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전반측(輾轉反側)
2황자 신무을(晨珷乙)의 탄신연이었다. 황궁에서 성대한 잔치가 열렸다. 황제를 비롯한 다른 황족들은 물론이고, 후궁들과 고위 관리들까지 줄줄이 참석했다.
〈2황자가 강건히 장성하여 국정에 큰 보탬이 되니, 아비 된 마음으로 기쁨을 감출 수가 없느니라. 오늘만큼은 다들 걱정 없이 먹고 마시며 즐기도록 하라.〉
〈아바마마의 은덕이 하해와 같사옵니다!〉
황제가 잔을 들어 건배를 제의하자, 벌써 취하여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2황자가 벌떡 일어났다. 술잔을 쭉 비운 그는 황제를 향해 크게 절을 했다. 체신도 잊고 호탕하게 웃는 것이 몹시도 기분이 좋은 듯했다.
당연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가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앓아누운 지가 벌써 반년째였다. 게다가 황제가 그를 이리도 아끼니, 이대로 형님이 순조롭게 죽어 주기만 한다면 제위는 그의 차지가 될 터였다.
음악 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하늘하늘한 옷을 입은 무희들이 앞으로 나와 춤사위를 선보였다. 흥청망청 이어지는 연회 가운데, 한 사람이 슬쩍 자리를 비우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청은 후원의 잔디 위에 아무렇게나 풀썩 앉았다. 우아한 빛깔의 비단옷이 구겨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으…….〉
그는 이마를 짚고 짧게 신음했다. 분위기를 맞추려 몇 잔만 마셨을 뿐인데 벌써 취기가 올랐다. 씁쓸한 독주의 향이 아직까지도 입 안에 감돌았다.
황제는 독한 술을 좋아했다. 한 번 술을 입에 대면 인사불성이 되어 요란하게 코를 골며 곯아떨어질 때까지 마셔야 성이 풀렸다. 제국의 주인으로서 체면도 체면이거니와 위험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술에 취해 무방비한 황제를 누군가 작정하고 해치기라도 하면 어찌한단 말인가.
그러나 황제는 주변의 충고를 들을 인물이 아니었다. 모두가 그의 한심한 행태를 보고도 못 본 척 눈을 내리깔고 입을 다물었다. 포악한 황제의 분노를 사 목이 달아날까 무서워서였다.
〈지청.〉
갑자기 이름을 불려 흠칫 놀랐다. 언제부터인지 누군가 기척도 없이 다가와 있었다. 밤이슬 맺힌 풀잎을 밟으며 우뚝 선 남자는 키가 컸다. 달빛이 스민 다갈색 눈동자가 그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표정 없는 얼굴이 어슴푸레한 그늘에 잠겼다.
〈6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건물 벽에 등을 기대고 방만하게 주저앉아 있던 청이 잽싸게 몸을 일으켰다. 술기운 때문에 도중에 조금 비틀거렸지만, 어찌 되었든 예를 갖추는 데는 성공했다.
〈왜 네가 여기에 있지?〉
2황자의 탄신연은 황족들과 비빈들, 높은 관직에 있는 귀족들만 참석하는 자리였다. 청에게까지 초대장이 돌아갈 만한 연회는 아니었다.
〈사실 제가 순 귀인마마의 춤에 맞추어 금을 타기로 하였사온데, 갑작스레 취소된 터라……. 그저 술이나 축내고 있었습니다. 취기가 오른 듯하여 바람을 쐬러 나왔고요.〉
청이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해명했다. 오늘 연회에서는 원래 후궁 중 한 명이 춤을 선보이기로 되어 있었다. 황제의 눈에 들어 총애를 얻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순 귀인은 귀족들 중에서도 악기 다루는 솜씨가 뛰어난 것으로 유명한 청에게 연주를 해 줄 것을 간곡히 청했다.
그러나 연회가 시작하기 몇 시간 전에 후궁의 발목이 부러졌다. 신발 굽에 굵은 대못이 박혀 있던 것을 미처 모르고 신었다가 크게 넘어진 탓이었다. 우연히 벌어진 사고는 절대 아니었다. 그 뒤에 누군가의 흉계가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전하께서도 연회가 지루하여 잠시 빠져나오셨습니까?〉
황자는 언제나 그렇듯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건조한 시선으로 청을 주시할 뿐이었다. 섬뜩한 무반응이 비현실적인 외모와 더불어 그를 더욱 인간 같지 않게 만들었다.
〈달빛을 안주 삼고 풀밭을 술상 삼아 한잔하시겠습니까? 전하와 저, 둘이서만요.〉
청은 이제 그의 흉흉한 태도에도 익숙해졌다.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가 곧장 목이 졸리고 몸이 벽에 처박혔던 첫 만남 때에 비하면 이것도 장족의 발전이었다.
〈여기서?〉
〈예. 연회장의 술은 너무 쓰고 독하여 맛이 없잖습니까.〉
청은 배시시 웃으며 품에서 술병을 꺼냈다. 그 와중에 야무지게 술잔까지 챙겨 왔다.
〈아, 그게, 황제 폐하의 선택에 토를 다는 것은 절대 아니옵고, 제 취향이 미천한 나머지 폐하의 높으신 안목에 감히 따라갈 수 없어 그렇다는 말이옵니다. 아무튼 사선시(司膳寺)의 궁인에게 슬쩍 부탁하여 한 병 받아 왔습니다.〉
〈…….〉
〈다른 것으로 바꿔 올까요?〉
제풀에 찔린 청이 황자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황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술병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이내 옷자락을 걷으며 그의 곁에 풀썩 앉았다. 황족답지 않게 스스럼없는 행동이었다.
인적 없이 수풀만이 우거진 황궁의 뒤뜰에서 묘한 주연이 열렸다. 참석자는 황자와 청 둘뿐이었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궁중 악사들 대신 풀벌레들이 음악을 연주했다.
떠드는 것은 주로 청이었고 황자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를 올곧게 올려다보는 청의 눈동자에 달이 담겨 있었다. 말솜씨를 발휘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던 청이 이따금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때면 그가 쥔 술잔 속에 담긴 달도 파르르 흔들렸다.
밤하늘 아래 잔을 주고받는 동안 시끄러운 연회의 소음도, 눈앞을 어지럽히는 가지각색의 비단 옷자락들도, 코를 찌르는 음식 냄새도 점차 잊혔다. 대신 그 자리에 평온이 찾아들었다.
* * *
청은 자꾸만 축축 늘어지는 몸을 억지로 추슬러 일으켰다. 몸이 묘하게 무거웠다. 간밤 내내 꿈에 시달린 탓에 잠을 자도 잔 것 같지 않았다. 꿈속의 정경이 눈에 선했다. 밤이슬을 머금은 청량한 풀 냄새와 고즈넉하게 우는 풀벌레 소리, 잔에 담긴 술 표면을 흔들고 지나가는 서늘한 밤바람이 아직도 생생했다.
“아…….”
목이 몇 년 동안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은 황무지처럼 뻑뻑하게 갈라졌다. 향긋한 술을 잔에 가득 채워 홀짝이던 꿈속과는 모든 것이 정반대였다.
침침한 눈을 힘겹게 깜빡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뿌옇게 흐린 시야에 물병과 잔이 들어왔다. 청은 손을 가늘게 떨며 힘겹게 물을 따랐다. 잔을 들어 물을 마시려다가 흠칫했다. 물이 역겨웠다. 맑고 깨끗한 맹물인데, 어젯밤까지만 해도 멀쩡히 마시고 잠들었는데. 처음 맡아 보는 물비린내가 확 풍겼다. 도저히 입을 댈 수가 없었다.
“욱……!”
청은 잔을 놓치고 손으로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텅! 도자기 잔이 바닥을 뒹굴며 왈칵 물을 쏟아 냈다. 그는 잔을 떨어뜨리고 나서도 한참이나 헛구역질을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간신히 메슥거림이 잦아들었다. 침상 등받이에 기대어 앉아 있던 청의 상체가 푹 고꾸라졌다. 이부자리 위에 긴 머리채가 흩어졌다. 그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숙이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젊은 태의가 끔찍한 최후를 맞은 이후, 청이 머무는 전각에는 아무도 오지 않게 되었다. 꼭 필요할 때에만 최소한의 인원이 드나들었고 그조차도 매번 얼굴이 바뀌었다. 외딴 전각에는 온종일 소름 끼칠 정도로 고요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미칠 것 같았다. 아니, 이미 조금씩 미쳐 가고 있었다. 지독한 고독이 그의 정신을 갉아먹었다. 창가에 나뭇잎 스치는 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랐고, 가끔 황제의 목소리가 그를 부르는 환청을 들을 때면 자다가도 발작을 일으켰다.
지금 청에게는 누군가가 끔찍이 필요했다. 그를 아프게 해도 좋고 망가뜨려도 좋으니, 누군가 곁에 있어 주길 바랐다. 그것이 이 잔인한 외로움 속에서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나을 터였다. 그렇게 해 주지 않을 바엔 차라리 죽여 주길 바랐다. 더 이상 고통에 시달리지 않도록.
갑자기 뜨거운 것이 속에서부터 울컥 치밀어 올랐다. 목 안이 커다란 돌덩이가 든 듯 뻐근하게 아팠다. 고작해야 옛날 꿈을 꿨을 뿐인데, 별것 아닌 일인데. 슬픔이 북받치고 눈가가 뜨거워졌다.
최근 그는 이상하리만치 눈물이 잦아졌다. 사소한 일 하나하나가 비수가 되어 마음을 할퀴었다. 스스로가 몹시 한심하고 미련하게 느껴졌지만 도무지 절제할 수가 없었다.
“윽, 흐윽…….”
그는 손에 고개를 파묻고 입술을 깨물며 한참을 홀로 울었다. 얼굴을 가린 양 손바닥이 눈물에 흠뻑 젖도록. 텅 빈 전각에 그 말고는 아무도 없는데도, 차마 마음껏 울지도 못하고 한껏 소리를 죽인 채였다.
* * *
“전하, 마땅한 사람을 구했습니다.”
강 어의가 한껏 소리를 낮추어 은밀히 고했다. 고향 이야기를 나눈다는 핑계로 주위 사람들을 모두 물리고 차를 마시던 도중이었다. 황후가 화들짝 놀라 찻잔을 내려놓았다.
“자시에서 축시 사이에 올 것입니다. 침소의 가구가 망가져 급히 새것으로 바꾸러 온 시종으로 위장하여 들일 계획이니, 놀라시거나 어색해하지 마시고 자연스레 맞으시면 되옵니다.”
“마땅한 사람이라뇨?”
“씨내리 말입니다.”
그제야 이해했다. 황제를 대신하여 그를 잉태시킬 사내가 온다는 뜻이었다. 제국의 황후 된 몸으로 구중궁궐 한복판에서 황제가 아닌 다른 이와 교합하는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른다는 뜻이기도 했다. 가슴이 불길하게 뛰었다.
“전국을 샅샅이 뒤져 제국인과 서역의 이민족 사이에서 태어난 자를 구했습니다. 황손의 용모 때문에 의심받을 일은 없을 것입니다.”
“강 대인께서 어찌 그런 일까지 하셨습니까?”
“제국에서 조력자를 찾았습니다. 황제에게 반감을 가진 이가 우리뿐만이 아니더군요.”
“그게 누구입니까?”
“탁주백 홍원익이라는 자를 아십니까?”
아는 이름이 들렸다. 황후에게 해동백이라는 이름의 연분홍빛 꽃을 선물하여 그의 처지를 조롱한 사람이었다. 순진하게 선물을 받았다가 나중에서야 그 꽃의 의미를 알게 된 황후가 상심하여 꽃병을 내던졌고, 때마침 운의전에 들렀던 청이 그를 위로하려 그와 단둘이 남았고, 그리고…….
모든 일이 복잡하게 뒤얽혀 있었다. 마구잡이로 엉켜 도저히 풀 엄두가 나지 않는 실뭉치 같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자는 저를 욕보였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어찌 믿고 거사를 진행하려 하십니까.”
“탁주백은 선황의 측근이었던 자로, 지금의 황제가 등극하면서 일시에 권력을 잃게 된지라 여러모로 불만이 많다고 합니다. 다른 세력이 커져 황권을 누를 수만 있다면 뭐든 물심양면으로 돕겠다 하더군요.”
“…….”
“어차피 우리는 더 잃을 것도 없습니다. 탁주백을 믿을 수 없다고 망설이다가는 조국의 멸망을 손 놓고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
“전하.”
강 어의가 황후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황후가 어린 시절 쓴 약을 먹기 싫어 울고불고 떼를 쓸 때도, 그는 이렇게 등을 두드려 가며 왕자를 달래곤 했다.
“아직까지 깨어나지 못하고 사경을 헤매는 9왕자 전하를 생각하시옵소서. 지금 이 순간에도 황폐한 국토에서 고통받고 있는 율의 백성 또한 굽어살피시옵소서.”
황후는 그 순간 엉뚱하게도 자신의 친형도 조국의 백성들도 아닌 황제를 떠올렸다. 그가 처형장에 끌려가는 죄인처럼 벌벌 떨면서 황제의 시침을 들었던 밤의 일이었다.
그는 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황제를 두려워했다. 책봉례를 치르고 공식적인 반려 사이가 되었거늘, 그와 눈을 마주치기는커녕 옷자락 끝만 보아도 몸이 떨렸다. 황후에 비해 황제의 키와 체격이 훌쩍 큰 것도, 눈동자 색이 짐승의 것처럼 밝은 것도 소름이 끼쳤다.
어느 날 상궁 하나가 귓속말로 조심스럽게 일러 주었다. 황제의 용모가 이국적인 것은 그가 이민족 태생인 탓이라 했다. 황궁 내의 모두가 쉬쉬하고 있지만 황제에게 흐르는 피의 절반이 비천한 이민족의 것이라는 사실은 공공연히 알려져 있다고. 황제가 돌연 황궁에 피바람을 일으켜 경쟁자들을 죄다 축출하고 옥좌에 앉기 전까진 그는 황위 계승을 고려할 대상조차 아니었다고.
게다가 생모가 이민족이라니, 머리털이 희고 눈이 파래서 꼭 도깨비 같다던 그 천한 족속의 태를 빌려 태어났다니. 황후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한 삶이었다.
그는 여전히 황제가 무서웠다. 자신의 조국을 짓밟은 약탈자라 여겨 증오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듣자 그가 전보다는 조금 가깝게 느껴졌다. 황후는 자연스레 그를 연민하게 되었다. 풍요롭고 평온한 지배층의 삶을 살아온 이의 습성이었다. 가진 자의 여유를 베풀어 못 가진 자를 긍휼히 여기는 것.
〈폐하, 감히 한 말씀 올려도 되겠사옵니까?〉
항상 겁먹은 토끼처럼 황제 앞에서 움츠러들어 있기만 하던 황후가 처음으로 그를 먼저 불렀다.
〈저는 품계가 낮은 후궁 소생이었던지라, 왕비에게서 난 다른 왕자와 공주들에 비해 차별을 많이 받았습니다. 심지어 태어난 순서조차 한참 뒤쪽이어서 왕권과도 한참 거리가 멀었고요.〉
황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황후의 말을 듣긴 한 건지 의심스러운 덤덤한 얼굴을 유지할 뿐이었다.
〈이제껏 서럽고 힘든 일이 많으셨지요. 제가 후궁 소생으로 태어난 것이 제 잘못이 아니듯, 나쁜 피를 타고 태어난 것 또한 폐하의 잘못이 아닌데 말입니다. 하나 저는 폐하를 이해합니다. 저도 비슷한 처지였으니까요.〉
황제는 한참 침묵을 지켰다. 황후는 슬슬 불안해졌다. 자신이 해서는 안 될 말을 꺼내어 황제를 노하게 만든 것이 아닌가 걱정되었다. 마침내 황제가 기나긴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그랬소?〉
바람 한 점 일지 않는 날의 바다처럼 평온한 음성이었다. 황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황제는 생긋 웃고 있었다. 꽃이 만개하듯 화사하게. 살아 있는 인간 같지도 않던 서늘한 얼굴에 처음으로 생기가 깃들었다. 사르르 눈웃음을 치며 볼우물이 패도록 미소 짓는 얼굴이 너무 아름다워서, 황후는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말았다.
그 일이 있었던 후로 그는 황제를 조금은 달리 보게 되었다. 겉으로는 무섭고 차가워 보이지만, 그저 상처를 많이 받아 마음의 문을 닫았을 뿐이라 생각했다. 꾸준히 보듬어 주다 보면 언젠가는 웃는 얼굴을 다시 보여 줄 거라 여겼다. 아슬아슬한 연심이 싹을 틔운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저는.”
회상은 거기에서 끝났다. 눈앞에는 비참한 현실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황후가 길게 늘어진 옷소매 끝자락을 구기며 망설였다. 강 어의는 참을성 있게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겠……. 하겠습니다. 내 나라를 살릴 수 있다면.”
이윽고 황후가 눈을 질끈 감으며 결연히 대답했다. 이젠 돌이킬 수 없었다. 헛되이 품었던 사사로운 감정에 연연하기에 이미 그는, 그리고 황제는 너무도 멀리 와 버렸으므로.
* * *
어느덧 겨울이 문간에 성큼 다가왔다. 그나마 몇 개 남아 있던 마른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고 뜰에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불어닥쳤다. 유독 하늘이 흐리던 어느 날 아침, 진눈깨비 같은 눈발이 스산하게 휘날리기 시작했다. 첫눈이었다. 그와 동시에 황궁에 경사가 생겼다.
“황후마마, 경하드립니다. 회임하셨사옵니다!”
황후의 손목에 실을 묶어 진맥하던 태의가 경탄을 터뜨렸다. 스스로의 무릎만 내려다보며 얌전히 진맥을 받던 황후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모든 것이 그저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놀라 웅성대는 궁인들도, 이 소식을 빨리 전하기 위해 잽싸게 뛰어나가는 내관도.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현실감이 없었다.
결착은 하지 않을지언정 황제는 환열기마다 황후를 꼬박꼬박 찾았다. 한때는 배려라 생각한 적이 있었으나 지금은 패자를 향한 조롱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 짓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화위복으로 도움이 되었다.
강 어의와 황후는 마주 앉아 머리를 싸맸다. 항백국(巷伯局)에 보관되어 있는 시침 기록과 황후의 환열기를 대조해 가며 날짜를 끼워 맞췄다. 그의 회임은 철저한 계산 끝에 이루어졌다. 누구도 감히 황손의 정당성을 의심할 수 없도록.
상황이 급변했다. 찾는 이가 거의 없어 한적하던 운의전이 오랜만에 붐볐다. 평소에 얼굴 한 번 보여 주지 않던 이들이 죄다 황후를 만나러 제 발로 찾아왔다. 셀 수 없는 축하 인사와 선물이 쏟아졌다. 임신부에게 좋다는 약재며 식재료들이 운의전의 곳간에 그득그득 쌓였다. 어디를 가도 무시당하고 구박받기 일쑤였던 운의전의 궁인들이 한껏 목을 뻣뻣이 세우고 어깨를 폈다.
그날 오후, 마침내 황제가 운의전을 방문했다.
“축하하오.”
황후의 침상 곁에 앉은 황제가 여상하게 인사를 건넸다. 낮은 목소리가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그러나 반려의 회임 사실을 갓 전해 들은 이의 반응이라기엔 어딘가 묘한 구석이 있었다. 황후도 마찬가지였다. 수줍게 뺨을 붉히며 기뻐해야 마땅할진대, 안색이 희다 못해 퍼렇게 질려 있었다.
“먹고 싶은 건?”
“저……. 그게.”
“먹고 싶은 것, 없냐고 물었는데.”
황제가 물었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뚫어져라 상대를 주시하는 시선이 섬뜩했다. 황후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먹고 싶은 것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지금도 속이 메슥거려 견딜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그가 저지른 더러운 짓이 황제의 앞에 낱낱이 까발려질 것만 같았다.
“황손이 건강히 크려면 그대가 잘 먹어야 되지 않겠소.”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조국을 위해서라면 대역죄를 저지르는 것도 불사하겠다고 마음먹었으면서, 막상 황제를 마주하니 온몸이 차게 식었다. 거대한 공포 앞에서는 결심도 다짐도 소용없었다.
그의 배 속에 자라고 있는 것은 황손이 아니었다. 이름조차 모르는 이민족 혼혈 사내의 씨였다. 죄의 결실이 열 달 동안 그의 피와 살을 양분으로 무럭무럭 자라날 터였다.
“선물로 받은 것이 너무도 많아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나 보군. 언제든 떠오르면 말하시오.”
황제는 별다른 말을 남기지 않고 자리를 떴다.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도 황후는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마마, 어디 편찮으신 곳이라도.”
“괜찮으십니까?”
결국 보다 못한 시종들이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황제가 머물렀던 그 짧은 시간 동안, 황후의 등허리가 찬물을 한 동이 들이부은 것처럼 식은땀으로 온통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 * *
청은 잠결에 몸을 뒤척였다. 절로 인상이 써지고 이마에 엷게 식은땀이 배었다.
“흐으…….”
몸이 불편했다. 정확히는 아랫배가 아팠다. 커다랗고 뜨거운 쇳덩이가 배 안에 쑤셔 박힌 것 같았다. 그는 찢어질 것 같은 배를 붙잡고 끙끙 앓았다.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것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다시 처박혔다. 쾅. 몸 전체가 들썩였다.
“윽!”
청은 짧은 비명과 함께 깨어났다. 무언가 이상했다. 몽롱한 정신으로도 이질감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청은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허겁지겁 침상 위를 짚었다. 그러나 몸을 일으키려는 그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크고 단단한 손이 그의 팔을 비틀어 잡고 끌어당겼다. 청은 상체가 풀썩 꺾인 채 뒤로 질질 끌려갔다. 바깥바람을 머금은 서느런 옷자락이 등에 스쳤다.
“폐…… 헉!”
차마 말을 끝맺지도 못하고 다시 한번 박혔다. 명치를 세게 얻어맞은 듯 숨이 막혔다. 청의 엉덩이가 움찔 긴장했다. 잠결에도 버겁게 성기를 받아먹던 내벽이 의식을 되찾자 더욱 뻑뻑하게 조여들었다.
“잘 잤어?”
황제가 허리를 힘주어 꾸욱 밀어붙였다. 우둘투둘 핏줄이 돋은 성기가 머리를 들이밀었다. 큼직한 기둥이 한계까지 벌어진 내벽을 주욱 긁는 감각이 적나라했다.
“하도 곤히 자기에, 언제쯤 깨어나려나…… 했지.”
아직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청이 어렵게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위에서부터 찍어 누른 황제를 발견하고, 그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황제가 습관적으로 희미하게 웃었다.
세상모르고 잠든 청을 붙들고 흘레붙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반항 없이 축 늘어진 이의 다리를 벌려 구멍을 넓히고 성기를 쑤셔 넣었다. 얼굴을 찡그리지도, 울며 거부하지도 않고 얌전히 눈을 감은 채 몸을 맡긴 모습이 어여뻤다.
그래도 역시 청은 이렇게 깨어 있는 편이 훨씬 나았다. 잠에서 깨어난 청은 황제가 찌걱찌걱 소리가 나도록 박아 줄 때마다 안을 꽉꽉 조이며 울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충격에 휩싸인 눈으로 허공을 더듬다가, 입 안의 살을 씹어 억지로 신음을 삼켰다. 매 순간 바뀌는 생생한 표정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아으, 흐, 악!”
청은 침상에 어정쩡하게 꿇어 엎드린 자세로 황제를 받았다. 안을 쾅쾅 때려 박는 움직임에 맞추어 큰 충격이 찾아들었다. 금방이라도 굵은 기둥이 내장과 가죽을 뚫고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 저도 모르게 팔을 내려 아랫배를 감쌌다.
“예락, 그거 아는가?”
청의 엉덩이 살이 벌겋게 물들도록 철썩철썩 치대다 말고, 문득 황제가 몸을 낮추어 청의 등에 가슴을 바짝 붙였다. 스스로의 배를 끌어안은 청의 손 위에 그의 손이 겹쳐졌다. 청이 반사적으로 퍼뜩 긴장했다.
“설영이 아이를 가졌어.”
황제는 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는 청의 얼굴을 집요하게 들여다보며 상대의 반응을 낱낱이 관찰했다.
“화, 황후…… 전하가…….”
청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목이 졸린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황후가 평생 회임하지 않길 바랐다. 황후뿐만 아니었다. 황제의 비빈들 중 그 누구도 그의 아이를 갖지 않기를 바랐다. 동시에 그 바람이 더할 나위 없이 그릇되고 허황된 바람이라는 것도 너무 잘 알았다.
그래서 청은 역으로 황제가 아이를 많이 갖길 바라게 되었다. 유능하고 총명한 황자와 황녀들을 잔뜩 거느려, 아무쪼록 권력의 기반을 튼튼히 다지기를. 몹시도 모순적이고 자학적인 소망이었다.
“그대는 하루가 멀다 하고 내 좆을 삼키면서도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지. 밥보다 정액을 더 자주 먹이는 것 같은데.”
사실이었다. 단 한 마디도 반박할 수 없는. 황제가 아무리 청의 안에 성기를 박고 정액을 싸질러 봤자 내장에 흥건히 들어찬 것이 도로 줄줄 흘러나올 뿐이었다. 청은 결코 황제의 품에 아이를 안겨 줄 수도, 대를 이어 제위를 굳건히 해 줄 수도 없었다.
그의 말이 그 어떤 칼보다도 날카롭게 청을 찔렀다.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청에게는 황제와 교합하는 것조차 잘못이 되었다. 그는 황실의 죄인이었다. 비빈들에게 돌아가야 할 소중한 기회를 헛되이 낭비하는.
청은 침상에 엎드린 채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힘없이 이불을 움켜쥔 마른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이윽고 억눌린 흐느낌이 드문드문 새어 나왔다.
“윽…… 흐으…….”
청은 이불에 고개를 파묻고 소리 없이 울었다. 황제의 성기를 반쯤 문 엉덩이 또한 가늘게 들썩였다.
“울어?”
황제가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래도 대답이 없자,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움켜쥐고 고개를 억지로 젖혔다.
“아, 악!”
긴 흑발이 손마디에 엉켰다.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청의 옆얼굴이 눈물범벅이었다. 검은 속눈썹이 축축하게 젖어 눈가에 드리우고, 울음기를 참느라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뭘 잘했다고 울어.”
억센 손힘으로 목이 잡혔다. 황제는 청의 고개를 침상에 찍어 눌렀다. 얼굴이 이불 위에 푹 처박혔다. 컥컥대는 신음이 두툼한 이불에 죄다 잡아먹혔다.
“읍…… 흐읏, 흐, 흡!”
청이 필사적으로 바르작거렸다. 코와 입이 이불에 파묻혀 전혀 숨을 쉴 수 없었다. 눈앞이 빨갛고 파랗게 물들었다. 빠져나갈 길을 찾지 못한 뜨거운 호흡이 꼴딱꼴딱 되넘어 갔다.
“이 구멍은 자지 빨아 먹는 것 말고는 도무지 쓸모가 없는 모양이군. 그래, 하기야. 애를 못 낳으면 좆이라도 잘 받아먹어야지.”
청은 죽어 가는 짐승처럼 맥없이 허우적거렸다. 어설프게 치켜든 엉덩이 사이로 성기가 드나들었다. 젖은 속살이 절박하게 조여들어 성기에 들러붙었다. 살려 달라고 간청하듯 내벽 전체가 기둥을 힘껏 쥐어짰다.
황제는 명치까지 짓이길 기세로 기복 없이 쾅쾅 박아 넣었다. 청의 판판한 아랫배 위에 성기의 윤곽이 희미하게 도드라졌다. 반쯤 발기한 청의 성기가 허공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며 스스로의 허벅지와 사타구니를 때렸다. 점차 온몸에 힘이 빠졌다. 모든 감각이 가물가물한 가운데 배 안을 거세게 후려치고 긁어 대는 성기만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어느 순간부턴가 더 이상 괴롭지 않았다. 그저 몹시 졸릴 따름이었다. 의식이 흐려지며 사지가 축 늘어졌다. 청의 눈이 스르르 감기려는 찰나, 황제가 그의 몸을 거칠게 뒤집어 바로 눕혔다.
“허억!”
막혀 있던 숨이 확 터졌다. 차갑고 신선한 공기가 가슴에 급격히 들어찼다. 청이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눈으로 연거푸 기침을 했다.
“어딜 주군 앞에서 팔자 좋게 드러누워 자려고.”
청의 유두에는 아직도 청옥 귀걸이가 달랑달랑 박혀 있었다. 귀걸이를 빼는 것을 허락받지 못한 탓이다. 황제는 손끝으로 작고 푸른 보석을 쥐어 확 잡아당겼다.
“폐하, 헉, 폐…… 흐, 아악!”
유두가 통째로 뜯겨 나가는 듯한 아픔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청이 잔뜩 쉬어 쩍쩍 갈라지는 음성으로 비명을 질렀다. 물속에서 갓 끌어 올린 물고기처럼 몸이 멋대로 펄떡였다.
“정신 똑바로 차려. 다른 쪽 젖꼭지도 뚫리기 싫으면.”
“아, 으으, 흐…….”
왈칵 설움이 북받쳤다. 울어서 시뻘겋게 짓무른 청의 눈가를 타고 새로운 물줄기가 흘렀다.
황제는 항상 그렇듯이 그를 무참히 짓밟고 떠날 것이다. 자신의 아이를 가진 황후의 곁으로. 황후는 주위 사람들의 축하와 보호 속에서 태어날 아이를 손꼽아 기다리며 들뜬 나날을 보내고 있겠지. 그리고 청은 아무도 찾지 않는 외딴 전각에 남겨져 홀로 끔찍한 고독과 싸워야 할 것이다. 황제가 온몸에 새긴 참혹한 상처들로 아파하면서.
미치도록 고통스러웠다. 차라리 황제가 떠나기 전에 자신을 죽이고 가길 바랐다. 심장이 멎고 숨을 쉬지 않게 되면 더 이상 외롭지도 괴롭지도 않을 테니까.
“폐하…….”
가슴팍이 위태롭게 들썩였다. 청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울면서, 치밀어 오르는 흐느낌 사이사이로 말을 이었다.
“부디…… 한 번만. 하, 한 번만…… 안아 주십시오. 제발…….”
그가 벌벌 떨리는 팔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황제가 강제로 움켜쥐고 비튼 탓에, 여윈 팔목에 불그죽죽한 손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황제는 흡족해하는 기색으로 웃었다. 눈매가 곱게 휘어지고 양 뺨에 수줍은 꽃물이 들었다. 그러나 결코 청을 마주 안아 주지는 않았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너무도 잔인한 말이 태연자약하게 떨어졌다. 청은 넋을 잃고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한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그럼 그대도 내가 원하는 것을 줘. 안아 주는 것뿐이겠는가. 그대가 원하는 것, 뭐든지 들어줄 테니까.”
“…….”
청은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거친 숨을 헐떡이며 불안한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초조하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이리저리 허공을 방황했다. 그의 답을 기다리던 황제가 피식 웃었다. 그러나 아까와는 웃음의 온도가 확연히 달랐다. 차게 굳은 입매에서 언뜻 컴컴한 살의마저 엿보였다.
“청아, 너는…… 내게 끝내 매정하게 구는구나.”
남은 힘을 짜내어 애절하게 뻗은 팔이 툭 떨어졌다.
황제는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접합부만 빤히 내려다보며 청의 안을 들쑤셨다. 청에게 쾌락을 주기 위해서도, 그를 괴롭히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오로지 성기에 자극을 주어 정액을 싼다는 목적에만 충실했다. 배설 행위나 다를 바 없었다.
이윽고 내장 안에서 성기가 육중하게 맥동했다. 기세 좋게 쏘아져 나온 정액이 청의 배 안을 메웠다. 사정을 마친 황제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등을 돌렸다. 그는 만신창이가 되어 널브러진 청을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황제가 떠나고 난 후에도 청은 오랫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모든 감각이 식어 버린 화로처럼 사위었다. 그는 구멍 밖으로 꿀럭꿀럭 새어 나와 사타구니를 적시는 정액을 닦을 엄두조차 못 내고 축 늘어졌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양다리가 아무렇게나 벌어진 채 구겨진 이부자리 위에 방치되었다.
이윽고 눈물이 흘렀다. 아까 황제에게 시달리며 그렇게 울었는데도 눈물은 마르지 않는 샘처럼 자꾸만 솟았다. 청은 피멍투성이가 된 팔목을 힘겹게 들어, 보는 사람도 없는데 눈가를 가렸다.
“으흑, 흐, 흑…….”
한껏 억누른 울음소리가 고요한 방 안을 메웠다.
* * *
제국에는 새해 첫날에 해맞이 활쏘기를 하는 풍습이 있었다. 일출과 동시에 화살 세 발을 연달아 쏘고, 과녁에 화살이 꽂힌 위치로 한 해의 운수를 점쳤다. 물론 과녁의 정중앙에 가깝게 꽂힐수록 길한 것이었다. 청이 지내는 한적한 처소에도 과녁과 활, 화살이 배달되었다. 비록 요양 중이지만 활쏘기라도 하면서 적적함을 달래시라는 배려였다.
청은 털이 달린 겨울용 외투를 걸치고 뜰로 나갔다. 숨을 내쉴 때마다 허공에 새하얀 입김이 피어올랐다.
“하아…….”
고작 뒷마당까지 걸어간 것만으로도 숨이 차고 몸이 둔하게 아팠다. 뼈 마디마디에 냉기가 스몄다. 호적상으로는 아직 한창 창창한 나이이건만, 청은 이미 삶에 지쳤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피곤했다.
마당 한쪽에 시종들이 설치해 놓고 간 과녁이 보였다. 멀리 떨어져 작게 보이는 둥근 과녁이 대낮에 뜬 달처럼 희었다.
해맞이 활쏘기는 몹시 오랜만이었다. 어렸을 때 가족들끼리나 챙기던 것이었다. 그마저도 청은 매번 온갖 핑계를 대 가며 능글맞게 내뺐고, 비교적 성실했던 그의 동생이 그의 몫까지 대신 활을 쏘았다. 한 발 한 발 화살이 날아가 꽂힐 때마다 터지던 하인들의 탄성이 떠올랐다. 대견하다는 듯 웃는 부모님의 미소도.
청은 뜰 한쪽에 놓여 있던 활을 무심결에 쥐었다. 새하얀 입김을 뿜으며 과녁을 향해 화살촉을 겨누었다. 그러나 그는 곧장 시위를 놓지 못했다. 활대를 쥔 손이 안쓰러울 정도로 파들파들 떨렸다.
대못에 모질게 뚫렸다 간신히 나은 손이 예전 같지 않았다. 눈앞이 침침해 초점이 자꾸 엇나갔다. 청은 인상을 쓴 채 몇 번이고 고개를 흔들었다. 손등에 눈을 마구 문질러 보기도 했다. 그러나 흐린 시야는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결국 시위를 얼떨결에 놓쳐 버렸다. 핑! 화살이 불안정하게 날아갔다. 과녁을 아예 벗어나 수풀에 꽂히려나 했는데, 과녁 가장자리의 붉은 테두리에 박혔다.
화살통에는 셀 수 없이 많은 화살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청은 다른 화살을 집었다. 손끝이 허옇게 질리도록 힘껏 활줄을 당겼다. 결과는 또다시 처참했다. 두 번째 화살은 먼젓번 꽂힌 것의 정반대 방향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이번에도 붉은 가장자리에 꽂혔다.
해맞이 활쏘기에서는 가운데의 노란 점에 화살을 맞히는 것을 길황(吉黃)이라 하여 최고로 쳤다. 정 가운데를 맞히지 못하더라도 과녁 안의 흰 부분에만 들어가도록 쏘면 괜찮았다. 그중 최악이 삼적(三赤)이라 하여 화살 세 발을 모두 가장자리의 붉은 테두리에 맞히는 경우였다. 활을 쏜 자의 죽음을, 혹은 그에 준하는 불운을 뜻하는 최악의 흉조였다.
하지만 아무리 활솜씨가 형편없어도 삼적이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붉은 테두리는 기껏해야 손가락 하나 정도 두께였고, 멀리서는 거의 실선처럼 보였다. 명사수가 일부러 그곳만 노리고 쏘지 않는 이상 불가능했다.
어느새 청은 추위도 아픔도 잊었다. 홀린 듯 다음 화살을 들어 활에 걸었다. 이를 악물고 시위를 당겼다. 그리고 세 번째 화살 또한 어정쩡하게 휘어진 채 날아가, 붉은 가장자리에 틀어박혔다.
“…….”
청은 우뚝 서서 오래도록 과녁을 응시했다. 삭풍에 귀와 뺨이 얼어붙는 것도 모르고. 그는 조용히 몸을 숙여 화살을 집었다. 팽팽히 당긴 시위에 걸고 기계적으로 쏘았다. 핑! 핑!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연거푸 화살이 날았다.
과녁 앞에 하나둘 그가 쏜 화살의 잔재가 쌓였다. 절반쯤은 과녁에 박혔고 절반쯤은 한참 엇나가 다른 곳에 떨어졌다. 억센 활줄에 손아귀가 쓸려 벌겋게 달아오르다 결국은 찢어졌다. 살갗이 짓이겨지고 손톱이 으스러졌다. 활을 쥔 손을 타고 피가 줄줄 흘렀다. 일부는 옷소매를 적시고 일부는 뚝뚝 떨어졌다.
그러나 청은 활쏘기를 멈추지 않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미친 듯이 쏘고 또 쏘았다. 큼직한 화살통에 차 있던 화살이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같은 행위를 반복했다. 청은 피범벅이 되어 후들후들 떨리는 손을 뻗어 마침내 통에 딱 하나 남은 화살을 잡으려 했다. 그보다 뒤에서 불쑥 나온 손이 청의 손을 감싸 쥐는 것이 빨랐다.
“앞을 똑바로 봐.”
나긋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렸다. 황제는 청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겹쳐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질척한 피가 묻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숨 깊이 들이마시고, 과녁에서 눈 떼지 말고.”
청은 저도 모르게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는 청의 뒤에서 형편없이 파들파들 흔들리는 손을 단단히 붙들어 자세를 잡아 주었다. 쐐액! 허공을 가르고 흔들림 없이 곧게 날아간 화살이 노란색 동그라미 안, 그것도 정확히 정중앙에 꽂혔다. 이제껏 청이 수백 발을 쏘았어도 단 한 번도 맞히지 못했던 곳이었다.
“손에 상처가 났군. 지혈을 해야지?”
그 어려운 것을 성공하고서도 황제는 과녁에 별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대신 뻘겋게 젖은 청의 손에 망설임 없이 혀를 대어 상처에서 줄줄 흐르는 피를 핥아 먹었다. 입술 사이로 언뜻 보이는 혀가 벌겋게 물들고, 흰 뺨과 입가에 드문드문 피가 묻었다. 창백하고 황량한 겨울의 뒤뜰을 배경으로 붉은 피를 묻힌 모습이 묘하게 음란했다.
“아…… 읏.”
청이 당황하여 물러서려 했다. 그럴수록 황제는 집요하게 다가왔다. 그는 한 손으로 청의 허리를 잡아 우악스럽게 끌어당겼다. 얼떨결에 앞으로 확 끌려가, 청은 황제의 목덜미와 어깨 사이쯤에 얼굴을 들이박게 되었다. 두꺼운 겨울옷 아래로도 알 수 있었다. 황제는 청의 피를 핥으며 명백히 흥분하고 있었다. 성기가 점차 발기하여 옷자락을 불룩하게 밀어 올리고 청의 아랫배를 눌렀다.
“더럽습니다. 부디 그만…… 헉!”
황제가 손을 내려 청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두 남자의 하체가 빈틈없이 맞붙었다. 엉덩이를 주무르며 허리를 미적지근하게 툭, 툭 쳐올렸다. 옷 위로 성기를 느릿하게 문지르고 비볐다.
“폐하, 저는…….”
맥이 탁 풀렸다. 청은 황제의 어깨에 고개를 기댄 채 몸을 희롱하면 희롱하는 대로 멍하니 있다가, 문득 힘없이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폐하의 친우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나 그것이 주제넘은 바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폐하의 충신이 되고자 했습니다.”
넋두리에 가까운 고백이었다. 그 사이에 드문드문 흐느낌이 섞여 있었다. 혼잣말처럼 시작하였다가 어느덧 울분 섞인 발악이 되었다.
“그 이상의 다른 것은 될 수 없습니다. 되어선 안 됩니다……. 감히 바라지도 않습니다.”
“…….”
“저는 두렵습니다. 폐하께서 색에 미쳐 평인 사내 따위와 비역질을 한다며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이 두렵고, 제 존재가 폐하의 이름을 더럽힐까 너무도 두렵습니다. 그리되느니 차라리 제가 죽어 사라지는 게 낫습니다. 제가 이제껏 폐하의 명예에 한 점 흠도 생기지 않게 하려 얼마나, 얼마나…….”
“내가 언제 그대에게 그리해 달라 했지?”
마침내 황제가 입을 열었다. 섬뜩하리만치 무감정한 어조였다. 심장이 쿵 떨어졌다.
“친우? 충신?”
그는 피식 웃었다. 차가운 입김이 안개처럼 스몄다.
“그딴 것, 필요 없어.”
청이 황제의 애정을 원했다면 지금껏 마음을 숨길 필요도 없이 그가 황자였던 시절에 요구했을 터였다. 자존심도 긍지도 모두 버리고 애걸하면, 욕구 해소용으로 은밀히 둔 비역질 상대쯤은 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청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황제의 치부가 되고 오점이 되느니, 남들의 눈을 피해 몰래 만나 허겁지겁 몸을 섞는 도착적 관계에 매달리느니……. 그와 이상과 신념을 공유하는 동반자가 되고 싶었다. 피를 뒤집어쓰고 진창에 구르면서라도 그의 앞길을 닦아 주고 싶었다. 그것이 황제를 향한 청의 사랑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말 한 마디로 이제껏 오롯이 그를 위해 바쳤던 청의 삶을 처참히 짓밟았다. 목숨 걸고 쌓아 올린 희생과 인내가 산산이 부서졌다. 청은 황제의 품에 갇힌 채 멍하니 넋을 놓았다. 모든 빛을 잃어버린 눈동자가 캄캄하게 가라앉았다.
이윽고 눈가를 타고 물이 한 줄기 흘렀다. 그는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눈물만 뚝뚝 흘리며 고요히 울었다. 추위에 꽁꽁 얼어 부르튼 뺨을 타고 눈물이 길을 내고, 매서운 칼바람이 그 눈물을 또다시 얼렸다.
황제는 짐승의 모피를 덧대어 만든 두툼한 외투 자락을 벌려 그를 감쌌다. 싸늘한 이마에 입을 맞추고, 제자리에 얼어붙어 도무지 움직일 줄 모르는 청을 끌어당겼다. 뻣뻣하게 굳은 몸을 껴안고 온기를 불어 넣었다. 그의 무심한 시선이 문득 저만치 뒤쪽에 있는 과녁을 향했다.
“예락, 앞으로 활은 쏘지 마.”
청의 형편없는 활 솜씨를 비난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붉은 가장자리에 꽂힌 세 발의 화살을 보고 하는 말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 * *
날이 점점 추워지면서 나머지 세 계절 동안 굳건히 폐쇄되어 있던 황궁 외곽의 숲이 마침내 열렸다. 사냥의 계절이 찾아왔다.
이번 수렵제는 규모가 꽤 컸다. 이렇게 성대하게 열리는 것은 신황이 즉위한 이후 처음이었다. 저번 대 황제야 국고를 닥닥 긁어서라도 매일같이 연회며 잔치를 벌여 댔지만, 지금의 황제는 사람들이 여럿이 모여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것을 즐기지 않아서였다.
사냥 일정이 공표되자마자 황궁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다른 때와 달리 이번 수렵제에는 특별한 변수가 있었다. 황후의 회임이 그것이었다. 황후를 위해 귀한 사냥감을 잡아 바치면 뭐든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계산이 물밑에서 치열하게 오갔다.
흐리게 얼어붙은 겨울 하늘 아래 수십 명의 참가자가 모였다. 귀족들의 수발을 들 시종들도 줄줄이 뒤를 따랐다. 숲 변두리를 따라 임시 막사가 설치되었다. 간편한 차림의 황제가 사냥용 말을 대동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연한 색의 머리칼을 하나로 높이 묶어 틀어 올렸다. 긴 소맷자락이 움직임에 거슬리지 않도록 단단히 조여 매고 보호구를 찼다.
그의 얼굴 생김이 화사한 것과 별개로, 키가 크고 체격이 탄탄한 남자가 거대한 군마를 이끌고 걷는 모습은 뭇사람들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게 했다. 무심결에 주눅이 든 이들이 깊게 머리를 조아려 예를 갖추었다.
“대해단의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길이 평안을 누리소서!”
황제의 뒤를 따라 한 사람이 더 나타났다. 황후의 침전에 든 자객을 막으려다 입은 부상이 도무지 낫지 않아, 몇 달째 요양하고 있다던 금군 대장군이었다. 금군을 통솔하는 일을 휘하의 좌장군과 우장군에게 죄다 맡겨 두고 병석에만 드러누워 있는 자가 갑자기 왜 수렵제에 참석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차가운 공기를 타고 고요한 술렁임이 퍼졌다.
대장군은 멀리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안색이 나빴다. 그간 심하게 앓긴 한 모양이었다. 얼굴이 하도 희게 질려 있어서, 하나로 느슨하게 묶어 드리운 흑발이 먹물처럼 아주 새카맣게 보였다. 자신 몫의 말에 매인 고삐를 쥔 채 고개를 살짝 숙이고 황제의 뒤에서 걷는 모습이 묘하게 처연했다.
“오랜만입니다, 대장군. 크게 다치셨다 들었는데, 몸은 많이 나아지셨습니까?”
그를 알아본 장군 하나가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오랜만에 본 청이 반가운 마음 반, 두문불출하다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의도를 알고 싶은 마음 반이었다. 그러나 청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헉……!”
낯선 이의 손이 닿자 멍하니 땅만 보고 가던 청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는 필요 이상으로 기겁하며 퍼뜩 몸을 사렸다. 인사를 매몰차게 거절당해 면구스럽기 이전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지예락 대장군?”
청은 말없이 고개만 꾸벅 숙여 인사를 하고 상대를 지나쳤다. 당황한 장군이 다시 그를 부르려 했다.
“저, 잠시…….”
그러나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때마침 힘찬 뿔피리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진 탓이다.
육중한 말발굽이 마른 대지를 박찼다. 누구는 사냥개를 풀고 누구는 사냥매를 날렸다. 날개를 쭉 편 매가 흐린 하늘을 가로질러 숲 위를 활공했다. 바야흐로 겨울 사냥이 시작되었다.
* * *
청은 무작정 말을 몰아 숲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많은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사방에서 들리는 수군대는 목소리들이 모두 자신을 비난하는 것 같아 속이 메슥거렸다.
처음에 그는 안장을 딛고 말에 올라타는 것조차 헤맸다. 몇 달 전만 해도 대열의 최전방에서 전투를 지휘했던 이답지 않았다. 다행히도 철저히 훈련받은 황실의 말은 청의 서툰 몸놀림에도 곧잘 따라 주었다.
앙상한 나무 사이를 지나 한참을 달렸다. 칼날처럼 차가운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헤집고 귓바퀴를 할퀴었다. 타인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야 조금 숨이 트였다.
황궁의 사냥터는 몹시 넓었다. 제대로 사냥을 하려면 밤을 새우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래서 수렵제는 최소 이틀에서 사흘, 길게는 1주일까지 이어졌다. 또한 길을 잃었을 때를 대비하여 모든 참가자들이 신호탄을 소지했다.
이렇게 철저히 방비를 하여도 매년 실종이나 조난 사건이 몇 건은 꼭 발생했다. 멋모르고 숲에 들어간 신참내기 궁인들이 길을 잃고 헤매다 빠져나오지 못하는 경우였다. 결국 사냥철을 제외한 나머지 세 계절 동안은 숲을 폐쇄하게 되었다.
시야 가득 펼쳐진 숲의 정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지금이라면 달아날 수 있지 않을까. 저번에는 두 발로 달려 도망치다 황제에게 붙잡혔지만, 이번에야말로 이 지옥 같은 삶에서…….
실낱같은 가능성을 인지한 순간 심장이 쿵쿵 터질 듯 불안하게 뛰었다. 다각다각 소리를 내며 규칙적으로 걷던 말의 발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청은 안장에 매인 가죽 주머니를 뒤져 그의 몫으로 배급된 신호탄을 꺼냈다.
급작스러운 충동으로 벌인 일이었으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머뭇거림 끝에 그는 신호탄을 땅에 툭 버렸다. 혹시라도 도중에 마음이 바뀔 것을 대비한 행동이었다. 죽으러 나왔으면서도 황제의 총에 맞고 난 뒤 살고 싶다는 마음에 저도 모르게 도망쳤던 저번처럼.
“미안하다. 나 때문에 너까지.”
청은 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음울하게 속삭였다.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짐승은 그저 순하게 눈을 끔벅일 뿐이었다.
“나를 저 깊은 곳까지 데려다주고 나면 망설이지 말고 곧장 바깥쪽으로 달려가거라. 네 다리는 나보다 훨씬 빠르니, 기운이 다하기 전엔 빠져나갈 수 있겠지.”
그는 다시 고삐를 쥐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원시림 안까지.
이상한 기척을 감지한 것은 그로부터 반 시진 정도가 지난 후였다. 저 멀리서부터 수풀이 부스럭대는 소리가 꾸준히 들렸다. 처음에는 바람에 마른 잎사귀가 쓸리는 것이려니 했으나, 소음은 들렸다가 끊어지기를 반복하며 점차 가까워졌다. 묘한 기척이 청의 뒤를 은밀하게 따라붙었다.
그리고 마침내 인간의 것이 아닌 낮은 으르렁거림이 등 뒤에서 들렸다. 청의 몸이 뚝 굳었다. 불길한 분위기를 알아챈 말이 푸르릉 코를 울리며 초조하게 꼬리를 흔들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저만치 멀리, 겹겹이 가려진 나뭇가지와 수풀 너머로 눈이 마주쳤다. 집채만 한 곰이었다.
이 시기의 곰은 몹시 흉포했다. 긴 겨울잠을 앞두고 조금이라도 영양을 더 비축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먹이를 찾아 돌아다녔다. 살이 오르고 털에도 윤기가 도는 때라 전리품으로서는 최상이었지만, 반대로 기운이 넘치고 포악하여 사냥하기 몹시 힘든 때이기도 했다.
두 발로 땅을 딛고 선 곰이 앞발을 치켜들었다. 청을 똑바로 노려보는 시커먼 눈알이 살의로 번들거렸다. 청의 손이 무심코 총으로 향했다. 그러나 장전을 해 두지 않은 것을 기억하고는 곧 단념했다.
화약을 채워 넣고 심지에 불을 붙여 쏘는 식의 화승총은 아무리 숙련된 무관이라도 장전하는 데 몇 분은 걸렸다. 그러므로 수렵제에 참가하는 모든 이들은 언제라도 쏠 수 있도록 미리 총탄을 장전해 두었다. 그러나 청은 처음부터 빈 총을 가지고 숲에 발을 들였다. 애초에 사냥을 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대신 그는 활을 들었다. 시위에 화살을 걸어 저 멀리에 보이는 곰을 겨누었다. 하지만 쉬이 쏘지는 못했다. 활줄을 팽팽히 당긴 손이 형편없이 후들후들 떨렸다.
〈예락, 앞으로 활은 쏘지 마.〉
황제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동시에 새빨간 가장자리에 틀어박힌 세 발의 화살이, 죽음을 상징하는 불길한 표식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손이 도무지 움직이지 않았다. 숨이 가빠지고 눈앞이 빙빙 돌았다.
“으, 흐윽.”
악다문 잇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손아귀에 힘이 탁 풀렸다. 청은 결국 화살을 쏘아 보지도 못하고 활을 든 손을 스르르 내렸다. 본능적인 공포와 위협이 스르르 사라졌다. 그 자리를 체념이 메웠다. 청은 양팔을 축 늘어뜨렸다. 지축을 쿵쿵 울리며 수풀을 헤치고 달려드는 맹수를 보고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처음에 손가락만 하게 보이던 짐승의 형체가 점차 커졌다. 빽빽이 돋은 털과 주둥이 밖으로 드러난 긴 송곳니, 청의 얼굴보다도 더 큰 두툼한 앞발이 낱낱이 보일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졌다. 입을 쩍 벌린 곰이 우렁차게 포효하며 달려들려는 찰나, 커다란 굉음이 울렸다.
타앙!
처음에 청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지 못했다. 곰이 눈에서 피를 뿜으며 몸을 뒤트는 것을 보고서야 알았다. 멀리서 날아온 탄환이 곰의 머리도 몸통도 팔다리도 아닌, 눈알을 꿰뚫었다. 인간의 솜씨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소름 끼치게 정밀한 사격이었다.
탄환은 단단한 가죽에 보호받지 못하는 안구를 파고들어 곧장 뇌까지 헤집어 놓았다. 그 한 발로 곰은 제자리에 풀썩 쓰러져 절명했다. 깔끔한 즉사였다.
“헉…….”
귓가에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총소리를 들은 청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자신을 위협하던 곰이 죽었는데, 마음이 놓이기는커녕 더욱 불안해졌다. 굵직한 탄환이 쏘아져 무자비하게 허벅지를 꿰뚫던 때의 고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피범벅이 된 다리에 칼날을 푹 찔러 넣어 생살을 후벼 파던 감각도 낱낱이 되살아났다.
저 총을 쏜 이가 누군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제 곧 그가 청이 있는 곳으로 올 거라는 사실 또한.
“으, 아아…… 아……!”
쿵! 숨을 힘겹게 헐떡이며 괴로워하던 청이 결국 중심을 잡지 못하고 말에서 떨어졌다. 그의 몸이 맥없이 땅에 내팽개쳐졌다. 둔한 충격이 전신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저벅저벅 마른 풀을 밟는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한 손에 장총을 든 채, 마침내 황제가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 표정 없는 덤덤한 얼굴이었다. 모든 것이 칙칙하고 음울한 겨울 숲에서 오직 그만이 금빛으로 빛났다.
그의 시선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땅에 쓰러진 청도 곰의 시체도 아니었다. 기수를 잃은 채 제자리에 우뚝 서 있는 말이었다. 황제는 칼을 뽑았다. 사냥감의 가죽을 바르거나 수풀을 헤치고 나아갈 때 쓰는 거라, 칼날이 두껍고 약간 휘어 있었다. 그는 묵직한 칼을 들어 망설임 없이 말의 목을 내리쳤다.
퍽! 말은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짐승의 목이 잘리며 더운 피가 확 튀었다. 황제의 옆얼굴이 피범벅이 되고, 심지어는 옆에 쓰러져 있던 청에게까지 핏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주인을 안전히 모시지는 못할망정 위험한 곳으로 데려가고, 등에서 떨어뜨리기까지 하나? 살려 둘 가치가 없는 짐승이군.”
황제는 뺨에 묻은 피를 손등으로 무심하게 쓱 훔쳤다. 그는 그제야 청에게 눈길을 주었다. 고작 눈이 마주친 것뿐인데 그물에 사로잡힌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흐으, 흑…….”
손안에 차가운 땀이 고였다. 청은 무심결에 벌벌 떨리는 팔로 낙엽 위를 짚었다. 땅을 엉금엉금 기어서라도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갑자기 배를 쥐어짜는 것 같은 통증이 닥쳤다.
“윽……!”
청이 몸을 확 숙이며 본능적으로 배를 감싸 안았다. 눈앞이 하얗게 질렸다. 아랫배가 너무 아파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황제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몸을 웅크리고 헐떡이는 청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의 손이 청의 몸에 닿는 순간, 청이 발작적으로 몸을 뒤틀며 비명을 질렀다.
“아악!”
“예락, 아픈 곳을 보여 줘야지.”
“아, 아아, 으…….”
청이 이성을 잃고 흐느꼈다. 배가 아파 몸을 제대로 펴지도 못하고 있으면서, 황제의 손길을 피하려 미친 듯이 몸부림쳤다.
“앙탈 부리지 말고. 응? 당장이라도 그대의 팔다리를 저 말처럼 토막 내 버리고 싶어지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어진 잔인한 말에 숨이 턱 막혔다. 그제야 청이 조금 얌전해졌다. 큼직한 손이 옷자락을 헤치고 파고들었다. 청은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채 아픈 내색도 못 하고 벌벌 떨었다. 이윽고 안에 입은 얇은 옷 위로 단단한 손바닥이 덮였다.
주먹으로 배를 후려갈기거나 오장육부가 터지도록 꽉 누를 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에 황제는 아랫배를 그저 가만히 문질러 주었다. 부드러운 온기가 서서히 퍼졌다. 그는 청을 끌어안고 어린아이를 달래듯 토닥였다.
“가만히, 숨 천천히 내쉬고. 그래……. 몸에 힘 풀어야지.”
극한의 공포로 뻣뻣하게 굳어 있던 몸이 조금 이완되었다. 긴장이 풀리자 묵직한 통증이 몸속을 헤집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느닷없이 왈칵 눈물이 터졌다. 황제에게 또다시 붙잡혔다는 허탈감과 죽다 살아났다는 안도감이 엉망으로 뒤섞였다. 청은 황제의 가슴에 고개를 묻고 흐느꼈다.
그와 붙어 있자 신기하게도 아픔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황제의 체온이 스며들어 꽁꽁 얼어 있던 청의 몸을 녹이기라도 한 것일까. 청은 흐느끼며 본능적으로 팔을 뻗어 황제에게 절박하게 매달렸다.
“흑, 허억, 배가…….”
“배가?”
“너무…… 흐으, 너무 아파요.”
“이런. 배가 아파서 이리 서럽게 우는 게야?”
요즘 청은 눈물이 부쩍 많아졌다. 황제의 말 한 마디, 몸짓 한 번에도 눈가를 발갛게 물들이며 서럽게 울었다. 그 와중에도 소리를 한껏 죽이고 희멀건 얼굴로 눈물만 뚝뚝 흘리는 모습이 못내 애처로웠다. 그것이 어떤 교태와 아양보다도 마음을 동하게 했다.
“참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야, 그대는. 응석이 이리 심해서야.”
황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그는 고개를 기울여 청의 이마에 입술을 대었다. 흠뻑 젖은 눈가에도, 말의 피가 점점이 튄 뺨에도 서슴없이 입을 맞추었다. 마침내 입술끼리 닿았다. 버석버석하게 말라 갈라진 청의 입술 위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다. 황제는 어느 순간부턴가 살며시 눈을 감고 있었다. 고운 빛깔의 속눈썹이 사붓이 내리깔렸다.
혀를 섞지 않는 가벼운 입맞춤이 살짝살짝 오갔다. 아픔으로 바들바들 경련하던 몸이 조금씩 안정되고 헐떡이던 숨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황제는 청을 품에 안은 채 질리지도 않고 오래도록 깃털 같은 입맞춤에 열중했다.
청이 간신히 안정을 되찾았을 무렵 마침내 입술이 떨어졌다. 입술 바로 위에서 황제가 조곤조곤 속삭였다. 이마와 코끝이 닿을 듯 말 듯 가까운 거리였다.
“저것의 가죽을 벗겨 그대 침전 바닥에 깔아 줄까? 아니면 털로 겨울 외투를 만들어 어깨에 걸쳐 줄까?”
거대한 짐승이 고꾸라져 죽어 있는 모습이 시야 한쪽 구석에 들어왔다. 수렵제의 사냥감은 기껏해야 토끼나 여우, 커 봤자 늑대와 멧돼지 정도였다. 저 곰은 황궁 전체에 소문이 쫙 퍼질 만한 대단한 전리품이었다. 청이 당황하여 고개를 저었다.
“제, 제 몫이 아닙니다. 제가 감히 바라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번 수렵제에서 얻은 모든 결실은 황후를 위한 것이었다. 대놓고 공언하진 않았지만 모두가 그리 여겼다. 목숨을 걸고 겨울 숲에 뛰어들어 황후를 기쁘게 할 사냥감을 잡아 와야 한다고. 그래서 비참한 마음으로 수렵제에 참석했다. 일부러 총탄을 장전하지 않은 것은 청의 미련하고 소소한 저항이었다. 대장군씩이나 되어서 토끼 한 마리 잡지 못한다고, 무능하다고 비웃음을 당하더라도 차라리 빈손으로 돌아오는 게 나았다.
“청아.”
황제가 빙긋 웃었다.
“나는 네가 원하여 황제가 되었고, 네가 바랐으니 나라를 손에 넣었어. 네게 벼슬을 내리고 보검을 안기고, 황후의 목숨까지 마음대로 하라고 내주었는데……. 이깟 곰 가죽이 대수겠어.”
그의 손이 얹힌 청의 아랫배에서 규칙적인 맥박이 쿵쿵 울렸다. 누구의 심장 박동인지는 알 수 없었다. 청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도를 넘은 경악으로 한참 말을 잇지 못하다가, 그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 그럼…… 폐하, 제가, 제가 만약 이 나라를 멸망시키길……. 그러길 바랐다면…….”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것은 아니었다. 현실을 부정하고자 내뱉은 의미 없는 발악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한 점의 동요도 없이 태연자약하게 대꾸했다.
“그리하고 싶어? 그럼 그렇게 할까?”
심장이 저 바닥까지 쿵 떨어졌다. 일국의 황제라면 결코 농담으로라도, 상상으로라도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발끝부터 섬뜩한 전율이 치고 올랐다. 황제의 온기가 닿은 곳부터 몸이 쩌저적 얼어붙는 것 같았다.
시커먼 수렁에 처박힌 기분이었다. 너무도 깊고 어두워서, 차마 빠져나갈 엄두가 나지 않는.
* * *
수렵제 첫째 날이 저물어 갈 무렵, 황제와 금군 대장군 지예락이 나란히 나타났다. 황제가 자신의 말에 대장군을 함께 태운 채였다. 깊은 숲속에서 곰을 마주쳐 접전을 벌이다가, 그 과정에서 대장군의 말이 희생되었다 했다. 과연 곰과의 사투가 힘에 부치긴 했는지, 간신히 돌아온 대장군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황제가 뒤에서 허리를 잡아 주어야 할 정도였다.
수렵제의 우승은 결국 금군 대장군에게 돌아갔다. 그가 잡은 거대한 곰만큼 훌륭한 전리품은 마지막 날까지도 나오지 않았다. 부상을 입어 오래 요양했어도 역시 대장군은 대장군이라며 모두가 그의 무위(武威)를 칭송했다.
그러나 대장군이 잡은 곰 가죽은 황후가 아닌 그 본인에게 돌아갔다. 대장군의 무예와 용기를 높이 산 황제가 그에게 스스로가 잡은 곰을 기꺼이 하사한 것이었다. 아이를 품은 황후가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도록, 그분께 드려야 하지 않겠냐는 조심스러운 물음에 황제는 태연히 답했다.
“황후는 마음이 여려 곰처럼 큰 짐승을 보면 두려워할 게 분명하다, 아무리 죽은 것이라 해도. 크게 놀라 배 속의 아이가 자칫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하오나, 폐하.”
“설영에겐, 그래, 토끼와 여우를 손질하여 털목도리나 만들어 주도록. 쓸데없이 겁도 많고 꾀도 많은 게 딱이군.”
옥좌에 턱을 괸 황제가 시큰둥하게 명했다. 관리가 깍듯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황제의 명이니 다소 납득이 가지 않는 구석이 있더라도 따라야 했다.
* * *
긴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9왕자가 결국 깨어났다. 돌이킬 수 없는 후유증을 떠안은 채로.
그는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옆머리를 가마에 세게 부딪치고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한 상태로 너무 오래 방치된 탓이었다. 황후와 강 어의가 백방으로 노력해 보았지만, 탁하게 흐려진 그의 한쪽 눈에는 빛이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마, 사냥터로부터 전갈이 도착하였습니다.”
내관 하나가 들어와 황후의 앞에 절을 올렸다. 옷차림을 보아하니 수렵제에서 귀족들의 시중을 들던 이 같았다.
“무슨 일이냐?”
몸에 좋다는 보양식이며 약은 죄다 챙겨 먹으며 호위호식하고 있거늘, 황후의 몰골은 처참했다. 앳되고 천진한 느낌을 주던 통통한 볼살이 죄다 빠져 안색이 퀭했다.
“수렵제의 본 경기가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합니다. 마마께 토끼와 여우 가죽으로 털목도리를 지어 하사하라고, 황제 폐하께서 직접 지시하셨사옵니다.”
“우승자가 대체 누구이기에, 전리품이 고작 토끼와 여우 따위지?”
“지예락 금군 대장군이십니다. 대장군께서는 황실 역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큰 곰을 잡았사온데…….”
“그 곰은 어디 가고.”
황후의 음성이 신경질적으로 가라앉았다. 지레 불안함을 느낀 내관이 재빨리 뒷말을 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곰 가죽은 잘 손질하여 대장군에게 내리라 명하셨습니다. 그 큰 곰을 잡으면서도 모피에 흠집 하나 내지 않았는데, 수렵제에 참가한 모두가 대장군의 솜씨에 혀를 내둘렀다 합니다. 그만큼 대단한 업적을 이루셨으니, 스스로 잡은 곰 가죽을 받아 마땅…….”
“받아 마땅하다고? 그럼 나는 대장군에 비해 자격이 모자라 못 받았단 말이냐?”
난데없이 날카로운 일갈이 터졌다. 내관이 제풀에 놀라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도대체 자신의 말 어디가 황후의 심기를 거슬렀는지 아무리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없었다.
“이 내가, 제국의 황후가 아이를 가졌다는데. 한데 일개 신하인 대장군은 곰 가죽을 얻고, 내게 떨어지는 건 고작 토끼와 여우냐? 토끼나 여우 털목도리 따윈 율에 있을 때도 얼마든지 가질 수 있었다. 내가 한미한 소국 출신이라 이딴 하사품에도 감격하여 기쁨의 눈물이라도 흘릴 거라 생각하였느냐?”
“당치도 않은 말씀이옵니다. 소인이 어찌 그런.”
“배 속의 용종(龍種)을 위해서라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진정하려 했더니, 네가 정녕 그럴 수 없게 만드는구나. 장 상궁!”
“예, 마마.”
그를 부축하고 있던 상궁이 재깍 대답하고 앞으로 나섰다. 내관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벌벌 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철썩! 철썩! 적막하던 운의전 안에 따귀 때리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궁인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저만치 물러났다. 노한 황후의 시야에 들었다간 무슨 꼴을 당할지 몰랐다.
“마마께서는 회임 초기인 데다 원래 몸이 약하여 극도로 불안한 상태이시다. 삿된 일에 신경을 쓰시지 않도록 운의전 전체가 철저히 조심하고 있거늘,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경솔한 말로 마마의 심기를 어지럽히느냐!”
“자, 잘못했습니다.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상궁은 끊임없이 매몰차게 따귀를 내리쳤다. 곧 내관의 양 뺨이 터지고 입술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그때, 응접실 문지방을 넘어 한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방 안에서 벌어지는 살벌한 풍경에는 신경 쓸 가치도 없다는 듯 곧장 황후에게 다가가 절을 올렸다.
“신, 탁주백 홍원익이 대해단의 황후 전하를 뵙습니다. 길이 평안을 누리소서.”
“기척도 없이 불쑥 찾아오다니…….”
“이런. 문 앞에서 고하였사온데, 궁인들이 경황이 없어 못 들은 모양입니다.”
탁주백은 냉큼 자리에 앉아 내관이 황급하게 내오는 차를 받았다. 그는 양 뺨이 피투성이가 되어 흐느끼는 내관을 흘긋 곁눈질했다.
“어이하여 애꿎은 내관을 괴롭히고 계십니까. 문밖에서 듣자 하니, 저 내관은 그저 혀를 잘못 놀린 죄밖에 없는 것으로 사료됩니다만. 혀를 잘못 놀렸는데 애먼 뺨을 맞으니, 저자도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혀로 지은 죄는 혀로 갚아야지요.”
“그게 무슨…….”
“저것의 혓바닥을 뽑으시지요. 일벌백계하여 다시는 천한 아랫것들이 전하의 권위를 넘보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지나치게 잔혹한 처사였다. 황후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그러나 결코 탁주백을 만류하지는 않았다. 그는 입술을 꾹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황후의 눈치를 살피던 이들이 슬금슬금 다가가 내관의 팔을 양옆에서 붙잡았다.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내관이 처절하게 비명을 질렀다.
“마마, 마마! 잘못했사옵니다. 자비를 베풀어 용서해 주십시오. 앞으로는 결코 입을 함부로 놀리지 않겠습니다. 헉, 으악!”
내관이 필사적으로 애원하고 몸부림치며 끌려 나간 자리에는 스산한 적막만이 남았다. 그 광경을 보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차만 홀짝홀짝 마시던 탁주백이 빈 잔을 달칵 내려놓았다.
“이제 전하께는 힘이 있습니다. 고작 내관 따위를 매질하는 것 말고도 무궁무진한 일들을 할 수 있는 힘이요. 그 일례로, 강택서로 하여금 전하를 전담케 하여 한낱 망국의 어의에 불과하던 그에게 권력을 쥐여 주셨지 않습니까. 어렸을 때부터 전하를 보살폈으니 전하의 몸을 가장 잘 안다는 이유로.”
그래 봤자 황제의 위세에는 미치지 못했다. 권력을 쥐었으나 여전히 황후는 매일이 외줄 타기였다. 황제의 아이를 가졌다 거짓말을 한 것이 언제 들통날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그는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삶을 살았다. 잠자리에만 들면 악몽을 꾸었다. 먹은 음식을 죄다 게워 내는 것이 입덧 때문인지 불안감 때문인지도 알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지금의 전하께서는 눈엣가시 한둘쯤은 쉽게 제거할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사옵니다. 그것이 총명한 문관이든 용맹한 무관이든 간에요. 명만 내리신다면 제가 얼마든지 손을 빌려 드리겠습니다.”
“손을 빌려주겠다니.”
“예를 들면……. 건장한 장정 몇을 동원할 수도 있겠지요. 저를 호위하러 가문에서 딸려 보낸 사병이라 하면, 황궁에 사람을 들이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입니다. 아무리 날고 기는 자라도 머릿수로 밀어붙이면 당해 낼 수 없을 테고요.”
황후는 근심 어린 표정으로 침묵을 지켰다. 그의 얼굴에 언뜻 갈등의 빛이 스쳤다.
“전하. 복중 태아를 가장 우선으로 생각하시옵소서. 골칫거리를 제거해야 전하의 마음이 편해지고, 전하께서 마음을 편히 먹어야 아이도 건강히 크지 않겠사옵니까.”
매 순간 황제를 원망하면서도, 황후는 차마 그에게 반기를 들지는 못했다. 정말로 그를 견딜 수 없이 증오하였다면 죽기 살기로 덤벼들어 암살이라도 시도해 보았겠지만, 황후는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다. 아직까지도 헛된 애정의 파편이 남아 있어서일까, 아니면 황제가 너무도 두려워서일까. 그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갈 곳을 잃은 분노는 꺾이고 뒤틀려 다른 곳으로 향했다.
물집이 잡히고 짓무른 발에 붕대를 감아 주던 손길, 양인의 여향이 듬뿍 묻은 산호 비녀, 가슴팍을 길게 베던 칼날, 맨허벅지 위에 풀썩 떨어진 검은 머리채, 허름한 전각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던 헐떡이는 신음 소리, 그리고 황제의 아래에 깔려 그의 팔뚝을 힘겹게 붙잡은 손…….
“제거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마침내 황후가 입을 열었다.
“모든 것이 그 남자 때문입니다. 그가 내 삶을 망쳤고 내 나라를 무너뜨렸습니다. 나는 그가 가능한 가장 고통스럽고 비참하게 죽기를 원합니다. 반드시 그리해야 한이 풀리겠습니다.”
탁주백은 대답 대신 교활한 웃음을 만면에 머금었다.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 * *
수렵제의 우승자가 가려지고 나면 의례적으로 축하연이 뒤를 이었다. 수렵제 기간 동안만 임시로 설치한 막사에서 벌어지는 연회였다. 더운 김이 폴폴 피어오르는 진수성찬을 차리고 따뜻하게 데운 술을 나누어 마셨다. 추운 날씨에 숲을 헤매며 고생한 참가자들을 치하하기 위함이었다.
가장 크고 강한 사냥감을 잡아 우승하였으니, 축하연의 주인공 또한 금군 대장군이 되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언뜻 보아도 몸 상태가 나빴다.
칼바람이 불어닥치는 혹한의 날씨에 바깥에서 활쏘기를 하고 숲에서 말을 달리는 등 무리를 하여서일까. 청은 황제의 말에 함께 타고 돌아온 뒤로 줄곧 앓았다. 지끈지끈 울리는 두통과 함께 열이 올랐다. 아픈 몸을 끌고 힘겹게 축하연에 참석하여 자신의 자리에 앉고 나서도 열은 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청은 금방이라도 쓰러지려는 몸을 추스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억지로 정신을 다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눈알 뒤쪽에 불이 붙은 숯덩이를 넣어 둔 것처럼 눈두덩 전체가 화끈거렸다.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가 아득히 멀리서 들렸다. 모두가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청의 양 뺨이 술기운 때문인지 고열 때문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높은 상석에 앉은 황제의 옆얼굴이 비스듬히 올려다보였다. 그마저도 꿈인지 생시인지 긴가민가할 정도로 흐렸다. 황제는 어느 무관의 보고를 한 귀로 들으며 술잔을 입가에 대고 있었다. 그를 멀거니 바라보다가, 청은 기계적으로 술잔을 따라 들었다. 그 순간 갑자기 속이 확 뒤집혔다. 향긋한 술 냄새도, 상에 가득 차려진 음식 냄새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역하게 느껴졌다.
“욱……!”
아무렇게나 놓인 술잔 표면이 흔들려 술이 넘쳤다. 청은 고개를 푹 숙이고 연거푸 헛구역질을 했다.
“헉, 하아, 윽…….”
고개를 다시 들려는 찰나 눈앞이 핑 돌았다. 시야가 얼룩덜룩하게 물들다 까맣게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맥없이 비틀거리던 청의 몸이 한쪽으로 픽 기울어졌다. 그러나 의자에서 떨어져 연회장 바닥에 고꾸라지는 신세는 면했다. 옆에서 무심코 뻗어 나온 단단한 팔이 그를 받쳤다.
“저어…… 읏차. 지 대장군? 괜찮으십니까?”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걱정스러워하는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렵제가 막 시작할 때쯤에 그에게 말을 걸었던 장군이었다.
초점을 잡지 못해 허공을 헤매던 청의 눈이 비로소 그를 향했다. 흐릿하게 풀린 눈매가 열로 젖었다. 그간 항상 인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무감정한 태도만 고수하던 대장군이 이렇게까지 무너진 모습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기분이 묘했다.
“죄송……. 쿨럭, 죄송합니다.”
청은 몸을 일으키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도중에 힘이 탁 풀렸다. 그는 도로 풀썩 쓰러져 상대의 어깨에 이마를 들이박았다. 흐트러진 긴 머리채가 장군의 팔뚝을 간질였다. 장군은 매몰차게 청을 밀쳐 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를 짐짝처럼 둘러업는 무례를 저지를 수도 없어 안절부절못했다.
“많이 편찮으신 것 같습니다. 아직 부상이 완전히 낫지 않았는데 사냥터에서 무리를 하신 탓입니까? 이런 몸으로 연회에까지 나오시다니.”
“저…… 흐윽, 저는……. 괜찮, 습니다.”
“아뇨, 보는 제가 안 괜찮습니다. 일어나시지요. 막사에서 좀 쉬셔야겠습니다.”
그는 기어이 고집스럽게 청을 부축하여 일어섰다. 어디 가느냐 묻는 주위 사람들에게 청이 만취한 것 같아 막사까지 데려다주고 오겠다고 요령 있게 둘러대기까지 했다.
따뜻하게 불을 땐 연회장을 나서자 밤하늘 아래 차디찬 서리가 내린 흙이 사박사박 밟혔다. 밤길을 지나는 도중에도 청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축 늘어졌다. 그가 자꾸만 쓰러지려 해서 몇 발짝 가고 쉬고를 반복해야 했다. 멀지 않은 거리를 가는 데 한참이 걸렸다.
“대장군, 그간 푹 쉬며 요양하셨던 것이 맞습니까? 몸 상태가 너무 나쁜 듯한데.”
그러나 청은 대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몸이 놀랄 정도로 뜨거웠고, 푹 숙인 고개 아래에서는 색색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 장군은 재빨리 사과했다.
“아닙니다. 제가 괜한 것을 물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곧 두 남자는 청의 몫으로 배정된 막사 앞에 다다랐다. 아무리 그래도 사적인 공간까지 따라 들어갈 수는 없었다. 장군은 잠시 망설인 끝에 짧은 인사를 남기고 돌아섰다.
“쾌유를 빕니다.”
청은 비틀거리며 막사에 들어섰다. 한창 연회 중이라 시종들이 막사에까지는 아직 등불을 켜 놓지 않았다. 안이 온통 어두웠다.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금 당장 침상에 눕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바닥에 쓰러져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쪽으로 등을 보이고 팔걸이 달린 의자에 느슨히 기대앉은 이의 형체를 발견한 순간, 그는 몸을 짓누르던 열기와 통증을 모두 잊었다.
어둠 속에서 황제가 스르르 돌아보았다. 연한 색 눈동자가 문틈 사이로 스며든 흐린 달빛을 받아 푸르스름한 빛깔로 도드라졌다. 얼굴에 그늘이 짙게 드리워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명확히 보이지 않았다.
“예락.”
가만히 이름이 불렸다. 어째서인지 목이 조금 잠겨 있었다. 청은 저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섰다. 오싹 소름이 끼쳤다. 연회장 상석에서 태연자약하게 술잔을 비우며 청의 존재 따위는 아예 잊어버린 것 같이 굴던 황제가 왜 여기에 있는 것인지, 여기서 대체 얼마나 오래 그를 기다린 것인지…….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다.
황제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낮은 음성에 얼핏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밤 산책은 어땠나?”
“폐, 폐하.”
“그자와 무슨 말을 했지? 밤이 외로우니 침상을 데워 달라고 애원하며 막사까지 끌어들였나?”
아무런 배려 없는 잔인한 말이 쏟아졌다. 넝마가 되어 더 이상 다칠 곳도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심장이 다시 한번 후벼 파였다.
“그런 말은…….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면, 더 노골적으로 요구했을까? 뒤가 허전하니 좆으로 채워 달라고.”
“아닙니다…….”
“그대도 참으로 대단하단 말이야.”
조용히 한숨을 쉰 황제가 자리에서 스르르 일어섰다.
“간만에 바람도 쐬고 마음껏 뛰어놀라고 숲에 풀어 줬더니, 그새 또 사내를 홀려?”
그는 이윽고 청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저벅저벅 묵직한 발소리가 고요한 실내에 울렸다. 청은 극한의 공포에 사로잡혔다. 호흡이 가팔라지고 이가 작게 부딪쳤다.
“자, 잘못……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의 몸이 풀썩 꺾였다. 시야가 한 차례 크게 흔들리며 머리가 깨질 듯 아팠지만 억지로 참았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청은 무작정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빌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부디 용서를…….”
황제는 청의 앞에 곧장 서는 대신, 그를 무심히 지나쳐 막사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출입문 옆에 말을 다루기 위한 도구 몇 가지가 걸려 있었다. 그중 하나를 집어 들고, 청의 고개를 억지로 젖혔다.
“헉……!”
청이 짤막하게 신음하며 얼굴을 들었다. 두려움에 질려 하염없이 흔들리는 시선이 황제를 마주 보지 못하고 바닥을 향했다. 바들바들 떨리는 시야에 황제가 쥔 것이 들어왔다. 마편(馬鞭), 말채찍이었다.
“이런 음란한 얼굴로 끙끙대며 조르니 누군들 넘어가지 않고 배기겠나.”
안색이 안쓰러울 정도로 창백하고 이마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그 와중에 눈가와 뺨만 열이 올라 불그스름했다. 영락없는 병자의 몰골이거늘, 황제는 한 점의 동요도 없이 태연하게 그를 비난했다.
“저, 흑, 저는 결코 그런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제 상태가 나빠서…… 막사까지 부축해 주…….”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마편 손잡이를 고쳐 쥔 황제가 가죽 술이 달린 반대쪽 부분으로 청의 뺨을 후려갈긴 탓이었다.
짜악!
“아악!”
청의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얼굴이 살점이 죄다 뜯겨 나간 듯 아팠다. 말의 허벅다리를 후려갈겨 달리게 만들 목적으로 만들어진 말채찍은 몹시 견고하고 질겼다. 금세 한쪽 뺨에 시뻘겋게 피가 맺혔다.
“입 다물어.”
황제는 마편의 단단한 손잡이 부분으로 청의 뺨을 툭 쳤다. 살갗이 퉁퉁 붓고 피멍이 들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러웠다.
“멋대로 입을 열어 쓸데없는 어리광을 부려도 된다고, 내가 언제 허락했지?”
“흐으, 아, 윽…….”
“태의의 손가락을 자른 것으로는 모자랐나? 몇 번을 더 일깨워 줘야 알아듣겠어. 다른 이에게 눈 돌리지 마. 그래 봤자 소용없으니.”
황제가 싱긋 웃으며 청에게 손을 뻗었다.
“어차피 그대에겐 나뿐이잖아.”
커다란 손이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휘어잡았다. 청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짤막하게 비명을 질렀다. 황제는 그의 머리를 움켜쥐어 침상으로 질질 끌고 갔다. 청은 곧 막사 한구석의 침상에 내동댕이쳐졌다.
“엉덩이 들고 구멍 벌려. 그 구멍에 다른 놈 자지가 드나들었는지 아닌지, 확인해 봐야 할 것 아닌가.”
“맹세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입니다, 흐윽, 믿어 주십시오.”
“그대 말만 듣고 어찌 믿나? 그대는 항상 숨 쉬듯 거짓말을 하니 도무지 믿음이 가질 않는단 말이지. 황후를 사랑한다고 했다가 말을 바꾸고, 그다음엔 나를 사랑한다고 했다가 헛소리였다고 둘러대고. 참으로 앙큼하기 짝이 없어.”
“…….”
“구멍이 찢어져 쩍 벌어질 때까지 맞고 싶어 그리 앙탈을 부리는 건가?”
황제가 채찍을 한 손으로 쥐고 반대쪽 손바닥을 느릿하게 두드렸다. 탁, 탁, 탁. 숫자를 세듯 규칙적인 간격이었다. 뺨에서 느껴지는 욱신욱신한 통증이 아까의 공포를 일깨웠다. 청은 자꾸만 축축 늘어지는 팔을 움직여 허리끈을 풀어 헤쳤다.
황제는 청이 힘겹게 바르작대며 옷을 벗는 광경을 무심하게 지켜보았다. 겹겹이 껴입은 옷자락 사이로 맨살이 드러났다. 말에서 굴러떨어지며 생긴 푸르스름한 멍이 몸 곳곳에 남아 있었다. 어느새 청은 이마를 침상에 들이박고 엉덩이만 치켜든 자세가 되었다. 이불에 뜨거운 숨이 색색 스몄다. 그는 이를 악물고 허벅지를 간신히 조금 벌렸다. 끔찍하게 수치스러웠다.
“엉덩이 잡고 똑바로 벌려 봐. 안이 보이게.”
황제는 채찍 손잡이를 허벅지 사이에 넣어 사타구니를 툭툭 쳤다. 단단히 다물린 연한 빛깔의 입구가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구멍 그만 오물거리고.”
청은 눈을 질끈 감고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자신의 엉덩이를 움켜쥔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 엉덩이 살이 양옆으로 벌어져 사이에 감춰져 있던 구멍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황제는 아무런 예고 없이 구멍에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헉!”
아무런 윤활유도 없이 무작정 쑤셔 넣은 거라 괴롭기 짝이 없었다. 메마른 점막이 거칠게 쓸렸다. 마디가 단단히 잡힌 손가락이 억지로 파고들 때마다 청의 구멍이 가파르게 수축했다.
“겉만 보아서는 알 수가 없지 않나. 이 안에 누가 좆물을 싸질렀는지 아닌지.”
황제는 내벽 주름 하나하나를 집요하게 꾹꾹 눌러 더듬었다. 손톱 뿌리 부분이 드러날 때까지 쑥 빼냈다 다시 푹 집어넣기도 했다. 정말로 안에 정액의 흔적이 있는지 확인하듯.
뻑뻑하게 달라붙는 발간 속살을 뿌리치며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청이 참고 있던 호흡을 간신히 터뜨렸다. 스스로 내쉰 숨이 델 듯 뜨거웠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무로 만들어진 마편 손잡이가 구멍을 벌리고 콱 틀어박혔다.
“윽, 아악……!”
단단히 조여든 내벽이 침입을 거부했다. 황제는 청의 엉덩이에 반쯤 꽂힌 손잡이를 꽉 눌러 억지로 처박았다.
“우욱……. 쿨럭, 컥…….”
길고 굵은 막대가 끝도 없이 안을 뚫고 들어왔다. 내장이 생으로 뚜두둑 뜯어지는 것 같았다. 청이 괴롭게 몸을 뒤틀며 헛구역질 섞인 기침을 했다. 침상에 맑은 타액이 뚝뚝 떨어졌다. 황제는 마편 끝을 쥐고 구멍 안을 몇 번 크게 들쑤셨다. 청의 몸에 들어갔다 나온 손잡이에는 정액이 묻어 있지 않았다. 그는 손잡이를 쑥 뽑아내고 청의 엉덩이를 툭 쳤다.
“잘했어. 자지가 먹고 싶어 이리 구멍을 열렬히 오물대면서, 정작 다른 놈과 붙어먹지는 않았던 모양이야.”
청은 무의식적으로 안심했다. 자신의 결백을 증명했으니 이제 끝인가 싶었다. 그러나 마음을 놓기에는 일렀다.
황제는 시선을 돌렸다. 그가 앉아 있던 탁자 앞에 술 한 병이 놓여 있었다. 황제가 여기까지 친히 가져온 것이었다. 연회장에서 청이 마시려다 못 마신 것이기도 했다. 그는 팔을 뻗어 술병을 집었다. 마개를 열어 찰랑찰랑 들어찬 맑은 술을 한 모금 머금었다. 침상에 널브러진 청의 고개를 잡아 돌리고 입을 맞추었다.
서늘하고 질척한 혀가 입 안을 헤집고 들어왔다. 차갑고 홧홧한 액체가 넘어왔다. 청은 무심코 그것을 삼켰다. 목울대가 작게 오르내렸다.
“아까 한 잔도 마시지 않았지?”
황제가 술에 젖은 스스로의 입술을 슬쩍 핥으며 속삭였다.
“그대가 옛날부터 좋아하던 술이야. 특별히 그대만을 위해 준비했거늘, 입도 대지 않고 가 버려서 서운했어. 낯을 가려 그리했나? 그래……. 예락 그대는 워낙에 수줍음이 많으니.”
황제는 한 손에 술병을 든 채 싱긋 웃었다. 그 얼굴이 밤하늘에 뜬 달이 무색하도록 청려(淸麗)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실컷 마셔 보게.”
그 말과 함께 백자 술병이 통째로 청의 구멍에 꽂혔다. 차디찬 액체가 구멍 안으로 울컥울컥 쏟아졌다. 술이 여린 내벽에 직접 닿아 몹시 뜨겁고 쓰라렸다.
“흐악!”
청이 불 위에 올린 생선처럼 펄떡이며 사지를 경련했다. 입가로 타액이 질질 흘렀다. 파들파들 떨리는 손이 병을 빼내기 위해 스스로의 뒤로 향했다. 철썩! 황제는 마편을 들어 그의 엉덩이를 힘껏 내리쳤다. 말간 엉덩이에 시뻘겋게 채찍 자국이 남았다. 청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양손을 힘없이 늘어뜨렸다.
“참아. 잔꾀 부리지 말고. 안을 실컷 들쑤셔 놓았으니 이제 소독을 해야지.”
“읏, 흐으, 아……!”
“어때, 예락. 뒤로 마시는 술맛은 좀 다른가?”
“제발, 폐하, 제발…… 살려 주십시오, 으, 윽, 너무, 아파서…….”
술에 흠뻑 적셔진 내벽이 너무도 아파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배 속이 온통 술로 출렁였다. 통증에서 벗어나 보려 몸을 들썩일 때마다 술병이 흔들려 안에 든 것이 왈칵 쏟아졌다. 죽을 것 같았다.
“왜 그러지? 연회장에서도 내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매정하게 술잔만 쳐다보고 있기에, 나보다 이 술이 더 좋은 건가 싶어 배부르게 먹여 주었는데.”
“…….”
“응? 말해 봐. 술병이 좋은지, 내 자지가 좋은지. 무엇이든 그대가 직접 고른 것으로 박아 줄 테니까.”
청은 눈물과 식은땀에 젖은 이마를 이불에 문질렀다. 그래도 아픔과 거북함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폐하…… 것으로…….”
“내 자지를 박아 줄까?”
“네에……. 네, 흐윽, 자지…… 박아…… 주세요, 으읏, 헉……!”
그는 흐느낌 사이사이로 절박하게 간청했다. 수치심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그저 어떻게든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다시.”
그러나 황제는 그의 애원을 단호하게 기각했다.
“울지 말고 똑바로 말해야지. 숨넘어가게 엉엉 울어 대기만 하니,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어.”
“헉, 허억, 흐, 끅.”
청은 울음기를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숨을 꾹 참은 채로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깨물고 볼 안쪽 살을 피가 나도록 씹었다. 엉덩이를 치켜들고 엎드린 그의 등과 어깨가 가파르게 들썩였다.
“저는, 폐하 자지로, 박히는 게 더 좋…….”
자학적인 인내 끝에, 청은 마침내 헐떡이지 않고 간신히 말을 이을 수 있었다. 그러나 도중에 말이 뚝 끊겼다. 느닷없이 타인의 목소리가 불쑥 끼어든 탓이다.
“대장군? 혹시 아직 깨어 계십니까?”
막사 밖에서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를 찾는 목소리도 들렸다. 아까 그를 데려다주었던 장군이었다.
“혹시나 도움이 될까 하여 의원에게서 약을 얻어 왔습니다. 많이 편찮으신 것 같기에…….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것만 전해 드리고 가겠습니다.”
청은 이불에 고개를 묻은 채 소리 없이 경악했다. 그의 몸이 그 자세 그대로 나무토막처럼 뻣뻣이 굳어 버렸다. 아직까지 술병을 물고 있는 구멍 또한 빠듯하게 좁아졌다. 지금의 자신을, 맨엉덩이와 벌겋게 부은 구멍을 낱낱이 드러내고 꼴사나운 자세로 고꾸라져 술병을 꽂고 있는 모습을 저 남자에게 들킨다면…….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마침 잘되었군. 예락, 저자에게 똑똑히 일러 줘. 그대 뒷구멍은 이미 주인이 있어서 내줄 수 없겠다고. 그래, 아예 내 것을 물고 좋아 자지러지는 모습을 보여 줄까? 후장 안을 찔러 주면, 그대……. 한 번도 만져 주지 않은 앞쪽으로도 좆물을 질질 싸 대지 않나.”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 청이 침상 위를 엉금엉금 기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황제의 옷자락을 힘겹게 붙잡고 머리를 조아려 빌었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횡설수설 애원했다.
“그, 그건……. 폐하, 제발, 제발 그것만은 거두어 주십시오.”
“어째서? 그대 입으로 직접 말했으면서. 내 자지에 박히고 싶다고.”
“저는 폐하에게만, 오로지 폐하 앞에서만…… 박히고 싶습니다. 헉, 흐윽,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것은 싫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발…….”
안에서 아무런 응답이 없자, 장군이 다시 한번 청을 불렀다.
“대장군, 지예락 대장군? 주무십니까? 잠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청이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고개가 반사적으로 문 쪽을 향해 돌아갔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들켜선 안 된다는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잠시 후 막사 앞을 기웃거리던 기척이 떠났다. 저벅저벅 흙을 밟는 발소리가 천천히 멀어져 갔다.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얼어붙어 있던 청이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는 이윽고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인간의 것 같지 않은 밝은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황제가 고개를 기울여 청을 빤히 주시하고 있었다. 소름 끼치게 무미건조한 얼굴이었다.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다른 이에게 눈 돌리지 말라 했는데……. 그새를 못 참고.”
청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당장이라도 사죄해야 하는데, 그래야 조금이나마 황제의 분노가 덜어질 텐데. 너무도 무서워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귀애해 주려 해도 할 수가 없군. 그대가 자꾸 혼이 날 만한 짓을 하니.”
황제가 무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는 청의 뒤에 꽂힌 술병을 확 잡아 뺐다. 차갑고 미끄러운 도자기가 내벽을 긁으며 빠져나갔다. 벌겋게 부은 구멍이 뻐끔히 벌어졌다가 다물렸다. 이윽고 구멍 안에 고여 있던 맑은 술이 줄줄 넘쳐흘러 이부자리를 적셨다.
“일어나. 일어나서 무릎 꿇고 앉아.”
“읏…… 흐으…….”
청은 열이며 술기운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침상을 짚고 일어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갓 태어난 망아지처럼 자꾸만 푹푹 고꾸라졌다.
“정신 차려야지.”
황제는 술병에 반쯤 남아 있던 술을 그에게 확 끼얹었다. 철퍽! 청의 머리카락부터 얼굴, 그 아래 쇄골과 가슴팍이 온통 축축하게 젖었다. 뺨을 맞아 생긴 상처에 술이 스며들어 지독한 통증이 닥쳤다.
“아으…… 으, 흐으, 헉……!”
아픔으로 아래턱이 벌벌 떨렸다. 청은 차마 뻘겋게 피가 맺힌 자신의 뺨을 만지지 못하고 손을 허공에 어정쩡하게 든 채 괴로워했다. 축축하게 젖은 속눈썹 아래 술과 눈물이 뒤섞여 흘러내렸다.
“내가 주군 된 의무로 그대에게 벌을 주려 하는데.”
심드렁하게 마편으로 손바닥을 툭툭 두드리던 황제가 긴 소맷자락을 걷으며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양손으로 채찍 끄트머리를 쥐고 한 번 팽팽히 당겨 보았다.
“세 대를 때릴 거야. 한 대 맞을 때마다 하나씩, 그대가 잘못한 것을 말해 봐. 제때 말하지 않고 미적대면 매가 늘어날 것이고.”
“…….”
“벌이 부당하다 여겨지면 얼마든지 고해도 좋아. 신하의 직언을 귀 기울여 듣는 것 또한 주군의 덕목 아닌가.”
청은 간신히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힘없이 떨어뜨리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술이 뚝뚝 떨어졌다. 앞섶이 죄다 열린 옷을 간신히 걸치고 있는 어깨가 간헐적으로 경련했다. 상반신은 그나마 사정이 나았다. 하반신은 알몸이었다. 힘겹게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느라 허벅지와 성기가 적나라하게 보였다.
“왜, 못 받아들이겠나?”
“아, 아닙, 아닙니다……. 이견…… 없습니다.”
청이 잔뜩 쉰 목소리로 말을 더듬었다.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대답을 듣자마자 황제는 아무 감흥 없는 얼굴로 마편을 들었다. 짜악! 섬뜩한 파열음이 허공을 갈랐다. 채찍이 청의 허벅지 위에 시뻘건 선을 남겼다.
“흐아악!”
“말해야지. 뭘 잘못했는지.”
통증으로 전신을 움찔움찔 뒤틀던 청이 눈을 질끈 감았다.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들도록 주먹을 꽉 쥐어 당장이라도 휙 쓰러져 넘어가려는 몸을 간신히 지탱했다.
“폐하께서…… 다른 이에게, 헉, 흐읏, 눈을 돌리지 말라 하셨는데……. 한눈을 팔았습니다.”
황제는 재차 팔을 휘둘렀다. 두 번째 채찍질 또한 아까와 정확히 같은 곳에 내리꽂혔다.
“허억……!”
한순간 눈앞이 까맣게 사그라졌다. 청의 고개가 휙 꺾였다 다시 제자리에 돌아왔다. 술을 뒤집어쓴 얼굴과 가슴팍뿐만 아니라, 등까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다음.”
“천박하게…… 함부로 다른 사내에게 몸을 기대고……. 폐하의 허락도 없이, 흐윽, 말을 섞었습니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사물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청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다행히도 그의 대답이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황제는 묵묵히 다시금 마편을 들었다. 짜악! 시뻘겋게 달아오른 허벅살에 기어이 피가 송골송골 맺혔다. 맞은 곳이 끔찍하게 아팠다. 하지만 그보다 초조함이 더 컸다. 세 번째 잘못이 생각나지 않았다. 흐려진 기억을 아무리 돌이켜 보아도 짚이는 것이 없었다.
“다음.”
황제가 나른하게 재촉했다. 청은 온전치 못한 정신으로 필사적으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하지만 긴장할수록 머릿속이 점점 더 새하얗게 물들었다.
“저, 그, 그것이, 저는…….”
“미적대면 벌이 늘어날 거라 하였거늘.”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청의 낯이 다가올 고통에 대한 공포로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철썩! 무자비한 충격이 허벅지를 후려갈겼다. 온몸에 힘이 탁 풀렸다. 청은 깜빡 정신을 놓고 침상에 고꾸라졌다. 몇 초 뒤에야 자신이 쓰러졌다는 것을 알았다.
“똑바로 앉아. 아직 안 끝났어.”
청이 쉽사리 일어나지 못하자, 황제는 옆에 놓인 술병을 태연하게 도로 들었다. 찰랑찰랑 소리가 나도록 병을 가볍게 흔들어 안에 남은 액체의 양을 가늠했다. 그 소리가 청의 정신을 일깨웠다.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끼쳤다. 그는 침상 위에서 팔다리를 휘저으며 절박하게 허우적거렸다. 말을 듣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앉았다.
“거, 거짓을……. 폐하께, 감히 거짓을…… 고했습니다.”
반쯤 넋을 놓은 청이 색색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다급히 입을 열었다. 몸이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 위태롭게 휘청댔다.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허벅지를 내려다보는 눈에 초점이 없었다.
“거짓이라. 뭐라고 거짓말을 했지?”
“제, 가 폐하를……. 사랑한다 한 것이.”
“…….”
“헛소리…… 였다고, 거짓말을…….”
“그래서?”
맨허벅지 위로 눈물이 하염없이 뚝뚝 떨어졌다. 청은 채 말을 마치지 못하고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산발이 된 머리채가 스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무릎을 꿇고 앉은 자세 그대로 어깨를 한껏 움츠리고 흐느꼈다. 속에 담긴 것을 죄다 쥐어짜 토해 내는 것 같은 처절한 울음이었다.
“죄, 송, 폐하, 죄송합니다, 으, 흐윽, 제가, 거짓말을 해서…… 흐, 헉, 흐읍…….”
터지는 울음 사이사이로 드문드문 비참한 고백이 섞였다. 한 음절 한 음절이 피와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그러나 그 뒤에 이어지는 것은 없었다. 청은 그저 거짓말을 하여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하며 섧게 오열했다.
황제는 한참 동안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청이 제 울음기를 못 이겨 컥컥 숨이 넘어가고 탈진하기 직전에 이르렀을 때까지도 침묵을 지키던 황제가 마침내 움직였다. 그는 스르르 몸을 일으켜 침상에 올랐다. 청을 뒤에서 끌어안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어찌 이리 무정할까, 청아. 너는 내게만 참으로 박하게 굴어. 다른 이에게는 잘만 웃어 주고, 달콤한 말을 잘만 속삭이면서.”
주위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집안을 멸문시켰다. 철저히 고립시켜 자신만 보고 자신만 따르도록 길들이고, 오랜 세월에 걸쳐 집요하게 몰아붙였다. 그래도 청은 끝끝내 고집을 지켰다.
정신을 놓을 지경이 되어서야 간신히 제 속내를 털어놓나 했더니, 다음 순간 그저 헛소리에 불과했다고 선을 긋는다. 거짓말을 하여 죄송하다 사과하면서도 결코 황제가 원하는 말은 들려주지 않는다.
도대체 얼마나 더 망가뜨리고 무너뜨려야 입을 열까. 참으로 지독한 고집이었다. 청이 너무도 어여쁘게 굴어서, 전신의 뼈를 으스러뜨리고 살점을 짓이겨 죽여 버리고 싶었다.
“벌을 다 받았으니, 이젠 그대가 원하는 것을 주어야겠지.”
황제는 청의 뒤에 몸을 바짝 붙였다.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놓고 술에 척척히 젖은 입구를 더듬었다. 그는 청의 구멍을 지분거리며 자신의 옷자락을 한 손으로 건성건성 풀어 내렸다. 검붉게 열이 몰린 거대한 성기가 툭 튀어나왔다. 청이 채찍질을 당하며 울부짖는 모습을 볼 때부터, 아니, 그 전부터 이미 터질 듯 발기해 있었다.
“폐, 폐하?”
“내 자지에 박히고 싶다 했잖아.”
청은 여전히 무릎을 꿇고 앉은 채였다. 황제는 그의 허리를 움켜쥐어 허공에 살짝 띄웠다. 그를 들어 그대로 성기 위에 꽂아 버렸다. 두꺼운 귀두가 회음을 따라 미끄덩하게 비벼지다가 구멍 위에 콱 눌렸다.
“아으, 윽, 흑……!”
황제는 청의 허리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어 내려앉혔다. 질펀하게 부어 넣은 술의 힘을 빌려 성기가 꾸역꾸역 파고들었다.
“뜨거워…….”
황제가 나긋하게 속삭였다. 그의 뺨에도 발그스레하게 꽃물이 들어 있었다. 고열에 시달리느라 청은 배 속 또한 몹시 뜨거웠다. 절절 끓는 내벽이 화로 위에 올려 둔 떡처럼 질척하게 녹아 성기를 움켜쥐었다. 마치 청의 안이 그를 갈구하는 것 같아 제법 마음에 들었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청의 아랫배를 단단히 감싸 안고 철썩철썩 허리를 치댔다. 이 판판한 뱃가죽 아래에서 자신의 자지가 위아래로 들쑥날쑥 문질러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 없이 흥분되었다.
두 남자의 몸이 침상 위에 꿇어앉은 채 겹쳐져 들썩들썩 흔들렸다. 황제가 아래에서 쿡 치받아 올릴 때마다 청의 엉덩이가 살짝 떠올랐다 도로 떨어지며 성기에 박혔다. 청은 그때마다 흑, 윽, 헉, 하고 짤막한 신음을 연달아 토했다. 이따금 힘겹게 기침을 하기도 했다. 몸 전체가 들썩이도록 격렬하게 박히며 쿨럭쿨럭 기침을 하는 모습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컥, 크윽, 으…… 흐으…….”
한계까지 몰린 청이 마침내 혼절했다. 너무 아픈 나머지 바짝 긴장한 채 파르르 떨리던 등줄기에 힘이 탁 풀렸다. 그러나 그가 축 늘어진 후에도 황제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성교에 열중했다. 중심을 잃고 자꾸만 쓰러지려는 청의 몸을 추슬러 안으며 집요하게 성기를 처박았다.
뜨거운 안은 의식이 없는 와중에도 성기를 착실히 삼켰다. 완만한 요철이 도드라진 내벽을 죽 그으며 올라가 배꼽 안쪽을 쿵 찍을 때마다 내벽이 반사적으로 수축하여 기둥 전체를 우물우물 씹었다.
그는 허리를 쳐올리며 청의 피멍이 든 뺨을, 식은땀에 젖은 이마를, 피가 점점이 묻어나는 허벅지를 끊임없이 어루만졌다. 몇 번을 만져도 모자랐다. 그러던 어느 순간, 황제는 청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으며 푸스스 웃었다.
“그래, 이승에선 결코 들려주지 않을 모양이로구나…….”
* * *
정신을 차려 보니 여관방이었다. 그 와중에도 고주망태가 되어 길바닥에 뻗는 것만은 면하고자, 최후의 이성을 발휘하여 방을 잡은 것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마셨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누구도 서로를 제지하지 않았다. 청은 잔을 비우다 보니 은근한 오기가 생겨 황자를 말리지 않았고, 황자는 청이 과음할까 봐 말려 줄 만큼 자상한 성격이 아니었다. 그렇게 한 잔 두 잔 비우다 보니 이 꼴이 났다.
〈전하께서 침상을 쓰십시오. 후우, 저는 여기, 의자에…….〉
곯아떨어지기 전에 그리 말했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거기까지 말하다 그만 여관방 구석의 긴 의자에 고꾸라져 기절하듯 잠들었다. 술에 절어 인사불성이 된 상태에서조차 황족을 먼저 위하다니, 참으로 눈물겨운 충성심이었다. 청은 알딸딸한 와중에도 새삼 자신의 인품에 감탄했다.
그는 딱딱한 나무 의자를 짚고 고개를 들었다. 용케 여기서 잘도 잤다 싶었다. 술이 덜 깨어 여전히 정신이 몽롱했다. 시야가 빙빙 돌고 사지가 흐느적거렸다. 술을 콸콸 들이부었던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차갑고 맑은 물이 간절했다. 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물…….〉
그러다 방 안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청이 잠을 청했던 의자 맞은편에는 침상이 있었다. 그 침상에 반듯하게 누운 남자가 보였다.
흰 뺨에 엷은 달빛이 내려앉았다. 긴 연갈색 속눈썹 아래로 파르스름한 그늘이 드리웠다. 자잘한 먼지가 떠도는 것까지 고스란히 보이는 고요한 달빛 아래, 그가 내쉬는 숨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가 잠든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청은 물을 찾던 것도 잊고 휘청휘청 침상을 향했다. 도중에 탁자 모서리에 정강이를 한 번 찍히기도 했다. 만취한 상태라 아프지도 않았다. 중심이 잡히지 않아 얼떨결에 이부자리 위를 짚었다. 그는 황자의 얼굴을 위에서부터 홀린 듯 들여다보았다.
단정하고 수려한 이목구비가 어슴푸레한 어둠 아래 도드라졌다. 이리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니, 지금껏 두렵고 섬뜩하게만 느껴지던 황자가 처음으로 같은 인간으로 보였다. 청은 저도 모르게 서서히 고개를 숙였다. 코끝이 서로 닿을 듯 말 듯 가까워졌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대역죄였다. 황자가 이 사실을 안다면 단숨에 그의 목을 비틀어 죽여도 이상하지 않을 터였다. 제정신이라면 결코 이런 짓은 하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술에 취하고 달에 홀려, 청은 잠든 이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달밤에 몰래 훔친 입맞춤은 술김에도 매우 조심스러웠다. 청은 조마조마한 가슴을 억누르며 천천히 입술을 떼어 냈다. 그와 동시에 황자가 살며시 눈을 떴다. 초점 없는 눈동자가 아주 가늘게 드러나 있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몸도 못 가눌 정도로 취해 있었는데, 술기운이 단숨에 싹 달아났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청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이젠 죽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청아…….〉
나지막하게 이름을 부르고, 황자는 스르르 팔을 뻗었다. 희고 큼직한 손이 청의 허리를 덥석 움켜쥐어 우악스럽게 끌어당겼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굳어 있던 청이 고스란히 끌려가 침상에 엎어졌다.
황자는 곧 다시 눈을 감고 잠들었다. 아까도 잠결이었던 것이 분명했다. 깨어 있을 때의 황자는 절대 청을 ‘청아’라고 부르지 않으므로.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멈춰 있던 심장이 그의 생에서 가장 크게 뛰었다. 너무 빠르게 뛰어 눈앞이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손끝과 발끝부터 시작하여 전신의 혈관 하나하나에 새로운 피가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청은 그날 밤을 뜬눈으로 꼬박 새웠다. 잠이 올 리가 없었다. 허락도 없이 황자의 곁을 함부로 떠나 방을 나갈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황자와 감히 한 침상을 쓸 수도 없었다. 결국 청은 방 건너편의 의자에 웅크리고 누워 하염없이 뒤척였다. 차마 황자 쪽을 보지 못하고 벽을 향한 채였다.
그는 자각했다. 상대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그리고 동시에 직감했다. 이 마음은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결코 입 밖에 내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홀로 깨어 있는 밤이 너무도 길었다.
* 전전반측(輾轉反側) :
고민이 많아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함. 혹은 연인을 그리워하며 잠을 이루지 못함.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