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八首 지척천애(咫尺天涯) (20/113)

第八首  지척천애(咫尺天涯)

-사랑은 금을 타고.

흔들리는 여심(女心)은 누구를 향한 것인가.

 동녘이 어스름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망산의 숲 속을 그처럼 뒤덮었던 안개도 산자락으로 넘어오면서 햇살에 흩어지는 듯했다.

 십여 호의 촌락.

 한효월은 그 촌락의 끝에 있는 한 농가를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쫓던 회포인 일행이 그 농가로 들어갔던 것이다.

 새벽이 밝아오고 있어서인지 몇몇 농가에서는 개 짖는 소리도 나고 밥짓는 연기도 올라온다. 전형적인 농가의 모습에 다름이 아니었지만 집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한효월의 눈에서는 맑은 빛이 쏟아져 4, 5장가량 떨어진 농가의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격물(隔物)하여 사물을 볼 수 있는 천조신안을 발동하고 있는 것이지만 공력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아서 전과는 달리 내부의 상황을 명백히 볼 수가 없었다.

 흐릿한 그림자가 보일 따름인데, 두세 명 정도가 농가의 내부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했다.

 농가의 주위에는 회포인을 따라왔던 자들이 숨어 있었고, 그 이전부터 이곳에 숨어 주위를 살피던 자들도 있었다. 그가 이 거리까지 숨어들 수 있었던 것은 회포인이 농가로 들어가는 틈을 이용했기에 가능했다.

 "귀왕은?"

 "그는 이미 떠났소."

 낮은 음성이 농가에서 들려왔다.

 '귀왕이 이곳에 왔다가 갔다는 것인가?'

 한효월의 눈에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순간, 그는 눈을 내리감았다.

 천조신안으로 투과되던 모든 사물들이 사라진 대신, 그의 귀가 열리면서 심신이 공령(空靈)한 상태로 되어 주변의 소리들이 점점 크게 그에게 들려왔다.

 원래 그는 무공일도에 크게 정진하지 않았었다.

 그것이 그렇게 유용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보다는 육예(六藝)나 기타의 학문에 더 흥미가 많았었다. 그가 무공에 전념하여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의도(醫道)를 연구하기 시작한 다음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격기(擊技)보다는 이런 류의 내가신공에 더 조예가 깊었다.

 "그 배후를 알아내셨습니까?"

 회포인의 음성이 조금 더 크게 들려왔다.

 그의 음성이 커진 것이 아니라, 한효월이 공력을 모았기에 더 또렷해진 것이다.

 "그렇게 쉽게 말할 사람일 리가 없지. 천하십왕은 결코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이름이 아니오. 비록 귀왕이 천하십왕 중 상위(上位)에 속하는 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전력을 다한다면 무림중의 어느 누구도 감히 함부로 볼 수가 없는 존재가 바로 천하십왕이니까."

 "그가 누구의 부탁으로 시체를 훔쳤는지 알아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당연하지. 하지만 독고해의 시신을 가져간 것은 그가 아니오."

 "그가 그렇게 말했습니까?"

 "그렇소."

 "그 말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천하십왕의 신분으로 허언(虛言)을 한다면 세상의 비웃음을 사게 될 테지. 믿을 수밖에! 갔던 일은?"

 문득 기척이 들리더니 차고 날카로운 그 음성이 되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효월이 다시 눈을 뜨고 천조신안을 일으키자 농가의 안에 앉아 있는 청포인이 희미하게 보였다.

 턱밑으로 흰빛이 출렁임을 보아 긴 수염을 길렀을 것이고 그렇다면 나이가 적지 않음이 분명하며 또한 남자일 터였다.

 "제천교가 귀왕의 북망산 음조지부를 화약으로 공격하여 붕괴시켰습니다. 그것을 본다면 최소한 제천교와 귀왕은 연관성이 희박할 걸로 판단됩니다."

 "상황이 명확치 않은 상태에서 그들이 무작정 귀왕을 공격했다는 것인가? 그를 적으로 돌리면서까지?"

 "명분이 있습니다. 공교롭게 군웅에게 쫓기던 지주귀도(蜘蛛鬼盜)가 땅속 통로를 통해서 그 북망별부에 들어갔다고 하는데 그들은 아마 그 이유를 대게 될 겁니다."

 그들의 정보망은 놀라울 정도였다.

 한효월은 비로소 그 견고한 지하 건축물이 붕괴된 까닭을 알 수 있었다.

 그 무덤은 제천교의 공격에, 내부로 들어온 벽력당의 고수가 터뜨리는 화탄세례까지 받게 되자 한쪽이 무너지게 되었고, 그렇게 되어 연쇄적으로 아예 무덤 자체가 붕괴된 것이다.

 한효월은 무덤을 벗어난 다음에 수많은 무림고수들이 달려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북망산이 무림고수들의 은신처라도 된 듯 그들은 그렇게 사방에 깔렸고, 시간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 몰려든 것이 귀도라고 불리는 자를 따라온 것임을 아는 것은 간단했다.

 독행신개에게 끌려가면서 심소옥이 모조리 종알거려 상황을 풀어주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말소리가 끊겼다.

 생각에 잠겨 있던 한효월은 그들의 말소리가 죽어들자 신경이 곤두섰다.

 움직임이 일고, 뭔가 말을 하긴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외부인이 들을 수 없는 전음입밀의 방법으로 말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제천교가 아니었다.

 이미 독고해를 공격한 것이 제천교임이 거의 분명한 상태라면, 이들이 누군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제삼의 세력일 것이기 때문이다.

 한참 공력을 집중하고 있던 한효월은 문득 기이한 느낌을 받게 되었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정신을 농가의 안에다 쏟고 있던 그는 아차, 하는 심정으로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정말 있었다.

 청포를 입은 사람이 턱밑에 달린 흰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한 공자이신가?"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한효월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의 모습은 조금 전까지 농가의 안에서 회포인과 이야기 하던 그 노인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꼴이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농가의 문이 열리면서 그 회포인이 한효월이 있는 곳을 향해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말이야 천천히, 급한 것이 없는 듯하지만 고수의 걸음걸이로서 4, 5장을 걸어온다는 것은 한달음에 지척이 된다는 의미다.

 그들은 엉뚱한 소리를 흘리면서 한효월의 신경을 돌려놓고는 오히려 그의 뒤로 돌아와 그의 퇴로를 차단한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그라 할지라도 그건 강호상의 경험 문제였다. 어쩌면 그들은 처음부터 그의 존재를 알았는지도 몰랐다.

 문득 한효월의 얼굴에 웃음이 돌았다.

 "추태를 보였군요. 그렇습니다."

 그가 태연히 앞의 청포노인에게 손을 맞잡아 포권하여 보이자 청포노인은 묘한 눈길로 그를 보더니 고개를 끄떡였다.

 "과연 독고 맹주의 사제다운 태도군. 상처가 심하오?"

 그의 질문은 뜻밖이다.

 "견딜 만합니다. 강호에서 생활하는 사람이라면 언제라도 감내(堪耐)해야 할 일이지요. 그보다……."

 "우리는 적이 아니오."

 청포노인이 말을 가로챘다.

 "……."

 한효월은 묘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우리는 강호상의 패권 따위에는 관심이 없소. 그럴 힘도 없고……. 다만 제천교의 움직임이 불안스럽게 보여서 그 의도를 알아보고 있을 따름. 그러니 필요하다면 한 공자를 도울 수도 있소."

 "그 우리가 누군지 알 수 있겠습니까?"

 한효월이 물었다.

 순간, 청포노인이 껄껄 웃었다.

 "우린 그저 몇 사람이 서로를 돕고 있을 따름이지, 거창하게 밝힐 게 아무것도 없소. 노부가 이 자리에서 아무 이름이나 밝힌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소?"

 말과 함께 그는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참으로 놀랍게도 청포노인의 수염이 속절없이 밀려나면서 창백했던 그의 얼굴이 대추빛의 얼굴을 한 중년인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바로 앞에서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할 일.

 한효월도 멈칫, 그 얼굴을 보더니 고개를 끄떡였다.

 "훌륭한 변용술(變容術)이로군요."

 "이제 아시겠소? 이름이 의미가 없다는 말을?"

 청포노인은 다시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웃음을 머금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은 누렇게 병색을 띤 사람의 얼굴로 다시 변했다.

 문득 한효월은 손을 뻗어 옆에 있는 나뭇가지 하나를 꺾었다.

 그 나뭇가지에는 푸른잎이 싱싱한 생기를 머금고 달려 있었다.

 "이게 뭔지 압니까?"

 그가 그 나뭇가지를 내밀었다.

 "……?"

 너무 엉뚱한 소리에 청포인이 일시지간 말문을 열지 못했다.

 내민 것이 나뭇가지임을 모를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일견해도 평범치 않은 그가 그러한 대답을 원했을 리는 분명히 없으니 그의 의중을 짐작치 못한 상태에서 함부로 입을 열 수 없는 까닭이다.

 한효월은 손을 뻗어 나뭇가지를 훑었다.

 나뭇잎이 칼로 밀어낸 듯이 와르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남은 것은 말 그대로 나뭇가지 뿐.

 "어떻게 해도, 나무에 달려 있어도, 이렇게 떨어져 있어도 나뭇가지는 가지일뿐, 달라지는 것은 없소. 뜻이야 조금 다르겠지만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이란 말도 궁극적으로는 이름이 바뀐다고 해서 본질이 바뀌지는 않는다는 것이오. 겉모습이 어떠하든 귀하는 귀하일 뿐, 다른 사람이 아닌 것처럼."

 그의 말에 멈칫했던 청포인은 이내 크게 웃었다.

 "과연, 과연 듣던 대로 간단한 사람이 아니로군! 감탄했소, 감탄했어……. 하지만 지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소. 그러나 한 공자는 머지않아 내가 누군지 우리가 누군지 스스로 알게 될 것이오."

 말과 함께 그는 소매를 휘둘렀다.

 그러자 소매 속에서 한 가지 물건이 한효월에게로 날아왔다.

 한효월이 받아 드니 그것은 한 폭의 둘둘 말린 비단이었다.

 "혹, 필요할 때가 오면 그것을 맹주부에 걸어두시오. 사람이 찾아갈 것이오."

 말과 함께 그는 미련없이 신형을 돌렸다.

 한효월은 그들이 사라짐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길고 긴 밤이었다.

 문득 가슴에 통증이 느껴졌다.

*   *   *

 낙양성의 겉모습은 전과 다름없다.

 그러나 그 움직임은 전과 같을 수가 없었다.

 강력한 힘으로 천하무림을 안정시켜 오던 천하무림맹이 맹주인 건곤무적 독고해의 사후에 바람 앞의 촛불과 같이 흔들리고 있었기에.

 태평한 세월이 십여 년이나 지난 무림이었기에 그 불안감은 더했다.

 과연 이제부터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짐작이라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폭풍의 회오리가 거세게 낙양을 향해서 불고 있음은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그들 자신이 낙양으로 몰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보도에 대한 소문은, 그 유혹은 참으로 커서 시간이 지날수록 낙양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의 숫자는 더 많아졌다.

 그 소문이 어떻게 나온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이 다 아는 신투(神偸), 지주귀도(蜘蛛鬼盜) 신부재(申不財)가 장보도를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소문은 비탈을 구르는 눈덩이처럼 커졌고 모여드는 사람들의 숫자도 시시각각 불어났다.

 그 유혹은 참으로 커서 그처럼 세상을 놀라게 했던 건곤무적 독고해의 죽음마저 희석되는 듯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서 무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긴 운기조식 끝에 눈을 뜬 한효월은 그윽한 빛이 창문을 통해 스며들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땅거미가 지고 있는 시각인 듯했다.

 그렇다면 맹주부로 돌아온 다음 거의 종일을 운기조식으로 보낸 셈이었다.

 이미 저녁노을도 스러진 다음인 듯했다.

 어둠의 무리가 다시 창문 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한효월은 천천히 손을 움직여 보았다.

 움직일 만했다.

 아침처럼 그렇게 움직일 때마다 통증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그 상처가 하루 만에 아물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그가 중조산에서 만든 속근고(續筋膏)가 제대로 역할을 해낸 모양이었다.

 그러나 계속 무리를 하여 조금쯤은 쉬어야 할 터이다.

 한효월은 잠시 몸 상태를 점검하다가 굳은 얼굴로 길게 한숨을 쉬었다.

 '분명히 때가 아니었었는데 그때 그 일이 일어나다니…… 설마 발작이 앞당겨진 것이란 말인가?'

 늘 평온했던 그의 안색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안색은 마치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보듯이 침통했고, 또한 굳어 있었다.

 '또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속수무책. 뭔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한효월은 미간을 찡그렸다.

 미간에 깊은 골이 졌다. 깊은 고뇌의 빛이 거기 깃들었다.

 그 순간.

 "깨어나셨습니까?"

 그가 깨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문밖에서 한 사람의 음성이 들린다.

 "감 사질인가?"

 "예."

 "괜찮으십니까?"

 한효월이 침상에 단정히 앉아 있음을 본 감천형이 물었다.

 "많이 좋아졌다."

 한효월이 미소를 짓자, 감천형은 굳은 얼굴로 다시 물었다.

 "반 치만 옆으로, 아니, 상처가 조금만 더 깊었다면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런지도 모를 상처라고 들었습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야기를 한다면 길지. 어쨌든 죽지는 않았으니 된 거 아닌가?"

 한효월이 그를 향해서 웃어 보이자 감천형은 어이가 없는 듯했다.

 "맹주부 내에 별일은 없나?"

 "예, 그보다 우선 이것 좀 드십시오."

 감천형이 침상 옆 탁자에 있던 그릇의 뚜껑을 열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면서 고소한 냄새가 퍼졌다.

 뭐냐는 한효월의 눈빛에 감천형은 미소를 머금었다.

 "경아가 사숙께서 깨어나기를 기다리면서 스무 번도 더 들락거리더니 결국 이걸 남겨두고 갔습니다. 잉어탕입니다. 직접 끓였다고 하는군요."

 "그런가?"

 한효월은 감천형이 권해주는 잉어탕을 받아서 조금도 망설임없이 그대로 다 마셔 버렸다.

 "맛이 좋군."

 "그렇습니까? 저는 그 말괄량이가 성깔만 있는 줄 알았더니 요리도 할 줄 아는 모양이로군요."

 감천형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 말을 들은 것인지, 막 문 앞에 도달했던 사람 하나가 나직이 코웃음을 치면서 발을 굴렀다. 그러나 차마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하고 몸을 돌려서 가버리고 말았다.

 한효월과 감천형은 의미 모를 웃음을 교환했다.

 그것이 누군지 말하지 않아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그들은 굳은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정말 진시황의 장보라는건가?"

 한효월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지주귀도가 황궁의 비고(秘庫)에 들어가서 가져온 거라고 하는데 처음에는 그게 뭔지 몰랐다고 합니다. 난해해서 학자에게 해석하라고 물어본 모양인데…… 그 학자가 그걸 해석하고는 부본(副本)을 남겨두었던 모양입니다."

 "그 학자는?"

 "북경의 석유(碩儒)라고 하는데 이미 피살되었습니다. 그 부본이 몇 사람의 손을 건너다가 싸움 끝에 훼손되어 버려 출처를 찾다가 지주귀도의 일이 강호상으로 퍼졌다고 합니다."

 "그런가?"

 한효월은 묵묵히 그의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진시황의 장보라면 정말 간단히 볼 일이 아닐 것이다.

 그는 중국 천하를 통일하고 삼황(三皇)과 오제(五帝)에서 한 자씩을 따 스스로를 황제(皇帝)라 부른 최초의 인물이다.

 수많은 제도를 정비했고 천하를 운하로 연결했으며 진(秦)이 영영세세(永永世世) 천하를 통치하고자 하여 그때까지 천하를 다스리는 방법으로 여겨졌던 제후(諸侯) 통치의 봉건제(封建制)를 군현제(郡縣制)로 바꾼 최초의 황제. 누구도 자신에게 반항하는 자를 용납하지 않았던 철혈(鐵血)의 인물. 세상에 이름 높은 분서갱유(焚書坑儒)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분서(焚書)로 인하여 수많은 책들이 불살라졌다.

 그런 와중에 희귀본들이 천하각처에서 수집됨은 또한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게 수집된 책들이 모두 다 태워진 것은 아니었다. 정말 귀중한 책들은 따로 분류되어 궁중에서 보관되었다가 시황의 장보(藏寶)로서 자리매김했다.

 그런 장보 자체가 간단한 것일 리가 없다.

 거기에 모인 장서들 또한 천하 삼교구류(三敎九流)의 모든 것을 포괄하였고 그도 모자라 상고시대의 전설적인 기록마저 있었다고 하였다.

 거기에 무공에 관한 책이 없었다라고 한다면 어불성설이다.

 더더구나 진시황은 시가(詩歌)류가 아닌 실용적인 책이라면 태우지 않았었다. 예를 들어 농업, 의약, 점복에 관한 책들이다. 그런 상황에서 무공에 관한 책이 그냥 타버렸을 리 만무.

 그렇게 번져 나온 소문은 그 진시황의 장보도에 천하를 오시하고도 남을 무공비급이 다수 있다는 것…….

 무림이 들끓지 않을 수 없는 소문이었다.

 한 자루의 보검이 있다는 소문만 나도 피바람이 이는 곳.

 거기에 그 모두를 포괄하고 있다는 장보도라니.

 "공교롭군."

 한효월이 낮게 중얼거렸다.

 휘영청, 달이 떴다.

 그가 맹주부로 돌아온 지 이틀.

 아니, 이제 밤이니 내일이면 사흘째가 된다.

 그 기간 동안 한효월은 방 안에 칩거하면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따금 감천형이 들러서 바깥 상황을 알려주는 것 외에는 한 발자국도 방 안에서 움직이지 않고 상처를 치료했던 것이다. 그것이 겉으로 알려진 그의 근황이다. 물론, 그가 안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가 밖으로 나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 와중에도 바깥의 정세는 시시각각 급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젠 소강 상태.

 아니, 폭풍전야의 고요라고 함이 옳을 터였다.

 낙양을 향하여 끊임없이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럼에도 정작 낙양성은 조용했다.

 천하를 위진(威震), 누르고 있었던 낙양의 주인 천하무림맹은 이미 종이호랑이가 된 다음이었다. 아니라고 할 힘이 없었다. 그만큼 지난번 습격으로 받은 타격은 컸다. 거기에 더해 맹주의 부재. 더더구나 시신을 도둑맞아 맹주의 죽음을 공식으로 발표조차 할 수 없는 참혹함이 더욱 그 위상을 추락시킨 다음이다.

 힘이 없으면 대접을 받지 못하는 곳이 무림.

 거기에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된 무림맹이라면 대접을 받을 수가 없다.

 상징적인 존재.

 그것이 현재의 무림맹이었다.

 "사형이 변을 당하고, 그 시신이 돌아온 다음…… 장보도가 하필이면 낙양에 출현한다는 것인가?"

 한효월은 뜨락을 서성였다.

 너무 공교로웠다.

 그리고 지주귀도는 왜 하필이면 낙양으로 온 것일까?

 시황의 능은 낙양이 아니라 섬서에 있었다. 섬서 려산(驪山)에 그 능이 축조되었음은 그리 큰 비밀이 아니었다. 비록 몇 군데 가묘를 만들어 두었지만 70만이라는 너무 엄청난 인원을 동원한 탓에 그 위치가 비밀이 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지주귀도는 망산의 무덤을 헤매고 있었다.

 설마, 여기에도 진시황의 무덤이 있다는 건가?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괴이한 일은, 의문은 그 일이 터진 시기였다.

 하필이면 왜 지금이냐는…….

 낙양으로 몰려든 군웅들은 시간이 갈수록 많아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낙양으로 오면 금방이라도 장보도를 얻을 수 있을 것처럼 소문이 소문을 낳으면서 사방에서 군웅들이 끝없이 몰려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숫자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 낙양 전체를 뒤덮다시피 한 그 군웅들은 지주귀도가 망산에 나타났다는 소문에 모두 망산으로 몰려갔다.

 오리무중.

 망산을 뒤덮었던 군웅들이 눈에 불을 켜고 산을 뒤지고 있었지만 그날 잠시 나타났던 지주귀도는 어디로 숨은 것인지 나타나지 않았다.

 여러 곳에서 작은 충돌이 있었지만 이젠 그나마도 잠잠했다.

 참지 못한 군웅들이 여기저기에서 무덤을 파헤치느라 싸울 여가가 없기 때문이다.

 "또 다른 무엇이 있다는 것인가?"

 한효월은 미간을 깊게 접었다.

 그가 산을 떠나올 때는 최선을 다할 뿐이라는 말을 하긴 했지만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나온 이후, 실제로 그가 알아낸 것은 한계가 있었다.

 따져 보면 알아낸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뭔가 방법을 달리해야만 할 때였다.

 그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일들이 분명히 이 흐름 밑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숨을 쉬고 있었다. 그것을 찾아내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상처를 치료하면서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서 골몰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기다림만은 아니었다.

 천천히 팔을 휘둘러 보았다.

 별다른 느낌이 없다.

 이 정도라면 일단 움직이는 데 지장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격렬한 싸움에는 아직 장담할 수야 없는 일.

 하늘의 달은 무심히도 밝다.

 그렇지만 그 달의 기울어짐을 보는 한효월의 얼굴은 밝지 못했다.

 산에 있을 때는 늘 고요했던 그였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늘 명경지수와 같이 편안했던 성정(性情)이 지금은 어딘가 달랐다. 그래서인지 좀 전에 설(設)해 보았던 선천지수(先天之數)도 제대로 괘(卦)가 나오지 않았었다.

 마음이 흐트러졌다는 증거였다.

 "성아가 돌아올 때가 넘었는데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군."

 한효월이 천천히 중얼거렸다.

 그날 제천교의 사명사자를 뒤따라갔던 유성은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소식도 없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 순간, 어디선가 흐느적거리듯 낮은 소리가 들려온다.

 "비파 소리인가?"

 잠시 귀를 기울이던 한효월은 그것이 제법 잘 타는 비파임을 알고 부지중에 끌리듯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누각.

 담장 너머로 보이는 화경루.

 불빛이 새어 나오는 화경루의 2층의 창문이 열려 있고 그림자 하나가 반쯤 닫힌 창문을 통해 보인다. 비파 소리는 그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술에 취해 슬피 떠나려는데 문득 아득한 강물에 떠오르는 달빛. 홀연히 들려오는 비파 소리에 주인도 객도 넋을 잃고 앉아 있구나……."

 디당당거리는 낮은 비파음에 곁들인 낮은 노랫소리.

 맑고 고운 음색이었다.

 하지만 그 노랫소리는 곱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어딘지 모르게 어두운 느낌이 그 노랫소리에는 깃들어 있었다.

 "비파행(琵琶行)……."

 잠시 귀를 기울이고 있던 한효월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백거이가 지었던 가사(歌詞).

 무려 616언(言)이나 되던 그 비파행을 독고경이 비파를 타면서 부르고 있었다.

 그때, 한효월의 뒤에 한 사람이 와 섰다.

 "사숙."

 천무였다.

 "준비가 되었나?"

 "예, 사숙."

 "가자."

 한효월의 말에 천무는 힐끗 시선을 돌려 담 너머로 보이는 화경루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묵묵히 신형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났다.

 무거운 마음을 남겨두고서.

 딩! 디디딩∼

 은어와 같은 손가락이 현(絃)을 오간다.

 그때마다 흔들리는 현의 울음에서 흘러나오는 비파 소리에 전신을 묻고서 독고경은 창밖을 본다.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천무의 등은 컸지만 한효월의 등이 더 커보임은 왜였을까.

 땅!

 갑자기 강렬한 음이 전체의 음을 모조리 튕겨 버린다.

 그녀가 비파의 현을 움켜잡고 있었다.

 움켜잡힌 줄이 실타래처럼 끊어져 그녀의 손아귀에서 늘어졌다.

 "나도 모르겠어……."

 그녀가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면서 입술을 물었다.

*   *   *

 한효월의 앞에는 20여 명의 위사들이 숙연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긴장감.

 맹주부의 후전 별원에 자리한 그들은 무공교두인 천무에게 선택되어 이 자리에 불려 나왔다. 그것도 비밀리에. 그리고 그들 앞에는 맹주의 사제라는 저 신비로운 젊은이가 나타났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그들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한효월이 그날 보였던 신위를 어찌 그들이 잊었을까.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었을 터이다. 위기의 순간에 그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날 맹주부에 있던 사람들은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으리라는 점을…….

 "이제부터 여러분이 무엇을 하게 될 것인지는 지금 말해 줄 수 없소. 앞으로의 모든 것은 천 교두가 지시할 거요. 잘못하면 개죽음을 할 수도 있소. 누구든 지금이라도 원치 않는 사람이 있다면 물러나도 좋소."

 한효월의 말에 물러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긴 이미 다짐을 받고 온 자리였다.

 지금에 와서 그 말에 누가 물러날 것인가.

 숙연한 기운이 그들의 얼굴에, 비장한 기운이 그들의 눈에 깃들었다.

 한 시진 후.

 "저들이 빠진다면 맹주부에 구멍이 생길 텐데?"

 그 자리를 물러난 한효월은 뒤따라 나오는 천무에게 말했다.

 "어차피 생긴 구멍 아니겠습니까? 저들이 있다고 해서 맹주부가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야 없겠지요. 그런데, 저들로서 가능할런지……."

 "다들 근골이 좋으니 가능성이 있을 것 같군. 이 일의 성패는 천 사질에게 달렸다. 어차피 시간이 모자라 모험을 할 수밖에 없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

 한효월이 말끝을 흐렸다.

 "언제부터 합니까?"

 "지금 이 순간부터."

 한효월이 무거운 표정으로 말을 끊었다.

 "알겠습니다."

 천무가 묵묵히 고개를 끄떡였다.

 어쩌면 저들은 그의 안배를 이기지 못하고 다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또한 싸움터에서 개죽음을 할 수도 있으니 어차피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은 분명하였다.

 적은 어두운 곳에 있고 이쪽은 모든 것을 다 내보인 상태.

 아무것도 감춘 것이 없는, 가진 패를 상대에게 다 읽힌 상태에서 처분만 바라고 있어서는 아무리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상대를 이길 수가 없다.

 더더구나 이쪽의 전력이 현저하게 밀리는 바에야…….

 지피지기(知彼知己)는 백전불태(百戰不殆)가 아니던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천무의 배웅을 받으며 거처로 돌아온 한효월은 그를 기다리는 감천형을 만나게 되었다.

 "군웅들이 지주귀도를 찾아낸 것 같습니다."

 그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여전히 망산에 있던가?"

 "그렇습니다."

 "우리 측 사람들은?"

 "외부에 나가 있던 고수들은 늦어도 내일이면 맹주부에 도착하게 될 겁니다. 그들이 온다면 우리 측의 전력도 조금쯤은 나아지겠지요."

 "다행이군. 그보다……."

 문득 한효월의 말소리가 낮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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