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八首 천리추종(千里追踪) (70/113)

第八首  천리추종(千里追踪)

-노승을 찾다.

한 치 앞을 예측(豫測)할 수 없게 되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한효월은 암중에 그와 몇 마디를 더 나눈 후에 국수집을 나섰다.

 그의 움직임은 조심스럽고도 빨랐다.

 제천교의 표적이 된 그였다. 모습을 드러내고 활보하여 좋을 일은 없었다. 그의 행적은 최대한 비밀이어야 했다.

 사람들이 많은 시장통으로 나선 그는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골목으로 들어간 다음, 신법을 전개하여 바람처럼 낙양성을 벗어났다.

 그렇게 낙양을 벗어난 그가 달려간 곳은 뜻밖에도 용문이다.

 이수(伊水) 양안으로 마주 보고 있는 용문은 지난날 그가 신안금조 조건의 말에 따라 찾았던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사형의 전 부인이자 독고경의 어머니인 주자미를 처음 만났었다.

 그 당시를 회상하듯 그는 빈양동(貧陽洞)을 찾았다.

 누대를 거쳐 만들어진 이 용문석굴은 그야말로 인간이 만들어낸 걸작이다. 그 말은 이곳을 찾는 사람이 많다는 것과 같다. 밤낮없이 사람들이 줄을 잇는 이곳을 찾은 한효월은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한 사람을 찾는 것이다.

 그가 찾는 사람은 그때 만났던 무명(無明)이라는 노승.

 급한 나머지 지나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더구나 독고경과 주자미가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면 신안금조 조건이 남겨놓은 것을 발견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은 바로 그 노승이었다.

 그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가정 하에, 한효월은 그를 찾아온 것이다.

 빈양동과 그 주변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한 시진 가까이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목적했던 무명노승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의 행적을 알 만한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당시 그의 모습을 보건대, 우연히 그곳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그를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여기에 왔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맞았다.

 몇 사람에게 물어보자 그가 상당히 오래전부터 여기에 있었음을 알아낼 수가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머물고 있다는 곳도 알아낼 수가 있게 되었다.

 이수가 흘러가는 좌우로 솟은 암벽이 궐과 같다 하여 이궐(伊闕) 용문이라 불리는 이 암벽은 따로히 용문산이라고 불린다.

 무명노승이 머물고 있는 곳은 용문산 위에 있는 잠계사(潛溪寺)였다. 잠계사는 오랜 절로써 수많은 고적들이 혼재하여 있는 곳이다.

 "무명이요?"

 잠계사에서 만난 사미승이 눈을 크게 뜨고 한효월을 바라본다.

 "모르십니까? 이곳에 기거하고 계시다고 들었는데……."

 "글쎄요……."

 열서넛 되어 보이는 사미승이 묘한 눈길로 한효월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냐?"

 곁을 지나던 중년의 승인이 물었다.

 "이 시주께서 무명노사(老師)를 찾으시는군요."

 "아미타불…… 어디서 오셨습니까?"

 중년 승인이 한효월을 바라보더니 물었다.

 "일전에 빈양동에서 노사를 한 번 뵈었습니다. 한번 놀러 오라고 하셔서 찾아왔는데 그쪽에 계시지 않아서……."

 한효월이 말끝을 흐렸다.

 "그러신가요? 무명노사는 암자에 계신데 근래에는 뵙지 못한 듯합니다."

 백상(白象).

 희미하게 빛 바랜 암자의 이름은 세월만큼이나 오래된 듯싶었다. 암벽에 기대 지은 그 암자의 절반은 밖에서 암벽에다 기대 지은 절이고, 나머지는 암벽 속으로 파고든 절반은 동굴인 형상. 굳이 표현하자면 석감(石龕)과도 같은 형상으로 존재하였다.

 "여깁니다만…… 안 계신 듯하군요?"

 한효월을 안내한 도연(導緣)이란 중년 승인이 백상이란 암자에다 고개를 디밀었다.

 "안에 계십니까?"

 대답이 없다.

 도연이 반쯤 닫힌 문을 열고 안을 살폈다.

 안에 있는 것은 고요뿐, 보이는 것은 어둠침침한 어둠.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운수라도 가신 게 아닌가 싶군요……."

 도연이 한효월을 돌아보았다.

 그때였다.

 "여긴 어쩐 일이시오?"

 등 뒤에서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눈썹이 백설 같은 노승이 선장(禪杖)을 짚고 서 있었다. 구부정한 허리며 분위기는 비슷하지만 무명노승은 아니었다.

 "무고하셨습니까? 무명노사를 찾는 시주가 계셔서요……."

 도연이 그에게 합장을 해 보였다.

 한효월은 무명노승이 거처했다는 백상암을 둘러보고 있었다.

 암자의 앞에서 만난 노승, 일행(一行)의 말에 의하면 그는 가끔 훌쩍 떠났다가 몇 달 만에 돌아온다고 한다. 그 기간은 일정치 않아서 돌아올 때까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가 이곳에 떠난 날짜를 짚어보니 한효월이 여기에 왔다간 다음인 것 같았다. 무명노승이 이곳에 머문 지난 십여 년 간 이곳을 떠난 것은 손꼽을 만큼 드물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무엇 때문에 그 직후에 이곳을 떠난 것일까?

 '음?'

 불조차 꺼져 어둠이 깔린 백상암에서 무명노승이 앉았던 것으로 짐작되는 곳을 살펴보던 한효월의 안색이 조금 달라졌다.

 갈대를 엮어 만든 포단.

 그 포단을 들자 암반이 오목하게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무슨 흔적일까?

 손으로 그 흔적을 더듬어본 한효월의 눈빛이 묘하게 일렁인다.

 '앉은 자리에 난 흔적, 늘 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면…… 이 자리는 그가 운기조식을 한 흔적일까?'

 사람이 앉아 있었다고 해서 바위에 흔적이 남았다면 범상한 일일 리가 없다. 소림사의 달마 대사가 면벽구년을 한 다음에 그 자리에 그의 형상이 남아 전설(傳說)화되지 않았던가.

 '역시 보통 사람이 아니었군…….'

 한효월은 석감 안쪽에 모셔진 불상을 살피기 시작했다.

 사람보다 조금 작은 불상은 목조였고 연도가 오래되어 보인다. 연좌(蓮座)는 상당히 정교하게 조각되었지만 세월의 흔적을 따라 연꽃들이 뭉개진 흔적들을 어찌할 수 없다.

 슬그머니 불상의 연좌를 밀어보았다.

 움직이지 않는다.

 힘을 더 준다면 밀어낼 수 있겠지만 이런 정도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이 불상이 움직인 적이 없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가 있었다. 이보다 더한 힘으로 밀어내야 한다면 필시 밀어낸 흔적이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효월은 불상의 뒤로 돌아갔다.

 암벽에 바짝 붙은 불상.

 그래서 불상 뒤쪽으로는 사람이 들어가기에는 좁았다.

 하지만 억지로 몸을 디밀 수는 있었고 고개를 디민 한효월의 눈빛에 신광이 일었다.

 연좌에 앉은 불상의 등 쪽에 묘한 흔적을 발견한 것이다.

 손으로 더듬자 등 쪽이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복장(腹藏)을 위한 곳인데, 무엇 때문인지 틈없이 밀봉되어 있어야 할 그곳 막음새가 반쯤 쪼개져 틈이 드러나 있었다.

 손을 넣어 더듬어보자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는다.

 한효월의 눈빛이 침침한 어둠 속에서 신광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불상의 배에는 사리(舍利)나 기타 경전 등을 넣는 일이 전통적으로 행해진다. 그 물건들을 일러 복장(腹藏)이라 한다. 복장을 넣는 일은 매우 은밀하고 중요한 일이라 복장이 들어간 자리는 밀봉되는 법이다.

 그런데 이 불상은 막음새만 쪼개진 게 아니라 불상 자체에도 손상이 조금 있었다.

 긁힌 자국.

 무엇인가가 복장을 넣었던 곳을 긁고 나간 듯한 흔적을 발견한 것이다.

 '급하게 뭔가를 꺼내다가 긁힌 형태다. 이것은 정돈하기 힘들 정도로 시간에 쫓겼다는 의미.'

 다른 어떤 도구를 쓸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손으로 무엇인가를 꺼내다가 그 입구가 훼손되었다면 그 손의 주인은 보통 사람일 리가 없다. 손톱으로 긁으면 혹 몰라도 보통 사람의 손이 스쳐 간다고 나무가 부스러질 리가 없기 때문이다.

 세심히 살펴보아도 다른 흔적은 발견하기 힘들었다.

 이미 먼지가 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의 출입이 오래 없었고 주변의 상황으로 미루어 싸움이 있었던 것 같지도 않았다.

 "물건만 가지고 바로 떠났다는 건가?"

 한효월은 잠시 주변을 더 둘러보다가 밖으로 나섰다.

 가슴이 조금 답답해졌다.

 무명노승을 찾아온 것은 제대로 짚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이곳을 떠났으니 단서가 끊긴 셈이 아닌가.

 한효월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는 암자 옆에 있는 바위에 걸터앉았다.

 그렇게 앉아서 보니 이수(伊水)가 눈 아래다.

 흘러가는 강물과 용문석굴의 모습들이 눈에 잡힌다.

 희대의 걸작이라는 용문석굴이지만 이렇듯 멀리서 보자니 마치 벌집을 보는 것 같았다.

 자연은 원래 생긴 그대로를 일러 자연이라 한다.

 누대에 걸쳐 만들어낸 저 걸작도 어쩌면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낸 산물일 수도 있을 터이다. 어쨌거나 자연을 훼손한 셈이 아니던가.

 강바람이 불어 그의 옷자락을 잡아 흔든다.

 "제천교주……."

 묵묵히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던 한효월이 문득 중얼거렸다.

 이 신비에 쌓인 인물의 정체만 밝히면 모든 것이 명료해질 것도 같다. 그는 이 얽히고설킨 난마(亂麻)와 같은 실타래의 중심에 있었다.

 주변의 상황은 정말 그가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사형의 죽음.

 그리고 그를 찾아온 감천형과 천무.

 사부의 편지를 보면서 한효월은 적이 제천교임을 단정했고 강호에 나가서 그들의 정체를 밝히고 그들을 물리치는 것으로 이 모든 것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제천교는 구대문파에서 사주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사형은 그것도 모르고 자신의 주검까지 이용하여 보구회를 만들고 강호를 지키고자 했었다.

 그런 상황이라면 사형의 죽음과 더불어 모든 것이 정리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구대문파로 인하여 성립된 것이 제천교라면 자신의 사부가 미리 그것을 알고 사형인 독고해를 강호로 내보냈다는 것은 성립될 수가 없는 말이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혜도 선사 등은 과연 누구에게 제천교의 조직을 부탁한 것일까?

 그를 부추긴 것으로 짐작되는 그는, 제천교주는 누구일까?

 그 상황을 초래했던 주모자는 모두 죽고 말았다.

 그것을 알아낼 방법이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이 일의 인과(因果)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를 찾아내야만 했다.

 고뇌하던 한효월은 신안금조 조건의 말에 기대를 걸고 이곳까지 왔다.

 화산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한 신안금조 조건은 죽기 전에 안간힘을 다해서 몇 마디를 하고 갔다.

 "끄으으…… 그, 그를 찾……."

 "끄으…… 제(齊)…… 천(天)…… 기(機)…… 크으으……."

 신안금조 조건이 죽기 전에 남긴 말이다.

 신안금조 조건은 독고해가 실종되자 그를 찾아 강호로 나갔었다.

 사형의 생전에 그는 영민함으로써 이름 높은 사람이었었고 누구도 그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목숨을 걸고 맹주부로 귀환했다.

 적에게 쫓기던 그는 빈양동에 무엇인가를 남겨두었고 그것을 전달코자 했지만 결국 그 일은 실패로 돌아간 듯 보인다.

 하지만 무명노승을 찾아낼 수 있다면, 이라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에 아직 포기하기는 이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에, 정말 귀부(鬼府)에 끌려갔던 혼을 되돌려서까지 내뱉은 그 단편적인 말들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뒷말은 제천교에서 누구를 찾으라는 말처럼 짐작되어진다.

 과연 제천교에서 누구를 찾아야 한다는 건가?

 그는 무엇을 알아내었을까?

 그것이 무엇이기에 정말 뜻밖에도 관부에서조차 그를 원한다는 말인가.

 "역적……."

 한효월이 문득 중얼거렸다.

 "설마 제천교에서 무림뿐 아니라 황권(皇權)을 넘보고 있기라도 한단 말일까?"

 그는 미간을 찡그렸다.

 이 일은 아무래도 주자미와 만나 의논을 해봐야 할 것 같았다.

 "여기 계셨습니까?"

 그때 문득 그의 등 뒤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어서 오시오."

 한효월이 말했다.

 등 뒤에서 들려온 음성은 정말 뜻밖이다.

 그러나 한효월의 태도는 더 더욱 뜻밖이다.

 그는 누군가가 나타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의 뒤에는 거지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거지라고 보기에는 뜻밖에도 이목구비가 수려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일러 옥면무영이라고 부른다.

 "예상보다 빨리 왔군요."

 한효월의 말에 옥면무영은 이를 드러내고 웃어 보였다.

 "근처에 있었지요. 그리고 몇 가지 일 처리를 해야 할 것도 있고 해서 이미 움직이고 있던 차였습니다."

 "방주께서는?"

 "호남 쪽으로 움직이고 계시는 중입니다."

 "호남 쪽?"

 뜻밖이란 듯 그를 본 한효월이 다시 물었다.

 "내가 말한 것 때문이오?"

 "아닙니다. 말씀하신 곳을 찾는 것은 이미 명령이 하달되었으니 곧 찾아낼 수가 있을 겁니다. 다만 동정호란 곳이 너무 넓어서 가까운 시일 내에 제대로 찾아낼 수가 있을는지 걱정이긴 합니다만…… 방주께서 가신 것은 뭔가 다른 일 때문인 듯합니다."

 무슨 일 때문인지 그가 입을 열지 않으니 또 묻는 것도 뭐한 일.

 그의 기색을 눈치 챈 것인지 옥면무영 호일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근자에 들어서 호남 쪽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있었다는 보고가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음……."

 한효월이 잠시 침음한다.

 개방의 방주가 급거 화산을 떠나 호남으로 향했다.

 이제부터 한효월이 가려는 동정호 또한 바로 그 호남에 위치한다.

 그렇다면 이 일이 그냥 우연이라고 치부할 수 있는 일일까?

 그쪽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일까?

 "한 가지 부탁이 있소."

 "말씀하시지요. 방주께서 한 대협의 말씀이라면 무엇이건 돕도록 이미 전 방도에게 명을 내리셨습니다."

 "과한 대접이라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는지……."

 잠시 말끝을 흐렸던 한효월은 정색을 했다.

 "호남 쪽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일.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아내어서 나에게 알려주시오. 무슨 일이든 단 하나도 남기지 말고. 그리고……."

 한효월은 품속에서 봉서 하나를 꺼냈다.

 "이건 방주께 직접 전달될 수 있으면 좋겠소."

 "알겠습니다."

 옥면무영 호일랑은 보지도 않고 봉서를 품에 집어 넣었다.

 "좀 전에 듣긴 했었는데…… 보구회의 회주께서 화산을 떠난 것이 사실이오? 떠나셨다면 어디로 가셨는지 아시오?"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화산에서 화음현(華陰縣)으로 옮기셨고 독고 소저도 같이 가신 걸로 압니다."

 화음현이라면 화산 초입에 있는 시진(市鎭)이다.

 "그분만 아니셨다면 저도 방주를 따라 호남으로 내려갔을런지도 모릅니다. 방중의 고수들이 대거 움직이고 있는 중이라서……."

 옥면무영 호일랑이 말끝을 흐렸다.

 개방의 방주인 황엽의 성품으로 볼 때 현재의 한효월에게 굳이 뭔가를 숨길 리는 없다. 그 말은 옥면무영 호일랑이 알고 있는 일이라면 지금의 그에게 말을 하지 않을 리 없다는 의미다.

 '무슨 일로 그가 방중의 고수들을 따라오게 하면서까지 급거 호남으로 간 건가? 역시 그도 제천교주에 관한 일을?'

 잠시 생각에 잠겼던 한효월은 황엽의 능력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독고 사질녀에게 그 뒤에 다른 일은 없었는지?"

 "제가 알기로는 보구회주께서 엄한 감시를 붙여서 혼수상태를 벗어나지 않게 조치하는 일방, 여러 가지 방도를 찾고 있는 것으로 들었습니다. 곁에는 독고 전 맹주께서 계시니 누가 넘볼 수야 있겠습니까?"

 "봉황문과 독고 부인의 소식은?"

 "그게 좀 이상합니다.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데도 물속에 빠진 조약돌처럼 소식이 없군요. 그날 바로 화산을 떠났다고 들었는데…… 아!"

 말하던 옥면무영 호일랑이 한효월을 보았다.

 "감 총당주를 비롯한 좌 순찰 등이 한 대협이 화산을 떠난 직후, 화산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들의 종적 또한 묘연합니다. 본 방이 찾고 있지만 일은 많고 능력에 한계가 있어서 아직……."

 "때가 되면 나타나겠지요."

 한효월이 담담히 대꾸했다.

 '역시…….'

 그 모습을 보고 옥면무영 호일랑은 암중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 말을 한 의미는 감천형 등의 실종이 바로 당신과 연관된 것이 아니냐는 물음이라 할 수 있었다.

 거기에 대해서 한효월은 부인하지 않았다.

 굳이 말할 계제는 아니지만 그의 말에 대해서 시인을 한 셈이다.

 상대에 대한 예우라고 할 수 있었다.

 '흠, 그럼 그들을 어디로 간 거지?'

 화산을 벗어나자마자 꺼지듯 사라진 그들의 행적에 옥면무영 호일랑은 호기심이 동함은 참을 수가 없었다.

 "가능하다면 봉황문의 행적을 예의 주시, 그들을 좀 찾아주시오. 물론 맹주 부인도 같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한효월은 구대문파의 동정을 비롯한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 것을 옥면무영 호일랑과 더불어 잠시 더 이야기를 하다가 그 자리를 떠났다.

 그가 이 자리에서 옥면무영 호일랑과 만난 것은 이미 예정된 일이었다.

 그가 낙양성에 들어간 것은 그가 돌아왔다는 신호였었던 것이다.

 "……."

 한효월의 신형이 저만큼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던 옥면무영 호일랑도 그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잠시.

 남은 것은 백상이란 세월을 담은 암자 하나와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 뿐.

 사람의 기척이 사라진 다음.

 소리도 없이 한 사람이 그 자리에 나타났다.

 그의 모습은 참으로 해괴하였다.

 안개 같기도 하고 노을 빛 같기도 했다.

 있는 것 같으면서도 또한 없는 것 같아 보면서도 본 것 같지 않아 허깨비 같으니 괴이하기만 하다.

 복면을 한 것도 아니고 또 맨얼굴 같지도 않았다.

 보이는 것은 얼굴로 짐작되는 곳에서 은은히 드러난 눈빛뿐.

 하나 그 눈빛조차 강한 것이 아니다. 안개 속에 켜진 희미한 등잔과도 같다고나 할까.

 마치 허깨비처럼 그렇게 그 자리에서 일렁이던 그림자는 한효월이 사라진 곳을 향해 미끄러지듯이 사라져 갔다.

 그것으로 백상암에 일었던 작은 풍운은 마무리되는 듯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 괴영(怪影)이 사라지고 난 다음 다시 한 사람이 그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역시……."

 그는 괴영이 사라진 곳을 보고는 머리를 끄덕였다.

 "이 늙은이가 한나절을 숨도 못 쉬고 죽친 보람이 있긴 있군. 쥐새끼가 정말 있었단 말이시?"

 그는 등에 지고 있던 술 호로를 잡아당겨 목을 축였다.

 흩어진 머리카락에 너덜거리는 옷자락은 그가 거지임을 말한다.

 정광이 빛나는 그 눈은 그가 범상한 거지가 아님을 의미하지만 그는 전혀 급한 것이 없는 듯 다시금 술을 들이켰다.

 "꼬리가 달린 걸 알면서도 확인만 하고 그냥 두란 이유는 또 뭔가?"

 그는 머리를 저었다.

 "어린 친구가 도무지 속내를 짐작할 수 없으니…… 엽아(燁兒)가 방중에 처음 들어왔을 때 나를 그렇게 놀라게 하더니 저 친구는 더하군. 쯧쯧…… 망할 놈의 계집애 같으니! 거지 주제에 저런 기재를 좋아하니 그 일을 어찌할꼬?"

 그는 답답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사람들은 그를 개방의 독행신개라고 부른다.

*   *   *

 화음현(華陰縣).

 화산 아래 위치한 시진(市鎭).

 화산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다.

 오가는 사람이 많은 만큼 주루와 객잔이 많았고 화경루(華瓊樓)도 그중 하나다.

 중원의 고급 주루들은 대체로 전원(前院)과 후원(後院)이 나뉘어진다. 전원은 술을 파는 주루가 되고 후원은 객잔이 되는데, 화경루도 예외는 아니었다. 후원으로 들어서면 가운데 정원이 있고 좌우에서 방이 둘러싼 형태가 되어 전형적인 사합원(四合院)의 형태인데, 그 후원 안쪽으로는 다시 담으로 막힌 독채가 있어 귀빈을 접대할 수가 있는 구조였다.

 주자미는 바로 그 후원 독채 전체를 세 내어 여기에 묵고 있었다.

 한효월이 떠난 다음날, 그녀는 화산을 떠나왔다.

 구대문파.

 그들을 적대시하기도 애매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그 인면수심을 대하고는 더 이상 그들을 지킬 마음이 일지 않아서였다. 때마침 활염라 조과가 와서 군웅들의 중독을 대부분 해(解)하였으니 마음 편히 떠날 수 있기도 했다.

 창백하다 못해 투명하기조차 한 얼굴.

 사람의 피부가 이리 아름답게 변할 수 있음은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너무도 아름다워 요기롭기조차 하다. 피부가 투명해지면 안의 모든 것들이 드러나게 된다. 핏줄에 근육들까지…… 그것들이 아름다울 리가 없다.

 그러나 그녀의 피부는 그저 아름답고 투명하기만 하였다.

 잠들어 눈을 감고 있음에도 저러하거늘, 그녀가 눈을 뜨고 움직인다면 얼마나 가슴을 뒤흔들어 놓을 것인가.

 그런 그녀의 경세(驚世)할 미모를 내려다보면서 주자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단 하나밖에 없는 딸임에도, 이 세상에 못할 것이 없는 황족(皇族)임에도 손을 놓고 그저 바라보아야만 하는 그녀이기에 더욱 가슴이 아팠다.

 아니, 지난날 조금만 더 잘해주었더라도 이렇듯 미안하고 안쓰럽지는 않을 터이다.

 "아직 한 공자의 소식은 없는가?"

 주자미가 입을 열어 물었다.

 방 안에는 침대에 누운 독고경과 그 앞에 앉은 주자미뿐이다.

 "아직 없습니다."

 답은 방문 밖에서 들려왔다.

 밖은 대청이다.

 그녀를 그림자처럼 따르는 호위 용천성이 거기에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해독제를 찾으러 간다고 하고는 무엇을 하기에 이렇듯……."

 그녀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독고경의 손을 어루만졌다.

 사람의 손도, 피부도 아닌 것 같았다.

 여인의 피부는 필연적으로 부드럽기 마련이다. 특히나 잘 가꾼 피부라면 양지유가 엉기고 백옥(白玉) 운운하게 된다. 하지만 독고경의 피부는 그런 차원을 넘은 지 이미 오래였다.

 손을 대면 미끄러지는 투명한 피부.

 그 피부는 놀랍게도 아름답고 윤택이 있는 것만이 아니다. 칼을 들이밀어도 미끄러진다. 살을 베는 것이 아니라 그저 미끄러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물방울이 굴러 떨어져 내리듯이.

 독고경은 그렇게 현란한 피부를 드러낸 채로 눈을 감고서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잠은 인위적이다. 언제 어떻게 움직일지 몰라서 깨어나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미안하구나. 네게 정말 미안하구나……."

 주자미는 다시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마마, 금의위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무슨 일로?"

 "화산에서 마마를 뵈었던 천호 공자기인데, 직접 뵙고 말씀을 드리겠다고 합니다. 경사에서 황상(皇上)을 뵙고 오는 길이라고……."

 "기다리도록 전해라."

 "옛!"

 "마마를 뵙습니다!"

 주자미를 보자 기다리고 있던 천호 공자기는 급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무슨 일인가?"

 주자미는 의자에 앉으며 차가운 얼굴로 물었다.

 "지휘사사께서 보내신 전서(傳書)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가 두 손으로 올리는 전서를 시위 용천성이 받아 그녀에게 바쳤다.

 "그가 나에게 무슨 일로 글을 보냈단 말이냐?"

 "황상의 명을 받았다고만 알고 있을 뿐, 소관은 더 이상 아는 것이 없습니다!"

 천호 공자기는 깍듯이 머리를 숙였다.

 주자미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밀봉된 편지를 뜯었다. 관아에서 기밀을 요하는 글은 봉인(封印)을 붙이는 법이고 이 전서에도 봉인이 붙어 있었다.

 편지는 그리 길지 않았다.

 그러나 그 글을 읽는 주자미의 얼굴은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이 글이 사실이냐?"

 그녀가 고개를 들고서 물었다.

 "소관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천호 공자기가 머리를 숙인 채 대답했다.

 "알았다. 물러가거라."

 "옛!"

 천호 공자기가 물러간 뒤, 주자미가 말했다.

 "떠날 준비를 하라."

 "지금 말입니까?"

 용천성이 흠칫, 그녀를 바라보았다.

 "조금 더 어두워지면 떠나도록 하겠다."

 "알겠습니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주위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용천성과 호위들은 밖에서 떠날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이곳에는 주자미와 독고경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제천교가 비왕이라고 불렀던 건곤무적 독고해가 여기 같이 있었다. 나머지 보구회의 고수들은 이목을 고려하여 다른 곳에 거처하지만 언제라도 합류할 수가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공공연히 이런 객잔에 묵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건곤무적 독고해.

 그는 불조차 밝혀지지 않은 방에 조용히 누워 있었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그는 죽어도 죽지 않은 몸으로써 아직 존재하고 있었고 여전히 적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청동빛의 얼굴은 산 사람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얼굴을 내려다보는 주자미의 눈빛은 안타깝기만 했다.

 "무심한 사람…… 무심한 사람……."

 그녀가 중얼거렸다.

 떨리는 그녀의 손길이 그의 청동빛 얼굴을 쓰다듬는다.

 차갑고 딱딱한 느낌이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이따금 답답할 때마다 그가 있는 곳으로 와서 그를 본다.

 그는 말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그래도 그는 움직일 수가 있었다. 그것이 이따금 그가 죽지 않은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이 차가운 감촉은 그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님을 절감케 하고 만다.

 그가 이러한 위장부(偉丈夫)가 아니었다면 차라리 그를 잊을 수 있으련만, 그를 보고 나서 또 다른 남자를 어찌 찾을 수 있으랴.

 그럴 수 있었다면 그 오랜 세월 남해에서 머물지도 않았으리라.

 "내게 이런 짐을 지우고 나에게 더 이상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건가요? 그 배은망덕한 자들을 위해 지금도 당신을 움직여야 한다는 건가요?"

 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그녀가 머리를 저었다.

 그때였다.

 그녀의 안색이 돌변했다.

 건곤무적 독고해가 갑자기 두 눈을 번쩍 떴기 때문이다.

 소스라쳐 놀란 그녀가 주춤 뒤로 물러났다.

 건곤무적 독고해는 강시다.

 지난날의 그가 누구였든 간에 명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강시가 지금의 그다. 그런데 그런 그가 그녀가 명을 내리지도 않았는데 눈을 뜬 것이다.

 하지만 그뿐, 그는 더 이상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대체 이게 무슨 일……!"

 중얼거리던 주자미의 안색이 다시 달라졌다.

 어디선가 묘한 소리가 들리고 있는 듯했다.

 "이 소리는?"

 그 소리에 그녀가 귀를 기울이는 순간.

 "악!"

 조용하던 차에 느닷없이 들려온 날카로운 비명은 마치 고요한 밤에 접시를 깨는 것과 같아 격렬하기 그지없었다.

 바람처럼 주자미의 신형이 방 안에서 사라졌다.

 그 방에는 건곤무적 독고해가 눈을 뜬 채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괴괴한 고요가 내려앉았다.

 "무슨 일이냐?"

 방을 뛰쳐나온 주자미가 소리쳤다.

 용천성이 독고경이 있는 방으로 뛰쳐 들어가고 있음을 본 것이다.

 "손을! 손을 멈추십시오!"

 용천성의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팡! 파파파…….

 맹렬한 파공음이 터져 나오는가 싶더니 용천성이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면서 뒤로 밀려 나왔다.

 와장창!

 안에서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경아!"

 심상치 않음을 느낀 주자미가 바닥을 찼다.

 그녀의 신형이 바람과 같이 용천성의 곁을 스쳐 안으로 날아들었다.

 그리곤 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졌다.

 독고경.

 그녀가 일어나 있었다.

 전신을 금제하기 위해서 관절에 놓은 금침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있었다. 그녀는 침의(寢衣)를 입고 있었다. 늘 침상에 누워 있었기에 침의만을 입고 있었는데, 그 침의를 걸친 채로 그녀는 침상에 걸터앉아 있었다.

 혼자가 아니었다.

 가볍게 앞으로 뻗은 손에 한 사람의 목을 마치 장난처럼 틀어쥐고 있는데, 파랗게 질린 그 사람은 독고경을 돌보기 위해 고용된 시녀였다.

 독고경은 차고 아름다운 얼굴을 들어 날아드는 주자미를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웃음 빛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리곤 그녀의 손에 들린 시녀가 무서운 기세로 주자미를 향해 날아들었다.

 쏴아악!

 파공음이 마치 태풍이 휘모는 것 같다.

 "무슨 짓이냐!"

 주자미가 다급히 소리치면서 시녀를 받았다.

 목이 제멋대로 흔들거렸다.

 일견해도 이미 목이 부러진 것을 알 수 있을 정도.

 그때 그녀를 향해 독고경의 손이 무서운 속도로 날아들었다. 바로 그 무서운 마교의 혼단백절수였다.

 "혼단백절수?"

 주자미의 안색이 돌변했다.

 마교의 혼단백절수는 공포의 무공이다.

 지척에서 강궁(强弓)을 쏘아낸 듯한 섬전과 같은 속도를 피해내기는 누구라도 불가능하다. 그렇게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부딪치는 순간에 깨진 얼음 끝 같은 경기가 심맥을 공격해 적을 일패도지(一敗塗地)케 하기에.

 다급한 김에 주자미가 손에 든 시녀를 앞으로 내밀었다.

 파각!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시녀가 훌쩍 뒤로 튕겨져 나갔다.

 "경아! 정신 차리거라!"

 주자미가 날카롭게 고함치면서 독고경을 덮쳐 갔다.

 그녀의 무공은 불가(佛家)에 기본을 두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 외침에도 불가정종의 내공이 운용되어 사자후(獅子吼)와 같은 위세가 있었다.

 일수에 시녀를 날려 보낸 독고경은 그 외침에 멈칫했다.

 마치 유리처럼 투명한 그 눈빛에 잠시 망설임이 일었다. 그녀가 눈을 껌벅이는 순간에 그녀를 향해 주자미가 날아들었다.

 가슴팍의 혼혈(昏穴)을 제압하려는 순간, 어디선가 묘한 음향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러자 갑자기 독고경의 눈에서 빛이 튕겨져 올랐다.

 "오호호호-!"

 날카로운 웃음소리와 함께 독고경이 손을 들어 주자미를 쳤다.

 그 속도는 놀랍도록 신쾌(迅快)하여 주자미가 독고경을 제압한다면 그 순간에 독고경의 일격 또한 주자미의 얼굴을 칠 터였다.

 저 가공할 일격을 얼굴에 맞고도 버틸 수가 있을까?

 그녀가 힘을 쓰기 전에 그녀를 제압할 수 있다면 가능한 일이지만 그것은 생명을 걸어야 하는 모험이었고, 지금 이 마당에서 주자미가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만 할 이유가 없었다.

 주자미는 나직이 호통치면서 양손을 교차하여 그녀의 공격을 막았다.

 팡!

 맹렬한 폭음과 함께 그 폭음 못지 않은 경기가 폭풍처럼 일어나 방 안을 휩쓸었다.

 기물이 뒤집어져 날아가는 와중에 독고경도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비틀, 뒤로 물러나다가 뒤에 있던 침상에 걸려 털썩 뒤로 주저앉고 말았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주자미가 달려들었다.

 그녀 또한 충격을 받았지만 이 기회를 놓치면 자칫 큰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음을 잘 알기에 숨 쉴 틈을 주지 않고 달려드는 것이다. 손가락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마치 꽃잎이 모진 바람에 휘날려 떨어지는 것 같아 시야가 온통 손 그림자로 가득 차는 것 같았다.

 일컬어 난화불혈수(蘭花拂穴手)!

 파앙!

 "이런!"

 헛손질을 한 주자미의 얼굴에 낭패의 기색이 어렸다.

 주자미의 앞에는 독고경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결정적인 순간에 독고경이 침대에서 한 바퀴를 뒹굴어 창문으로 뛰쳐나가 버렸던 것이다.

 "마마!"

 용천성이 다급하게 외쳤다.

 두 사람이 한 번 부딪치는 그 서슬에 아직도 맹렬한 경풍이 방 안을 맴돌고 있었다. 게다가 두 사람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 어떻게 손을 쓰지도 못한 채로 문밖에서 소리치는 것이다.

 "경아를 막앗!"

 다급한 외침과 함께 주자미가 옷자락을 펄럭이는 가운데 바람처럼 창문을 뚫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독고경은 전신 관절을 금침으로 제압당한 상태였다.

 정상적이라면 몸조차 가누지 못해야 했다.

 그런데도 이런 위력을 보인 것이다.

 만에 하나 그녀가 마음대로 운신(運身)할 수 있었다면 주자미는 독고경을 쫓는 것이 아니라 자칫 목을 조심해야 했을런지도 몰랐다. 독고경의 무공은 혼수상태에서 또다시 높아진 것이다. 그런 그녀가 만에 하나라도 도주해 버린다면 어디로 가서 그녀를 찾을 것인가.

 "아……!"

 다급하게 창밖으로 뛰쳐나온 주자미는 멍청해져 그 자리에 굳어졌다.

 정말, 정말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기에.

 독고해.

 이미 죽어 강시가 된 그가 눈앞에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앞에는 독고경이 노해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놀랍게도 독고해는 그녀의 손을 움켜쥔 채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횃불 같은 눈을 번쩍이면서…….

 "그 아이를 제압해요!"

 주자미가 다급히 소리쳤다.

 "……."

 독고해가 묘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전에 없던 일이다.

 무슨 일이든 그녀의 말 한마디라면 조금도 망설임이 없던 그였다.

 그런데 저런 태도라니?

 "어서 그 아이를 제압하세요!"

 주자미가 손을 들어 흔들며 다시금 소리쳤다.

 그녀의 손목에서 취록빛 팔찌가 빛을 반사해 낸다.

 묘한 빛이 일렁이던 독고해의 눈빛이 다시금 무심하게 돌아갔다.

 그리고 그는 손을 내밀어 독고경의 마혈을 눌렀다. 미친 듯 손을 휘둘러 독고해를 치고 있던 독고경이 그 자리에 늘어졌다. 그 공포의 혼단백절수도 독고해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듯했다.

 "당신……."

 주자미가 신음처럼 입을 열었다.

 독고해는 석상처럼 우뚝 서 있었다.

 늘어진 독고경의 손목을 움켜잡고서.

 독고경은 독고해에게 손목을 잡힌 채 정신을 잃고 땅에 늘어져 있었다. 만에 하나라도 독고해가 제정신이었다면 하나밖에 없는 딸을 그렇게 잡고 있을 리 만무였다.

 "내 말이…… 들리나요?"

 주자미가 물었다.

 그녀의 음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어떤 기대로써.

 "……."

 하지만 독고해의 표정은 무심하기만 하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 무표정한 모습으로 독고경의 손목을 잡고서 우뚝 선 채로 그녀를 보고 있을 뿐이다.

 "그 아이를 이리 주세요."

 암암리에 길게 한숨을 내쉰 주자미가 손을 내밀었다.

 독고해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제압된 독고경을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용천성 등은 이미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이 잘 훈련된 고수라는 것은 그들의 움직임에서 드러난다.

 명을 받지 않아도 일부는 그들의 주위에, 또 일부는 담장 부근으로 흩어져 외인의 침입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독고경을 넘겨받던 주자미의 안색이 문득 조금 달라졌다.

 어디선가 묘한 소리가 들리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너무 화급한 상황이라 미처 느끼지 못했던 소리였다.

 '무슨 소리지?'

 잠시 귀를 기울이고 있던 주자미의 안색이 달라졌다.

 가늘게 들려오는 피리 소리.

 그것이 지난날 그녀가 독고경을 불러냈던 퉁소 소리와 흡사했던 것이다. 마치 속삭이는 듯한 그 소리…….

 '호혼지곡(呼魂之曲)!'

 주자미가 나직이 신음을 흘렸다.

 비로소 그녀는 왜 독고경이 깨어났고 독고해가 움직인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호혼지곡이란 것은 혼을 부르는 노래라는 의미다.

 바로 혼을 잃어버린 독고해와 같은 존재를 움직이거나 부를 때 쓰는 일종의 신호였다. 그녀 또한 독고해와 호정군(護正軍)을 지휘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음조(音調)를 알고 있었다. 물론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은 이것과는 다른 것이지만 그 곡에 깃든 의미를 알아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적이 찾아왔다!'

 그녀의 얼굴에 긴장이 피어 올랐다.

 사방의 어둠이 짙게 밀려와 주위를 덮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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