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도검무안 31화]
第五章 개방과의 인연 (5)
노인이 눈살을 가늘게 좁히며 말했다.
“네놈…… 도귀 쪽 무공을 쓴다. 그렇지?”
“그렇습니다.”
야뇌슬은 순순히 대답했다.
이들은 부도주에 대해서 소상히 연구했다.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적에 대해서 연구한다.
무공 같은 것을 속일 수는 없다.
“저놈들 무공을 쓰면서 저놈들에 대해서 묻는다. 놈들에게서 떨어져 나온 놈이군.”
“그렇습니다.”
“도귀들과 원한이라도 있는 것 같은데?”
이들은 적암도 무인들을 도귀라고 일컫는 것 같다.
도귀…… 딱 적당한 명칭이다. 섬에서 기어 나와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으니 정말 도귀다.
“개인적으로…… 원한이 좀 있습니다. 도귀라는 자들에 대해서 말해주실 수 있습니까?”
‘도귀라는 자?’
노인의 눈에서 또다시 기광이 번뜩였다.
도귀를 ‘도귀라는 자’라고 말하는 사람은 어떤 부류일까? 도귀를 모르는 자일 것이다.
이 놈…… 도귀와 같은 무공을 사용하지만 도귀들의 행동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
장로는 낯선 젊은이에게 호기심을 느꼈다. 아니, 전세를 반전시킬 수 있는 단초를 찾은 느낌이었다.
이놈을 이용해야 한다.
이놈은 도귀들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 분명히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무공 또한 놀라울 정도로 뛰어나다. 자신을 이토록 곤경에 처하도록 밀어붙이는 놈은 없었다.
이놈을 이용해서 도귀들을 친다. 차도살인(借刀殺人)이다.
노인이 진기를 풀면서 말했다.
“클클! 주먹 뼈가 부러지도록 손발을 맞춰봤으니…… 이젠 술 귀신을 만날 차례군. 어떤가?”
야뇌슬이 말했다.
“제 일행을 데려와 주시겠습니까? 해변 송림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많이 기다릴 겁니다. 이야기는 그 후에 하죠.
취화선개(醉火仙丐).
노인이 자신을 소개했다.
야뇌슬과 마록타는 그의 별호를 듣고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더 있는가? 그들로써는 처음 들어본 별호다. 취화선개가 어떤 인물인지 사전 지식이 전혀 없다.
취화선개의 눈빛이 또 빛을 뿜었다.
‘이놈들…… 뭐야?’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인간인가, 땅에서 솟구친 인간인가.
무림인치고 취화선개라는 별호에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다. 야뇌슬 정도의 무인들은 한 자리에 앉아서 같이 대화를 나눈다는 사실만으로도 영광스러워서 어쩔 줄 몰라 한다.
중소문파의 장문인들, 각 지역의 패주들…… 그런 자들도 발 벗고 뛰어나와 접대를 한다.
그런데 이놈은…… 아무 것도 모른다.
그가 지극히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야뇌슬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야뇌슬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마록타를 소개하려고 할 때,
“주공, 시종까지 소개하는 법은 없지요. 키키! 이놈은 그저 야복, 야복이라고 불러주십쇼. 키키!”
야복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말했다.
그는 허리가 굽었다. 그래서 사람을 쳐다보기 위해 눈을 들면 눈동자를 위로 치켜뜨면서 노려보는 모습이 된다.
악의는 없고, 오래된 습관이다.
마록타는 소개만 거부한 게 아니다. 두 사람에 대화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뒤로 일 장 가량 물러나 시립했다.
“시종인가?”
“그렇습니다.”
야뇌슬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마록타가 소개를 거부한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그는 신안을 수련했다. 신안이라고 해서 멀리 있는 것을 자세히 본다거나 남들이 못 보는 것을 보는 게 아니다. 사람이 풍기는 분위기를 본다.
이 사람은 악인인가, 선인인가. 무공이 야뇌슬보다 강한가, 못한가. 싸워서 이길 수 있는가, 없는가.
그런 종류의 판단이 정확할 리는 없다.
하지만 그래도 해본다. 부족하고, 미흡하고, 정확하지 않지만 최선을 다해서 염왕을 돕는다. 시종이 주인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바친다.
그는 취화선개에게서 호감을 느끼지 못했다.
취화선개의 마음속에 부정함이 있다.
취화선개는 오랜 연륜으로 마음을 숨기고 있지만, 마록타의 직감은 순수함 너머에 숨어있는 욕구를 읽어냈다.
- 염왕, 이놈이 널 이용하려고 해.
마록타가 소개를 거부하고 뒤로 물러서서 시립한 데는 그런 뜻이 담겨있다.
‘굳이 그럴 필요 없는데……’
야뇌슬은 속으로 쓴 웃음을 흘렸다.
취화선개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대하고 있는지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가장 잘 안다.
개방의 장로가 한낱 무명배에게 따뜻한 말을 건넬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나. 방금 전까지만 해도 손속을 휘둘렀던 사람이 얼굴에 환환 미소를 머금고 다가올 때는 이미 계산이 끝났다고 봐도 좋지 않은가.
사람을 읽는 게 모든 일의 기본이다.
자신은 이미 취화선개를 읽었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술을 마시자고 하는지 안다.
취화선개가 호로병을 들어서 쭉 들이켠 후 말했다.
“적암도가 대체 어디 있는 섬인가?”
“남쪽인데…… 뭐라고 말할 순 없군요.”
“중원은 처음인가?”
“그렇습니다.”
“적암도 사람들이 두 패로 갈린 것 같군. 도귀 편은 이백 명쯤 되던데, 자네 편은 몇이나 되나?”
“없습니다.”
“자네하고……”
취화선개가 마록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단 둘 뿐이냐는 뜻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밖에 없습니다.”
야뇌슬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주 긴 싸움을 생각했다.
섬에서 배를 타고 나올 때는 부도주를 찾아서 목숨만 취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럴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의 무공이다.
심등과 십이묘환법 덕분에 절정고수 두 명을 제거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무공으로 부도주에게 덤비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나 마찬가지다.
부도주와 어떻게 싸워야 하나? 아니, 그 전에 노모보와 어떻게 싸울까?
중원에 나와서 노로곤을 봤다. 그리고 개방이 전전긍긍하는 모습도 봤다. 개방 분타가 쫓기다 못해서 총단에 구원 요청을 했고, 개방 장로가 직접 나섰다.
이 일련의 사건으로 모든 게 정리된다.
부도주는 성공했다.
중원 무림을 거침없이 무너트리고 있다. 그가 원하는 패권(覇權)을 차지해가고 있다. 중원이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지만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적암도에 비하면 수백만 배는 족히 되는 중원.
이 땅에 사는 수십만 명의 무인을 상대로 거침없이 질주하고 있다.
야뇌슬은 그 점만 본 것이 아니다.
노로곤은 정말 평범한 자다. 지금 당장 나서도 그런 자는 당장 요절낼 수 있다. 섬에 있을 때는 형이라고 불렀지만 아버지의 머리를 잘라서 장대에 꽂는 순간, 적이 되었다. 언제든 죽이고 싶으면 죽일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 밑에 낯선 자들이 모여 있다.
그들은 적암도 사람이 아니다. 중원인이다. 즉, 중원에 나와서 세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흡수한 무인들이다.
부도주는 커졌다.
단신으로 뛰어들어서 목숨만 따내는 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의 곁에 다가서지도 못할 만큼 인(人)의 장막(帳幕)에 둘러쳐져 있으리라.
부도주가 큰소리 땅땅 치고 섬을 떠날 만했다.
상당히 피곤하고 긴 싸움이 될 것이다.
물론 지금은 어디서부터 싸움을 풀어나가야 될지 단초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취화선개와 마주앉았다.
부도주에 대해서 소상히 알아야 하기 때문에. 그가 만든 조직, 그가 일군 모든 행적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개방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중원에 들어서자마자 개방 장로와 마주쳤고, 이렇게 앉아서 술 한 잔이라도 할 수 있게 된 것은 하늘에 계신 부모님이 도와준 덕분은 아닐까?
취화선개는 마록타가 간파한대로 자신을 이용하려고 한다.
적암도에 대해서 알아낼 생각이다. 부도주와 한 패가 아닌가 싶어서 감시할 요량이다.
그런 점은 감안하고 대화를 나눈다.
취화선개는 많은 것을 숨길 것이다. 어떤 부분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야기를 전개할 것이다. 또 어떤 점은 아예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자신은 정직함으로 대한다.
지금 당장 취화선개를 속일 수는 있다. 앞으로도 계속 속여 나갈 자신도 있다.
그런데…… 그럴 필요가 있나?
단지 정보나 좀 얻으면 되는 사람에게 거짓말을 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괜히 피곤하기만 하다. 또 거짓말은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오기 십상이다.
지금쯤 개방도들은 자신과 마록타에 대해 조사하라고 전서를 띄웠을 게다.
전서를 받은 자들은 이곳저곳을 쑤시고 다닐 게다.
자신의 용모, 마록타의 용모.
두 사람의 요모조모를 설명하면 답이 딱 나온다. 적암도에서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자들…… 적암도 무인들 입장에서는 살아있으면 안 되는 자들.
개방이 자신들에 대해서 알아내는 건 시간문제다.
괜히 오해 살 짓은 하지 말자. 자신이 말한 것과 저들이 알아낸 것 사이에 조그만 차이도 없는 게 좋다.
그는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자네 둘 뿐이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도귀에게 원한이 있고?”
“그렇습니다.”
“가문을 멸했는가?”
“너무 많은 이야기를 묻는군요. 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아셨으니, 이제 도귀에 대해서 말해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자네…… 아나? 나와 대작한다면서 한 모금도 안 마신 거.”
“아! 예.”
야뇌슬은 호로병을 들어 꿀꺽꿀꺽 소리 내어 마셨다.
취화선개가 의미 모를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흐흐흐! 정말 풋내기군. 강호 경험이 없어도 너무 없어. 이보게. 앞으로 또 기회가 생기거든 방금 전에 싸웠던 사람이 주는 술은 마시지 말게. 특히 자존심에 상처를 입힌 후에는 물 한 모금 안 마시는 게 좋아.”
야뇌슬이 말했다.
“도귀에 대해서는 언제 말해주실 겁니까?”
술에 독 같은 건 타지 않았다. 하지만 술 자체가 극독이다.
천일취(千日醉)!
웬만한 술고래도 작은 잔으로 석 잔만 마시면 나가떨어진다는 독주 중에 독주다.
술에 미쳐서 항상 술 취한 체 세상을 산다는 취화선개조차도 석 잔 밖에 마시지 않았다. 호로병을 들어서 들이켜는 척 했지만…… 그렇게 마실 수 없는 술이다.
야뇌슬은 단숨에 반병을 들이켰다. 잔으로 따지면 족히 예닐곱 잔은 마셨다. 그런데도 취기가 엿보이지 않는다. 얼굴에 홍조가 깃들지도 않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야뇌슬은 술이 맛있는지, 호로병을 들어서 남은 술까지 모두 털어 넣었다.
“크크크! 크크크크! 좋아, 좋아. 내가 오늘 임자 만났군. 아주 된 통으로 만났어. 좋아. 털어좋지. 털어놔. 어디서부터 말해줄까? 일 년 전? 일 년 전에 도귀 놈들이 바다를 건너온 건 알지? 그래, 거기서부터 말해주지.”
취화선개가 야뇌슬의 얼굴을 빤히 보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천일취를 한 병이나 마시고도 멀쩡한 모습이 못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쿵!
야뇌슬은 통나무 쓰러지듯이 앉은 자리에서 뒤로 넘어갔다.
취화선개가 장장 한 시진에 걸쳐서 부도주와 도귀들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마친 후다.
“허!”
취화선개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말을 하는 동안 야뇌슬은 취해있지 않았다. 너무도 멀쩡해 보였다. 헌데…… 말을 마치자마자 뒤로 넘어갔다.
그는 천일취에 취해있었다.
마록타가 조용히 다가와 야뇌슬은 안아 올렸다.
“선개인지 똥개인지…… 또 한 번 이런 장난하면…… 크크크!”
“뭐, 뭐라고!”
취화선개는 입을 쩍 벌린 채 말문을 잃었다.
그가 한낱 시종에게 똥개로 불린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