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왕전설-188화 (188/200)

# 188

13화

약 오 장 정도로 거리가 좁혀졌을 때였다.

“멈춰.”

다소 어눌한 중원의 말투다. 그나마 이 중에서 제일 한어를 잘하는 자이겠지만 말이다.

“어디에 가는 거냐.”

“금구전장으로 가는 길이다.”

갈지혁의 입에서는 유창한 남만어가 쏟아져 나온다. 그렇게 되자 오히려 말을 걸었던 자가 당황했다. 이토록 유창하게 남만어를 구사하는 자라니 뭔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 것이다.

공손하게 그가 물었다.

“누구신데 이곳에…….”

거리가 좁혀졌다. 갈지혁은 대답 대신 손을 휘둘러서 답했다.

퍼엉!

거대한 소리와 함께 앞에 있던 독황독립문의 문도가 뒤로 날아가 버렸다. 커다란 소리도 났지만 처음부터 모든 이목을 집중시켰던 상태였다.

숨기려고 했어도 결코 불가능했을 게다.

“침입자다!”

사방으로 울려 퍼지는 소리.

‘이걸 기다렸다.’

애초부터 은밀하게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이쪽으로 모든 이목이 주목되기를 기다렸다.

우선적으로 입구를 지키던 자들이 번개처럼 갈지혁을 향해 날아들었다. 사방에서 독황독립문 무리들이 덮쳐든다. 그들의 손에는 제각기 다른 것들이 들려져 있다.

동시에 갈지혁을 향해 독이 쏟아졌다.

가루, 액체……

내력의 움직임까지 느껴진다. 갈지혁은 옆으로 물러서면서 그 공격을 피해 냈다. 독을 뒤집어썼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팽이처럼 몸을 회전시켰다.

파파파팍!

주변을 에워싸던 자들이 그대로 뒤로 나뒹굴었다.

멀리서 독을 뿌린 채로 기다리고 있던 독인 하나는 너무나 멀쩡한 갈지혁의 모습에 당황해 버렸다.

수십 가지의 독을 뒤집어썼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변한 것이 없다.

“네, 네놈은 누구냐?”

“알 필요 없다.”

빠악!

발이 그대로 상대의 얼굴을 후려쳤다.

새하얀 이빨 몇 개가 그대로 떨어져 나갔다. 갈지혁은 그대로 정문을 손바닥으로 때렸다. 묵직한 느낌이 손을 타고 전달되어진다.

쿠웅.

문이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안으로 들어서며 갈지혁은 주변을 둘러봤다. 어느새 몰려든 자들이 주변을 잔뜩 감싸고 있다.

갈지혁은 눈웃음을 쳤다.

계획대로 일이 되어 간다. 많은 자들이 자신을 노리고 있지만 갈지혁은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건방진 놈! 이곳이 어디인 줄 알고…….”

중후해 보이는 자가 앞으로 나섰다.

아마 이 무리를 이끄는 수장인 듯하다. 그런데 예상외로 그 사내의 얼굴이 낯이 익다.

독황독립문의 규율을 담당했던 독안사신 율개!

갈지혁의 등에 파문이라는 글자를 박아 넣었던 바로 그자다.

“오랜만이오, 율개.”

“어떻게 내 이름을…….”

“내가 기억나지 않소?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역시 살다 보니 다시 만나게 되는군.”

율개는 갈지혁의 말에 뚫어져라 그를 바라본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기는 한데 막상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던 율개는 갈지혁의 얼굴 가운데를 가르는 검상에 퍼뜩 한 사내가 떠올랐다.

자신이 직접 등에 파문이라는 두 글자를 심었던 사내가.

“넌…… 갈지혁!”

“기억해 줘서 고맙소. 그렇다면 내가 그때 했던 말을 기억하시오?”

“…….”

“언젠가 오늘을 후회하게 될 거라고 했었지.”

그날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그저 금지된 독에 손을 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진 고문과 함께 파문의 낙인을 짊어지게 됐다.

열여덟 살의 생일날 세상이 변했다.

갈지혁이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말투를 바꿨다.

“율개, 넌 오늘 죽는다.”

“웃기는 소리! 단신으로 우리 모두를 죽이겠다고 찾아든 너의 어리석음을 상기시켜 주지.”

율개의 손짓에 따라 사방으로 갈라진 독인들이 움직였다.

“임(臨)!”

주변을 둘러싼 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율개가 다시금 소리쳤다.

“문(門)!”

조여 오듯이 다가선다.

“폭(爆)!”

먼저 독분이 바람을 타고 흘러 들어온다. 각양각색을 지닌 가루들이 바람을 타고 갈지혁에게 날아든다.

“산화(散花)!”

암기들이 사방에서 쏟아져 나온다.

그냥 암기가 아니다. 온갖 종류의 독들이 잔뜩 묻어 있는 암기일 것이다. 이 암기들에 맞으면 뼈까지 녹아 버릴 게다.

그렇지만 상대는 갈지혁이었다.

갈지혁의 손에서 강력한 장력이 쏟아져 나온다. 회오리처럼 솟구쳐 오른 장력에 암기들이 밀려난다. 동시에 그의 몸도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멍청한 놈!”

말과 함께 율개가 소매 속에서 무엇인가를 쏘아 냈다.

허공으로 날아오르자마자 소매에서 나온 것이 깨지면서 지독한 액체를 쏟아 냈다.

갈지혁의 상체를 액체가 뒤덮었다.

“우하하! 이 어리석은 놈! 만부화골산(萬腐化骨散)의 맛이 어떠…….”

막 신나서 외치던 율개의 얼굴이 확 하고 변했다.

당장에 온몸이 녹아들었어야 한다. 그렇지만 허공에서 갈지혁은 오히려 두 손을 움직여 독을 뿌렸다.

“컥!”

나방의 날개 가루처럼 천천히 내려앉은 독분에 많은 자들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율개는 멀쩡한 모습으로 땅에 내려선 갈지혁을 보면서 입을 닫아 버렸다. 녹은 것은 상의뿐이다. 정작 신체에는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는다.

“네놈…… 만독불침지체가 된 게냐? 아니, 아무리 만독불침지체라고 해도…….”

만부화골산은 율개가 지니고 있는 화골산 중에서 제일 지독한 놈이다.

만 구에 가까운 시신의 독기를 뽑아내서 만든 화골산이다. 만부화골산은 설령 만독불침지체라고 해도 피해를 입을 거라고 자신하던 물건이다.

한데 갈지혁은 멀쩡했다.

“너희가 가진 그 어떠한 독도 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우, 웃기지 마라, 이놈!”

율개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주변을 둘러봤다. 갈지혁이 나타나자 문 쪽을 향해 삼십에 가까운 자들이 포위망을 형성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나마 두 다리로 땅에 서 있는 자의 숫자는 다섯밖에 되지 않는다.

공중에서 뿌린 그 독분 한 번에 모두가 쓰러진 게다.

종류는 알 수가 없다. 목숨을 앗아가는 것인지, 단순한 마비를 목적으로 쓰는 건지도 판단이 서지 않는다.

‘망할! 저놈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갈지혁은 분명 대단한 기재였다.

독황독립문 역사상 최고의 기재라고까지 불렸다. 물론 그가 중원인이 아닌 남만인이었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했을 게다. 그렇지만 그는 중원인이었다.

그랬기에 독황독립문은 그를 버렸다.

그대로 둔다면 화근거리가 될 거라는 생각에 문주인 지대익이 먼저 손을 쓴 것이다.

그래서 파문시켰다.

그렇게 사독문에 버렸던 놈이 거목이 되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파문을 당하던 날 갈지혁이 중얼거리면서 했던 말이 현실이 되어 버렸다.

율개는 갈지혁이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경지에 올라선 것을 알았다.

그래도 싸워야 한다.

이곳을 빼앗기면 무림맹과 대치하고 있는 독황독립문의 본진이 위험해진다.

다행인 것은 상대가 갈지혁 하나라는 거다.

이쪽의 머릿수가 압도적으로 많으니 나름대로 승산이 있다. 물론 독을 쓰는 자들의 특성상 머릿수보다는 절대적인 독인의 비중이 더 크기는 하지만 말이다.

‘무공으로 제압한다.’

기도 안 차는 생각을 하면서 율개는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갈지혁이 일악천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의 무공을 그대로 전수받은 것을 알았다면 이처럼 모자란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게다.

바깥이 소란스러워지자 안쪽에 있던 자들도 정문을 향해 몰려들기 시작했다. 갈지혁은 이 싸움이 끝났음을 느꼈다.

아직까지는 잠잠히 있지만 이내 별동대의 무인들이 담을 넘을 것이다. 그리고 단숨에 금구전장의 식량과 물자들을 처리할 게다. 그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이 갈지혁의 몫이다.

마음만 먹으면 모두를 죽일 수도 있다.

지금의 갈지혁은 일수만독 일악천이 올랐던 것 이상의 경지에 올랐다. 같은 독인이라면 그 수가 아무리 많아도 상대가 되지 못한다.

이들을 죽이지 않고 적당하게 상대하려는 데는 이유가 있다.

독인은 살인귀가 아니다.

하지만 무차별적으로 죽인다는 보편적인 시선이 있기에 독이 오늘날과 같은 상황까지 온 것이다.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는 게 바로 최선책이다.

“놈의 독을 조심해라!”

율개의 외침에 지금 막 모습을 나타낸 자들은 거리를 벌린다. 그렇지만 이 정도 거리는 갈지혁에게는 소용없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다.

모두가 각자 병기를 꺼내 든다. 사방에서 들리는 쇳소리가 갈지혁의 귀를 간지럽게 한다.

갈지혁은 가만히 선 채로 두 손을 들어 올린다.

그의 몸에서 녹색의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수라독공.’

십성의 경지에 들어선 수라독공이다. 이미 녹색의 기운을 수족처럼 움직일 수 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근방에 있는 자들 모두 독에 중독시킬 수도 있는 경지인 것이다.

알 수 없는 위압감이 갈지혁에게서 뿜어져 나온다.

율개는 저절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용이 되어 버렸어. 문주조차 상대가 되지 않을지도 모르겠군…….’

믿을 수 없지만 왠지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든다. 갈지혁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그토록 강렬했다.

갖가지의 병기가 점점 거리를 좁혀 오고 있지만 갈지혁은 태연했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허공을 가르며 지법이 터져 나왔다.

열 개의 손가락에서 동시에 터져 나오는 지법이다.

십선유루지.

파라랑!

경쾌한 소리와 함께 다가오던 자들을 덮쳐간다. 병기로 막아 낸 자도 있지만 그대로 그것에 맞고 나뒹구는 자도 있다.

빠르게 다가온 자의 검이 갈지혁을 노렸다.

허리를 베고 들어오는 검을 그는 뒤로 물러나면서 피했다. 동시에 사방에서 많은 자들이 갈지혁에게 달려든다.

갈지혁의 수투에서 하얀 줄이 슬금슬금 빠져나오더니 달려드는 자들을 덮쳤다.

칠갑지주의 거미줄이다.

거미줄은 그들을 옭아매면서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게 해 버렸다. 동시에 갈지혁의 손에서 쏟아진 장력이 움직일 수 없는 그들의 온몸을 강타했다.

칠갑지주의 거미줄을 회수하며 갈지혁은 여유 있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반면 독안사신 율개는 더더욱 침묵에 빠져 버렸다.

싸워야 하는데 선뜻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때였다.

‘음?’

이상한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동시에 뜨거운 열기도 슬금슬금 치고 올라온다. 고개를 돌린 율개의 얼굴이 눈에 띌 정도로 변해 버렸다.

“부, 불!”

불이다.

불이 금구전장을 뒤덮기 시작했다.

그가 무서운 눈으로 앞에 있는 갈지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눈빛으로 그 자리에 서 있다.

‘성동격서(聲東擊西)…….’

당했다.

동쪽에서 소리를 내고 서쪽을 친다. 병법의 기본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좌시하기 쉬운 것이다.

갈지혁이라는 존재가 나타나 주변의 경계가 약해졌다.

그 틈을 타 다른 자들이 금구전장의 담을 넘어 불을 지른 것이다. 그리고 이토록 조용히 끝낸 것을 보아 담을 넘은 자들의 실력 또한 만만치 않을 게다.

아무리 큰일이 벌어져도 창고를 지키도록 되어 있는 자들이 있다.

혹여나 무슨 일이 생기면 그들도 신호를 보낸다.

그런데 채 신호를 보내기도 전에 정리됐다는 소리다.

점점 커져 가는 불을 보는 율개의 표정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이곳이 불타면 독황독립문의 상황은 위급해진다. 식량은 다소 걸리겠지만 반지화에서 어떻게든 올리면 된다. 그렇지만 무기가 되는 독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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