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왕전설-169화 (169/200)

# 169

19화

“일수만독이라는 별호를 아시는지요.”

겨우 숨을 고른 현문이 물었다. 잠시 생각하던 곽소정이 고개를 저었다. 세대가 다르고 살아온 곳이 다른 탓이다.

일악천은 꽤나 오래전에 사라진 무인이다.

“제가 스물을 갓 넘겼을 때입니다. 그때 중원으로 독황독립문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독황독립문이라면 남만에 있다는 그 독문(毒門)?”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독황독립문과 중원 전체의 싸움이 붙었지요.”

끔찍한 일이었다. 그 당시 앞장섰던 중소문파 중에 사라진 곳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그리고 구파일방들조차 그 일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해남파는 섬에 있었기에 독황독립문과 직접적인 마찰이 없었다. 백 명에 달하는 인원을 보내 준 것이 그때 해남파가 한 전부였다. 그랬기에 해남도에서는 일수만독이라는 별호가 낯선 것이다.

그 당시 독황독립문 일에 개입된 자들만 제한다면 말이다.

“당연히 압도적인 중원의 승리가 예상되었습니다. 비록 독은 강하다고 하지만 독인들은 무공에 약했으니까요. 그때 저 일수만독이라는 분이 나타났습니다.”

균형을 깨고 구파일방이 점점 독황독립문을 밀어붙일 때였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일수만독 일악천이라는 단 한 명의 인물로 인해 전세는 완벽하게 뒤집혔다.

“유리하던 구파일방은 뒤로 밀리기 시작했고, 이대로 끝나는가 싶었을 정도입니다. 단 한 명의 등장으로 인해 구파일방이 처절한 꼴을 당한 것이지요.”

“대단하네요.”

곽소정은 진심으로 감탄한 듯이 시선을 돌려 일악천을 바라본다.

그런데 의구심이 든다. 그토록 상황이 돌변했는데 지금 어찌 중원이 이토록 멀쩡하냐는 거다.

현문이 계속해서 말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저분이 독에 중독된 자들을 해독했기 때문이지요.”

그랬다.

구파일방의 수뇌부들 중 반수가량은 일악천의 독에 중독되어 거동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해독약을 푼 것이다. 그리고 일악천은 그대로 몸을 돌려 남만으로 돌아갔다.

그가 사라지자 독황독립문은 그대로 뒤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일수만독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왜 독에 중독된 자들을 해독해 주었고, 다 잡은 중원을 포기하고 사라졌는지도.”

물론 그 답을 아는 유일할지도 모르는 자가 옆에 있다.

일수만독 본인.

그때 현문 또한 중원을 위해 섬을 나갔었다.

그리고 그는 해남파에서도 전혀 튀지 못하는 무사였다. 그저 한 명의 젊은 무인으로 싸움에 참가했던 현문은 잠시 나타난 일악천을 보고 굳어 버렸었다.

그리고 그건 다른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쓰윽 한 번 훑어보면서 걸어가는 것뿐인데도 그 당시 모여 있던 무인들은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아주 잠시 스치듯이 봤지만 아직까지 일악천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은 그때 받았던 느낌이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이다.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처럼 자신의 과거를 듣던 일악천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로 입을 열었다.

“지루해져 버렸거든.”

“뭐가요?”

“싸우는 것도, 마음에도 없는 독을 뿌려대는 것도.”

알 수 없는 말이다.

마음에 없는 독을 뿌려댄다니, 이해할 수가 없다.

잠시 가만히 앉아 있던 일악천이 말했다.

“독인들의 꿈이 무엇인지 아느냐?”

“독인들의 꿈이라…… 글쎄요.”

“독왕이다. 독왕이라고 불리는 게 독인들의 꿈이야.”

곽소정은 선뜻 뭐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 그녀는 지금 일악천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검왕이라는 칭호가 붙는 자들은 허다했다. 도왕이라고 불리는 자들도 여태까지 수도 없이 많았다.

남해도만 해도 남해검왕(南海劍王)이라고 불리던 자가 있었고, 육지에는 검왕(劍王)이라는 별호를 가진 자가…… 그런데 독왕이라고 불리는 것이 꿈이라니, 대체 그게 어떠한 의미인지 그녀는 모른다.

“검왕(劍王), 도왕(刀王), 장왕(掌王), 지왕(指王), 각왕(脚王)…… 왕이라는 글자가 붙는 별호는 많지. 한 시대에 분명 저렇게 불리는 자들은 꼭 하나씩 나오게 되어 있어. 한데…… 독왕은 없단 말이야?”

“아…… 그러고 보니.”

암기왕이라는 별호도 있었거늘 독왕이라고 불린 자는 단 한 명도 없음을 곽소정은 알아차렸다.

물론 현재 무림에서 갈지혁을 독왕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그건 일부에 불과할 뿐이었다. 구파일방의 인물들은 갈지혁을 독왕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구파일방에게 인정받아야 독왕이라는 건 아니다.

실질적으로 갈지혁 본인도 아직 스스로가 독왕이 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독왕이라는 것은 단순하지 않다.

“중원은 독에 왕이라는 칭호를 붙이지 않아. 그렇기 때문에 나올 수 없는 별호인 게야. 나 또한 독왕을 꿈꾸었지. 무턱대고 강함만 보였단 말이야. 중원이 바로 내 손 아래에 들어왔을 때 나는 깨달았지.”

참으로 오래된 이야기다.

갈지혁에게도 하지 않았던 그러한.

갈지혁과 마찬가지로 독왕을 꿈꾸었던 일악천은 그러한 별호를 얻기 위해 무림에 나섰다.

전 중원에서 적수가 없을 정도로 강한 그였지만…… 그는 독왕은 아니었다.

“난 독왕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 버렸다.”

강했지만 독왕은 아니었고, 이대로 아무리 강해져도 독왕은 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떠났다.

독왕이 되기 위해 싸운 것이지 결코 중원을 손에 넣고 싶다는 욕망 따위를 가졌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저놈이라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일악천은 갈지혁을 바라봤다.

단지 강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일악천 그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갈지혁은 많이 가지고 있었다.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사내다.

너무나 꼿꼿했기에 꺾인 일악천과는 달리 갈지혁은 휘어질 줄도 알고 있었다.

“그만 좀 하십시오, 스승님.”

“클클.”

연신 자신을 띄워주는 일악천의 말이 부담스러웠는지 갈지혁이 제지하고 나섰다. 일악천도 그냥 그렇게 입을 닫았다.

새로운 사실을 알아 버렸다.

일수만독 일악천이 아직 살아 있고, 그가 키운 제자가 바로 지금 무림을 시끄럽게 하는 갈지혁이라는 것도.

* * *

곽생은 측근 다섯 명을 대동하고 산길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다소 복잡했다.

‘제발 무사하거라.’

너무나 안일하게 대처했던 자신에 대한 책망도 든다.

백씨세가가 정면으로 도전해 들어온다고 해서 그게 전부라고 생각한 것이 실수였다.

약속 장소에 도착해서 기다렸지만 백씨세가는 오던 도중 갑자기 방향을 틀어 사라졌다. 그리고 때맞추어 해남파가 기습을 당했다는 정보가 입수됐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해남파에 남아 있는 자들 중에서 싸울 수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기는 단번에 바닥을 기게 되어 버렸다.

백씨세가와 싸우기 위해 출정한 일부 무인들의 가족은 해남파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런 가족들이 지금 백씨세가에게 인질로 잡혀 버린 것이다.

아무리 용맹한 자라고 해도 검을 들지 못했다.

항복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이대로 갔다가는 인질도 모두 죽어 버릴 게고, 자신들 또한 결국 고립되어 해남파라는 이름 자체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를 입장에 처한 탓이다.

그러던 와중에 웬 낯선 자의 방문을 받았다.

자신을 심부름꾼이라고 밝힌 그가 서찰 한 장을 곽생에게 전해 주었다. 아무 생각도 없이 펼친 서찰을 읽는 순간 그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해남파의 포로들이 모두 구출되었고, 진법 안에 숨어 있다는 내용이 담긴 서찰이었던 것이다.

좋은 소식이다.

하지만 막연하게 좋아만 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누가, 라는 의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백씨세가로 압송되어 가는 포로들을 구해 냈단 말인가.

해남도에서 백씨세가와 견줄 수 있는 곳은 오직 하나 해남파뿐이다. 해남파가 아니라면 그런 그들에게 반기를 들 수 있는 곳도 없었다.

의문이 들었지만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또한 곽소정이라는 자신의 유일한 혈육을 해남파에 두고 왔다. 목숨보다 귀한 딸이다. 그런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았다.

함정일 거라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곽생은 서찰에 적혀 있는 장소로 향하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평소에는 인자한 그이지만 한 번 정한 이상은 반드시 고집하는 곽생의 성격을 알기에 결국 주변에 있던 자들이 포기했다. 대신 그들은 다섯 명의 측근을 붙여 그를 따르도록 했다.

그들 또한 이 서찰의 내용이 사실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서일지도 모른다.

만약이라는 것에 그들은 걸기로 한 것이다.

어차피 이대로 간다면 해남파는 없다.

아무리 강한 무인이라도 가족을 인질로 잡고 있는데 어찌 검을 들 수 있단 말인가.

곽생까지 포함한 여섯 명은 지친 기색도 보이지 않는다. 여섯 명 모두 무공의 경지가 대단히 높은 자들이기 때문이었다.

“이 근처인 것 같은데…….”

한 명이 중얼거린다. 곽생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진법 안에 숨어 있다고 들었다. 한데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진법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다.

‘속은 것인가?’

마지막 희망이 끝내 거짓이라는 생각에 곽생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네가 곽생이냐?”

“누구냐!”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곽생은 검을 뽑았다.

방금 전까지 세상 모든 것을 잃은 듯한 눈을 하고 있던 자치고는 꽤나 날카로운 기세다.

“위다.”

그제야 곽생은 고개를 위로 치켜들었다.

나무 위에 누군가가 있었다.

동시에 그는 검을 든 손을 위로 향했다. 그의 마음 한편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위치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만약 저자가 마음을 먹고 살수를 전개했다면 지금 곽생은 적지 않은 부상을 입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고수다. 도대체 백씨세가에 어찌 저런 고수가…….’

조그만 덩치의 인물이 나무 아래로 툭 하고 떨어졌다.

검을 휘두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지 아무런 방비도 없이 말이다.

그제야 정체불명의 인물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일악천이다.

“괴, 괴물?”

다섯 명의 측근 중 하나가 중얼거렸다. 흉물스럽게 생긴 얼굴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다. 순간 말을 내뱉었던 자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컥!”

입으로 한 사발의 피를 토해 낸다.

일악천이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주둥아리 함부로 놀리지 말거라. 노부에게 그런 말을 지껄이고 산 놈은 네가 처음이다. 내 제자만 아니었다면…… 너도 죽었어.”

곽생은 지금 자신의 수하가 쓰러진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다만 지금 눈앞에 있는 자는 엄청난 고수라는 걸 알 수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이 또한 자신보다 훨씬 많은 자라는 것도.

“노인장은 누구시오.”

“궁금하면 내 제자에게 물어. 기껏 해남파의 놈들을 살려 줬더니만 하는 말이라고는.”

“사, 살아 있다니…… 그게 정말이오?”

“내가 보낸 서찰을 받고 온 것 아닌가?”

“그 서찰을 노인장이…….”

“닥치고 따라들 와. 내 발을 잘 보고 그대로 움직여. 다른 곳을 밟았다가 죽은 후에 날 원망해 봤자니까 알아서들 해.”

말을 마친 일악천은 그대로 몸을 돌려 어딘가로 향한다. 곽생은 일순 망설였다.

상대의 정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니 섣부르게 따라간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때 앞서 가던 일악천이 몸을 돌려 소리쳤다.

“안 따라올 게냐!”

곽생은 일악천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가겠소.”

“장문인!”

“자네들은 여기서 기다리게. 나 혼자 다녀오지. 혹 내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자네들에게 훗날을 맡기겠네.”

말을 마친 그는 일악천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곽생이 다가오자 일악천은 기이하게 발걸음을 바꿨다.

곽생은 그런 그의 발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쫓았다. 그때 뒤에 남은 자 중 하나가 소리쳤다.

“장문인! 독, 독에 당한 거요!”

번개처럼 한 사내의 얼굴이 곽생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독이라면…… 갈지혁!’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