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
17화
‘독, 독만 있었어도…….’
오늘을 위해 준비해 둔 독들의 삼 분지 이가 날아가 버렸다. 다시 만드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고 다른 걸로 대체하기에도 위력이 많이 떨어진다.
억지로 이곳까지 올라와 한두 번 정면으로 부딪쳐 봤지만 그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다.
사천당문이 의외로 강력했던 것이다. 거기다가 약선문이라는 자들까지 발 벗고 나서서 독황독립문을 방해하니 지금의 독으로는 큰 타격을 줄 수가 없는 것이다.
‘물러서? 하지만…….’
지금 물러서면 또 언제 중원에 나선단 말인가. 이번 출정만큼 준비하는 것만 해도 십 년 이상은 걸린다. 그리고 또 기회도 봐야 하고 이런저런 정보들도 긁어모아야 한다.
최소 이십 년이다.
그때는 지대익이 살아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다.
반드시 이번 원정에서 중원을 집어삼켰어야 했다. 이번이 지대익에게는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또 선뜻 정하지 못하는 것은 역시 며칠 동안의 격돌에서 입은 피해 때문이다.
죽은 쪽은 물론 독황독립문보다 무림맹 쪽이 많다.
며칠간의 싸움으로 무림맹은 천 명에 달하는 사상자들을 냈다. 아무리 약해졌다고 해도 독황독립문의 독이다. 사방에서 마구 쏟아지는 독을 모두 해독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무림맹의 피해에 비해 독황독립문은 삼백여 명 죽은 것으로 끝났다. 이득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뿌리가 다르다.
무림맹 무인의 숫자는 독황독립문의 독인에 비해 열 배 이상 많다. 머릿수가 기껏해야 천 명 안팎인 독황독립문으로서는 삼백 명의 죽음이 너무나 큰 타격이었다.
‘다음 싸움에서 또 비슷한 숫자를 잃는다면…… 반수도 남지 않아.’
처음 이곳으로 출정할 때는 천이백 명 정도. 전 중원과 싸우는 것치고는 너무나 우스운 숫자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인이 아닌 독인 천이백 명이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독인은 한 사람당 능히 일당백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들이다. 십만대군(十萬大軍)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그들은 위풍당당하게 중원에 나섰다.
그런데 지금 남은 숫자는 칠백에서 팔백 남짓.
어떻게든 무림맹과 팽팽한 접전을 벌일 수도 있다. 문제는 무림맹이 다가 아니다.
최근 들어온 급보에 의하면 마교가 무인들을 모으고 있다는 소문이다. 그들이 만약 이 싸움에 가세한다면…….
파죽지세로 밀리게 될 게다.
마교까지 동시에 막아 낼 힘이 지금의 독황독립문에는 없다.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싸워야 하는가, 아니면 남만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욕심 때문에 물러서지 못하는 거다.
머리는 계속해서 이 싸움이 길어질수록 독황독립문에 불리하다고 말하고 있다. 물러서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선뜻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독만 있다면 충분히 싸우고도 남았을 인원이지만 현재 상황에서는 제 힘의 반도 발휘를 하지 못하고들 있다.
무인에게서 병기를 빼앗고 싸우게 하는 것이 차라리 이보다 나을 게다.
머리는 복잡했지만 답은 알고 있다.
이 상태로 싸우다가 점점 피해를 입으면 결국 독황독립문은 중원에서 뼈를 묻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미래도 없다.
지금 이곳에 온 자들 모두가 죽는다면 독황독립문은 다시 일어설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살아서 돌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싸워서는 안 된다.
지대익은 바보가 아니다. 누구보다 현재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아는 자다.
“……물러서야겠구나.”
“뭐라고요?”
“다시 남만으로 돌아가야겠어.”
“할아버지!”
지운경이 버럭 소리쳤다. 젊은 그로서는 지금 물러선다는 말을 쉽사리 받아들이기 어려울 게다. 아주 옛날 지대익 또한 그러했으니까 말이다.
“이곳까지 왔습니다. 사천만 밀어 버리면 중원이 저희의 손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물러나시다니요. 지금 상황이 다소 불리하긴 하지만…….”
“시간을 끌면 마교가 올 거다. 더 버티면 몰살이야.”
“…….”
마교라는 말에 지운경은 입을 닫았다.
전력이 멀쩡한 마교까지 싸움에 가세한다면 승패는 확연하게 기울 것이다. 그렇다고 마교가 개입하기 전에 무림맹을 쓸어버릴 방도도 없다.
“사기도 바닥, 싸움에서 사용할 독도 거의 바닥난 상태야. 운이 좋으면 이 독만으로도 어떻게 해 볼 수야 있겠지. 하지만 그럴 확률이 얼마 되지 않아.”
성공할 확률이 삼 이상만 됐어도 한 번 미친 짓이라도 해 보겠다. 일 할도 채 되지 않는 확률에 독황독립문의 미래를 모두 걸 수는 없는 일이다.
“운경아.”
“……예.”
“넌 젊다. 너는 다시 중원으로 나올 수 있어.”
“…….”
지운경은 분함을 참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런 자신의 손자를 보며 지대익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은 어떠한 말을 해도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다. 아주 나중에 나이를 먹고 지운경이 문주가 되어 중원에 다시 나올 때쯤이면 지금 자신의 마음을 알게 될 게다.
“나가서 철수 준비를 하라고 전해라.”
“예.”
“그리고…… 혹여 우리를 뒤쫓을지도 모르니 만반의 준비를 갖추도록. 그 정도 손봐줄 독은 충분히 있으니까.”
물러는 가지만 도망치는 게 아니다. 뒤쫓아온다면 그에 맞는 처절한 응징을 가할 것이다.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그뿐이다.
고개를 숙인 채로 지운경이 천막 밖으로 걸어나갔다. 지대익은 의자에 몸을 푹 기댔다.
“하, 하하하. 하하하!”
미친 듯이 웃었다.
지금의 기분을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다. 그토록 염원해 왔던 모든 것이 단숨에 무너졌다.
“갈지혁…… 오늘의 수모, 결코 잊지 않으마.”
담자 대사의 거처에 개방 방주인 걸왕이 급하게 뛰어들어왔다.
눈을 감고 있던 담자 대사는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뜨고 걸왕을 맞이했다.
“걸왕께서 이 이른 시간에 어쩐 일로…….”
“놈들이 물러가고 있소!”
“놈들이 물러간다니요? 혹 독황독립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놈들이 아니면 누구겠소.”
담자 대사의 표정이 눈에 보일 정도로 밝아졌다. 괜한 싸움으로 더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되는 건 아닌지 내심 걱정을 하던 그다. 담자 대사는 신발도 신지 않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걸왕의 말대로 멀리서 독황독립문 무리들이 먼지바람을 일으키면서 회군을 하고 있다.
주변이 시끌시끌하다.
많은 무인들이 이 싸움이 끝났다면서 환호를 외치기도 한다. 담자 대사는 그들을 말리지 않았다. 그때 황급히 문파의 수장들이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점창파의 장문인인 소절상이 담자 대사에게 말했다.
“맹주님! 놈들이 도망치고 있습니다. 지금 뒤쫓아서 다시는 중원을 노리지 못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소절상의 말에 주변에 있던 다른 몇 명도 동의를 하는 눈빛으로 담자 대사를 바라봤다. 그렇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괜히 궁지로 몰면 이쪽의 피해만 생깁니다. 잊지 마시지요. 저들은 독인입니다. 독을 얕보다가 이리되지 않았습니까. 무슨 방책을 준비해 놨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그냥 좋게 이대로 보내 주는 게 나을 듯싶습니다.”
“하오나…….”
“장문인의 생각은 잘 알지만 제 뜻을 따라주시지요. 아미타불.”
담자 대사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그 누구도 토를 달지 못했다. 그는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멀어지는 독황독립문의 무리를 바라봤다.
반년가량 중원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그들이 물러가고 있다.
그동안 정파 무림이 입은 피해는 보통이 아니었다. 죽은 자의 수만 해도 몇천에 달하고 재산 피해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제는 전쟁으로 인해 부서진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려야 할 때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하다.
다 끝났다는 생각은 드는데 뭔가가 찜찜하다.
‘이 괴이한 기분은 무엇일꼬…….’
싸움은 끝났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다.
* * *
무림맹의 추격은 없었다.
쫓아왔다면 꽤 큰 타격을 줄 수도 있었건만 여우처럼 눈치를 챈 모양이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오히려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고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것이 속 편하다.
독황독립문 내부의 분위기는 말이 아니다. 갑작스러운 회군에 이래저래 말이 많은 것이다. 그렇지만 지대익으로서는 최선의 선택이라는 생각은 변함없다.
마교가 개입하기 전에 끝낼 수 있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물러서야 할 때다.
지대익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이 중에서 가장 중원을 손에 넣고 싶어 하던 것이 그다. 그리고 지금 가장 분한 것 또한 그일 게다. 속내를 보이고 싶지 않아 꾹 참고 있는 것일 뿐이다.
밤이 깊어지자 독황독립문은 발걸음을 멈추고 천막을 치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움직였다. 그 탓에 남만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예상보다 빨랐다.
지대익은 자신의 천막에 홀로 앉은 채로 술잔을 기울였다.
적적한 마음에 술을 마시지 않고서는 도저히 못 견디겠다.
반 시진가량을 홀로 술을 마시던 지대익은 인기척에 시선을 돌렸다.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천막 입구에 낯이 익은 사내 하나가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다.
술을 입 안에 털어 넣은 지대익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단리문.”
“돌아가신다는 말을 들어서 말입니다.”
“후후, 그래.”
“지금은 물러설 때가 아니지요. 다시 전장에 나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지대익은 반쯤 취한 눈으로 고개를 들어 단리문을 바라봤다. 그의 입가에 조롱 가득한 미소가 걸렸다.
“네놈…… 사라졌다가 오늘 갑작스럽게 나타난 주제에 뭔 개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잠시 일이 있어서 다녀온 것뿐입니다.”
무림맹과 전면전을 펼치러 떠나기 직전 사라졌던 그다. 그런 단리문이 지금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곱게 보일 리가 없다.
“어쨌든 지금 회군하시면 안 됩니다.”
“닥쳐라! 애초부터 네놈이 맘에 들지 않았다. 이번엔 또 무슨 꿍꿍이냐. 넌 내 아래에 있을 놈이 아니야. 냉큼 이곳에서 나가라. 허튼수작은 통하지 않아.”
더 이상 독황독립문에 단리문은 필요하지 않다.
중원을 침략하기 위해 그의 힘을 잠시 빌렸을 뿐이다. 그 계획이 무산된 지금 더 이상 단리문의 존재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그는 이제 짐이 되어 버렸다.
옆에 두면 언젠가 목덜미를 물려고 덤벼들 게다.
차라리 지금 내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술잔을 기울이며 지대익이 침울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가라.”
“……아직은 갈 때가 아닌데 말이지요.”
단리문이 웃으면서 대꾸했다.
분명 독황독립문은 버리는 패다. 그렇지만 그것이 지금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아직은 독황독립문이 있어야 한다.
그랬기에 돌아간다는 말을 듣고 바로 이곳으로 와서 말리려고 하는 것이다.
문제는 지대익의 태도다.
그의 생각이 굳어진 느낌이다.
“네놈 손아귀에서 더는 놀아나지 않을 게다. 냉큼 사라지지 않고 뭘 하느냐!”
“굳이 벌주를 마시려고 하는군.”
“뭐야?”
지대익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단리문이 픽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지대익을 가리켰다.
“당신…… 너무 오래 살았어. 그리고 너무 머리가 좋아. 쓸데없이 머리가 좋으면 오래 못 살지.”
“이놈이…… 지금 날 죽이겠다는 거냐?”
“못할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