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
24화
일악천은 갈지혁이 눈을 뜨는 것을 확인하기가 무섭게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억지로 버텼다.
여태까지 버틴 채로 갈지혁을 지켜본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스승님!”
갈지혁이 가부좌를 풀고 급히 그에게 다가갔다. 엎어져 있는 일악천을 품에 안은 채 그는 급히 맥을 짚었다.
목숨에 위험은 없다. 하지만…….
갈지혁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눈을 감고 있던 일악천은 자신의 볼에 닿는 갈지혁의 눈물에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왜…… 그러느냐.”
“스승님, 제가 못나서…… 저 때문에…….”
“헛소리. 내가 선택한 일이다. 네가 미안해할 건 없어.”
“스승님!”
갈지혁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참 일악천에게 받은 게 많다고 생각했다.
목숨을 구원받고, 그에게 다시금 꿈을 꾸게끔 해 주었다. 엄청난 무공도 가르쳐 주어 독황독립문에서 순탄하게 컸다면 결코 이르지 못할 경지에도 이르게 됐다.
그것은 평생을 갚아도 다 못 갚을 은혜였다.
그런데 그거로도 모자라 무인의 생명이라는 내공을 모두 받아 버렸다. 도대체 어떠한 것으로 일악천에게 이 모든 은혜를 갚는단 말인가.
“됐다. 울지 마라. 비록 내 내공을 모두 너에게 주었지만 사라진 것은 아니지 않더냐. 어차피 너를 위해 살기로 마음먹은 인생이다. 너에게 준다고 무에 그리 아깝겠느냐.”
일악천이 자신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갈지혁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나이를 먹고, 무림에서 알아주는 인물이 되었어도 여전히 스승 앞에서는 제자인 모양이다. 그렇게 울고 있는 자신의 제자를 일악천은 따뜻하게 어루만졌다.
갈지혁은 일악천을 천천히 내려놓고 허리를 굽혀 절했다.
고개를 들지 않았다. 눈물이 너무 쏟아져서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해야 한다.
갈지혁은 고개를 숙인 채로 일어나더니 다시 무릎을 굽혔다.
구배지례다.
예전 일악천과 헤어질 때 했던 구배지례를 지금 또다시 하고 있는 것이다.
한번 한번 고개를 숙일 때마다 갈지혁은 많은 것을 생각했다.
구배지례가 끝나자 그는 앉아 있는 일악천에게 다가갔다.
“스승님.”
“그래.”
“예전 사독문을 나설 때 구배지례를 하고 나서 말씀드렸습니다. 앞으로 그 누구에게도 허리를 굽히지 않겠다고.”
“그랬었지.”
“또다시 약속 하나를 하겠습니다. 앞으로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겠습니다.”
“상대가 단리문이라고 해도?”
“절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스승님뿐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입니다.”
일악천은 갈지혁을 올려다봤다.
내공을 모두 잃어 이제는 평범한 것보다 못한 신세가 된 그다. 그런 그가 웃음을 흘린다.
추하게 살아왔다. 흉한 외모를 감추기 위해 그보다 더한 악으로 살아온 인생이다. 이제…… 슬슬 쉴 때가 된 것 같다.
일악천이 웃음을 거두고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스승으로서 마지막 명이다.”
“하명하십시오.”
“단리문을 막아라.”
“그리하겠습니다.”
갈지혁은 단리문에게 패했다. 그것이 채 한 달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갈지혁은 그에게 패할 것 같지 않았다.
일악천이 벽에 손을 댄 채로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지혁이 급하게 그를 부축했다.
일악천은 아무런 말도 없이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나아갔다. 긴 계단이 눈앞에 나타났다. 내려오는 것은 빨랐지만 올라가는 것은 꽤나 걸릴 듯싶다.
시간은 많다. 그리고 갈지혁에게 하고자 했던 말도 있다.
“지혁아, 해 줄 말이 있다.”
계단을 밟고 올라가며 일악천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단화초에 관해서인데, 너에게 하지 않은 말이 있다.”
“……?”
꽤나 복잡한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일악천의 이야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길었던 어둠도 끝났다. 계단을 통해 걸어나온 둘을 본 무인은 기겁을 했다. 둘 모두 옷이 날아가 버리는 바람에 알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곳 지하 감옥의 입구 쪽에 있는 것은 단지 무인들뿐만이 아니었다.
갈지혁이 들어갔다기에 걱정스럽게 찾아온 사람들 또한 이곳에 있었던 것이다.
곽생과 곽소정, 현문, 노후량 이렇게 넷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둘의 모습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현문이 급하게 곽소정의 앞을 막아섰지만 이미 그녀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달아올라 버렸다.
“오, 옷을 가져다 드리거라.”
곽생의 말에 문을 지키던 무인 중 하나가 급하게 어딘가로 달려갔다.
갈지혁은 그제야 자신들이 알몸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크게 부끄럽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지금 그의 머리는 상당히 복잡했다.
일악천에게 들었던 단화초에 대한 이야기 때문이었다. 여태까지 듣지 못했던 단화초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 송이의 단화초가 피어나면 나머지들은 그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고. 그리고 그 한 송이가 사라지는 순간 사방에 단화초가 만개한다는 것을 말이다.
일악천은 그것을 확인하러 갔고, 있어야 할 단화초들이 없어졌다고 했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단리문의 소행 같다는 말도 전해 들었다.
‘위험하다.’
단화초의 독이라면 세상을 뒤흔들기 충분하다. 서둘러 단리문을 제압해야 한다. 그가 단화초의 독을 사용하기 시작하면 온 무림은 혼란에 빠져든다.
며칠 동안 일악천을 보살피고 나서 해남도를 떠나야 할 듯하다.
“무슨 일인가? 왜 저분은…….”
일악천의 몰골이 말이 아니게 되어 버렸다. 그런 그의 모습에 곽생은 다소 놀란 모양이다.
갈지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에게 내공을 모두 전해 주셨습니다.”
“……허허.”
곽생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지 그저 웃음만 흘렸다.
갈지혁이 이렇게 곽생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다. 이제 갈지혁은 해남도를 벗어나야 한다. 그러니 이제부터 일악천과 함께 있을 수가 없다.
이제 일악천은 보통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런 그를 가장 안전하게 보호할 만한 곳은 바로 이곳 해남파다. 구파일방의 하나, 그리고 해남도에 있기에 육지에서 벌어지는 일에서 가장 관련이 없는 곳이기도 하다.
해남파에 부탁을 하려면 적어도 지금의 상황을 알리는 것이 낫다.
그때 달려갔던 무인이 옷 두 벌을 가지고 와서 그들에게 건네주었다.
간단한 무복이었기에 몸이 불편한 일악천 또한 입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가만히 서 있던 노후량이 말했다.
“네놈…… 강해졌군.”
“그래.”
“이젠 정말 상대가 안 되겠어.”
“예전에도 내 상대는 아니었잖아?”
노후량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는 지금 내심 갈지혁의 변한 기도에 놀라 버렸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의 갈지혁은 대체 끝이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얼마나 더 강해진 것인지 감이 오지 않을 정도다.
“장문인, 며칠 있다가 찾아뵙겠습니다. 그때 해남파에 조금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그러게. 많이 피곤한 듯 한데 어서 가게나.”
곽생은 잡지 않았다. 둘 모두 무사한 듯하고, 갈지혁이라는 자는 더 강해졌단다. 그때 봤던 무위만으로도 놀랐는데 일악천의 내공까지 모두 전수받았다고 한다.
만약 곽생이 육지에 있는 다른 거대 문파였다면 결코 갈지혁을 적으로 두지 않을 게다.
그는 이미 구파일방이라고 해도 건드릴 수 없는 위치에 올라 버린 것이다.
갈지혁의 부탁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해 줄 수 있는 일이라면 무조건 해 줄 것이다. 그만큼 해남파가 갈지혁에게 입은 은혜는 커다랬기에 말이다.
갈지혁은 일악천을 부축한 채 그렇게 걸어갔다.
모두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즈음에 갈지혁이 입을 열었다.
“스승님.”
“왜?”
“많이 늙으셨습니다.”
“나이를 먹었으니까.”
나이도 나이이지만 내공을 전수해 준 타격이 컸다. 단 하루 만에 일악천은 폭삭 늙어 버렸다.
“스승님.”
“또 왜?”
“업어드려도 되겠습니까?”
“이놈이 이제는 스승을 애 취급을 하는구나. 어, 어어, 이놈 봐라?”
갈지혁은 일악천이 승낙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업어 버렸다.
일악천은 그리 말하기는 했지만 갈지혁이 자신을 업고 걷기 시작하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스승과 제자는 걸어갔다.
‘놈, 많이 컸구나.’
사독문을 떠나보낼 때 이젠 다 컸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또 더 더욱 그렇다.
갈지혁은 일악천에게 아들이었다.
이제는 훌쩍 커버려 자신을 넘어 버린 아들을 바라보는 아비처럼 그는 그렇게 갈지혁을 내려다보았다.
* * *
일악천은 힘을 찾았다.
물론 무인으로서의 힘은 내공이 모두 사라졌으니 불가능하다. 이제 스스로 거동이 가능한 정도지만 그것만으로 일악천은 충분한 모양이다.
일악천을 보살피는 동안 갈지혁은 중원에 대한 정보를 긁어모았다.
역병이 커졌고, 점점 무림도 그 사안을 심각하게 보는 듯했다. 그리고 이런저런 곳에서 소란이 일면서 무림은 꽤나 시끄러워졌다.
갈지혁은 일악천에게 줄 약재를 달였다. 그렇게 약을 달이는 중에 문을 열고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왜 나오셨습니까?”
“답답해서 말이야.”
일악천은 그곳에 주저앉아 하늘을 올려다봤다. 내공을 모두 잃었는데 그는 상심하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악천은 후련한 표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물론 무인이었던 일악천이니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생활 하나하나가 불편해졌다. 그리고 종종 자신의 나약함에 한숨도 나오곤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버린 대신 이러한 평화를 얻었다. 물론 아직 진정한 평화는 아닐지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너무나 마음이 고요했다.
가만히 약을 달이던 갈지혁을 바라보던 일악천이 입을 열었다.
“지혁아.”
“말씀하십시오.”
“슬슬 떠나거라.”
“…….”
가려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다만 침상에 누워 있는 일악천을 보면서 하루하루 자신도 모르게 출발을 늦췄을 뿐이다.
그런 갈지혁의 마음을 일악천은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 때문에 너무 시간을 버렸어.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일이었는데.”
“알겠습니다. 오늘 해남파의 장문인을 만나고 내일 떠나겠습니다.”
“그래.”
말을 마친 일악천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갈지혁은 가만히 앉아 다시금 약을 달이기 시작했다.
이제 다시금 중원으로 나가야 한다.
책상에 앉아 있던 곽생은 누군가의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문 근처에서 시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셨습니다.”
“들라 해라.”
시비가 문을 열었고, 그녀의 옆으로 갈지혁이 걸어 들어온다. 곽생은 보고 있던 서찰을 접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거야 원, 같은 곳에서 지내는데 얼굴 보기가 꽤나 힘들군.”
보름 전쯤 헤어진 이후 곽생과 갈지혁은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그만큼 갈지혁이 일악천의 곁에만 있었다는 소리다.
“자리에 앉게. 차는…….”
“됐습니다.”
차를 마시는 걸 그리 즐기지 않는다. 그리고 이야기를 길게 할 생각도 없었다.
자리에 앉은 갈지혁은 바로 입을 열었다.
“내일 이곳을 떠날 겁니다.”
“꽤나 급하게 가는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겐가?”
“막아야 될 자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막아야 될 자라…….”
갈지혁이 무엇을 하려는지 곽생은 모른다. 하지만 물어보기도 뭐하다.
그가 하려는 일에 대해 곽생은 간섭하기도 뭐한 상황이었다.
“제가 뵙고자 한 것은 부탁드릴 게 있어서입니다.”
“뭐든지 말하게. 내 자네 부탁을 들어주지 못하겠는가.”
“저의 스승님을 보살펴 주십시오.”
“일수만독 어르신을?”
“예.”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기에 곽생은 잠시 당황했다.
물론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의 정체가 다소 걸리기는 하지만 그걸 아는 이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정체를 아는 자들 모두 입이 무거우니 소문이 날 우려도 없었다.
“이제부터 어려운 싸움을 해야 합니다. 스승님을 지켜 드릴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해남파라면 저희 스승님을 안전하게 지켜 드릴 수 있을 테니까 부탁드리는 겁니다.”
“그거야 그렇지.”
곽생 또한 해남도의 장점을 알고 있었다.
육지와는 떨어져 있으니 그만큼 위험한 요소들도 적다는 거다.
“한 가지 물어도 되겠는가?”
갈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막으려고 하는 자가 누구인지 물어도 되겠는가?”
“단리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