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二首 적암아명(敵暗我明)
-위기에 직면하다.
적이 천지(天地)에 깔리니 피할 곳이 없다.
용문사(龍門寺).
이궐 용문을 저 멀리로 두면서 자리한 용문사는 고찰(古刹)이되, 백마사처럼 성가가 드높은 유서 깊은 사찰은 아니었다. 하지만 용문을 찾았던 사람들이 이곳에 들르는 경우가 많아 향화(香火)는 늘 끊이지 않았다.
어젯밤의 빗줄기로 인해서인지 하늘은 더욱 맑다.
그처럼 하루하루 불볕이었던 날씨도 계절은 어쩔 수 없는지 선들바람이 한낮임에도 느껴진다.
그것이 지난밤의 빗줄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터이다.
"허허, 이런 일이 있나……."
오후의 나른한 햇살이 용문사에 드리우고 있을 때, 돌연 난감한 탄식이 고요를 깨뜨리며 들려왔다.
주지가 거처하는 방장실.
좌우로 열린 장지문.
그 방장실에서 민대머리의 노승(老僧) 한 사람과 이십 대의 백삼문사(白衫文士)가 서로 머리를 맞댄 채로 바둑을 두고 있었다.
흰 돌과 검은 돌의 어우러짐은 가히 용호상박의 형국이다.
하지만 손에 들린 한 자루의 섭선(摺扇)을 휘적휘적 부치고 있는 백삼문사의 태도는 느긋하기 그지없는 반면에, 방금 탄식을 흘린 노승의 깊게 주름진 이마에서는 땀방울이 맺혀 고뇌의 흔적이 역연하다.
"허어, 참내…… 어떻게 해서 거기에 후절수가 있었더란 말인고? 도대체가 방법이 없구먼……."
뚫어져라 바둑판을 들여다보던 노승, 이 용문사의 주지인 수인 대사(修因大師)는 마침내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일대에 국수라고 소문이 날 정도로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이 바로 수인 대사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찾아온 이 백의문사에게 이미 연전연패를 한 상태. 그러던 차에 이번만은, 이라는 다짐 하에 이번 판만은 정말 장고(長考)에 장고를 거듭하여 대마를 잡고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한데 대마를 잡았다고 함박웃음을 웃으려던 그의 얼굴은 다시 굳어져야 했다. 상대를 차단했던 자신의 요석(要石)이 후절수에 걸려 떨어져 나가면서 자신의 대마가 함몰하는 것을 눈앞에서 봐야 했던 것이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방법이 없었다.
"하하, 다시 양보를 해주신 듯합니다."
백의문사가 낭랑히 웃었다.
눈에 익은 단아한 얼굴.
바로 한효월이었다.
"끄응……."
한효월의 말에 수인 대사는 입을 열지 않았다.
너무 아까운 판인지라, 뭔가 새로운 수가 없는지 골몰하고 있는 것이다.
"잠시 앞에 나가 바람을 쐬고 오겠습니다. 앞에 있을 터이니 제 차례가 되면 찾으십시오."
한효월은 그에게 웃어 보이며 자리를 떴다.
수인 대사는 오히려 잘되었다는 듯 고개만 끄덕인다. 그러면서도 눈은 바둑판에서 아예 떠날 줄을 모른다. 지난 몇 년 간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던 바둑인지라 출가한 몸에도 불구, 호승심이 인 것이다.
한효월은 밖으로 나와 방장실 너머에 있는 커다란 석탑을 바라보면서 표표히 옷자락을 날리면서 서 있었다.
그는 어제, 요광성주와 약속을 정하고는 바로 여기 용문사에 왔다. 우연히 용문사의 주지인 수인 대사와 불리(佛理)를 논하다가 서로 뜻이 맞아 바둑까지 두게 된 터이다. 실제로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상황이었다. 물론 수인 대사는 그런 일을 알지 못하지만.
그가 석탑의 주위를 두어 바퀴나 돌았을까.
문득 시녀 차림의 여인이 석탑을 향해서 다가왔다.
서른쯤으로 제법 나이가 든 그 여인은 뭔가를 기원하는 것이 있는 듯 합장을 한 채로 계속해서 석탑을 돌고 돌았다.
요광성주를 기다리던 한효월은 조금 초조해졌다.
그녀가 오지 않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었다. 그러나 예정 시각을 한 시진이나 지났다. 유성의 말대로 그를 치기 위한 고수나 데려오지 않으면 다행일까?
바로 그 순간이다.
'한 공자이신가요?'
나직하고도 은밀한 전음이 그의 귀로 날아들었다.
그 시녀 차림의 여인이 그의 옆으로 스치고 지나면서 하는 말이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나직한 중얼거림이 끊임없이 울려 퍼진다.
여인은 한효월은 쳐다보지도 않고서 연신 축수염불을 하면서 태연히 탑을 돌고 있었다.
용문사의 탑은 모두 두 개가 있다.
등룡(騰龍)과 대안(大安)이다.
얼핏 전혀 연관이 되지 않는 듯한 그 탑의 이름은 실제로는 매우 깊은 뜻으로 연관되어 있다. 잉어가 용문탄(龍門灘)을 거슬러 올라가면 용이 된다는 전설이 용문에 깃들어 있음은 이미 전술(前述)한 바가 있다. 그렇게 뜻을 이룬 존재는 바로 등룡이 된다. 기복(祈福)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하지만 대안은 그 이후의 의미가 된다. 용이 되고 난 다음에 세상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는 그런…….
그래서 사람들은 바랄 일이 있을 때에는 이 등룡탑을 찾고, 그것이 이루어지면 대안탑을 찾아 무사강녕을 기원한다.
여인과 한효월이 돌고 있는 탑은 등룡이다.
한효월이 그녀를 보고 있을 때, 다시 전음지성이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서로 길이 다르다는 말씀을 전하라 들었습니다. 그럼…….'
등룡탑에 오체투지하여 절을 하던 여인은 그 말을 끝으로 하여 그 자리를 떠났다.
한효월은 황당했지만, 뜨악한 표정을 짓거나 그녀의 뒤를 따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하기에는 서너 명이나 되는 다른 향화객(香火客)들의 눈길을 의식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여인이 오체투지한 등룡탑의 전면으로 가면서 그 탑을 조용히 올려다보았을 따름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여 등룡탑을 물러 나오는 그의 손에는 이미 암중에 한 장의 서찰이 들려 있었다. 여인은 물러 나오면서 은밀히 서찰을 떨어뜨렸고 한효월은 능공섭물(凌空攝物)의 공력으로 그것을 빨아들였던 것이다.
그러한 상황은 정말 찰나간에 진행되어 귀신도 알아보기 힘들었다.
'제가 따라가 볼까요?'
봤는지 못 봤는지, 유성의 음성이 나직이 들려왔다.
한효월은 섭선을 휘적휘적 부치면서 머리를 저었다.
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는 방장실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 탑을 떠났다.
방장실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등룡과 대안을 거쳐 대웅전을 가로질러야 한다. 등룡과 대안이 대웅전 앞에 우뚝 자리하고 있는 까닭이다.
대웅전 앞을 지나던 한효월의 눈에 놀람의 빛이 일었다.
그 대웅전의 높다란 계단.
그 계단의 위쪽, 대웅전 출입구 쪽에 회의 중년인 두 사람이 좌우를 둘러보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뿐, 한효월은 조용히 대웅전을 지나쳐 담장 월동문으로 들어섰다. 월동문으로 들어선 그는 잠시 미간을 찡그리고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이내 바람처럼 신형을 날려 대웅전의 뒤로 돌아갔다. 그 움직임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날벼락이 치듯 급박하기 그지없었다.
오후의 나른한 햇살이 졸고 있는 용문사.
그 대웅전 뒤쪽으로 돌아간 한효월은 소리도 없이 대웅전의 안쪽을 엿보기 시작했다.
대웅전의 안쪽에는 흑의의 여인 한 사람이 석가모니 본존불에게 오체투지하여 계속하여 절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앞문 쪽으로는 그녀의 시녀인 듯한 시비 두 명이 서 있었고, 불상의 앞에는 50줄의 승려 하나가 독경을 하고 있었다. 얼핏 들어보건대 왕생경(往生經)인 듯하였다.
'역시 그녀로구나!'
한효월은 자신이 잘못 보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야말로 지난날 용문석굴의 빈양동중에서 만났던 흑의 면사여인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떠나간 자리에는 독고경이 있었다. 비록 그녀를 직접적으로 해한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 뒤로 독고경이 보인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저 흑의면사녀뿐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나무관세음보살……."
흑의면사녀가 나직이 불호를 외면서 오체투지했던 머리를 들었다.
'음?'
그녀의 얼굴을 본 한효월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부처님의 앞이라 그런지 그녀는 면사를 걷어놓고 있었다. 아무리 많아도 40대를 넘지 않을 듯한 그 얼굴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한효월이 놀란 것은 그녀가 아름다워서가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은 나이를 짐작키 어려웠다.
젊어서도 절세의 미인은 아니었을 터이다. 그러나 기품있었을 그 얼굴은 어딘지 그늘지고, 우수(憂愁)가 어려 묘한 분위기가 어린다. 하지만 그보다 한효월을 곤혹스럽게 한 것은 그런 그녀의 얼굴이 본 듯하다는 점이었다. 더 곤혹스러운 것은 어디서 본 듯하면서도 실제로는 본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효월은 세상이 흔히 말하는 천재의 범주에 드는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한 번 들은 것은 결코 잊어버리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기억을 하지 못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괴이하군……. 그때 잠시 보긴 했지만 얼굴을 본 적은 없었고, 그 외에는 본 적이 없을 텐데, 왜 본 것 같을까?'
한효월은 곤혹스러움에 잠겼다.
그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에 흑의면사녀는 불공을 마친 것인지 다시 면사를 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독경을 하던 승려의 전송을 받으며 대웅전을 나서 회의인들, 지난날 그처럼 무서운 검기를 전신에서 쏟아내던 그들의 호위를 받으며 용문사를 떠났다.
그녀의 신분이 역시 간단치 않음을 의미하듯이 예의 가마가 대웅전 앞까지 들어와서 그녀를 모셨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대웅전 앞까지 가마가 들어올 수가 없을 터이다.
'조심해서 따라가 보도록 해라. 특히 가마를 호위하는 두 회의인을 조심하도록. 보통 고수들이 아니다.'
그녀가 탄 가마가 승려들의 전송을 받으며 떠나는 것을 지켜보던 한효월이 전음으로 지시했다.
그의 명대로 유성은 소리도 없이 저 가마를 따라갈 것이었다.
그 가마의 모습이 사라진 후, 암암리에 가마의 신분을 조사했지만 알아낼 것은 없었다. 가끔 와서 불공을 드리고 간다는 것밖에는. 대부분 첫새벽에 오는데 오늘은 특별한 예외라는 말을 들었을 뿐이다.
방장실로 걸음을 옮기던 한효월은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자, 소매 속에 든 서신을 꺼내 들었다.
<잘 아는 여자를 조심하세요.>
서신의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잘 아는 여자?'
말 대신 서신으로 만날 장소를 다시 정할 것으로 생각했던 한효월은 내심 실망스럽고도 황당했다. 편지를 보냈길래 뭔가 중요한 것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너무 뜻밖의 내용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 * *
쏴아아…….
계곡 물이 시원스러운 포말을 일으키면서 흐른다.
물방울이 튀어 옷을 적시지만 개의치 않는다.
산바람에 불어와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당기지만 그 또한 상관치 않았다.
그저 고요히, 아니, 망연히 흐르는 물만 바라볼 뿐이다.
저처럼 거침없이 자신의 갈 길로 가는 물이 부럽다.
할 수 있다면 저 물살에 몸을 맡기고 그 물을 따라 흘러가고 싶을 따름.
이름 대신 요광성주라 불리는 그녀는 하염없이 흐르는 물살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긴 한숨을 몰아쉰다.
부모도 모른다.
철이 들면서부터 그녀가 알게 된 세상은 먹지 않으면 먹히는 약육강식의 강자 논리가 철저히 지배하는 세계였다. 오직 살아남기 위해서 달려오면서, 강해지기 위해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해서 전력을 다했었다.
남자를 생각할 시간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교중에서 남녀 간의 행위를 금하지 않지만 그녀는 코웃음 쳤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옷을 벗는 것 따위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음을 주는 것이 얼마나 바보스러운 짓인지는 너무도 잘 안다. 그 허울이 얼마나 사람을 약하게 하는지 보면서 자랐기에.
그런데…….
그런데 지금 이렇듯 흔들리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저 급류의 부서지는 물살에서 피어 오르는 물안개에 서린 무지갯빛에 떠오르는 저 얼굴은 누구의 것인가.
교중제일적.
제천교에서 추살 대상 제일호로 정한 적이다.
"바보처럼……."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날 듯 고통으로 입술이 저며온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녀의 가슴속은 이해하기 어려운 고통으로 가득 찼다.
어이할 것인가.
왜 이따위 일이 나에게…….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한차례 거칠게 머리를 흔들어댄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복면으로 얼굴을 감추고서 그 자리를 떠났다.
쏴아아아…….
물살은 무심히 흘러가기만 한다. 그녀가 떠났든 아니든 상관없이 그저 흘러갈 따름이다. 마음껏 용트림하면서.
* * *
하루가 지났다.
태연하게 방장 수인 대사와 바둑을 두며 지내고 있는 한효월이었지만 그의 내심은 매우 침중했다.
흑의면사녀를 따라간 유성이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쉽게 생각했던 건가?"
굳은 얼굴로 용문사의 뒤뜰을 서성이던 한효월은 잠시 다녀오겠다는 전갈을 남기고 그곳을 떠났다.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봉설란의 거처로 가려는 것이다.
이미 약속한 사흘의 시간이 지났다.
밤이 된 것은 아니지만, 굳이 밤에 갈 이유는 없었다.
봉설란을 만나고 난 다음에 유성의 행방을 찾아볼 예정이었다. 그 행방을 찾는 데에는 한 가지 방법이 있어 막연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미 제천교에서 눈에 불을 켜고 찾는 존재였다.
그냥 길을 간다면 본의 아니게 봉설란에게 피해를 줄 수가 있었다.
한효월은 화복(華服)으로 성장을 하여 변장을 한 다음에 유람하듯 봉설란의 거처에 당도했다.
"별로 좋은 소식이 아니라서……."
봉설란은 밝지 않은 안색으로 한효월을 맞았다.
시녀가 그를 맞았고, 대청에서 차를 마시며 잠시 기다리자 나온 봉설란의 말은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봉황문주에게 일이 있어서 서로 연락이 되질 못했어요. 겨우 한 공자의 의중을 전달만 해둔 상태라서…… 며칠이 더 걸려야 의사 전달이 가능할 것 같군요. 어떻게 하면 좋을지?"
"기다리지요."
그녀의 조급함에 비해서 한효월의 태도는 느긋했다.
조금도 바쁠 것이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백방으로 손을 써봤지만, 봉황문주와 연락이 닿지를 않았어요. 오늘 아침에야 문중의 대소사를 처리하는 문곡과 연락이 닿았는데 문주가 여기까지 당도하려면 족히 이틀은 걸려야 한다는군요."
봉설란은 죄라도 지은 듯 난감해하는 모습이었다.
"아닙니다. 그들과 접촉할 수 있도록 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를 드려야지요. 봉황문은 신비하여 그들과 접촉하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말은 뭣하지만……."
봉설란이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말씀하십시오."
"왜 문주를 만나려고 하는지…… 제가 알아도 되겠습니까?"
한효월은 그녀의 물음이 뜻밖인지 묵묵히 찻잔만을 만지작거렸다.
이름난 도자기가 아닌 투박한 찻잔. 하지만 거기 담긴 차 맛은 매우 그윽하여 맛을 보지 않아도 가슴이 시원해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 그는 눈길을 들어 봉설란을 쳐다보았다.
"별다른 뜻은 없습니다. 과연 봉황문이 어떤 뜻을 가졌는지, 그게 궁금할 뿐이지요."
"예에……."
봉설란은 말끝을 흐렸다.
한효월이 의례적인 답을 한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연락을 어디로 하면 될까요? 불편하시겠지만 여기 계시겠습니까?"
그녀의 물음에 한효월은 머리를 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말끝을 흐린 한효월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시렵니까?"
"지금 가봐야 할 곳이 있어서……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그녀에게 머리를 숙여 보인 한효월은 바로 그를 맞았던 대청을 떠났다.
오후가 되면서 다시 희뿌연 구름이 밀려들었다.
한효월이 조용히 저택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창문을 통해서 일목요연하게 내려다보인다.
"그가 알아낸 것이 얼마나 될까……."
한효월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던 봉설란이 중얼거렸다.
놀랍게도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그 말을 받는 사람이 있었다.
"제천교의 움직임에 걸림돌이 되긴 했지만, 실제로 알아낸 것은 거의 없다가 현재까지의 상황인 듯합니다."
"거의 없다?"
"그렇습니다. 다만……."
그녀의 뒤에서 들려오던 음성이 더욱 낮게 가라앉았다.
"그가 어떻게 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심각해졌습니다. 이젠 독고 맹주가 살아난다 할지라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할지라도 이젠……."
음성이 말끝을 흐렸다.
…….
그 말을 끝으로 누각에 자리한 방에서는 침묵이 흘러갔다.
"그 계집은?"
"추적 중입니다."
"추적 중, 추적 중…… 언제까지 그 말만 되풀이할 거지?"
돌연 날카로운 음성이 터져 나오며 봉설란이 홱, 신형을 돌렸다.
자애했던 얼굴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눈빛이 칼날과 같이 무섭게 빛나고 있었다.
"내일까지 찾아내. 있는 장소를 찾아내든, 그 계집을 내 앞에다 데려다 놓든…… 더 이상 시간 끌지 말고!"
"알겠습니다."
무거운 음성이 봉설란의 명을 받았다.
* * *
한효월은 봉설란이 있던 저택을 빠져나오자, 바람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그가 방향을 잡은 곳은 바로 유성이 간 흔적이다.
유성은 그냥 간 것이 아니었다.
한효월만이 알아볼 수 있는 흔적을 남기면서, 그가 향하고 있는 방향을 알려주면서 그 흑의면사녀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만에 하나 잘못되었다 할지라도 한효월이 뒤를 따를 수 있기 위한 안배다.
그 흔적을 찾기 위해서는 다시금 용문사까지 가야 했지만 한효월은 이미 용문사를 떠나올 때, 유성이 남긴 흔적에 대해서 조사를 한 바 있었다.
낙양 일대가 그냥 유서 깊은 고도(古都)가 된 것은 아니었다. 산세가 좋고 병가(兵家)의 요충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낙양 주변에는 명승(名勝)이 많고 고적(古蹟)이 많다.
뿐만 아니라, 산세 또한 여기를 가도 저기를 둘러보아도 빼어났다.
봉설란의 저택을 벗어난 한효월은 바로 방향을 틀어 관도(官道)를 벗어났다. 관도란 나라에서 닦아놓은 길이다. 한효월과 같은 고수가 전력으로 어떤 곳으로 달려가려면 그 길을 따라가기보다는 숲을 가로질러야 한다. 그렇게 달려가면 유성이 남간 흔적을 따라가야 하는 그로서는 상당한 시간을 절약할 수가 있었다. 게다가 관도로 가게 되면 사람들의 눈 때문에 신법을 전개하기 어렵다는 점도 있었다.
그렇게 관도를 벗어나 짙푸른 숲으로 들어선 한효월은 얼마 가지 않아 어디선가 은은히 들려오는 비명 소리가 듣게 되었다. 10여 장이 넘는 거리였지만 조용한 숲 속이라 비명 소리는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단숨에 그 거리를 가로지른 한효월은 거지 한 사람의 시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중년의 거지인데, 내가중수에 당한 듯 피를 쏟은 채 엎어져 죽어 있는 모습이었다.
주위를 살펴봤지만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얼마 살펴보지 않아 그가 매우 급박한 싸움을 벌이면서 여기까지 이르렀고, 마지막 순간까지 저항을 멈추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엇을 위하여?'
한효월은 미간을 찡그린 채로 시선을 든다.
몇 가지 다급한 흔적이 그쪽으로 나 있었던 것이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한효월은 그 흔적을 쫓아 신형을 날렸다.
개방과 그는 이미 인연이 생긴 상태이고, 설사 인연이 없다 할지라도 이렇게 죽어 있는 것을 그냥 보고 넘길 수만은 없는 일인 까닭이다.
"학학……."
다급한 숨을 몰아쉬는 거지 하나가 있다.
몇 군데가 찢겨 너덜거리는 더러운 옷에는 핏자국이 낭자하여 가히 참혹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것은 숨이 턱에 차 올라 정말 이젠 때려죽인다 할지라도 한 걸음도 더 움직일 수 없을 지경이라는 것. 쫓아올 적을 생각한다면 숨을 죽이고 어떻게든 이 자리를 모면해야 한다.
그러나 내상은 진력을 고갈시켜 숨을 가다듬을 수가 없다.
숨을 한번 몰아쉴 때마다 가슴이 터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심소옥은 공포에 질린 눈빛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개방의 고수들을 마치 파리처럼 때려잡은 그 가공할 악마들이 그녀를 쫓아오는 것은 아마도 찰나간일 터이다.
"학, 학! 하학……."
그녀는 억지로 숨을 억누르면서 산신묘(山神廟)의 기둥을 움켜잡았다.
쫓길 때, 이런 곳으로 숨어드는 것은 그리 현명한 짓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디든 잠시라도 숨을 돌릴 곳이 필요했기에. 그리고 우선, 다른 곳으로 갈 만한 힘이 없었다.
"훅, 후우우……."
잠시 후, 그녀는 겨우 숨을 추스를 수 있었다.
무공을 연마한 사람답지 않게 마치 대장간의 풀무와 같이 내뿜던 숨길이 이제야 겨우 자리를 찾았다.
"어, 어떻게든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할 텐데……."
그녀는 스스로를 진정시키려는 듯 가슴에 손을 얹었다. 옷이 찢겨 가슴의 봉긋한 골이 다 보였다. 그래도 제대로 가릴 수도, 그럴 염도 없었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판이었다.
"그럴 수 있을 것 같은가?"
음산한 웃음이 그녀의 귓속으로 파고든 것은 바로 그 순간이다.
혼비백산한 그녀가 펄쩍 뛰다시피 하면서 그 자리에서 물러나려는 순간에 막강한 힘 한줄기가 그녀의 가슴을 쳤다.
"아악!"
참혹한 비명과 함께 그녀의 신형이 내동댕이쳐지듯 훌쩍 날아 산신묘의 벽에 세차게 나가떨어졌다.
쿠다당!
흙먼지가 심하게 일어나는 가운데 그 먼지를 뒤집어쓴 심소옥이 머리를 들자 그녀의 앞에는 음산한 웃음을 머금은 흑의인 하나가 우뚝, 버티고 서 있었음을 볼 수 있었다.
"너, 너는……!"
짓눌린 비명과 같은 신음을 흘리며 심소옥이 주춤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일 뿐, 물러날 곳은 없다. 그녀의 입에서 붉은 피가 뭉클뭉클 쉼없이 흘러내렸다.
"크흐흐흐…… 겨우 여기까지 온 건가?"
흑의인이 음산한 웃음을 터뜨렸다.
"도, 도대체 왜, 왜 이러는 거예요?"
심소옥의 음성이 떨려 나왔다.
그녀의 입에서 이처럼 순한 말이 나온다는 것은 참으로 믿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처했던 상황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러는지는 스스로가 잘 알겠지……."
흑의인의 입에서 음산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순간, 그의 신형이 유령과도 같이 심소옥을 덮쳐 왔다.
심소옥은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흑의인이 덮쳐 오는 순간에 옆으로 몸을 날렸지만 심한 내상을 입은 마당인지라, 평소와 같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그녀가 신형을 날린 쪽에서 또 다른 흑의인이 나타날 줄은 미처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음……!"
나직한 신음과 함께 심소옥은 마혈(麻穴)을 짚여 쓰러지고 말았다.
"질긴 계집이군…… 여기까지 도주하다니. 끌고 가."
먼저 나타났던 흑의인이 상사인 듯 명령하자, 심소옥을 제압한 거구의 흑의인은 조금도 망설임없이 심소옥의 머리채를 잡아 들었다. 그녀는 속절없이 푸줏간의 돼지처럼 그의 손아귀에 머리채를 잡힌 채, 대롱대롱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렇지 않아도 거의 반라가 되어 있었던 심소옥의 상의가 그만 밑으로 흘러내리고 말았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그대로 출렁이며 드러났다. 의외에도 그녀의 상반신은 거지답지 않게 희고 아름다웠다. 거지라 할지라도 여자인지라 목욕은 자주 한 모양. 그녀의 풍만한 유방이 눈앞에서 출렁이자 흑의인의 눈에 괴이한 빛이 흔들거렸다.
"거지라도 계집이라는 건가?"
그 흑의인이 음산히 중얼거렸다.
"확인이라도 해보고 싶나? 거지가 계집인지 아닌지?"
상사인 흑의인이 그 광경을 보고 소리없이 괴이하게 웃었다.
거구의 흑의인은 큭큭 웃으며 심소옥의 가슴을 한번 주물러 보더니 망설임없이 손을 들어 심소옥이 입은 다 헤진 바지를 잡아당겼다.
옷이 찢어지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헤진 바지는 힘없이 찢겨져 그냥 바닥에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그 잔해가 심소옥의 발에 걸려 대롱거리고 있을 뿐.
이제 그녀의 나신을 가리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문득 산신묘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거지 옷 속 안에서 드러난 심소옥의 나신이 너무 훌륭했던 것이다.
"그냥 넘겨 버리긴 그렇군……."
부지중에 침을 삼키던 거구의 흑의인이 중얼거렸다.
그 순간, 앞에 있던 흑의인이 괴이한 소리와 함께 그를 향해 덮쳐 왔다.
"무, 무슨 짓? 아니, 아무리 급해도……."
하지만 그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심소옥을 잡으려는 것처럼 보이던 흑의인이 그녀의 앞에서 그대로 땅바닥에다 얼굴을 처박으며 쓰러지는 것을 보았던 까닭이다.
뿐만 아니라, 흑의인이 있던 그 자리에는 화복의 청년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고 그는 노한 눈빛으로 거구의 흑의인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녀를 놓아주어라."
그가 냉엄한 어조로 말했다.
그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흑의인은 마치 심장을 철퇴로 치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놀란 그는 부지불식간에 틀어 잡고 있던 심소옥의 머리채를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에 그는 그 청년이 심소옥을 부축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찰나, 그는 소리도 없이 주먹을 휘둘러 그 청년의 머리를 쳤다.
그와 청년의 거리는 불과 두어 자.
피하기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나타난 청년이 앞서의 흑의인을 쓰러뜨린 것을 알아본 다음인지라 그 일격에는 그의 전력이 깃들어 있었다.
하나, 그가 일권을 쳐내는 순간에 그는 무서운 힘을 가진 한 주먹이 그의 가슴을 치는 것을 깨닫고 입을 딱 벌렸다.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 입으로는 피가 쏟아져 나왔으므로.
"도대체 이건……."
한효월은 난감한 표정으로 심소옥을 내려다보았다.
숲 속에서 발견한 흔적을 따라왔더니 설마 하니 이런 일이…….
심소옥도 누가 나타났는지 알게 된 모양이다.
위기의 순간에 자신을 구해준 것이 공교롭게도 그라니?
늘 또렷하다 못해서 되바라지기까지 하던 그녀의 눈망울은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질끈 감은 눈에 그렁그렁 고인 것은 눈물. 그 눈물이 그녀의 얼굴에 묻은, 흘러내린 핏자국 위를 타고 미끄러진다. 풍만하게 솟구치다가 옆으로 퍼져 나간 젖가슴이 핏물에 젖어 격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울고 있는 것이다.
잘록한 허리에서 팽팽하게 퍼진 둔부까지.
그리고도 모자라 그 가운데 자리한 여인의 국부까지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놓고도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가 없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다리를 오므리고자 하지만 그것도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한효월은 손을 들었다.
그녀의 찢겨진 옷이 그 손으로 날아들었다.
"고생이 많았구나."
한효월은 그녀의 마혈을 풀어주면서 그녀의 등을 토닥거렸다.
손에 닿는 감촉이 매끄럽기 그지없다. 가뜩이나 낡았던 옷인지라 찢겨진 그 옷으로는 그녀의 풍만한 나신을 가리기가 불가능했다.
"이걸로는 안 되겠구나. 잠시 여기 있어보아라. 우선 내 장삼이라도……!"
말을 하면서 그녀를 밀어내던 한효월은 멈칫, 그녀를 보았다.
"으아앙∼!"
그녀가 어린애처럼 울음을 터뜨리면서 옷을 팽개친 채로 그의 목에 매달렸던 것이다.
"이, 이런! 이게 무슨 짓이냐?"
그녀가 다시 나신이 되자 당황한 한효월이 그녀를 꾸짖었다.
"놈들이…… 놈들이 나를…… 아흑흑……."
심소옥은 꺼이꺼이 울면서 그에게 매달렸다.
한효월은 당황해서 그녀를 타일렀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려면 진정하고 이야기를 해야지, 알 게 아니냐? 개방에 무슨 일이라도 있단 말이냐? 윽!"
그녀의 등을 토닥이던 한효월은 갑자기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무너지듯이 무릎을 꿇었다.
그렇게 되자 그의 얼굴은 방금까지 그가 다독거리고 있던 심소옥의 아랫배에 닿게 되었다.
"호호…… 좋아, 좋아……."
심소옥은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은 한효월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까르르 웃었다. 도저히 방금 전까지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서럽게 울던 그녀라고는 믿기지 않는 태도였다. 하긴 그녀가 한효월의 마혈을 짚은 것도 믿기지 않는 일은 분명하였다.
그녀는 한효월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처럼 하면서 실제로는 그의 머리 부근 요해대혈을 모두 짚었다.
그리곤 그녀는 한효월의 얼굴을 받쳐 들었다.
"이렇게 잘났을 줄이야…… 힘도 얼굴처럼 좋을까?"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그녀는 깔깔 웃으며 한효월의 가슴속으로 쓱, 손을 집어넣어 그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한효월의 젖꼭지를 만지작거리다 문득 숨결이 거칠어졌다.
"우리 여기서 과연 누가 센지 한번 확인해 볼까? 호호……."
그녀는 생각만 해도 즐거운 듯 한효월의 옷을 벗기려 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악!"
한소리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그녀는 가슴을 움켜쥔 채로 연신 뒷걸음쳤다. 그러고 싶지 않았으되, 그녀가 받은 타격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던 것이다.
입에서 정말 선혈이 격하게 솟구쳐 올라왔다.
"어, 어떻게? 내, 내가 혀, 혈도를 짚었는데……."
심소옥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안간힘을 썼다.
"제천교?"
자세를 바로하면서 한효월은 그녀를 보며 물었다.
"그렇군, 당신도 제천교의 온유향 소속인가?"
한효월은 나신의 심소옥을 바라보면서 문득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어떻게?"
심소옥의 눈이 경악으로 더욱 커졌다.
"재미있군. 함정을 파놓고서 나를 기다렸다는 건가?"
한효월은 나신을 드러내 놓고 널브러진 심소옥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는 누더기가 된 그녀의 옷을 들어 그녀의 나신 위에다 놓아 그녀의 치부를 가려주면서 물었다.
"내가 이곳으로 올 것을 어떻게 알고 기다린 건가?"
심소옥은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아닌 걸…… 어떻게 알았죠?"
"그게 궁금한가?"
"그래요. 어디에도, 어디에도 빈틈은 없었는데…… 어떻게?"
그녀의 말은 그녀가 심소옥이 아니라는 의미이니, 놀랍기 이를 데 없었다. 그녀의 얼굴 어디에도 변장한 흔적은 없었다. 누가 봐도 심소옥이 분명한 그녀의 얼굴…….
"그 아이가 벗은 모습을 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하지만 한번 안아본 적이 있었지. 그때 느낌은 너와 같지 않았다."
어이가 없다는 빛이 심소옥, 가짜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그 아이의 가슴은 너처럼 풍만하지 않았지. 아담한…… 어쨌든 느낌이 달랐다."
"그런……."
가짜 심소옥은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한효월을 쳐다볼 뿐이다.
누구라도 믿기 힘든 일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겨우 그런 느낌으로 완벽하게 변신한 그녀를 알아본다는 건가? 더구나 옷을 벗어버린 나신의 그녀를, 뿐만 아니라 상황이 급박하여 그런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하였었다. 그런데…….
"내가 답해주었으니, 이번에는 그쪽에서 답할 차례가 아니던가? 내가 이곳으로 올 것을 어떻게 알고 기다린 것이지?"
한효월이 다시 물었다.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가 이곳으로 올 것을 알지 못한다면 이런 절묘한 함정은 결코 팔 수가 없었다.
"명령을 받았을 뿐 나는……!"
그녀가 입을 여는 순간, 콰쾅! 폭음이 터지면서 천장과 창문, 벽이 부서져 나갔다. 그것과 함께 그를 덮쳐드는 검은 그림자. 그것은 폭음이 터짐과 거의 동시라 전광석화와 같았으며, 그 강도와 선후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그들의 무공이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님은 분명했다.
찰나, 한효월은 수중의 섭선을 쫙 펴서 빙글 저어냈다.
탕, 타탕!
섭선이 펼쳐지면서 좌우에서 날아들던 두 명의 흑의인이 쳐오던 검세를 밀어냈다. 그 순간의 틈에 한효월은 섭선을 접어 위로 쳐내어 천장에서 떨어지던 자를 맞아갔다.
쨍!
그를 공격해 오던 흑의인의 눈에 경악의 빛이 일었다.
그는 천장에서 기회를 엿보다가 좌우 벽 뒤에서 뛰쳐나온 자들과 호흡을 맞춰 한효월을 공격하였다. 그런데 한효월은 그의 공격을 막아냄과 동시에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다음 순간, 그는 눈앞에서 불똥이 튀어 오르는 충격에 입을 딱 벌리며 그대로 땅바닥으로 처박히고 말았다.
한효월이 그와 일격을 교환하는 순간에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번개처럼 그의 머리 위로 치솟아오르는 바람에 그는 순간적으로 한효월의 종적을 잊어버렸고, 그것은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머리 위로 솟구친 한효월은 발로 그의 머리를 딛고 두어 자가량을 더 솟아올랐고, 그렇게 한효월의 발에 머리를 밟혀 눈앞에 불똥이 튀는 충격을 받고서 굴러 떨어진 그를 좌우에서 덮쳐 오던 동료 두 명의 장검이 산적처럼 꿰뚫었다.
경악한 그들의 놀람이 채 가시기도 전에 떠올랐던 한효월이 독수리처럼 아래로 내려오면서 양손을 쳐내 그들을 쓰러뜨린 것은 거의 한순간이라고 해도 좋을 지경이었다.
좌우의 두 흑의인이 제압되어 산신묘의 바닥에 나뒹굴 때, 한효월도 아래로 내려섰다.
가짜 심소옥은 그런 그를 경악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한효월과 부딪힌 좌우의 흑의인들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었다. 더구나 그들이 첫 부딪침에서 물러났다가 다음 순간에 더욱 무섭게 공격해 들어가다가 검을 거두지도 못하고 동료를 찌르는 광경을 보았기에 더욱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
말 그대로 경악의 침묵이 흘렀다.
"이들은……."
한효월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가짜 심소옥의 앞으로 다가서면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는 채 말을 맺지 못하고 안색이 돌변했다.
무엇인가 괴이한 냄새가 코끝을 스치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순간,
콰쾅∼!
산신묘가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단순한 폭발이 아니라, 계획된 것임을 의미하듯이 잇달아 폭발이 산신묘에서 터져 나왔고 이내 검붉은 불꽃이 산신묘를 집어삼켰다.
별로 크지 않은 산신묘였다.
겨우 묘우(廟宇) 하나가 형체를 갖추고 있고 여기저기 무너진 담장이 그 산신묘를 반쯤 가리고 있는 상태였다. 그나마 그 산신을 모신 전각도 반쯤 허물어져 있었고, 처음부터 규모라고 할 것도 없이 조촐했다. 그러니 그 굉장한 폭발에 산신묘의 전각이 폭삭 주저앉아 버린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사위가 그 폭발에 잠시 숨을 죽였다.
후두둑 후두둑…….
사방에 잔해가 떨어지고 불꽃이 쓰러진 잔해를 태우는 소리만이 그 정적을 깨뜨리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천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흑의를 온몸에 두르고 얼굴마저 복면으로 감싸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모습, 그러나 당당한 거구에 화등잔 같은 강렬한 눈빛은 그가 평범하지 않은 사람임을 알게 한다. 그가 나타남과 함께 산신묘의 사방으로 검은 인영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찾아라."
잠시 폐허가 된 산신묘를 바라보고 있던 복면인이 명령했다.
"피하지는 못했겠지만, 시신이라도 찾아내도록."
그의 명에 따라 흑의인들이 산신묘를 향해 조수처럼 밀려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산신묘의 폐허를 뒤질 필요는 없었다.
쿠다당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그 폐허 속에서 판자와 같은 것이 뒤집어지더니 한 사람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던 것이다.
온통 흩어진 긴 머리카락, 하지만 그 머리카락마저 심하게 그슬렸다. 더구나 일신에 걸쳤던 옷은 누가 불길 속에다 넣고 한참 흔들어대다가 그에게 입힌 듯 반쯤은 불에 타 여기저기 구멍이 나 너덜거린다.
그야말로 형편없는 몰골이다.
"넌가?"
그를 보자 흑의인의 눈에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동평후…… 당신이오? 오늘 일의 책임자가?"
그 산발의 괴인이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그야말로 폭발 속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한효월이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 선 흑의복면인은 바로 진시황릉의 일을 지휘하던 그 동평후였다.
"정말 대단하군! 그 폭발에서 살아 나오다니…… 이 일을 위해서 산서(山西) 수인가(燧人家)의 탄천뢰(呑天雷)까지 구해왔었는데……."
중얼거리던 동평후는 이내 싸늘히 웃었다.
"대단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네가 오늘 여기서 죽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한효월!"
그가 냉랭히 소리치자 한효월을 둘러싸고 있던 자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다가서기 시작했다.
숨 막히는 살기가 음산하게 일어났다.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소?"
비틀거리며 신형을 일으켜 세운 한효월은 자신을 향해 다가서는 흑의인들을 일별하고는 시선을 돌려 동평후를 보면서 물었다.
그의 살아남은 천행이라고밖에는 달리 말할 수가 없었다.
뭔가 이상한 냄새, 그것이 화약 냄새임을 깨달은 그의 눈에 띈 것은 한쪽 구석에 놓인 석관(石棺). 물론 제대로 된 것은 아니었고 반은 부서진 상태에다 뚜껑도 없었지만 바로 자신의 옆에서 그것을 발견한 한효월은 그 석관 속으로 날아들면서 그 석관과 함께 옆으로 굴렀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 일어난 폭발…….
그 폭발의 가공함은 그 석관을 쪼개 날려 버릴 정도였지만 석관은 한효월을 덮어서 그가 그 폭발에서 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했다. 그렇게 하고 호신강기로 보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지금 입은 내상이 가볍지 않으니, 그 폭발이 얼마나 무서웠으랴.
"뭔가?"
동평후가 물었다.
"내가 이곳으로 올 것을 어떻게 알고 이런 함정을 만든 것이오?"
한효월이 물었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의 물음에는 정말 중요한 뜻이 담겨 있었다. 이렇게 철두철미한 이중삼중의 함정을 만들었다는 것은 그가 이곳으로 지나갈 것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 의미는 누군가가 그가 이곳으로 지나갈 것을 알려주었다는 것이기도 했다.
그가 이곳으로 갈 것을 아는 사람은 현재로서는 오직 하나…….
믿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아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말에 동평후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궁금한가? 그렇겠지. 하지만 알고 보면 간단하다. 너를 반드시 잡아야 한다는 추살령이 발동한 다음…… 본후가 제일 처음 한 일이 네가 과연 낙양 일대를 벗어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지. 그것이 확인된 다음에는 간단했다. 요로(要路) 몇 군데에다가 함정을 파고 그 함정에 이르는 유인선을 사방으로 쳐놓고 걸리기를 기다렸을 뿐이니까."
"보잘것없는 사람을 위해서 참으로 많은 수고를 했군……."
한효월은 나직이 신음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의 말은 몇 군데에다 함정을 만들고, 그 함정으로 이끌어오는, 다시 말해서 한효월이 발견한 그런 일종의 도화선(導火線)을 사방에서 쳐놓아 어디에서 오든 걸리면 그 함정 중 하나에 도달케 했다는 의미이니 거기에 들인 인력이며 준비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그것은 제천교의 힘이 그처럼 대단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동평후는 껄껄 웃었다.
"보잘것없다니…… 독고해의 사형제는 명불허전이라, 그 사제마저도 이렇게 대단한 존재인걸! 너는 죽어도 억울해할 것 없다. 너를 위해서 우리 제천교는 연인원 천여 명의 고수를 동원했으니까, 자부심을 느낄 만하지!"
그의 눈빛에서 전광과도 같은 빛이 일었다.
"네게 고맙다고 해두마. 다행히도 본후가 맡은 곳으로 와주었으니…… 이제 더 궁금한 점은 없겠지?"
지, 라는 말이 채 그의 입에서 끝나기도 전에 이미 신호를 받았는지 한효월을 둘러싸고 있던 흑의인들이 한효월을 덮쳐 오기 시작했다.
한효월은 그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에서 이미 그들이 평범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발동하자 그 정도가 아니었다.
번쩍이는 순간에 그의 눈앞으로 두 개의 검이 날아들었다.
무섭게 빠른 쾌검(快劒)이었다.
지독하게 빠르면서도 살기가 가득하다. 분명히 정도(正道)의 무공이 아니다. 그러나 방문좌도(傍門左道)라고 함은 결과만을 중시하여 나머지를 버린 것을 의미함에서 출발했다. 거기에서 사도(邪道)라는 말과 마도(魔道)라는 갈래들이 시작했으니, 이 검법 또한 사람을 베는 데 중점을 둔 살검(殺劒)일 터이다.
평소라면 그 예기(銳氣)를 피하고 다시 부딪칠 터이다.
하나 그 두 개의 쾌검이 시작임을 알고 있는 한효월이기에 그는 한쪽 발을 비스듬히 내딛으면서 양손을 쳐냈다. 그 손이 뻗어 나가는 것은 그의 움직임과 매우 적절한 조화를 이루어 손에서 일어난 강기는 그 두 개의 검을 쳤다.
땅!
날카로운 음향과 함께 그 두 자루의 검이 단번에 부러졌다.
"독고해의 절옥장력이군!"
그것을 보고 동평후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금옥(金玉)을 두부처럼 잘라낸다는 무서운 장세.
그러나 한효월은 뒤이어 장세(掌勢)를 쳐내지 못했다.
이미 좌우에서 네 자루의 강도(鋼刀)가 그를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신형을 돌리는 순간, 그 강도의 공격의 틈새로 섬광이 날아들었다. 암기인가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서너 자루의 창이었다. 그 일련의 연환공격은 대단히 위력적이고 무서웠다.
한효월의 얼굴이 무거워졌다.
시간을 끌어 좋을 것이 없음을 익히 아는 터였다.
그래서 그는 시작하자마자 전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전력을 기울이고도 적에게 파탄을 드러내게 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한 일은 강호상에 나와서 처음이었다.
'모험을 하지 않으면 오늘 이 자리를 벗어나기 힘들겠군!'
한효월은 위험을 무릅쓰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는 이미 폭발에 충격을 받아 정상이 아니었다.
적의 숫자는 그를 공격하는 흑의인 열둘. 그리고 외곽에서 그의 도주로를 차단하고 있는 흑의인들이 스물 정도. 만만치 않은 자들이 서른을 넘었다. 더구나 뒤에서 지휘하고 있는 동평후는 막강한 고수다. 시간을 끌어서 좋을 일이 없었다.
어떻게든 이 자리를 벗어나야만 했다.
마음을 굳히자 한효월은 북쪽을 향해서 질풍처럼 덮쳐 갔다.
검과 도가 기다렸다는 듯이 날아들었다.
그들은 암중에 일종의 진세를 형성하고 있어서 그 움직임이 질풍과 같고 서로가 고리로 연결된 듯 돕고 있었다.
파파팡!
격렬한 폭음이 잇달아 터지는 가운데 한효월은 두 자루의 강도를 장세로 부러뜨렸다.
"으악!"
터져 나오는 비명.
도수(刀手) 하나가 도가 부러짐과 동시에 한효월의 일장을 맞고 나가떨어지면서 내지른 비명이었다. 그 공격이 얼마나 격렬했던지 두 명의 도수와 두 명의 검수가 견디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 순간, 한효월은 측면에서 내지른 장창에 옆구리를 찔려야 했다. 뿐만 아니라, 두 자루의 강도가 그의 등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피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몸을 움직이면 옆구리를 꿰뚫은 장창이 전신을 헤집어 버릴 터이니 그 상황이야말로 가히 절대절명이었다.
그 절명의 순간에 이미 자신의 옆구리를 찌른 창대를 잡고 있던 한효월은 몸을 틀었고, 그 힘에 창대가 수수깡처럼 부러졌다.
그렇게 한효월은 신형을 돌릴 수 있었다. 신형을 빙글 반 바퀴 틀자, 그의 등 뒤에서 날아들고 있던 강도를 스쳐 보내게 되었다. 그의 앞으로 경악한 흑의인의 얼굴이 급속히 다가들었다.
그는 이런 상황은 생각조차 못했으므로 놀라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빠르게 한효월의 일장은 그의 가슴을 쳤다.
채 비명 소리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는 피분수를 쏟아내면서 땅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가슴이 완전히 허물어져 버렸으니 어찌 살기를 바랄 것인가. 더구나 한효월이 전력을 다하는 마당에야.
그것과 함께 그 도수와 같이 한효월을 공격했던 도수의 강도가 한효월을 갈랐다. 하나 그것은 그의 생각뿐, 한효월은 이미 그 자리를 벗어나 앞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포위망이 허물어진 것이다.
그것으로 끝은 아니다.
그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는 자들이 있었으므로.
하지만 한달음에 4, 5장의 거리를 가로지르는 그의 질풍 같은 신법을 막아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를 공격했던 자들과 퇴로를 차단하고 있던 자들과의 사이는 2장가량에 불과하여 한효월은 그 진세를 통과하자마자 그들의 앞에 이르고 있었다.
"으악……."
처절한 비명이 그들에게서 터져 나왔다.
한효월의 신형이 핏줄기를 뿌리며 그들을 통과했다.
콰쾅!
돌연 터져 나오는 폭음.
"으윽!"
폐부를 울리는 나직한 신음.
그처럼 질풍처럼 앞을 가로막는 것들을 날려 버리면서 달리던 한효월. 그가 신음을 흘리면서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의 앞에서 선 것은 동평후였다.
"대단하군, 색혼십이위(索魂十二衛)의 색혼연쇄진(索魂連鎖陣)을 깨뜨리다니……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그는 시간을 주지 않으려는 듯 차갑게 외치고는 양손을 철퇴와 같이 휘두르면서 한효월을 덮쳐 갔다. 그 위세는 가공하여 주위 3, 4장이 모조리 그의 장세 하에 쓸려 들어갈 지경이었다.
이미 그의 공격에 타격을 받은 한효월은 입에서 핏줄기를 흘려내면서 양손을 교차하여 그의 공격을 막아갔다. 조금도 물러나지 않는 것이 마치 죽음을 각오하기라도 한 듯한 모습이었다.
쾅! 콰쾅…….
"이, 이런 터무니없는……!"
동평후가 신음을 흘렸다.
그의 복면 아래가 축축해지는 듯하더니 그의 흑의 목덜미 부근에서 붉은빛의 선혈이 서서히 흘러내렸다.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피를 토해내고 만 것이다.
그의 앞에도 핏자국이 보인다.
그것은 그가 토해낸 것이 아니라 한효월의 것이었다.
방금의 격돌에서 일어난 회오리바람에 의해서 세차게 일어난 흙먼지는 아직도 주위를 휩쓸면서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시야가 명확하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폭풍이었다.
하지만 그의 비룡장(飛龍掌)을 받아내던 한효월이 있던 자리에 아무도 없음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말도 안 돼…… 그 상황에서도 이런 위력이란 말인가?"
동평후가 비틀 하곤 다시금 신음을 흘려냈다.
폭발에 휘말려 충격을 받았던 한효월은 색혼연쇄진을 깨뜨리면서 이미 중상을 입었다. 게다가 색혼연쇄진을 벗어나던 그는 동평후의 일장을 맞고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셈이었다.
거기에 동평후가 평생을 두고 자랑하는 무공인 비룡장.
하늘을 날아 본신 진기와 함께 그 날아 내리는 힘을 이용하는 비룡장은 집채만한 바위도 박살을 내는 위력을 가졌다.
그런데 한효월은 그 상태에서 놀랍게도 그런 비룡장을 받아냈을 뿐만 아니라, 동평후에게 내상까지 입히고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물론 한효월이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공격을 이용하여 그 자리를 벗어난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이미 공포스러웠다. 그것은 한효월이 멀쩡했다면 결코 자신의 상대가 아님을 의미하기에.
'독고해의 사제라고 하더니, 도대체…….'
암중에 가슴이 서늘해 신음하던 동평후가 갑자기 발작하듯이 소리쳤다.
"쫓아라! 절대로 놈을 놓치면 안 된다!"
그의 명과 함께 흑의인들이 흩어졌고, 이내 사방으로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서 시작된 호각 소리는 급속한 속도로 멀리 번져 갔다.
팡!
채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전광과도 같이 어둠 속에서 내밀어진 손 하나.
그 손은 흑의인이 쥔 귀두도를 날려 버리고 그의 목을 쳤다.
목이 부러지고 살아날 장사는 없다. 더더구나 강력한 힘이 그 목을 쳤음에는…… 방금까지 살아 있던 흑의인 두 사람은 채 신호도 보내지 못하고 그렇게 쓰러졌다.
"으으으……."
신음은 오히려 그들을 쓰러뜨린 산발괴인에게서 흘러나왔다.
머리카락은 엉망으로 흩어져 버렸다. 옷은 불길을 헤치고 나온 듯 엉망으로 여기저기 탄 흔적이 낭자한데, 그나마 흘러내리는 핏줄기로 인해서 온통 혈의(血衣)와 같았다.
"거기에 독까지 있었다니……."
힘을 다해 앞에 나타난 흑의인 둘을 쓰러뜨린 한효월은 이를 악물면서 신음을 흘렸다. 그의 힘이 여전했다면 흑의인이 쥔 귀두도는 반 동강이가 나버렸을 터이다. 하나 그러지 못했다.
수령(樹齡) 천 년은 되었음직한 거대한 고목에 한쪽 어깨를 대고 겨우 신형을 세운 한효월은 거친 숨을 토해냈다.
내외상이 이미 엄중하다.
게다가 산신묘의 가짜 심소옥은 언제인지 모르게 그에게 독을 쓴 듯했다. 중독 현상이 있었다. 그녀가 아니라면 저들의 무기에 독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산신묘가 있던 곳에서 이미 사오십 리를 도주한 상태.
평소라면 간단했을 그 거리는 가히 혈로(血路)였다.
한 걸음을 옮기는 것 자체가 괴로운 상태에서 곳곳에서 적이 출몰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면서 잇달아 고막을 찌르는 호각 소리는 끔찍하기조차 할 정도였다. 적이 그의 뒤를 따르고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쿠르릉…… 쿠쿠쿠…….
거대한 울림이 저 멀리에서 들려온다.
"어쩌면 조금쯤 살아날 가망이 있을런지도 모르겠군."
몇 알의 단약을 꺼내 입에다 털어 넣은 한효월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하늘에서 천둥이 길게 울고 검은 구름이 일고 있었다.
비가 올 것 같았다.
비가 오면 흔적이 지워진다.
제아무리 집요한 그들이라 할지라도 쫓기가 힘들 것이고, 시간을 벌 수 있을 터이다.
그렇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너무 자만했었다.'
다시 천둥이 울고, 마침내 몇 가닥의 빗줄기를 뿌리기 시작하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한효월은 문득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이미 경고를 받았지 않았던가.
<잘 아는 여자를 조심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능력만 믿고서 경계를 게을리 했다. 물론 그 경고를 잊지 않았기에 가짜 심소옥을 조금 더 빨리 알아볼 수 있었지만, 그가 좀 더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났더라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한효월이 떠난 자리에 다른 사람이 나타난 것은 그가 그곳을 떠난 지 불과 한 식경이 되지 않아서였다.
그가 그 자리에 나타났을 때는 빗줄기가 제법 굵어져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숲 속에 쓰러져 죽은 시체를 가리거나, 한효월이 기대면서 생긴 핏자국을 씻을 만큼 폭우가 쏟아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 식경…… 아무리 오래되었어도 한 식경을 넘지 않았다."
주위를 살펴본 복면인은 급히 호각을 불었다.
날카로운 소리가 고막을 찢고 숲 속을 흔들면서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들린 지 채 일 다경(一茶更)이 지나지 않아 그곳으로 수십 명의 흑의인들이 모여들었다가 방향을 잡고 추적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