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三首 귀왕재우(鬼王再遇)
-다시 어둠속으로
의문은 처처(處處)에 가득하기만 하다
바로 그때,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흡사 천마가 달리듯 그렇게 허공을 가르며 세상을 놀라게 할 경공으로 날아들어 추혼도 곽유의 앞을 가로막았다.
"경아!"
그리고 그는 천둥처럼 고함쳤다.
별빛 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직시(直視)하면서.
만부막적(萬夫莫敵)!
누구도 감히 그녀의 일격을 어찌하지 못했었다.
어느 누구도 감히 그녀의 앞을 가로막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는 달랐다.
그처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손을 쓰던 그녀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사람을 보자 주춤거린다. 물론, 그것은 다른 사람이 알아볼 수 있을 만큼의 주춤거림이 아니다. 아주 미세한 동작의 흐름에서 드러난 변화일 따름이다.
쳐낸 손길에서 머뭇거림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너는 마녀가 아니다! 경아!"
그 손길을 바라보면서도 나타난 사람은 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별빛 같은 눈을 반짝이면서 낭랑히 소리치고 있었다.
"한 공자, 위험하오!"
그 광경을 보고 황엽이 놀라 외쳤다.
나타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한효월인 것이다.
한효월은 한 손을 가슴에 세웠다.
그리고 다른 한 손은 옆으로 내젓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물러나라는 손짓인 셈이다. 멀리서 격투하는 소리를 듣고는 변고가 발생함을 알고 전력을 다해 달려왔다. 해서 경공일절이라는 옥면무영보다 더 빨리 장내에 당도한 상태였다.
그가 독고경을 막아서자 옥면무영과 유성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 뒤를 따라 나타났다.
"경아! 나를 보거라. 내가 기억나지 않느냐?"
한효월이 다시금 소리쳤다.
그의 음성은 장중했다.
그리고 그의 기태(氣態)는 장엄하기조차 하여 음성 하나하나가 커다란 범종(梵鐘)을 울리는 듯했다.
얼굴에서는 빛이 뿜어지는 듯하니 전설상의 부동명왕(不動明王)이 현신(現身)한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의 외침에 독고경의 눈빛에 흔들림이 일었다.
그러나 그것은 찰나지간.
그녀가 돌연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한효월을 향해 일장을 쪼개냈다. 경심동백(驚心動魄)의 놀라운 일격이 돌연 펼쳐진 것이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손은 이미 한효월에게 닿고 있을 정도였다.
"공자!"
유성이 놀라 소리쳤다.
"한 공자!"
황엽이 몸을 날렸다.
"정신 차리거라!"
한효월이 눈을 부릅뜨고서 고함쳤다.
동시에 그가 양손을 차례로 쪼개어냈다.
맑고 밝은 빛이 그의 손에서 섬광처럼 쏟아져 나갔다.
"마음의 사(邪)를 항복받으니 정(定)이라 하다!"
외침과 함께 그가 앞으로 비스듬히 한 걸음을 내딛었다.
"마(魔)가 세상을 덮으려 하나, 어찌 신(神)을 농(弄)할 수 있으랴!"
호통.
철퇴를 내려치는 듯한 호통 소리가 더해지면서 한효월의 손에서 섬광이 쏟아져 나간다.
펑! 퍼펑!!
폭음이 연신 터져 나왔다.
놀랍게도 그처럼 무섭던 독고경의 공세가 한효월과 맞서자 힘을 잃고 스러지는 것 같았다.
독고경의 눈에는 당황한 빛이 역력히 드러났다. 그녀가 비칠거리면서 뒤로 밀려났다.
"내 눈을 보거라!"
한효월이 다시 소리쳤다.
"으으음……."
신음이 독고경의 입술을 비집었다.
"너는 지지 않을 수 있다! 경아! 너를 되찾거라!"
한효월이 그녀를 노려보면서 소리쳤다. 그의 음성이 쩌렁쩌렁 어둠을 울렸다. 말을 할 때마다 한효월은 땅을 굴렀고 지축이 요동 치는 것 같았다.
"캬악!"
독고경이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 바람에 그녀가 낚아챘던 포대는 땅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곁으로 다가와 있던 황엽이 얼른 그 포대를 끌어당겨 옆으로 건넸다.
허공에 둥둥 떠 있던 그녀가 머리를 움켜쥔 채로 떨어졌다.
암흑의 나래와 같이 너울거리던 흑포도 힘을 잃고 땅바닥에 깔리고 말았다.
"경아! 나를 보거라!"
한효월이 다시 소리쳤다.
거대한 종을 울리는 듯한 음성이었다.
"사…… 사숙……."
망연한 음성이 독고경에게서 흘러나왔다.
"그래! 나다! 나를 알아보겠느냐?"
한효월이 다시 소리쳤다.
"사숙…… 으으음……."
신음이 머리를 움켜쥔 독고경에게서 흘러나왔다.
방금 전까지 그처럼 무섭던 명옥마녀의 위세는 찾아보기조차 힘들었다.
"그래, 나다. 경아…… 천천히…… 천천히 너를 돌아보거라. 누구도 너를 버리게 할 수는 없다."
한효월이 그녀를 보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으으……."
괴로운 빛으로 그녀가 한효월을 쳐다보았다.
사악한 빛과 교활한 빛, 괴로운 빛,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는 것까지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갖가지 빛깔이 찰나적으로 교차되면서 그녀의 얼굴이 칠면조처럼 빠르게 변해갔다.
휭휭-
그녀의 주변으로 세찬 강풍이 일었다.
"누구도 너를 버리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너의 그 모습을 잊지 않고 있다……."
한효월이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면서 말했다.
그리 크지 않은 음성이지만 공력이 실린 그 말은 강한 힘으로 그녀의 전신을 강타했다.
"나를? 나를…… 말인가요?"
"그래. 나는 너를……."
한효월은 그녀의 어깨로 손을 뻗어갔다.
바로 그때.
삐이이-익!
소름 끼치게 날카로운 음향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그것은 심혼을 찢어버리는 무서운 위력을 지녀 그 소리를 들은 모든 사람들이 진저리를 치면서 귀를 막아야 했고, 공력이 얕은 사람은 귀를 틀어막으면서 그 자리에 나뒹굴어야만 했다.
"캬-악!"
독고경이 머리를 움켜쥐고서 진저리를 쳤다. 극한 고통의 빛이 역력했다.
"경아!"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한효월이 그녀를 제압하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보다 그녀의 움직임이 더욱 빨랐다.
그녀는 발작하듯 한 손을 쳐냈고 그 속도는 정말 전광과도 같이 빨라 한효월보다 먼저 그의 가슴을 쳤다.
펑!
"윽!"
신음과 함께 한효월이 뒤로 튕겨졌다.
한효월을 날려 버린 독고경은 소름 끼치는 괴성을 지르면서 그 자리에서 진저리를 치더니 무서운 속도로 밤하늘을 가르며 훌쩍
날아올랐다.
"한 공자!"
주위에서 경계하고 있던 황엽이 날아왔다.
"그녀를 막아야 합니다!"
한효월이 일어나면서 소리쳤다.
사람이 일단 움직일 수 있다면 치명적은 아니라고 봐야 했다.
그를 부축하려던 황엽은 망설임없이 몸을 날려 독고경을 따라갔다.
"공자!"
유성이 사색이 되어 날아들었다.
"난 괜찮다!"
손을 저으며 한효월도 몸을 날렸다.
"이런!"
유성도 따라서 땅을 박찼다.
"놈들을 수습하고, 저 포대를 잘 보관, 엄중경계하시오!"
옥면무영 호일랑이 명을 내리면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뒤를 쫓아가는 것보다는 지금 이 자리를 지키는 것이 더 중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야에는 이미 어둠뿐, 제일 마지막에 몸을 날린 유성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방금까지의 사람을 놀라게 하던 생사박투.
하지만 이제 보이는 것은 없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은 어둠과 고요뿐, 벌레들의 울음소리마저도 들리지 않는다.
"으음……."
주위를 휘둘러본 황엽은 미간을 찡그렸다.
"황 방주!"
그때 한효월이 날아들었다.
"아니, 한 공자! 괜찮소?"
"경아는 어디에? 놓치셨습니까?"
"딱히 그렇다고 하긴 그런데, 일단 종적을 놓친 건 맞는 것 같소. 이리 날아오는 걸 분명히 보았는데 갑자기 사라져 버리고 말았소. 아무리 명옥마녀의 경공이 절세경인(絶世驚人)하다 할지라도 어찌 눈앞에서 사라질 수가 있단 말인지……."
다른 사람도 아닌 황엽이 변명을 할 리는 없다. 그의 앞에서 그냥 사라진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
한효월은 굳은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제가 펼친 부동명왕공에 타격을 받아 지금은 전처럼 움직이기 쉽지 않을 겁니다. 어디 숨어 있거나 다른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지요. 서로 갈라서 찾아보도록 하는 게 좋겠습니다."
"알겠소. 난 이리 갈 테니……!"
고개를 끄덕이던 황엽이 돌연 신형을 날렸다.
숲 속으로 날아든 황엽을 보며 한효월이 뒤따르면서 소리쳤다.
"조심하……!"
한효월은 황엽의 손에 잡힌 것을 보고 말을 멈추어야 했다.
부엉이였다. 부엉이는 한쪽 날개가 꺾여 퍼덕거리고 있었다. 황엽이 들은 것은 바로 그 부엉이가 퍼덕거리는 소리였고 그는 부엉이 소리를 듣고는 그곳으로 덮쳐 갔던 것이다.
"수작을 부렸군……."
부엉이의 날개 꺾인 것을 살펴본 황엽이 중얼거렸다.
단순히 실수나 어떤 문제로 인한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날개를 꺾었다. 그것도 숨기려고 한 게 아니라 그냥 꺾어서 날려 보낸 상태라서 시선을 끌기 위한 것이 분명했다.
"황 방주께선 이쪽을 맡아주십시오. 뭔가 발견하면 제가 신호를 보내겠습니다."
한효월이 나섰다.
"괜찮겠소? 명옥마녀의 일격은 정말 간단치 않던데……."
"소생에겐 그녀를 상대할 방법이 있습니다."
"그렇게 보이긴 했었소만……."
황엽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한효월은 땅을 박차고 숲 속으로 쏘아져 갔다. 황엽은 개방의 고수들을 움직여서 주변을 수색하고 또 일대를 경계할 것이다.
원래 한효월은 부동명왕공으로 독고경을 거의 제압했었다. 마지막에 날아든 경혼소(驚魂嘯)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그녀가 마지막 순간에 쏟아낸 불의의 일격에도 한효월은 큰 부상을 입지 않았었다.
부동명왕공은 특별한 위력을 지닌 무공은 아니다.
하지만 삿됨을 항복받는 데에는 최상의 무공이 바로 부동명왕공이고 그것은 명옥대법에 극성이 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 만큼 타격을 받은 그녀는 쉽사리 이 일대를 벗어나지는 못했으리라. 생각은 그렇지만 어둠 속에 잠긴 숲 속에서 그녀의 종적을 찾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십여 장 높이의 우뚝한 교목(喬木) 위로 오른 한효월은 천조신안을 펼쳐서 주위를 살폈다.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아무것도 걸리는 것이 없었다. 숲 전체가 숨을 죽이고 조용히 가라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경아의 명옥대법은 아직 완벽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분명히 근처에 그녀를 조종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움직이기가 쉽지 않을 테니까……. 오늘은 반드시 경아를 조종하고 있는 것이 누군지 밝혀내고야 말겠다!'
한효월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주변을 관조(觀照)했다.
갖가지 소리가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채 한 호흡을 가라앉히기도 전에 한효월은 거대한 독수리처럼 몸을 날렸다.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가 소리도 없이 숲 속을 가로지르고 있음을 발견했던 것이다.
한효월은 삼십여 장이나 되는 거리를 단숨에 가로질렀지만 그 종적을 따라잡지 못하고 계속해서 뒤쫓아야 했다. 놀랍도록 빨랐다.
'놓치지 않는다!'
한효월은 모든 힘을 기울여 그 뒤를 쫓았다.
그가 전력을 다해 신법을 펼치자 그의 움직임은 마치 유령이 숲 속을 헤집는 것만 같았다. 그의 경공 또한 이미 범인의 범주를 넘어 나무를 차면서 날아 땅에 내려서지 않으니 한 가닥 질풍과도 같았다.
하지만 앞선 그림자 또한 그에 못지않게 빨랐고 그 움직임은 은밀하기 짝이 없어서 한효월의 놀라운 신법으로도 쉽게 따라잡을 수가 없어 마치 숨바꼭질을 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보통 사람이 보았다면 허깨비를 본 것으로 착각하겠지만.
순식간에 사오 리를 질주한 한효월은 마침내 흑영이 독고경과 비슷함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그녀를 부르기 전에 흑영은 눈앞에 나타난 도관(道觀)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조금 퇴락한 듯하지만 아직 향화가 끊이지 않는 듯 번듯한 도관이었다. 그러나 그 도관이 어떤 곳인지를 살펴보고 있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도관은 숲을 벗어난 곳에 있었지만 숨을 곳이 많아 만에 하나 그녀를 조종하던 자가 그녀를 이곳으로 불러들인 것이라면 어떤 사태가 일어나서 그녀를 놓치게 될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한효월의 신형은 바람처럼 도관으로 날아들었다.
그와 흑영과의 거리는 이 장여에 불과했다.
훌훌 담을 날아 넘는 그 흑영을 따라 담을 넘은 한효월은 흑영이 지붕을 타고 도관의 정전(正殿)으로 보이는 삼청전(三淸殿)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담 끝을 박찼다.
어둠을 가르며 그의 신형이 칠팔 장을 단숨에 가로질렀다.
그리고 그는 흑영이 대전 안으로 사라지는 순간에 대전 안으로 뚫고 들어갔다. 문이 닫혀 있었지만 이런 대전의 문은 튼튼하게 만들어져 있지 않아 그와 같은 고수가 박차고 들어가자고 마음만 먹는다면 종잇장을 뚫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었다.
그가 대전의 문을 부수며 안으로 날아드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어둠 속에서 경풍이 날아들었다.
한효월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이미 허실생동(虛實生同)의 안력을 지닌 그였기에 대전 안이 아무리 어둡다고 할지라도 눈을 가늘게 뜨고 안력을 집중시킨 바에야 상대가 보이지 않을 리가 없는 것이다. 흑영이 자신을 공격하고 있음을 알아본 한효월은 빙글 신형을 틀어 상대의 공격을 피했다. 그가 움직이는 속도는 비할 바 없이 빨라 경풍을 스쳐 보내는 순간에 이미 상대의 앞에 이르러 있었다.
"앗!"
상대가 놀란 외침을 터뜨렸다.
한효월의 일장이 코앞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이건?'
한효월의 눈에 괴이한 빛이 스쳐 갔다.
외침이 달랐다. 그가 따라온 것은 독고경이다. 그런데 그녀의 음성이 아닌 듯했다. 그러고 보니 모습도 틀린 것 같았다.
상대는 하수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일장은 신속무비하여 미처 피할 수가 없었다. 손을 써서 막을 수밖에. 그러나 당금 무림에서 그와 맞상대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팍! 하는 폭음이 일며 그 흑의여인은 비칠, 뒤로 물러났다.
"당신은?"
그녀의 혈도를 쳐가던 한효월은 흠칫 손을 멈추었다.
"당신……?!"
그의 행동을 본 흑의여인이 손을 멈추고서 주춤거렸다.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그렇군…… 역시 제천교에서 한 짓이었군?"
한효월이 냉소를 흘렸다.
동시에 그는 맹렬하게 상대를 덮쳐 갔다.
"무슨 짓!"
흑의여인이 놀라 소리쳤다.
그녀는 맹렬하게 손가락을 세워 한효월을 찔러갔지만 한효월은 손바닥을 세워 빙글 돌리는 사이에 그녀의 손목을 쳐버렸다.
"악!"
한소리 비명과 함께 그녀는 이미 한효월에게 손목을 잡혀 버리고 말았다.
"이이…… 악독한……."
그녀가 이를 악물며 신음을 흘렸다.
한효월이 내려친 손목은 이미 부러져 버렸다. 그리고 한효월은 그 손목의 맥문을 움켜잡았던 것이다. 당연히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경아는 어디 있소?"
한효월이 차갑게 물었다.
"경아라니?"
흑의여인이 얼떨떨한 빛으로 되물었다.
"당신과 장난을 칠 시간은 없다!"
한효월이 냉소를 쳤다.
"아악!"
그녀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한효월이 그녀의 손목을 움켜쥔 채로 공력을 주입시켜 그녀의 팔을 잡아 올렸던 것이다. 부러진 손목으로 그녀의 체구를 공중으로 들어 올리는 형국이니 어찌 아프지 않을쏜가. 그녀의 얼굴에는 이내 식은땀이 송골송골 솟아났다.
드러난 그녀의 얼굴.
그녀의 얼굴은 한효월도 잘 아는 얼굴이었다.
바로 명부음희.
지난날 그가 만났던 풍도귀왕의 딸이라던 그녀였기에.
그녀가 여기 나타난 것을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공교롭다. 그렇기에 한효월은 그녀를 모질게 다그치고 있는 것이다.
"말하지 않으면 단순한 고통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오."
"뭐, 뭘 말하는 거예요? 대체……."
그녀가 입을 딱딱 벌리면서 고통을 호소했다.
단순히 팔이 부러지고 제압을 당한 정도라면 그녀 정도의 고수가 이렇듯 고통을 느끼지는 않았을 터이다.
하지만 한효월이 공력을 돋워 핍박하자 정말 견딜 수가 없었다.
"왜 나를 이곳으로 유인한 거지? 그게 우연이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오늘 지옥을 보게 될 거요."
한효월은 그녀를 허공에 들어 올린 채로 냉소했다. 그녀의 다리는 그 상태로 한 치쯤 허공에 떠 있었다.
"그녀가 어디 있는지 말할 기회를 주겠다. 하나, 둘……."
한효월이 수를 세기 시작했다.
"대, 대체 무슨 일인지를…… 나, 나는 아버님을 만나뵈러 온 것일 뿐…… 정말 아무것도……."
"아버님?"
한효월이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에게서는 강렬한 기세가 일고 있어서 명부음희는 새파랗게 질려서 연신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전에 그를 만났을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른 것도 아닌데 대체 어떻게 이렇게 엄청난 차이가 나도록 강해질 수가 있단 말인가?
"저, 정말 여기서 아버님을 만나기로……."
"그걸 내가 믿을 것 같소?"
한효월이 냉소를 터뜨렸다.
"아-악!"
명부음희가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한효월이 힘을 주었던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너는 왜 믿지 않느냐?"
음랭한 음성이 들려왔다.
음성, 그 음성 하나의 위력은 실로 놀라웠다. 그 음성이 들려오면서 주변에 귀기(鬼氣)가 치밀어 올라 대전을 온통 뒤덮어 버렸던 것이다. 금방이라도 어디서 귀신이 튀어나올 듯.
그리고는 대전을 중심으로 괴기한 음률이 흐르기 시작했다.
"마음주악(魔音呪樂)……."
한효월은 냉정히 중얼거리면서 명부음희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그가 신형을 돌렸다.
대전의 신단.
태상노군의 신상이 놓여 있어야 할 그 자리에는 괴이한 형색의 사람 하나가 우뚝 서 있었다.
용포를 입었다.
머리에는 면류관을 썼다. 그러나 어둠 속에 드러난 얼굴은 청동 빛으로 푸르르다. 하지만 팔자수염이 난 그의 얼굴은 깎은 듯 수려했다. 그 얼굴에 자리한 눈에서는 어둠을 뚫고서 푸른 비수와 같은 안광이 형체가 있는 듯 뻗어 나와 한효월을 직시하고 있었다.
괴이하고도 공포스러운 형색이라 보는 사람의 심금이 떨린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는 한효월의 눈빛에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다.
"마침내 나타났군……."
그의 말투는 또한 괴이하다.
마치 그가 나타날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 아닌가.
"본왕이 나타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건가?"
"확신을 하진 못했었지만."
알고 있었다는 의미다.
용포중년인, 풍도귀왕의 눈에서 무서운 살기가 쏟아졌다.
"그걸 알고도 내 딸을 핍박했단 말이냐!"
소리는 크지 않았다.
하나 그의 음성에 대전 전체가 무너질 듯 뒤흔들렸다. 천장에서 흙먼지가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그럼에도 그 먼지를 맞는 사람은 없었다.
한효월이나 풍도귀왕 모두가 절정에 이른 고수인지라 먼지는커녕 물방울조차도 그들을 적실 수가 없는 까닭이다. 설사 폭우가 쏟아지더라도.
그의 그러한 위세에도 한효월은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천하십왕의 신분으로서 제천교의 주구가 되고, 그것을 부인하였으니 어찌 대우받기를 바라겠소?"
그의 다그침에 풍도귀왕의 눈빛이 일그러졌다.
"뭐라고?"
"부인할 작정이오? 당신이 제천교에 들어 강시들을 제조하고 마교의 대법을 베풀어 독고 사형의 하나밖에 없는 딸을 명옥마녀로 만들어 버린 것을! 그리고 이제 그 뒤를 쫓는 나를 없애기 위해서 나타난 것을 내가 모를 것이라 생각했소?"
한효월은 준엄히 그를 꾸짖었다.
늘 자애하기만 하던 한효월. 언제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양보만 하던 그였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듯했다.
겉보기로는 중년이지만 실제로는 한효월이 손자뻘에 불과한 풍도귀왕은 그의 꾸짖음에 대노해 안색이 달라졌다. 그러나 그는 역시 천하십왕 중 일 인. 범인(凡人)과 같을 수가 없었다.
"내가 명옥마녀를 만들었다고? 어디 그 증거를 대봐라."
"당신이 아니라면 누가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소? 그리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당신의 무공이 마교의 지옥귀마경(地獄鬼魔經)에서 연유한 것을 알고 있소. 설마 자신의 무공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를 부인할 셈이오?"
"……!"
풍도귀왕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누구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느냐?"
"그게 중요하오?"
"중요하다!"
"당신이 시인하기 전까지는 말해 줄 수 없소."
"시인? 무슨 시인을 하라는 것이냐?"
"당신이 제천교의 일원으로서 독고경을 명옥마녀로 만들고 마교천하를 이루고자 했음을 말이오!"
"흐흐……."
문득 음산한 웃음이 풍도귀왕에게서 흘러나왔다.
"본왕이 네게서 듣고 싶은 말을 듣지 못할 것 같으냐?"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한효월은 조금도 지지 않고 그를 쏘아보았다.
'대체 이놈이 뭘 믿고 이렇듯 당당한 게지?'
풍도귀왕은 묘한 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는 일전에 한효월과 맞닥뜨려 본 경험이 있었다. 그때 한효월이 세상을 놀라게 할 무공을 지니고 있음은 분명히 알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를 이길 수 있는 무공을 지녔다는 말은 아니다. 전력을 다한다면 십 초, 길면 백 초 이내에 그는 한효월을 죽일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 대전의 외부는 그의 수하들이 겹겹이 포위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것을 모를 리 없는 한효월이 이렇듯 홀로 있음에도 당당하니 어찌 괴이하지 않을 것인가?
"경아는 어디 있소?"
한효월이 물었다.
"……."
말없이 그를 쏘아보던 풍도귀왕은 문득 눈빛을 누그러뜨렸다.
"지난날 너는 본왕에게 구마회혼대법에 관해서 물은 적이 있다. 왜였더냐?"
"그건……."
한효월의 안색이 조금 달라졌다.
"그 구마회혼대법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는 너도 알겠지? 바로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마공대법이다. 어떤 자라 할지라도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면 되살릴 수가 있지. 하지만 여기에는 반드시 선행되어야만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죽기 전에 그에게 구마회혼대법을 미리 베풀어둔 다음에 죽은 그의 시신을 구마회혼대법으로 되살리는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인 줄 아느냐?"
"……."
한효월은 묵묵히 그를 바라보았다.
풍도귀왕이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해서 살아난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겠지?"
"설마…… 그게?"
"맞다. 바로 독고해다!"
그의 말에 한효월의 얼굴에 놀람의 빛이 드러났다.
그뿐만 아니라 고통스러운 빛으로 한쪽으로 물러나 있던 명부음희도 놀란 신음을 흘려냈다.
하긴 그 말을 듣고 누가 놀라지 않을 것인가.
"그걸 지금 나에게 믿으라는 말이오?"
"믿든 안 믿든 그건 네 맘이다. 하지만 사실 여부는 지금의 독고해를 조종하고 있는 그녀를 찾아가 물어보면 알 수 있을 테니 더 이상 말할 것은 없다!"
그는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독고해가 죽기 전에, 제천교와 결전을 하기 전에 찾은 사람이 바로 본왕과 그 부인이었다. 그는 이미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기에 그 대비까지 하려 했었지……. 그런 그의 호협(豪俠)함을 가상히 여겨 본왕은 그 요청을 수락하여 구마회혼대법을 시술했었다. 그런 본왕을 보고 제천교의 주구라고?"
그가 냉소를 터뜨렸다.
"……."
한효월은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말대로라면 상황은 전혀 다르다.
그러나 그가 여기 나타난 공교함은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가 부인을 한 이상, 더 그를 다그칠 명분은 없었다. 상대는 다른 사람이 아닌 천하십왕 중 일 인인 것이다.
"강시라는 존재가 쉽게 만들어지는 줄 안다면 실로 웃기는 일이지! 만약 그렇다면 본왕은 천하의 고수를 모조리 강시로 만들어서 수하로 부렸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누가 본왕과 자웅을 결할 수가 있을 것이냐?"
"……."
강시는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효월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더구나 독고해와 같이 사라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부활하여 나타나 움직일 수는 결코 없다. 그럴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바로 구마회혼대법이며 그러한 시술을 위해서는 귀왕의 말과 같이 반드시 미리 손을 써두어야만 한다.
물론 그 과정도 쉽거나 평범할 수는 없다.
결국, 귀왕의 말은 사실이라는 의미다.
"네가 그 가소로운 재간을 믿고 감히 본왕의 위엄을 손상하였으니, 그 죄를 알고 있으렷다?"
"모르오."
한효월의 말에 추상같던 귀왕의 눈빛이 음침히 일그러졌다.
"모른다?"
"당신의 말이 맞다 할지라도 내 눈으로 확인한 것이 아니니, 어찌 맞다고 할 수 있겠소? 더구나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오해에서 비롯된 것일지니 내가 사과하면 될 일. 더 이상 무슨 죄를 지었다고 할 것이 있겠소?"
한효월의 태도는 여전히 당당하다.
"으핫하하하……."
귀왕은 갑자기 미친 듯 웃어댔다.
그의 웃음소리는 실로 대단하여 대전을 온통 뒤흔들었다.
쏟아질 먼지는 좀 전에 다 쏟아졌는지 들썩이던 대전은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고통에 겨워 몸부림치다가 마침내 서까래 하나를
밑으로 떨구고 말았다.
쾅!
서까래는 한효월과 풍도귀왕, 두 사람의 가운데에 비스듬히 떨어졌다.
실로 세상이 놀랄 공력이다.
천하십왕의 무공은 이미 산천을 떨게 만들 경지였다.
"네놈이 이처럼 광오하니, 과연 무엇을 믿고 그처럼 본왕을 도발하는지 어디 한번 보자!"
음산한 웃음소리가 고막을 찌르면서 들려왔다.
쿠콰콰콰…….
발동하기 전에 거대한 해일처럼 경기가 밀려들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어둠 속에 떠오른 손바닥 하나.
슬쩍 앞으로 밀어낸 것 같은데, 손바닥의 위세는 경인지경이라 천지가 모조리 그 손바닥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다.
"귀왕음부인……."
한효월이 신음을 흘렸다.
놀랍게도 상대는 손을 쓰자마자 한효월을 죽이기로 작정한 듯이 그의 최고 절기를 아낌없이 써 공격을 하는 것이다.
지난날이라면 분명히 맞상대하기 불가능한 위세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한효월은 그를 마주 보면서 천천히 한 손을 내밀었다.
그 모습은 한 손으로 풍도귀왕의 귀왕음부인을 상대하려는 것 같았다.
"미친…… 네놈의 능력이 과연 소문처럼 대단한가 보겠다!"
한효월의 광오함에 풍도귀왕은 대노하여 공력을 더욱 끌어올렸다. 평소라면 그는 이처럼 노하지 않았을 터이다.
마음을 다스릴 수 없는 자는 절대로 무공을 초범입성(超凡入聖)의 경지까지 수련할 수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듭된 도발로 인해 그는 처음부터 한효월을 죽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렇듯 사정없이 전력을 다해 일격을 쳐내는 것이다.
한효월의 오른손은 묘했다.
붉은빛이 어린 그 손은 주먹[拳]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손을 편 것도 아니고 느슨하게 주먹을 쥐는 것처럼 하면서 손을 말아 쥔 것에 불과해 보였다.
그렇다고 풍도귀왕의 귀왕음부인처럼 가공할 경기가 쏟아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절옥장세?'
그것을 보고 풍도귀왕은 어이없는 듯 냉소를 흘렸다.
절옥장은 장으로 옥을 잘라 버린다는 무서운 위력을 가졌다. 독고해의 생전에 찬탄을 받았던 무공이다.
그러나 그것은 독고해의 진신절학(眞身絶學)이 아니었다.
당연히 풍도귀왕의 일격을 받아낼 수 없다.
"죽고 싶구나!"
음산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대답은 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한효월의 손은 빙글, 도는 사이에 도검과도 같은 일장을 쳐내고 있었다.
과연 그것은 세상을 놀라게 했던 절옥장세였다.
하지만 그 절옥장은 귀왕음부인을 당적하기에는 모자란 것이 확실했다.
두 장세가 마주친 순간에 귀왕음부인은 조금 주춤했지만 그 기세 그대로 한효월에게 밀려들고 있었고 절옥장세는 단솥에 부은
물처럼 너무도 허무하게 소멸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천지가 온통 귀왕음부인에 빨려들었다.
바로 그때.
한효월은 낭랑히 웃었다.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한 빛이 없는 득의에 찬 웃음소리였다.
그 웃음소리에 내심 괴이함을 느꼈던 풍도귀왕은 흠칫, 한효월을 쏘아보았다.
그때 그는 보았다.
한효월의 손에서 쏟아져 나오는 붉은빛 비수와도 같은 것을!
그것은 놀랍게도 귀왕음부인의 장세를 꿰뚫고서 풍도귀왕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이게 뭔가!'
놀란 풍도귀왕은 노호(怒號)하면서 손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가공할 위력으로 주변을 장악했던 손길에서 공포스러운 위력의 일격이 일어났다.
퍼져 있던 위세가 한효월이라는 한 점을 향해 집중된 것이다.
쾅!
거창한 폭음이 천둥처럼 터졌다.
놀랍게도 두 사람의 일격이 마주치자 그 단 한 번의 격돌에 대전 전체가 무너져 내렸다.
아니, 무너졌다기보다는 대전 내부에서 폭발이 나서 사방으로 터져 나가는 것만 같이 보였다.
훌훌 사방으로 날아다니는 잔해…….
마치 거대한 벼락이라도 맞은 모습이었다.
"노옴……!"
신음이 흘렀다.
풍도귀왕.
그는 어느새 대전의 밖에서 어둠 속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난리 통에도 그의 모습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바깥에서 대전을 보고 있었던 것처럼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지만 원래 청동 빛이었던 그의 얼굴은 더욱 굳어 있었다.
그 눈길이 미치는 곳에는 무엇인가가 까마득히 사라지고 있음이 보이는 듯도 했다.
한효월이었다.
그가 단 한 수에 몸을 빼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렇게 어이없게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몸을 뺄 것은 생각지 못했기에 풍도귀왕은 미처 따라갈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들과 같은 고수에게 있어서 한 번의 멈칫거림은 곧 천 리의 차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효월에게서 미련없이 시선을 거둔 그는 자신의 손바닥을 보았다.
붉은빛이 은은히 서려 있었다.
'하마터면 귀왕음부인이 파괴될 뻔했다. 대체 그게 뭐지?'
그는 굳은 눈빛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네 줄기의 지풍이 날아왔다.
그런데 그중 한줄기가 귀왕음부인을 뚫고서 그의 손바닥에다 작은 상처를 낸 것이다.
그때였다.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앞쪽에서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유령처럼 한 사람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적이 나타난 것 같습니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옆에서 신음 소리처럼 호곡(號哭)이 들려왔다.
"적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또 한 사람이 땅속에서 솟아나듯이 모습을 드러냈다.
"개방이 나타났습니다."
"개방?"
"그런 것 같습니다. 아직 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신호가……."
"일대에 개방의 거지들이 깔렸더니……."
'놈들이야 신경 쓸 것 없지만 궁가방은 귀찮은 존재들이지…….'
암중에 생각을 스쳐 보낸 그는 차게 명했다.
"모두 이곳을 떠나도록."
말과 함께 그는 미련없이 도관의 뒤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의 경공은 놀라워 슬쩍 몸을 떠올리자 그대로 바람을 몰고서 유령과 같이 날아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에 떨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아, 아버지……."
명부음희.
그녀였다. 그녀는 대전이 터져 나가는 순간 몸을 피한 듯했지만 그 몰골은 낭패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긴 한효월에게 당해 정상이 아닌 상태에서 누구도 상상키 어려운 대격돌이 순간적으로 일어났으니 피한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할 수 있었다.
날아가던 풍도귀왕의 신형이 허공에서 멈칫하는 것 같더니,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따라오너라."
조금의 정(情)도 담겨 있지 않은 그 음성은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후우……."
들릴 듯 말 듯 나직한 한숨.
명부음희의 모습도 그곳에서 사라졌다. 그처럼 요염하고 당당하던 그녀였지만 풍도귀왕의 앞에서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능공허도(凌空虛渡)의 절세경공으로 단숨에 도관을 벗어난 한효월은 단숨에 백 장 거리를 벗어났다.
풍도귀왕이 뒤쫓지 않음을 확인한 그는 숲 아래로 내려서 바람처럼 다시금 도관으로 접근했다.
그때 사방에서 들려오는 호각 소리, 괴이하지 않을 수가 없다.
두어 군데서 불길이 이는 듯하더니 호각 소리가 급촉하게 여기저기서 부산하게 울려 퍼지는 것이 적지 않은 숫자가 나타난 것
같았으나 실제로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장성세?'
그가 중얼거리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입에서 호각 소리를 울리면서 바람처럼 숲을 가로지르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런 망할! 어떻게 기어나오는 것 같다가 다 기어 들어가냐? 이 어르신께서 꼭 안으로 들어가야 된단 말이냐? 망할 놈의 귀신들
같으니……."
검은 그림자는 죽어라 호각을 불어대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음을 보고 난감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이걸 어떻게 하지? 들어가야 하나, 빨리 황 방주에게 가야 하나?"
그때 난데없이 들려오는 소리.
"그런 고민을 하는 사이에 이미 난 죽었다."
"공자!"
호각을 물고 있던 검은 그림자가 환성을 질렀다.
바로 유성이었다.
"어, 언제 빠져나오신 건가요? 전 아직 안에 계신 줄 알았는데!"
"넌……."
한효월이 그 모습에 어이없는 듯하자 유성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으흐흐흐…… 놈들이 난리를 치고 공자께서 안으로 들어간 다음에 대전이 무너지니 속이 보통 탑니까? 그렇다고 귀신들이
떼거지로 몰려 있는데 혼자 들어가 봐야 표도 나지 않을 거 같고…… 해서 알고 있던 개방의 연락 신호를……."
불어대면서 혼자 왔다 갔다 했다는 말이다.
"점점 교활해지는구나?"
그 말에 유성은 씨익, 웃었다.
"교활이라니요? 점점 더 똑똑해지는 거지요. 놈들 놀래켜서 헷갈리게 하지요? 신호 보냈으니 개방에서 이리 몰려올 거 아니에요?
이거야말로 일석이조! 아니, 세 마리라도 못 잡겠어요?"
"녀석……."
한효월은 웃음을 떠올리다 문득 정색을 했다.
"여기서 주변을 감시하면서 기다리거라."
"왜요? 설마……."
"황 방주가 곧 오실 게다."
말과 함께 한효월은 신형을 뽑아 올리더니 단숨에 도관 안으로 날아들었다.
'으으…… 도대체 뭘 하자는 거야? 기껏 빠져나와서는 또 들어가다니…….'
그것을 보고 유성은 발을 동동 굴렀다.
한효월은 바람처럼 도관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몸을 피한 것은 풍도귀왕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풍도귀왕과 부딪쳐 본 결과, 그를 이긴다고 장담하긴 어렵지만 분명히 지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그러나 그와 생사결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무리를 하다가 만에 하나 지병이 발작이라도 한다면 그는 그 자리에 뼈를 묻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대전에서 능공허도를 전개하여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온 것은 사실상 금방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런 만큼 아직 풍도귀왕은 그 자리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그의 종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분명히 대전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그의 수하들까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한효월은 길게 숨을 들이키고는 땅을 박찼다.
가볍게 사 장여를 날아간 그는 후전 지붕을 밟고서는 일학충천(一鶴沖天)의 형상으로 수직으로 날아올랐다.
놀랍게도 그는 단숨에 지면에서 칠팔 장 높이까지 솟구쳤다.
그리고는 두 팔을 저으며 잠시 허공에 부유하듯 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을 이용하여 소매로 그것을 휘감아 천천히 돌고 있는 것이다.
강호상에서 경공에 자신있다는 사람들이 그것을 보았다면 입에 거품을 물 가공할 경공신법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상태로 그는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는 방향을 잡은 듯 북쪽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유성은 그 모습을 담장 밖에서 기가 막힌 듯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언제 저런 경공을 터득하신 거야?"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그때 뒤에서 들려온 소리.
"뭘 보고 있느냐?"
깜짝 놀라 신형을 돌리니 황엽이 그 뒤에 있었다.
황엽의 뒤로는 그의 수신구룡들이 보이고 사방으로 밀려오고 있는 개방의 고수들이 어둠 사이로 물결처럼 보인다.
"빨리 오셨군요!"
그를 본 유성이 반색을 했다.
"한 공자는?"
"풍도귀왕을 쫓아가셨습니다."
"풍도귀왕? 귀왕이 여기 있었단 말이냐?"
"예."
"독고경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여기 진을 치고 있는 건 귀왕의 패거리들이었습니다. 귀왕이 가면서 다들 떠났는데 방금 공자께서
그들 뒤를 따라가셨습니다."
"난데없이 무슨 귀왕이……."
황엽은 미간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모두 주변을 수색하고, 명을 전해 사방 오십 리 내의 모든 움직임을 살피도록 해라. 어떤 움직임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옛!"
대답과 함께 서너 명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밤하늘을 울리는 호각 소리.
그것은 유성이 발한 것과는 또 달랐다. 밤하늘을 울린 그 소리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 전에 다시 저 멀리서 그것과 같은 소리가
들려와 메아리처럼 전달되는 것 같았다.
사람과 호각을 통해 명을 전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