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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리박빙(如履薄氷) (5/10)

여리박빙(如履薄氷)

지(池)씨 가문은 내로라하는 명문가였다. 전형적인 문관 집안이라 대대로 벼슬아치들이 많았다. 가풍이 청빈하여 사치를 즐기지는 않았지만, 황도 한복판에 널찍한 저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유서 깊은 집안도 몰락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죄인 지연학은 황제 폐하를 능멸하고 역모를 꾀한 죄로 처형되었다. 관직을 박탈하고 모든 재산을 몰수한다.〉

귀에 익은 이름이 들렸다. 청의 아버지였다. 여러 명의 관리들이 정갈하게 가꾸어 놓은 저택 뜰 한복판을 흙발로 짓이기며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며칠 전 한밤중에 느닷없이 포졸들이 들이닥쳐 그를 체포해 갔다. 아버지는 분명히 무슨 오해가 있었던 거라며, 곧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의연하게 식솔들을 달래고 포졸들을 따라 떠났다. 그 뒤로 줄곧 감감무소식이어서 집안 식구들 모두가 걱정하던 차에, 갑자기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청은 옹기종기 모여 선 가족들과 하인들을 자신의 뒤로 보내며 한 걸음 나섰다. 아버지가 없을 땐 그가 가문을 이끌어야 했다.

병사들이 짊어지고 온 거적을 툭 던지듯 내려놓았다. 둘둘 말아 놓은 거적이 펼쳐지며 안이 보였다. 머리가 없는 시체였다. 너무도 익숙한 이의.

〈아악……!〉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목이 잘린 채 돌아온 자신의 남편을 알아본 어머니가 그 자리에 풀썩 쓰러져 혼절했다. 시종들이 다급하게 어린 동생들의 눈을 가렸지만 이미 늦었다. 처참한 광경을 보아 버린 아이들 또한 숨넘어가게 울기 시작했다.

예술과 풍류가 함께하던, 영원히 평온할 것만 같던 청의 일상은 그날을 기점으로 완전히 망가졌다.

선황은 두 가지에 미쳐 있었다. 전쟁과 엽색(獵色). 매해 조공을 받으며 속국으로 남겨 두던 변방의 작은 나라들을 무작정 약탈했다. 민가에 불을 지르고 백성들을 학살했다. 여자와 남자를 가리지 않고 얼굴이 좀 반반하다 싶은 이들을 막사로 잡아 와 내키는 대로 범하고는, 죽든 말든 아무렇게나 내버려 두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정복 전쟁을 벌이니 아무리 강건한 제국이라도 견뎌 낼 리가 없었다. 금은보화가 가득하던 국고가 점점 빈궁해졌다. 그러자 황제는 막대한 전쟁 비용을 귀족들로부터 받은 뇌물과 백성들로부터 착취한 세금으로 충당했다.

6황자의 생모 또한 황제가 정복지에서 포로로 잡아 온 피해자 중 한 명이었다. 자기 아이를 가졌다니 일단 데려와 품계를 내리고 황궁 구석에 처박아 두긴 했지만, 황제는 후궁과 6황자에게 시종일관 무관심했다. 여기저기 싸지르고 다닌 씨가 하도 많아 굳이 천한 이민족의 피가 섞인 아들에게까지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그 잔인하고 추악한 작태를 공개적으로 지탄한 것이 청의 아버지, 의부경 지연학이었다. 황제가 두려워 모두가 몸을 사리던 와중에 그 혼자만이 과감한 결단을 했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황제는 자신의 오른팔인 대내상과 결탁하여 지연학에게 누명을 씌웠다.

황궁의 최고 권력자가 황제라면 황궁 밖의 최고 권력자는 대내상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황제의 신임을 받는 대내상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말 몇 마디로 역모 죄를 뒷받침할 증인이 생기고 증거가 생겼다. 지연학은 제대로 된 재판조차 받지 못하고 즉각 참수형에 처해졌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청은 자신의 무력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림을 그리거나 시를 짓는 재주 따위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그런 것들로는 순식간에 텅 비어 버린 저택의 곳간을, 뿔뿔이 흩어진 가솔들을, 아버지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정신을 놓아 버린 어머니를 되돌릴 수 없었다.

현재 청의 힘으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아무런 벼슬도 권세도 없는 그저 곱게 자란 도련님일 뿐이었다.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권력이,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절대적인 권력이 필요했다.

그때 한 사람이 떠올랐다. 황궁 구석의 별궁에서 모두의 냉대를 받으며 모친과 단둘이 살다가, 끝내는 그 모친마저 세상을 떠나고 완전히 혼자가 되어 버린 비운의 황자. 희박할지언정 그에겐 가능성이 있었다. 명목상으로나마 6황자에게도 황제를 끌어내리고 대내상의 목을 칠 위치에 오를 가망이 분명 존재했다. 수행자를 유혹하여 타락시키는 마귀처럼, 달콤하고 실낱같은 희망이 망가진 마음에 파고들었다.

앞뒤 따질 겨를 따윈 더 이상 없었다. 청은 이제껏 가진 자의 여유와 약간의 연민을 가지고 대했던 남자를 절박하게 찾아갔다. 상대의 반응을 확인할 새도 없이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황자 전하, 뭐든 하겠습니다. 제 목숨을 버리라면 버리고, 사람을 죽이라면 죽이겠습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반드시 전하께 옥좌를 바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도와주십시오…….〉

창백한 얼굴이 눈물로 엉망이 되어 고개를 숙이고 애원하는 청을 내려다보며, 황자는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웃었다. 제 발로 덫에 걸려든 사냥감을 보듯.

* * *

청은 여전히 황궁 변두리의 전각에 홀로 머물렀다. 전각을 둘러싼 가시나무 울타리는 이미 오래전에 치워졌건만, 그는 문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아니, 나갈 수 없었다. 죄책감과 체념이라는 무형의 가시나무가 그를 단단히 옭아매고 있었다. 황후가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면 모를까, 그가 이 황궁 안에서 살아 숨 쉬고 있음을 확인한 지금 청은 차마 바깥으로 나설 수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그가 상처를 회복하여 곧 정신을 차린다면, 그리고 청이 저지른 짓을 다른 이들에게 낱낱이 증언한다면. 그때야말로 청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될 것이다. 그는 언제 내려질지 모르는 사형 선고를 기다리는 죄수의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청을 친히 운의전까지 데리고 가 황후의 생사를 확인시켜 준 이후로 황제의 발길이 뚝 끊겼다. 이제껏 이렇게 긴 시일 동안을 찾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황제는 청의 존재를 말끔히 잊기라도 한 것처럼 모습을 감추었다.

사실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청도 황제도, 서로가 서로에게 거짓말을 했음을 시인했다. 진실을 알고 절망에 몸부림치는 청을 감상하며 실컷 즐겼으니 이제 그에게 더 볼일은 없다 여긴 것일지도 몰랐다.

심심풀이 내지는 화풀이 대상으로서의 쓸모조차 없어진 청에게 남은 결말은 뻔했다. 의식을 되찾은 황후가 그를 살인 미수범으로 지목하여 사형을 당하거나, 황후가 깨어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 전각에 홀로 버려진 채 방치되어 있다 명이 다할 터였다.

황궁의 나날은 언제나처럼 분주하게 흘러갔다. 그 가운데 청이 머무는 곳만이 다른 세상인 듯 동떨어져 있었다. 고요한 전각의 문지방을 넘나드는 것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탕! 도자기 잔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안에 담겨 있던 물은 반은 이불에 뿌려지고 반은 바닥에 흘렀다.

“…….”

청은 잔을 놓치고도 놓친 줄도 몰랐다. 덮고 있던 이불이 축축하게 젖었는데도 그저 멍하니 앞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제 소임을 다하고 망가져 버린 기계 같았다.

“읏차.”

태의가 익숙한 듯 일어나 바닥에 뒹구는 잔을 주웠다. 다행히도 잔은 금이 가거나 이가 나간 곳 없이 멀쩡했다. 겉보기엔 그저 단순한 백자이지만, 이 물잔 또한 황궁에서 쓰는 물건인지라 그의 봉급을 훨씬 상회했다.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청의 이름도 직책도 그가 처한 상황도 몰랐기에, 그는 오히려 청을 순수한 환자로 대할 수 있었다. 오롯이 측은지심과 사명감만으로 그를 돌보았다. 그가 청이 제국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무관임을 알았다면 이리 성심껏 보살피지는 못했을 터였다. 상처가 느리게 낫는다며 대장군께서 경을 치지는 않을까, 내가 높으신 분들 사이의 정치적 알력 다툼에 잘못 휘말려 버린 것은 아닐까 온갖 걱정을 떠안고 전전긍긍했으리라.

태의는 잔 바닥에 약간 남아 있던 물을 창밖으로 확 버렸다. 그리고 조금 고민하다가 탁자 위에 놓여 있던 탕약 그릇을 들었다. 안에 든 탕약은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고 고스란히 식어 있었다. 그것 또한 미련 없이 버렸다.

더 이상 청에게 수면제는 필요 없었다. 그는 점차 잠드는 시간이 길어졌다. 깨어 있을 때마저도 종종 눈을 뜬 채 깜빡깜빡 정신을 놓았다. 말하는 법도 생각하는 법도 잊은 사람 같았다.

태의는 청을 조심스럽게 침상에 눕히고 약재 상자를 열었다. 태의원에서 지급한 연고 통을 도로 슬쩍 밀어 넣고, 안에 숨겨져 있던 다른 연고를 꺼냈다. 뚜껑을 열고 내용물을 듬뿍 덜어 상처에 발랐다.

청의 목에는 무언가에 졸린 자국이 선명했다. 가장 최근에 생긴 것인데, 얼마나 모질게 졸랐는지 며칠이 지나도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고문하고 치료하고 강간하고 치료하고, 정말로 죽을 지경이 되면 며칠 동안 내버려 뒀다가, 몸이 좀 나아질 만하면 다시 찾아와 한계까지 몰아붙이고. 물론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청이겠지만 그의 상처를 낱낱이 들여다보아야 하는 의원 또한 매번 괴로웠다. 죽일 거면 차라리 단번에 죽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지금도 보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 만큼 안쓰러운 몰골의 환자인데 도대체 괴롭힐 구석이 어디 있다고.

태의는 청이 왜 여기 갇혀 있는지, 대체 무슨 원한을 샀기에 이런 수모를 겪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를 가두어 두라 지시한 이름 모를 상전의 잔혹함에 치가 떨렸다. 사람이라면, 심장이 뛰고 붉은 피가 흐르는 사람이라면 이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얼마나 대단한 분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의 탈을 쓰고 어찌 같은 사람에게 이럴 수가 있나. 인면수심이란 말이 꼭 맞는구나.”

그렇게 중얼거리며 약을 더 바르려다 말고, 태의는 흠칫 놀랐다. 언제부터였는지 정면을 보고 얌전히 누워 있던 청이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만.”

청이 미미하게 인상을 썼다. 안색이 허여멀겋게 질린 가운데 죽은 생선처럼 탁하게 흐려져 있던 눈에 언뜻 빛이 돌아왔다. 태의는 흠칫하며 연고 통을 든 손을 뒤로 숨겼다.

“그분께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잘못은…… 그분이 아니라 제가, 제 마음이…….”

청은 넋 나간 듯 중얼거리던 도중에 스르르 눈을 감으며 잠들었다. 그가 희미한 숨소리를 내며 깊이 잠든 후에도 태의는 한참 동안이나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 * *

“마마, 일어나실 수 있겠사옵니까?”

“괜찮다. 손님이 오셨는데 누워 있을 수는 없지.”

황후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양옆에서 궁인들이 잽싸게 그를 부축했다. 침상에 드리운 천개와 방 입구에 친 홍옥 주렴, 두 겹의 장막 너머로 건너편이 흐릿하게 보였다. 관리들 여러 명이 저만치 멀찍이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무슨……. 무슨 일이지요?”

황후는 말 도중에 마른기침을 했다. 붕대가 칭칭 감긴 가슴이 갑갑했다.

“황후 전하, 쉬시는 와중에 찾아뵈어 송구합니다. 수사 중인 사건과 관련하여 여쭐 것이 있어 감히 무례를 무릅쓰고 알현을 청했습니다.”

“말씀하시오.”

“그날에 있었던 변고에 대해 기억나시는 것이 있사옵니까? 지예락 금군 대장군께서는 먼 지방에서 요양 중이신지라 증언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대장군? 증언?”

“운의전에 숨어들어 전하를 해치려 했던 자객에 대한 증언입니다. 불쾌한 기억을 떠올리게 해 드려 송구합니다만, 진범을 잡아 확실히 뿌리를 뽑아야 다시는 이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 뒤로 황후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관리들의 말을 듣긴 한 건지 의심스러운 멍한 얼굴로 우두커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관리들의 기다림도 그에 따라 점차 길어졌다. 그들은 아직 전하께서 정신이 온전치 않으신 건가, 시일이 더 지난 뒤에 찾아뵈었어야 하는 건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때는 몹시 경황이 없었고, 크게 놀라고 충격을 받았는지라 기억이 또렷하지 않지만.”

오랜 침묵을 깨고 황후가 입을 더듬더듬 열었다.

“아아…… 네. 그것만은 기억나는군요. 대장군께서…….”

방 안팎에 있던 모두의 이목이 알게 모르게 황후에게 쏠렸다. 황후 시해 미수 사건은 무사히 해결되었긴 하나 여전히 의문점이 많았다. 범인의 정체는 무엇인지, 대체 그 삼엄한 경비를 어떻게 뚫고 황후의 침소까지 잠입할 수 있었던 것인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오리무중이었다.

이미 끝난 사건을 함부로 캐 볼 수도 없었다. 황제의 분노를 살까 두려워서였다. 그는 끔찍이 총애하는 황후가 죽을 뻔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먼 변방에서부터 급하게 말을 몰아 귀환했다. 범인이 금세 잡히긴 했으나 신원이 밝혀지지 않았고, 고문에 시달린 끝에 제대로 된 자백을 듣기도 전에 숨이 끊어졌다.

황제는 평소에도 손 속이 잔혹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감히 황후를 건드린 범인을 살려 둘 리가 없었다. 그뿐이랴, 사건에 관련된 관리와 시종들까지 죄다 목이 날아갔다. 이런 판국에 막상 당사자인 황후와 대장군은 너 나 할 것 없이 사이좋게 병상에 드러누워 있으니, 사건의 진상은 내내 미궁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이 순간 황후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가 흘린 한마디에 황궁 전체가 들썩일지도 몰랐다.

“대장군이 제 목숨을 구하였습니다.”

황후는 널찍한 침상에 펼쳐진 비단 금침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핏기 없이 질린 입술을 달싹였다.

“대장군께서 재빨리 그 자객…… 을 제지하지 않으셨다면, 저는 지금 살아서 이 자리에 누워 있지도 못했을 테지요.”

“전하, 그렇다면 범인에 관한 것은.”

황후는 옷소매를 들어 입가를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끔찍한 기억을 떠올린 탓인지 그의 속눈썹이 애처롭게 떨렸다.

“잘 모르겠습니다. 너무도 순식간이었고, 아팠다는 것밖에는.”

관리들은 더 이상 황후에게 증언을 요구하지 못했다. 사경을 헤매다 겨우 깨어난 어린 황후가 새하얗게 질린 낯으로 괴로워하는데, 그런 이를 더는 몰아붙일 수 없었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부디 하루빨리 쾌차하시길 바라옵니다.”

그들은 주렴 너머에서 정중히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당사자의 증언을 들어도 영 소득이 없으니, 아무래도 수사는 이쯤에서 완전히 종결해야 할 것 같았다. 세상에는 너무 깊이 파고들어서는 안 되는 일도 있는 법이니.

* * *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까무룩 잠들었다. 요즘은 종종 그랬다. 잠시 멀거니 넋을 빼놓고 있다 정신을 차려 보면 한나절이, 때로는 하루가 훌쩍 지나가 있었다.

청의 잠을 깨운 것은 창문을 두드리는 옅은 빗소리였다. 창을 닫는 것을 잊고 잠들었는지, 가느다란 빗줄기가 기름을 먹인 나무 창틀 위를 툭툭 그었다. 찬 공기가 들어 방 안이 썰렁했다.

청은 눈을 떴다. 등불 하나 켜지 않은 캄캄한 밤이었다. 황량한 천장만이 보여야 할진대, 뿌연 시야 한쪽에 다른 형체가 들어왔다. 무거운 눈꺼풀을 애써 몇 번 깜빡였다. 눈앞이 천천히 맑아졌다.

침상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황제가 그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방이 어두워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는 가운데, 열린 창을 통해 언뜻 스며든 달빛이 그의 눈동자를 푸르스름하게 물들였다.

“아…….”

청의 몸이 작게 움찔했다. 그는 근래 여러 일을 겪으면서 황제의 옷자락 끄트머리만 보아도 소스라치게 놀라게 되었다.

황제가 손을 뻗어 청의 흐트러진 귀밑머리를 매만졌다. 싸늘하게 식은 손가락이 귓가에 닿았다. 황제는 체온이 높은 편이라 항상 손이 따뜻했는데, 지금은 얼음장 같았다. 손끝에서 차디찬 습기가 느껴졌다. 삐걱대는 머리를 힘겹게 굴린 끝에 바깥에 내리는 비에 생각이 닿았다. 우산을 제대로 쓰지 않고 오신 걸까. 제국에서 가장 귀하신 몸인데, 빗방울 하나 닿는 것도 저어되는데.

“설영이 깨어났어.”

장난감 가지고 놀듯 청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다 말고, 황제가 입을 불쑥 열었다.

“이곳에 다시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베개를 베고 누운 채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던 청이 대꾸했다.

“그가 그날의 사건에 대한 증언도 하였지. 뭐라 말했는지 궁금하지 않나?”

“제 사형 집행일은 언제입니까?”

두 사람은 각자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묘하게 대화가 이어졌다. 청의 물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황제는 덤덤하게 제 할 말만 꺼내어 놓았다.

“그대가 생명의 은인이라 하더군. 그대 덕에 제 목숨이 아직까지 붙어 있는 거라고.”

청은 살짝 벌어진 입술을 다물 생각도 못 하고 얼어붙었다. 이번에야말로 황후의 고발에 의해 목이 잘리진 않을까, 황제가 드디어 마음을 바꾸어 그를 죽여 주기로 한 것은 아닐까. 그런 기대를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순진한 척 세상 물정 모르는 척 해도, 사실은 제법 영리한 사람이야. 곧장 깨달은 게지. 내가 이 사건을 자객의 소행으로 마무리 짓기로 결정했다는 것의, 이제껏 그대를 고스란히 살려 두었다는 것의 의미를.”

“황후 전하께서, 그런…….”

“전혀 예상 못 한 것도 아니지 않나? 예락 그대가 직접 골라 올린 사람인데.”

청은 이제껏 수많은 비빈 후보들을 황제에게 추천했다. 내명부 인사는 거의 그가 전담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간택에 관심이 없는 황제도 청이 간곡히 권하는 사람이라면 결국은 별말 없이 받아들였다.

그가 권한 후보들은 이름도 생김새도 집안도 각각 달랐지만 한결같은 특징이 있었다. 황제의 앞길에 해가 되지 않을 만큼 적당히 순진했고, 그럼에도 황궁에서 살아남을 만큼 적당히 영리했다. 자신의 기구한 운명에 고분고분 순종하되, 아랫것들의 감언이설에 놀아나지 않을 정도의 강단은 있었다. 요약하자면 간단했다. 효율 좋고 허울 멀쩡한 허수아비.

골라도 어디서 꼭 이런 것들만 골라 왔을까 싶어서 헛웃음이 났다. 청이 예쁘고 괘씸했다. 자신의 속마음은 꼭꼭 숨기고 시선을 내리깐 채, 황제의 침실에 밀어 넣을 이들의 명단을 제 손으로 꾸역꾸역 만들어 바치는 꼴이 아주 깜찍했다.

그래도 이리 귀엽게 조르는데 들어주지 않을 수도 없어, 그가 추천하는 이들에게 적당한 품계를 내려 맞아들였다. 그 일련의 과정에 정점을 찍은 것이 황후의 책봉례였다.

“만약 황후가 회임하기라도 한다면, 그대는 황후에게 온갖 보약들을 지극정성으로 가져다 나르겠지. 그러다 아이가 태어나면, 갓 태어난 황손의 앞에 무릎을 꿇고 가장 먼저 충성 맹세를 할 테고.”

“…….”

“그래, 하고 싶은 대로 하게. 그대가 원한다면 그리하게 해 줘야지. 그대는 쓸데없는 곳에서 고집을 부리는 게 흠이지만, 나는 그것까지 너그러이 보아 넘길 수 있으니. 하지만…….”

황제의 서늘한 손가락이 머리칼 사이로 파고들었다. 손에는 힘이 별로 들어가 있지 않았지만, 당장이라도 머리채가 틀어잡히고 머리통이 벽에 처박힐 것 같아 무서웠다. 그는 청이 누운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고 귓가에 가만히 속삭였다.

“무슨 핑계든 내게서 도망치려 하는 건 용납 못 해.”

청은 딱딱하게 굳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황제의 낮고 조곤조곤한 음성이 빗소리와 어우러져 더할 나위 없이 스산하게 들렸다. 황제가 빙긋 웃으며 스르르 몸을 일으켰다. 긴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를 스쳤다. 윤기를 잃고 푸석푸석해진 머리카락 끄트머리가 저들끼리 엉켰다.

“머리칼이 흐트러졌어. 손질해 주어야겠는데.”

“그리하실 필요 없습니다. 전 괜찮…….”

청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친히 경대 서랍을 열어 빗을 가지고 돌아왔다. 황제의 크고 길쭉길쭉한 손안에 쥐어진 반달빗이 몹시도 작아 보였다.

“등을 이리 보이고 앉아 봐.”

“…….”

“대답.”

“예…….”

황제는 청을 자신의 앞에 앉히고 그의 머리카락을 한 줌 쥐어 가볍게 쓸어 보았다. 소름이 끼쳤다. 목부터 등허리까지의 감각이 일제히 곤두섰다. 청은 불안한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다 결국 고개를 푹 숙이고 아래만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금속으로 된 빗이 닿았다. 가늘고 촘촘한 빗살이 두피 위를 살살 긁어내렸다. 선뜩한 감각이었다. 청의 머리칼을 빗어 내리는 손길은 부드럽고 차분했다. 하지만 애틋함과 편안함은커녕 묘한 오싹함만이 느껴졌다.

뒤쪽에 앉은 황제의 움직임이 의식되어 견딜 수 없었다. 옷자락 스치는 소리에도 무심결에 움찔했다. 청은 입을 꾹 다문 채 필사적으로 몸의 떨림을 가라앉히려 애를 썼다. 부디 황제의 심기가 틀어지지 않기만을 바랐다. 뾰족한 빗살이 돌연 흉기가 되어 살점을 후벼 파고 가죽을 벗겨 내지 않기를.

“예락, 내가 찾지 않는 동안 뭘 하고 지냈지?”

“그저……. 그, 잘…….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겠다?”

“잠을 오래 잤고……. 그것 외에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

감옥에 갇혀 있던 때처럼 모진 고문을 당한 것도 아닌데, 요즘은 자꾸만 기억이 뚝뚝 끊겼다. 어제, 아니, 당장 오늘 낮에 뭘 했는지도 가물가물했다. 그의 정신은 물에 푹 젖은 서책 같았다. 엉망으로 번진 글씨를 읽어 보려 애를 써도 읽어 낼 수 없어 결국 포기하고야 마는.

“슬슬 관직에 복귀할 준비를 해야지. 이제 그대에게 아무런 죄목도 씌워지지 않았다는 걸 알았으니.”

“과분한 말씀입니다. 제겐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내가 괜찮다고 하지 않나. 이 나라의 주인이고 그대의 주인인 내가.”

“폐하, 저는……. 지친 것 같습니다.”

청은 고개를 숙이며 몸을 좀 더 움츠렸다. 얇은 침의 위로 마른 몸의 골격이 도드라졌다.

“폐하께서는 저와 약조하셨던 대로 저희 가문의 한을 풀어 주셨지요. 무사히 제위에 올라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셨고요. 이제 폐하께는 저 말고도 다른 신하들이 많습니다. 저보다 훨씬 총명하고 유능한 자들이요.”

황제는 청의 머리를 빗던 손을 서서히 멈추었다. 청은 그것도 모른 채 횡설수설하다 말끝을 흐렸다.

“저 같은 건 이제 쓸모가…….”

황제는 청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이윽고 청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중심이 느릿느릿 옆으로 쏠리다가, 결국 황제의 팔뚝에 옆머리를 기대며 쓰러졌다.

“청아.”

이름을 가만히 불러 보았다. 하지만 청은 묵묵부답이었다. 황제는 빗을 든 손으로 청의 뺨을 툭 건드렸다.

“청아……?”

그는 가만히 숨을 죽였다. 한 팔로 청을 받친 채 침묵 속에서 귀를 기울이자, 아주 느리고 희미한 숨소리가 들렸다. 황제는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조금 안심했다. 청의 방부 처리를 고민해야 할 날은 아직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박제를 하더라도 잘 먹이고 재우고 가꿔서 제일 어여쁠 때 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도 안 예쁜 건 아니지만 얼굴이 허여멀겋게 질려서는 부쩍 수척해져 있으니, 화장을 하고 비단옷을 입혀 유리 관에 넣어 놔도 영 맵시가 안 살 것 같았다.

“제, 제가……. 잠들었습니까?”

축 늘어져 있던 청이 움찔하더니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힘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이불 위를 짚으며 황제에게서 떨어지려 했다.

“폐하, 죄, 죄송, 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무례를…….”

황제는 대답 대신 청의 턱을 쥐었다. 단단한 손아귀에 잡힌 턱이 뻐근하게 아파 왔다. 그는 청의 고개를 확 돌려 입을 맞추었다. 마른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겹치고 혀를 얽었다. 청의 입 안은 좁고 부드러웠으며, 자신의 체온에 비해 미지근하게 느껴졌다.

처음에 청은 퍼득 몸서리를 치며 저항했지만 얼마 가지 못했다. 힘이 빠진 몸이 헝겊 인형처럼 황제가 이끄는 대로 딸려 갔다. 입술 사이로 버겁게 새어 나오는 밭은 숨마저 황제가 모두 집어삼켰다. 황제가 들고 있던 빗이 어느 순간부턴가 툭 떨어져 이부자리 위를 아무렇게나 굴렀다.

* * *

창밖에 내리는 비가 거세어졌다. 제법 굵은 빗줄기가 창틀을 때리고 튀어 방에 들이쳤다. 습한 한기가 방 안에 스며드는데도 둘 중 누구도 열린 창을 닫으려 하지 않았다.

청은 저항하지 않았다. 황제가 몸을 더듬고 만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옷이 허물처럼 흘러내리고 싸늘한 공기가 맨살에 닿아도 바르르 떨며 움츠릴 뿐 춥다는 말 한 마디를 꺼내지 않았다. 그저 가끔 아, 아, 하고 메마른 신음을 흘릴 뿐이었다.

황제 또한 무슨 변덕에서인지 그를 덜 거칠게 다루었다. 평소에 비하면 심지어 다정하게까지 느껴졌다. 살이 빠져 도드라진 쇄골을 가볍게 깨물고, 아래로 내려와 부드러운 유두에 피가 몰려 곤두설 때까지 집요하게 빨았다.

옆구리를 앞니로 긁고 골반을 지나 허벅지 안쪽에 입술을 묻었다. 청의 허리가 가볍게 들썩였다. 황제는 위를 흘긋 올려다보고 서슴없이 그의 성기를 머금었다.

“헉……!”

청이 힘없이 신음했다. 새카맣게 가라앉은 시야 가운데 붉은 불꽃이 피었다. 허리가 멋대로 뒤틀리고 발끝이 오므라들었다. 하지만 허벅지를 단단히 움켜쥔 황제의 손 때문에 마음대로 달아날 수도 없었다.

귀두를 사탕 빨듯 입 안에서 굴리며 반쯤 벗겨진 침의 자락 사이로 손을 불쑥 넣어 엉덩이를 주물렀다. 몇 번 핥아 주자 성기에 서서히 피가 몰렸다. 어느 정도 형태를 갖춘 기둥을 힘 있게 쭉 빨아올렸다. 동시에 엉덩이를 떡 주무르듯 주무르던 손으로 안을 더듬어 구멍을 푹 찔렀다. 좁은 내벽이 꽈악 수축하며 손가락 하나도 버겁게 삼켰다.

“흐으, 으…….”

황제의 앞에 활짝 벌어진 다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청은 고개를 뒤척이며 섧게 흐느꼈다. 굵고 긴 손가락이 틀어박힌 뒤가 불이 붙은 듯 쓰렸고, 황제의 입 안에 삼켜진 성기 또한 불타는 듯 뜨거웠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시커먼 천장만이 가득 펼쳐져 있던 시야가 점차 흐려졌다. 죄책감과 배덕감과 도착적인 쾌감이 마구잡이로 얽혀 이지러졌다. 스스로의 헉헉대는 거친 숨소리와 심장 소리가 귓가에서 아득히 멀어졌다.

어느덧 청은 완전히 발기했다. 황제는 성기 끝에서 찔끔찔끔 새어 나온 액체까지 남김없이 핥아 먹었다. 등을 켜지 않아 방 안이 어두운 것이 못내 아쉬웠다. 옅은 색의 귀두가 발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좆물을 질질 흘리는 것을 낱낱이 보고 싶었는데.

이윽고 그는 청의 다리 사이에서 몸을 일으켰다. 한 손으로 허리끈을 풀며 청을 내려다보았다. 고개가 옆으로 꺾인 채 누운 청의 시선이 두 뼘 정도 열린 창문 쪽을 향해 있었다. 입술을 살짝 벌리고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는 눈에 초점이 없었다. 청이 그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입가에 흐릿하게 난처한 듯한 웃음이 번졌다.

“무련(珷鍊) 공자님.”

아주 오랜만에 듣는 호칭이었다. 저잣거리 한복판에서 6황자 전하라 부를 순 없지 않겠냐며, 그를 뭐라고 부르면 좋을지 묻던 청의 모습이 떠올랐다. 서글서글하게 웃는 눈매와 발그레한 생기가 깃든 뺨이 눈에 선했다.

넉살은 또 어찌나 좋은지, 매몰찬 말로 끊어 내도 지치지도 않고 치근덕대기에 결국 이름을 알려 주었다. 부황이나 모후가 아니면 쉬이 부를 수 없는 황자의 휘(諱)를.

“올해는 유달리 벚꽃이 늦게 피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계절은 가을의 끝자락에 다가서고 있었다. 당연히 벚꽃이 필 리가 없다. 컴컴한 창 너머에는 음산한 비바람이 몰아닥칠 뿐이었다.

“공자님을 모시고 요 앞 강가에 뱃놀이를 가기로 했는데. 이제껏 뱃놀이를 가 본 적이 없다 하셨으니, 반드시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정경을 보여 드려야 하는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청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눈을 뜬 채 숨이 끊어진 사람처럼 한곳에만 우두커니 머물러 있던 눈이 마침내 스르르 감겼다.

“너무 오래 기다리시게 하면 안 되는데…….”

청의 말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는 끈이 떨어진 연처럼 널브러져 미동도 하지 않았다. 황제는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그를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뺨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힘을 주지 않고 가볍게 만졌을 뿐인데 청의 고개가 툭 돌아갔다. 창백한 옆얼굴이 흰 베갯잇 위에 닿아 서늘한 그늘이 졌다.

“청아, 또 자?”

시선을 집요하게 청에게 고정한 채 황제가 조용히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벌써 자면 안 되지. 아직 잠자리에 들 시간이 아닌데, 일어나야지.”

그는 조금 더 기다렸다. 여전히 청이 아무 말이 없자, 그는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손을 치켜들었다. 짜악! 의식이 없는 이의 뺨을 후려갈기는 소리가 텅 빈 방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일어나라니까?”

황제는 같은 곳을 몇 번 더 내려쳤다. 기묘하게 뒤틀린 광기와 살의가 느껴졌다. 청의 입술이 터지고 뺨이 어둠 속에서도 티가 날 만큼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청은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하도 맞아서 뜨끈뜨끈하게 열이 오른 청의 뺨을 손바닥 전체로 감쌌다. 고개를 바짝 붙여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청을 들여다보았다. 금빛에 가까운 옅은 갈색 눈동자가 청의 감은 눈꺼풀 위를 집요하게 응시했다.

“명을 내렸는데, 왜 안 듣지……?”

청의 뺨을 매만지던 손이 스르르 내려가 그의 목을 잡았다. 붕대가 감긴 목이 한 손 안에 들어왔다.

“지청, 청아. 네가 그리 말했잖아. 내가 시키는 건 뭐든 하겠다고. 결코 내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그는 청의 목을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쾅! 청의 뒷머리가 침상 위쪽에 세게 부딪혔다. 고개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줄기가 꺾인 꽃처럼 툭 젖혀졌다. 곱게 빗어 준 머리카락이 마구잡이로 흐트러져 얼굴을 가렸다.

황제는 손을 뻗어 자꾸만 축 늘어지는 청의 머리를 단단히 받쳤다. 힘없이 딸려 오는 몸을 자신의 품에 꽉 끌어안고, 서늘하게 식은 그의 이마에 뺨을 비비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나를…… 이 나를 두고 언제까지 무정하게 잠만 자려고…….”

오싹한 정적이 흘렀다. 황제는 한참이나 청을 안고 있다가, 어느 순간 팔을 툭 풀었다. 청의 몸이 침상에 풀썩 떨어졌다. 황제는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눈으로 청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애틋하게 껴안고 있던 이를 보는 눈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 청을 번쩍 안아 들었다. 얇은 침의 한 벌만 입은 청의 몸 위에 자신의 겉옷을 덮어 감싼 채, 밤비가 퍼붓는 어둠 속으로 망설임 없이 걸어 나갔다.

* * *

“원인을 알아냈습니다, 폐하.”

청의 몸 곳곳에 감긴 붕대를 풀어 상처를 살피던 손길이 조심스럽게 멀어졌다. 태의들의 우두머리, 수의(首醫)가 고개를 숙이며 차분히 고했다.

“고하라.”

맞은편의 의자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있던 황제가 까딱 고갯짓을 했다. 수의는 저도 모르게 침상에 누운 청을 곁눈으로 흘깃 돌아보았다. 그녀도 청이 누군지는 너무도 잘 알았다. 그러나 청이 왜 지금 여기 있는지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황제의 오른팔이자 유능한 책사인 대장군이, 그것도 먼 지방의 별장에서 휴양 중인 것으로 알려진 자가 황제의 침상을 차지하고 드러누워 사경을 헤매고 있을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그것도 저렇게 초췌한 몰골로.

수의는 황제의 생모인 후궁이 갓 입궁했을 때부터 사망 시까지 쭉 그녀를 담당하였다. 이민족 출신인 후궁은 입궁 당시에 제국어를 전혀 할 줄 몰랐고, 제국에도 머나먼 타국의 언어를 아는 이가 없었다.

황궁에서 유일하게 후궁의 모국어를 할 수 있는 이가 서방으로 의술 유학을 다녀온, 그 당시에는 말단 태의였던 수의였다. 자신은 출세 욕심도 없고 후궁의 처지가 딱하기도 하여 주치의를 자청하였는데, 6황자가 제위에 오르면서 얼떨결에 태의원의 수장 자리에까지 앉게 되었다.

황제의 생모는 암투에 휘말려 죽었다. 시종이 가져다준 찻잔에 든 독을 아무 의심 없이 마셨던 것이다. 수의는 후궁의 상태를 살피고 사망 선고를 내렸으며, 사인을 밝히고자 부검까지 실시했다. 입궁부터 줄곧 후궁의 진료를 담당했고 출산할 때 황자를 직접 받기까지 했던 그녀에게도 몹시 괴로운 경험이었다.

그 사건 당시에 후궁과 6황자 밑에서 일했던 이들 중 살아남은 자는 그녀 단 한 명뿐이었다. 황제는 그 사건에 연루된 궁인과 관리들의 면면을 낱낱이 기억했다가, 즉위 후에 한 명도 빠짐없이 토막 내어 죽였다. 물론 그자들을 악착같이 끌고 와 황제 앞에 바친 것이 청이었다.

“지예락 대장군의 상처에 쓴 것은……. 저희 태의들이 일반적으로 쓰는 약과는 다른 것인 줄로 아옵니다.”

“그럼?”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폐하. 이것은 치료하기 위해 쓰는 약이 아닙니다.”

“하면 독이라도 된단 말이냐.”

“약은 약이되, 환자를 낫게 할 목적으로 쓰는 것이 아니오라.”

턱을 괴고 청만 바라보며 수의의 설명을 듣던 황제가 스르르 고개를 돌렸다. 밝은 갈색 눈동자가 상대를 지그시 응시했다.

“전쟁터나 전염병이 도는 마을에서는 모든 환자를 일일이 돌볼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자는 부족하고 병세는 점점 심각해져 가니, 어떤 환자는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이를 그대로 죽으라고 내버려 둘 수도 없지요.”

“그래서?”

“마지막 가는 길이라도 편하게 보내 주고자, 가망이 없는 환자에게 쓰는 약입니다.”

둘의 시선이 일제히 침상 위의 청에게 향했다. 청은 그야말로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핏기가 사라져 새하얀 얼굴에 표정이 전혀 없었다. 괴로워 보이지도 아파 보이지도 않았다.

“이 연고에는 강력한 마취 효과가 있어 환부에 바르면 통증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잠드는 시간이 길어지고, 고통을 잊기 위해 환각을 보기도 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깊은 잠에 빠지듯 숨이 끊어집니다. 조금만 더 발견이 늦었으면 영영 돌이킬 수 없을 뻔하였습니다.”

청의 상처에 듬뿍 발려 있던 연고는 적군의 활과 총에 맞아 팔다리가 잘려 나가거나 전염병으로 온몸이 썩어 문드러져 가는 환자에게나 쓰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차라리 죽여 주는 것이 자비를 베푸는 것이라 생각되는 이들에게.

황궁은 온갖 모략이 판치는 곳이니, 대장군이 그런 약물에 당한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다만…….

“폐하, 감히 한 말씀 올려도 되겠사옵니까?”

“그리하라. 언제는 그대가 말하지 말란다고 입을 다물었던가?”

황제는 자신의 어머니뻘, 혹은 그 이상 되는 수의를 상대로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빈정거렸다. 수의 또한 아무 동요 없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었다.

“이 일이 기밀이라는 것도, 폐하께서 지 대장군을 아끼신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나 신은 태의원의 수장입니다. 태의원은 폐하를 비롯한 황가의 구성원들을 진료하는 곳이고요.”

황제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며 손끝으로 탁자를 툭, 툭, 느리게 두드렸다. 지루하다는 뜻이었다. 더 이상 서론을 길게 늘어놓았다간 아무리 그녀라도 신변의 안위를 장담할 수 없었다. 수의는 재빨리 본론을 꺼냈다.

“황후 전하도 다른 후궁 마마들도, 친왕과 장공주도 아닌 일개 신하를 어찌 폐하의 침소에까지 들여 진료하라 하십니까?”

“일개 신하라. 그래. 마침 잘 말했군.”

황제가 탁자를 두드리던 손을 멈추었다.

“일개 신하인 내 예락을 저 꼴로 만들어 놓은 게 그대 휘하의 태의인데. 그건 어찌 생각하는가?”

수의의 낯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녀는 그대로 얼어붙어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몇 주 전부터 따로 분부를 받고 주기적으로 자리를 비우던 태의가 있었다. 황명에 따라 태의를 파견하긴 했지만, 어디에 가서 누구를 진료하는지는 수의도 명확히 알지 못했다. 당연히 높으신 분의 사적인 비밀을 보장하느라 행선지를 밝히지 않는 거라 생각했다.

의원의 일거수일투족이 생명과 직결되는 것은 황궁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어느 의원이 언제 누구를 진료하는지 알면, 몰래 탕약에 다른 재료를 섞어 넣거나 침에 독을 발라 놓는 것이 가능했으므로. 어느 후궁 마마님께 회임이 잘되는 약이라도 지어 드리고 있는 게 아닐까, 그저 그리 짐작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그 태의가 찾아가던 상대가 다름 아닌 대장군이었다면?

“보아하니 짚이는 놈이 있는 모양이지?”

그 반응을 빤히 지켜보던 황제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휘며 생긋 웃었다.

“뭐 하나. 당장 잡아 오지 않고.”

꽃 같은 웃음과는 달리, 그 아래에 깔린 살의는 음습하기 짝이 없었다.

* * *

청은 꿈도 꾸지 않고 길고 깊은 잠을 잤다. 마침내 그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황제의 눈동자였다.

“잘 잤어?”

황제는 청의 옆에 비스듬히 누워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심지어 베개는 그 혼자 차지하고, 황제는 베개 대신 자신의 팔을 벤 채였다. 청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이번에도 질긴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기에, 또다시 삶으로 끌려온 것이다. 지옥보다 못한 이승으로.

“헉…….”

청은 무심코 몸서리를 치며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그가 익히 알던 외딴 전각의 흰 이불이 아니었다. 두툼하게 솜을 채워 넣고, 붉은 비단에 금실로 용과 학을 수놓은 이불이 보드랍게 몸에 휘감겼다.

침상 또한 몹시 넓었다. 장성한 두 남자가 함께 눕고도 한참이나 공간이 남을 정도였다. 장방형으로 널찍하게 뻗은 침상 가장자리에 박사(薄紗)로 된 천개가 드리워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청조차도 몇 번 들어와 본 적 없는 황제의 침소였다.

“몸은 좀 어떤가?”

황제가 빙긋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폐하, 저…… 제가 왜 여기에.”

청은 허둥지둥 몸을 일으키려 했다. 황제의 침상에, 그것도 황제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버젓이 누워 있다니. 감히 엄두조차 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더 누워 있게. 아직 몸도 성치 않은 사람이.”

“그럴 수는 없습니다.”

황제가 웃는 낯 그대로 사근사근하게 되물었다.

“팔다리의 힘줄을 죄다 끊어 놔야 얌전히 드러누울 텐가?”

청의 몸에 힘이 빠졌다. 그가 반항을 포기하자 황제가 기다렸다는 듯 간격을 좁혀 왔다. 따스한 손으로 청의 뺨을 감싸고 입술에 쪽 입을 맞추었다. 넋이 나간 채로 멍하게 있다가, 뒤늦게 청이 움찔하며 몸을 사렸다.

“안 됩니다. 제발, 그것만은.”

“어째서?”

“그, 그건…… 도리에 어긋나는…….”

“후장에 좆을 처박는 건 괜찮고, 입을 맞추는 건 안 된다? 그것참 신기한 도리로군. 위나 아래나 구멍이 있는 건 똑같은데.”

청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시선이 황제를 바로 보지 못하고 이불 위를 하릴없이 더듬었다.

“저는 폐하께서 분풀이를 할 상대는 될 수 있을지언정……. 승은을 내릴 상대는 못 됩니다.”

“분풀이라.”

죽다 살아난 꼴을 하고서 필사적으로 종알종알 떠드는 게 귀엽긴 한데, 영 신경에 거슬렸다. 황제는 청의 혀를 아예 뽑아 버릴까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막상 그러자니 또 마음에 걸렸다. 청의 혀는 관상용 외에도 여러모로 쓸모가 많았으니까.

청은 항상 그랬다. 고스란히 놔두기엔 아까웠고 완전히 망가뜨리기에도 아까웠다. 어떤 때는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배를 갈라 오장육부를 모두 씹어 먹고 싶다가도, 어떤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언제까지나 곁에 두고 싶었다.

이제껏 그가 청에게 했던 모든 일을 분풀이라 생각했다니. 헛웃음이 나왔다. 청에 관한 일이라면 황제는 항상 베풀 수 있는 모든 인내를 베풀었다. 생을 통틀어 이렇게 공들여 아낀 것이 없을 정도였다. 가끔 청이 말을 안 들으면 벌을 주긴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그가 반성하는 기색을 보이면 곧 너그러이 용서해 주었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옛날 옛적에 목이 날아갔을 일도, 청이라면 몇 번이고 참아 주었다.

그래, 이번에도 한 번 더 참기로 했다. 청은 자기가 죽는 줄도 모르고 죽을 뻔했다 간신히 살아난 참이니, 군주로서 이 정도 관용은 베풀어 줄 수 있었다. 황제의 침상에서 그의 향을 듬뿍 묻히고 곤하게 자는 모습이 보기에 제법 흡족해서였기도 했다.

황제는 다시 꽃이 피어나듯 웃었다. 청을 끌어안고 이마며 입술이며 뺨에 잔뜩 입을 맞추다가, 아예 그의 위로 냉큼 타고 올랐다. 관을 쓰지도 단단히 틀어 올리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늘어뜨리고 있던 다갈색 머리카락이 황제의 어깨 앞으로 풀썩 흘러내렸다. 청의 얼굴 위에 그늘이 졌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청이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맹수의 앞발에 붙잡혀 잔뜩 겁을 먹은 초식 동물 같았다.

“예락, 내 목에 팔을 감아 봐.”

“폐하…….”

“그리 매몰차게 굴지 말고. 감아 봐, 어서. 응?”

황제가 청의 콧잔등에 자신의 코끝을 톡 부딪쳤다. 따뜻한 물에 우려낸 차처럼 목소리가 부드럽게 녹아 있었다. 하지만 참담하게 굳은 청의 낯은 도무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황제와 옷자락이 스치는 것만으로도 살갗에 찌릿찌릿한 전율이 흐르고 몸이 경직되었다. 그는 어느 순간부턴가 입술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자신의 위에 올라탄 황제를 향해 팔을 뻗자 헐렁한 소매가 흘러내려 가며 마른 팔목이 드러났다. 그는 결국 팔을 삐걱삐걱 움직여 황제의 목에 어설프게 둘렀다.

“옳지……. 착하다.”

황제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어느덧 서로의 눈동자에 서로가 비치는 것이 보일 만큼 거리가 가까워졌다. 그는 장난치듯 입술을 몇 번 가볍게 부딪쳐 오다가, 이윽고 고개를 살짝 틀고 눈을 감으며 입을 맞추었다. 반투명한 나비 날개처럼 느릿느릿 팔랑이던 속눈썹이 가만히 내려앉았다.

하지만 청은 내내 새파랗게 질려 눈을 뜨고 있었다. 바로 코앞에 사뿐히 눈을 감은 황제의 얼굴이 보이고, 입술이 살며시 닿았다. 그것을 똑똑히 보고 느끼면서도 눈을 감을 수 없었다.

황제가 그를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비난할 때마다, 청은 싫다는 말 한 마디 없이 그저 감내했다. 괴로움에 지쳐 스스로 삶을 놓아 버리려 했을지언정 결코 누군가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었으니 황제가 그에게 분풀이를 하고 벌을 내리는 것은 당연했다. 사내인 자신에게 수치와 굴욕을 주기 위해 일부러 고통스럽게 범한 거라 여겼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이래서는 안 되었다. 씨를 품을 수 없는 평인인 데다, 미동(美童)이라 하기에도 너무 커 버린 시커먼 사내를 침상에 들여 끌어안고 입을 맞추다니. 이 일이 바깥에 퍼지기라도 하면 황제에게 흠이 될 터였다.

스스로가 더럽게 느껴져 견딜 수가 없었다. 무엇 때문에 이 긴 세월 동안 자신을 죽여 가며 황제의 곁에 머물렀는데. 이제껏 어떻게 마음을 억눌러 왔는데. 그런데 이제 와서…….

“읏…….”

그때 황제의 손이 뺨을 강하게 쥐었다. 입술이 힘없이 벌어졌다. 그 사이로 말캉한 혀가 파고들었다. 젖은 열기가 입 안을 적셨다. 자조적으로 이어지던 상념이 뚝 끊겼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면서도, 그는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 *

황제는 작은 향유 병을 들어 손에 통째로 들이부었다. 맑고 끈적한 액체가 손바닥을 적시다 못해 손마디 사이로 뚝뚝 흘렀다. 향유 방울이 떨어져 비단 이불에 얼룩이 지는데도 개의치 않고, 무심한 태도로 눈앞의 청을 지켜보았다.

청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차림으로 양손으로 스스로의 엉덩이를 잡아 벌리고 있었다. 성기와 음낭을 비롯해서 회음이며 그 아래 구멍까지 적나라하게 보이는 자세였다. 황제의 명이었다. 어설프게 치켜든 엉덩이와 허벅지 안쪽이 파들파들 떨렸다. 벌어진 골반이 뻐근하게 아팠다.

“읏, 흐으…….”

하지만 아픈 것보다 수치스러운 것이 더했다. 마냥 창백하던 청의 얼굴에 발그스름하게 물이 들었다. 그는 차마 황제를 쳐다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저도 모르게 힘이 빠지며 몸이 점점 움츠러들었다.

“더 벌려. 구멍이 잘 안 보이잖아.”

황제는 향유에 젖은 손으로 청의 엉덩이를 철썩 내려쳤다. 말간 엉덩이에 번들번들하게 붉은 자국이 남았다. 갑자기 느껴지는 격통에 청이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떴다.

“악……!”

청이 절로 터지는 비명을 삼키며 엉덩이를 움켜쥔 손에 다시 힘을 주었다. 손끝이 하얗게 질리고 엉덩이 살이 손가락 모양을 따라 패었다.

“확인해야 할 것 아닌가. 이 안까지 그 약이 스며들었는지 아닌지.”

“그 약…… 이라니…….”

자초지종을 모르는 청이 헐떡이며 힘겹게 의문을 표했다. 하지만 황제는 그 물음에 일일이 대답해 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는 손을 타고 뚝뚝 흐르는 향유를 대충 손가락에 문질러 발랐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청에게서 떠날 줄을 몰랐다. 옅은 색의 입구가 단단히 다물려 있었다. 굴욕적인 자세에 청이 힘들어할 때마다 구멍도 같이 움찔거렸다. 먹음직스러운 광경이었다.

황제는 검지와 중지로 구멍을 푹 쑤셨다. 탄탄하게 조여든 입구가 진입을 방해했지만, 질척하게 바른 향유 덕에 곧 미끄덩하게 밀어 넣을 수 있었다.

“흐, 흐윽, 아, 아……!”

청이 도리질을 치며 괴로워했다. 제멋대로 꾸역꾸역 밀고 들어오는 손가락이 무서웠다. 차라리 안이 전혀 젖지 않아 메말라 있는 게 나았다. 향유를 잔뜩 묻혀 놓은 손가락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자꾸만 질척하게 파고들었다.

배 속이 거북했다. 무심결에 힘을 주어 밀어내려 해 봐도 소용없었다. 결국 황제의 손가락은 내벽을 미끄럽게 적시고 들어와 저 끝까지 처박혔다.

“똑바로 잡고 있어. 구멍 다물지 말고.”

황제는 구멍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명령했다. 이물감에 절로 몸에 힘이 풀리려다가, 청이 흠칫하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는 청의 안에 쑤셔 박은 손가락을 펼쳐 입구를 벌렸다. 근육의 저항을 무시하고 억지로 벌리자, 뻑뻑한 구멍이 조금씩 넓혀졌다. 연홍빛을 띈 내벽이 약간이나마 어렴풋이 보였다.

“폐하, 헉, 부디, 제발……. 아, 윽!”

청이 횡설수설 애원했다. 가로로 한계까지 벌어진 입구가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 같았다.

“얌전히 있어야지.”

철썩!

두 번째로 엉덩이에 뜨거운 통증이 내리꽂혔다. 청이 목 너머로 신음을 삼키고 끅끅대며 이를 악물었다. 황제는 그만두기는커녕 오히려 고개를 가까이 하여 구멍 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뒷구멍의 속살이, 내장 안이 황제의 눈앞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수치스러움을 넘어 절망스러워졌다. 인간이 아니라 가축이 된 느낌이었다. 주인의 앞에 아랫도리를 들이밀고 생식기와 항문을 점검받는. 스스로의 엉덩이를 잡아 벌린 채 무력하게 덜덜 떠는 청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손가락만으로는 잘 모르겠는데. 어때, 예락 그대는 알겠나?”

한껏 내벽을 휘젓고 벌려 보며 안을 관찰하던 황제가 태연하게 고개를 들었다.

“소, 송구, 송구합니다, 폐하, 저는…… 저는 그 약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청이 섧게 흐느꼈다. 눈매를 타고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래?”

황제는 건성으로 대꾸하며 청의 안에서 손을 쑥 빼냈다. 뻐끔하게 벌어져 있다가 꽉 조여들어 닫히는 구멍에 귀두를 들이밀고 툭툭 두드렸다.

“폐, 폐하……!”

“그대도 잘 모르겠다 하니, 다른 것으로 확인해 보아야지.”

엉덩이 골에 귀두를 문질러 흘러내린 향유를 질척하게 묻히고 곧장 꾹 밀어 넣었다. 필사적으로 버티던 입구가 결국 압력에 못 이겨 찌걱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귀두가 고개를 들이미는 순간 청은 숨을 쉬는 것을 잊었다. 잔뜩 긴장한 배가 움찔움찔 경련했다.

황제는 어정쩡하게 벌어진 청의 허벅지를 잡았다. 무릎 뒤쪽을 확 찍어 누르며 올라타, 아예 그의 몸을 반으로 접어 버렸다. 그 상태로 체중을 실어 위에서부터 성기를 박아 넣었다.

“윽…… 흐으…….”

팽팽하게 벌어진 구멍이 단단히 곧추선 기둥을 버겁게 삼켰다. 향유를 흥건하게 쏟아부어서인지, 아무런 전희 없이 무작정 처넣었을 때처럼 생살이 찢기는 아픔은 없었다. 하지만 오장육부가 죄다 명치 위로 밀려 올라가고 내벽이 황제의 성기에 맞게 꾸역꾸역 늘어나는 듯한 감각은 아무리 겪어도 적응하기 힘들었다.

불편한 자세로 황제를 받는 청의 얼굴에 열이 올랐다. 얼굴뿐이랴. 목덜미며 귀, 쇄골 부근에까지 온통 피가 몰려 붉었다. 최근엔 줄곧 핏기가 죄다 빠진 시체 같은 몰골만 보았으니, 이리 생기 있는 모습은 오랜만이었다.

황제는 상체를 낮추고 청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의 뺨에도 열락의 증거가 발그스름하게 떠올라 있었다.

“예락, 맞혀 봐. 내 좆이 지금 어디까지 들어갔는지.”

그가 열에 들뜬 눈으로 가만히 눈웃음을 쳤다.

“맞히면 한 번에 다 넣진 않을 테니까.”

탁하게 흐려진 눈동자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이리저리 방황했다. 그 와중에도 황제의 성기는 무게를 실어 조금씩 파고들었다. 배가 뻐근하게 아파 오고, 이마가 땀으로 젖었다. 뒤로 성기를 문 채 황제의 아래에 깔려서는 그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는 게 빤히 보였다. 그것이 제법 귀여워서, 황제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기다렸다.

아랫배를 가득 메우며 들어찬 성기에 절로 의식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잘 가늠할 수 없었다. 황제의 성기는 항상, 이제 다 들어왔나 싶으면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더 깊이 처박혀 오곤 했다. 명치까지 성기로 가득 찬 것 같은 감각에 숨이 꼴딱꼴딱 넘어갈 때쯤이 되어서야 삽입이 끝났다.

“흐, 읏, 절반…….”

“…….”

“아, 아니, 6할…… 입니까?”

청이 헐떡이며 힘겹게 대답을 내어놓았다. 단숨에 끝까지 쑤셔 박히는 건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내장이 터지고 배가 찢어질 것 같아 매번 무서웠다.

황제는 말없이 접합부를 내려다보고 피식 웃었다. 잔뜩 벌어진 구멍은 향유로 질척하게 적셔 줬는데도 불구하고 6할은커녕 그것의 절반 정도를 겨우 물고 있었다. 그는 자비를 구하듯 절박하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청과 똑바로 시선을 마주하고, 빙그레 웃어 주었다.

“틀렸어.”

청의 허벅지를 움켜쥐어 잔뜩 벌리고 있던 황제의 손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다음 순간, 완전히 삽입되기까지 한참 남은 기둥이 단번에 쑤욱 처박혔다.

“흐, 아윽……!”

순간 눈앞이 까맣게 물들었다. 숨이 콱 막혔다. 삽입이 지나치게 깊고 과격한 탓에 귀두가 내장 안쪽의 막힌 어딘가를 강하게 짓눌렀다. 힘을 주면 안이 좁아져서 더 괴롭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한없이 밀고 들어오는 성기가 몸을 통째로 꿰뚫고 목구멍으로 튀어나올까 무서워 본능적으로 몸을 뻣뻣이 굳혔다.

“하아…….”

황제는 나른하게 숨을 내쉬고 청의 안에 물린 성기를 힘주어 쑥 뽑았다. 거대한 기둥이 질척하게 젖은 채 모습을 드러냈다. 입구에 귀두가 턱 걸릴 때까지 빼냈다 다시 박았다.

“헉, 허억.”

청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짧은 호흡을 간신히 흘려보냈다. 황제가 하도 세게 움켜쥐고 있어, 모질게 얻어맞은 엉덩이와 마찬가지로 허벅지에도 울긋불긋하게 손자국이 났다.

황제는 눈앞에 훤히 드러난 접합부를 집요하게 주시하며 성기를 퍽 쑤셔 넣었다 빼내기를 반복했다. 굵직한 성기를 밀어 넣을 때면 입구 주변의 살이 같이 밀려 들어가 오목하게 그늘이 졌다. 그러다 다시 뽑아내면 향유에 번들번들하게 젖은 발간 속살이 기둥에 들러붙어 딸려 나왔다.

두툼한 귀두로 뱃가죽 바로 아래의 내벽을 득득 긁어 줄 때마다 청이 자지러지며 숨넘어가는 소리로 신음했다. 강력한 마취 효과를 가졌다는 그 연고를 내벽에 발랐다면 이렇게 반응할 수는 없었다.

“그 태의가 이 안까지 연고를 발라 주지는 않았던 모양이지?”

순간 청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더할 나위 없이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에겐 대꾸할 틈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황제는 그의 허벅지를 잡아 벌려 사타구니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자세로 고정해 놓고 허리를 퍽퍽 쳐올렸다.

어느덧 아까 들은 말이 청의 머릿속에서 흐릿하게 지워졌다. 비단 금침 위에 누운 그의 몸이 황제의 아래에서 흔들렸다. 황제의 팔뚝에 어설프게 걸린 종아리가 움직임에 맞추어 맥없이 들썩였다.

덜컥. 침전의 문이 열렸다. 정신없이 시달리느라 청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무언가 묵직한 것이 질질 끌려와 방 한쪽 구석에 털썩 놓였다. 화살에 맞은 짐승이 내는 듯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황제가 몰아붙이는 대로 흔들리며 헐떡이던 청의 귓가에 이상한 소음이 섞여 들었다.

그는 무심코 반투명한 천개 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원래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 만큼 피투성이가 되어 끌려온 태의를 발견했다. 그 옆에는 병사로 보이는 이들 몇이 서 있었다.

“…….”

자신의 위에 올라탄 황제도, 배 안에 꽉 찬 성기도 그 순간만은 모두 잊혔다. 정수리부터 칼날을 꽂아 넣은 것처럼 전신이 차게 얼어붙었다. 이성이 자취를 감춘 자리를 경악과 공포가 메웠다.

“흐악, 아, 아악!”

청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그는 몸을 파들파들 떨며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손에 닿는 것을 마구잡이로 밀어내고 고개를 미친 듯이 흔들었다.

“청아.”

“읏, 흐윽, 흐.”

“청아…….”

황제가 양손으로 그의 뺨을 감쌌다. 좁아진 시야에 오롯이 황제의 모습만이 들어왔다. 뺨을 발갛게 물들이고 살포시 웃고 있는 수려한 얼굴이.

“내게 집중해야지.”

청이 초점을 잃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옆쪽에서 괴롭게 앓는 신음이 들렸다. 잠시 진정하나 싶었던 청이 소스라치게 놀라 파드득 경련했다.

“아, 시끄러워서 그래? 미리 입을 꿰매어 놓을 걸 그랬나.”

황제는 태연자약하게 중얼거리며 살살 허리를 놀렸다. 질척한 성기가 내벽을 부드럽게 헤집었다. 하지만 청의 발작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면……. 다른 이들 앞이라 내외하는 건가?”

황제가 숨죽여 웃더니 천진한 어조로 청의 귓가에 속삭였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대가 낯가림이 심한 걸 내 진작 알고 있었으니. 저자들은 곧 죽게 될 거야. 한 명도 남김없이 모두. 물론 저들에겐 아직 비밀이야…… 알았지?”

황제가 말을 마치며 흘긋 돌아보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병사들은 황제의 귓속말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묵묵히 움직여 태의를 잡아끌고 왔다. 바닥에 길게 핏자국이 남았다. 침전 바닥에 작은 작두가 놓였다. 태의원에서 약초를 자르고 다듬을 때 쓰는 것이었다. 밧줄에 묶인 태의의 손이 작두 위에 강제로 얹혔다.

청은 태의를 마주할 때마다 다른 이를 떠올리곤 했다.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그의 남동생을. 동생이 여태껏 살아 있었다면 아마 이 또래쯤 되었을 거라고, 기억 속에 남은 소년의 얼굴을 몇 번이고 하염없이 그려 보았다.

황제가 갓 등극하여 정권이 불안정하던 때, 한 차례 반란이 일어난 적 있었다. 대내상을 비롯하여 아직 남아 있던 선황의 추종자들이 적장자도 아니고 제국 순혈도 아닌 황제를 인정할 수 없다며 들고일어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반란의 주요 인물 중에 청의 동생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황제의 최측근인 청에 대한 정보를 황제의 정적들에게 팔았다. 어린 시절부터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였으니, 팔아넘길 중요한 정보는 얼마든지 있었다.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이후 몇 년간 떨어져 살았던 형제는 처형장에서 다시 만났다. 대장군과 반란군의 신분으로, 형은 관복 차림으로 우뚝 서고 동생은 밧줄에 꽁꽁 묶여 무릎을 꿇은 채로.

〈왜 그런 짓을 했어. 너도 알지 않느냐. 우리 아버지가 어떻게, 누구 때문에 돌아가셨는지. 선황과 대내상이 얼마나 극악무도한 자들인지. 그런데 왜.〉

〈네, 잘 알지요. 알다마다요. 너무 잘 아는데, 그런데……. 어떡합니까. 그들의 편을 들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는데.〉

〈…….〉

〈아버지 일이 있고, 어머니를 모시고 지방으로 내려간 후에도 형님은 계속 황도에 남아 계셨으니 몰랐겠지요. 저 혼자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어머니의 약값을 대기 위해서, 어린 동생들을 먹이고 입히고 살림을 꾸리기 위해서 무슨 일까지 해야 했는지!〉

반역자 집안이라는 오명하에서는 도저히 황도에서 더 지낼 수 없었다. 청은 6황자에게 몸을 의탁하여 황자궁에 머무를 수 있었지만, 다른 식구들은 어쩔 도리가 없어 먼 지방으로 짐을 꾸려 떠났다.

타지에 도착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나마 황도는 나은 편이었다. 중앙 관청의 눈이 직접 닿지 않는 변방에서는 부정부패가 더욱 기승을 부렸다. 권세가들에게 한번 잘못 보였다간 평민들뿐만 아니라 귀족들도 가차 없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 형이……. 미안하다.〉

한참 동안 참담한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청은 간신히 한 마디를 흘렸다.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말이라고는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청의 동생은 원래 단두대에서 목이 잘릴 운명이었다. 하지만 청은 대신 자신이 사형을 집행하겠다고 자청하여 나섰다. 이제껏 형 노릇도 제대로 못 해 주었는데, 동생의 마지막만큼은 직접 거두고 싶었다.

높은 곳에 앉은 황제가 그를 빤히 응시했다. 그 집요한 시선을 마주한 순간 청은 직감했다. 이것은 황제가 그에게 내리는 시험이었다. 황제를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다 맹세한 청이, 과연 정말로 무엇이든 할 수 있을지.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아버지의 복수를 대가로 무조건적인 충성을 맹세한 그 순간부터 청의 모든 것은 황제에게 속해 있었다. 결국 그는 처형장 한복판에서 검을 뽑았다. 이를 악물고 퍼렇게 빛나는 검을 치켜들어, 사랑했던 친동생의 목을 내리쳤다.

퍽! 작두날이 가차 없이 떨어지는 소리가 청의 정신을 현실로 되돌렸다. 차마 맨정신으로는 들을 수 없는 끔찍한 비명이 그 뒤를 따랐다. 손가락이 후두둑 잘려 나갔다. 열 손가락 중 몇 개는 잘리고 몇 개는 아직 붙어 있었다. 침전 바닥이 피범벅이 되었다.

“제발, 제발……. 제가 잘못했습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아니, 아니야. 그대가 잘못하긴 뭘 잘못해? 잘못은 저자가 했지. 역시 예락 그대는 사람이 너무 좋아서 탈이라니까.”

다시 한번 정확히 그 자리에 작두가 떨어졌다. 남아 있던 대여섯 개의 손가락 중 또 두세 개가 툭 잘렸다. 고통을 못 이긴 태의가 피거품을 물고 몸을 뒤틀며 바닥을 뒹굴었다.

청은 눈물범벅이 되어 헛구역질을 했다. 손끝에 벌겋게 피가 맺히도록 비단 이불을 긁어내리고 잡아 뜯다가, 자신의 귀를 틀어막고 울부짖으며 애원했다.

“아악, 흐, 윽, 폐하, 아, 안 돼, 제발……!”

그를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황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양팔을 벌렸다. 이성을 잃은 청이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숨도 못 쉬고 꺽꺽대며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황제는 그를 꼭 끌어안았다. 식은땀에 절어 차게 식은 몸이 파들파들 떨리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척척하게 젖은 이마에 자신의 뺨을 기대고, 칭얼대는 어린아이를 달래듯 등을 토닥여 주었다.

“괜찮아……. 착하지.”

다정함을 가장한 음험한 속삭임이 귓가를 메웠다. 청의 안에 단단히 틀어박혀 있던 성기는 숨이 죽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흉흉하게 발기했다.

“폐하, 자, 잘못했,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런. 그대는 잘못한 게 없대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청이 아예 정신을 놓아 버린 사람처럼 수없이 사죄를 반복했다.

“청아, 네겐 나밖에 없지? 오로지 나뿐이지?”

황제가 눈물에 젖은 청의 뺨에 입술을 꾹 눌렀다. 마구잡이로 경련하는 몸을 보듬어 품고, 느릿느릿 허리를 놀리며 물었다.

“대답.”

“흐, 허억.”

청이 작살에 꿰인 물고기처럼 퍼득 몸서리를 쳤다. 공황 상태에 빠져 제정신이 아닌 와중에도, 황제가 공포와 고통으로 길들여 놓은 본능이 착실히 반응했다. 그는 혹여나 조금이라도 대답이 늦으면 황제의 분노를 살까 봐 허겁지겁 입을 열었다.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 채 그저 앵무새처럼 황제의 말을 따라 했다.

“네에, 네, 제겐, 흐으, 폐하밖에 없습니다. 오로지 폐하뿐입니다.”

“…….”

황제가 뺨을 붉히며 살며시 웃었다. 그는 달콤한 한숨을 내쉬며 손끝으로 몇 번이고 조심스럽게 청의 얼굴을 쓸어 보았다. 흐트러진 귀밑머리를 넘겨 주고 속눈썹을 살살 만지고 뺨을 쓰다듬었다.

“나를 사랑해?”

그러다 그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대수롭지 않게 툭 던진 물음이었다. 처참한 몰골로 바닥에 널브러진 태의는 안중에도 없이, 황제의 심기를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생각만이 뇌리를 지배했다. 청은 이번에도 기계적으로 재깍 대답했다.

“네……. 폐하를, 사랑합니다.”

황제의 얼굴에서 웃음기를 비롯한 모든 표정이 지워졌다. 안을 미적지근하게 올려붙이던 성기의 움직임도 멎었다. 그는 섬뜩하게까지 느껴지는 무표정으로 청을 응시했다. 잡아먹을 듯 집요하게.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동시에 천개 너머에서 참혹한 비명이 들렸다.

“흐아아악!”

도를 넘은 통증에 잠시 혼절했던 태의가 정신을 차렸다. 그는 끔찍한 꼴이 된 자신의 손을 보고 목이 쉬도록 절규했다.

“헉…….”

갑자기 들린 큰 소리에 청이 화들짝 놀랐다. 어르고 달래어 겨우 진정시켜 놓았던 경련이 다시 도졌다. 황제는 하려던 말을 삼키고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스르르 가늘어지는 눈매가 그의 심기가 몹시 불편함을 대변했다. 그는 청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서 병사들에게 손짓했다.

“으악, 아아악…… 크, 커억!”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병사들은 잘 훈련된 사냥개처럼 민첩하게 반응했다. 양옆에서 태의의 팔을 잡아끌고, 다른 한 명은 뒤에서 고개를 찍어 눌렀다. 잘린 손가락과 피투성이가 된 작두도 재빨리 치워졌다. 태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만도 못한 꼴로 끌려 나갔다. 그가 떠난 자리에 남은 것은 바닥에 흥건히 고인 핏물뿐이었다. 널찍한 침전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폐하, 잘못…… 했습니다…….”

청은 눈앞에서 태의가 사라지고 난 후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텅 빈 눈으로 하염없이 중얼거릴 뿐이었다. 황제는 축축 늘어지는 그의 몸을 묵묵히 추슬러 안았다. 곧 둘밖에 없는 공간에서 질척한 정사가 재개되었다.

* * *

널찍한 대리석 탕에서 따뜻한 김이 피어올랐다. 목욕물은 갖은 약재를 달여 넣고 꽃잎을 띄워 향긋한 냄새가 났다. 아늑한 어둠이 스며든 가운데, 곳곳에 피운 향초에서 은은한 빛이 퍼졌다. 사방이 적막하기 짝이 없었다. 물방울이 똑 떨어지는 소리, 수면이 참방이며 흔들리는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메아리쳤다.

황제는 탕 안에 몸을 담그고 청을 자신의 앞에 앉혔다. 청은 여전히 넋이 나간 상태였다.

그는 수면 아래로 손을 불쑥 넣어 청의 허벅지 안쪽을 쓸었다. 큰 손으로 사타구니와 엉덩이를 주무르자 뿌연 액체가 새어 나와 물에 스며들었다. 탕에 들어가기 전 미리 정액을 긁어내 줬는데도 아직 안에 조금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청은 그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멍하니 수면만 내려다보았다.

오랜 세월을 함께 지냈어도 청은 이제껏 한 번도 황제 앞에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다른 장군이나 부하들과는 거리낌 없이 지냈다. 심지어 날이 더우면 훈련 도중에 냇가에 옷을 벗어 놓고 다 같이 몸을 씻은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황제와는 철저히 거리를 지켰다. 황제는 제국의 주인이고 청이 가장 정중하게 모셔야 할 사람이니, 예의를 지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황제는 옅은 흉터가 군데군데 보이는 청의 어깨를 쓰다듬다가 문득 짜증스러워졌다. 저도 꼴에 장군이라고, 맨살을 고스란히 드러내 놓고 다른 놈들 사이에서 부대꼈을 걸 생각하니 심사가 뒤틀렸다.

평생 붓과 악기, 보석과 비단 따위에만 둘러싸여 살던 이가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이제까지의 삶을 전부 버렸다. 어울리지도 않는 칼과 활을 악착같이 익히고, 목숨을 바쳐 황제의 적을 제거했다. 청이 착실히 망가져 가고 있음을 확인할 때마다 황제는 몹시 흡족했다. 그런데도 이따금 참을 수 없이 불쾌해지는 순간이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그는 후회했다. 청을 이제껏 사지 멀쩡하게 내버려 둔 것은 자신의 실수였다. 오냐오냐 예뻐해 주며 풀어 키웠더니, 제 분수를 잊고 황후를 연모한다는 깜찍한 거짓말까지 하지 않던가. 애초에 장군 따윌 시키는 게 아니었다. 이런 걸 사내들이 우글우글한 전장 한복판에 던져 놓느니, 차라리 처음부터 옆에 끼고 있을 걸 그랬다.

아니, 청이 눈물범벅이 되어 자신을 거두어 달라고 찾아왔던 때, 그때부터 아예 바깥에 내돌리지 말고 목줄을 채워서 침실에 처박아 놨어야 했다. 양다리를 부러뜨리고 일부러 뼈를 어긋나게 붙이면 혼자서는 일어서지도 못할 텐데.

“예락.”

황제가 뒤에서부터 청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수면이 가볍게 흔들렸다.

“아까 그 말, 정말인가?”

“…….”

“나를 사랑한다는 말.”

그 한마디가 뿌옇게 흐려져 있던 청의 의식을 일깨웠다. 청은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아까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뒤늦게 깨달아 버렸다. 탕에 가득 찬 따뜻한 목욕물이 무색하도록, 황제와 닿아 있는 부분부터 살갗이 쩌적 얼어붙었다. 온몸의 피가 싸하게 식었다.

제 주제에, 자신 따위가 뭐라고, 속에 품은 더러운 마음을 황제의 앞에 풀어놓다니.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려 함부로 고백을 흘려 버린 스스로의 목을 졸라 버리고 싶었다.

어떻게 변명해야 할까. 무슨 말로 둘러대야……. 초조함으로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멀거니 굳어 있던 청의 낯이 비탄으로 일그러졌다.

“응?”

황제가 가볍게 대답을 채근하며 몸을 붙여 왔다. 수면 밖으로 드러난 청의 어깨와 등은 놀랄 만큼 차갑게 식은 데 비해, 황제의 몸은 여전히 따뜻했다.

“용서해 주십시오, 폐하.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청은 덜덜 떨며 간신히 고했다. 반병신이 된 죄인 따위가 어찌 감히. 내게 몸을 몇 번 바친 것 가지고, 네까짓 게 비빈이라도 된 줄 알았느냐. 제 주제도 모르고……. 무심하게 날아올 황제의 조롱과 비난이 무서웠다.

“정신이 나가 헛소리를……. 흑, 당치도 않은 소리를 했습니다.”

“추운가? 그대, 떨고 있는데.”

황제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청의 떨림이 더욱 심해졌다. 수면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결코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물 밖에 나와 있으니 몸이 식은 모양이군. 봐, 뺨이 이리 싸늘해졌어.”

황제는 그가 필사적으로 사죄하는 것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혀를 찼다. 그는 청의 허리를 안고 있던 손을 풀고 목을 쥐었다. 따스한 온기가 목을 감쌌다. 다음 순간, 황제는 청의 고개를 수면 아래에 처박았다.

“컥……!”

첨벙! 고요하던 탕 표면에 물보라가 튀었다. 청은 제대로 된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코와 입에 따뜻한 물이 왈칵왈칵 들어찼다. 귀에서 삐 소리가 들렸다. 몇 초 뒤 억센 힘이 머리를 물 밖으로 끄집어냈다. 물이 몸을 타고 쏴아아 쏟아졌다. 그는 본능적으로 허겁지겁 공기를 들이마셨다.

“실언을 했다고……? 헛소리였다고?”

“폐, 하, 요, 용서를…….”

간신히 치켜든 고개가 도로 물에 쑤셔 박혔다. 무력하고 무방비한 상대에게 고문을 가하면서도, 황제는 조금의 동요도 없는 무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직도 그리 나오겠단 말이지. 정말이지 어찌할 도리가 없군. 그대 고집에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어.”

“허억……! 헉, 쿨럭, 컥…….”

그는 다시 청의 머리채를 잡아 물 밖으로 꺼냈다. 청은 반쯤 의식을 잃은 채 끌려 나와 괴롭게 기침을 했다. 입술 사이로 물이 울컥 흘러나왔다.

“그래. 그 고집, 어디까지 가나 보지. 10년을 넘게 참았는데 조금을 더 못 참겠나.”

황제는 청의 몸을 돌려 그를 꽉 끌어안았다. 물에 젖은 맨가슴끼리 빈틈없이 밀착했다. 서로의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몹시 빠르고 불안정하게 뛰는 청의 맥박이 규칙적으로 쿵쿵 뛰는 황제의 맥박에 감싸여 조금씩 안정되었다.

잔뜩 충혈되고 탁하게 흐려진 청의 눈이 허공을 이리저리 더듬다 자신을 안은 황제의 탄탄한 어깨에 닿았다. 그의 어깨 뒤쪽에는 손가락 크기의 붉은 반점이 있었다. 핏자국이 묻은 것처럼도 보이고 타오르는 불꽃처럼도 보였다. 몇 번이고 몸을 섞었어도 이 반점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매번 완전히 발가벗는 것은 그 혼자뿐이었고, 황제는 앞섶만 풀어 헤쳤을 뿐 옷을 그대로 걸치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말을 섞고 살을 부대끼고 시선을 마주하면서도, 청은 황제가 종종 살아 있는 사람 같지 않게 느껴졌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철저하게 계산되어 만들어진 조각상처럼, 그에게는 현실과 동떨어진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런 용모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잔인한 짓을 하니 더욱 섬뜩했다. 그 가운데 이 부분만이 유일하게 인간적이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걸작을 그리던 화공이 실수로 여백에 떨어뜨린 물감 방울 같았다. 청은 홀린 듯 붉은 반점에 시선을 빼앗겼다.

헐떡이며 고통스러워하던 청이 어느 순간부턴가 몸에 힘을 빼고 얌전히 안겼다. 황제는 물을 잔뜩 머금은 청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반듯하게 드러난 이마와 눈썹을 살며시 만져 보았다. 탕에 빠졌다 나온 탓에 아직까지 그의 턱을 타고 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싸늘하게 식어 있던 아까와 달리 지금은 따뜻했다.

“이제 춥지 않지?”

황제가 가만히 웃으며 품 안의 청에게 속삭였다. 청은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잔뜩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 * *

“금군 대장군을 뵙습니다.”

“대장군을 뵙습니다.”

길게 뻗은 복도를 걸었다. 발소리를 내지 않고 복도를 지나다니던 궁인들이 청을 발견하고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대외적으로 요양 중이라 알려진 청이 왜 여기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모두가 일말의 의문도 품지 않았다. 청을 향한 황제의 총애는 예전부터 유명했다. 황제가 불렀으니 청이 온 것일 테고, 황제가 청을 부른 것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 사이를 가로지르며 청은 극도로 불편한 기분을 느꼈다. 얇은 얼음 위를 걷는 듯 걸음걸음이 위태로웠다. 황후에게 칼을 휘두르고 황제의 아래에 깔려 다리를 벌린 주제에, 겹겹이 관복을 껴입고 황제가 하사한 검까지 찬 채 버젓이 황궁을 활보하다니. 당장이라도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그를 벌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황제가 여기까지 오라는 명을 내렸으므로 그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심지어 친절하게 청이 머무르는 전각 앞까지 가마를 보내 주었다. 청은 참담한 심정으로 의관을 갖추고 가마에 올랐다. 황실에서 쓰는 최고급 가마가 마치 사형수를 처형장까지 이송하는 수레처럼 느껴졌다.

침전 앞은 문을 지키는 시종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주변에 사람을 두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황제의 성정 탓이었다. 그의 생모인 후궁이 가까이서 시중을 들던 궁인에 의해 죽었던지라, 황제는 자신의 사적인 공간에 아랫사람들이 함부로 들락날락하는 것을 혐오했다. 곁에 오래도록 머무르는 것을 허락한 유일한 상대가 청이었고, 그 외에 굳이 꼽자면 황후 정도였다.

자신이 도착했음을 알려 줄 이가 없으니 직접 고해야 했다. 그는 문 앞에 멈춰서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입을 열었다.

“폐하, 부름을 받고…… 지예락이 왔습니다.”

나름대로 크게 말한다고 한 것인데, 기어들어 가는 것 같은 목소리가 나왔다. 스스로의 이름이 수치스러운 울림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안에서는 가타부타 대답이 없었다. 청은 망설이다 결국 문을 열었다. 미적거리느라 늦었다간 황제의 심기가 틀어질까 무서웠다.

침전 안은 어둑어둑한 가운데 희미한 등이 켜져 있었다. 하늘하늘하게 드리운 천개 너머로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언뜻 가느다란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얇고 반투명한 천은 그 너머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가려 주지 못했다. 청은 곧장 깨달았다. 황제의 침상에 있는 것은 한 명이 아니었다.

뚜벅뚜벅 걷던 청의 걸음이 점차 느려지다가, 이내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멈추었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그는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우두커니 섰다.

가장 먼저 황제가 청을 발견했다. 그는 무덤덤하던 눈매를 살며시 휘어 청을 향해 눈웃음을 쳤다. 그의 시선을 따라 무심코 고개를 돌린 황후 또한 상황을 파악했다. 상대를 강제로 범하려 했던 자와, 그런 상대에게 칼을 휘두른 자.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두 사람의 시선이 그날 이후 처음으로 마주쳤다.

“악……!”

황후가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는 반쯤 벗겨진 옷자락을 다급하게 여미어 몸을 가렸다. 그 사이로 가슴팍을 쭉 가로지른 붉은 흉터가 언뜻 보였다.

“마침 잘 왔어. 딱 좋은 때에 왔군.”

황제가 기다렸다는 듯 자연스레 침상에서 일어나 천개를 열어젖혔다. 어렴풋하게나마 황후의 모습을 가려 주던 천개가 걷혔다. 당황한 황후가 이불을 아무렇게나 끌어모아 둘렀다. 그는 느긋한 걸음으로 청에게 다가왔다. 느슨하게 늘어뜨린 머리칼이 가슴께에 드리우고, 의복 앞섶이 방만하게 풀려 있었다. 누가 보아도 한창 정사를 치르던 이의 모습이었다.

“예락, 하나 묻지. 황후가 그대의 칼에 베여 쓰러진 이후로 오랫동안 교합을 하지 못해 뒤가 근질근질하다는데, 나더러 간지러움을 달래 줬으면 한다는데. 그대는 어찌 생각하는가?”

“폐, 폐하! 대체 무슨 말씀을!”

등 뒤에서 황후가 경악하여 외쳤다. 그에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황제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좋은지 싫은지, 그것만 말해 봐. 그대가 좋다 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하던 일을 마저 할 테니.”

“…….”

“대답해.”

청은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모든 감정을 잃어버린 것 같은 메마른 눈을 순종적으로 내리깔고, 입술만 작게 달싹였다. 황제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았다. 손을 들어 그의 뺨을 힘껏 후려갈겼다.

철썩! 방 전체를 울릴 정도로 큰 소리였다. 청의 고개가 확 돌아가고 하나로 묶어 내린 머리채가 흐트러졌다. 충격에 휩싸여 굳어 있던 청은 이내 묵묵히 고개를 정면으로 되돌렸다. 맞은 이는 덤덤한데, 오히려 그 광경을 낱낱이 목격한 황후가 기겁했다. 낯빛이 새파랗게 질리고 이불을 움켜쥔 손이 벌벌 떨렸다.

“싫…….”

마침내 청이 눈을 질끈 감으며 입을 열었다. 뺨을 얻어맞았을 때 입술이 터졌는지 입가가 따끔거렸다.

“싫, 습니다.”

“그래? 싫단 말이지. 하나 그렇다고 황후를 저대로 내버려 둘 순 없지 않겠나.”

황제가 황후에게 흘긋 시선을 주었다. 황후가 사자 앞의 토끼처럼 몸을 움츠렸다. 다시 청에게로 고개를 돌렸을 때, 황제는 생긋 웃고 있었다.

“그럼 그대가 나를 대신하여 황후를 달래 줄 텐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황제의 말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것은 황후도 청도 매한가지였다.

“할 수 있지? 그대는 내 오른팔이니.”

뒤늦게 섬뜩한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황제가 아무리 청을 아낀다 한들, 이건 아니었다. 비상식적이다 못해 소름 끼치는 말이었다.

“예락, 날 위해 뭐든지 하겠다 맹세했잖아.”

“…….”

황제는 창백한 얼굴로 얼어붙어 있는 청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 황후는 바들바들 떨며 그를 지켜보았다. 청은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로 서 있다가, 떠밀리듯 비틀대며 한 발짝 움직였다. 첫걸음을 떼자 그 뒤는 쉬웠다. 그는 텅 빈 눈으로 황후를 향해 걸었다.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는 황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설마……. 설마, 대장군. 아니, 아니에요. 이건 아닙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철컥. 청은 말없이 허리에 찬 검을 풀었다. 황제가 직접 내린 보검이었다. 그것을 침상 곁의 탁자에 올려놓고 겉옷 매듭에 손을 얹었다. 허리끈이 스르륵 풀려나갔다. 금군 특유의 검은색 관복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허물처럼 벗은 옷을 뒤로하고 청은 계속 걸음을 옮겼다. 황제는 그 광경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폐하! 싫습니다. 싫어요!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어찌 제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황후가 처절하게 외쳤다. 하지만 황제도 청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 기이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청은 침상에 올랐다. 침상 한쪽이 푹 꺼지는 것이 느껴졌다. 황후가 고개를 마구 휘저으며 뒤로 물러섰다.

간격이 좁혀지자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청에게서 황제의 여향이 풍겼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군데도 빠짐없이 어찌나 진득하게 처발라 놨는지, 향이 너무 짙어 머리가 아프고 속이 메슥거릴 지경이었다. 황제가 환열기를 맞았을 때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숨이 턱 막혔다. 모든 것이 너무도 이상했다. 자신이 보는 앞에서 타인에게 자신의 반려와 교합할 것을 명하는 황제도 이상했고, 이렇다 할 저항 한 번 하지 않고 복종하는 청도 이상했다. 온 세상이 기괴하게 뒤틀려 버린 가운데 홀로 남겨진 악몽을 꾸는 기분이었다.

날카로운 칼날에 모질게 베였다 겨우 나은 가슴팍이 욱신욱신 아파 왔다. 황후는 이불자락을 목숨처럼 부여잡은 채, 넋을 놓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미쳤어…….”

거리가 가까워 그의 말을 똑똑히 들었을 텐데도, 청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는 묵묵히 황후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이불에 이마가 닿도록 머리를 깊이 숙였다. 고개를 든 청은 이불 아래로 드러난 황후의 발목을 쥐었다. 낯선 남자의 손이 맨발에 닿자 황후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흐악!”

황제가 침상에서 그의 발목을 잡는 것은 오로지 두 경우뿐이었다. 황제가 두려워 달아나는 그를 질질 잡아끌고 올 때와 체위를 바꿀 때. 황후는 그때마다 발목이 으스러질까 무서워 겁을 집어먹고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이제까지 몸을 섞은 상대라고는 황제밖에 없었기에, 그는 정사란 본디 그런 것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청은 그의 발목을 잡아 꺾지도, 확 낚아채 끌어당기지도 않았다. 한 손에 잡히는 가느다란 발목을 조심스럽게 받쳐 들고 발등에 입술을 눌렀다.

“…….”

황후는 예상 밖의 행위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발목을 빼내려던 것도 잊고 어정쩡하게 굳었다. 이번에는 복숭아뼈 안쪽에 입술이 닿았다. 하나하나 정중하게 입을 맞추며 발목으로, 종아리로, 무릎으로 천천히 타고 올랐다. 길게 늘어진 청의 머리채가 다리를 간질였다.

청의 손이 헐렁한 침의 안으로 파고들어 허벅지를 쓸었다. 뒤늦게 정신이 퍼뜩 들었다. 지금 자신을 만지고 있는 남자는 자신의 반려가 아니었다. 청이 듬뿍 뒤집어쓴 여향에 홀려 그 사실을 잠시 잊을 뻔했다.

“폐하, 제발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전 폐하의 반려입니다. 오래도록 역사에 남을 제국의 적법한 황후요. 그런데 절, 저를 어찌 이런 식으로 대하십니까!”

황후의 옷자락을 걷어 올리려던 손이 뚝 멈추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청의 입매가 뒤틀렸다. 황제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탁자 앞에 놓인 의자에 걸터앉아 상황을 관망하던 황제가 나른하게 한숨을 쉬었다.

“황후, 그 입 좀 다무시오. 예락이 시끄럽다지 않나.”

황후가 뻣뻣하게 굳었다. 그렇지 않아도 몸이 완전히 낫지 않아 낯빛이 파리하던 차에, 얼굴에서 핏기란 핏기는 죄다 빠져나갔다.

황제는 청이 탁자에 올려두고 간 검을 느긋한 손길로 만지작거렸다. 내키면 언제든 검을 뽑을 수 있다는 듯. 검집에서 철컥, 철컥 묵직한 소리가 났다. 그 행동이 뜻하는 바는 명백했다. 경고였다. 결코 달아나려 해선 안 된다는.

황후는 결코 어리석지 않았다. 원래 성정이 다소 유약하고 순진하다 한들, 그는 일국의 왕자로 태어나 길러졌다. 어차피 왕위 계승과는 한참 거리가 먼 신세이니 주위 사람들은 그에게 마냥 예쁘고 고운 것만 보여 주려 했지만, 구중궁궐에서 자라며 그도 언뜻언뜻 알게 되었다. 궁중에서 일어나는 온갖 기괴하고 추악한 일들의 일면을. 정략결혼의 비참한 현실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봤자 황제의 권위에는 결코 저항할 수 없음을, 볼모나 다름없는 신세로 제국에 팔려 온 이상 어떤 끔찍한 굴욕도 감내해야 함을……. 그리고, 황제는 자신을 어떤 의미로든 전혀 사랑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

이불을 끌어당겨 힘겹게 몸을 가리던 황후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 * *

“흐으…….”

황후는 청의 손을 피해 움찔대며 몸을 물리려 했다. 하지만 뒤쪽은 침상 모서리와 벽으로 가로막혀 있어 더 달아날 수도 없었다. 눈앞에 발그스름하고 아담한 성기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그 광경을 넋이 나간 눈으로 내려다보던 청이 고개를 들었다. 황후가 극도로 거북해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를 달래려 습관적으로 웃었다.

“어여쁘십니다.”

황후는 청이 웃는 것을 처음 보았다. 가끔 메마른 표정으로 피식 비웃거나 헛웃음을 흘리긴 했지만, 저렇게 눈매를 휘며 웃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청이 운의전에 들렀다 간 뒤, 가끔 주위 사람들이 청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황제가 행차했을 땐 두려워 이마를 땅에 박고 그의 옷자락 끝도 쳐다보지 못하는 이들이 청은 종종 흘금흘금 곁눈질로 훔쳐보았다.

황후가 제국으로 팔려 온 때보다도 한참 전, 옛날의 청은 황도에서 여러모로 유명했다고 했다. 그의 말 한 마디, 웃음 한 번에 가슴 설레어 밤잠을 설친 이가 한둘이 아니라고. 그가 익히 아는 대장군과는 상당히 괴리가 있었다. 청은 물론 잘생기긴 했지만, 표정이 거의 없고 무뚝뚝해서 대하기 어려웠다. 그 나이가 되도록 미혼인 것도 본인이 연애에 전혀 관심이 없어서 그런가 보다 했다.

이런 식으로 청의 다정한 면을 알고 싶지 않았다. 정사가 원래 마냥 무섭고 힘들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결코 이런 식으로는 알고 싶지 않았다.

청의 손끝이 황후의 가슴께에 닿았다. 하지만 쇄골 아래에서부터 명치쯤까지를 길게 가로지른 흉터에 차마 손을 대지 못하고 그 주위를 맴돌다 떨어졌다. 그는 대신 고개를 숙여 황후의 아랫배에, 그리고 성기 위에 한 번씩 입을 맞추었다.

“전하, 조금만 몸에 힘을 빼시고……. 예, 잘하고 계십니다.”

청은 시종일관 정중했다. 황후를 가만가만 어르고 달래는 차분한 음성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의 손이 가느다란 허벅지 사이에 자리 잡은 성기를 살며시 쥐었다. 손바닥 전체로 감싸고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찌르르한 전율이 퍼졌다.

“아…… 으응, 하, 앗.”

황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에 찬 얼굴을 하고서도 착실히 흥분했다. 청의 애무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가 전신에 묻혀 온 황제의 향에 반응해서였다. 바들바들 곧추선 성기와 음낭 아래 구멍이 흠뻑 젖었다. 말간 액체가 줄줄 새어 나와 아래 깔린 이불에 얼룩이 졌다.

청은 그것을 무심하게 쓱 쓸었다. 그의 검지와 엄지 사이에서 투명한 애액이 죽 늘어났다. 황후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몇 번 입구에 문질러 액을 펴 바르고, 손가락을 부드럽게 밀어 넣었다. 구멍 안은 풀어 주고 말고 할 것도 없이 흐물흐물하게 녹아 있었다.

청은 상대의 몸이 충분히 달아오른 것을 확인하고 자신의 옷고름을 풀었다. 황후는 흘러내리는 옷자락 사이로 조금씩 드러나는 청의 맨몸을 보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간격이 너무 가까워 볼 수밖에 없었다.

황후는 황제가 아닌 다른 사내의 맨몸을 보는 것 또한 처음이었다. 청은 얼굴만큼이나 몸도 잘생겼다. 평인이라 그런지 황제보다는 확실히 몸이 가늘었다. 우락부락하기보단 늘씬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곧게 벌어진 어깨와 가슴팍, 배의 윤곽이 제법 보기 좋았다.

그의 성기는 전혀 흥분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청은 당황하지도 않고 덤덤하게 자신의 것을 쥐고 자위했다. 공무를 처리할 때와 다름없는 무미건조한 얼굴을 하고 스스로의 성기를 흔드는 모습이 기괴하면서도 묘하게 음란했다. 탁, 탁, 탁. 터질 듯 아슬아슬한 정적 속에 청이 자위하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렸다.

“아프게 하지 않겠습니다.”

청이 황후의 허벅지를 쥐어 고정하며 낮게 속삭였다. 간신히 반쯤 세운 성기 끝을 입구에 맞췄다. 귀두가 미끌미끌하게 젖은 구멍에 꾹 눌렸다. 앞으로 다가올 쾌락을 기대하며 내벽이 멋대로 발씬거렸다.

“안, 안 돼…….”

황후는 절박하게 눈을 돌려 황제를 보았다. 이대로라면 자신은 정말로 황제가 아닌 다른 이의 성기를 몸 안에 받게 될 터였다.

그러나 자신의 반려가, 제국의 황후가 외간 남자 아래에 깔릴 위기에 처했는데도 황제의 표정에는 동요가 없었다. 그는 황후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눈길은 줄곧 청에게 못 박혀 있었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집요하게 응시하는 시선이 무서울 정도였다.

이자들은 미쳤다. 청도, 황제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소름이 끼쳤다. 기괴하게 뒤틀린 상황에,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던 황후의 이성이 사라졌다. 저항을 포기하고 무력하게 청에게 몸을 맡기고 있던 그가 최후의 발악을 했다.

“대장군, 하지 마세요. 싫어. 싫……. 하지, 말라니까!”

그가 찢어지는 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마구잡이로 팔을 휘둘렀다. 주먹을 쥐어 청의 어깨를 때리고 발로 밀어냈다. 평생 몸싸움을 해 본 적도, 누군가를 해쳐 본 적도 없는 이라 몸놀림이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청은 아무 반응 없이 그 공격을 고스란히 받아 주었다.

기어이 손톱이 살점을 할퀴는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황후는 자신이 해 놓고도 제풀에 놀라 몸부림을 멈추었다. 청의 뺨에 가로로 길게 붉은 선이 그어졌다. 속살이 벌겋게 드러난 상처에 핏방울이 송골송골 맺히다가, 이윽고 핏줄기가 되어 얼굴을 타고 흘렀다.

“…….”

청은 손등으로 뺨을 쓱 훔쳐 피가 난 것을 확인하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옷자락에 피를 문질러 닦고 하던 일을 계속하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황제가 움직이는 것이 더 빨랐다. 그는 결코 서두르지 않는 걸음걸이로 다가와 침상에 올랐다. 청의 뒤에서 손을 뻗어 그의 뺨을 만졌다. 황제의 손끝에도 시뻘겋게 피가 묻어났다.

“예락.”

잘 만들어진 기계처럼 움직이던 청이 처음으로 사람다운 반응을 보였다. 공포로 얼룩진 시선이 차마 황제를 돌아보지 못하고 이불 위를 방황했다.

“누가 멋대로 피를 흘리라 했지? 누구 허락을 받고.”

“자,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황제는 손에 흠뻑 묻은 피를 핥았다. 그의 입술에 발갛게 스민 핏물이 꼭 입술연지 같았다. 기괴하면서도 묘하게 요염한 광경이었다. 그는 청의 뒤에 몸을 바짝 붙였다. 옷자락끼리 스치어 부스럭대는 소리가 났다.

“으흑…… 헉.”

청이 괴로워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나 청에 가려 황후의 시야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정확히 보이지 않았다. 퍽. 갑자기 커다란 충격이 닥쳤다. 청의 몸이 앞으로 확 고꾸라졌다. 그 와중에도 황후에게 체중을 싣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침상을 짚었다.

“아, 윽!”

공황 상태에 빠진 황후의 시선이 힘겹게 아래로 향했다. 자신의 허벅지 위에 고개를 박고 쓰러진 청의 뒤통수가 보였다. 뒤에서 황제가 우악스럽게 밀어붙일 때마다 그의 몸이 맥없이 들썩였다. 두 남자의 밀착한 몸과 가려진 옷자락 너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런 방면에 순진한 그라도 금세 알 수 있었다.

“자지를 벌떡벌떡 잘도 세우는군.”

황제가 풀어 헤친 옷자락 사이로 손을 밀어 넣어 성기를 쥐었다. 청이 헉, 하고 다급하게 숨을 삼켰다.

“왜, 황후와 붙어먹을 생각에 새삼 흥분되었나?”

“헉, 제가 잘못, 부디, 읏, 용서를…….”

“그간 써먹을 데도 없던 것을 오랜만에 놀리게 되어 신이 났던 모양이지?”

“흐으, 윽……!”

“양인도 아닌 몸으로 황후를 어찌 만족시키려고. 향도 없고 결착도 못 하는 주제에 감히 좆을 박으려 하니, 황후도 화가 났지 않은가.”

온갖 저속한 말들이 쏟아졌다. 속이 울렁거렸다. 황후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당장 여기서 뛰쳐나가고 싶었다.

황제는 그의 등 뒤로 몸을 낮추어 청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황후에게까지는 정확히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청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 파들파들 떨리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 내용이 얼마나 충격적일지는 충분히 짐작되었다.

“폐하, 그건…….”

“말해 보라니까. 응? 예락 그대 목소리로, 직접 듣고 싶어서 그래.”

“헉, 제발, 폐하, 황후 전하가 계십니다, 제발 그것만은!”

청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황제는 뒤에서부터 청의 머리채를 확 움켜쥐었다. 고개가 한껏 젖혀지도록 들어 올려 가차 없이 뺨을 때렸다. 퍽 돌아간 청의 고개가 황후의 허벅지 위에 도로 풀썩 떨어졌다. 청의 뺨에 난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매끈하게 뻗은 허벅지에 얼룩졌다.

“저, 저는, 흐윽!”

머리가 산발이 된 채로 쓰러져 황제가 밀어붙이는 대로 흔들리다 말고, 결국 청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폐하 좆이 좋습니다. 저는 오로지…… 폐하 좆에, 읏, 박히는 것, 만 좋…….”

“하아…….”

황제가 피 묻은 손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의 이마와 머리칼에 엷게 피가 묻었다.

“황후.”

눈이 마주쳤다. 짐승을 연상시키는 연한 색 눈동자 가운데 동공이 확 좁혀졌다. 황후의 이가 따닥따닥 부딪쳤다. 황제가 피식 웃으며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나가시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황후는 허겁지겁 침의로 몸을 감싼 채, 맨발로 침상에서 내려섰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절박하게 뛰쳐나갔다. 극한의 공포와 충격에 휩싸여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황제의 침실로부터 멀어지는 한 발짝 한 발짝이 얇은 얼음 위를 걷는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늑장을 부렸다간 딛고 있는 얼음장이 깨어져 검고 깊은 물에 빠질까 봐, 필사적으로 발을 놀렸다. 그가 떠난 뒤 침상 위에서 이어질 일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 여리박빙(如履薄氷) :

얇은 얼음 위를 걷는 것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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