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
16화
갈지혁이 서서히 입을 막고 있던 손을 치웠다. 하지만 여전히 목에는 그의 손이 닿아 있다.
“해남파에 왜 백씨세가가 있지?”
“그, 그야…….”
“빠르게 대답 안 해도 죽는다. 어차피 물어볼 놈들은 사방에 널렸으니까.”
갈지혁의 말에 눈치를 보던 사내가 질끈 눈을 감았다.
그의 말대로다.
만약 자신만이 아는 비밀이라면 그것을 가지고 시간이라도 끌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벌어진 이 일은 이 안에 있는 무인이라면 대부분이 알 것들이었다.
사내가 말했다.
“어, 어제저녁 해남파를 기습했습니다.”
“해남파에서 피 냄새가 나지 않아. 이유는?”
“독입니다. 독을 써서…….”
아까 전 숨어서 들었던 말이지만 그가 진실을 말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일부러 재차 물은 것이다. 다행히도 이 사내는 거짓을 말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다 죽었나?”
“아닙니다요. 사실 해남파의 대부분의 병력들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백씨세가는 그들을 유인하고 어젯밤에 독을 이용해 해남파의 본거지를 기습…….”
정확한 과정은 모르겠지만 대략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 것 같았다. 백씨세가는 계략을 써서 해남파의 정예들을 전부 움직이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백씨세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독을 이용해 해남파의 본거지를 친 셈이고.
진짜 사건은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얼추 비슷한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갈지혁은 자신의 생각을 접고 물었다.
“그렇다면 해남파에 있던 자들은 다 어디 있지?”
“그, 그야…….”
“지금까지 성실하게 답해 줬기에 목숨은 살려 주려고 했는데 마음이 바뀌게 하지 마라.”
다급하게 몰아가자 머리를 굴릴 생각도 들지 않는다.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모든 것을 술술 불기 시작했다.
“아, 아직 해남파에 있고 오늘 오후에 압송될 거라고 합니다.”
“그래?”
궁금한 것은 대충 다 물었다. 그리고 이 사내 또한 비록 백씨세가의 무인이기는 하지만 그리 높은 위치에 있는 자 같지는 않았다. 알고 있는 것을 캐묻는다고 해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이제부터는 본인들에게 물어보는 것이 가장 빠른 해결책이 될 것 같았다.
“약속했으니 목숨은 살려 주마.”
“감사합…….”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내는 그대로 픽 하고 쓰러졌다. 살려 주기로 약속은 했지만 절대 지금 일어나서는 안 된다.
갈지혁이라는 것은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괜히 해남파의 인물들을 압송하는 무사들을 늘릴 필요는 없었다.
정확하게 삼 일이다.
이 독에 중독되면 삼 일은 잠에 빠진 것처럼 일어나지 못한다.
갈지혁은 그대로 벽에 몸을 기댔다. 이 안에서 싸워서 구한다는 것은 다소 문제가 있다.
하려고 하면 할 수도 있겠지만 굳이 해남파에 보답을 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곽소정이나 현문이 있는 것을 우선 확인하고 움직일 것이다.
그리고 이 안에서 소란을 일으킨다면 반드시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고 만다.
차라리 압송되는 그때를 노리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갈지혁은 그대로 해남파를 벗어나 다시금 원래의 장소에 몸을 감추었다.
그는 그곳에 숨어 해남파를 살폈다.
포로들을 압송하는 일이라면 분명 커다란 문을 통해 움직일 것이다. 커다란 수레에 가두고 움직인다면 나올 수 있는 곳은 이곳 정문뿐이었다.
오후라고 했지만 정확한 시간은 모른다. 일악천이 먼저 이곳에 오면 좋겠지만 그가 언제 올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갈지혁은 기척을 감춘 채 해남파의 정문을 응시했다.
* * *
시간이 흘렀다.
점심 시간이 지난 듯하고, 또 해도 서서히 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끼이익.
해남파의 정문이 열리며 한동안 조용했던 곳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말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무인으로 추측되는 자들도 꽤나 많다. 그들은 말이 끌고 있는 수레 주변을 에워싼 채로 호위하듯이 걷고 있었다. 하지만 수레는 두터운 나무로 사방을 막아 두었다.
무인이라면 우습게 부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무공을 모르는 자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튼튼한 감옥인 셈이다.
마차의 수는 무려 이십여 대에 가까웠다.
마차 하나에 열 명 이상이 타고 있는 것을 감안해 볼 때 포로는 이백 명이 훌쩍 넘는 숫자일 것이다.
그리고 그 마차를 지키는 자들 또한 그 숫자 못지않았다.
‘최소 이백 명은 되겠군.’
갈지혁은 몸을 숨긴 채로 지나가는 수레를 바라봤다. 뿌연 먼지가 일었지만 그러한 것이 그의 시야를 가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마차 안에 갇혀 있는 자들을 살피던 중 행렬 중간쯤에 몇 명 타지 않은 수레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예상대로군.’
해남파와 백씨세가의 일에 대해 말해준 사내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한 바가 있었다.
백씨세가와의 일 때문에 나섰다면 분명 곽소정을 데리고 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그가 본 해남파 장문인인 곽생은 자신의 딸을 위험한 곳으로 데려가지 않았을 거라고 판단해서다.
예상은 한 치도 빗나가지 않은 듯하다.
마차에는 곽소정이 있었다. 현문도 있었다. 그 외에도 세 명이 더 있기는 했지만 누구인지는 모른다.
다만 그 둘과 같이 있는 것을 보아하니 그들 또한 해남파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 자들이라는 소리일 게다.
그 다섯은 눈을 감은 채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갈지혁의 눈에는 똑똑하게 보였다. 입술을 꽉 깨문 채로 앉아 있는 곽소정의 표정이.
‘쫓아야 하는데…….’
아직 일악천이 오지 않았다.
갈지혁은 품속에서 병 하나를 꺼내 자신의 손목에 슬쩍 묻혔다. 액체는 이내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만리향(萬里香).
이것은 신비한 향기를 지닌 물건이었다.
만 리를 떨어져 있다고 해도 이 향기를 맡을 수 있다고 해서 만리향이다.
물론 이 만리향은 직접 병에 들어가 있을 때의 향기를 맡은 자만이 알아낼 수 있었다.
갈지혁처럼 일악천도 이 만리향을 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일악천이 쫓아 올 수 있다는 소리다.
만리향을 묻힌 갈지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은 아직 싸울 때가 아니다.
해남파와 너무 가까워 지금 움직인다면 아까 안에서 구출하려고 하는 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기회를 봐야 한다.
갈지혁은 나무를 이용해서 몸을 감추며 계속해서 그 긴 행렬을 뒤쫓았다.
밤이 되고 나서 이들이 쉬려고 할 때, 그때를 노린다.
상대의 수는 이백이 넘지만 전혀 걱정은 되지 않았다. 어차피 갈지혁의 앞에서는 상대의 수가 이백이든 천이든 상관없었다.
갈지혁의 독은 사람의 숫자와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이 행렬의 맨 앞에 있는 사내에게로 향했다. 말에 올라탄 채로 선두에 서 있는 자는 용감해 보이는 사내였다.
허리에는 검을 찼고, 몸매는 날렵해 보인다. 나이는 그리 많아 보이지 않지만 상당한 고수임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이 같은 중요한 일을 맡겼을 리가 없다.
그 외에도 눈길이 가는 이가 몇 있기는 했지만 그건 무인이라는 관점에서다.
눈길이 간다 뿐이지 결코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건 아니었다.
독인인 갈지혁의 눈에는 그들 모두 비슷비슷한 수준의 자들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밤이 깊었는데도 불구하고 마차는 멈출 줄을 모른다. 그렇지만 갈지혁은 초조해하지 않고 마차의 뒤를 쫓았다.
이제 어느 정도 해남파와 거리도 벌어졌다. 어느 때라도 마음만 먹으면 기습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다만 가장 흔적이 남지 않게 할 수 있는 때를 노리는 것뿐이다.
움직일 때보다는 가만히 있을 때 기습하는 것이 흔적이 덜 남는다.
마차가 멈춘 건 자정을 넘기 바로 직전이었다. 선두에 있던 젊은 사내가 말에서 뛰어내리며 소리쳤다.
“오늘은 이곳에서 쉰다! 모두 짐을 풀고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마라!”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상당한 내공을 소유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렇지 않으면 이토록 바로 앞에서 말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리지 않는다.
갈지혁은 적당히 거리가 있는 곳에 앉아서 그들의 행동을 바라봤다. 나무 위쪽이었기에 백씨세가 인물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보인다. 그들은 왁자지껄 떠들면서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냄새들이 코를 자극한다.
그렇게 식사를 준비하던 중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수레 안으로 집어던졌다.
잠시 다른 곳을 살피던 갈지혁은 그 모습에 시선을 돌렸다.
뭔가를 던지며 사내는 연신 소리를 쳐 댔다.
“먹어! 너희의 식사는 바로 이것이다!”
무리를 이끄는 수장과 가까이 있던 자다. 백씨세가의 사람들 중에서 꽤나 실력이 있어 보이는 자였다. 그런 그가 수레에다가 무엇인가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다시금 무엇인가를 수레 안으로 집어던졌다. 안력을 돋운 갈지혁의 눈에 사내가 던지는 것의 정체가 들어왔다.
‘저 새끼가…….’
잘 익은 고기를 뜯으며 그가 수레 안으로 던지는 것은 바로 굽기 전에 발라낸 뼈였던 것이다. 그것도 재미있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면서 말이다.
갈지혁의 눈에 살기가 일었다. 아무리 포로라고 해도 이 같은 대우를 하는 건 아니다. 그것도 대부분이 아이와 노인, 그리고 여인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렇게 뼈를 집어던지던 그가 멈춘 것은 갈지혁이 예의주시하던 바로 그 수레에서였다.
곽소정을 비롯해 해남파의 중요 인물들이 잡혀 있는 곳이다.
마차 앞에 선 그가 웃음을 흘린다.
“눈에 힘은 여전하구나. 장문인의 딸이라 이건가?”
수레 안에 있는 곽소정에게 하는 말인 듯하다. 갈지혁은 슬슬 움직이기로 마음먹었다. 조금 더 시간을 두려고 했지만 이들의 행동이 그를 자극해 버렸다.
사내가 손에 들고 있던 고기를 수레 안으로 내밀면서 말했다.
“입고 있는 옷을 모두 벗으면 이 고기를 주지. 어때? 크하하!”
“닥치지 못할까!”
들려온 목소리는 분명 익숙한 자의 것이었다.
노한 것이 역력한 목소리, 현문인 것이 분명하다. 수레가 일순 흔들렸지만 그뿐이다.
예전의 현문이라면 이 정도 수레를 부수는 것은 일도 아니었겠지만 지금은 무리인 듯했다.
무공을 쓸 수 있는 자들은 모두 내공을 쓰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갈지혁은 수투를 끼고 가만히 손을 들어 올렸다. 더는 두고 볼 것도 없다.
그의 수투에서 하얀 가루가 흘러나와 바람을 타고 날아가기 시작했다.
무몽환(無夢患).
극독은 아니다.
그것은 내공이 있는 자에게만 반응하는 독이다. 그리고 더불어 일정 수준 이상의 무인에게는 통하지도 않는다. 그다지 대단한 독은 아니지만 이렇게 많은 숫자가 있을 때는 제법 쓸 만하다.
갈지혁은 들어 올린 손을 조용히 내렸다.
그의 시선이 백씨세가의 무인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현문은 이를 갈았다.
눈앞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는 안다.
백씨세가에서 돈을 주고 데려온 사내지만 그 무명은 결코 녹록치 않다.
문제는 이 사내를 이끌고 있는 수장이다. 그는 나이가 어린데도 불구하고 무림에서 꽤나 알려진 자였다.
현문이 내공을 쓸 수 있다고 해도 결코 이길 수 없는 경지에 있는 인물이다.
이 많은 무리 중 열 명 정도는 무림에서 알려진 자들이다. 이들 중 다섯 명 가량은 현문보다 아래요, 나머지는 그보다 위에 있는 자들이다. 애초에 내공이 있다 해도 싸움이 되지 않았다.
‘분하다…… 저런 놈들에게서 아가씨를 지키지 못하다니.’
대부분의 무인이 빠져나갔으니 당연한 결과였다고 할지 모르나 너무 방심한 것은 사실이었다.
백씨세가가 양동작전을 펼치며 기습을 감행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백씨세가는 해남파에 정면으로 도전해 왔다.
예전이었다면 망설였을지도 모르지만 마음을 굳힌 곽생은 단호했다. 그는 단숨에 그 도전을 받아들이고 해남파의 고수들을 이끌고 약속된 장소로 향했다.
그런데 그게 속임수였다.
만약 이곳이 해남도가 아닌 육지였다면 결코 불가능했을 일이다. 이처럼 비겁한 방법을 쓴다면 다른 세력들이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해남도는 섬.
그 해남도에서 백씨세가를 벌할 자는 아무도 없었다. 잠시 섬 밖으로 소문이 퍼져 나가는 것만 제한다면 이러한 사실이 알려진다고 해도 육지의 무인들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