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首 용사혼잡(龍蛇混雜)
-쫓고 쫓기다.
물고 물리는 가운데, 새로운 인물이 속출하다.
어둠 속.
가냘픈 피리 소리는 들릴 듯 말 듯 끊임없이 이어진다.
마치 눈앞에서 누군가가 손짓하고 있는 듯한 느낌의 그 소리.
마혈을 제압당했음에도 독고경은 전신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일어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수혈을 눌러서야 그녀는 겨우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버들눈썹이 곤두서 있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음을 보아 그녀가 깊은 잠에 빠져들지 않고 있음은 분명했다.
몸은 잠에 빠져들어도 정신은 피리 소리에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던 주자미가 입을 열었다.
"출발 준비를 시키도록."
"지금…… 말입니까?"
뜻밖이란 듯 문 쪽에서 되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주자미의 음성은 단호하다.
"알겠습니다. 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용천성이 허리를 굽혔다.
그가 나간 뒤, 주자미는 침상 옆에 우뚝 서 있는 독고해를 돌아보았다.
"지금 이 소리가 들리나요?"
독고해는 그녀를 바라본다.
무표정한 얼굴. 그러나 그 눈에는 묘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눈빛이 흔들린다고나 할까?
주자미가 손을 들어 보였다.
그 손에 채워진 취옥환(翠玉環)에서 푸른빛이 빛난다.
그 취옥환을 바라본 독고해의 눈빛이 다시금 무심하게 돌아갔다.
"가서 지금 이 피리를 연주하는 자를 잡아오세요. 우리는 이곳을 떠날 테니 뒤를 따라오도록 하고. 잡지 못하면 바로 귀환해야 함은 잊지 말도록 하세요."
"……."
독고해는 묵묵히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명을 기다리는 것이다.
"가세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독고해는 바람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벽에는 피칠이 되어 있었다.
독고경의 손에 목이 꺾어져 즉사한 시녀. 그녀가 독고경의 일격에 날아가 벽에 부딪치면서 만들어진 흔적이다.
그 장본인 독고경은 잔뜩 버들눈썹을 찡그린 채로 눈을 감은 채 침상에 쓰러지듯 누워 있었다. 자신이 살인한 것도 알지 못한 채.
"용서할 수 없어!"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주자미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 것인가!
자신의 딸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놓은 자를.
"준비가 끝났습니다!"
밖에서 용천성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예정되었던 마차는 두 대였다.
독고경과 주자미가 탈 마차와 독고해를 태울 마차. 그렇게 두 대였지만 지금은 한 대면 족했다. 독고해가 먼저 떠나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경루의 뒷문으로 빠져나온 마차는 여전히 두 대였다.
용천성이 말을 타고 앞선 마차는 20여 기(騎)의 호위를 받으면서 빠르게 어둠을 헤치며 앞으로 내닫고 있었다.
말도 사람도 밤을 대비하여 충분히 쉰 상태였기에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 행보는 상당히 빨라 삽시간에 화음현을 벗어나 관도로 접어들었다.
그들이 향하는 방향은 남쪽.
남하(南下)한다는 의미다. 이미 방향이 정해져 있는 듯 그들의 행보에는 거침이 없다.
그렇게 단숨에 백여 리를 달려가자 어둠은 더욱 짙어졌다.
조각달이 허공에 걸려 있을 뿐, 숲 속에 펼쳐진 관도는 고즈넉하기 이를 데 없어 그들의 말발굽 소리밖에는 들리지 않는다.
먼저 떠났던 독고해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였다.
시위 용천성이 갑자기 말고삐를 낚아챘다.
이히히힝!
달리던 말이 급하게 앞굽을 쳐들면서 급히 정지했다.
그러나 옆을 달리던 동료 시위 사도준(司徒俊)은 앞으로 몇 걸음 더 나가서 말을 멈추었다.
다급한 소리가 연달아 들리면서 뒤를 따르던 마차도 멎었다.
'무슨 일인가?'
주자미의 물음이 용천성에게로 날아들었다.
용천성은 앞을 주시하면서 전음으로 답했다.
'누군가가 앞에서 길을 막고 서 있습니다.'
'…….'
주자미는 답을 하지 않았다.
용천성은 결코 경망한 성격이 아니다. 그런 그가 정면 돌파를 하지 않고 급히 마차를 멈추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심상치 않다는 의미이기에 더 이상 묻지 않는 것이다.
그들의 앞.
관도에는 한 사람이 달빛에 길게 그림자를 끌며 서 있었다.
언제부터 거기에 서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20여 기의 준마가 호위하는 마차 두 대가 바람처럼 달려오고 있는데도 길 가운데 서서 움직이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다른 뜻이 있다는 의미. 그 외에는 달리 해석할 수가 없는 일인 것이다.
머리 위로 조각달이 보이긴 하지만 무성한 숲이 좌우로 펼쳐져 있다. 백여 리를 달렸다고는 하지만 아직 진령산맥의 산세를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숲도 하늘을 찌를 듯 울창하게 짙기만 했다.
그 관도 가운데에서 그는 달려오는 마차를 보고 있었다.
"누구냐?"
몇 걸음 앞서 나간 시위 사도준이 외쳐 물었다.
말 위에 탄 몸이 활처럼 굽어 있었다. 언제라도 검을 뽑을 수 있고 몸을 날릴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너희 주인을 만나고자 기다렸다."
흑영이 답했다.
뜻밖에도 그 음성은 여인의 것이었다.
"당신은……."
그제서야 그녀를 알아본 시위 사도준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달빛에 드러난 여인의 얼굴.
그녀는 화산에서 홀연히 사라졌던 봉설란이었다.
지난날 늘 온화하여 맹주부의 사람들에게 자면성모라고까지 불렸던 그녀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냉정하고 딱딱히 굳은, 전혀 다른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가서 전하거라. 내가 뵙기를 청한다고."
"혼자이시오?"
"여기 나 말고 또 누가 있단 말이냐?"
"……."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사도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잠시 기다리시오. 용 형! 회주께 아뢰어주시게."
"알겠소."
용천상은 말을 몰아 뒤에 있는 마차의 옆으로 다가섰다.
"봉 여협이 뵙기를 청합니다."
안에서 답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내 그는 머리를 돌려 봉설란 쪽을 바라보았다.
"회주께서 접견하시겠다고 하셨으니 이리 오시오."
봉설란은 가타부타 아무런 말도 없이 조용히 걸어왔다.
사박사박…….
경공을 사용하지 않으니 잠시 시간이 흘렀고 장내에 있던 사람들 모두의 눈은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모두가 긴장된 눈으로 그녀를 주시한다.
여차직하면 일제히 검을 뽑아 난도질이라도 하려는 듯한 기세.
그러나 그러한 것을 느끼면서도 봉설란의 태도는 여일(如一)했다.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에 옷자락을 표표히 날리며 미끄러지듯이 걸어 마침내 그녀는 마차의 앞에 도달했다.
"잠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마차의 앞으로 다가온 그녀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마차 안에서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얼굴도 보여주지 않을 건가요?"
"얼굴을 봐야 할 일이 있나? 왜? 경아가 너를 따라가지 않으니 무슨 일인가 염탐을 하려 나타난 것이냐?"
차고 오만한 음성이 냉소를 터뜨렸다.
봉설란의 얼굴이 굳어졌다.
야행의를 차려입은 그녀의 몸매는 지금도 풍성했고 또 늘씬했다. 게다가 등에다 한 자루 보검까지 질러 꽂았으니 당당하기조차 하다. 겉으로는 검은색 피풍(披風)을 걸쳤으니 드러난 것은 얼굴뿐.
펄럭이는 검은 구름 가운데 흰 얼굴만 둥둥 떠올라 움직이는 것만 같다.
봉설란은 잠시 숨을 고르는 듯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요?"
주자미가 차갑게 코웃음 쳤다.
"아니라고 할 생각이냐?"
봉설란은 길게 숨을 들이키더니 냉랭히 말했다.
"한 가지 확인하려고 굳이 먼 길을 왔더니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군요."
말과 함께 그녀는 바람 소리가 나도록 등을 돌렸다.
그대로 떠나려는 몸짓.
하지만 누구도 그녀를 잡지 않았다.
잠시 주춤했던 봉설란은 냉소를 터뜨렸다. 그녀는 한차례 발을 구르고는 그대로 신형을 날리려 했다.
바로 그 순간이다.
"무엇을 확인하려는 것이지?"
주자미의 음성이 그녀를 잡았다.
봉설란의 신형이 그 자리에 섰다.
그녀는 등을 보인 채로 말을 받았다.
"당신이 그분의 복수를 할 것인지 아닌지를……."
"복수? 누구에게?"
"누구? 그걸 몰라서 묻는단 말인가요?"
갑자기 봉설란이 격하게 소리치면서 신형을 돌렸다.
"그 가증한 구대문파의 간적들을 두고 누구에게 복수를 할 것이냐고?"
"그 사실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명확?"
봉설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가 밝혀지지 않았다는 건가요? 구대문파의 간적들 스스로가 제천교를 조직한 것이 그들임을 자인했음에도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죠?"
"그들을 조종한 자. 제천교를 조직한 것이 누군지 밝혀지지 않았다."
"그 따위 변명을 믿는다는 건가요?"
"믿지 않는다."
봉설란의 얼굴에 의혹이 깃들었다.
"그런데……."
"하지만 어떤 자가 이러한 국면을 조성한 것인지는 알아내야만 하겠다. 그것이 그분의 유지를 따르는 길이기도 할 테니까."
"그걸 말이라고!"
봉설란이 격하게 발을 굴렀다.
흙먼지가 그녀의 몸짓에 따라 관도로부터 피어 올랐다.
"스스로 죽어서까지 천하를 위해 살아야 했던 그분을 모해한 자들! 그런 인면수심의 악도에게 무슨 사정을 봐줄 게 있죠? 그들에게 죄과(罪科)를 치르게 하고서 배후를 조사해도 늦지 않아요. 누가 어떻게 했든 그들은 결코 책임을 벗을 수 없으니까! 그런데도 이렇게 망설이고 있는 것은 설마 다른 생각이……."
봉설란의 외침은 싸늘한 웃음소리에 잘리고 말았다.
"봉설란. 네가 감히 나를 추궁할 생각이냐?"
마차에서 싸늘한 음성이 꾸짖듯 들려왔다.
"어찌 감히 초민(草民)이 마마께……."
봉설란이 천만의 말씀이란 듯 머리를 저었다.
하지만 과장된 그녀의 태도 어디에서도 두려운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갑자기 숨죽인 긴장이 그녀와 마차 사이로 찾아들었다.
그것을 깨뜨린 사람은 주자미였다.
"너는 그분이 왜 너에게 호정군(護正軍)을 맡기지 않고 이미 그의 곁을 떠난 나에게 그 일을 하게 한 것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난데없는 물음에 봉설란은 멈칫했다가 답했다.
"그거야 그분이 내가 무공을 지닌 줄 모르고 있었기……."
"오호호호……."
날카로운 웃음이 그녀의 말을 자르며 마차 안에서 터져 나왔다.
"과연 그럴까? 내 생각에는 이미 오늘날의 사태를 내다보았기에 그랬을 것 같은데?"
봉설란의 미간에 내 천 자가 생겨났다.
"무슨 뜻인가요?"
"그렇지 않으냐? 무엇이 그분의 뜻인지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천방지축 날뛰는 철부지에게 너라면 그런 대임을 맡길 수 있었을 것 같으냐?"
"그, 그런……!"
봉설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경거망동하지 말고 조용히 있어!"
차갑고 오만한 주자미의 음성이 들려왔다.
"내게 명령하지 마세요!"
봉설란이 이를 악물고서 소리쳤다.
콰당!
마차의 문이 열렸다.
'아니?'
봉설란의 눈이 커졌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주자미가 내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가 나오고 있는 마차는 지금까지 봉서란이 바라보고 이야기하던 그 마차가 아니었다. 비어 있는 것으로 짐작했던 앞에 있는 마차였다.
"명령하지 말라고?"
주자미가 얼음 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
어둠이 짙게 깔린 숲.
그 숲을 가로지른 관도에는 당대를 풍미하는 두 여걸이 우뚝하다.
불어오는 밤바람은 흙먼지를 휘몰고도 모자라 그녀들의 치맛자락을 흔들어놓는다.
그럼에도 그들은 미동도 없이 서로를 노려보면서 우뚝 서 있다.
"네가 감히 나에게 대들겠다는 것이냐?"
주자미가 눈을 부릅뜬 채로 코웃음 쳤다.
"존귀한 신분으로서 명하신다면 어찌 감히! 하지만 무림 중의 신분으로서 명한다면…… 용납할 수 없는 일. 나라에 황법(皇法)이 있듯이 집안에는 가법이 있고 무림에도 법이 있으니, 지아비의 복수를 하지 말라는 명을 어찌 들을 수 있으리오?"
봉설란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의 그 결연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지난날 자상했던 자면성모로 돌아간 듯한 모습이었다.
"평생을 그분만을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그분이 이런 참변을 당하지만 않았더라면 결코 이렇듯 무림에 나와 불피풍우(不避風雨)하며 동분서주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녀는 입술을 물었다.
"그분을 그렇게 만든 자들이 누구이든 간에 그들을 용서할 순 없어요.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이 일에서만큼은 뜻을 따를 수가 없군요!"
봉설란은 안색을 굳히며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뜻이 다른 것을 확실히 알았으니 저는 저대로 행동하지요."
그녀가 떠날 뜻을 보이자 주자미는 냉소했다.
"네 마음대로 왔다가 네 마음대로 가겠다는 것이냐?"
봉설란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이 몸을 잡아두기라도 하겠다는 말인가요?"
"못할 것도 없지!"
"오호호호호……."
봉설란이 돌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수 있을까요? 아니, 그래서 무슨 의미가 있죠? 우리끼리 자중지란(自中之亂)을 일으킨다면 누가 좋아할까요? 구대문파? 아니면 암중의 흉수?"
그 말에 주자미가 코웃음 쳤다.
"너를 상대로 싸움을 벌이고 말고 할 것이 있을까?"
봉설란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사람을 너무 핍박하시는군요."
주자미의 얼굴은 얼음으로 조각해 놓은 듯했다.
"경아의 참혹한 모습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로는 부족하지."
"그건 또 무슨 말이죠?"
"흥!"
주자미가 냉소를 터뜨렸다.
얼음이 풀풀 날리는 것 같았다.
"네 스스로에게 물어보아라. 경아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그게 무슨 의미죠? 경아에게 무슨 짓이라니?"
굳은 표정으로 주자미를 바라보던 봉설란이 천천히 입을 열어 물었다.
"흥!"
주자미는 코웃음만 친다.
심증은 있되, 물증이 없으니 말을 하지 못한다는 뜻.
봉설란이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쳤다.
"정말 너무하군요. 그렇게 애를 써도 경아는 나에게 한 번도 마음을 열어준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 나에게 그런 누명을 씌운다는 건가요? 경아의 그 상태가 나로 인해서 생긴 일이라구요? 내가 그 아이를 해쳤다는 말인가요?"
심중의 노기를 참을 수 없는 듯 봉설란은 손으로 가슴을 누르면서 새파랗게 질려 발을 굴렀다.
공력을 일으킨 듯 땅이 울렸다.
그 위세에 흙먼지가 풀썩, 일고 묵묵히 서 있던 말들이 놀라 투레질을 하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 앞에 선 주자미의 얼굴엔 미동도 없다.
"네게 무공을 가르쳐 준 사람이 누구지?"
그녀의 음성은 여전히 차고 오만하다.
"……."
봉설란은 말없이 그녀를 보았다.
"천형에게 말하기를 그분이 네게 호신무공을 가르쳐 주었다고 했는데, 과연 그러하냐? 그 정도의 무공으로 이런 경지에 이르렀다고? 더구나 그분은 네가 무공을 지닌 줄 몰랐다고 하지 않았더냐?"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가요?"
"무슨 뜻인지는 네 스스로가 생각해 보면 알겠지!"
말과 함께 주자미는 미련없이 몸을 돌려 마차에 올랐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자 말에서 내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용천성이 바로 문을 닫았다.
"가자!"
그리고 그는 곧바로 말 위에 뛰어올라 소리쳤다.
앞선 사도준이 말을 달리기 시작하자 마차는 빠르게 달려 그 자리에서 사라져 갔다.
"……."
봉설란은 어리둥절한 빛으로 사라지는 마차를 보고 있었다.
방금까지 자신을 잡아먹을 듯, 강제로 잡아둘 것처럼 이야기하다가 이처럼 갑자기 떠나 버리자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문득 그녀의 뒤에서 침착한 음성이 들려왔다.
"역시 간단치 않은 사람이군요……."
"무슨 뜻이죠?"
봉설란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그것은 그녀가 나타난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는 뜻.
"그녀는 우리가 이곳에 매복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부인을 잡아두겠다는 말도 떠보기 위한 것이었을 겁니다."
음성이 다시 말했다.
나타난 사람.
그는 깨끗한 학창의를 입었다. 동파건에다 손에는 한 자루의 섭선을 들었다. 섭선을 휘적휘적 부치면서 숲 속에서 걸어나오는 그는 이제 40대 중반의 선비. 바로 봉황문의 문곡이었다.
"떠봐서 뭘 하겠다는 건가요?"
"여러 가지 예측이 가능하지요. 부인의 태도에 따라서 행동이 달라졌을 겁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저렇게 달아나듯 사라지는 거죠?"
"뭔가 일이 생겼을 수도 있겠지요. 아니면 우리에게 의문을 남겨주어 앞으로의 행도(行途)에 뭔가 차질을 빚게 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습니다. 그녀는 보통 여인이 아닙니다. 독고 맹주는 사람을 잘 선택했군요……."
그 말에 봉설란의 안색이 달라졌다.
싸늘하고 음침하게 가라앉은 그녀의 낯빛.
"그게 무슨 뜻이죠?"
그녀의 되물음에 문곡의 깊은 눈에는 아차 하는 빛이 지나간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찰나일 뿐이다. 누군가가 그의 눈을 바짝 들여다보고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알아보기는 정말 쉽지 않을 정도였다.
"독고 맹주는 일세의 영웅이었습니다. 그가 행한 행사에는 다 뜻이 있었고 천하무림의 형세는 어지럽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그가 예측한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가 그처럼 심혈을 기울였던 구대문파가 그를 배신했다는 것이, 그가 그것을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 옥의 티였을 따름이지요."
묘한 말로 핵심을 빗겨간 문곡은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는 그녀에게 말했다.
"문주께서 근일 중 출관(出關)하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문주께서?"
봉설란의 안색이 달라졌다.
"언제?"
"근일 중이라는 말씀만 들었습니다. 때가 되었다라는 전언(傳言)만 있어서 소생으로서도 더 이상 드릴 말씀은 없군요."
그의 음성은 정중하다.
하지만 더 이상의 답을 들을 수 없음을 봉설란은 알 수 있었다.
약속에 의해서 그들을 부릴 수는 있으되, 그들의 수뇌는 봉설란이 아니었음이 그녀가 가진 한계이기도 했다.
"가시지요. 지금 바로 출발해야 하겠습니다."
"어디로?"
"남하해야 할 것 같습니다. 봉신지비에 관한 소문이 남쪽에서 들려오고 있다는 보고가 있었는데, 문주께서 출관하시는 이유도 아마 그것 때문인 듯합니다."
* * *
한효월이 화음현 주자미가 묵고 있던 곳에 당도한 것은 그녀가 그곳을 떠난 지 반나절이나 지난 후였다.
점소이의 말에 한효월은 어이가 없는 듯한 표정으로 멀뚱히 서 있었다.
그녀는 그가 방도를 알아올 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리기로 했었다. 독고경의 상태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어서 어떻게든 손을 써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도 없이 가버렸다는 것인가?
"어디로 간다는 말도 남겨놓지 않았단 말인가?"
한효월의 물음에 점소이는 머리를 긁적였다.
"소인이 들은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갑자기 떠나셔서……."
난감한 표정으로 화경루를 나서던 한효월은 다가오는 사람 하나를 보게 되었다.
날렵한 생김의 그 30대 사내는 한효월의 앞에 와 허리를 굽혔다.
"한 대협이십니까?"
"뉘시오?"
그는 대답 대신 한효월에게 품에서 서찰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회주께서 한 대협께 남긴 것입니다."
그는 한효월이 서찰을 받는 것을 보자 다시 한 번 허리를 굽히고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몸을 돌려 사라져 버렸다.
물론 그를 돌려 세울 수도 있는 일이지만 한효월은 그러지 않았다. 사람을 남겨 서찰을 보냈다면 할 말이 여기에 다 담겨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서신을 개봉하자 잘 흘려 쓴 행서체의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짐작대로 주자미가 그에게 남긴 글이었다. 그녀의 성정(性情)을 말하듯 글씨체는 날카롭고도 깨끗한 데다 힘이 있어 여인의 것 같지 않았다.
<급한 일이 있어서 동정호로 가게 되었소.
가능하다면 최선을 다하여 뒤를 따라와 주시기 바라오.
만약 동정호에 도달하기 전에 따라잡지 못한다면 악양루에서 만나기로 합시다. 루에 사람을 보낼 테니 표기(標記)를 찾으시면 쉬 만날 수 있을 것이오.>
글은 간략하다.
서명 대신 끝에 구(仇)라는 글자 하나가 남겨져 있을 뿐이다.
자신의 이름 대신 보구회의 구(仇) 한 자만을 남겨놓은 것은 그녀가 복수라는 일념을 가슴에 새기고 있음을 말하는 듯하였다.
'동정호란 말인가?'
한효월의 안색이 묘하게 달라졌다.
동정호라니…….
제천교의 교주 또한 동정호로 남하하고 있다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젠 그녀마저 동정호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동정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한효월은 수중의 서찰을 구겨 버리곤 그 자리를 떠났다.
한효월이 화경루를 떠난 후, 사람들 틈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바람처럼 한효월이 버린 서찰을 낚아채 사라졌다. 누가 보고 있었어도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빠른 신법이었다.
한효월이 이곳에 도착한 것은 밤을 도와 달려온 다음인지라 새벽녘이었다. 그러니 지켜보는 사람도 거의 없는 데다가 새벽 안개가 자욱한 터라 그의 그러한 행동을 지켜본 사람은 없다고 할 수 있었다.
그는 한효월의 모든 행동을 지켜본 터였다.
한효월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도 쉽게 나서지 못했던 것은 그 서신을 너무 쉽게 버렸기 때문이다. 한효월과 같은 사람은 결코 실수를 하는 법이 없다.
그런데 저렇게 아무렇게나…….
그것이 그를 망설이게 했다.
하지만 한효월이 버린 서찰에의 유혹은 너무 컸다. 그래서 그는 마침내 그 서찰을 낚아챘다. 서찰을 손에 넣은 그는 바람처럼 한효월의 뒤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고 암중으로 그 서찰을 펴보았다.
'이럴 수가!'
서찰을 펴보는 순간에 그는 아연실색했다.
서찰이 그의 손 안에서 흔적도 없이 가루로 화해 흘러내렸기 때문이다.
손 안의 종이를 가루로 만드는 것은 그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가루가 된 종이가 제 형상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그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경지인 것이다.
서찰은 아무렇게나 버린 것이 아니었다.
* * *
화산에서 동정호까지 남하하는 길은 수천 리 길이다.
가장 좋은 것은 배를 타고 수로를 따라 내려오는 것이다.
남선북마(南船北馬)라는 말 그대로 남쪽에는 수많은 하천과 호수들로 물길을 이루고 있다. 거기에다 그 물길을 잇는 운하들이 역대 왕조를 거치면서 끊임없이 건설되어 남쪽에서의 이동은 배가 더 빠르다는 말이 있다.
적벽대전(赤壁大戰)이라는 거대한 수전(水戰)은 남쪽이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효월은 그러지 않았다.
배를 타고 가면 편하기는 하되, 그와 같은 절세고수의 경공보다는 빠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의 문제점은 그렇게 해서 목적지에 달하게 되면 피로가 쌓여 강적을 만난다면 자칫 낭패를 당할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한효월은 천생고질로 인해 장기간 무리를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온 절충안이 최대한 달리다가 힘들 때에는 배에 의탁하기였다.
무창(武昌)에 이르면 수십 개의 호수들 가운데로 물길이 동정호까지 이어진다.
한효월은 물길을 통해 무창에 이르러 있었다.
무창은 선인의 고사(故事)로 유명한 황학루가 있는 호북성의 요지(要地)다.
남북 교통의 요충지로써 역대로 병가에서 다투던 곳이 바로 무창.
무창의 서쪽에 있는 황곡산(黃鵠山)은 따로히 황학산이라고도 불리는데, 이유는 거기에 바로 그 유명한 황학루가 있기 때문이다.
황학루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그 옛날 신씨(辛氏)라고 하는 사람이 황곡산에서 술을 팔았는데, 마침 지나던 한 사람의 도사(道士)가 와서 술을 마시게 되었다. 신씨가 그를 잘 대접하자 도사는 벽에다 학 한 마리를 그렸다. 그런데 그가 손뼉을 치자 황학이 벽에서 살아 나와 박자에 맞춰 춤을 추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신씨는 거부가 되었다.
십 년이 흐른 후에 도사가 다시 와서 피리를 불자 황학은 벽에서 빠져나와 도사를 태우고 날아가 버렸다 한다.
그 뒤로 신씨가 이곳에다 루를 짓고 이름을 황학루라 하였으니 수많은 재자가인들이 이곳을 시제(詩題)로 삼아 끊임이 없었다.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최호(崔顥)의 등황학루(登黃鶴樓)다.
석인기승백운거(昔人己乘白雲去)
차지공여황학루(此地空餘黃鶴樓).
황학일거불복반(黃鶴一去不復返)
백운천재공유유(白雲千載空悠悠)…….
옛사람 이미 흰 구름을 타고 가버렸거니
이곳에는 황학루만 홀로 남았구나.
황학은 한번 떠나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흰 구름만 천 년을 두고 변함없이 유유하구나…….
한효월 또한 그 고사를 알고 있었고, 한번쯤은 황학루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이 마당에 그런 곳까지 가볼 수 있도록 한가한 그가 아니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 아직도 주자미를 만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효월은 감회 어린 빛으로 황학루에 올라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누가 본다면 정말 싯귀나 읊는 한가로운 유생과도 같은 모습이다.
사방에 휘갈겨진 수많은 명사들의 싯귀와 분주(奔走)하는 말과 같이 달려간 호방한 필체들……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고사를 떠올리면서 각자의 뜻을 남겨둔 흔적들이다.
한가로운 사람처럼 그렇게 사방으로 뻗어 나간 물길을 바라보던 한효월의 눈에서 문득 빛이 인다.
석양을 등지고 저 멀리 커다란 배 한 척이 정박하고 있음을 본 까닭이다. 그 배가 눈길을 끈 것은 배가 클 뿐 아니라, 이곳에서는 보기 힘든 범선(帆船)이었기 때문이다. 원양(遠洋)으로 나가는 배가 아니라면 저런 돛을 쓰는 법이 아니고 원양에서 온 배는 저런 모습으로 이런 내륙까지는 들어오지 않는 법이다.
결국 저 배는 특별한 목적이 있거나 아니라면 대단한 배경을 지닌 사람이 타고 있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고관(高官)이 타고 있다는 건가?'
그 범선을 바라보던 한효월의 가늘게 뜬 눈에서 빛이 쏟아진다.
그렇다면 혹 주자미와 관련이 있을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천조신안을 발동하여 그 범선을 살펴볼 생각인 것이다.
범선과의 거리는 백여 장이 넘지만 그의 안력이라면…….
그런데 그때였다.
"최호의 등황학루가 쓸 만하긴 하지만 어찌 이백의 고범원영벽공진(孤帆遠影碧空盡) 유견장강천제류(唯見長江天際流)에다 비길 수야 있겠습니까?"
옆에서 낭랑히 들려온 소리.
40대 후반의 유생이 옆에 뒷짐을 진 남삼인(藍衫人)에게 벽에 쓴 글들을 손짓하면서 말을 하고 있다.
"그렇게 따진다면 이백의 천재성 앞에서 빛날 시가 몇 편이나 되겠나? 세상에는 천재보다 평범한 사람들이 더 많은 법이니, 그렇기에 그들의 뛰어남이 돋보이는 게지. 우리야 그저 선인(先人)이 남긴 숨결을 느끼면 족하지."
남삼인이 담담히 웃으며 휘적휘적 섭선을 부친다.
나이는 마흔이 채 되지 못한 듯, 그러나 기이하게 전혀 얼굴에는 수염이 보이지 않는다. 하나 눈빛이 강렬하고 당당한 기풍이 그의 전신에서 느껴진다.
그런 그와 한효월의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그는 문득 웃음기 어린 얼굴로 한효월에게 묻는다.
"형제의 생각은 어떠하시오?"
그가 자신에게 물어올 줄은 뜻밖이다. 하지만 그 물음에 말문이 막힐 한효월은 아니었다.
"선인의 자취는 그 하나하나가 그분들의 심혈이니,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옳겠지요. 평가야 자신이 가진 그릇만큼 할 수 있는 것이니 굳이 옥석을 가린다는 것이 무의미하지 않을런지?"
"핫하하하……."
남삼인은 섭선으로 손바닥을 두드리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옳소! 옳아……. 과연 탁월한 식견이오! 작은 것 하나하나에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소인배들이나 할 일이지."
"그……."
처음 입을 열었던 유생의 얼굴이 우거지상이 된다.
그러나 그는 남삼인에게 꺼리는 점이 있는 듯 감히 입을 열어 항변하지는 못한다.
그때 한 사람이 급히 루에 올랐다.
"무슨 일이냐?"
남삼인이 그를 보았다.
날렵한 차림의 30대 무인은 환도를 차고 있는데, 눈빛이 날카롭다.
그는 남삼인에게 주먹 쥔 손을 수평으로 들어 보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무창 지부(知府)가 찾아와 뵙기를 청합니다."
남삼인은 미간을 찡그렸다.
"지부가? 내가 이곳에 있음을 그가 어찌 알고?"
"아마 대인(大人)의 배를 보고 사방으로 수소문을 한 모양입니다."
"할 일이나 하지 무슨 쓸데없는 짓을. 가서 공무나 보도록 이르라."
"옛!"
무인은 다시금 팔을 들고서 허리를 굽혀 보이고는 날듯이 아래로 내려갔다.
'군례(軍禮)……?'
그의 행동을 보던 한효월의 얼굴에 묘한 빛이 어린다.
그가 행한 것은 군에서 상관에게 행하는 군례다. 설마 하니 이 둥글둥글하게 생긴 남삼인이 장군이란 말인가?
명조는 주원장 자체가 문인(文人)이 아니었기 때문에 초기에 권력을 잡았던 사람은 모두 무인(武人)이었다. 승상을 폐하고 만든 최고위직인 내각대학사는 명예직에 불과했고 실질적으로 가장 높은 문인의 직위는 한림학사였지만 그 품계는 겨우 정오품.
그러니 이 남삼인이 장군이라면 대단한 힘을 가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디를 봐도 장군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잠시 쉴까 했더니 그도 쉽지 않군. 만나서 반가웠네."
남삼인이 한효월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관이라면 보기 드물게 소탈한 사람이다. 관부에 줄만 닿아 있어도 거드름을 피우는 것이 보통임을 감안한다면.
"소생도."
한효월이 그를 향해 포권을 해 보였다.
그렇게 그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황학루를 내려갔다.
일단 그가 움직이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우루루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밖으로 나서자 또 여기저기에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호위들임이 분명한데, 그 움직임에는 자로 잰 듯한 절도가 있다. 역시 간단한 사람이 아님이 분명했다.
그가 떠나고 조금 있다가 한효월도 황학루를 내려왔다. 그리고 그는 강안(江岸)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배로 향했다.
갈대 숲 사이에 정박해 있는 그 작은 배는 그가 타고 온 것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갈대 사이에 숨어 지켜보고 있는 눈이 있었다.
중조산에서부터 그림자처럼 그를 따르고 있는 눈.
그는 한효월이 배에 오르는 것을 확인하자 옆에 있는 버드나무의 밑에 있는 돌을 힐끗 바라보곤 그 자리를 떠났다. 그 돌 밑에는 그가 남긴 것이 있었다. 일각 이내에 누군가가 그것을 찾아갈 것이었다.
그 자리를 떠난 그는 한효월의 배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갈대 숲을 따라 움직이면 흔적도 없이 추적이 가능했다.
게다가 그는 열흘쯤은 자지 않을 수 있었고 사흘 정도는 쉬지 않고 걸을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그의 추적은 귀신도 눈치 챌 수 없다고 하여 무흔(無痕)이라 하였다.
무흔은 소리도 없이 배를 따랐다.
배가 아무리 빨라도 그와 같은 추적의 고수에게는 느림보 거북과 토끼의 경주와 같다. 한효월이 전력으로 몸을 날릴 때 그를 따르는 것이 어렵지, 지금과 같은 경우라면 그야말로 놀고 먹기에 다름이 아니다.
그런데…….
갑자기 무흔은 전신이 팽팽히 긴장됨을 직감한다.
이것은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음을 느꼈을 때 절로 그의 감각이 반응하는 것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
그는 숨을 죽였다.
움직임도 멈추었다.
숨 막히는 긴장의 순간. 흐르는 물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저 멀리서 사람들의 음성이 물을 타고 번지지만 이곳과는 상관없다.
그때였다.
"으으…… 망할 놈의 거북이 새끼. 어딜 가서 꼬랑지도 안 뵈냐?"
난데없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앳된 음성인지라 무흔은 일순 어이가 없었다.
이제 보니 한 소년이 무명옷을 입고서 그의 앞쪽 가로누운 나뭇등걸에 걸터앉아 있었다. 허리춤에는 피리 하나를 꽂은 그 소년은 뭔가를 들고서 중얼중얼 읽다가 따분한 듯 기지개를 켜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 긴장했었던 모양이군…….'
무흔은 암중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런데 그때 들려온 중얼거림.
"그는 황학루에 올라 관부의 고관으로 짐작되는 자를 만났습니다. 그가 누군지를 조사토록 사람을 붙였습니다. 그는 다시 배에 올랐는데 그대로 동정호로 내려갈 것으로 보입니다. 무흔."
소년이 들고 있던 종이를 들여다보면서 뭔가를 읽어 내렸다.
그 소리에 무흔의 안색이 돌변했다.
그가 읽는 것이야말로 그가 조금 전에 은밀하게 묻어둔 보고서였기에.
순간,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과 무흔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소년이 씩, 웃었다.
잔광(殘光)으로 남은 노을 빛을 받으며 앉은 그의 눈빛은 맑고 찼다. 희미하게 땅거미가 지는 가운데 묻힌 그의 모습은 기이하기조차 하다.
"난 여기서 반 나절이나 무흔이란 놈을 기다리는데 이 더러븐 거북이 꼬랑지 같은 놈이 도통 나타나질 않네. 혹시 그놈 어디 있는지 아슈?"
아주 짜증난다는 태도로 머리까지 벅벅 긁어댄다.
그의 물음에 무흔의 눈빛이 묘하게 일렁였다.
상대는 그를 안다.
알 뿐만 아니라 그를 놀리기까지 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 살기가 바람처럼 은밀히 전광처럼 빠르게 스쳐 갔다.
그의 심상치 않은 눈빛을 보자 소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갑자기 왜 그렇게 미친개 눈이 되는 게요? 혹시 미친개에게 물린 거북이라도 본 적이 있는 거요?"
다급하기 이를 데 없이 마구 손을 내저으니 그 손에 들린 편지가 금방이라도 찢겨져 나갈 듯 펄럭인다.
이런 모욕을 당하고서 참을 수는 없다.
하지만 무흔은 달랐다.
그 와중에도 그는 혹시라도 모를 매복을 생각하고 주위를 살폈다. 다른 흔적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한효월을 태운 배는 그사이에도 계속해서 흘러 내려가고 있었다.
설혹 매복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는 그 매복을 충분히 벗어날 자신이 있었다. 그가 평생을 두고 익힌 은형잠둔술(隱形潛遁術)은 어떤 경우에라도 스스로를 지킬 수 있으니 당연한 일.
결정을 내린 무흔은 소년을 덮쳐 갔다.
머뭇거릴 때와는 달리 일단 움직이자 그 움직임은 비할 바 없이 빨랐다.
한데.
"윽!"
앞으로 덮쳐 가던 무흔이 갑자기 무엇에 튕기듯 덮쳐 갈 때보다 더욱 빠르게 뒤로 물러나는 것이 아닌가.
"이건?"
그가 가슴을 움켜쥔 채로 신음했다.
그 모습을 보자 소년은 당황한 듯 물었다.
"저런…… 미친개를 잡으려고 묻어둔 덫을 밟았나 보네? 당신 정말 미친개요? 흠…… 그나저나 이 빌어먹을 무흔이란 놈은 어디서 꾸물거리느라고 아직도 안 기어나오는 거지?"
"넌…… 누구냐?"
소년을 노려보고 있던 무흔이 묘한 억양을 가진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러자 소년은 피식, 웃었다.
"그건 알아서 뭘 하려고? 혹 모르지, 네가 무흔이란 거북이라면 이 어르신네의 존호를 알려줄런지도. 흐음, 네가 무흔이란 놈 맞냐?"
방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태도.
정색을 한 얼굴로 빤히 쳐다본다.
"……."
무흔은 일그러진 눈빛으로 소년을 노려보았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귓구멍에서 연기가 날 일이다.
그는 암중으로 운기하고 있었다.
방금 소년을 덮치다가 그는 가슴에 암기를 맞았다.
분명히 소년이 쏜 것은 아니고 갈대 숲 어디선가 날아온 것. 그것은 소년이 혼자가 아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독이 있는지 알 수 없어 그는 운기를 하여 혈도를 막는 한편 주위를 살피는 중이었다.
문득 그가 입을 열었다.
"혹시, 네가 한효월의 시종인 유성이냐?"
그의 물음에 소년은 뜻밖이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어라?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쏴, 쏴아아…….
물 흐르는 소리가 고요하다.
그러나 이 맹랑한 소년의 앞에 선 무흔은 심각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설마 했더니 정말로 눈앞에 나타난 놈이 한효월의 시종인 유성이라니!
그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린다.
유성이 나타났다는 것은 그의 존재를 한효월도 알고 있었다는 것.
그것은 그의 처지가 대단히 위험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대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나타날 리가 없지 않은가. 그것을 모를 리 없는 그인지라 이미 유성을 없애는 것은 포기한 상태였다. 가장 급한 것은 그가 살아남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주변 지세가 아주 묘하다.
앞으로는 쓰러진 커다란 나뭇등걸에 유성이 걸터앉아 있어 그를 타 넘어가야만 한다. 그런데 그의 뒤로는 갈대가 우거져 있어 거기에 무엇이 있을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옆으로도 마찬가지.
갈대는 강 쪽을 제외하면 삼면을 모두 가릴 만큼 무성하다.
"흠? 눈알을 굴리는 걸 보니 도망갈 생각을 하나 보지? 이 어르신네가 그렇게 무서운가?"
유성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 그가 몸을 일으킴을 보자 무흔은 다급하게 뒤로 몸을 날렸다. 그는 천생 수영을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앞으로 덮쳐 가기에는 무엇인지 모를 암기가 겁난다. 그 상황에서 유성이 몸을 일으키자 그것이 신호라고 단정한 그는 냅다 도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싸우는 것은 그의 임무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가 몸을 날리는 순간.
"이제야 오는 건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침중한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무서운 도기(刀氣)가 일어 그를 덮쳐 왔다.
그 기세는 대단하기 짝이 없어서 마치 날벼락이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무흔은 대경했지만 이미 준비를 한 상태였던지라 급히 틀어 옆으로 날았다.
상대의 공격이 허탕을 치는 순간에 그의 옆을 통과할 생각.
평소라면 당연히 상대는 허를 찔릴 신속무비한 움직임이었다.
"핫하하하…… 쥐새끼라면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
천둥 같은 웃음소리와 함께 기다렸다는 듯이 가공할 도기가 다시금 그의 앞에서 쏟아져 오는 것이 아닌가.
놀랍게도 상대는 허장성세로 앞에서 한칼을 후려내고는 무흔이 도주하는 곳으로 와서 일도를 그어낸 것이다.
무흔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저 가공할 상대의 공격에 정면으로 뛰어든 꼴이니 어찌 무사하기를 바랄 것인가.
"크윽……!"
섬광과 신음이 같이 일었다.
"대단하군……."
무흔을 막아선 사람이 말했다.
그는 손에 한 자루 장도(長刀)를 빗겨 들고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장도는 세상에서 패도(覇刀)라고 일컫는다. 그 빗겨 든 패도의 끝에서는 방울방울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다.
패도 감천형.
그가 여기에 나타난 것이다.
"……."
무흔은 가슴을 움켜잡은 채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위기일발의 순간에 양손을 합쳐 패도를 막아내면서 뒤로 물러설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가공할 도기(刀氣)를 온전히 피할 순 없었다. 가슴이 갈라져 피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신음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튕기듯 바람처럼 뒤로 물러나고 있을 따름.
"저런! 하필이면 그쪽으로 갔나?"
그 광경을 보고 유성이 혀를 찼다.
그 말에 가슴이 섬뜩해진 무흔은 뒤를 돌아보려다 그만 비틀거리며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런 그의 뒤에는 좌백이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안색은 여전히 냉랭했다.
먼저 암기를 날린 것도 그였고 지금 무흔을 제압한 사람도 그였다.
"고기를 잡았으니, 흔적을 지워야겠군요. 그건 제가 하죠."
유성이 훌쩍 날아오면서 말했다.
"간혹 사숙의 의중을 알 수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이자를 처리하려면 굳이 여기까지 끌고 오지 않았어도 될 텐데……."
문득 좌백이 중얼거렸다.
감천형이 미미하게 웃었다.
"너도 인정하지 않았더냐? 사숙이 우리보다 머리가 좋다고. 그렇다면 그 말대로 따를 수밖에. 뭔가 뜻이 있겠지."
"……."
좌백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감천형은 말하지 않아도 사제의 심정을 짐작했다.
천하를 질타하던 신분에 있었던 그들 사형제였다. 그런데 이젠 불피풍우하면서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면서 시킨 일을 한다. 그가 존경하는 사숙이라 할지라도 평범한 사람이라면 견디기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감천형은 좌백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
그가 감천형을 바라본다.
짙게 그늘지는 노을 속에 두 사형제는 그렇게 서로를 보았다.
그리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기다려 보자. 때가 오겠지."
아직 그들은 젊었다.
그리고 그들의 힘은 지금도 충분히 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