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
15화
검을 수평으로 세운 독객이 앞으로 찌르고 들어간다. 우습다는 듯이 혈부는 자신의 도끼를 휘둘렀다.
광풍이 몰아치며 도끼가 독객을 향해 쏘아진다.
날아드는 도끼를 향해 독객이 자신의 검을 쭉 내밀었다.
검끝에 도끼가 닿았다.
자신 있게 도끼를 휘두르던 혈부는 자신의 손이 갑자기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끼는 순간.
쩌저적.
도끼를 박살 내면서 독객의 검이 그대로 혈부의 가슴을 관통했다. 미칠 듯이 몰아치던 바람이 멈추었다.
가느다란 혈선이 독객의 얼굴에 그어져 있다.
그렇지만 결코 문제가 될 정도의 상처는 아니다. 반면 혈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봤다. 피가 콸콸거리면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네, 네놈…….”
설마 도끼를 부수면서 가슴을 관통할지는 몰랐다.
검끝에 모든 내력을 쏟아 모았을 게다. 그렇지 않았다면 혈부의 도끼가 이처럼 우습게 깨질 리가 없다.
그가 분하다는 눈으로 털썩 무릎을 꿇었다.
독객이 검을 뽑았다.
“컥!”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토해 낸 그가 그대로 땅에 엎어졌다.
독객은 쓰러진 혈부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은 지독한 피 냄새로 가득했다.
혈전이 벌어지고 있다.
독황독립문 무리들은 독과 무공을 사용하면서 별동대를 공격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갈지혁이 웅도로 보이는 자와 진검백이 비검으로 보이는 자와 결전을 벌이고 있다.
갈지혁의 싸움은 독객이 들어서기가 무섭게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몇 번 도를 휘두르던 웅도는 갈지혁의 소매에서 쏘아져 나온 사황에게 목덜미를 물리며 그대로 즉사했다.
웅도 정도 되는 자가 사황을 피하지 못한 것은 사전에 갈지혁이 펼친 움직임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웅도를 사황이 물어서 죽인다는 건 어려웠을 게다.
비검은 비록 진검백과 검을 맞대고 있지만 얼굴이 땀투성이다.
그리고 온몸에 잔상처들이 가득하다.
한눈에 봐도 일방적으로 진검백이 우위에 서 있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다.
독객은 급하게 싸움에 끼어들면서도 진검백의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의 검은 언제나 독객을 자극한다.
진검백의 검에서 퍼지는 매화 향이 피 냄새를 덮었다.
샤샤샥!
너무나 빠른 쾌검! 그렇지만 비검 또한 만만한 자가 아니다. 그 또한 뒤로 물러서면서 자신의 검을 현란하게 흔들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대결이다.
쾌검 대 쾌검의 대결.
두 개의 검은 매섭게 빠른 속도로 공수를 교환했다.
탕탕탕탕!
쉬지 않고 울리는 쇳소리. 그렇지만 큰 차이가 있다. 진검백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비검은 뒤로 물러서기에 바쁘다.
싸움은 끝났다.
매화가 진검백을 뒤덮을 때였다. 진검백의 검이 빠르게 날아들다가 갑자기 진로를 바꾸었다.
급작스러운 변화에 비검이 채 반응도 하기 전이었다.
샤악.
검이 가슴을 베고 지나갔다.
너무나 절묘한 베기였다. 검이 가슴을 베고 지나갔거늘 피도 나지 않는다.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서던 비검이 가슴에 손을 얹자 그제야 피가 터져 나온다.
싸움이 끝난 갈지혁과 진검백도 다른 독황독립문 무리들과의 싸움에 개입했다.
혈부, 응도, 비검 셋 모두가 제압당했다.
싸움은 끝난 것과 다름없다.
예상대로 싸움은 대승으로 끝났다. 이쪽의 죽은 자의 숫자는 세 명, 부상자가 열 명가량이다. 개중에 반 정도는 금방 일어날 수 있는 경미한 부상이다.
이 정도면 별동대를 결성한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봐도 좋다.
식량과 물자를 끊었고, 독황독립문에서 무공이 빼어난 자들을 모아 놓은 곳도 박살 냈다.
물론 이곳 말고도 몇 군데 더 있기는 하겠지만 팔십 명이라는 적은 인원으로 한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일들을 해냈다.
다시금 산속에 몸을 감추고 부상자를 치료하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던 중에 산 아래로 내려갔던 3조의 인물이 무림맹에서 날아든 서찰을 가지고 왔다.
비록 별동대로 움직이고 있기는 하지만 정보까지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그랬기에 수많은 정보들을 무림맹을 통해서 전해 듣고 있었다.
담자 대사가 나타나면서 개방이 다시 무림맹에 합류했다.
눈과 귀가 열리면서 사방에서 정보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사내가 건네주는 서찰을 받은 독객은 종이에 찍혀 있는 도장을 확인했다. 가장 중요한 밀서라는 표식이 되어 있다.
그는 서찰을 펼쳤다.
“흠.”
서찰의 내용을 심각하게 읽고 있는 독객의 모습을 본 진검백이 다가왔다.
그는 옆에 앉으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독황독립문이 움직였다는군.”
“그래요? 잘됐군요.”
별동대를 조직해서 움직였던 것은 모두 본진이 더는 웅크려 있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독황독립문 무리들도 이런저런 위협을 느꼈는지 속전속결로 승부를 끝내려고 하는 걸 게다.
“내가 봤을 때 보름에서 한 달 안에 이 싸움은 끝날 것 같군.”
식량과 물자를 끊은 것이 크게 작용했다. 장기전이 될 수도 있었는데 그 덕분에 전쟁이 짧아지게 생겼다.
다급하게 움직이는 쪽이 싸움에서 불리한 것은 당연하다. 아마도 이 싸움은 점점 무림맹 쪽으로 기울 것이다.
갈지혁은 독황독립문이 움직였다는 말에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애초부터 독황독립문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정작 중요한 것은 단리문의 움직임이라고 생각하는 그다.
나름의 방법으로 황금귀 이풍과 아직도 연락을 주고받는 갈지혁이다. 그렇지만 딱히 수상한 움직임을 발견해 내지 못했다.
분명 이대로 독황독립문을 쓰러지게 놔둘 것 같지는 않은데…….
‘독황독립문을 버려? 단화초의 독이 대단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퍼뜨리는 데 시간이 걸린다. 그렇다면…….’
다른 무엇인가 생각하는 것이 있는 게 아니라면 지금은 독황독립문을 버릴 때가 아니다.
그런데 뭔가가 불안하다.
일이 너무나 일사천리(一瀉千里)로 진행되고 있다. 단리문이 조금만 도왔다면 독황독립문이 이처럼 쉽게 밀리고 있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마치 단리문은 독황독립문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듯이 관전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게 무엇일까?
갈지혁은 고민에 빠졌다.
그때 서찰을 품에 넣은 독객이 일어나면서 말했다.
“슬슬 본진에 합류를 해야 할 것 같군.”
돌아갈 때가 된 것이다.
해남도.
시끄러운 중원과는 다르게 이곳은 점점 고요함을 되찾아간다. 해남파와 백씨세가의 싸움 덕분에 흉흉해진 분위기도 이제는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내부의 일이 정리되자 해남파는 무인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무림맹에서 정식적으로 도움을 요청하지는 않았지만 구파일방의 하나인 해남파다.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해남파의 은밀한 곳에는 일악천이 머물고 있다. 내공을 갈지혁에게 모두 전수해 주는 바람에 이제는 보통의 인간처럼 되어 버린 그이지만 일악천은 즐거운 얼굴이다.
바깥에 앉아 바람을 맞으며 일악천은 자신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주름살 가득한 얼굴. 흉측하게 일그러진 인간 같아 보이지 않는 얼굴.
예전에는 참으로 싫었다. 이렇게 흉한 얼굴도, 나이를 먹어가는 것도 미치도록 싫었다.
그러나 이제는 담담하다. 오히려 자신이 늙어가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세상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갈 거라는 생각에 나이 먹는 것을 싫어했다. 그렇지만 이제는 아니다.
적어도 일악천이 죽어도 그의 제사상에 술 한 잔 올릴 놈이 하나 생기지 않았는가.
이 맛에 사람들이 제자를 받아들이는구나 하는 생각까지 할 정도다.
느긋하게 앉아 차 한잔 마시고 있으니 여태까지 살아왔던 인생이 거짓이라고 느껴질 정도다.
무인으로서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는 그것을 사랑하는 제자를 위해 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상실감을 느끼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문득 중원에 나간 갈지혁에 대한 걱정이 고개를 든다.
그놈이라면 잘해 낼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스승의 마음이라는 것이 그런 게 아니지 않은가.
믿으면서도 내심 다치지 않을까 걱정을 하는 건 스승인 일악천도 부모의 마음과 다를 게 없다.
‘현 중원에서 그 녀석을 위협할 놈이라면…… 단리문뿐이지.’
단화초와 일악천의 내공까지 지니게 된 지금 갈지혁은 적수가 없을 정도로 강해졌을 것이다.
수라독공도 십성에 이르렀고, 몸 안에 있는 독성은 배 이상 강해졌다.
비록 이렇게 죽은 듯이 지내고는 있지만 일악천 또한 물 밖에서의 일들에 대해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주워듣고 있는 중이다.
움직일 거라고 생각했던 단리문이 너무나 조용하다. 그리고 갈지혁이 개입하면서 무림맹이 독황독립문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보급로를 끊었다는 것도 들었다.
아마 싸움은 단시일 내에 끝을 맺을 게다.
그래도 역시 단리문이라는 존재가 너무 모습을 보이지 않아 불안하다.
‘놈은 단화초를 가지고 갔지. 그걸 어떻게 쓰려는 것인가.’
그걸 알아내야 한다.
단화초를 어떻게 쓰려는 것인지를 알아야 그에 맞는 방비도 할 수 있다. 단리문을 얕볼 수 없는 다른 한 가지 이유가 바로 단화초를 가지고 갔다는 거다.
물론 갈지혁이 단화초의 독에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다르다. 잘못하면 갈지혁을 제외한 모두가 죽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갈지혁의 패배다.
중원을 살려야만 갈지혁이 이기는 것이다.
‘단화초를 가장 빠르게 퍼뜨릴 수 있는 방법이…… 물인가? 아니, 물을 타고 흐르면 그 주변의 땅부터 문제가 생길 게야. 그리고 물의 색깔도 변할 테고…… 흐음.’
머리를 굴렸지만 답이 나오지 않는다.
괜히 머리를 굴리는 건가 하면서 찻잔을 들어 올리던 일악천은 찻잔에 비친 무엇인가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늘을 나는 나비 한 마리가 눈에 보인다.
아름다운 색을 지닌 나비를 보며 허허 웃음을 짓던 일악천의 얼굴이 갑자기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찻잔을 내려놓고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생각도 하지 못한 한 가지가 있다.
얼마 전 해남도의 일부가 이상한 독에 의해 땅을 쓰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는 말도 들었다. 단리문의 짓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크게 신경은 쓰지 않았다.
이제 일악천은 내공도 없기에 독에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몸이기도 했다.
그냥 그렇게 기억에 묻어 두었던 일이 지금 떠오른 생각과 겹치니 무서운 상상이 들기 시작한다.
“그놈…… 단화초를 노린 게 아니었나.”
단화초의 독은 분명히 극독이다. 누구라도 죽일 수 있는 치명적인 독.
그랬기에 일악천도 갈지혁도 단리문이 단화초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쩌면 큰 착각을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진정으로 단리문이 노렸던 것은…….
“확인해 봐야겠군.”
일악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화초가 있던 공간에 다시 한 번 가봐야겠다. 내공이 없는 몸이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다.
잘못하면 앉아서 전 중원인이 몰살당하는 일이 벌어질 게다.
막아야 한다.
* * *
독황독립문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무림맹 또한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특히나 독에 대한 방비는 계속 준비해도 모자라다는 생각이 든다.
사천당문이 있고, 약선문도 싸움에 끼어들었지만 왠지 모르게 부족하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아마도 갈지혁의 부재 때문이리라.
같은 편으로 두기에는 뭔가 걸리는 것이 많은 사내이기는 하지만 독에 한해서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조력자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남만의 독은 중원의 것과 달라 사천당문도 모두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