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왕전설-196화 (196/200)

# 196

21화

“난주까지 도망은 치되 시간을 벌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수의 인원이 계속해서 타격을 줘야겠지요.”

“다시 한 번 별동대를 움직이자는 말씀입니까?”

“그렇지요. 독객과 진검백 둘이 이끈다면 제법 시간을 지연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낙화검 진검백이라고 불리던 그가 이제는 무림맹의 희망으로 떠올라 버렸다.

낙화검이라는 별호를 부르는 자가 사라진 지 오래다. 그는 무림맹이 밀리는 와중에서도 수많은 활약을 했다.

매화검(梅花劍) 진검백.

검을 펼칠 때마다 진한 매화 향을 풍기는 그를 사람들은 이제 그렇게 불렀다. 앞에 낙이라는 글자가 매 자로 바뀐 것뿐인데 의미는 천지 차이다.

이제 그 누구도 진검백을 무시하지 못한다.

그는 화산의 미래였으며, 후기지수 중 그 누구와도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최고봉이었다.

“고수들로 한 번 별동대를 다시 조직해 보지요. 시간을 조금이라도 끈다면 그만큼 본진의 타격을 줄일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무림맹은 마교가 합류할 시간을 벌어야 했고, 독황독립문은 그전에 그들을 잡아먹으려고 하고 있다.

이제부터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무림맹의 본진이 빠르게 난주를 향해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한 틈을 독황독립문이 놓칠 리가 없다. 그들 또한 급하게 자리를 정리하고 무림맹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런 독황독립문을 막은 것은 고수 이백 명 정도로 구성된 별동대였다.

그들은 치고 빠지는 전술을 구사하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독황독립문의 본진을 괴롭히려고 들었다.

하지만 독황독립문의 방비 또한 만만치 않았다.

예전처럼 뼈아픈 실책으로 다시금 남만으로 돌아가는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결국 별동대는 큰 타격은 주지 못하고 시간을 끄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소기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한 것이다.

무림맹이 마침내 난주에 자리했다.

이제 이곳에서 물러난다면 무림맹은 거의 끝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독황독립문 또한 무림맹의 지척까지 다가왔다. 그 무렵 마교는 청해성 흥해 부근에 도달했다.

애초에 근방에 있는 모든 배를 홍해 바로 위쪽에 있는 곳으로 모아달라고 전해 두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한 곳에는 배 한 척도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부서진 배의 잔해 일부만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앞장서서 갔던 수하 하나가 나뭇조각을 들어서 확인하다가 몽원양에게 말했다.

“탄 자국이 있습니다.”

“젠장, 누가 불을 질렀다는 소리로군.”

예상 밖의 일이 벌어졌다.

누군가가 이곳에 있는 수백 척에 달하는 모든 배를 불태워 버린 것이다.

책사인 심방의 표정도 좋지 않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해결책이 나오지 않아서다.

이 근방에 있는 커다란 배란 배는 다 이곳으로 모았다.

그런데…….

만약 이곳에서 배를 타지 못하면 서녕을 지나야 한다. 그렇다면 최소 한 달가량은 더 걸린다는 소리인데 그것은 큰일 날 소리다.

“독황독립문 놈들이 여기까지 손을 쓸 줄이야…….”

“방책이 없습니다, 부교주님.”

심방이 방책이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누가 온다고 해도 현재 상황을 타파할 수 없다는 소리다.

오천이 넘는 무인들이 탈 만한 배들을 지금 와서 어디에서 구한단 말인가!

“크, 크하하! 꼼짝없이 당했어. 놈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날 줄은 몰랐어. 하하!”

웃고 있지만 결코 즐거워서 웃는 게 아니다.

씁쓸함이 밀려온다. 지금의 상황에서 어떠한 방법을 써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졌다.

아무리 무림맹이 버틴다고 해도 한 달이 넘는 시간을 마교의 도움 없이 버틸 수는 없다. 그들이 괜히 사천을 버리고 감숙까지 온 것이 아니다.

마교와의 협공을 위해 더 버틸 수 있는 장소를 버리고 난주까지 올라왔다. 그런데 마교는 갈 수 없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제 꾀에 넘어가 버린 꼴이다.

방법이 없다.

차라리 빨리 무림맹에 연락을 주는 것이 낫다. 그래야 그쪽도 다른 방법을 강구할 수 있을 게다.

“무림맹에 서신을 넣어라. 배가 전부 불타서 육지로 돌아가야 한다고.”

“옛!”

옆에 있던 사내 하나가 사라졌다.

말이 좋아 육지로 돌아간다는 것이지 한마디로 도와줄 수 없다는 소리다.

그때,

멍하니 물을 바라보던 심방의 눈이 커졌다.

멀리서 아주 조그맣게 검은 점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가 급히 옆에 있는 몽원양을 불렀다.

“부교주님! 저기 수백 척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수의 배가…….”

“무슨 헛소리야?”

이 근방에 있는 모든 배들이 불탔는데 또 어디서 그만한 배들이 나타난단 말인가.

그에게 면박을 주면서 고개를 돌린 몽원양은 자신의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심방의 말대로다.

배다.

어마어마한 수의 거선들이 지금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 각양각색의 깃발을 단 배들에는 수십 가지의 이름들이 적혀 있다. 몽원양은 단숨에 그들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장강수로채!’

가장 선두에 섰던 배가 점점 뭍으로 다가왔다.

배 위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유약해 보이는 얼굴. 하지만 만면에 지어진 자신감 있는 미소의 사내.

“장강수로채주 구백룡? 당신이 왜 여기에…….”

“탈 거요, 말 거요?”

“뭐요?”

“아, 탈 거냐고, 말 거냐고!”

갑작스러운 일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몽원양이 고개를 끄덕인다. 지금 이 상태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배가 모두 불타 없어진 지금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장강수로채가 나타나 그들을 이동시켜 주려는 거다.

배 위에 서 있는 구백룡이 중얼거렸다.

“망할 놈, 장강수로채의 배를 전부 빌려달라니…… 괜한 약속을 했었군. 쩝.”

구백룡은 갈지혁과 약속을 한 적이 있다.

훗날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물론 그 대신 그때 자신과 싸워서 이겨야 한다는 조건도 있었다.

구백룡은 갈지혁과 겨루지 못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이렇게 갈지혁의 소원을 들어줬다.

‘점창파를 단신으로 꺾은 놈하고 싸워 봤자 승산은 뻔하지.’

그가 다른 배에 타고 있는 마교도들을 보면서 투덜거렸다.

“젠장, 아무리 봐도 이건 내가 손해인데.”

난주는 전쟁터다.

하루도 쉬지 않고 무림맹과 독황독립문의 싸움이 벌어졌고 그때마다 수백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다.

대부분이 무림맹의 사람들.

독황독립문은 멀리서 독을 뿌려대기만 할 뿐 거리를 좁히지 않는다. 막상 무림맹 쪽에서 공격을 가하려고 하면 독황독립문이 뒤로 물러선다.

하지만 과하게 쫓아갔다가는 수많은 독들을 뒤집어써야 한다.

그래도 무림맹은 끝까지 버텼다. 마교가 곧 도와주러 올 거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때 무림맹에 급보 하나가 날아들었다.

마교 부교주인 몽원양이 보낸 서찰이다. 그리고 그 서찰에는 독황독립문의 소행으로 배가 불타 육지로 돌아서 가야 한다는 최악의 상황이 적혀 있었다.

수뇌부들은 서찰을 보는 순간 좌절했다.

이것 하나만을 믿고 모든 것을 버리고 난주까지 피해온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막상 도와주러 와야 하는 마교가 난관에 봉착했다.

지금 상황에서 육지로 돌아서 온다면 한 달은 족히 걸린다. 결코 버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사실을 알고서도 수뇌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마교가 오지 못한다는 소식이 퍼지면 떨어져 있는 사기가 바닥을 칠 게다.

이곳에서 뼈를 묻을 생각을 해야 한다.

오늘도 독황독립문의 도발이 시작됐다. 아마 그들은 알고 있을 게다. 마교가 이곳으로 도움을 주러 오지 못할 거라는 것을. 독황독립문 무리들이 왜 먼 거리에서 계속 자잘하게 독을 풀어대는지 의문을 가졌었다.

화끈한 공격 없이 그들은 시간을 끌면서 무림맹 무인들의 숫자를 조금씩 줄여 나갔다.

마교가 온다면 불리해질 거라는 걸 모를 리도 없는데 말이다.

서찰을 받고서야 알았다. 그들이 오지 못할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길어야 삼 일이야.’

삼 일이면 모든 게 끝난다. 그때가 되면 담자 대사는 마지막으로 전면전을 펼칠 것이다.

이길 확률은 없다.

그래도 이렇게 앉아서 죽는 것보다는 한 놈이라도 더 죽이고 죽는 것이 낫다.

갈지혁. 그만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계속해서 든다. 그가 광동성에 가 있는 이유를 알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그러한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한 명일 뿐이지만 그만 있었어도 이리되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 탓이다.

길어야 삼 일이라고 생각하던 담자 대사는 멀리서 보이는 독황독립문 무리들을 보고 생각을 바꿨다.

천천히 인원을 줄여 나가던 그들이 이제는 전면전에 나설 생각인 모양이다. 여태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인원이 움직이고 있다.

“맹주님…….”

청성파 장문인 엄일성이 담자 대사를 부른다. 그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싸우다가 죽어야겠지요.”

“후후.”

엄일성이 허탈하게 웃는다. 자신의 최후가 이렇게 허탈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그렇지만 현실이 이러하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만약 산다면 술이나 한번 거하게 사겠습니다.”

“허허, 장문인 소승은 중입니다. 저보고 땡중이 되라는 소리입니까?”

“까짓거 산다면 땡중 한번 되어 보시는 것도 좋지 않습니까.”

“그런가요? 그것도 나름대로 재미있긴 하겠습니다.”

엄일성과 담자 대사는 가벼운 말을 나누고는 서로를 보며 웃었다.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는다.

무림맹 쪽도 모든 준비를 마쳤다. 이제는 격돌만이 남은 것이다. 무림맹의 무인들이 긴장한 채로 모여 있다. 인원수는 상대에 비해 열 갑절은 되는데 오히려 이쪽이 죽음을 앞두고 있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독인이라는 존재를 내친 것이 이제 와서 이렇게 후회가 될 줄이야……

선두에 선 것은 무당파의 무진악이다. 그가 검을 뽑아 들었다.

“진격한다!”

그의 목소리에는 악이 찼다.

한 놈이라도 더 죽이고 죽겠다는 무인의 각오가 물씬 풍겨져 나온다. 무림맹의 무인들도 움직이기 시작한다.

난주를 등지고 최후의 전투가 시작되는 것이다.

싸움의 시작은 독황독립문에서 먼저 알렸다. 그들의 손에서 각양각색의 것들이 하늘로 솟구쳤다.

펑펑펑!

허공으로 솟구친 것들이 터져 버렸고 그 안에 있던 가루들이 땅으로 쏟아져 내린다.

“독이다!”

누군가가 소리쳤지만 듣기 전부터 그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급히 호흡을 조절하면서 무림맹의 무인들은 앞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선두에 있던 자들부터 암기와 독을 쏟아 냈다.

“컥!”

“크악!”

하늘에서 떨어지는 가루를 이겨 내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진 자들도 허다하다.

독분을 이겨 내고 안으로 뛰어들어 간 자들도 암기나 다른 독에 의해 몸이 녹고, 중독되어서 피를 토하고 있다.

독황독립문은 이 싸움을 준비라도 한 것처럼 수백 가지의 독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반 각도 되지 않아 수백이 죽었다. 그런 데 반해 무림맹은 독황독립문의 본진 근처에도 도착하지 못했다.

개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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