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리안치(圍籬安置)
“내가 그걸 어찌 알았겠느냐?”
쨍그랑! 아름다운 문양을 자랑하던 백자 화병이 깨졌다. 뾰족하게 날이 선 자기 파편들이 사방에 튀었다. 느닷없이 큰소리가 났는데도 아무도 쉬이 반응하지 못했다.
박살 난 화병 조각 사이로 점차 물 얼룩이 번졌다. 그 위로 연분홍빛 꽃송이가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궁인들이 매일 먼지 한 톨 없이 닦는 바닥은 이미 엉망이 된 지 오래였다.
“마마, 고정하십시오. 다치십니다.”
그새 궁인들 몇이 재빨리 쓰레기를 담을 통이며 행주를 가져왔다. 한때 화병이었던 것의 잔재가 하나하나 치워졌다.
“이 꽃이 날 모욕하기 위해 보낸 것이었다고,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았겠냔 말이야.”
그 광경을 멍하니 내려다보던 황후가 침상 위에서 힘없이 몸을 웅크렸다. 느슨한 옷깃 사이로 희고 가느다란 목덜미가 드러났다.
원래도 뼈대가 가늘고 호리호리한데 수수한 옷차림으로 한껏 움츠러들어 있으니 더욱 작아 보였다. 한때는 작지만 어엿한 왕국의 왕자였고, 지금은 대제국의 하나뿐인 황후가 된 이답지 않은 의기소침한 태도였다.
분주하게 움직이며 침전 바닥을 청소하는 이들을 보던 황후가 조용히 사과했다.
“미안하구나. 갑자기 큰소리를 내서…….”
“말씀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아랫것들에게 친히 사과하시다니 가당치도 않습니다.”
“그냥 활짝 핀 꽃이 참으로 예쁘다고, 그렇게만 생각했는데.”
궁인들은 입을 다물고 바닥을 치우는 데 집중했다. 입이 있어도 말을 할 수 없는 것처럼, 눈이 있어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귀가 있어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궁에서 일하는 자들이 지켜야 할 철칙이었다.
황후는 희고 말간 얼굴에 여린 체격의 음인(陰人)이었다. 남쪽 변방에 있는 소국, 율(栗)은 제국과의 전쟁을 종식시키고자 왕위 계승권에서 한참 벗어난 아들을 팔아넘기듯 황제에게 시집보냈다.
그는 타고난 성격이 부드럽고 온화했다. 속상한 일이 있어도 언성을 높이거나 인상을 쓰는 일이 없었다. 막 혼례를 치렀을 때는 황후의 거처인 운의전(雲懿殿)에서 일하는 궁인들이 이방인인 황후를 내심 꺼려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가 그를 따르게 되었다.
하지만 아랫것들의 인망을 얻는 것만으로는 황궁에서 살아남기 결코 녹록지 않았다. 한미한 소국의 왕족인 데다 하루아침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타지로 보내졌으니, 황후에게 권력이나 연줄이 있을 리 만무했다.
사람들은 그의 앞에서는 형식적으로나마 예를 갖추었으나 뒤에서는 은근히 깔보고 무시했다. 작지만 아늑한 왕궁에서 사랑받으며 살아온 그로서는 제국인들의 갖은 패악을 배겨 내기 힘들었다. 설상가상으로 황제는 변경의 오랑캐들을 복속시키러 몇 달째 원정을 떠난 채였다. 의지할 곳 없는 구중궁궐 한복판에서 황후는 방치된 화초처럼 점차 말라 갔다.
몇 겹의 벽으로 꽁꽁 둘러싼 침전 바깥에서부터 기척이 느껴졌다. 문 너머의 시종들이 조용히, 하지만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손님을 맞았다.
“마마는 지금 침전에 계십니다. 이제 곧 오수(午睡)에 들 예정이십니다만……. 예, 여쭈어보겠습니다.”
사전에 아무 기별도 없이 편한 옷차림으로 침상에 있는 황후를 찾아왔는데도 아랫사람들이 제지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방문객이 황후에게 적대적인 이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가 황후의 낮잠을 방해할 만한 가치가 있는, 혹은 그만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
“이리로 모셔라.”
한창 괴로워하던 와중에 본능적으로 반가움이 왈칵 치밀어 올랐다. 황후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아까까지 침울해하고 있던 것도 잊었다. 이윽고 방 입구에 드리운 주렴이 걷히며 방문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는 황후가 짐작했던 이가 아니었다.
“금군(禁軍) 대장군께서 오셨습니다.”
“황후 전하를 뵙습니다. 길이 평안을 누리소서.”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묶어 늘어뜨린 남자가 황후의 앞에 망설임 없이 무릎을 꿇었다. 그가 입은 금속 갑옷이며 보호구가 저들끼리 부딪치며 철컥 소리가 났다. 허리에 찬 장검이 눈에 띄었다. 금방이라도 바람에 날려 사라질 듯 산뜻한 색감의 비단옷을 입고 머리카락에 향유를 발라 곱게 손질한 황후와 대조되었다.
“아……. 대장군께서 오셨군요. 어서 일어나세요.”
남자는 방금 전장에서 복귀한 듯 완전 무장을 하고 있었다. 여독이 풀리지 않아 안색이 초췌했다. 아마도 먼 변방의 전장에서부터 황궁까지, 전속력으로 말을 달려도 며칠이 걸리는 거리를 쉬지 않고 달려왔으리라.
시종들은 바닥에 흩어진 꽃송이를 황급히 모아 그의 눈에 띄지 않도록 치우며 뒤로 물러섰다. 무서웠다. 피로에 젖어 착 가라앉은 대장군의 눈빛이 무서웠고, 그가 지금껏 황제의 오른팔로 살면서 해 온 행적들이 무서웠다.
“해동백이군요.”
대장군은 시종 하나가 부랴부랴 챙겨 나가는 꽃을 곧바로 알아보았다. 그는 시종에게 황제 직속 부대인 금군의 문양이 찍힌 보호구를 찬 손을 대뜸 뻗었다. 검을 잡아 생긴 굳은살로 가득한 데다 여기저기 칼에 베인 흉터까지 있는, 그야말로 무관의 손이었다.
시종은 얼른 가져다 버리려던 꽃 한 송이를 저도 모르는 새에 홀린 듯이 내주고야 말았다. 이 드넓은 제국에서 황후의 침전에 칼을 차고 들어올 수 있는 이는 단둘이었다. 제국의 유일한 주인이신 만인지상 황제 폐하, 그리고 눈앞의 이 남자.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것이 없었다.
“누가.”
대장군이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누가 이 꽃을 전하께 선물했지?”
“탁주백(倬州伯)께서 보내셨습니다.”
“탁주백이라. 홍씨 가문의 장자였던가.”
“예.”
아, 그 작자. 제 가문의 권세만 믿고 우쭐대더니, 언젠가 일 칠 줄 알았지. 대장군은 고요한 무표정 아래로 생각했다. 우물쭈물하며 그를 올려다보던 황후가 조심스럽게 한 발짝 다가왔다.
“대장군께서는 이 꽃을 아십니까?”
“알지요. 해동백(海冬柏), 바다에서 피는 동백이라는 뜻입니다. 먼 해안 지방에서만 자라는 꽃이라 잘 모르시는 것도 이상하지 않겠군요. 해동백은 바다와 떨어진 곳에서는 싹을 틔우기도 전에 말라 죽으니까요.”
그는 황후의 물음에 고분고분 대답했다.
“해동백은 바닷가에서는 붉은 꽃을 피우지만……. 씨앗을 육지로 가져와 영양제를 줘 가며 강제로 꽃을 피우게 하면 연분홍빛을 띱니다. 붉은 꽃을 피우는 데 필요한 성분이 부족해서인지.”
“강제로…….”
황후는 대장군의 손에 들린 꽃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화병에 담긴 물을 뒤집어쓴 꽃잎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어느 지방을 다스리는 관리가 꽃을 바쳤다기에 별다른 생각 없이 받았다. 소담스럽게 피어난 연분홍색 꽃이 고와서 마냥 순수하게 기뻐했는데, 낯빛이 허옇게 뜬 시종 하나가 그를 만류했다. 그 꽃은 결코 좋은 뜻으로 보낸 게 아니라고. 저 청순한 꽃에 그런 악의가 담겨 있을 줄은 몰랐다.
“연분홍빛 해동백도 색이 곱긴 하지만 꽃송이가 작고 금방 시들어서 선물용으로는 쓰이지 않습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색이고, 아무래도 붉은색에 비해 연약해 보이니까요. 이런 꽃을 선물했다간 상대를 조롱하는 거라 여겨지기 딱 좋지요.”
대장군은 쥐고 있던 꽃송이를 툭 내던졌다.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잽싸게 꽃을 받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이걸 굳이 곱게 손질해서 화병에 담아 보냈다는 건, 먼 타지에 홀로 떨어져 기를 못 펴는 신세라고 비웃는 뜻일 테고.”
황후가 유일무이한 정실인 데다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으니 직접 건드리긴 무섭고, 그래서 생각해 낸 게 고작 황제의 부재를 틈타 꽃을 보내는 거라니. 같잖았다. 수가 너무 얕아서 화도 나지 않았다.
“전 정말 몰랐습니다. 그가 자신의 영지에서만 나는 귀한 꽃이라고, 고운 자태를 보니 제가 떠올라 진상한 거라고 하기에, 아무것도 모르고.”
황후가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황궁은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었다. 악귀 소굴이었다. 겉으로는 웃으면서 뒤로 칼을 품은 적이 사방에 들끓는 가운데, 입궁 이래 줄곧 황후를 지켜 주고 돌봐 준 사람이 대장군이었다. 황제가 황후를 무심하게 내버려 둔 순간에조차. 이런 하소연을 할 사람 또한 그밖에 없었다.
“전하, 진정하십시오. 보는 눈이 많습니다.”
“예락!”
황후가 한 발짝 더 다가서며 대장군의 이름을 불렀다. 궁지에 몰린 초식 동물 같은 새된 외침이었다. 평정을 잃은 그를 단호하게 제지하려던 대장군이 흠칫했다.
황후는 한 번도 그를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었다. 황후와 신하, 둘 사이에 신분의 격차가 있는데도 황후는 항상 주눅 들어 있었고 그를 어려워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명목상으로만 황후와 신하일 뿐, 팔려 온 거나 다름없는 약소국의 왕자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력을 가진 제국의 대장군 중 우위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는 따져 볼 것도 없었으므로.
그런 연유로 황후는 이제껏 그에게 꼬박꼬박 말을 높이며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이제까지 줄곧 그랬었는데…….
“난 무섭습니다. 이곳이 무서워요.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꽃 한 송이조차 쉬이 받아선 안 된다니요. 폐하는 어째서 절 보러 오지 않으시고!”
아랫입술을 깨물고 처연하게 올려다보는 눈매가 필사적이었다. 어느새 눈가가 붉어지고 물기가 맺혔다.
황후가 눈물을 보이는 모습을 함부로 아랫것들에게 보일 수 없었다. 대장군은 다시금 한숨을 쉬며 공손히 손을 모으고 문간에 선 이들을 향해 눈짓했다. 물러나라는 뜻이었다.
황제가 아닌 외간 남자와 황후를 한곳에, 그것도 침전에 단둘이 두다니. 원래대로라면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아무리 상대가 양인(陽人)이 아닌 평인(平人)이라 해도, 사내는 사내였으므로.
하지만 금군 대장군 지예락은 달랐다. 그는 황제의 오른팔이었다. 황제가 사람을 죽이라면 죽이고, 수발을 들라면 들고, 기라면 기었으며……, 죽으라면 죽음까지 불사할 기세로 충성했다. 황제가 제위에 오르기 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버려진 황자였을 때부터 그러했다. 그라면 결코 황제의 심기를 거스를 일을 할 리 없었다.
또한 그는 황후의 후원자이자 보호자이기도 했다. 황후 따위 들여서 무엇 하냐며 내내 심드렁한 태도를 보이던 황제를 설득해 기어이 국혼을 성사시켰고, 잔뜩 겁먹은 황후를 어르고 달래 가며 제국의 예법을 가르쳤고, 심지어는 황후가 혼례식 날 입을 예복까지 일일이 감독하여 지었다.
그러니 현재 황후에게 있어 이 황궁에서 저 남자만큼 믿음직스러운 자는 없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황제의 긴 부재와 황궁의 암투에 지쳐 극도로 신경이 곤두선 황후를 달랠 수 있는 자도 그밖에 없었고.
대장군이 팔을 들었다. 스르르 늘어지는 긴 옷소매로 시종들로부터 황후를 자연스럽게 가렸다.
“밖에서 대기해라.”
“예. 분부 받들겠습니다.”
궁인들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물러섰다. 대장군께서 오셨으니 이제 모든 상황이 정리되고 황후 마마의 기분 또한 나아질 거라 믿으면서.
하지만 그 믿음은 얼마 가지 못했다.
“아아아악!”
대장군과 황후가 단둘이 있는 침전 안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울렸다. 혹여나 그들을 방해할까 싶어 멀찍이 물러난 채 바깥에서 할 일을 하던 이들이 깜짝 놀랐다.
“마마? 황후 마마!”
무슨 일이지? 혹여나 미처 치우지 못한 화병 조각이 바닥에 남아 다치시기라도 한 건가. 아니면 화병에 들어 있던 물에 독이 들었다거나…….
당황한 궁인들이 침전 앞으로 달려갔다. 앞에서 몇 번이고 불러도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기다리다 못해 혼이 날 것을 각오하고 침전의 문을 열어젖혔을 때, 그들의 앞에는 충격적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가장 먼저 인지한 것은 코를 찌르는 향이었다. 한때는 그윽하고 청아했을 향이었으나, 지금은 너무 짙은 나머지 속이 메슥거리고 머리가 아팠다. 궁인들 중 냄새에 민감한 몇이 코와 입을 틀어막으며 헛구역질을 했다.
그다음으로는 흠뻑 뿌려진 피가 눈에 들어왔다. 핏물이 넓은 침전 안을 흥건히 적시고 사방팔방에 튀었다. 고풍스러운 가구를, 비단 천개를, 침상을 물들였다. 피가 묻은 장검을 한 손에 든 대장군이 침상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침상에 축 늘어진 황후는 언뜻 보아도 의식이 없는 것이 명백했다. 그의 가슴팍에서 피가 끊임없이 새어 나와 의복과 금침을 시뻘겋게 적시고 꾸역꾸역 영역을 넓혔다. 피를 뒤집어쓴 것은 대장군도 마찬가지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황후의 피가 묻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아수라 같은 몰골을 한 채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대장군이 스르르 고개를 돌렸다. 죽은 생선 같은 시커먼 눈동자가 궁인을 향했다. 뺨에 묻어 있던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던 궁인이 그제야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는 공포와 충격으로 뻣뻣하게 굳은 팔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허겁지겁 뛰어나갔다.
“허억, 으, 으아악!”
시종들이 혼비백산하여 달려 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향뿐이었다. 정체 모를 농염한 향기와 피비린내가 섞인, 소름 끼치는 향.
제국의 주인이 자리를 비우고 없는 이때에, 황궁에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하였다.
* * *
“정찰에 착오가 있었다고.”
막사 안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부동자세로 뻣뻣이 선 무관들 모두 차마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 그 가운데 단 한 명의 말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혼잣말에 가까운 결코 크지 않은 음성이었으나, 섬뜩하리만치 선명하게 귀에 박혔다.
“착오가 있었다…….”
보고를 곱씹는 목소리는 한 점 동요 없이 태평했다. 얼핏 들으면 그가 지루해하고 있다고 느낄 정도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군사를 500이나 딸려 줬잖아. 사흘의 말미를 줬잖아. 그런데 어떻게 그 간단한 정찰을 실패하지?”
길게 뻗은 손가락이 의자 팔걸이를 느릿하게 툭, 툭, 건드렸다. 황제의 앞에 엎드려 고두(叩頭)한 이가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크게 떨었다. 팔을 괴고 앉아 중얼거리던 황제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웃었다. 색이 옅은 속눈썹이 살짝 떨리며 눈매가 사르르 휘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이 일반적인 제국인들과 달리 그의 눈은 빛을 받으면 얼핏 황금빛으로도 보이는 밝은색이었다. 하지만 연약하거나 부드러운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동공의 모양이 선명히 드러나는 밝은 홍채가 인간이 아닌 짐승의 눈 같아서 오히려 소름 끼쳤다.
“응? 북좌위(北左衛) 장군. 내가 묻고 있지 않나. 어떻게 하면 그걸 실패할 수 있냐고.”
“사, 살려…… 폐하, 살려 주십시오.”
“살려 달라니.”
황제가 빙그레 웃었다.
“살려 달라는 건 잘한 일이 있을 때나 쓰는 말이지 않은가. 이럴 땐 말이야.”
그는 기척도 없이 스르륵 손을 뻗어 자신의 검을 쥐었다.
“죽여 달라고 해야지?”
무언가 눈앞을 휙 지나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막사 내에 시립해 있던 장수들 전원이 바로 인지하지 못했다.
“허억, 컥!”
처절한 비명이 들리고, 코와 입에서 피를 뚝뚝 흘리며 신음하는 장군을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간 황제의 장검이 검집째로 그의 얼굴을 후려갈긴 것이었다.
“쿨럭, 커, 윽, 흐윽…….”
북좌위 장군이 괴롭게 헐떡이며 기침을 했다. 피 섞인 타액이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가운데, 그의 입술 사이에서 무언가 툭 튀어나왔다. 뿌리째로 뽑혀 피투성이가 된 어금니였다. 황제는 그것으로 모자랐는지 텅 빈 손을 느리게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그의 검은 이미 저만치 날아가 막사 반대편 벽에 처박힌 후였다.
공포로 바짝 얼어 있던 무관들 중 눈치 빠른 누군가가 황제의 검을 주우러 걸음을 옮겼다. 그보다 황제가 입을 여는 것이 조금 일렀다.
“예락. 이리 오도록.”
그가 정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옆쪽으로 손을 뻗어 까딱였다. 뒷짐을 지고 황제의 곁에 반듯하게 선 채,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얼굴로 이 참상을 낱낱이 지켜보고 있던 청년이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평소대로라면 재깍 대답했을 이의 반응이 조금 느렸다. 황제는 고개를 돌렸다. 긴 속눈썹이 눈매 위에 아른아른 드리워지도록 눈웃음을 치며, 다시 한번 불렀다.
“청(淸)아?”
금군 대장군 지예락(池濊洛). 예락은 관례를 치르며 지은 자(字)로, 날 때부터 받은 이름은 지청(池淸)이라 했다. 황제는 그의 가족, 혹은 반려 정도나 부를 수 있는 사적인 이름을 아무렇지도 않게 불렀다.
청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호흡을 멈추었다. 뒷짐을 지고 있어 황제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살짝 떨리고 있던 손의 경련 또한 멎었다. 그는 별다른 명이 없었는데도 황제가 원하는 바를 알아챘다.
“예, 폐하.”
직책이 대장군이니만큼 그의 허리에도 무관들이 착용하는 장검이 매여 있었다. 그는 검집을 묶은 끈을 망설임 없는 손길로 풀어내며 성큼성큼 다가갔다. 황제는 기분이 나쁜 건지 좋은 건지 알 수 없는 희미한 웃음을 머금고 손을 내밀었다. 청의 허리께에 손을 뻗어, 검집은 그대로 내버려 두고 검만 뽑아 들었다.
이윽고 그는 시퍼렇게 빛나는 청의 검을 한 손에 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국 사내들의 평균 신장보다 한 뼘은 더 큰 황제가 일어서자 눈높이가 확 높아졌다.
“폐하! 자, 잘못했습니다. 헉, 제발 살려 주십시오. 제발…….”
피로 입술이 시뻘겋게 물든 장군이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횡설수설 애원했다. 칼을 빼 들고 다가오던 황제가 잠깐 걸음을 멈추었다. 더듬더듬 힘겹게 새어 나오는 그의 말을 이해하려는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가, 안타깝다는 듯 연민 어린 웃음을 지었다.
“죽여 달라고 하라니까 그러네.”
다음 순간 그가 칼을 높이 치켜들었다. 몇몇 심약한 이들이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 가운데 청은 아무 표정 없이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피곤했다.
콰앙! 귀가 찡하게 아플 만큼 요란한 소리가 났다. 하지만 산 자의 목을 베는 소리는 결코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지나치게 날카롭고 딱딱한 소리였다. 꼭 금속과 금속이 부딪치는 것 같은.
황제가 스르르 칼을 거두어들였다. 있는 힘껏 내려친 검이 장군의 갑옷에 거세게 내리꽂혔다. 칼날은 두꺼운 금속으로 만든 갑옷 위에 길게 흠집을 남겼지만, 그 아래 있는 피와 살까지 닿지는 못했다.
정말 이대로 죽는 줄 알았는지, 칼이 날아드는 동안 바짝 굳어 있던 장군이 몇 초 뒤에서야 크게 숨을 내쉬었다. 쥐죽은 듯 엎드려 있던 몸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뭘 그리 겁을 먹고 있나. 설마 죽이기라도 할까 봐?”
황제는 청의 칼을 지팡이 삼아 바닥에 반쯤 무릎을 꿇고 앉았다. 눈을 휘어 생긋 웃으며 그의 귀에 다정하게 속삭였다.
“죽이지 않아. 내 소중한 충신을 어찌 죽이겠는가. 병력 한 명 한 명이 귀한 이때에.”
“허억, 헉, 헉…….”
“그래도 그리 대경실색을 하는 걸 보니, 이젠 알게 된 모양이야?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상대에게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이미 반쯤 넋이 나갔는지, 고개를 바닥에 처박은 채 간헐적으로 꿈틀거릴 뿐이었다.
“이번 전투에서 장군의 과오 때문에 잃은 군사가 자그마치 150인데.”
황제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150번……. 괜찮지? 공평하잖아?”
조곤조곤 대답을 종용하는 낮은 목소리가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흉신악살(凶神惡煞)의 선전포고 같았다. 청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무덤덤한 낯으로 시선을 한 곳에 고정한 채 눈의 초점을 흐렸다. 바닥에 뒹구는 자갈을, 허공에 떠다니는 먼지를 하염없이 응시했다.
“흐악, 아, 악! 컥, 흐억!”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광경이 펼쳐졌다. 숨넘어가는 비명이 드문드문 터지는 가운데, 갑옷을 칼로 내려치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황제는 이를 악물고 말없이 검을 휘둘렀다. 저항할 의지조차 없이 무력하게 바닥에 웅크린 장군을 향해. 아무런 표정 없는 얼굴에 눈빛이 섬뜩하게 희번덕댔다. 이미 죽은 사냥감에게 확인 사살을 하듯, 혹은 고기를 잘게 다지듯 몇 번이고 기계적으로 칼끝을 내리찍었다.
두꺼운 철 갑옷이 아무리 날카로운 칼날로부터 몸이 베이는 것을 막아 준다 한들 충격 자체를 없애지는 못했다. 빠각, 콱, 콰드득. 흠집투성이가 된 갑옷 아래에서 뼈가 부서지고 내장이 짓이겨지는 끔찍한 소리가 났다. 무자비한 칼질이 반복될수록 점차 장수들의 얼굴이 희게 질리고 단단히 땅을 딛고 섰던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왔다.
검 휘두르기 150번. 그다지 많은 횟수는 아니었다. 검술을 익히는 무관들이라면 한번 훈련할 때 제자리에서 몇천 번씩 검을 휘두르는 이들도 있으니.
그러나 150번의 칼질이 끝났을 때, 그 자리에는 간신히 숨만 붙어 있을 뿐 도저히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 없는 형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고개를 한껏 숙이고 시선을 내리깐 이들이 끔찍한 몰골이 된 그를 질질 끌고 나갔다.
뚜둑! 때마침 제 소임을 다한 칼날이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몇 번이고 벼린 순도 높은 철로 만들었기에 웬만해서는 부러질 일이 없는 대장군의 검이 너무도 쉽게 동강 났다. 황제는 흥미를 잃었다는 듯 반 토막이 난 청의 검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툭 내던졌다.
“폐하, 거, 검을…….”
막사 구석에서 주워 온 황제의 검을 받쳐 들고 벌벌 떨며 대기하던 신하가 그에게 검을 건넸다. 얼굴이 허옇다 못해 퍼렇게 질린 걸 보니 있는 용기 없는 용기 죄다 쥐어짜 낸 게 분명했다.
“그래, 그러고 보니 내 검이 아니었지.”
황제가 입가에 묻은 타인의 피를 옷소매로 훔치며 돌아섰다.
“검을 망가뜨려서 미안하네.”
“전 괜찮습니다.”
“아니, 아니야. 괜찮다니? 그대는 너무 사람이 좋아서 탈이야. 무관에게 검이 없으면 어찌하나. 금군의 수장이란 자가 그리 물러서 어찌 아랫것들을 다스리겠어.”
그는 유유히 웃었다. 흰 뺨에 미처 닦아 내지 못한 핏자국이 흐리게 남아 있었다. 청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미동도 없이 서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대의 검을 못 쓰게 만들었으니 마땅히 보상을 해야겠지.”
다음 순간 무관들은 스스로의 눈을 의심했다. 황제가 자신의 검을 거리낌 없이 청에게 건넨 것이었다.
황제의 검은 다른 일반 무관들이 그러하듯이 중앙 관청의 병기고에서 나눠 준 걸 쓰다가 망가지면 반납하고 다시 배급받는 물건이 아니었다. 기나긴 제국의 역사를 통틀어 단 한 자루밖에 존재하지 않는 황실의 보검이었다. 그야말로 국보(國寶)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그런 유서 깊은 물건이 아무리 황제가 총애하는 이라 하나 일개 신하의 손에 들어가다니. 선대 황제들이 줄줄이 무덤을 박차고 일어나 기함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 중 그 누구도 반기를 들지 못했다. 방금 전 일어난 끔찍한 일이 아직도 눈앞에 어른거렸다. 황제의 심기를 거슬렀다간 자신도 그 꼴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제가 어찌 감히.”
청이 한 박자 후에 떨떠름하게 겸양을 표했다. 그나마 황제 앞에서 형식적으로라도 거부의 말을 할 수 있는 건 그 한 명 정도였다.
“내가 주는 건데, 예락.”
황제는 한 발짝 느긋하게 내디뎌 간격을 좁혔다. 허공을 주시하던 청의 시야를 황제의 웃고 있는 입매와 턱, 반듯하게 뻗은 목덜미와 널찍한 어깨가 가득 메웠다.
“뭐든 감사히 받아야지.”
청은 마침내 손을 내밀어 눈앞의 황제가 내민 검을 받았다. 조금 전까지 황제가 쥐고 있던 검 손잡이는 따뜻하게 데워져 있었다.
“성은이 망극합니다.”
“감사 인사는?”
“예?”
“그런 판에 박힌 말 말고. 왜 그리 딱딱하게 굴어. 응?”
여린 살갗을 깃털로 간질이듯 무척이나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목소리였다. 황제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 청의 속눈썹 끝에 그의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했다.
“이 감격을 어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폐하. 목숨처럼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청은 감히 황제를 마주하지 못하고 순종적으로 시선을 내리깐 채 대답했다. 책을 낭독하는 것처럼 억양 없는 어조였다. 그러나 귓바퀴가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로 아주 희미하게 붉어져 있었다.
황제는 만족한 듯 활짝 핀 꽃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대에게 줄 게 더 있어.”
“예?”
그는 허리춤에 매인 주머니를 뒤적여 뭔가를 꺼냈다. 청이 반사적으로 양손을 내밀었다. 곧 그의 손바닥 위에 작은 패물이 툭 떨어졌다. 갓 흐른 피처럼 선명한 붉은빛을 띤 산호 비녀였다.
“설영(雪瑛)에게 전해 줘. 짐이 궁을 비운 지가 이제 반년이 되어 가니, 퍽 외로울 테지. 날 걱정하고 있을 테고.”
“…….”
옅은 의아함이 서려 있던 청의 얼굴에서 점차 표정이 사라졌다. 그는 수락도 거절도 하지 않은 채 침묵을 지켰다.
“폐하, 송구하오나 대장군께서는 좌장군과 우장군에게 지시를 내리고 금군 전체를 통솔하시어 전투를 이끄셔야 하옵니다.”
반발의 말은 그가 아닌 다른 장군에게서 나왔다. 황제가 청에게 대뜸 황실의 보검을 넘긴 것까진 어떻게든 참았으나 이건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보검은 없어도 당장 전투에 지진 않지만, 청이 없으면 당장 질 판이었다. 변경 정벌을 마무리 짓기까지 아직 무찔러야 할 적이 산더미였다. 이런 시국에 청이 황궁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황제는 잠시 아무 반응이 없었다. 혹여나 저 장군까지 황제의 심기를 거슬렀다가 폐인이 되나 싶어서 지켜보던 무관들 모두가 조마조마해졌다.
“여기서 예락 외에 내 정표를 지니고 황후의 침전까지 들어갈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되지? 내가 믿고 보낼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되느냐고.”
다행히도, 이것을 다행이라고 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황제는 분노를 터뜨리는 대신 태연하게 말했다.
황제가 황후에게 사적으로 보내는 정표를, 그것도 나랏일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기밀문서도 아니고 일개 장신구를 대장군의 손에 들려 보내다니. 몹시 모욕적인 취급이었다. 소식을 나르는 전령은 하급 병사에게나 맡기는 역할이었으므로.
“명 받들겠습니다.”
하지만 황제가 시키는 일이면 뭐든지 한다는 금군 대장군은 순순히 비녀를 받아 들었다. 졸병 취급 받은 것이 불쾌하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대가 내 몫까지 성심껏 황후를 달래어 주게. 그 마음 여린 이가 황궁 한복판에서 홀로 얼마나 쓸쓸하겠는가.”
황제의 입가에 걸린 웃음기가 조금 더 짙어졌다. 청은 여전히 별다른 반응이 없었으나, 아까보다 낯빛이 창백했다. 꼭 황제가 그를 괴롭히기라도 하는 것처럼.
“응? 할 수 있지? 예락 그대는 내 오른팔이잖아.”
청은 고개를 깊게 숙였다. 이런 일에 일일이 상처받기엔 이제껏 그가 황제와 함께한 세월이 지나치게 길었다.
“예.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 * *
청은 말없이 넓은 침전 안을 돌아다니며 덧창을 닫고 발을 내렸다. 혹여나 울음소리가 밖에 새어 나갈까 봐 염려해서였다. 그 와중에도 황후가 우는 모습을 보는 무례를 저지르지 않으려 등을 돌리고 있었다.
“흐윽…….”
등 뒤에서 섧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언젠가는 이렇게 될 줄 알았다.
황제는 스물도 안 된 소국의 왕자를 데려와 황후랍시고 들어앉혀 놓고는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황후가 식음을 전폐하며 고국에 돌려보내 달라고 울어 댈 때도, 다른 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도 고스란히 방치했다. 물론 그 뒤치다꺼리를 맡는 건 모조리 청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이따금 황후의 처소에 보석과 비단을 산더미처럼 하사했다. 어떤 때는 환열기(歡熱期)가 지나고 나서도 이틀이고 사흘이고 황후의 처소에서 밤을 보냈지만, 역으로 몇 달을 한 번도 찾지 않기도 했다.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호의를 주었다가 금세 거두어 가고, 차갑게 무시하다가도 내키는 대로 관심을 가졌다.
물론 여타 후궁들에 비해서는 몹시 나은 상황이었다. 입궁 후 황제의 얼굴 한번 제대로 보지 못한 이도 있고, 총애에 굶주린 나머지 어설픈 계략을 꾸미다 목이 날아간 이도 있었으니.
다른 이들은 이름뿐인 타국의 왕족이라 별 볼 일 없다 여겼던 황후가 냉혈한인 황제의 마음을 독차지했다며 부러워했다. 하지만 청이 보기엔 달랐다. 황제는 황후를 망가뜨리고 있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착실히. 의지할 곳 없는 심약한 소년이 뒤틀린 애착에 길들여지면 어찌 되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것도 아닐 텐데.
조국을 짓밟은 악랄한 폭군과 한 이불을 덮느니 차라리 목을 매 죽어 버리겠다 하던 소년이 이제는 황제를 그리며 눈물까지 보인다. 혼자 슬픔을 삭일망정 아랫사람들에게 훈계 한번 하지 못하던 이가 신경질적으로 버럭 소리를 지른다. 그 변화를 곁에서 낱낱이 지켜본 사람으로서 소름이 끼쳤고 한편으로는 불쌍했다.
‘그러게 왜 하필 폐하의 눈에 뜨이셨습니까.’
그런 물음이 절로 떠올랐다. 하지만 청은 곧 생각을 지웠다. 그렇게 따지자면 저도 할 말이 없었다. 오히려 황후보다 자신이 더 심하게 망가져 있을지도 몰랐다.
황후는 청을 유일한 보호자라도 되는 것처럼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지만, 사실 그는 황후의 우군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악의 축에 가까웠다. 무관심하던 황제를 적극적으로 설득해 치러지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혼례를 치르게 했고, 평온하게 살아갔을지도 모르는 이의 운명을 송두리째 나락에 처박았으니.
국혼에 대한 논의가 오갈 당시, 황후의 고국에서는 아무리 왕위와 거리가 멀다 하나 마냥 곱게만 자랐던 왕자를 타국에 보내는 것을 반대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하물며 상대가 야차 같고 악귀 같다는 극악무도한 제국의 황제임에야.
청은 그들 중 몇을 고문했고 몇을 죽였다. 손발을 잘라 입에 쑤셔 넣어 줬더니 왕자를 못 보내겠단 소리는 쏙 들어갔다. 황후는 지금까지도 결코 모르는 사실이었다. 알았다면 청을 은인 대하듯 이리도 친근하게 대할 수는 없었다.
어느새 뒤에서 들리던 울음소리가 그쳐 있었다. 그는 황후가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돌아보았다.
“이제 진정되셨습니까.”
“예.”
침상에 걸터앉은 황후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그새 눈이 발개졌다. 청은 소매에서 황제가 준 산호 비녀를 꺼냈다.
“폐하의 뜻을 받들어 대신 위로를 전합니다. 이것을 전하께 전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변경 정벌을 마치고 귀환할 때까지 정표로 여기라고.”
“폐하께서? 나에게?”
황후가 홀린 듯 비녀에 손을 뻗었다. 예법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지만 그것을 인지할 여유조차 없는 듯했다. 그의 손끝에 황후의 손이 살짝 닿았다.
“아!”
순간 황후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불에라도 닿은 듯 황급히 손을 쳐 냈다. 새빨간 비녀가 바닥에 툭 떨어져 나뒹굴었다. 황후는 멍하니 청을 올려다보다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바닥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원래 심약하고 낯을 가리는 성격이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예상보다 마음의 병이 심각한 모양이었다. 청이 묵묵히 비녀를 주워 탁상 위에 도로 올려놓았지만, 황후는 처음 보였던 반응과는 달리 비녀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정적이 이어졌다. 공기가 묘하게 무거웠다. 입을 꾹 다문 황후는 물론이고 청까지 답답함을 느낄 정도였다. 창문을 죄다 닫아걸어서 바람이 통하지 않아 그런 건가 싶었다.
“전하, 어디 편찮으신 데라도…….”
“아뇨, 아닙니다. 저, 대장군.”
“예.”
“차를 우려 드릴까요? 제 고국에서 가져온 찻잎이 있는데, 1년에 한 상자만 생산되는 귀한 찻잎이랍니다. 피로를 없애고 원기를 회복하는 데 좋습니다.”
황후가 나고 자란 변방의 소국은 이렇다 할 강점이 없었다. 척박한 내륙의 산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어 농업도 어업도 미진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이라고, 산세가 험하고 외진 탓에 희귀한 찻잎이 많이 자랐다.
그는 학문이나 무술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음인이라 하나 일국의 왕자로 자랐으니 요리나 자수 같은 분야에도 마찬가지로 별 소양이 없었다. 그나마 그가 자신 있는 것이 차를 우리는 것이었다. 운의전에 방문할 때마다 황후는 손수 차를 타 내오곤 했다. 자신도 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자신에게도 재주가 있다고 필사적으로 주장하듯이.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런 귀중한 것을 제게 주셔도.”
“제가 가진 건 이런 것뿐이잖아요.”
황후는 울음기가 남아 발개진 눈으로 처연하게 웃었다. 그 얼굴에 대고 차마 거절의 말을 할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탁상에 찻잔 두 개가 놓였다. 찻물 표면에서부터 고즈넉하게 김이 피어올랐다. 청은 이렇다 할 불평도 찬사도 없이 묵묵하게 차를 홀짝였다.
“아무 기약 없이 떠나셔서 반년을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는데, 돌아오는 건 이 비녀 하나뿐이로군요.”
황후는 비단 금침을 깐 침상에 걸터앉아 탁자 위의 비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산호 비녀는 바닥에 나뒹굴고도 흠집 하나 나지 않은 채 영롱한 광채를 뽐냈다.
“폐하께서 공사다망하셔서 그렇지요. 곧 정벌을 마치고 무사히 돌아오실 겁니다.”
“언제요? 그게 언제인가요? 돌아오시고 나면, 저를 찾아오시기는 하시나요? 대장군께선 늘 폐하의 곁을 지키며 용안을 마주하니 이 기분을 모르겠지요.”
“전하.”
“폐하는 제게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고국에 있는 어떤 궁궐보다도 크고 호화로운 처소를 주셨고, 비단옷과 금붙이도 셀 수 없이 많이 주셨어요. 하나 개중 폐하가 손수 건네주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옷도 보석도 집도…….”
황후가 왈칵 설움을 터뜨렸다. 차곡차곡 쌓여 오던 게 드디어 폭발한 모양이었다.
“그래요, 이 비녀도. 아무리 폐하께서 명하셨다 한들, 결국은 대장군이 제게 준 것이지 않습니까. 전 무엇 하나 그분께 직접 받은 것이 없어요.”
“부디 진정하십시오. 그리 노여워하시면 몸이 상하십니다.”
“전 더는 못 하겠습니다. 애당초 제게 과분한 자리였어요. 저처럼 잘난 것 하나 없는 사람이 황후라니요.”
“고향을 떠나 많이 힘드신 것을 압니다. 하지만 이제 이 제국이 전하의 나라입니다. 익숙해지셔야지요.”
이제껏 인이 박이도록 교육시킨 예법은 어디로 가고, 황후는 어린아이처럼 섧게 울먹였다. 사실 실제로도 어리긴 했다. 청이 황후 또래 나이였을 때 뭘 하고 있었는지를 떠올려 보면……. 철없이 황도(皇都)를 누비며 흥청망청 놀았던 기억뿐이었다.
청은 일단 황후를 진정시키려 했다. 그가 다짜고짜 청의 품에 매달리며 옷깃을 붙잡지만 않았다면.
“절 멀리 데려가 주세요.”
“예?”
순간 뒷덜미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제국의 황후 되는 이라면 농담으로라도 결코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대장군은 어디든지 갈 수 있으시잖아요. 황궁 밖으로는 한 발짝도 못 나가는 저와 달리. 그러니까 대장군이 절 데리고 달아나 주세요. 네?”
“전하,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부디 제 옷을 놓아주시고…….”
“예락, 제발.”
희고 마른 손가락이 가슴팍에 갈고리처럼 파고들었다. 의복에 한껏 주름이 졌다. 그러나 청은 차마 상대를 힘껏 밀쳐 내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굳었다. 자칫 잘못해서 황후의 옥체가 상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안 된다는 걸 전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어째서? 어째서 안 된다는 겁니까?”
황후가 그의 품에서 퍼뜩 고개를 들었다. 눈물에 젖은 앳된 얼굴에 울분과 절망과, 처절한 광기가 넘실거렸다.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처럼.
“저는 황제 폐하의 신하입니다. 그분께 불충을 저지를 수는 없습니다.”
“폐하께 충성해야 한다?”
황후는 청의 옷자락을 할퀴듯 움켜쥐었다. 천이 억지로 당겨지며 빠드득 소리가 났다. 청이 별다른 대답이 없자, 일그러진 웃음을 지으며 쐐기를 박았다.
“폐하를 사모해서 그런 게 아니고요?”
“…….”
청은 입을 딱 다물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리숙한 황후에게서 나올 거라 상상도 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일단 시치미를 뗐다. 정곡을 찔렸어도 내색하지 않는 것. 온갖 모략이 판치는 황궁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본이었다.
“대장군께서 폐하를 사모하는 게 아니냐 여쭈었습니다.”
“신하 된 도리로 연군의 정을 품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모범적인 충신인 양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연군지정(戀君之情) 운운하는 청을 올려다보다가, 황후가 흐리게 웃었다.
“대장군은 처음부터 한결같이 제게 헌신적이었지요. 그래서 한때는 대장군이 제 구원자라고, 절 이 황궁에서 빼내 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비바람을 맞은 난초처럼 애처롭기 짝이 없는 표정과는 달리, 청을 필사적으로 붙잡은 손에 실린 힘이 점점 강해졌다.
“줄곧 생각했어요. 대장군께서 왜 제게 이리 잘해 주시는 걸까 하고요. 다른 관리들은 처음에 공손한 척 다가왔다가도 곧 제게 붙어 있어 봤자 아무런 소득이 없다는 걸 깨닫고 떨어져 나갔는데 말이지요.”
“…….”
“제게 잘 보여서 출세하고 싶어서? 절 잘 보살핀 대가로 폐하께 재물을 하사받고 싶어서? 그건 아닐 것 같더군요. 아니면……. 제 처지가 불쌍해서? 글쎄요.”
황후는 눈물에 젖은 속눈썹을 깜빡이며 말했다.
“당신은 그리 착한 이가 아니잖아요.”
청은 잠시 말이 없었다. 무작정 품에 파고들어 매달리는 황후를 어떻게든 말려 보려던 움직임도 뚝 멎었다. 긴 침묵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황후 전하, 폐하께 고하기라도 하시겠습니까? 비(妃)도 빈(嬪)도, 하다못해 씨를 품을 수 있는 몸도 아닌 놈이 더러운 마음을 품었다고. 당장 사지를 찢고 목을 치라고요.”
“하…….”
황후의 말을 부정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대답이었다. 황후는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당사자의 입으로 확답을 들었는데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 않았다.
“글쎄요, 그리 고한다 해서 과연 폐하가 제 말을 들어주시겠습니까. 반려인 나보다 그대의 곁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내는 분이신데.”
목을 타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기어올랐다.
“잠깐, 전하. 놓아주십시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지가 잘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피로 회복에 좋은 향을 피워서 몸이 나른하게 이완되는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나른함을 넘어 흐물흐물하게 풀리고 있었다.
“저 차……. 무슨 차입니까?”
황후는 다급하게 묻는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청의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보드라운 뺨과 앙증맞은 코끝이 민감한 피부에 닿았다.
“전하!”
“하아…….”
살갗에 스민 내음을 한껏 들이마신 황후가 달콤한 한숨을 내쉬었다. 눈에 초점이 없었다. 그 모습에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환열기십니까? 왜 말씀하지 않으셨……. 젠장, 이게 아니지. 당장 사람을 부르겠습니다.”
원래 몸이 약한 탓에 황후의 환열기는 불규칙적이었다. 예측할 수도 없고 미리 대비할 수도 없었다. 다른 건강한 음인들처럼 한 달에 한 번씩 꼬박꼬박 맞는 것이 아니다 보니, 황후를 모시는 시종들은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했다. 공적인 자리에서 느닷없이 환열이 오르기라도 하면 큰일이었으므로.
그런데 그것이 하필 지금일 줄이야. 양인이나 음인이 내뿜는 특유의 여향(麗香)을 맡을 수 없기에, 청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황후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인다고만 여겼다.
“대장군은 불쌍한 분이군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폐하의 향을 잔뜩 뒤집어쓰고도 정작 본인은 알지 못하니.”
“예? 그게 무슨.”
“마비 효과가 있는 찻잎을 진하게 우렸습니다. 아주 진하게요. 움직이기 힘드실 겁니다.”
황후는 얼굴을 일그러뜨린 청을 침상 쪽으로 밀치고 올라탔다. 몸이 잔뜩 달아 있던 와중에 청이 흠뻑 묻히고 온 황제의 여향까지 들이마시자 더 이상 자제할 수 없었다. 거친 움직임에 탁상 위의 찻잔이 엎어졌다. 거의 마시지 않은 황후의 찻잔과 달리, 깨끗하게 빈 청의 찻잔에는 찻잎 찌꺼기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양인이든 음인이든, 환열기를 맞은 이들은 이성을 잃었다. 사회적 체면이고 인간관계고 모조리 내팽개치고, 어떻게 해서든 누군가와 관계를 맺어야겠다는 생각밖에 할 수 없게 되었다. 말로 설득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바로 지금처럼. 비로소 황후가 갑자기 뜻 모를 소리를 하며 품에 안겨 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폐하를 대신해 절 위로하러 오셨지 않습니까. 가만히 계세요…….”
황후는 청의 옷자락을 억지로 젖히고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몇 달간 맡지 못했던 향이 가득 밀려들어 왔다. 본능적으로 아랫배에 간질간질하게 전율이 오르고 뒤가 젖었다. 아래에 깔린 남자가 자신의 반려가 아니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이 향만이 중요했다.
“으, 읏!”
청이 괴로워하며 몸을 이리저리 뒤틀었다. 하지만 물에 젖은 솜처럼 축 늘어진 팔다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만……. 안 됩, 헉, 안 됩니다. 후회하실 겁니다.”
황후는 그의 필사적인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옷자락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어차피 침전 안의 모든 창은 굳게 잠겼고 문 또한 닫혀 있었다. 소리가 새어 나갈 염려는 없었다.
황제 외에 다른 이와, 그것도 양인이 아닌 평인과 몸을 섞어 본 적은 없었지만 어차피 같은 사내이니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입으로는 싫다며 저항하더라도 아래에 자극을 주면 반응하게 되어 있었다.
단단히 조여 맨 허리끈을 풀어 헤치고 안을 더듬었다. 온몸이 마비된 상대는 저항조차 못 하고 무력하게 침상에 쓰러져 있었다. 그런 주제에 눈빛만 살아서 자신을 잡아먹을 듯 쏘아보았다.
체온에 데워져 한층 짙어진 황제의 향이 확 풍겼다. 아찔했다. 더 흐려질 것도 없을 정도로 흐려져 있던 이성이 다시금 날아갔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어지러웠다.
“손, 치워…….”
황후가 열에 들뜬 신음을 흘렸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상대의 경고 따윈 들리지도 않았다. 자의든 아니든, 사지가 마비되어 있든 아니든 간에 작고 부드러운 손으로 만져 주자 청은 조금씩 발기했다. 그의 위에 올라앉은 황후가 허벅지 안쪽과 엉덩이를 지그시 문지르자 그의 것이 좀 더 커졌다.
청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황제의 향에 푹 절어 있었다. 처음 그가 길게 드리운 주렴을 걷으며 방 안으로 들어올 때에, 순간 황제인 줄 착각하여 벌떡 일어섰을 정도로. 대체 어떻게 하면 이렇게 되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아니, 차마 짐작하고 싶지 않았다.
한때는 황제가 어느 날 재앙처럼 나타나 그의 삶을 짓밟은 약탈자이고, 청이 선량한 구원자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황제가 무자비하게 그를 유린하고 미련 없이 휙 떠나 버린 밤이면 청이 찾아와 엉망이 된 그를 간호하고 돌봐 주었다. 지위 높은 무관으로서 한밤중에 불려 와 자신보다 한참 어린 음인의 시중을 드는 게 자존심이 상할 법도 한데, 청은 매번 자상했다. 단 한 번도 불쾌한 티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진한 생각이 깨어지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애초에 황제와 청은 군신(君臣) 관계였다. 그들 사이에는 타국에서 온 황후는 결코 넘을 수 없는 굳건한 신뢰가 있었다. 황제가 악마라면 청은 악마의 하수인이었다. 희생양을 데려다 악마의 제단에 바치는.
눈앞의 남자가 원망스러웠다. 동시에 불쌍했다.
“불쌍해라.”
“…….”
말을 듣지 않는 몸을 힘겹게 들썩이며 저항하던 청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거북함과 당황으로 일그러져 있던 얼굴에서 표정이 싹 사라졌다.
아무리 황후보다 오랜 시간을 황제의 곁에 붙어 있더라도, 황제의 반려는 청이 아닌 황후였다. 아무리 황제의 여향을 온몸에 묻히고 다녀도 그는 그 사실조차 알 수 없었다. 이루어지지 못할 짝사랑을 하며 몸과 마음을 바쳐 헌신하면 무엇 하는가. 결국 역사서에 황제와 나란히 기록되어 후세에 알려질 이름은 황후의 것이었다. 그가 아니라.
가느다란 손가락이 청의 목을 어루만졌다. 상대를 상냥하게 쓰다듬어 주는 것 같기도 하고, 금방이라도 상대의 목을 졸라 버리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당신은 정말로 불쌍한 사람이군요.”
비단 이불이 깔린 침상에 무력하게 늘어져 있던 청의 손가락이 움찔, 작게 움직인 것도 그 순간이었다. 울컥 치밀어 오르는 본능이 마비 독을 이겼다.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습관적으로 뻗은 손끝에 차갑고 묵직한 검 손잡이가 닿았다. 오래 써 와서 익숙한 자신의 검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을 깨닫기 전에 이미 청은 반사적으로 칼을 뽑아 들고 있었다. 황실의 도검 장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손질했을 칼끝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타인의 살을 갈랐다. 어찌나 예리하게 날이 서 있는지, 벤 감각조차 거의 없었다.
“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더운 피가 소나기처럼 후두둑 뿌려지고, 한 박자 늦게 청의 이성이 돌아왔다. 마비가 덜 풀려 삐걱대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고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황제가 하사한 검이 황후의 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 * *
멀리서 묵직한 발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아무런 빛도 소리도 느껴지지 않는 컴컴한 공간에 오래 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감각이 곤두서게 된다. 미세한 진동에도 몸이 반응했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제국식 고문법은 몹시 악랄했다. 치명상은 입히지 않고 목숨 줄을 붙여 놓은 채로 끊임없이 고통을 가했다. 일부러 빛 한 점 들지 않도록 어둡게 조성한 지하 감옥에 처박아 놓고 며칠에 한 번 극도로 강렬한 빛을 쐬어 준다.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죄수에게는 눈을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만이 느껴진다. 그 과정을 며칠 반복하다 보면 죄수는 실명하거나 실성하거나, 둘 중 하나가 되기 마련이다.
천수를 누리고 곱게 죽는 것은 추호도 바라지 않았다. 그러기엔 지금껏 쌓은 업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황후 시해범이 되어 유서 깊은 고문을 몸소 겪게 될 줄도 몰랐다.
〈바른대로 말해라! 어째서 황후 전하를 해친 거지?〉
〈적국의 사주를 받았나?〉
황후를 칼로 벤 후, 황궁 지하의 감옥에 갇힌 청은 갖은 고초를 겪었다. 평소에는 눈치를 보느라 그에게 말도 제대로 못 걸던 예부(禮部)의 관리들이 기다렸다는 듯 그를 혹독하게 심문했다. 청도 이제까지 저지른 일이 있어 그다지 억울하지는 않았다.
손톱과 발톱이 하나씩 뽑혀 나갔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피와 고름이 엉겨 붙은 손을 대못으로 꿰뚫어 감옥 벽에 고정해 놓았다. 처음 얼마간은 죽도록 고통스러웠으나, 의식을 잃는 때가 길어지면서 이젠 별로 아프지도 않았다. 원래도 검이나 활을 쓰는 건 그렇게 좋아하지 않긴 했지만, 앞으로는 쓰고 싶어도 못 쓸 것 같았다. 그것도 목숨이 계속 붙어 있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끼이익. 기름칠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감옥 문이 힘겹게 열렸다. 이윽고 굳게 닫혀 있던 문틈 사이로 새하얀 빛이 스몄다.
“윽……!”
눈을 통째로 후벼 파는 것처럼 아팠다. 청은 고개를 푹 숙이며 신음했다. 또 지긋지긋한 고문의 시작인가 싶었다.
“예락.”
하지만 귀에 익은 목소리를 듣는 순간 사고가 멈췄다.
황제는 뚜벅뚜벅 딱딱한 발소리를 내며 느릿하게 걸어 들어왔다. 굵은 창살로 가로막힌 감옥 앞에 서서 물끄러미 안에 있는 이를 내려다보았다. 막 변경에서 돌아왔는지 출정 시에 입는 차림 그대로였다.
청이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산발이 되고 피와 먼지가 들러붙은 머리카락 사이로 흐린 빛이 새어 들어왔다. 그러나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몹시 눈부시다는 것만 느껴졌다. 오랫동안 어둠 속에 갇혀 있었던지라 그에겐 희미한 빛조차 큰 자극이었다. 망가진 눈에서 생리적인 눈물이 줄줄 흘렀다.
“왜 죽였지?”
황제가 물었다. 비정상적으로 차분한 어조였다. 청은 그가 당연히 분노할 것이라 생각했다. 황제가 전쟁터에 나가 있느라 자리를 비운 동안, 믿고 있던 오른팔이라는 놈이 황후를 죽였으니 그게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황제가 황후를 사랑했는지는 늘 곁을 지키던 청조차도 알 수 없었다. 그의 심중은 항상 헤아리기 어려웠다. 하지만 적어도, 다른 이들에게는 결코 베푼 적이 없던 너그러움을 황후에게 쏟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적적인 일이었다.
“왜 설영을 죽였어?”
황제가 다시 한번 물었다. 감옥 벽에 반쯤 기대어 쓰러져 있던 청은 무심코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 앉으려 했다. 하지만 손등을 무자비하게 꿰뚫은 굵직한 대못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헉.”
시야가 새까맣게 물들었다. 잊고 있던 끔찍한 통증이 신경을 갈기갈기 찢었다. 무력하게 벌어진 입에서는 헐떡이는 소리만 나왔다. 무슨 대답을 하든 결코 진심은 말할 수 없었다. 당신을 몰래 사랑해서, 당신을 사랑하는 나를 불쌍하다 말하는 황후에게 살의를 느껴서, 그래서 죽였다고? 최악의 대답이었다.
청이 바라는 것은 황제의 사랑이 아니었다. 황제의 애정과 욕망이 자신의 것이 되길 원했다면 오래전 옛날에, 그들이 처음 만났던 때에 이미 간구했을 터였다. 평인 사내와의, 그것도 신하와의 염문은 제국 황제에겐 큰 흠이겠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황자에겐 아니었을 테니까.
그는 그저 황제가 황제이길 바랐다.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절대적인 권력을, 제국의 일인자 자리를 손에 넣길 바랐다. 그에게 결코 오점이 있어서는 안 되었다. 그의 하나뿐인 정실인 황후 또한 마찬가지였다. 청이 모든 누명을 뒤집어쓰고 처참하게 죽는 한이 있어도, 그들은 티끌 한 점 없이 완벽해야 했다.
아랫사람의 대답이 조금이라도 늦으면 곧바로 잔혹한 보복이 날아오던 평소답지 않게 황제는 그저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든지 기다려 주겠다는 듯, 관대한 군주의 탈을 쓴 채로.
청은 질끈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핏물 섞인 눈물이 주르륵 흘러 떨어졌다. 전신을 짓이기는 격통을 억지로 참고 몸을 움직여 무릎을 꿇었다.
“제가…….”
그간 비명이나 신음만 토하던 성대가 며칠 만에 처음으로 사람의 말을 했다. 물론 목이 끔찍하게 쉬어 있어 결코 듣기 좋지는 않았다. 청은 첫 운을 떼자마자 명치에서부터 올라오는 통증에 괴롭게 기침을 했다.
“제가, 황후 전하를……. 연모해서.”
이미 거짓 자백은 시작되었다. 더는 되돌릴 수 없었다.
“폐하께서 자리를 비우신 틈을 타 그분을 강제로 범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격렬하게 저항하시기에……. 순간적으로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베었습니다.”
청의 자백을 듣는 내내 황제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거의 시체나 다름없는 몰골로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은 청을 묵묵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오히려 뒤쪽에 있는 듯 없는 듯 서 있던 간수가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을 보였다.
“폐하. 국문(鞠問)을 진행할까요? 죄인이 죄를 실토했다고는 하나, 공식적으로 벌을 내리려면…….”
“열어라.”
“예?”
저 창살 안에 있는 것은 희대의 대역 죄인이자 흉악범이었다. 전쟁터에서 날고 기던 무관이기도 했다. 아무리 지금은 모진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되었을지언정, 그런 자가 갇힌 감옥을 함부로 열 수는 없었다.
황제가 감옥을 턱짓했다. 습관적으로 입매를 살짝 올렸지만 눈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열라 했을 텐데.”
“아, 예. 명 받들겠습니다!”
간수는 깊이 고개를 숙이며 복종했다. 성정이 흉악하기로 악명이 자자한 황제가 직접 내리는 명이었다. 거역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감옥 문의 구멍에 열쇠를 끼워 넣는 손이 두려움으로 떨렸다.
황제는 서슴없이 걸음을 옮겼다. 감옥의 차가운 돌바닥에는 지푸라기 몇 가닥이 깔려 있을 뿐 침상도 모포도 없었다. 그 안에 청이 도축을 기다리는 짐승처럼 갇혀 있었다.
“아니, 예락. 이건 아니야.”
황제는 가만히 몸을 낮추어 한 손으로 청의 뺨을 감쌌다. 피가 덕지덕지 말라붙은 얼굴이 꺼려질 만도 한데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다른 이들이 모두 등을 돌리더라도 그대만은 내 곁에 있겠다고, 끝까지 내 편이 되겠다고 했지 않은가. 그런데 그대가 어떻게 나를 배신해. 응?”
책도 읽지 못할 정도로 흐린 빛 아래에서, 황제의 엄지손가락이 피와 먼지로 얼룩진 뺨을 매만졌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거짓이었다고 말해 줘. 한 번, 단 한 번이면 돼. 그대가 황후를 해친 게 아니라고, 그에게 삿된 마음을 품지도 않았다고.”
혹독한 고문으로 초점을 잃어버린 청의 눈이 어설프게 컴컴한 허공을 더듬었다. 그는 며칠 동안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해 쩍쩍 갈라진 목으로도 용케 대꾸했다.
“이러면 안 된다며 끝까지 애원하던 황후 전하의 눈물 젖은 얼굴이……. 정말로 곱던데요. 폐하가 부러웠습니다.”
“…….”
손길이 뚝 멎었다. 황제는 한참이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대로 시간이 멈춰 버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나는 이제껏 그대가 영민한 자라고 생각했는데.”
황제는 희미하게 웃었다. 뺨을 어루만지던 손등에 뼈대가 서고 힘줄이 돋았다.
“내가 틀렸던 모양이야.”
쿵!
그는 그대로 손아귀에 힘을 주어 청의 뒷머리를 벽에 처박았다. 모든 감각이 한순간 사라졌다 다시 돌아왔다. 어둠으로 점철된 시야에 얼룩덜룩한 색채가 번졌다. 두개골을 짓이기는 것 같은 통증이 한 박자 늦게 밀려들었다.
“크, 흐윽……!”
황제는 태연자약하게 다시 한번 그를 밀어붙였다. 퍽 소리가 났다. 결국 청의 손바닥을 꿰뚫어 고정하고 있던 대못이 우악스러운 힘을 이기지 못했다. 근육을 찢고 신경을 헤집으며 거칠게 빠져나갔다. 피범벅이 된 못이 돌바닥에 나뒹굴고, 그 위에 새로 흐른 피가 후두둑 떨어졌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끔찍한 정경에 간수는 말을 잃었다. 하지만 차마 끼어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황제가 원한다면, 당장 이 자리에서 저자의 사지를 자르고 배를 가른다 하더라도 결코 말릴 수 없었다.
이윽고 청은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혼절했다. 몸이 앞으로 풀썩 고꾸라지며 헝클어진 머리채가 흘러내렸다. 이대로 숨이 멎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처참한 몰골이었다. 정신을 잃은 청이 황제의 발치에 쓰러졌는데도 그는 별 반응이 없었다. 소름 끼치도록 덤덤한 얼굴을 하고, 발끝을 들어 청을 가볍게 걷어찼다.
“지청, 청아……. 주제 파악 못 하지?”
그는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청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죽은 벌레의 사체를 관찰하는 것 같은 무감정한 태도였다.
“오냐오냐 예뻐해 줬더니 이딴 식으로 기어올라.”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 흐른 끝에 마침내 황제가 움직였다. 그는 손수 몸을 낮추어 양팔로 청을 안아 들었다.
체질적으로 날씬하고 호리호리한 음인이면 모를까, 청은 평인이자 장군이었다. 키도 체중도 결코 남들에 뒤지지 않고, 칼을 휘두르고 활을 쏘느라 몸에는 근육이 붙었다. 결코 들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황제는 전혀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듯 가뿐히 청을 든 채 저벅저벅 걸어 감옥을 나섰다. 의식 불명 상태에 빠진 이가 입은 지저분한 홑옷 자락이 그의 걸음에 따라 가볍게 흔들렸다. 그가 지나간 길을 따라 바닥에 핏방울이 뚝, 뚝, 떨어졌다.
“…….”
간수의 옆을 지나치는 아주 짧은 순간, 황제가 그를 흘깃 보았다. 밝은색의 무감정한 눈동자가 얼핏 옆을 향했다.
“사, 살펴 가시옵소서!”
자신이 방금 본 것을 믿을 수 없어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간수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허리를 푹 숙였다. 죄인의 처분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어디로 가시는 것인지.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결코 물어서는 안 된다고.
* * *
온화한 봄바람이 강물을 스치고 날아와 누각 기둥 사이를 누볐다. 강가에 심은 나무마다 꽃송이가 나뭇가지가 휘어지도록 탐스럽게 영글었다. 꽃가지가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며 연분홍빛 비를 내렸다. 팔랑팔랑 날아간 수많은 꽃잎들이 강물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청은 난간에 팔을 얹고 기대어 강의 정경을 내려다보았다. 강에는 귀족들이 뱃놀이를 위해 띄운 나무배가 몇 척 떠 있었다. 색색의 비단으로 장식한 배에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들어앉아 야유(野遊)를 즐겼다. 수면에 떠다니는 꽃잎을 건지려 뱃전 너머로 손을 뻗어 보는 이들도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평온하고 사치스러운 풍경이 귓가에 들어오는 왁자지껄한 소음과 어우러졌다. 거문고 뜯는 소리, 술잔 부딪치는 소리,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로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버들가지 곱게 흔들리고 강 위에 꽃이 흐드러지니, 바야흐로 태평성대를 맞아 모든 근심이 사라지누나.〉
봄을 예찬하는 시조의 한 구절이었으나, 그를 읊는 말투는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청은 시무룩하게 턱을 괴고 흘러가는 강물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한 층만 위로 올라가도 술과 음식, 노래와 유흥이 가득하거늘 그에게는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그는 며칠 전에 금주령에 처해졌다. 저잣거리에서 친구와 술을 마시고 거나하게 취해 노래를 부르며 집에 돌아왔더니, 아버지가 노발대발하며 집안 망신 다 시키는 놈이라고 호통을 쳤다. 그 결과가 이거였다.
솔직히 말해서 대체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 술 마시고 누굴 때린 것도 아니고 술값을 안 낸 것도 아닌데. 굳이 문제점을 찾자면 청이 열다섯은 넘겼고 스물은 안 된 앳된 소년이라는 것인데, 제국에 미성년자가 술을 마시지 말라는 법도는 없으니 상관없었다.
황도 내에 지씨 가문 맏아들이 놀러 다니기 좋아한다는 소문은 이미 옛날 옛적에 쫙 퍼졌을 텐데. 자신이 이러고 다니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아버지가 지나치게 엄격한 게 아닌가 싶었다.
아무리 노는 자리에는 안 빼고 얼굴을 비치는 청이라지만, 오늘 열리는 연회에는 참석하고 싶지 않았다. 황도의 귀족들 중에서도 특히 방탕하고 허영심 많은 이들이 참석하는 자리였다. 대낮부터 기생들을 잔뜩 불러다 흥청망청 술판을 벌이는 것만 봐도 답이 나왔다.
하지만 아버지의 체면을 생각해서 참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연회의 주최자는 대내상(大內相)이었다. 황제의 최측근으로서, 황도뿐만 아니라 온 나라에 위세를 떨치고 있는 권력자. 그의 눈 밖에 나서 좋을 일이 없었다.
〈전이나 좀 집어 먹다 가야지.〉
심드렁하게 강을 응시하던 청이 기지개를 쭉 펴며 돌아섰다. 그리고 전각 기둥에 기대어 건너편을 응시하는 남자를 발견했다.
그는 옷차림부터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요란한 비단옷을 차려입은 다른 이들과 달리, 사냥용 의복이나 전투복에 가까운 간편한 차림이었으니. 게다가 가만히 벽에 기대선 채 위층의 동향을 살피고 있는 것이, 누가 봐도 연회를 즐기는 귀족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호기심이 생겼다. 청은 발소리를 죽이고 그에게 다가갔다.
〈저…….〉
어떻게 해 볼 새도 없이 남자의 손이 날아왔다. 단단하게 마디가 잡힌 큰 손이 우악스럽게 청의 목을 움켜쥐었다. 한순간 눈앞이 까맣게 물들었다.
〈컥!〉
〈넌 뭐냐.〉
청은 정신이 가물가물한 와중에 생각했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잠, 그, 이것…….〉
억센 힘으로 숨통을 조이자 곧 청의 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눈가에 눈물이 잔뜩 고인 채 남자의 팔을 절박하게 붙들었다.
남자는 눈앞의 소년에게서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침입자의 존재를 눈치채고 저지하러 온 호위 무사인가 했더니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몸은 단련한 흔적이 거의 없었고, 대응 방식도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소년은 키가 제법 크고 골격도 반듯하게 잘 잡혔지만 아직 덜 자란 티가 났다. 살결은 부드럽고 향긋했으며, 총기가 엿보이는 앳된 얼굴에서는 고생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굳은살이나 흉터와는 거리가 먼 손이 자신의 팔뚝을 애처롭게 두드리는 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곧 목을 틀어쥔 악력이 조금 느슨해졌다. 하지만 청을 완전히 놓아주지는 않았다. 언제든 숨통을 끊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듯, 단단한 엄지가 느릿하게 동맥혈 위를 문질렀다.
〈뭐냐고 물었는데.〉
남자가 나직하게 위협했다. 밝은색의 눈동자가 원시적인 살의로 번들거렸다.
〈의, 콜록, 의부경(義部卿) 지연학의 장자 지청입니다.〉
청이 밭은기침을 하면서도 용케 대답했다.
〈의부경?〉
〈예. 저 이상한 사람 아니라니까요. 저는 그냥, 궁금한 마음에 말을 건 것뿐입니다. 어이하여 이런 누추한 곳에 6황자 전하께서 왕림하……. 큭!〉
다시 한번 손에 힘이 가해졌다. 태연하게 청의 목을 조르는 남자의 손등에 푸르스름한 핏줄이 섰다.
〈어떻게 알았지? 대답 여하에 따라 죽이겠다.〉
〈…….〉
그러나 청이 대답을 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힘없이 벌어진 입술 사이로 헐떡이는 소리가 새어 나오고, 발갛게 충혈된 눈이 원망스럽게 상대를 쏘아보았다.
〈지난달, 황궁 연회에서. 그 눈은 한 번 보면 잊기 힘드니까요…….〉
황자는 한참이나 청을 빤히 바라보았다. 저항할 수 없는 상태의 먹잇감을 앞에 두고, 달려들어 목을 물어뜯을지 말지 고민하는 짐승처럼. 이윽고 그는 묵묵히 손을 놓았다. 전각 마룻바닥에 풀썩 주저앉은 청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목덜미를 손으로 감쌌다. 뽀얀 목덜미에 참혹한 피멍이 들었다.
〈아, 아야야. 전하, 완력이 대단하십니다. 삼도천 구경하고 올 뻔했습니다. 역시 대해단(大垓端)의 황족답게 비범하십니다.〉
놓아주자마자 청은 곧장 싱거운 소리를 했다. 안색이 시퍼렇게 질리고 목에는 손자국이 남아 처참한 꼴을 하고서도 입만 살았다.
〈무슨 용무인지는 모르겠사오나, 전하. 잠입할 때 그런 의복을 입으시면 오히려 의심을 삽니다.〉
〈뭐라고?〉
〈밤도 아니고 대낮에, 누가 그렇게 칙칙한 옷을 입고 다닙니까. 심지어 장소가 연회장인데. 차라리 알록달록한 비단옷을 입는 게 덜 튀겠…….〉
쾅!
전각의 나무 기둥에 청의 등이 큰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순간적으로 등뼈가 산산조각 난 줄 알았다. 황자가 그의 어깨를 잡아 기둥에 처박은 것이었다.
청이 이제껏 스무 해도 안 되는 인생을 살면서 겪은 신체적 괴로움이라고는 무술 강습을 받느라 손아귀에 물집이 잡혔을 때나, 몰래 밤에 놀러 나가려 담을 넘다가 발을 헛디뎌 떨어졌을 때 정도였다. 천방지축 귀족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큰 충격이었다.
〈감히 나를 가르치려 드는 거냐.〉
〈제가, 쿨럭,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 존귀하신 황자 전하께. 아무리 제가 철이 없다 한들 생각까지 없진 않습니다.〉
청이 끊임없이 마른기침이 터져 나오는 입을 옷소매로 가리며 반대편을 가리켰다.
〈저쪽에 사용인들이 드나드는 통로가 있습니다. 그리로 가시면 적어도 호위들의 이목을 끌지 않을 겁니다.〉
〈네가 그것을 어찌 알지?〉
〈대내상이 주최하는 연회에는 어릴 때부터 뻔질나게 드나들었으니까요. 뒷문이나 샛길 같은 것은 빠삭하게 알고 있습니다.〉
황자가 아까처럼 노골적으로 살의를 드러내지 않자, 청은 금세 기세를 회복했다. 그는 황자의 눈치를 살피며 손을 뒤로 뻗어 욱신욱신 아파 오는 허리를 열심히 문질렀다.
〈연회장에 들어가려 하셨던 것 아닙니까?〉
〈…….〉
〈같이 가시지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뭘 믿고?〉
황자는 성정이 흉포한 것만큼이나 경계심이 몹시 강했다. 인간의 탈을 쓰고 있지만 인간 같지 않았다. 사회화된 인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산속을 헤매며 먹잇감을 찾는 맹수에 가까웠다.
6황자는 다른 황자들처럼 세력 불리기에 힘쓰거나 정사에 관여하기는커녕 황궁 변두리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지냈다. 하지만 그의 별칭만큼은 유명했다. 나쁜 피가 섞인 비운의 황자.
그는 황제가 먼 변방을 정벌하러 갔다가 그곳의 이민족 여인을 강제로 취했는데, 그때 우연히 얻은 자식이었다. 이민족의 피를 절반 이어받아 황자 또한 몸집이 크고 머리카락과 눈동자의 색소가 옅었으며 이목구비가 뚜렷했다. 하지만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이 일반적인 제국인들에게 황자의 존재는 그저 기괴하고 거북할 뿐이었다. 더러운 피가 흘러 황실의 격을 더럽히는 잡종이라며 꺼렸다.
이름도 나이도 세간에 거의 알려지지 않아서, 6황자의 존재는 비밀에 싸여 있었다. 청도 지난번 황궁에서 열린 연회에 아버지를 따라 참석하면서 저만치 구석에 서 있는 황자를 얼핏 본 게 처음이었다. 연하게 우려낸 찻물색과 비슷한 눈동자가 인상 깊어서 기억하고 있었다.
하도 키가 훤칠하고 체격이 건장해서 스물을 훌쩍 넘긴 장성한 청년일 줄 알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의외로 생김새에서 앳된 티가 났다. 청은 어쩌면 황자가 자신과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또래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연회에서 오가는 이야기들을 들으러 오신 것이지요? 이번 연회는 주최자가 주최자이니만큼, 황궁의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모두 참석했으니까요.〉
6황자의 친모, 머나먼 이방에서 온 후궁은 몇 년 전 죽었다. 공식적인 사인은 제국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해 풍토병으로 죽은 것이었다. 하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알았다. 이제껏 이역만리의 황궁 한복판에서도 황자를 낳고 키우며 잘만 살았던 후궁이 갑자기 풍토병에 걸려 죽는 게 말도 안 된다는 것을.
그녀의 진짜 사인은 궁중 암투였다. 부패한 귀족들, 뇌물을 받아먹는 데 혈안이 된 관리들, 서로를 찍어 누르고 짓밟으며 위로 올라설 생각에만 사로잡힌 후궁과 황자들. 그들이 6황자의 모친을 죽였다.
〈저자들을 싫어하는 건 전하뿐만이 아닙니다. 권세가 무서워 입을 다물고 머리를 숙이고 있을 뿐이지요. 뭐, 저희 집안도 그렇고…….〉
씁쓸하게 말끝을 흐리던 청이 씩 웃으며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 댔다.
〈저만 믿고 따라오십시오. 들키지 않고 대화를 엿들을 수 있는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 * *
꿈에서 떠밀려 쫓겨나듯 깨어났다. 청은 처절하게 몸서리를 치며 눈을 떴다. 아니, 뜨려고 했다. 하지만 눈앞이 온통 캄캄했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암흑뿐이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왜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인지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덜컥 무서워졌다. 쩍쩍 말라붙은 목구멍에서 소리 없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는 경황없이 마구잡이로 주변을 짚었다. 어설프게 허우적거리는 청의 손끝에 부드러운 이불보가 걸렸다. 모진 고문으로 손톱이 죄다 뽑혀 나가고 없는 피투성이 손가락이 이불 위를 스쳤다. 청은 저도 모르게 불에 덴 듯 흠칫하며 손을 뗐다.
뒤늦게 자신의 눈가를 더듬어 보았다. 도톰한 천이 감겨 눈을 가리고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이유를 깨닫자 무의식적으로 조금 안심했다. 힘이 빠진 손이 이불 위에 도로 툭 떨어졌다.
“이불이 마음에 드는가?”
갑자기 어두컴컴한 시야 너머에서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누구인지 가늠할 필요도 없었다. 이제껏 수도 없이 들어, 꿈에서도 나올 정도로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헉!”
청의 어깨가 육안으로도 보일 만큼 크게 움찔 떨렸다. 산전수전 다 겪어 웬만한 일에는 꿈쩍도 하지 않던 제국의 대장군은 오랜 고초를 겪은 끝에 작은 자극에도 화들짝 놀라게 되었다.
“하나 이 이불이 아무리 마음에 든다 한들 황후의 침상에 깔린 비단 금침보다는 못하겠지. 안 그런가? 그대는 두 군데 모두 누워 봤으니 알 테지.”
“…….”
“예락. 대답해야지?”
청이 버석버석하게 마른 입술을 헛되이 달싹였다. 완전히 혈색을 잃어버린 입술은 참혹하게 부르트고 갈라져 있었다. 큼직한 천에 얼굴의 반이 가려 보이는 부분이라고는 고작해야 코끝과 입매밖에 없는데, 그조차도 만신창이였다.
황제의 인내는 거기까지였다. 방향도 거리도 가늠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휙 하고 공기 가르는 소리가 났다. 철썩! 한쪽 뺨에 불이 일었다. 청은 충격에 고개가 휙 돌아가고도 잠시 동안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닳아 문드러진 정신이 삐걱대며 늦게 반응했다.
“대답.”
딱 숨을 한 번 고를 시간 동안만 뜸을 들였다가, 황제는 가차 없이 다시 손을 들었다. 아까와 정확히 같은 위치, 같은 강도였다. 살갗을 불에 달군 수천 개의 바늘로 지지는 것 같은 통증이 맞은 자리에서부터 번졌다.
“왜 말이 없어. 제대로 누워 보지 않았으니 대답을 못 하겠나? 그래, 침상에 누울 틈도 없이 곧바로 본론에 들어갔나 보군?”
아무런 답이 없자 또다시 손이 날아왔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미리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었다. 시커멓던 시야에 번쩍, 한순간 번개가 쳤다. 간신히 반쯤 일어나 앉은 것이 허무하게, 몸이 너무도 쉬이 허물어졌다.
“흐으…… 큭!”
청은 침상에 도로 고꾸라졌다. 헝클어진 머리채가 이부자리 위에 흐트러졌다. 그는 이내 힘겹게 이불을 짚었다. 이를 악물고 힘을 주어 비틀대며 상체를 세웠다. 황제 앞에서 침상에 드러누워 뒹구는 꼴을 보일 수는 없다는 무의식적인 강박에서였다.
똑같은 곳을 계속 맞은 뺨은 따갑다 못해 쓰렸다. 살갗이 죄다 벗겨진 것 같은 끔찍한 아픔이 뇌리를 잠식했다. 얼굴 반쪽이 화끈화끈하게 부어오르고, 입술이 터졌는지 입가에 핏물이 고였다. 얻어맞은 쪽 귀가 떨어져 나갈 듯 아팠다.
무작정 가해진 폭력은 의지를 빠르게 꺾어 놓았다. 보이지 않는 상대방이 본능적으로 무서워졌다. 언제 어디서 손찌검이 날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몸이 덜덜 떨렸다.
“예락.”
황제가 천 아래 드러난 뺨을 손등으로 툭 건드렸다. 물건 건드리듯 건성으로 가볍게 쳤을 뿐인데, 뜨거운 통증이 확 퍼졌다. 청은 이를 악물며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이제는 아예 입을 다물기로 작정했나? 아까 그 기세는 어디 가고. 그대가 뭐라고 했더라. 황후의 자태가 고와서 내가 부러웠다고?”
황제는 기묘하게 뒤틀린 어조로 청의 말을 되풀이했다. 우스꽝스러운 농담을 하듯 산뜻하게 들뜬 음성 아래에 음습한 분노가 깔려 있었다.
“저는 이미 죽을 각오를 했습니다. 더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그대가 죽인 이가 누군지는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건가?”
“…….”
“그대의 칼질에 가슴팍이 쪼개진 이는 내 반려였어. 이 제국의 황후였고, 온 나라를 통틀어 가장 고귀한 음인이었지. 그런 이를 죽여 놓고, 고작 그대의 목숨으로 죗값을 갚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황제가 피식 웃었다.
“너 따위가?”
어둠 속에서 느닷없이 다가온 단단한 손이 청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의 목덜미를 느릿하게 쓰다듬던 황후의 곱고 가느다란 손가락과 달리, 황제의 손힘은 무자비했다. 본능적으로 상대를 밀어내려 바르작거리던 청의 손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 앞이 보이지 않아 전혀 반항할 수 없었다. 아니, 앞이 보였다 할지라도 반항하지 못했을 터였다.
새카맣던 시야가 점점 하얗게 물들어 갈 때쯤 황제가 손을 툭 놓았다. 청은 침상에 쓰러져 괴롭게 헐떡였다. 목구멍으로 공기가 급하게 흘러들어 갔다. 죽음을 각오했다 말한 주제에, 막혀 있던 기도가 풀리자 생존 본능에 따라 필사적으로 숨을 몰아쉰다. 스스로에게 환멸이 났다.
“죽이지 않아. 그대가 죽여 달라 읍소하더라도, 결코 그리하지 않을 거야. 그대에겐 그럴 가치가 없으니까.”
목을 움켜쥐었다 놓은 자리에 금세 울긋불긋하게 피멍이 들었다. 몇 번이고 사정없이 내려친 뺨도 마찬가지로 시뻘겋게 핏기가 올랐다. 황제는 엉망이 된 청의 모습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고작 며칠 고문당한 것 가지고 이렇게 망가진 주제에, 목을 졸라도 저항조차 제대로 못 할 정도로 무력한 주제에. 감히 자신의 앞에서 황후를 연모한다고 지껄인 청이 괘씸했다. 살의인지 다른 감정인지 알 수 없는 충동이 왈칵 치밀어 올랐다. 그냥 진짜 죽일까.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다 사라졌다.
“설영에게 뭘 어떻게 해 줬지?”
그는 청에게 손을 뻗었다. 얼굴에 다짜고짜 상대의 손이 닿자, 또 뺨을 때릴 줄 알았는지 청이 반사적으로 몸을 확 움츠렸다. 학습된 공포였다.
하지만 황제는 그를 후려갈기는 대신 아래로 내려갔다. 참혹한 몰골이 된 목을 지나 한껏 너덜너덜해진 홑옷의 옷깃 사이로 손을 밀어 넣었다. 시각이 차단된 탓에 촉각이 예민하게 날을 세웠다. 뱀처럼 스르르 기어들어 온 황제의 손끝이 속살을 건드렸다.
“폐하!”
청이 경악하여 처음으로 큰 소리를 냈다.
“그는 여길 만져 주면 좋아했는데.”
그는 작살에 꿰인 물고기처럼 파드득 몸서리를 쳤다. 황제는 그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손에 닿는 유두를 가볍게 비틀었다.
“조금만 건드리면 발정 난 고양이처럼 가냘픈 소리로 울어 대지 않던가? 그 모습이 제법 봐 줄 만했거든. 물론 그대도 직접 보았겠지?”
얇은 옷자락 아래 가려진 청의 가슴팍에는 지하 감옥에 갇혀 고문을 당하면서 생긴 자잘한 생채기가 수없이 있었다. 황제가 그중 하나를 가차 없이 후벼 팠다.
“그, 만…… 흐악!”
간신히 피만 멎은 정도였던 상처에서 도로 피가 배어났다. 황제는 손가락에 엷게 묻은 청의 피를 핥았다. 가늘게 입맛을 다시며 청을 내려다보는 얼굴만큼은 몹시도 청아했다.
고통에 시달리느라 반항이 한풀 수그러들었다. 황제는 청의 유두를 문지르며 허리끈을 풀었다. 옷자락이 침상 위로 흘러내려 상처투성이가 된 맨상체가 드러났다. 10여 년 전만 해도 하얗고 말랑말랑한 게 곱게 자란 티가 물씬 나더니, 이젠 저도 장군이랍시고 제법 근육이 붙어 있었다.
몇 번 굴리고 쓸어 주자 연한 색의 유두가 서서히 일어섰다. 눈을 가린 두꺼운 천 아래로 청이 이를 악무는 게 보였다. 모욕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황제는 딱딱해진 유두를 손끝으로 튕기며 무심하게 비난했다.
“천박하기 짝이 없군. 대역 죄인 주제에 벌을 받으면서 젖꼭지를 세우고. 이런 자를 대장군이라고 따랐을 그대 휘하의 병사들이 불쌍한데. 환열기를 맞은 음인보다 더 음탕하게 구니. 그래, 그러니 발정 난 짐승처럼 앞뒤 분간 못 하고 황후에게 달려들었겠지.”
“흐윽…….”
“벌려.”
황제는 그의 무릎을 툭 치며 명령했다. 반쯤 풀어 헤쳐진 옷을 간신히 걸치고 누워 있던 청이 눈에 띄게 흠칫했다.
“무, 무슨.”
“확인하려고. 그대가 황후와 대체 어디까지 붙어먹었는지. 겉으로만 더듬은 건지, 맨살을 물고 빨았는지, 아니면 배까지 맞췄는지……. 살펴봐야 하지 않겠나.”
청은 그제야 황제가 요구하는 바를 깨달았다. 그는 침상 위를 더듬어 흐트러진 옷자락을 움켜쥐고 절박하게 애원했다.
“제가 잘못, 잘못했습니다.”
“벌리라니까.”
“제발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죽을죄를 지었…….”
철썩! 뺨을 때리는 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또다시 먼젓번과 같은 곳이었다. 천을 끌어당겨 몸을 어설프게 가리려던 청의 손에 힘이 풀렸다.
곧 옷자락이 넓게 벌어지고 속바지 끈이 풀렸다. 청의 몸이 황제의 눈앞에 낱낱이 드러났다. 끔찍하게 수치스러웠다. 눈이 가려져 있는데도 상상되었다. 고깃덩이를 보듯 무감정하게 그를 훑고 있을 황제의 시선이.
“이런 꼴이 되고도 자백을 번복하겠단 말은 끝내 하지 않는군. 참으로 지고지순한 연정이야.”
황제의 손이 안쓰러울 정도로 부들부들 떨리는 허벅지 사이로 파고들어 흥분의 기미 없이 축 늘어져 있는 성기를 쥐었다. 손아귀 안에 들어차는 살덩이를 천천히 주무르고 문질렀다.
“큭…….”
자의가 아닌 쾌감이 척추를 타고 올랐다. 청은 고개를 돌려 침상에 얼굴을 파묻었다. 입 안 살을 씹고 혀를 깨물며 모멸감을 간신히 참았다.
청은 황제가 자신을 살려 두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당연한 추리였다. 감히 황후에게 칼질을 한 자를 살려 두는 게 더 이상했으니까. 격노한 황제의 칼에 당장 숨이 끊어지거나 끔찍한 고문을 당한 끝에 목이 잘려 황성 앞에 걸리거나, 둘 중 하나일 거라 여겼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처형장으로 끌려갈 줄 알았던 그는 눈을 가린 채 이름 모를 장소에 끌려와 있었다. 몸에 닿는 이불은 부드러웠고, 감옥에 항상 진동하던 썩은 냄새와 녹슨 쇠 냄새는 조금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이 상황이 더 무서웠다. 황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자신을 어떻게 하려는 건지 알 수 없으니 한층 더 두렵고 불안했다. 죗값을 치러야 한다면 차라리 지금 목이 날아가는 게 나았다.
“이 후궁을 맞아들여라, 저 후궁의 품계를 높여라, 비빈들에게 더 자상히 대해 주어라. 내겐 그리도 잔소리를 하면서 본인은 반려 하나 들이지 않더니, 이제야 알겠군. 그때부터 이미 황후에게 딴마음을 품고 있어서 그랬던 게지?”
“죽여 주십시오…….”
“죽이긴 뭘 죽여. 그대가 지금 내게 뭔가를 요구할 수 있는 처지라고 생각하나?”
황제는 청의 애원을 심드렁하게 묵살했다.
“이 정도는 각오했어야지. 제국의 황제와 구멍 동서가 되려면.”
성기를 얼마간 만졌는데도 청은 여전히 뻣뻣이 굳어 있었다. 황제가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뒤로 액을 줄줄 흘리며 신음하던 황후와는 확연히 다른 반응이었다. 물론 그는 음인이었고, 황제가 그를 찾는 것은 환열기 때뿐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황제는 곧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따뜻하고 큰 손이 힘 있게 허벅지를 잡아 벌렸다. 다리를 찍어 눌러 다시 움츠리지 못하게 고정해 놓고 엉덩이 사이로 손가락을 불쑥 밀어 넣었다. 길고 단단한 손가락 하나가 메마른 입구를 비집고 억지로 들어갔다.
“헉!”
처음 느끼는 종류의 통증이었다. 손톱이 모조리 뽑혀 나가고 없는 데다 손바닥에 관통상까지 입어 만신창이가 된 청의 손이 차마 황제를 붙잡지는 못하고 침상 위를 처절하게 기었다. 말갛던 침구 위에 드문드문 핏자국이 묻었다.
“그간 내 앞에서 본심을 숨기느라 힘들었겠군. 내가 황후를 찾을 때마다 질투가 나 몹시도 괴로웠을 텐데, 그동안 대체 어찌 참았나?”
“폐하, 큭, 제발……!”
“황후가 마음에 들었나? 그런 거면 진작 말하지 그랬어. 그럼 그대에게 황후를 내주었을 텐데. 나는 그대가 원하는 거라면 무엇이든지 하사할 수 있었어. 그대가 내 칼을 가졌듯이.”
“…….”
청은 스스로의 귀를 의심했다.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황후를 주겠다니? 정상의 범위를 한참 벗어난 말이었다. 그를 빤히 응시하며 반응을 관찰하던 황제가 빙긋 웃었다.
“농담이야.”
손가락 하나도 받아들이기 힘들 만큼 좁고 뻑뻑한 곳을 마구잡이로 들쑤시다가, 황제는 손을 쑥 빼냈다. 다음 순간 그 자리에 다른 것이 와 닿았다. 미처 반응할 새도 없었다. 골반이 강제로 벌어지고 커다란 것이 틀어박혔다.
몸이 두 개로 찢어졌다. 아니, 찢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상처투성이가 된 청의 발끝이 충격으로 확 치켜 올라갔다가 다음 순간 툭 떨어졌다.
“……!”
차마 소리가 되지 못한 비명이 터졌다. 액이 나오지도 않았고 윤활유를 바르지도 않았던 탓에 구멍이 쉽사리 찢어졌다. 성기를 감싼 벌건 속살에 피가 송골송골 고였다. 이불 위에 새빨간 핏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황제는 청의 허리를 잡고 이를 악물었다. 한 번, 그리고 다시 한번. 힘을 주어 턱턱 처박을 때마다 피에 젖은 성기가 조금씩 억지로 밀고 들어갔다. 한 번도 타인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았던 속살이 힘겹게 벌어졌다.
“아악, 흐아악!”
“예락, 이 정도로 아파하면 안 되지. 설영은 그대의 칼에 베이며 훨씬 더 아팠을 텐데.”
“흐, 윽, 허억, 아, 아…….”
파르르 떨리는 입술 사이로 숨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빠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불을 쥐어뜯느라 간신히 출혈이 멎었던 손의 상처에서 다시 고름 섞인 피가 흘렀다.
“하아.”
황제는 한숨을 내쉬고 팔을 뻗었다. 침상 옆에 눈에 익은 칼이 놓여 있었다. 줄곧 황제의 소유였다가 얼마 전 청에게 넘겨주었던, 그리고 황후의 가슴팍을 갈랐던 보검이었다. 한때 흠뻑 묻었던 피가 지금은 깨끗하게 닦여 있었다.
이윽고 칭칭 감겨 시각을 완전히 차단한 천 아래로 차가운 것이 불쑥 밀고 들어왔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칼날이었다. 온통 시커멓기만 하던 시야가 한쪽 구석에서부터 천천히 밝아졌다. 예리한 칼날이 사각사각 천을 잘라 내는 동안 청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자칫 잘못 움직였다간 칼끝에 눈꺼풀이 베일 것 같았다.
천 안쪽이 식은땀과 눈물로 척척히 젖어 있었다. 그 아래 드러난 민얼굴도 마찬가지였다. 안색이 몹시 초췌한 데다 핏자국이며 멍으로 엉망이었다. 황제는 청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움켜쥐어 자신을 향하게 만들었다.
“눈 떠.”
황제는 채근하듯 성기를 거세게 처넣었다. 오장육부를 짓이기는 충격이 배 속을 뒤흔들었다. 후들후들 떨리는 허벅지가 차마 황제에게 닿을 수 없어 허공을 방황했다.
청이 헐떡이며 간신히 눈을 떴다. 고문의 여파가 아직 남은 탓에 시야가 흐렸다. 그 가운데 어른어른 황제의 얼굴이 보였다. 피범벅에 산발이 된 청과 달리, 황제는 이마 위로 머리카락 몇 올이 흐트러져 내려왔을 뿐 언제나처럼 단정했다. 단아하게 드리운 긴 속눈썹 아래 연한 색 눈동자가 그를 집요하게 응시했다.
“아윽, 흐, 악!”
폭력적인 정사가 이어졌다. 아니, 정사라는 말을 붙이기에는 너무도 잔혹했다. 황제가 퍽 밀어붙일 때마다 숨이 막혔다. 입 속에 피 맛이 맴돌고 헛구역질이 났다. 침상 위쪽으로 몸이 콱콱 밀려 올라가며 구멍에 반쯤 박힌 거대한 성기가 안을 들쑤셨다. 한계까지 몰린 청이 이성을 잃고 빌었다.
“그만, 제발 그만…….”
한계까지 벌어진 구멍 안에 물려 있던 기둥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내장이 죄다 뽑혀 딸려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뒤로 물러섰던 성기가 다시 콱 틀어박혔다. 숨이 턱 막히고 배 속이 들썩였다. 골반을 부수고 내장을 짓이길 기세로 밀어붙여도 고작 굵직한 성기의 절반 정도를 삼키는 게 한계였다.
청이 자신도 모르게 상대를 밀어내려 손을 뻗었다. 피투성이가 된 손끝이 뿌드득 길게 미끄러지며 옷소매 아래로 드러난 황제의 팔뚝에 여러 줄의 핏자국을 남겼다. 황제는 그 손을 도중에 잡아챘다. 손목뼈를 부러뜨릴 것 같은 악력이었다.
그는 피와 진물로 얼룩져 흉한 꼴이 된 손을 입가에 댔다. 청의 손끝이 공포로 가늘게 떨렸다. 하지만 황제는 잔인하게 보복하는 대신 손가락을 입술 사이에 물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살갗이 거북하지도 않은지, 망설임 없이 손에 묻은 것들을 빨아 먹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황제는 분풀이를 하듯 청의 목덜미를 깨물고 짓씹었다. 상처에서 새어 나온 피를 핥으며 흉흉하게 발기한 성기를 다시금 밀어 넣었다. 메마른 내벽이 처절하게 경련하며 억지로 안을 벌리고 쑤셔 박히는 기둥을 조였다.
탄탄한 근육이 잡힌 몸은 뻣뻣하기 짝이 없었다. 여인처럼 애액이 흐르지도 않았고 음인처럼 요염한 향이 풍기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황제는 더할 나위 없이 흥분했다. 감히 자신을 배반한 역적을 벌하고자 무자비하게 성기를 퍽퍽 처넣으면서, 욕망으로 눈앞이 뻘겋게 물들고 갈증이 났다.
피와 땀에 젖은 청의 목덜미에 머리카락이 들러붙었다. 황제는 손끝으로 머리칼을 살살 쓸어 넘기고 자신이 물어뜯어 놓은 자리에 입술을 눌렀다. 곧 황제의 입가에도 꽃물처럼 희미하게 피가 묻었다.
“흐…… 하아, 아, 으윽…….”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끔찍한 고통을 견디다 못해 청의 몸에 점차 힘이 빠졌다. 황제가 움직이는 대로 흔들리며 정신이 가물가물하게 흐려졌다.
“청아, 네 분수를 알아야지. 이제 너한텐 나밖에 없다는 걸 잊지 말았어야지.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황제는 그저 살포시 웃었다. 어지러이 소용돌이치며 어두워지는 의식 너머로, 나긋나긋한 속삭임이 흘러들어 왔다.
“그러게 왜 내가 이렇게까지 하게 만들어.”
* * *
청이 눈을 떴을 때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번에는 천으로 눈이 가려져 있지도 않았다. 컴컴한 암흑 속에 갇혔던 며칠 동안 시력이 상했는지 시야가 흐렸지만, 그럭저럭 사물을 분간할 정도는 되었다.
그는 멍하니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너덜너덜해져 차마 못 봐 줄 꼴이던 의복이 갈아입혀진 채였다. 양손에 흰 붕대가 칭칭 감기고, 온갖 피와 얼룩으로 엉망이 되었던 살갗 또한 깨끗했다.
뒤늦게 가장 근본적인 의문에 생각이 닿았다. 여기는 어디일까. 청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주위를 살폈다. 별 특징 없는 공간이었다. 텅 빈 목조 건물 안에는 침상과 서랍 같은 최소한의 가구만 있을 뿐, 장식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었다. 죄인을 가두는 곳치고는 정갈했지만 그뿐이었다.
굳게 닫힌 덧문에 문득 시선이 갔다. 밖을, 창밖의 광경을 살피면 단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청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끌고 절뚝이며 창가로 걸어갔다. 보통의 건강한 사람이었다면 두세 걸음 만에 성큼성큼 다가갔을 거리를, 식은땀을 흘리며 한참이나 애를 쓴 끝에 간신히 도달했다.
하지만 무심코 견고한 덧문에 손을 얹는 순간 날카로운 통증이 확 일었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망가진 손끝이 붕대 아래에서 고통을 호소했다.
“아윽!”
청이 크게 비틀거렸다. 창문 옆의 벽에 어깨를 쿵 소리가 나도록 부딪치고 나서야 간신히 몸을 기대어 중심을 잡았다. 무자비한 충격이 뇌리를 뒤흔들었다.
“하…….”
그는 피딱지가 앉은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삼켰다. 자괴감으로 입맛이 썼다. 이렇게라도 숨이 붙어 있음을 다행이라 여겨야 하는 것일까. 황후를 죽인 죄인의 몸으로 살아남으면 무엇 하는가,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는 반병신 꼴이 되었는데.
제 혈육을 자기 손으로 베었다. 수없이 많은 피를 묻혀 가며 황제를 옥좌에 올렸다. 제국 곳곳에 뿌리내린 선황의 악습을 몰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마지막까지 모든 오명을 혼자 떠안으려 했다. 그 결과가 이거였다.
이제 청에겐 연인도 가족도 친척도, 하다못해 툭 터놓고 지낼 수 있는 친구조차도 남지 않았다. 황제의 오른팔로 사는 게 그의 유일한 쓸모이자 사명이었다. 그의 인생에서 그가 가진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이런 몰골로는 금군 대장군은커녕 금군 막사의 마구간지기 노릇도 못 할 게 분명했다.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 무용지물이 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차라리 죽는 게…….
청은 가만히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한참을 그대로 서 있다가, 엄습하는 절망으로부터 도망치려는 것처럼 힘겹게 걸음을 떼어 놓았다. 걸을 때마다 척추와 골반을 죄다 으스러뜨리는 것 같은 아픔이 퍼졌다.
“허억, 헉.”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무작정 문밖으로 향했다. 아무런 손질도 하지 않은 머리채를 가슴께에 늘어뜨리고 창백한 얼굴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 여밈이 느슨한 침의 한 벌만 걸친 차림으로 한 발짝 한 발짝 나아갔다.
무언가 이상했다. 황량하게 비어 있는 전각 안을 걷는 동안 다른 사람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황궁의 모든 건물에는 항상 사람의 기척이 있기 마련이었다. 죄인을 감시하는 간수든, 그를 벌하러 온 집행관이든, 시중을 들 궁인이든……. 누군가는 반드시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할 터인데.
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불길한 공포가 목뒤를 타고 찌르르 흘러내렸다. 청은 말을 듣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 걸음을 서둘렀다.
“누구 없…… 쿨럭!”
정문을 나서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문장을 끝맺기도 전에 기침이 터졌다. 청은 문틀에 기대어 연거푸 기침을 했다. 이러다 피를 토하지는 않을까 싶을 정도로 괴롭게. 잠시 후에 간신히 기침이 멎었다. 청은 옷소매로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목도하고 얼어붙었다.
“…….”
아무도 없는 적막한 뜰. 널찍한 마당을 따라, 사람 키보다 훌쩍 큰 가시나무 울타리가 둘러쳐 있었다. 전각을 빙 둘러싼 울타리에 출구는 없었다. 드나들 수 있는 문도 틈도 없었다. 울타리를 비집고 나가기는커녕,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빼곡히 돋은 가시에 살이 짓이겨질 듯 흉악한 기세를 자랑했다.
여기는 또 다른 감옥이었다. 황제가 그에게 직접 하사한. 이제 네게는 더 이상 쓸모가 없다고, 너는 내가 직접 죽일 가치조차 없으니 여기서 홀로 비참한 최후를 맞으라고. 황제의 무감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아…….”
절망인지 허탈함인지 모를 감정이 정수리에서부터 차갑게 흘러내렸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청은 그만 제자리에 스르르 주저앉고 말았다.
* 위리안치(圍籬安置) :
중죄인에 대한 유배형 중 하나로, 가시가 돋친 울타리로 죄인이 머무는 집을 감싸 외부와 차단하고 달아나지 못하도록 하는 형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