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首 도탄지고(塗炭之苦)
-산세를 조망하다.
액겁(厄劫)을 지나니 갈등은 더욱 깊어지다.
어둠이 화산을 찾아들었다.
검은 구름이 점점이 하늘에 떠 있고 눈길 아래에서는 아직도 검은 연기가 풀어헤친 머리카락처럼 어둠과 함께 피어 오르고 있었다.
불길을 거의 잡았음에도 아직 불씨는 남아 있는 듯했다.
잠시 바라본 아래의 참혹한 모습.
한효월은 눈길을 돌려 다시 산세를 굽어보았다.
어둠이 사방으로 빠르게 달리고 있어 산세를 살피기 용이하지 않았다.
문득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사숙."
좌백이었다.
"황 방주께서 찾고 계십니다. 다른 분들도 취운궁(翠雲宮)에서 기다리고 계시는데……."
좌백이 굳은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그의 얼굴은 아직 창백했다. 체내의 중독이 해소된 것도 아니고 내상이 회복된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죽을 만큼 상처를 입은 것이 아닌지라 이렇듯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 무림맹이 어떤 처경에 있는지를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한효월의 기지로 일단 상황은 수습했지만 물과 불 같은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있는 판이다.
중지를 모으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논의가 뒤따라야 하지만 사람들을 소개(疏開)하고 불을 끄기에도 급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화산파 경내의 화재가 산불로 번지지 않은 점이었다.
그런 마당에 한효월은 한가롭게 갑자기 산 위로 올라온 것이다.
그리곤 이 와중에 산세를 감상하듯 어슬렁거리고 있으니 사람들이 괴이할 수밖에.
다른 사람이라면 한심해 보였겠지만 그 대상이 한효월이다 보니 괴이함보다는 대체 무슨 까닭인지 궁금하기만 했다.
그런데 좌백의 말에 대한 한효월의 대답.
"화산은 전체가 연꽃처럼 생겼다 하더니 과연이군."
"……?"
얼떨떨한 빛이 되어 좌백은 한효월을 쳐다보았다.
"화산파가 연화를 표기로 삼고, 연화봉을 본거로 삼은 것도 의미가 있었던 것 같군. 이곳은 태조(太祖), 중조(中祖), 근조(近祖)가
주산(主山)을 에워싸고 내외 청룡(靑龍)과 내외 백호(白虎)가 좌우를 막고 있으니 세간에서 말하는 보기 드문 명당(明堂). 후전인
취운궁을 현무정(玄武頂)에 두어 전체를 내외 명당으로 삼았으니 여기에 화산파를 자리케 한 화산 조사가 보통 사람이 아니었음은
이것만 봐도 충분히 알 만하군……."
"……?"
좌백의 얼굴이 더욱 괴이하게 변했다.
그 방면에 별다른 지식은 없지만 그것이 풍수에 관한 이야기인 것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이 와중에 왜 난데없는 풍수(風水)타령이란 말인가?
그런 그의 기색을 눈치 챈 듯 한효월은 미미하게 웃음 지었다. 그리곤.
"이쪽으로 사람이 오를 수 있을까?"
그는 한쪽 산봉을 가리켰다.
어둠이 덮고 있는 산중, 그 어둠의 자락을 뚫고서 올연히 솟구친 산봉들은 어디를 보아도 겹겹이 늘어서 있다.
그렇지 않다면 화산을 일러 험악하다 하지 않을 것이었다.
한효월이 가리킨 곳은 그중 더욱 험악하여 깎아지른 듯했다.
"일반인이라면 몰라도 경공이 출중한 고수라면 가능하겠지요."
"가장 쉽게 올라갈 길을 찾을 수 있겠나? 아니, 저 뒤쪽에서 위로 올라가려면 말이야."
한효월의 물음에 좌백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왜 그러시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한효월이 그를 돌아보았다.
"명당은 주변의 기운이 모이는 곳이지. 앞서 말한 것들이 다 사에 포함되니 만약 누군가가 그 점을 이용한다면 뜻밖의 소득을 올릴
수 있을런지도……."
"이용이라면?"
좌백은 여전히 납득이 가지 않는 듯했다.
"가면서 이야기하지. 황 방주에게 사람을 좀 빌려야 할 것 같으니."
황엽은 굳은 표정으로 한효월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침착한 사람인지라 늘 얼굴이 평온한 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태의 심각함을 말하듯 안색이 침중했다.
그는 방중의 장로와 당주 등 개방의 고수 몇 사람과 바깥에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가 한효월을 맞았다.
화산파의 후전인 취운궁은 그리 넓지 않아 부상자들을 수용하기에도 모자랐다.
어쩔 수 없이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은 밖에서 돌 수밖에 없었다.
그가 원한다면 방 하나를 얻는 건 문제가 아니겠지만 그런 겉치레에 연연할 그가 아니었다.
"생각보다 사태가 엄중하오."
한효월을 맞은 황엽의 일성이다.
"역시 중독을 면하지 못했습니까?"
"그렇소. 역시…… 한 공자는 이미 짐작을 하고 있었구료."
"개방의 고수들이나 보구회의 고수들이라면 그리 큰 걱정은 없을 겁니다. 뒤에 와서 홍화독장의 독기에 깊이 중독된 것은 아닐
터이니 조리하면서 약을 쓰면 해독이 가능하겠지요."
"그럼 나머지 무림맹의 고수들은?"
황엽의 되물음에 한효월의 안색이 무거워졌다.
"제 생각이 틀리길 바랍니다만, 처음 중독과 홍화독장이 어울리면서 중독이 골수에 스며들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만약 그렇다면
해독이 쉽지 않을 겁니다."
"으음……."
황엽의 입에서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실로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구대문파의 정예들이 모두 힘을 쓰지 못하게 된다면…….
"한 공자가 그것을 해독하실 수 있겠소?"
"단순히 홍화장독이라면 어떻게 손을 써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만약 복합적인 것이라면 쉽지 않을 겁니다. 가능하다면
방주께서 그 방면의 대가(大家)를 수배해 두시는 게 좋겠습니다."
"으음……."
한효월의 대답에 황엽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 방의 장로 한 분이 중독을 살펴보고 있으니 그 뒤에 상황을 다시 논의해 봅시다. 그리고……."
문득 그는 정색을 했다.
"구대문파에서 독고 맹주를 모해하고, 제천교를 만들었다는 것이 무슨 소리요? 한 공자도 알고 있는 일이오?"
"방주께서도 전혀 몰랐던 일입니까?"
한효월의 반문에 황엽의 얼굴이 납빛이 되었다.
그 의미는 너무도 컸기에. 그 말은 그의 물음에 대한 백 마디 대답보다 더 확실했다.
"정말 그런 일이…… 도무지 이건……."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머리를 저었다.
"사숙……."
옆에 있던 좌백이 입을 열었다.
"이 문제는 간단히 논할 문제가 아니다. 내가 다시 설명을 할 테니 지금은 잠시만 기다려 다오."
한효월이 좌백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으음……."
좌백이 침음했다.
그의 심중에는 의문투성이였다. 대전에서 봉설란의 그 처절한 절규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 뒤에 이어진 일련의 상황을 미루어 짐작하고 있을 뿐이고, 그나마 쉴 여가도 얻지 못해서 중독되고 힘든 상태로 억지로
움직이고 있는 형편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보다 나이 어린 이 사숙을 믿었다.
그러므로 입을 다물 수 있었다.
그때 한효월이 그에게 물었다.
"그보다 그분이 정말 돌아가셨다던 형수님인가?"
"맞습니다."
좌백의 답에 한효월은 황엽을 바라보았다.
"맞습니까?"
"그렇소."
황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효월이 그에게 물은 것은 그가 보구회주, 그녀와 함께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럼, 그분이 정말 독고 사형이십니까?"
"그렇소……."
황엽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청운궁…… 사모님입니다!"
좌백이 경색된 음성으로 말했다.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한 청운궁. 거기 연결된 편전(便殿)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기분 좋은 웃음이 아니라 분노에 가득 찬 날카로운 웃음소리였다.
그 소리에 섞여서 누군가가 싸우는 듯한 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거기 누가 같이 있는 거지?"
한효월이 물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사숙께 갈 때까지 저기에는 진 장문인과 큰 사모님 등이 계셨는데 언제 사모님께서 저리로……."
"낭패로군!"
한효월이 발을 굴렀다.
"냉각기를 갖도록 하려던 생각이 실패로 돌아갔군요! 속히 가봐야겠습니다. 가면서 말씀하시지요?"
"그럽시다."
답하는 황엽의 얼굴도 굳어 있었다.
청운궁 내부는 앞뜰까지 구대문파의 고수들로 넘쳤다.
신분의 고하보다도 상세가 중하고 경함에 따라서 사람들이 청운궁 내부에 안돈되었다.
급하게 천막이 생기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리로 수용이 되고 있는 판이었다.
그 옆으로 붙은 편전은 원래 큰 규모가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화산파의 후전인 이 청운궁은 평소라면 외부인은커녕,
화산파에서도 신분이 낮은 제자는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었다.
청운궁 뒤쪽에 바로 화산파의 조사전(祖師殿)이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을 가릴 처지가 아님이 화산으로서는 실로 비감할 것이고,
조사전에 모셔진 화산파의 조사들의 혼령(魂靈)이 만에 하나 이 일을 지켜보고 있다면 구천지하에서라도 어찌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인가.
"무슨 짓이야! 이 사람들은 중독을 당해서 손을 쓸 수 없음을 모른단 말인가?"
꾸짖는 음성.
"호호호…… 대체 그들이 무슨 짓을 한 것인지나 알고 그들을 비호하는 건가요? 오늘날 이 상황을 만들어낸 것이 누군지나 알고?"
다시금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편전 중앙에는 소청(小廳) 하나가 있었다.
팔선탁이 놓여진 그곳에는 진자양과 몇몇 구대문파 장문인들, 그리고 그들을 시중들던 제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제자들 중 둘은 이미 피를 흘린 채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다.
그들을 가로막고 나선 것이 요동권왕이었다.
그 옆에 선 것은 보구회주.
그 앞에서 서릿발 같은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것은 바로 봉설란이었다.
그녀가 손을 써서 앞을 막는 화산 제자들을 쓰러뜨린 것이다.
"좀 전부터 계속해서 그 말인데, 대체 무슨 소리인지 부인께선 속 시원히 말을 해보시오."
침중한 어조로 요동권왕 막풍이 입을 열었다.
그의 무게는 실로 컸다.
세상이 다 아는 전대(前代)의 고수일 뿐 아니라 이 방에서 온전한 실력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어 더욱 그러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다 정상이 아니었다.
봉설란도, 하다못해 보구회주마저도 홍화독장의 독기에 침습을 받은 상태였기에.
"……."
봉설란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그를 노려보다가 이내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를 호위하던 수신호위들은 이미 발검한 상태였지만 제아무리 그들이 강하다 해도 요동권왕의 적수는 아니었다.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태산이 솟은 듯한 압도적인 위세가 느껴졌다.
"좋아요. 다시 한 번 말하는 것이 그리 어려울 것도 없겠지!"
봉설란이 소리쳤다.
"저자들…… 저 인면수심의 간악한 도배들이 그분을 해쳤어요. 권력을 잡기 위해서 음모를……."
"제가 말씀을 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음성 하나가 끼어들었다.
한효월이 편전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의 뒤를 황엽과 좌백이 따라 들어왔다.
"제게 맡겨 주십시오. 만약 잘못된 점이 있다면 바로잡아 주시고."
한효월이 봉설란에게 포권을 해 보였다.
입술을 깨물었던 봉설란은 낮게 코웃음을 쳤다.
그녀의 모습에는 고집이 가득하여 지난날 자면성모라 불렸던 그 부드럽고 자상한 모습은 약에다 쓰려고 해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으로 족하다 생각한 한효월은 그녀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손을 들어 보구회주에게 포권을 하면서 정중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제가 말을 하기 이전에 우리 모두가 궁금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사형께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지 하는 겁니다. 죄송하지만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
보구회주는 뭔가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때, 황엽이 참견했다.
"본 방주가 아는 대로 말을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시지요."
보구회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되어 봉설란과 진자양, 그리고 보구회주 사이에는 한효월과 황엽, 요동권왕 막풍까지 끼어들게 되었다.
"지난날 독고 맹주께서는……."
황엽이 입을 열었다.
이어지는 그의 말에 장중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입이 벌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건곤무적 독고해.
그는 정의의 화신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그의 평생은 오직 천하의 의(義)를 지키고 강자로부터 약자를 보호하는 억강부약(抑强扶弱),
하늘을 대신하여 올바름을 행하는 체천행도(替天行道)에 다름이 아니었다.
그는 명예에 연연하지 아니하였고, 권세에 애착을 가진 적도 없었다.
세상을 덮는 무공을 지녔음에도 그의 행보는 늘 악을 징벌하고 여린 사람들을 돕는 것이었고, 모든 사람들에게 겸손했다.
그러하였기에 누구도 그를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의 그러한 동분서주로 말미암아 천하는 안돈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겉보기일 뿐, 상상할 수 없는 어떤 힘이 준동하고 있음을 그는 조사해 낼 수가 있었다.
그 실체를 더듬어갈수록 그 힘의 가공함은 독고해를 전율케 했고 그의 마음을 무겁게 하였다.
그렇게 해서 그는 몇 가지의 안배를 남겨두기에 이르렀다.
그중 하나가 바로 딸 독고경에게 단서를 남겨 그의 사부를 세상에 나오게 하는 것이었다.
하나 그 일은 그의 예상과는 달리 오늘날 한효월을 세상에 나오게 하는 단초(端初)가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긴 것은 세상이 이미 죽은 것으로 알고 있는 그의 첫 부인, 능자미(陵紫薇)에게였다.
그것이야말로 오늘날 보구회를 있게 한 시발이었다.
천하가 겁난(劫亂)에 잠길 것을 염려하여 독고해는 그의 사후,
그의 시신을 거두어 강시화하여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그녀에게 남겼다.
그렇게 해서 그의 시신은 맹주부에서 사라져 오늘날 비왕이라는,
정식 명칭으로는 호정군(護正軍)의 대장이라는 신분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그것은 극비로 진행되어 사후에만 발동하도록 되어 있었다.
물론 그 내부에는 좀 더 복잡한 사정이 있었으나, 그러한 것들까지 이 자리에서 장황히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황엽이 그 내정(內情)을 모두 알고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절로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누가 자신의 사후, 자신의 시신까지 천하를 위하여 내놓을 것인가.
장내에 침묵이 흘렀다.
봉설란마저 어이가 없는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는 이내 날카로운 웃음을 터뜨렸다.
"오호호호…… 정말 위대하군요! 정말 위대해……. 당신을 모해(謀害)한 저 간악한 도배들을 위해서 자신의 주검마저도 그들을
위해 바쳤다는 건가요? 정말 존경받을 일이로군요, 정말……."
봉설란의 웃음소리는 칼날과 같았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를 듣고 있는 진자양 등의 얼굴은 그야말로 참혹했다. 참괴(慙愧)한 빛이 역력했고, 고통스러운 빛이 가득하다.
어찌 그렇지 아니하겠는가.
차마,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봉설란의 손에 의해 쓰러진 소림사의 방장 대광 대사와 독고경에게 쓰러진 청성파의 수령자를 제외하고도 화산, 무당, 아미 등
나머지 구대문파의 장문인들 중 성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중 중상을 입은 사람은 아예 일어나지도 못하여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은 진자양을 비롯하여 다섯 명에 불과했다.
소림 등 다른 파에서는 장로들을 내보냈지만 그들도 중독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형세는 실로 참혹하다 할 것이었다.
진자양이 이 자리에 참석하고 있지만 그의 상태 또한 조금도 낫지 않았다.
그가 화산파의 주인된 입장이 아니었다면 그 또한 여기 나와 있을 형편이 아닐 정도로 그가 입은 부상 또한 무거웠다.
그런 참혹한 사태의 발단이 바로 그들 자신의 음모(陰謀)에 의해 일어났고,
그런 그들의 음모에 의해 희생된 독고해는 목숨을 잃고도 모자라 그 시신마저 기꺼이 천하를 위하여 내놓았으니 사람이라면,
어찌 고개를 들 염치가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맹주부에서 시신이 사라진 것은?"
"그분의 유언에 따른 일이었소."
한효월이 입을 열자 보구회주, 독고해의 전부인 능자미가 냉랭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녀 또한 이미 상황을 어느 정도는 눈치 채고 있어서 그 표정은 얼음과 같았다.
"이제 한 공자께서 이야기를 해보시오. 과연 무슨 일인지."
그녀가 여전히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진자양이 탁자를 짚고 일어나 그녀에게로 다가섰다.
그리고 사람들이 무슨 행동을 보이기도 전에 그녀의 앞에서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장문인!"
화산십이룡 중 살아남은 다섯 중 이 자리에서 그를 지키던 셋이 놀라 소리쳤다.
"너희들도 꿇어라."
진자양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장문인……."
"내 말을 듣지 않겠다는 것이냐?"
진자양의 말에 화산십이룡들은 입술을 깨물며 그 뒤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는 두 팔로 땅을 짚고 능자미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이게 무슨 뜻이오?"
차가운 눈길로 그가 하는 양을 바라보고 있던 능자미가 입을 떼었다. 눈길만큼이나 차가운 음성이었다.
구대문파!
그중 화산파의 장문인이 남의 부인 앞에서 무릎을 꿇고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린다는 것은 실로 천하를 경동시킬 대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고 맹주는 우리 구대문파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말미암아 헛되이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화산의 진자양, 이 자리에서 머리를
조아려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무슨 의미요?"
능자미의 질문에 진자양은 일그러진 얼굴로 입술을 물었다.
짓다문 그 입술에서 핏물이 터져 나온다.
"저간의 상황을 생각한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저를 비롯한 책임자들의 목을 잘라 맹주의 원혼을 위로하여야 마땅할 것이로되,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으니 부디 잠시만 유예 기간을 주십시오. 그리하시면 신명을 다해 이 난국을 헤쳐 세상을 바로잡아 놓은
다음에…… 그때 스스로 맹주의 제단 앞에서 목을 베어 속죄하겠습니다."
말과 함께 그는 더욱 깊숙이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머리를 들지 않았다.
뚝뚝…… 그의 입에서 바닥으로 핏물이 떨어진다.
"하아……."
나머지 구대문파의 장문인들과 장로들 또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면서 몸을 일으켜 진자양의 뒤에서 능자미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무림 역사상 다시 찾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능자미는 그 자리에 버티고 앉아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차가운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을 뿐.
"어떻게 된 일인지 내게 설명을 해주시겠소?"
능자미가 눈을 들어 한효월을 바라보았다.
한효월의 얼굴이 침중히 굳어졌다.
"사실은……."
한효월이 입을 열었다.
질식할 듯 한 침묵이 방 안을 눌렀다.
한효월의 무거운 음성이 방 안을 맴돌 때마다 능자미의 얼굴은 얼음을 빚은 듯 더욱 차갑게 굳어져 갔고,
황엽과 요동권왕 막풍 또한 다르지 않았다.
한효월의 말이 끝나자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천인이 공노할 노릇이로군! 그런 천벌받을 짓을 하다니……."
요동권왕 막풍이 참지 못하고 눈을 부릅뜬 채로 발을 굴렀다.
쿠르르……. 그의 노성에 방 안 기물이 덜덜 떨고 찻잔이 굴러 바닥에 떨어져 깨어졌다.
발구름에 집 안 전체가 지진을 만난 듯 뒤흔들렸다. 천장에서 흙먼지가 풀풀 쏟아져 내렸다.
'믿기지 않는군…… 어떻게 그런…….'
황엽은 기가 막힌 듯 무릎을 꿇고 있는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을 바라보았다.
사태가 사태인지라 차마 입을 열어 질책하지는 못하지만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듣고도 믿지 못했을 엄청난 소리였다.
당사자라 할 수 있는 능자미의 얼굴은 흡사 칠면조를 보는 듯했다.
하지만 누가 봐도 그녀의 전신이 가늘게 떨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실제로 그녀는 소매 속의 두 손을 손가락이 부러져라 움켜쥔 상태였다.
당당…….
그녀가 앉아 있는 의자의 밑에서 낮은 진동음이 일었다.
청석을 깔아둔 바닥이다.
그 바닥이 의자의 무게에 눌려 깨지고 있었다.
그처럼 흔들리던 그녀의 얼굴이 한 겹 얼음을 깔아놓은 듯 차갑게 굳어진 다음, 입을 연 것은 일 다경이나 흘러서였다.
그동안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한효월조차도.
"그처럼 바보였단 말이지……."
창백하고, 또 차가운 얼굴로 능자미가 중얼거렸다.
그 말이 누구를 지칭한 것인지는 너무도 자명했다.
진자양 등은 무릎을 꿇은 상태 그대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소림사가 불타고, 무당의 초석이 뽑힌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군."
능자미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음성은 차갑기 이를 데 없어서 얼음 가루가 풀풀 날리는 것 같았다.
"부인!"
그 말에 황엽이 놀라 소리쳤다.
이 상태에서 그녀가 등을 돌린다면 구대문파는 고립무원의 처지가 된다.
도와주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그녀마저 적으로 돌아선다면 설상가상,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천하는 속수무책, 혈풍성풍(血風腥風)에
잠기게 되리라.
"왜요? 설마 이 몸에게 이 간악한 도배들을 위해 더 움직이란 말을 할 생각은 아니겠지요, 황 방주?"
황엽을 바라보는 능자미의 눈빛은 얼음보다 더 찼다.
그렇지 않아도 차고 거만한 성품으로 유명했던 그녀였다. 그녀의 태도에 주위에는 한 겹 서리가 내린 듯 한풍이 도는 듯했다.
"후우…… 부인, 아니, 회주……."
황엽이 무겁게 입을 떼는 순간, 침착한 음성 하나가 들려왔다.
"제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효월이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오? 사실이 명명백백한 이상, 나를 설득할 생각은 하지 마시오."
능자미는 땅을 박차고 일어서면서 말을 잘랐다.
그 모습을 봉설란은 냉소를 머금은 채로 보고 있었다.
"설득할 생각은 없습니다, 형수님."
한효월의 말에 능자미의 눈에 흠칫하는 빛이 스쳐 갔다.
그가 독고해의 사제임은 그녀도 알고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그녀를 이렇게 부르자 그를 다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형수(兄嫂)라…….
"저는 사실을 말씀드리려는 것뿐입니다."
"……."
한효월의 말에 능자미는 차가운 눈빛으로 한효월을 쏘아보았다.
서릿발과 같은 시선이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심금이 떨려 위축될 무서운 눈빛이었다. 평생을 두고 사람을 눈빛으로 부려본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하지만 한효월의 모습은 침착하다.
눈빛 또한 심산의 맑은 연못과 같아 그녀의 눈길을 받아내면서도 조금도 위축됨이 없다.
'하늘은 유독 이들 사형제에게만 은총을 내린 것 같군…….'
물끄러미 한효월을 바라보던 능자미가 내심 중얼거렸다.
순간적으로 그처럼 들끓어 오르던 분노마저 잊었다.
그 옛날, 그를 처음 만났던 때가 불현듯 스쳐 간 것이다.
기질(氣質)은 너무도 상반된다.
한효월은 고요한 성품임을 누가 봐도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독고해는 말 그대로 호한(好漢)이었다.
말술을 마다하지 않고 사람들을 사귀었으며 그 호탕한 웃음소리는 천둥과도 같았다.
그렇듯 상반된 그들이었지만 누구라도 느낄 수 있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비범(非凡)하다는 것.
언제 어디에 있어도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남이 드러난다.
그의 그런 점에 능자미는 반해 그를 따랐었다.
자신의 그 고귀한 신분을 모두 버리고서…….
그런데…….
능자미는 입술을 깨물며 암중에 머리를 저었다.
"여기에 더 이상 무슨 사실이 필요하오?"
그 생각을 털어버리려는 듯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음성은 여전히 비수와 같다.
하나 그 어조는 어딘지 모르게 조금쯤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한효월은 품속에서 찢어진 책자 하나를 꺼냈다.
"이것은 이 모든 일을 처음 시작한 소림사의 혜도 선사께서 남긴 글입니다. 일종의 비망록(備忘錄)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제천교의 설립에서 현재까지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효월의 손으로 날아든다.
"어디서 그걸?"
"소림사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그곳까지 가지 않았더라면 조금 더 빨리 올 수 있었겠지요. 이 글을 쓴 본인인 혜도 선사께서 살아
계셨다면 좀 더 명확한 사실을 알아낼 수가 있었을 텐데……."
차가운 웃음소리가 그 말을 잘랐다.
"그 간교한 자는 이미 모든 걸 자백하고 죽었어요! 더 이상 무슨 사실이 필요하죠? 설마…… 이자들을 두둔할 생각인가요?"
봉설란이었다.
"두둔이 아닙니다. 전 사실을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한효월은 <번천지회>라고 쓰여진 그 책을 여러 사람에게 보였다.
"혜도 선사가 여기에 쓴 바에 따르면 그는 사형이신, 독고해. 전 맹주의 음모를 알아내고서 그 음모를 막아내기 위하여 번천지계를
시작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봉설란이 노해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그걸 사실이라고 믿는다는 말이오?"
능자미가 차갑게 한효월을 쏘아보았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형은 그런 짓을 할 분이 아닙니다."
한효월은 침착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것은 저도 알고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이 다 알 겁니다. 그러나 혜도 선사는 그 일에 대한 증거를 가졌었고, 그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분이 아무리 호승심이 강한 성품이었다고 하더라도 그처럼 무모한 일을 계획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것이오?"
능자미가 한효월을 바라보았다.
그 눈길은 차갑게 굳어지고 있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인정하기는 싫지만 천하제일의 장부(丈夫)였던 그였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버리고 세상을 등졌다가 그의 유언에 따라 다시금 세상에 나온 그녀였다.
그가 그러한 위장부(偉丈夫)가 아니었다면 결코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으리라.
그런데 그런 그의 영광에 흠집을 내려 한다는 건가?
그녀의 눈빛이 얼음처럼 변함을 보면서도 한효월은 침착하다.
"혜도 선사가 살아 계셨다면 모든 것은 자명해질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 책에 의거하여 모든 것을 추론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간악한 자가 무슨 헛소리를 했던지간에, 이 마당에 그걸 믿을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세 살 먹은 어린아이도 웃을 일이에요!"
봉설란이 차갑게 코웃음 쳤다.
"오늘날 보구회를 보더라도 사형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누가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혜도 선사 또한 나름대로 그 일에 대해
명백한 증거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게 뭡니까?"
황엽이 옆에서 물었다.
"그 내용이 여기 적혀 있었는데 일부만 남아 있고 나머지는 찢겨 나가서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찢겨진 책은 누가 봐도 책의 내용을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어 보였다.
내용도 알지 못하는 책을 가지고 대체 뭘 하자는 건가?
그런 기색이 봉설란의 얼굴에 역력하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알아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혜도 선사의 배후에 누군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말에 사람들의 안색이 돌변했다.
"배후라니?"
뜻밖의 말에 모든 사람들의 안색이 돌변했다.
모두의 얼굴에 경악의 기색이 역력히 떠올랐다.
"혜도 선사의 뒤에 배후가? 그게 누구란 말이오?"
황엽조차 참지 못하고 소리쳐 물었다.
"그가 누구인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이곳을 한번 보시지요."
한효월이 황엽에게 손에 들린 찢긴 책자를 넘겨주었다.
황엽이 책을 들여다보는 가운데 한효월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혜도 선사는 소림사의 장로였습니다. 어릴 때 출가하여 소림사 산문(山門) 밖으로 나간 적이 별로 없어 세상사에 어두울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비록 그분이 출중한 인재였다 할지라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지요. 그런 그분이 당시 누구도 감지하지
못했던 전 맹주의 음모를 발각했다는 것은 누군가의 제보에 의해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거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그 책에도
그런 부분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는 그 음모를 조사해 보고 확신이 서자, 평소에 신념을 실천에 옮길 생각을 하게 되었고
오늘날의 사태가 초래되었던 것 같습니다."
한효월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든 사람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것이 그의 뛰어난 점이었다.
언제 어디에서라도 정세의 핵심을 찔러 한순간에 화제를 자신에게로 끌어들여서 상황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것.
"아시다시피 그분은 바보가 아닙니다. 뛰어난 인재였지요. 그런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있었다는 것은 그 제보자의
신분이 믿을 만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혜도 선사가 번천지회의 말미에 배신이라는 단어를 언급했을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말은…… 번천지계를 계획하고 실천한 사람은 혜도 선사이지만, 실제로는 그 암중인이 그 모든 것을 계획했을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혜도 선사는 자신의 호승심 때문에 그 모든 것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라고 착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 암중인의 능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겠지요."
"으음……."
"그런 일이……."
여기저기에서 경악에 찬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말도 안 돼!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금 믿으란 건가요?"
봉설란이 다시 날카롭게 소리쳐 그 말을 잘랐다.
"소생은 소림사에서 이 글을 발견했고, 그 순간 습격을 받아서 절반이나 되는 분량을 그 암습자에게 탈취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뒤로 소생은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혜도 선사의 번천지회에는
남에게 알려져서는 안될 어떤 단서가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무리이겠습니까?"
…….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열어 침묵을 깨뜨린 사람은 황엽이었다.
"그게 혜도 선사를 암중에서 조종…… 했던 자의 신분 내력이란 말씀이오?"
"소생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보셨던 그 책의 절반을 가져간 다음에 다른 움직임이 없었다는 것은 그들이 기도했던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이라면 비약이겠습니까?"
말을 끝으로 한효월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 눈길이 멎은 곳은 봉설란이 아닌, 능자미였다.
"형수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능자미는 묵묵히 한효월을 쳐다보기만 했다.
"만약 제 추측이 사실이라면, 자칫 우리는 적당(敵黨)의 간계(奸計)에 빠져 그들이 바라는 대로 상잔(相殘)을 하게 될런지도
모릅니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한효월은 머리를 저었다.
"어찌 구천지하에 계신 사형께서 눈을 감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래서 날보고 어쩌란 말씀이오? 명확하지도 않은 사실을 믿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구대문파를 위해서 싸우라는
것이오? 그것이 그분의 유지(遺志)이니까?"
"그것이 무리임을 잘 압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잠시 말미를 주십사 하는 겁니다. 이 의혹을 확인해 볼 수 있는……."
봉설란이 코웃음 쳤다.
"결국 한 공자는 그분을 모해한 이자들을 용서하라는 말이군요?"
"용서가 아닙니다. 제 추측이 사실이라면 구대문파 또한 그들에게 이용당한 피해자일 수도 있습니다."
한효월의 말에 아직 무릎을 꿇고 있는 구대문파 장문인들의 얼굴에는 화색(和色)이 돌았다.
그렇게만 된다면 이 오욕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날 수가 있지 않겠는가.
없었던 것만이야 못하겠지만 그래도 지금보다는 훨씬 나은 입장이 되리라.
"피해자라고?"
봉설란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이 간악한 도배들이 피해자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이용을 당했다면 아무런 책임도 없다?"
"구대문파는, 그 일에 동참한 사람들은 당연히 책임을 벗을 수 없습니다. 책임을 벗을 수 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진 장문인을
비롯한 구대문파의 수장(首長)들이 이렇듯 무릎을 꿇고 있겠습니까? 정말 암중 음모자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훗날, 구대문파는 그
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아니외다. 너무도 당연한 말씀이오."
한효월의 질문에 진자양은 무겁게 머리를 저었다.
다른 장문인들, 장로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들을 능자미는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재고를 부탁드립니다, 형수님."
말과 함께 한효월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
능자미는 굳게 입을 다문 채 말이 없다.
"부인! 우리 구대문파는 결코 책임을 회피할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다만 바라는 것은…… 우리들의 잘못으로 인해 벌어진 이
일을 수습할 기회를 주십사 하는 것뿐입니다."
진자양이 침통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소림의 혜원 선사가 무겁게 불호를 외웠다.
다른 사람들의 태도 또한 마찬가지, 그야말로 천만 근의 짐을 진 모습들이다.
이미 구대문파의 영예(榮譽)는 황하에 뛰어들어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그나마 한 가닥 기회를 잡을 수 있을는지의 여부는 한 여인의 생각 여하에 달려 있는 판이었다.
어찌 착잡하지 않을쏜가?
능자미가 여전히 침묵을 지키자 이제껏 묵묵히 있던 요동권왕 막풍이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회주, 이 늙은이의 생각으로는 한번 기회를 주는 게 좋을 것 같네."
그의 음성에는 무게가 있었다.
천하십왕 중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신분인 그다.
허튼소리를 할 리도 없고, 그의 말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최소한 당금 무림 중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할 것이었다.
"청산이 남아 있는 한, 땔감 걱정이 없으니…… 복수야 언제라도 할 수 있지만, 적의 장단에 놀아나는 것은 정말 기분 나쁜 일이지."
요동권왕 막풍이 중얼거리듯 다시 말했다.
능자미는 미간을 찡그렸다.
잠시 입술을 깨물었던 그녀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은 참아보기로 하지요. 말씀대로 잠시 기다릴 수는 있을 테니까."
말과 함께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부인!"
진자양이 머리를 조아렸다.
잠시 멈칫했던 능자미는 냉소를 흘리며 등을 돌렸다.
"당신들을 봐서 말미를 준 건 아니오."
그리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곳을 빠져나갔다.
"일어나십시오, 장문인."
한효월이 진자양을 부축해 일으켰다.
"감사하오, 한 공자."
진자양이 무겁게 말을 받았다.
바로 그때, 날카로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누구 맘대로!"
"누구 마음대로 용서를 하고 말아? 난, 난 절대로 그럴 수 없어. 구대문파의 씨를 말리고 제천교마저 말살할 때까지…… 누구도
용서하지 않겠소! 절대로!"
봉설란은 날카롭게 고함쳤다.
"부인, 용서를 하라는 게 아닙니다. 잠시 말미를 두어 만에 하나, 이 사태를 암중에서 방조한 자가 있다면 그자를 찾아내자는
것입니다."
황엽이 말했다.
"그런가요?"
봉설란의 얼굴에 싸늘한 웃음이 떠올랐다.
"마음대로들 하세요. 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테니까."
말과 함께 그녀도 나가 버렸다.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대단한 성미로군."
요동권왕 막풍이 중얼거렸다.
"부드러운 성품이셨는데 많이 변하셨군요……."
중얼거린 한효월은 급히 막풍을 향해 말했다.
"한 가지 부탁을 드려야겠는데,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뭐냐?"
"……."
한효월이 그를 향해 뭔가를 말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전음입밀을 시전하여 암중에 말을 전했기 때문이다.
"정말이냐?"
"아니라면 다행이지만 만약 제 추측대로라면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됩니다. 부탁드립니다."
한효월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막풍은 고개를 저었다.
"신기한 놈이로군……. 그 나이에 천기를 읽는다는 건가? 좋아, 한번 가보도록 하마!"
한 가닥 질풍이 일며 그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황 방주께서도 부탁드린 대로 행동을 취해주십시오. 중독의 상태를 알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전 지금 바로 작은 형수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그분은 봉황문을 움직일 수 있어서 우리와 등을 돌리면 매우 어려운 사태에 직면하게 될 겁니다."
말을 멈춘 한효월은 미간을 찡그렸다.
"오늘의 이 결전에 봉황문은 그분을 홀로 보내놓고 전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제 생각이 틀림없다면 봉황문은 이 근처에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을 겁니다. 봉황문의 문곡은 범상한 사람이 아닌데, 그들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내가 이미 몇 사람을 시켜서 봉황문의 종적을 찾아보게 했으니, 그들이 부근에 있다면 찾아낼 수 있을 것이오."
황엽이 한효월의 말을 받았다.
그의 말은 그가 역시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의미한다.
이미 사태를 예측하고 있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굳은 얼굴로 말을 듣고 있던 진자양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봉황문의 종적을 탐지하기 위한 안배는 본인도 했었지만…… 아무런 연락이 없는 것으로 보아 파견한 제자들이 모두 화를 당한 것
같소. 오늘날 이런 참혹한 지경을 당하고도 속수무책이니 조사영령들을 무슨 낯으로 뵐 수 있을 것인지……."
그는 괴로운 듯 머리를 젓더니 한효월을 바라보았다.
"한 공자,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는지 모르겠소."
"별말씀을…… 대국적인 견지에서 취할 바를 말했을 뿐입니다."
한효월이 그 말을 받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겸사의 대응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근저에 깔린 의미는 같지 않았다. 그 의미는 그들을 책망(責望)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었다.
진자양이 누구인데 그것을 느끼지 못하겠는가.
그는 어두운 얼굴로 다시금 탄식했다.
"한 공자께도 드릴 말씀이 없소.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믿어주시면 하오. 본인은 정말 알지 못했었소. 그것을 알았을 때……
맹주는 이미 화를 당하신 다음. 사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해 있었소. 그 상태에서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은…… 후우……
그 사태를 수습하는 일뿐이었소. 저질러진 일을 방치할 수가 없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역시 본인의 능력이 모자라 오늘날
이런 지경까지 사태가 악화되었으니 더 무슨 말로 변명을 하겠소이까? 그저 지하의 맹주께 죄만할 따름이오."
말을 마친 그는 피가 나게 입술을 깨물었다.
"음모에 빠져 목숨을 잃으신 맹주께서 그래도 무림을 잊지 못하고 스스로의 시신마저 수고로이 구시술(驅屍術)에 내맡겨 무림을
지키고자 하심을 보고…… 차마, 차마 낯을 들 수가 없었소."
"하아……."
"후우우……."
여기저기에서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진 장문인께서 하실 일은 스스로 잘 아실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속히 부상에서 회복하여 전력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어쩌면 적의 공격이 다시 있을런지도 모릅니다."
"적의 공격이 말이오?"
"그렇습니다. 저라면……."
한효월은 말끝을 흐리고는 그곳을 나섰다.
더 이상 하나하나를 설명한다면 그들의 능력에 대한 모독이 되리라.
"무림은…… 저들 사형제에게 너무 큰 신세를 지는구나."
진자양이 길게 탄식을 불어냈다.
그런 그를 향해서 황엽이 물었다.
"장문인의 체내 중독 증상은 어떠하시오?"
"솔직히 심각합니다."
황엽의 물음에 진자양이 무겁게 답했다.
"운기조차 하기 힘듭니다. 사문의 영단을 복용하여 기력을 조금 찾기는 했지만 내공은 이미 거의 산실된 상태라서 다른 사람과의
동수(同手)는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으음……."
황엽이 무겁게 신음했다.
진자양은 세상에 그 이름이 알려진 기재였고, 고수였다. 그런 그가 이런 지경이라면 다른 사람은 보지 않아도 뻔한 일.
사태는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