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
7화
모든 일이 갈지혁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랬기에 저절로 알게 된 것이다.
단화초를 쫓는 단리문이 갈지혁을 바라봤고, 역병을 뒤쫓는 운하연이 동료가 되었다.
“어쩌다가 단화초와 관련된 싸움에 말려들었더니 저절로 알게 되더군요.”
“그렇다면 단화초를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건…….”
“접니다.”
“역시.”
예상했던 대답이었는지 담자 대사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대신 그는 담담한 어조로 갈지혁에게 물었다.
“단리문이라는 자를 만나 보았습니까?”
“어렸을 적에 한 번, 그리고 해남도에서 한 번 만난 적이 있지요.”
갈지혁은 감추지 않았고 담자 대사는 더 파고들지 않았다. 어차피 하고 싶은 말은 여기서 끝났다.
담자 대사와 갈지혁이 할 말은 다 끝났다.
그는 일부러 식량에 타지는 독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건 며칠 후에 써먹어야 할 갈지혁의 무기인 것이다.
갈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가보도록 하죠.”
“그러시겠습니까? 거처는 당 가주께 부탁드리지요.”
“알겠습니다.”
당려환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그가 갈지혁을 보면서 차갑게 말했다.
“가자.”
“그러죠.”
담자 대사를 뒤로하고 둘은 밖으로 걸어나왔다. 회의 장소를 빠져나오고서도 둘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어설픈 연기는 화를 부른다.
한번 시작한 연기인 이상 끝까지 속여야 한다.
* * *
무림맹이 상당히 시끄러웠다.
다름 아닌 갈지혁이라는 존재가 무림맹과 함께하게 되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젊은 사람들은 오히려 갈지혁의 등장을 환영했지만 나이 든 이들은 아니었다.
그들이 크게 반발했다.
하지만 이미 정해진 일이고, 얼마 전에 갑작스럽게 퍼졌던 독황독립문의 독을 해독할 수 있는 게 갈지혁뿐이라는 것도 알려졌다.
울며 겨자 먹기로 함께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함께하게는 됐지만 시선까지 고울 수는 없는 법이다. 사람들의 갈지혁을 바라보는 눈이 따갑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는 그러한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갈지혁은 역시나 사천당문과 함께 머물렀다. 겉으로는 독에 관련된 자이기에 함께한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당려환이 갈지혁과 가까이 있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을 벌이든 간에 가까울수록 유리한 법 아닌가.
갈지혁은 방 안에 처박힌 채로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독황독립문은 아직 움직이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은 적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독황독립문은 무림맹의 무인들이 집결해 있는 이곳으로 들어오는 식량에 독을 풀었다. 그 독이 퍼지는 때가 그들이 움직일 순간인 것이다.
방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지만 수시로 식량들의 이동로를 확인하는 건 놓치지 않았다.
예상이 맞다면 오늘 오후 즈음에는 이곳에 식량을 실은 마차들이 도착할 게다.
갈지혁은 땅에 앉은 채로 두 눈을 꾹 감고 있다. 그의 몸에서 녹색의 기류가 흩어져 나온다. 그렇지만 그것은 주변의 그 어떠한 것에도 피해를 입히지 않았다.
독의 제어가 완벽의 경지에 들어선 것이다.
만약 단화초의 기운이 조금이라도 흩어졌다면 방 안에 있는 것은 모두 녹아 버렸을 게다.
닫혀져 있던 갈지혁의 눈이 뜨였다. 순간 앞에 놓여 있던 커다란 책상이 먼지로 변하면서 사라졌다.
공기 중으로 퍼졌던 독의 성분이 원하는 순간 하나가 되어 책상을 녹여 버린 것이다.
심검(心劍)이라는 말이 있다.
마음이 이는 곳에 곧 검이 있는 경지로 무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경지다. 그리고 비록 검을 든 것은 아니지만 갈지혁이 그 심검의 경지에 들어선 것이다.
원하는 곳에 바로 독으로 뒤덮을 수 있는 경지로 세상 그 누구라고 해도 갈지혁의 손을 피할 수 없을 것만 같다.
가부좌를 틀고 있던 그가 다리를 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지혁은 침상에 앉더니 무엇인가를 꺼내 들었다. 그는 꺼내 든 것을 손으로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갈지혁은 지금 옷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독인에게 옷이라는 것은 무인의 검과 비견될 정도로 중요한 것이다. 가장 은밀하게, 그리고 많은 독을 숨길 수 있는 옷이 필요하다.
아무리 독공이 극성에 올랐다고 해도 갈지혁은 꼼꼼하게 모든 것을 준비했다.
단리문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그 또한 단화초의 독성을 몸으로 흡수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고 한들 갈지혁은 질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단화초의 독은 가장 먼저 피어 있는 한 송이에 전부 흡수당한다. 뒤늦게 핀 단화초의 독성은 처음 것의 반도 되지 못할 게다. 그리고 가슴속에 충만한 내력도 있다.
몇십 년간 쌓아온 일수만독 일악천의 순수한 내력이다.
독으로 다져진 그의 내력은 다른 자들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갈지혁에게 도움이 된다.
가만히 앉아 있던 갈지혁은 찾아온 손님 탓에 문을 열어 주기 위해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곳에 온 손님이라면 분명 뻔하다.
진검백이나 운하연, 풍백, 그것도 아니라면 당려환일 게다. 예상은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았다.
문을 두드리려던 진검백은 문이 활짝 열리자 애매한 자세로 서 있었다.
“뭐 하는 거냐?”
“그러게. 하하.”
진검백이 웃으면서 방 안으로 성큼 들어온다. 그러면서 그의 눈이 주변을 살핀다.
진검백이 빠르게 말했다.
“식량이 곧 도착한다더군. 동문(東門)을 통해서 들어온다니 그쪽으로 가라더군.”
직접 와서 이야기를 하기 뭐했는지 당려환이 진검백에게 부탁했던 모양이다.
본론을 전한 진검백이 바로 크게 목청을 높이면서 말했다.
“심심하지도 않아? 매일매일 처박혀서 뭐 하는 거야. 나랑 잠시 외출이라도 하자고!”
가만히 서 있던 갈지혁의 소매를 잡고 진검백이 잡아당겼다. 그가 눈을 찡긋하면서 신호를 주자 갈지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끌려 나갔다.
진검백은 그를 이끌고 동문을 향해 걸어갔다.
동문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동문에 도착하자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아마도 들어오는 식량을 옮기려고 기다리는 모양이다.
아직 식량을 실은 마차는 보이지 않는다.
진검백은 알면서도 일부러 옆에 있는 장정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사람이 많습니까?”
“지금 식량을 실은 마차가 들어온답니다.”
“호오.”
진검백은 처음 안 것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신기해했다.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갈지혁과 진검백의 정체를 잘 알지 못했다. 이곳에는 일꾼뿐만이 아니라 무인들도 있다.
그때 무인들 중 하나가 앞으로 다가오면서 입을 열었다.
“진검백?”
무승(武僧)으로 보이는 사내가 다른 몇 명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진검백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그가 중을 바라보면서 가볍게 인사했다.
“오랜만이군.”
“그러게.”
갈지혁은 무승에게서 눈을 떼고 그 뒤에 서 있는 자들을 바라봤다. 개중에는 낯이 익은 자들도 보였다.
‘저놈은…… 이름이 뭐였더라.’
자신을 보며 뭔가 분한 눈빛을 하고 있는 사내를 보며 갈지혁은 예전의 기억을 곱씹었다. 분명 꼭두각시의 독을 이용해 한 번 손을 봐줬던 자다.
“묘운, 자네도 여기에 왔는가?”
“이번에 소림이 참여하면서 함께 왔지.”
“그렇군.”
진검백은 묘운과 함께 있던 자들을 살폈다.
무당파의 청우, 갈지혁에게 덤벼들었다가 개망신을 당했던 적이 있는 자다.
청성파의 후기지수인 용혁진과 점창파의 곡연훈도 있다. 그리고 두 명의 여인은 아미파의 혜빈과 종남파의 여상희다.
여상희를 본 진검백이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렸을 때는 나중에 꼭 시집을 오겠다며 귀찮도록 따라다니던 아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이렇게 만나는 것 자체가 불편한 사이가 되어 버렸다.
언제부턴가 여상희가 진검백에게서 등을 돌린 것이다. 낙화검이라고 불린 지 일이 년 정도 지났을 때부터였다.
“오셨다는 소리는 들었소.”
용혁진이 갈지혁에게 인사를 건넸다. 갈지혁은 대충 인사를 받고는 진검백에게 시선을 돌렸다.
소림의 묘운이라는 사내의 눈이 갈지혁의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경계를 하는 모양인데…….’
신경도 쓰지 않는다.
아마도 이들이 칠천룡이라고 불리는 정파의 후기지수들일 게다. 그렇지만 갈지혁은 이들에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마음만 먹는다면 동시에 달려든다고 해도 몇 수 안에 모두 눕힐 수 있는 상대들이다.
‘진검백을 제하고 말이지.’
묘운이라는 자가 제법 실력자인 것 같기는 하지만 아직 멀었다. 저 정도로는 진검백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물론 본인은 그걸 모르는 듯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진검백 자네가 이곳엔 웬일인가?”
“내 친구가 여기 볼일이 있다고 해서.”
갈지혁을 가리키면서 진검백이 말했다. 묘운은 기다렸다는 듯이 갈지혁에게 말을 걸어왔다.
“혹 시주의 이름이 갈지혁이십니까?”
“그래.”
갈지혁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굳이 숨겨야 할 이유도 없고, 저쪽에서는 이미 자신의 정체를 아는 자들도 몇 있다.
묘운은 예상했던 답이 나오자 입을 열어 말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무림맹을 도우러 오셨다고요? 한데 어째서 당신이 저희를 돕겠다고…….”
“너 같은 맹의 말단에게도 미주알고주알 전부 말해 줘야 하는 거냐? 정 궁금하면 소림사의 방장에게 가서 물어봐라.”
“…….”
갈지혁은 말을 딱 잘라 버렸다.
묘운의 다소 건방져 보이는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소림사의 승려라고 보기에는 너무 도전적이다.
“말이 심하군요! 저희는 칠천룡이에요! 당신 같은 언제 죽어도 문제 될 것이 없는 독인하고는 다르다고요!”
옆에 있던 여상희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갈지혁의 미간이 꿈틀했다. 자신의 위치도 모르고 먼저 설친 것은 그쪽이다. 거기다가 독인을 마음대로 비하하고 있다.
아직까지 이런 모자란 생각을 가진 자가 있을 줄이야.
지금 이렇게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사천당문 때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런 말을 내뱉는다.
아마 주변에 있는 다른 자들을 믿고 나선 모양인데, 여상희는 사람을 잘못 봤다.
“너…… 죽고 싶냐?”
갈지혁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흘러나왔다.
여상희는 움찔하면서 뒤로 물러났다. 허투루 내뱉는 말이 아니다. 정말로 갈지혁은 자신을 죽이려고 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만 해.”
움직이려던 갈지혁의 손목을 진검백이 잡아챘다. 한번 본때를 보여 주려던 그는 어쩔 수 없이 멈추었다.
진검백이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내 동생 같은 아이다. 부탁한다.”
“……한 번은 봐주지.”
갈지혁은 사용하려던 독을 거뒀다.
놀라서 얼굴이 새하얗게 변한 여상희를 뒤로하고 갈지혁이 진검백에게 말했다.
“너도 칠천룡이라고 했나?”
“칠천룡의 일원이기는 하지.”
“넌 그곳에서 나오는 게 좋겠다. 수준이 안 맞는 놈들하고 하나로 묶여서 뭐 하는 거야.”
“하하.”
진검백이 애매한 표정으로 웃었다.
다른 자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잘 안다.
낙화검 진검백이라는 이름을 지닌 자신을 위로 놓는 갈지혁의 태도에 어처구니가 없을 게다.
묘운이 참지 못하고 말했다.
“누가 수준이 안 맞는지 모르겠군요.”
갈지혁이 칠천룡의 인물들을 바라봤다.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너희 여섯이 나에게 덤벼들면 이길 것 같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