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首 권왕래현(拳王來現)
-전설이 현실되다.
마침내 천하십왕이 위용(偉容)을 드러내기 시작하다.
밤이 되었다.
청룡보(靑龍堡)의 밤도 깊었다.
정원사의 손길로 향기로웠던 주위는 이제 우거진 잡풀들로 황량하다. 사람의 키를 덮을 듯 자란 풀과 제멋대로 가지를 뻗어 자라난 교목들은 퇴락한 담장과 허물어진 건물들에 음산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17, 8년 전만 해도 강호상에서 무림 삼대보(三大堡) 중의 하나였던 청룡보가 원인 모를 혈겁에 휘말리면서 멸문지화를 당하자 의혹을 느낀 친우들이 암중에 조사를 했지만 누구도 그 내막을 알아내지 못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이 청룡보는 폐허가 되었고 이제는 밤만 되면 귀신의 호곡 소리가 들린다는 귀보(鬼堡)가 되어버린 것이다.
희미한 달빛 아래 드러난 청룡보의 정경은 그 귀보라는 이름에 어울리도록 을씨년스럽다.
특히 그 후원은 황량(荒凉)의 극을 달릴 정도.
스스스…….
한줄기 바람이 불고 지나자 잡초들이 몸을 비비는 소리가 머리끝을 쭈뼛하게 만든다.
"아무도 없는 것 같군요. 누군가 나타나기라도 해야 할 텐데……."
주위를 살피고 있던 감천형이 중얼거렸다.
"아직 이경 전이니 조금 더 기다려 보지."
옆에 있던 한효월이 말을 받았다.
그들은 홍 낭랑의 말대로 청룡장에 와서 잠복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사람을 시켜서 홍 낭랑의 거처인 냉운장을 지켜보았지만 홍 낭랑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태. 우선 그녀의 말대로 청룡장을 암중에 조사해 보았으나 소문대로 폐가(廢家)일 따름. 특이한 것은 알아내지 못했다.
그때였다.
스윽, 슥…….
귀를 거슬리게 하는 괴이한 음향이 어디선가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스름한 달빛 아래.
괴이한 행렬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잡초가 허리까지 오는 길을 가로질러서 후원으로 들어서고 있는 중이었다.
어둠과 동화되는 흑색 도포를 입은 그들은 관(棺)을 메고서 천천히 후원의 퇴락한 대청으로 들어갔다.
관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얼핏 보아 다섯 개가량이나 되었는데 두 사람이 한 개씩의 관을 메고서 마치 어둠 속으로 빨려들 듯이 대청 안으로 사라졌다.
…….
그리곤 정적.
사람이 들어갔으면 뭔가 기척이 있거나 불이 밝혀져야 했을 것임에도 그런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계속 기다립니까?'
'들어가 보는 게 좋을 것 같군.'
한효월도 전음으로 동의를 표했다.
감천형은 매복한 고수들에게 신호를 해서 기다리게 하고 한효월과 함께 기척도 없이 후원 대청으로 잠입해 들어갔다.
매복이 있을까 저어했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
대청은 옛날 청룡장의 규모를 말하듯이 대단히 넓고 컸다.
좌우로 객청(客廳)이 붙어 있고 가운데 대청이 있는데 그렇게 오랜 세월 퇴락했음에도 지난날의 모습은 대부분 남아 있었다. 그러나 부서진 문짝과 무너지고 구멍이 뚫어진 벽들은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기에 족했다.
자신의 손가락도 제대로 알아보기 힘든 어둠.
대청 안은 그야말로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
대청 안으로 들어선 감천형은 순간적으로 전신이 굳어짐을 의식한다.
괴이하기 짝이 없었다.
관과 흑색 도포를 입고 그 관을 운반했던 자들까지. 모두가 대청의 가운데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생기(生氣)가 느껴지지 않았다.
"사숙……."
"저들은 이미 죽었다."
한효월이 미리 질러 말했다.
"엣? 죽다니요? 그럴 리가?"
감천형은 한효월의 말에 믿기지 않는 듯 흑포괴인들을 점검했다.
사실이었다.
그들 모두가 두개골이 부서진 참혹한 죽음을 당한 다음이었다. 그 형상은 참혹할 뿐 아니라 심히 공포스럽고 괴이하였다.
"실로 괴이하기 이를 데 없구나. 도대체 이들은 무엇 때문에 여기에다 관을 운반해 놓고 자결을 한 것이란 말인가?"
감천형이 불신에 찬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관은 그대로 있고, 흑포괴인들은 그 자리에 엎어지듯이 그렇게 죽어 있었다.
피비린내가 코를 찌른다.
부서진 머리에서 흘러나온 뇌수가 어둠 속에서 허옇게 빛을 뿌렸다. 누구라도 소름이 끼칠 상황이었다.
자결이라니…….
"이들은 자결한 것이 아니다."
한효월의 음성이 무겁게 들려왔다.
"자결이 아니라니, 이 형상은……."
"이들은 최심열골수(催心裂骨手)라고 하는 마공에 죽음을 당한 것 같다."
"최심열골……?"
그 말을 되뇌이던 감천형의 안색이 갑자기 돌변했다.
"그, 그건…… 멸망한 마교비전(魔敎秘傳)이 아닙니까?"
"……."
한효월은 묵묵히 고개를 끄떡였다.
최심열골수는 극악한 마공이다.
이 마공에 격중당하게 되면 전신의 기혈이 폭발하면서 심장이 터져 나가고 나머지 힘이 머리로 몰려 머리마저 터져 버리게 된다.
이미 강호상에서 사라진 지 오래된 마공.
그 의미는 감천형이 대경실색할 정도로 정말 엄청난 것이었다.
그때, 그그긍…… 소리와 함께 한효월이 손을 써서 앞에 있던 관 하나의 뚜껑을 열었다.
"역시……."
한효월이 중얼거렸다.
"빈 관이로군요?"
옆에서 들여다본 감천형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아니, 이들은 겨우 빈 관을 여기까지 운반하고는 죽임을 당했다는 걸까요?"
한효월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건 감 사질도 잘 알지 않나? 이들은 입을 봉하기 위해 살해되었고, 누구도 우리의 눈을 피해서 이 대청을 벗어난 적은 없어."
"그렇다면 아직까지……."
"그렇게 봐야겠지. 흉수는 아직 이 대청에 있겠지."
한효월은 이미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돌아보고 있었다.
불현듯 긴장감이 엄습해 왔다.
'비밀 통로가 있다는 건가?'
주위를 조사하던 감천형은 미간을 찡그렸다.
기관 쪽은 아예 아는 것이 없는 그였다.
혹시나 하고 그가 한효월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한효월은 대청의 왼쪽 끝에 있는 기둥을 만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
막 입을 열어 기관에 대해서 아는 게 있는지 물어보려고 하던 감천형은 입만 벌리고 하려던 말을 삼켰다.
끼끽…….
낮은 마찰음과 함께 그 기둥에 암문(暗門)이 하나 생기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기관을……."
암문을 움직이는 기관은 벽에 붙어 있는 촛대였다. 한효월은 그 촛대를 꺾어서 기관을 작동시킨 것이다.
한효월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이 촛대는 얼마 전에 누가 만진 흔적이 있었지. 다른 건 다 먼지가 쌓여 있는데……."
말과 함께 그는 성큼성큼 밑으로 내려갔다.
말은 쉽다.
하지만 이 어둠 속에서도 그런 게 다 보인다는 말인가?
'사숙의 나이는 나보다 어리다. 그런데, 이미 내공이 화경(化境)에 이르러 허실생동(虛實生同)의 안력을 지닐 정도라는 것인가?'
감천형은 머리를 젓다가 한효월의 신형이 시야에서 사라진 것을 보고는 놀라 급히 그 암문으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서자 암문은 다시 닫혔다.
작은 소리였지만 그 닫히는 소리는 마치 천둥이 치는 듯했다.
암문의 내부는 좁은 복도였다.
하지만 한 사람이 어깨를 펴고 충분히 걸을 만한 너비. 그나마 복도라고 느꼈던 것은 한순간, 바로 아래로 길게 계단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아볼 수 있었다.
착…….
앞쪽에서 불빛이 일었다.
한효월이 작은 산가지 같은 것을 하나 꺼내 들고 있는데, 거기에서 밝은 빛이 나와 주위를 밝혔다.
"천리화통(千里火筒)이 아니군요?"
감천형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천리화통이란 밤길을 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고안해 낸 작은 대롱이다. 안에 인화 물질이 들어 있어서 거기에 불을 밝히면 천리를 가도록 빛을 낸다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십 리도 갈 수가 없다.
그런데 한효월이 들고 있는 것은 밝기는 더한데 크기는 비교조차 할 수 없도록 가늘고 작았다.
"십리명화(十里明火)라고 이름 붙인 건데. 심심할 때 만들어본 거라서……."
간단히 대꾸한 한효월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한 번 굽이진 계단은 모두 50개가량이나 되는 듯했는데 그 순간에 계단이 끝났던 것이다.
그들의 앞에 문이 하나 있었다.
"……."
둘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 순간, 주위가 다시 칠흑 같은 어둠으로 변했다.
한효월이 십리명화를 꺼버린 까닭이다.
암중에 서로 마주 본 두 사람은 문의 좌우로 붙어 섰고, 그 순간에 감천형은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열리자 안에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감천형이 안으로 몸을 날리는 순간에 한효월도 그 문으로 들어섰다.
칠흑 같았던 어둠은 이미 없다.
그들이 들어선 곳은 지하에 마련된 석청(石廳)이었다. 음침한 분위기였지만 사방 벽에 마련된 장명등(長明燈)에 불이 밝혀져 있어서 사물을 알아보는 데에는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괴이했다.
여전히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더욱 괴이한 것은, 지하 석청의 분위기였다.
"이건……!"
감천형이 신음을 흘렸다.
수십 개의 관이 널려 있었다.
너비가 십여 장이나 되어 보이는 이 넓은 지하 석청을 가득 채운 것은 바로 그 관들. 관도 그냥 관이 아니라, 석관(石棺)이었다.
서로를 돌아본 두 사람은 잠시 주위를 살피고 있다가 한효월이 먼저 움직였다.
그그응…….
석관 하나의 뚜껑이 그의 손에 밀려났다.
빈 관이었다.
그그긍!
감천형도 관 뚜껑을 열었다.
"여기도 빈 관이군요……!"
말을 하면서 옆에 있는 관 뚜껑을 다시 열어보던 감천형은 문득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투가 이상함을 느낀 한효월이 고개를 돌려 그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지?"
"여기에……."
감천형이 더듬거렸다.
석관의 내부에는 금침(衾枕)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한 사람이 잠자듯이 누워 있었다. 남자가 아닌 여자. 그것도 전신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裸身)의 여인이 그 관 속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나이는 스물에서 서른 사이.
젊고 아름답다.
세상을 놀라게 할 미녀는 아니다.
그러나 충분히 아름답다.
잠자듯 지그시 내려감은 눈에서 검은빛 그늘을 드리우며 길게 뻗어난 속눈썹과 오똑한 콧날, 조용히 다물어진 앵두와 같은 입술.
가슴에 손을 모았다.
그 손의 좌우로 풍만한 젖가슴이 팽팽하다.
지하의 습기 때문인지, 딱딱하게 굳어진 유실(乳實)이 더욱 그 풍만한 젖가슴의 풍요로움을 더한다. 군살없이 흘러내린 허리선과 아랫배. 거기에 더한 검은 신비에서 좌우로 미련없이 갈라져 간 길고 미끈한 두 다리는 가히 폭발할 듯한 유혹의 덩어리다.
남자라면 누구라도 가슴이 뛸 터이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우윳빛 살결이어야 할 그녀의 나신은 창백하리만큼 푸르른 빛을 띠고 있었다.
그것은 요염(妖艶)이 아니라, 괴기(怪奇)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여인의 나신.
감천형은 차마 더 보지 못하고 눈길을 돌려야 했다.
그 순간이다.
"조심해!"
감천형의 말에 그를 돌아보던 한효월이 다급히 소리쳤다.
찰나 감천형은 음산한 기운이 자신에게 덮쳐 오고 있음을 경각한다.
그의 안색이 돌변했다.
죽은 듯, 잠자는 듯 그렇게 누워 있던 여인이 용수철이 튕기듯 일어나서 자신을 공격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시체와 같은 그녀의 모습, 거기에 나신인 여인을 대하자 감천형은 고개를 돌렸었고 전혀 무방비 상태였었다. 그러한 그를 공격하는 여인의 공세는 놀랄 만큼 신속하고도 신랄(辛辣)하였다.
스파앗!
감천형이 반 걸음쯤 뒤로 물러나면서 옆으로 몸을 틀었음에도 여인의 손은 그의 가슴을 스쳤다. 그리고 그 날카로운 경기(勁氣)에 감천형의 옷은 여지없이 찢겨져 날았다.
피가 튀었다.
팡!
감천형의 가슴을 할퀸 여인이 손을 다시 빙글 돌려 독사토신(毒蛇吐信)의 일수로서 감천형을 따라오면서 그의 가슴을 찍어 누르는 순간에 강력한 일격이 그 여인을 쳤다.
콰당!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나신의 여인이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세차게 다시 관 속으로 나가떨어졌다. 석관이 부서질 듯 흔들거렸고 여인의 종아리가 관의 턱에 걸려 덜렁거렸다.
"괜찮나?"
"별것 아닙니다. 조금 스친 것뿐입니다. 감사합니다, 사숙……."
감천형의 말에 여인을 날려 보낸 한효월은 미간을 찡그렸다.
"빨리 혈맥을 봉쇄해. 그 손에는 독이 있는 것 같다."
말과 함께 그는 품에서 작은 옥병 하나를 꺼내 감천형에게 내밀었다.
"이걸 하나 먹어두도록 해……!"
그는 말끝을 흐렸다.
그 순간, 방금 그가 쳐 날렸던 나신의 여인이 관 속에서 벌떡 일어남을 보았던 것이다.
여인은 그 엄중한 타격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그리고 감았던 눈을 뜨고 그를 보는데, 검은자위보다 흰자위가 많아 허옇게 보이는 그 눈은 초점이 없어 실로 괴이하기 이를 데 없었다.
덜컹! 덜컹…….
그것과 함께 사방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면서 관 뚜껑들이 저절로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이건?"
관 속에서 사람들이 벌떡벌떡 일어서는 것을 보고 감천형의 안색은 납덩이처럼 굳어졌다.
하나같이 알몸의 그들.
그들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스름한 장명등의 불빛.
그 아래에서 관 뚜껑이 열어젖혀지면서 시체들이 벌떡벌떡 일어서는 모습은 분명코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다. 푸르른 몸체는 불빛을 받아 더 고괴(古怪)하기까지 하다.
더욱이 허옇게 뜬 두 눈을 보자면 소름이 끼친다. 공포스러웠다.
"이것들이 설마……."
감천형이 신음을 흘릴 때, 한효월이 그들을 보면서 말했다.
"강시는 아니다. 그와 비슷한 마공을 연수(練修)한 자들이다."
"키악!"
순간, 한효월의 일격에 관 속에 자빠졌던 그 나신의 여자가 귀를 찌르는 외침과 함께 훌쩍 관 속에서 날아 나와 감천형을 덮쳐 왔다.
겁을 먹기는커녕, 감천형은 코웃음 쳤다.
"네가 나를 만만히 봤던 모양이구나?"
말과 함께 그는 슬쩍 옆으로 몸을 돌리는 서슬에 그가 자랑하는 패도를 뽑았고, 발도(拔刀)하는 순간에 그는 자신의 앞으로 날아든 그 나신의 여자를 베었다.
프팍!
괴기한 음향과 함께 나신의 여자가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괴이한 신음을 흘리며 튕겨져 나갔다. 미끈한 두 다리를 치켜들고서 나가떨어지는 모습은 아릅답다고는 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녀가 나가떨어지면서 석관에 부딪히자 석관이 부서지는 것은 실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게다가 세상에 이름 높은 감천형의 패도에 격중되고서도 그 어깨 부분에는 겨우 흔적만 남아 있지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아닌가.
"키아악……."
나신의 여자는 발버둥치면서 일어났다.
타격이야 받은 듯도 했지만 상처를 입은 모습은 분명코 아니다.
눈에서는 흉광이 무섭게 이글거린다.
"저럴 수가?"
감천형의 얼굴이 놀람으로 굳어졌다.
그 순간, 다른 관 속의 괴인들도 일제히 몸을 날려 두 사람을 덮쳐 왔다.
일진 격돌이 이루어졌다.
감천형은 다시금 연달아 삼도(三刀)를 격출하여 덮쳐 온 40대의 남자의 가슴을 공격했는데, 여전히 괴이한 음향과 함께 그 남자를 날려 보낸 것에 만족해야 했다.
그 상태에서 또 다른 괴인의 공격을 받아 허점을 보인 감천형은 사숙 앞에서 못난 꼴을 보인 것 같아서 열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래서야 중원무왕이란 사부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꼴이 아닌가.
그는 노해 눈을 부릅떴다.
"타앗!"
일성 고함.
동시에 그는 수중의 패도를 격렬하게 앞으로 찔러냈다.
스파앗!
패도에서 강력한 도기(刀氣)가 일어나 덮쳐 오던 한 괴인을 베어넘겼다.
그러나 그처럼 강력한 도기를 일으켰음에도 그 괴인의 가슴팍에는 겨우 서너 치 길이의 상처가 생겼을 뿐이고, 그 깊이는 반 치도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피가 나지 않았다.
'나의 도기는 강철도 잘라내는데…….'
그 광경을 보고 감천형은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왕철골신(魔王鐵骨身)을 연수한 모양이군."
그때, 한효월이 중얼거리며 감천형에게 손을 내밀었다.
"무리하게 진기를 운용하면 독기가 퍼질 수도 있어. 내게 그 패도를 빌려다오."
그의 무공이 놀라운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진공실학(眞功實學)이 과연 어느 정도인지는 알지 못했던 감천형은 서슴없이 자신의 패도를 그에게 넘겨주었다.
크아악!
그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괴인이 날아들었다.
관 뚜껑이 열리고 거기에서 나온 괴인들의 숫자는 일곱이었다.
그들 일곱의 위력은 가히 일개 문파와 같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검으로 쳐도 흠집 하나 낼 수 없는 괴물들이니, 그 힘이야 말해 무엇 할 것인가. 그런 특별한 신체에 몸놀림마저 민첩해서 그 위세는 실로 만만치 않았다.
더구나 한효월이 감천형에게 패도를 넘겨받는 순간을 노리고 달려든 움직임은 전광과도 같아서 한효월이 패도를 넘겨받는 순간에 그 괴인은 이미 한효월의 가슴과 머리를 치고 있을 정도였다.
"큭?!"
하지만 그 순간, 괴인의 그 섬뜩한 눈에 괴이함이 피어 올랐다.
찰나간에 한효월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꺼지듯이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자연 그의 일격은 허탕.
순간, 찬란한 도광(刀光)이 그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스각-!
비명조차 없었다.
입을 딱 벌리고 눈을 부릅뜬 그 괴인의 목이 그 도광에 날아가는 것은 너무 순간적이라서 그저 목이 잘리는 섬뜩한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대단하다!'
먼저 한 발 물러났던 감천형은 그 광경에 놀라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누구라도 피해낼 수 없을 것으로 보였던 그 순간에 한효월은 마치 꺼지듯이 옆으로 몸을 이동했다. 그 속도는 너무도 빨라서 원래 그가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처음의 그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아 마치 분신술을 보는 것만 같았던 것이다.
감천형은 그것이 상승(上乘)의 이형환위(移形換位)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도 이형환위의 신법을 시전할 줄은 안다. 하지만 저렇게 자연스럽지는 못했다. 뿐만 아니라, 괴인이 헛손질을 하는 순간에 그의 목을 잘라 버린 도법은 그를 경악케 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뇌정도(雷霆刀)……."
감천형이 신음을 흘리는 순간에 한효월은 또다시 괴인 하나를 베어넘기고 있었다.
단 일 도였다.
그처럼 무서워 보였던 괴인들 누구도 한효월의 일도를 피하지 못했다.
모두 목이 잘려 쓰러져 버렸다.
그것은 너무도 간단하여 흡사 한효월이 패도를 휘두르는 곳에다 괴인들이 목을 들이밀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순식간에 여섯 명의 괴인들이 목 없는 시체가 되어 쓰러졌다.
"아으으으……."
마지막 남은 괴인이 주춤거리며 신음을 흘린다.
공교롭게도 그 괴인은 바로 감천형이 발견했던 바로 그 나신의 여자였다.
한효월은 패도를 내밀어 그녀를 가리키고 있는데, 그 패도에서는 찬란한 도광이 일어나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그 도광에 노출된 그녀는 마치 거미줄에 걸린 파리처럼 꼼짝도 못하고 그 자리에 못 박혀 있었다. 두 눈에는 공포가 확연했다. 풍만한 가슴이 격하게 출렁거렸다.
그 순간이다.
어디선가 귀를 거슬리는 괴이한 음향이 석벽을 울리면서 전해져 왔다.
"꺄아악!"
동시에 나녀는 머리를 움켜쥐면서 비명을 질렀다.
이내 눈코귀입의 칠공에서 선혈이 폭발하듯이 터져 나오면서 그녀는 그 자리에 허물어지듯이 쓰러졌다.
"마음주악(魔音呪樂)인가?"
한효월은 미간을 찡그렸다.
다음 순간, 그는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감천형도 그 뒤를 따라 달렸다.
한효월은 감천형이 두말없이 뒤따라오자 달리면서 그에게 패도를 넘겨주었다.
그리곤 말.
"다 기억했나?"
"무슨……!"
부지중에 되묻던 감천형은 갑자기 안색이 달라졌다.
한효월이 펼쳤던 도법(刀法)이 홀연 눈앞에 생생히 떠올라 왔던 것이다.
"아!"
감천형은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 우뚝 서버렸다. 마치 어둔 밤하늘을 가르며 거대한 번개가 불칼과도 같이 정수리를 치는 것 같은 느낌.
한효월이 펼친 도법은 그가 익히 아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효월처럼 펼치지를 못했다.
공력이 모자란 것도 있었지만 그 변화를 완전히 체득하지 못했던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효월의 움직임에는 그 오의(奧義)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이제서야 알 수 있었다. 그의 도법 전개가 그처럼 빠르고 완벽했음에도 실제로는 전개가 완만했다가 빨라졌다가를 반복했던 이유를.
그는 감천형에게 그 뇌정도를 시연(試演)하여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패도를 빌리지 않았으리라.
"잘 기억해 두도록. 앞으로 쓰임새가 많을 테니까."
한효월은 굳어진 그를 보면서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는 몸을 돌려 앞으로 몸을 날렸다.
어둠 속에 드러난 그의 단아한 얼굴은 창백했다.
감천형도 그것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한효월이 공력을 과도하게 소비하여 그런 것으로 짐작했다. 그와 같은 공력을 지닌 사람이라면 공력 소비가 컸다 할지라도 그렇게 표가 나지는 않을 것이 당연한 일이었지만 크게 마음에 두지 않았다.
거기에 깃든 의미를 그로서는 아직 상상도 할 수 없었기에.
한효월은 지하 석청의 끝에 위치한 암도(暗道)를 찾아냈다.
그리고 그 문을 통해서 질풍과 같이 치달리고 있었다. 벽돌로 이루어진 암도는 상당히 길었지만 이윽고 위로 향했고, 급한 경사에서 끝이 났다.
그 끝에는 밖으로 통하는 것인 듯한 문이 있었다.
한효월과 감천형이 문을 여는 순간, 문밖에서 용이 신음하고 범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격렬하게 들려왔다.
"삼제가 강적을 만난 것 같습니다!"
다급한 외침과 함께 감천형은 한효월보다 먼저 밖으로 뛰쳐나갔다.
한효월이 밖으로 나와서 보니, 암도의 바깥은 청룡보의 후원 끝에 있는 가산(假山)이었다. 가산의 크기는 제법 그럴듯하여 지난날 청룡보의 위용을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말라 버린 연못이나 손질을 하지 않아 제멋대로 어우러진 수목들은 퇴락함을 더하여 황폐하기 그지없었다.
그 가산의 앞쪽에 거령신권 천무가 있었다.
그는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연신 비틀거리고 있는데, 그의 옆쪽으로는 이미 몇 사람의 맹주부 위사들이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거령신권 천무의 앞쪽에는 갈의노인(葛衣老人) 한 사람이 우뚝 서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그의 등은 굽고 튀어나와 있어서 곱추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체구는 당당하여 만약 굽은 그의 등이 펴진다면 오히려 거령신권 천무의 체구를 능가할 것 같았다.
게다가 특이한 것은 그렇게 큰 키에다 팔이 길어 거의 무릎에 이른다는 점이었다.
갈의 곱추노인은 천무를 향해 그 긴 팔을 휘둘러 공격을 하고 있는데, 그 위세는 가히 광풍폭우와 같아서 천하의 거령신권 천무가 제대로 손을 쓰지 못하고 연달아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위기의 순간.
"멈춰라!"
공중으로부터 강력한 도광이 밤하늘을 가르는 번갯불과 같은 위세로 날아 내렸다.
콰앙!
가공할 폭음이 터져 나왔다.
강렬한 도기와 경풍이 일대를 휩쓰는 가운데 놀람에 찬 신음이 흘러나왔다.
위기의 순간에 날아든 것은 감천형이었다.
갈의 곱추노인의 일격을 막아내는 순간에 감천형은 셋째 천무가 왜 그처럼 몰렸는가를 알 수 있었다.
하마터면 그도 제대로 자세를 잡지 못할 뻔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패도는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휘청거렸고 그 힘을 이기지 못해 감천형의 호구(虎口)가 찢어져 피가 흘렀다.
갈의 곱추노인은 감천형이 그의 일격을 받아냄을 보자 의외라는 표정이더니 이내 냉소를 터뜨렸다.
"좋은 일도(一刀)로군. 재질이 아깝다!"
동시에 그는 그 길다란 팔을 휘둘러 감천형을 향해 일권(一拳)을 쳐냈다.
고오오-
그가 일권을 쳐내는 순간, 갑자기 일대가 진공으로 변하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흙먼지가 돌개바람에 휘말려 올랐다.
마치 천지가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감천형의 안색이 돌변했다.
그는 사람의 일권이 이처럼 무서운 위세를 보일 수 있음을 아직까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무공에 미쳤다고까지 하던 셋째의 거령신권도 이런 가공할 권세(拳勢)와는 너무도 현격한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피할 수가 없다!'
감천형의 얼굴이 납덩이처럼 굳어졌다.
상대는 그가 만나본 중 최고의 고수였다.
더구나 상대는 그를 향해 살기마저 드러내고 있었다.
단 일 권을 쳐냈을 따름인데 아예 퇴로마저 없었다. 그것은 갈의 곱추노인의 무공이 이미 일반적인 무공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임을 의미했다.
감천형은 이를 악물고서 수중의 패도를 가슴 앞에 세웠다.
쭈욱! 도기가 마치 살아 있는 뱀과도 같이 그 패도를 타고 피어 올랐다.
건곤일척(乾坤一擲)!
생사를 건 일격을 쳐내려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손에 사정을!"
낭랑한 외침 소리와 함께 흰 그림자 하나가 날아들었다.
꽝!
지축을 울리는 폭음.
일진 광풍(狂風)이 일었다. 흙먼지와 바닥을 덮고 있던 낙엽들이 하늘을 가리며 피어 올랐다.
"사숙……!"
감천형이 신음했다.
서서히 흙먼지가 가라앉으면서 그의 앞을 가로막은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던 것이다.
한효월이었다.
갈의 곱추노인은 자신의 일격을 막아낸 것이 뜻밖에도 감천형보다 더 어린 일개 서생인 것을 알아보고는 눈을 끔벅였다.
하나 그것도 잠시, 그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졌다.
"좋아, 지난 30여 년 간을 중원 출입을 하지 않았더니 그사이에 젊은 고수들이 속출한 모양이군?"
그의 음성은 마치 큰 종을 울리는 것 같은데, 심한 북방(北方) 사투리가 섞여 있어서 쉽게 알아듣기 힘들 정도였다.
"과찬의 말씀을."
한효월은 그의 말에 담담히 미소 지어 보이면서 그를 향해서 정중하게 포권을 해 보인다.
용은 용을 알아본다.
갈의 곱추노인은 한효월이 결코 상대하기 쉽지 않은 사람임을 이미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의 얼굴은 얼음 가루가 풀풀 날릴 듯 차갑게 변한 지 오래였다. 갈의가 풍선처럼 절로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찢어질 듯이 펄럭이고 있었다.
공력을 운집한다는 의미다.
"그 나이에 그런 성취를 이루기 정녕 쉽지 않았을 것인데, 애석하군…… 오늘로 끝이라니!"
갈의 곱추노인은 말과 함께 오른손을 말아 쥐고서 비스듬히 들어 올렸다.
콰아아아…….
가공할 기세가 발동하기도 전에 일었다.
겨우 주먹을 쳐들었을 뿐인데도 장내에는 이미 제대로 숨을 쉬는 사람들이 없었다.
갈의 곱추노인의 기도(氣度)는 정말 가공하리만큼 엄청나서 오히려 포위하고 있는 맹주부의 위사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의 기세를 견디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야 했다.
그리고 정작 곱추노인이 한효월을 향해 일권을 쳐내는 순간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일권을 보는 순간에 한효월의 안색은 돌변하고 말았다.
"무적패권(無敵覇拳)?"
경악한 외침과 함께 그는 지금까지 태연하던 태도가 달라졌다. 두 발을 좌우로 조금 벌려 정(丁) 자의 자세로서 땅을 디디며, 양손을 합쳐 한 손은 땅을 가리키고 다른 한 손은 하늘을 가리킨 자세로써 그 곱추노인의 일권을 향해 마주해 나갔다.
꽝!
벼락 치는 굉음.
마치 몇만 근의 화약이 폭발하는 것 같은 대폭음이 일며 땅바닥의 흙더미가 뒤집어져 올랐다. 낙엽이 휘말려 오르다 못해 아예 갈기갈기 찢겨져 가루가 되어 으스러져 버렸다.
한효월은 감당할 수 없는 경기의 폭풍을 이기지 못하고 어깨를 술 취한 사람처럼 흔들다가 마침내 연달아 두 걸음이나 물러서고 말았다.
그 발걸음은 마치 진흙 바닥을 걷는 듯했다.
땅바닥이 푹푹 파여 흙먼지가 격하게 일었다.
그의 안색은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반면에 그 폭풍 속에서도 곱추노인은 어깨를 흔들거리다가 한 걸음 가량을 물러났을 뿐이다.
그는 그 상황을, 한효월이 자신을 한 걸음이나 물러나게 한 것을 믿을 수 없는 듯 안색이 대변했다.
"천주부동(天柱不動)이란 말인가?"
그는 신음처럼 중얼거리더니 두 눈에서 신광을 쏟아냈다.
"너는 누구냐?"
그의 물음에 한효월은 침착한 어조로 대꾸했다.
"소생의 성은 한이라고 하며 이름은 효월이라고 합니다. 선배께서 바로 요동권왕(遼東拳王) 막풍(莫風), 막 선배이십니까?"
곱추노인은 한효월의 말에 의아한 빛으로 그를 쳐다보더니 싸늘히 웃었다.
"으하하하…… 3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중원에서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그의 말에 감천형은 물론, 천무까지 안색이 돌변해 그 노인을 쳐다보았다.
'요동권왕이라니?'
'설마…… 저 노인이 천하십왕 중 한 명이란 말인가?'
그들은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이 자리에서 그 전설과도 같은 존재인 천하십왕 중 한 사람을 만나게 되다니.
"요동권왕이 적당(敵黨)의 수괴(首魁)란 말입니까?"
거령신권 천무가 신음처럼 소리쳤다.
그 말에 곱추노인, 요동권왕 막풍이 미간을 찡그리고 천무를 바라보더니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한효월을 보았다.
"소형제의 기도(氣度)는 비범하여 이따위 짓거리를 할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바, 왜 여기에 있는지 나에게 사정을 말해 줄 수 있겠는가?"
그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한효월을 노려보면서 묻자 한효월 등의 얼굴에는 묘한 빛이 떠올랐다.
그의 말투로 보자면 뭔가 사정이 다른 것이다.
한효월은 잠시 생각하다가 독고해의 죽음에서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의 상황을 숨김없이 간추렸다. 물론 천기선생이나 기타 필요없는 부분이야 말하지 않았지만.
그의 말을 들은 요동권왕 막풍의 안색이 납빛으로 굳어졌다.
"중원무왕 독고 노제가 죽었다는 건가? 누구에게 당한 것인지도 모르고? 어떻게 그런 일이?"
그는 연신 머리를 흔들더니 무거운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이번에 중원으로 들어온 것도 실은, 같은 일이라네."
요동(遼東)에서 요동권왕 막풍의 이름은 중원무왕이라는 독고해를 능가하는 바가 있다. 아무리 중원무왕이 대단하더라도 눈앞에 있는 요동권왕의 주먹이 더 큰 법인 것이다.
그는 요동에서 이름을 얻었고, 요동무림의 지존(至尊)이 되었다.
그는 말 그대로 요동의 전설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런 그에게는 오래전부터 의형제로 지내던 사람이 있었다.
이름하여 장백신룡(長白神龍) 함천기(咸千旗).
그는 백두산, 중국 측에서 장백산(長白山)이라고 부르는 그 장백산에 위치한 장백파(長白派)의 장로(長老)였다. 요동권왕의 나이가 이미 구십이 넘은 점을 감안한다면 그 또한 무림 중의 원로요, 고수다.
"함 아우는 누군가에게 피살을 당했다. 그리고 시신마저 사라졌다."
요동권왕의 말에 한효월은 미간을 찡그렸다.
"설마, 그 종적을 쫓아서 이곳으로?"
"맞네. 나는 그자들의 흔적을 따라 여기까지 온 걸세. 수천 리 길을 따라오면서 나는 그자들이 행태가 매우 괴이한 것을 알 수 있었다네. 시신을 도둑맞은 것이 내 아우만은 아니었다는……."
요동권왕의 확인에 한효월은 검미를 더욱 찡그렸다.
그가 이곳에 이른 것은 한효월과 같은 목적이다. 하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실로 간단하지 않았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암중의 적은 괴이하게도 천하의 고수들, 그것도 그 시신만을 훔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문득 그의 뇌리에 지하 석청에 있던 관들이 생각났다.
그의 안색이 돌변했다.
'서, 설마…… 마교(魔敎)라는 건가? 설마 거기에…… 거기에…….'
그 의미는 너무 격해서 한효월은 가슴이 떨려왔다.
그의 생각이 채 끝나기 전이다.
앞쪽에서 돌연 싸움 소리가 들려왔다.
"비키시오! 나는 개방의 옥면무영(玉面無影)이오! 감 대행을 만나러 왔소!"
어지러운 호통 소리가 엇갈리면서 한 사람이 위사들의 저지를 뚫고 질풍처럼 앞으로 전진해 오고 있었다.
"그를 막지 마라."
감천형이 외치자 위사들이 물러났다.
순간, 한 사람이 질풍처럼 그들의 앞으로 들이닥쳤다. 보기 드문 쾌속한 신법이었다.
거지였다.
그런데 미목이 매우 수려하여 거지답지가 않을 정도였고 나이는 서른 무렵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나이답지 않게 허리에는 개방에서 장로를 상징하는 일곱결(七結)의 매듭이 지어져 있다.
"감 대리 맹주이십니까?"
그는 장내에 들이닥치자마자 감천형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그렇소만?"
"소생은 개방의 옥면무영 호일랑(胡一郞)이라고 합니다."
"아, 근래에 들어 그 이름이 높아 그렇지 않아도 한번 뵙기를 희망하던 차였소.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소이다."
옥면무영 호일랑.
그는 당금 개방주의 소사제(小師弟)로서 강호상에 들리는 소문으로는 다음 대 개방의 방주가 될 재목이라고 알려지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감천형은 겸사의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얼굴이 흙빛이 되고 말았다.
"시간이 없습니다. 속히 맹주부로 귀환하십시오. 적이 맹주부를 습격했습니다!"
"……!"
"무, 무슨 소리요?"
감천형이 눈을 부릅떴다.
"여러분이 맹주부를 떠난 직후, 맹주부는 적의 기습을 받았습니다. 현재 본 방 낙양 방면의 인마는 모종의 일로 차출되어 맹주부를 도울 여력이 없습니다. 속히 가셔야 합니다!"
『대풍운연의』 제2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