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二首 절대고수(絶代高手)
-세상을 놀라게 하다
천하십왕이 강하되, 하늘 밖에 또 하늘이 있다
하늘을 향해 치솟은 만장단애.
구름을 뚫고, 햇살을 가리면서 솟구쳐 오른 깎아지른 절벽은 세간의 발길을 거부한다.
그 옛날 거대한 개벽(開闢)이라도 있었던 듯 깎아지른 절벽과 악마의 이빨과도 같은 툭툭 불거진 암벽들의 날카로움을 세차게 내려치면서 흘러가는 물살은 아우성이라 부르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오죽하면 이곳을 일러 매도 건너기 시름에 겨워한다고 응수간(鷹愁澗)이라 이름하였을 것인가.
사방으로 물방울이 튀어 물안개가 피어올라 눈앞을 보기 힘들고, 검은 바위는 물살에 깎여 발 디딜 곳이 반들거리는가 하면 이내 칼날과 같은 기암괴석들이 툭툭 돌출한다.
참으로 험악하다.
그 응수간의 길이는 삼십여 리에 달한다.
삼십여 리에 달하는 응수간의 끝에는 만장단애가 자리하는데,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물줄기들이 사방에서 뒤엉켜 응수간을 휘감은 물길을 형성한다.
일대를 덮는 물안개는 거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오랜 세월을 두고 변하지 않는 그 광경.
그런데 오늘은 어딘가 달랐다.
그 단애의 한쪽이 거대한 도끼로 잘라낸 듯이 파괴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계곡 자체가 반쯤 주저앉으면서 그 사이로 또 다른 계곡의 모습이 드러나 있었다.
무너진 계곡.
검고 날카로운 바위들이 무너진 그 계곡 사이로 드러난 계곡은 응수간과는 전혀 달랐다. 아침 안개가 드리운 그 계곡은 산곡(山谷) 하나를 사이에 두고서 떨어져 다른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가 졸지에 비명과 함께 실체를 드러내야 했다.
회색의 인영들은 그 새로 나타난 계곡으로 새벽 안개를 가르면서 바람처럼 밀려들었다.
한둘이 아니었다.
돌연.
"무엇 하는 자들이냐?"
앙칼진 고함.
시비 차림의 소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녹의와 홍의를 한 그녀들이야말로 홍아와 향아. 이심환의 시비들이다. 대체 그녀들은 어떻게 이곳에 나타난 것일까.
"마교의 계집들이로군. 잡아라!"
냉엄한 호통과 함께 회의인들이 그녀들에게 날아들었다.
여자, 그것도 채 스물도 되지 않은 계집이라고 가벼이 생각했던 회의인 둘이 비틀거리면서 격퇴되었다.
하지만 뒤이어 들이닥친 회의인들의 무공은 그녀들로서 견디기 어렵게 고강했다.
"악!"
홍아가 비명과 함께 쓰러지자 향아가 날카롭게 부르짖었다.
"물러나지 못해!"
그녀가 홍아의 앞을 가로막으며 수중의 단검을 사력을 다해 휘두르자 삼엄한 검빛이 일었다.
홍아를 쓰러뜨린 회의인에게서 당황한 빛이 드러났다.
"흥!"
하지만 냉랭한 코웃음.
또 다른 회의인 하나가 불쑥 나타나 그녀가 휘두르는 단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예 그 단검이 눈에 뵈지 않는다는 태도.
향아는 이를 악물고 단검을 내리그었다.
현오획사(玄烏劃沙)의 평범한 일식이지만 기세만은 날카롭기 그지없어 강철이라도 잘라 버릴 기세였다.
땅!
그러나 막상 나타난 결과는 전혀 달랐다.
놀랍게도 단검을 손으로 쳐버린 회의인은 바람처럼 덮쳐 가면서 향아의 가슴을 쳐버렸다. 전혀 망설임이 없는 손길이었다.
손목에 강력한 반탄력이 전해짐과 함께 심상치 않음을 느낀 향아는 신형을 비틀면서 소매를 휘둘러 상대의 손을 감으려 했다.
"제법이군?"
회의인이 뜻밖이란 듯 냉소를 흘렸다.
말은 그렇지만 그는 조금도 쉬지 않고 바람처럼 진격하여 향아의 운라수를 무력화시키면서 장영(掌影)을 쏟아냈다.
향아의 눈빛이 일그러졌다.
상대는 그녀가 맞서기 곤란한 고수였다.
바로 그 순간.
"감히 천운곡에 난입하다니!"
꾸짖음과 함께 한 사람이 두 사람의 가운데로 날아들었다.
펑!
맹렬한 폭음과 함께 향아를 공격하던 자가 뒤로 튕겨졌다.
"아가씨!"
향아가 자신을 막아선 여인을 보고 반색을 했다.
나타난 여인, 이심환은 서릿발 같은 안색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서 온 자들이냐?"
너무도 뜻밖이었다.
곤하게 자고 있다가 맞은 날벼락. 천운곡은 외부와 단절된 곳이다.
진세가 바깥을 막고 있어 외부에서는 그냥 들어올 수가 없는데 난데없이 외벽이 허물어지면서 진세랑 상관없이 회의인들이 난입해
들어온 것이다. 채 잠옷도 벗지 못하고 달려나온 향아와 홍아가 제 능력을 발휘할 리 만무이고 이심환도 허겁지겁 달려나와야 했다.
"마교의 교장을 지키는 것이 계집들인가?"
냉엄한 음성.
한 사람이 회의인 가운데 모습을 드러냈다.
회의인들 가운데서 섭선을 휘적거리고 있는 중년인은 다른 사람이 아닌 봉황문의 문곡이었다.
"마교라니?"
이심환이 아미를 치켜떴다.
"하하, 이 마당에 시치미를 떼려 하다니? 조용히 교장을 연다면 해를 끼치진 않겠다. 하지만 허튼짓을 한다면 용서하지 않겠다!"
"난데없이 난입해서 협박이라니! 마교는 뭐고, 교장은 뭐란 말인가?"
이심환이 차갑게 말을 자르자 문곡이 냉소를 흘렸다.
"늘 그런 법이지. 권주는 마다하고 벌주만을 원하니……. 꿇려라!"
회의인들이 일제히 날아들었다.
칠, 팔 명이나 되는데 개개인이 약수(弱手)가 아닌 데다 원래부터 연수 합격을 연습한 듯 움직임이 일사불란하니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적이 누구며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어 이심환은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이들은 어디서 온 것일까?
"물러나지 못할까!"
이를 악문 그녀는 호통을 치면서 수중의 퉁소를 쳐냈다.
시간을 끌수록 불리하니 최대한 빨리 상대를 물리쳐야 했다.
퉁소와 소매가 한데 어울리면서 마치 나비가 너울거리는 것처럼 회의인들을 맞아갔다.
그녀의 무공은 특이하고도 기고(奇高)하여 회의인들은 일류고수였고 일곱이나 되면서도 그녀를 쓰러뜨릴 수가 없었다.
오히려 앞선 회의인이 그녀의 퉁소가 펼치는 대라소법(大羅簫法)에 맞아 쓰러지면서 전혀 다른 상황이 초래되고 있었다.
"멍청한! 물러나거라."
무거운 힘을 가진 꾸짖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는 한 사람이 이심환과 그들 사이로 날아들었다.
"……!"
이심환의 안색이 달라졌다.
나타난 사람은 적수공권(赤手空拳)!
맨손으로 그녀의 대라소법을 막아냈다.
뿐만 아니라 그 손에서 일어나는 가공할 권경은 흡사 사막에서 불어오는 용권풍과 같이 주체할 수 없도록 그녀의 전신을 뒤흔들었다.
"빨리 찾지 않고 뭘 하느냐!"
그가 꾸짖었다.
그러자 문곡은 황급히 회의인들을 지휘하여 천운곡 안으로 난입했다.
"대체 무슨 짓이오? 당신들은 누구길래 이렇게 함부로……."
이심환은 말을 멈추었다.
나타난 사람, 대한이 눈을 부릅뜬 채로 양손을 쳐내는데 그 권세가 너무 막강하여 도저히 말을 할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공할 기세가 일대를 온통 휘감아 피할 수조차 없었다.
스파파팟-!
이심환은 전력을 다해서 수중의 퉁소로 대라소법 중의 대라파천(大羅破天)의 일초를 펼쳐서 상대의 권세를 찢어내고 적의 예봉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땅!
수중의 퉁소는 그 가공할 압력을 이겨내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심환의 공력이 따르질 못했다고 해야 하리라.
퉁소가 두 동강이 나는 순간에 이심환은 무서운 압력이 밀려듦을 깨닫고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적은 여자라고 봐주지 않았다.
팡! 파팡!!
그녀의 앞에서 맹렬한 폭음이 터졌다.
항거 불능의 힘에 주춤주춤, 밀려나는 그녀의 입에서 참지 못하고 핏줄기가 터져 나왔다.
"용권풍의 앞에서 그래도 버티다니 제법이군! 계집이라고 해서 봐주진 않는다. 무릎을 꿇으면 목숨은 살려주마."
대한이 냉엄히 꾸짖었다.
그는 승기를 잡았음에도 조금도 기세를 늦추지 않았다.
무서운 위세의 권경(拳勁)이 폭풍처럼 끊이지 않고 쏟아지는 폭포수처럼 이심환을 향해 밀려들고 있었다.
항복하지 않는 한, 죽음을 면치 못할 상황이었다.
바위라도 으깨고 말 힘을 가진 경력이 끊임없이 밀려오는 것은 공격 중에도 가장 무섭다.
그 끊임없는 힘을 막아내지 못하면 계속해 몰아쳐 오는 힘에 그대로 전신이 으스러져 죽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물러설 곳도 없다.
이심환은 이를 악물고 전력을 다해 버티려 하였다.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녀는 부드럽지만 또 강인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난데없는 이 상황에 누군지도 모른 채 무조건 항복할 그녀가 아니었다.
이 순간만 넘기면…….
하지만 상대가 너무 강했다.
콰쾅!
그녀의 앞에서 다시금 지축을 울리는 폭음이 터져 나왔다.
맹렬한 회오리바람을 맞으며 이심환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선 사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방금의 격돌에서 충격을 받은 듯 백의의 그도 어깨를 흔들거렸다.
그처럼 강력하던 대한도 방금의 격돌로 인해 주춤, 한 걸음을 물러났지만 별다른 충격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 대한은 나타난 사람을 보자 뜻밖이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빨리도 왔군……."
안색을 굳히는 그야말로 봉황문주이자 대막사왕인 완일이었다.
백의의 그, 이심환의 위기 상황에 그녀를 가로막으며 나타난 사람은 당연히 한효월이었다.
"역시 그랬었군……."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완일을 노려보면서 이심환에게 물었다. 얼굴은 돌리지 않은 채였다.
"괜찮습니까?"
"그, 그래요……. 어떻게 여길?"
너무도 뜻밖의 일에 이심환은 감격에 겨워 고개만 끄덕였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 그가 나타나서 자신을 구해주리라고 어찌 상상이라도 하였을 것인가!
"호오, 서로 아는 사이란 말인가?"
대막사왕 완일은 뜻밖이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렇다면 이미 교장은 한 공자의 손에 들어가 있단 말인가? 대단하군. 어느새 그런……."
그는 설레설레 머리를 흔들었다.
"어쩔 수 없군. 서로 마주치지 않기를 바랬는데 그렇게까지 되었다니 더 이상은 피할 수가 없겠구만."
그의 눈빛에 음산한 살기가 서렸다.
한효월은 미간을 굳힌 채 준엄히 꾸짖었다.
"이것이었소? 당신이 바랬던 것이? 당신을 키운 사람을 배신하고 그 자리에서 사라져 허겁지겁 달려온 것이 그 대신 자신이 마경을
찾아, 봉신방을 찾아보겠다는 야욕 때문이었단 말이오?"
"야욕(野慾)이라……?"
대막사왕 완일은 머리를 저었다.
"그게 야욕인가? 천하를 아우를 힘을 얻게 되는데, 세상을 다시 몽고마의 발굽 아래 둘 수가 있는데 그게 헛된 욕심이라? 핫하……
그렇다면 뭐가 사나이의 대망(大望)이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된다는 건가? 세상 사람 모두가 한 공자처럼 나는 젖혀두고,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해야 한다는 건가?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가 눈을 부릅떴다.
"본왕의 기도(企圖)가 성공한다면 내 백성들은 다시금 천하의 주인이 될 것이고, 이제 두 번 다시 실패하지 않을 터인데…… 그걸
두고 야욕이라 한단 말인가!"
그가 발을 구르자 흙구름이 발 밑에서 피어올랐다. 진동이 주변을 뒤흔들었다.
과연 그는 천하십왕 중 한 사람다운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봉신지비를 풀어 천하를 발 아래 두고자 함은 지난 100년래 천하무림의 화두(話頭)였다! 그 앞을 가로막고자 한다면……."
그는 한효월을 살기 띤 시선으로 노려보면서 말끝을 흐렸다.
"누구라도 그냥 둘 수 없지!"
막강한 기세가 풀풀 일었다.
"나를 이길 수 있으리라 자신하나?"
한효월의 달라진 말투에 대막사왕 완일은 냉소를 흘렸다.
"천하십왕이 공연히 생긴 말인 줄 아나? 설혹 네가 본왕과 같은 능력을 지녔다고 할지라도 넌 혼자다. 본왕이 비록 급하게
오느라고 전력을 대동(帶同)치는 못했어도 봉황문과 대막의 고수 칠십이 같이 왔는데, 과연 버틸 수 있을 것 같으냐?"
"과연 그렇게 생각하나?"
침착한 한효월의 말에 대막사왕 완일의 안색이 조금 달라졌다.
"그건……."
"당신이 그간 보듯, 나는 쉽게 움직이지 않으며 또한 대책없이 일을 추진하는 사람이 아니지. 그런데 당신을 쫓아오면서…… 내가
이곳에 혼자 나타났을 것이라고 생각하다니."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다른 길이 없으니 선택도 없다. 친구가 되지 않는다면 가장 무서운 적이 너이니, 어찌 살려둘
것인가? 더구나 누가 함께 왔다면 그들이 나타나기 전에 너를 처리할밖에!"
말과 함께 그는 발동했다.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고 한효월을 공격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말 그대로 한효월이 혼자 나타났을 가능성은 없었고 같이 행동하면서 그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가를 이미 피부로 느꼈기 때문에
시간을 끌어서 좋을 일이 없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더구나 교장을 이미 한효월이 가졌다고 오해한 바에야 더 더욱.
그가 수련한 용권풍은 대막의 절기다.
모든 것이 용권풍에서 시작해서 그 정화인 대풍장력(大風掌力)은 가히 사막의 모래바람을 연상케 한다.
막강한 힘으로 가로막는 모든 것을 부숴 버리는 것이다.
쿠쿠쿠-
한효월은 그와 맞서는 순간에 완일이 그간 자신의 전력을 다 보여주지 않았던 것임을 직감했다.
"역시 공일도와 같은 핏줄이라 숨길 건 숨겼다는 건가?"
코웃음을 친 한효월은 양손을 합쳤다가 자신을 향해 무섭게 밀려오는 용권풍을 향해 갈라쳤다.
대막사왕 완일은 한효월이 뜻밖에도 자신의 공세를 정면으로 맞받아오자 냉소와 함께 전력을 일으켜 쏟아 부었다.
그들과 같은 초절정고수는 절대로 건곤일척의 대결을 하지 않는다. 한순간이 생사의 갈림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양패구상(兩敗俱傷)이 된다 할지라도 혼자인 한효월이 결정적으로 불리하니까 그로서는 거리낄 것이 없는 유리한 입장이었다.
"아악!"
비명과 함께 향아가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문곡이 상황을 보고는 이심환과 시비들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히 한효월의 심기를 어지럽히려는 심산.
그러는 일방 수하들을 지휘하여 사방을 수색하니 과연 그는 심기가 깊은 모사(謀士)였다.
쓰러진 홍아를 돌보고 있던 향아가 치명상을 입고 쓰러지자 이심환이 노하고도 다급하여 대라소법을 펼쳐 소영(簫影)을 뿌려냈지만
이미 가볍지 않은 내상을 입은 그녀는 자신조차 지키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콰쾅!
폭음이 일었다.
한효월은 양손을 갈라쳐 상대와 맞부딪치는 것처럼 했지만 실제로는 그 한 동작으로 대막사왕 완일이 쳐낸 대풍장력을 비틀어
쳐냈다. 가공할 경기가 소용돌이치면서 옆으로 미끄러졌다.
그 순간에 한효월은 그림자처럼 앞으로 날아들었고 그의 손에서는 천하독보의 수인지력이 섬광처럼 쏟아져 나가 대막사왕 완일을
공격했다.
순간적으로 벌어진 상황.
그가 이처럼 자신의 공격을 밀어버리고 달려들 줄은 몰랐던 대막사왕 완일은 대경해 하늘이 무너질 듯한 고함을 질렀다.
"어헝!"
그는 이미 한효월의 수인지력이 절세무비(絶世無比)함을 알고 있었던 지라 호통과 더불어 쏟아낸 장세를 비틀었다.
쿠쿠쿠…….
그가 쏟아낸 대풍장력이 거대한 회오리바람으로 압축되면서 방향을 틀어 한효월을 쓸어갔다.
수발(收發)이 자유로운 절세고수의 면모를 보여주는 한 수!
칙칙!
독보적인 위력의 연환수인지력은 대막사왕의 가슴으로 짓쳐들었다.
한효월이 그대로 대막사왕 완일의 가슴을 찌른다면 그의 등 뒤로 날아드는 공포의 일격을 견디기 어려울 것이었다.
그 결과는 동패구상(同敗俱傷)을 의미했다.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하지만 누구라도 손을 거둔다면 그 순간 선기(先機)를 잃어버릴 것이 분명해서 손을 거둔다는 것은 정말 크나큰 결단을 필요로 한다.
절대고수의 싸움에 있어서 선기를 상대에게 넘긴다는 것은 한순간에 싸움이 끝날 수도 있음을 의미하는 까닭이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동패구상한다면 인원이 많은 대막사왕이 백 번 유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효월은 조금도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마주친 그 눈은 괴이하게도 웃고 있는 듯 보였다.
'대체 저놈이 왜 웃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지금 상황은 백번천번을 머리 굴려도 한효월이 불리했던 것이다.
그때 문득 대막사왕 완일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
-당신이 그간 보듯, 나는 쉽게 움직이지 않으며 또한 대책없이 일을 추진하는 사람이 아니지…….
미치지 않은 다음에야 이 마당에 동패구상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들 리가 없다.
대막사왕 완일은 갑자기 함정에 빠진 느낌에 가슴이 섬뜩해졌다.
뭔가 기분이 나빠진 대막사왕 완일은 쏟아낸 장세를 잡아끌면서 살짝 발끝을 밀었다.
그 간단한 동작만으로 쏟아냈던 장세, 가공할 회오리를 일으키는 장세는 그의 움직임을 따라왔고 그의 신형은 누가 집어 던진 듯이
찰나간에 옆으로 삼 장여를 이동했다.
가히 극에 이른 이형환위(移形換位)다.
마치 사람이 퍽! 꺼지면서 삼 장 옆에서 나타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한효월의 수인지력은 따라가면서 여전히 대막사왕 완일의 가슴을 쳤다.
그리고 그런 한효월의 배후를 끌어당긴 대풍장력이 날아들어 때렸다.
대막사왕 완일이 장세를 잡아끌어 당긴 것은 자신을 따라오지 말라는 의미였지만 한효월은 망설이지 않았다.
동패구상을 무릅쓰고서 그를 따라가며 공세를 늦추지 않았던 것이다.
파팟! 쾅!!
맹렬한 경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터져 나오는 폭음.
두 사람의 대결은 정말 너무도 찰나적이라 그 움직임은 채 반 호흡도 되지 않았다.
손을 쳐드는 순간에 인영이 엇갈렸고 그것과 동시에 귀청을 떨어 울리는 굉음이 터져 나왔던 것이다.
당사자에게는 긴 시간이지만 실제로는 찰나라는 표현으로도 모자랄 엄청난 속도의 대결.
주춤하는 대막사왕 완일을 향해 한효월은 숨 쉴 틈도 없이 덮쳐 갔다.
철판보다 강력한 호신강기를 두른 대막사왕 완일의 가슴팍을 두드린 수인지력은 그의 가슴에서 피를 뿜게 했다.
그가 몸을 비트는 동작이 조금만 늦었다면 아예 등까지 구멍을 뚫었으리라.
그 가공할 위력에 대막사왕 완일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는 천하십왕 누구에게도 자신의 능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당연히 한효월이 자신의 상대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그가 강한 것은 인정했지만 천하십왕과 상대할 능력을 가졌다고는.
그런데 아니었다. 달랐다.
"본신의 능력을 감추고 있었단 말이냐?"
그는 노호하면서 다시금 전력을 기울여 대풍장력을 때려냈다. 용권풍을 운용하여 장세는 가공할 회오리를 일으키고 있었다.
방금 전 그는 한효월의 수인지력에 격중되었지만 한효월 또한 그의 장세에 등판을 얻어맞았으니 무사하지는 못하리라 믿고 공력의 우위로서 그를 밀어붙일 심산이었다.
그렇게 해서 조금이라도 밀리면 잃은 선기를 되찾고 아예 치명타를 가할 작정.
그런데…… 한효월은 그의 의도를 알면서도 덮쳐 오던 기세 그대로 밀어붙이는 게 아닌가.
마치 상처를 입고 달려드는 멧돼지를 보는 것만 같다.
콰쾅!
다시금 터지는 폭음.
"크윽!"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대막사왕 완일은 신음을 토해냈다. 기혈이 솟구치고 지독한 충격이 전신을 두드린다.
그는 어깨를 튕기듯 흔들고는 주춤 잇달아 서너 걸음을 물러났다.
힘을 이기지 못한 발 밑에서 부서진 돌 가루와 흙먼지가 세차게 피어올랐다.
"저, 정말……?"
그는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한효월을 보면서 신음을 흘렸다.
어깨를 흔들고 있긴 하다.
그러나 믿기지 않게도 물러나지는 않고 다시금 덮쳐 오려는 모습이 아닌가.
가슴이 섬뜩했다.
"뜻밖이오?"
그런데 한효월이 계속해 덮쳐 오지 않고 물었다.
그의 안색은 조금 창백해 보이지만 잇달아 물러난 데다 가슴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대막사왕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선기를 잡고도 그 황금과 같은 기회를 날려 버리는 이런 물음은 전혀 뜻밖인데다 바보 같은 짓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어
대막사왕 완일은 얼떨떨한 얼굴로 한효월을 바라보았다. 한효월과 같은 사람이 왜 이런 일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펑펑!
"으악!"
"으아아……."
갑자기 잇달아 폭음과 고함, 그리고 단말마의 비명이 뒤쪽에서 터져 나왔다.
단애가 허물어진 바로 그곳이었다.
대막사왕 완일 등이 천운곡으로 들어온 곳이기도 했다.
그러니만큼 자연히 퇴로 확보를 위해서 지키는 사람이 있는 것이 병법의 기본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잇달아 비명이 터져 나온 것이다.
그것도 한두 마디가 아니라 으악! 소리가 들리자마자 그곳을 지키는 사람들이 잇달아 물러났고, 그것도 모자라 비명과 함께
튕겨나듯이 쓰러지면서…….
항거 불능의 적이 나타난 것이 분명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곳으로 쏠렸다.
허름한 옷차림을 한 일단의 대한들이 날듯이, 무서운 기세로 대막사왕 완일의 수하들을 허물어뜨리면서 곡 내로 진입해 들어오고
있었다. 그중 특히 앞장선 산악과 같이 우람한 체구의 대한이 보이는 위력은 압도적이라 아무도 그를 막아내지 못했다.
"사숙! 소질이 늦지 않았습니까?"
그 대한이 벼락치듯 고함치면서 앞을 가로막던 자를 일권으로 날려 보냈다.
가공하게도 상대는 철벽에 부딪친 듯 피를 토하며 튕겨졌다.
"알맞게 왔다. 어떻소?"
한효월은 대답을 하면서 대막사왕 완일을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완일은 곁눈질로 앞선 대한을 훑어보았다. 금방 토굴에서 기어 나온 듯이 허름한 옷을 걸치고 있는 그와 그 뒤를 따르는 자들의 숫자는 대충 오십쯤 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행색과는 달리 그들의 기세는 성난 호랑이와 같아 대막사왕 완일의 수하들은 무너지는 둑과 같이 그들에게 밀리고 있었다. 게다가 원래 그쪽을 지키고 있던 것은 모두 해야 십여 명밖에 없었다. 그러니 오히려 수적인 면에서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대체 어디서 기어 나온 놈들이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저런 자들에 대해서는 들어본 바가 없었다.
"이제 보니 너는 사라졌던 맹주부의 셋째인 거령신권 천무로구나!"
그에게 알려주려는 듯 문곡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다급한 지휘에 따라 계곡을 수색하던 자들이 천무와 그 수하들에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으핫하하……! 알았으면 닭대가리를 내밀고 죽음을 기다리거라! 연후에 털을 뽑고 목을 비틀어주마."
거령신권 천무가 껄껄 웃으며 앞을 막는 자들을 향해 일권을 날렸다.
그를 막는 자들은 모두 일당백의 고수들이었다. 봉황문의 고수들은 수백 명이고, 완일이 대막에서 데려온 고수들도 수백 명이었다.
그런 그들 중 비밀 유지를 위해서 골라 데려온 자들이니 당연히 약자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천무나 그를 따르는 옛날 호맹위사들을 상대하는 대막사왕의 고수들은 쩔쩔맸다.
거의 누더기와 같은 옷을 입고 있는 그들이 그간 사라졌던 맹주부의 위사들임을 안다면 누가 놀라지 않을 것인가.
아무리 괄목상대(刮目相對)라지만…….
문곡은 상황을 살펴보고 안색이 일그러졌다.
갑자기 전혀 유리할 것이 없는 상황이 되었다. 대막사왕 완일조차 한효월에게 쩔쩔매고 있는 듯 보였다.
아군의 숫자가 좀 많지만 흩어져 있는 상황에 완전히 허를 찔린 듯했고 적은 송곳과 같이 뚫고 들어와 이미 그와 완일이 있는
곳까지 거의 도달해 있는 상황이었다.
"잡아!"
그가 소리쳤다.
그렇지 않아도 허덕이던 이심환을 잡으라는 명령.
여자인데다 이미 한효월과 아는 사이. 더구나 이곳을 지키는 계집이니 인질로 삼을 수 있으리라는 판단이 선 것이다.
나타난 자들이 강하다 해도 이쪽도 고수 중에서 골라 뽑은 고수들이니 결코 약자가 아니다.
흐름을 조금만 비틀어서 대치할 수가 있게 한다면 절대로 질 싸움이 아니었다.
"비켯!"
천무는 두 눈을 부릅뜨고서 고함쳤다.
눈앞을 가로막는 자들을 향해 철퇴와 같은 주먹을 휘둘렀다.
그는 유성의 연락을 받자마자 그간 폐관에 들어 있던 수하들을 모두 이끌고 달려왔다.
그 지옥 훈련을 견딘 것이 바로 오늘과 같은 날을 위해서다.
한효월이 만들어놓은 훈련 계획은 끔찍할 정도였고 그 무서움을 증명하듯이 모두 칠십 명이 폐관수련에 들어갔지만 실제로 출관한
사람은 여기 있는 오십이 명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죽거나 폐인이 된 상태였던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첫 출도를 한 셈.
천무는 세간에 무공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무광(武狂)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의 성격은 세심하기 이를 데 없어 기민함이 둘째인 좌백에 뒤지지 않았다.
천운곡에 진입한 천무는 자신이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단숨에 알아낼 수 있었다.
해서 그는 이심환을 구하기 위해서 달려들고 있는 것이다.
그의 무공은 독고해의 세 제자 중 으뜸이라고까지 알려졌었다.
그런 마당에 그간 폐관수련은 불에다 기름을 부은 것과 같이 그의 무공을 일취월장의 경지로 솟구쳐 놓았다.
"크악!"
이심환을 공격하던 적의 수하가 득달같이 달려든 그의 일권을 견디지 못하고 피를 뿜어내면서 튕겨져 나갔다.
가히 만부막적의 위세.
"괜찮습니까?"
천무가 우렁한 음성으로 물었다.
"나는 괜찮……!"
그녀의 안색에 놀람의 빛이 떠올랐지만 그전에 천무는 이미 좌우에서 강력한 기운이 덮쳐 옴을 느낄 수 있었다.
"쥐새끼 같은 놈들이 암습을 하는구나!"
그가 호통 치면서 빙글 몸을 돌리는 가운데 양손을 바람개비처럼 휘두르며 잇달아 십여 권을 한꺼번에 후려냈다.
그가 죽도록 고련한 풍뢰연환권(風雷連環拳)이었다.
콰콰쾅!
폭음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그는 격한 충격에 어깨를 흔들면서 뒤로 물러나야 했다.
버티려고 했지만 충격이 너무 커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가 놀란 눈을 부릅뜨고 보니 그의 앞에서 두 명의 노인이 놀란 빛으로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와 거의 비슷한 충격을 받은 형상이다. 세찬 경풍이 그들의 사이에서 일어 방금 이 일전이 얼마나 강렬했는지를 말하는 듯했다.
그들의 무공은 제각기 발군의 양강지력이니 당연한 결과였다.
"조무래기가 아니군. 좋아, 좋아……. 다시 해보자!"
천무가 냉소를 치곤 팍팍 하는 소리와 함께 앞으로 걸어나갔다.
한 걸음마다 땅이 울리고 발걸음이 땅을 디딜 때마다 흙먼지가 퍽퍽 하늘로 치솟아올라 무슨 돌개바람이 앞으로 밀려나오는 것
같은 형상이었다.
그의 앞을 가로막은 두 노인의 눈에 놀람과 함께 긴장의 빛이 흘렀다.
싸움은 점입가경.
그것을 보는 문곡은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천무가 어떻게 해서 대막에서 온 대막삼로(大漠三老) 중 두 사람을 한꺼번에 상대할 수가 있단 말인가?'
대막삼로는 대막사왕 휘하의 가장 강력한 고수라 할 수 있었다.
그 아래로 다시 대막십팔룡이 있지만 그들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절세고수였고 문곡이 알기로 그들은 절대 천무와 비교될 수 없
전 세대의 고수들이었다.
그런데 혼자도 아니고 둘이 한꺼번에 달려들고도 우세를 차지하지 못하고 이젠 저 가공할 기세에 질린 빛이라니!
주변을 둘러보자 그들 일행은 어디에서도 우세를 점하지 못하고 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그는 한효월과 대치한 채로 굳어진 대막사왕 완일을 보자 결심을 하고는 암중에 다시금 지시를 내렸다.
그 지시는 천무가 호승심을 참지 못하고 앞의 두 사람을 덮쳐 간 바로 그 순간에 암중으로 이루어졌다.
천무와 좌백의 다른 점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좌백은 어떤 경우에도 냉정을 잃지 않지만 천무는 절세무공과 마주치면 그 순간을
절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천생의 투사라 할 만했다. 천무는 맹렬히 앞으로 돌격해 갔고 그 기세를 두 명의 노인은 겨우 막아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예봉을 피하고 반격을 노리는 상태라 할 수 있었다.
그 순간에 문곡의 지시를 받은 자들이 이심환에게로 달려들었다.
한효월에게는 대막사왕 완일이 손을 쓰기 시작했다. 거의 모든 공격이 일제히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천무를 너무 만만히 본 것에 다름이 아니었다.
천무 또한 지난 세월을 그냥 논 것이 아니라서 그가 앞으로 덮쳐 가자 그를 따라 곡 내로 진격해 온 수하들 십여 명이 이심환을
둘러싸 보호하면서 맞섰기에 싸움은 격렬해졌다.
팡! 파파팡!!
맹렬한 폭음과 함께 한효월과 대막사왕 완일의 주변에서 격렬한 회오리바람이 일어 주위를 휘감았다.
그 가운데에서 두 사람은 사력을 다해서 상대를 공격하고 있었고 누구도 결정적인 우세를 점하지 못했다.
정면으로 맞닥뜨리면서도 좀 전과는 달리 격돌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두 사람이 뿜어내는 내경(內勁)의 가공함은 주위를 휘감다 못해서 천지를 온통 뒤집어 버릴 것만 같았다.
피차의 기세가 너무 강해서 피할 수도 없어 기호지세였다.
상대의 공격을 변초로써 흩트리는 가운데, 계속 기회를 엿보는 형태이지만 누구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정말 방법없이 되밀릴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전황은 유리하다.
하지만 한효월은 초조했다.
자신이 과연 얼마나 버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상대는 천하십왕 중 하나라서 쉽게 거꾸러뜨릴 상대가 아니었다. 과연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그런 상대인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자신이 쓰러진다면 심각한 사태가 벌어질 것이 분명했다.
대막사왕 완일은 평소 보이던 성미 그대로 절대로 물러나지 않았다.
끝까지 해보자는 듯이 정면 승부를 걸어오고 있어 한순간도 마음을 놓기 힘들었다.
바로 그때.
'바보 같은 녀석! 언제까지 그렇게 미련한 짓을 하고 있을 셈이냐? 네가 수련한 것이 무엇임을 잊었단 말이더냐?'
그의 귀를 때리는 질타.
그 말에 한효월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가 한 말인지 알고도 남음이 있는 이야기. 바로 동굴 속의 괴노가 한 말인 것이다.
그가 수련한 주천무애신공은 선가(仙家)의 것이다.
마음을 수련함이 그 근본이고 무공 또한 그러하여 대막사왕 완일의 것과는 전혀 달랐다.
그럼에도 한효월은 마음이 급하여 부지간에 자신의 장점을 버리고 강력함이라는 단점으로 상대의 장점에 맞서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와 힘으로 맞서는 것은 그의 장기가 아니었다.
건곤무적 독고해는 그 무공을 자신에게 맞도록 개조하여 강력함으로써 천하에 군림했었다.
하지만 한효월이 수련한 것은 그것과 달랐다. 성격이 그와 달랐고 환경도 달랐다.
그런데 참으로 열혈남아였던 그 건곤무적 독고해.
그가 살았을 때는 얼굴도 본 적이 없었던 그 사형의 일생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한효월 또한 강함을 추구해 버렸다.
그것이 그와 맞는 것이 아님에도.
이 절박한 순간에 그것이 그의 심금을 때렸다.
바로 하고자 하는 그 마음이 자신에게 장애가 됨을.
콰콰콰…….
그에게 거대한 경기가 노도와 같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런데 한효월은 자신을 덮치는 그 경기를 보면서 피하거나 막으려 하지 않았다.
그것을 보지 못한 듯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을 따름이었다.
그것을 본 이심환이 놀라 봉목을 부릅떴다.
"위험해!"
그가 얼마나 강한지 이미 알고 있는 그녀다.
저런 능력이라면 마음만 먹어도 일반 고수들은 손도 대지 않고 죽일 수 있는 가히 전설적인 능력을 가진 대막사왕 완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전력을 다해 손을 쓰는데 방비도 하지 않는 듯한 모습이라니…….
무념위종(無念爲宗)…….
-아무 생각을 하지 않음으로 기둥을 삼는다.
선의(禪意)를 가진 네 글자가 한효월의 뇌리를 꿰뚫고 있었다.
아니, 그 순간에 무상위체(無相爲體)라는 네 글자가 다시금 그의 눈앞에 떠올랐다.
그를 향해 달려드는 대막사왕 완일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무주위본(無住爲本)까지…….
그는 자신을 향해 가공할 경력을 밀어내고 있는 대막사왕 완일을 눈앞에 두고도 방금 들려온 괴노의 외침에 벼락을 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고는 마치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그렇게 멍청히 서 있기만 했다. 아니, 그렇게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멍청히 서 있는 듯 보이는 그의 뇌리에는 전광과도 같은 깨달음이 전율로서 도도히 흘러가고 있었다.
"죽고 싶다면!"
그 모습을 보자 대막사왕 완일은 냉소를 흘렸다.
절대고수들의 대결이니 전력을 다해 상대를 치는 일은 없다.
그런 힘을 발휘해서 상대를 공격했다가 선기를 빼앗기기라도 하면 그것처럼 치명적인 일이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런 절대고수들의 움직임은 상상을 초월한다.
손을 내고 발을 뻗는 그 한 동작이 모두 이치에 맞고, 그 움직임 또한 상궤를 벗어난다.
움직이지 않을 때는 천년풍상을 머금은 바위와 같지만 일단 움직이면 질풍신뢰(疾風迅雷)라 할지라도 따라오기 힘드니 이런 와중에
어찌 감히 소홀히 할쏜가.
한효월의 이런 태도는 목숨을 내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콰-콰콰!
가공할 용권풍이 한효월을 사정없이 휘감았다.
천지가 온통 먹빛 흙바람으로 휘감겼다.
"사숙!"
이심환의 비명에 놀란 천무가 그쪽을 바라보곤 놀라 고함쳤다.
누가 보아도 끝장이 날 것 같은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놀랍게도 한효월은 그 가공할 폭풍 속에서 끄떡도 없다.
마치 허공에서 솜사탕을 빚기라도 하는 듯이 장(掌)도 아니고 권(拳)도 아닌 그저 편한 모습의 손을 내밀어 미묘하게 그어내렸다.
아니, 그었다기보다 실패에다 실을 감는 듯한 형상이라고 해야 할까?
콰콰쾅!
대막사왕 완일이 쳐낸 것이 봄날 아지랑이가 아니라는 것은 거기에 쓸린 모든 것들이 산산조각으로 으스러지며 증명한다.
그럼에도 그 경력은 한효월의 움직임에 기묘하게 비틀어져 그를 치지 못했다.
한효월은 굽이쳐 쏟아져 내리는 급류에서 헤엄치는 잉어와 같았다.
"마, 말도…… 말도 안 돼!"
이 믿기지 않는 상태에 대막사왕 완일은 눈을 휩뜨고서 흩어지는 경력을 끌어 모아 한효월에게 집중시켰다.
콰콰콰-
그의 손짓에 따라 경력이 미친 듯 한효월에게로 몰아닥쳤다. 경력에 휩쓸린 모든 것이 가루가 되어 부서져 나갔다.
하지만 허공에서 부유하듯 움직이는 한효월의 손짓에 그 가공할 경력은 기묘하게 비틀어지며 한효월을 치지 못했다.
천지가 개벽하는 굉음을 내면서 그의 주위가 공포로 몸서리치지만 한효월은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았다.
쏴쏴쏴-
순간, 한효월이 손가락을 튕겼다.
절세의 연환수인지력이 다시금 그의 손가락에서 쏟아져 나갔다.
그것을 보자 대막사왕 완일은 사색이 되어버렸다. 그가 쏟아낸 경력은 가히 배산도해였다.
절금단옥(切金斷玉)의 보검이라 할지라도 그 경력을 베고 들어올 수 없을 것이고 검강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런 경력을 흩트리고 달려와 공격이라니!
파팡!
맹렬한 폭음과 함께 대막사왕 완일이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가슴을 움켜잡은 그의 손가락 사이로 선혈이 솟구쳤다.
늘 당당하던 그의 얼굴도 창백해 핏기가 사라진 상태였다.
그러고도 아직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그는 한효월에게 일격을 당한 다음이었다.
호신강기로 보호하고 있음에도 절세의 수인지력은 사정없이 그의 가슴을 때렸다.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즉사하고 말았을 터이다.
그에 반해 한효월은 조금 창백한 얼굴로 우뚝 서 있을 따름이다.
세찬 경기에 백의를 날리고 선 그 모습은 임풍옥수라는 말에 다름이 아닌 형상이었다.
왼손으로는 지결(指訣)을 맺고 오른손은 그 지결 위에서 손을 감싸 쥔 모습으로 마치 무엇을 튕겨내려는 듯한 모습이라 전혀
충격조차 받지 않은 것만 같다.
"대, 대체 무, 무슨 일이……."
대막사왕 완일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자신이 당한 일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더란 말인가?
한효월과 그는 막상막하. 누구도 쉽게 우세를 점하기 어려운 격전을 벌이고 있었고 어느 누구도 실력을 감추지 않았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결과가 나타나다니…….
그때였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고 싶으냐?"
그의 뒤에서 음산하고 냉랭한 음성이 들려왔다.
"……!"
대막사왕 완일의 눈에 경악이 폭죽처럼 튀었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그의 능력으로 자신의 뒤에 누군가가 다가서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니! 더구나 말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의 뒤였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누가?'
그는 바람처럼 옆으로 신형을 튕기면서 시선을 돌렸다.
그 자리에서 뒤를 돌아보는 것은 전신을 그대로 적에게 노출시키는 바보 짓이니 그가 그런 일을 할 리가 없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런 소용 없음을 알기에는 전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순간적으로 삼 장여를 이동하며 돌아선 그의 앞에는 괴기한 모습의 노인이 우뚝 서서 그의 눈을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괴노와 그의 거리는 채 반 장도 떨어지지 않아 언제라도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라는 것이 그를 더욱 놀라게 했다.
그가 찰나적으로 이동한 거리만큼 상대도 이동했다는 의미였기에.
괴노의 눈은 공포스러웠다.
지옥의 겁화(劫火)와 같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그 눈빛에 전신이 타는 것 같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전신이 지옥의 겁화에 휩쓸려 타 들어가 버리는 것만 같았다.
"누, 누구냐!"
부지중에 심신이 공제됨을 느낀 대막사왕 완일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곤 벼락처럼 소리치면서 괴노를 향해 일장을 쳐냈다.
아무리 중상을 입었다 한들, 그의 일장이 어찌 범상한 것일까?
그런데 괴노는 그의 일장을 막으려 들지 않았다.
그저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가공할 일은 그 다음이다.
괴노의 눈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던 그 겁화가 눈에서 쏟아져 나와 그를 휘감은 것이다.
휘감고도 모자라 겁화는 세상을 온통 뒤덮었다.
이글거리는 검붉은 겁화는 살아 있는 것처럼 그렇게 이글거리며 세상의 모든 것을 삼켜 버리고 말았다.
그 와중에 대막사왕 완일의 일장은 흔적도 없이 소멸되어 버렸다.
공포의 빛이 대막사왕 완일의 눈에 떠올랐다.
형용키 어려운 기운이 그의 눈을 통해서, 저 무서운 괴노의 눈을 통해서 자신의 눈을 통해 그의 전신을 옭아매고 있음을,
자신의 몸 전체가 자신의 통제 하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 안 돼……."
그가 쓰러질 듯 비틀거리면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것은 헛된 몸부림.
대막사왕 완일은 고개를 돌릴 수도, 눈을 감을 수도 없었다.
그저, 부릅뜬 눈으로 홀린 듯 그렇게 괴노의 눈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지옥의 겁화와 같은 그 공포의 불길은 이미 그의 심신(心身)을 모조리 다 태워 버린 채로 그를 옭아매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그 광경을 바라보는 문곡은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보고 또 본다 한들 어찌 저것을 이해할 수가 있단 말인가?
대막사왕과 같은 절세고수가 어떻게 저렇듯 반항조차 못한 채로 허우적거리고 있단 말인가? 어떻게 저것이 말이나 된단 말인가?
그뿐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의 생각도 그러하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괴노인이 나타나고 대막사왕 완일은 서로가 무섭게 눈을 부릅뜬 채로 서로를 노려보고 있음에 다름이 아니었기에.
그런데 어느 순간인가부터 대막사왕 완일이 허우적거리고 있음이 눈에 들어왔다.
게다가 괴노가 성큼 다가가서 누더기 옷자락을 펄럭이며 그 깡마른 손을 들어 대막사왕 완일의 정수리를 움켜잡음에도 그는 괴로운
빛만 떠올린 채로 두 팔을 허우적거릴 뿐, 아무런 힘도 쓰지 못했다.
마치 어른이 위에서 머리를 잡아 누르면 아이가 두 팔을 허우적거리는 모습과 흡사했다.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고 문곡이 놀라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놀라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쳐라!"
심상치 않음을 느낀 문곡이 고함쳤다.
그의 옆에서 그를 호위하고 있던 수신호위가 날아올랐다. 사정이 다급하자 그의 호위까지 출동을 시킨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대막사왕이 있는 곳까지 갈 수 없었다.
바람처럼 날아드는 그들의 앞을 한효월이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음산한 음성이 무서운 힘으로 곡 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귓속으로 심금을 울리며 파고들었다.
"흑암(黑暗)의 존(尊)이 명하노니, 꿇어라!"
산발이 된 긴 머리카락 사이로 두 눈을 빛내며 괴노가 소리쳤다.
그 음성은 사이하기 이를 데 없어서 절로 모골이 송연해지는 여운을 담고 계곡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그러자 놀랍게도 억지로 버티고 있는 듯하던 대막사왕 완일이 부들부들 떨면서 천천히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닌가!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괴노가 머리를 내리눌러서 그 힘에 못 이겨 꿇어앉은 것 같지만 절대 그럴 리가 없음을 이곳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다 알 수 있었다.
그 외침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무릎을 꿇고 싶은, 무릎을 꿇어야만 할 것 같은 항거할 수 없는 심령(心靈)의
핍박(逼迫)을 받았던 것이다.
쿠쿠쿠…….
괴노와 그 아래 무릎을 꿇은 대막사왕의 주위에서 회오리바람과 함께 돌 가루, 흙먼지가 하늘을 가리며 일어났다가 그가 무릎을
꿇음과 함께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는 사람들의 눈에 공포가 흘러갔다.
모든 싸움이 멎었다.
뚝뚝…….
그 자리에 묘한 음향이 미약하게 흘러 정적을 깨뜨린다.
대막사왕의 입에서 코에서 부릅뜬 눈에서 흘러내리는 핏물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였다.
그렇게 격렬히 저항했던 그의 눈에서는 이미 빛이 꺼졌다. 몽롱한 빛뿐.
괴노는 고개를 들어 한효월을 보았다.
"네가 데려온 애들을 이쪽으로 물러나게 하거라."
그의 말에 한효월이 말했다.
"천무."
"알겠습니다. 모두 이곳으로 모여라!"
천무가 소리치자 싸우던 위사들이 일제히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이 모여드는 것과 함께 괴노의 신형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겁(劫)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누구도 그의 움직임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의 움직임은 희뿌연 그림자조차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었다. 너무 빠른 데다가 괴이하여 시력을 집중시켜도 그를 볼 수가 없었다.
그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서 도저히 알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그보다 더 가공했다.
그가 그렇게 희뿌연 귀영(鬼影)으로 화해 스치고 간 곳은 바로 대막사왕 완일의 수하들.
문곡을 비롯하여 대막삼로, 대막십팔룡까지 세상에 내로라할 수 있는 그 고수들 모두가 하나도 횡액을 면하지 못했다.
뿌우연 귀영이 스치고 간 순간, 그들은 넋을 잃은 듯 칠공에서 피를 흘리며 뒤로 넘어갔던 것이다.
무서운 위세가 이는 것도 아니고 그냥 스쳐 가는데 그런 변괴가 발생하자 뒤에 있던 문곡이 대경실색하여 고함쳤다.
"쳐, 쳐라! 모두 공격해!"
하지만 그의 고함도 모두 무위였다.
그조차 앞으로 덮쳐 온 귀영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머리를 불로 지지는 것 같은 느낌이 전해지는가 싶더니 극통이 머리 속에서 울리듯 튀어나왔다.
퍽!
무엇인가가 머리 속에서 깨지는 느낌이 일며 까마득히 정신이 무너져 내렸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생각할 수도 없었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죽는구나! 하는 것뿐…….
일세를 풍미했던 그는 그렇게 무너졌다. 세찬 타격을 받아 튕겨져 나가는 것도 아니었다.
귀영이 스쳐 가자 그냥 격렬한 고통 속에서 머리 속이 터져 나가는 느낌. 그리곤 끝이었다.
그 자리에 허물어지듯이 그렇게 주저앉았다가 고꾸라지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
앞으로 고꾸라지는 자, 옆으로 쓰러지는 자, 뒤로 넘어지는 자까지 형태는 달랐지만 눈을 부릅뜨고서 칠공으로 피를 흘리며 무너져
내리는 모습은 조금도 다르지 않았고 그 누구도 그 가공할 귀영의 움직임에 저항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도 다른 점은 아무것도 없었다.
…….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가 맞는 말일 터이다.
천무조차도 멍하니 입을 벌리고 이 믿기지 않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모두 70명의 고수.
그 하나하나가 일류라 불릴 만한 고수였다.
그리고 그중 십여 명은 강호상에서 절세라고 불릴 놀라운 무공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그야말로 순식간에 단 한 사람도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로 시체로 변해 나뒹굴었다.
즉사.
소리없이, 마치 유령이 모습을 드러내듯이 괴노가 한효월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숨조차 가쁘지 않았고 살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 모습이었다.
"세상에 나오자마자 살계를 열었군……."
"……."
한효월은 잠시 침묵하다가 한숨을 몰아쉬었다.
"정말 무섭군요……."
그 말뿐, 한효월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시간이 없으니 따로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 어떤 놈이 교장에 들어 몇 가지 문건을 탈취해서 사라졌다. 놈을 쫓아라."
그 말에 한효월의 안색이 달라졌다.
"누가? 이들 말고 누가 또 있었단 말입니까?"
"거의 같이 들어온 것 같은데, 교장의 중추를 건드린 건 이놈들이 아니었다. 그 짧은 시간에 교장의 비고(秘庫)에 들어
비장(秘藏)을 탈취하여 사라진 것은 보통 솜씨가 아니다. 해서 내가 천기를 헤아려 본 결과, 이로 인해서 천하에 무서운 겁난이
일게 되지만 그것은 하늘의 뜻이 아니니 어찌 좌시할 수가 있겠느냐? 어차피 내가 세상에 남아 있을 시간은 얼마 남지 않은
지금이니 호생지덕(好生之德)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일……. 나머지 일은 네놈이 해주어야겠구나."
그가 굳은 표정으로 말을 했다.
방금 그렇게 무서운 살수를 쓴 그가 호생지덕이란 말을 쓰니 정말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한효월은 그가 이미 생사의 범위를 벗어난 초인(超人)임을 알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모습을 드러낸 자체가 크나큰 의미를
가진 것이다.
"마교도입니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원래는 내가 나머지 일을 처리하고자 했지만 뜻밖에도……."
그는 잠시 말을 끊고는 하늘을 보았다.
"하늘이 정한 것은 참으로 공교하고도 괴이하니, 인간의 한계를 벗어났다고 생각한들 그 흐름을 따르지 않을 수 없어 나머지를
너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는 곧 비승(飛昇)하게 될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도 갑자기?"
"모든 일은 천천히 진행되지만 결과는 갑자기 다가오지. 나는 평생을 두고 이날을 기다렸지만 막상 이날이 다가오자 한 점
아쉬움이 남아 살계를 열고 말았다. 너는 가서 마계가 열리는 것을 막고, 봉신방을 찾아 그들의 뜻을 알도록 하거라. 그곳에
당도하면 자연히 네가 해야 할 일을 알게 될 것이니 그때까지 저놈이 너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의 눈이 가리킨 것은 무릎을 꿇고 망연히 앉아 있는 대막사왕이었다.
그는 이미 넋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놈은 나의 겁백마안존(劫魄魔眼尊)에 공제되어 제정신이 사라졌다. 네가 명하는 대로 따를 터이니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될 것이다.
놈의 능력이 생각했던 것보다 높아 나머지 놈들은 모두 없앨 수밖에 없었구나."
결국 대막사왕 완일을 제압하기 위해서 힘을 많이 썼기에 나머지 사람들은 그렇게 만들지 못하고 죽였다는 의미다.
말은 간단하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까지 간단하지는 않았다.
당금 무림에서 그렇게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존재하기라도 할 것인가.
"……."
모두는 가슴이 얼어붙는 심정으로 그 노인을 바라보았다.
누더기에 몸을 감고 봉두난발의 머리가 땅바닥에 끌리는 저 괴노인이야말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면 경천동지의 놀라운 위세를
보여주고도 남을 것이고, 어쩌면 무림사를 홀로 다시 쓰게 만들고도 남을 것이 분명하였다.
괴노는 시선을 돌려 이심환을 보았다.
"너는 몰랐겠지만, 천운곡은 마교의 교장을 지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곳이다. 네 사부 또한 그 소임을 가지고 일생을 여기서 살았다. 하지만 내가 나머지를 모두 폐쇄할 터이니 너는 여기서 굳이 머무르지 않아도 된다."
"……."
이심환은 어안이 벙벙하여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로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제서야 문득 사부(師傅)인 천운모모가 임종 전에 무엇인가 말을 하려다가 만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네게까지 무거운 짐을 평생 남겨주고 싶지 않구나라는 말과 함께.
"네 사부만 하더라도 나의 외조카 손녀뻘이니, 나로 인하여 오랜 세월 고생을 한 셈이다. 네 사도(師徒)의 짐은 여기까지로
족할 것이다. 물론 나머지 사안도 봉신방에 이르면 다 해안(解案)이 될 터이지만……."
말끝을 흐린 그는 한효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의 배움은 사실, 이미 네 나이 또래로 보자면 무림 역사상 아마 다시는 너와 같은 천재가 나타나기 어려울 게다. 더구나 지금
깨달은 것을 네 것으로 완전히 할 수 있다면 당대에는 적수를 찾기 어렵겠지. 그러나 그런 힘으로도 세월이 너를 가로막을 터이니
모든 것을 해결하기는 어려울 터이다. 잠시 나를 따라오너라."
말과 함께 그는 그 자리에서 희미한 빛으로 화해 사라졌다.
그가 어디로 간 것인지는 한효월만이 알았다.
그가 사라지자 유성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저, 저분이 뉘십니까?"
"천무."
"예, 사숙."
천무가 급히 달려와 그의 앞에서 궁신했다.
"이 소저를 도와 이곳을 정비하고 주변을 살펴 경계하도록 해라. 잠시 다녀오겠다."
"알겠습니다. 걱정 마시고 다녀오십시오."
천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
한효월은 멍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심환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그곳을 떠났다.
그의 그런 모습을 이심환은 홀린 듯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묘하게 방향이 같게 무릎을 꿇고 앉은 대막사왕 완일이 멍청한 빛으로 그쪽을 바라보고 있을 따름…….
"다시 한 번만 묻겠다."
괴노가 한효월을 보면서 물었다.
"무엇으로도 네 천명을 연장할 수가 없다. 그것이 하늘이 정한 바라서 그것을 늘리려면 역천(逆天)의 마법을 동원해야 하며,
그렇게 하자면 마계가 열려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명옥마녀가 완성되면서 마교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날 터이다. 그런 일이
있더라도 네 명을 연장하겠느냐?"
그 말에 한효월은 미소를 머금었다.
"왜 물어보십니까?"
뻔히 하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왜 묻느냐는 의미다.
"멍청한 놈…… 네 나이에 생에 집착을 끊을 수 있다니…….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리 천재라 할지라도 어찌 네 나이에 그런
경지에 이를 수가 있었겠느냐? 내게는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 아직 많이 남은 줄 알았더니 얼마 있으면 마해(魔解)가 시작되어
내 모든 것이 흩어지고 등선지령(登仙之靈)이 태어나 이승의 존재를 벗어버리고 비승하여 선계에 들게 되리니 네게 전해줄 것도
한정될 수밖에 없다. 정녕 네 목숨을 돌보지 않으려느냐?"
"앞으로 백 년을 더 늘린다 한들, 바로 된 삶이 아니라면 의미가 없을 것이고, 천 년을 더 산다고 한들 그 또한 죽음을 잠시 더
늘리는 것이니 어찌 거기에 큰 의미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들으나마나 한 소리군……."
괴노는 냉소를 흘리더니 손을 뻗어 한효월의 천령개를 눌렀다.
"봉신방은 천하십성이 스스로 천계에 들며 그 자리를 봉쇄하면서 생겼다. 자세한 것은 네가 그 자리에 당도하면 알게 될 것이거니와,
네가 할 일을 하기 위해서는 어차피 역천의 대법을 한 번은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내가 너에게
천마강신지법(天魔降神之法)으로 한 줌 진기를 남겨줄 터이니, 언제 사용해야 하는지는 네 스스로가 알게 될 것이다. 후우……
명옥마녀가 만약 마계에 들어 마기를 전달받았다면 죽이는 것 외에는 아무런 방도가 없다. 절대로 막을 수 없을 것이고 실제로
죽이는 것조차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마계에 들기 전이라면 부동명왕공으로 충분히 그 마기를 깨뜨리고 구할 수 있겠지……."
한효월은 눈을 감았다.
천천히 이글거리는, 그러면서도 묘하게 평온한 기운 한줄기가 자신의 뇌리로 스며드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천무는 묵묵히 바위와 같이 팔짱을 낀 채로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의 수하들은 쉼없이 일을 하고 있었고 이심환의 부탁을 받아 무너진 계곡을 보수하여 진세를 설치하는 중이었다.
무너진 계곡을 원상 복구할 수는 없지만 진세로서 그것을 메우려는 생각이었고 실제로 그것은 가능한 일로 천천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녀의 심중을 알 수는 없으되, 쉬 이곳을 떠나려는 생각은 없는 듯 보였다.
이곳을 떠나겠다면 굳이 저렇게 보수하고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오래 걸리시는군……."
천무의 곁에서 왔다 갔다 하던 유성이 중얼거렸다.
"그 노인이 뉘신지 아느냐?"
"나도 모르죠. 얼핏 이야기를 들은 거 같긴 하지만 너무 엄청나서 지금은 아무런 생각도 안 나네요……."
천무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폐관수련을 하면서 이제 무공의 길을 보았다 느꼈었다.
그런데 나와보니 거거산(去去山)이라, 말 그대로 산 너머 산이니 갈수록 갈 길이 암담하게만 느껴질 따름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노인과 같은 경지에 이를 수 있을는지 자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앗!"
유성이 경탄의 소리를 흘려냈다.
뿌우연 빛이 안개를 뚫고서 사방을 비추며 어디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기이한 향이 코끝을 스치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알지 못하는 어떤 느낌이 전신으로 밀려드는 듯했다.
그 빛무리 속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한효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