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後記) 아버지를 찾아서…….
<네 부모는 용화회에서 가장 젊은 사람이었다.
봉신지약은 네 선조가 만들었고 선계(仙界)에 이르는 길을 발견하여 대자연진세를 설치하는 기초를 닦은 사람은 바로 네
고조부이다. 그는 초기 용화회에서 중추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네 할아버지를 비롯한 부모들이 모두 알 수 없는 화를 당한 다음, 나는 너를 안고 중조산에 은거하였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너를 키우기 위해서였고 또한 네 할아버지로부터 부탁받은 봉신지약 하나를 지키기 위함이기도 했다.
나는 이제 강호로 나가거니와, 만에 하나 네가 이 글을 본다면 나의 예측과 같이 그들이 네 부모를 해한 것이 틀림없을 것 같구나……(하략).>
* * *
태백산의 대회전이 있은 지 오 년.
하늘을 향해 솟구친 태백산의 위용은 예전과 변함이 없고 산봉마다 이고 있는 만년설 또한 여전히 희게 빛난다.
늦가을.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늦단풍이 스러진 산자락과는 달리 높이 올라오자 삭풍(朔風)이 눈보라를 불어내면서 걸리는 모든 것을 쥐어흔든다.
태백산에 있는 세 개의 호수조차 그 추위에 웅크러 든 것처럼 보이지만 한 무리의 사람들은 추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조용히
전진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들의 눈앞에는 이제 무림의 성지(聖地)가 된 곳이 나타났다.
신단수(神檀樹).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오연한 나무 한 그루.
장정 대여섯이 팔을 둘러야 겨우 안을 수 있는 둘레를 가진 거대함에다 세상을 향해 팔 벌린 당당함으로 우뚝한 그 신단수의 뒤를
보면 하늘을 찌를 듯한 절벽 가운데 보일 듯 말 듯 기묘한 형상이 있다.
정좌한 채로 오 년 전부터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사람.
전 무림이 숭배하는 일대의 대협이 그였다.
세상을 위해 자신을 버린 사람.
"보렴……."
격한 감정을 누른 맑은 음성이 문득 들려왔다.
이 산정까지 가마를 타고 온 그 음성의 주인공은 찬바람을 아랑곳하지 않고 밖으로 나와 입을 열었다.
여인이다.
이름을 서문운하라 하는 여인.
그녀의 손에는 이제 너덧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 하나가 버둥거리고 있음이 보인다.
복숭앗빛 볼에 씩씩한 생김을 가진 그 아이는 사내다.
서문운하는 아이를 들어 올려 그 대협, 한효월을 보게 했다.
"네 아버지다, 월아(月兒). 세상에서 대협이라 불리는 저 바보 같은 사람이 바로 네 아버지란다."
"응? 어디? 어디?"
신기한 듯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있던 꼬마가 반색을 했다.
"어디 아버님이 계셔?"
"저기."
서문운하가 아이를 들어 올려 그곳을 보게 한다.
정좌한 한효월의 모습은 희미한 빛줄기 속에서 금방이라도 살아서 튀어나올 것만 같다.
"아빠! 아빠!"
꼬마가 버둥거리더니 이내 서문운하의 손에서 벗어나 달려가기 시작하였다.
"월아! 어딜 가는 게야!"
서문운하가 소리쳤다.
"그냥 둬, 하매. 어차피 데려왔다면 아빠를 곁에서 보게 해주도록 해."
옆에서 그녀의 손을 잡는 사람이 있었다.
이심환이었다.
그녀는 서문운하가 한효월을 닮은 아이를 낳을 때부터 지금까지 서문운하의 곁을 떠나지 않고 같이 아이를 키웠다.
서문운하는 가끔 언니가 없었다면 난 어떻게 살았을까? 라는 말을 할 정도로 그녀와 서문운하는 서로를 의지했다.
다행히 아이는 아버지와 엄마를 닮아 총명한 데다 영리했다.
"제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나직한 음성이 공명을 일으키면서 또렷이 들려왔다.
한 사람이 어느새 꼬마 한억월(寒憶月)의 뒤에 서 있음이 보인다.
좌백이라 이름하는 그는 서문운하가 해산한 날부터 한시도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고 아이와 그녀를 지켜왔다.
더불어 그를 따르던 여인, 종소교까지 그들과 같이 살았고 세 살된 계집아이까지 낳았다.
감천형과 천무가 흐트러진 무림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함을 보면서도 좌백은 한 번도 서문운하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 한효월을 보지 못했던 그는 언제까지라도 사숙모인 서문운하와 꼬마 사제를 지켜줄 참이었다.
과묵한 좌백과는 달리 유성은 늘 한억월의 친구가 되어 놀아주었고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했다.
그런 그들을 보면서 무림삼괴 세 노인은 우리가 죽은 다음에도…… 라고 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가 있었다.
황엽은 감천형을 도와 한시도 쉬지 않았고 강호가 안정되는 대로 은퇴하겠다고 공언했다.
무너졌던 구대문파도 새로 소림의 장문인으로 취임한 대명을 필두로 해서 서서히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고 천하십왕의 잔존
세력들은 한효월이 그렇게 생전에 남겨둔 안배로 인해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유일하게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면 남해의 부해옥 정도랄까, 그녀는 늘 감천형이 있는 정의맹 옆을 맴돌아 이젠 그녀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주자미는 모든 것을 감천형에게 넘겨주고 다시금 남해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출가한 자신의 딸을 보아야 했다.
"……."
서문운하와 이심환은 깡충거리며 앞으로 뛰어가는 꼬마를 말없이 바라보며 서 있었다.
"아빠! 아빠! 월아가 왔어요!"
꼬마가 환하게 웃으며 벽을 두드린다.
하지만 희미한 빛 속에 정좌한 한효월이 눈을 뜰 리 없다.
"아빠의 아들 월아라니까요! 정말 월아의 아빠죠? 제가 왔어요……."
계속 불러도 답이 없자 꼬마의 눈에 글썽글썽 눈물이 맺힌다.
"아빠! 아빠……."
아이의 목이 메인다.
얼마나 불러보고 싶고 만나보고 싶었던 아빠였는데…….
아빠는 왜 저기에 저렇게 앉아서 쳐다보지도 않는 것일까?
그런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좌백은 불현듯 목이 메었다. 그는 암암리에 길게 한숨을 몰아쉬면서 하늘을 바라본다.
푸른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푸르기만 하다.
정말 무심히.
하지만 아버지를 보는 아이의 눈은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뚜렷해졌고 힘을 가지게 되었다.
아버지를 잊지 않겠다는 이름을 가진 한억월.
어쩌면 아버지가 못다 한 일이 장성한 그의 앞에 펼쳐지게 될런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호랑이의 새끼는 결코 강아지는 되지 못하는 것이 고래의 진실이다.
그는 대협 한효월의 아들 한억월이니까.
大風雲演義를 맺으면서…….
참 곤란한 세상이 되었다.
제자가 스승을 패고 스승이 제자를 욕보인다.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아버지가 자식들을 학대하고 죽이기까지 한다.
정치가는 국민을 등치고 국민은 정치가를 조소한다.
성직자가 유부녀를 넘보고 유부녀는 가정에 충실치 못하며 아이들은 의리와 올곧은 삶을 배우기 전에 성(性)을 배워 캠화면에서 바지와 치마를 벗어 내리는 세상. 한 푼의 돈에 자신의 가치를 팔아버리는 그런 정말 곤란한 세상이 눈앞에 있다.
그런 세상을 보면서 세상을 살아온, 또 열심히 사는 수많은 사람들은 허탈해진다.
전통이 흔들리고 가치가 무너진 사회.
우리 아이들은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위해서 살아갈 것인가.
이 대풍운연의는 10년 하고도 더 오래전에 기획되었고 그 계획이 많은 분들에게 알려져 궁금증을 자아냈었다.
신문에 3년 가까운 시간 연재를 하고 여러분 앞에 내놓게 되었다.
그 세월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라 그간 무협시장은 많이 변했다. 그렇기에 금강식 무협, 아니, 전통적인 무협의 모든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만들어졌던 이 대풍운연의는 시기적으로 오히려 빠르거나 너무 늦게 나온 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렇기에 대풍운연의는 1, 2부 전20권 이상의 대장편 기획에서 일단 11권으로 그 막을 내리기로 하였다.
원래 이 대풍운연의는 1부 아버지. 2부 아들로 계획되었었고 아버지 편에서는 전통적인 무협의 세계로 그리되,
천하십왕을 등장시켜서 세상 모든 곳에서의 세력들 간의 투쟁을 거대한 스케일로 그리고자 하였었다.
하지만 신문 연재로 말미암아 많은 인물을 등장시키는 것에 제약을 받게 되어 처음의 의도와는 조금쯤 다른 형태가 되어버린
것이 못내 안타깝기도 하다. 각처의 풍물과 그들의 삶, 생각까지 정말 많은 것을 담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2부 아들 편에서는 아버지가 찾아낸 미지의 세계.
세계가 그려질 예정이었었다. 정통무협에서 일신하여 신괴무협(神怪武俠)이 나타날 때에 과연 시장은 어떻게 반응할까? 라는
실험적인 시도였던 셈이다.
그것을 하지 못했음이 대풍운연의를 끝내는 지금도 못내 아쉽다. 이 신괴무협 쪽은 일반적인 차원 이동물과는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앞으로 다시 기회가 있다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일단은 대풍운연의를 여기에서 접기로 하였다.
대풍운연의의 주인공은 한효월이다.
그는 시작에서 끝까지 협골(俠骨)이며 대협(大俠)이다.
그는 강호에 나오는 순간부터 나를 위해 살지 않았다. 죽음 직전까지 남을 위해서 그 삶을 바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앞부분의 세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대풍운연의의 이야기로 돌아감을 보고 이게 무슨 일이야? 했던 분이 있다면 이제 그 답을 보게 된 셈이다.
이런 시대에 한 사람,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세상의 빛이 될 사람을 그려도 좋지 않겠는가? 라는 것이 또한 이 대풍운연의가 담고 있는 의미라는 말로써 이 글을 마감하고자 한다.
11권에 이르는 짧지 않은 글을 봐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모두 건강하시기를.
그리고 차기작인 소림사(少林寺)에서 여러분을 만나뵐 수 있기를…….
단기 4336년 6월 초하(初夏)
연화정사(蓮花精舍)에서 금강(金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