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六首 심탐무우(尋探無憂)
-사조를 찾아가다.
마침내 한 가닥 희망(希望)의 빛을 발견하다.
낙양에서 중조산으로 가려면 황하를 건너야 한다.
우려와는 달리 배를 타고 강을 건너고 다시 중조산 경내로 들어설 때까지 별다른 일은 생기지 않았다.
중조산은 수백 리에 걸쳐서 동에서 서로 길게 누워서 산서성의 아랫자락을 마무리하는 곳이다. 그 산맥을 둘러 황하가 흐르니, 이 산은 길고 좁아 북쪽으로는 태행산(太行山)을 면하고 황하 건너 남쪽으로는 화산(華山)과 궤를 잇는다.
이 산을 중조라 이름한 것은 바로 태행산과 화산 사이의 띠와 같다고 한 것에서 연유한다.
산세는 별게 아닌 듯했지만 실제로 산에 들어서자 계곡은 깊고 기봉절학(奇峰絶壑)이 시선을 압도하며 그 웅자를 자랑한다.
밤을 도와 쉬지 않고 길을 재촉한 끝에 아침녘이 되자 중조산에 도달할 수는 있었지만 그때부터가 문제였다. 지도에 그려진 산세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점심때가 되도록 그야말로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녀도 지도에 그려진 것과 비슷한 산세는 찾아보지도 못하자 천무가 중얼거렸다.
"이러다가는 3일 내에 돌아가기는커녕, 그동안 찾지도 못하는 게 아닌가 모르겠군……."
"이대로는 곤란할 것 같으니 다른 방도를 찾아봐야 될 것 같다."
"무슨……?"
"사냥꾼이나 나무꾼 같은…… 이곳의 지리를 잘 아는 사람을 찾아서 무우곡의 위치를 물어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구나."
"그게 낫겠습니다!"
천무도 찬동했다.
하지만 심산으로 들어서니 사냥꾼이나 나무꾼을 만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간신히 한 사람을 만났지만 그 사냥꾼은 그런 이름 처음 듣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만 젓고 토끼를 쫓아 팔짝 사라져 버렸다. 계속해서 돌아다녔지만 마찬가지. 난감해진 그들은 잠시 바위에 걸터앉아서 숨을 돌리면서 대책을 궁리했다. 그러나 뾰쪽한 수가 나올 리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시간만 가니 초조해진 감천형은 숨을 돌리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다시 일어났다.
"좀 더 깊이 들어가 보자. 사조께서는 은거하신 곳은 아무래도 심산유곡일 테니……."
그때였다.
어디선가 퉁소 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두 사람은 부지중에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들이 퉁소 소리를 따라 가보니 송백(松柏)이 하늘을 가릴 듯 우거진 숲속에서 16, 7세가량의 초동(草童) 하나가 바위에 걸터앉아서 퉁소를 불고 있었다.
그 주위로는 소 한 마리가 풀을 뜯고 있는 것을 보니 소에게 풀을 뜯기러 온 듯.
그들이 나타나자 초동은 퉁소 불기를 그치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산속 초동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바라보는 눈에 총기가 반짝이고 있어서 보통 소년이 아닌 듯한 느낌이 들었다.
"소형제, 혹시 무우곡이 어딘지 알고 있나?"
천무가 먼저 입을 열어 물었다.
"……."
초동은 반짝이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오히려 되물었다.
"무우곡을 왜 찾는 거죠?"
설마 되물을 줄을 몰랐던 천무가 주춤하자, 감천형이 그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무우곡을 아느냐?"
초동은 말없이 그를 쳐다보더니 문득 고개를 끄떡였다.
"알죠!"
"안단 말이냐?"
천무가 흥분해 소리쳤다.
"거기가 어딘지 우리를 안내해 줄 수 있겠느냐?"
감천형의 말에 초동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럴 수는 없어요. 난 지금 집으로 돌아가 봐야 하거든요? 음…… 좋아요, 나쁜 분들 같지는 않으니 말씀드리죠."
초동은 손가락을 들어 송백(松柏)의 숲 너머로 보이는 계곡을 가리켰다.
"저 산을 넘어 산자락을 끼고 돌면 계곡이 나타나죠. 거기 가면 알 수가 있을 거예요."
말을 마치자 초동은 퉁소를 짧게 불었다.
그러자 풀을 뜯고 있던 소는 길게 울음을 흘리더니 투벅투벅 초동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곤 초동은 두 사람에게 고개를 까닥거려 보이고는 소 등에 올라 숲 사이로 사라져 가는 것이 아닌가.
은은한 퉁소 소리가 소 발걸음 소리에 맞춰서 숲을 타고 흘렀다.
"이건……."
천무가 부지중에 감천형을 돌아보았다.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드는군요?"
그의 말이 아니라도 감천형도 마찬가지였다.
안개가 깔린 산기슭, 소년이 소를 타고 사라지는 것은 무슨 심우도(尋牛圖) 한 폭을 보는 것 같아 누구라도 신비로운 느낌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단 가보도록 하자."
감천형이 몸을 날리자, 천무도 뒤를 따랐다.
길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초동의 말대로 가니 길이 있었다.
"여긴 우리가 좀 전에 지나친 곳이로군요. 지나가면서도 몰랐다니……."
천무가 중얼거렸다.
숲이 무성한 계곡이 그들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희미하게 안개가 서린 가운데 산 위에서 쏟아지는 양광이 계곡의 바위에 부딪혀 절가(絶佳)한 경치가 그들의 눈앞에 펼쳐졌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여긴 막다른 곳인데……."
주위를 살펴보던 천무가 미간을 찡그린다.
아무리 살펴봐도 더 이상 길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대체 여기 뭐가 있다고……."
그는 말을 하다가 감천형을 보면서 입을 다물었다.
그가 바라보는 곳,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커다란 바위에 뭔가 써 있었던 것이다.
<지척천애(咫尺天涯).>
글자는 선명하다. 나뭇가지로 이끼를 긁어 쓴 듯한데 암반에 새긴 것이 아니니 쓴 지 오래된 것이 아닌 게 분명했다.
"이건 좀 묘하군요. 우리더러 보라고 쓴 것 같은데?"
글자대로라면 눈앞이 하늘 끝이라는 이야기다.
그 의미는 눈앞에 있지만 잡을 수 없다는 것. 결국 보이지 않지만 가까운 곳에 무우곡이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어디에?
단 몇 발자국도 더 움직일 수 없는 곳이 바로 여기였다. 앞은 천길 절벽. 좌우로도 깎아지른 절벽. 말 그대로 막다른 계곡이었다.
"그 꼬마가 우릴 놀린……!"
입을 열던 천무는 감천형이 막힌 계곡을 향해 움직이는 것을 보고 말을 멈추었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설마 여기에 무슨 기문진(奇門陣)이라도……!"
말을 하던 천무의 안색이 돌변했다.
불과 서너 걸음 앞서 가던 감천형의 신형이 앞의 천길 벼랑에 부딪히는 순간에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사형!"
천무가 놀라 앞으로 달려갔다.
순간, 그는 지독한 충격이 머리에 부딪히는 것을 느껴야 했다. 바위에다가 이마를 부딪친 것이다. 얼마나 세게 부딪쳤는지 그 소리가 계곡을 울려 메아리가 칠 정도였다.
"크으윽!"
천무가 이마를 부여잡고서 뒤로 물러났다.
그때, 바위 속에서 손을 불쑥 튀어나와 그를 바위 속으로 잡아당겼다.
감천형이었다.
"이게 도대체……."
바위 속으로 끌려 들어간 천무가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무우(無憂).>
십 장 높은 바위 위에 커다랗게 글자가 새겨져 있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
바위를 치고 부딪치면서 굽이 돌아 흐르는 계류(溪流)의 소리가 청랑하다. 가로막혔던 천길 벼랑이 사라져 버리고 탁 트인 정경이 눈을 시원케 했다.
경색이 일변했다.
갑자기 전혀 다른 세계에 온 듯이 밭이 있고 논이 있었다. 그 가운데 시내가 흐르고 화원과 약초 밭이 보인다. 그 밭에서는 소 몇 마리가 한가로이 꼬리를 치면서 그들을 바라본다.
그 가운데 자리한 것은 초가 서너 채.
주변으로는 대가 우거지고 송백이 푸르름으로 계곡을 에워싸 바람을 막는다. 여기저기에 꽃들이 흐드러져 곡 내에는 그야말로 청랑한 화향(花香)이 그윽하였다.
음메에…….
그들을 바라보던 소 한 마리가 길게 울었다.
"여긴 도대체……."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천무가 불현듯 중얼거렸다.
"앞의 절벽은 기문진이야. 사람의 눈을 차단하는 역할을 하는 게지……."
그의 손을 끌어 안으로 데려온 감천형이 답했다.
그 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하하…… 제대로 찾아왔군요?"
그들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감천형의 눈에 놀람의 빛이 튀어 올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타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그들에게 길을 가르쳐 주었던 그 신비한 초동이었던 까닭이다.
"아니, 네가 어떻게 여기에?"
초동이 그들을 보면서 씨익, 웃음을 떠올렸다.
"여기가 제 집이니까, 여기 있는 게 당연하겠죠. 실은…… 오늘 손님이 오실 테니까 이곳으로 안내하라는 말씀을 듣고 마중을 한 겁니다. 혹시라도 못 찾아올까 걱정했더니 다행이군요."
그의 눈에는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결국 그들이 이곳을 찾아올 수 있을지 아닌지를 시험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감천형과 천무는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마중이라고?"
그들은 부지중에 서로를 마주 보았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이 찾아올 것을 어떻게 알고 저 초동을 미리 마중 내보냈단 말인가?
무슨 옛날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상황.
"어서 가시지요. 기다리고 계십니다."
초동이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 마당에 무슨 생각을 더 할 수 있겠는가.
두 사람은 홀린 듯한 표정으로 초동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안내된 곳은 초가의 가운데 자리한 죽헌(竹軒)이었다. 지붕에서 기둥과 벽까지 모든 것을 푸른 대나무로 만든 그 죽헌에서는 은은하게 금음(琴音)이 들리고 있었다.
그 옛날 뛰어나게 금을 잘 타던 백아(伯牙)의 금음을 알아주는 친구로 종자기(鍾子期)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는 백아의 금음을 듣고 태산을 볼 수 있었고, 도도히 흐르는 큰 강물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하여 고사(故事)로써 지음(知音)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감천형은 무부(武夫)로서 그러한 조예는 없다.
하지만 그 금음을 듣자 마음이 편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죽헌에 앉아서 금을 타고 있는 것은 백의유생(白衣儒生)이었다. 그는 고요한 손짓으로 금을 타고 있는데, 단아(端雅)한 기품이 멀리에서부터 느껴졌다.
"손님들께서 당도하셨습니다."
초동이 그 죽헌의 앞에서 말했다.
금음이 멎었다.
그리고 백의유생은 손을 거두고 몸을 일으켰다.
초동의 안내로 죽헌에 들어선 두 사람은 그 백의유생의 얼굴을 보고는 놀라 안색이 달라졌다.
뜻밖에도 그의 얼굴이 너무 젊었던 것이다.
이십여 세나 되었을까?
단아한 얼굴.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미남은 아니지만 기품있는 얼굴은 사람의 눈을 끌게 하고도 남음이 있고, 샛별 같은 눈동자는 나이답지 않게 지혜로써 깊었다. 높은 콧마루와 한일 자를 그은 붉은 입술 등은 그의 심지(心志)를 말하는 듯하다.
그들을 맞아줄 사람이 당연히 사조인 경월선인일 것으로 생각했던 두 사람은 얼떨떨한 표정이 되어 부지중에 서로를 마주 보았다.
'설마…… 내공이 극고한 경지에 이르러서 반노환동(返老還童)이라도 한 것일까?'
실로 어이없는 생각을 하고서 감천형 등이 엉거주춤해 있자, 백의유생이 침착한 음성으로 그들을 맞았다.
"한거(閑居)에 오심을 알면서도 마중치 못하였으니, 죄송하군요. 어서 오십시오."
그의 신분이 과연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감천형은 감히 그에게 소홀히 대할 수가 없어 포권을 해 보이면서 말했다.
"불쑥 찾아와 죄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소생은 감천형이라고 하고, 이쪽은 사제인 천무입니다."
"그러십니까? 저는 한효월(寒曉月)이라고 합니다."
'한효월?'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들어본 이름이 아니다. 하긴 산속에 사는 일개 청년의 이름을 들어보았을 리가 없다.
정말 반로환동을 했다면 몰라도.
그가 권하는 대로 자리에 앉자 초동이 이내 차를 날라왔다.
"맛을 보십시오. 산골의 것이라 대단치는 않지만 이곳의 물이 좋은 편이라 피로에 좋습니다."
스스로를 한효월이라 밝힌 백의유생이 차를 권하며 하는 말이다.
과연 싸아한 것이 혀를 친다. 말 그대로 정신이 새로워지는 듯한 맛. 평범한 차가 가질 수 있는 맛이 아닌 듯했다.
"한 공자께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십시오."
찻잔을 내려놓은 감천형의 물음에 한효월은 고개를 끄떡였다.
"우리들이 이곳에 올 것을 어떻게 알고 사람을 시켜서 마중을 보낸 것인지……."
한효월은 희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대수로운 일은 아닙니다. 산중에 살다 보면 간혹 다른 사람보다는 감각이 예민하게 되어 가끔 앞일을 예측하기도 하니까요. 오늘은 운이 좋았던 모양입니다. 아성이 두 분을 모시고 온 것을 보니……."
단순히 운이 좋았다?
이 마당에 그런 말을 믿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감천형은 묵묵히 그를 보았다.
평범한 청년은 분명히 아니었다.
그가 보통 사람이었다면 이미 당신들은 누구며, 여기에 무엇 하러 왔느냐를 따져 물었을 터인데 전혀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나이를 따지기 이전에 저런 사람에게는 누구라도 함부로 대할 수가 없게 되는 법이다.
감천형은 천천히 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이곳이 무우곡이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여기에 경월선인이란 분이 사신다고 들었는데…… 그분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
그의 말에 한효월은 안색이 조금 달라졌다.
"그분을 왜 찾습니까?"
"그분을 만나야만 말할 수 있습니다."
"……."
침착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던 한효월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분은 제 사부이십니다."
"사……?!"
감천형과 천무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사, 사부라니? 그럼 그 어른이 당신……."
감천형은 묻다가 입을 다물었다.
경월선인이 그의 사부라면 그는 자신의 윗사람이 되니 감히 당신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게 사실입니까?"
감천형이 말을 바꾸어 묻자 한효월은 담담히 웃어 보였다.
"무엇 때문에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
부지중에 서로를 돌아보았던 감천형과 천무.
"그럼 혹시 독고 성에 명(名)을 해라고 하시는 분을 아십니까?"
"뵙지는 못했지만, 소생의 사형이 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효월이 정색을 하고 머리를 끄떡이자 감천형은 자세를 바로하고 그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미처 알아뵙지 못하고 큰 실수를 했습니다. 소질, 천형이 사숙을 뵙습니다!"
"사질(師姪)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감천형이 무릎을 꿇자 한효월이 놀라 몸을 일으켰다.
감천형은 그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소질 천형과 사제 천무는 바로 독고 성에 해 자를 쓰시는 선사(先師)의 제자들입니다."
한효월의 안색이 달라졌다.
"선사라니?"
감천형이 입술을 물었다.
"사부께서는 얼마 전에 변을 당하셨습니다."
"변을? 설마…… 독고 사형께서 돌아가셨단 말이오?"
한효월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감천형은 지난 경과를 간단히 그에게 설명했다.
그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한효월은 길게 탄식을 토해냈다.
"그간 천기가 어지럽더니 그런 일이……."
"사조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천무가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그 어른께서는 이곳을 떠난 지 벌써 6년이 넘었는데…… 아직 소식이 없소."
한효월의 말에 감천형 등의 안색이 돌변했다.
"그럼 지금 어디 계신지 모른다는 말입니까?"
"그렇소."
"찾아볼 방법도 없습니까?"
금방이라도 발을 구를 듯한 그들의 태도에 한효월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어쩌면 사부께서는 오늘의 일을 이미 예견하고 계셨던 것 같소……."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한효월은 품속에 손을 넣어 금낭(錦囊) 하나를 꺼냈다.
"이것은 사부님께서 떠나기 전에 찾아오는 사람이 있거든 열어보라고 주신 것이니 한번 보기로 합시다."
"……?"
감천형 등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것을 보고 있는 가운데 한효월은 그것을 대나무 탁자 위에다 올려놓고 묶인 끈을 풀었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봉서(封書) 하나와 더 작은 금낭 두 개.
그 금낭에는 각각 작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하나는 <나의 생사에 의문이 생기거든>이라고 적혀 있었고, 다른 하나에는 <너의 신세를 알게 되면>이라고 적혀 있었다.
한효월은 그것을 보면서 길게 탄식했다.
"나의 신산지술(神算之術)만큼은 아직 사부님을 따라갈 수 없군……."
그 말은 평범한 듯했지만 세심히 살펴본다면 놀라운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도 했다.
신산지술만큼은 따라갈 수 없지만 다른 것은 그에 못지 않다는 것일까?
봉서가 개봉되었다.
<이 봉서를 네가 읽는다는 것은 네 사형에게 변고가 생겼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가 겁난(劫亂)을 제지함에 실패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니, 강호의 대란(大亂)은 이미 목전에 도래한 셈이다.
이 사부는 전대(前代)의 인과(因果)로 인하여 직접 강호에 나설 수 없어, 무리임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네 사형인 독고해를 강호에 내보낸 것이다.
…….
이 사부는 모종의 중대한 일 때문에 강호에 나간다.
만약 5년 이내에 내가 돌아오지 않고, 네가 이 글을 보게 된다면 이미 강호의 겁난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른 것이다.
거기에 얽힌 인과와 그로 인하여 파생된 당금 천하의 정세는 너무도 복잡하다. 그럼에도 이 사부는 봉신(封神)의 서약(誓約)에 의해 네게 아무것도 말해 줄 수가 없구나. 만에 하나라도 내가 봉신의 서약을 깨뜨린다면 천하는 즉각 회생불능의 상황에 빠지고 말 터이니…….>
봉신의 서약.
과연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은 아직은 아무도 없다. 아니, 누구도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제부터의 모든 상황은 너의 기지로 해결해 나가야 한다.
하지만, 설사 네가 전력을 다한다 할지라도 네가 당금의 정세를 타개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거의 없다.
선택은 네게 달려 있다.
네 일신의 청정(淸淨)을 강호의 혼탁으로 더럽히고 싶지 않다면 너는 즉시 내가 남겨둔 금낭을 다 태워 버리고 은거하도록 해라.
이 글을 보는 순간에 너는 이미 적의 이목에 노출되었을 것이니……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자유롭고자 해도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사부가 네게 더 이상의 자세한 이야기를 해줄 수 없음을 양해하거라.>
봉서의 글은 거기서 끝이었다.
끝에는 거울인 듯 보이는 그림에 달 하나가 배경으로 자리하여 사람의 서명을 대신했다.
뭔가 많은 말을 한 것 같지만 실제로 거기에 남겨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뭔가가 미진한 듯 한효월의 사부인 경월선인은 말끝을 흐리고 있었다. 무엇인가 더 쓰려고 고민하다가 결국 끝을 맺지 못하고 서명을 하고 만 듯한 내용.
한효월은 봉서에서 시선을 돌려 감천형 등을 보았다.
"특별히 알아낸 것은 없군요. 있다면 상황이 엄중하다는 것뿐이니……."
"그렇습니다."
감천형은 무거운 어조로 답했다.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무엇인가, 큰 기대를 가지고 왔었는데 이곳에 와서는 오히려 더 큰 의혹만 생긴 셈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공자!"
초동이 황급히 죽헌 앞으로 달려왔다.
"밖에……."
"침입자가 있느냐?"
한효월이 물었다.
초동은 얼떨떨한 듯한 표정이더니 고개를 끄떡였다.
"맞습니다. 일단의 신비인들이 곡 밖에 은신하고 있습니다. 그중 10여 명이 암중에 침입하다가 성라진(星羅陣)에 갇혔습니다."
"은신한 자들의 능력은 어느 정도나 될 것 같으냐?"
"글쎄요…… 간단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외곽의 수곡대진(守谷大陣)은 발동했느냐?"
"아직……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습니다. 저들의 움직임이 예상보다 훨씬 빠릅니다."
한효월은 잠시 미간을 찡그렸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미 안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네가 나가서 그들을 맞이하도록 해라."
초동은 그럴 리가? 하는 표정이었지만 군소리없이 몸을 돌려 사라졌다.
그의 신법은 나이답지 않게 신속하기 이를 데 없어 한줄기 바람이 이동하는 것 같았다.
그것을 보고는 천무의 안색이 조금 달라졌다.
"밖에 온 자들이 혹시…… 우리 뒤를 따라온 것입니까?"
감천형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한효월은 희미하게 웃었다.
"아마 그럴 것이오. 그렇지 않다면 이곳을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테니까."
"그런 일이……."
감천형은 그 말을 인정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들은 극도로 조심하여 그들이 맹주부를 떠나는 것마저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그들의 뒤를 따라 이곳까지 온 자가 있다면…….
하지만 더 이상 생각을 굴릴 만한 시간은 없었다.
이내 격렬한 싸움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그 소리에 감천형의 얼굴은 일그러졌지만 한효월의 얼굴에는 여전히 태연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과연 어떤 자들이 찾아왔는지 한번 가보기로 합시다."
말과 함께 그는 몸을 일으켰다.
죽헌은 막힌 곳이 아니었다.
사방이 탁 트인 시야가 확보되어 죽헌에서 봐도 곡구가 다 바라보인다.
이미 저녁노을이 지고 있어서 석양이 사방 벼랑에 반사되어 무우곡 내의 경치는 더욱 감탄을 금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감천형은 사오 명의 흑의인이 자신들이 들어왔던 곳에서 초동에게 막혀 있음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숫자가 많고 무공 또한 강하여 초동 혼자서 그들을 막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과연 초동은 입구에서 뒤로 밀리고 있었다.
"사제, 가서 저들을 막아라."
감천형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천무가 거대한 호랑이와 같이 몸을 날렸다.
천무가 그들을 덮쳐 가는 것을 보고도 한효월은 그를 말리지 않았다.
초동은 한 자루의 단검을 영교(靈巧)하게 휘둘러 곡 내로 진입하려는 흑의인들을 저지하고 있었다. 그의 무공은 나이답지 않았지만 상대의 무공이 고강할 뿐만 아니라, 숫자가 많아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천무가 날아들었다.
그는 이 정체 모를 자들에 대해 이미 뼈에 사무치는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터인지라 손을 쓰자마자 사정 보지 않고서 막 초동을 향해 진격해 오고 있는 흑의인에게 대갈일성, 고함을 치면서 비스듬히 일권을 때려냈다.
그 흑의인은 천무가 날아오는 것을 이미 보았음에도 전혀 물러나지 않고 마주 일장을 쳐냈다.
펑!
폭음이 일었다.
흑의인이 천무의 일격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는 겨우 한 걸음을 물러났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 좌우에서 두 명의 흑의인이 천무를 향해 검을 휘둘러 공격해 왔다.
일격에 상대를 날려 버리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오히려 적의 공격을 받게 될 것은 상상치도 못했던 천무는 분노하여 고함을 지르며 양손을 휘둘러 폭풍우와 같이 십여 권을 한꺼번에 격출해 냈다.
"거령신권이군!"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동시에 천무는 칼날 같은 한 가닥 잠력(潛力)이 자신의 권세를 뚫고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이었다.
"뒤로 물러나라!"
낭랑한 호통이 들려오면서 흰 그림자 하나가 천무와 초동의 앞으로 날아들었다.
그는 천무를 향해 날아드는 잠력을 향해 일격을 쳐냄과 동시에 이미 흑의인들의 가운데로 진격해 들어가고 있었다.
파파팡!
튕겨져 나간 잠력이 부딪힌 곳에서 시퍼런 화염이 일었다. 원래 그 잠력에는 일종의 화기(火器)가 숨겨져 있어서 조금만 늦었다면 그 화염이 천무를 덮쳤을 터였다.
팡!
"윽!"
비명이 일었다.
날아든 백영(白影)이 앞에 있던 흑의인의 가슴을 친 것이다. 그가 훌쩍 떠올랐다 뒤로 나뒹굴었다.
그와 함께 백영은 옆에서 날벼락처럼 자신의 가슴을 찔러오는 검을 슬쩍 몸을 돌리는 사이에 피해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는 검을 뒤로하고 이미 앞으로 전진하고 있어서 그 움직임은 실로 눈부신 바 있었다.
팡!
"억!"
다음 순간, 비명과 함께 백영을 공격했던 흑의인이 검을 놓쳤다. 뿐만 아니라 그는 피를 토하면서 일 장여 밖으로 처박히고 말았다.
이미 검을 피해 앞으로 전진한 백영이 발을 옆으로 차돌려 뒤꿈치로서 그의 등을 차버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백영의 움직임은 조금도 느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흑의인의 등을 차는 탄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눈앞에서 경악으로 눈을 부릅뜬 흑의복면인을 공격해 가고 있었다.
놀랍도록 신속한 움직임.
그 백영이야말로 닭 잡을 힘도 없어 보이던 한효월이었다.
그가 불쑥 날아들어 단숨에 흑의인 둘을 처리하고 자신을 향해 날아들자, 그 가운데 있던 흑의복면인은 대경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진격 속도가 너무도 빨랐던 것이다.
하지만 흑의복면인이 고수인 것은 다음 순간에 드러났다.
찰나간에 자신의 지척에 이른 한효월의 머리를 수도로 쪼갤 듯 내려치는데, 그 속도는 유성과 같아서 세찬 바람이 일면서 한효월이 그의 앞에 도달한 순간에 이미 그의 머리를 내려치고 있었다.
"좋은 유성노사(流星怒瀉)의 일식이군."
낭랑한 외침.
동시에 흑의복면인의 앞으로 다가왔던 한효월의 머리가 찰나간에 사라졌다.
경악의 빛이 흑의복면인의 눈에서 튀었다.
원래 한효월은 두 명의 흑의인을 처리하면서도 앞으로 전진하는 탄력을 조금도 죽이지 않은 상태였다. 더구나 뒤로 발을 뻗어 흑의인을 차버리면서 그 탄력으로 날아오던 차라 머리가 앞으로 향하고 몸을 뒤에 있어서 머리 외에는 달리 공격할 곳이 없었다.
그런데 그가 한효월의 머리를 공격하자마자 그렇게 되기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한효월의 머리가 뒤로 물러나 버렸던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물러난 것이 아니라, 반원을 그리며 위로 솟구쳐 올라가 버린 바람에 착각을 일으킨 것이지만 그 속도는 착각을 유발할 만큼 놀랍도록 빨랐다.
찰나간에 허공에서 몸을 뒤집은 한효월은 발꿈치로 흑의복면인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머리가 위로 올라가면서 그 탄력으로 찍어내린 힘이니 빠르기는 실로 유성과 같았다.
"능풍전(凌風展)이로구나!"
그것을 본 감천형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한효월이 시전한 신법은 그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신법은 그가 사부인 독고해에게서 배운 것인 까닭이다.
능풍전은 말 그대로 바람을 능멸한다는 신법으로 공중에서 신형의 반동을 이용하여 자세를 계속해서 마음대로 바꾸며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상승의 무공이었다.
그러나 한효월이 시전한 능풍전은 전혀 다른 것을 보는 듯 비단 깨끗하고도 시원했을 뿐 아니라, 그 속도는 믿기 힘들도록 빨랐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그것을 시전하면서 말을 했다는 것이다.
무공을 시전함은 한 모금의 진기에 의지하는 것으로 공중에 몸을 띄운 채로 말을 한다는 것은 정말 내가의 고수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세찬 경풍이 엄습함을 느낀 흑의복면인은 놀라 황급히 옆으로 후퇴했다.
쒸악!
세찬 바람이 그를 스쳐 갔다.
미처 변초할 여유도 얻지 못하고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면한 흑의복면인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서 고함을 지르면서 한효월을 공격해 갔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또 놀라 눈을 크게 떠야 했다.
세차게 발을 휘두른 한효월은 그 탄력으로 이미 몸을 바로 세운 상태였고, 그 흑의복면인이 공격을 하는 순간에 그를 향해 기다렸다는 듯이 양손을 쳐오고 있었던 것이다.
팡!
채 피할 생각을 하기도 전에 두 사람의 장세가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일진 경풍이 이는 순간이었다.
"윽!"
흑의복면인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장세가 마주친 순간에 한효월이 슬쩍 옆으로 돌아 들어오면서 그의 손을 밀어냄과 동시에 그의 가슴을 쳐버렸던 것이다.
마침내 그가 쓰러졌다.
한효월이 그를 제압해 쓰러뜨리기까지는 긴 듯했지만 실제로는 거의 찰나간에 불과했다.
그렇게 되자 나머지 두 사람은 천무와 초동에게 제압되어 쓰러졌고 싸움은 끝이 나버렸다.
"위험했군."
상황이 끝이 난 것을 본 한효월이 입을 열었다.
위험했다니?
생각해 보면 비교적 수월하게 상대를 쓰러뜨린 듯한데 의아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얼떨떨한 표정으로 감천형이 물었다.
그를 향해 한효월은 희미한 웃음을 머금은 채로 그에게 손에 쥐었던 것을 쳐들어 보였다.
작은 공과 같은 것이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쇠로 된 계란이랄까.
"그건……?"
그것을 본 감천형의 안색이 굳어졌다.
"아마, 내 생각이 맞다면 이건 상당히 무서운 화기일 거요."
"맞습니다. 그건 산서(山西) 벽력당(霹靂堂)의 삼대화기 중의 하나인 자모탄(子母彈)입니다. 터지면 안에서 작은 탄환이 사방으로 흩어져 5장 이내의 것을 모조리 부숴 버리는 위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어디서?"
한효월의 말에 감천형이 의아한 빛이 되어 물었다.
"저자의 손에서 빼앗은 거요."
한효월은 쓰러진 흑의복면인을 일별했다.
"으음……."
그제서야 감천형은 내막을 알아채고 신음한다.
한효월이 그처럼 빠르게 움직이지 않았다면 자칫 심상치 않은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었음을.
"그들은 앞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든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 같은데, 과연 그런 명령을 받았는지, 누가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인지 한번 알아보기로 합시다."
한효월은 말과 함께 쓰러진 흑의복면인에게 다가갔다.
"그를 조사하기 전에 입 안을 한번 보십시오. 이들이 그자들과 관계가 있다면 어쩌면……."
그를 따르며 입을 열던 감천형은 말끝을 흐렸다.
한효월이 흑의복면인의 복면을 벗기자, 그 안에서 드러난 얼굴은 50대의 중노인인데, 바짝 마른 얼굴은 날카로운 성품을 말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고, 그의 부릅뜬 눈과 입에서 흘러내리고 있는 검은 피였다.
"자결이라니……?"
한효월이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정말 그들이란 말인가……."
감천형이 중얼거리다가 다급히 나머지 제압된 자들을 조사했다.
천무에게 걸린 흑의인은 즉사했고, 나머지 세 사람은 살아 있었다. 아니, 살아 있어야 했다. 한효월이 손을 과하게 써서 두 사람은 중상을 입었지만 죽을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마지막 초동에게 제압된 흑의인의 상태는 가장 경한 편이었다.
그런데…….
그중 살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감천형이 그들을 조사함을 보고 한효월은 고개를 들어 초동을 보았다.
"성아(星兒), 너는 지금 즉시 나가서 수곡대진(守谷大陣)을 발동시키도록 하거라. 아마 이들은 척후에 불과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초동이 황급히 곡구를 향해서 달려나갔다.
"저와 사제가 돕겠습니다."
감천형의 말에 한효월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아성 혼자서도 충분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오."
"사숙께서는 말씀을 놓으십시오. 소질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감천형이 포권하며 정중히 청했다.
"그러지."
한효월은 순순히 머리를 끄떡였다.
비록 얼마 전까지 서로 알지 못했던 그들이다. 그리고 한효월은 감천형보다 나이가 어렸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감천형 사문의 존장(尊丈)인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한효월이 뭔가 생각에 잠겨 있음을 보고 있던 감천형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평소의 그는 늘 침착하고 서두르지 않는 성품이었었다. 그런데 이 젊은 사숙을 만나자 묘하게도 자신도 모르게 조금 성급해지는 듯했다.
초동이 간 곡구 쪽을 힐끗 본 한효월은 문득 나직이 탄식한다.
"사부님과 사형이 그들로 인하여 변고를 당했다면…… 내가 어찌 일신의 안녕만을 도모할 수 있겠는가?"
그는 정색을 했다.
"그들이 과연 누구며, 어떤 능력을 지닌 자들인지 내가 직접 한번 봐야겠다! 과연 어떤 능력을 지녔기에 사형을 해칠 수 있었던 것인지……."
말과 함께 그는 감천형을 보았다.
"이제 나는 강호로 나가려고 하는데, 내가 강호로 나가서 오히려 일에 지장을 주는 게 아닐지 걱정스럽군. 괜찮겠나?"
"무슨 말씀을,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이지요, 공연히 제가 찾아와서 사숙의 청수(淸修)를 깨뜨린 듯하여 죄송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감천형이 황급히 답했다.
그때 문득 곡구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마치 아궁이에 얹힌 가마솥의 뚜껑을 연 듯이 곡구 쪽에서 안개가 뿌옇게 피어 올랐다.
놀라 천무가 그쪽으로 달려가는 순간, 초동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수곡대진이 발동되었군. 이제 안으로 들어가서 앞으로의 일을 의논해 보기로 하자."
그들이 다시 죽헌으로 발길을 돌릴 때, 초동이 바람처럼 달려왔다.
"공자! 밖에 그들이 또 나타났습니다!"
"그대로 버려두어라. 어차피 수곡대진을 발동한 이상, 쉽게 들어올 수는 없을 것이다."
한효월은 상기된 초동을 다독거리고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윽한 정경.
십여 년 간을 하루같이 보았던 그 친숙한 경치다.
하지만 당분간 이곳을 떠나야 한다.
언제 다시 돌아올는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런지도 몰랐다. 그가 그 나이에 입신양명을 위하여 강호로 나가지 않고 세상을 초연한 수도자와 같이 이 산골에 묻혀 있음은 그의 성품이 초연하기만 해서는 아니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였다.
하지만 이젠 그것만 돌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문득 주위를 둘러보던 한효월의 얼굴에 의미 모를 웃음이 떠올랐다.
'그래…… 차라리 잘된 것인지도 모르지. 세상을 위해, 사람들을 위해 피를 흘릴 수 있다면…… 그렇게 죽을 수 있다면…….'
마음을 정한 그는 웃음 띤 얼굴로 초동을 보았다.
"성아, 가서 곡을 떠날 준비를 해라."
"떠나다니? 아주 떠난다는 겁니까?"
초동이 얼떨떨한 빛이 되어 그를 보았다.
"그래. 언젠가 다시 돌아올 수 있다면 좋겠지만……."
…….
준비가 되었다.
문을 닫고, 기르던 가축들은 스스로 살 수 있도록 놓아주었다. 어차피 천혜의 땅이니 살아갈 문제는 없을 터이다.
"가자."
한효월의 말에 감천형이 의아한 듯 그를 보았다.
향하는 방향이 곡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로 곡 밖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가 있으니 그리고 나가면 저들은 밖에서 헛물만 켜다 말겠지. 그사이에 우리는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때였다.
"저……."
옆에서 초동이 머뭇거리며 입을 뗀다.
"무슨 일이냐?"
"저기, 이 소저(李小姐)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갑니까? 무척 서운해하실 텐데……."
문득 한효월의 안색이 묘하게 흔들린다.
"그냥 가자."
부지중에 무우곡의 북쪽을 흘낏 바라본 그는 깨끗이 신형을 돌렸다.
'나참…….'
초동은 입맛을 다시며 머리를 긁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