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
15화
일악천과 갈지혁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그동안 하고 싶은 말도 참 많았지만 둘 모두 말을 아꼈다.
갈지혁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스승님.”
“할 말이라도 있는 게냐?”
“단화초를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
“시간이 없습니다. 그건 스승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갈지혁의 몸 상태는 나아졌다. 그 말은 곧 단리문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소리였다. 다시 그가 움직이기 전에 갈지혁은 최상의 경지에 오르고자 하는 것이다.
일악천은 묵묵히 갈지혁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급한 마음은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악천 또한 갈지혁이 어떻게든 단리문을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섣부르게 답을 내릴 수 없는 것은 역시 단화초라는 독초의 무서움 때문이었다.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지독한 독기를 눌러야 한다.
단화초를 품에 지니고 있는 것과 몸속에 받아들이는 건 천지차이이다. 여태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독기가 갈지혁을 괴롭힐 게다.
알지만 역시 답은 이미 내려진 상태였다.
“좋다. 하지만 그전에 준비해야 할 게 있다.”
“준비라니요?”
“단화초의 독성을 그나마 억누를 약재를 준비하려고 한다.”
“그게 가능합니까?”
“살 확률을 일 할 정도 늘려줄 뿐이지만 그것만 해도 지금으로서는 감지덕지지.”
단화초를 먹고 갈지혁이 살 확률은 일 할이 채 못 된다. 거기에 일악천이 말한 약재까지 먹는다면 그나마 이 할에 가까운 확률이 생기게 된다.
물론 그것 또한 보장할 수 없는 것이지만 말이다.
“문제는 약재들이 구하기 어렵다는 거야. 최대한 빠른 방법이 황금귀에게 부탁을 하는 건데…… 그렇게 해도 최소 석 달은 걸려.”
“너무 늦습니다.”
“그래. 그래서 말한 것이다. 혹 네가 생각한 다른 방도가 있느냐?”
갈지혁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황금귀에게 부탁하려면 꽤나 복잡하다.
해남도 내에서 황금귀와 연락할 방도를 찾기도 힘들다.
그렇다면 우선 육지로 나서야 하는데, 그것만 해도 보통 시간이 걸리는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단리문 정도 되는 자라면 모든 해로에 관련된 곳을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괜히 모습을 보이는 것은 좋지 않다.
그렇다면 이 해남도 안에서 해결을 해야 한다는 소리인데…….
“한곳이 있긴 합니다만…….”
무슨 약재를 찾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악천이 어렵다고 말할 정도라면 그건 분명히 쉽게 구할 수 없는 귀한 약재들일 게다. 그러한 것들을 구하려면 재력과 힘이 있는 곳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 해남도에 있는 곳이라면 단 한 군데가 있다.
“어디냐?”
“해남파입니다.”
“해남파?”
일악천의 어투에 담긴 의미를 갈지혁이 모를 리가 없었다. 해남파가 갈지혁을 도울 리가 없지 않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해남도에 오는 도중에 인연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해남파에 잠시 머무르기도 했었지요.”
“들었는지 모르겠다만, 넌 지금 무림공적이다.”
“알고 있습니다. 알면서도 해남파는 절 손님으로 받아주었습니다.”
“분명 해남파라면 내가 원하는 약재를 찾는 데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겠지. 하지만 모험이야. 만약 다른 세력들의 압박으로 인해 너를 죽이려 든다면 우리는 해남파와 싸워야 한다.”
일악천의 말에 갈지혁이 픽 하고 웃었다.
두렵지 않다. 일악천이 옆에 있는데 그 무엇이 두려우랴.
“스승님이 옆에 계신 이상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놈! 헤어져 있는 동안 말만 는 듯하구나.”
호통은 쳤지만 일악천은 갈지혁의 말에 기분이 좋았다.
갈지혁은 결코 듣기 좋으라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사내가 아니었다. 그가 그리 말했다면 그건 곧 갈지혁의 진심이라는 소리다.
좋다.
그럼 답은 나온 것이다.
다소 위험할지는 모르지만 해남파로 가련다. 그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임을 잘 알기에.
움직임은 조심스러웠다.
일악천과 갈지혁은 낮에는 몸을 감추었고 밤에만 움직였다. 단리문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다. 서둘러 움직였지만 아무래도 감시의 눈길을 피하려다 보니 속도는 더뎠다.
거기다가 둘 모두 눈에 띄는 외모인지라 사람들의 눈에 결코 걸려서는 안 됐다.
낮에는 땅을 파서 그 안에 몸을 감추었다. 그리고 밤에는 있던 흔적을 없애고 다시금 움직이기를 반복한 지 어언 열흘이 지났다.
사나흘 만에 온 곳이건만 돌아가는 데는 무려 그 세 배에 가까운 시간이 소요됐다.
열흘을 움직이고서야 그 둘은 해남파에 도착했다.
“해남파에 직접 오는 건 처음이군.”
일악천은 구파일방 중 하나인 해남파를 바라보며 손을 꿈틀거렸다. 저들이 자신들에게 적대감을 드러낸다면 싸워야 한다. 구파일방의 하나인 해남파이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전 중원을 상대로 싸운 적이 있는 일악천이다. 해남파 하나라면 싸워볼 만하다.
“가자.”
갈지혁을 안다고 했다. 그렇다면 굳이 담을 넘는 것보다 떳떳하게 정문으로 들어갈 게다.
막 나무에 몸을 감추고 있던 일악천이 움직이려고 할 때였다. 가만히 앉아 있던 갈지혁이 급히 그의 소매를 잡았다.
“스승님,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왜 그러느냐?”
“뭔가가 이상합니다.”
주변의 분위기가 뭔가 붕 뜬 느낌이다.
해남파는 시끄러웠다.
쉬지 않고 무인들로 보이는 자들이 들락거린다. 문제는 그들의 행색에 있었다. 갈지혁이 해남파에 있으면서 본 그들의 복장은 저렇지 않았다.
너무나 낯설다. 마치 해남파가 아닌 다른 곳에 온 듯했다.
눈에 익은 분위기가 아니다. 이건…….
그때 갈지혁의 시야에 커다란 마차 한 대가 들어왔다.
마차는 해남파의 입구에서 멈추어 서더니 그 안에서는 몇 명의 사내가 걸어나왔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으로 나오던 사내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해남도의 해남파가 이리도 초라하던가!”
낯이 익은 자다.
가만히 사내를 응시하던 갈지혁은 해남도로 오던 뱃길에 만났던 자를 떠올렸다.
백씨세가의 인물이었던 백무각이다.
그가 이곳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갈지혁이 아니었다.
사내는 같이 온 자들과 해남파 안으로 들어갔다.
갈지혁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 그의 태도에서 무엇인가를 눈치 챘음을 알았는지 일악천이 물었다.
“무슨 일이냐?”
“해남파가 다른 세력에게 무너진 모양입니다.”
“해남파가 무너져? 그것도 해남도에서?”
“백씨세가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듣기론 해남파를 이렇게 무너뜨릴 정도는 아니었는데…….”
의아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분명 백씨세가는 강하다고 했다. 하지만 해남파의 장문인이었던 곽생은 결코 그리 쉽게 무너질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데 너무 짧은 시간 안에 해남파가 무너진 것이다.
대체 어떻게.
“뭔가 일이 생긴 모양이군. 후, 일이 귀찮아지겠는데.”
해남파에서 필요한 약재들을 받아 내려고 했다. 한데 사정이 다소 우습게 변해 버렸다.
가만히 있던 갈지혁의 머리에 몇 명의 모습이 떠올랐다. 곽소정과 현문이 바로 그들이었다.
비록 큰 연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되었을지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잠시 망설이던 갈지혁이 입을 열었다.
“스승님,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이라니?”
“근처 마을에 가셔서 정보를 구해다 주실 수 있겠습니까?”
“해남파에 대해서?”
“예.”
“한시가 급한데…… 괜찮겠느냐?”
“보지 못했다면 모를까 본 이상 그냥 넘어가기에는 뭔가 마음이 불편해서 그렇습니다.”
일악천은 갈지혁을 바라봤다.
겉모습은 많이 변했다. 더 사내다워졌고, 또 강인해졌다. 처음 일악천의 곁을 떠날 때 갈지혁은 무명의 사내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지금 갈지혁을 모르는 자는 무림에 없었다.
많은 것이 변했지만 변하지 않았다.
언제나 냉정한 듯하고 신경 쓰지 않는 척하지만 결국 자신과 연이 있었던 자들이라면 도와주려고 하는 그 모습은 말이다.
“좋다. 어차피 반나절이면 될 일이니까. 그동안 뭘 할 생각이냐?”
“해남파 안에 잠시 잠입해 볼 생각입니다.”
위험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답은 해남파에 있을 수도 있었다. 더군다나 해남파의 인물들이 안에 갇혀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가장 위험한 것은 역시 해남파의 중요 인물들일 게다.
곽소정과 현문은 그러한 자들이다.
“그리하지. 뭐, 딱히 다른 거에 대해서는 알아볼 게 없느냐?”
“없습니다. 아, 혹 악면삼귀라는 자들이 지금 어디 있는지도 알아보실 수 있으면 부탁드리겠습니다.”
“악면삼귀라. 그리하지. 그럼 정확하게 반나절 후에 이곳으로 돌아오겠다. 조심하도록 해라.”
말을 마친 일악천의 모습이 귀신처럼 사라졌다.
그가 마음먹고 몸을 숨겼으니 웬만한 자들은 일악천의 그림자조차 잡지 못하리라.
갈지혁은 섣부르게 움직이지 않고 잠시 주변을 살폈다. 단신으로 백씨세가와 싸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단지 이곳에서 모습을 드러내면 바로 해남도에 소문이 쫙 퍼질 것이다.
단리문이 움직일지도 모른다.
그것 때문에 지금 갈지혁은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잠시 주변을 돌던 그는 딱히 주변에서 몸을 감추고 있는 자가 없음을 확신했다.
확신이 서는 순간 갈지혁은 망설이지 않았다.
슥.
바람처럼 갈지혁은 장원을 뛰어넘었다. 그렇지만 그 움직임은 너무나 고요했고, 또한 자연스러웠다.
담을 넘은 그는 그대로 엎드린 채 주변을 살폈다. 예상대로 근처에 나무들이 있어 갈지혁의 몸은 드러나지 않았다.
해남파에 들어오니 역시 판단을 내린 대로였다.
해남파 내부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백씨세가였다. 백(白)이라는 글자가 박혀 있는 거대한 깃발이 있었다.
‘서둘러야겠군.’
해남파가 이렇게 된 것이 언제인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방금 전에 등장한 백무각을 보고 판단하건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을 듯했다.
주변을 둘러보던 갈지혁은 의아함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싸운 흔적이 너무 적어.’
적어도 해남파와 싸웠다면 건물들은 박살나고 피가 진동을 해야지 정상이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그러한 전투의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피 냄새 또한 마찬가지였다.
해남파 무인의 숫자라면 이 안은 이미 진득한 피 냄새로 가득했어야 한다.
그런데 마치 무혈입성(無血入城)이라도 한 것처럼 전투의 흔적도, 피 냄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수상하지만 그랬기에 더 더욱 갈지혁은 해남파에서 있었던 일을 알아내야만 했다.
갈지혁은 엎드린 채 사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현재 상황을 파악하려고 하는 것이다.
대부분이 해남파를 이겼다는 것에 들뜬 듯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던 중에 갈지혁의 귀에 걸리는 말이 있었다.
“독 하나에 해남파가 이리되다니. 젠장, 끔찍하군.”
엎드린 채로 갈지혁은 말을 꺼낸 사내를 바라봤다. 별반 뛰어나 보이지 않는 무인이지만 그가 하는 말만큼은 지금 갈지혁에게 무척이나 관심이 가는 것이었다.
‘독?’
잘못 듣지 않았다면 분명 그는 독이라고 말했다.
갈지혁은 엎드린 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주워듣는 것보다 차라리 한 놈을 족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해서였다.
그렇게 그는 방금 전 떠든 놈을 쫓았다. 나무에 몸을 숨기고 땅을 기면서 갈지혁은 끝까지 사내를 따라갔다.
막 떠들어 대던 무리는 어느 순간 뿔뿔이 흩어졌다.
갈지혁은 그대로 담장 위로 몸을 날렸다.
엎드린 채 아래를 내려다보던 그의 눈에 방금 전 떠들어 대던 사내가 들어왔다.
갈지혁이 손을 내렸다.
“컥!”
목깃을 잡아챈 갈지혁은 그를 그대로 땅바닥에 패대기치면서 뛰어내렸다. 동시에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다른 한 손은 목에 가져다 댔다.
“큰 소리 내면 죽는다.”
“…….”
입을 틀어막고 있으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하지만 한눈에 봐도 그 사내는 겁을 집어먹은 표정이 역력했다. 갈지혁이 다시금 살기 어린 어투로 말했다.
“알았으면 눈을 깜빡여.”
끔뻑.
마치 눈물이라도 쏟을 것처럼 커다란 눈을 한 사내는 깜빡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