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七首 천기도모(天機圖謀) (99/113)

第七首  천기도모(天機圖謀)

-하늘을 엿보다

의외의 변수(變數)는 이미 예측된 것이라

 쏴아아…….

 빗줄기처럼 쏟아지는 물줄기. 세찬 포말은 천지가 먹먹한 고함을 내지르면서 사방으로 튕겨져 나간다. 세상이 온통 물소리요, 들리느니 폭포의 굉음이다. 저 높은 곳에서 곤두박질쳐서 아래로 내리꽂히는 폭포는 동정호라고 없는 것이 아니었다. 동정호의 주변에도 산이 있고 계곡이 있는 바에야.

 쿠콰콰콰-

 물소리라기보다 굉음으로 들리는 그 폭포를 바라보면서 한 사람이 걸음을 옮겨가고 있었다.

 당당한 체구의 그는 감천형이었다.

 폭포는 사오 장가량의 높이를 가졌다. 우렁찬 물줄기의 고함을 내지르는 그 폭포 아래엔 커다란 웅덩이와 같은 연못 하나가 있고 거기서 발원하는 계곡 물이 콸콸 흐른다. 그 좌우로는 오랜 세월을 상징하듯이 크고 작은 바위들이 울멍줄멍한데, 묘하게 바위들이 모이고 엉겨 제법 큰 공터와 같은 곳이 있었다. 평평한 반석과 같은 그 바위를 향해 감천형은 몸을 날렸고 그곳에는 한 사람이 폭포를 바라보고 있다가 그를 보자 아는 척을 했다.

 "아직 안 나오셨느냐?"

 감천형이 묻자 유성은 머리를 저었다.

 "멀었을 거예요. 이제 반나절인데……."

 "이제 반나절이라니? 벌써 해가 지고 있단 말이다! 무슨 목욕을 그렇게 오래 한다니?"

 옆에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옥면무영 호일랑이 한쪽 바위에 턱하니 걸터앉아 있었다. 그는 감천형을 보자 목례하여 그를 맞이하고는 다시 엉덩이를 바위에 걸쳤는데 따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제 보니 그 공터처럼 보이는 바위에는 제단(祭壇) 하나가 만들어져 있었다. 빙 둘러 깃발이 꽂혀 있고 제단까지는 바위를 쌓아 계단도 만들었다.

 "쯧쯧쯔…… 무식하긴, 그거 기다린 걸 가지고 뭘 죽는 소릴……."

 "무, 무식이라니? 물속에 들어가서 때 씻는 게 목욕 아니면 뭐냐? 개방 거지도 아니고 뭔 때가 그리 많다고 아침부터 지금까지 하고도 모자라서 아직도 멀었다고 하는 거냔 말이다."

 "쯧쯔…… 그러니 무식하다고 하지. 목욕이 그냥 목욕이나? 맑은 물에서 정신을 씻고 가다듬어서 황천후토(皇天后土)에 성심(誠心)을 전달하기 위한 과정이란 말예요!"

 "황천후토는 무슨…… 새벽에 여기 와서 지금까지 뭐 빠지게 종일 저놈의 제단을 쌓느라고 뱃가죽이 등에 붙었구만, 먹은 거라곤 물밖에 없는데……."

 "원…… 호 형은 개방 사람이라도 얼굴이 번지르르해서 좀 다른 줄 알았더니 뭘 그리 먹을 걸 밝혀요?"

 "먹을 걸 밝히다니! 내가 여기 와서 먹은 게 뭐가 있다고! 새벽에 와서 종일 저놈의 제단 쌓……."

 옥면무영 호일랑은 유성의 눈초리가 무섭게 변하는 걸 보고 저눔이 왜 저러지? 라고 생각하다가 아하, 그 이유를 금세 깨달았다. 하긴 깨닫지 않아도 이내 이어진 유성의 말로 알게 되었겠지만.

 "저놈의 제단이라니! 그런 부정 탈 말을 함부로……."

 유성과 옥면무영 호일랑이 티격거리는 소리에 대강 알고자 하던 상황은 물어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가 있게 되었다.

 감천형은 몇 걸음을 옮겨 조금 높은 바위로 올라섰다.

 그러자 한눈에 폭포가 떨어지는 연못이 눈에 들어온다.

 쿠쿠쿠…….

 폭포의 물은 여전히 굉음과 함께 떨어져 내린다.

 그 폭포 속에 한 사람이 앉아 있음이 보인다. 물론 감천형의 안력이 특별나지 않다면 보기 쉽지 않았을 것이었다.

 '난데없이 제단을 쌓고 목욕재계라…….'

 묘한 빛이 감천형의 얼굴에 떠오른다.

 새벽에 돌아온 한효월은 바로 제단 쌓을 곳을 준비토록 했었다. 그리고는 개방과의 연락을 위해 그 자리에 옥면무영 호일랑과 유성이 남았다. 그때부터 감천형은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이미 한효월로부터 몇 가지 지시를 받았던 것이 가시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놓고 한효월은 바로 저 폭포 속에 들어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미 해가 저물어감에도.

 옥면무영의 말대로 목욕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처음에는 물속에서 움직이는 듯하더니 지금은 폭포 속에 있는 바위에 반쯤 잠긴 채로 석상과 같이 앉아 있었다.

 무슨 신공을 참오(參悟)하기 위해서 운기조식을 하거나 선정에 잠긴 것 같지도 않았다.

 "여전히 알 수가 없군……."

 감천형은 답답했다.

 사숙의 능력은 그가 보기에 경천위지(經天緯地)했다. 하지만 세력이 없으니 그 힘을 발휘할 수가 없어 혼자서 늘 동분서주하면서도 실제로는 뜻했던 것을 이루어내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당금의 천하는 영웅 일 인의 힘으로 어떻게 할 상태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일모도원(日暮途遠)이라, 갈 길은 먼데 서산에 해는 지고의 형국인 것이다.

 {c#}*   *   *

 감천형은 의자에서 일어나 탁자 주변을 서성거렸다.

 질곡(桎梏)의 세월을 거친 그의 얼굴에는 전보다 신중함이 더 짙어져 한층 무게로워 보였다. 뒷짐을 진 어깨도 당당하다.

 깊숙이 가라앉은 눈빛은 침잠한 가운데 날카롭다.

 "속진(俗塵)을 씻어내려 한다……?"

 감천형이 문득 중얼거렸다.

 한효월이 폭포에 들기 전에 그에게 남긴 유일한 말이었다. 산수가 좋은 폭포를 찾아야 하겠고 제단을 쌓을 장소가 필요하다. 한효월의 요구에 따라 그들은 여기에 오게 되었다.

 제단을 쌓는 것은 한효월과 유성, 그리고 옥면무영 호일랑이 같이했다.

 감천형은 사람들을 이끌고 그가 일을 끝낼 때까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도록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근래에 들어 그는 하루를 수천 조각으로 내야 할 만큼 바빴다.

 한효월의 격려에 힘입어 사람들을 모았고 아직 정식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이제 어느 정도 힘을 갖추게 되었다. 그 이름을 정의맹(正義盟)이라 하여 임시 맹주가 바로 그였다.

 그런데 그런 그를 끌고 와서 고작 보초를 서라니.

 다른 사람이었다면 어이가 없는 일일 터이지만 그것이 한효월인지라 감천형은 두말없이 정의맹 고수들을 이끌고 이곳을 지키고 있는 중이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그런 일을 할 사숙이 아님을 믿고 있기에.

 하지만 설명도 없이 그저 목욕재계에 하루 종일을 투자하니 아무리 믿는 그일지라도 답답하기 이를 데 없는 노릇이다.

 바로 그때 정의맹 순찰당 당주로 있는 신풍객이 안으로 들어왔다.

 "맹주, 개방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개방에서?"

 "예, 급히 한 대협을 뵈어야 한다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한 사숙을? 내가 만나보지. 이리 데려오게."

 한효월이 여기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오직 개방의 방주인 황엽뿐이었다.

 그렇게 해서 전령(傳令)을 만나본 그는 안색이 변했다.

 쏴아아아…….

 폭포 속에서 한효월이 걸어나온 것은 한 시진이나 더 지나서였다.

 바지 하나만을 입은 그가 물에서 걸어나오자 유성이 얼른 도포를 그에게 가져갔다.

 가볍게 몸을 닦고 흰색의 도포를 걸친 그는 질끈, 허리를 묶더니 천천히 걸음을 옮겨 제단으로 향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칠성의 도리를 따라 움직였고 촘촘히 서 있는 깃발은 오행의 이치로써 그를 맞았다.

 그가 양손을 벌리자 길게 늘어진 소매가 한차례 펼쳐지면서 건곤(乾坤)을 싸안았고 그 순간, 미리 준비했던 초에서 일제히 불꽃이 피어올랐다. 유성이 미리 피워둔 향연이 심신을 맑게 가라앉힌다.

 좀 전까지도 티격거리던 유성과 옥면무영은 엄숙한 표정으로 깃발을 잡은 채로 한효월의 좌우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어디 그뿐일 것인가.

 이 일대에는 정의맹 사람들이 천라지망을 펼치고 있어 나는 새라 할지라도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이곳을 접근할 수 없으리라.

 제단에 이르른 한효월은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두 손을 맞잡으며 제단의 앞으로 광활히 펼쳐진 밤하늘을 바라본다.

 이미 노을도 사라져 다시금 어둠이 세상을 덮고서 밀려오고 있었다.

 '뭐 하는 건지 좀 알려주라.'

 금방 뭘 할 것 같았던 한효월이 손을 모으고는 조용히 굳어져 움직이지 않는 데다가 그게 또 한 식경이 넘어가자 참지 못한 옥면무영이 전음지성으로 유성에게 물었다.

 "……!"

 유성이 그를 사납게 노려보았지만 그가 아랑곳하지 않는 표정임을 보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머리를 젓더니 전음을 보내왔다.

 '천기(天機)를 짚어보시기 위해서 목욕재계하고 정신을 가다듬었고, 이제 황천후토에 자신의 죄를 고하고는 천기를 엿보려고 하시는 거니 절대로 소리 내거나 움직이면 안 돼요!'

 '천기를 엿본다고?'

 얼떨떨한 빛으로 옥면무영이 한효월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가 뛰어남은 이미 알고 있는 일이다.

 천기를 읽는다는 선배 기인들도 여러 사람을 보았었다. 하지만 한효월과 같은 젊은 나이에 천기를 읽는다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게다가 지금 같은 상황에서 천기를 읽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이처럼 급박한 상황에서 무슨 제갈량의 신기묘산 같은 걸 흉내라도 내보겠다는 말이면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일각이 여삼추인 마당에…….

 '답답하군…….'

 옥면무영은 암암리에 한숨을 내쉬었다.

 방주의 엄명으로 한효월과 행동을 같이 할 때만 해도 숨 막히는 시간의 연속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이건 한가한 데다 따분하기조차 했다.

 한효월의 표정은 엄숙했다.

 고요히 가라앉아 하늘을 우르른 그의 얼굴은 투명한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도 알지 못할 주문과도 같은 말을 흘려내는 그의 눈빛은 암담해 보였다.

 어느 순간.

 하늘의 별이 빛을 발하는 듯 보였다.

 한효월도 양손을 합했다.

 마치 하늘을 향해 알았다는 표시를 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낮은 음성.

 "황천후토가 허락하지 아니한다면 인간이 어찌 천기를 거스를 수 있으랴. 더 이상의 삶을 잇기 어려우니 천기를 엿봄으로써 죄를 받을지라도 그것은 이 몸이 모두 감당하리다."

 어디에서 비문(碑文)이라도 읽는 듯 담담한 음성이지만 그 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음은 그의 심중 격동이 간단치 않음을 의미한다.

 순간, 세찬 돌풍이 제단에서 일더니 앞에 있던 누런 깃발이 뚝 부러졌다.

 "공자!"

 유성이 자지러질 듯 놀라 소리쳤다.

 "경망되이 굴지 말거라. 내가 너를 그렇게 가르쳤더냐."

 여전히 등을 돌린 채로 무릎 꿇은 한효월의 나지막한 꾸짖음에 유성은 감히 경망되이 움직이지 못한다.

 그러나 그 눈에 서려 뚝뚝 떨어지는 것은 뜨거운 눈물.

 피를 흘려낸들 그보다 더 뜨거울쏜가.

 '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옥면무영 호일랑은 깃발을 움켜잡은 채로 눈을 끔벅거렸다.

 돌개바람이 갑자기 제단에만 분 것도 이상하지만, 그렇다고 멀쩡하던 깃발이 유독 하나만 부러진 것도 괴이하다. 게다가 깃발 하나 부러진 걸 보고 저놈은 왜 또 저렇게 숨이 넘어간단 말인가.

 그때 제단 아래쪽에 감천형이 나타났다.

 그는 한효월의 뒷모습을 보고는 뭐라고 할 듯했지만 분위기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감 사질인가?"

 한효월이 등을 돌린 채로 물었다.

 "예, 사숙."

 "황 방주에게서 연락이 왔나?"

 "그렇습니다. 방금 급히 전령을 보내와서……."

 "가서 황 방주께 전하도록 하게. 적의 눈속임일 테니 급히 움직이지 말고 감시만 하시도록 정 대인에게 전하도록."

 "그……."

 얼떨떨해서 입을 벌렸던 감천형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무슨 내용인지 듣지 않고 이미 아신다는 겁니까?"

 "정 대인이 제천교주를 발견했다고 소식을 전해오지 않았나?"

 "으음……."

 부지중에 감천형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김이 새는 소리라고나 할까? 헐레벌떡 뛰어온 사람으로서는 너무도 당연한 일일런지도 몰랐다.

 "대체 어떻게?"

 "그렇게 전하고 이 일대의 경계는 이제 철수해도 좋아. 감 사질은 물러나서 한 사람을 기다리도록 해주게. 내 예측이 틀리지

 않는다면 아마 그가 곧 올 걸세."

 "누가 올 건지……."

 "만나보면 알게 될 거야. 하지만 그를 적대시하지는 말고 정중히 대하도록 하게. 앞으로의 일전은 그와의 협상에 달렸을지도

 모르니…… 그가 오면 바로 나에게 안내해 주게나."

 그 말을 끝으로 한효월은 입을 닫았다.

 '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있나?

 어지간한 감천형도 눈을 끔벅이다가 멀뚱한 눈으로 깃발을 움켜잡은 채로 자신을 보고 있는 옥면무영과 눈이 마주쳐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의 얼굴 표정을 보니 바로 자신의 얼굴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감천형은 하릴없이 물러나고 말았다.

 오늘처럼 사숙이 사람 같지 않아 보이는 적은 없었다. 늘 애늙은이 같기는 했어도 이렇게 사람을 귀신에 홀린 것처럼 만든 적은…….

 "……!"

 그러고 보니 문득 생각이 났다.

 그가 한효월을 처음 중조산으로 찾아갔을 때, 그가 이미 알고서 자신을 기다리게 했던 일.

 그렇다면 지금 찾아오리라는 사람은 과연 누구인 것일까?

 그가 누구이길래 적대시하지 말라는 것일까?

 감천형은 부지간에 발걸음을 빨리 하기 위해서 진기를 일으켰다.

 그가 자리 잡은 곳은 한효월이 있는 폭포로 가기 위한 길목이었다.

 그곳을 기점으로 반경 일 리가량의 숲에 척후를 두고 반 리 사방에는 고수들을 깔아 적을 방비케 하고 있었다.

 그가 머물고 있는 곳은 사냥꾼의 움막.

 그런데 그가 거기에 채 도달하기 전에 순찰당의 당주 신풍객이 급히 달려오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누가 찾아온 건가?"

 신풍객이 급히 복명하려는 것을 본 감천형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 그렇습니다만 어떻게……?"

 기습을 당한 듯 얼떨떨한 표정으로 신풍객이 그를 바라보았다.

 찾아온 사람은 정말 뜻밖이었다.

 한효월이 굳이 그를 적대시하지 말라고 이야기한 이유를 그를 보자 바로 알 수가 있었다.

 대막사왕.

 천하십왕 중 하나인 그가 찾아왔던 것이다.

 "한 공자를 만나고 싶소."

 아무도 거느리지 않고 은밀히 찾아온 그가 감천형을 만나자 한 첫 마디였다.

 "다른 사람은?"

 감천형의 말도 간단했다.

 대막사왕은 손을 벌려 보였다.

 "혼자요."

 "간담이 크시군."

 "핫하하…… 아무려면 적진에 온 사자를 죽일 리야 있겠소?"

 그가 방약무인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소문대로 대범한 모습이었고 또한 천하십왕다운 태도이기도 했다.

 감천형이 물러남을 느끼면서도 한효월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침잠했다.

 혹시라도 하여 조금이라도 시간을 늦출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천기를 헤아렸다.

 그러나 운명은 변함이 없고 시간은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누구도 멈출 수 없는 것이 운명의 시간이니 어찌할 것인가.

 '어차피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었으니 더 미련을 둬서 무엇 하랴. 이젠 적의 수괴(首魁)를 끌어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수밖에.

 부디 마지막 안배가 제대로 이루어지기를……!'

 문득 그의 안색이 묘하게 변한다.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작은 흔들림이 인다.

 '인연이 다하니 인연이 이어지지 못하며, 다음 대에서 후일을 기약하게 되다…… 이게 무슨 뜻일까?'

 인연이 다하다.

 '누구와의 인연을 의미하는 것이지?'

 그의 뇌리에 불현듯 서문운하의 모습이 스쳐 간다.

 하지만 그는 애써 그녀의 웃는 얼굴을 털어버렸다. 가슴 한쪽 깊은 곳이 싸아하니 아려온다.

 과연 그는 무엇을 하는가, 과연 무엇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버려둔 채로 풍진(風塵) 속에서 바삐 뛰고 있는 것일까.

 알지 못할 일이었다.

 사람의 삶이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난다. 어찌 후일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인가?

 죽어서라도 다음 대를 기약할 한(恨)을 가졌다면 몰라도.

 한효월은 잠시 숨을 가다듬고서 손가락을 짚었다. 천간지지(天干地支)…….

 그리고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

 "신세(身世)……."

 문득 사부가 남긴 서신이 떠오른다.

 <……선택은 네게 달려 있다.

 네 일신의 청정(淸淨)을 강호의 혼탁으로 더럽히고 싶지 않다면 너는 즉시 내가 남겨둔 금낭을 다 태워 버리고 은거하도록 해라.>

 그렇게 남긴 금낭이 두 개.

 하나는 자신의 생사에 의문이 생기거든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너의 신세를 알게 되면>이었다.

 "나의 신세란 말인가?"

 한효월은 문득 가슴팍을 더듬었다.

 아직 그의 가슴에는 목걸이처럼 걸고 있는 금낭이 있다.

 '인연이 다했다면 금생에는 나의 신세를 알게 되지 못하리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 금낭을 본들 무엇 할 것인가? 하지만 다음

 대에서 후일을 기약하다니?'

 총명절정인 그로서도 도무지 요령부득이다.

 홀홀단신.

 게다가 이미 죽음을 받아놓은 자신에게 후대라니, 아무래도 무엇인가 천기를 잘못 읽어낸 것 같았다.

 '그토록 속진에 많이 더렵혀져 있었던가?'

 한효월은 부지중에 머리를 저었다.

 그는 아직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설마 이 세상에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후대가 자라고 있을 것이라고는,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그런 일이 있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부께서 굳이 내가 신세를 알고 난 다음이라고 한정하신 것에 뜻이 있을 테니 나머지는 운명에 맡길밖에.'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격동했던 눈빛은 이미 고요히 가라앉아 있었다.

 '마지막 패가 성공한다면…… 적을 끌어내고 섬멸시킬 수도 있으리라. 그것이 가능하다면…… 후우, 부디 내 생각이 맞기를 바랄

 수밖에.'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천기를 본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정말 제대로 천기를 보려면 자신의 생을 갉아먹을 만큼의 심력을 소모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 바쁜 와중에 하루를

 소모하면서까지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지는 아니 하였으리라.

 "성아."

 그가 문득 입을 열었다.

 "예, 공자!"

 유성은 황급히 답했다. 누가 뭐라건 한효월은 그에게 있어 주인이고 공자였다.

 "자리를 치우도록 해라. 곧 사람이 올 것이다."

 감천형에 의해 안내된 대막사왕은 시내가 흘러가는 계류의 널찍한 바위에 우뚝 선 한효월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뒷짐을 진 그의 등은 허허로워 보이기도 하고 유람을 나온 시인의 모습으로 보이기도 했다.

 '풍진강호에 맞지 않는 인물이야…….'

 그를 보면서 대막사왕이 내심 머리를 저었다.

 언제 어떻게 보아도 탈속(脫俗)한 기품이 느껴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한효월만은 다르다.

 나이가 많지 않음에도 늘 볼 때마다 신비한 느낌이 드는 사람이다. 대막사왕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를 볼 때마다 느끼는…….

 "사숙. 말씀하신 사람이 왔습니다."

 감천형의 말에 한효월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조용한 눈빛이다. 지난번에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 사람을 보면서도 그 눈은 고요하기만 했다.

 "어서 오시오."

 "……."

 대막사왕은 미간을 찡그린 채로 잠시 한효월을 응시했다.

 "본왕이 올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군."

 "미리 연락을 받았으니 알고 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는지 들어봅시다."

 대막사왕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를 안내해 온 감천형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은밀한 매복이 있음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주위를 물려주시오."

 대막사왕이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소. 어차피 모두가 한가족이라 결국 다 알게 될 일이니."

 "이 일은 극비를 요하는 일이란 말이오."

 "한가하시오?"

 "……?"

 "당신이 내게 하고 싶은 말은 한가한 것이 아니라, 시간을 다투는 일일 텐데…… 내 짐작이 틀렸소?"

 "으음……."

 부지중에 대막사왕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호방한 모습의 그의 얼굴에서는 일순 난감한 빛이 스쳐 갔지만 그는 이내 머리를 저었다.

 "역시 이 일은 문곡을 시켰어야 했는데……."

 "그가 온다면 당연히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았을 것이오."

 "놀랍군. 문곡이 했던 말을 그대로 하다니…… 좋아. 말하지! 나는 한 공자 당신에게 제천교주의 행방을 알려주기 위해서 왔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놀랍기 그지없다.

 "그런 정도라면 우리도 이미 알고 있소."

 감천형의 말에 대막사왕은 냉소를 흘렸다.

 "제천교주가 지금 어디에 있기에? 혹, 팔촌리(八村里)에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말하는 것이오?"

 "……!"

 감천형의 안색이 굳어졌다.

 과연 그가 말한 것이 정 대인이 알아낸 정보와 같았기 때문이다.

 "제천교주는 수많은 화신(化身)을 준비하고 있지. 이번 일도 마찬가지요. 그는 정 대인이 통금령을 내리면서까지 자신의 행보를

 막자 그의 이목을 혼란시키기 위해서 그곳에다 화신을 배치해 놓고 공격이 시작되면 자신은 은밀히 포위망을 빠져나갈 생각이오."

 "왜 그런 것을 나에게 알려주는 것이오?"

 "어쩔 수 없어서…… 자세한 것은 말하기 어렵소."

 "그렇다면 돌아가시오."

 "뭐라고?"

 "당신은 이미 나를 한 번 속였소. 그런 당신을 어떻게 믿고 당신이 제공한 정보를 믿을 수가 있겠소? 또 다른 함정이 아니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기에?"

 "그건…… 으음……."

 대막사왕은 신음을 흘렸다.

 "당신이 나를 믿게 하지 못한다면 이곳에서 벗어나기도 힘들 것이오."

 "사자를 잡아두겠단 말인가?"

 대막사왕은 피식, 웃었다.

 잡을 테면 잡아보라는 태도였지만 안색은 편치 않다.

 "사신을 목 벤 일은 한두 번 일어난 일이 아니오. 특히 그 사신이 적의 머리에 해당되는 자라면 쉽게 보내기 어렵지. 내가 당신을

 그냥 돌려보내야 하는 이유를 말해 보시오."

 "감히 나를 위협하려는 것인가?"

 "사실을 말할 뿐이오."

 한효월이 냉정히 말했다.

 "……."

 대막사왕은 사납게 한효월을 쏘아보았다.

 가공할 위세가 그의 몸에서 돌개바람처럼 일어나 주위를 휩쓸었다. 바윗돌이 들썩거리고 냇가의 돌들이 핑핑- 날아올랐다.

 '과연 천하십왕!'

 감천형은 내심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무공은 이미 예전과는 비교하기 힘들 만큼 진보한 상태였다.

 그런 그의 무공으로도 대막사왕과 비교하면 손색이 있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 어찌 감탄치 않을 것인가.

 하지만 전과 다른 점은 분명히 있었다.

 전이라면 아예 상대를 못한다고 생각이 될 것이었지만 지금은 손색이 있을 따름이라고 느끼는 것이니 그것은 하늘만큼이나 큰 차이였다.

 "좋아, 지은 죄가 있으니 이런 수모야 감수할밖에."

 대막사왕은 뜻밖에도 이내 수긍을 하고 끌어 모았던 진기를 흩었다.

 "제천교주가 무림에 군림하려는 것은 대원의 중원수복을 위해서다. 그렇기에 못마땅한 점이 있더라도 모든 것을 다해 그를 도왔고

 부족한 물자를 아낌없이 제공했지. 그런데 지금의 그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다른 생각?"

 "그렇다. 그는 이미 스스로의 힘으로 의사 결정을 하지 못한다. 누군가의 꼭두각시로 변해 이용당하고 있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북원의 용사들까지도 죽음으로 내몰고 있어 더 이상은 방관할 수가 없다."

 "당신의 모든 것은 그가 물려준 것일 텐데?"

 "그는 어릴 때부터 내가 동경하면서 커온 우상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미치광이고 꼭두각시일 따름이다. 같이 미치광이가 될

 수는 없다. 그는 만천하를 독으로 덮어 생령(生靈)의 씨를 말리려 한다."

 "대의(大義) 때문에란 말이오?"

 "그렇다."

 "아하하하하……."

 한효월은 낭랑히 웃음을 터뜨렸다.

 어깨를 들썩이는 웃음소리.

 그 웃음소리에 대막사왕의 안색이 일그러져 갔다.

 "왜 웃는 것이냐?"

 한효월이 웃음을 그쳤다. 그리고 정색.

 "본심을 말해 보시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소."

 "……."

 대막사왕은 사납게 그를 쏘아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이군. 좋다. 말하지."

 그는 한효월을 노려보면서 한 자 한 자 끊어 말했다.

 "그가 있으면 나 또한 암중의 그들에게 허수아비로써 휘둘려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는 사람이지, 남의

 지시를 받는 허수아비가 아니다."

 "……."

 이번에는 한효월이 침묵했다.

 그는 대막사왕의 내심을 살피려는 듯이 그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제천교주의 배후에 있는 자가 누구요?"

 "그건 나도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그 배후가 제천교를 만들도록 그를 도와주었고, 지금도 막후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 사실조차도 나는 중원에 들어와서야 무엇인가 이상함을 느끼고 조사를 한 끝에 알 수가 있었다."

 "좋소…… 그럼 제천교주는 지금 어디 있소?"

 "그는 장강을 건너기 위해서 북상 중이다. 지금 있는 곳은 무창에서 백여 리 못 미친 조가장(趙家莊)이다. 정화를 속이기 위해서 상당수의 병력을 화신이 있는 곳에 남겨둔 상태이고, 그를 호위하는 직속 호위들만 그의 주변에 있을 것이다. 최대한 빠른 속도로 북상할 예정으로 알고 있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알지 못하겠다. 오늘 밤에 다시 그곳을 떠날 것이니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조가장이라…… 뭐 하는 곳이오?"

 "나도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한다. 그냥 외관은 평범한 곳이지만 실제로는 제천교의 무창 분단 연락 거점으로 알고 있다."

 한효월은 하늘을 얼핏 보고서 천색을 살피더니 말했다.

 "그럼 두 시진 후에 그곳에서 만나기로 합시다."

 "그곳에서 만나다니?"

 대막사왕의 얼떨떨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당신도 그 공격에 연수(聯手)해야 하오. 뿐만 아니라, 당신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선봉에 서야 하지."

 "그, 그런!"

 대막사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만약 하지 않겠다면 나는 당신의 말이 모두 거짓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소. 그리고는 일단 제천교주의 행방을 누설해 보겠소. 그럼

 당신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 있게 되겠지……."

 "그렇게 되면 그를 놓치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그를 고변한 것을 그가 알게 될 것이다!"

 "그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오. 당신들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나건……. 설마 하니 이런 것 하나 예측하지 않고 간단히

 차도살인(借刀殺人)을 하려 했단 말이오? 하하, 그럴 리가?"

 "이, 이런……."

 그가 신음을 흘렸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감천형은 기가 막혔다.

 대체 뭘 어떻게 알고 있었길래 천하십왕 중 하나를 단숨에 저렇게 옭아매고 마는 것일까? 그가 보기에 대막사왕은 한효월의

 올가미에 이미 걸려 피할 수가 없어 보였다.

 말 그대로 진퇴양난이었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 널 죽여 입막음할 수도 있다!"

 대막사왕이 눈을 부릅떴다.

 "그럴런지도. 하지만 당신이 죽을 수도 있소."

 "흥! 본왕이 설마 혼자 왔을 것으로 믿는단 말이냐?"

 "그럴 리가. 하지만 당신이 한 말은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들었소. 아마 그 입을 다 막기는 쉽지 않을 것이오."

 "으핫하하…… 본왕은 말할 때 강기막으로 일 장 주위를 모두 봉쇄하여 말소리를 새어 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의 말소리는 뒤가 잦아들었다.

 한효월이 고개를 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소. 당신은 내가 소매를 젓고 있는 걸 보지 못했소?"

 "그게 무슨……."

 "당신의 강기막은 내 주변에서는 전혀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의미요. 해서 감 사질을 비롯해서 여기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 말을 들었지."

 대막사왕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천하의 군자라는 한효월이 이처럼 교활하다니!"

 "교활? 대막의 왕이 협잡을 하여 사람을 속인 것은 아무렇지도 않고 내가 자신을 보호하려는 것은 교활이란 말이오?"

 한효월이 차갑게 말했다.

 "으음……."

 다시금 신음이 그의 입술을 비집었다.

 이윽고.

 "좋소. 그럼 이렇게 합시다."

 마침내 그가 포기한 듯 입을 열었다.

 "내가 선두에 서라는 것은 양보해 주시오. 대신 옆에서 돕겠소. 한 공자의 옆에서 그 지시대로 움직일 테니…… 선봉에만 세우지

 말아주시오. 이 부분에서 더 이상을 요구한다면 나로서도 이 일은 없던 것으로 할 수밖에 없소. 가능한 나를 전면에 나서지 않도록

 해주시오."

 그의 말투가 다시 바뀌었다.

 "그렇게 합시다."

 한효월이 머리를 끄덕였다.

 원래부터 그는 대막사왕은 선봉에 세울 생각이 아니었다. 그러니 한효월의 대답은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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