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권-第一首 암중모색(暗中摸索) (93/113)

대풍운연의 10

龍華를 찾아서

第一首  암중모색(暗中摸索)

-움직이는 고수들

군웅(群雄)들은 제각기 봉신지비를 향해 움직이다

 어둠은 짙게 세상을 덮었다.

 간혹 불던 바람도 숨을 죽였다. 하늘 멀리 구름이 보이긴 하지만 휘영(暉映)한 달빛을 가리지는 못한다.

 숨죽인 바람이 구름을 몰아와 달을 가리기는 예전에 글렀다.

 달빛은 나타난 사람을 드러내기에는 충분히 밝았다.

 둥그렇게 솟은 등에서 부서지는 달빛은 그를 대변하는 표징이다. 고개를 든 그의 얼굴을 본 남해용왕은 미간을 찡그렸다.

 "여긴 어떻게 온 건가?"

 얼굴에 차가운 빛이 서린다.

 널브러진 여인에게서 몸을 일으키는 사람은 등이 굽은 꼽추였다.

 하지만 등이 굽었음에도 그의 몸체는 보통 사람을 능가하고 남음이 있을만큼 당당했다. 자부심 강한 남해용왕이 껄끄럽게 생각할 꼽추는 이 세상에 오직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요동권왕 막풍!

 "설마 다른 사람이 몰라서 그놈을 그냥 버려두고 있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겠지? 만약 그렇다면 세간에 전해진 남해용왕의 소문은 모두 헛것이겠군……."

 요동권왕 막풍의 말에 남해용왕은 냉소를 머금었다.

 "무슨 생각을 하든 마음대로."

 그는 성큼 앞으로 한 발을 내딛었다.

 순간, 가공할 기세가 요동권왕 막풍에게서 일어 그의 앞을 막았다.

 "해보겠다는 건가?"

 남해용왕이 그를 쏘아보았다.

 말과 함께 한 걸음을 그가 더 나서자 음유한 기운이 파도처럼 일어 요동권왕에게서 일어나는 기세에 맞섰다.

 휙휙!

 갑자기 주변에 회오리바람이 일기 시작한다.

 그들은 보통 말하는 고수들의 경지를 이미 오래전에 초월한 절대고수들이라서 기세만으로도 이미 사람을 죽이고도 남을 수준이었다. 회오리바람이 폭풍처럼 일어 주위를 떨리게 한다.

 "핫하하…… 그 광오한 성질은 듣던 대로군. 그런 성질이니 제일 먼저 나서서 피를 토하고 용선으로 도주, 틀어박힐 수밖에 없었겠지! 그렇게 고생을 하고서도 조금도 성질은 변하지 않았군그래?"

 요동권왕 막풍이 냉소를 흘려냈다.

 그의 말에 비웃음이 서려 있음을 짐작한 남해용왕의 얼굴에 음산한 살기가 어렸다.

 "감히 본왕의 앞에서 큰소리를 치다니, 요동 변방의 오랑캐 따위가……."

 "하하…… 바다의 해적 나부랭이가 오랑캐 운운이라니! 하긴 만주 벌판을 달리는 그 웅혼(雄渾)한 기상을 어찌 해적 따위가 알겠나? 아니아니, 요동 앞바다의 해적들은 사내다운 점이 없지 않은데 물이 다른가?"

 요동권왕 막풍은 조금의 사정도 없이 상대를 매도했다.

 남해용왕은 누구보다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이런 모욕을 받고 참을 사람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는 자신이 남에게 행한 것은 아무렇지도 않고 당연한 것이지만 남이 자신에게 행한 것은 털끝만한 것이라도 결코 잘못됨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죽고 싶은가?"

 "호오, 그럴 능력이 있나?"

 "독불장군은 아무런 소용이 없지! 요동 땅의 전설이라 한들 이곳에서야 고장난명(孤掌難鳴)! 그 주먹 하나로 뭘 할 수 있겠나?"

 "흐음…… 남해에서 패거리를 불러 모으더니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로군. 어디 그 패거리들 한번 불러보지? 이 일대 모든 사람들을 다 불러 모으게."

 요동권왕 막풍이 냉소를 치자 남해용왕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그는 용선에서 상처를 치료하면서 암중으로 남해에 연락하여 고수들을 불러 모았다. 그가 다시 움직인 것도 그들이 당도했기에 자신을 가지고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 꼽추 놈이 그것을 안단 말인가?

 "못할 것 같은가?"

 "어부지리를 주려면 뭘 못할까?"

 요동권왕 막풍의 말에 남해용왕은 미간을 찡그렸다.

 "어부지리?"

 "누가 어부가 될는지 보고 싶다면 한번 뎀벼봐."

 올 테면 오라는 듯 요동권왕 막풍이 말했다.

 상대가 이렇게 나오면 아무리 남해용왕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하기 힘들다. 하물며 상대는 만만한 자가 아니었다. 그와 싸우는 것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로 인해서 파생될 결과가 꺼려지는 것이다. 그는 싸우기 위해서 여기 있는 것이 아니라 봉신지약을 손에 넣기 위해서 왔으니까.

 "뭘 원하나?"

 남해용왕이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단순히 노려보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도 죽음의 저주를 담은 회오리바람은 일대를 휘감고 있었다.

 "하하…… 이건 뜻밖이군! 남해용왕이 이처럼 참을성이 많다니?"

 "싸우고 싶다는 건가?"

 "천만에."

 요동권왕 막풍은 머리를 저었다.

 그리고 그는 정색을 했다.

 "봉신의 전설은 천하십왕만이 풀 수 있는 자격이 있지.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천하십성의 후예만이…… 그럴 자격이 있어. 하지만 지금 상황은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내가 보기에 당신은 미끼를 문 고기처럼 보이는군."

 "미끼?"

 남해용왕의 눈빛이 음침히 변했다.

 "누가 감히…… 천하십왕을 상대로 장난을 친단 말인가?"

 "아니라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

 그 말에 남해용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말을 못하지?"

 "무슨 말을 하기 위해서 온 건가?"

 잠시 그를 노려보고 있던 남해용왕이 다시 물었다.

 "생각해 보면 알겠지."

 말과 함께 요동권왕 막풍은 슬쩍 어깨를 흔들었다.

 찰나간에 그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가 이처럼 수월하게 사라질 것을 몰랐던 남해용왕은 신음을 흘려야 했다.

 저렇게 사라질 것이라면 왜 여기에 나타났던 것이란 말인가?

 그가 남긴 말들이 가슴을 누른다.

 '흥! 너 따위 오랑캐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을 본왕이 생각하지 못했다면 어찌 남해의 패자로서 군림할 수가 있었겠느냐?'

 암중에 냉소를 흘린 남해용왕은 관제묘를 벗어났다.

 관제묘 후원을 벗어난 그는 일직선으로 동정호를 향해 달렸다.

 목표를 정해둔 그의 움직임은 누구도 추적하기 어렵도록 빨랐다. 비록 밤이라 성문이 닫혀 있지만 그에게 있어 담을 넘는 것은 너무 간단한 일. 거대한 박쥐와 같이 훌훌 허공을 가로지른 그는 아예 땅으로 내려서지 않고서 동정호를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남들이 보든 말든 전력을 다해서 자신의 근거라고 할 수 있는 용선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누가 보았다면 할 수 있는 말.

 죽기 살기로 용선을 향해서 달린다는 것이 옳은 표현이었다.

 달리는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비조(飛鳥)처럼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는 놀라운 경공이 펼쳐졌고, 그는 단숨에 칠십여 리를 가로질러서 용선이 기다리고 있는 곳까지 당도할 수 있었다.

 달빛 아래.

 용선은 여전히 동정호에 떠 있다.

 호변에서 십여 장가량이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남해용왕과 같은 절대고수에게 있어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한 번 도약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거리이기 때문이다.

 그는 달빛을 가르며 훨훨 날아 용선 안으로 사라졌다.

 그가 날아들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용선은 천천히 호면을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이미 어떤 약속이 되어 있었음이 분명했다.

 남해로 돌아가려는 듯이 용선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호수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돛까지 활짝 편 상태라 그 속도는 매우 빨랐다. 남해용선은 대해를 주름잡던 배라서 돛을 펴고 노를 저어대자 날 듯이 물살을 가르며 사라져 갔다.

 배가 움직임에 따라 호변에서도 은밀한 움직임이 일었다.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진다. 그러나 어둠에 묻혀 그러한 움직임은 누구도 쉽게 느끼기 힘들었다.

 겉으로는 배가 사라져도 달빛만 무심히 호수를 비추고 있을 따름.

 {c#}*   *   *

 악양성.

 그 성 밖에 위치한 장원(莊園) 하나.

 어둠 속에 묻힌 장원은 거대한 괴물처럼 보였다.

 장원 군데군데 밝혀져 있던 불빛도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둘…… 꺼지고 장원은 어둠에 잠긴 채로 잠들어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소리도 없는 움직임이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장원은 잠들고 있는 듯했지만 어둠이 짙게 내린 장원의 후원 쪽으로 난 문은 이미 열려 있었고 그 문으로 한 떼의 사람들이 연기처럼 밀려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십여 명의 흑의인이 어둠 속에서 연기처럼 묻혔다.

 뒤이어 다시 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그들의 뒤로 한 채의 가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다시 가마의 뒤를 따른다.

 모두 해서 서른 명가량의 흑의인들이 옹위하는 가운데 가마는 날 듯이 장원을 빠져나와 어둠을 뚫고 달리기 시작했다.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고 밤길을 가고 있음에도 불을 밝힌 사람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움직이는 속도는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기 어렵도록 빨랐다. 그들 개개인이 모두 고수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장원 후원을 빠져나가서 일직선으로 호변을 향했다.

 어둠 속에서 숲을 가로지르는 그들.

 숲을 지나 갈대와 잡풀이 무성한 들판으로 들어서게 된 그들은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한 사람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기에.

 어둠 속에서도 뚜렷이 드러나는 백의를 걸쳤다. 손에 든 것은 한 자루의 장검. 검사들은 늘 검을 곁에서 떼어놓지 않는다. 등에 메고 다니기도 하고 들고 다니기도 하며, 혹은 옆구리에다 걸고 다니기도 한다. 어떤 경우든지 그와 가장 가까운 곳에, 늘 뽑기 쉬운 위치에 있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그는 아예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백의는 어둠 속에서 선명히 드러났다. 늘어뜨린 검은 어둠 속에서 뿌옇게 빛을 흘린다.

 묘한 느낌이었다.

 단순히 그렇게 검을 빼 들고 서 있을 뿐인데 거대한 흰색 절벽이 버티고 서 있는 것만 같았다. 그가 비키지 않는다면 그곳으로는 전진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느낌.

 휙휙-

 앞선 흑의인들 열 명이 소리없이 날아올랐다.

 어둠을 가르는 섬광들.

 그들에게서 검도가 뿜어져 나왔고, 장권이 경기를 휘몰고 백의인을 향해 덮쳐 갔다.

 가히 산사태가 나는 듯한 기세였다.

 무공을 모르는 자라 할지라도 혼비백산, 공포에 질릴 무서운 공격이었다. 달려가던 흑의인들은 앞을 가로막은 백의검수를 발견하자 누구냐고 묻지도 않았다.

 소리없이 날아올랐을 뿐이다.

 그리고는 가해지는 공격!

 그들은 보았다.

 백의인의 손에 들린 장검이 위로 치켜 들리는 것을.

 단지 그것뿐인 것 같았다.

 늘어뜨린 검이 위로 치켜 올라간 것.

 그런데 그 한 번의 손짓에 그를 향해 덮쳐 갔던 흑의인 열이 쓰러졌다.

 뿌연 달무리와 같은 검기가 섬광처럼 이는가 했더니 사라진 것뿐이다. 하지만 그 한 번의 손짓에 그를 향해서 그처럼 무섭게 달려들던 흑의인 열이 한 줌 이슬처럼 모두 무너져 내렸다. 앞선 다섯은 거의 즉사를 한 듯 말 그대로 둔중하게 대지에 처박혔다. 나머지 다섯은 튕겨 나가 금세 일어나지 못하고 버둥거렸다.

 찰칵! 칵…….

 그 검기를 막았던 도검이 마치 철편에 부딪친 수수깡처럼 반 토막으로 부러졌고 검기에 노출된 몸이 반 토막으로 갈라져 피가 뿜어졌다.

 공포스러운 일검이었다.

 백의검사는 일검을 그어냈던 몸짓 그대로 몸을 반쯤 돌린 채로 있었다.

 정면을 보고 있던 얼굴이 측면으로 돌아간 상태.

 달빛에 드러난 얼굴은 고요하기만 하다.

 그 나이는 이제 40대 정도로 보이지만 청수하여 나이를 쉽게 알기 어렵다.

 스팟-!

 가마를 둘러싸고 달려오던 흑의인들은 그 무서운 광경을 보고도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중 열이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처음 공격은 앞선 자들이 일제히 흩어지면서 밀려왔었다.

 그러나 이번 공격은 절반씩 하늘과 땅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그 뒤를 나머지 열이 다시 밀려오고 있어서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는 일에 아무런 거리낌도 없는 듯 보였다.

 순간.

 "멈춰라."

 낮은 호통.

 하늘로 날아올라 덮쳐 가던 흑의인들이 허공에서 재주를 넘으며 뒤로 날았고 땅으로 밀려오던 자들 또한 땅을 차고 뒤로 돌아갔다. 나머지 흑의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이미 가마를 둘러싼 모습으로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을 따름이다.

 한 사람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복면을 한 대한.

 그는 허리에 찬 대도를 한 손으로 누른 채로 모습을 드러냈다.

 용행호보(龍行虎步)!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살기가 인다.

 그것은 마치 잘 벼른 날처럼 그의 걸음마다 날이 세워지고 있었다. 성큼성큼 다가서던 그의 걸음이 백의검사와 가까워지자 차츰 느려지기 시작했다.

 걸음은 느려졌다.

 하나 찰나에 찰나를 더해 기세는 무섭게 강해지고 있었다. 형용하자면 얇은 칼 하나하나를 걸음마다 그의 앞에다 세우고 있는 듯했다. 그의 걸음마다 칼이 모여 점점 형체를 이루고 거대한 도기를 형성해 나가는 그런 형국이었다.

 백의검사는 여전히 그 모습, 미동도 없다.

 일검을 휘두른 모습 그대로이니 눈은 비스듬히 앞을 향해 다가오는 복면대한을 쳐다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층층단애지도(層層斷崖之刀)……. 쏟아지는 도기로 절벽을 이루니 무엇이 그것을 견딜까? 하나 절벽이 무너지고 난 다음이라면 더 이상 무너질 것이 없으니 그것으로 끝일 터."

 그의 입에서 무거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

 순간, 다가오고 있던 복면대한의 눈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그가 강호에 나온 이래로 이 일도를 막아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거니와, 그 일도를 알아본 사람조차 처음 보았던 것이다. 그러한 놀람은 다가오던 그의 기세에 미세한 빈틈을 노출시켜 그처럼 무섭던 기세를 크게 감소케 하는 결과를 낳았다.

 물론 평범한 사람이 본다면 아무런 변동을 느낄 수 없을 것이겠지만 절세고수가 본다면 그 순간은 이미 목숨을 내놓아야 할 틈이었다.

 그것으로 승부가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백의검사는 공격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측면을 보여주고 서 있는 모습은 마치 이런데도 공격을 하지 못하는가 비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으음…….'

 복면대한의 심중에 신음이 흘렀다.

 갑자기 적이 커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 한 음성이 들려와 그의 걸음을 막았다.

 그 음성이 때맞춰 들려오지 않았다면 이미 기호지세에 오른 복면대한은 앞으로 나가는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을 것이었다. 실로 시기적절하게 들려온 음성이었다.

 "과연 고려검왕……."

 낭랑한 웃음소리가 뒤이어 울려 나온다.

 "물러서라. 천하십왕 중 일좌(一座)인 고려검왕을 상대하려면 예를 갖춰야지, 어찌 일개 범부를 상대하듯 할 수 있겠는가?"

 그 말에 천천히 백의검사, 고려검왕이 시선을 돌려 가마를 보았다.

 가마는 흑의인들에게 둘러싸인 채 고요하다. 과연 그 속에서 방금의 그 말이 흘러나왔는지조차 알기 힘들다.

 "말은 하되, 모습을 보이긴 힘드는 것인가?"

 "핫하하하……."

 낭랑한 웃음소리.

 그것과 함께 가마의 문이 열렸다.

 그 안에는 한 사람의 선비가 학익선을 쥔 채로 단정히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 모습을 보면서 고려검왕은 냉소를 흘렸다.

 "뜻밖이군. 이렇게 쉽게 모습을 드러내다니……."

 "한순간의 실책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하하…… 기왕 드러난 정체를 계속해서 숨기고자 하는 자라면 어찌 현명하다 할 수 있겠나? 더구나 당신과 같은 사람 앞에서."

 가마 안의 사람은 다시금 낭랑히 웃었다.

 천하의 고려검왕, 당대 최고의 고수.

 불가일세의 그 천하십왕 중 한 사람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음에도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모습을 보이는 그 사람이야말로 당대의 풍운아 천기선생이었다. 따로히 제천교의 교주라는 신분을 가진 그는 태연한 모습으로 앉아 고려검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왜 본 교주의 앞을 가로막은 것인지 물어도 되겠소?"

 천기선생은 정색을 하고 물었다.

 "어디를 가는 것인가?"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고려검왕의 되물음.

 "정화가 올 때까지 기다릴 작정이오? 당신 혼자서 우리 모두를 상대로 말이오?"

 그 말에 대해서 다시 천기선생 공일도는 웃으며 물었다.

 고려검왕은 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이 침잠히 가라앉았다.

 상대가 자신의 움직임을 꿰뚫고 있음은 그로서도 뜻밖인 까닭이다.

 "그래서 당신에게 무슨 이득이 있소?"

 "……."

 고려검왕은 묵묵히 그를 바라볼 뿐이다.

 "중화(中華)라 자존자대하는 자들의 개가 되어서 그 발을 핥아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이오? 당신은 수호신문의 계승자요. 수호신문은 그 옛날 천손(天孫)의 후계가 아니오? 그런 수호신문의 후계인 당신이 기꺼이 그 오만한 자들의 개가 되어 명을 받든다면 아마 당신의 선조들께서는 치욕으로 눈을 감지 못할 것이오."

 "대원이라 불린 초원의 이리들 또한 그 못지않았지. 중원의 주인이 누가 되든,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 민족이 주인 되지 못한 이상……."

 고려검왕은 냉소를 흘렸다.

 "하긴 그렇지. 하지만 말이오."

 천기선생이 문득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당신이 본 교주를 여기에 붙들어두어 무슨 이득이 있겠소?"

 "……."

 "우리가 동패구상(同敗俱傷)한들, 아니면 정화가 대군을 휘몰고 달려올 때까지 시간을 벌어 본 교주의 발길을 붙잡아놓는다 할지라도 그게 당신들에게 무슨 이득이 된단 말이오?"

 "……."

 고려검왕은 묵묵히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당신이 도와 나를 잡는다고 한들, 그게 당신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것이오.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복원(復元)을 꿈꾸고 있소! 위대한 말발굽 소리가 다시금 천지를 진동케 할……. 천하가 어지러우면 당신들에게도 기회가 생길 것이고 당신들을 괴롭힐 대국은 힘을 쓰지 못할 것인데 무엇 하러 그들에게 빌미를 주려는 것이오? 게다가 당신이 나를 잡지 못하고 쫓아다닌다면…… 하하…… 그동안 그들은 당신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것이 아니오?'

 그의 이번 말은 전음지성으로 들려왔다.

 "……."

 고려검왕의 눈빛이 묘하게 굳어졌다.

 천기선생의 마지막 말이 의미심장하게 그의 심중을 흔든 것이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했지만 그 약속을 과연 지킬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저들은 늘 요구를 들어주면 또 다른 요구를 해왔었다. 자신이 이미 한 번 요구를 들어준 이상, 또 다른 요구를 조선에 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때 자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오늘이 아니라도 기회는 있을 터……. 우리는 앞으로도 자주 만나게 되지 않겠소?'

 웃음기 어린 전음지성이 다시 들려왔다.

 "……."

 파라락…….

 밤바람이 고려검왕의 백의를 흔든다.

 "본 교주의 친위대장의 일도가 비록 당신을 상대하기에 조금 부족할지 모르나, 그렇다고 쉽게 보기는 어려울 것이오!"

 갑자기 천기선생이 고함치듯 냉엄히 외쳤다.

 찰나 그의 가마가 풍선이라도 된 듯이 둥실 떠올랐다.

 그리고는 바람에 날리는 연처럼 날았고 그 좌우를 떠오른 흑의인들이 호위하면서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말이야 그럴듯하지만 말을 하다가 갑자기 가마는 치솟아올랐고 그 가마를 호위하던 흑의인들이 일제히 날아오르는 모습은 장관이라고 해야 옳았다.

 게다가 묵묵히 있던 복면대한.

 그야말로 지난번 좌백과 맞닥뜨렸던 제천교주의 친위대 대장이었다. 그는 한효월의 수인지력에 심한 타격을 받았었는데 그동안에 회복이 된 모양이었다.

 그는 천기선생이 탄 가마가 날아오름과 동시에 일도를 전개하여 고려검왕에게로 덮쳐 갔다. 이미 암중에 준비를 하고 있었는 듯 기세는 천군만마가 달리는 것 같았다.

 일격에 천지가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다.

 그과과아아…….

 일도가 허공을 가르자 가공할 도기가 첩첩이 일어나면서 앞을 쓸어냈다.

 흙먼지가 그 위세를 말하듯이 회오리치면서 일었고 풀 포기가 으스러져서 그 바람을 타고 돌 부스러기와 함께 날았다.

 그것이 끝이었다.

 어둠 속에서 이미 까마득히 멀어져 가는 가마와 그 뒤를 따르는 흑의인들이 보일 뿐이다. 그들을 막는 사람은 없었다.

 고려검왕은 무심한 눈길로 멀어져 가는 그들을 보고 있었다.

 방금 친위대장의 그 일도로서는 그를 어찌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것은 정말 하겠느냐는 시위성 일격이었을 따름이라 그는 아예 상대하지를 않고 물러나 버린 상태였다.

 '역시 효웅(梟雄)……. 하지만 내가 당신의 말에 넘어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너무 수호신문의 전통을 간단히 보았다. 내가 당신을 놓아준 것은 한 가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을 뿐이니…….'

 그는 까마득히 멀어지는 가마를 보았다.

 "용화회……."

 그는 문득 한마디를 흘리고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섬광 한줄기가 옆에 있던 바위를 두 쪽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것은 뒤에 당도할 정화 일행에게 가마가 어디로 갔는지를 알려줄 지표다. 정화가 그것으로 천기선생을 찾아낼 수 있을런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것까지 그가 상관할 일은 아니다. 어차피 천기선생 공일도가 이처럼 빨리 움직인 것은 뜻밖이었으니까.

 이제부터 그가 어디로 왜 이 시간에 움직인 것인가를 알아보는 것이 해야 할 일일 터이다.

 {c#}*   *   *

 갈대는 무심하고 달빛은 그윽하다.

 어둠은 짙어지고 바람은 스산하다. 멀리 철썩이는 물결 소리가 귀를 울린다. 모두 잠든 이 밤 누가 그 소리를 들을 것인가.

 먹빛으로 물든 물결은 고요하고 물을 내 집 삼는 물고기들마저 잠들어 잠잠하기만 하였다.

 하지만 움직이는 물고기도 있었다.

 하긴 세상사에 어찌 한 가지 일만 있을 수 있을쏜가.

 출렁거림조차 없이 조용히 물살을 가르며 동정호를 가르는 움직임은 그 누구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은밀하고도 놀라웠다.

 남해용선이 떠나간 자리로부터 십 리가량 떨어진 갈대밭.

 거기에서 조금 더 가면 동정호를 바라보며 선 용왕묘(龍王廟) 한 채가 있다. 근처 어민들이 제를 지내는 용왕묘는 밤이 되자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인적이 끊어진 까닭이다.

 그 용왕묘 안쪽으로 소리도 없이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야행의를 입었다. 그 옷은 묘하게 번들거리면서도 빛나지 않는다. 얼굴까지 그 검은 옷으로 뒤집어쓴 그는 용왕묘의 안에 나타나서는 칠흑처럼 검은 그 옷을 벗었다.

 얼굴이 드러났다.

 놀랍게도 그 얼굴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남해용왕의 것이었다.

 이미 배를 타고 사라졌어야 할 그가 어떻게 여기에 나타난 것일까?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용왕묘의 안을 둘러보았다.

 용왕이 모셔져 있어야 할 그 용왕묘 안에는 괴이하게도 미륵불 일좌(一座)가 모셔져 있다. 어둠 속에서도 은은히 금빛을 흘려내는 미륵의 얼굴은 중원의 것이 아닌 듯 보여 조금 괴이하였다.

 "본신의 금빛을 감추지 못하고 그렇게 불상 행세를 하고 있다니, 당신의 불광반선지공(佛光般禪之功)은 듣던 것보다 못한 모양이군?"

 "밀종의 깊음을 어찌 알고 그 따위 소리를!"

 단상의 미륵이 눈을 부릅뜨고서 남해용왕을 쏘아보았다.

 "흐흐…… 하기야……."

 웃음을 흘린 남해용왕은 말을 돌렸다.

 "십대존자는 어디 있소?"

 "때가 되면 나타나겠지."

 "십대존자뿐 아니라 이미 이십팔천룡(二十八天龍)도 도달했다고 하던데 그들과 같이 있는 것이오?"

 "당신이 남해에서 십대도주(十大島主)들과 그 휘하의 고수 수백 명을 끌어들였는데, 본불이라고 하여 어찌 그대로 있을 것인가? 더구나 그 일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인들 못할까!"

 "출가인이 욕심을 버리지 못하니……."

 "그것을 어찌 욕심이라 할까! 봉신지비는 해탈의 비밀이 숨어 있거늘……."

 "하하…… 해탈의 비밀이라? 해탈이란 마음을 가다듬어 진리를 깨달아가는 것이 아니오? 그것은 불경 속에서 찾아야 하는 것일 텐데?"

 "지금…… 나와 해보자는 겐가?"

 미륵불이 눈을 부릅떴다.

 그 단상의 미륵불이야말로 서역법왕이다.

 대체 그는 어떻게 해서 여기에서 남해용왕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그럴 리가!"

 남해용왕은 낮게 웃음을 흘렸다.

 "……."

 그를 노려보고 있던 서역법왕은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봉신지약은 가져왔소?"

 문득 남해용왕은 정색을 했다.

 "봉신지약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노라마는 데려온 거요?"

 "그의 무공은 보잘것없소. 그런 그를 여기까지 데려온다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 그보다 고문(古文)을 잘 안다는 대학자는 어찌 되었소?"

 "그도 무공을 모르니 이곳에 올 수 없지……."

 "……."

 서역법왕은 말없이 남해용왕을 노려보았다.

 "어쩌자는 것이오?"

 "같이 갈 수밖에. 어차피 이곳에서 모든 걸 할 수는 없는 게 아니오?"

 "세상이 남해용왕을 일러 교활하여 믿을 수 없다 하더니…… 과연이로군."

 "법왕도 만만치 않은 것 같군?"

 "……."

 두 사람은 어둠 속에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하지만 누구도 도발하지 않았다. 어차피 두 사람은 필요에 의해 합친 것이고, 둘 중 누구도 아직 서로가 필요했다. 더구나 지금은 그들이 헤어질 때가 아니었다.

 봉신지약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것이 아니라면 전면에 나서서 이런 모험을 감행하지 않았으리라. 더더구나 이미 크게 한번 낭패를 본 적이 있었던 남해용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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