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八首 이일대로(以逸待勞) (50/113)

第八首  이일대로(以逸待勞)

-함정에 빠지다

어둠 속의 적은 천하(天下)를 향해 웃다

 태양이 구름 속으로 숨은 지 이미 한참이 흘렀다.

 어둠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아직 해가 지려면 시간이 남아 있음에도 어둠은 급하게 달려와 세상을 덮었다. 마치 세상이 어둠 속으로 곤두박질치는 듯한 모양이다.

 저 멀리 암울하게 천둥이 운다.

 곧 비라도 쏟아질 모양.

 노승(老僧) 한 사람이 힐끗 무거운 눈길로 그 하늘을 쳐다본다.

 "생각보다 비가 일찍 쏟아질 것 같구료……."

 "어쩌면 잘된 것인지도……."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노승의 옆에는 속가(俗家)의 노인 한 사람, 다시 그 옆으로 노도사(老道士) 두 사람이 애써 무표정한 빛으로 묵묵히 앉아 한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 나이가 고희를 넘긴 듯 보인다. 동안학발(童顔鶴髮)이라는 말 그대로 오랜 연륜이 그들에게서는 느껴진다. 한가로이 주변 경치를 구경이라도 하는 듯하지만 실제로 그들의 모습에는 알지 못할 긴장이 은밀히 숨 쉰다. 울울(鬱鬱)한 숲 속에 몸을 담은 그들은 모두 눈을 모아 한곳을 응시하고 있다.

 널따랗게 펼쳐친 계곡.

 거기에는 십여 채의 집이 자리한다. 얼핏 느끼기에 세상을 버린 옛 선비들이 모여 있음직한 고요한 모습이지만 그곳을 바라보는 그들 노인들의 손바닥에는 진땀이 고일 만큼 그들은 긴장하고 있었다.

 지난 수십 년 간의 수도로도 진정키 어려운 긴장(緊張)!

 그럼에도 그들의 주위에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의 기운을 마음대로 갈무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고수라는 의미인 것이니 어찌 간단한 일이랴.

 "주변은 깨끗하오."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다시 한 노인이 나타났다. 그들과 비슷한 연배. 나이 일흔은 넘어 보이지만 눈에서는 정광(精光)이 빛나 젊은이를 압도할 기태가 늠연한 속가의 노인이다. 그의 등에는 한 자루 고검(古劍)이 걸려 그가 검도에 수십 년을 바친 사람임을 알게 한다.

 "깨끗하다고?"

 노도인 한 사람이 미간을 살짝 찡그린다.

 "그러하오. 어쩌면 우리가 너무 과민(過敏)했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오만……."

 나타난 회삼노인이 말했다.

 "과민이라……."

 그들의 앞에 앉아 있던 노승이 중얼거렸다.

 "과민이라면 좋겠지. 그렇다면 모든 걱정이 다 기우일 것이니 무슨 걱정이겠소? 아니라면 그가 아직 우리가 이곳을 알아낸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일런지도…… 나무아미타불……. 대경(大鏡)!"

 "예, 사백."

 중년의 승려 한 사람이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금강나한이 현신한 것 같은 모습.

 "일러둔 대로 일단 움직이게 되면 살계(殺戒)를 펼침에 결코 주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아미타불, 알겠습니다."

 그가 고개를 숙이자 그 뒤 숲 속에 늘어선 승려들도 고개를 숙였다. 숲 속에 몸을 은신한 상태라 숫자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되, 그들의 기상이 삼엄함은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들이야말로 소림사의 정예라는 나한전의 고수이니 너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일뢰(一雷)!"

 "예, 사숙!"

 노도인의 부름에 옆에서 중년의 도사 한 사람이 나타났다. 눈에서 정광이 빛나는 것이 그의 성취 또한 대경이란 승인에 못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너 또한 살계를 주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손에 사정을 남긴다면 천하가 도탄에 빠질런지도 모름을 명심토록 하거라."

 "명심하겠습니다."

 일뢰라 불린 도사가 허리를 굽혔다.

 그의 뒤쪽 숲 속에도 일단의 도사들이 기척을 죽이고 있었다. 그들이야말로 무당파의 정예라는 진무궁(眞武宮)의 고수들.

 "자, 그럼 이제 가보도록 합시다."

 말과 함께 노승의 어깨가 살짝 흔들리자 그의 몸은 이내 둥실 떠올라 퉁, 선장(禪杖)을 짚은 채 앞으로 내려섰다. 그 한 수 연대좌불(蓮臺坐佛)의 경공만 하더라도 세상에 드문 것이라 여기 모인 노인들의 무공이 어떠한 것인지는 알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였다.

 "좌 도우께서는 이 자리를 잘 지켜주시오. 만약 이상이 있다면 바로 발동하여 진격해 들어와야 할 테니 잠시라도 눈을 떼지 마시구료."

 노승의 옆에 서 있던 학발노도인의 말에 방금 나타난 회삼노인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시오. 구대문파의 정영(精英)이 이 자리에 모였는데, 누가 감히 당적할 수 있겠소?"

 "……."

 노도인은 그를 향해 미소를 머금은 채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곤 신형을 돌린 그의 얼굴은 전혀 수도인답지 않게 납덩이처럼 굳어 있었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듯한 모습이었다.

 노승이 앞서고 옆에 있던 속가노인과 노도인이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사라져 가자 회삼노인은 암암리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부디 기우였기를……."

 그의 중얼거림은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앞선 그들 세 사람이 사라짐을 보고 있는 그들의 바램은 누구라도 틀리지 않을 것이었다. 그들이 떠남과 보고 있는 숲 속의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라 할 수 있을 터였다.

 "모두 준비하고 신호를 기다리도록 하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 노인의 말에 숲 속에 은신하고 있던 그들은 소리도 없이 다시금 숲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조용한 움직임이 숲 속으로 번져 가기 시작한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열 명, 스무 명도 아니었다. 근 백 명에 이르는 고수들이 숲 속에서 대형을 짠 채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풀벌레도 숨을 죽였다.

 계곡.

 노승 일행은 바람처럼 앞으로 전진했다.

 그들이 목적하는 곳은 계곡에 있는 집들 중 가장 큰 곳. 그들은 남의 이목도 상관하지 않는 듯 거침없이 신형을 날려 거의 단숨에 그 큰 집의 후원으로 날아들었다. 집의 담은 나지막했고 그 담장 안은 아주 평범하여 전원 하나와 후원 하나로 구성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집 한 채가 전후로 나뉜 정도라 말이 후원이지 규모로는 조촐하기 그지없다.

 그들이 그처럼 거침없이 움직임에도 사람이 살지 않는 것처럼 그들을 제지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없단 말인가?'

 노승이 미간을 찡그린 채 앞을 본다.

 후원에는 연못에 면한 정자 하나가 위치한다.

 권선재(勸善齋)라고 이름된 정자에는 한 사람이 의자에 앉은 채로 연못을 보고 있었다. 보이는 것은 뒷모습이긴 하지만 표표한 느낌이 흐른다. 백의의 그는 이따금 부는 바람에 옷자락을 날릴 뿐, 생각에 잠긴 듯 움직이지도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를 발견한 노승 등 세 사람은 서로를 돌아보곤 몸을 날려 조용히 조용히 정자에 올랐다.

 "차를 올려라."

 백의인은 여전히 뒷모습을 보인 채로 말했다.

 그 바람에 정자에 들어선 세 사람은 멈칫, 입을 다물었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건만 백의인의 말에 채 스물이 되어 보이지 않는 여인 둘이 홀연히 나타나 탁자 위에다 세 잔의 찻잔을 올려놓았다.

 졸졸…….

 소리조차 들리지 않게 찻물을 따른 여인들은 뒷걸음으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고요가 여인들이 사라진 자리를 채운다.

 그러나 누구도 그 찻잔을 드는 사람은 없다.

 주인은 여전히 연못을 바라보고 있을 따름.

 '우리가 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하긴 그의 능력이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겠지…….'

 노승이 깊숙이 가라앉은 눈으로 암중에 신음을 흘렸다.

 잠시 침묵이 흐르자 먼저 입을 연 것은 백의인. 여전히 등을 보인 채다.

 "세 분이 오늘 이곳을 찾아오신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설마 몰라서 묻는단 말이오? 근래, 시주의 행보(行步)를 부인할 작정이오?"

 노승이 딱딱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문득 낭랑한 웃음이 일었다.

 "어디가 이상한단 말씀이오? 나는 모르겠는데?"

 "언제까지 그렇게 등만 보이고 있을 작정이오?"

 탕!

 찻잔이 튕겨 오르고 탁자가 고함을 질렀다. 속가노인, 회삼을 차려입은 그는 탁자를 내려친 채로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하하하…… 점창의 선대 장로인 창궁일검(蒼穹一劒)의 위명은 오래전부터 천하를 경동하였지. 그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 조급한 성미를 버리지 못하였으니 어찌 선대의 절학을 대성하였다 말할 수 있겠나?"

 백의인이 어깨를 흔들며 웃음을 터뜨렸다.

 "뭣이라고!"

 회삼노인, 창궁일검이라 불린 그가 노해 검을 움켜잡았다. 그의 검세는 전광(電光)과도 같은 빠르기로 유명하다. 검을 잡는 순간에 그의 검은 이미 용음(龍吟)을 토해내면서 검집을 벗어나 허공을 가르고서 백의인에게 도달했다.

 "도우!"

 노도인이 놀라 그를 만류하려 하였다.

 하지만 창궁일검의 발검은 너무도 신속하여 그가 손을 내밀었을 때는 그 일검은 이미 백의인을 찌르고 난 다음이었다.

 와장창!

 등을 보이고 있던 백의인은 그의 일검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난간을 부수면서 앞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이건……!"

 뜻밖의 사태에 노승의 눈빛이 굳어졌다.

 "말도 안 돼!"

 백의인을 찔러 거꾸러뜨린 회삼노인이 당황한 빛으로 중얼거렸다. 그가 자신의 일검에 거꾸러질 것은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표정이 역력했다. 자신의 앞에 있던 사람은 그 일격에 쓰러질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망연자실할 때 노도인이 바람처럼 정자 밖으로 날아 내렸다.

 그 밖은 작은 연못.

 노도인은 일신의 높은 경공으로 연못에 뜬 개구리밥을 밟고서 연못에 뜬 채로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의 앞쪽으로 물속에 반쯤 잠겨 엎어진 흰옷의 사람이 보인다.

 물속에 잠긴 흰옷, 그 옷 위로 떠오르는 붉은빛의 선연함.

 '어떻게 이런 일이…….'

 괴이함에 내심 머리를 저으면서 노도인은 손을 뻗어 그 사람을 뒤집었다.

 순간, 천만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사람이 터져 버린 것이다. 삽시간에 희뿌연 연기가 주변을 삼켰다.

 "위험하오!"

 노승이 소리치면서 일장을 갈겨냈다.

 연기가 치솟음과 함께 연못 속에서 회백색 옷을 입은 자들이 노도인을 향해 치솟아오름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손에서 번뜩이는 사악한 검광의 빛줄기들.

 "감히 노도(老道)를 노리고서 함정을 판단 말인고?"

 노도인의 노성이 흩어지는 연기 속에서 터졌다. 소용돌이치는 검광이 연기 속에서 전광과도 같이 번쩍인다.

 쨍그랑거리는 금속성이 터지면서 연기 속을 뚫고서 노도인이 솟구쳐 올랐다. 구름을 가르고 날아오르는 신룡과도 같이 당당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더 이상의 습격도 다른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긴장된 빛으로 주위를 살펴보던 노승의 눈빛이 괴이하게 굳어졌다. 정자의 지붕 위로 날아오른 그의 옆으로 노도인과 회삼노인이 내려서 주위를 쓸어본다.

 뭉클거리는 연기가 일대를 덮고 있었다.

 방금 쳐낸 노승의 웅위한 일장 때문에 잠시 밀려나는 듯했지만 연기는 짙은 안개처럼 다시 주변을 온통 뒤덮은 상태였다.

 "괴이하군……."

 잠시 주위를 살펴본 노승이 중얼거렸다.

 "그렇구료. 이자가 함정을 팠다면 이런 정도로 끝나지 않을텐데, 어떻게 해서 방금 그 공격 이후에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것인지……!"

 중얼거리던 노도인의 안색이 갑자기 달라졌다.

 "설마……!"

 놀란 그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에게 이끌리듯이 다른 두 사람도 시선을 돌렸다.

 그들이 바라보는 곳은 바로 그들이 조금 전에 떠나왔던 곳.

 괴이했다.

 연막이 터짐과 동시에 신호가 발출되었다. 그렇다면 대기하고 있던 고수들이 일제히 밀려들었어야 했다. 그런데 아무런 움직임도 없다니?

 그것을 경각(警覺)한 노도인은 가슴이 섬뜩하여 고개를 들었고, 이내 숲 속에서 번뜩이는 검광예기(劒光銳氣)에 은은히 금속성이 들리는 것을 보고 안색이 대변했다.

 "맙소사!"

 말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그가 지붕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무슨 일이오?"

 그와 함께 노승까지 날아오름을 보고 회삼노인이 외쳐 물었다.

 "오히려 우리가 습격을 당한 것 같소!"

 노승의 음성에 청삼노인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어떻게 그런 일이……."

 몸을 날려 다시 숲으로 향하려던 세 사람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정자를, 아니, 후원을 벗어나기도 전에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흑의인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아무런 소리도 말도 없었다.

 그저 그것만이 할 일인 양 그렇게 그들을 향해 밀려오는 검은 무리들을 보아야 했다. 그들의 숫자가 몇인지 제대로 살필 여가조차 없이 참혹하고 무서운 싸움은 시작되었다. 그것을 알리듯 은은한 천둥 소리와 함께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멀리 숲 쪽에서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들린다. 애를 끊는 비명이 그 호각 소리에 묻혀 어둠 속으로 잦아들고 있었다.

*   *   *

 세상의 종말이라도 오려는 것일까.

 도무지 쏟아 붓는 빗줄기는 그칠 줄을 몰랐다. 이따금 번쩍거리는 번갯불이 세상을 호령하지 않으면 사물을 분간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할 정도였다.

 개봉을 떠난 한효월은 그 비를 무릅쓰고서 어둠을 가로질러 숭산(嵩山)을 지나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건지 알 수 없지만 대충 한두 시진은 달린 듯했다. 그런 정도의 시간을 쉬지 않고 전력 질주하다시피 달렸으니 쇠가 아닌 이상, 제아무리 한효월의 무공이 고강하다 해도 무리가 가지 않을 리가 없었다.

 잠시 숨을 가다듬고자 하지만 산속이라 쉴 곳도 마땅찮았다.

 주위를 살펴보던 한효월은 주변 나무 중 거대하게 팔을 벌리고 있는 오동나무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가지가 무성해서 대충 비는 막아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동나무 앞에 도달한 그는 주춤 걸음을 멈추었다.

 한 사람이 그 나무 아래에서 놀란 빛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때마침 번쩍거리는 번갯불이 아니었다면 그를 발견하지 못했을 터였다. 하나 그렇게 드러난 그의 모습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다. 피투성이라는 말로는 형용이 모자란다. 전신에 피칠을 한 그의 배를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 선혈이 끊임없이 흐르다 못해 내장까지 흘러나오고 있었다. 회삼(灰衫)이었던 그 옷은 혈의(血衣)가 된 지 오래다.

 보기 좋았을 턱밑의 수염도 피에 젖고 비에 젖어 참혹하다.

 그는, 그 회삼의 노인은 일그러진 눈빛으로 한효월을 노려보고 있었다. 한효월이 그 노인을 향해 막 입을 열려는 순간, 노인에게서 섬광(閃光)이 뻗어 나와 한효월을 덮쳤다.

 검이었다.

 그의 공격은 너무 뜻밖이었다.

 그리고 자칫 화를 당할 뻔할 만큼 그의 공격은 위협적이었다.

 한효월이 그를 발견한 것은 나무 밑에 당도해서였다. 짙은 어둠과 비, 무성한 숲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렇게 그와 채 대여섯 자의 거리가 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받은 공격이다. 더구나 그를 발견하고 흠칫, 놀라는 순간에 시작된 그의 공격은 마치 한효월이 나타나길 기다렸다가 발동한 것처럼 빠르고도 무서웠다.

 마치 시체처럼 보였던 그 회삼노인이 한쪽 손에 들렸던 검을 휘둘러 그를 공격한 찰나, 한효월의 어깨가 흔들리면서 그의 신형이 누가 밀어버린 듯 옆으로 돌아갔다.

 노인의 일검이 허공을 갈랐다.

 마음만 먹는다면 그 빈틈을 노려 노인을 공격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럴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한 한효월은 낮게 소리치면서 물러났다.

 "멈추시오."

 그것이 끝이었다.

 노인은 한차례 검을 뻗어낸 것으로 힘이 다한 듯 그 자리에 엎어지듯 털썩 무릎을 꿇었다. 가쁜 숨을 토하면서…… 그 숨결을 따라 핏덩이가 쏟아졌다. 체외의 상처뿐만 아니라 극심한 내상도 같이 입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놈들…… 과 일당이…… 쿨럭쿨럭…… 아, 아닌가?"

 노인이 안간힘을 쓰면서 물었다.

 "전 이곳을…… 위험!"

 입을 열던 한효월이 소리치면서 신형을 날렸다.

 노인의 뒤에 검은 그림자가 나타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검은 그림자는 마치 어둠 속에서 불쑥 솟아난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노인의 뒤에서 나타난 그 흑영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손을 휘둘러 노인의 머리를 치고 있었다.

 그 손에 들린 것은 갈고리처럼 생긴 귀조(鬼爪).

 거기에 찍힌다면 결과야 불문가지.

 한효월의 몸짓에 회삼노인은 자신의 뒤에 누군가가 나타난 것을 직감했다. 평소라면 십 장 이내의 낙엽 떨어지는 소리도 듣는 그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다급히 몸을 굴리려 했지만 그가 채 움직이기도 전에 흑영의 귀조는 사정없이 노인의 목을 찍어버렸다.

 "크악!"

 단말마의 비명이 엇갈렸다.

 흑영이 튕겨져 나갔다.

 흑영의 일격이 노인을 치는 순간에 한효월이 손을 휘둘러 흑영의 가슴을 쳐버렸던 것이다. 평소라면 그가 그렇게 중하게 손을 쓸 리가 없었다. 하지만 흑영은 복면을 하고 있었다. 복면을 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감출 것이 있다는 의미, 게다가 그 상대는 죽어가는 노인이었다.

 "노인장!"

 흑영을 날려 버린 한효월이 노인을 부축해 안았다.

 노인은 이미 죽은 것과 다름이 없는 상태였다.

 살아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전설의 대라신선(大羅神仙)이 살아 나온다 할지라도 그를 살려낼 수는 없을 터였다. 귀조는 강철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것이 머리를 찍으려다 한효월의 일격으로 인해 머리가 아닌 노인의 목덜미를 찍어 즉사는 면했지만, 한효월의 일격에 흑영이 튕겨 나가면서 목에 박힌 귀조로 인해 목덜미가 왕창 뜯겨져 나가 버린 까닭이다. 아직도 피가 남아 있었던지 선혈이 분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노인장! 노인장, 정신……!"

 다급히 노인의 응급 혈도를 몇 군데 점하면서 소리치던 한효월이 입을 다물었다.

 숨 쉴 틈도 없이 예의 흑영이 재차 공격해 왔기에 더 이상 노인을 돌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한효월의 일격에 가슴을 얻어맞고는 일 장여 밖에 있던 바위로 나가떨어졌었다. 거의 사경을 헤매고 있어야 정상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선불 맞은 멧돼지와 같이 다시 달려들고 있었다.

 "멈추지 못할까!"

 한효월은 침중히 소리치면서 일장을 쳐냈다.

 빗속을 뚫고 질주하느라 지친 그였지만 그 일장은 여전히 막강하였다.

 그런데 그 순간, 달려들던 흑영은 한효월의 일장은 본 척도 않고 수중의 귀조를 쓰러져 있는 노인을 향해 집어 던지는 것이 아닌가?

 처음부터 한효월을 공격한 것은 허초였던 것이다.

 귀조가 무서운 기세로 쓰러진 노인을 향해 날아갔다.

 "이런 지독한……!"

 그의 일초가 출기불의한 것이었지만 한효월은 이미 방비하고 있어 흑영이 귀조를 날려 보내는 순간, 지력을 날려 날아가는 귀조를 쳤다.

 카캉!

 방향이 틀어진 귀조는 옆에 있던 바위에 부딪쳐 파란 불꽃을 튕겨내면서 놀랍게도 바위에 절반쯤 박혀들었다. 그것이 노인에게 날아갔으면 어떻게 되었을런지는 불문가지.

 "그, 그를 죽이시…… 오! 신호를 보내면 일당들이 몰려…… 몰려……."

 들릴 듯 말 듯한 음성이 쥐어짜듯이 들려왔다.

 죽은 줄 알았던 노인이 한효월을 향해서 소리치고 있었다. 그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마음뿐, 몸이 말을 듣지 않아서 부들부들 안간힘만 쓰고 있을 뿐이었다.

 펑!

 한효월의 일장이 사정없이 흑영을 날려 보냈다.

 너무 악독한 흑영의 행태에 반감이 생긴 그가 수중에 사정을 두지 않고 진력을 토해 그를 날려 보낸 것이다. 설사 죽지는 않더라도 쉽게 일어날 수는 없을 타격이었다. 과연 흑영은 더 이상 일어나지 못했다.

 "그, 그들을…… 그들을 도와주시오……."

 노인의 꺼져 가는 음성이 빗줄기에 묻히며 띄엄띄엄 들려왔다.

 한효월은 다급히 그에게 다가가서 그를 부축했다.

 "노인장, 말을 마십시오. 지금은……."

 그를 부축한 한효월의 말에 회삼노인이 메마른 쓴웃음을 떠올렸다. 웃음이라기보다는 얼굴이 일그러졌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난 틀렸…… 쿨럭! 그들을 도와주시……."

 그의 입에서 선혈이 쏟아졌다.

 "그들이 누굽니까?"

 그가 얼마 견디지 못할 것임을 알아본 한효월은 더 이상 그를 돌볼 생각을 포기하고 물었다.

 "구대문파…… 장로오(長老)……."

 그의 말에 한효월의 안색이 돌변했다.

 "구대문파의 장로란 말씀입니까?"

 노인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장께서는?"

 "노, 노부…… 점창 고창룡(古蒼龍)……."

 "맙소사! 그럼 노인께서 점창파의 선대 장로이신 창궁일검(蒼穹一劒) 고 선생이란 말입니까?"

 설마 하면서 물었던 한효월이 입을 벌렸다.

 아무리 평소에 침착한 그일지라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창궁일검 고창룡은 점창파에 몇 남지 않은 선대 장로다. 괄괄하고 야심 많았다고 알려졌던 그는 이미 오래전에 은거하여 점창산을 떠나지 않는다고 알려졌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여기에서 이렇게 죽어가고 있다니 어찌 놀라지 않을 것인가.

 하나 그의 말을 의심할 수는 없었다.

 좀 전 그가 공격했던 그 번갯불 같은 검법은 바로 점창검의 정화(精華)인 분광검법(分光劒法)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알아보았기에 그는 중하게 손을 써서 흑영을 물리쳤고 노인을 구했던 것이기도 했었다.

 "화산으로…… 가서…… 전하…… 우리는 모두 놈들에게…… 당해…… 틀렸다고……."

 그의 눈에 빛이 꺼져 갔다.

 "누구에게 당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저들은 누굽니까?"

 다급해진 한효월이 소리쳤다.

 "소, 소협은?"

 그의 외침에 정신을 차린 듯 눈을 꿈벅거리며 한효월을 쳐다본 창궁일검 고창룡이 되물었다. 한효월이 그의 등에 댄 손으로 끊임없이 진기를 주입시켜 주지 않았다면 이렇듯 오래 견딜 수는 없었을 터였다.

 "소생은 한효월이라 합니다."

 "한……?"

 갑자기 고창룡의 꺼져 가던 눈에 경악(驚愕)이 튀어 올랐다.

 그는 누가 잡아당긴 듯 그렇게 몸을 일으키면서 다시 물었다.

 "그, 그럼 독고 맹주의 사제라던 그……?"

 "맞습니다. 제가 바로 그 한효월입니다."

 "맙소사……!"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갑자기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놀라 숨을 거두고 만 것이다.

 실로 괴이하기 이를 데 없는 태도였다.

 '무슨 의미였을까?'

 한효월은 굳은 얼굴로 창궁일검 고창룡의 주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맙소사! 라는 그의 마지막 말이 귀에 생생했다.

 그는 부릅뜬 눈을 감지 못하고 죽었다. 그 눈에 어린 것은 경악과 곤혹스러움이었다. 최소한 한효월이 볼 때는 그러했었다. 단순히 한효월을 만났다는 것만으로 그런 태도를 보인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납득이 가는 태도가 아니었다.

 필유곡절(必有曲折).

 무엇인가 그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이 있는 듯했다.

 하지만 여기 계속 그렇게 있을 수만은 없는 일, 그의 눈을 감긴 한효월은 좀 전에 자신이 쓰러뜨린 흑영을 찾았다.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다급한 김에 과하게 손을 쓴 것 같았다.

 내심 혀를 찬 한효월은 그의 품을 조사해 보았다. 작은 호각(號角) 하나, 그리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은자 부스러기 하나 없는 걸로 보아 단체로 움직이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 호각으로 서로 신호를 하는 것이리라.

 호각을 갈무리한 한효월은 고창룡의 시신을 나무에 기대 두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그의 말투나 행색으로 보아 나머지 일행들이 지금 어떤 처경(處境)에 있는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   *   *

 우르릉…… 쾅! 콰쾅!

 어둠 속에서 쏟아지는 빗줄기는 여전히 거세고, 천둥은 세상을 날려 보낼 듯이 그렇게 요란하다. 이따금 세상을 산산조각으로 갈라내는 저 서릿발 같은 번갯불의 위력만이 그 어둠을 간헐적으로 찢어놓을 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상황에서 창궁일검 고창룡이 말한 그들이 어디 있을지 찾아낸다는 것은 처음부터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단숨에 전신이 폭포 속에 들어간 듯 젖어버린다. 그런 상황에서 어떤 흔적이 남아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처음에는 쫓고 쫓긴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채 10장을 가지 않아 그 종적은 희미해졌고, 조금 더 가자 아예 찾아볼 수가 없었다. 빗줄기가 너무 굵었다. 바닥에서 물방울이 송곳처럼 사방으로 튀어 달아났다. 폭포가 위에서 내리쏟는 것만 같았다.

 혹여 추격자들이라도 만날 수 있을까 하고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그들도 악천후에 추격을 포기한 것인지 보이질 않았다.

 그냥 돌아다녀도 길을 잃을 판인데 그렇게 정처없이 사람을 찾아 헤매다 보니 한효월 스스로가 길을 잃어버렸다.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날이라도 맑아 하늘이 보인다면 길을 짐작이라도 할 수 있을 텐데 그것조차 여의치를 않았다.

 품속의 호각을 만지작거렸다.

 신호를 보내면 저들과 연락이 될 것이다. 그로 인해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것을 감수해야만 할 때인 듯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한효월의 눈앞에 검은 괴물처럼 버티고 선 사찰 하나가 나타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