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
25화
“단리문?”
생소하다.
너무나 낯선 이름이기에 반문한 것이다. 비록 해남도에 있다고 하지만 섬 밖의 일에 완전히 무지한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소식은 곽생 또한 전해 듣고 있었다.
그런 그가 생전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얼마 전 무당파 무인들을 도륙한 놈입니다.”
“아, 이야기는 들었네만 그자의 이름이 단리문이라고? 그런데 자네가 왜 그자를…….”
“천하를 망가뜨릴 놈이니까.”
“허허. 무슨 일이 있었나 보군.”
자세한 이야기는 묻지 않으련다.
갈지혁의 표정도 좋지 않았지만 그것 외에도 너무 많은 걸 묻는 것은 실례라고 생각해서다. 그냥 갈지혁이라는 사내가 악한 짓을 하려고 떠나는 것이 아님을 안 것이면 족하다.
참 이상했다.
갈지혁이라는 자에 대한 중원의 소문은 무척이나 안 좋았다. 그에 반해 곽생이 본 갈지혁은 소문과는 많이 다른 사내였다.
그의 강함은 사실이었지만 갈지혁이라는 자는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점창파의 장로들을 암습해서 죽였다는 말을 이제는 아예 믿지 않을 정도가 되어 버렸다.
갈지혁은 그러한 짓을 할 자가 아니었다.
곽생이 그를 바라보며 슬쩍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꽤나 맘에 들던 사내였다.
곽생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혹 무슨 일이 생기면 나에게 연락하게. 내 해남파 무인을 이끌고 육지로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자네를 돕지.”
“말이라도 감사합니다.”
“빈말로 듣지 말게. 난 진지하니까.”
곽생이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도움이었다.
백씨세가가 다시 움직일지도 모르는 마당에 무인들을 빼서 도와준다는 것이다.
갈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중에 보답하겠습니다.”
“아닐세. 우리가 받은 것이 더 많은데 보답은 무슨.”
“그럼 이만.”
갈지혁이 목례를 하고는 장문인의 방을 나섰다.
그가 나가자 곽생은 의자에 몸을 파묻은 채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가 해남파에 나타나고 많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매번 그때마다 갈지혁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다.
무사하기를 바란다.
“거참…….”
어린 나이에 정말 많은 것을 짊어지고 걸어가는 사내다, 갈지혁은.
* * *
또다.
또 일악천의 옆을 떠나게 됐다. 사독문에서 헤어지던 그날 아침처럼 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갈지혁은 자신의 짐을 들었다.
일악천은 마당에 있는 의자에 앉은 채로 제자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갈지혁이 그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슬슬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때 가만히 서 있던 갈지혁이 갑작스럽게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더니 눈을 가리고 있는 머리를 뒤로 틀어 넘겼다. 그대로 그는 머리를 뒤로 묶어 버렸다.
얼굴에 검상 하나가 있긴 하지만 무척이나 빼어난 외모다.
갈지혁이 다시금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것이다.
“허허허. 고민이 사라졌느냐?”
“예. 더는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릴 이유가 없을 것 같습니다.”
“…….”
“너무 오래 걸렸습니다. 이제 다시는 저에 대해 망설이지 않을 것입니다.”
시원한 이목구비다. 얼굴을 감추고 있었을 때와는 달리 사람이 밝아 보인다.
갈지혁은 잠시 일악천을 바라봤다. 자신이 없으면 얼마나 불편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많은 것을 받은 만큼 해야 할 일도 많았다.
그는 그렇게 몸을 돌렸다.
이제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다음에 일악천을 마주할 때는 약속한 대로 단리문을 쓰러뜨리고 난 후다.
몇 발자국 걸어가던 갈지혁이 갑자기 멈칫했다.
그가 가만히 있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아버지.”
“……그래, 하나뿐인 내 아들아.”
태어나서 생전 처음 뱉어 보는 말이다.
아버지라는 그 한마디.
언젠가 한 번…… 말해보고 싶었다.
갈지혁이 웃으면서 걷기 시작했다.
* * *
갈지혁이 해남파를 떠났을 무렵 중원에는 일이 벌어졌다.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독황독립문!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그들이 중원을 향해 다시금 이빨을 들이밀었다. 엄청난 준비로 무장되어 있었는지 그들은 빠르게 치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청성파가 쓰러졌다. 그것은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구파일방은 급히 무림맹을 소집하여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하지만 독황독립문의 독 앞에 그들은 제대로 방비도 하지 못하고 연전연패를 거듭했다.
일방적으로 치고 올라오던 그들을 제지한 것은 바로 사천당가였다. 그들이 싸움에 개입한 것이다.
사천당가가 개입하면서 독황독립문의 독은 예전만큼 위력을 내지 못했다.
사천당가가 시간을 벌자 청해에서는 곤륜이, 섬서에서는 화산과 종남이 나섰다.
감숙에 있는 공동파까지 움직였건만 가장 중요한 소림과 무당이 아직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막상 독황독립문과 전쟁이 터지자 사천당가의 위상이 급부상했다. 그들이 아니면 독을 막아 낼 치료제를 만드는 것이 상당히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디나 마찬가지였다.
전쟁이 많으면 무관이 힘을 지니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과 같은 이치로 지금 사천당가는 정파무림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싸움은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진정한 세력은 모습을 감춘 채로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쏴아아.
시원한 바람이 콧잔등을 스치고 지나간다. 자리에 누워 있던 사내가 슬슬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나타났는지 노인 한 명이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언제 돌아갈 생각이냐?”
“때가 되면 돌아가겠습니다.”
“무림이 시끄럽다.”
“저와는 상관없지요.”
“모자란 놈! 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게냐?”
버럭 소리를 지르는 노인은 화산파의 장로로 그 위치가 화산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자였다. 그런 그가 이토록 성을 내는 사내는 누구란 말인가.
“무슨 소리십니까? 전 낙화검입니다. 싸움터보다는 이런 곳이 어울리지요.”
“난세는 영웅을 만든다 하였다. 지금이 바로 네 진면목을 보여 줄 때다.”
“제 길은 제가 알아서 걸어갑니다. 다시 연락드리지요.”
“아직도 갈지혁이라는 놈 때문에 이러고 있는 것이냐? 멍청하게 그런 별 볼일 없는 놈 하나 때문에 인생을 망칠…….”
장로는 끝까지 말을 맺지 못했다.
가만히 있던 진검백의 몸에서 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놀랍게도 진검백의 몸에서 붉은색의 기운이 슬슬 피어오른다.
‘이, 이놈, 자하신공을 이미 대성했단 말인가?’
자하신공(紫霞神功)!
화산파 장문인에게만 전해진다는 심법이다. 그런 것을 진검백이 익히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장로 또한 애초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수뇌부 몇 명만이 아는 비밀이지만 이 장로는 그 몇 명에 속하는 자였던 게다.
이 신공을 일으키면 몸에서 자색의 기류가 흐른다고 한다. 그것이 너무나 아름다워 넋을 잃기까지 한다고는 하지만, 실상 그것은 죽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만큼 자하신공은 독보적인 심법이었다.
진검백이 살기를 거두면서 말했다.
“이만 가시죠.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니까.”
“어, 언젠가 오늘을 후회하게 될 게다, 흠!”
장로는 성난 얼굴로 몸을 홱 하니 돌리고 사라졌다. 가만히 앉아 있던 진검백이 손을 뻗어 풀을 뜯었다.
그의 시선이 먼 하늘로 향한다.
“슬슬 올 때가 됐잖아? 언제 돌아오려고 아직도 감감무소식이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검백은 등 뒤에 메고 있던 것을 풀었다. 확 하니 풀린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기 시작했다.
독왕대로행(毒王大路行)!
깃발에 적힌 글씨가 힘차게 그 위용을 뽐낸다.
“어서 오라고. 이 깃발이 어울리는 건 내가 아닌 너니까 말이야.”
갈지혁이 해남도로 간 지 두 달이 훌쩍 넘어 버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진검백은 광서성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분명히 돌아온다.
진검백은 그리 믿었다.
아직 갈지혁과 자신의 인연은 끊어지지 않았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슬슬 내려가 볼까.”
진검백은 그렇게 마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진검백은 익숙한 발걸음으로 마을에 있는 객잔을 찾았다. 이제 점소이도 그가 눈에 익은지 아무런 말도 없이 소면을 가져다준다.
이 마을이 바로 갈지혁과 헤어졌던 그곳이다.
소면 한 그릇을 게 눈 감추듯이 해치운 진검백은 바다로 나갔다.
바닷바람이 상당히 기분 좋았다.
“나도 늙어서는 바다에서 살아야겠어.”
그가 히죽 웃으면서 말했다.
바다는 언제나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랬기에 진검백은 바다를 보면 마음이 편해졌다.
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아직도 여기 있었어요?”
“여어.”
몸을 돌린 진검백은 운하연을 발견하고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옆에는 풍객이 서 있었다. 진검백은 그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언제 올 줄 알고 기다리는 거예요.”
“그러는 운 소저도 마찬가지 아니오.”
“그러게요. 저희 둘 다 바본가 봐요.”
갈지혁이 떠났을 때 둘은 우선 북쪽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채 하루도 되지 못해서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그 후에는 같이 행동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같은 곳에 자주 오다 보니 이렇게 마주치는 경우가 허다했다.
“언제 올까요?”
“글쎄…… 무신경한 놈이라 좀 늦을 것 같기는 하오.”
“무림이 시끄러워요. 독황독립문이 움직였다고 하는데 갈 소협이 와 줬으면 좋겠네요.”
운하연은 약선문에 명령을 내려놓았다. 그들은 이미 정파무림을 도와 해독약을 만드는 것에 전념하고 있었다.
하지만 운하연은 아직도 갈지혁을 기다렸다. 역병이 더 더욱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무인의 목숨도 귀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목숨 또한 같은 무게를 지닌다.
적어도 그녀 하나는 그런 역병과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끼이이!
남해도에서 떠난 배 한 척이 막 항구에 들어섰다. 그렇지만 진검백과 운하연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하루에 이곳을 드나드는 배가 한두 척이 아니다. 처음엔 일일이 살펴보기도 했지만 이내 지쳐 버렸다.
진검백은 땅바닥에 앉아 바다를 바라봤다. 그의 어깨에 멘 깃발을 운하연이 쳐다봤다.
그날 이후 진검백은 잠시도 저 깃발을 손에서 떼어 놓지 않고 있었다.
“언제까지 기다릴 거예요?”
“아, 뭐, 해가 질 때까지.”
“그게 아니고 앞으로요. 앞으로 얼마나 더 기다릴 거냐고 묻는 거예요, 전.”
“음…… 그놈이 올 때까지 기다릴 생각인데.”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진검백이 말했다.
그런 그를 보며 운하연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바보는 아니다. 그렇지만 종종 이럴 때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문제는 농담이 아닌 것 같다는 거다.
정말 이자는 평생을 기다려서라도 갈지혁을 만나려고 하는 것만 같았다.
운하연을 바라보며 웃고 있던 진검백의 표정이 갑자기 굳었다.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풍백은 그의 이상한 행동에 무슨 일이 벌어졌나 하고 자신의 병기에 손을 가져다 댔다.
갑자기 진검백이 등에 메고 있던 깃발을 뽑았다.
그가 깃발을 묶고 있던 줄을 끊어 내자 다시금 ‘독왕대로행’이라고 적힌 글씨가 하늘을 향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단번에 이쪽으로 향했다.
“이, 이게 무슨 짓이에요. 그만 해요, 사람들이 다 보잖…….”
말을 하면서 진검백이 바라보는 쪽으로 시선을 돌린 운하연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져 갔다.
낯이 익은 뒷모습이다.
그자가 옆으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한다. 진검백과 운하연 모두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은 없다. 하지만 몰라볼 리가 없었다.
저렇게 흑의가 잘 어울리는 사내는 바로 그뿐이다.
진검백이 깃발을 펄럭이면서 소리를 내질렀다.
“야! 임마!”
등을 돌리고 있던 사내가 몸을 돌린다.
얼굴 가운데 검상이 있지만 무척이나 빼어난 외모의 미남자다.
사내의 표정이 잠깐 흔들리는 듯싶더니 이내 무표정하게 변한다.
그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면서 입을 연다.
“이게 무슨 짓이야, 멍청아.”
갈지혁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