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림심연(如臨深淵)
여러 명이 앉을 수 있는 커다란 탁자 위에 큼직한 화선지가 펼쳐졌다. 술병이며 안주 접시며, 푸짐하게 차려져 있던 주안상이 저 구석으로 밀렸다.
들뜬 기색으로 기웃대던 사람들이 잽싸게 물러나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청이 길게 늘어진 비단 옷소매를 걷어 올리며 자연스럽게 그 사이에 섰다. 씩 웃으며 돌아보는 얼굴에 술기운으로 은은하게 홍조가 올라 있었다.
〈뭘 그려 드릴까?〉
식당의 주인이 멋쩍게 웃었다. 그는 곁에 선 아내를 애정 어린 손길로 끌어안았다. 수줍게 남편의 어깨에 기대는 여인의 배가 둥그스름하게 부풀어 있었다.
〈청포도로 부탁드립니다. 우리 둘째가 이번 여름에 태어날 예정이라.〉
다산과 건강·자손 번성을 상징하는 포도 덩굴. 줄기에 주렁주렁 달린 알찬 열매를 떠올린 청이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왁자지껄한 환호성이 터졌다.
붓도 화선지도 염료도 그리 고급품이 아니었다. 그러나 청은 거리낌 없이 붓에 물감을 듬뿍 찍어 종이 위에 가져갔다. 흠뻑 젖은 붓 끝에서 녹색 물감 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즉흥적이다 못해 무모하게까지 보이는 행동이었다. 저 도련님이 취한 나머지 인사불성이 되어 종이를 망치는 건가 싶어 몇몇 구경꾼들이 미미하게 인상을 썼다.
그러나 그다음 순간, 청은 혀끝으로 입술을 슬쩍 핥으며 과감하게 붓을 놀렸다. 텅 비어 있던 종이에 녹색 포도 알이 하나둘 생겨났다. 파릇파릇한 잎사귀가 여러 개 달리고 덩굴이 사방으로 뻗었다. 청은 하나로 느슨하게 묶어 늘어뜨린 머리채가 어깨 앞으로 풀썩 떨어지는 것도 모른 채 집중했다. 거나하게 술에 취해 큰 소리로 떠들어 대던 관중들 또한 어느새 숨을 죽였다.
탁자를 가득 메울 만큼 큰 종이에 순식간에 탐스러운 청포도 덩굴이 그려졌다. 술에 취한 채 손 가는 대로 그렸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고 수려했다. 종이에 손을 뻗으면 금방이라도 탱글탱글한 포도 알을 따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붓놀림을 마친 청이 붓을 내려놓고 옆에 있던 술잔을 들어 쭉 들이켤 때까지도 모두가 입만 떡 벌리고 있었다. 경탄 섞인 정적이 가게 안을 채웠다.
〈이 정도면 술값은 되었소?〉
〈되다마다요. 차고도 넘칩니다. 대체 이 은혜를 어찌…….〉
〈술 마신 값을 치른 것뿐인데, 은혜는 무슨 은혜. 저 그림은 주인장 마음대로 내다 팔아도 좋으니, 돈 아끼지 말고 안주인 몸보신이나 제대로 시켜 주시게.〉
〈예, 공자님. 부디 살펴 가십시오!〉
뺨이 발갛게 달아오른 청이 대답 대신 생긋이 웃었다. 가게 주인은 말을 잇지 못하고 그저 허리만 꾸벅꾸벅 숙였다. 술값은커녕 저 그림을 팔면 족히 평민들의 몇 달 치 생활비가 나올 터였다. 싸구려 재료로 단숨에 그린 데다 낙관도 없었지만, 청의 그림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저……. 오래 기다리셨지요. 누를 끼쳐 송구합니다. 이만 가시겠습니까?〉
탁자 곁을 지나쳐 문간으로 걸어간 청이 누군가에게 말을 걸었다. 무심코 그쪽을 바라본 군중들이 일제히 흠칫했다. 시선 끝에 키가 큰 남자가 있었다.
그는 훤칠한 체격에 얼굴이 희었다. 하지만 청이 가진 것처럼 귀족 도련님 특유의 유들유들한 분위기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에게선 오히려 묘한 음습함이 느껴졌다. 고개를 비스듬히 숙여 그늘이 진 얼굴에, 기이할 정도로 연한 색깔의 눈동자만이 형형하게 빛났다.
남자가 스르르 고개를 들었다. 그는 풀숲에 몸을 숨기고 사냥감을 찾는 맹수 같은 눈으로 실내를 느릿하게 훑어본 후, 청이 정중하게 열어 주는 문을 통해 나갔다.
* * *
황도의 저잣거리는 언제나처럼 붐볐다. 노점의 상인들이 목이 터져라 호객 행위를 하고, 널찍한 길거리에 수많은 행인들이 지나갔다. 상단의 마차들이 지나가며 대로변 가득 뿌연 흙먼지를 일으켰다. 온갖 물자를 가득 실은 수십 대의 마차가 연이어 지나가는 장면은 장관이었다. 두 남자는 갓길에 선 채 잠시 마차 행렬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묵묵히 앞만 응시하다 말고 황자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 그림을 금전으로 바꾸었으면, 그깟 싸구려 술 따윈 궤짝으로 살 수 있었을 텐데.〉
〈압니다.〉
〈한데 왜.〉
〈이 거리에 저만큼 양심적인 가격으로 장사하는 곳이 또 없거든요. 저기마저 문을 닫게 되면 서민들은 갈 곳이 없습니다. 이대로 계속 가게를 꾸려 달라고 후원하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아까까지 세상 물정 모르는 한량 행세를 하며 방글방글 웃고만 있던 것이 거짓말처럼, 청은 씁쓸해하는 기색으로 목소리를 낮추었다.
〈지금 황도에서 장사치들에게 걷는 세금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자그마치 8할입니다.〉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황실에서 공식적인 칙령으로 선포한 세율은 4할이었다. 청의 말대로라면 황도의 상인들은 열 냥을 벌면 그중 여덟 냥을 세금으로 바쳐야 했다.
〈이 거리에서 장사를 하는 이들 모두가 그만큼 착취당하고 있습니다. 부당하다 항의해 봤자 어쩔 수 없습니다. 내지 않으면 권력자들의 눈 밖에 나고, 눈 밖에 나면 더 이상 밥벌이를 못 하게 되니까요.〉
〈…….〉
〈그러나 아까 그 식당은 8할의 세금을 적용받지 않습니다. 선황 시절에 황실과 연이 닿은 적이 있었거든요. 백성들 고혈 빨아먹기에 여념이 없는 관리들도 저 집은 못 건드립니다. 그래서 그만큼 싼값만 받고도 장사할 수 있는 거고요.〉
두꺼운 벽과 문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구중궁궐에서만 지내는 황족들은 결코 알지 못하는 이야기였다.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허구한 날 저잣거리에 나와 여기저기 휘젓고 다니길 좋아하는 청 같은 괴짜가 아니면.
〈그나저나 전하, 제가 밖에선 전하를 어찌 불러야 합니까?〉
황자는 말없이 돌아보았다. 위에서 깔아 누르는 듯한 서늘한 시선으로 청을 향했다.
청은 황자를 처음 보고 길이 들지 않은 맹수 같다 여겼다. 과연 그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는 황족답지 않게 무뚝뚝하고 말이 서툴렀다. 타인을 극도로 경계했고, 때때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잔혹성을 드러냈다. 아무리 혈통 때문에 냉대를 받으며 자랐다지만 이렇게까지 날이 서 있을 줄은 몰랐다.
처음엔 호기심이었다. 말로만 듣던 그 비운의 황자가 어떤 인물인지 알고 싶었다. 그다음엔 호감이 생겼다. 청은 누구를 상대로나 쉽게 좋은 점을 찾아내고 금세 서글서글하게 구는 성격이었으므로. 그리고……. 조금쯤은 연민도 들었다.
〈6황자 전하라 부를 순 없지 않겠습니까. 아까 식당에서도, 그리 불렀다간 한바탕 난리가 났겠지요. 그렇다고 매번 ‘저기’, ‘저’ 하는 식으로 얼버무릴 수도 없고.〉
〈그럼 뭐라 부르려고.〉
청이 황자의 눈치를 살살 보며 조심스럽게 던졌다.
〈형님?〉
황자의 미간이 스산하게 찌푸려졌다. 청은 재빨리 고쳐 말했다.
〈도련님? 나리? ……주인님?〉
〈그냥 이름으로 불러.〉
〈예? 아니 될 말씀입니다. 황족의 이름을 어찌 감히.〉
〈나 같은 반편이 황족에게 피휘(避諱)[2]가 가당키나 한가?〉
그가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덤덤하게 말했다. 청의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그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누군가 청의 품에 느닷없이 달려들었다. 입을 꾹 다문 황자의 눈이 스르르 가늘어졌다.
〈지 공자님! 근래엔 어찌하여 찾아오시지 않으셨어요? 도아는 공자님 보기만 기다렸어요. 어머니 아버지는 공자님께서 바쁘셔서 그런 거라 하였는데.〉
청의 허리쯤에나 올까 한 사내아이였다. 이목구비가 여리고 몸이 꽃가지처럼 가냘파서, 바지 차림이 아니었다면 여아로 오해할 법도 했다.
〈공자님, 저…….〉
아이가 머뭇대며 청의 옷자락을 쥐고 그의 뒤에 숨었다. 옆에 선 황자를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그는 흠잡을 데 없이 잘생겼지만, 체격이 크고 표정이 지나치게 없어서 그런지 어딘가 섬뜩하고 꺼림칙한 분위기가 있었다. 게다가 아이는 음인이고 황자는 양인이니, 평인인 청은 느낄 수 없는 뭔가가 있으리라 짐작했다.
황자의 눈을 마주한 아이가 겁을 먹고 울먹이기 전에, 청은 잽싸게 아이를 안아 올렸다.
〈엇차. 그래, 도아야. 말마따나 내가 최근에 좀 공사다망하였느니라.〉
〈한데 저자에 소문이 파다한걸요. 지 공자님께서 매일같이 여기저기 바깥 놀음을 다니신다고.〉
맞는 말이라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뜨끔한 청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못 본 새에 좋은 소식이 있더구나. 곧 동생이 생긴다지?〉
〈네에. 동생이 태어나면 도아는 형님이 되어요. 저도 이제 다 컸으니, 이번에야말로 공자님이랑 혼인할 거예요.〉
품에 안긴 아이가 청의 머리채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천진하고 당돌하기 그지없었다. 고사리 같은 손에서 긴 흑발이 사르르 흘러내리는 것도 모르고 잠시 얼을 빼놓고 있던 청이 한 박자 늦게 물었다.
〈혼인?〉
〈책에서도 찾아보고, 어른들 하시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도아는 음인이니까 같은 사내끼리도 혼인할 수 있대요.〉
〈하하. 네가 관례를 치르고 나면, 그때도 네 마음이 변치 않는다면 한번 고려해 보마.〉
〈농이 아니시지요?〉
〈그때가 되면 나는 거의 서른일 테고, 네 주위엔 젊고 훤칠한 또래들이 많을 텐데. 내가 눈에 들어오기나 하겠느냐?〉
〈지 공자님은 서른 살이 되어도, 마흔 살이 되어도 멋지실 거예요. 이 나라에서 공자님이 제일로 잘생기셨어요.〉
옆에 우뚝 선 남자가 황족이라는 것을 모르기에 할 수 있는, 어린아이답게 순진무구한 말이었다. 청이 쓰게 웃었다.
〈말은 참으로 번지르르하구나.〉
〈참말이에요!〉
〈그래, 그래. 잘 알았다. 많이 먹고 많이 자고 많이 놀고, 쑥쑥 크기나 하거라.〉
청은 몸을 낮추어 아이를 바닥에 내려 주었다. 아이는 청을 향해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주저한 끝에 결국 황자에게도 어설프게 허리를 숙였다. 식당 문으로 들어가려다 휙 뒤돌아 쪼르르 뛰어와서는 청의 뺨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하여 눈만 깜빡이던 청은 이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눈매가 한껏 휘고 뺨에 옅은 볼우물이 패도록 소리 내어 웃다가, 얼굴이 새빨개진 채 도망치는 아이에게 유들유들하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주인 부부의 첫째 아이입니다. 갓 걸음마를 떼던 시절부터 봤는데, 금세 저렇게 자랐군요. 아직 어려서 그런지 엉뚱한 행동을 종종 합니다.〉
청이 아직 웃음기가 남아 부드럽게 풀린 낯으로 설명했다. 그의 말을 듣긴 한 건지, 황자는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얼굴로 아이가 들어간 식당 문을 빤히 응시했다.
* * *
눈앞에 새까맣게 타 버린 폐허가 있었다. 잿더미가 되어 부스러진 잔해들 사이에 드문드문 접시며 의자 같은 집기가 보였다.
〈…….〉
청은 그곳에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며칠 전만 해도 시끌벅적한 웃음소리와 음식 만드는 냄새가 가득했던 곳에, 지금은 매캐한 탄내만이 남았다.
〈아무 잘못 없는 이들입니다. 선행을 베풀면 베풀었지, 악행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순박한 백성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하루아침에 갑자기…….〉
〈그래, 물론 이자들은 잘못이 없지. 하지만 다른 이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뒤에서 덤덤한 목소리가 들렸다. 무심결에 돌아보았다.
〈이 식당만은 부당한 세금을 내지 않았다지? 그래서 근방의 다른 곳에 비해 음식을 값싸게 팔 수 있는 것이고.〉
〈설마…….〉
〈상인들 사이에 몇 번 말이 돌고 나니 그다음은 일사천리더군.〉
서민들에게는 권세를 거머쥔 탐관오리들에게 저항할 힘이 없었다. 그들은 비뚤어진 분노를 다른 서민에게로 돌렸다. 똑같이 불행의 구렁텅이를 뒹구는 와중에, 그나마 조금이라도 더 나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잡아 아득바득 끌어내리려 했다.
〈설마, 전하께서……. 하셨습니까?〉
황자는 대답 대신 나른하게 웃었다. 그가 웃는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야성만이 존재하는 짐승처럼 표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던 얼굴이 순식간에 꽃답게 피어났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에 찬사가 나오기는커녕, 절망으로 몸이 차갑게 굳고 소름이 끼쳤다.
〈대체 왜…….〉
황자를 향해 한 발짝 다가가려는 청을 누군가 뒤에서 붙잡았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새까만 손이, 아니, 손으로 추정되는 형체가 그의 옷자락을 붙들고 있었다.
〈헉.〉
청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시커멓게 타서 숯덩이가 되어 버린 어린아이가 뒤뚱뒤뚱 걸어 그를 쫓았다.
〈공자님…….〉
〈도, 도아야.〉
아이에게서 탄내가 진동했다. 눌어붙은 살점이며 진물로 얼굴이 알아볼 수 없이 일그러진 가운데, 목이 졸린 것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왜 밤중에 집에 불을 지르셨어요? 왜 우리 가족을 죽였어요?〉
〈미안……. 미안하다, 내가, 내가 다 잘못했어. 미안해.〉
청은 아이를 피해 허겁지겁 뒤로 물러나다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질끈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으며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에게 닿은 것은 뜨거운 불길에 타 버린 어린아이의 손이 아닌, 차갑고 가느다란 섬섬옥수였다.
〈대장군.〉
앳된 티가 가시지 않은 소년의 미성이 속삭였다. 청은 소스라치게 놀라 무심코 눈을 뜨고야 말았다.
〈땅속은 너무 춥습니다. 여긴 너무도 추워요.〉
핏기가 모두 빠져 퍼렇다 못해 시커멓게 굳어 버린 황후의 얼굴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헐렁한 수의 옷깃 너머로 참혹하게 세로로 쩍 갈라진 가슴팍이 보였다.
〈저를 왜 죽이셨나요? 제게 무슨 죄가 있다고…….〉
황후가 잿빛 입술을 달싹였다. 그 틈에서부터 쩌저적 균열이 가며 곰팡이며 구더기가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흐, 으윽. 헉!”
청은 발작적으로 몸서리를 치며 벌떡 일어났다. 제대로 넘어가지 못한 숨이 기도에 턱턱 걸리고 몸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식은땀에 흠뻑 젖은 머리채가 드리워져 얼굴을 가렸다. 그는 상체를 푹 숙인 채 입을 틀어막고 절박하게 헛구역질을 했다.
“우욱……!”
잠든 청의 곁에서 지필묵을 늘어놓고 약방문을 쓰고 있던 의원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입을 벙긋거렸다. 그는 혼비백산하여 주위를 둘러보다 급하게 잔에 물을 따라 건넸다. 청은 후들후들 떨리는 손을 반사적으로 뻗어 찬물이 가득 담긴 잔을 받아 들었다. 손이 하도 심하게 경련해서, 물이 왈칵왈칵 넘쳐흘러 이불을 적셨다.
그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청의 이성이 돌아왔다. 새카맣게 물들었던 시야가 서서히 개이며 주변의 풍경이 보였다. 익숙한 방이었다.
차가운 물이 손을 타고 넘쳤다. 청은 내용물이 절반도 채 남지 않은 잔을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간신히 한 모금 마셨다. 그나마도 제대로 넘기지 못해 물이 입가로 줄줄 흘렀다. 바짝 말라 껍질이 일어나 있던 입술이 흠뻑 젖었다. 태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청을 지켜보았다.
“하아…….”
잔을 내려놓은 청이 옷소매로 입가를 문지르며 숨을 골랐다. 초점 없이 퀭한 눈에 묘한 귀기가 어렸다. 그 눈에 한순간 시선을 빼앗겨 버렸다. 태의는 재빨리 얼굴을 돌렸다.
청은 잠에서 깨어나고도 한참이나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덜덜 떨리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저대로 의식을 잃은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의원님.”
비로소 그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을 미처 닦아 내지 못한 눈가가 발갛게 젖어 있었다. 그의 시선이 스르르 움직여 태의가 쓰다 만 약방문 종이에 닿았다.
“종이를……. 붓과 종이를 주실 수 있으십니까.”
다소 엉뚱한 요청이었다. 처음에 청은 여기는 어디냐, 황후는 어찌 되었냐, 당신은 누구냐 같은 곤란한 질문만 퍼부었고, 태의가 대답해 주지 않을 것임을 알자 포기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이런 부탁은 처음이었다.
태의는 고민했다. 청과 말을 섞거나 신체 접촉을 하지 말라는 명령은 있었지만 그에게 종이를 건네주지 말라는 명은 없었다. 게다가 금방이라도 숨이 꼴딱꼴딱 넘어갈 것 같은 애처로운 몰골의 환자인데, 그깟 종이 한 장 준다고 무슨 일이 생길까 싶었다. 어차피 종이를 줘 봤자 청은 여기서 탈출할 수도, 누군가를 해칠 수도 없을 테니.
그래,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주는데 산 사람 소원이라고 못 들어주겠어. 그는 곧 마음을 굳히고 약방문을 쓰기 위해 가져온 지필묵을 넘겨주었다. 청은 침상에 기대어 앉은 채 무릎 위에 종이를 폈다. 희고 노르스름한 빈 종이가 시야를 가득 메웠다.
너무도 까마득한 세월 동안 잊고 있었다. 그는 예술을 좋아했다.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몹시 뛰어났다. 귀족들의 연회에서 시 한 수 지어 달라, 편액(扁額)을 만들게 글귀를 써 달라, 사군자화를 그려 달라 하며 청을 찾는 부름이 끊이지 않았다.
청은 수많은 연회들 중 절반쯤은 스스로의 의지로 참석했고, 나머지 절반쯤은 의무로 참석했다. 청이 고위 관료들이며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모인 연회장에서 솜씨를 발휘하고 돌아오는 날이면, 아버지의 정치적 일이 술술 잘 풀렸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팔자에도 없던 검과 활을 악착같이 잡으면서, 살면서 들어 본 무거운 물건이라곤 커다란 붓 정도밖에 없던 청의 손은 굳은살과 흉터로 뒤덮여 투박해졌다. 그림을 어떻게 그렸는지, 시를 어떻게 지었는지. 이젠 생각도 나지 않았다. 전술과 전략을 고안하고 부하들을 다스리고, 전투에서 이기는 것만 해도 벅찼다.
먹물을 가득 머금은 붓에서 까만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빈 종이에 수없이 얼룩이 졌다. 청은 붓을 든 채 한참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림을 그리기는커녕 점 하나 찍을 수 없었다. 갈 곳을 잃은 시선이 점점 엉망이 되어 가는 종이 위를 참담하게 더듬었다. 어정쩡하게 붓을 쥔 손의 떨림이 갈수록 심해졌다.
결국 손에 힘이 빠져 붓을 놓치고 말았다. 그의 무릎 위에서 떨어진 붓은 검은 궤적을 남기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청은 못 쓰게 된 종이를 신경질적으로 구겼다. 한 맺힌 손길로 몇 번이고 우그러뜨리고 짓이겼다. 곧 종이 뭉치 또한 침상 아래로 내팽개쳐지는 신세가 되었다.
“으윽, 흐, 흐으…….”
그는 한껏 웅크려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 사이로 억눌린 흐느낌이 드문드문 새어 나왔다. 속에 들어찬 모든 절망을 쥐어짜 내는 듯한, 듣는 사람마저 괴로워지는 흐느낌이었다.
자신이 준 종이와 붓이 바닥에 마구잡이로 흩어져 있는데, 태의는 차마 몸을 움직여 그것을 주울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청을 달래거나 위로할 수도 없어, 입술을 지그시 깨문 채 우두커니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 * *
“예락.”
바깥바람 내음이 묻어 있는 손이 뺨을 쓸었다. 전신에 소름이 끼치며 가물가물 옅은 잠에 빠져 있던 정신이 확 깨어났다. 청은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폐, 폐하. 길이 평안을 누리소서.”
황제가 왔는데도 제때 일어나 인사를 하지 못하자 곧바로 머리채를 휘어잡혀 얻어맞은 적이 있었다. 그때의 경험으로 인해 학습된 공포였다.
“자고 있었는가?”
“예.”
황제는 기분이 나쁘지 않아 보였다. 그는 말 잘 듣는 애완동물을 귀여워하듯 청의 뺨을 매만지며 침상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청은 아무런 손질도 장식도 하지 않은 머리채를 한쪽 어깨 앞에 모아 늘어뜨린 채, 얇은 침의 차림으로 자신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제껏 이런 게 어떻게 그 거칠고 투박한 장군들 사이에 섞여 있었나 싶었다. 무관들은 양인이거나, 평인 중에서도 우락부락하고 기골이 장대한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맨손으로 멧돼지도 때려잡을 듯 험악한 사내들 틈에서 말갛고 고운 청은 유독 눈에 띄었다.
이런 걸 금군의 수장이랍시고 윗자리에 앉혀 놨었다니. 황제는 제풀에 피식 웃었다. 청에게는 전장이나 군용 막사 따위보단 역시 침상 위가 어울렸다.
“어디 불편한 데는 없는가?”
“예.”
“약은 잘 챙겨 먹고 있고?”
“예…….”
청은 황제의 물음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수긍했다. 대답이 늦으면 곧장 폭력이 날아올 것임을 알았기에 고민할 겨를 따위는 없었다.
“손도 차근차근 낫고 있는 것 같군. 그래, 응당 나아야지. 하루 종일 들어앉아 딱히 하는 일도 없으니.”
황제가 청의 손을 빤히 내려다보며 툭 던졌다. 청은 저도 모르게 손끝을 움츠렸다. 어지럽게 널브러졌던 붓과 종이는 이미 흔적도 없이 치워졌는데, 바닥에 묻은 먹물도 말끔히 닦아 낸 지 오래인데. 그가 그림을 그리려 했던 것이 황제에게 발각된 것 같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양 손목이 잘리지는 않을까 두려웠다.
황제가 이불 속에 반쯤 가려진 청의 손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갑작스레 와 닿는 타인의 체온에 움찔 놀랐다.
“손톱도 예쁘게 났고.”
한때 혹독한 고문으로 손톱이 죄다 빠지고 없던 청의 손끝에 깨끗한 연홍빛으로 새 손톱이 자라 있었다. 그러나 손바닥 가운데 대못에 꿰뚫렸던 벌건 흉터는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황제의 긴 손가락이 청의 손마디를 찬찬히 쓸었다. 붓을 잡아 생긴 굳은살이 거의 사라진 대신 손아귀에 고된 훈련의 흔적이 남은 손을 애무하듯 느리게 어루만졌다.
“손톱 손질을 해 주어야겠어. 멋대로 자라게 뒀다간 살에 파고들어 아플 수 있으니.”
“황공합니다. 하나 그러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손질 도구를 어디쯤에 뒀지?”
“제가, 제가 하겠습니다……. 폐하, 부디 고정하시옵소서.”
청이 황제에게 붙잡힌 손을 힘겹게 뒤로 물리려 했다. 황제가 빙긋 웃었다. 철썩! 다음 순간 눈앞이 하얗게 밝아졌다. 한쪽 귀가 먹먹했다.
“뭐라고?”
“흐윽! 으, 헉.”
“그대가 하긴 뭘 하나. 내가 없이 혼자선 아무것도 못 하는 주제에, 어디서 쓸데없는 앙탈을 부려.”
이번엔 반대쪽 뺨에 손이 날아왔다. 청은 옆으로 휙 돌아간 얼굴을 다시 추스를 생각도 못 한 채 색색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충격으로 활짝 열린 동공이 텅 비어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몇 올이 눈가로 스르르 흘러내렸다.
“예락, 주제를 알아야지. 그대가 지금 내게 이래라저래라 할 처지인가?”
“죄송…… 합니다…….”
“아양을 떨면서 몸을 사리는 게 비빈들과 다를 바 없군. 내가 언제 그대에게 그럴 권리를 줬지? 승은을 몇 번 입었다고 그대가 후궁이라도 되는 줄 아는가? 씨도 못 품는 몸으로 감히.”
“…….”
“그대 손으로 죽여 버린 황후 대신 그대가 뒷구멍을 바치기로 했으면, 그에 맞게 행동해야지. 응?”
청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힘겹게 이불자락을 움켜쥔 마른 손등이 떨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황제는 친히 손톱 손질 도구를 가져와서는 청을 제 품에 앉혔다.
아슬아슬한 정적 속에서 사각사각 손톱 갈리는 소리가 났다. 황제는 청을 뒤에서 끌어안고 손톱 가장자리를 사포로 하나하나 갈아 주었다. 곁눈으로 황제의 옆얼굴이 언뜻 보였다. 옅은 갈색 속눈썹을 청아하게 내리깔고 입을 다문 채 청의 손톱에 집중하는 얼굴이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등에 널찍한 가슴팍이 닿고, 따뜻한 온기가 몸을 감쌌다.
하지만 청은 안락함과 온화함 대신 스산한 공포를 느꼈다. 손을 황제에게 잡혀 옴짝달싹 못 하고, 그가 하는 대로 고스란히 받고만 있어야 했으므로.
손가락 끝은 살갗이 몹시 예민하고 여렸다. 가시 하나만 박혀도, 거스러미 하나만 뜯어도 괴로울 정도로. 그런 부위를 황제에게 오롯이 맡기고 있는 상황이 몸서리쳐지게 무서웠다. 한순간 기분이 틀어지면, 황제는 청의 손가락을 으깨고 겨우 새로 난 손톱을 도로 뽑아 버릴지도 몰랐다. 그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청은 두려움에 몸을 바짝 굳히고 숨을 거의 쉬지 못했다.
“예락.”
묵묵히 손톱을 손질해 주던 황제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극도로 긴장하고 있던 청이 흠칫했다.
“오늘은 뭘 했지?”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흰죽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잠깐 다시 잠에 들었다가.”
“들었다가?”
입 안이 바짝 말랐다. 형편없이 벌벌 떨리는 목소리가 부디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만을 바랐다.
“의원이 왔습니다.”
청은 황제의 손에 무력하게 잡힌 채 살살 갈려 나가는 자신의 손톱을 차마 볼 수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
“계속해.”
“제가 자고 있을 때 온 거라, 깨어 보니 그자가 있었습니다. 저를 진찰하고 새로운 처방을 써 가는 것 같았습니다.”
“별다른 일은 없었고?”
황제는 어느덧 청의 왼쪽 다섯 손가락을 모두 단정하게 정돈했다. 그는 손질이 끝난 왼손을 이불 위에 내려놓고 이번엔 오른손을 쥐었다. 잡힌 손목 안쪽에서 맥이 뛰었다. 살아 있기는 한 건가 싶을 정도로 마냥 희미하고 느리기만 하던 맥박이, 황제의 손안에서 점차 불안정해지고 빨라지는 게 느껴졌다.
“……예.”
“그래?”
황제가 청의 엄지를 쥐고 사포질을 재개하며 대수롭지 않게 되물었다. 푹신한 이부자리에 앉아 황제의 품에 안겨 있을진대, 청은 전신에 사무치는 한기를 느꼈다.
“아니, 아닙니다. 실은 제가……. 제가 질문을, 했습니다.”
“질문이라.”
“잠이 덜 깬 탓에 정신이 흐릿하여 무심결에 질문을 했는데, 그자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무시하여서……. 그게 다였습니다.”
“…….”
“저, 죄, 죄송합니다, 폐하. 절대 말을 섞지 않겠습니다. 다, 다시는, 맹세코……. 제가 잘못했습니다.”
청이 황제의 품 안에서 파드득 작게 몸서리를 치며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황제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청의 메마른 음성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부디…….”
“죄송할 게 뭐가 있나. 잠이 덜 깨면 그럴 수도 있는 법인데. 예락 그대는 원래도 아침잠이 많았지. 제때 일어나지 못할까 봐, 새벽 행군 때는 아예 뜬눈으로 밤을 새워 버린 적도 종종 있었고.”
황제는 조곤조곤 나지막하게 옛일을 되짚었다. 청이 금군의 우두머리 자리에 오른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의 이야기였다. 새파랗게 젊은 놈이 대장군이 되었다고 얕보일까 봐 사소한 것 하나라도 책잡히기 싫어 이를 악물었다. 남들이 검을 100번 휘두를 때 청은 300번 휘둘렀고,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라는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악착같이 적군을 도륙했다.
“그래, 죄송할 건 없지. 그런데…….”
청의 오른손 약지를 쥐고 있던 손에 갑자기 힘이 들어갔다. 살을 뭉개고 뼈를 부러뜨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악력이었다. 청이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흐윽!”
황제가 억지로 비틀어 꺾은 손마디가 보였다. 피가 통하지 않아 살이 온통 새하얗게 질린 가운데, 작은 먹물 방울이 하나 튀어 있었다. 언뜻 보아서는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묻어서 청조차도 미처 모르고 있었다.
“꿈에서 그자에게 연서라도 썼나 봐?”
황제는 태연한 물음과 함께 우악스럽게 움켜쥔 약지에 사포를 가져갔다.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낀 청이 몸을 이리저리 틀며 애원했다.
“제, 발, 잘못했습니다, 폐하, 제발……! 아, 아악!”
거친 사포가 갓 자란 손톱 아래 여린 속살을 무참히 긁었다. 살갗이 벗겨진 자리에 진물과 피가 뒤섞여 맺혔다.
“헉, 흐윽.”
이부자리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상처 자체야 깊지 않았지만, 부위가 부위인지라 예리한 통증이 말초 신경을 박박 할퀴었다.
“아니면 필담을 했을까?”
황제는 무덤덤하게 말하며 다시 사포를 들었다. 먹물이 묻은 부분의 살갗이 모조리 갈려 나갈 때까지 사포질을 할 생각인 것 같았다.
“폐하, 으, 잘못, 흐악!”
다시 한번 끔찍한 통증이 손톱 아래에 파고들었다. 파들파들 떨며 움켜쥔 손안에 열이 오르고 등줄기에 식은땀이 맺혔다. 살갗이 파헤쳐지며 난 피가 손마디를 타고 줄줄 흘렀다. 청의 손가락을 틀어쥔 황제의 손아귀에까지 묻었다.
“예락, 뒤가 간지러웠나? 안 박아 준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다른 사내를 홀리고. 좆이 먹고 싶어서 환장을 했군.”
황제는 고개를 스르르 기울여 잔뜩 웅크린 청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청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굳었다.
“왜, 의원 좆맛은 좀 다를 것 같아?”
차가운 전율이 흘렀다. 거대한 벽 앞에 선 것 같은 절망이 몰아닥쳤다.
“그림을, 폐하……. 그림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그는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처절한 흐느낌 사이사이로 고백했다.
“그림을 너무 그리고 싶어서. 약방문을 쓰기 위해 가져온 종이라도 얻을 수 있을까 해서……. 부탁을, 했…….”
울며 몸부림치는 청의 손을 무자비하게 붙들고 다시 벌을 가하려던 황제의 손이 뚝 멎었다. 그는 피 묻은 사포를 내려놓고 청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청이 발작하듯 몸서리를 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양팔로 몸을 감싸 꼬옥 품었다. 숨넘어가게 우느라 가파르게 들썩이는 청의 어깨에 턱을 얹은 채 다정하게 물었다.
“그림을 그리며 놀고 싶었어?”
“네, 흐으, 네에…….”
“그럼 처음부터 솔직히 얘길 하지, 왜 괜히 거짓으로 둘러대나. 내가 그것 하나 못 들어줄까 봐. 하여간 그대는 정말 손이 많이 가는군.”
황제는 빙그레 웃고는 청의 손을 부드럽게 들어 올렸다. 간신히 회복되어 가던 도중에 도로 만신창이가 된 손가락에 입을 맞추고, 질질 흐르는 피와 진물을 망설임 없이 핥았다. 피가 대강 멎을 때까지 몇 번이고 조심스러운 입맞춤과 혀 놀림을 반복했다.
“그림을 그리고 싶으면 마땅히 그리해야지. 예락 그대가 원한다는데, 얼마든지 하게 해 줘야지.”
황제가 혀끝으로 피가 묻은 입술을 느릿하게 훑으며 하는 말에, 청은 의례적인 감사 인사를 비롯하여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 * *
청이 누워 있던 침상보다도 더 큰 종이가 바닥에 깔렸다. 방의 절반을 가득 메운 새하얀 화선지 옆에 붓이며 물감이 종류별로 놓였다. 황실에서 쓰는 거라 하나같이 천금을 주고도 못 살 귀물들이었다. 붓의 손잡이는 통째로 옥으로 만들어졌고, 물감은 꽃잎과 열매즙으로 색을 내고 보석 가루를 섞어 은은한 빛이 돌았다.
청은 멍하니 방 안에 펼쳐진 물건들을 내려다보았다. 곧 뒤에서 황제가 그의 목덜미를 잡아 찍어 눌렀다. 억센 힘에 청의 무릎이 확 꺾였다.
“으, 흑!”
그는 제압당한 짐승처럼 풀썩 주저앉아 무릎을 꿇었다. 시야가 낮아지자 눈앞에 보이는 거라곤 온통 새하얀 설원처럼 펼쳐진 종이뿐이었다.
“자, 이제 그림을 그려 봐.”
뒤에 선 황제가 청의 어깨에 손을 얹고 몸을 숙여 나직이 말했다.
“그려 보래도. 판을 깔아 줬잖아.”
“폐하…….”
“하고 싶어 못 견딜 정도였지 않나. 그깟 싸구려 종이 한 장 얻으려 외간 사내에게 교태를 부리며 매달릴 만큼.”
청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그런 게 아니라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해명해 봤자 황제가 들어 주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감히 군주의 말에 토를 단다는 이유로 벌을 받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결국 그는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팔을 더듬더듬 내밀어 손에 잡히는 붓을 쥐었다.
여러 개 놓인 물감 접시들 중 아무 곳에나 붓을 담갔다. 그게 하필 붉은색 물감이었다. 한 번도 쓰지 않아 깨끗하던 담비 털에 시뻘건 염료가 듬뿍 묻었다.
시야가 새카맣게 좁아졌다.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심장이 불안정하게 뛰었다. 태의의 앞에서도 한 획도 그리지 못했던 그림을 황제의 앞이라고 그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예락, 기대하고 있으니 어서.”
웃음기를 담아 조곤조곤 속삭이는 황제의 목소리마저도 저 멀리서 아득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청의 어깨를 짚은 황제의 손에 힘이 실렸다. 그러나 청은 그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덜덜 떨었다.
“흐으…….”
붓에서 떨어진 물감 방울이 종이를 조금씩 물들였다. 청은 고개를 푹 숙이고 이를 악물었다. 자괴감으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차라리 얻어맞거나 피를 보는 게 나았다. 차라리 비명을 지르며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게 나았다. 이런 식으로 스스로의 무력함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손쓸 도리 없이 망가졌다고, 이제 예전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다고, 남은 선택지라고는 죽느니만 못한 벌레 같은 삶을 사는 것뿐이라고 확인 사살을 당하는 것 같아 더할 나위 없이 괴로웠다.
한참이 지나도 종이에 남은 거라고는 잘못 떨어진 물감 방울 몇 개와, 청이 손을 심하게 떤 탓에 붓 끝이 종이 표면을 마구잡이로 그은 자국밖에 없었다. 꼭 붉은 꽃잎이 으깨진 잔해를 보는 것 같았다.
“걸음마도 못 뗀 어린아이가 그려도 이것보다는 낫겠군.”
황제가 붓을 든 청의 손등을 발로 툭 건드렸다.
“고작 이따위 장난질을 하려 내게 울면서 읍소를 했나? 제국의 황제에게 잔심부름을 시키면서?”
“그게, 그것이 아니오라…….”
“정 못 그리겠으면, 그대가 유일하게 잘하는 일을 해. 도무지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그거라도 해야지.”
뒤에서 묵직한 체중이 실렸다. 무릎을 꿇고 간신히 앉아 있던 청의 몸이 다시 한번 푹 꺾였다. 가슴팍이 종이 위에 눌리며 덜 마른 물감이 옷에 스몄다. 무자비한 손길로 옷 매듭이 풀렸다. 옷자락이 스르르 흘러내리며 맨살이 찬 공기에 노출되었다. 흠칫 놀란 청이 다급하게 뒤를 돌아보려 했다.
“더 벌려야지.”
황제가 무릎으로 청의 허벅지 사이를 툭툭 쳤다. 청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힘이 빠진 손에서 붉은 물감을 한껏 머금은 붓이 툭 빠져나와 종이 위를 굴렀다.
“아, 으으…… 흐, 앗!”
길고 마디가 도드라진 손가락이 메마른 구멍을 마구잡이로 들쑤셨다. 청은 종이 위에 엎드려 고개를 파묻고 필사적으로 신음을 삼켰다.
“고개 들어. 며칠 안 박혔다고 그새 내외라도 하는 건가?”
황제가 무심하게 말하며 손가락을 쑥 빼냈다. 다음 순간 그 자리에 단단하고 차가운 것이 틀어박혔다. 딱딱한 원통형 물체가 내장에 틀어박혔다.
“헉, 흐윽!”
통증과 거북함으로 몸을 뒤트는데, 갑자기 구멍 속에서 찬 액체가 왈칵 쏟아졌다. 콸콸 흘러나온 물이 아랫배 안쪽에 고였다.
붓 통과 안료 접시 옆에 놓여 있던 연적에 뒤늦게 생각이 미쳤다. 청이 바닥에 고개를 들이박은 채 어렵사리 옆을 돌아보았다. 대나무 모양의 청자연적이 보이지 않았다. 먹물에 섞어 농도를 조절할 용도로 담아 놨던 물이 지금은 청의 내벽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황제는 청의 안에 반쯤 박힌 연적을 빼냈다 다시 쑤셔 박았다. 그럴 때마다 물이 흥건하게 새어 나왔다. 물이 찰랑찰랑 들어찬 아랫배가 뻐근하게 무거워지는 느낌이라, 청이 괴롭게 신음하며 배를 감싸 안았다.
“흑, 으읏, 빼 주십시오. 너무 아파서, 제발.”
“엄살이 심하군. 이것 대신 저 붓 통을 처박으려다 참은 건데.”
“하윽…… 큭!”
황제가 손을 멈추지 않으며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대나무 마디를 본떠 볼록하게 만든 부분이 내벽을 득득 긁었다. 여러 개의 붓이 담긴 나무통은 사람 팔뚝만큼 굵었다. 저런 걸 박았다간 구멍이며 내장이 죄다 터질 게 분명했다.
방향과 강도를 바꿔 가며 안을 퍽퍽 찌르던 황제의 성기와 달리, 푸른 도자기로 된 연적은 몹시도 딱딱하고 서늘해서 소름이 끼쳤다. 게다가 흠칫흠칫 놀랄 정도로 차가운 물이 자꾸 새어 나와 배를 채웠다.
“폐하, 싫습니다. 저는…….”
청의 입에서 처음으로 싫다는 말이 나왔다. 그는 헐떡이는 숨소리 사이로 힘겹게 말을 이었다. 뼈대가 도드라진 어깨와 등이 간헐적으로 들썩였다. 엉덩이를 어설프게 치켜든 채 엎어진 탓에, 긴 머리칼이 널찍한 종이 위에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었다.
“저는, 읏, 이런 물건으로는 싫습니다. 적어도, 범해지더라도……. 폐하께만 충성하고 싶…… 헉!”
그는 말을 채 마치지 못했다. 황제가 한 뼘쯤 되는 길이의 연적을 힘주어 쑤셔 넣은 탓이었다. 서늘하고 묵직한 도자기가 내벽을 쾅 때려 박았다. 무력하게 벌어진 입에서 아, 아, 하는 신음만 드문드문 새어 나왔다.
“충성?”
황제는 끄트머리만 남기고 깊이 틀어박힌 연적을 쑥 뽑아냈다. 한계까지 팽팽히 벌어져 연적을 물고 있던 발간 구멍이 빠끔하게 벌어져 있다가 서서히 닫혔다. 그 틈으로 배 속을 가득 메우고 있던 맑은 물이 울컥 넘쳐흘렀다.
“청아, 네가 그러면 안 되지. 다른 이는 몰라도 너만은 내게 충성 운운하지 말아야지. 나를 배신하고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불충을 저지른 주제에, 감히 그딴 말을 입에 담아?”
“흐으, 으…… 흑.”
“그런다고 내가 순순히 죽여 줄 것 같아?”
황제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주 낮고 흐릿한 목소리로 한순간 스쳐 지나간 말이라, 청은 자신이 들은 것이 헛것인지 아닌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래, 충성……. 충성 좋지. 그렇게 내 좆에 충성하고 싶으면.”
그는 들고 있던 연적을 휙 내던졌다. 같은 무게의 금값에 필적하는 아름다운 청자가 묵직한 소리와 함께 내팽개쳐졌다. 안에 반쯤 남아 있던 물이 콸콸 새어 나와 마루를 적셨다.
“구멍 잡고 벌려. 원하는 대로 박아 줄 테니까.”
그러나 청은 황제의 명에 곧장 따르지 못했다. 구멍에서 새어 나온 물이 사타구니와 허벅지를 타고 줄줄 흐르는 가운데, 그는 충격으로 몸을 뻣뻣하게 굳히고 벌벌 떨었다.
“연적으로는 모자랐나? 붓 통으로도 뒤를 넓혀 줬으면 해서 그러는 건가?”
“흐…… 흑, 아니요, 하겠습니다. 하겠…….”
체중을 지탱하던 손을 뒤로 뻗었다. 상체가 완전히 푹 꺼지며 이마가 차가운 종이 표면에 눌렸다. 가늘게 경련하는 손이 힘겹게 스스로의 엉덩이를 벌렸다. 그는 자신이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했다. 황제를 향해 엉덩이를 치켜들고 구멍을 벌리고 있는 꼴을 스스로 보았다면, 자괴감에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을 테니까.
찬물을 흠뻑 머금어 미지근해진 구멍에 귀두가 와 닿았다. 황제는 한 손으로 청의 허리를 잡고 몸을 붙였다. 연적을 억지로 쑤셔 박고 흔들었던 탓에 발갛게 부어 있는 구멍이 힘겹게 귀두를 삼켰다. 서늘하게 성기에 들러붙어 오는 젖은 내벽의 감촉을 음미하며 꾹꾹 밀어 넣었다.
“청아. 그림을 다시 한번……. 마저 그려 봐.”
황제가 몸을 바싹 붙여 청의 귓가에 속삭였다. 꽉 조여진 내벽을 억지로 뚫고 들어오는 성기를 견디느라, 청은 대답 대신 거친 숨소리만 흘렸다.
“오랜만에 네 그림이 보고 싶어. 응?”
“안 됩니다, 폐하. 읏, 아, 아무리 해도, 흐윽, 그릴 수가 없…….”
“못 하겠단 소릴랑 하지 말고.”
황제는 빙긋 웃으며 힘없이 바르작거리는 청의 손에 붓을 찾아 쥐여 주었다.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었다. 그랬다간 무슨 보복이 날아올지 몰랐다.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젓던 청이 결국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상체를 비척비척 일으켰다.
자세가 바뀌자 배 속을 가득 메운 성기가 하복부 바로 아래쪽을 뻐근하게 눌렀다. 매듭을 풀어 허리께까지 끌어 올려 놓았던 옷자락이 그의 움직임에 따라 스르르 흘러내려 접합부를 가렸다.
황제는 아래를 흘긋 내려다보았다. 성기를 빠듯하게 베어 문 엉덩이가 적나라하게 보이도록 옷자락을 도로 젖혀 둔 채, 다시 철썩철썩 소리가 나도록 몸을 부딪쳤다.
“아……. 아, 읏!”
한 손으로 종이 위를 짚은 채 뒤에서 턱턱 치받아 오는 황제를 견디다 못해, 청은 붓을 든 손으로 어설프게 허공을 휘저으며 허우적거렸다. 새빨간 물감 방울이 후두둑 튀어 종이를 적셨다.
“어서.”
나직하게 채근하는 황제의 목소리에 열락의 기운이 섞였다. 결국 청은 이를 악물고 아무렇게나 붓을 그었다. 거대한 기둥으로 배 안 깊숙이까지 꿰뚫려 흔들리면서 그은 거라 당연히 제대로 그려질 리가 없었다. 최고급 화선지에 삐뚤빼뚤한 붉은 선이 생겨났다.
“읏, 으윽, 아, 앗, 아……!”
청은 흐느끼며 다시 팔을 내밀었다. 자신이 무엇을 그리려 하는지도 모른 채, 아까 그은 선 위쪽에 한 획을 더하려 필사적으로 몸을 앞으로 뻗었다. 그러나 황제가 뒤에서 허리를 감아 성기 위에 확 내려앉혔다. 그가 잡아당기는 대로 질질 끌려가 엉덩이 살이 짓눌리도록 깊게 박혔다. 한순간 놓쳐 버린 붓이 저만치 닿을 수 없는 곳까지 굴러갔다.
“흐악!”
“선 긋는 법부터 다시 연습해야겠군. 그 유려하던 솜씨는 다 어디 갔나?”
황제가 태연하게 종이 위에 펼쳐진 참상을 평했다. 다른 어떤 경멸의 말보다도, 그 어떤 폭언보다도 이 비판 한 마디가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청은 종이 표면에 얼굴을 처박고 흐느꼈다. 그러나 울음소리는 나지 않았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깨문 채 끅끅대며 소리 없이 오열했다.
붉은 물감으로 얼룩진 종이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투명한 물방울에 새빨간 염료가 뒤섞여 묽은 연홍빛이 되었다. 벌겋게 뭉개진 흔적들이 마구잡이로 짓이겨지고 으스러진 꽃 무더기 같았다. 청의 마음처럼. 시야를 가득 메운 새빨간 색채가 불현듯 과거의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전하. 전하께서는 무슨 꽃을 제일 좋아하십니까? 다른 황족들은 정원 가꾸기니 꽃꽂이니 하며 꽃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데 여념이 없으신데, 전하의 처소에서는 한 번도 꽃을 보지 못한 듯하여.〉
황자는 아무 표정 없이 청을 내려다보았다. 어차피 황자에게서 답을 들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가장 밝고 화려한 황궁에서 가장 어둡고 처절한 삶을 살아온 남자였으니.
꽃을 좋아하지 않으실 수도 있다는 것을 미처 생각지 못했다고, 무례를 용서하시라고 적당히 말을 맺으려는 찰나 황자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동백…….〉
〈한겨울에 핀 동백은 운치가 있지요. 꽃가지에 새하얀 눈이 쌓이면 붉은 꽃과 대조되어 더욱 아름답고요.〉
의외였다. 청은 조금 얼떨떨해진 채 반사적으로 맞장구를 쳤다. 황자는 고개를 돌려, 꽃도 잎도 없이 앙상하게 뻗은 후원의 나뭇가지에 시선을 주었다.
〈동백은 낙화할 때 꽃잎이 제각기 휘날리지 않고 꽃송이가 통째로 뚝뚝 떨어지지.〉
창백한 겨울 햇살이 황자의 옆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림에나 나올 법한 수려한 자태였지만, 이유 모를 으스스함이 느껴졌다.
〈그 모습이 마치, 사람의 목이 잘려 떨어지는 것 같아서.〉
그때의 일이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졌다. 지금 청의 삶은 송두리째 망가졌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어디서부터, 대체 무엇부터 잘못되었는지는 그조차도 알지 못했다.
과연 누구를 원망해야 하는 것일까. 그의 아버지를 반역자로 만들어 집안을 풍비박산 낸 선황과 탐관오리들을 원망해야 하는지, 아니면 악에 받쳐 황자에게 옥좌를 권하고 복수를 간구했던 자신을 원망해야 하는지, 그도 아니면…….
청은 멍하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톱이 죄다 뽑혔다가 다시 난 손끝은 여린 살갗이 갈려 엉망이 된 채였다. 그 순간만큼은 뒤에서 그를 짓누르는 황제의 존재도, 숨도 못 쉬게 내벽을 벌리고 틀어박힌 성기의 부피도 느껴지지 않았다.
청은 홀린 듯 제 손가락을 물어뜯었다. 아픔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모질게. 피와 진물이 흐르다 간신히 멎은 것이 무색하게도, 손끝이 도로 더 깊게 찢어졌다. 살점이 움푹 팬 자리에서 울컥울컥 피가 솟았다.
청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종이에 동그랗게 고인 핏방울을 문질렀다. 피를 물감 삼아 탐스러운 꽃잎을 그리고 싱싱한 꽃술을 그렸다. 같은 붉은색이거늘, 염료와 피가 흰 종이 위에서 극명하게 대조되었다. 청의 피를 머금고 활짝 피어난 검붉은 동백이 소름 끼칠 정도로 요요한 자태를 자랑했다.
쉴 새 없이 넘쳐흐르는 피를 더 묻혀 꽃줄기를 마저 그리려는데, 억센 힘이 그를 확 끌어당겼다. 청의 몸이 힘없이 퍽 돌아갔다. 청은 종이 위에 등을 대고 널브러진 채로도, 피 칠갑을 한 손으로 그림을 가리키며 웃었다.
“6황자 전하, 그렸습니다, 꽃을…….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빨간 동백꽃을.”
청을 내려다보는 황제의 얼굴에서 표정이 씻은 듯 지워졌다.
* * *
탁자에 부드러운 비단 천을 몇 겹으로 덧대어 깔고 그 위에 청의 손을 얹었다. 조심스럽게 피를 닦아 내고 연고를 발랐다. 만신창이가 된 손가락 하나하나에 붕대를 감았다.
청의 신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지만, 그를 여러 번 진료하러 오면서 태의는 그에 대한 단서를 몇 가지 얻었다. 모른 척하려 해도 모를 수가 없었다. 청은 파들파들 경련하는 손으로 억지로 붓을 쥐고 있다가 내던져 버렸다. 그다음 날, 붓을 잡았던 바로 그 손이 끔찍하게 망가져 있었다. 그리고 청의 온몸에 가실 날이 없는 폭력과 강간의 흔적. 모든 정황이 너무나 명백했다.
태의원은 제국 역사 대대로 황궁의 잔혹하고 더러운 민낯이 까발려지는 곳이었다. 음모에 휘말려 불구가 된 후궁들, 후계 싸움을 하다 죽어 나가는 황자와 황녀들, 권좌에서 물러난 이후 온갖 지병을 달고 사는 황실의 뒷방 늙은이들까지. 그 모든 이들이 태의원의 환자였다.
그런 곳에서 일하는 태의에게도 청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차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혹독한 짓을 당하고도 억울하다며 악을 쓰는 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자신을 이 별궁에 처박은 이에 대한 증오를 드러낼 법도 한데, 청은 홀로 고통을 삭일지언정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았다.
하지만 청은 조금씩, 그러나 확실히 망가져 가고 있었다. 그의 눈은 가끔 몸 상태가 나쁠 때면 초점이 맞지 않았다. 그래서 전각 안을 돌아다니다 부딪치고 넘어져 멍이 들기 일쑤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턴가 청의 몸에 그런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 침상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게 된 것이다.
대화를 나누는 것도 신체 접촉을 하는 것도 금지된 상황에서, 태의가 인간 대 인간으로 청에게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는 그를 치료하지 않는 것이었다. 부질없는 목숨을 억지로 붙여 놓는 잔인한 짓을 그만두는 것.
하지만 그는 의원이었다. 의원이 환자를 죽게 방치하는 건 직무 유기였다. 가는 길이 최대한 편하도록 도와줄 수는 있을지언정, 마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손을 놓을 수는 없었다.
“저는…….”
다친 손을 태의에게 맡기고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응시하며 한참 넋을 놓고 있던 청이 문득 입을 열었다.
“언제쯤 죽을 수 있습니까?”
애초에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듯, 상대방 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혼잣말처럼 던진 물음이었다. 예상대로 태의에게서는 언제나처럼 아무런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 청이 지레 포기하고 침상에 누우려는데, 작게 억눌린 소리가 들렸다.
“으흑…….”
젊은 의원은 숨죽여 울고 있었다. 한 손에 붕대를, 한 손에 연고가 묻은 솜방망이를 든 채였다. 태의들이 입는 짙은 푸른색 관복을 입은 무릎에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얼굴에 솜털이 보송보송하여 딱 봐도 어려 보이는 게, 의과 시험에 갓 급제한 신참내기 티가 나긴 했다. 그래도 저렇게 마음이 여려서야 어찌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는지.
겉만 번드르르하고 아름다웠지, 황궁은 그야말로 복마전(伏魔殿)이었다. 동정심과 도덕을 버리지 못한 사람은 오래 못 버티기 마련이었다. 청처럼 산전수전 다 겪은, 온갖 더러운 일을 하며 손에 피를 셀 수 없이 묻혀 본 이조차도 이렇게 한순간에 망가지지 않았는가.
태의는 한참을 고개를 푹 숙이고 소리 없이 흐느꼈다. 그를 조용히 지켜보던 청이 쓰게 웃었다. 청의 남동생이 지금껏 살아 있었다면 이 또래쯤 되었을 것이다.
사기그릇에 담긴 탕약을 얌전히 마신 청은 곧 기절하듯 잠들었다. 청은 까맣게 모르고 있지만, 사실 그가 최근 매일 마시는 탕약에는 수면제 성분이 들어 있었다. 청의 치료를 맡긴 이름 모를 윗분이 그리 명했다. 자신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청이 말하고 움직이고 생각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그러니 자신이 그를 찾지 않는 시간에는 약물을 써서라도 가급적 재워 두라고.
태의는 침상 옆에 앉아 잠든 그를 지켜보다가, 상처에 마저 연고를 바르기 위해 연고 통을 찾았다. 하지만 아까까지 탁자 위에 올려 두고 쓰던, 태의원 약제실에서 대량으로 만드는 연고가 아니었다.
그는 여러 가지 약재와 진료 도구가 들어 있는 상자를 뒤적여 다른 것을 꺼냈다. 그 안에 든 희고 반투명한 연고를 아끼지 않고 듬뿍 덜어 상처 위에 얹었다. 그에게 당장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면, 몸에 난 상처만이라도 고통스럽지 않길 바랐다.
* * *
방 안에 가득 찬 음식 냄새에 잠에서 깼다. 청은 베개를 베고 누운 채 힘겹게 고개를 돌려 옆을 확인했다. 항상 죽 그릇과 의약품 따위만 올라와 있던 텅 빈 탁자에 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도자기 그릇부터가 최고급이었고, 그 위에 올라간 음식은 말할 것도 없었다.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휘황찬란했다.
그 맞은편에 황제가 느슨하게 기대어 앉아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오래 그의 잠든 얼굴을 지켜보고 있었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눈이 마주쳤다. 청은 무심결에 움찔 몸을 굳혔다. 황제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빙긋 웃었다.
“잘 잤어? 청아.”
“저, 폐하,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 송구합니다.”
청이 더듬더듬 사과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황제는 턱짓으로 의자를 권했다.
“밥 먹어야지.”
청은 침상을 벗어나자마자 침의를 갈아입지도 못한 채 주춤주춤 밥상 앞에 앉았다. 그러나 차마 수저를 들 수 없었다. 황제와 같은 자리에서 식사할 수 있는 것은 그의 가족들뿐이었다. 연회에서 황제가 칭찬의 의미로 내리는 술잔을 받아 마시는 것, 그것이 이제껏 청에게 허락된 전부였다. 황제가 빤히 쳐다보는 앞에서 혼자 식사를 하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황제는 황후와 함께 수라를 들면서 청을 동석시킨 적이 몇 번 있었다. 청은 그들이 식사를 하는 내내 부동자세로 식탁 곁에 서 있어야 했다. 밥상머리에 세워 두는 것은 하급 궁인에게나 시킬 법한 허드렛일이었다. 하지만 청은 불쾌한 티를 전혀 내지 않고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청이 곁에 있든 없든 아무 거리낌 없이 태연하게 식사하는 황제와 달리, 황후는 매번 청을 의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불편하고 죄송해서 어떡하지’라고 써 붙여 놓은 것 같은 얼굴로 그를 힐끔힐끔 곁눈질했다.
그러다 한 번은 실수로 찻잔을 떨어뜨렸다. 황후가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청은 망설임 없이 무릎을 꿇고 그의 발치에 앉아 찻잔을 치웠다. 엎질러진 찻물이 바닥에 드리운 옷자락을 흠뻑 적시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황후는 당황과 부끄러움으로 뺨을 발갛게 물들이며 감사 인사를 했다. 묵묵히 그 광경을 지켜보던 황제의 눈매가 스르르 가늘어지는 것은 알지 못했다.
“제가 어찌 감히 폐하의 앞에서…….”
“참으로 비싸게도 구는군. 내가 한 숟가락씩 일일이 떠먹여 줘야 먹을 텐가?”
황제는 턱을 괴고 심드렁하게 재촉했다. 한참 망설이던 청은 결국 주저하며 수저를 들었다. 예법을 어기는 것보다 황제의 분노를 사는 것이 더 무서웠다.
고기 요리나 기름기가 번들번들한 볶음 요리에는 도저히 손을 댈 수 없었다. 청은 고민하다 소담스럽게 담긴 게살 죽 그릇으로 숟가락을 가져갔다. 그 와중에도 그는 손을 가늘게 떨었다. 부상의 후유증 때문인지, 황제가 두려워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자기로 된 숟가락이 그릇에 잘게 부딪쳐 달각달각 소리가 났다.
아직도 따뜻한 김이 폴폴 피어오르는 죽 그릇에 숟가락을 담갔다. 가늘게 찢은 게살과 흰 쌀을 푹 끓인 죽에서 고소한 냄새가 났다. 죽을 한 숟가락 뜬 청은 입술을 살짝 벌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언제부터였는지 식탁에 황후가 앉아 있었다. 생기 없이 푸르스름하게 질린 얼굴로 한가득 차려진 만찬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다가, 스르르 고개를 돌려 청을 바라보았다. 발끝에서부터 섬뜩한 전율이 치고 올랐다.
“아, 으, 아……!”
숟가락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탁자에 떨어졌다. 그 안에 담긴 죽이 허무하게 쏟아졌다.
황후는 옅은 색의 침의 차림이었다. 청이 그를 베었을 때 입고 있던 바로 그 옷이었다. 하늘하늘한 비단 자락이 길게 찢어지고, 가슴팍을 흠뻑 물들인 피 얼룩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화, 황후 전하.”
청은 말을 잇지 못하고 휘청휘청 물러섰다. 덜컹! 큰 소리가 났다. 그가 앉아 있던 의자가 통째로 넘어가며 맥없이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러나 아픔조차 느끼지 못했다.
“제,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감히…….”
황후는 여전히 식탁 앞에 앉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적 끝에 마침내 황후가 뭐라 말하려는 듯 입술을 찬찬히 달싹였다. 그러나 그 순간 멱살이 확 잡히고 따뜻하고 큰 손으로 눈이 가려졌다. 눈앞이 새까맣게 어두워졌다.
“숨 쉬어.”
청은 그제야 자신이 숨을 전혀 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깊은 물속에 처넣어졌다 끌려 나온 것처럼 절박한 호흡이 터졌다.
“흐, 흐윽, 헉, 헉.”
눈을 가리던 손이 치워졌다. 마냥 컴컴하던 시야에 다시 빛이 돌아왔다. 더 이상 황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황제가 코앞에서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으므로.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 옅은 다갈색 눈동자가 있었다. 투명한 홍채에 제 모습이 고스란히 비쳤다. 청은 저도 모르게 파드득 경련했다.
“폐하, 저, 저는.”
“눈 돌리지 마.”
황제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청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양 뺨을 감싸고 한참이나 지켜본 끝에 청의 호흡이 간신히 가라앉았다. 황제가 메마른 웃음을 흘렸다.
“내가 요즘, 너한테 너무 잘해 줬지?”
“윽…….”
단단한 손마디가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들어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두피가 통째로 뜯기는 것 같았다. 고통스러운 비명이 차마 터져 나오지 못하고 목 안에서 맴돌았다.
“내 앞에서 정신 빼놓고 다른 놈 생각할 겨를도 있고.”
황제는 한 손으로 청의 머리채를 움켜쥔 채 식탁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청은 이렇다 할 저항조차 할 수 없어 무력하게 질질 끌려갔다. 그는 망가진 인형처럼 황제의 무릎에 풀썩 앉혀졌다. 다시 죽을 뜬 황제가 청의 입가에 숟가락을 대어 주었다.
“먹어.”
청이 곧바로 죽을 받아먹을 낌새가 보이지 않자 황제는 그의 뺨과 턱을 움켜쥐어 고정해 놓고 억지로 입을 벌리게 했다. 얼굴이 부서질 듯한 악력이었다.
“먹으라니까?”
황제가 눈매를 휘며 웃었다. 이윽고 숟가락이 벌어진 입술 사이로 우악스럽게 쑤셔 넣어졌다. 청은 곧 사레가 들렸다. 음식을 조금도 삼키지 못하고 컥컥대며 괴로워했다.
“왜, 황후 생각에 목이 메어 음식이 안 넘어가나?”
“쿨럭, 큭, 흐윽!”
“뒷구멍으로는 뭐든 잘만 받아먹더니, 윗입은 왜 이 모양이지? 좆 빠는 것 말고는 쓸모가 없군.”
청이 헐떡이며 황제에게 팔을 뻗었다. 상대에게 매달리기 위한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도중에 정신이 들었는지, 그 팔은 황제에게 닿지 못하고 힘없이 떨어졌다.
“청아, 황후의 관을 도로 열고 널 같이 처박아 순장해 줄까? 아니면 무덤을 파헤쳐 황후를 꺼내 와서 네 옆자리에 앉혀 줄까? 그러면 밥 처먹을래?”
참담한 낯으로 침묵하던 청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속이 메슥거리고 구역질이 나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한 숟가락 한 숟가락 죽을 받아먹었다.
“황후를 떠올렸더니 새삼 입맛이 도나 보군. 그의 몫까지 살아야겠다 결심하기라도 했나?”
황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비아냥거렸다. 표정만큼은 여전히 웃고 있어 도무지 속내를 짐작할 수 없었다.
“제발, 폐하. 부디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주제넘게나마 부탁드립니다.”
결국 청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간청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제겐 아무런 자격도 권리도 없으니 어떻게 다루셔도 아무 상관 없습니다. 하지만 황후 전하께서는, 생전에도 지금도 그런 취급을 받을 분이 아니시지 않습니까.”
“어째서?”
뺨과 턱을 붙잡고 있던 손이 스르르 아래로 내려왔다. 황제는 손끝으로 청의 목덜미를 살살 어루만졌다. 황제의 손은 언제나처럼 따뜻했다. 하지만 뱀이 목을 칭칭 휘감고 기어 다니는 듯한 으스스함이 느껴졌다.
“폐하의 하나뿐인 정실이십니다. 황실의 족보에 폐하와 함께 영원히 이름이 남으실 분이시고요. 감히 저 따위가 이런 말을 하는 게 괘씸하다 여기실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분의 명예만큼은 지켜 주십시오.”
“황후가 내 반려라 안 된다라. 네가 아직도 그를 못 잊어 그러는 것은 아니고?”
청의 얼굴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하지만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황제가 눈을 돌리지 말라 명령했기에 시선을 피할 수도 없었다. 맹수의 시야에 사로잡힌 먹잇감처럼 덜덜 떨던 청이 더듬더듬 고백했다.
“아닙니다, 폐하, 아닙니다……. 제, 제가……. 거짓말을 했습니다.”
부서지는 햇살 아래에서 금빛으로 빛나는 속눈썹을 느리게 깜빡이며, 황제는 그 뒤에 이어질 말을 조용히 기다렸다. 청의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처음 황제에게 거짓 자백을 하던 순간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두려웠다.
“저는 황후 전하를……. 연모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품은 적 없습니다.”
처음부터 이 우스꽝스럽고 비참한 연극을 끝내야겠다고 결심하고 입을 연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저 너무 지쳐 있었다. 어차피 자신의 생은 이미 끝난 거나 다름없으니, 조금이라도 속내를 털어놓고 편안해지고 싶었다.
이제 와서 진실을 성토한다 해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 같아서이기도 했다. 그가 황후를 사랑한 게 아니었다고 고백하면 뭐가 달라지기라도 하는가? 이미 황후는 그의 칼질에 명을 달리하여 땅에 묻혔고, 이미 황제는 그를 죽일 가치도 없다 여길 만큼 경멸하는데.
“…….”
목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던 황제의 손길이 뚝 멎었다. 그는 청의 속내를 낱낱이 들여다보려는 듯 한참 동안 끈질기게 시선을 마주했다. 지옥 같은 정적 끝에 황제가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작게 흘러나온 웃음소리는 이윽고 점점 커졌다. 그린 듯 수려한 눈매가 환하게 휘어졌다. 황제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 내어 웃다가, 웃음기를 못 이겨 청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툭 기대기까지 했다.
그러나 청은 아무런 반응도 보일 수 없었다. 황제가 왜 웃는지 알 수 없어 망연히 굳어 있을 뿐이었다. 감히 자신을 농락하고 기만했다는 사실에 격노한 황제가 당장 그에게 죽음을 명하지 않을까, 그런 희미한 기대를 가졌었는데.
마침내 웃음이 조금 잦아들었다. 황제는 부드럽게 풀린 입매로 속삭였다.
“알아.”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귀로 똑똑히 들었는데도 황제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온몸에 돌던 피가 순식간에 싹 빠져나가기라도 했는지 손발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우두커니 얼어붙어 있던 청의 시선이 고장 난 듯 삐걱삐걱 움직여 황제를 향했다. 그 눈을 마주하자 간신히 진정되었던 웃음이 다시 터졌다. 황제는 낮게 웃으며 청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처음부터 네겐 나밖에 없었잖아.”
* * *
황제가 다음번에 전각을 찾아왔을 때, 그는 공단으로 감싼 큼직한 상자를 든 채였다. 아랫사람을 시키지도 않고 직접 상자를 방 안까지 가져와서는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폐하, 오셨습니까.”
수면제 약효가 덜 가셔서 몽롱한 상태의 청이 황급히 일어나 그를 맞았다. 식사를 하고 약을 먹는 시간을 제외하면 하루의 대부분을 잠으로 보내고 있으니 병세가 금세 좋아져야 할 텐데, 청의 회복은 묘하게 느렸다.
“열어 봐.”
황제는 가만히 상자를 턱짓했다. 머뭇거리던 청이 결국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 든 것은 옷이었다. 청도 익히 아는, 너무도 익숙한 의복. 황후를 칼로 베고 지하 감옥에 끌려가기 직전까지만 해도 입고 있던 금군의 정복이었다. 흑색에 가까운 먹색 겉옷에 허리띠를 두르고, 붉은색 천에 금군 특유의 금색 문양을 넣은 보호구를 차게 되어 있었다.
언제 황후의 피가 튀었냐는 듯 깨끗이 세탁하여 단정하게 개어 놓은 옷 위에는 검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황제가 청에게 하사한 보검이었다.
“이게 무슨…….”
진작 태워 버린 줄 알았던 옷이 왜 아직까지 멀쩡히 보존되어 있는지, 황후를 해친 흉기가 왜 이 상자 안에 들어 있는지. 묻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예락, 뭐 하고 있나. 어서 갈아입지 않고. 외출을 하려면 옷을 차려입어야지.”
“외출, 말씀이십니까? 제가, 이, 이 옷을 어찌.”
청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는 이제 대장군도 뭣도 아닌 황후 시해범에 불과했다. 당장 목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판국에 나가긴 어딜 나간단 말인가.
이제껏 청에게 침의 한 벌 정도밖에 허락하지 않았으면서, 이제 와 갑작스럽게 고급스러운 상자에 옷을 담아 내미는 황제의 의중을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관복을 수의로 삼아, 이대로 단두대로 끌려가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저는…… 전 이미…….”
그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 혼란스러워하다 저도 모르게 뒷걸음쳤다. 마룻바닥을 딛고 선 창백한 맨발이 어설프게 뒤로 물러났다. 황제의 눈을 차마 마주 보지 못하고 황망하게 바닥만 쳐다보았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보던 황제의 심기가 틀어졌다. 모처럼 너그럽게 예뻐해 주려 했더니. 자신이 뭘 했다고,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다 죽어 가는 짐승처럼 빌빌대는 꼴이 같잖았다.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흐, 흑!”
청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거리가 가까워지며 신장 차이 때문에 눈높이가 어긋났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청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궁지에 몰린 사냥감처럼 가련하게.
“내가 무섭나?”
황제가 조용히 물었다.
“그대에게 친히 의복을 가져다주고 입으라 했을 뿐인데, 그게 그리 기겁하며 몸서리를 칠 일인가? 허락도 하지 않았는데 멋대로 자리를 피하려 하고. 건방지게…….”
“…….”
“주군이 묻는데, 대답해야지?”
황제가 손등을 들어 청의 뺨을 느리게 쳤다. 툭, 툭. 결코 강하지도 빠르지도 않은 움직임이었지만, 학습된 공포를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했다.
“아, 아닙니다. 송구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청이 제대로 숨도 못 쉬고 빠르게 말했다. 목소리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황제는 빙긋 웃고 더욱 간격을 좁혔다. 그리고 손을 뻗어 청의 침의에 매인 허리끈을 풀었다.
“아……!”
옷자락을 고정하는 끈이 사라지자 얇은 천이 스르르 흘러내렸다. 청은 곧장 나신이 되었다. 아무 예고 없이 맨살에 바깥 공기가 스몄다. 깜짝 놀란 청이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예락, 이리 와.”
주춤 물러선 발뒤꿈치에 침상 기둥이 닿았다. 달아나려 해도 더는 달아날 곳이 없었다.
그의 얼굴 위로 서늘한 그늘이 졌다. 다음 순간 팔락 소리와 함께 어깨에 부드럽고 얇은 천이 내려앉았다. 속적삼이었다.
황제는 무심한 손길로 청에게 옷을 입혔다. 가장 안에 입는 속옷부터 겉옷까지, 한 겹 한 겹 일일이.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몸으로 아랫것들이나 할 법한 일을 직접 하면서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입을 다물고 시선을 가만히 내리깐 채 그저 행위에 집중했다.
그 모든 과정 내내 청은 호흡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자신의 숨소리가 황제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자꾸만 벌벌 떨리는 몸을 안간힘을 다해 억눌렀다. 황제의 손끝이 피부 위를 언뜻언뜻 스칠 때마다 긴장하여 솜털이 바짝 일어섰다.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몰라, 스르륵 비단 끈을 미끄러뜨리며 고름을 매는 황제의 손을 보았다가, 발끝을 내려다보았다가 하며 방황했다.
허리끈을 둘러 허리를 조여 매느라, 황제가 비단 끈을 힘 있게 잡아당겼다. 그 탓에 청의 몸이 앞으로 약간 휘청댔다. 그것을 빤히 바라보다 말고 황제가 입을 열었다.
“예락 그대는 내게 거짓말을 했지. 거짓으로 둘러대는 게 빤히 보이는데, 자수할 기회도 여러 번 줬는데. 끝내 고집을 부리더군.”
청의 몸이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로 크게 움찔했다. 그러나 황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손길로 맵시 있는 매듭을 만들어 낸 황제가 그제야 시선을 마주했다.
“그것이 못내 서운해서……. 나도 하나, 거짓말을 했어.”
그 거짓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청은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서 있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황제는 마지막으로 검을 청의 허리에 채워 주었다. 장식 술이 달린 끈을 단단히 매어 검집을 고정했다. 가슴과 어깨가 서로 닿을 듯 말 듯 바짝 가까워졌다. 상대방의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에서, 황제가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반성은 많이 했어?”
청이 대답하기도 전에 황제는 몸을 휙 돌려 방을 나섰다. 청은 반사적으로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현실과 동떨어진 꿈을 꾸는 기분으로 침전의 문지방을 넘고 전각의 문을 나섰다. 허리춤에서 덜컥이는 묵직한 검이, 단정히 묶은 머리카락이, 겹겹이 껴입은 관복이 몹시도 어색하게 느껴졌다.
밖은 화창한 대낮이었다. 눈부시게 새하얀 볕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근처에 있는 숲에서 풀 내음 섞인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왔다. 뒤늦게 깨달았다. 가시나무 울타리 안에 갇힌 이후, 처음으로 제 발로 걸어 나와 맞는 햇살이었다.
목조 건물을 빼곡하게 둘러싸고 있던 가시나무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무가 뽑혀 나가 맨흙만 남은 자리를 멀거니 바라보다 걸음을 옮겼다. 전각 뒤에 병풍처럼 펼쳐진 숲이 점점 시야에서 사라지고 익숙한 풍경이 나타났다. 하늘을 향해 우아하게 치솟은 기와의 곡선과 두 팔을 벌려도 안을 수 없을 정도로 웅장한 기둥, 말끔히 닦여 자갈 하나 떨어져 있지 않은 통행로. 한때 청이 제집처럼 드나들었으며, 목숨을 바쳐 일했던 곳. 황궁이었다.
큰길가에 나가자 황실의 인장이 찍힌 가마 두 대와 함께 가마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황제와 가끔 들르는 의원을 제외하고는 너무도 오랜만에 보는 타인이었다. 청은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황궁 이곳저곳을 누비다 보면 높으신 분을 태운 가마 행렬은 숱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청이야 황궁과 황제를 수호하는 금군의 수장이었으니 짧은 거리는 순찰을 겸하여 걸어 다녔지만, 보통 황족들이나 귀족들은 치렁치렁한 의복과 장신구 때문에 거동이 여의치 않아 가마를 탔다. 그러니 가마꾼들이 황제를 기다리고 있는 것도 별 이상할 것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상하게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껏 좁은 전각에 갇혀 학대당하고 범해지기를 반복했던 청에게 갑작스럽게 나타난 낯선 이들의 존재는 두렵게 느껴졌다. 평생 어두컴컴한 굴에 갇혀 살았던 이가 갑자기 태양 아래로 나선 것만큼이나 생경했다.
“폐하, 저…… 저자들은…….”
청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횡설수설하며 황제의 뒤에 몸을 숨겼다. 저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그를 흘긋 돌아본 황제가 희미하게 웃었다.
“대해단의 주인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길이 평안을 누리소서.”
황제를 발견한 가마꾼들이 일제히 일어나 땅에 이마가 닿도록 깊게 고두했다. 그들은 곧 창백한 낯빛으로 황제의 뒤에 우두커니 서 있는 청을 발견했다. 검은 무관복과 보호구 위에 수놓인 금군의 인장에 눈길을 주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금군 대장군을 뵙습니다.”
모든 것이 너무도 이상했다. 대역 죄인인 자신을 태연하게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는 황제도, 이미 불릴 자격이 없어진 호칭으로 청을 부르며 예를 갖추는 가마꾼들도. 기묘한 놀이판의 한가운데에 혼자 영문을 모르고 덩그러니 남겨진 느낌이었다.
곧 그들을 태운 가마가 움직였다. 청은 몸을 뻣뻣하게 굳히고 내내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앉아서는 안 될 자리에 앉아 가서는 안 될 곳으로 가고 있는 것 같았다. 따사로운 햇살이 사방을 비추고 있거늘, 그는 오히려 뼈에 사무치는 한기를 느꼈다.
어설프게 팔걸이에 얹혀 있던 손끝이 움찔 움직였다. 의원이 매일같이 정성껏 연고를 발라 준 것이 무색하게도 청은 불안해하는 기색으로 손끝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살갗에 일어난 거스러미가 뜯겨 나가고 손톱 끄트머리가 딱딱 소리를 내며 깨어졌다. 청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마는 널찍한 황궁의 대로 가운데를 평온하게 가로질러 나아갔다.
* * *
가마는 널찍하고 웅장한 건물 앞에 도착했다. 높다란 정문 위에 달린 현판이 보였다. 운의전. 황후의 처소였다. 청의 손으로 직접 죽인 소년이 지내던 곳.
“안 됩니다. 저는, 전 여기 들어갈 자격이 없습니다.”
청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황제는 손을 뻗어 직접 청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어 주며 태연하게 못을 박았다.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는 내가 결정해. 그대가 아니라.”
“하오나, 폐하.”
“계속 들어가기 싫다 칭얼대면, 운의전 뜰 한복판에서 다리를 벌리고 박히고 싶다는 뜻으로 알아듣지.”
침상을 데울 용도로 쓰는 성노에게나 할 법한 모욕적인 발언이었다. 분노 대신 비참한 체념이 가슴속을 메웠다. 황제가 왜 그를 여기까지 끌고 왔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범행 현장을 직접 보게 하여 죄책감을 되새겨 주려는 목적일까, 그렇지 않으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일까. 황제의 속내는 언제나처럼 종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황제의 명을 거스를 수도 없었기에, 그는 결국 황제의 뒤를 따라 비척비척 걸음을 옮겼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이 된 기분이었다.
청이 기억하는 운의전은 항상 화초들로 가득했다. 황후는 찻잎뿐만 아니라 식물이라면 뭐든지 좋아했다. 다른 후궁들이 귀금속과 비단·진귀한 향료 따위를 모을 때, 황후는 싱싱한 화초로 침소를 꾸몄다. 그러나 지금 운의전 안은 휑하기 짝이 없었다. 섬세하게 관리해 주지 않으면 금방 시들어 버리는 생화와 난초 따위는 모두 치운 지 오래였다. 생활감이 느껴지지 않는 실내가 몹시 황량하게 느껴졌다.
“화, 화,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길이 평안을 누리소서.”
마른행주로 창틀을 닦고 있던 궁인 하나가 황제와 청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 넙죽 엎드렸다. 못 볼 사람을 본 듯한 반응이었다. 황제는 시큰둥해하는 태도로 까딱 턱짓을 했다.
“물러나 있어라.”
“예, 명 받들겠사옵니다.”
안쪽에 있는 침전으로 곧장 가로질러 다가간 황제는 길게 늘어뜨린 주렴을 걷었다. 홍옥 구슬을 일일이 꿰어 만든 주렴 사이로 방 안의 풍경이 언뜻 보였다. 하늘하늘한 천개를 드리운 침상 안에 누군가가 누워 있었다. 청이 잊으려 해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이가.
어금니가 따닥따닥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청은 무심코 당장이라도 힘이 풀려 꺾일 것 같은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뒤돌아 방을 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황제가 그를 확 끌어당겨 자신의 앞에 세우는 것이 빨랐다. 졸지에 청은 황제보다도 더 가까운 자리에서, 고작 서너 걸음 간격을 두고 침상을 응시하게 되었다.
“왜, 어째서…….”
반투명한 천개 너머로 눈을 감고 누운 황후의 얼굴이 보였다. 안색이 창백하고 병색이 짙어 보이긴 했지만, 청이 몇 번이고 환각으로 보았던 푸르죽죽한 망자의 낯이 아니었다. 고운 손이 깍지를 낀 채 배 위에 얌전히 올라가 있고, 두꺼운 비단 금침 아래에서 가슴팍이 미미하게 오르내렸다.
“그날 황후의 침소에 자객이 들었다. 내가 변경 정벌로 오래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감히 황후를 해치려 한 것이지.”
넋이 나간 청이 황제를 돌아보았다. 초점 없는 눈이 빛을 잃고 까맣게 죽어 버렸다. 황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침상에 누운 황후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황후는 침상 아래에 숨어 있던 자객에게 불의의 기습을 받아 명을 달리할 뻔했지만, 다행히도 그때 마침 황명을 받고 궁에 돌아온 금군 대장군이 운의전을 방문한 참이었다.”
“그, 그게 무슨.”
“조금만 늦었다면 돌이킬 수 없었겠지만, 재빨리 사태를 파악한 대장군이 달려 들어가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 황후는 중상을 입었으나 다행히 목숨만은 건졌고.”
“도대체……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폐하…….”
“그때 운의전 안팎에서 일하고 있던 궁인들은, 자객이 숨어드는 것도 모르고 황후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모두 처형되었다. 마찬가지로 진범 대신 애꿎은 대장군을 황후 시해범 혐의로 끌고 가서는 온갖 고초를 겪게 만든 무능한 관리들도 전부 목이 잘렸고. 목만 잘렸겠나. 혀를 뽑고 눈알을 파고 귀를 잘라 성문에 사흘 밤낮을 걸어 두었지.”
“…….”
“황후는 자객에게 당한 상처가 깊어 혼수상태에 빠졌고, 마찬가지로 자객과 몸싸움을 벌인 데다 억울하게 누명까지 썼던 대장군 또한 몸이 쇠약해져 먼 별장에서 정양 중이다.”
은은하게 켜 놓은 최소한의 조명 외에는 아무런 빛이 들지 않아 컴컴한 침전 안. 촘촘하게 드리운 영롱한 홍옥 주렴을 배경으로, 황제는 꽃이 활짝 피어나듯 화사하게 웃었다.
“예락, 이것이 황후 시해 사건의 전말이야.”
황제가 말하는 바를 깨달은 순간, 청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견딜 수 없이 어지러웠다. 헛구역질이 나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이대로 두면 그대는 역사에 황후를 죽인 자로 남을 테니까.”
황제는 청의 손을 잡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손등에 깊게 입술을 눌렀다. 팔뚝부터 손등까지를 감싸는 붉은 보호구, 그중에서도 금군의 인장이 찍혀 있는 손등 위에 황제의 입술이 낙인처럼 내려앉았다.
“그대의 이름이 내가 아닌 다른 이와 나란히 기억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어.”
더 이상 황후를 바라볼 수 없었다. 자신이 죽였다 믿었던 이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했거늘, 죄책감이 덜어지기는커녕 더해졌다. 청은 기름칠을 하지 않은 목각 인형처럼 삐걱삐걱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똑바로 봐야지. 그대가 한 짓이잖아.”
“흐, 읏…….”
황제가 뒤에서 팔을 뻗어 청의 턱을 붙잡았다. 얼굴을 정면에 억지로 고정해 놓고, 눈앞에 누운 황후에게서 눈을 돌리지 못하게 했다.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다음 순간 불덩어리처럼 뜨거운 열기가 심장에서 확 솟구쳐 올랐다. 절망인지 울분인지 허무함인지는 알 수 없었다.
“참으로 너무하십니다. 어째서입니까, 폐하. 왜 제게 이제껏……. 왜 제게 이리도 잔인하십니까. 대체 왜……!”
고개를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자 청은 이번엔 손을 들었다. 필사적으로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으며 울부짖었다. 하지만 그 반항조차도 얼마 가지 못했다. 황제가 청의 양 팔목을 한데 움켜쥐고 뒤로 꺾어 버린 탓이었다.
“아악!”
큼직한 손아귀에 구속당한 팔목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청이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뒤이어 억센 힘으로 고개가 확 돌아갔다. 황제가 얼굴을 틀어 입술을 물어뜯었다. 입술이 과격하게 벌어지고 혀가 뒤엉켰다. 앞니끼리 부딪쳐 딱딱한 소리가 났다.
짐승처럼 달려들어 입을 맞춘 탓에 버석버석하게 말라 있던 입술이 금세 터졌다. 타액에 옅게 피 맛이 섞여 들었다. 목구멍 안쪽까지 혀가 우악스럽게 틀어박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으, 흐으, 읍.”
청이 이리저리 몸을 뒤틀며 저항했다. 힘껏 몸부림친 끝에 입술이 잠깐 떨어졌다. 황제는 턱을 잡고 있던 손을 내려 아예 청의 목을 틀어쥐었다. 그리고 도로 입술을 겹쳤다.
“헉!”
숨통이 조여 목 안쪽에서 컥컥대는 소리가 났다. 황제는 그 소리마저 달게 받아 삼키며 입 안을 헤집었다. 젖은 입술이 서로 질척하게 문질러졌다. 숨을 쉬지 못하자 점점 몸에서 힘이 빠졌다. 귓가에서 들리는 이명이 점점 커지고 시야가 노랗고 파랗게 얼룩질 무렵, 황제는 목을 조르던 손을 놓으며 입술을 뗐다. 청은 물에 빠졌다 간신히 건져진 사람처럼 절박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흐윽, 헉, 허억…….”
이제 끝난 것인가 싶어 무심결에 안도하려는 찰나, 황제의 큰 손이 옷깃 사이로 불쑥 파고들었다. 목덜미와 쇄골을 마구잡이로 더듬다가 자신이 손수 매어 줬던 허리끈을 무자비하게 풀어 헤쳤다.
“폐하……!”
발작적으로 터져 나온 외침이 형편없이 갈라졌다. 황제는 청의 뒷덜미를 가볍게 깨물며 손을 좀 더 깊이 밀어 넣었다.
“그렇게 음탕한 얼굴로 박아 달라 애원하듯 쳐다보니, 동하지 않을 수가 있나.”
“싫습니다. 여기서는 싫습니다! 제발, 적어도, 황후 전하가 없는 곳에서.”
“쉿……. 조용히 해야지. 이러다 깨겠어.”
황제 또한 목이 가볍게 잠겨 있었다. 그가 가만히 황후 쪽을 눈짓했다. 바르작대며 몸부림치던 청이 한순간 얼어붙었다.
“고통에 시달리다 깨어난 설영의 눈앞에서 우리 둘이 붙어먹고 있는 꼴을 보여 주면, 저이가 퍽이나 좋아하겠군.”
이윽고 청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곧 반항을 그만두었다. 반항해 봤자 달라지는 것이 없음을 알아서였다.
청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거칠게 잡혀서 뒤로 꺾인 팔이 끊임없이 통증을 호소했다. 황제가 뒤에서부터 손을 뻗어 그를 더듬어 내려갔다. 그는 옷을 벗기면 벗기는 대로, 몸을 만지면 만지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청이 헐떡이는 숨 사이사이로 흐느끼듯 웃었다. 어깨를 들썩이며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폐하께서는……. 지금껏 제가 마주한, 가장 큰 불운이십니다.”
음울한 절망에 푹 젖은 목소리였다. 언뜻 광기마저 느껴졌다.
“그래?”
황제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옷자락 사이로 드러난 청의 맨어깨에 입술을 묻었다.
“그것참 공교롭군. 그대도 마찬가지야.”
쿵! 둔탁한 소리를 내며 청의 상체가 탁자 위에 밀어붙여졌다. 황제는 그의 양 팔목을 한 손 안에 움켜쥐고 뒤로 꺾어 비틀었다. 청에게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청의 뒤통수를 빤히 바라보던 황제는 이내 그의 머리채를 하나로 묶은 비단 끈을 거칠게 풀어 손목을 칭칭 휘감았다. 탁 풀린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아으, 윽……!”
옴짝달싹할 수 없는 청을 대신하여, 황제는 친절하게 그의 머리통을 잡아 황후가 잘 보이는 방향으로 돌려 주었다. 혹여나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릴까 봐 흐트러진 귀밑머리를 손수 귀 뒤로 넘겨 주기까지 했다.
“잘 보여?”
얇은 천개 건너편에서 잠들어 있는 황후의 모습이 시야에 정면으로 들어왔다. 청의 표정이 수치와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설영이 도중에 깨기라도 하면 반갑게 맞아 줘야 할 것 아닌가. 참으로 오랜만에 만나는 것일 텐데.”
황제는 그를 짓누르고 손에 잡히는 대로 옷을 끌어 내렸다. 그가 직접 입히고 매무새를 다듬어 주었던 옷가지들이 허물처럼 너무도 쉽게 벗겨져 나갔다.
“황후를 연모한다는 거짓말을 내가 믿을 것 같았나?”
황제는 지하 감옥에서 창살 너머로 청을 마주했던 때를 떠올렸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핑계를 대는 게 우습고 같잖았다.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벌벌 떨 거면서, 그런 쓸데없는 짓은 왜 했는지.
청의 자백이 거짓임을 머리로는 알았다. 너무도 잘 아는데, 그런데도 이상하게 화가 났다.
자신의 앞에서는 매번 시련을 견디는 순교자 같은 가련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말을 아꼈으면서, 고작 검 한 자루를 주는 것뿐인데도 떨떠름하게 몸을 사렸으면서. 황후를 위해 지리멸렬한 핑계를 쥐어짜 내어 필사적으로 거짓 사랑을 고백하는 꼴이 괘씸했다.
“왜 하필 핑계를 대도 그딴 핑계를 댔어. 잠깐이지만 정말로 그대를 죽여 버릴까 고민했지 않나. 응?”
황제는 청의 등 위로 몸을 겹쳤다. 청의 상체를 완전히 탁자 위에 찍어 누른 채, 귓가에 가만히 속삭였다.
“그럼 다시 묻지. 설영을 왜 죽였어? 아니, 왜 죽이려 했어?”
엉망으로 풀어 헤친 옷자락 사이로 손이 불쑥 파고들었다. 청이 곧장 대답하지 않자 큰 손이 성기를 터뜨릴 듯 세게 움켜쥐었다.
“읏!”
순간 눈앞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통증으로 전신이 빳빳하게 경직되었다가, 다음 순간 힘이 쭉 빠졌다. 힘겹게 바닥을 딛고 선 다리가 풀려 꼴사납게 고꾸라질 뻔했다. 그러나 청은 끝내 진실을 털어놓지 않았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차갑고 딱딱한 탁자에 뺨을 기댄 채 중얼거렸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눈동자에는 황후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말할 수 없다, 라.”
황제는 잠시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러다 엷게 피식 웃었다.
“고집부리긴.”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던 옷자락이 위로 확 젖혀졌다. 황제는 청의 허리를 큼직한 손으로 움켜쥐고, 한껏 힘을 주어 꽉 눌렀다.
“크, 흑!”
하복부가 탁자 위에 인정사정없이 눌렸다. 안에 든 장기가 죄다 터질 것 같았다. 전혀 숨을 쉴 수 없었다. 청이 힘겹게 몸부림치며 목이 졸린 듯한 소리로 신음했다.
이리저리 간헐적으로 들썩이는 엉덩이가 시선을 잡아 끌었다. 꼭 어서 박아 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았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절박하게 몸을 뒤틀며 살고자 몸부림치는 청을 찍어 눌러 놓고, 황제는 그 상태로 성기를 퍽 쑤셔 넣었다.
“악……!”
아무런 전희 없이 삽입한 탓에 기어이 입구가 터졌다. 황제가 무작정 꾹꾹 밀어 넣자 성기가 찢어진 상처를 더욱 크게 벌리며 조금씩 틀어박혔다.
“헉…….”
반사적으로 비명을 지르려다 침상에 누운 황후가 눈에 들어왔다. 아찔했다. 중태에 빠진 황후가 쉽사리 깨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청은 필사적으로 비명을 억눌렀다. 입 안의 살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씹으며 이를 악물었다.
황제의 큰 손으로 꽉 눌러 놓은 배 속에서 성기가 제멋대로 꿈틀거렸다. 커다란 성기가 뻑뻑한 속살을 쾅 찍고 다시 나갈 때마다 격통으로 목이 뜨끈해졌다. 끔찍한 고통을 참느라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굵직한 절구로 내벽을 쿵쿵 내리쳐 짓이기는 듯 아팠다. 이러다간 정말로 배가 터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장을 뚫고 뱃가죽을 가르고, 피범벅이 된 성기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뒤에서 퍽퍽 치받는 움직임에 맞추어 청의 머리가 탁자에 작게 부딪혔다. 쿵, 쿵. 둔탁한 소리가 났다. 양 팔목이 뒤로 꺾인 채, 그의 몸 또한 탁자 여기저기에 덜컥덜컥 부딪혔다. 고요한 실내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그것뿐이었다.
황제는 문득 청의 표정이 궁금해졌다. 눈물을 줄줄 쏟으며 서럽게 울고 있을까, 아니면 고통에 잔뜩 일그러진 낯을 하고 있을까. 황후 쪽으로 향하게 두었던 청의 고개를 돌려 보았다.
청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저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허공을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성기가 내벽을 쑤실 때마다 몸이 격렬하게 흔들려서, 자꾸만 탁자에 이마를 잘게 찧었다.
“청아.”
황제가 그를 가만히 불렀다. 청은 대답이 없었다. 힘없이 벌어진 입술에서는 비명과 신음조차 새어 나오지 않았다. 황제는 더 기다리지 않고 서슴없이 손을 들었다. 철썩! 청의 고개가 휙 꺾였다. 한계까지 벌어져 억지로 성기를 물고 있던 내벽이 움찔 떨리며 더욱 좁아졌다.
멈춰 버린 기계의 태엽을 다시 감은 것처럼, 청은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하염없이 더듬던 눈동자가 마침내 황제를 향했다. 자신의 뺨이 벌겋게 물든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윽, 흐으, 읏…….”
“자세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
황제는 파들파들 경련하는 그의 상체를 확 일으켰다. 안에 성기가 들어찬 채로 일어서자, 각도가 바뀌어 단단한 귀두가 배꼽 아래를 뻐근하게 찔러 왔다. 몸을 완전히 곧게 세웠다간 귀두가 배 위로 툭 불거질 것 같았다. 청은 바로 서지 못하고 허리를 어정쩡하게 굽혔다.
“이러면 황후가 더 잘 보이지?”
“폐하, 제발…….”
“이제 집중해. 딴생각하지 말고.”
탁자에 엎어진 자세로 퍽퍽 박힌 탓에 청의 가슴팍이며 배에 온통 벌겋게 쓸린 자국이 나 있었다. 황제는 뒤에서부터 손을 뻗어 그의 몸을 느릿하게 만졌다. 탁자 모서리에 눌려 시뻘건 선이 그어진 아랫배를 쓰다듬고, 위로 타고 올라가 유두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말랑말랑한 유두를 끈질기게 만져 주자 곧 피가 몰리며 단단해졌다. 빳빳하게 일어선 유두 끝을 손가락 사이에 끼워 비비다가 툭 튕겼다.
“흐윽…….”
청이 무심코 몸을 움찔 굳혔다가, 배 안 깊숙이 파고든 성기가 적나라하게 느껴지자 제풀에 놀랐다. 황제는 청의 묶인 팔목을 잡아 뒤쪽으로 이끌었다. 여전히 성기를 구멍에 반쯤 박아 놓은 채였다.
그는 탁자 근처에 놓인 의자에 풀썩 걸터앉으며 청을 그 위에 꽂았다. 청은 양손이 묶인 탓에 저항할 시도조차 못 하고 고스란히 성기 위에 앉혀졌다. 피에 젖은 구멍이 스스로의 체중을 실어 성기를 깊숙이 삼켰다. 차마 소리가 되지 못한 비명이 터졌다. 장기가 죄다 갈비뼈 위쪽으로 쏠리는 느낌이었다.
“흐으, 윽, 아…….”
꾸역꾸역 내장을 벌리고 들어오는 성기가 버거워서, 청은 본능적으로 발끝으로 바닥을 꾹꾹 밀어냈다. 조금이라도 몸을 띄워 보려는 듯이.
황제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감상했다. 잔뜩 힘이 들어가 곧게 팬 등줄기와 부들부들 떨리는 어깨를 지켜보았다. 그러다 청이 허리와 허벅지에 힘을 주어 비틀비틀 일어서려는 것을 다시 주저앉혔다.
“아윽!”
“설영에게 신음으로 인사를 대신하려고? 몹시도 인상 깊은 해후가 되겠는데.”
황제가 시큰둥하게 그를 비난했다. 등을 보이고 그의 위에 올라앉아 어쩔 줄 몰라 하는 청의 허벅지를 한껏 벌렸다. 혹여나 황후가 정신을 차린다면, 관복을 거의 벗다시피 어설프게 걸친 청이 황제의 성기를 품고 다리를 활짝 벌리고 있는 것이 정면에서 똑똑히 보일 터였다.
황제가 밑에서부터 쳐올릴 때마다 청의 성기도 그에 맞추어 위아래로 흔들렸다. 황후의 침상에서는 씁쓸하게 달인 약 냄새가, 황제에게서는 시원한 향이 났다. 짙은 향들이 제멋대로 뒤섞여 흘러들어 왔다. 어지러웠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흐, 으…… 읏…….”
황제가 한 팔로 청의 허리를 감았다. 그저 무자비하게 틀어박혔다 빠져나가기만을 반복하던 움직임이 바뀌었다. 굵직한 귀두가 내벽을 지그시 위아래로 문질렀다.
“아……!”
황제의 성기가 배 속을 긁을 때마다 자꾸 몸에 힘이 들어갔다. 생살이 찢어진 입구에서 피어오르던 통증도 점차 무뎌졌다. 청은 눈을 질끈 감았다. 때리든 폭언을 퍼붓든 상관없으니, 한시라도 빨리 황제가 만족하여 제 몸에서 성기를 빼내 주기만을 바랐다.
그때, 황제가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청아……. 그렇게 좋아?”
처음에 청은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내벽에 거대한 기둥이 몇 번 더 은근하게 비벼지고 나서야 뒤늦게 깨달았다. 감았던 눈을 뜨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성기가 반쯤 발기해 있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자신은 음인도 아닌데, 최음제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도 뒤로 느끼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아, 아니…… 아닙니다, 이건…….”
“아니라고? 네 뒷구멍이 내 자지를 아주 꽉꽉…… 씹어 먹는데.”
“흐, 아, 으윽.”
청이 공포에 질려 고개를 마구 저었다. 스스로가 이 가학적이고 비정상적인 행위에서 쾌감을 얻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황제가 발갛게 열이 오른 얼굴로 살포시 웃었다. 충분히 만족스러운 반응이었다. 그는 청의 허리를 양손으로 꽉 붙잡았다. 그리고 아래에서 거세게 쾅쾅 쳐올리기 시작했다.
“아으, 윽!”
더는 신음을 참을 수 없었다. 아래로 늘어져 있던 성기가 황제의 움직임에 따라 마구잡이로 흔들리며 점차 형태를 갖추었다. 청은 허리를 이리저리 들썩이며 원치 않는 쾌감을 피해 몸부림쳤다. 성기가 박히는 각도가 바뀌면 이 꺼림칙한 감각이 사라질까 해서, 필사적으로 몸을 뒤틀었다.
그것이 오히려 황제를 자극했다. 그렇지 않아도 빠듯하게 좁은 내벽이 쉴 새 없이 씰룩이고 꿈틀거리며 성기를 조여 물었다. 황제가 긴 속눈썹을 깜빡이며 달콤한 숨을 내쉬었다.
“그리 보채지 않아도, 원하는 대로 박아 줄 테니까.”
“헉, 흐으, 안, 안 됩니다, 폐하, 제발.”
“제발 싸게 해 달라고?”
핏줄이 돋은 황제의 손이 청의 허리를 움켜쥐고 수직으로 퍽퍽 찍어 내렸다. 몸이 타의에 의해 허공에 조금 떴다가 다시 아래로 꽂혔다. 맨살끼리 부딪쳐 철썩철썩 소리가 났다. 팔이 구속되어 있는 탓에 저항할 수도 없었고, 허리를 붙든 황제의 손 탓에 달아날 수도 없었다. 한계까지 벌어져 빠르게 드나드는 성기를 버겁게 받는 구멍이 얼얼했다.
“아, 안 됩……. 황후 전하께서…… 헉, 깨어나시면, 저…… 를, 읏, 용서하지 않으실 겁니다.”
마침내 청이 꺼질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최후의 보루였다. 황제는 청의 손목에 묶인 끈을 풀었다. 스르륵 매끄럽게 풀려나가는 비단 끈을 팽팽하게 당겨 손아귀에 감으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럼……. 깨어나기 전에 죽일까?”
섬뜩했다. 청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다음 순간 비단 끈이 뒤에서부터 불쑥 나와 청의 목에 걸렸다. 목젖에 부드러운 비단이 막 스친 찰나, 황제가 끈을 확 잡아당겼다.
“크, 헉!”
목뼈가 부러질 듯 강한 힘으로 숨통이 틀어막혔다. 청의 고개가 확 꺾여 강제로 젖혀졌다. 뒤통수가 황제의 귓가에 닿았다. 황제는 올가미로 짐승을 포획하듯 청의 목을 휘감아 조르며 안을 쾅, 거세게 때려 박았다.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는 청의 엉덩이를 꾹 잡아 눌러 강제로 앉혔다.
“컥……!”
청이 컥컥대며 헛구역질을 했다. 꺼떡이던 청의 귀두에서 맑은 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 쭉쭉 기세 좋게 쏘아진 물줄기가 탁자며 바닥이며, 황후의 침소 곳곳에 마구잡이로 뿌려졌다.
황제는 성기를 짓눌러 터트릴 듯 꽉꽉 조여 오는 속살을 가르고 들어가 가장 깊은 곳에 사정했다. 정액이 내벽을 울컥울컥 적시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성기를 퍽퍽 박았다. 활짝 벌어진 청의 허벅지가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길고 긴 사정이 완전히 끝나고 나서야 청의 목을 조르던 끈을 풀어 주었다. 목의 여린 살갗에 시뻘겋게 자국이 남았다. 흠뻑 싸지른 정액이 구멍을 비집고 나와 피와 섞여 뚝뚝 흘렀다. 숨이 모자라 괴로워하던 청은 결국 의식을 잃었다. 그의 몸이 중심을 잃고 뒤로 기울어 황제의 품에 풀썩 쓰러졌다.
“농담이었어, 청아……. 뭘 그리 겁을 먹고 그래.”
황제는 기절한 청의 뺨에 자신의 뺨을 비비며 수줍게 웃었다. 저만치 앞에서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황후는 보이지도 않는 것 같은 태도였다.
* * *
눈을 떴다. 밝지 않은 조명이 방 안을 어슴푸레하게 밝히고 있었다. 천장에 물결처럼 어른어른하게 불그스름한 빛이 번졌다. 몸이 무겁고 정신이 몽롱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자신의 이마에 얹힌 물수건을 갈아 주고 있는 궁인이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선이 마주쳤다.
“헉.”
궁인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손에서 젖은 수건이 풀썩 떨어졌다. 궁인은 물수건을 놓친 것도 모르고 혼비백산하여 허둥지둥 달려 나갔다.
“마마께서…… 황후 마마께서 깨어나셨사옵니다!”
절간처럼 썰렁하던 운의전 안이 이윽고 소란스러워졌다.
* 여림심연(如臨深淵) :
깊은 못을 건너는 것과 같이.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