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왕전설-179화 (179/200)

# 179

4화

무림맹에서 갈지혁이 어떠한 존재인지 누구보다 잘 안다. 아직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갈지혁은 독황독립문의 인물이기도 하다.

다른 것도 아닌 독황독립문과 싸우는 일이니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밝혀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거기에 무림공적이기도 한 자이거늘 그런 자를 같은 우리 안에 두려고 할 리가 없다.

난처한 부탁이지만 당려환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결코 아무 생각도 없이 그 같은 부탁을 할 사내가 아님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물론.”

“말해 줄 건가?”

“상관없습니다.”

갈지혁은 어렵지 않다는 듯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 길게 이야기를 할 여력이 없었는지 갈지혁은 해남도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단리문과의 만남. 그리고 패배.

그가 단화초를 가지고 사라졌다는 말에 당려환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당려환 또한 독인의 길을 걷는 자다.

그가 단화초가 어떠한 물건인지 모른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그런 지독한 독이 상대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을 들으니 표정이 굳는 건 당연하다.

“놈은 독황독립문을 조종합니다. 그놈을 잡기 위해서는 무림맹이 져서는 안 되지요. 그렇지만 제가 없으면 단리문은 아무도 못 막습니다.”

“……젠장! 그 무림맹의 고리타분한 놈들을 어떻게 설득시켜야 할지 모르겠군.”

당려환 또한 갈지혁이 필요하다는 걸 느낀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이들도 같을 거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단화초의 위험을 골백번은 설명할 수 있다. 그래도 그들은 갈지혁과 함께하려 하지 않을 게다.

아무리 말해도 한 번 보거나 접하지 못한 것은 몸에 와 닿지 않는 법이다. 더군다나 독인에 대한 정파인들의 시선이 최고조로 좋지 않을 때다.

“저의 필요성을 강조하면 됩니다.”

“생각해 둔 게 있는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애초부터 막무가내로 무림맹에 들어가겠다고 우길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당려환의 입장이 곤란해질 거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갈지혁은 병 하나를 꺼내 당려환에게 건넸다.

“이건…….”

“오는 길에 독황독립문 무리들을 만났습니다. 놈들이 가지고 있더군요.”

“독이로군.”

살짝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당려환은 이것의 정체를 확인했다.

갈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무색, 무취, 무미.”

“이 독이 어떻다는 겐가?”

“지금 무림맹을 향해 식량이 오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설마…… 식량을 노린단 말인가?”

“그렇다고 하더군요.”

“젠장, 앉아서 당할 뻔했군.”

만약 그 식량이 그대로 무림맹 무인들의 입으로 들어왔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게다. 물론 사전에 알아차렸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다소 희박하다.

음식을 만드는 주방까지 절정고수들이 드나들 일이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맛도, 향도, 색깔도 없으면 더더욱 알기는 힘들다. 그때 갈지혁이 말했다.

“오는 동안 보니 불에 닿기 전에는 독성도 발휘되지 않더군요.”

“불에 올린 순간 독성이 발휘된다는 건가…….”

“그것도 먹고 나서 바로도 아닌 반 각가량이 흐른 후에 발작이 시작됩니다.”

당려환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갈지혁이 나타나 이 사실을 말해 주지 않았다면 모여 있는 무인의 반 수 이상이 죽는 참변이 일어났을 것이다.

“이걸 이용하겠다?”

“그렇습니다.”

“나름 괜찮은 방법이기는 한데.”

다소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는지 당려환은 고심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러자 갈지혁은 준비해 둔 다른 한 수를 생각했다.

“하나 더 있습니다.”

“뭐지?”

“이겁니다.”

갈지혁은 또 다른 병을 꺼내 들었다. 당려환은 그것이 뭐냐고 묻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갈지혁이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몇 명을 이 독으로 중독시켜 주시면 됩니다.”

“뭐야!”

조용조용하게 이야기를 하던 당려환의 목소리가 갑작스럽게 높아졌다. 그만큼 갈지혁의 말은 그를 놀라게 한 것이다.

금세 침착성을 되찾은 당려환이 따지듯이 물었다.

“독에 중독시키라고? 그게 무슨 짓인가.”

“해독약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저뿐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천당문에서 그 해독약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제가 만들어 내는 것이지요.”

“…….”

당려환은 망설이는 듯했다.

어떠한 생각을 하고 이러한 계획을 짰는지 이제는 알 것 같다. 그리고 나름대로 먹힐 거라는 것도 안다.

독황독립문이 이러한 독을 썼는데 해독약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갈지혁뿐이라는 걸 강조하라는 거다. 그렇게 된다면 무림맹 입장에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갈지혁과 손을 잡아야 할지도 모른다.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성공할 확률은 오 할 이상이다.

그렇지만 왠지 모르게 망설여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가만히 있던 갈지혁이 그의 마음을 잡기 위해서 말했다.

“제가 없으면 단리문은 아무도 못 막습니다. 그걸 위해서 연기를 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후우, 내가 어쩌자고 너와 이런 연을 맺게 됐는지.”

한숨을 쉬고는 있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다는 걸 갈지혁은 잘 알고 있었다.

당려환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승낙한 것이다.

“그럼 작전을 짜보지요.”

갈지혁은 애초에 자신이 생각한 것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정파의 수뇌부들이 모였다.

갑작스럽게 사람들이 모인 것은 다른 두 개 문파의 합류 때문이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무당과 소림이 드디어 사천에 도착해 이곳까지 온 것이다.

무당파의 무인들을 이끌고 온 것은 바로 장문인인 청허검 무진악이다. 그리고 소림사를 이끌고 온 것은 오랜 시간 면벽수행에 들어섰던 방장인 담자(談子) 대사였다.

담자를 오랜만에 보게 된 많은 사람들은 먼저 고개를 숙였다.

“허허, 다들 오랜만입니다.”

“맹주님이 오시니 이제야 뭔가 정파 수뇌부들의 자리 같은 느낌이 듭니다.”

화산파 장문인인 독고문이 웃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 말에는 은연중에 무진악에 대한 질타의 감정이 감춰져 있었다.

비어 있는 담자의 자리를 맡은 채로 무진악이 행했던 행동들은 독고문에게는 불만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와 비슷하게 생각하는 이는 꽤 있는 듯했다.

점창파의 장문인인 소절상을 바라본 담자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미타불, 고초가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아닙니다.”

실제로 소절상의 얼굴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해져 있었다.

점창파의 장문인으로 언제나 당당했던 그였지만 갈지혁에게 문파 자체가 흔들린 후로는 많이 위축된 듯하다.

한 사람씩 얼굴을 살피던 담자 대사의 눈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바로 당려환에게였다.

“당문의 가주 덕분에 이렇게 정파의 목숨이 붙어 있는 겁니다. 추후에 후하게 보답하지요.”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당려환이 겸손하게 대답했다. 그렇지만 그의 머리는 꽤 빠르게 구르고 있었다.

오늘 이 자리가 생길 것을 알고 며칠 동안 갈지혁이 몸을 감추고 있도록 했다.

그리고 정확하게 회의 시간과 장소까지 갈지혁에게 말해 주었다.

무인들이 주변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지만 갈지혁은 스스로 알아서 한다고 했다.

수뇌부들의 회의이니 주변을 지키고 있는 자들 모두가 고수인 것은 당연하다.

웬만한 절정의 고수라도 밖에 있는 모두의 눈을 속이고 이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그런데 왠지 갈지혁이라면 가능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갈지혁이 이곳에 나타난 후에 준비한 일들이 하나씩 터질 것이다. 그 후부터는 하늘에 맡길 수밖에.

꽤 많은 자들이 모였다.

정파를 대표하는 장문인들이 모였다.

이곳에 자리하지 않은 것은 개방의 방주인 걸왕과 해남파의 장문인이다.

거기에 오대세가 중에서 세 개가 이 자리에 있다.

남궁세가, 사천당문, 진주언가.

그리고 조만간 하북에 있는 하북팽가도 힘을 합치러 이곳에 올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이 정도로도 정파의 모든 힘이 집결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진악이 헛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소림과 무당이 오기 전까지 버텨주신 다른 문파의 장문인들에게 노고를 표하오. 하지만 이제 소림과 무당이 왔으니 우리가 몰아쳐야 할 때요!”

그가 호언장담을 하듯이 소리쳤다.

독고문은 맘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내분을 야기할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던 담자 대사가 입을 열었다.

“개방이 없습니다.”

“아, 그것이…….”

청성파 장문인인 엄일성(儼溢性)이 곁눈질로 무진악을 바라봤다. 걸왕은 무진악과 갈지혁의 문제로 싸운 이후 무림맹의 일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그 탓에 초반에 얼마나 큰 타격을 입었던가.

개방의 귀는 그들에게 가장 큰 정보통이었다.

어차피 그들은 거지다.

독황독립문이 중원을 장악하든 말든 크게 신경을 쓰지 않겠다는 듯한 자세로 나오는 것이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거늘 담자 대사는 대충 상황을 눈치챘다.

그가 말했다.

“서신을 보내야겠습니다. 개방이 없는 싸움이라니요. 그건 불가능한 일이지요.”

개방 없이 싸워서는 안 된다.

정보라는 것은 눈과 귀다.

눈과 귀가 없이 어떻게 싸움을 시작한단 말인가. 여태까지 개방 없이 싸운 것이 오히려 더 용하다.

무진악은 내심 불쾌했지만 다른 이도 아닌 담자 대사가 한 말이다. 소림사의 방장인 그는 무진악이 함부로 할 상대가 아니다.

가장 먼저 선봉에서 사천당문과 함께 싸웠던 청성파의 장문인 엄일성은 현재의 상황에 대해 담자 대사에게 설명했다.

그간 있었던 일과 현재의 상황. 그리고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나름대로 소견을 말했다. 담자 대사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냥 이야기만 들었다.

한참 이야기를 듣던 그가 처음으로 꺼낸 말은 다소 상황과 동떨어진 말 같았다.

“신중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이상한 말이 아니었다. 그 갑작스러운 말속에는 깊은 생각이 들어 있었다.

담자 대사는 독의 무서움을 안다.

그는 몇십 년 전 벌어졌던 독황독립문과의 싸움에 참전했었다. 일수만독 일악천의 무위를 본 자라는 소리다.

담자 대사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그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았다.

단 일 수에 수백 명이 나자빠지며 피를 토했다. 마음만 먹는다면 단신으로 온 중원과 싸울 것만 같았던 그 사내.

곱사등이에 추한 외모였지만 아무도 그를 보고 비웃지 못했다.

오히려 일악천이 나타났다는 말만 들리면 정파의 수뇌부들이나 마교나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그와는 싸우지 말라는 말이 생겨 버릴 정도였다.

“섣부르게 움직였다가는 모두가 독에 당합니다.”

“그렇지만 지금의 전력은 저희가 우세입니다. 차라리 이 기회에 사천에서 아예 놈들을 몰아내는 것이…….”

무진악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렇지만 담자는 그저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무진악의 생각이 틀린 게 아니다. 사천을 토대로 계속 싸워 봤자 점점 손해를 보는 것은 이쪽이다. 서둘러 그들을 운남으로 몰아내고 몰아쳐야지 이 싸움은 끝난다.

그렇지만 아직은 섣부르게 움직일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우선은 시간을 두고…….”

중얼거리던 담자 대사가 말을 멈췄다.

바깥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누구냐!”

무진악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 누가 장문인들의 회합에 끼어든단 말인가.

다른 장문인들의 표정 또한 무진악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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