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四首 교호귀호(狡狐鬼呼) (16/113)

第四首  교호귀호(狡狐鬼呼)

-여우를 만나다.

어둠 속에서 귀신(鬼神)들과 마주치다.

 어둠이 그를 쫓아오는 것만 같다.

 숨이 가빠졌다.

 평소의 그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가슴에 단검을 박고서 몸을 날린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그가 달린 거리는 이미 십 리에 이르렀다.

 이제 쉴 곳이 필요했다.

 한효월은 가슴을 움켜잡은 채로 주위를 둘러본다.

 일부러 맹주부 쪽으로 가지 않았다. 적이 그쪽으로 쫓아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젠 어디든지 쉴 곳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쿠쿠쿠우웅…….

 저 멀리에서 천둥이 운다.

 비라도 쏟아지려는 것인가.

 그 점은 오히려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전에 쉴 곳을 찾아야 했다.

 다행히 그 바램은 헛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괴물처럼 웅크리고 있는 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모양새를 보면 퇴락한 산신묘(山神廟)이거나 토지신(土地神)을 모신 사당일 터이다.

 "후, 후우우……."

 가쁜 숨을 내쉬며 한효월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낙양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서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곳이 필요했다.

 다행히 한효월이 찾은 곳은 그가 원하던 곳인 듯했다.

 멀리서 볼 때는 작아 보이더니 막상 이르러 보니 퇴락한 도관(道觀)이다. 제법 그럴듯한 도관의 형상을 갖추고 있는데 왜 이렇듯 버려졌는지 알기 힘든 도관. 무너진 담장 안으로 잡초가 우거졌고, 뜰 안쪽으로 정전(正殿)이 있다. 옆으로 몇 채의 퇴락한 전각들이 보이지만 거의 무너져 형상만 갖추고 있을 따름이다.

 주위를 둘러본 한효월은 조용히 몸을 날려 정전으로 들어섰다.

 옥황대제(玉皇大帝)를 주신으로 모신 곳이다.

 "음……."

 안을 둘러본 한효월은 나직이 신음을 흘렸다.

 놀랍게도 관(棺)들이 정전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던 것이다. 반쯤 부서진 관도 있고 뚜껑이 열린 관도 있다. 그런데로 형태를 제대로 갖춘 관도 있는 것을 보면 주인없는 시체를 여기다 두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자니 인가가 너무 멀다.

 콰콰쾅!

 요란한 천둥 소리와 함께 새파란 빛이 한효월의 등 뒤에서 일어 정전 안을 밝힌다.

 형상이 더욱 섬뜩하다.

 하긴 십여 개가 넘는 관이 그렇게 널려 있으니 어떤 사람이라도 기분이 좋을 리는 없을 터이다.

 하지만 이것저것 가릴 때는 아니었다.

 주위를 둘러본 한효월은 정면에 있는 옥황상제의 신상을 향해서 신형을 날렸다. 정전을 가로질러 신상의 뒤로 날아 내린 그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듯 나직한 신음과 함께 가슴을 움켜쥔 채로 벽에 기대면서 주저앉았다.

 조용히 숨을 조절한 그는 단검에 찔린 가슴의 상처 주위 혈도를 누르고 단검을 뽑았다. 두 치 반이나 가슴을 파고든 단검, 요광성주가 마지막에 힘을 거두지 않았다면 자루까지 가슴에 박히고 말았으리라. 만약 단검이 반 치만 옆을 찔렀더라면 한효월은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닐 터였다. 그런 상황이기에 요광성주는 괴이하여 손을 멈춘 것이기도 했다.

 "도박(賭博)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대가가 적지 않군……."

 알 수 없는 소리, 고통에 미간을 찡그리면서 한효월은 미리 준비한 금창약(金創藥)을 발랐다. 그것은 그가 중조산에서 약초를 채집하여 만든 것으로 지혈생기(止血生肌)에 탁월한 효능이 있었다. 단검을 뽑았음에도 피는 흐르지 않았다. 혈도를 눌렀기 때문이다.

 금창약을 발랐으니 며칠 정양하면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가슴이라 상처가 아물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한효월은 가슴을 지그시 누른 채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가슴을 누르자 금창약의 약효가 발동하여 지독한 통증이 엄습해 온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었는데……."

 잠시 숨을 가다듬고 있던 한효월이 굳은 얼굴로 문득 중얼거렸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다.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의 일은 정말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이었다. 대체 그는 무엇 때문에 요광성주의 단검을 피하지 않았던 것일까?

 좋아서 그럴 사람은 없다.

 더더구나 한효월과 같은 사람이라면…….

 필유곡절(必有曲折)!

 "삼 년이나 남았는데…… 벌써 시작이란 말인가?"

 굳은 얼굴로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또다시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렸다.

 무슨 까닭인지 아직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한효월이 목숨을 건 도박을 하고 여기에 이른 것은 분명했다.

 서정후 등에게 둘러싸여서 그처럼 태연자약하던 그가 갑자기 연막탄까지 터뜨리면서 그 자리를 떠났던 이유는 갑자기 그의 몸에 이상이 생겼기 때문이다. 일신의 진기가 산산이 흩어져 버린 괴이한 현상. 그러하기에 그는 적을 유인하고는 실제로는 그 자리를 떠나지도 못했었다. 요광성주의 검에 가슴을 찔린 것은 일종의 충격 요법이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목을 건 도박에 다름이 아니었다.

 요광성주가 찌른 곳은 한효월의 기문혈(期門穴)이었다. 기문혈은 인체 내의 족궐음간경(足厥陰肝經)에 속하는 중혈(重穴)이다. 기문혈은 인체 내의 36개 대혈 중 9개 훈혈(暈穴)에 속하는 곳으로서 가벼운 타격만으로도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곳이다.

 그럼에도 한효월은 그곳을 일부러 요광성주의 검에 내주었다.

 그리고 그 검이 기문혈을 찌르는 충격에 흩어졌던 한효월의 진기는 일순 운용(運用)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렇게 진기를 움직일 수 있게 된 한효월은 그녀를 제압하고는 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 자신이 진기를 되찾은 것이 극히 일순간뿐임을 알고 있었기에.

 말이야 쉽다.

 하지만 의도(醫道)와 무공에 고심한 공부를 지닌 그가 아니었다면 찰나간의 순간에 그런 도박을 할 수는 없었다.

 그가 기문혈을 내준 이유는 체내의 기혈이 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을 때였기 때문이다. 그런 기혈의 흐름을 유주(流注)라 하거니와 당시는 족소양담경(足少陽膽經)에서 족궐음간경으로 기혈의 흐름이 넘어가던 순간이었다.

 간혹 아무렇지도 않게 툭 건드린 사람이 죽어 넘어지는 경우를 보게 된다. 급살(急煞)을 맞았다고 하는데, 자신도 모르게 기혈이 움직이는 곳을 쳐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한효월이 시도한 것도 그와 비슷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목을 건 도박을 했다는 것뿐.

 검은 그의 기문혈을 찔렀고, 그 아래에서 움직이던 기혈은 그 충격에 폭장(暴張)했으며 그로 인해서 한효월은 흩어졌던 진기가 일시지간 모이는 효과를 얻는 데 성공했다.

 그것이 그 느닷없는 일의 경과였다.

 하지만 대체 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는 한효월이 아니라면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직은…….

 한효월은 이를 악물고서 운기하고 있었다.

 차츰 흩어졌던 진기가 모여들고 있다. 언제나처럼 충일한 느낌이 전신을 감싸기 시작한다. 얼마 더 지나지 않으면 진기가 일주천(一週天)하게 된다. 그럼 그는 진기를 회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무엇인가 소리가 들렸다.

 콰콰쾅!

 고막을 두드리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세찬 바람이 일고 있었다. 후두둑거리며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요란했다.

 한 사람이 우뚝 대전의 입구에 서 있었다.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칠흑 같은 어둠에 잠긴 대전을 둘러보고 있는데 어둠 속에서 눈이 마치 고양이의 눈과 같이 빛을 내고 있다. 내공이 경지에 이른 고수라는 의미다.

 잠시 주위를 살펴보던 그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옥형성주였다.

 그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오면서 바닥을 살피고 있었다.

 오래동안 사람의 출입이 없었음을 의미하듯 바닥에는 흙먼지들이 쌓여 있는데 거기에는 몇 개의 발자국이 얼기설기 찍혀 있음이 보였다.

 "흥!"

 잠시 주위를 살피던 그는 냉소를 흘리며 앞에 있던 관을 냅다 걷어찼다.

 무림고수의 발길질은 막강한 위력이 있다.

 펑!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 관은 훌쩍 튕겨져 올랐다가 아래로 떨어져 밑에 있던 관을 치면서 반쯤 부서져 버렸다.

 그리고 안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굴러나왔다.

 "정말 시체……?"

 찰나간에 검을 움켜잡고서 발검(拔劒)할 준비를 하고 있던 옥형성주는 미간을 찡그린 채 중얼거렸다.

 수의를 입은 시체 한 구가 뻣뻣하게 굳어진 채로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관에 부딪힌 충격으로 반쯤 부서진 관 속에도 시신이 있는 듯했다.

 그런데 그때다.

 쿵, 쿵, 쿠웅…….

 괴이한 음향이 밖으로부터 천천히 들려왔다.

 돌연한 소리에 옥형성주의 안색이 돌변했다.

 그 소리가 천천히 대전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없느냐?"

 옥형성주가 소리쳤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쏴아- 하는 빗소리만 들릴 뿐, 그 말에 대한 대답은 없었다.

 그와 같이 이곳까지 온 수신호위들. 같이 수색해 온 그들의 숫자는 셋이라 그리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강호 일류의 고수라고 할 수 있어서 누구라도 쉽게 볼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런데…….

 쿵, 쿵, 쿵…….

 괴이한 소리, 마치 방아를 찧는 듯한 그 소리만이 대답처럼 가까이 다가오고 있을 뿐, 옥형성주의 부름에 답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괴이한 느낌이 엄습해 온다.

 쿠웅…….

 그 순간, 훌쩍 그림자 하나가 대전의 문 앞에 나타났다. 그 괴이한 울림을 동반한 채로.

 '저거……?'

 그 그림자를 본 옥형성주의 얼굴이 돌변했다.

 수의(壽衣)를 입었다.

 그리고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얼굴이 자리한 그곳에는 괴이한 종잇조각 같은 것이 붙어 누런 빛으로 흔들거리고 있을 따름이다. 일견해도 부적(符籍)임을 알 수 있다.

 쿵!

 다시 소리가 울렸다.

 수의를 입은 그 괴인이 훌쩍 뛰어 안으로 들어섰다. 소리의 정체는 그것이었다. 무릎도 굽히지 않고 훌쩍 뛰어 앞으로 나서는 괴인. 떨어질 때마다 소리가 울릴 수밖에 없다. 그것도 사뿐하게 움직이는 게 아니라 무슨 나무토막으로, 그러했다. 절구공이로 땅을 찧듯이 그렇게 움직이니 소리가 클 수밖에.

 그 괴인이 쿵쿵거리며 안으로 들어선 순간에 또 다른 괴인이 같은 소리를 울리면서 대전 앞에 나타났다.

 딸랑, 딸라앙…….

 그와 때를 같이해서 옥형성주는 빗소리를 뚫고 들리는 묘한 쇳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허라, 북망산이 여기 있으니…… 황도(黃道)가 멀지 않도다. 음(陰)과 양(陽)이 갈리니……."

 쿵, 쿵…….

 딸랑, 딸랑…….

 시신으로 보이는 수의를 걸친 자들이 얼굴에 부적을 붙이고 쿵쿵 그 종소리처럼 들리는 쇳소리에 따라서 대전 안으로 들어서니 그 형상은 심히 공포스러웠다.

 하지만 옥형성주는 허리의 검을 움켜쥔 채로 대전의 문만 노려볼 뿐, 자신의 앞으로 다가서는 그들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한 사람이 손에 작은 종을 흔들면서 나타났다.

 "어허라아아…… 이제 다 왔으니 모두 쉬어가자꾸나. 어차피 가게 될 저승길이 뭐가 그리 급하랴. 이 밤이 아니라도 어찌 죽음을 피할 수 있겠나? 서둘러 가나 늦게 가나 죽기야 일반이지……."

 그가 손에 든 작은 종을 흔들어대자 쿵쿵 움직이던 자들이 옥형성주의 앞에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렇게 되자 공교롭게도 그들 셋은 옥형성주를 앞에서 둘러싼 묘한 모양이 되었다.

 "아이구, 원…… 뭔 놈의 비가 갑자기 쏟아지냐? 하마터면 부적 떨어질 뻔했네그랴."

 나타난 자는 투덜거리면서 안으로 들어서다가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을 사납게 노려보고 있는 옥형성주의 눈빛을 마주한 것이다. 그때 마침 번개가 또 세상을 찢고 지나가면서 그의 모습이 선명히 드러나 그 형상은 섬뜩하기까지 했다.

 "누구요?"

 나타난 사람이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그의 키는 불과 5자를 겨우 넘었지만 담력이 큰 듯 옥형성주를 발견하고서도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네놈은 누구냐?"

 옥형성주가 음산한 음성으로 물었다.

 금방이라도 검을 쳐낼 듯한 기세였다.

 어둠 속이다.

 더더구나, 시체가 수의를 입고 쿵쿵 뛰어다니는 판.

 바깥에는 세찬 빗줄기, 새파란 번갯불이 시시각각 세상을 찢고 천둥이 크게 우는 그 상황에서 살기가 등등한 옥형성주의 기세는 확실히 쉽게 볼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어둠 속에서 그의 눈빛이 고양이의 눈과 같이 빛을 내면서 쏘아보고 있는 바에는 더욱 그러했다.

 그런데,

 "음? 허, 이거 고얀 놈일세! 귓대기가 시퍼런 애새끼가 엇다 함부로 아가리질이여? 이 네미랄 놈이 위아래도 없는 거여?"

 멈칫, 옥형성주를 쳐다보던 5척 단구의 노인은 겁을 먹기는커녕, 대뜸 걸직하게 욕을 걸러붓는 것이 아닌가.

 5척 단구(短軀)에 괴이한 두건을 쓴 그는 작은 키에 발등까지 덮는 헐렁한 갈포장삼(葛布長衫)을 걸치고 있어 옷이 그를 입고 있는 것 같다. 마치 허수아비에 옷을 입혀놓은 듯 가소롭게 보이는 그가 그렇게 험악하게 욕을 해대자 일순 어이가 없었던 옥형성주는 대노하여 살기를 드러냈다.

 그리고 그의 손에서 일검이 뻗어 나갔다.

 밤하늘을 가르는 번갯불과도 같은 쾌검(快劒)이었다.

 "으헉?!"

 괴성이 노인에게서 터져 나왔다.

 옥형성주의 일검은 참으로 빨라서 창! 하는 검명(劒鳴)이 이는 순간에 이미 그를 덮치고 있었다.

 찰나간에 검광이 노인의 머리에 쓴 큼직한 두건을 두 쪽으로 갈라냈다. 조금만 몸을 낮추는 것이 늦었었더라면 두 쪽이 난 것은 두건이 아니라 괴노인의 이마였으리라.

 그러나 그것으로 끝일 리가 없다.

 옥형성주는 노인이 아슬아슬하게 그 일검을 피해내자 냉소를 터뜨리면서 손목을 뒤집었다. 검이 유성(流星)과 같이 괴노인을 엄습해 갔다.

 "으아악!"

 괴노인은 기절초풍하여 몸을 날려 그 검을 피해냈다. 아슬아슬하게 그의 장포 끝자락이 다시 그 검에 잘려 나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입은 쉬지 않았다.

 "으아악! 이 거북이 꼬랑지 같은 새끼가 살인을 하려드네? 거기 누구 없소? 사람 살려어∼!"

 그는 다시 검이 날아들자 혼비백산, 몸을 굴려서 옆에 있던 관 뒤로 숨으며 소리쳤다.

 동시에 옥형성주를 향해 관이 튕겨져 올랐다.

 괴노인이 바닥에 누운 채로 관을 걷어찬 것이다. 관을 지푸라기처럼 차올리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노인이라면 더 더욱.

 그때 옥형성주와 그의 거리는 3, 4척에 불과하여 그것을 피할 수가 없었다.

 연달아 괴노인에게 희롱을 당한 셈이 된 옥형성주는 격노하여 날아오른 관을 향해 검을 쳐냈다. 피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괴노인에게 틈을 주게 될 것을 알기에 정면으로 맞선 것이었다.

 뜻밖의 일은 그때 일어났다.

 옥형성주의 검이 무쪽을 베듯 관을 베어내는 순간에, 관 뚜껑이 폭발하듯 옥형성주를 향해 튕겨져 오르며 사람 하나가 관 속에서 튀어나왔던 것이다.

 "손을 멈춰!"

 찢어질 듯 날카로운 외침.

 관 속에서 튀어나온 그림자가 외쳤다.

 "거기 숨어 있었나?"

 관 속에서 사람이 나타나자 흠칫했던 옥형성주는 이내 코웃음 치면서 다시 손목을 뒤집었다. 밤하늘을 가르는 유성과도 같은 속도의 검세가 무섭게 관과 함께 그를 양단해 버리고 말았다.

 파팍!

 세찬 파공음과 함께 그 사람은 반쪽이 되는 관을 박차며 뒤로 튕겨져 괴노인을 향해 날아갔다.

 "어딜!"

 옥형성주는 검을 휘둘러 그를 추격했다.

 그의 쾌검은 일절(一絶)이라 불릴 만하여 인영은 더 이상 괴노인을 추격할 수가 없었다.

 "이런 망할, 눈깔이 삐었나? 이 개자식이 누굴 죽이려 드는 거야?"

 노한 그 인영이 마구 욕을 해댔다.

 파파팍!

 한차례 격돌이 일었다.

 "너는 누구냐?"

 옥형성주가 굳은 얼굴로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앞에 선 사람은 한효월이 아니었던 것이다.

 꾀죄죄한 옷차림, 등에는 거적을 말아 매고 손에는 뭣에 쓰려는지 몰라도 막대기 하나를 들었다. 허리에는 작은 술호로 하나. 머리카락은 엉망으로 흐트러졌지만 그래도 질끈 뒤로 돌려 매었다.

 시체가 아니라 거지였다.

 수중의 막대기, 단봉(短棒)으로 옥형성주의 쾌검을 막아낸 거지는 반짝이는 눈으로 방금 괴노인이 사라진 대전의 문 쪽을 쳐다보고는 발을 굴렀다.

 "교활한,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건가?"

 그리고 그가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하자 옥형성주가 그의 앞을 가로막아서면서 말했다.

 "넌 누구냐?"

 "이런 망할 자식! 당장 꺼지지 못해?"

 거지가 노해 수중의 단봉을 휘둘러 옥형성주의 가슴을 찔러왔다.

 옥형성주가 피하면 그대로 앞으로 달려가겠다는 형상이다.

 나타난 이래로 계속해서 욕을 얻어먹자 옥형성주는 정말 꼭지가 돌게 노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다. 괴이한 음향이 들리면서 음산한 기운이 그의 뒤에서 엄습해 오는 것이 아닌가.

 '암습?'

 하나가 아니었다.

 번개처럼 신형을 돌리면서 검을 쳐내던 옥형성주의 안색이 돌변했다. 어둠 속에서 그를 공격한 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얼굴에다 부적을 붙이고 있던 시체, 괴노인과 함께 나타났던 그 시체였던 것이다.

 "감히!"

 한소리 노호와 동시에 옥형성주는 검을 쳐냈다.

 그의 검세는 신쾌(迅快)하기 이를 데 없어서 한순간에 그를 공격하던 시체 3구를 모조리 쓰러뜨리고 말았다. 공포스럽기는 했으되 시체는 별것이 아니었다.

 시체를 쓰러뜨리고 난 옥형성주는 바람처럼 대전에서 사라졌다.

 그 틈에 거지마저 사라졌기 때문이다.

 쏴아아…….

 대전은 다시 정적을 회복했다.

 쏟아지는 빗줄기의 소리만 요란하다.

 이따금 천지를 흔들어대는 천둥 소리가 장단을 맞출 뿐, 사방은 다시금 고요해졌다. 대전 여기저기에 시체가 쓰러져 있음이 달라졌을 뿐.

 얼마가 지났을까.

 대전 안에 다시 한 사람이 나타났다.

 뜻밖에도 방금 사라졌던 그 거지였다.

 의외로 거지의 나이는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고 미목(眉目)도 수려했다. 특히 초롱한 눈망울은 어둠 속에서도 반짝인다. 나이는 채 스물이 되지 않은 듯.

 그는 옥형성주의 검에 쓰러진 시체 3구를 살펴보더니 혀를 찼다.

 "가짜군. 하긴 영구(靈柩)를 버려두고 갈 귀신이 아니지. 내가 뒤따른 걸 어떻게 알았을까?"

 그의 중얼거림이 끝나기 전이다.

 "너는 누구냐?"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한 사람이 다시 나타나 있었다.

 문 쪽에 우뚝 선 그는 손에 음산한 빛을 뿌리는 검을 들었다. 옥형성주였다.

 "내가 누군지 너와 무슨 상관이 있나, 꺼져!"

 거지는 그를 힐끗 보고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를 보던 옥형성주가 문득 중얼거렸다.

 "뭐야? 이제 보니 계집이란 건가?"

 그의 말에 거지가 고개를 들었다.

 "왜? 내가 계집이면 관심이 있어?"

 문득 목소리가 영롱하게 변한다. 정말 여인의 음성이었다. 그것도 아주 앳된.

 그녀를 살펴보던 옥형성주는 미미하게 웃음을 떠올렸다.

 "나는 계집을 좋아하지……."

 말과 함께 그는 앞으로 한 걸음을 다가섰다.

 그가 다가섬을 보자 거지는 고개를 끄떡였다.

 "나도 사내는 좋아하지. 어차피 남자여자가 어우러져야 일을 보는 거니까……."

 서슴없이 말을 받은 거지는 문득 미간을 찡그리고 그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네 낯짝을 보니, 빛 좋은 개살구겠어. 물건도 시원찮게 생겼군! 그 주제에 무슨…… 좋은 말 할 때 꺼져! 귀찮게 따라다니지 말고."

 그녀는 귀찮다는 듯 다시금 손을 마구 내저었다.

 아무리 봐줘도 스물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하는 말이라니……. 옥형성주는 어이없는 듯 그녀를 바라보다가 싸늘히 웃었다.

 "한번 시험해 보겠나?"

 그러자 거지소녀는 코웃음 쳤다.

 "넌 아무 데서나 붙어먹는 수캐인지는 몰라도 나는 화냥년이 아닌 요조숙녀야. 남녀가 유별하니, 더 이상 지분대지 말고 꺼져 버려. 재수가 없으려니 별 떨거지가 다 와서 깐죽거리네. 아, 정말 왕짜증! 짜쯩!"

 그녀는 신경질 난다는 듯 머리를 마구 긁어댔다. 도무지 말을 가리는 게 없다.

 "수, 수캐?"

 옥형성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별것 아니게 받아넘길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묘한 일이다. 그녀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자 지독한 모멸감이 드는 건 왜인가?

 살기가 그의 눈에 감돌았다.

 "거지라서 계집치곤 입이 거칠군. 죽고 싶으냐?"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나를 죽일 능력이 있어? 미안하지만 아직까지 난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아, 맞아! 넌 수캐니까, 좀 다르다는 건가?"

 거지소녀는 픽, 웃음을 터뜨렸다.

 마침내 옥형성주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발동했다.

 쉿-!

 검이 어둠을 가르며 날았다.

 "조심해."

 동시에 웃음소리가 일었다.

 옥형성주는 자신이 발동함과 동시에 웃음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한광(寒光)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그가 움직이기 직전에 거지소녀의 손에서 뻗어 나온 것인데, 그가 발동을 하는 것과 절묘하게 시간이 맞아 그의 발동은 그 한광에 머리를 디민 것과 같을 정도였다.

 "암기로 날 막아보겠단 건가?"

 옥형성주는 냉소를 터뜨리면서 날아든 암기를 검으로 쳐냈다.

 그는 어둠 속에서도 눈을 감은 채로 파리를 베어낼 수 있는 고수였다. 그까짓 암기 몇 개야 간단히 쳐내고 남음이 있었다.

 "멍청한…… 그건 암기가 아니라 화기(火器)야."

 거지소녀는 느긋하게 뒤에 있던 관에 걸터앉으며 혀를 찼다.

 그 말에 옥형성주는 놀라 급히 검을 회수하려 했지만 이미 늦어 검이 한광을 쳤다.

 팡!

 검이 한광을 치자 작은 폭발과 함께 어둠 속에서 불꽃이 일었다.

 "으윽?!"

 다급히 숨을 들이키는 신음.

 뒤로 물러나던 옥형성주가 무엇에 찔린 듯 껑충, 1장여 뒤로 후퇴하면서 소리쳤다.

 "이게 뭐냐?"

 "개똥을 밟았나?"

 말과 함께 거지소녀는 깔깔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그 모습에 어울리지 않도록 맑고 영롱한 웃음소리다.

 하지만 옥형성주에게 있어서 그 웃음소리는 치욕적일 수밖에 없다. 그는 나타난 이래 저 거지소녀에게 손도 쓰지 못하고 놀림감으로 전락한 것이다.

 화기가 폭발하자 불꽃이 일어 피할 여가도 없이 그의 머리를 그슬렸다. 하지만 위력이 별게 아니라 그건 폭죽이 터진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정작 그를 신음케 한 것은 그가 뒤로 물러날 때 바닥에 있었던 암기였다. 그것이 그의 발바닥을 뚫고 들어가자 옥형성주는 그 고통에 치를 떨면서 뒤로 후퇴했던 것이다. 발바닥을 찌르면 시체도 일어난다고 한다. 그런 고통을 받았는데 어찌 그냥 있을 수 있으랴.

 "크으윽……!"

 옥형성주는 왼쪽 발을 엉거주춤하게 들고서 이를 갈았다.

 별것 아닌 어린 계집, 그것도 상거지였다.

 하지만 겉보기와는 달리 상대는 교활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가 돌아올 것을 짐작하고 바닥에다 암기까지 포설하여 둔 것은 물론이고 그의 움직임까지 계산하여 그를 그곳으로 몰고 간 것이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하나하나가 철저히 계산된 움직임이라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너, 너는 누구냐?"

 옥형성주의 물음에 거지소녀는 픽 웃었다.

 그리곤 말.

 "나 같으면 그게 궁금하기보다는 다리를 먼저 자르겠는데…… 살고 싶다면 말이야."

 "다, 다리를 자르다니 설마?"

 "흠, 상당히 둔하군. 아직도 중독 증세를 못 느낀다는 건가? 하긴…… 당가(唐家)의 추명독(追命毒)이란 걸 느끼면 이미 그렇게 조잘거리고 있을 물건이 아니긴 하지. 슬슬 시간이 되었을 거 같은데? 쓰러져라!"

 거지소녀가 갑자기 소리쳤다.

 그 말에 옥형성주가 안색이 대변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콰콰쾅!

 벼락치는 굉음과 함께 세찬 천둥 소리가 그 순간에 도관을 떨어울렸다.

 "깔깔깔……!"

 거지소녀는 손뼉을 치며 웃었다.

 깔깔거리면서 한참을 웃고 난 그녀는 문득 어둠 속에서 중얼거렸다.

 "망할 자식 때문에 공연히 힘만 썼네. 지난 한 달 간이나 애쓴 게 한순간에 도루묵이라니……."

 입맛을 다시던 그녀는 혀를 찼다.

 "보아하니 저자는 당신을 쫓고 있었던 모양인데…… 언제까지 거기 그렇게 대가리를 처박고 있을 참이야?"

 그녀의 말에도 대전 안은 어둠과 고요에 잠겨 있을 따름이다.

 거지소녀가 미간을 찡그렸다.

 "음? 이거 봐라? 모른 척한다는 건가?"

 그녀의 얼굴에 갑자기 짜증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까치집처럼 헝클어진 머리를 벅벅 긁어댄 그녀는 갑자기 투덜거렸다.

 "고마운 것도 모르는 작자로군! 하여튼 요즘 인간들은……."

 그때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자신이 속았음을 깨닫고 돌아올 거요. 그가 돌아오기 전에 이곳을 떠나는 게 좋을 거요."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 말이 뜻밖인 듯한 표정으로 거지소녀는 말소리가 들려온 신상 뒤를 쳐다보았다.

 한 사람이 신상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 속에서 백의가 희미하게 빛을 발한다.

 창백한 얼굴의 한효월이었다.

 "도와줘서 고맙소."

 "나참! 이거야 원, 옆구리 찔러서 절 받기네."

 그의 말에 거지소녀가 투덜거렸다.

 입맛을 다시던 그녀는 돌연 정색을 하고서 한효월을 쳐다보았다.

 "그자가 왜 이곳으로 돌아온다는 거지?"

 "속임수라는 건 당시에는 통하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는 법이지. 그가 돌아오면 이번에는 그를 속이기 쉽지 않을 거요."

 한효월의 말에 거지소녀는 픽 웃었다.

 "내가 뭘 속였다는 거지?"

 "철질려에 만약 독이 있었다면 맨손으로 그렇게 바닥에 뿌리진 못했을 것이오. 더더구나 당문의 치명적인 독이라면……."

 "흐음……."

 거지소녀는 묘한 빛으로 한효월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좀 전의 노인을 쫓아 여기에 왔었다. 미리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관 속에 숨어 있던 그녀는 어둠 속에서 한효월이 신상 뒤에 숨는 것까지 볼 수 있었다.

 그 상황은 별게 아니라 한효월이 어떤 사람인지 알 리가 없다.

 그런데 몇 마디를 해보자 뭔가 좀 달랐던 것이다.

 "왜 그자에게 쫓기는 거지?"

 그녀가 문득 입을 열어 물었다.

 그 순간이다.

 "그가 본 교에 죄를 지었기 때문이지."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한 사람이 천천히 대전의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방금 그 자리를 떠났던 옥형성주였다. 그의 차가운 얼굴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그가 이렇게 빨리 돌아올 줄 몰랐던 거지소녀는 뜻밖인 듯 안색이 조금 달라졌다.

 "본 교? 설마…… 제천교인가?"

 그의 중얼거림은 한효월은 물론 옥형성주에게도 의외였다. 강호상에서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은 아직까지 극소수인 까닭이다.

 "넌…… 개방……?"

 중얼거리던 옥형성주의 안색이 음침하게 변했다.

 "그렇군. 네년이 바로 개방의 구미호(九尾狐)로구나……."

 그의 말에 거지소녀가 코웃음 쳤다.

 "싸가지하고…… 숙녀에게 구미호가 무슨……!"

 그녀는 채 말을 끝내지 못했다.

 싹!

 하는 소리와 함께 번갯불같이, 정말 전광석화와도 같은 빛 한줄기가 옥형성주의 허리춤에서 그녀를 향해서 직사(直射)해 왔던 것이다.

 두 사람의 거리는 2장이나 되었다.

 하지만 일단 발동을 하자 섬광은 찰나간에 이미 거지소녀의 눈앞에 도달해 있었다.

 거지소녀의 안색이 돌변했다.

 슷!

 머리카락이 잘려 날린다.

 그녀는 앉아 있던 관에서 땅바닥으로 몸을 굴려 그 섬광을 피했지만 옥형성주의 쾌검은 피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검광이 숨가쁘게 그녀를 엄습했다.

 찰나간에 구검 삼십이식이 전개되어 그녀를 난자(亂刺)해 들었고 영리하기 이를 데 없었던 거지소녀는 거의 제정신을 차릴 여가가 없이 몸을 굴려야 했다. 반격은커녕 한순간이라도 움직임이 늦으면 그 순간 피를 부릴 판이다.

 옥형성주는 냉소를 터뜨리면서 그녀를 쫓아갔다.

 한쪽 다리가 조금 불편하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그녀를 죽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일검으로 그녀를 죽일 필요가 어디 있을까.

 그녀를 복날 개처럼 바닥에 뒹굴게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옥형성주는 그 순간에 자신의 귓전을 파고드는 낮은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차!'

 내심 한효월에게 두려움을 가지고 있던 그는 당황해 황급히 검을 거두었다. 어느새 거지소녀를 쫓아 한효월과의 거리가 가까워졌음을 경각했던 것이다. 그가 부상을 입었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것이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하는 그였다.

 암경(暗勁) 한줄기가 그에게 날아들었다.

 거리가 가까워 피할 수가 없었다.

 "하앗!"

 옥형성주가 호통을 치면서 검을 흔들었다.

 날아드는 경력을 향해 검광이 명멸하면서 일었다.

 윙윙-

 검에서 세찬 음향이 인다.

 하지만 그 경력과 맞선 순간에 옥형성주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막대한 압력에 검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물러설 수도 없었다.

 당황한 빛이 그의 눈에 드러났다.

 한효월이 낭랑히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나를 찾아왔다면 그럴 만한 능력을 가졌을 터, 어디 그 능력을 보여봐라."

 동시에 옥형성주는 막대한 잠경(潛勁)이 자신의 검세를 무너뜨리면서 덮쳐 오는 것을 보았다.

 항거불능의 힘.

 "으악!"

 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쿠쿠우웅…….

 길게 천둥이 우는 소리가 전해졌다.

 어둠에 잠긴 대전.

 "왜 쫓아가지 않아? 아니, 그보다도 그처럼 한 방에 보낼 힘이 있는 사람이 왜 그런 자에게 쫓긴 거지?"

 어이가 없는 듯 멍청히 서 있던 거지소녀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옥형성주가 한효월의 일격에 피를 토하고 도주했던 것이다. 꼬리를 말고서.

 "세상일이란 건 늘 사정이 있기 마련이지."

 중얼거리던 한효월은 문득 비틀거리며 옆에 있던 기둥을 잡았다.

 "이제 보니 다쳤군?"

 그 모습을 보고 거지소녀가 말했다.

 어둠 속이지만 그 기척을 충분히 느끼고 남음이 있을 머리를 가진 사람이 그녀였다.

 "나를 좀 부축해 주겠나?"

 한효월이 그녀에게 말했다.

 "내가?"

 "여기 누가 또 있나?"

 "저런, 남녀칠세부동석이란 말도 몰라? 아무리 내가 거지기로서니 남녀가 유별한데……."

 거지소녀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녀의 태도에 한효월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것을 따지고 있다가는 이곳을 떠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를 텐데?"

 "반주검이 된 놈이 돌아오면 겁나남?"

 "그자가 오는 건 겁날 이유가 없겠지만……."

 한효월은 말과 함께 앞으로 나섰다.

 조금 위태롭긴 하지만 당당한 걸음걸이다.

 "움직일 수 있으면서 공연히……."

 그것을 보자 거지소녀가 투덜거렸다.

 바로 그 순간이다.

 대전 밖에서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빗소리를 뚫고서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소리에 호응하듯 여기저기에서 호각 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 소리는 이내 대전을 향해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오는군…… 생각보다 빠른데?"

 한효월이 중얼거렸다. 어둠 속에서 그의 얼굴은 조금 굳어 있었다.

 "뭐야? 다른 놈들이 온다는 거야?"

 그 의미를 깨달은 거지소녀의 안색이 달라졌다.

 한효월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지금 가지 않으면 갈 수 없다."

 말과 함께 그는 가슴을 움켜잡은 채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흔들리는 신형.

 그 움직임에서 전과는 다른 조급함이 느껴진다.

 거지소녀의 얼굴에 묘한 빛이 떠올랐다. 그에게서 위기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단순히 그런 정도로 신경 쓸 그녀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것을 느끼자 그녀 스스로가 바짝 긴장이 되었기에, 묘한 표정으로 그를 다시 보는 것이다.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또 들려왔다.

 순간, 앞으로 나서던 한효월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의 발부리에 부서진 관 조각이 걸린 것이다.

 "맙소사, 이게 뭐야?"

 앞에 있다가 부지중에 손을 내밀어 그를 부축한 거지소녀가 놀라 소리쳤다. 그녀의 손이 한효월의 가슴을 누르자 그에게서 신음이 흘렀고, 그녀의 손은 금세 피로 범벅이 되었다.

 그의 가슴은 피투성이였다.

 방금의 일격으로 충격을 받아 가슴의 상처가 다시 터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래서 서둘렀군!'

 상황을 직감한 거지소녀가 더 이상 묻지 않고 그를 부축했다.

 "좋아, 어차피 이 빌어먹을 곳에서 시체와 있을 수는 없으니 가보기로 하자구!"

 하지만 그를 부축하며 앞으로 나서려던 그녀는 문득 굳어져 그 자리에 멈추고 말았다.

 한 사람이 대전의 앞에 우뚝 서 있었다.

 흑의는 비에 젖어 착 달라붙었다. 전신의 농염한 굴곡을 남김없이 드러낸 채로 선 그 흑의인이 여인임을 알아보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복면의 그녀는 바로 요광성주였다.

 번쩍!

 전광(電光)이 작렬해 천지를 뒤집었다.

 그 번갯불을 등지고서 요광성주는 한효월과 그를 부축한 거지소녀를 보고 서 있었다. 그녀가 언제 나타났는지는 한효월조차 알지 못했다.

 그와 그녀의 눈빛이 부딪쳤다.

 한효월의 눈가에 미미한 웃음빛이 스쳐 갔다.

 "우리는 예상보다 빨리 만나게 되었군."

 어둠 속이지만 그의 웃음이 보였을까?

 요광성주의 눈빛에 출렁, 파동이 일었다.

 순간,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대전의 앞마당에서 들려왔다.

 뒤이어 들리는 호각 소리.

 그것들은 대전의 좌우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이미 사방에 적이 깔렸음을 의미한다.

 옥형성주가 도주하면서 경보를 울렸고, 한효월의 뒤를 추격하던 자들이 대거 몰려들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 순간이다.

 "주위를 수색해! 안에는 아무도 없다."

 갑자기 요광성주가 날카롭게 고함치고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저쪽이다!"

 뒤이어 바깥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호각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어지러이 들리며 순식간에 멀어져 갔다.

 "……?"

 얼떨떨한 표정으로 거지소녀가 한효월을 쳐다봤다.

 "아는 계집이야?"

 "……."

 한효월은 대답 대신 그녀가 사라진 어둠을 바라보고 있다가 미미하게 한숨 쉬었다.

 "빚을 진 셈인가."

 말과 함께 그는 신형을 바로잡으며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여기서 잠시만 쉬었다 가야겠군."

 거지소녀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

 적이 유인되는 동안 이곳에서 기다리자는 뜻.

 "그 계집도 제천교의 주구(走狗)야?"

 그녀가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부축을 하고 있는 판이니 서로의 숨결도 느껴질 거리.

 한효월은 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눈빛이 반짝인다.

 "언제나 말투가 그런가?"

 한효월의 말에 문득 거지소녀가 피식, 웃었다.

 "우리 사부한테만 조금 다르지. 그 외에 누가 감히 교호(嬌狐)를 말리겠어?"

 '교호? 예쁜 여우라는 뜻인가?'

 그녀의 대꾸에 한효월은 부지중에 그녀를 눈여겨보았다.

 봉두난발에 정말 엉망인 모습.

 하지만 자세히 보니 이목구비가 또렷하여 목욕을 하고 잘 꾸며놓으면 상당히 미인이 분명할 듯했다. 키도 작은 편은 아니었다.

 "잘 어울리는 이름이로군."

 한효월이 고개를 끄떡였다.

 그의 눈가에 웃음기가 서려 있음을 보고 거지소녀가 미간을 찡그렸다.

 "설마 내 이름도 모른단 말이야? 교호 심소옥(沈小玉)을? 개방이 배출한 걸출하고도 뛰어난 개방삼수의 으뜸이 난데?"

 "미안하군. 난 견문이 넓지 못해서……."

 그게 사실이었다.

 한효월은 아직 각 파의 중요 인물에 어떤 이름이 있는지 잘 알지 못했다. 하기야 그가 강호에 나온 게 며칠이나 되었던가.

 그런 것을 신경 쓸 틈이 없는 숨가쁜 나날이었다.

 "당신은 누구지? 숙녀의 이름을 알았으면 당연히 예의상이라도……!"

 말하던 교호 심소옥은 문득 눈을 크게 떴다.

 한효월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기 때문이다.

 노해 그의 팔을 움켜잡으며 뭐라 하려던 그녀는 한효월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젓고 있음을 보고 숨을 죽였다. 누구보다 영리한 그녀인 까닭이다.

 누군가가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흑의인 하나가 대전의 창밖에서 소리도 없이 안을 살펴보고 있는 중이었다.

 다행히 한효월이 그녀를 이끌고 몸을 숨긴 곳이 묘한 위치라서 안으로 들어와 사방을 샅샅이 살펴보기 전에는 발견하기 힘든 곳이라 숨을 죽이고 있자 밖에서는 그들을 발견할 수 없었다.

 "갔군."

 한효월이 말했다.

 "정말 저들이 제천교?"

 "듣지 않았던가?"

 심소옥의 얼굴이 묘하게 굳어졌다.

 "당신 이름이 뭐지? 제천교가 왜 당신을……."

 "가지. 이곳에서 오래 머무는 건 바람직하지 못하니까."

 한효월이 말했다.

 "좋아. 우선은 이곳을 벗어나고 보는 게 좋을 거 같네. 하도 이놈 저년 뎀비니……."

 투덜거린 그녀는 한효월을 잡아끌었다.

 "윽……."

 나직한 신음이 한효월에게서 일었다.

 상처 입은 왼편 가슴 쪽 팔을 잡아당겼기 때문이다. 도무지 여인다운 조심성이라던가,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었다. 하나에서 열까지 거리낌이 없는 성격에 태도.

 심소옥은 한효월을 이끌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녀의 무공은 낮지 않았다. 그러나 부상 입은 한효월과 같이 가야 하니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바깥에는 빗줄기가 여전했다.

 그런데 그들이 막 도관을 벗어날 무렵이었다.

 그녀의 부축을 받고 있던 한효월이 돌연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더니 몸을 날리는 것이 아닌가.

 마치 질풍과도 같아 찰나간에 그들의 모습은 담을 넘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검은 그림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쓸어보고는 어깨를 슬쩍 흔드는 사이에 담장 위로 날아올라 일대를 살폈다.

 "내가 잘못 봤던 건가?"

 중얼거리는 그는 바로 서정후(西征侯)였다.

 그가 나타남과 동시에 사방으로 다시 수색이 시작되었다.

 휙휙-

 세찬 바람, 경풍이 빗줄기와 함께 그들의 뒤로 쏜살과 같이 밀려난다.

 "어, 어떻게?"

 자신이 부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이끌려 가자 심소옥은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입이 딱 벌어져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녀 혼자서라도 그런 속도로 이렇게 움직일 수는 없었다.

 "잠시 쉬었으니 이 정도 힘이야 회복해야 하지 않겠나?"

 한효월이 그녀를 향해 미미하게 웃었다.

 '잠시 쉬었다고 이런 능력이란 말인가?'

 심소옥은 놀란 눈을 깜박이면서 한효월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의 옆얼굴은 단아한 선을 그린다. 거기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묘하고도 편안했다.

 '흐으음……?'

 묘한 눈길로 심소옥은 한효월의 얼굴을 본다.

 마치 구름을 타고 달리듯이 그렇게 그들은 어둠과 빗속을 가르며 질주하고 있었다.

 "근처에 잠시 몸을 숨길 곳이 있을까?"

 한효월이 달리는 속도를 늦추지 않으면서 물었다.

 묘한 눈빛으로 한효월의 단아한 옆얼굴을 쳐다보던 심소옥이 고개를 끄떡였다.

 "있어요."

 말투가 조금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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