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
20화
독단을 깨물 시간도 주지 않고 마비시켜야 한다.
갈지혁은 매달린 채로 손아귀에 든 조그마한 단환을 튕겼다.
탁.
매달린 탓에 안의 상황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 갈지혁은 단환을 다시 한 번 튕겼다.
탁.
갈지혁은 숨을 죽이고 그대로 있었다.
저벅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창문이 열리며 상대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 순간 갈지혁은 독분을 뿌리면서 창문 안으로 몸을 날렸다.
고개를 빼꼼 내밀었던 자는 독분을 뒤집어쓰며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잠에 빠져 있던 자가 깨어나면서 채 반응도 하기 전에 갈지혁은 다시금 마비독을 침상에 누워 있던 자에게 뿌렸다.
둘은 정신은 멀쩡했지만 마비가 돼서 꼼짝도 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갈지혁은 둘의 입을 벌리고 독단으로 보이는 것을 찾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그 둘의 입 안에는 조그마한 단환이 하나씩 들어 있었다.
언제든지 자결할 수 있게 하는 물건이다.
갈지혁은 침상에 누워 있는 자와 쓰러진 둘 모두를 벽에 기대 앉게 하고는 품속에 있는 환시독의 병을 꺼냈다. 노란색 액체가 찰랑거리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갈지혁은 그것을 열어 마비된 둘의 코에 가져다 댔다.
억지로 눈에 힘을 주면서 버티던 둘의 눈동자가 점점 풀리기 시작했다.
그는 말을 시키기 전에 먼저 마비독을 해독할 수 있는 해독제를 뿌렸다.
약 반 각 정도를 기다리던 갈지혁이 이내 입을 열었다.
“독인이냐.”
“그렇습니다.”
“예.”
예상했던 대답이었기에 갈지혁은 놀라지 않았다. 갈지혁이 독 냄새를 알아내지 못했을 리가 없다.
몸속에 독기를 갈무리하지 못하는 경지다.
“너희의 수장이 단리문이냐?”
“모릅니다.”
“저희는 단 한 번도 수장을 뵙지 못했습니다.”
환시독에 중독된 이상 거짓말은 하지 못한다.
단리문이 그토록 자신의 모습을 꽁꽁 숨긴 채로 측근들에게만 모습을 드러낸다는 소리다.
이 둘은 그 측근들의 수하일 게 분명하다.
“아까 전 서찰을 보내는 걸 봤다. 내용이 뭐냐.”
“……마교를 막아라입니다.”
“마교를 막아?”
전혀 생각도 못 했던 말이었기에 갈지혁은 고개를 그들에게 가까이 하고 다시금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마교를 막다니.”
“마교가 무림맹을 돕기 위해 나타났으니 그들의 뱃길을 막으라는 겁니다. 청해성에서 감숙으로 빠르게 가기 위해서는 뱃길을 이용해야 합니다. 가는 곳을 파악해 내고 모든 배를 없애라는 명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갔다.
지금 상황이라면 무림맹이 감숙까지 밀려가는 건 당연지사다. 그리고 마교 또한 그리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애초에 마교는 감숙성을 향해 방향을 잡고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방향으로 올 경우, 청해에서 감숙으로 가기 위해서는 강을 건너야 한다. 그 배들을 사전에 없애놓는다는 거다.
그렇게 되면 마교는 다시금 방향을 틀어야 하고 시간은 배가 걸리게 된다.
‘막아야 한다. 마교가 감숙에 오지 못하면 무림맹은 못 버텨.’
어떻게든 막아야 하는데 문제가 있다. 지금의 상황에서 마교가 어느 방향으로 올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도 없다. 또 안다고 해도 막을 인원이 없다.
지금 무림맹은 사천에서 감숙으로 밀리느냐 마느냐 하는 찰나다. 지금 병력을 뺀다고 해도 마교보다 늦을 수밖에 없다.
‘배, 배를 지켜야 하는데…….’
배는 불탈 것이다.
애초에 마교가 올 곳뿐만이 아니라 근방에 있는 모든 배를 없앨지도 모른다.
그러한 것이 오히려 안전하다면 그들은 능히 그런 일을 벌이고도 남을 것이다.
갈지혁이 움직여야 할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곳에 있는 단접을 해결해야 한다.
그가 물었다.
“단접은 지금 어디 있느냐.”
“단접은…….”
“단접은…….”
같은 말을 내뱉던 둘의 안색이 갑자기 변했다. 파랗게 변하더니 이내 입가로 피를 쏟아 내기 시작한다. 갈지혁은 급히 그들의 손목을 잡았다.
맥박이 이상하게 뛰고 있다.
‘이런!’
“커억!”
비명과 함께 두 명 모두 뒤로 나자빠졌다.
갈지혁은 이를 꽉 깨물고 그들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심장이 뛰지 않는다.
“벌레를 심어 놨군.”
금지된 말을 꺼내면 발작하는 벌레를 심어 놨을 게다. 그리고 그것이 아마 단접이었던 모양이다.
심장에 박혀 있는 벌레는 미칠 듯이 요동쳐서 둘의 생명을 끊어 버린 것이다.
갈지혁이 착잡한 표정으로 일어났다.
유일한 단서였던 둘이 모두 죽어 버린 것이다.
설마 그러한 벌레를 심어 놓았을 줄은……
갈지혁은 품속에서 화골산의 일종을 꺼내 둘에게 뿌렸다. 시신에 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이대로 둔다면 이들이 중독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환시독에 대해 알아차리면 귀찮아진다. 차라리 이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지 못하게 하는 게 낫다.
갈지혁은 다시금 창을 통해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몰랐던 사실을 알아냈지만 마음은 더욱 착잡해졌다.
마교가 싸움에 개입하지 못하면 독황독립문의 승리다. 그것만은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배가 문제야. 하지만 배를 지키지 못해. 다시 배를 만든다? 아니, 그건 불가능해.’
마교의 병력이 얼마인데 그곳에서 배를 만들고 있는단 말인가. 거기다가 그 정도의 인원이 움직이기 위해서는 거선(巨船)이 필요하다.
조그마한 나룻배 같은 걸로는 수백 척이 있어도 모자라다.
‘배가 필요한데…….’
갈지혁의 머릿속에 퍼뜩 누군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 수백 척이 넘는 거선을 지닌 놈이 한 명 있었지.’
한시가 급하다.
서둘러 연락을 해야지 간신히 시간이 맞을 듯하다. 운이 좋다면 그들이 도울 수 있을 게다.
‘그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마교와 무림맹은 각개격파를 당할지도 모른다.’
가장 많은 배를 가지고 있는 자는 정부의 관리도, 세상 제일의 거부도 아니다.
장강수로채의 채주인 구백룡이다.
* * *
오천에 달하는 인물들이 움직이는 광경은 장관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웅장했다.
신강에서부터 청해를 통해 감숙으로 향하는 마교의 무리다.
이 마교의 무리를 이끄는 것은 부교주인 몽원양(朦鴛洋)이다.
도법으로는 천하에서 으뜸이라고까지 불리는 자로 그의 도는 자비를 모를 정도로 잔혹하다고 알려졌다.
덩치도 크고 다소 단순해 보이는 외양과는 다르게 그는 머리를 쓸 줄 아는 인물이다. 그랬기에 교주가 마교의 정예들을 몽원양에게 맡긴 것이다.
단지 힘만 쓸 줄 아는 인물이었다면 이들을 이끌고 출정을 시키지 않았을 게다.
그들은 급하게 감숙성으로 향하고 있다. 수시로 미리 보내놓은 자들로부터 소식이 날아온다.
그렇지만 매번 날아오는 급보들마다 점점 상황이 좋지 않게 흐르고 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날아서라도 가고 싶건만…….
잠시 자리를 잡고 쉬는 와중에도 몽원양은 지도를 살폈다. 그의 옆에는 책사 겸 해서 따라온 심방(深方)이 있다.
마교에서 알아주는 지략가로 이번 싸움에서 몽원양을 돕기 위해 참전했다.
“감숙으로 밀려난다면 이쯤이겠군.”
“난주를 지키려고 들 겁니다.”
난주는 감숙성의 성도다.
그곳은 감숙의 중앙 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을 빼앗기면 무림맹은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에 이곳만큼은 목숨을 걸고 사수하려고 할 게다.
“걸어서 간다면 이렇게 돌아가야 해. 가장 좋은 뱃길은?”
“흥해(興海)에서 배를 타고 이동하면 난주로 가는 최단거리가 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를 이동시킬 정도의 배가 될지 모르겠군.”
“근방에 있는 커다란 배는 모두 모아 두라고 했습니다. 거기다 흥해에는 원래 거선이 꽤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심방이 준비한 일이라면 문제 없을 게다.
몽원양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지도를 살폈다. 현재의 위치에서 흥해까지 가는 데 오 일 이상은 걸린다. 거기서 또 난주까지 가는 것만 해도 또 오 일 이상이다.
짧게 잡아도 열흘은 훌쩍 넘길 게다.
‘버텨야 할 터인데…….’
걱정되지만 그것은 몽원양으로서 어떻게 할 방도가 없는 일이다. 그저 무림맹이 버티면서 난주를 사수하기를 빌 수밖에 없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
“움직인다!”
마교의 대군이 난주를 향해 쏟아져 가고 있다.
무림맹의 막사에 수뇌부들이 모였지만 분위기는 최악이다.
갑작스러운 회군으로 인해 무림맹은 속수무책으로 퇴각을 해야만 했다. 적들의 변한 힘은 너무나 위협적이었다.
꽤 많은 독인들을 죽였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래도 밀리고 있는 형편이다.
처음에는 화살이 제법 통했다. 하지만 독황독립문 무리들도 바보가 아니다. 그들 또한 살상 범위가 넓은 독으로 상대하면서 점점 무림맹은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그렇게 물러나다 보니 어느새 사천의 끝자락에 와버렸다.
구채구(九寨溝).
사천성 끝자락에 위치한 곳으로 뒤로 조금만 물러서면 바로 감숙성이다.
억지로 이곳에서 버티고 있는 형편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뒤로 물러나야 한다는 걸 모르는 이는 없다.
무진악이 화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런 때 그놈은 대체 어디 있는 거요?”
갈지혁의 이야기다.
가장 심하게 갈지혁을 욕하던 무진악이 지금은 오히려 그가 없음을 탓하고 있다.
다른 이들 또한 모두 그 사실이 궁금한 모양이다.
담자 대사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승이 시킨 일이 있어 현재 광동성에 있습니다.”
“대체 이러한 때 시킬 일이라니요!”
무진악은 담자 대사에게 성을 냈다. 지금 같은 상황에 갈지혁이라는 존재의 필요성은 아주 크다.
솔직히 그가 있었으면 이렇게 사천의 끝자락까지 밀리지도 않았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지금은 말할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아시게 될 겁니다.”
“대체 그게 무슨…….”
“그만, 그만! 지금 싸우려고 모인 게 아니지 않소.”
무진악의 말을 끊어 버린 것은 개방 방주인 걸왕이다. 그가 나서자 무진악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그날 이후 아직까지도 사이가 좋지 않은 둘이다.
그렇지만 걸왕의 말이 틀린 것이 아니었기에 무진악은 딱히 반박하지 못했다.
담자 대사는 걸왕에게 살며시 고개를 숙이고는 이내 본론으로 들어갔다.
“현재 상황으로 볼 때 난주까지 물러나야 합니다.”
감숙으로 물러가자는 말에 사람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겨우 독문 하나에 밀려 이렇게까지 수모를 당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지금 마교가 감숙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알아본 바로는 감숙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듯합니다.”
“마교의 도움까지 받다니……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로군.”
무진악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지금은 마교가 아닌 아이의 손이라도 빌려야 할 때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공통의 적이 눈앞에 있다.
마교와도 손을 잡아야 할 때다.
“난주에서 마교와 합류해서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마교의 대군이 합세하면 수적 우세는 더욱 심해진다. 더군다나 지금 이곳으로 오는 자들 중 일부는 독인들이라고 한다.
정파와 달리 마교는 독을 배척하지 않았다. 그 탓에 독에 제법 능한 인재들을 많이 지니고 있다. 그들이 이곳으로 온다면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