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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왕전설-199화 (199/200)

# 199

24화

분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방도가 없다. 도망칠 길은 오로지 하나다. 정면으로 치고 나가면 살기가 어렵다. 그리고 산다고 해도 큰 부상을 입어 결국에는 죽을 공산이 크다.

길은 하나.

뒤쪽에 있는 바다다.

이 바다를 통해 해남도로 도망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저쪽 커다란 바위 뒤에 물자를 나르던 배 한 척이 있다. 도망치려면 지금밖에 기회가 없다.

독황독립문 무리들이 날아드는 병기를 막아주는 지금뿐이다.

처음엔 당황하던 독황독립문 무리들도 이내 독을 뿌리면서 대응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것이 정사연합군에 피해가 되기는 했지만 머릿수에서 압도적으로 밀린다.

이내 싸움은 정리될 것이다.

쓰러져 있는 지운경을 힐끔 쳐다본 단리문은 몸을 날렸다.

바위 쪽으로 달린 단리문은 그 뒤쪽에 있는 배에 올라탔다. 줄을 푼 그는 급히 옆에 있는 노를 잡았다.

이 조그마한 배로 해남도까지 가는 것은 무리다. 그렇지만 해남도와 이곳 사이에는 수많은 섬이 있다. 그 섬 중 몇 곳에서는 단리문이 탈 배를 구할 수 있을 게다.

그곳까지만 가면 된다.

그가 모는 배가 망망대해(茫茫大海)로 나서기 시작한다.

삐걱, 삐걱.

노 젓는 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 지금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모두 짜증이 되어 치밀어 오른다.

이가 갈린다.

갈지혁을 무시했던 자신에게도, 그리고 모든 것을 망쳐 버린 그놈에게도!

“배 한 척이 도망친다!”

싸우던 와중에도 몇 명이 급하게 배 쪽을 향해 화살을 쏘아댄다. 그렇지만 화살은 배에 닿지 못한다.

단리문은 더 거세게 배를 몰았다.

배가 작은 탓에 속력이 제대로 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저들은 쫓을 수 없을 것이다. 이 근방에 있는 배로 자신을 쫓기 위해서는 최소 한 시진은 걸린다.

그동안 단리문은 저들이 상상하지 못한 곳으로 뱃머리를 돌리면 그만이다.

그리고 몇십 명 정도가 쫓아온다면 오히려 환영이다.

기분도 적적한데 전부 죽여 버리면 될 일.

바다를 향해 나아가던 단리문이 멈추어 섰다.

이미 모든 걸 포기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것을 각오해야 한다.

물론 그게 몇 년이 걸릴지, 몇십 년이 걸릴지, 아니면 평생을 해도 불가능한 일인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그날을 위해서 한 가지 해야 할 게 있다.

갈지혁. 그놈은 죽여야 한다.

단리문이 또 꾀를 내어 나타난다고 해도 갈지혁이 있다면…… 뭔가가 불안하다. 차라리 지금 그를 죽여야 한다.

멈춘 배에서 단리문이 천천히 일어났다.

갈지혁의 위치는 알지 못했지만 그의 스승인 일악천이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다.

해남파.

그곳에 일악천이 있다.

“갈지혁!”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내공을 실은 목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진다.

병장기가 부닥치면서 울려 퍼지는 소리도, 고통에 찬 비명도 그 목소리에 묻혀 버렸다.

단리문이 다시 소리쳤다.

“갈지혁!”

그가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단접을 이끌고 사라지는 것은 봤지만 그 후의 일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있을 게다. 나중에라도 자신의 말을 전해 주면 그만이다.

분에 찬 목소리로 단리문이 소리쳤다.

“해남도로 와라! 만약 오지 않는다면…… 네 스승이 죽는다! 우리가 처음 싸운 그곳으로 와라. 그곳에서 너를 기다린다. 내가 해남도에 도착하고부터 보름! 정확하게 보름이다. 늦으면 해남도에 있는 모든 것들이 죽을 것이다……!”

말을 마친 그가 다시금 배를 몰기 시작한다.

싸움터였지만 단리문의 목소리는 아직도 쩌렁쩌렁 울리는 듯하다. 싸움은 끝났다. 잠시 반항하던 독황독립문은 이내 싸우기를 포기하고 양손을 들었다.

정사연합군은 그들의 몸을 뒤져 위협이 될 만한 모든 것을 빼앗고 그들을 포박했다.

그리고 그 무렵 사라졌던 갈지혁이 나타났다.

시체를 수습하고 독황독립문 무리들을 묶던 연합군의 사람들은 갈지혁이 다시 나타나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좌중 사이를 걷자 길이 생겼다.

갈지혁이 향하는 곳은 담자 대사가 있는 곳이다. 담자 대사를 향해 가던 중에 무리 속에서 한 사내가 뛰쳐나온다.

진검백이다.

그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이 자식…… 나중에 두고 보자!”

“왜?”

“너무 늦었잖아!”

“제때 나타났다고 생각하는데.”

진검백은 갈지혁을 노려봤다. 그렇지만 결코 미워서가 아니다. 갈지혁 또한 그걸 모를 리가 없다. 가볍게 웃은 갈지혁이 그의 옆을 스치면서 지나간다.

사람들의 시선은 갈지혁 한 명에게 쏠렸다.

숨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다.

담자 대사에게 다가간 갈지혁이 포권을 취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늦었습니다.”

“아닙니다. 시주 덕분에…… 저희가 몇 번이나 목숨을 건진지 모르겠습니다.”

식량에 든 독을 발견해 냈다. 그리고 별동대를 이끌고 적의 숨통을 끊었다.

사라진 후에도 갈지혁은 언제나 도움을 줬다.

장강수로채를 움직여 마교를 감숙으로 이동시킨 것은 두고두고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다. 거기에 지금 단접들의 독분 아래에서 무림의 현재와 미래를 구해 냈다.

이번 전쟁에서 가장 큰 공신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갈지혁을 꼽는 데 누구도 주저함이 없을 게다.

독인만 아니었다면 좋았을 터인데…….

하지만 독인이 아니었다면 이러한 일을 해내지도 못했을 게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그토록 멸시하던 독인 덕분에 무림이 살았다.

갈지혁이 말없이 바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멀리 있었지만 단리문의 외침을 똑똑히 들었다.

사실 갈지혁은 며칠 전부터 이 근방에서 몸을 감춘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독황독립문 무리들이 이곳으로 도망쳐 온 것을 그가 몰랐을 리가 없다.

갈지혁은 다소 떨어진 곳에 진을 쳤다.

단접을 가둘 만한 진법이다. 진이 아니고서는 단접을 가두어둘 수 없다.

그랬기에 진을 치고 기다리다가 위급한 순간에 나타나 단접들을 그 진 안에 집어넣고 돌아온 것이다.

“배를 타고 갔습니다.”

“들었습니다.”

“해남도로 가실 것입니까, 갈 시주?”

“물론이지요.”

단리문은 제거해야 한다. 더군다나 그자의 입에서 나온 말을 허투루 들어서는 안 된다.

일악천을 죽인다고 했다. 그러한 것을 두 눈 뜨고 보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지금의 일악천은 내공조차 없다.

담자 대사는 그런 갈지혁의 의중을 읽었는지 그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저희 쪽에서도 고수 몇을 뽑아서…….”

“아닙니다. 혼자 가겠습니다.”

“하지만…….”

“독인 대 독인의 싸움에 무인은 필요 없습니다.”

“갈 시주의 뜻이 그렇다면 그리하시지요.”

애초부터 한 번 정한 뜻을 꺾는 사내는 아니었다. 그랬기에 무림맹이 이처럼 안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담자 대사는 갈지혁에게 은혜를 갚고 싶은 모양이었다.

“저희가 해 드릴 것이 없겠습니까?”

“그렇게 뭘 해 주시고 싶다면…… 배나 한 척 구해 주시지요.”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담자 대사는 누군가를 불러 무엇인가를 명했다. 명을 받은 자가 바람처럼 어딘가를 향해 몸을 날렸다.

아마도 가까운 곳으로 가서 배 한 척을 구해서 올 모양이다.

“바로 해남도로 가실 수 있게 커다란 배 한 척을 구해 오도록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갈 시주의 도움에 비한다면야 이런 것이야 미약하지요.”

그 무엇을 준다고 해도 이 은혜를 갚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갈지혁의 시선이 저 멀리서 악을 쓰는 한 사내에게로 향했다. 지대익이 죽으면서 문주가 된 지운경이다.

그가 악을 쓰면서 자신을 끌고 가는 자에게 발악을 하고 있다. 갈지혁의 시선을 느꼈는지 난동을 부리던 그가 고개를 돌린다.

지운경의 눈과 갈지혁의 시선이 마주쳤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난리를 피던 지운경이 이내 슬그머니 고개를 숙여 버렸다.

그가 사라지자 갈지혁은 조용히 자신의 얼굴에 난 검상을 만졌다. 아주 옛날, 친구라고 믿었던 한 사내에게 당했던 상처.

아프지 않다.

이제는.

사내가 사라진 지 반 시진가량이 흐른 후에 거대한 배 한 척이 부근에 모습을 드러냈다.

싸움 후의 뒤처리에 열중하던 무인들의 시선이 다시금 갈지혁과 나타난 거대한 배에 쏠렸다.

단리문이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크게 소리쳤다. 지금 이 배가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리가 없다.

갈지혁은 싸우러 가는 거다.

해남도로 사라진 그자와 말이다.

갈지혁이 담자 대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 배 자체를 저에게 주시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갈지혁이 주변에 있는 바위를 박차고 배 옆에 늘어진 줄을 잡고 위로 올라선다.

배 위에 올라선 갈지혁은 안에 있는 젊은 선원에게 말했다.

“돛에 글씨를 쓰고 싶다.”

“돛에 말입니까?”

“그래. 글씨를 쓸 수 있게 나머지도 준비해 다오.”

선원은 의아해하면서도 돛을 내리도록 하고, 붓과 먹을 가지고 오게 했다.

돛을 내리자 갈지혁은 그것을 배에 크게 펼쳤다. 그는 붓에 먹물을 듬뿍 묻히고는 한 글자 한 글자씩 써 내려갔다.

돛에 글씨를 쓴 갈지혁은 붓을 내렸다.

그러고는 자신이 쓴 글자를 바라보며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 선원이 다시금 돛을 매달았다.

선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동안 갈지혁은 뱃전에 올라서서 아래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가볍게 인사를 했다.

“이만 가야겠습니다.”

“허허, 몸조심하셔야 합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놈을 처리하고 다시 한 번 찾아뵙지요.”

“소림사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갈 시주.”

담자 대사가 말한다.

소림사에서 차 한잔 대접하고 싶다.

그것이 갈지혁에게 해 줄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르겠지만.

갈지혁이 고개를 끄덕이고 뱃전에서 모습을 감춘다. 배 위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출발합시다!”

펄럭!

접혀 있던 돛이 바람을 타고 확 하고 펼쳐졌다.

사람들의 눈이 돛으로 향한다.

강인하고 살아 있는 듯이 꿈틀거리는 글씨가 돛에 적혀 있다. 채 다듬어지지 않은 글씨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듯하다.

“호오.”

사람들의 입에서 감탄성 어린 신음 소리가 흘러나온다.

독왕대로행(毒王大路行)

갈지혁이 처음 중원에 나서며 걸었던 깃발이 이제는 돛에서 바람을 타고 나부끼고 있다.

아무도 화를 내지 않는다. 독왕이라는 말에 발끈하던 노고수들도 지금만큼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

배가 천천히 바다를 타고 흘러나가기 시작한다.

가만히 서 있던 화산파의 독고문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의 옆에 있던 진검백이 그를 바라봤다.

그런 진검백의 시선을 느꼈는지 독고문이 그를 바라보면서 인자한 목소리로 말한다.

“우습게도…… 정말로 독왕이 된 것 같구나.”

“독왕 말입니까?”

“왕(王)이라는 호칭은 진정으로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을 받아야만 붙일 수 있는 것이지. 지금 보아라. 이곳에 있는 모든 자들의 모습을.”

진검백이 주변을 둘러본다.

모두가 멀어져 가는 배를 바라보고 있다. 그들의 눈에는 결코 독에 대해 경시하거나 증오하는 감정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갈지혁이라는 인물에 대한 감탄으로 가득하다.

“몇 명은 인정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무림 역사상 처음으로 독왕이 나타난 걸지도 모르겠군.”

독고문의 눈도 멀어져 가는 배에서 떨어질 줄 모른다.

독왕대로행이라는 글씨가 적힌 돛과 함께 갈지혁이 탄 배가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배가 순풍을 탄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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