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六首 곤룡대진(困龍大陣)
-공포가 시작되다.
죽음의 함정(陷穽)은 절망으로 다가오다.
어둠에 잠긴 숲 속.
풍음곡은 말 그대로 단풍나무가 많은 곳이다.
높다랗게 솟은 절벽 아래로 곡 내로 들어오는 길은 넓지만, 실제로는 무성한 숲이 좌우를 뒤덮고 있어서 그리 넓은 것이라고 할 순 없었다. 그리고 곡 전체는 산자락을 타고 커다란 호리병 모양이라 입구가 아니라면 산을 타고 넘어야만 다른 곳으로의 이동이 가능했다.
어둠 속에서 대조 대사 등은 흑의인들과 격렬하게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중 대여섯 명이 벌써 땅바닥에 쓰러진 상태.
한효월이 질풍처럼 달려오는 것을 보자 대조 대사 등을 둘러싸고 있던 흑의인들 쪽에서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그들은 한효월이 채 장내에 당도하기 전에 썰물처럼 숲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어떻게 된 겁니까?"
주위를 돌아본 한효월이 급히 물었다.
"갑자기 숲 속에서 암기가 날아와서 순식간에 십여 명이 다쳤소이다. 빈승과 일진도우가 숲 속으로 진격해 들어가는데, 적이 출현했소."
굳은 얼굴.
그와 같이 있는 일진자의 얼굴도 일그러져 있었다. 그의 어깨에서는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많이 다쳤습니까?"
한효월은 일진자를 보면서 물었다.
"괜찮소이다. 암기에 맞긴 했지만……."
말과 함께 그의 얼굴이 조금 붉어지자 그의 팔에서 핏물이 솟구쳤다. 운기행혈(運氣行血)로써 팔뚝에 박혀 있던 암기를 튕겨내면서 핏줄기가 솟아난 것이다.
그런 공력이라면 충분히 스스로를 돌볼 수는 있을 터이다.
쓰러진 사람을 바라보던 한효월의 안색이 달라졌다.
"암기에 독이 있습니다."
말과 함께 그는 쓰러진 중년 승려의 목줄기에 손을 댔다.
이미 기식이 엄엄하다.
굳어지는 그의 얼굴에 대조 대사가 다급히 물었다.
"설마……?"
"중독이 심합니다. 어쩌면 힘들지도……."
다른 청년 도사의 혈맥을 짚어본 한효월은 번개처럼 주위에 쓰러진 몇 사람들의 혈도를 점했다.
"그, 그사이에 말이오?"
"무슨 독인지는 모르겠지만, 독기가 이미 전신으로 번졌습니다."
"으음……."
"우선 부상자들을 능 쪽으로 옮겨가야겠습니다."
"알겠소이다."
대조 대사 일행이 부상자들을 대동하여 물러 나오자, 그 모습을 군웅들은 굳은 얼굴로 쳐다보았다.
한효월이 그렇게 경고해도 누구도 그 말을 믿은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이젠 달랐다.
실증(實證)을 그들 스스로의 눈으로 목도하였기에.
웅성거림과 함께 십여 명의 군웅들이 신형을 날려 곡을 벗어나려고 했다.
"멈추십시오!"
한효월이 만류했지만, 그들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을 막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그들은 곡을 빠져나가 버렸던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곡구의 어둠 속으로 잠겨 버렸다고 할까.
"저건……?"
의혹의 빛이 군웅들의 눈에 깃들었다.
"좋지 않군……."
반면, 한효월의 얼굴은 오히려 굳어졌다.
"무슨 말씀이오? 저들은 아무 이상 없이 나간 거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저들이 대사 일행을 막은 것은 뭔가 완벽하지 않았던 것이고, 지금은 그것이 완벽해졌다는 의미입니다. 누구든 뚫고 나갈 수 없을 거라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군웅 중 한 사람이 코웃음 쳤다.
흑포의 노인 한 사람이 한효월의 말을 비웃고 있었다.
안색이 차가운 대머리 노인.
나이는 칠순이나 되어 보인다. 얼핏 보면 피도 눈물도 없이 생긴 사람. 하나 그의 본색은 냉면염라(冷面閻羅)라는 정도(正道)의 노협객이다. 악에 대해서는 피도 눈물도 없어서 그렇게 불린다. 무공은 강호 일류로서, 자연히 기질이 냉오하고 사람을 눈 아래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제 말이 믿어지지 않으신다면, 곡구 밖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실 수 있겠습니까?"
한효월의 말에 흑포노인은 대꾸도 없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일진 질풍이 이는 순간에 그의 신형은 이미 곡구로 치달리고 있었다. 그의 무공이 과연 경지에 이르러 있음은 충분히 알고도 남음이 있는 신법.
…….
그러나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싸움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갑자기 주위가 질식할 듯한 무거운 침묵으로 가득 찼다.
"아직도 의심이 가십니까?"
한효월이 주위를 둘러보면서 입을 열어 물었다.
까욱, 까욱…….
어디선가 밤까마귀 우는 소리가 섬뜩하게 들려왔다.
주위를 덮은 어둠.
그리고 사위를 내리누르는 침묵.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는 가운데,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으니 침묵의 무게는 더욱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정말…… 저들이 우리를 다 죽이려고 한다는 것이오?"
누군가가 물었다.
"좋은 뜻으로 이런 함정을 마련할 사람은 없겠지요."
한효월은 침착히 대꾸했다.
우회적인 대답이지만,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없다.
"아미타불……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좋을런지?"
주위를 돌아보던 대조 대사가 입을 열었다.
"아직까지 몸을 숨기고 계신 분은 모습을 드러내 주시겠습니까?"
한효월은 대답 대신 주위를 둘러보면서 소리쳤다.
그의 주변, 아니, 경릉 일대에 있는 군웅들의 숫자는 대략 백사오십 명 수준이었다. 그들을 제외하고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능 안으로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다.
한효월이 온 다음에 들어간 숫자만도 200명은 됨직했다.
그전에 들어간 숫자가 얼마인지는 짐작하기도 어렵다.
"만약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적으로 간주하고 행동을 하겠습니다."
한효월의 외침이 어둠을 울렸다.
"크크크…… 지금 협박을 하는 게냐?"
까마귀가 울부짖는 듯 듣기 거북한 음성이 들려왔다.
흑포노인 한 사람이 십이지신상 중 하나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대머리에 냉혹한 눈빛. 깡마른 얼굴에 광대뼈가 튀어나와 보기에도 섬뜩한 기운이 가득하다. 몸체마저 깡마른 그의 등에는 쌍도의 손잡이가 불쑥 솟구쳐 올라와 있음이 보인다.
"뉘신지 밝혀주시겠습니까?"
"노부는 마조(麻眺)라 한다."
흑포노인이 거만하게 대꾸했다.
사람을 눈 아래로 내려다보는 기색이 역력하다.
"마조? 맙소사…… 잔혼마도(殘魂魔刀)까지 나타나다니……."
누군가가 탄성을 흘러냈다.
하지만 흑포노인의 차가운 눈빛이 그곳을 쓸자 그 소리는 이내 사라져 버렸다.
잔혼마도 마조.
그의 나이는 이제 칠순을 바라본다.
전대의 마두 중 하나라고 일컬어지지만, 그의 행적은 피로 물들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자는 어느 누구라도 그냥 두지 않았지만 실제로 그가 손을 쓴 것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그의 잔혼삼십육도(殘魂三十六刀)는 잔혹하여 일단 손을 쓰게 되면 사정이 없어 그의 손 아래 걸리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했다. 호광(湖廣) 일대에서만 움직이고, 그나마 십여 년 전부터는 거의 활동이 없었던 그였다. 그런 그마저 여기에 나타났으니 오늘 이 자리에 과연 얼마나 많은 기인마두(奇人魔頭)들이 와 있는지 짐작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협박이 아닙니다."
그가 누군지 알지 못하고, 알아도 흔들림이 없을 한효월이다.
한효월은 침착히 말을 계속했다.
"여기 있는 분들은 모두 힘을 합해서 적의 포위망을 뚫고 나가야 하는데, 배후에 어부지리를 노리는 사람을 남겨둘 수는 없으니까요."
그가 정색을 한다.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적당과 한패로 생각하고 처리할 수밖에 없는 일."
그가 말을 맺었다.
"건방진 놈! 네가 지금 여기 모인 사람들을 마음대로 부리겠다는 게냐?"
코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비웃는 티가 역력하다.
또 한 사람이 숲에서 걸어나오고 있었다.
타는 듯 붉은 홍의를 입은 그는 잔혼마도와는 반대로 풍선에 바람을 잔뜩 넣어둔 듯이 뚱뚱한 데다 키마저 작아 5자나 될까 할 정도. 마치 굴러 나오는 듯한 모습이었다. 말은 그렇게 얼음 같으나 그의 얼굴에는 사람 좋은 웃음이 가득해 소면미륵(笑面彌勒)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소면인도(笑面人屠)로군."
한효월의 뒤에서 기가 막힌 듯 일진자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하나하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가히 불가일세(不可一世)의 마두들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정파(正派)에 몸을 담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 사람됨이 바르지 않다는 뜻. 그것은 다시 말해서 탐욕이 심하고 자기중심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명문정파에서도 달려온 마당에 그들이 나타난 것은 당연했다.
"뜻을 같이할 분만 행동을 같이하면 되겠지. 굳이 나를 따르라고 강요할 생각은 전혀 없소."
소면인도, 웃으며 사람을 죽이는 그 마두의 앞에서 한효월은 여전히 침착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흘흘흘…… 건방진…… 건곤무적이 무적이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소면인도가 머리를 흔들며 웃었다.
얼굴에는 가득 웃음이 떠올라 있지만, 한효월을 보는 그 눈빛은 음침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가 건곤무적 독고해에게 가지는 감정은 아주 특별난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20년 간 그는 숨을 죽이고 감히 세상에 나타나지 못했었다.
이유는 건곤무적 독고해와의 약속 때문.
천하에 무서운 것이 없었던 그는 자신의 비위를 거스른 산동(山東)의 채가장(蔡家莊)의 식솔 마흔일곱을 괴롭히고 있었다. 말이 괴롭히는 것이지, 실제로는 하나하나 잔인하게 죽이고 있는 참이었다.
그것을 마침 지나던 독고해가 보게 되었다.
결과는 뻔했다.
소면인도는 거의 초주검이 되어 구사일생, 겨우 목숨을 붙여서 도주했고 다시는 강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독고해가 자신을 찾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어찌 감히 반항할 엄두라도 낼 수 있으랴.
상대는 건곤무적이었다.
건곤(乾坤), 하늘과 땅 사이에 적이 없다는 제일고수.
하지만 그가 죽었다.
이제는 그가 없다. 그래서 그는 장보도의 소문을 듣자 조금도 망설임없이 달려왔던 것이다.
한효월은 그가 의도적으로 시비를 거는 것을 직감했다.
"당신은 제천교의 사람이오?"
한효월이 그를 쏘아보면서 물었다.
"무슨 소릴 하는 게냐? 제천교라니?"
소면인도의 퉁퉁한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이 순간에 굳이 그런 태도를 보일 리가 없기 때문이오."
소면인도의 얼굴에 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클클…… 이런 포를 뜰 놈이……!"
채 말이 끝나지 않았다.
그는 말을 하고 있는 도중에 돌연 한효월의 앞으로 다가서면서 양손을 쳐왔다. 폭풍과도 같은 경기가 일며 한효월을 휘감았다. 뿐만 아니라, 그 경기 속에는 음산한 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분간하기 힘든 쇠털같이 가느다란 암기가 함께 발출된 것은 그의 공세가 펼쳐짐과 동시였다.
"조심하시오!"
그의 뒤에 있던 일진자가 소리쳤다.
한효월은 미간을 찡그렸다.
피할 수가 없었던 까닭이다.
그가 그 자리를 피한다면 뒤에 있던 사람들이 그 암기에 희생될지도 몰랐다.
"악독하군."
냉랭한 음성이 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동시에 그는 앞으로 소매를 쓸어냄과 동시에 일장을 쳐냈다.
그의 소매에서 폭풍과 같은 경기가 일었다.
그 경기는 암기들을 모조리 휘감아 빨아들였다.
"만류귀종(萬流歸宗)!"
경탄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으흐흐…… 걸렸다!"
하지만 소면인도에게서 흘러나온 것은 음산한 웃음.
소면인도는 음산한 웃음을 터뜨림과 동시에 소매 속에 감추고 있던 왼손을 불쑥 앞으로 내밀었다. 손가락이라고는 식지 하나밖에 남지 않은 손이 그 속에서 무서운 기세로 튀어나왔다.
쐐애애액-!
부젓가락과 같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는 그 식지에서는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일면서, 가공할 위세의 지력이 찰나간에 한효월을 향해 무찔러 왔다.
핏빛 경기가 그 지력을 따라 사납게 회오리치며 일었다.
그 속도는 전광석화와도 같아서 붉은 뇌전이 한효월을 엄격(掩擊)해 오는 것만 같다. 게다가 거리조차 지척이라 피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
"그것은……?!"
그것을 본 한효월의 눈에 일견 놀람의 빛이 스쳐 갔다.
하지만 놀라고 있을 틈은 없다.
그의 얼굴에 맑은 빛이 떠오르는가 싶더니, 그의 손이 활짝 펴졌다가 찰나간에 수도(手刀)로 화해 비스듬히 앞으로 쳐갔다.
"독고 맹주의 절옥장력(切玉掌力)이다!"
그의 손이 나감에 따라 어둠 속에서 맑은 빛이 은은히 일어남을 알아본 사람이 소리쳤다.
동시에 한효월의 장세는 소면인도가 쳐낸 혈지공과 부딪쳤다.
파파팡!
고막을 떨어 울리는 폭음이 연속으로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맹렬한 경기가 회오리치며 이는 가운데 한 사람이 구르듯 뒤로 물러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흰 그림자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였다.
그러나 백의를 입은 것이 한효월임은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일.
뒤이어 장력과 지력의 부딪침이라고는 믿기 힘든 강력한 경기의 파장이 폭장(暴張)되면서 연달아 폭음이 터져 나왔다. 가공할 지력이 날아간 곳에 있던 석물(石物) 하나가 흔적도 없이 부서져 흩어졌다.
"으악!"
참담한 비명이 그 뒤를 이었다.
"크흐으으…… 이 잔인한 놈!"
치가 떨리는 신음과 함께 비칠거리며 뒤로 물러나고 있는 것은 소면인도였다.
방금까지 그처럼 가공할 위력을 보이던 왼손은 너덜거리는 고깃덩이로 변해 핏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팔뚝을 움켜쥔 소면인도의 얼굴은 참혹한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 앞에 선 한효월의 얼굴은 얼음처럼 찼다.
"잔인? 탄혈마지공(彈血魔指功)을 익히려면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스스로 잘 알면서 나를 잔인하다 하는가?"
말과 함께 한효월은 손을 뒤집어 일장을 쳐냈다.
폭음과 함께 그 손은 소면인도의 가슴에 작열했고, 외마디 비명과 함께 소면인도는 훌훌 줄 끊어진 연과 같이 사오 장을 날아가 버렸다. 바닥에 처박힌 그는 두어 번 꿈틀거리는 것 같더니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졌다.
소면인도와 같은 고수를 불과 몇 초식 만에 쳐 죽이는 것을 보았으니 사람들의 입이 얼어붙는 것도 당연했다.
'이 사람은 과감하기는 하지만 손 씀씀이가 너무 과하구나…….'
그 광경을 본 대조 대사는 암암리에 불호를 외웠다.
무림에 몸을 담았다고는 하나 수도하는 승려인 그였다. 상대가 아무리 용서받지 못할 마두였지만, 그처럼 참혹하게 죽이는 것을 보자 보기 좋을 수가 없었다.
도도(屠刀)를 놓으면 곧 성불(成佛)할 수 있다는 것을 굳이 들지 않더라도 상대에게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은…….
그때 문득 한효월이 물었다.
"탄혈마지공을 아십니까?"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였다.
"탄혈마지공이라면……!"
갑자기 대조 대사의 안색이 달라졌다.
"설마…… 자신의 피로 상대를 공격하는…… 그 저주받은 마공이란 말씀이오? 자신의 피에 원혼을 깃들게 하기 위해서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며 그 피로 수련한다는……."
대조 대사가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탄혈마지공이 단순히 지공이라고 하지 않고 마공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 수련 방법이 악독하기 때문이다.
내공으로 자신의 피를 뿜어내어 상대를 공격하는데, 그 피에는 독기가 서려 있어서 스치기만 해도 중독이 된다. 게다가 그 튕겨진 핏방울의 위세는 가공하여 화강암도 두부처럼 뚫고 들어간다. 그러한 위력을 곁들인 독기는 바로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면서 공포와 분노를 느끼게 해놓고, 그 공포와 분노가 깃든 상대의 피를 빨아들이는 것이 선행 조건이다. 그렇게 사람들을 죽이면서 심장의 피를 손가락으로 빨아들이면 공력이 진전됨에 따라서 손가락이 점점 굵어지고 종내에는 시뻘겋게 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경지에 이르게 되면 지력을 뿜어냄에 따라 혈기가 사방으로 소용돌이치면서 거기에 휩쓸린 사람은 모두 중독을 면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러한 내용을 알고 있는 대조 대사이니 놀라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때,
"앗! 저, 저거……!"
경악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한효월에 의해 날아가 처박혔던 소면인도의 몸이 한줌 핏물로 화해 녹아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츠츠…….
그의 주변에 있던 풀포기들이 변색되면서 연기를 뿜어냈다.
소면인도가 죽으면서 체내에 있던 독기를 제어할 수 없게 되자,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전신이 녹아내리는 것이다.
그 광경을 보면서 한효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면인도의 탄혈마지는 이미 십성 이상의 경지였습니다. 저런 경지에 이르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였을는지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아미타불……."
무색해진 대조 대사가 불호를 외었다.
뭐라고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자가 하루라도 더 살아 있다면, 세상에 얼마나 더 큰 해악을 끼칠 것인지는 불문가지였으므로.
간단히 설명한 한효월은 암암리에 숨을 몰아쉬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한 방에 소면인도를 죽여 버린 듯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탄혈마지공은 그렇게 쉽게 볼 무공이 아니었다.
그렇게 간단한 무공이라면 마공이라 불리지도 않을 터이다.
실제로 한효월은 무리가 됨을 알면서도 전력을 다해 그를 처리했다.
그가 그렇게까지 무리를 한 것은 그의 무공을 강력하게 과시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곳에 나타난 이후에 손을 쓰면서 전혀 사정을 두지 않고 전력을 다해 상대를 거꾸러뜨렸던 것이다.
암암리에 잠시 숨을 고른 한효월은 주위를 돌아보면서 입을 열었다.
"더 이상 몸을 숨긴 분은 없습니까?"
그의 물음에 더 이상 나타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어둠 속 여기저기에서 새로 모습을 드러낸 군웅들의 숫자는 줄잡아 백칠팔십 명은 충분하다.
"좋습니다. 여러분들은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뭘 하려는 거요?"
"저들이 어떤 함정을 파놓고 있는지 잠시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너무 위험한 발상이 아니오?"
"무량수불…… 그렇소이다. 차라리 여기 모인 사람들이 한꺼번에 밀고 나가면 어떻겠소? 이 인원이 한꺼번에 나간다면 누가 막을 수 있겠소?"
무당의 일진자가 말했다.
사실이 그러했다.
하지만…….
"그건 어쩌면 저들이 노리는 바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곡구가 좁아서 인원수가 많다고 힘을 발휘하기 어려울 겁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한효월은 말을 마치자, 더 이상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신형을 날렸다.
그의 신형은 바람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져 곡구를 향해 날았다.
"아미타불…… 지난날의 독고 대협을 보는 듯하구료."
그의 모습이 사라짐을 보고 있던 대조 대사가 중얼거렸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그의 모습을 사람들은 굳은 표정으로 바라본 채 서 있었다.
* * *
산속.
밤이다.
그렇다면 풀벌레 소리가 요란할 터이다.
그러나 질식할 듯한 침묵만이 자리한다.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자신의 손가락을 내밀어도 제대로 분간하기 힘든 어둠만이 일대를 짓누르고 있을 따름이다.
고요하기만 한 가운데 숲을 흐르는 것은 숨죽인 살기(殺氣).
그렇기에 모든 소리가 숨을 죽인 것이리라.
한효월은 나아갈수록 점점 더 무엇인가 자신을 누르는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실체는 그가 숲 속으로 들어서 채 십여 걸음을 나아가지 않아서 나타났다.
슷-
거의 듣기 힘든 미약한 파공음.
어둠 속에서 한성(寒星)이 날아들고 있었다.
'암기?'
이미 그것을 알아본 한효월은 신형을 틀어 그 암기를 피했다.
순간, 그가 움직인 곳에서 날카로운 기세가 폭사되어 나왔다. 나무 뒤에서였다.
정말 뜻밖에도 그것은 길이가 일장이 넘는 장창(長槍)이었다.
슉슉!
장창은 잇달아 그를 공격했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꼬리를 물고 십여 개가 연달아 그를 노렸다.
가히 출기불의(出其不意)!
창이 공격해 올 것은 미처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한효월은 그들과 싸우는 것이 목적이 아닌지라 다시금 물러났다. 하지만 뒤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훌쩍 건너뛰어 물러난 것은 옆이었다. 이런 경우에 뒤로 물러나는 것이 좋지 않은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그러나 그 순간, 한효월의 안색이 돌변했다.
발 밑이 허전했던 것이다.
거기 함정이 마련되어 있었다. 시커먼 어둠이 입을 벌리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양손을 떨치자 찰나간에 그의 신형이 일 장 가웃가량을 그대로 이동해 갔다. 그러한 신법은 정말 놀라운 것이라 보는 사람에게 탄성을 자아내게 할 만하였다.
하지만 땅에 내려서려던 한효월의 안색이 다시 굳어졌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그를 내리누르고 있었다.
무엇인가가, 그를 내리덮는 듯한 느낌.
부지간에 하늘을 올려다본 그는 다시 놀라고 말았다.
무엇인가가 어둠 속에서 그를 향해 떨어져 내리고 있었는데, 그게 무엇인지 일시지간 알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있는 듯 마는 듯 너무도 넓게 펴진 어떤 것.
"그물?"
찰나간에 그 정체를 짐작한 한효월은 다급하게 몸을 앞으로 던졌다.
길 좌우에 있는 숲으로 몸을 피한 것이다.
찰나, 마치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이 그를 향해서 섬광이 난도질하듯이 떨어졌다.
처음으로 날아든 것은 장창.
앞으로 몸을 내던졌던 한효월은 미처 몸을 일으킬 사이도 없이 바닥을 굴러 그 장창을 피함과 동시에 날아드는 장창 하나의 창대를 발로 걷어차는 탄력으로 허공으로 신형을 띄워 올렸다.
스팟!
하지만 그런 그의 앞으로 날아들고 있는 것은 그것을 짐작이라도 한 것처럼 덮쳐 오고 있는 검은 옷의 살수. 그들의 손에 들린 장도는 섬광(閃光)을 뿌리며 이미 한효월의 전신을 갈라오고 있었다.
쨍쨍! 쨍…….
날카로운 금속성이 고막을 울리며 터져 나왔다.
그리고 터져 나온 피보라.
…….
바닥에 흩어진, 넓게 펴진 그물.
그 위에 서너 명의 흑의살수가 꿈틀거리며 쓰러져 있다.
방금까지도 거기 있었던 한효월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정말 믿기 힘들게 강하군……."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중얼거렸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동평후와 그 옆에 있던 중년 문사, 곽수였다.
"그 상태에서도 색혼도진(索魂刀陣)을 형성한 도객 셋을 쓰러뜨리고 달아날 수 있다니……."
동평후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상처를 입었습니다."
곽수가 침착한 음성으로 말했다.
"별건 아닐 게야. 하지만 놀라긴 한 모양이군. 기절초풍을 하고 달아난 걸 보면……."
"그런 것 같진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니?"
"자신이 필요한 목적을 달성했으니 돌아간 것 같습니다."
"목적?"
"예, 아마 우리의 준비가 어느 정도인가 탐모(探摸)해 본 듯합니다."
"그렇단 말인가?"
미간을 찡그렸던 동평후는 이내 음산한 웃음을 머금었다.
"곤룡대진은 단순히 길을 막기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지……. 진을 발동해."
"지금 말입니까?"
"지금. 놈이 정신 차리기 전에."
"알겠습니다."
곽수가 머리를 숙였다.
* * *
"많이 다치셨소?"
돌아온 한효월의 전신 몇 군데에서 피가 번져 나옴을 본 대조 대사가 놀라 물었다.
팔뚝에서 흐르는 피를 눌러 지혈하면서 한효월은 침착히 말했다.
"그냥 스친 정도의 상처입니다."
"아미타불…… 적이 강하오?"
대조 대사가 물었다.
"매복이 대단합니다. 이곳에 모인 분들이 아무리 고수라 해도 그쪽은 어둠 속에 숨어 있어서 빠져나가려면 막대한 희생을 치러야 할 겁니다. 그런 희생을 치르더라도 빠져나갈 수 있다는 장담은 하기 힘듭니다."
한효월의 대답에 군웅들의 안색이 심각해졌다.
그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이미 아는 그들이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한단 말이오?"
누군가가 물었다.
"모두 기다리도록 하십시오. 날이 밝을 때까지."
"날이 밝을 때까지?"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지금은 어둠 속이라 적이 어떤 대비를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저처럼 우거진 숲으로 들어간다면 속수무책 능력 발휘도 못하고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려서 뚫고 나가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음……."
사람들이 신음을 흘렸다.
서로 얼굴을 돌아보는데, 난감하기 이를 데 없는 기색들이었다.
나도 한번 천하제일의 고수…….
그런 행운을 바라고 이 자리에 오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건 거짓일 터이다.
그런데 행운은커녕,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목을 걸어야 하다니!
하지만 그들이 생각을 굴려야 할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으앗!"
갑자기 외곽에 있던 군웅 중 한 사람이 비명을 질렀던 것이다.
"장 형! 무슨 일이오? 무슨 일이기…… 으앗? 이게 뭐냐?"
친분이 있던 사람이 묻다가 돌연 비명을 질렀다.
"으악! 뱀이다!!"
연이어 옆에서도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정말이었다.
무릎까지 오는 잡초들로 인해서 알지 못했었는데 뱀들이 소리도 없이 기어 들어와서 그들의 발을 물었던 것이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여기 무슨 뱀들이 이렇게?"
의혹 깃든 소리는 이내 잦아들어야 했다.
사방 천지가 뱀이었다.
"으하갸갸아……."
여기저기에서 비명이 잇달아 터져 나왔다.
놀란 사람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아미타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일꼬?"
대조 대사 등이 당황하여 수중에 들었던 선장으로 아래를 휘저었다.
펑! 펑!
강력한 벽공장력(劈空掌力)이 쏟아져 나가 땅거죽을 헤집는다.
흙먼지와 풀포기가 사방으로 비산하는 가운데, 피떡으로 으스러진 뱀들이 뒤엉켜 튕겨져 나갔다.
"대체 무슨 뱀들이 이렇게나 많단 말인가?"
놀란 일진자가 전면을 향해서 장풍을 쏟아내면서 중얼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작은 뱀, 큰 뱀. 그야말로 세상의 뱀이란 뱀은 모조리 다 몰려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방이 어두워져서 풀포기 아래로 스며드는 뱀들을 발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넋을 놓고 서 있다가는 언제 물렸는지 모르게 종아리를 물고 늘어지는 뱀을 보게 되니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손을 쓸 수밖에 없었다.
"잠시, 검을 빌려주십시오."
한효월이 뒤에 있던 일진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미 그의 움직임은 일행의 움직임을 영도한다. 일진자는 두말없이 등에 메고 있던 송문고검(松紋古劒)을 뽑아 한효월에게 내밀었다.
검을 받아 든 한효월은 나지막한 기합과 함께 앞으로 내달았다.
검광이 달무리처럼 그의 궤적을 따라 흐른다.
스파앗!
검광이 어둠을 가를 때마다 종아리까지, 혹은 허벅지까지 올라왔던 풀포기들이 밑둥까지 잘려 흩어진다. 한효월은 그렇게 풀포기를 잘라내는 일방, 장력을 쳐내 그 풀포기들을 바깥으로 날려 보냈다.
찰나간에 너비가 반 장가량 되는 공지가 생겨났다.
스멀스멀 그 순간에도 그 공지로 밀려드는 뱀이 보인다.
풀포기가 덮고 있을 때는 몰랐지만 그 잡초들이 사라지자 밀려드는 뱀 떼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한효월은 밀려드는 뱀 떼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계속 검을 휘두르면서 달려갔다. 그의 검이 이르는 곳에서 잡초들과 뱀 떼가 한꺼번에 날아갔다.
"한 공자를 도웁시다!"
그때서야 그의 의도를 알아차린 한 사람이 수중의 감산도를 휘두르면서 한효월의 뒤를 따랐다.
한효월은 그들 주위의 잡초를 대강 베어 넘김으로써 밀려드는 뱀 떼를 확인코자 하는 것이다. 잡초가 없다고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눈으로 볼 수 있으면 어디로 오는지 알지 못하는 것보다는 나을 터이다. 최소한의 방어는 할 수 있을 테니까.
백여 명이 넘는 군웅들이 일제히 손을 쓰자 그들 주위로는 금세 원형의 공터가 만들어졌다. 그것으로 몰려드는 뱀 떼의 모습을 확인할 수는 있지만 뱀 떼를 막을 수는 없었다.
군웅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어디선가 괴이한 피리 소리가 들려오고 있음을 느낀 것이다.
그 피리 소리가 점점 커지자, 뱀 떼의 움직임이 더욱 사나워져서 훌쩍훌쩍 뛰어오르면서 군웅들에게 달려드는 뱀마저 있었다.
"이것도 놈들의 짓이란 말인가?"
누군가가 이를 갈면서 소리쳤다.
이제는 누구도 한효월의 말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바로 그때, 한 사람이 바람처럼 앞으로 나서면서 손을 휘둘렀다.
그의 손짓에 따라 희끄무레한 것이 바닥으로 뿌려졌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처럼 달려오던 뱀들이 기겁을 하고 뒤로 물러나는 것이 아닌가. 희끄무레한 것은 누런빛을 띠는 가루였는데, 그 가루가 뿌려진 바닥으로 밀고 오던 뱀 떼는 마치 불에 데인 것처럼 옆으로 비켜났다. 그렇게 되자 뒤에서 밀고 오던 뱀과 물러나는 뱀들이 한데 엉겨서 일대 소란이 일어났다.
나타난 사람은 빠른 신법으로 질주하면서 한효월 등이 만들어놓은 그 방어선의 외곽에다가 손을 저었고, 그때마다 누런 가루가 뿌려졌다.
그 효과는 정말 탁월했다.
뱀들은 한데 엉기면서까지 꿈틀거리기만 할 뿐,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고, 무공이 뛰어난 군웅들은 이미 방어선 안으로 들어온 뱀들을 잡아 죽이는 것으로 일단 한숨을 돌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호 형(胡兄)?"
나타난 사람을 본 한효월이 뜻밖인 듯 소리쳤다.
"그간 무양하십니까?"
그가 한효월에게 포권하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이는 서른가량, 누가 봐도 허름한 옷에다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형상이라 거지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다만, 그런 모습임에도 미목이 수려한 데다 허리에 두른 매듭이 일곱 개나 되는 칠결(七結)인지라 그가 개방에서 간단치 않은 신분임을 알게 한다.
한효월과 지난날 잠시 만난 적이 있었던 개방의 옥면무영 호일랑이었다.
"언제 오신 겁니까?"
한효월의 물음에 옥면무영 호일랑은 미소했다.
"이런 성회(盛會)에 개방이 빠질 수가 없지요."
말과 함께 그가 손을 젓자, 군웅들 외곽에서 거지 몇이 더 나타나서 예의 누런 가루를 다시 뿌렸다.
그것을 보고 있던 한효월이 물었다.
"뿌리신 게 웅황(雄黃)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거지들은 늘 뱀이랑 엉겨 살아야 하는 처지라 비상용으로 몸에 지니고 다니는 거지요. 하지만 설마 이렇게 많은 놈들이 달려들 줄은 예상치 못해…… 얼마나 버틸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군요."
옥면무영 호일랑이 미간을 찡그렸다.
거지들은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다.
오늘의 양민이 내일이면 유리걸식(遊離乞食)하는 시대가 당시였다.
남의 집 처마에서 웅크리고 잔다면 운이 좋은 것이고 떠도는 거지라면 들판에서 밤을 지새워야 한다. 자연히 뱀들을 방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그들의 삶이다. 개를 쫓는 몽둥이와 뱀을 물리치는 유황, 어디나 누워 잘 수 있는 거적때기가 바로 거지의 필수품 중 하나인 것이다.
상황은 옥면무영의 말 그대로였다.
웅황이 잠시 위력을 발휘하고 있긴 했다.
그러나 뱀들은 점점 더 급촉해지는 피리 소리에 등을 떠밀리기라도 하는 듯이 줄기차게 달려들었고, 앞에 있는 웅황을 보면 또 기겁을 하고 뒤로 물러나는 상황이 거듭되고 있었다.
하지만 대체 어디서 그렇게 많은 뱀들이 밀려드는 것인지 급촉한 피리 소리를 따라 뱀들의 숫자는 점점 더 많아졌다. 뒤에서 밀려드는 뱀의 숫자가 더 많아지니 앞의 뱀은 가기 싫어도 엉겨서 앞으로 밀려 나가는 형편이었다.
"저 피리 소리를 저지하지 않으면 안 되겠군……."
잠시 주위를 살피던 한효월이 중얼거렸다.
"어디서 들려오는지 알겠습니까?"
"10여 장 밖인 듯한데, 저 전면의 숲 속인 것 같군요."
한효월의 대꾸에 옥면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같이 가지요. 저 피리를 불고 있는 자는 아마도 사노(蛇老)라는 자일 겁니다."
"사노?"
"뱀을 부리는 게 업인 자입니다. 주로 무이산(武夷山)과 선하령(仙霞嶺) 일대에서 활동하는데, 얼마 전에 북상하고 있는 것이 우리 개방의 눈에 들어 왔었습니다."
"그렇군요……."
한효월이 머리를 끄덕였다.
개방은 거지의 모임이지만, 그 특유의 정보력은 강호의 으뜸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수만의 방도를 이끌고 있는 것은 강호상에서 그들이 유일했고, 그 수많은 방도를 이용한 정보력은 뛰어날 수밖에 없었다.
잠시 옥면무영을 바라본 한효월은 무엇인가 말할 듯하다가 그대로 신형을 날렸다.
발 밑은 뱀 떼였지만, 불과 십여 장의 거리인지라 풀잎을 두어 번 밟는 사이에 그의 신형은 이미 십여 장의 거리를 가로질러 그가 목적한 숲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숲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숲 앞에 도달한 그는 대갈일성, 고함을 지르면서 그때까지 들고 있던 검을 숲을 향해 던져 냈다.
쏴아아앙!
검이 가공할 음향을 일으키면서 한 무더기의 찬란한 빛의 덩어리로 화해서 숲 속으로 덮쳐 갔다.
스파파파-팟!
검이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단숨에 양단(兩斷)하면서 날아갔다.
"으악!"
검이 날아감과 함께 숲 속에서 비명이 일었다.
그 순간, 한효월은 앞으로 내뻗었던 손을 힘겹게 빙글 돌리더니 앞으로 잡아끌었다.
그러자 숲 속에서 빛의 덩어리가 그를 향해서 날아들었다.
그의 손에 잡힌 그것은 바로 방금 그가 던져 냈던 일진자의 송문고검이었다.
잠시 주춤했던 그는 일성 고함과 함께 다시금 그 검을 격출했다.
쏴아아-앙!
섬광(閃光)에 이어 고막을 찌르는 파공음이 어둠을 뒤흔들었다.
"으악!"
숲 속에서 다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쿠쿠쿠쿠…….
그것과 동시에 굉음이 일면서 방금 검광이 스쳤던 곳의 아름드리 나무들이 이리저리 쓰러지기 시작했다. 세찬 경풍이 일어나는 가운데 나뭇잎이 날고 흙먼지가 하늘을 가리며 피어 오른다.
정말 굉장하고도 압도적인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과 함께 들려오던 피리 소리는 뚝 그치고 말았다.
보던 사람들이 모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효월의 뒤를 따라오던 옥면무영도 예외는 아니었다.
피리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공격하려는 것을 알고 지원하기 위해서 뒤를 따르긴 했지만 이런 방법으로 적을 공격할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 돌아온 검을 움켜쥔 한효월이 비틀거렸다.
"한 대협!"
옥면무영이 놀라 외쳤다.
동시에 그는 수중의 막대기를 좌우로 쓸어냈다.
순간적인 틈을 노려 달려들던 뱀들이 그 경풍에 휘말려 이리저리 날아갔다.
"돌아갑시다."
한효월이 신형을 틀어 바람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옥면무영은 그 뒷모습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한 공자가 언제 자신도 모르게 대협이 되었는지 그는 의식하지 못했다.
"주위를 경계하십시오."
일진자에게 송문고검을 건네주면서 한효월이 말했다.
"적은 금방 다시 공격을 해오지는 않을 겁니다만, 경계를 늦추지 말아주십시오."
"한 공자께서는?"
한효월의 말투가 이상함을 느낀 대조 대사가 물었다.
"잠시 쉬어야 할 것 같아서."
말하던 한효월은 미미하게 웃으며 옥면무영을 바라보았다.
"잠시 호법(護法)을 해주실 수 있겠소?"
한효월의 말에 흠칫하던 옥면무영은 미소를 띠며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말과 함께 그는 한효월의 앞을 막아섰다.
호법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를 지켜주는 역할을 의미한다.
이 마당에 호법을 해주겠느냐는 말은 자신을 믿는다는 뜻임을 옥면무영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서슴없이, 기분 좋게 한효월의 부탁을 받아들였고, 그의 앞을 가로막아선 것이다.
그가 자신의 앞에 섬을 보자 한효월은 뒤에 있던 석물의 기단에 기댄 채로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제아무리 그의 무공이 높다고 해도 단기간에 너무 무리를 해서 한계에 도달한 까닭이었다.
뱀을 조종하던 피리 소리가 사라지자 그처럼 극악하게 덤벼들던 뱀들도 주춤거리면서 웅황 경계선을 넘어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