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왕전설-171화 (171/200)

# 171

21화

“허, 허허, 허허허!”

일악천이 웃는다. 너무나 공허한 듯이 비어 버린 그의 웃음은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처량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일악천이 일어났다.

단리문이 단화초를 가져갔다. 그것을 가지고 무슨 짓을 하기 전에 막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갈지혁이 강해지는 것이 시급한 문제다.

다행하게도 여기서 가져간 단화초들은 그들을 억누르며 독기를 빼앗아가던 갈지혁의 것에 비해 너무나 미약한 힘을 가졌다.

‘아직 끝난 건 아니다.’

어서 빨리 해남파가 백씨세가를 밀어내고 힘을 찾아야 한다. 그것을 일악천 또한 도와야 할 것 같다. 물론 이 오지산까지 왕복하는 기간 동안 갈지혁은 많은 것을 해 놓을 것이다.

운이 좋으면 이미 백씨세가의 일을 정리했을지도 모른다.

일악천은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아직 일악천은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했다. 그저 단화초가 아니다. 단화초가 사라졌기에 그는 기본적인 것 중 하나를 생각해 내지 못했다.

정작 위험한 것은 바로 그것임을 일악천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노후량은 앉은 채로 자신의 앞에 있는 갈지혁을 바라봤다. 간단하게 짐을 챙기는 갈지혁의 모습을 밉살맞은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자신을 부르더니 이곳을 부탁한단다. 당장에 거절하려 했지만 어찌 되다 보니 이리된 것이다.

현문이 위험하다는 말에 섣부르게 거절도 못하게 되어 버렸다. 거기다가 노후량은 갈지혁에게 은혜를 입기도 했다.

이제는 주변의 사물이 거짓말처럼 잘 보인다. 거의 예전의 시력을 회복했을 정도다.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어찌 고마운 마음이 없지 않을 수 있으랴. 엉겁결에 노후량은 이 일을 떠맡았다.

노후량을 데리고 왔던 일악천은 그날 모습을 감추었고, 그로부터 삼 일 정도 갈지혁은 진 안에 머물렀다.

이런저런 준비할 것들이 있어서다.

그런 그가 이제는 슬슬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이다. 가만히 갈지혁을 바라보던 노후량이 입을 열었다.

“어딜 가려는 거냐.”

“해남파랑 백씨세가랑 붙거든.”

“해남파를 도우려고?”

“받을 게 있어서. 싸움을 빨리 끝내야 그걸 빨리 받을 수 있으니까.”

나이 차가 꽤나 나는 둘이다. 갈지혁은 상당히 젊지만 노후량은 노인에 가깝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둘은 마치 친우처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노후량도 불편하지 않았고, 갈지혁 또한 그러한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짐을 다 챙긴 갈지혁이 허리를 펴며 말했다.

“막으려면 지금 막아.”

“막아? 내가 널? 왜 내가 널 막아야 하지?”

“백씨세가를 돕던 몸 아니었나?”

“필요 없어. 어차피 돈 때문에 도운 거다.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고 해도 네놈하고는 싸우지 않는다.”

진심이다.

노후량의 눈빛은 그리 말하고 있었다. 갈지혁은 짐을 어깨에 둘러멨다. 적어도 이 사내라면…… 이곳에 있는 모두를 지켜낼 수 있을 게다.

단리문만 아니라면 해남도에서 그를 이길 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만약 단리문이 나타난다면 갈지혁이 있다고 해도 답은 바뀌지 않는다. 어차피 누가 있으나 상관없다는 소리다.

노후량은 눈을 잃은 대신 오감을 얻었다. 그런 그가 이제 눈까지 되돌려 받았다. 한층 더 날카로워졌음이 분명하다.

“부탁 받았으니 지켜준다. 단, 이번뿐이다.”

그는 자리에 앉은 채로 갈지혁을 올려다본다.

새롭게 빛을 되찾은 노후량의 눈은 무척이나 깨끗하다. 노인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생기도 넘친다.

갈지혁이 노후량을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덕분에 마음 놓고 갈 수 있어서 다행이다.”

“백씨세가는 만만치 않아. 아무리 너라도 방심하지 마라.”

“충고 새겨듣지.”

갈지혁은 가볍게 대꾸하고는 진법을 벗어나기 위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 안에 있는 이들은 이제 노후량이 지킬 것이다. 남은 거라고는 자신이 최대한 빠르게 백씨세가와의 일을 정리하는 걸 도와주는 거다.

이미 싸움은 시작되었을 것이다.

백씨세가는 서둘러 싸움을 하려고 움직였을 게 분명하다. 기선이 꺾인 상태에서 제압하려고 드는 건 당연한 거다. 거기다가 중간에 포로들이 모두 도망쳤다는 보고도 들었을 것이다.

그러한 사실이 해남파 무인들의 귀에 들어가기 전에 어떻게든 해결을 보기 위해 행동했을 거라고 갈지혁은 판단했다.

피해는 모른다. 제대로 정면 격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곽생이 모두가 살아 있다는 걸 알고 떠났다. 아마 두 세력은 소강상태로 기회를 엿보고 있을 거다.

‘서둘러야겠군.’

제대로 싸우기 전에 도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양쪽 모두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을 것이다. 그전에 도착한다면 갈지혁은 소수의 피해만으로 이 싸움을 끝낼 자신이 있었다.

진법을 벗어난 갈지혁은 몸을 틀었다.

곽생이 어디로 간다고 미리 일악천에게 언급해 주었고, 그건 갈지혁에게도 알려졌다.

“가볼까.”

갈지혁의 소매에서 사황이 고개를 내민다.

자잘하게 몇 번 마찰은 있었지만 지금 해남파와 백씨세가는 전면전을 펼치지 못하고 있는 입장이었다. 제대로 붙는다면 양쪽 모두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을 것이 분명해서다.

백씨세가의 가주인 백무령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세가의 머리라고 불리는 화문성만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머지 인물들은 고개조차 제대로 드는 자가 없었다.

백무령의 입 안에서 기이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뿌드득.

“대체…… 그 새끼는 우리에게 무슨 원한이 있다고 사사건건 방해질이더냐!”

다 성공한 일이었다.

해남파를 기습해 식솔을 모두 잡았다. 이 상태라면 싸울 의지를 갖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다 끝난 싸움이라고 생각하며 여유를 가졌다.

싸울 마음이 없는 자들과 싸워 질 리가 없었다. 자신있게 해남파의 정예 병력들을 몰아내기 위해 움직였다. 그리고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날아온 서찰에 백무령은 피가 머리로 쏠리는 기분이었다.

포로들이 모두 도망쳤단다. 한둘도 아닌 이백에 달하는 그 많은 자들이 전부 도망친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을까 해서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무인들을 그 일에 투입했다.

지금 해남도에서 백씨세가를 위협할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 포로들을 구해 냈다. 처음엔 어떤 놈들이냐고 길길이 날뛰었지만 이내 그게 한 놈이라는 말에 급기야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갈지혁…… 이노옴!’

갈지혁이었다.

단신으로 이백오십이 넘는 무인을 손쉽게 제압할 자는 갈지혁뿐이었다. 백무령은 급하게 해남파의 남은 자들을 정리하려고 했다. 사기가 꺾인 상태에서 제압해야 한다고 생각해서다.

그런데 어떻게 알아냈는지 슬슬 거리가 좁혀졌을 때 그들의 모습이 확 하고 바뀌었다.

아무런 힘도 없던 눈동자에 생기가 넘치기 시작했다. 그건 곧 자신들의 식솔이 구출된 것을 알았다는 소리였다. 바로 공격하려던 계획을 전면적으로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붙었다가는 승부를 장담할 수 없었다.

비록 많은 무인들을 육지에서 데려왔다고 하지만 상대는 해남파다. 구파일방의 하나인 그들의 저력은 얕잡아 볼 수 없었다.

백씨세가가 판단한 것보다 그들이 강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모든 것을 포기했던 자들이 다시금 희망을 가졌다. 그러한 자들은 위험하다.

가만히 있던 화문성이 조심히 입을 연다.

“시간이 없습니다.”

“알고 있네.”

모를 리가 있겠는가. 비록 백씨세가가 서둘러 고수들을 영입하기는 했지만 이들은 결국 돈에 의해 움직이는 자들이다. 언젠가 떠날지도 모르는 자들. 반면 상대는 몇 백 년을 자리 잡아온 해남도 최고의 무인들이다.

그리고 만약 갈지혁이 나타난다면…….

최악의 상황이다. 그가 나타난다면 싸움은 단번에 해남파 쪽으로 기울게 된다.

우습다.

단 한 명이라는 존재가 이렇게 크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동시에 분하기도 했다. 다된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 갑작스럽게 급변하였으니 어찌 마음이 편할 수 있겠는가.

백무령이 짜증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대체 그 단리문인가 뭔가 하는 놈은 갑자기 어딜 간 게야!”

꽤나 도움이 되는 자라고 생각했다.

해남파를 제압할 때 사용했던 독도 그가 준 것이었다. 무색무취(無色無臭)의 독으로 사람들이 내공을 쓰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면서도 신체에는 직접적으로 위협을 가하지 않는다.

무색무취이기에 해남파는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 독은 무공을 익힌 자들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은밀했다. 대단한 성과였다.

그 독 한 번에 해남파에 남아 있던 자들은 검 한 번 제대로 휘두르지 못했다.

단리문만 있었다면 지금쯤 어떻게든 총공세를 펼쳤을 게다.

화문성이 말했다.

“아직 그때 사용한 독이 남아 있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이 독을 사용하고 싸움을 거는 것입니다.”

“방법은 그것뿐이겠군…….”

시간을 끌어 봤자 다른 답이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독성이 강한 독이 아니라 다소 싸움이 버거워질지는 모르나 그래도 화문성의 말대로다. 단리문에게 받은 독을 아껴둘 때가 아니었다.

그가 말했다. 이 독은 일정 수준 이상의 무인에게는 통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해남파의 고수들은 당하지 않을 게다. 하지만 그 아래에 있는 자들은 아마 내공을 잃고 제대로 싸우지 못할 것이다. 그거로라도 만족해야 할 때다.

백무령은 결단을 내렸다.

“오늘밤, 해남파를 기습한다. 모두 준비하라!”

“존명!”

모여 있는 무인들의 목소리가 우렁차다.

야심한 밤이다.

해남파는 고립된 듯이 갇혀 있었다. 그것은 전부 며칠 전에 있었던 그 일 때문이다. 전면전을 펼치기 위해 문파 밖으로 나왔던 그들에게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해남파가 백씨세가의 기습에 의해 점령당했다는 소식 말이다.

그들의 얼굴에 수심이 깊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그곳에는 자신의 가족들이 있었다.

해남파의 무인들 중에서 일부는 가족과 함께 그곳에서 산다. 그렇다고 가족이 인질로 잡히지 않은 나머지 자들도 편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가족들도 그리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었다.

마음이 불편하다. 당장이라도 검을 놓고 가족에게 달려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갑자기 곽생이 사라졌다. 불안감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그런데 용하게도 이탈하는 자는 나오지 않았다.

해남파에 대한 자부심과 곽생이라는 장문인에 대한 믿음 탓이었다.

백씨세가는 점점 포위망을 좁혀왔다. 반격을 해야 하지만 지금 상태에서 붙어 봤자 싸움은 필패다. 뒤로 물러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해남파는 물러나야만 했다.

그때 그가 돌아왔다.

돌아온 곽생의 입에서는 믿어지지 않는 말이 나왔다.

갈지혁이 잡혀가던 해남파 무인들의 식솔을 모두 구해 냈다는 말이었다.

힘을 잃었던 그들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더군다나 비겁한 행동을 한 백씨세가에 대한 분노도 갑작스럽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먼저 움직일 수는 없었다. 장소가 좋지 않았던 것이다. 해남파는 백씨세가가 움직이는 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먼저 선공을 펼치면 불리한 자리다.

밤이지만 해남파의 경계는 철저했다.

한 번 당했지 다시는 당하지 않는다. 밤을 틈타 그들이 기습해 올 거라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화된 것이다.

사방에서 불을 붙인 나무를 들고 경계를 서고 있었다.

횃불을 들고 어둠을 응시하던 경계병들은 무엇인가 눈에 들어오자 서로를 급하게 바라봤다.

잘못 본 것이 아니다.

창창.

쇳소리도 들린다. 그리고 이어지는 발자국 소리는 분명 자신들의 귀가 잘못되지 않았음을 말해 주었다.

예상외다. 암습해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백씨세가는 정면으로 치고 들어왔다.

“적이다!”

한 번의 외침에 잠을 자고 있던 해남파 무인들이 모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들은 단숨에 검을 뽑아 들고 달려 나왔다.

곽생은 무리의 맨 앞에 서서 다가오는 자들을 바라보았다. 어둡지만 슬슬 그들의 윤곽이 제대로 드러났다.

“장문인, 뭔가 이상하오.”

“알고 있소.”

정면 대결은 피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백씨세가는 어둠을 틈타기는 했지만 암습이 아닌 정면으로 치고 들어왔다.

피해가 만만치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러는 건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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