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四首 화산혈겁(華山血劫)
-죽음이 가득 차다.
피의 강(江), 시신의 산이 만들어지다.
밖으로 나온 진자양의 얼굴은 참혹히 굳어졌다.
화산파의 본전은 가히 용담호혈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공격해 오기 힘든 천험의 지형에다가 무림대회를 위하여 천하에서 몰려든 군웅들로 북적거리는 곳이니, 실제로 어느 누구도 이들 전체를 상대로 싸움을 벌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아니었다.
무인지경으로 밀고 들어오는 무리들이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자들.
그들은 밤을 틈타 기습을 해온 것도 아니었다. 마치 무인지경을 가듯 가로막는 화산과 무림맹의 고수들을 베어넘기면서 정면으로 공격해 들어왔고 그들의 그러한 침공을 무림맹은 막아내지 못했다.
흑포를 펄럭이면서 앞선 십여 명의 괴인을 막아낼 수 없어서였다.
그들의 무공은 고강한 정도를 넘어섰다.
게다가 창검이 별무소용(別無所用). 아무리 찌르고 쳐도 끄떡도 없었다.
그런 괴물들과 싸우면서 어찌 무사할 수가 있을까!
거기에 어떻게 된 셈인지 그들이 화산파의 본전에 이르도록 아무도 알지 못했다. 외곽을 경비하던 고수들 또한 약자가 아니었음에도 경보 하나 울리지 못하고 모두 무너져 버리고 만 것이다.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보고가 없는 외곽 경비가 이상해서 순찰을 돌던 좌백은 비명 소리와 함께 흑포괴인들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비로소 적의 습격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적에게 완벽하게 기선을 제압당했음을 의미했다.
십여 명의 흑포괴인이 무인지경을 가듯 전진해 오고 있는 그 뒤를 흑의인들이 무리 지어 따르고 있었다.
백여 명이 넘는 무리들이었다.
그들의 전진 속도는 신속하기 이를 데 없어서 보고를 받은 진자양이 건곤대전을 나왔을 때, 이미 화산파의 중지(重地)에 도달한 상태.
진자양은 격노했지만 그 자신이 이미 검을 들기도 어려울 지경인 중상을 입었으니 어찌할 것인가.
쨍, 쨍그렁……!
으악…….
고함 소리와 병장기가 부딪는 소리가 잇달아 처절히 귀를 후빈다. 잇달아 뿌려지는 피와 꼬리를 잇는 단말마의 비명 소리.
"멈춰라!"
진자양이 고함쳤다.
그러자 정말 거짓말처럼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밀고 들어오던 흑의인들이 그 소리에 손을 멈추면서 몇 걸음 뒤로 물러선 까닭이다.
"누가 책임자냐?"
진자양이 눈을 부릅뜬 채로 다시 호통 쳐 물었다.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그의 음성은 천둥처럼 일대를 쩌렁쩌렁 울렸다.
진자양의 호통.
그 한마디에 문득 일대에 정적이 찾아들었다. 마치 거짓말처럼.
한순간에 찾아든 그 침묵은 방금까지 벌어지던 아비규환의 참극(慘劇)을 먼 나라의 이야기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그 침묵이 얼마나 무겁게 가슴을 눌러오는지 여기 있는 사람들, 특히 구대문파의 사람들은 절절히 가슴 깊이 느끼고 있었다.
영겁(永劫)인 듯 찰나인 듯한 그 침묵을 깨뜨린, 음산한 웃음소리는 그 침묵이 채 자리 잡기도 전에 들려왔다.
"그것을 알아 무엇 할 것인가?"
차가운 음성.
흑의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일견 무질서하게 서 있는 듯 보이는 흑의인들의 무리 가운데 선 그의 좌우로는 십여 명이 그림자처럼 따르고 있어서 흑의인들의 움직임이 모두 그의 주변으로부터 시작됨을 의미하는 듯 보였다.
다른 사람과 달리 그는 복면을 쓰지 않았다.
바람에 암흑처럼 펄럭이는 검디검은 흑포를 걸치고 눈처럼 흰 머리카락은 묶지 않아 제멋대로 휘날린다. 나이는 오십? 칠십? 얼핏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 백발이 흩날리는 얼굴 가운데 자리한 세모깔의 작은 눈에 어린 빛은 칼날과 같고, 날카로운 매부리코는 종이를 대면 갈라질 것만 같아 그의 성정(性情)을 짐작케 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 사람이야말로 지난번 장원에 나타났던 제천교의 제삼교주이지만 한효월이 없는 이 자리에서 그것을 알아볼 사람은 없다. 당시 그가 말했던 것처럼 천붕(天崩)에 이어 발동되는 지벽계(地闢計)의 완성은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이루어지도록 계획되어 있음을 아는 사람은 더 더욱 없었다.
"귀하가 오늘 일의 책임자인가?"
"그렇다면?"
흑포 백발의 노인은 냉랭히 진자양을 쏘아보았다.
"제천교에서 귀하의 신분은?"
삭풍과도 같은 냉랭한 웃음소리가 흑포노인에게서 흘러나왔다.
"시간을 끌어보겠다는 건가?"
그는 미간을 찡그리더니 머리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시간을 끌면 체내에 스며든 식공지독(蝕功之毒)의 기운이 더 깊어질 텐데?"
그 말에 진자양과 군웅들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그럼 정말 제천교가 독을 썼단 말인가? 어떻게……."
진자양의 좌우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제아무리 고강한 내공을 쌓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일단 식공지독에 중독이 되면 한 시진이면 모든 내공을 잃게 되지. 내가고수가 내공을 잃게 되면 보통 사람보다 더 무기력한 건 잘 알 텐데 그래도 반항을 해볼 작정인가? 아! 그러고 보니 예외가 있긴 했었다. 건곤무적 독고해는 식공지독에 중독된 다음에도…… 하루를 버티더군. 그는 적이면서도 정말 존경받을 만한 자였지. 그러나 그가 그처럼 신명(神明)을 다해 지키려던 자들로부터 배신을 당해 죽어가야 했으니 어찌 구천지하에서라도 눈을 감을 수 있겠는가? 흐흐흐흐……."
그의 말에 군웅들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아직까지도 대전 안에서 일어난 일은 긴가민가하는 그들이었기에.
그런데…….
문득 세찬 바람 한줄기가 일어나 화산파가 자리한 연화봉을 휩쓴다. 흙먼지가 하늘을 가리며 일었다. 죽은 사람들의 몸에서 흐른 핏빛 내음이 코를 찌르며 사방으로 아우성을 치는 듯했다.
참혹한 전율이 그 가운데 선 군웅들의 전신을 온통 뒤흔든다.
바깥에 있던 사람들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해서 어리둥절한 빛이지만 그 말 한마디로써 승패는 이미 갈린 것과 다름이 없었다.
"배신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앞쪽에 서 있던 좌백이 눈을 부릅뜨고서 소리쳤다.
맹주 대행이었고, 또한 새로이 맹주로 선출될 것이 확실한 진자양이 있는 자리였기에 그가 나설 자리는 아니었다. 좌백 또한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일은 다른 사안(事案)이 아니라 이미 세상에 없는 사부에 관한 일이었다.
그 사부가 배신을 당해 죽었다니?
그냥 넘길 수가 없는 일인 것이다.
"독고해의 제자인가? 하긴…… 아직 모르니 저자들과 같이 있는 것이겠지?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는 게 어떤가? 진자양! 답을 해보라."
흑포노인은 차갑게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날이 선 비수와 같이 진자양의 가슴을 찔렀다.
그때였다.
"그 답은 내가 하지!"
냉랭한 음성이 들려왔다.
봉설란이 안에서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녀가 나타나자 웅성거림이 일었다.
"부인! 지금 상황은……."
"내가 입을 열면 분열이 일어나 구대문파가 제천교에 항거하지 못하게 될 것이고, 자멸(自滅)이라도 한다는 거겠지. 오호호호……."
진자양의 말에 봉설란이 날카롭게 웃었다.
얼음 가루를 뿌리듯 웃음을 터뜨리던 그녀는 돌연 웃음을 뚝 멈추었다.
그리고 주위를 돌아보면서 하는 말.
"맞아! 그게 바로 내가 바라는 바야. 구대문파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것! 겉으로만 정인군자인 척하는 인면수심의 간적(奸賊)들이 모두 이 자리에서 피를 뿌리면서 죽어 넘어지는 걸 보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
구대문파 수뇌부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좌백을 비롯한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의혹의 빛이 짙게 드리워졌다.
"사모님."
그녀의 뒤에서 침중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녀와 함께 대전 안에서 나온 감천형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저들이 다 죽는다면 우리들도 무사할 수 없습니다."
"죽음이 겁나느냐?"
봉설란이 차갑게 코웃음 쳤다.
"그건……."
감천형은 말이 막혔다. 죽음이 겁나다니…….
그녀의 다그침에 감천형이 입을 열기도 전에 봉설란이 미친 듯이 웃었다.
"나는 아니다! 소림사가 불타고, 무당파의 초석(礎石)이 뽑혀 그 자리에 잡초가 무성한 것을 본다면 죽어서라도 눈을 감을 수 있어. 내가 이 자리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복수만 할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좋다."
그녀의 말에는 광기(狂氣)마저 어린 듯했다.
일부함원(一婦含怨) 유월비상(六月飛霜).
여인이 한을 품으면 유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섬뜩하게 모든 사람들의 뇌리를 쳤다.
"후우……."
감천형도 더 이상 입을 열 수가 없다.
이 마당에 무슨 말을 어떻게 더 할 수 있을 것인가.
차라리 명예롭게 죽는 것이 옳을 듯싶었다.
이 마당에 살기 위해서 저들과 손을 잡는 것 또한 명분이 없었다. 그녀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 일은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설혹 그렇게 살아난다 할지라도 사부를 볼 낯이 없었다.
문득 그의 뇌리에 한효월의 모습이 스쳐 갔다.
'사숙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가 온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 그의 모습이 떠오른 것은 왜일까?
흑포노인의 음산한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굳이 시간을 끌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반항을 해봐야 몰살일 뿐이다. 살고자 한다면 이쪽으로 오너라. 그러면 누구든 살려주마. 그렇지 않은 자들은 모두 남김없이 죽이겠다."
그의 음성은 삭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가 진자양의 멈추라는 소리에 공격을 멈춘 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그 말을 하기 위한 까닭이었다.
그는 진자양에게 항복을 종용하고 있는 것이다.
진자양은 굳은 얼굴로 그를 꾸짖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음이 두려워 항복을 할 사람이 있을 것 같은가! 아무리 중독이 되었다 한들, 우리 모두가 마지막 힘을 다한다면…… 최악의 경우에도 너희들과 같이 죽을 수는 있다."
그의 말은 비장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리고 군웅들에게 용기를 주는 말이기도 하였다.
하나 흑포노인은 코웃음 쳤다.
"그런가? 한번 그래 보지? 여기 있는 자들이 몰살하면 그 자체로 구대문파는 아마 백 년은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게다. 잘 봐줘도 삼사십 년 간은 숨을 죽이고 있어야 하겠지. 아마 그중에는 다시 일어서지 못할 곳이 있을 것이고…… 그러나 여기 있는 우리 교도들은 다 죽어도 전혀 아무런 문제가 없다. 본 교의 고수들은 구름과 같으니까. 더 확실한 것은……."
그의 눈에 웃음기가 돌았다.
"너희들의 지금 전력으로써는 그게 어림도 없는 일이라는 점이지."
흑포노인의 말은 광오(狂傲)하기 이를 데 없었다.
광오를 넘어 광망(狂妄)하기까지 했다. 이곳에 모인 구대문파의 고수들은 그야말로 구대문파의 정예(精銳)라 할 수 있었다. 그들 모두가 중독되었다 할지라도 그들이 한데 모여 있는 이상, 어느 누구도 그들을 얕잡아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전력으로 어림도 없다?
뜻밖의 일로 침체된 구대문파의 고수들, 그들의 눈에서 분노의 빛이 일었다.
그때.
"시간이 얼마나 남았나?"
문득 흑포노인이 물었다.
"반 시진 이내입니다."
뒤이어 들려온 대답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한 곳에서 들려왔다.
화산우사 육기가 진자양의 뒤에서 나서며 대답을 한 것이다.
악연실색(愕然失色), 모든 사람들이 입을 벌리고 진자양마저도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아직도 반 시진이나 남았단 말인가?"
흑포노인이 칼날 같은 음성으로 그를 꾸짖었다.
화산우사 육기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아시다시피 차질이 있었습니다. 뜻밖에도 수원(水源)에 독을 푸는 일이 저지되어 건곤대전에다 향을 피우면서 손을 써야 했기에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습니다. 그러나……."
"사형! 대체 무슨 짓입니까? 이게……."
진자양이 참다못해서 발을 구르며 노호를 터뜨렸다.
육기는 나뭇등걸처럼 굳은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어차피 끝난 일일세. 누구도 제천교의 교세를 막을 순 없어. 시무지자준걸(時務知者俊傑)이라 하지 않던가? 포기하게. 어차피 자네도 천하를 움켜쥐기 위해서 무림맹주가 되려고 한 게 아닌가? 투항한다면 제천교에서도 섭하게 대하지 않을 걸세."
"그……!"
너무 기가 막힌지 진자양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왁! 하는 소리와 함께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냈다.
그가 충격으로 피를 토하는 것을 본 흑포노인은 차갑게 웃었다.
"반 시진이 남았다고 대항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다. 싸움을 반 시진 할 수 있다는 소리는 아니니까! 무리하게 힘을 쓰면 일각도 지탱하기 힘든 것이 바로 식혼향(蝕魂香)이다. 무색 무취한 그것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천금을 들여야 했지……."
문득 그가 눈을 부릅떴다.
"이제 마지막 기회를 주마. 셋을 셀 동안 항복하지 않는 자는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나……."
그 순간, 한 사람이 고함치면서 화산우사 육기에게 달려들었다.
"이 더러운 배신자!"
화산우사 육기의 배신은 참으로 뜻밖이었다.
평소 누구보다 명리(名利)에 담백하다고 소문난 그였다. 그렇기에 장문인의 자리까지 사제인 진자양에게 양보하고 출가를 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그가 배신을, 더더구나 군웅들에게 하독(下毒)을 할 것을 상상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실상 그 과정은 더욱 복잡하였었다.
화산파에서 쓰는 물[水源]에다 독을 풀려던 계획이 차질을 빚자, 화산우사 육기는 다시금 군웅들이 밤에 마실 찻물에다 독을 타야 했다. 그 독은 미량인데다 무미 무취하여 느낄 수 없는 대신 효력도 미미하였다. 그러나 일단 건곤대전에 피운 식혼향과 결합하면 식공지독(蝕功之毒)이란, 무림인에게 가장 무서운 독이 되는 것이다.
중국인에게 있어 찻물이란 일상생활과 같다.
더구나 화산파에서 준비한 찻물에 독이 들어 있을 것임을 상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설혹 그 방면으로 뛰어난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극소량이 첨가되었으니 다향(茶香)에 묻혀 누구도 느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설사 찻물을 마시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식혼향을 맡게 되면 서서히 공력이 감퇴되기 마련이다.
건곤대전 안은 무거운 분위기로 인해서 피워놓은 향이 그런 무서운 것임을 누구도 느끼지 못한 것은 어쩌면 무림맹 자체로서는 불행한 일이라 할 수 있을 터였다.
젊은이들은 명예를 중히 여긴다.
이제부터 무림을 영도하리라는 기대에 차 있던 화산파의 제자들은 더욱 그러했다. 그 자부심이 오늘 이 자리에서 산산조각으로 깨어졌다. 그것은 좌절로, 이내 절망으로 또 격렬한 분노로 바뀌었다.
그 대상은 자연히 화산우사 육기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화산십이룡 중의 일수탈혼 경정추가 참지 못하고 그를 공격했다.
별호 그대로 경정추가 수련한 매화검결은 날카롭기 이를 데 없었다. 화산칠수는 20세 전후의 후기지수. 화산십이룡은 이미 장년이 된 사람들이니 그 지닌 바 공력은 당연히 장로들이라도 무시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감히 네놈이 존장(尊丈)에게 검을 겨누느냐?"
하지만 믿을 수 없게도 화산우사 육기가 소매를 떨치자 그 한 수에 경정추는 검을 놓치고 피를 토하면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존장이라고?"
"이 간악한 자…… 당신 같은 자를 사백이라고 모셨다니!"
분분한 고함 소리와 함께 칠수와 십이룡 중 서너 명이 참지 못하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칠수 중 하나인 진가기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경정추를 부축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평소 그처럼 친근하게 따랐던 사백이었기에…… 어릴 때부터 친딸과 같이 자신을 귀여워해 주었던 그였는데, 그런 그가 배신을 했다는 것을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후에 벌어진 일은 더욱 참혹했다.
"크윽! 네, 네가……?"
화산십이룡 중 셋째인 일자검(一字劒) 군사량(君史亮)은 자신의 가슴을 뚫고 나온 검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 검을 쥔 손은 그와 같이 화산에서 자란 화산십이룡 중 일곱째, 섬전검(閃電劒) 방전(房展)이었던 것이다.
"나, 나는……."
섬전검 방전은 일자검 군사량을 찌른 검을 놓고 주춤 물러났다.
일그러진 그의 얼굴.
"사, 사제…… 네가 어떻게?"
일자검 군사량은 비틀거리면서도 믿기지 않는 듯 전신을 떨었다.
"용서하시오. 사형…… 어쩔 수가 없었소……."
섬전검 방전은 일그러진 얼굴로 주춤거리다가 이를 악물고서 군사량의 등을 찌른 검을 뽑아냈다.
"우악!"
군사량이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그것은 시작이라 할 수 있었다.
십이룡 중 또 하나가 등 뒤에서 동료를 공격했고 몸을 날렸던 다섯 중 둘의 배신으로 화산우사를 공격하는 듯 보였던 그 순간적인 공세는 찰나간에 세 명이 피를 뿌리고 쓰러지는 것으로 끝이 났다.
"이럴 수가……."
진자양은 너무도 어이없는 사태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것은 다른 군웅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이러한 사태는 실로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기에.
"으핫하하…… 이제 알겠나? 왜 너희들의 힘으로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했는지? 너희들은 중독되었을 뿐만 아니라, 언제 자신의 동료에게 배신당할지 모르는 신세다. 그런 주제에 감히 본 교와 맞설 수 있을 것 같은가? 하긴…… 너희들이 건곤무적 독고해를 암해할 때부터 배신은 시작되었으니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
흑포노인은 뒷짐을 진 채로 앙천대소했다.
그 웃음소리는 처절한 비웃음으로 군웅들의 가슴을 찔렀다.
웅성거림이 일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거리를 두는 모습이 눈에 드러났다. 서로에게 대한 경계심, 이미 분열이 일기 시작하는 것이다.
'대체 저게 무슨 소립니까?'
좌백이 참지 못하고 감천형에게 전음을 보내 물었다.
이 마당에 무슨 말을 어떻게 할 것인가.
감천형은 무거운 얼굴로 사제 좌백을 바라보면서 한숨만 내쉬었다.
주위가 어두워지고 있었다.
하늘에 구름이 몰려들고 있다. 검은 구름이다. 끝도 보이지 않는 어둠의 그늘이 그들을 뒤덮으려고 달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 어둠의 그늘을 뚫고서 흑포노인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둘…… 마지막 기회! 죽고 싶다면 모두 죽여줄 수 있다."
좀 전까지 그처럼 찬란하던 하늘이다.
곧 중천에 뜰 햇살은 무림맹의 내일을 상징하듯 그렇게 밝았고, 따스한 양광(陽光)은 사람의 마음을 푸근하게 채워주기에 족하였었다.
그러나 상황은 돌변했다.
봉설란이 나타나면서 그들의 자랑인 긍지가 사라졌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제천교의 습래(襲來)로 인하여 여기 모인 군웅들은 이제 죽음의 그림자가 자신에게 손을 벌리고 있음을 느껴야만 했다. 부정하고 싶지만 누구도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흑포노인의 위협에 웅성거림이 일었고, 마침내 몇 명이 주춤거리면서 반대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많은 사람이 그쪽으로 옮아가지는 않았다. 죽을 때 죽더라도 중인환시(衆人環視)리에 비겁함을 보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상했던 것처럼 격렬한 비난이 그 뒤를 따랐다.
"관을 봐야만 눈물을 흘릴 모양이로군. 그래…… 좋아, 모두 죽여주지."
상황을 짐작한 흑포노인은 차갑게 코웃음 쳤다.
"쳐라!"
뒤를 이어 그의 고함 소리가 살기를 머금고서 터져 나왔다.
그의 앞쪽에 유령처럼 우뚝 서 있던 흑포인들이 가장 먼저 훌쩍 몸을 날렸다. 흑포를 펄럭이며…….
울분에 차 있던 군웅들이다.
달려오는 적을 보고 물러설 그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적은 너무 강했다.
처절한 비명이 군웅들에게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감천형은 그들의 움직임을 보자 그들이 바로 조운촌에서 만났던 그 흑포인들임을 깨달았다. 강령루의 고수라는, 마왕철골신을 연수하여 도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그 흑포괴인들.
'어렵게 되겠구나…….'
감천형은 암암리에 길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들의 위력이 어떠한지는 누구보다 그가 잘 알고 있었기에.
"으악!"
"으아아……."
그들의 진격이 시작되자 그 앞을 가로막았던 무사들에게서는 기다렸다는 듯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모습은 흡사 노도(怒濤)에 방죽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간 그처럼 피나게 수련했던 무공이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상대가 이렇게 피하면 이렇게, 라는 가정 하에 무공을 수련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상대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 피하지 못한 상대를 치면서 승부가 나게 된다. 그러나 상대가 전혀 도검을 두려워하지 않고 달려들게 되면 그 모든 의미를 상실케 되는 것이다.
진자양과 다른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이 서로를 마주 보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그들의 손짓에 따라 각파의 정예고수들이 일제히 흑포괴인들을 향해서 몸을 날렸다. 원래 제천교의 기습은 예상된 일이므로 진자양을 비롯한 구파 장문인들은 이미 대비를 하고 있었다.
진자양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각파의 장문인들과 회동하면서 이미 그런 상황에서의 인원 배치에 대한 의논까지 해둔 상태였었다. 그러나 일이 이렇게까지 참혹하게 될 줄은 그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와 청성파의 장문인은 이미 적과 동수(同手)하기 힘든 중상에, 소림사의 장문인은 사경(死境)을 헤매니…….
사방에서 비명이 터지고, 시작된 싸움은 이내 처절의 극을 달렸다.
"검을!"
진자양은 자신의 곁에서 떠나지 않는 화산십이룡 두 명 중, 하나인 장수인(莊守仁)에게 손을 내밀었다.
"장문인, 지금 상세가……."
쓴웃음이 진자양의 창백한 얼굴에 떠올랐다.
"지금이 내 상세를 돌보고 있을 만한 상황으로 보이느냐?"
"장문인……."
그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금방 울음이라도 터뜨릴 듯한 표정. 실제로 감정이 풍부한 장수인은 금세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을 잡으며 진자양은 우뚝 섰다.
그 눈길이 향한 곳은 그가 존경해 마지않던 사형, 화산우사 육기.
그의 눈길을 느낀 화산우사 육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형……."
진자양은 그를 불렀다.
"이것이 이 하늘 아래에서 당신을 사형이라고 부르는 마지막 부름이오."
말과 함께 그는 검을 육기에게로 겨누었다.
"사문을 욕되게 하는 것도 모자라, 천하무림에 죄를 짓다니…… 이 진자양, 마지막 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당신을 용서할 수 없소!"
그의 준열한 꾸짖음에 화산우사 육기의 얼굴이 실룩거렸다. 늘 청수해 보였던 그 얼굴은 보기 싫게 일그러져 있었다.
"크크크…… 얼마든지! 사부는 늘 너를 편애했었지. 잠을 자지 않고 노력해도 너는 늘 나를 앞서 갔다. 너는 아느냐? 장문제자였던 내가 견디지 못하고 출가를 하면서 네게 장문의 지위를 양보해야 했던 심정, 내가 암중에 뿌렸던 그 피눈물을 짐작이라도 할 수 있느냐? 사부가 편애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장문인이 되었을 것이며,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격앙된 감정을 누르지 못하고 턱을 떨었다.
"그것을 말이라고 하는가!"
진자양은 준엄히 소리치면서 그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딛었다.
검기가 찌를 듯이 일었다.
"그 몸으로 나를 상대하겠다는 것이냐?"
화산우사 육기가 냉소를 터뜨렸다.
진자양은 대꾸하지 않고 다시 한 걸음을 다가갔다.
육기는 그의 태도에서 필살(必殺)의 기세를 읽었다. 설사 진자양 자신이 죽는다 할지라도 반드시 육기를 죽이고야 말겠다는…….
문득 그의 눈에 두려움이 일었다.
사방은 삽시간에 아비규환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검과 도, 장풍, 권경(拳勁)이 난무하면서 피가 튀고 단말마의 비명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져 나왔다.
쓰러지는 것은 대부분 구대문파의 고수들. 중독이 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대개 건곤대전에 참가할 자격이 없었거나 외부에 있었던 사람들이라 그 능력은 자연히 건곤대전에 자리했던 고수들보다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거기에 이따금 정체를 드러내는 내부 반란자들이 가세하니 제대로 된 싸움이 될 리가 없다. 이미 시작하기 전에 지고 들어간 상태에 다름이 아니다. 그 모습은 지난날 맹주부가 속수무책으로 유린되던 참혹함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주위를 일별한 감천형이 좌백에게 말했다.
"사제, 사모님을 모시고 이곳을 떠나거라."
"사형은?"
"그냥 가려고 한들, 저자들이 놔주겠느냐?"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어차피……."
"내가 뒤를 봐주마. 사모님을 이곳에 계시게 할 수는 없다."
좌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부상에다 중독까지 당한 사형을 두고 그냥 갈 수는 없습니다."
"사매까지 혼절한 상태다. 사모님이나 사매가 잘못된다면 어찌 비명에 가신 사부님을 뵐 낯이 있겠느냐? 고집을 부릴 때가 아니다."
말과 함께 그는 옆에 있던 청풍노인 사마무애를 보았다.
"장로께서 사매를 돌봐주십시오."
청풍노인이 굳은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이미 대세가 기운 듯하오. 남아 싸운다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 같으니 차라리 뚫고 나가는 것이 어떨는지? 노부의 짐작이 맞다면 적의 수괴는 결코 만만치 않은 자라서 이대로는……."
"저 흑포노인을 아신단 말입니까?"
"아주 오래전에 한번 얼핏 본 것 같은데, 명확하질 않소. 만약 기억이 맞다면 저자는 바로 명교의 사대천왕(四大天王) 가운데 하나인 지국천왕(持國天王)일 게요."
"명…… 교의 사대천왕이란 말입니까?"
감천형의 안색이 돌변했다.
"십중팔구는……."
청풍노인이 말끝을 흐렸다.
"그럴 리가? 명교의 사대천왕은 이미 오래전에 다 죽었을 텐데……."
"죽었다고 알려진 자가 나타났다는 것은 더 무서운 일이지. 그가 정말 사대천왕 가운데 하나라면 제천교는 명교의 후신일런지도 모르오. 어쩌면 오늘의 이 난국은 이제 시작인 것도 같고……. 후우……."
청풍노인은 길게 한숨을 쉬면서 머리를 저었다.
감천형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정말 그렇다면 더욱 간단하지 않은 일임을 너무도 잘 알기에.
명교.
그 명칭을 백련교라 이름하는 이 단체는 현세 미륵불(彌勒佛) 신앙을 모태로 삼는다.
남송(南宋) 시대 고종의 소흥연간 초에 소주(蘇州) 연상원(延祥院)의 승려인 모자원(茅子元)이 창립한 백련채(白蓮菜)라는 교단(敎團)으로 시작된 이 백련교는 이후 원, 명을 거쳐 청 시대에까지 끊임없이 민중 속에서 숨 쉬었지만 늘 어둠 속에서 탄압을 받으면서 살았다. 처음에는 아미타신앙(阿彌陀信仰)이었으나, 원(元)나라 말기부터 미륵불(彌勒佛)의 하생(下生)에 따라 이 세상에 번영이 찾아온다는 미륵교와 융합하여, 미륵신앙을 내세웠고 명태조인 주원장은 바로 이 백련교에 힘입어 명을 세울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그 힘을 익히 아는 주원장은 황제가 된 다음에, 전력을 다해 백련교를 탄압하여 그들을 붕괴시켰다. 주씨의 황실을 공고히 하기 위해 수 없는 옥사(獄事)를 일으켰던 그였으니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배신을 당한 백련교에서 그냥 있을 리 만무.
여러 번의 충돌이 있었지만 결국 강력한 황제가 된 주원장을 당할 수는 없어 그 주력은 세상에서 사라진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쩔 수 없군요. 우선 뚫고 나갑시다. 사제, 사매를 맡아라."
감천형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던 봉설란에게 다가가 뜻을 전했다.
하지만 봉설란은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저들이 모두 피를 뿌리며 쓰러진 것을 봐야만 눈을 감으리라. 너희들 먼저 가거라. 경아를 잘 돌봐주고……. 언제라도 내 몸 하나는 지킬 수 있을 테니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녀는 늘 대제자인 감천형에게 말을 놓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렇듯 하대를 함은 그녀의 결심이 그만큼 굳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임을 감천형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사모님!"
"시간이 없다. 이미 저들이 패색을 드러냈다."
과연이었다.
일방적이던 싸움은 구대문파의 정예고수들이 달려나가 그 흑포괴인들을 막기 시작하면서 잠시 밀고 밀리는 접전이 이루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들은 독기가 발작하기 시작하는 듯 이내 힘을 잃고 밀리기 시작하였고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잦아들었던 비명이 다시금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왔다.
사방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정말 너무도 어이없이 구대문파의 연합 세력이, 천하의 그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을 그 엄청난 전력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비명이 하늘을 찔렀다.
구대문파의 힘은 결코 간단치 않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많은 문파 중에서 유독 구대문파라고 불리게 된 것은 가장 큰 수라는 구(九)라는 숫자에다 맞춘 점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그들이 가장 강성한 문파이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도 구대문파에서 누락되지 않고 그 강성함이 유지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시련을 이기고 그 자리에 서야만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그것이 간단하게 될 리는 만무.
그렇기에 그 수많은 세월이 흐르면서도 그들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신화(神話)라고 해도 좋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그 신화는 무참히 무너지고 있었다.
제아무리 구대문파라 할지라도, 그 힘이라고 할지라도 그 정예들이 모여 있음에도 중독이 된 상태에서는 힘을 쓸 수가 없었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공력의 감퇴는 더욱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사방에서 비명이 꼬리를 물고 피가 흘러 내를 이루었다.
후일 화산혈겁(華山血劫)이라 불린 그 참극(慘劇)은 믿기지 않게도 싸움이 시작된 지 일각이 지나지 않았을 때부터였다.
그 결정적인 역할은 당연히 앞장 선 강령루의 흑포인들.
그들을 막아선 구대문파의 고수들은 능히 그들을 막아낼 수 있는 능력자들이었다. 하지만 중독으로 인해 대부분의 공력이 감퇴된 지금에 이르러서는 역불급(力不及)이란 말이 그들의 뇌리에 선명했고, 그들의 일각이 무너지자 그 붕괴 속도는 걷잡을 수가 없었다.
앞장 선 그들 외에도 제천교도들의 무공은 고강했다. 뿐만 아니라 이따금 구대문파의 진영 내에서 배신자들이 나타나 손을 쓰는 통에 자중지란이 일어나 손도 제대로 쓸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무너지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할 터이다.
사부가 쓰러지고, 사형이 쓰러지고, 동료가 쓰러짐을 보면서 구대문파의 고수들은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크으으…… 아직도 이런 정도라니?"
화산우사 육기는 가슴을 움켜쥐고서 비틀거렸다.
그의 가슴에 박힌 것은 서릿발 같은 검기를 뿌리는 한 자루의 보검. 화산파의 장문인을 상징하는 그 검, 한매신검을 쥔 사람은 바로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하던 육합무적검 진자양이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의 사형이었던 자를 단죄(斷罪)한 그의 얼굴은 납덩이와 같았다. 그의 얼굴이 창백한 것은 그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오는 핏물 때문만은 아니었다.
"후일…… 사형에게 잘못한 점이 있다면 지하에서 사죄하리다. 하나 지금은 죽어가는 당신의 사문에게 사죄하시오."
진자양은 이를 악물고서 화산우사 육기의 가슴에 박힌 검을 뽑았다.
피분수가 솟구쳤다.
진자양의 검세는 놀라웠다.
거기에 더해 그의 기도(氣度)는 너무도 장엄(莊嚴)하기조차 하여 육기와 같이 배신했던 섬전검 방전 등은 감히 달려들 엄두도 내지 못했다. 어쩌면 달려들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몰랐다. 사형제들을 공격할 때부터 그들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으니까.
진자양은 선혈을 뿜어내면서 쓰러지는 사형 육기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격정(激情)이 그의 가슴을 온통 헤집는다.
"미, 미안…… 하……!"
땅바닥에 쓰러진 육기가 피에 젖은 손을 버둥거리며 무엇인가를 말하기 위해서 버둥거렸다. 그 눈에 서린 것은 뜻밖에도 원한이나 증오가 아니라 어떤 절실한 안타까움.
하지만 진자양은 그의 다음 말, 그의 마지막 말을 듣고 있을 여가가 없었다.
흑포노인, 오늘 이 자리에 나타난 제천교를 이끌고 있는 그가 살을 에이는 북풍과도 같이 무서운 기세로 그를 향해 날아든 까닭이다. 거리가 일 장이나 떨어져 있음에도 숨 막히는 기세가 엄습한다.
그것을 느낀 듯 진자양의 곁에서 떠나지 않고 있던 화산십이룡 중 둘이 일제히 고함치면서 그에게 덤벼들었다.
"물러나거라!"
그것을 본 진자양이 소리쳤다.
그러나 그 말이 그의 입을 떠나는 순간에 '으악!' 하는 참담한 비명과 함께 그가 심혈을 기울여 키운 화산십이룡 중의 둘은 허무하게 튕겨져 나갔다.
한순간에 그들을 날려 보낸 흑포노인은 진자양이 소리치는 것과 거의 동시에 그의 앞에 당도하고 있었고, 그 손은 검은빛 너울과도 같은 소맷자락을 펄럭이면서 그를 눌러오고 있었다. 가공할 위세가 무서운 압력으로 진자양의 전신을 짓눌렀다.
웬만한 사람이었다면 스스로 서 있기도 어려운 상태가 지금의 진자양이다. 그 상태로써는 견디기 어려운 힘이었다.
누구도 그를 구할 여력이 없었다.
화산파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었기에.
진자양은 입술을 물었다.
그의 얼굴이 자줏빛으로 물들며 검을 앞으로 찔러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는 검세.
하지만 그 움직임에 따라 그를 향해 쏟아지던 가공할 힘이 비단 폭을 가위로 찢어낸 듯이 갈라졌다.
화산 육합검법 중의 혼돈초개(混沌初開)의 일초.
흑포노인의 눈에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아직도? 라는 빛이 역력했다.
그가 손을 오무렸다 펴면서 장세를 비틀자 강력한 와류(渦流)가 일었다.
진자양의 검세가 그 힘에 휘말려 파도처럼 흔들렸다.
평소라면 진자양은 혼돈초개의 일초로써 상대의 힘을 끊고 다음 순간에 기미육합(氣彌六合)을 펼쳐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었을 터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와아악!"
진자양이 피분수를 뿜어내면서 튕겨져 나갔다.
상대가 힘으로 눌러오자 더 이상 견디지를 못한 것이다.
화산을 상징하던 한매신검이 무섭게 진동을 일으키면서 뒤채다가 진자양의 손을 벗어나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이제 누구도 그를 돌볼 수가 없었다.
흑포노인은 그를 날려 보낸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를 아예 죽이려는 것인지 제압하려는 것인지 덮쳐 가던 기세를 조금도 죽이지 않고 진자양을 그대로 덮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