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
20화
일악천의 뒤를 쫓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주변의 풍경이 갑자기 확 하고 바뀌었다.
앞장서서 걷던 일악천이 멈추었다.
“진법 안이니 마음대로 걸어도 돼.”
“고맙소. 그런데…… 노인장은 대체 누구시오.”
“내 제자에게 물어보라니까.”
일악천은 짜증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곽생은 일악천의 뒤에서 걷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혹 노인장의 제자가…….”
“아버지!”
익숙한 목소리에 곽생은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동자가 커졌다.
“아, 아아! 소정아!”
그는 갑자기 나타난 곽소정에게 나는 듯이 다가가 그녀를 꼭 껴안았다.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백씨세가는 결코 해남파의 피를 남겨두지 않았을 게다.
일반 무인이라면 모를까 장문인인 그와 딸인 곽소정만큼은 반드시 죽였을 게다.
머리가 살아 있으면 다시금 시끄러운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만났다. 죽지 않고 이렇게 마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이게 대체…….”
“운이 좋았어요. 포로로 잡혀서 가던 도중에 구출을 받았거든요.”
“그렇구나. 널 구해 준 은인은 어디 계시냐.”
곽소정이 고개로 옆을 가리킨다. 그제야 곽생의 눈에 주변의 다른 풍경이 들어온다. 무사한 딸을 보자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것이다.
곽생의 눈에 얼굴을 가린 한 사내가 들어온다.
그가 얼굴에 미소를 짓는다.
“역시…… 자네였군.”
앉아 있던 갈지혁이 일어나 가볍게 목례를 했다. 곽생은 갈지혁에게 다가가더니 그의 손을 꽉 잡았다.
너무나 고마웠다.
해남파의 존폐(存廢)가 이 사내 덕분에 바뀌게 된 것이다.
“은혜를 어찌 갚아야 될지 모르겠네.”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을 테니 고마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버지, 이미 약재 몇 가지를 주기로 했어요.”
옆으로 다가온 곽소정이 말한다. 곽생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남파를 살려 준 자다. 약재가 아닌 자신의 심장을 달라고 해도 당장에 빼줄 수 있었다.
“다른 이들도 모두 무사한가?”
“주변에 다섯 개의 진을 쳐놨어요. 다들 무사하고요.”
“오…… 하늘이시여.”
곽생이 눈을 꼭 감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빼앗긴 것은 그저 해남파의 건물뿐이다. 사람들이 모두 살아 있으니 되찾는 것은 시간문제다. 이제 해남파의 무인들은 검을 휘두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싸울 수 있는 자를 제하고는 이곳에 있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좋은 생각이다. 그런데 이 진법은 누가…….”
“일수만독 어르신이 만드셨어요.”
“……뭐라고 했느냐?”
곽생의 웃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자신의 귀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곽소정이 다시 말했다.
“일수만독 어르신이 만드셨다고요.”
“저 노인장이…… 일수만독이라고?”
“예.”
곽생은 숨이 턱 하고 막혀왔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을 이곳까지 데려온 노인을 바라봤다.
이자가…… 일수만독 일악천이란다.
구파일방을 비롯한 정파의 모든 무인들을 죽음의 나락으로 몰아넣었던 그 전설의 독인.
문득 그가 방금 전에 했던 말이 생각났다. 자신의 제자에게 물어보라던 그 말말이다.
그 말인즉…….
‘갈지혁의 스승이 일수만독이었군.’
하기야 갈지혁 정도 되는 자를 키워내는 것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일수만독 정도 되는 자라면 이해가 간다. 아니, 그가 아니면 그 누가 갈지혁과 같은 자를 만들어 낼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고인을 몰라 뵈었습니다.”
“상관없다. 어차피 너에게도 그리 좋은 사람은 아닐 테니까.”
사실이다.
해남파가 다른 구파일방에 비해서는 극히 적은 피해를 입었다고는 해도 그래도 일악천을 좋게 보지는 않을 게다.
곽소정은 자신의 아버지가 이토록 상대에게 조심스럽게 대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다정하고 예의 바르지만 최소한 자신의 권위는 지켰다. 그런 곽생이 지금 일악천 앞에서는 달랐다.
나이 많은 이들에게 일악천이라는 이름은 가히 공포라던 현문의 말은 전혀 과장이 아닌 모양이다.
“제 딸을 잠시지만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내 제자가 원한다면.”
곽생이 갈지혁을 바라본다.
지금 곽생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서 일전을 준비해야 한다.
해남파의 무인들은 아직 이 사실을 모른다. 어서 빨리 그들에게 가족들이 살아 있음을 알리고 싶은 게다.
“받을 게 있습니다. 그리고 그건 해남파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가능한 일입니다.”
“고맙네. 정말 고마워.”
갈지혁이 정확하게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가 한 말의 의미는 분명했다.
돕는다는 거다.
지금 이 진법이 있는 이상 무공을 모르는 해남파의 사람들은 다시금 위험에 처하지 않을 게다.
이제부터는 싸움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조만간 다시 연락 주겠네.”
“나갈 거면 길 안내는 해 주지.”
“감사합니다.”
곽생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 누가 일수만독 일악천과 갈지혁이 있는 곳에 나타나 자신의 식솔들을 위협할 수 있겠는가. 이 둘이 있다면 설령 상대가 무림 전체라고 해도 두렵지 않을 게다.
그는 딸을 바라보며 웃음을 흘렸다.
“더는 고생시키지 않으마. 이번만 이 아비를 이해해 주려무나.”
“제 걱정 마시고 다치지 않게 조심하세요.”
“오냐. 금방 정리하고 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거라.”
말을 마친 곽생이 몸을 돌린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악천이 짧게 묻는다.
“끝났나?”
“예, 길 안내 부탁드리겠습니다.”
“따라와.”
갑작스럽게 나타난 것처럼 곽생의 모습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실로 대단한 진법이 아닐 수 없다.
곽생이 사라지자 웃고 있던 그녀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옆에 있던 현문이 곽소정에게 다가왔다.
“괜찮으실까요?”
“힘드시긴 하겠지만…… 해남파의 장문인이십니다.”
해남파는 무너지지 않는다. 육지의 압력에도 단 한 번도 굴하지 않았고, 언제나 독자적인 힘을 쌓아왔다.
섬사람들은 독하다.
쉽사리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그러한 오기들이 똘똘 뭉쳐진 곳이 바로 해남파고, 그들의 수장이 바로 곽생이다.
“해남도가 시끄러워지겠어요.”
해남도에서 가장 큰 세력인 해남파와 백씨세가는 이제 전면전을 펼칠 것이다. 당연히 꽤나 시끄러워질 것이 분명하다.
갈지혁은 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슬슬 올 때가 된 것 같은데 아직 그가 오지 않았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곽소정에게 아직 말하지 않았지만 갈지혁은 해남파의 싸움에 낄 생각이었다. 그냥 두 세력 간의 싸움이 끝나기를 기다리기에 그는 시간이 많이 모자랐다.
차라리 확실하게 해남파를 도와 싸움을 끝내는 것이 낫다. 그리고 갈지혁이 낀다면 오히려 적은 피로 싸움의 종지부를 찍을 수도 있었다. 마비독을 사용해 대부분의 무인을 중독시킨다.
그리고 싸움을 한다면 그만큼 피해가 줄어들 수 있었다.
제압해야 할 것은 일반 무인들이 아닌 백씨세가의 수뇌부들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갈지혁의 생각은 일악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미리 약속한 대로 지금 데리고 나가는 길에 그러한 갈지혁의 의견을 곽생에게 말하고 있을 게다.
‘보름, 보름 안에 끝낸다. 여태까지 보낸 시간을 감안한다면 그 이상은 안 돼.’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한다. 더는 이 싸움이 길어지게 놔둘 생각은 갈지혁에게 없는 것이다.
그. 그만 온다면 이곳을 맡기고 떠날 게다.
바로 해남파의 전설이었다던 신룡검 노후량 말이다.
곽생에게 보냈던 것처럼 일악천은 그에게도 간단한 서찰 하나를 보낸 상태였다.
현문에 대해 이야기했으니 아마 지금쯤 오고 있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노후량이라면 비어 있는 이곳을 어느 정도 지킬 능력이 있다고 생각해서다.
일악천에게 맡겨도 되지만 무엇인가 할 일이 있다고 했다.
단화초가 있었던 곳에 다시 한 번 가봐야 한다기에 이런 부탁을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올 때가 지난 것 같은데. 오지 않을 생각인가?’
그때 진법을 가르고 나타난 일악천이 갈지혁에게 말했다.
“이거, 기이하게도 곽생을 데려다 주기 무섭게 이놈이 오더군.”
말을 마치자마자 일악천을 뒤따라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다소 외양이 변한 듯했지만 기다리던 바로 그자였다.
갈지혁이 말했다.
“잘 왔다, 노후량.”
“무슨 일로 날 불렀나?”
노후량은 떨떠름한 시선으로 갈지혁을 바라봤다.
* * *
일악천은 홀로 움직였다.
갈지혁은 해남파의 장문인을 도울 거라고 했지만 그는 따로 할 일이 있었다.
단리문을 만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주의만 준 후 일악천은 그곳을 떠나 오지산 리족 부락 근처에 있는 오문진으로 왔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얼마 전 싸움의 흔적으로 주변이 온통 초토화되어 있었다.
이제 이곳은 풀도 자라지 못하는 그런 곳으로 변했을 게다. 갈지혁의 피는 그러기에 충분한 독성을 지니고 있었다.
다행히 다른 자들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일악천은 능숙하게 오행진 안으로 들어갔다.
오행진 안으로 들어선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무것도 없다. 있어야 할 오행의 기운조차 사라져 버렸다. 이러고도 진법이 아직까지 형성되어 있는 것이 용하다.
“크음.”
그는 급히 숨을 밖으로 토해 내며 수라독공을 운기했다. 십성의 경지에 이른 그의 독공 덕분인지 갑작스럽게 가빠오던 숨이 정상으로 돌아갔다.
지독한 독기다.
엄청난 독기가 이 안을 뒤덮고 있었다.
이것이 오행을 파괴하였을 테고, 또 안에 있던 모든 생물들의 목숨도 거두어 갔을 것이다.
엄청난 독이다. 오행을 파괴한다는 것은 곧 자연 자체를 박살 낼 정도라는 거다. 그러한 독이라면 사람은 견뎌낼 수 없다.
‘사단이 벌어졌다!’
일악천은 급히 경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단화초가 있는 이곳에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무런 것도 일악천을 막지 않았다. 이 공간 자체가 독기로 가득 차 아무런 것도 남은 것이 없어서다. 그가 최종적으로 향한 곳은 갈지혁이 단화초를 뽑아냈던 바로 그곳이었다.
그곳에 도착한 일악천은 멍하니 선 채로 아무것도 없는 그 공간을 바라봤다.
이게 아니다. 이곳에 아무것도 없어서는 안 된다.
털썩.
자신도 모르게 일악천은 주저앉고 말았다. 이곳에는 지금 단화초가 있어야 한다.
갈지혁은 이곳에 있던 하나의 단화초를 뽑아갔다. 그것이 분명 단화초의 전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단화초는 독성이 강한 풀이다.
이곳에는 수백 개가 넘는 단화초가 공존하고 있었다. 다만 그것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을 뿐이다.
가장 먼저 핀 단화초는 다른 놈들이 양분을 빨아먹게 놔두지 않는다. 그 탓에 다른 단화초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땅속에서 반쯤 핀 상태로 잠이라도 자는 것처럼 동면하고 있었던 게다.
그러던 것이 갈지혁이 단화초를 뽑으면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모아 둔 힘을 바탕으로 거의 동시라고 할 정도로 단화초 수백 송이가 동시에 피어오른다.
물론 그들의 독기를 모두 빨아먹은 갈지혁의 단화초가 진짜 단화초다. 하지만 그렇게 힘을 빼앗겼다고 해도 뒤늦게 나온 단화초 또한 단화초가 아닌 것은 아니었다.
원래 이 공간은 단화초로 가득해야 했고, 일악천은 그것들을 제거하기 위해 온 것이다.
단화초는 한 송이만 있으면 된다.
더 이상의 것은 필요 없다.
그 이상의 것은 오히려 세상을 시끄럽게 할 뿐이다.
단화초를 불태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지독한 독기 때문에 죽을지도 모른다.
그랬기에 갈지혁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일악천 자신이 짊어져야 할 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단화초가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단화초를 건드린 것이다.
그리고 그 당사자가 누구인지 예측하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았다.
“단…… 리문…….”
그자가 가져갔을 것이 틀림없다. 자신과 갈지혁이 아니라면 이곳을 아는 자는 단리문뿐이었다. 가장 위험한 자에게 가장 위험한 무기가 들려져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