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三首 절처봉생(絶處逢生)
-활염라를 만나다
제천의 추격(追擊)은 뜻밖의 방해를 받다
쏴아아-
폭우로 변한 빗줄기는 졸졸거리던 시냇물에 단숨에 막강한 힘을 부여하여 계곡을 용솟음치는 급류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급류는 바위에 부딪쳐 흩어지다 못해 뒤에서 덮쳐 오는 더 흉포한 물살의 도움을 받아 그 앞에 있는 모든 것을 쓸어버릴 듯 고함을 쳐대며 질주하고 있었다.
한효월은 그 급한 물살가에 자리한 바위 뒤에 등을 붙인 채 운기조식에 들어가 있는 중이었다.
언제 위에서 쏟아지는 급류가 더 불어서 자신을 덮칠는지 모른다. 위험한 것을 모를 리 없는 그였다. 하지만 이런 곳이 아니면 적의 눈길을 피할 수가 없었다. 운기조식하여 기운을 고를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그는 연신 적에게 쫓겨야 했던 것이다.
외상은 말할 것도 없고 내부가 엉망이었다.
게다가 쉬지 못하고 계속하여 무리를 하여 독기(毒氣)가 이미 전신으로 퍼진 상태였다. 그가 만든 해독약에다 영단(靈丹)을 먹지 않았더라면 이미 시체로 화한 지 오래일 터였다.
실제로 그는 손을 쳐드는 것이 힘들 정도로 지쳐 있었다.
하지만 얼마나 지났을까?
극도로 지쳐서 운기조식에 들어가 있던 한효월은 문득 괴이한 느낌에 슬그머니 눈을 떴다.
대체 언제 나타난 것인가?
한 사람이 그의 앞에서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검은 복면, 차가운 눈빛.
바로 제천교도다.
하지만 한효월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그는 희미하게 웃음을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당신이로군……."
"상처가 심한가요?"
흑의복면인이 입을 열었다.
뜻밖에도 영롱한 여인의 음성이다. 그녀야말로 다름 아닌 요광성주였다.
한효월의 앞에 선 그녀와 한효월 사이에는 좀 전 그가 운기조식에 들어가기 전까지 없었던 흑의인 하나가 앞으로 엎어져 있었다. 내가중수에 심맥이 으스러져 죽은 형상이다. 아마도 그가 눈을 뜨게 된 것은 그 흑의인이 쓰러지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인 듯했다.
"당신이 나를 구한 거요?"
"움직일 수 없나요?"
한효월의 물음에 대답 대신 요광성주가 되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한효월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조금 어려울 것 같소."
"……."
그의 대답에 문득 요광성주는 답답한 듯 얼굴에 쓰고 있던 몽면을 잡아당겼다. 몽면이 목 아래까지 내려가면서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온통 비에 젖은 얼굴이었다.
쏴아아-
쏟아지는 빗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온다.
"……."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그녀는 암암리에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를 다시 본다면 사정없이 손을 쓰리라 생각했었는데, 오히려 그를 구하고 말았다.
왜 손이 마음과 달리 움직인단 말인가.
"본 교의 고수는 이미 사방에 깔렸어요."
요광성주가 차가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복면 속에서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매우 아름다웠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그 수려한 미목에 한 겹 얼음이 서린 듯한 차가움이랄까.
"벗어나기 어렵겠군……."
그녀의 말에 한효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새가 되기 전에는."
요광성주가 차갑게 말했다.
"날개가 되어줄 수 있겠소?"
한효월의 물음에 요광성주의 전신에 가는 경련이 일었다.
"당신에게 진 빚은 이미 갚았어요. 나는……."
그녀의 말에 한효월의 얼굴에 미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내게 진 빚이 있기라도 했더란 말이오? 나는 당신이……."
말을 하던 한효월은 갑자기 냉소를 터뜨리면서 벌떡 일어나 그녀를 덮쳐 왔다. 그가 쳐낸 일장의 위세는 강렬하여 빗줄기가 사방으로 흩어질 정도였다.
기습을 받은 요광성주는 놀란 외침과 함께 반사적으로 일장을 쳐냈다.
"으악!"
단말마의 비명.
그녀의 일장에 그대로 가슴을 격타당한 한효월은 그 비명과 함께 뒤로 튕겨 나가 버렸다. 그가 떨어진 곳은 그 뒤에 있던 급류.
겨우 폭 반 장도 되지 못하던 시내는 폭우로 너비가 두 장이나 되는 급류가 되어 계곡을 온통 헤집으면서 쏟아져 내려가고 있었다. 거기에 떨어진 한효월의 모습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요광성주는 멍청해져서 자신의 손을 믿을 수 없는 듯 쳐다보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일장은 반사적인 것이었는데도, 한효월은 그 일장을 피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렇게 나가떨어지다니?
그 순간이었다.
"놈은 어떻게 되었느냐?"
그녀의 뒤에서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놀란 그녀가 뒤를 돌아보자, 그녀의 뒤에는 언제 나타난 것인지 제천칠성 가운데 수좌인 천추성주가 우뚝 버티고 서서 형형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의 출현과 함께 검은 인영들이 사방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맙소사! 그럼 나를 위해 일부러 그런…….'
문득 생각이 동한 그녀는 안색이 돌변하여 다급히 몸을 날려 바위 위로 올라섰다.
쿠쿠쿠…… 쏴, 쏴아아…….
누런 흙탕물이 가공할 기세로 소용돌이치면서 아래로 쏟아지고 있다.
그녀가 이 바위 위로 올라온 것은 그야말로 찰나지간이라 해도 좋았다. 그런데도 한효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온통 시뻘건 황톳물뿐…….
"어떻게 이런……."
그녀는 절로 가슴이 떨려왔다.
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굳은 그녀의 시야에 급류를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검은 인영들이 보였다.
* * *
폭우는 그쳤다.
하지만 빗줄기가 그친 것은 아니다.
어둠도 여전하다.
쏴, 쏴아아…… 물살도 여전했다.
기암괴석이 어둠을 갈라낼 듯이 여기저기에서 불쑥불쑥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는 곳. 급류가 소용돌이치면서 밀려들다가 호수를 만나 목소리를 낮춘다. 호수라기보다는 넓은 소(沼)라고 함이 좋을 그 일대에는 참으로 절가한 경치가 자리하고 있었다. 구름에 가려 달도 볼 수 없는 밤이라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것이 흠이긴 하지만.
그 기암괴석 중 하나.
그 너른 소에서 3장가량 솟아오른 암반에는 회색 옷을 입은 사람 하나가 낚시를 드리우고 있었다. 마치 석상과 같이 꼼짝도 하지 않고 고요한 소를 노려보고 있던 그 사람의 눈에 돌연 광채가 깃든다.
축, 늘어졌던 낚싯대가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었다.
'놈이 정말 물었단 말인가?'
조용하게 물을 응시하고 있던 낚시꾼의 눈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가 긴장된 신색으로 낚싯대를 쥔 손에 힘을 가하자, 촤, 촤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거센 물보라가 일면서 무엇인가가 낚싯대에 걸려 그가 이끄는 대로 끌려오기 시작하였다.
* * *
낙양 교외.
한적한 곳에 위치한 농원(農園).
일대에는 농가들이 자리를 잡았다.
백여 호의 적지 않은 농가들이 자리한 그 외곽에 자리한 농원의 대청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깔려 있었다. 거의 모든 것이 나무와 흙으로 이루어진 그 대청에는 벽에 걸린 한 폭의 산수도 외에는 장식도 별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소박했다.
거기, 개방의 방주인 황엽이 나무 탁자에 앉아 있었다.
"계속 말해 보거라."
황엽이 무거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의 앞에서 굳은 표정으로 보고를 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옥면무영 호일랑이다. 두어 군데 밝혀둔 불빛이 어둠을 쫓아내고 있지만 대청의 분위기는 왠지 무겁기만 했다.
그의 시선을 받은 옥면무영 호일랑이 굳은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의 신비인들이 의양(宜陽) 방면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뒤를 추적했는데…… 갑자기 그 숫자가 무섭게 불어나면서 건천산(乾天山) 쪽에서 수백 명이 일제히 움직이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 움직임은 매우 급박하여 우리 쪽 사람들을 급히 파견했습니다만 파견한 인마 중, 세 군데에서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그런 와중에 받은 보고를 분석한 결론은 그들이 제천교이고, 아마도 누군가를 추적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겁니다."
"그게 한 공자라는 소리냐?"
"지금 상황에서 그들이 그렇게 전력을 기울여 추적할 상대는 방주가 아니시면 한 공자뿐이지 않습니까?"
옥면무영이 황엽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한 공자를 추격하고 있는 거라면 그냥 있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무림맹이 와해된 상태니, 우리가 아니라면 그는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질 수 있겠지……."
황엽이 천천히 중얼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무슨 소리예요?"
다급한 음성과 함께 그림자 하나가 안으로 뛰쳐 들어왔다.
심소옥이었다.
그녀는 놀란 눈을 동그랗게 부릅뜨고 있었다. 급하게 어디선가 달려온 듯 숨이 턱에 찬 모습이다.
"한 공자, 오빠가 놈들의 함정에 빠져서 위험하다는 게 사실이에요?"
"넌 또 어디서 그 이야기를 듣고 온 게냐?"
옥면무영이 미간을 찡그린 채 그녀를 보았다.
하나뿐인 이 사매는 도무지 말릴 수가 없는 존재인지라 그녀가 이렇게 달려들자 머리가 아파온 것이다.
"지금 그게 문제예요? 정말이에요? 그 소식이?"
심소옥은 머리를 벅벅 긁어대면서 발을 동동 굴렀다. 요컨대 나 지금 흥분한 상태니 건드리지 말라는 시위인 셈이다.
"그때 내가 같이 갔어야 하는 건데, 날 억지로 잡아오더니……."
차마 방주의 앞이라 발작은 못하지만 눈에서 쌍심지가 피어 오르는게 금방이라도 옥면무영을 잡아먹을 듯한 기세.
"나참……."
옥면무영은 난감한 신색으로 사형이자, 방주인 황엽을 바라보았다.
"동원할 수 있는 인마가 얼마나 되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황엽이 입을 열었다.
"지난번 그 일로 부상한 군웅들을 호위하기 위해서 차출된 인원을 빼고 지금 당장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용호십팔개(龍虎十八짵)와 방주님을 수행한 내당의 고수들 정도입니다."
"내가 움직이면 만만한 세력은 아니로군."
황엽의 말에 옥면무영이 놀란 빛으로 그를 보았다.
"방주께서 직접 가실 생각입니까?"
"쫓기는 것이 정말 한 공자라면 내가 가지 않으면 구할 수 없다."
말하던 그는 문득 미간을 찡그렸다.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다면 좋겠다만……."
* * *
쏴아아…….
물 쏟아지는 소리가 끊임없다.
어둠은 아직도 세상을 덮고 검은 구름은 하늘을 가린 채 달도 없다. 하긴 그 구름이 없어도 달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터이다. 오늘이 바로 그믐이기에. 달도 없는 그 어둠 속에, 산속 깊이 자리한 소(沼)는 물 쏟아지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괴괴한 정적에 휩싸여 어딘지 모르게 음침하기 짝이 없다.
"이건 또 뭐여?"
긴장된 표정으로 낚싯대를 들어 올린 회의노인은 어이없다는 듯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건져 올린 것은 기대했던 것이 아니라 축 늘어진 사람이었던 까닭이다.
"아니, 아무리 물이 불어도 그렇지…… 여기에 어떻게 죽은 시체가 흘러 들어올 수가 있나? 시간이 일렀기에 망정이지, 때맞춰 나타났다면 십 년 공부를 한 방에 아작 낼 뻔했구만."
낮게 투덜거리던 회의노인은 귀찮다는 듯이 낚싯대를 흔들었다.
그러자 낚싯대에 걸렸던 사람은 누가 들어 올렸다 집어 던진 듯이 훌쩍 그 회의노인이 앉아 있는 암반 옆에 떨어졌다.
널브러진 그는 과연 시체와 같았다.
여기저기 심한 상처를 입은 데다가 그렇게 떨어져도 꿈틀거리지도 않는다. 게다가 오래 물속에 있었는지 그 상처에서는 피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피가 많이 빠져나갔다는 의미. 그것은 그가 시체라는 것에 다름이 아니었다.
"망할…… 천하를 뒤지기 십 년에 겨우 놈이 사는 곳을 찾았는데……."
중얼거리던 노인의 안색이 돌연 괴이하게 변했다.
쏴쏴…….
파도가 일고 있었던 것이다.
사방에서 흘러 들어오던 물은 비가 그치면서 잔잔해진 상태였다. 그러니 그 물이 이 소 전체로 번져 나가는 파도를 일으킬 리는 없었다.
"놈이 벌써 나타난단 말인가?"
회의노인이 회의(懷疑)가 깃든 빛으로 중얼거렸다.
흰 수염이 가슴을 덮었다. 얼굴 모습도 청수하다. 얼핏 보면 신선이 하범(下凡)한 듯한 모습이지만 자세히 본다면 광대뼈가 조금 나온 노인의 얼굴에서는 괴팍한 느낌이 한눈에 느껴진다.
쏴, 쏴아아…….
물결이 조금 더 높아졌다.
"이게 무슨 일이지? 왜 벌써?"
알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던 그는 문득 죽은 듯 널브러져 있는 그 시체를 보았다.
그의 낚시에 걸려 나온 시체.
얼핏 살펴보니, 창백한 얼굴은 미목이 수려하지만 이미 청동빛이다. 숨을 쉬지 않은 지도 제법 오래된 듯하다. 그가 물에 떠내려 온 한효월임을 노인이 알 리 없고, 알아도 감흥은 없을 터이다.
"독인가? 놈이 흥미를 느낄 만한 독?"
한효월의 안색을 스쳐 보는 것만으로 노인은 한효월이 극독에 중독되었음을 알아볼 수 있었다.
순간, 그는 망설이지 않고 낚싯대를 흔들었다.
그러자 낚싯줄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가 한효월의 허리를 꿰찼다. 그 낚싯줄은 한효월을 매달고서 어둠을 가르며 소를 향해 내달렸다. 놀랍기 이를 데 없는 능력이다.
그 순간이었다.
"무슨 짓?"
날카로운 꾸짖음과 함께 녹영이 바람처럼 날아들었다.
그 녹영은 절묘하기 이를 데 없는 신법으로 날아들어서 낚싯줄에 꿰어 막 소의 물속으로 곤두박질쳐 들어가는 한효월의 시신을 낚아챘다. 동시에 그 녹영은 파동 치는 소의 물결을 발끝으로 살짝 차면서 그 반동을 이용하여 5, 6장의 거리를 이동하여 회의노인 옆에 날아 내렸다.
세상을 놀라게 만들기에 족한 능파비도(凌波飛渡)의 신법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렇게 놀라운 신법을 전개한 것이 믿을 수 없게도 백발의 노파라는 점이다. 녹의를 곱게 차려입은 그녀의 얼굴은 얼음장 같았다. 그러나 얼음 같은 그 얼굴은 백발만 아니라면 40대 초반의 여인과 같이 아직도 아름다웠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녹의노파가 회의노인을 꾸짖었다.
"알지도 못하면서 왜 방해를 하는 겐가?"
낚싯대를 쥔 회의노인이 미간을 찡그렸다.
"방해라니? 지금 이 사람을 가지고 뭘 하려고 한 거예요?"
"보면 모르오? 놈을 낚으려는 미끼로 쓰려는 거지."
일순, 녹의노파가 아연해 소리쳤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말이 아니면 소든지."
회의노인이 툴툴거렸다.
"설마 하니 당신이 몰라보지 않았을 텐데? 이 사람은 얼핏 보면 죽은 거 같지만 숨이 붙어 있어요! 아니, 숨이 붙어 있지 않아도 그렇지……."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게 아니오. 대라신선이 와도 살리기 어려운 게 그놈의 상태니 차라리 미끼로 써서 하아(霞兒)를 구할 수 있다면 그게 더 좋은 일이지. 놈도 극락왕생할 수 있을 거요. 보시를 한 셈이니."
녹의노파의 입이 다시 벌어졌다.
"정말 활염라(活閻羅)다운 생각이로군. 도대체……."
그 순간, 쏴-쏴아아…….
세찬 물소리가 들리면서 물살이 더욱 크게 파동 쳐 올랐다.
"이게 무슨 소리지?"
물방울이 튀어 오르자 녹의노파가 놀라 소를 돌아보았다.
"뭐긴 뭐야, 놈이 기어나오려는 조짐이지."
"벌써?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을 텐데?"
"저놈 때문이오."
회의노인의 눈짓에 녹의노파가 놀란 눈으로 자신이 발 아래 내려놓은 한효월을 내려다보았다. 인사불성, 그의 상태를 보고 살았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한눈에 그의 상태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그들이었다.
"어떻게? 왜 그놈이……."
"독. 저놈은 상처만 입은 게 아니라 중독까지 되었는데……."
회의노인은 잠시 망설이다가 내뱉듯이 말을 이었다.
"그 독이 다름 아닌 독왕(毒王)의 삼대지독(三大之毒) 중 하나인 단혼추(斷魂追)야. 반드시 무기 같은 것에 묻혀서 사람을 찔러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일단 중독되면 어떻게 해도 살아날 수 없다고 해서 단혼추라고 불리지. 그 단혼추를 만들 때 사용되는 주재료가 묘강의 미인사(美人蛇)라, 미음요(美音謠)란 놈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지. 그러니……."
"설마, 독왕이 다시 강호에 나왔다는 건가?"
녹의노파가 문득 긴장된 신색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놈을 건드리는 건, 독왕의 일을 간섭하는 것. 알잖소? 그 독왕이란 늙은이가 지독하게 편협해서 자신의 일에 간섭하는 건 누구든간에 그냥 두지 않는다는 걸……."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코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호오, 그래서? 그래서 천하의 활염라가 아예 꼬리를 내리고 살릴 수 있는 놈을 버리는 것도 모자라 아예 미음요란 놈에게 먹이로 주자? 큭큭큭…… 좋아, 좋아! 내 그거 고대로 하아에게 전해주지. 하아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생각만 해도 재미있는걸?"
갑자기 들려온 걸걸한 음성에 회의노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런 빌어먹을 놈 같으니!"
그의 뒤쪽 3장 정도 거리에 자리한 암반 위에는 몇 그루의 소나무가 사방으로 가지를 뻗고 있었다.
그중 한 나무 가지에 한 사람이 편안히 기대 비스듬히 누워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흰 장삼을 입었는데 매우 낡아 회색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게다가 배가 동산만하여 마치 코끼리가 누워 있는 듯 보였다. 거대한 체구. 그런 체구가 어떻게 손가락 정도의 굵기의 나뭇가지 위에 건들건들 그처럼 편하게 보이게 누워 있는지 신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무 짓도 안 하고 뒤집어져서, 뭔 간섭이야? 그럼 네가 와서 미음요란 놈을 잡아봐!"
회의노인이 이를 갈면서 으르렁거렸다.
"큭큭…… 내가 활염라처럼 아는 게 많다면 당연히 내가 잡지. 하지만 미음요란 놈을 잡아야 한다고 한 건 네놈이잖나. 놈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내가 그놈을 어떻게 잡아?"
뚱뚱한 노인은 졸린 듯 눈을 비비더니 길게 하품을 했다.
"빌어먹을! 어째 이렇게 졸리냐? 어제 네놈이 시끄럽게 굴어서 오늘 아홉 시진밖에 못 자서 그런 모양이다. 열 시진은 자야 하는데……."
뚱뚱한 노인의 말에 회의노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 저놈을 그냥!"
그가 낚싯대를 팽개치고 벌떡 일어났다.
그 순간이다.
출렁거리던 물살이 갑자기 잠잠해지면서 주위가 일순간에 조용해졌다.
…….
누구라도 느낄 수 있었다.
몸에 느낄 정도의 긴장감이 사방에서 엄습해 오고 있었다.
비록 그것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는 모를지라도 분명히 음산하고도 숨 막히는 어떤 느낌이 이 너른 소 전체로 번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회의노인이 그것을 모를 리 없다.
그들 세 사람은 일대가 고요해지는 순간에 굳어졌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묘한 소리가 바람을 타고 전해오기 시작했다.
뭐라고 형언하기 힘든 소리.
그러나 이내 그것이 아름다운 노랫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용하고도 아름답게 흥얼거리는 음성, 그것도 참으로 아름다운 여인의 음성이 묘한 가락을 읊조리면서 들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노, 놈이 나타났다!"
흥분과 긴장으로 굳어져 회의노인, 활염라가 소를 노려보았다.
안개와 어둠으로 온통 뒤덮인 소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노랫소리가 들리는군……."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회의노인 옆에 선 녹의노파가 중얼거렸다.
그러하였다.
사람의 심금을 끌어당기는 그 노랫소리는 믿을 수 없게도 소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 소의 물 아래에서 천천히 물 위로 번져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인가가 소의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것을 의미하듯 다시 물결이 일렁인다. 파도가 점점 크게 출렁거렸다.
하지만 그것뿐, 더 이상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놈이 필요해!"
긴장된 신색으로 소를 지켜보고 있던 회의노인, 활염라가 말했다.
"이미 나타났는데도 왜……."
그의 말이 한효월을 지칭함을 안 녹의노파가 입을 여는 순간.
촤아아악!
돌연 거센 물살이 하늘을 가릴 듯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물살은 온통 주위를 뒤덮었다.
"놈이다!"
활염라가 고함쳤다.
무엇인가가 그 높이가 4, 5장에 이르는 파도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그 파도는 그들이 있는 앞에서 일어나 그들을 덮쳤다.
"이놈! 감히 미물이!"
녹의노파가 검은 그림자가 무섭게 엄습하자 벼락같이 양 소매를 앞으로 후려냈다.
촤ㄱ! 촤아아…….
물살이 거대한 바위에 부딪친 듯 사방으로 마구 흩어지는 가운데 강력한 경풍이 그 검은 그림자를 쳐갔다.
"무슨 짓이야! 놈이 달아나게 할 거야? 놈은 저놈을 노리고 있는 거란 말이야 그냥 둬!"
그 와중에 활염라가 노해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 순간, 언제 날아왔는지 소나무 위에서 졸고 있던 그 뚱보노인이 그 검은 그림자의 위에 당도하여 양손을 쳐내고 있었다. 그의 손에서 펼쳐져 날아가고 있는 것은 너비가 7, 8장에 달하는 그물이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신속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미 준비를 해둔 것이 분명했다.
"아, 아아……."
파도 속에서 다급하고도 안타까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애처롭기 이를 데 없는 소녀의 목소리였다.
"이게 뭐야?"
그 소리에 놀란 뚱보노인이 주춤거렸다.
찰나, 그물에 갇힐 뻔했던 검은 그림자는 파도 속으로 사라지고 모든 것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활염라가 낚싯대를 후려냈지만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촤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치솟아올랐던 파도가 소로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본 활염라가 대경실색하여 다급하게 낚싯대를 연달아 휘둘렀다. 세찬 경풍과 귀를 에이는 듯한 파공성이 연달아 고막을 치면서 낚싯대와 6, 7장에 이르는 긴 낚싯줄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파도를 뚫고 소 안으로 파고들어 갔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내 파도는 가라앉았고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일대는 다시 정적 속에 자리했다.
은은히 맑고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리는 듯도 하다.
"도대체 이건……."
뚱보노인이 홀린 듯이 소를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그가 뿌렸던 그물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걸리지 않은 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빌어먹을!"
활염라가 이를 갈면서 연신 발을 굴렀다.
금방이라도 귓구멍에서 연기가 솟아날 것만 같은 형국.
한바탕 발을 구른 활염라는 잡아먹기라도 할 듯이 사납게 뚱보노인을 노려보았다.
"어떻게 할 거냐? 네놈이 허튼짓을 하는 바람에 놈이 다시 숨어버렸으니 어떻게 책임질 거냔 말이다! 지난 보름 동안이나 여기서 밤이슬 맞아가면서 기다린 걸 이렇게 끝내?"
그의 기세가 등등하자 뚱보노인은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다시 나오길 기다리면 되잖……."
"이런 빌어먹을! 이미 경계심을 품었는데 놈이 다시 쉽게 나올 것 같아? 그럼 아무나 놈을 잡았게? 이 용소(龍沼)는 수심이 수십, 수백 장이나 될 거야. 아무리 자맥질을 잘하는 사람도 들어갈 수 없단 말이다!"
"그럼 어떻게 하지?"
녹의노파의 음성이 절로 다급해졌다.
그 말에 문득 활염라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죽은 듯 쓰러져 있는 한효월이 있는 곳이다.
그가 한효월을 바라봄을 보자 녹의노파의 안색이 달라졌다.
"또 저 사람을 미끼로 쓰자는 이야기를 하자는 거예요?"
"아니면, 다른 방도 있소?"
"그건……."
활염라의 되물음에 녹의노파는 말문이 막혔다.
"명불허전이군. 활염라답게 사람이 사는 꼴을 못 본다니까! 귀신은 뭐 하는지 몰라. 하긴 사람을 그렇게 많이 지옥으로 보냈으니 같은 통속으로 알고 안 잡아가는지도……."
뚱보노인은 하품을 하면서 손으로 입을 두드렸다.
그의 말에 활염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군! 오불관언(吾不關焉), 세상이 망해도 나만 상관없으면 간섭을 안 한다는 그 게으른 놈이 나서서 방해를 하지 않나, 사람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죽이는 날수독심(辣手毒心)이 천하의 성녀와 같은 소리만 해대고 있다니?"
그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어대면서 한효월을 힐끗 보았다.
"설마 하니, 저 죽어가는…… 아니, 죽은 놈에게 무슨 귀신 곡할 힘이라도 있다는 건가? 도무지 알 수가 없군! 왜 나만 나쁜 놈 만드는 거야? 나라고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건가? 미인요를 안 잡아가면 우리 하아는 누가 살려낼 건가? 누가 책임질 거야? 너냐?"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지는지 활염라는 뚱보노인, 오불관언을 때려죽일 듯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그, 그게 아니라……."
오불관언이 당황해 손을 저었다.
다른 건 겁나지 않는다.
그러나 하아를 살려내지 못한다면, 그게 자신 때문이라면…… 그건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인 것이다.
"알겠나? 나도 하고 싶진 않아! 하지만 방법이 그것뿐이야."
더 이상 간섭 말라는 듯 인상을 험악하게 긁은 채 활염라는 두 사람을 한번 흘겨보고는 손을 내밀어 한효월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나도 좋아서 하는 일은……."
갑자기 그의 말소리가 잦아들었다.
그의 눈이 경악으로 인해 황소 눈처럼 커졌다.
한효월, 죽은 줄 알았던 그가 눈을 뜨고 있었다. 믿을 수 없게도…….
"뭐, 뭐야?"
놀란 활염라가 주춤 한효월을 놓치며 한 걸음 물러났다.
활염라라는 이름답게 그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도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던 괴인이다. 수십 년 전부터 차라리 염라대왕을 만날지언정, 활염라를 만나지 말라는 말까지 강호에 유전(流傳)되었음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웅변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런 그가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는 것은 그만큼, 한효월이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고 있음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까닭이다.
그가 손을 놓치면서 황급히 뒤로 물러서자 녹의노파, 날수독심 송옥교(宋玉嬌)가 얼떨떨한 빛으로 활염라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에요?"
"노, 놈이 살아 있는데?"
"난 또…… 그야 안 죽은 건 이미……."
"그게 아니라, 눈을 뜨고 날 보고 있었단 말이야!"
"그럴 리가?"
날수독심 송옥교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한효월을 보았다.
참혹한 모습이다.
홀로 깨어나기는커녕, 누가 봐도 시체나 다름없는 모습.
그들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가 살아 있는 것조차 알 수 없도록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끔찍할 정도였다. 그냥 둔다면 저절로 숨이 끊어질 상태. 그런데 살아 있는 것은 고사하고 스스로 눈을 뜨다니?
"큭큭…… 나쁜 짓을 하도 많이 하다 보니 눈에 헛것이 뵈나 보……!"
서 있는 게 귀찮은 듯 그물도 팽개치고서 등을 옆에 있는 큰 바위에다 기댄 채 연신 하품을 해대던 오불관언 종무연(宗無緣)이 쿡쿡 웃어댔다. 하지만 그는 주위가 조용해지는 것을 느끼고 반쯤 감았던 눈을 뜨다가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져서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당연히 하던 말도 끝맺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활염라가 손을 놓치고 물러나는 바람에 땅바닥으로 나뒹군 한효월, 그의 손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손의 움직임은 팔에서 어깨로 이어지면서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면서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어둠 속에서 창백하다 못해서 귀기스럽게 하얀빛을 띤 한효월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가 몸을 일으켜 앉으면서 드러난 것이다.
"너, 너는……."
믿기지가 않는지 활염라가 신음을 흘렸다.
그는 의술의 명인이었다.
그런 그가 활염라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별호를 지니게 된 것은 말못할 사정이 있어서였다. 그의 경험으로 보자면 한효월의 상태로써 그가 스스로 깨어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스스로 일어나 앉는다는 것은 상궤(常軌)를 벗어난 일에 다름이 아니었다.
경악한 세 사람의 시선을 받으면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던 한효월은 미간을 찡그렸다.
참기 힘든 고통이 전신을 짓이기고 있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은 탁하긴 했어도 여전히 단아했다.
그가 말을 하자 어이없는 빛이던 세 사람.
"흥, 구해주긴 누가 널 구해줬다는 게냐? 우린 너를 구해준 적이 없을 뿐더러 이제부터 너를 이용할 작정이니 고마울 거 하나도 없다!"
말과 함께 파공성이 울리면서 낚싯줄이 날아들어 한효월의 상체를 휘감았다.
밤이 길면 꿈이 긴 법.
활염라 조과(趙過)는 한효월이 왠지 맘에 들지 않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은 오래가는 게 좋지 않다. 말썽이 일기 전에 잠재우는 게 옳다. 그의 판단은 어쩌면 옳았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것이 그렇게 늘 그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많이 경험했으면서도 간과하고 있었다.
소리도 없이 검은 그림자 하나가 날아들었다.
그리고 어둠을 가르며 검광 한줄기가 한효월을 휘감은 낚싯줄을 잘라왔다. 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그림자는 활염라를 공격해 들어갔고 또 다른 자는 한효월에게로 날아들었다.
"웬 놈들이냐?"
활염라 조과가 눈을 부릅뜨고서 꾸짖었다.
동시에 그는 낚싯대를 잡아당기면서 옆으로 몸을 틀었다.
활시위처럼 팽팽히 당겨졌던 낚싯줄이 그의 손짓에 따라 만월처럼 휘어지면서 한효월을 휘감은 채로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한 동작으로 갑자기 나타난 세 사람의 공세를 일시에 무력화시킨 것이다.
그러나 나타난 세 사람의 무공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허탕을 친 순간에 그들은 질풍처럼 세 방향으로 흩어지면서 활염라 조과를 덮쳐 왔다. 검과 도, 그리고 괴이하게 생긴 낫[鎌]과 같은 무기가 한 사람이 휘두르는 것 같은 조화를 이루면서 날아들었다.
"얼씨구? 제법인데?"
활염라 조과가 다급히 소리쳤다.
바로 그 순간이다.
"큭!"
괴이한 신음과 함께 흑영 하나가 주춤 손이 느려졌다.
그것을 놓칠 활염라 조과가 아니었다.
낚싯대를 쥔 오른손이 아닌 왼손이 소맷자락에 경풍을 싣고서 무섭게 뻗어 나갔다. 그리고 그 소맷자락은 여지없이 흑영의 검광을 뚫고서 그의 목덜미를 쳤다.
"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자가 뒤로 튕겨졌다.
"한 놈."
중얼거림과 함께 그는 빙글 신형을 돌려 자신의 눈앞으로 닥쳐든 흑의인의 낫을 피하면서 예의 옷소매로 그의 어깨를 쳤다.
우두둑 소리가 끔찍하게 일면서 그가 튕겨나듯 뒤로 물러났다.
"나머지 한 놈!"
활염라가 냉소를 터뜨렸다.
피잉-
그가 오른손을 움직이자 낚싯대가 세찬 파공음과 함께 움직이면서 남은 흑영에게로 날아갔다. 낚싯줄은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그 줄은 무섭게 날아가서 그의 목을 감아버렸다. 놀랍기 이를 데 없었다. 끝에 한효월을 감고 있음에도 줄의 가운데를 이용한 것이니 그의 무공을 짐작할 만하였다.
동시에 그가 왼손을 쳐냈다.
소매 속에 감추어졌던 손이 불쑥 튀어 나가면서 세찬 지풍(指風)이 흑영의 가슴팍 사혈을 격타했다.
그 순간이다.
"조심!"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이놈이……!"
경악이 활염라의 눈에 떠올랐다.
그의 옷소매에 격타당하고 뒤로 튕겨져 나갔던, 그렇게 생각했던 흑영이 소리도 없이 날아올라 그 낫과 같은 병기로 활염라의 목을 베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옷소매에 실린 경력은 가히 천 근이라, 집채만한 바위라도 부술 수 있었다.
그런데 다시 그를 공격해 오다니?
그것은 너무도 뜻밖이라 그가 그것을 알았을 때는 그 낫은 이미 활염라의 목에 당도하고 있었다.
위기의 순간.
갑자기 그 흑영이 피를 뿜어내면서 앞으로 풀썩, 거꾸러졌다.
그 뒤에는 녹의노파, 날수독심 송옥교가 차가운 빛으로 우뚝 서 있었다.
"결국 손에 피를 묻히게 되는군……."
그녀가 중얼거렸다.
"어떻게 된 거지?"
자신의 앞에 널브러진 세 명의 흑의인을 둘러본 활염라가 물었다.
"나도 모르겠어요. 저들이 좀 괴이하군요. 분명히 먼저 내가 쳐낸 수혼침(搜魂針)에 마혈을 맞았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움직이니……."
"고통을 모르게 훈련시킨 놈들인 것 같군 그래. 그러니 그렇게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덤벼들지."
원래의 그 자리에서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 있던 오불관언 종무연이 심각한 표정으로 의견을 제시한다.
그 말에 활염라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넌 뭐 하는 놈이냐? 내가 위험한 걸 보면서도 그렇게……."
그가 눈을 부릅뜨자 오불관언 종무연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위험은 무슨…… 천하의 활염라가 그 정도로 위험할 리가 없잖나? 그리고 보라구. 네놈 어디에 생채기 하나 난 데가 있어? 뭘 그만 일로……."
그 말에 활염라의 얼굴이 더욱 험악해졌다.
"이놈이……."
활염라 조과는 이를 갈았다.
어떻게든 대강 참아보려고 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더 지랄을 떤단 말이시……."
오불관언 종무연이 아예 눈을 감으면서 중얼거리는 말에 그만 그의 성질은 폭발하고 말았다.
"내 오늘 네놈을 그냥 두면 사람이 아니다!"
그가 대노하여 손을 걷어붙이는 순간이었다.
"미인요를 유인하기 위해 절 이용하겠다면 잘못 생각한 겁니다."
침착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 말에 주춤, 활염라 조과는 그 자리에 굳어졌다.
그의 낚싯줄에 감긴 한효월이 여전한 눈빛으로 그를 본 채 말하고 있었다. 방금의 세찬 드잡이질로 그의 몸에서는 아직도 흐를 피가 남았는지 상처가 벌어지면서 피가 흐르고 있어 그 형상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한효월은 고통스러운 듯 미간을 찡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 얼굴의 근저에 서린 것은 고요함인지라 보는 사람을 참으로 묘한 기분이 들게 만들기에 족했다.
"그건 무슨 소린가?"
날수독심 송옥교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건……."
"소리는 무슨! 그저 위기를 면하기 위해서 아무렇게나 갖다 붙이는 말이야. 꾸물거릴 시간이 없어. 놈이 아예 숨어버리기 전에 미끼를 던져야만 놈이 다시 올라올 거야!"
활염라 조과는 말과 함께 낚싯대를 쳐들었다.
그가 낚싯대를 쳐들자 한효월의 몸이 낚싯줄을 따라 까마득히 위로 솟구쳐 올랐다.
핏물이 그 궤적을 따라 흩뿌려졌다.
그때다.
"당장 멈추지 못해요!"
고막을 찌를 듯 날카로운 음성이 터져 나왔다.
날수독심 송옥교이 살기등등하여 활염라 조과의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백발일 뿐, 아직 40대로 보이는 그 얼굴은 서리가 내린 듯 차갑기 이를 데 없었다.
찔끔한 활염라 조과가 말했다.
"난 그저……."
"그를 내려놔요! 난 들어봐야겠어요! 왜 잘못이란 건지……."
"듣긴 뭘 들을 게 있다고……."
툴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활염라 조과는 한효월을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그의 성격을 아는 사람이 그 광경을 보았다면 실로 믿을 수 없는 광경일 것이었다.
"말해 보게. 왜 잘못이지? 미인요는 분명히 자네를 노렸었네. 그런데 그게 잘못이라는 이유는……."
한효월은 그녀의 물음에 암중 심호흡을 하여 운기를 고르며 입을 열었다.
"미인요는 한번 경각심을 가진 먹이에는 절대로 가까이 다가가지 않습니다."
"정말예요?"
비수와 같은 눈길로 날수독심 송옥교가 활염라 조과를 쏘아보았다.
"그렇긴 하지만…… 그건 고서(古書)에 적힌 이야기일 뿐이니 다 믿을 순 없지. 더구나, 저놈을 미끼로 쓰는 외에 지금 다른 방법이 어디 있겠소?"
"……."
딴은 그렇다.
날수독심 송옥교는 입을 열지 못했다.
그때, 한효월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미인요를 잡아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좌중 세 명의 노인은 일제히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이내 활염라가 코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미인요를 잡겠다고? 그 몸으로? 흥! 하긴 미끼가 된다면 잡긴 잡는 거겠군. 어차피 죽을 목숨 그렇게 보시를 한다면……."
"미인요를 잡겠다는 것을 보면 누군가가 지극순음지체(至極純陰之體)인 것 같군요. 맞습니까?"
한효월의 물음에 날수독심은 물론, 활염라까지 입을 벌렸다.
"정말 미인요를 안단 말이냐?"
눈을 꿈벅거리고 있던 오불관언 종무연이 물었다.
죽은 시체와 같던 한효월.
그가 스스로 깨어난 것도 놀라운 일인데, 그가 하는 말은 더욱 놀라웠다.
"정말 네가 미인요를 안다고?"
오죽하면 세상사가 다 귀찮다고 하여 오불관언이라고 하는 종무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되물었을까.
한효월은 그 물음에 미미하게 웃었다.
그러나 고통에 절어버린 얼굴에 나타나는 것은 미소가 아니라 일그러짐일 뿐이다.
"미인요는 보기 드문 전설 중의 영물(靈物)이긴 하지만, 일반인에게는 별로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극순음지체를 가진 사람에게는 그 순음지양(純陰之陽)이 다시 찾아볼 수 없는 영약이 됩니다."
"정말 아는군!"
날수독심 송옥교가 탄성을 터뜨렸다.
"어, 어디서 주워들은 게 있는 것 같긴 하군 그래……. 흥! 그렇다고 미인요를 잡을 수 있는 건 아니지. 말이야 누가 못하나?"
활염라 조과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정말 미인요를 잡을 수 있다는 건가?"
독수날심 송옥교가 급하게 다그쳤다.
"만에 하나라도 이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거라면 아마 다시 살아난 것을 원망하게 될 거야."
그녀가 음산한 어조로 못을 박았다. 그 얼굴에 서린 차가운 빛은 말 그대로 얼음 가루가 흘러내릴 지경.
한효월은 그녀의 위협 어린 말에 쓰게 웃었다.
"소생이 살아난다면…… 잡을 수 있게 될 겁니다."
그 말과 더불어 한효월은 꼿꼿이 앉아 있던 신형을 허물어뜨렸다.
마치 검불 더미가 저절로 넘어지듯 그렇게 그는 옆으로 쓰러지면서 정신을 잃어버렸다.
"이런!"
독수날심 송옥교가 놀라 그를 부축했다.
그녀는 한효월의 명문에다 장심(掌心)을 갖다 대고 진기를 운용하여 그를 도와주려고 했지만, 괴이하게도 한효월의 내부는 텅 비어 어떻게 힘을 써야 할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건 또 무슨 일이야?"
그녀가 괴이한 빛으로 활염라를 쳐다보았다.
"별거 아니야. 놈은 호심진기(護心眞氣)로 심맥을 보호하면서 가사 상태에 있었던 거지. 그렇게 전신을 내던지고 암중으로 상처를 치료해 가는…… 그러니까 외상은 그냥 두고 내상을 돌보기 위한, 뭐 말은 그렇지만 막다른 골목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인데…… 위기를 느끼고 억지로 그 가사 상태를 깨고 일어났던 거지. 그러니 이젠 스스로 깨어날 방도가 없게 된 셈이야. 하지만 어린 놈이 대단한걸! 그 상태에서 잠수활인지법(潛修活人之法)을 전개할 수 있다니 정말 보통이 아니군……."
활염라 조과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 이젠 깨어날 수 없다는 건가요?"
"스스로는 죽어도 못 깨어나지.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어."
"그를 살려요!"
"당신도 이놈의 말을 믿는다는 거요?"
"방금 말했잖아요? 당신 입으로 대단한 놈이라고. 그가 시행한 잠수활인지법이 아무나 할 수 있는 건가요? 더구나 저 나이에?"
"그건……."
활염라 조과가 입을 다물었다.
그 나이라면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더 이상 생각을 굴릴 만한 여유는 없었다.
소리도 없이 검은 그림자가 날아들었고, 그들은 그 검은 그림자를 상대해야 했던 것이다.
"이건 또 뭐 하는 놈들이야?"
연달아 방해를 받게 된 활염라 조과가 노해 으르릉거렸다.
"아무래도 저 아이가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군요!"
독수날심 송옥교가 소리치면서 소매를 앞으로 쳐냈다.
그러자 매서운 경력이 일면서 차가운 빛이 그 가운데에서 일어났다.
"빌어먹을! 도대체 뭐 하는 놈들이냐?"
활염라 조과가 이를 갈면서 수중의 낚싯대를 휘둘러 쓰러진 한효월에게 덮쳐 가는 흑의인들을 휩쓸어갔다.
싸움은 소리없이 시작되었다.
아직도 어둠은 사위를 짓누르고 있었고, 그 어둠의 무게는 만만치 않아 일대를 어둠으로 뒤덮고 있다.
흑영의 움직임은 바람과 같았다.
그리고 그들의 움직임은 그 어둠과 동화되어 알아보기 어려웠다.
칠흑 같은 밤, 더구나 그믐이다.
그 움직임이 쉽게 눈에 들어올 리 없다.
하지만 그들 세 노인은 바로 그러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설사 자신의 손가락을 알아보기 힘든 동굴 속 어둠에 갇혀 있다 할지라도 사물을 분간할 능력을 가진 것이 그들인 것이다.
피잉! 피이잉-
낮고도 날카로운 파공음이 방원 7, 8장을 온통 휘젓고 있었다.
그것은 활염라 조고가 휘두르는 낚싯대의 위력이었다.
한효월을 휘감았던 낚싯대가 그를 놓고 홀로 설치게 되자 그 위세는 놀라웠다.
오죽하면 소리없이 날아든 흑영 하나가 그 낚싯줄에 걸려 목이 날아갔을까. 무섭게 회전하는 낚싯줄은 날이 선 검과도 같았다
"끄으으……."
낮은 비명이 어둠 속으로 번졌다.
몇 번의 격돌 속에서 이미 대여섯 명의 흑영이 튕겨져 나갔다.
활염라 조고와 날수독심 송옥교가 만들어낸 위력.
"계속 그러고 있을 거냐? 이 빌어먹을 놈아!"
방금 날아갔던 흑영 하나가 놀랍게도 다시 일어나는 것을 본 활염라 조고가 미간을 찡그린 채 소리쳤다.
그때까지도 오불관언 종무연은 조는 듯 마는 듯 그렇게 있었다.
그러나 그도 적의 숫자가 점점 많아지는 것을 보았다. 그 자리에서 더 졸기 힘들다는 것은 바보가 아닌 이상, 제아무리 귀찮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간다! 가면 될 거 아니냐?"
순간, 일진 질풍이 일면서 그의 신형이 마치 꺼지듯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놀라운 이형환위(移形換位)의 신법이라 마치 착시를 보는 듯하였다.
"역시 부풍수영(扶風隨影), 육실하게 빠르군……."
힐끗 그것을 본 활염라 조고가 중얼거렸다.
그는 오불관언 종무연이 일단 움직이면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람 중 하나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활염라와 날수독심이 손을 모아 보호하던 바닥의 한효월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오불관언 종무연이 그를 데리고 간 것은 불문가지.
'갑시다!'
활염라가 전음지성으로 외치자 날수독심 송옥교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길 떠나도 괜찮을런지?'
'어차피 놈들은 아무것도 모르니까, 오히려 우리가 떠나는 게 낫겠지.'
활염라가 날수독심의 물음에 대꾸하곤 그도 신형을 날렸다.
그들의 이목은 비할 바 없이 영민하여 한효월과 이야기하는 중에도 사방에서 신호가 오감을 이미 경각하고서 나름대로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히 불가일세(不可一世).
그들은 성정(性情)이 오만무쌍하여 세상 누구도 겁내질 않았다.
게다가 그렇게 큰소리를 칠 만한 능력을 그들은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이 그렇게 오만할 수도 없었을 터이다.
하나 30년 세월은 결코 간단치 않은 모양.
팡팡!
하는 일진 폭음이 터져 나오더니 이미 10여 장 밖으로 앞서 가던 오불관언 종무연이 벼락처럼 뒤로 튕겨졌다.
강적을 만난 것이다.
"언 놈이냐?"
옆구리에 한효월을 낀 오불관언 종무연이 이를 갈면서 소리쳤다.
그의 능력으로써 남에게 격퇴되었다면 이는 실로 간단치 않은 일에 다름이 아니었다.
"하하하하……!"
그의 외침과 함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당당한 체구.
흑의에 복면을 해 면목을 알아볼 수 없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형형히 빛나는 눈빛과 방금 오불관언 종무연을 격퇴한 검, 차가운 빛을 뿌리면서 그의 손에 들린 그 검은 그가 간단한 힘을 가진 사람이 아님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가 제천교의 천추성주임을 오불관언 종무연이 알 리가 없다.
"넌 뭐 하는 놈이냐?"
그를 발견하자 오불관언 종무연이 미간을 찡그렸다.
"놓아라."
하지만 대답 대신 천추성주가 찔러오는 검을 본 그의 안색은 납덩이처럼 돌변해 버리고 말았다.
원래 그와 천추성주와의 거리는 1장가웃쯤.
그 거리는 뒤로 물러난 그가 일부러 띄워놓은 것이었다. 그 거리라면 천하의 어떤 자라 할지라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그럴 정도로, 그는 신법에, 자신의 빠르기에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그 자신(自信)을 무색케 천추성주의 일검은 찰나간에 그 거리를 가로질러 그의 가슴을 찔러오고 있었던 것이다.
가히 밤하늘을 가르는 전광(電光)과도 같은 속도!
스팟!
검광이 일고 놀란 기러기처럼 인영 하나가 튀듯이 옆으로 물러났다.
핏방울이 검끝에서 일고 옷자락이 길게 베어져 격렬히 이는 바람에 너풀거렸다.
오불관언 종무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믿을 수 없게도 천추성주의 그 검은 그의 신법을 따라잡으면서 마치 눈이 달린 것처럼 오불관언 종무연의 가슴을 계속해서 노리고 있었기에.
"수혼천심검(搜魂穿心劒)?"
신음이 오불관언 종무연에게서 터져 나왔다.
찰나, 돌연 오불관언 종무연이 몸을 뒤집는가 싶더니 한효월을 안은 채로 땅바닥으로 넘어졌다. 앞으로가 아니라 옆으로 넘어지는 그 순간, 천추성주는 그 뒤에서 불쑥 나타난 날수독심 송옥교를 볼 수 있었다.
그녀가 그를 향해 손을 쳐내고 있음이 보인다.
"가랏!"
서릿발 같은 질타.
동시에 천추성주는 검을 맹렬히 떨었다.
검광이 폭죽처럼 튀면서 송옥교가 그를 향해 뿌려낸 십여 줄기의 한망(寒芒)을 튕겨냈다.
"이까짓 장난으로……!"
차갑게 코웃음 치던 천추성주의 안색이 돌변했다.
그 순간, 묘한 냄새가 코끝을 스침을 경각했던 것이다.
"독?"
동시에 천추성주는 개구리가 튀듯이 번개처럼 뒤로 물러났다. 그때까지도 질풍처럼 앞으로 전진하던 그였지만 물러남은 정말 신속하기 이를 데 없었다.
"으흐흐흐…… 늦었다!"
그러나 음산한 웃음소리와 함께 천추성주의 옆에 있던 흑의인들이 갑자기 신음과 함께 비틀거리는 것이 아닌가.
활염라가 풍차처럼 손을 내젓고 있었다.
이내 비명이 일고 흑의인들이 삽시간에 짚단처럼 쓰러졌다.
"독이다. 피햇!"
천추성주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세 노인은 그 자리를 벗어난 뒤였다.
"뭘 하나? 빨리 신호를 올리고 쫓아라!"
그가 싸늘히 소리쳤다.
흑영들이 날아오름을 보고 그는 손에 쥔 것을 폈다.
그 손아귀에는 세 자루의 머리카락보다 더 가는 침(針)이 어둠 속에서 은은히 녹광(綠光)을 발하고 있다.
"녹광혈견휴(綠光血見休)에다가 부풍수영, 그리고 염왕지독(閻王之毒)까지……. 설마 하니 그들이 사라진 지 오래된 강호삼괴(江湖三怪)란 말인가?"
그는 믿기지 않는 듯 중얼거렸다.
강호삼괴라면 천하를 제멋대로 주무르면서 사는 세 괴물을 일컫는다. 누구도 그들을 가까이 하지 못했었다.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것을 그날의 기분으로 결정했으니, 천하가 그들을 무림 중의 세 괴물이라고 일컫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로군. 그 괴물들이 왜 그놈을 보호하려는 것일까?"
천추성주가 다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