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
17화
백씨세가의 기습은 야밤에 이루어졌다.
그들은 백씨세가의 정예들이었다.
해남파의 무인이 대부분 비어 버린 지금 남아 있던 자들은 제대로 싸우지 못하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거기다가 독까지 푸는 바람에 그나마 싸울 수 있는 자들도 움직임이 제한되어 버렸다.
상대가 될 턱이 없었다.
단숨에 해남파는 제압당했다.
그나마 독에 중독되지 않은 현문을 비롯한 몇 명은 싸우려고 했지만 상대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제대로 검 한 번 휘두르지도 못하고 포위당해 버렸다.
싸움은 손쉽게 끝난 것이다.
독에 의해 내공이 제압되지 않은 자들은 그들이 직접 점혈법으로 무공을 사용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해남파는 백씨세가의 정확한 힘을 몰랐다. 그들이 보여 주는 것 외에도 다른 힘을 숨겨두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숨겨두었던 힘을 백씨세가는 해남파를 기습하는 데 사용했다.
전혀 몰랐던 세력이었기에 해남파는 방비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해남파는 끝났다.
해남파의 진정한 정예들은 분명 아직 멀쩡할 게다. 그렇지만 문제는 지금 포로로 잡힌 자신들이다. 해남파 무인의 식솔들이다. 그들의 검이 날카로울 수 있을 리가 없다.
자신들이 인질로 있는 이상 해남파의 무인들은 싸우지 못한다.
‘아가씨…….’
옆에 앉아 있는 곽소정은 눈을 감은 채로 부들부들 떨고 있다. 주먹은 꽉 쥐었고 입술도 깨물었다.
방금 전 들었던 모멸스러운 말에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절대 아무렇지도 않아서가 아니었다.
더 이상은 비참해지고 싶지 않다.
그래서다.
현문은 안타까운 눈으로 곽소정을 바라보다가 이상한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털썩.
앞에 있던 무인이 갑자기 풀썩 하고 쓰러진다. 아직 술판이 벌어진 지 채 일각도 되지 않았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쓰러졌지만 크게 이상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문제는 그 후에 벌어진 일이다.
한 명씩, 한 명씩…….
“뭐, 뭐야!”
수레 앞에서 고기를 내민 채로 능글거리며 웃던 사내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방에서 한 명씩 쓰러지더니 급기야는 반수에 가까운 자들이 땅에 누웠다.
말에 기댄 채로 술을 기울이던 무리의 수장이 일어났다.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포로들을 압송하기 위해 해남파를 떠난 무리의 수는 이백오십 정도였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쓰러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오십 명도 채 남지 않았다.
아무런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암기가 날아든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검기 같은 것에 숨통이 끊어진 것도 아니다.
사내는 급히 옆에 쓰러진 자의 맥문을 짚었다. 숨이 다소 들쭉날쭉하기는 했지만 살아 있다.
십절검(十絶劍) 취련(翠蓮).
해남도 출신이 아니다.
그는 육지에서 온 자로 백씨세가가 어마어마한 거금을 주고 초빙한 고수다.
나이는 서른넷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는 복건성(福建省)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고수다.
쓰러진 자의 상태를 살핀 것만으로 그는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아차렸다. 그가 주변을 슬쩍 둘러보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독이다. 다들 조심해라.”
단 한 번 독을 하독했을 뿐일 게다. 그런데 그 단 한 번의 하독에 이백에 가까운 무인들이 검 한 번 휘두르지 못하고 쓰러져 버렸다. 이것이 바로 독의 무서운 점이다.
취련의 말을 듣고서 현문은 지금 상황이 술 때문이 아닌 누군가의 독 때문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동시에 그의 머릿속에 어떤 사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옆에 있던 곽소정도 놀란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갈지혁?”
그 말은 취련의 귀에도 들렸다.
“망할…….”
아니길 빌었다.
곽소정의 중얼거림이 그저 헛소리이길 바랐다. 그렇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지금 자신의 눈을 파버려야 할 게다.
나무 사이에서 천천히 걸어나오는 한 사내의 모습은 소문으로만 들었던 그 사내의 외향과 너무나 흡사했다.
검은색 무복, 손에 낀 수투와 긴 머리카락. 비록 얼굴은 가리고 있지만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기세.
귀가 따갑게 들었던 한 사내의 이름. 취련은 그를 보며 떠오른 이름을 중얼거렸다.
“독왕 갈지혁…….”
취련의 말에 주변의 분위기는 찬물이라도 확 끼얹은 것처럼 가라앉아 버렸다.
가뜩이나 갑작스럽게 나타난 자의 기세가 왠지 모르게 범상치 않아 경계를 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자가 독왕 갈지혁이라니…… 싸울 의지도 그대로 꺾여 버린다.
“자네!”
현문이 수레 안에서 반가운 얼굴로 다가오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갈지혁이다. 그가 분명하다.
취련이 수레의 앞을 막아선다. 상대가 갈지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냥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갈지혁이오?”
“그래.”
그나마 가지고 있던 마지막 희망이 깨져 버렸다. 무림에서 가장 상대하기 싫은 자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취련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용무로 오셨소?”
“그 수레에 있는 자들을 돌려받아야겠다.”
상대의 입에서 가장 우려했던 말이 흘러나왔다.
물론 갑자기 나타났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했던 일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 많은 자들을 독으로 제압하며 나타났을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난 이들을 압송하라는 명을 받았소. 당신의 말을 들어줄 수는 없을 것 같소.”
“결국은 싸워야겠군.”
애초부터 그냥 넘겨받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취련이라는 자, 당황은 하고 있지만 결코 물러설 자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슬쩍 뒤에 있는 자신의 수하를 바라봤다.
방금 전까지 고기를 들고 포로들을 괴롭히던 자다. 그를 향해 취련이 전음을 보냈다.
“인질을 잡아. 곽소정과 연이 있다고 들었다. 인질이 있으면 제아무리 갈지혁이라도 함부로 행동하지는 못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사내는 발을 거의 땅에 붙이다시피 하고 옆으로 조금씩 움직였다. 그리고 취련은 그런 그의 몸을 가린 상태로 서 있었다.
보이지 않게 길을 막고 있는 것이다. 취련은 어떻게든 갈지혁의 시선을 끌기 위해 일부러 말을 걸었다.
“아무리 당신이 강하다고 해도 이쪽은 오십 명이 넘소. 싸운다면 갈지혁 당신도 그리 쉽지는 않을 거요.”
“상관없어. 너희들의 숫자가 오십 명이든 오백 명이든 나에겐 마찬가지니까.”
“자신감이 대단하군.”
“사실이니까.”
일부러 필요 없는 말을 내뱉으면서 취련은 사내의 움직임을 몸으로 느꼈다.
이제 수레에 다 다가간 듯하다.
곽소정을 인질로만 잡는다면 제아무리 갈지혁이라도 섣부르게 움직이지는 못할 게다.
손만 뻗으면 닿을 정도로 사내는 수레에 다가간 상태였다. 그리고 아직 갈지혁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다.
성공인 것이다.
쏟아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취련은 다시금 그에게 전음을 보냈다.
“수레에 다 다가갔으면 곽소정을 인질로 잡아.”
“…….”
“탁천기? 뭐야? 왜 대답이 없어?”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수레에 다가간 탁천기가 전음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다. 한데 대꾸도 않던 그가 갑자기 손을 들어 올린다.
빠각!
그의 수도가 수레의 일부분을 박살 내 버렸다.
“이 새끼가 뭐 하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고개를 돌린 취련은 뭔가가 이상한 것을 눈치 챘다. 평소의 그가 아니다.
눈동자에는 힘이 없고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듯하다.
그때 차가운 갈지혁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함부로 움직인 벌이다.”
그 순간 탁천기의 관절이 기이하게 비틀려 버렸다.
빠각.
귓가에 결코 듣고 싶지 않은 소리가 들려온다. 어깨뼈가 완전히 나가 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탁천기는 비명 소리 한 번 지르지 않는다.
마치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대체 이게 무슨……!”
“꼭두각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지. 그저 주인의 손에 의해 움직일 뿐.”
갈지혁은 몰랐던 것이 아니다. 탁천기가 움직이는 순간 이미 그는 중독되어 버렸다.
애초부터 그가 수레에 다가간 것은 취련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갈지혁이 뿌린 꼭두각시의 독에 당해 수레를 부수려고 다가간 것이다. 전음을 보내고 움직이기가 무섭게 탁천기는 갈지혁의 수족과도 같은 꼭두각시가 되어 버렸다.
부서진 수레에 갇혀 있던 자들이 모두 빠져나왔다.
곽소정은 수레에서 나오기가 무섭게 갈지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얼굴이 환하게 변했다.
취련은 주변을 둘러봤다.
이미 대부분이 검을 내린 채로 이쪽을 보기만 하고 있다.
단 한 명이 나타났을 뿐이다. 그런데 그 한 명으로 인해 이백 명은 이미 전투불능의 상태다. 그리고 남은 오십 명 또한 싸울 생각도 잊은 채로 멍하니 상황을 기다리고만 있었다.
겨우 단 한 명 때문에 백씨세가의 정예 이백오십 명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
‘안 돼! 이대로 그냥 갈 수는 없다.’
비록 돈에 의해 고용된 몸이라고는 하지만 그만큼 반드시 지켜야 할 일이 있었다.
만약 이렇게 두 손을 놓고 포로들을 모두 놓친다면 그건 결코 씻을 수 없는 오명으로 남을 게다.
‘독인이다. 분명 갈지혁이라는 자는 점창파를 단신으로 쓰러뜨릴 정도로 강하다. 하지만 그만큼 무공에 빈틈이…….’
쉽지는 않겠지만 싸워 보는 수밖에 없다.
취련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멍하니 있던 자들 중에 몇 명이 퍼뜩 정신을 차리더니 그의 옆에 와서 섰다.
취련까지 합쳐서 정확하게 다섯 명이다.
‘싸운다.’
그냥 보내 줄 수는 없다. 어차피 갈지혁 또한 인간이라면 반드시 이기지 못할 것도 없는 것이다.
취련은 가볍게 눈짓으로 나머지 네 명에게 신호를 보냈다. 두 명은 곽소정을 잡는다. 그리고 나머지 둘과 함께 취련은 갈지혁에게 달려들게다.
곽소정만 잡는다면 어떻게든 살 길이 생긴다.
차앙!
취련은 검을 뽑아 들었다.
동시에 두 명의 인물이 곽소정을 향해 몸을 날렸다. 평소라면 현문이 어떻게든 시간을 벌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의 그는 무공을 전혀 쓸 수 없는 상태였다.
갈지혁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십선유루지가 쏟아져 나왔다.
지력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셋이 아닌 등을 보이고 곽소정을 향해 다가가는 둘에게 쏟아졌다.
퍼퍼퍽!
너무나 빠른 지력이었기에 두 명은 그대로 등을 관통당하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독지였기에 몸을 관통당하는 순간 지독한 독기가 온몸을 뻣뻣하게 만들어 버렸다.
두 명은 땅에 쓰러진 채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취련은 이를 꽉 깨물고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뒤의 상황이 어찌 되었는지는 보지 못했어도 대충 감이 온다.
이렇게 된 이상 정면 승부뿐이다. 더군다나 다른 무공을 쓰느라 갈지혁은 빈틈투성이다.
검이 매섭게 찌르고 들어온다. 갈지혁은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면서 하늘을 향해 녹색 가루를 뿌렸다.
“중독되기 전에 벤다!”
취련은 고함 소리와 함께 그대로 검을 쭉 밀어 넣었다. 그런데 무서운 속도로 나아가던 검이 무엇인가에 막힌 듯이 뒤로 퉁 하고 튕겨져 나왔다.
그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버렸다.
‘이런……!’
자신뿐만이 아니다. 다른 두 명의 검 또한 갈지혁의 몸에 닿기도 전에 튕겨 버린 것이다. 호신강기가 아니다. 검막 같은 것을 펼친 것도 분명 아니다.
가루. 그래, 가루다.
하늘로 던진 녹색의 가루가 갈지혁의 몸을 보호한 것이다. 믿어지지 않지만 이런 종류의 독도 있는 모양이다.
갈지혁의 손바닥이 녹색으로 물들었다.
퍼엉!
일장을 후려쳤다. 재빠르게 움직인 취련의 옆구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동시에 취련은 검기를 쏟아 내 갈지혁을 베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