지면 바로 단화초가 그를 잡아먹으려고 든다. 가뜩이나 눈앞에 있는 상대는 최고의 상태라고 해도 이길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는 자다.
그런데 단화초라는 짐까지 지고 싸우고 있으니 점점 버거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서둘러서 끝내야 한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단화초를 억눌러야 하는 갈지혁으로선 힘들어질 뿐이다.
갈지혁은 모든 것을 단시간에 쏟아 붓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손가락을 쫙 편 채로 단리문을 겨누었다.
순간 갈지혁의 손가락 끝에서 독기가 가득 실린 지력이 쏟아져 나왔다.
십선유루지다.
단리문은 내공을 실은 검으로 단숨에 지력을 가르려 했다. 그렇지만 갈지혁의 지력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십선유루지는 수라독공을 기반으로 펼쳐지는 지법이다. 그리고 그것은 호신강기까지 녹일 정도로 매섭다. 독지라고 해서 얕보다가는 큰코다친다는 소리다.
손쉽게 생각한 탓에 뒤로 밀려나던 단리문은 몇 개의 지력을 몸으로 받아야 했다.
그렇지만 그는 금강불괴의 경지에 오른 자다. 다소 타격이 있기는 했지만 거동이 불편할 정도의 부상은 아니었다.
뒤로 밀려난 그가 검을 수평으로 세웠다.
얼굴 가득했던 웃음기가 반쯤 걷혔다.
거리가 벌려지자 갈지혁은 그대로 무엇인가를 꺼내 단리문에게 던졌다.
날아드는 것을 그는 단숨에 검으로 갈라 버렸다.
그때 폭발이 일어났다.
퍼퍼펑!
연속적인 폭발이 단리문의 몸 주변에서 시작됐다. 그의 몸이 뒤로 또 밀려난다. 한 번 기회를 잡은 갈지혁은 또 다른 무엇인가를 뿌렸다.
가루가 단리문을 뒤덮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갈지혁은 액체를 뿌렸다. 가루와 액체가 만나는 순간 그것은 무서운 독으로 변했다.
그의 얼굴이 갑작스럽게 검게 변했다.
중독이 되었을 것이다.
‘좋아. 승산이 생겼어.’
갈지혁은 그대로 독장을 휘둘렀다.
짧은 찰나에 그가 펼칠 수 있는 가장 파괴적인 것은 결을 이용한 장법이다. 이것이 제대로만 들어간다면 독에 중독된 단리문은 그대로 쓰러질 것이다.
확신에 가깝게 휘두른 일장이었다.
한데 단리문이 갑작스럽게 입을 열고는 무엇인가를 뱉어 냈다.
“퉤.”
그의 얼굴에 일순 혈색이 돈다.
‘젠장!’
갈지혁은 그대로 몸을 틀었다. 그렇지만 기다렸다는 듯이 단리문의 발이 움직였다.
방향을 급하게 선회했지만 단리문의 신법은 결코 갈지혁의 아래가 아니었다. 그는 그대로 갈지혁에게 다가와 손바닥을 움직였다.
십단금!
갈지혁은 양손을 교차시키면서 그대로 발로 단리문을 걷어찼다.
퍽!
얼굴을 정확하게 때렸지만 이미 단리문의 손을 떠난 십단금 또한 갈지혁의 가슴에 적중했다.
콰앙!
갈지혁의 몸이 바람에 휩쓸린 낙엽처럼 땅을 뒹굴었다. 뒤로 물러난 단리문은 천천히 비틀린 고개를 원상태로 돌렸다.
그의 인상은 일그러져 있었다.
결코 그냥 내지른 발길질이 아니었다. 십단금을 쏘아 내기 위해 달려드는 반동까지 이용했다.
더군다나 내기가 실린 그 일격은 단리문에게 화가 일게끔 만들기에 충분했다.
갈지혁의 공격이 단리문에게 타격을 주기는 했지만, 문제는 그의 상태가 더 중하다는 것이다.
“쿨럭.”
땅을 나뒹굴던 갈지혁이 양손으로 몸을 받치고 어렵사리 일어났다. 그의 입가로 피가 쏟아져 나왔다.
‘너무 빨라.’
그의 신법은 도저히 갈지혁이 쫓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더군다나 가장 큰 문제는 지금 단리문이 독에 중독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청적독(靑赤毒).
푸른 가루와 붉은 액체가 만나는 순간 그 독기를 뿜어내는 독이다. 일악천에게 전수받은 독으로, 그 독성은 당문의 십대극독에 견주어도 모자랄 것이 없었다.
들어가는 순간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상대는 어찌 된 영문인지 독에 중독되지 않았다.
“어떻게…… 분명 중독되었는데.”
검게 변한 얼굴, 그리고 손가락 끝도 녹색으로 물들었다. 그건 분명 독에 중독된 현상이다. 확신이 섰기에 갈지혁은 움직였고, 그것은 독인인 그의 감각이었다.
틀렸을 리가 없다.
그런데…… 틀려 버렸다.
단리문은 고개를 슬쩍 비틀고 이내 가슴을 손으로 쓸었다. 연신 터져 버린 독탄에 가슴 부분의 옷이 거멓게 타버렸다.
“중독되었습니다. 다만 그걸 해독한 것뿐이지요.”
“그 짧은 시간에 해독은 불가능하다.”
갈지혁은 확신 어린 말투로 말했다.
어떠한 독인지 알아차릴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거기다가 설령 안다고 해도 청적독에 당할 것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치유제를 들고 다녔을 리도 없다.
청적독은 결코 시중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그러한 독이 아니었다. 당문십독에 버금가는 독을 그리 해독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잠시 일그러뜨렸던 얼굴을 원래대로 미소로 가두며 단리문이 말했다.
“독의 해독약은 바로 저의 내공이지요.”
말을 마치고 그는 다시금 검을 들어 올렸다.
갈지혁에 비해 그는 멀쩡한 상태였다. 비록 예상보다 상대가 강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승패는 변하지 않는다.
가슴을 움켜쥔 채로 갈지혁 또한 옆으로 움직였다. 그의 머릿속은 상당히 복잡했다.
‘무공으로 싸우면 내가 진다. 독으로 싸워야 하는데, 독이 통하지 않아.’
갈지혁은 독인이다. 그리고 상대는 무인이다. 그것도 여태까지 싸워 본 그 누구보다도 강한 자다.
그렇기에 독으로 싸우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상대방의 기이한 내공심법에 있었다.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단리문이라는 자의 내공은 독을 단숨에 제압한다.
약한 종류의 독이라면 가능하다.
하지만 청적독은 그 위력만으로 치자면 두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극독이었다. 그러한 독을 잠시 만에 해독한다는 것은 다른 그 어떠한 극독도 통하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독인이 아니다. 그런데 또 단리문은 독인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싸워야 해.’
방법이 딱히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갈지혁은 무거운 몸을 억지로 끌었다.
무당파의 십단금을 몸으로 받았는데 상태가 멀쩡할 리가 없었다.
십단금은 무당파를 떠나 전 무림에서 가장 파괴적인 장법으로 알려진 무공이다.
그러한 것을 맨몸으로 받았다.
멀쩡하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발은 걷는다기보다는 끈다는 말이 어울리게 처져 버렸다. 힘이 없어진 양손은 들어올리기도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