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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검무안-85화 (85/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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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검무안 85화]

第十四章 잠입(潛入) (2)

그나마 선녀가 하강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리따운 여인이 있어서 다행이다.

그녀는 억눌린 마음을 보듬어준다.

“목욕하고 싶은데 따뜻한 물 좀 준비해줄 수 있어?”

“그, 그럼요. 얼마든지……”

“목욕하면서 술 한 잔 하고 싶어. 탕 옆에 백주(白酒) 좀 놔줘.”

“일겠습니다. 안주는…… 아무래도 물기가 있으니까 간단한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알아서 준비해줘.”

“알겠습니다!”

그녀가 말은 건네 오면 신이 난다. 음성도 어찌 그리 고운지…… 마치 옥구슬이 쟁반 위로 도르륵 굴러가는 것 같다. 그런 음성이라면 백날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또 그녀의 음성에는 교태가 섞여 있다.

그녀가 옷을 벗는다. 욕탕 속으로 들어간다. 자신이 데워준 물에 몸을 담근다. 그리고 백주를 한 잔 따라서 마신다. 몸이 쫙 풀리면서 나른해진다. 그러면 머리를 탕에 기대고 깊은 숨을 토해낼 게[다. 발을 쭉 뻗으면서. 하얀 다리를 쭉 뻗으면서.

그녀가 목욕하는 장면이 고스란히 상상된다.

그것만으로도 흥분이 치민다. 여인은 말만 했을 뿐인데, 그런 상상을 이끌어 낸다.

사내들은 무섭지만 여인은 괜찮다.

사내들이 술을 마셨다.

창문 너머로 큰 산의 검은 봉우리가 보인다.

봉우리 위에 달이 걸렸다. 환하게 빛나는 반달이 검은 나무들을 비춘다.

“달은 뭐니 뭐니 해도 바다에 뜬 달이 최고야.”

금방이라도 몸을 퉁기면서 일어설 것 같은 사람, 노염백이 말했다.

“그렇지. 하늘에 하나, 바다에 하나. 바다에는 늘 쌍둥이 달이 뜨지. 하늘의 달은 맑고, 바다의 달은 출렁이고. 흠! 그러고 고면 바다 본 지도 꽤 오래 됐어.”

“그만해라. 자꾸 바다 이야기 하니 더 보고 싶잖아.”

덩치 큰 사내, 우람한 근육을 자랑하는 사내, 곡문권이 술 단지를 입에 대며 말했다.

꿀걱! 꿀꺽!

그는 술을 물처럼 마셨다.

“하하하! 그래, 그만하자.”

“오늘 진탕 마시자고. 내일부터는 이 술도 그리워질 테니.”

“그렇지? 그래, 먹는 게 남는 거다. 오늘 술 먹고 죽어보자. 하하하! 자 마셔!”

그들은 술이 원수라도 되는 냥, 마셔댔다.

사락! 사락! 사락!

옷자락 끌리는 소리가 방안을 울린다.

그녀는 방안으로 들어서다 말고 멈칫 섰다.

침상에 사내가 앉아있다. 웃통을 벗어던진 몸으로 침상에 앉아서 자신을 쳐다본다.

그녀는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분 거야?”

“여자 안아본지 오래 됐잖아.”

“호호호! 나가서 다른 여자 골라봐. 나 쉬운 여자 아냐.”

그녀는 경대 앞에 앉아서 머리를 빗었다.

물기가 젖은 머리에서 살 냄새가 풍겼다. 알몸으로 목욕을 하던 모습이 그려졌다.

노모보가 침상에 누우며 말했다.

“넌 내 여자야.”

“그래. 네 여자야. 옛날에도 지금에도. 야리몌한테 수태를 시키면서도 그 말을 했지. 독고금에게 일처 자리를 양보하라면서 그 말을 했고. 또 남은 게 있어?”

“그래도 넌 떠나지 않으니까.”

“너무 믿지 마. 그러다가 뒤통수 맞아.”

“그럴 거야?”

“안 그런다는 보장은 못해.”

“그만하고 와.”

“싫어. 피곤해.”

“그만해.”

“정말 싫어. 다른 여자와 자는 거 뭐라고 안 해. 하고 싶으면 해. 하지만 난 싫어.”

미와빙은 다정했다. 하지만 그녀의 거절은 분명했다.

노모보가 일어나 앉았다.

“싫은 이유 하나만 들어볼까?”

“안 씻었잖아.”

“그렇군.”

노모보는 씩 웃으면서 상의를 걸쳐 입었다.

“난 좀 취해야겠어. 있다가 술 생각나거든 나와. 이 집…… 그래도 술은 잘 담그는 것 같더라. 술 맛이 괜찮아.”

뚜벅! 뚜벅!

노모보가 미와빙의 등 뒤로 걸어 나갔다.

날이 밝았다.

쉬익! 촤라라락! 쒸이익!

곡문권이 언월도를 휘둘렀다.

천왕구도 미립강의 천왕구참도가 그의 언월도에서 재해석된다.

도련 도객들이 사용하는 천왕구참도와 전혀 다른 절공이 펼쳐진다. 진실로 강하다. 파괴적이다. 타고난 천력을 바탕으로 도의 장점을 최대한 살린다.

언월도를 후두르는 팔목에 힘줄이 불끈 선다. 땀이 줄줄 흘러내려 폭우를 맞은 것 같다.

그는 새벽부터 한 시진 동안이나 중도를 휘돌러댔다.

미루극은 계곡물을 택했다.

옷을 활딱 벗고 물속으로 들어가서 가부좌를 틀었다.

운기조식으로 상쾌한 하루를 맞이한다. 지난 밤의 술기운을 말끔히 씻어낸다. 새로운 하루를 맞이해서 육체도 마음도 완전히 새롭게 탈바꿈한다.

노염백은 커다란 나무를 머리로 들이받았다.

탁! 따악! 딱!

한 번씩 머리로 들이받을 때마다 커다란 고목이 강풍에 휩쓸린듯 우스스 몸부림친다.

그는 가문의 절기를 수련했다.

적암도 오륜(五輪)에 포함될 만큼 무공도 인정받았다.

하지만 그가 제일 잘하는 것은 화륜이 아니라 박치기다. 싸움에서 쓸 일이 별로 없지만, 그래도 기회가 닿기만 하면 박치기를 시도하곤 한다.

지금까지 누구와 부딪쳐도 다 이겼다.

천력을 타고난 곡문권도 노염백의 박치기는 당하지 못했다. 그에게 한 번 들이 받친 후에는 근 십여 일 동안 깨진 머리를 감싸 쥐고 다녔다.

박치기는 정신을 차리기에 좋다.

쿵! 쿵! 따악! 쿵!

미와빙은 산새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면서 일어났다.

높은 산 초입에 위치한 객잔이라서인지 공기도 맑고 새가 지저귀는 소리도 좋다.

침상에서 몸을 일으킨 그녀는 낯익은 사람을 봤다.

노모보, 그가 탁자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다. 김이 가늘게 피어나는 찻잔을 들고 창밖을 쳐다본다.

“언제부터 와있었어?”

“방금.”

“방금 온 것 같지 않은데?”

“잘 자더군.”

“그럼. 난 언제나 잠은 잘 자잖아.”

그녀가 길게 기지개를 켰다.

“목욕물 데워놓으라고 했고, 아침 반주는 생략했다. 아침은 쌀죽으로 준비시켰어.”

“차는?”

“목욕하고 나와. 내가 준비해놓겠다.”

“왜 그래? 어제부터?”

“내 여자니까 내가 챙겨야지.”

“챙겨주는 건 좋은 데 안하던 짓을 하니까 조금 부담스럽네?”

“독고금에 대한 생각, 정리했다.”

“……”

미와빙이 침상에서 내려오려다 말고 멈칫했다.

“너와는 인연이 없는 여자. 아버님이 혼인 날짜를 받아놨지만 거절하겠다. 그러니 일처를 양보할 필요 없어. 이처나 삼처 같은 것도 없다. 너 하나.”

“조건은?”

“이 세상.”

“호호호호! 호호호!”

미와빙이 깔깔 대고 웃었다.

그러나 노모보는 웃지 않았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창밖만 쳐다본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얼굴만 보고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다.

“현재 이 세상을 쥐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

“……”

이번에는 노모보가 말을 하지 않았다.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뜰 수는 없는 법. 벨 자신 있어?”

결국은 나와야 할 말이다.

태양이 되고자 한다면 하늘에 떠있는 태양부터 떨궈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무슨 수로 태양이 되겠는가.

“가능하다면.”

노모보가 오랜 결단을 드러낸 듯 진중하게 말했다.

가능하다면…… 무공으로, 혹은 암습으로……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떨궈낼 수 있다면 떨궈내겠다.

“가능은 해. 가능한 방법을 알지.”

미와빙의 눈가에 사악한 요기가 감돌았다.

“그럼 추진해.”

“약속 하나만 해준다면.”

“그 약속, 말할 필요 없어. 이 순간부터 난 네 거야.”

노모보가 들고 있던 차를 훌쩍 마셨다.

미와빙이 노모보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쌌다.

“그럼 밖에 나가서 말해. 출발은 이삼일 후에 한다. 이삼일 정도 더 쉬어라. 호호호! 계획이 바뀌었잖아?”

태양을 떨구는 것은 간단치 않다.

지는 해라면 그나마 가능성이 있지만 중천에 떠있는 해라면 심사숙고해야 한다.

태양을 떨구는 것만으로 태양이 되는 것도 아니다.

지금 하늘을 차지하고 있는 태양도 완전한 태양은 아니다. 두 개의 해가 떠서 자웅을 겨루고 있다.

‘추여룡…… 죽여야 해.’

그는 제일 첫 번째 제거 대상이다.

그를 죽이면 강북 무림은 머리를 잃는다. 약간의 이간책만으로도 사분오열된다. 그리고 흩어진 강북 무림은 적암도 사주들의 표적으로 전락한다.

추여룡을 제거하라!

이 명령은 빈산릉의 머리에서 나왔을 공산이 크다.

독고금과의 혼인을 약조로 그의 머리를 원했지만, 이미 그 전에 추여룡만은 죽여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었으리라.

빈산릉이 추여룡을 원한다.

그렇다면 추여룡은 죽여야 한다.

한쪽 해만 떨구는 건 의미가 없다. 두 개의 해를 같이 떨궈야 한다. 헌데…… 그 일을 동시에 해야 한다.

한 개를 떨구면 다른 한 개는 자연히 강성해진다.

련주부터 떨구면 강북 무림의 성세가 급격히 높아진다. 그때는 오히려 사주들이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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