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
18화
갈지혁은 가볍게 옆으로 비켜서며 취련의 공격을 피해 냈다.
취련은 옆구리를 움켜쥔 채로 뒤로 물러섰다.
허리 부근이 시큰거린다.
피한다고 피했지만 완벽하지 못했나 보다. 그의 시선이 양옆에 있던 두 명의 수하들에게로 향했다. 언제나 옆에 서 있던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면 독장에 당해 뒤쪽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대체 이놈은…….’
취련은 지금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 복건성에서 손에 꼽는 고수인 자신이다.
그런데…… 단 일 장이었다.
단 일 장에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사라졌다. 전의도 천천히 사그라지고야 말았다.
‘싸울 상대가 아니다. 나와는 실력 자체가 달라.’
십절검이라는 별호는 괜히 생긴 게 아니었다.
단 열 번이다.
그 열 번이면 대부분의 자들은 생명이 끊어지고야 말았다. 그렇지만 갈지혁에게 그는 단 일검도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상대가 되지 않는다.
“싸워봤자라는 걸 알았을 텐데. 이만 물러나라. 네가 싸워 봤자 부하들만 다친다.”
“……죽이지 않을 거요?”
“죽이지 않는다. 네가 싸울 의사만 없다면 지금부터 단 한 명도 손대지 않을 것이다.”
망설이지도 않고 갈지혁은 대답했다. 한두 명도 아니다. 이백이 훌쩍 넘는 숫자의 무인들을 그냥 보내 주려는 것이다.
이들은 다시금 백씨세가로 돌아갈 게다. 그리고 그들의 힘이 되어 검을 들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잠시 가만히 있던 취련이 말했다.
“다음에 우린 당신을 칠지도 모르오.”
“이백 명 정도 는다고 이길 싸움을 지지 않아.”
“……대단하군.”
결코 허언을 내뱉는 것이 아니다.
정말 갈지혁은 이백 명 정도 숫자가 느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다음에 덤빌 때는 이 정도로 끝나지 않을 거다. 다음번엔 바로 즉사하는 독을 살포할 테니까.”
“당신이라는 사람과는 다신 싸우지 않을 거요.”
돈을 받고 왔다.
하지만 아무리 돈이 좋아도 목숨이 있어야 돈도 필요한 것이다. 백씨세가에 몸을 담고 있으면 결국 갈지혁과 다시금 마찰을 일으키게 될 게 분명하다.
취련은 마음을 정했다.
백씨세가로 돌아가는 그 순간 자신이 데리고 온 수하들을 모두 이끌고 해남도를 떠날 것이다.
갈지혁과 다시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다시 싸우게 되면 정말로 살 수 없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마차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풀어 줘라.”
취련은 손으로 수하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들은 수레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갈지혁은 취련을 지나쳐 곽소정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다가오는 갈지혁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해남파의 미래는 이제 없다고까지 생각해 버렸다.
한데…… 아니다.
갈지혁이라는 사내에게 또 도움을 받아 버렸다.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고마움에 곽소정이 감사를 표했다.
“정말 고마워요.”
“고마워할 필요 없소.”
여전히 같은 말이다. 하지만 어찌 고마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무너질 뻔했던 해남파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을.
물론 아직 싸움은 끝난 게 아니다.
해남파는 본거지를 빼앗겼다. 그리고 백씨세가의 힘은 예상보다 강했다. 하지만 해남파의 진정한 힘이라면 그들에게 밀리지 않을 거라고 곽소정은 확신했다.
곽소정은 활짝 웃으면서 갈지혁을 바라봤다.
이 고마움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현문 또한 갈지혁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또 은혜를 입었군. 자네는 아무래도 우리 해남파와 귀한 인연인 것 같네.”
“부탁할 것이 있어서 도운 것뿐이오.”
“부탁할 것이라니?”
“필요한 약재가 몇 가지 있소.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아 보이는군.”
지금 상태라면 갈지혁이 원하던 약재들은 구할 수 없을 듯했다. 그때 갈지혁을 보고만 있던 곽소정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해남파를 되찾는 즉시 찾아드릴게요.”
“쉽지 않은 약재들도 좀 있소.”
“상관없어요. 어차피 해남파는 당신에게 갚을 수 없을 정도의 큰 은혜를 입어 버렸으니까요.”
“자꾸 은혜라고 하지 마시오. 어차피 약재 때문에 도왔는데…….”
“아니오. 약재 때문이었다면 차라리 백씨세가를 도왔어야지요. 그게 약재를 구하는 데에는 더 빨랐을걸요.”
곽소정은 갈지혁을 마주 보며 당당하게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다. 갈지혁이 방해를 하지 않는 대신 백씨세가에 지금 찾으려는 약재들을 원했다면 그들은 두말없이 그를 도왔을 게다. 그리고 그걸 갈지혁이 몰랐던 것도 아니다.
“……미리 알았으면 그럴 걸 그랬군.”
갈지혁은 말을 돌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때 수풀 사이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일이냐?”
“오셨습니까?”
갈지혁은 수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느새 일악천이 나타나 이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노인을 본 현문의 표정이 급격하게 변했다. 꽤나 흉측한 외모다. 갈지혁과 아는 사이였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경계를 하는 실례를 범했을지도 모른다.
일악천은 갈지혁이 이곳으로 온 이유를 모른다. 하지만 대충 이 상황이 어떠한 것인지는 알아차렸다.
“해남파의 인물이냐?”
“그렇습니다. 해남파 장문인의 영애입니다.”
“저 소녀가?”
“예.”
현문과 곽소정은 지금 나타난 일악천을 주의 깊게 바라봤다. 흉악하게 생긴 외모 때문이 아니다. 분명 그것도 시선이 가는 것이기는 하지만 무엇보다 갈지혁의 태도 때문이다.
그는 결코 자신을 굽히는 사내가 아니다. 그런 갈지혁이 저 노인 앞에서는 너무나 공손하다.
일악천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갈지혁에게 가볍게 말했다.
“난 잠시 수풀 속에 있겠다.”
“수풀 속에 말입니까?”
이해할 수 없다는 갈지혁의 태도에 일악천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이놈! 나의 얼굴을 보거라. 이곳에 있는 자들이 내 얼굴을 봐봤자 좋을 것 하나 없다.”
“…….”
일악천은 웃으며 말을 내뱉었지만 듣고 있는 갈지혁의 마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평생을 이리 살아왔을 게다. 자신의 외모를 남에게 보여 주는 것을 일악천은 좋아하지 않았다.
당연하다.
사람들의 신기한 눈빛도, 경계하는 모습도 일악천에게는 분명 달갑지 않을 게다. 그는 몸을 돌려 다시금 수풀 속으로 몸을 감췄다.
갈지혁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사라지는 일악천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의 눈빛을 바라본 곽소정은 지금 사라진 노인이 갈지혁에게는 무척이나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누구인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 * *
갈지혁은 이백에 달하는 인원들과 함께 모습을 감추었다. 물론 그것은 일악천의 도움 덕분이었다. 그가 펼친 진법은 세상과 단절이라도 된 것처럼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곽소정은 자리에 앉은 채 앞에 있는 노인을 바라봤다.
‘신기해.’
취련은 데리고 왔던 모든 자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갈지혁이 그들을 그냥 보내 준다고 했음에도 눈앞에 있는 이 노인도 한마디 반대도 하지 않았다. 그러냐고 묻고는 그냥 알아서 하라는 듯이 방관해 버렸다.
일악천은 사방에 진을 쳤다. 무려 다섯 개의 진을 만들어 냈고, 그 안에 각자 사람들을 나눠서 넣었다. 가져왔던 음식들을 모두 이쪽에서 챙겼기에 식사는 문제가 없을 게다.
가장 작은 진에 일악천과 갈지혁, 그리고 그 마차에 타고 있던 해남파의 수뇌부들이 머물렀다.
정확하게 일곱 명이 이 진 안에 있었다.
너무나 평화로워서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은 마치 거짓말 같았다.
일악천은 앉아서 나무를 깎아대다가 시선을 돌려 곽소정을 바라봤다.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어서다.
그가 말했다.
“왜 그리 쳐다보느냐.”
“어르신의 정체가 궁금해서요. 제가 알기로 갈지혁이라는 사내는 아무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거든요.”
“고집이 강한 놈이니까 그럴 만도 하지.”
말을 마친 일악천은 갈지혁을 바라본다. 이야기가 분명 들릴 텐데도 아무런 말도 없이 눈을 감고 있다.
이번엔 일악천이 곽소정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이 여인은 처음 봤을 때부터 자신에게 전혀 거리감을 두지 않았다. 다른 자가 방금 전에 그처럼 쳐다봤다면 일악천은 기분이 나빴을 게다.
자신의 외모 때문에 그렇게 쳐다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곽소정이라는 여인은 조금 독특했다.
“부친이세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일악천이 소리를 지르며 픽 하고 웃어 버렸다.
닮은 데라곤 하나도 없다. 자신은 남만인이고 갈지혁은 중원인이다. 얼굴만 해도 크게 다르다.
갈지혁은 비록 머리카락으로 가리고 있다고 하지만 빼어난 미남이다. 그에 반해 그는……
흉물이다.
괴물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을 정도로 볼품없는 외모다. 일악천은 말을 내뱉었다.
“스승이다.”
“에…… 갈 소협의 스승님이라고요?”
“그래. 왜 그렇게 놀라지? 아버지라고는 생각하면서 스승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나?”
“아뇨, 그게 아니라 저렇게 강한 사람도 스승이 있구나 싶어서요.”
왜 곽소정이 그토록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녀가 본 갈지혁은 너무나 강했다. 해남파를 단숨에 제압한 백씨세가의 인물들이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단지 이름만으로 싸울 의사를 꺾어 버릴 정도의 무인은 전 중원을 뒤져도 몇 나오지 않을 게다.
그토록 강했기에 스승이 있는 것은 당연한데도 불구하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가만히 있던 갈지혁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스승님은 나보다 강하오.”
“정말요?”
곽소정이 놀란 눈으로 일악천을 바라봤다. 그렇지만 그는 가볍게 손을 저으며 대꾸했다.
“몇 년 전에는 그랬겠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이제 난 저놈을 이길 자신이 없어.”
진심이다. 일악천은 지금의 갈지혁과 싸워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말이 있지.”
스승보다 제자가 뛰어남을 일컫는 말이다. 지금의 일악천은 갈지혁을 그리 생각했다.
자신이 뛰어난 기재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랬기에 중원에서 일악천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이 아닌 갈지혁이라는 이름에 온 중원이 긴장한다.
이제부터는 갈지혁이라는 사내의 시대가 온 것이다.
곽소정의 옆에 있던 현문은 며칠 동안 뭔가 생각해 온 것이 있었다. 그가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어르신, 죄송하지만 한 가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혹 어르신의 성이…… 일(一)로 시작되십니까?”
“뭘 그리 어렵게 물어. 일악천이냐고 물으면 되지. 그래, 내가 바로 일악천이다.”
대답을 듣는 순간 현문은 자신도 모르게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런 그의 행동에 곽소정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섬에서 자랐고, 나이가 어린 그녀는 일악천을 모른다.
하지만 현문 정도의 나이를 먹은 자라면 일악천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자다가 벌떡 일어날 게다.
“이, 일수만독 일악천…….”
“왜 그래요?”
“아, 아가씨, 저자, 아니, 어르신은…….”
“뭘 그리 더듬거리나. 쯧쯧.”
일악천이 혀를 찬다.
그렇지만 현문의 입장에서는 또 그렇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자는 독황독립문의 인물로, 이자가 나타난 곳은 결코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한다고 했다.
아무리 강한 무인이라도 일수만독 앞에서는 무릎을 꿇었다. 만약 그가 갑자기 사라지지만 않았다면 지금 무림은 독황독립문의 것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직도 중원에서 그 같은 악행을 저질렀던 독황독립문을 건드리지 못하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단 하나, 바로 일악천의 존재 때문이다.
그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 하나의 이유만으로 중원은 독황독립문에게 아무런 보복 행위도 하지 못했다.
그런 존재가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이다.
‘갈지혁이 일수만독의 제자라니…….’
뜻을 이은 자 또한 일수만독 못지않다. 일수만독의 말대로 이제 갈지혁의 실력이 그를 상회했다면 중원에서 그의 적수가 될 자는 아무도 없다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