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
13화
갈지혁이 뿌릴 수 있는 독 중에서 가장 위력적인 독 중 하나가 청적독이다. 그런데 통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른 독이라도 다 통하지 않을 것이다.
단 하나, 그것만 제한다면.
그는 품속에서 꿈틀대는 사황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지금 이놈은 나와서 갈지혁을 도우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안 된다. 눈앞에 있는 단리문이라면 사황의 움직임 정도는 읽고도 남는다.
잘못하면 사황이 죽는다.
그런 꼴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보고 싶지 않았다.
‘기회는 한 번뿐이다.’
갈지혁은 자신이 지닌 최대의 독을 사용하기로 했다.
그에게는 당문십독에 버금가는 많은 독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독으로는 눈앞에 있는 단리문이라는 자를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방금 전 썼던 청적독만 생각해도 답은 나온다.
청적독과 비슷한 독으로는 단리문을 제압하는 건 불가능하다.
갈지혁이 지닌 최대의 독.
바로 그건 갈지혁 본인의 피다.
수만 가지의 독을 섭취했다. 그의 피는 그 어떠한 독보다도 치명적이고, 또 절대극독까지 머금었다.
단화초를 제한다면 갈지혁의 피만한 독성을 지닌 것도 또 없을 게다.
단화초의 독을 만들어 내지 못한 지금 마지막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의 피였다.
그렇지만 그냥 피를 뿌린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단지 피의 독성만으로는 단리문에게 타격을 주지 못한다. 그렇기에 지금 갈지혁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잘못하면 죽는다.’
단화초의 독기가 몸속으로 침투하려는지 온몸이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 없다는 소리다.
갈지혁은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없고 급한 것이 그였지만 그래도 꾹 참아야만 했다. 최대한 거리가 가까워야 그만큼 단리문을 제압할 확률이 커진다.
정말 극한의 상황이 아니라면 절대 펼쳐서는 안 되는 최후의 무공을 갈지혁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 그 무공을 펼친다면 곧 단화초의 힘이 그를 삼키려 들 것이다.
그것을 사용한 후라면 단화초를 제어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건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무공이 아니라면 도저히 단리문을 제압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막연하게 하늘에 모든 것을 맡길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단리문이라는 놈이 살아남게 된다면…… 중원이 사라질 게다.
우습게도 중원에서 공적으로 삼은 갈지혁이 그들을 위해 목숨을 바쳐서 싸우고 있는 꼴이었다.
‘검은 피한다. 분명 십단금을 펼치기 위해 다시 한 번 접근할 거야. 그때를 노린다.’
검에 난자당하게 되면 더는 못 버틸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더 이상 출혈이 있어서는 안 된다.
팍!
단리문의 검이 갈지혁의 생명을 끊기라도 할 것처럼 빠르게 쇄도해 들어왔다. 그는 마치 사냥이라도 하는 것처럼 갈지혁을 궁지에 몰아넣고 즐거움을 느끼는 듯했다.
핏, 핏.
갈지혁의 온몸에 자잘한 검흔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점점 힘들어졌지만 무너지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이토록 상대에게 유린을 당하게 될 줄은 몰랐다.
갈지혁이 무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대가 얼마나 강했든 갈지혁의 독은 통했다. 독에 내성이 아무리 강한 자라도 결국 모든 독을 이겨 낼 수는 없었다. 그리고 갈지혁에게는 위력적인 몇 가지의 무공도 있었다.
그래서 패하지 않고 이곳까지 왔다.
그런데 단리문은 달랐다.
그의 무공은 가히 하늘이었고, 내공심법은 갈지혁의 모든 독을 막아 냈다.
“질기게도 피하는군요.”
검 끝을 빙그르르 돌리면서 단리문이 말했다. 그가 검을 꽉 움켜잡았다. 더는 시간을 끌 생각이 없는 것이다.
“슬슬 지루해졌습니다. 그리고 단화초도 어서 받아가야 할 것 같고요. 단숨에 머리통을 날려 드리도록 하지요.”
그가 검을 세우고 돌진이라도 할 듯한 자세를 취해 보였다.
갈지혁은 내공을 끌어 모았다. 이번 단 한 번에 모든 것이 결정될 것이다.
쒜엑!
단리문의 몸이 용수철처럼 튀어나왔다.
갈지혁은 단리문의 검을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동시에 갈지혁에게 빈틈이 생겼다.
기다렸다는 듯 단리문의 손바닥이 앞으로 날아든다.
십단금으로 마무리를 하려는 듯했다.
갈지혁은 눈을 감았다.
온몸의 신경들이 미친 듯이 두근거린다. 그리고 때를 맞추어 단리문의 손바닥이 가슴에 와 닿았다.
충격이 채 일기도 전 갈지혁의 입에서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혈해(血海).”
파악!
피분수다.
갈지혁의 몸에서 피가 터져 나온다.
십단금이 채 위력을 발휘하기 전에 벌어진 일이다. 단리문에게 당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동귀어진식의 최후의 수법인 혈해다.
아무리 단리문이 강하다고 하지만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급히 신법을 펼쳐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그는 피를 뒤집어쓰고야 말았다.
그것도 갈지혁의 피를.
“크악!”
처음으로 단리문의 입에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그가 땅에 얼굴을 처박은 채로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혈해를 사용한 갈지혁 또한 엄청난 양의 피를 쏟아 내고는 천천히 뒤로 쓰러졌다.
살 수 있는 최소한의 피만을 남겨두고 나머지를 전부 밖으로 토해 내는 무공이었다.
정말 최후의 순간이 아니라면 절대 사용하지 말라고 일악천이 언급했던 바로 그 무공이다.
갈지혁의 피가 사방으로 터져 나가자 상황은 참담했다.
나무도, 돌도…… 반경 십 장 안에 있는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타버렸다. 하나도 남지 않고 모든 것이 타버렸다.
심지어 흙까지도 녹아 버렸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 바로 갈지혁과 엎어져 있는 단리문이었다.
땅에 얼굴을 처박은 채로 부들부들 떨고 있던 단리문이 천천히 고개를 치켜든다.
넝마가 되어 버렸다. 온몸에 엄청난 부상을 입어 버렸다. 만약 그가 금강불괴의 경지에 이른 자가 아니었다면 다른 생명체처럼 그대로 녹아 버렸을 것이다.
호신강기도 녹였다. 그리고 금강불괴인 그의 신체까지도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러한 고통은 생전 처음 겪는 것이었다.
그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열린 단리문의 입에서 거칠게 갈라진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갈…… 지…… 혁!”
단리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지혁은 이미 정신을 반쯤 잃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싸움은 끝났다.
외상은 심하지만 아직 단리문은 싸울 힘이 남아 있었다. 그에 반해 갈지혁은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승부가 난 것이다.
“죽인다…… 감히 나에게!”
단리문의 어투가 거칠어졌다. 그만큼 그는 울화가 치밀었다는 소리였다.
갈지혁은 점점 정신이 혼미해져 갔다. 극도로 많은 양의 피를 양손을 통해 한 번에 쏟아 냈다.
몸이 약해지자마자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단화초의 독이 그의 몸에 침투해 들어온다.
이제는 막을 힘도 없었다.
‘……끝이로군.’
우습게 되어 버렸다.
단화초를 구했다고 나름대로의 꿈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갔다는 생각에 웃고 있다가 단리문이라는 자를 만났다.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제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독왕이 되겠다는 약속…… 지키지 못할 것 같습니다, 스승님.’
갈지혁은 눈을 감았다. 그만 쉬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귓가로 단리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죽인다, 죽인다! 찢어 죽여주마!”
단리문이 갈지혁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내 제자에게 손을 대면 넌 죽을 게야.”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단리문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채로 쓰러져 있던 갈지혁은 자신의 귀가 이상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빠졌다.
익숙한 목소리.
하지만 결코 들릴 리가 없는 목소리가 들려온 탓이다.
힘이라도 있다면 고개를 돌려 확인이라도 하겠건만…….
고개를 든 단리문의 얼굴에 놀란 감정이 가득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있어서는 안 될 자.
단리문이 이를 갈았다.
추레한 외모, 그렇지만 결코 우스운 상대가 아니었다. 다른 자라면 몰라도 지금 이자만큼은 이곳에 나타나서는 안 됐다.
그가 부들부들 떨면서 입을 열었다.
“일수만독, 네놈이 왜…….”
단리문의 말에서 갈지혁은 익숙한 별호를 들어 버렸다. 반쯤 잃었던 정신이 일순 또렷해졌다.
“스, 스승님?”
“놈. 창피하게 이게 무슨 꼴이더냐.”
쓰러져 있는 갈지혁의 앞에 누군가가 그림처럼 나타났다.
흉악한 외모를 지닌 노인.
갈지혁의 스승이자 독황독립문이 배출했던 최고의 독인인 일수만독 일악천이다.
갈지혁과 단리문의 사이를 막은 일악천이 말했다.
“내 제자는 내가 데려가지.”
“누구 마음대로?”
“그럼 나와 싸우겠는가?”
“큭…….”
단리문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원래의 몸 상태라면 일악천을 제압하는 건 문제없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의 단리문은 일수만독을 이길 수 없었다.
갈지혁에게 당한 부상이 너무 크기 때문이었다.
일수만독 일악천은 단리문이라고 해도 싸우고 싶지 않은 상대다. 더군다나 이러한 몸 상태라면 싸워 봤자 득보다 실이 많았다.
“……돌아가지.”
중원을 뒤집을 계획을 짜기 시작한 이래 최초의 실패다.
분명 다 성공했거늘 가장 중요한 거사를 벌이던 이때에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나 버렸다.
갈지혁이 예상보다 강했다.
갈지혁의 독이라면 전부 해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거늘 자신의 피를 뿜어내 버릴 줄은 몰랐다. 더군다나 몸속으로 스며든 그 피는 아직도 해독하지 못했다.
제대로 운기를 하지 않는다면 단리문 또한 한 시진 이상 버티지 못할 것임을 잘 알았다.
그리고 일악천의 등장도 그러하다.
평생을 사독문에 박혀서 살 것 같던 그가 나타났다. 그것도 독황독립문도 아닌 바로 이 먼 해남도에 말이다.
물러서야 한다.
다음에 만나면 둘 모두 죽일 수 있겠지만 괜히 지금 싸우다가는 오히려 자신이 당할 수도 있었다.
단화초를 눈앞에 두고도 물러서야 한다는 것이 그에게는 못내 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단화초가 있는 장소를 알아낸 것만으로도 충분한 소득이 있긴 하다.
갈지혁이 진법 안에 있는 단화초를 뽑아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단리문이 원하는 것은 단화초였지만, 그건 단화초의 독 때문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어떠한 연유가 그에게는 있었다.
“운이 좋으시군요, 갈지혁. 하지만 다음에 만날 때는 반드시 죽일 겁니다. 그럼 이만.”
분노로 인해 변했던 말투를 원래대로 되돌리며 단리문이 몸을 돌렸다.
최대한 태연하게 보이려 하고 있지만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일악천이 달려든다면 기력을 다해 도망쳐야 할 정도였다.
단리문이 떠나가자 급히 일악천이 갈지혁의 혈을 짚어 보았다.
반쯤 눈을 뜬 갈지혁의 눈에 일악천의 모습이 보였다. 흐릿하기는 하지만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스승님……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겁니까?”
“시끄럽다! 죽고 싶지 않으면 입을 다물고 있어.”
혈해를 쓴 이상 반은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더군다나 갈지혁의 몸 안으로 단화초의 독기 일부도 침투했다. 일악천은 급히 그의 품속에 있는 단화초를 꺼내 자신의 옷 속에 집어넣었다.
“대단한 독기로군.”
얼굴을 찡그리며 일악천이 중얼거렸다.
그는 갈지혁의 몸을 만지면서 인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못 본 지 몇 년 정도 되었을 뿐인데 이제는 정말 어른이 되어 버렸다. 잠시 대견하다는 듯이 갈지혁을 바라보던 일악천은 이내 표정을 굳혔다.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다.
우선은 그를 살리고 볼일이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갈지혁은 이각을 버티지 못하고 죽을 게다. 일악천이 그를 업었다. 혹여나 사라졌던 단리문이 다시 나타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갈지혁의 몸 안에 있는 독을 밀어낼 때 그가 기습해 온다면 방도가 없다.
“조금만 참거라. 내가 널 죽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을 테니까.”
말을 마친 일악천의 신형이 어딘가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의 모습이 순식간에 바람처럼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