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방관자들
정훈은 전투가 벌어지는 성밖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그는 기린성호수가 보이는 전각 지붕위에 올라앉아 있는 중이었다.
술 한 병을 옆에 끼고 앉은 그는 묵묵히 기린성의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하든 그는 인세에 속한 자가 아니었으므로 확실히 현실감도
참여할 마음도 가지고 있지않았다.
그는 아래를 내려다 보았는데 창룡전의 비무장안이 중무장한 병사들로 가득차
있는 것이 보였다.
그의 예민한 귀는 성밖에서 울부짖는 부상자들과 죽어가는 자들의 비명소리도
듣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승리의 웃음소리와 살기에 찬 외침,그리고 한편으로는
원한에 서린 자들의 고함도 듣고 있었다.
그는 술병을 입에 대고 가볍게 들이켰다.
대호가 어디에 있을지 짐작도 가지않았지만 그의 마음이 이상할 정도로 평온했
다.현재 누가 뭐라 하든지 간에 그의 마음은 차분했다.
검을 위해 수련했던 그의 선계에서의 생활도 그랬거니와 지금 역시도 그의 모든
것은 검을 향해 있었다.그리고 구천선자...
그는 약간 한숨을 내 쉬었다.
그녀는 여전히 냉담하고도 우울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려하지도 않았었다.
그가 다가가 청혼하고자 한다고 솔직히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우울한 얼
굴로 그를 흘긋 보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할 일이 많으니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그게 그녀의 대답이자 거절이었다.
그녀는 정말 정훈에 대한 감정이 없는 것일까.
혹은 아예 진정 혼자 지낼 마음으로 그러한 것일까.
돌아보지도 않는 그녀의 가냘픈 어깨를 보면서 그는 그저 우울한 심정으로 침묵
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실제로 멍하니 서서 그녀의뒷 모습만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는 피로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수치스러웠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
후우 하고 그가 한숨을 몰아 쉬고 석양을 바라보고 있을 때 세현의 목소리가 들
려왔다.
"여기서 뭘 하십니까?"
"석양구경."
그가 짧게 말하자 세현은 그런 그를 바라보더니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성밖을
바라보았다.그의 얼굴에 드러난 감정은 무관심이 아니라 걱정스런 얼굴이어서
정훈은 조금 의아했다.
"넌 관심이 없다고 하지않았나?"
"그런 스승님께선 관심이 있다고 말하시곤 여기서 석양구경을 하시는 겁니까?"
정훈은 세현의 따지는 듯한 말에 조금 피로해졌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술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거냐?"
"스승님이 이 곳에 있을 때 까지요."
그는 정훈이 주는 술병에 가볍게 입을 대고 한모금을 삼키곤 대답했다.
그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돌려 인간들은 보지도 못할 먼 곳을 바라보았다.
애진은 성의 망루에서 상천들과 이야기하고 있었다.그녀의 얼굴에는 절박할 정
도로 긴장된 표정이 엿보이고 있었다.
역시 전황이 좋지않은가.
그는 다시 창룡전안의 자연을 보았다.
자연은 여전히 곰방대를 든채 자신의 대전에 앉아서 지도와 하민이 보고하는 소
리를 듣고 있었다.그리고 창룡전 만이 아닌 다른 자들도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무기를 나르는 사람들,화살을 나르는 사람들,그리고 끓는 기름을 붓기 위해 불
을 때고 있는 사람들,모두가 바빴고 그들 만이 한가했다.
세현은 이런 분위기가 싫었다.
자신이 능동적으로 끼어 들어 일을 처리하지않으면 그는 성질이 풀리지않는다.
정훈처럼 느긋하게 앉아서 석양이나 볼 기분은 되지않았다.
게다가 그에게 애진이 베푼 온정은 확실히 눈에 보이는 것이었기에 그는 조금
안절부절했다.
불쑥 정훈이 안절부절 하는 그를 바라보며 내뱉듯 말했다.
"여기서 언제까지 뭉기적 거리고 있으면 동찬성이 내려오고 말거다."
"동찬성은 내가 여기있는 줄은 모릅니다."
"그라면 알아내고 말거야."
정훈은 예언하듯 말하곤 다시 시선을 인적하나 보이지않는 고적한 기린성으로
돌렸다.
세현은 음 하고 그를 노려보곤 결심하듯 말했다.
"나는 저들을 도와야 겠어요.스승님도 도우실려면 확실히 도우세요.스승님은 자
연이나 하민에게 관심이 있지않았던가요? 하민은 지금 마법을 너무 써서 여력이
없습니다.저런 몸으로는 얼마나 버틸지 알 수 없어요."
그말을 듣자마자 정훈은 그제서야 하민의 생각이 났다.그는 고개를 돌리고 하민
이 있을 곳을 돌아보았다.
하민은 여전히 수경을 바라보며 자연에게 보고하고 있었다.인간이 수경을 저렇
게 장시간 쓰는 경우는 당연 녹초가 되는 것이다.
새파래진 얼굴의 하민은 이미 기가 미약해 지고 있었다.
"바보놈."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하민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있고 헐덕이고 있었다.
마법사는 본디 몸이 건강하진 못하다.자신의 힘을 뽑아 마력으로 대신하는 것이
니만큼 당연 좋을 리가 없는 것이다.
"전투 중입니다.그는 당연 할일을 하는 거에요."
세현이 마치 정훈을 책하듯이 말하곤 다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스승님,어쩌실 겁니까?"
"넌 나에게 지금 인세에 끼어들라고 말하는 거냐?"
정훈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세현은 조금 우물거렸다.실제로 옳은 일이 아니
란 것을 알고 있기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방이 화광이 충천하고 살기와 죽음이 가득한 전쟁터였다.
한가롭게 노니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하민을 제자로 삼으셨으니 그 댓가를 각오하십시오.제가 스승님의 제자가 되어
댓가를 감수하고 있는 것처럼."
그는 냉정하게 정훈을 바라보았다.
정훈은 그의 시선을 묵묵히 받으면서 물었다.
"넌 내 제자가 된게 못마땅하냐?"
"모르겠습니다.철이 들면서 부터 스승님과 함께 였으니까요."
정훈은 그의 냉담한 대답을 들으면서 조금 울화가 치밀었지만 그것도 곧 우울한
심정에 휩쓸려 사라져 버렸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은 석양으로 붉게 물들고 있었고 세현은 그것을 묵묵히 바라
보다가 말했다.
"전 저들을 도우러 내려갑니다.애진은 나를 도와주었고 나는 그녀를 내버려둘수
없습니다."
정훈은 대답하지않았다.
그리고 세현은 그의 대답을 기대하지도 않았다.그는 그 말을 마치자 마자 지붕
위에서 가볍게 뛰어 내려 애진의 옆으로 달려갔다.
『북별궁의 집필실-환상의 노트북(작가연재란) (go FNNINAPA)』 89번
제 목:동방제국기전 29
올린이:ahinshar(박창준 ) 99/05/30 21:23 읽음:115 관련자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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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호 : 7148
게시자 : 이수영 (ninapa )
등록일 : 1997-11-20 03:03
제 목 : 동방제국기전 29
동방제국기전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