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
8화
“그거야 당연…….”
“너희 여섯이 점창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소리인가.”
막 발끈해서 대답하려던 여상희가 입을 닫았다.
갈지혁의 말대로다.
그는 단신으로 점창파를 무너뜨렸다. 칠천룡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점창파에 도전조차 하지 못한다. 칠천룡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단지 후기지수일 뿐이다.
각자의 문파에 그들보다 강한 자들은 셀 수도 없이 많다.
사실 여상희는 갈지혁이 무서웠다. 그렇지만 칠천룡이라는 이름 때문이라도 쉽사리 물러설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그녀를 향해 진검백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물러나. 네 상대가 아니다.”
“나에게 명령하지 말아요.”
여상희가 차가운 어투로 대꾸했다.
분명 기분이 상했을 텐데도 불구하고 진검백의 표정에는 조그마한 변화도 보이지 않는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여상희가 이리된 것만큼은 언제나 안타까워하던 진검백이다.
하지만 걸어온 길이 달랐으니 그녀가 그리 변한 것도 어쩔 수 없다.
진검백이 담담하게 말했다.
“명령이 아니다. 충고일 뿐이지.”
“저에게 충고할 능력은 되나요?”
“글쎄…… 그 자격이라는 걸 누가 주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을 마친 진검백이 몸을 돌렸다.
어차피 칠천룡은 그의 관심 대상이 아니다. 지금 이곳에 온 것은 칠천룡과 다투기 위해서가 아니다.
곧 들어올 식량에 독이 있음을 밝혀야 한다.
그러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
다른 것에 신경 쓸 여력은 없다.
칠천룡의 나머지들은 움직이지 못했다. 진검백의 행동에 분노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옆에 있는 갈지혁 때문에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다.
진검백이 단지 갈지혁을 믿고 설치는 거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칠천룡과 거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진검백이 한숨을 푹 쉬면서 말했다.
“자네에게 실례를 한 것 같군.”
“됐다. 어차피 손을 볼 상대도 아니었어.”
칠천룡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지만 어차피 갈지혁에게는 애송이로 보일 뿐이다.
“그냥 둘 생각이냐?”
“굳이 싸울 생각은 없지만…… 싸워야 한다면 싸워야겠지.”
진검백이 대꾸했다.
그 또한 알고 있다.
칠천룡의 나머지가 덤벼든다고 해도 진검백 자신은 지지 않는다.
그는 이미 화산파의 장로만이 안다는 자하신공을 익혔다. 진검백의 몸 안에 있는 내공이 동년배의 것을 뛰어넘은 것이 한참 전의 일이다.
그나마 칠천룡에서 가장 강한 묘운조차도 진검백과 붙으면 이십 초를 넘기지 못하고 패할 게다.
마음만 먹는다면…… 여섯이 동시에 덤벼도 상관없다.
허언이 아니다.
그리고 진검백은 그리 싸우고도 이길 자신이 있다. 여태까지 검을 휘두르지 않았던 것은 그들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다.
그래서 오히려 멍청하게 보이려고 했다.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검을 놓은 자처럼 행동했다.
오히려 그 검을 놓고 있는 시간 동안 진검백의 무공이 일취월장했음을 아는 이는 몇 없다.
많은 사람이 몰려 있던 동문이 더욱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갈지혁과 진검백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할 때가 왔다.
동문이 열리며 마차들이 많은 식량을 실은 채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에 있던 일꾼들과 무인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서둘러서 전부 중앙에 있는 창고로 옮기게!”
갈지혁의 눈이 막 소리친 사내에게로 향했다.
남궁세가 가주의 동생인 남궁삭이다. 그는 무림맹의 식량을 도맡고 있는 자다.
갈지혁이 일부러 그쪽으로 다가갔다. 막 바쁘게 움직이던 남궁삭은 누군가가 갑자기 마차 앞을 막자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거기 누구야! 일하는 거 안 보여?”
갈지혁은 대꾸하지 않고 마차에 있는 볏섬 하나를 갑자기 뜯어 버렸다.
가뜩이나 마차를 막은 행동에 짜증이 치솟던 남궁삭이 화를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이이! 대체 무슨 짓이냐!”
마차 두어 개를 단숨에 넘어선 남궁삭이 막 갈지혁의 어깨를 움켜잡았을 때였다.
탁.
가볍게 한 손으로 남궁삭의 손을 쳐낸 갈지혁은 그대로 볏섬에서 나온 벼를 입 안에 넣어 씹기 시작했다.
남궁삭은 자신의 손을 쳐낸 실력이 범상치 않음을 알아차렸다.
‘만만한 놈이 아니다!’
함부로 대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이것은 남궁삭이 해야 하는 일이다. 그가 노한 어투로 말했다.
“누구냐고 묻지 않은가.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힘을 쓰는 수밖에 없네.”
“갈지혁이오.”
“…….”
남궁삭은 일순 할 말을 잃었다.
눈앞에 있는 이자가 무림맹의 골칫거리이자 또 최고의 조력자인 갈지혁이란다. 젊다는 말은 들었지만 예상보다 더욱 나이가 어려 보여 당황한 것이다.
정신을 차린 그가 말했다.
“자네가 갈지혁이군. 그런데…… 지금 뭐 하는 건지 물어도 되겠는가?”
“잠시만 기다려 보시오.”
말을 마친 갈지혁이 이번에는 쌀을 뜯어 그것을 씹어 먹기 시작했다. 눈을 감은 채로 쌀을 씹던 갈지혁이 침을 뱉었다.
“퉤. 역시로군.”
“무슨…….”
뱉어 낸 침과 갈지혁을 번갈아 바라보며 남궁삭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갈지혁이 가볍게 말했다.
“독이오. 이 식량들 모두에 독이 뿌려져 있소.”
“지, 진담인가?”
남궁삭이 허겁지겁 쌀을 꺼내어 씹었다. 잠시 쌀을 씹던 그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독이라니. 전혀 이상이 없네.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허언을 해서 분위기를 이리 만드는 것인가.”
남궁삭의 말대로 갈지혁의 독이라는 말에 주변은 이미 웅성거림으로 가득해졌다.
그런 그의 행동이 너무 섣불렀다며 남궁삭이 갈지혁에게 뭐라고 하는 것이다.
그가 먹었거늘 아무런 이상이 없다.
독이 섞였다면 뭔가 몸에서 반응이 있어야 하는데…….
“이상이 없어야 정상이오. 하지만 이것으로 밥을 짓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불을 만나야 움직이기 시작하는 독이니까. 그리고 정확하게 식사를 하고 반 시진가량이 흘러야 발작하오.”
“……그게 사실이오?”
“실험해 보면 그만 아니오.”
다른 사람의 말이라면 무시하면 그만이다. 오히려 전시에 이러한 분란을 일으킨 죄를 물어 벌을 내려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다. 그런데 상대가 갈지혁이다.
독에 한해서는 중원에서 제일이라고까지 불리는 그가 한 말이다.
사람들의 표정이 기괴하다.
단순히 우길 수만은 없는 문제가 된 것이다. 독에 대해 갈지혁이 그리 말했다면 사람들의 불안감을 없애기 위해서는 눈으로 보여 주는 수밖에 없다.
남궁삭이 급히 주변에 있는 무인들에게 말했다.
“반경 오 장 안으로 아무도 출입을 못 하게 금하라. 그리고 이 안에 있는 그 누구도 내 명이 떨어지기 전에 밖으로 나가서는 아니 된다.”
동문의 근처에 있던 자들을 모두 움직이지 못하게 명했다. 그리고 누구도 이 근방으로 오지 못하게 했다. 쌀을 한 바가지 정도 푼 남궁삭이 수하에게 그것을 건네며 말했다.
“밥을 해 오도록 해라.”
“예?”
“이만큼만 밥을 해서 가지고 오라고 했다. 밥을 하는 자들에게 결코 입을 대지 말라고 해라. 그리고 올 때 은수저도 가지고 오도록.”
“아, 알겠습니다.”
명을 받은 수하가 급히 남궁삭이 건네준 쌀을 받아서 주방으로 몸을 감췄다. 무인들이 둥글게 퍼져서 아무도 움직이지 못하게 길을 막아섰다.
남궁삭이 갈지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만약 거짓된 말이었다면 아무리 갈지혁이라고 해도 그냥 넘어가기는 힘들 걸세.”
“알고 있소.”
그는 갈지혁의 말투에서 자신감이 묻어나온다고 생각했다.
그럴 일은 없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정말로 독을 푼 것이 아닐까?’
갑작스럽게 의문이 생기기 시작한다.
갈지혁의 당당한 모습이 남궁삭에게 걱정이 일게 만든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혼자 고민을 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곧 답이 나올 게다.
생각은 그때 해도 늦지 않는다.
다소 초조한 마음으로 남궁삭은 밥을 지으러 간 수하를 기다렸다.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곳에 발이 묶이게 된 자들 중 일부는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그러한 속내를 드러내기도 어려웠다.
이곳에 있는 남궁삭과 갈지혁 때문이다.
남궁삭은 무림맹에서도 꽤 높은 위치에 있는 자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을 리 없다.
적당한 시간이 흐른 후 사라졌던 수하가 막 지어진 밥을 들고 모습을 드러냈다.
“여, 여기 있습니다.”
“흐음.”
한눈에 봐도 이상한 점이 없다. 남궁삭은 은수저를 밥 속에 넣었다가 뺐다.
독이 들어 있다면 은수저의 색이 변할 게다. 그런데 수저의 색깔은 변하지 않았다.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남궁삭이 갈지혁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리되었네. 어떻게 생각하는가?”
“당신들은 독을 너무 모르는군. 은수저 하나로 독이 있고 없음을 분간해 낼 수 있다면 당하는 자들은 바보인가?”
갈지혁이 말을 마친 후 남궁삭을 바라봤다.
역시 몸으로 느껴보는 것이 가장 좋은 답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남궁삭은 갈지혁이 자신을 바라보자 뒤로 주춤 물러섰다.
“당신이 먹어 보시오. 몸으로 느껴야 알 테니.”
“머, 먹어 보라고?”
“왜? 무섭소? 독이 없다고 하지 않았소.”
“그렇긴 한데…….”
왠지 모르게 망설여진다.
독이 없다고 생각은 하지만 갈지혁의 행동에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게 만든다.
망설이던 남궁삭이 이내 마음을 정했는지 수저에 있는 밥을 입 안에 넣어 꿀꺽 삼켰다.
옆에 있던 수하들이 말리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는 밥을 꼭꼭 씹어서 삼키고는 말했다.
“반 시진이라고 했는가?”
“그렇소.”
“기다려 주지.”
말을 마친 남궁삭은 가부좌를 튼 채로 눈을 감았다. 몸 안에 있는 미묘한 감각조차도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눈을 감은 그가 입을 열었다.
“미안들 하지만 반 시진 동안만 기다려 주게.”
불만을 내뱉는 이는 없다. 그들의 눈이 가부좌를 틀고 있는 남궁삭에게로 향했다.
그의 표정은 너무나 평온해 보인다. 무슨 일인가가 벌어진다는 것이 믿을 수 없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지쳐 가기 시작했다. 남궁삭의 멀쩡한 모습에 일부는 갈지혁이 무림맹을 소란스럽게 만들려고 일부러 들어온 것이 아니냐는 말까지 소곤대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아졌다.
그때였다.
혈색이 돌던 남궁삭의 얼굴이 갑작스럽게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엇!”
누군가가 외치자 잠시 흥미를 잃었던 자들이 동시에 남궁삭을 바라봤다. 그가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어, 어르신!”
남궁세가의 무인 하나가 급히 남궁삭의 몸에 손을 댔다. 그 순간 그는 입에서 피를 토해 내면서 뒤로 밀려났다.
“독에 중독된 사람을 손으로 건드리다니. 무슨 짓인가!”
갈지혁이 외침과 동시에 무인의 혈도를 급히 손가락으로 눌렀다.
역으로 무엇인가가 올라오더니 이내 입으로 검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우웩!”
기침을 하면서 남궁세가의 무인은 땅에 쓰러졌다.
“어르신을…….”
그 와중에서도 그는 남궁삭을 구해달라는 눈빛으로 갈지혁을 바라봤다. 갈지혁은 남궁삭이 죽기를 바랐던 것이 아니다. 그가 살아 있어야 이 일의 파장이 더욱 커진다.
갈지혁은 남궁삭을 일으켜 세우더니 그의 등에 쌍장을 가져다 댔다.
손바닥에서 녹색의 기류가 이는 듯싶더니 남궁삭을 감싸 안았다.
쿠웅!
남궁삭의 가슴이 갑자기 불룩 튀어나왔다가 원상태로 돌아왔다. 동시에 입에서는 검은 피가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