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수지벽(斷袖之癖)
쿵! 짐짝처럼 들려 운반된 청이 거칠게 내던져졌다. 눈을 가리고 입에 재갈을 물렸으며, 사지를 꽁꽁 묶어 놓은 채였다. 차갑고 딱딱한 바닥에 팽개쳐지며 해묵은 먼지가 풀썩 피어올랐다. 퀴퀴한 냄새가 났다. 온몸이 바스러질 듯 아팠다.
“풀어 줘라. 죽이더라도, 자신이 무슨 상황에 처한 건지는 똑똑히 알려 주고 죽여야 하지 않겠나.”
9왕자가 가볍게 턱짓했다. 이윽고 청의 눈과 입을 가린 천이 풀려 나갔다. 청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던져질 때 바닥에 머리를 잘못 부딪쳤는지 자꾸 눈앞이 핑핑 돌았다. 이마가 깨질 것 같았다. 간신히 눈에 힘을 주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흐릿한 시야에 허름한 벽과 천장이 들어왔다. 이곳은 황궁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장소였다.
“무슨…… 헉, 무슨 속셈이냐. 폐하께, 무슨 짓을.”
“황제? 이미 널 버린 황제를 찾아 무엇 하려고.”
“뭐?”
“황제는 아마 네놈이 없어진 줄도 모를 거다. 알더라도 구태여 찾지 않겠지. 이제 네겐 아무런 쓸모도 없으니.”
“그럼…….”
“그래, 처음부터 너를 노렸다.”
9왕자라고 황제가 증오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황제에게는 차마 덤빌 수 없었다. 그는 막강한 권력을 지닌 제국의 지배자이자 황후가 품은 아이의 아버지가 될 자였다.
그보다는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된 대장군을 증오하는 것이 더 쉬웠다. 황후도 9왕자도, 모든 분노의 화살을 자연스럽게 청에게로 돌렸다. 황제의 앞잡이로서 악랄한 짓을 자행했던 청이 황제보다 더 나쁘다고 합리화하면서.
9왕자는 당연히 청이 충격을 받을 거라 생각했다. 일평생 몸과 마음을 바친 주군이 자신을 버렸다 하니 응당 배신감에 치를 떨겠지. 그 광경을 상상하니 짜릿하기까지 했다.
“아……. 폐하가 아니라 나를.”
하지만 다음 순간 청이 보인 반응은 명백한 안도였다. 그는 황제가 아닌 자신이 표적이 되어 진심으로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까지. 도를 넘은 맹목적인 충성에 소름이 끼쳤다. 청이 그의 앞에 엎드려 살려 달라 애걸하고, 버러지처럼 바닥을 벌벌 길 거라 생각했는데. 9왕자의 속에서 까닭 모를 울분이 솟구쳐 올랐다.
“지예락, 이제껏 네놈이 지은 악행의 대가를 받아라. 괴롭게 죽어 간 모든 율의 백성들을 대신하여, 그리고 가엾은 내 동생을 대신하여……. 최대한 치욕스럽고 고통스럽게 죽여 주겠다.”
그가 뒤에 서 있던 사내들에게 손짓했다. 우르르 몰려온 이들이 청의 사지를 붙들었다. 양발을 단단히 묶고 있던 밧줄을 단검으로 잘랐다. 하지만 손목은 여전히 속박된 채였다.
“헉, 흐윽…….”
청이 극도로 불안해하는 기색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누군가 그의 머리채를 움켜쥐어 아래로 처박았다.
“눈 굴리지 마.”
머리가 딱딱한 돌바닥에 크게 부딪쳤다. 귀에서 삐 소리가 나며 순간 앞이 보이지 않았다. 우악스러운 손길로 양 발목이 벌어졌다. 불쑥 파고들어 온 다른 손이 그의 옷고름에 닿았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청이 몸을 뒤틀며 미친 듯이 발악했다.
“하지 마…… 흐으, 읏, 하지…… 윽!”
철썩! 솥뚜껑만 한 손이 머리채를 움켜쥐고 그의 뺨을 갈겼다. 바짝 말라 있던 입술이 금세 터졌다. 입가에 시뻘겋게 핏물이 고였다. 그러고도 청이 반항하려 하자, 피 맺힌 입술 사이로 손가락을 쑤셔 넣어 아예 입을 틀어막아 버렸다. 두툼하고 거친 손가락이 입 안을 거칠게 헤집었다. 청이 컥컥대며 헛구역질을 했다.
“하…….”
9왕자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는 예전에 청을 먼발치에서 한 번 본 것이 전부였다. 그것도 황제의 뒤를 따라 걷는 그의 옆모습만 언뜻 보았다. 공포가 짧고 흐릿한 기억에 살을 붙였다.
그러나 실제로 마주한 청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무력하고 나약했다. 양손이 묶인 채 힘없이 몸부림치는 모습이 몹시도 가련해 보였다. 한 손에 들어찬 발목은 조금만 힘을 주어도 부러질 것 같았다. 고작 이런 놈을 이제껏 악몽처럼 여기며 두려워했다니. 우스웠다. 스스로가 한심했다. 동시에 시커멓게 썩어 문드러진 가학심이 고개를 들었다.
9왕자는 청의 옷깃을 벌렸다. 스르르 흘러내리는 옷자락 사이로 맨가슴팍이 보였다. 한쪽 유두에 끼워진 청옥 귀걸이를 발견한 그의 낯이 경멸로 물들었다. 청을 붙들고 있던 사내들 또한 저열한 웃음을 흘렸다.
“이 천박한 장식은 뭐지?”
그는 귀걸이를 손끝으로 탁 튕겼다. 귀걸이에 꿰인 유두에서 통증이 번졌다. 청이 허리를 움찔거리며 괴로워했다.
“홍등가의 남창도 하지 않는 짓을, 대장군이라는 자가. 역겹기 짝이 없군.”
그는 달랑달랑 달린 푸른 보석 장식을 쥐고 있는 힘껏 뜯어냈다. 뚜두둑 생으로 살점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헉, 흐으…… 으아악!”
끔찍한 비명이 버려진 창고 안을 쩌렁쩌렁하게 메웠다. 유두가 처참하게 뜯긴 자리에 피가 철철 흘렀다. 귀걸이가 구석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나뒹굴었다.
“윽. 이게 내 손을 깨물었어.”
남자들 중 한 명이 청의 입 안에서 손가락을 빼내며 투덜거렸다. 타액으로 흠뻑 젖은 손에 잇자국이 선명했다. 비명을 지르며 무심결에 물어 버린 모양이었다.
“어딜 이를 세워? 건방지게.”
몸을 일으킨 남자가 무방비하게 드러난 청의 상체를 짜증스럽게 걷어찼다. 퍼억. 청은 숨을 쉬지 못했다. 피범벅이 된 가슴팍이 파득, 파득, 가파르게 경련했다.
“대신 다른 것을 물려 놔야지. 더 큰 것으로.”
남자는 히죽히죽 웃으며 허리춤을 풀어 헤쳤다. 그가 받은 명은 청에게 최대한의 치욕을 가하다 고통스럽게 숨을 끊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뭘 하든 상관없다 했으니, 이 틈을 타 자신의 욕구를 채울 생각이었다.
“이번엔 얌전히 있으라고. 또 이를 세우면 이가 죄다 뽑힐 때까지 얼굴을 걷어차 줄 테니까.”
검붉게 발기한 성기가 꺼떡이며 대가리를 치켜들었다. 사내는 두툼한 성기 밑동으로 청의 뺨을 툭툭 쳤다. 옆에 있던 동료가 그 장단에 맞추어 청의 고개를 젖히고 입을 벌렸다.
“큭…… 아, 흐…… 으윽…….”
청이 저항하려 하자 두툼한 손으로 기도를 콱 눌러 숨통을 졸랐다.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입술이 억지로 벌어졌다. 흰 얼굴이 눈물과 타액으로 범벅이 되었지만, 그래도 제법 봐 줄 만했다. 산발이 되어 이마와 뺨에 마구 들러붙은 머리카락마저 처연함을 더했다. 피가 드문드문 맺힌 입술 사이에 성기가 쑤셔 박혔다.
“허억……!”
역겨웠다. 토악질이 확 치밀어 올랐다. 꺽꺽대며 성기를 게워 내려 하기도 전에 큼직한 귀두가 다시금 밀고 들어왔다. 남자는 큰 손으로 청의 머리통을 움켜쥐고 위에서부터 퍽퍽 꽂아 넣었다.
“후우, 사내새끼 입도, 제법 나쁘지 않은데.”
“입이야 사내든 계집이든 똑같이 달려 있으니.”
“하기야.”
남자가 허리를 치댈 때마다 청의 몸이 무력하게 흔들렸다. 머리 위에서 음탕한 대화가 오고 갔다. 많은 손이 청의 몸을 함부로 만졌다. 너덜너덜해져 끊임없이 피가 흐르는 유두를 지분거리고, 허리와 엉덩이를 주무르고, 밧줄에 묶인 손에 성기를 문질러 비벼 댔다.
9왕자는 청의 허벅지를 한껏 벌리고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허벅지 안쪽에 둥그런 화상 흉터가 있었다. 시뻘겋게 살을 지진 자국이 꼭 용처럼 보였다. 마치 노예의 낙인 같았다. 상대가 더욱 미천하고 혐오스러워 보였다.
욕망으로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아니, 이것은 천한 욕망 따위가 아니었다. 조국을 대신하여 행하는 신성하고 엄숙한 복수일 뿐이었다.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하며 앞섶을 풀어 성기를 꺼내 쥐었다.
쩍 벌어진 사타구니 사이 메마른 입구에 귀두가 툭, 닿았다. 청의 몸이 바짝 긴장하여 굳어졌다. 9왕자는 뻣뻣하게 발기한 성기를 좀 더 노골적으로 밀어붙였다. 제 흥분을 못 이겨 거친 숨을 씨근덕대던 사내들이 그 광경을 보고 낮게 웃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할 모양이었다.
“흐, 윽…….”
청은 자신의 아래에 닿은 것이 무엇인지 인지했다.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던 몸이 갑자기 발작적으로 들썩였다.
“지예락 대장군, 어떤가? 여인도 음인도 아닌 몸으로, 네놈이 멸망시킨 나라의 왕자에게 범해지는 기분은.”
9왕자가 음습하게 속삭였다. 청에게 사내로서 느낄 수 있는 최대한의 모욕을 줄 생각이었다. 좆으로 내장을 후벼 파고 안에 정액을 잔뜩 싸질러서, 몸도 마음도 한계까지 무너지도록.
그는 볼기를 움켜쥐어 벌리고 성기를 무작정 욱여넣으려 했다. 뻑뻑한 구멍이 진입을 방해했지만, 입구가 찢어지고 짓무르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억척스레 밀어붙였다.
“읍…… 흐, 윽, 허억…… 크, 읍!”
청이 미친 듯이 발악했다. 이제까지 중에서 가장 저항이 거세었다. 골반이 뒤틀리고 엉덩이가 꽉 오므라들어 타인의 성기를 필사적으로 거부했다.
“입 닥치고, 얌전히 있으라고, 했잖아!”
9왕자가 주먹을 쥐어 청의 아랫배를 힘껏 후려쳤다. 청의 몸이 펄떡 크게 튀어 올랐다. 저항은 조금 잦아들었지만 완전히 멎지는 않았다. 그는 다시금 주먹을 치켜들었다. 퍽. 퍽. 퍽. 무자비한 폭력이 연달아 가해졌다.
“…….”
마침내 청이 축 늘어졌다. 그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9왕자는 힘이 빠진 청의 허벅지를 움켜쥐고 다시 삽입을 시도했다.
“나리.”
그때, 청의 입에 성기를 박아 대던 남자가 난처해하는 기색으로 9왕자를 불렀다.
“이놈, 숨을 쉬지 않는데요.”
번들번들 젖은 성기가 빠져나가자 청의 고개가 뒤로 툭 꺾였다. 힘없이 벌어진 입술이며 코, 턱이 미동도 없었다.
“뭐?”
벌써? 아직 본격적으로 윤간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지금 갑자기? 9왕자는 당황했다. 청은 이대로 죽어서는 안 되었다. 차라리 죽여 달라 애원할 정도로 지긋지긋하게 능욕한 뒤에…….
주르륵. 무언가 따뜻한 것이 그의 아래를 적셨다. 무심코 내려다보았다. 시뻘건 핏물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청의 안에서 피가 흥건히 쏟아져 나와 그의 성기를 타고 줄줄 흐르고 있었다. 아직 귀두 부분도 제대로 넣지 않았는데. 단순히 입구가 찢어져서 피가 난 것이라기에는 출혈량이 지나치게 많았다.
“이, 이게 뭐야.”
“하혈한 것 같은데.”
“어째서?”
“음인이었나? 그게 아니고서야 이런…….”
당혹스러운 수군거림이 오고 갔다. 대장군은 평인이라 들었는데, 평인 사내가 왜 유산한 여인처럼 밑으로 피를 콸콸 쏟아 대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저, 나리.”
9왕자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미심쩍어하는 기색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사내들과 눈이 마주쳤다.
“이 사람, 나리께서 찾으시던 자가 맞습니까?”
그들은 탁주백이 돈을 주고 고용하여 9왕자에게 붙여 준 용병으로, 용병 중에서도 가장 악랄하고 질 나쁜 자들이었다. 돈만 받으면 높으신 분의 암살이든 겁간이든 뭐든지 하는 이들. 그저 사내 한 명을 납치해 잔뜩 괴롭히다 죽이면 큰돈을 주겠다는 말에 끌려 예까지 왔다.
그러나 처음부터 어딘가 이상했다. 지체 높은 귀족 관료의 처소가 다 무너져 가는 허름한 전각인 것부터가 묘했다. 게다가 제국 제일의 무관이라던 대장군은 서른도 안 되어 보이는 곱상한 청년이었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도 시킨 일은 해야겠다 싶어서 그를 끌고 왔는데, 이젠 숨이 멎어서는 아래로 피를 쏟는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
9왕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혼란스러운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기억하는 적국의 잔혹한 장군은 눈앞의 청년과 분위기도 성정도 너무나 달랐다. 그저 기억이 왜곡된 것이려니 하고 넘기려 했지만 이젠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얼핏 멀리서 보았던 지예락이 과연 이자와 동일 인물이 맞는가? 체격이나 생김새가 비슷한 이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어설픈 연기를 하는 대역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금군 대장군이 아닌 애먼 사람을 붙잡아다 강간하고 죽이려 한 것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사내들은 저들끼리 재빨리 눈짓을 주고받았다. 자칫하면 화에 휩쓸리겠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탁주백이 내건 거액의 사례금이 몹시 탐나긴 했지만, 수상한 함정에 빠지기를 자처할 만큼은 아니었다.
“저희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이 일에서 완전히 손 뗀다고 홍 대인께도 말씀해 주십쇼.”
주섬주섬 일어선 사내들이 재수 옴 붙었다는 듯 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들은 창고 문을 쾅 소리 나게 닫고 부리나케 모습을 감추었다. 텅 비어 버린 9왕자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참혹한 몰골의 청이 눈을 감은 채 차디찬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흐르는 피의 양이 자꾸만 늘어났다. 청은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가슴팍이 오르내리지도, 숨소리가 들리지도 않았다. 후들후들 떨리는 손을 간신히 뻗어 청의 뺨에 대어 보았다. 서늘했다.
섬뜩한 공포가 뇌리를 잠식했다. 9왕자의 낯빛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의 몸이 걷잡을 수 없이 경련하기 시작했다. 그는 바닥을 기어 청에게서 주춤주춤 멀어졌다.
“흐, 으아…… 으아아……!”
이윽고 그는 비틀비틀 일어섰다. 사지를 허우적대며 미친 듯이 뛰어나갔다. 쓰러진 청을 버려진 창고 안에 홀로 남겨 둔 채로.
* * *
내내 조용하던 바깥이 시끌시끌해졌다. 여러 필의 말이 달리는 소리, 일사불란하게 주변을 수색하는 발소리가 창고 주변을 에워쌌다. 굳게 닫혀 있던 문틈이 벌어졌다. 줄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진 청의 위로 실낱처럼 가느다란 빛이 들이쳤다. 누군가가 고함을 지르며 되돌아 뛰어나갔다. 그리고 다시 침묵.
잠시 후 문이 도로 열렸다. 묵직한 발소리가 조용한 실내에 울렸다. 문을 등지고 선 이의 긴 그림자가 청에게 드리운 희미한 빛을 가렸다. 저벅저벅 걷던 발이 청의 앞에 멈추었다.
바닥에 긴 머리채가 마구잡이로 흩어져 있었다. 다리 사이로 흐른 피가 넓게 퍼져 웅덩이가 되었다. 허벅지와 종아리는 물론이고 입고 있던 옷까지 온통 피범벅이었다.
“예락.”
천천히 몸을 낮추어 그를 들여다보았다. 금실로 자수를 놓은 비단옷이 검붉은 피에 척척하게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제 일어나야지. 해가 중천에 떴거늘.”
희고 큰 손이 청의 뺨을 천천히 매만졌다.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황제는 망설임 없이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검을 들어 양 손목을 묶은 밧줄을 잘랐다. 어찌나 처절하게 저항했는지, 밧줄로 묶였던 자리 또한 살갗이 까지고 짓물러 엉망이었다.
그는 팔을 뻗어 청을 안아 들었다. 흐른 지 꽤 되어 점차 식기 시작한 핏물이 다리를 따라 진득하게 뚝뚝 떨어졌다. 그러나 도중에 청의 고개가 맥없이 꺾였다. 머리카락이 스르륵 흘러내려 그의 창백한 얼굴을 가렸다.
“게으르기도 하지. 내가 왔는데, 언제까지 잠만 자려 해.”
황제가 가만히 중얼거렸다. 모든 감정을 싹 씻어 낸 듯 소름 끼치게 덤덤한 얼굴이었다. 그 가운데 눈빛만이 기이하게 번득였다.
청에게서는 아무런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의식 없는 이의 몸을 추슬러 안으려 해도 힘이 빠진 사지가 자꾸만 축 늘어졌다.
“청아?”
그는 청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툭 기대었다. 입술 사이로 혼잣말 같은 부름이 새어 나갔다.
“청아…….”
그 순간, 거짓말처럼 청이 눈을 떴다. 도저히 살아 있는 것 같지 않던 이의 눈꺼풀이 가늘게, 아주 가늘게 뜨였다. 길게 드리운 속눈썹 아래 검은 눈동자가 살짝 드러났다. 황제는 순간 호흡을 멈추었다.
청은 그대로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아슬아슬한 침묵 끝에 그가 느리게 눈을 굴렸다. 초점 없는 눈이 여기서 저기로 힘겹게 움직여 허공을 헤집었다. 바로 한 뼘 앞에 황제가 있거늘, 그는 상대를 알아보지 못했다. 출혈이 너무도 심해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이리라.
“폐, 하.”
피 웅덩이 위에 놓여 있던 청의 손이 움찔, 작게 움직였다. 상대의 기척은 느껴지는데 앞이 보이지 않으니 이렇게라도 확인하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몸 또한 그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마음만 같아서는 벌써 상대를 만지고도 남았는데, 그의 손은 차가운 바닥에서 무력하게 꿈틀대는 것이 전부였다.
황제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그는 무력하게 달싹이는 청의 손을 잡아 올렸다. 피에 진득하게 젖은 손을 자신의 뺨에 대며 빙그레 웃었다. 황제의 흰 뺨에 시뻘건 얼룩이 덕지덕지 묻었다.
“응? 청아.”
청은 뭐라 더 말을 이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심장을 쥐어짜고 오장육부를 벅벅 긁어내는 통증이 찾아왔다. 그는 황제에게 안겨 한 손을 잡힌 채 힘없이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헉…….”
황제는 묵묵히 그를 기다렸다. 한 치도 움직이지 않고 청을 빤히 내려다보는 시선이 오싹했다.
이윽고 아픔이 잦아들었다. 대신 참을 수 없는 졸음이 몰려왔다. 너무 졸려서 자꾸만 몸이 늘어지고 눈앞이 빙빙 돌았다. 하지만 청은 기력을 쥐어짜 억지로 정신을 차렸다. 황제의 앞에서 멋대로 잠드는 무례를 저지를 수는 없었다. 그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가물가물한 어둠을 더듬어 황제가 있다고 여겨지는 쪽을 바라보았다.
남몰래 황제를 마음에 품는 일은 항상 그러하였다. 짙은 안개 속을 홀로 헤매는데 아무런 이정표도 길잡이도 없어서, 오로지 멀리서 언뜻 보이는 황제의 옷자락 끄트머리만 보고 그를 따라 험난한 길을 나아갔다.
황제는 청의 가장 큰 불운이었다. 그때 연회장에서 6황자를 발견하지만 않았어도, 야트막한 호기심에 그에게 말을 걸지만 않았어도, 청은 특별할 것 없는 평인 사내이자 곱게 자란 귀족으로서 평온한 일생을 보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하지만 단 한 번도 그를 후회한 적은 없었다.
청은 사르르 웃었다. 머리는 산발이 되었고, 혈색이 죄다 빠져나간 얼굴에 피가 드문드문 묻었으며, 목 아래는 신경이 죄다 끊어진 듯 아무런 감각이 없는데도……. 그는 더할 나위 없이 환하게 웃었다. 창백한 뺨에 살며시 볼우물이 패고 눈시울이 살갑게 휘어졌다.
황제가 이제껏 보았던 청의 어떤 표정과도 닮지 않았다. 마냥 철없이 방글방글 웃던 소년의 해맑은 표정과도 달랐고, 서늘한 침묵을 고수하던 대장군의 표정과도 달랐다.
“진심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였습니다.”
청이 천천히, 하지만 또렷이 말했다. 남은 기운을 모두 끌어모아 선명하게 만들어 낸 문장이었다. 이윽고 그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어설프게나마 황제를 향하고 있던 눈이 완전히 감겼다. 간신히 달싹이며 말을 자아내던 입술이 미동도 하지 않았다.
“…….”
황제는 한동안 그 자세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자신의 품속에서 위태로운 숨결이 조금씩 잦아드는 것을 고스란히 느꼈다. 집요한 시선이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고 청에게 붙박였다. 한껏 동공이 조여든 눈동자에 햇살이 스며들어 금빛으로 보였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는 청을 안은 채 스르르 일어섰다. 여전히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피가 곳곳에 묻은 용포를 벗어 청을 감싸고, 서슴없이 창고 바깥으로 나아갔다.
쿵. 그의 등 뒤에서 묵직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 * *
“지 대장군은 평인이 맞습니다.”
수의가 담담하게 선언했다. 환자의 상태를 들여다보기 위해 살짝 들추었던 이불을 다시 덮었다. 황제의 침전을 차지하고 누운 환자는 환자라 부르기에도 미안한 지경이었다. 염을 하고 수의를 입혀 장례를 지내야 하지 않을까 싶은 몰골이었다.
황제가 그를 안아 든 채 걸어 나왔을 때, 그 자리의 모두가 청이 이미 죽었다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산 사람이 아니라 핏물에 푹 적신 시신을 안고 오는 줄 알았다. 그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 하지만 그는 놀랍게도 간신히 숨이 붙어 있었다.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숨이, 아주 가늘게.
하지만 청의 숨은 높은 확률로 얼마 못 가 도로 멎을 터였다. 운이 좋아 명이 계속 이어진다 하더라도 영영 깨어나지 못할지도 몰랐다. 최선을 다해 그를 보살폈지만, 도저히 낙관적인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부모도 가족도 주위 사람들도, 심지어 자신조차도 스스로 평인인 줄 알고 살아오셨을 겁니다. 미력하나마 의술을 공부한 제 의견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그럼?”
옆에서 나지막한 물음이 던져졌다.
“그가 유산했다고 진단한 건 그대잖아. 한데, 음인이 아니라고?”
황제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다음 말을 재촉했다. 화가 난 것인지, 조급한 것인지, 지루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덤덤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고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대장군께서는 음인의 형질을 어느 정도 가지고 태어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형질이 너무도 미약했던 탓에,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성장기를 거치며 누가 보아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평인으로 자라나셨을 테고요.”
수의는 침상에 누운 청을 흘긋 돌아보았다. 생기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는 새하얀 얼굴이 보였다. 숨을 쉬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청은 관직을 받기 전인 소년 시절부터 잘생긴 것으로 황도의 귀족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거기다 시서화(詩書畵)와 음률에 특출한 재능을 보이며 심지어 성격까지 서글서글하니 더욱 명성이 높았다. 황제의 오른팔이 되어 온갖 악명을 얻은 이후로는 가볍게 떠들어 대는 소문은 잦아들었지만, 그래도 열기 어린 시선들이 여전히 그의 뒤에 알게 모르게 따라붙었다.
뭇사람들이 보는 청은 나무랄 데 없이 준수한 평인 청년이었다. 얼굴은 해사하고 고운 편이었지만 키가 훤칠했고 골격도 탄탄하게 잘 잡혀 있었다. 음인으로 보일 만한 구석은 전혀 없었다.
“아주 드물게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 대부분은 자신에게 양인, 혹은 음인의 기질이 있다는 것도 모른 채 평생 평인으로 살다 죽습니다. 특히 이런 경우엔 더더욱 그렇습니다. 평인 사내가 같은 사내에게 안길 일이 얼마나 있겠사옵니까.”
수의는 애써 사무적인 어조를 유지하려 했다. 아무리 황제가 대장군을 총애하여 가까이 둔다지만, 그의 잠자리 사정까지 일일이 고해 바쳐야 하다니. 참으로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대장군께서는 아주 긴 세월에 걸쳐 양인의 여향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것으로 보이고 실제로 양인과 교합하기도 하였으니, 퇴화된 채로 체내에 남아 있던 음인으로서의 기질이 반응하였을 것입니다.”
청은 항상 황도의 아가씨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벼슬을 받은 후엔 일에만 몰두하여 금욕적인 생활을 했다지만, 그 전까지는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잡으며 적당히 자유분방하게 살았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사내 취향이었다니, 그것도 심지어 자신이 받는 쪽이었다니. 솔직히 말해 몹시 뜻밖이었다.
“정말로, 감히 말씀드리건대, 정말로 희박한 확률입니다. 평생토록 꾸준히 교합하여 씨를 받더라도 단 한 번도 일어나기 힘든…….”
“…….”
“그리고 대장군께서는 일반적인 음인들과는 달리 몸에 제대로 된 기반이 만들어져 있지 않기에, 태아를 품을 여건이 되지 않습니다. 만일 이대로 무사하셨더라도,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아 자연스레 유산되었겠지요.”
“어차피 죽었을 태아라고?”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황제는 피식 웃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고운 미소였지만, 입매 끄트머리가 스산하게 일그러졌다.
“용종(龍種)이다.”
수의는 처음에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짧은 정적이 흐른 후 그 말뜻을 깨닫는 순간, 머리가 새하얗게 비었다.
“폐, 폐하…….”
“내 아이였다는 말이다.”
황제는 억양 없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어느 순간부턴가 그의 입가에서 미소의 흔적이 사라졌다. 웃음기 없는 눈동자가 수의를 선득하게 내려다보았다.
청과 집요하게 교합하여 씨를 부어 넣은 끝에, 기어이 평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를 붙잡아 그에게 아이를 배게 한 것이 바로 자신이라고……. 황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백하고 있었다. 등골이 싸늘하게 식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덜덜 떨던 수의가 제자리에 무너지듯 무릎을 꿇었다. 바닥에 가슴팍이 닿도록 바짝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소, 송구합니다. 신이 실언을 했습니다.”
황제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낮아진 시야로 그가 뚜벅뚜벅 걸음을 옮기는 것이 보였다. 그는 바닥에 엎드린 수의의 곁을 지나쳐 무언가를 집었다. 철컥. 차갑고 단단한 금속의 소리가 났다. 장검이었다. 청이 머물던 전각에 피 묻은 채 버려져 있던 황실의 보검.
황제가 저 검을 뽑아 그녀를 벨 모양이었다. 지금껏 알아 온 그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중년을 훌쩍 넘어 노년으로 접어든 여인의 마른 등이 파들파들 경련했다.
“폐하! 이 늙은이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제가 노망이 나 사리분간을 못 하여, 감히 천부당만부당한 말을…… 헉!”
쿵! 바닥이 묵직하게 울렸다. 지레 놀란 수의가 몸을 크게 들썩였다. 황제가 검집째 검을 들어 바닥에 내리꽂은 것이다. 금을 씌워 유려한 문양을 새겨 넣은 검집의 끄트머리가 코앞에 보였다.
“뭘 그리 놀라……. 그대도 참, 나잇값을 못 하는군.”
장검을 세로로 세워 짚은 채, 황제는 낮은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도를 넘은 공포에 수의의 몸이 점점 더 심하게 떨렸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갑자기 황제의 웃음이 뚝 그쳤다.
“나가.”
짤막한 명이 떨어졌다. 한껏 웅크려 엎드린 채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수의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여기서 그대를 베면 침상에 피가 튈 텐데, 예락이 불쾌해하지 않겠나. 그렇지 않아도 피를 잔뜩 쏟아, 붉은 것만 보면 아주 진절머리가 날 테지.”
황제는 검을 들어 친히 문밖을 가리켰다. 수의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것은 황제의 마지막 자비였다. 황제를 어렸을 때부터 돌보았던, 그리고 그의 어머니를 최후까지 모셨던 자신에게 베푸는.
“성은, 성은이 망극…….”
그녀는 노쇠한 몸을 힘겹게 일으켰다. 감사 인사도 채 끝마치지 못하고 비틀대며 도망치듯 문밖으로 나갔다. 곧 침소 안에는 황제와 청, 단둘밖에 남지 않았다. 황제는 치켜들었던 검을 스르르 내리며 돌아보았다. 무감정한 시선이 침상에 누운 청을 향했다.
“일어나.”
한 손에 검을 든 채, 황제가 나직하게 명했다.
“이제껏 그대가 원하는 대로 실컷 자게 해 줬지 않은가. 이리 관용을 베풀었는데,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해.”
하지만 의식 없는 이가 그의 말에 반응할 리가 없었다. 청은 죽은 것인지 산 것인지 알 수 없는 모습으로 이불 속에 파묻혀 있을 뿐이었다.
“대체 얼마나 더…….”
혼잣말이 도중에 뚝 끊겼다. 황제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청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한참 동안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이대로 멈춰 버린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러던 어느 순간, 그는 표정을 싹 바꾸어 생긋 웃었다. 멈추었던 시간이 다시 흘렀다.
“정말이지 청이 네 고집은 못 이긴다니까.”
그리고 손에 든 검을 망설임 없이 뽑아 들었다. 검집이 바닥에 거칠게 팽개쳐졌다. 서슬 퍼런 진검의 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고집에 10년을 줄곧 져 왔는데, 나는 이번에도 네게 지는구나. 너는 내게 끝까지 무정하구나.”
그는 칼을 쥐고 청의 침상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면서.
“그래. 네가 바라는데 들어줘야지. 당연히 들어주어야겠지. 내가 네 소원 하나 못 들어줄까.”
황제는 청이 누운 침상 위로 몸을 기울이고 속삭였다. 꿀이 녹아 흐르는 듯 달콤한 음성이었으나 기묘한 살기가 느껴졌다. 침상에 누운 청의 위에 그늘이 드리웠다.
“이리도 죽고 싶어 하니, 죽여 줘야지.”
검이 허공으로 확 치켜 올라갔다. 황제는 망설이지 않았다. 검 손잡이를 단단히 고쳐 쥐고 아래로 내리꽂았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날카로운 칼끝이 은빛 궤적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푹.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칼날이 무른 표면을 뚫고 파고들었다.
손잡이에 힘을 주어 꽉 짓누르며, 황제는 덤덤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수직으로 내리꽂혀 저 깊숙이까지 박힌 검이 보였다. 비단 금침에 둘러싸여 누운 청의 뺨 바로 옆, 고개를 돌리면 바로 코가 베일 것 같은 자리에.
자신이 방금 칼날에 꿰뚫릴 뻔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청은 여전히 창백하고 평온한 낯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반드르르한 칼날에 그의 옆얼굴이 언뜻 비쳤다. 손잡이를 짚고 검을 지팡이 삼아 몸을 낮추었다.
“청아.”
나긋하게 청의 이름을 불렀다. 당연히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손을 뻗어 가만히 얼굴을 만져 보았다. 파리한 뺨을 부드럽게 쓸다가 한순간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빠드득 위태로운 소리가 나며 살이 허옇게 질렸다.
황제는 순간 청의 턱을 으깨고 목을 졸라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항상 그에게만 매몰차고 인색한 청이지만, 그리하면 마지막으로 내는 단말마의 비명 정도는 들려주지 않을까.
황제는 결국 이를 악물고 검을 도로 뽑아 들었다. 베개를 꿰뚫고 이불을 가르고 침상 아래까지 박혔던 칼날이 빠져나오며 처참한 흔적을 남겼다. 그는 곧 아무 미련도 없다는 듯 청에게서 몸을 돌렸다. 흉흉하게 날을 세운 진검을 움켜쥔 채, 청을 뒤로하고 저벅저벅 걸어 나갔다.
* * *
음습하고 퀴퀴한 지하에 쉴 새 없이 고통스러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이끼와 곰팡이가 한데 뒤엉켜 자라는 냄새, 피와 살이 썩어 문드러져 가는 냄새. 온갖 악취가 감옥 안을 메웠다.
중년의 남자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꼴이 되어 바닥을 뒹굴었다. 어의 강택서, 율 왕국의 왕족들을 담당하는 의원이자 이번 사절단의 일원이었다. 별 볼 일 없는 망국의 인질 신세였다가 회임한 황후의 신임을 얻어 급격하게 출세한 자이기도 했다.
“율의 9왕자는 어디에 있나.”
“모르…… 크헉, 모르옵니다.”
벌써 몇 번째 반복된 물음이었다. 황제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똑같은 어조로 똑같은 질문을 던졌고, 강 어의는 그때마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괴롭게 헐떡이면서도 꼬박꼬박 부정했다.
“이 일에 얼마나 관여했지? 어디까지 알고 있지?”
“아무것도…….”
황제는 짐짓 난처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이것도 모른다, 저것도 모른다. 그대는 대체 아는 게 뭔가?”
“헉, 저는 정말로, 모르는 일이옵니다. 왕자 전하의 행방을 일개 의원인 제가 어찌 알겠사옵니까.”
“그래?”
그는 턱을 살짝 젖히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간수가 가져다준 의자에 느슨하게 등을 기대고 앉은 채였다. 강 어의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억지로 삼켰다.
제국의 황제는 먼발치에서 보았을 때도 그러했지만 가까이서 대하니 더욱 위압적이었다. 단아하고 수려한 생김새가 무색하도록, 일거수일투족에서 상대를 찍어 누르는 듯한 오싹한 기운이 느껴졌다. 말투가 조곤조곤하니 부드러운 점이 오히려 더욱 섬뜩했다.
“계속 생각해 보게.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 고민하다 보면 무언가 떠오를지도 모르지.”
황제가 무심하게 명했다. 그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어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뒤에서 대기하던 병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 강 어의의 몸을 찍어 눌렀다. 이윽고 고문이 재개되었다. 아까보다 한층 혹독해졌다.
병사들은 강 어의의 목숨을 붙여 둔 채로 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고통을 가했다. 살갗을 얇게 벗겨 낸 자리에 소금물을 끼얹었다. 손가락과 발가락을 큰 돌 사이에 끼우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 쿵쿵 찧어 짓이겼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끔찍한 일이 연거푸 벌어졌다.
“흐악, 악, 으아악!”
황제는 서툰 광대의 놀이판을 구경하듯 권태로워하는 무표정으로 그 광경을 주시했다. 버러지 같은 것이 피와 진물을 질질 흘리며 바닥을 뒹구는 모습 따위, 따분하기 짝이 없었다. 긴긴 잠에 빠진 청을 지켜보는 것이 훨씬 흥미로웠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온몸이 참혹하게 으깨어진 강 어의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차…… 차라리…….”
적국의 황제에게 결코 머리를 숙이지 않겠다는 각오는 어디로 가고, 차라리 죽여 달라는 애원이 절로 나왔다.
“차라리.”
황제는 그의 말을 나긋하게 되풀이했다.
“제……. 허억, 제발.”
“제발?”
강 어의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황제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지루하던 차에 입을 열어 주니 마침 잘되었다는 듯.
그는 깨달았다. 9왕자의 행방을 털어놓느냐 마느냐와 관계없이, 애초에 황제는 고문을 멈춰 줄 생각 따윈 없었다. 그를 곱게 죽여 줄 생각 또한 없었다. 황제에게는 이 모든 과정이 화풀이이자 심심풀이였다. 절망으로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동시에 단전에서부터 참을 수 없는 살의가 끓어올랐다.
“어찌 사람의 탈을 쓰고 이리 극악무도할 수가 있는가.”
그는 증오 어린 눈으로 황제를 노려보았다. 위에서 병사들이 가차 없이 찍어 누르는데도 꿋꿋이 고개를 쳐들었다. 어차피 죽은 목숨, 적에게 구차하게 자비를 구걸하고 싶지 않았다.
“야만족의 더러운 피가 섞인 탓에 성정마저 야만스럽기 짝이 없구나. 산과 들에 사는 짐승도 네놈보다는 도리를 알 것이다.”
폭언이 쏟아졌다. 황제는 여전히 심드렁해하는 낯으로 앉아 있는데, 오히려 그를 구속하고 있던 병사들이 격노했다.
“정신이 나갔군. 어느 안전이라고 불경하게.”
“당장 혓바닥을 뽑고 주둥아리를 지져 주마!”
강 어의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남은 힘을 쥐어짜 저주를 토해 놓았다.
“사이좋게 지옥에 떨어져라. 네놈도, 네놈의 앞잡이 지예락도!”
“아.”
가만히 듣고만 있던 황제가 짧은 탄성을 흘렸다. 곧 그의 얼굴에 만개한 꽃처럼 화사한 미소가 사르르 번졌다. 그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눈매가 곱게 휘어지고, 연하게 탄 찻물 색깔의 눈동자에 부드러운 온기가 어렸다.
상대를 조롱하기 위한 비웃음이 아니었다. 정말로 흐뭇하고 흡족한 마음에 나온 웃음이었다. 그것을 인지한 순간, 강 어의의 숨이 턱 막혔다. 도를 넘은 공포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것도 괜찮겠군.”
한참을 홀로 웃던 황제가 짤막하게 감상을 표했다. 강 어의는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새파랗게 질린 낯으로 온몸을 덜덜 떨 뿐이었다.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닥에 엎어져 있던 강 어의를 퍽 걷어차 그의 몸을 뒤집었다. 죽은 개구리를 발로 밀어 치우듯 가차 없는 행동이었다.
“9왕자의 행방을 그대가 모르면 누가 알지? 그래……. 설영은 알까?”
“헉!”
강 어의가 경악하여 크게 꿈틀했다. 이 모든 것은 황제의 폭정에 반기를 든 율의 사절단이 자발적으로 벌인 일이어야 했다. 황후에게는, 황제의 아이를 낳고 황제의 반려로서 평생을 살아갈 그에게는, 무슨 일이 있어도 불똥이 튀어선 안 되었다.
“아니, 황후 전하는, 그분께서는, 맹세코 아무것도……!”
강 어의가 황제를 향해 팔을 뻗으며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은은한 광택이 흐르는 비단 옷자락 끝에 오물투성이 손이 닿으려는 순간, 옆에 있던 병사가 재빨리 칼을 들었다. 타국의 역적 따위가 황제를 해하려 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콰득. 살과 뼈를 으깨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났다. 황제의 신발과 옷자락에 더운 피가 확 뿌려졌다. 그러나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율 왕국에, 그리고 9왕자와 황후에게 목숨 바쳐 충성한 이의 최후는 고요했다.
* * *
욕탕에서부터 침전으로 이어지는 문이 열렸다. 두꺼운 창호지를 바르고 붉은색과 금색 칠을 한 나무 문 너머로부터 더운 습기가 밀려 나왔다. 황제가 문지방을 넘어 들어왔다. 얇은 욕의 한 벌만 걸친 차림이었다. 전신에서 진동하던 피비린내는 흔적도 없이 말끔하게 씻겼다.
그는 느긋하게 방을 가로질렀다. 자신의 영역을 살피는 맹수처럼 결코 서두르지 않는 걸음이었다. 길게 늘어진 머리칼이 물기를 머금어 짙은 갈색으로 보였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 드문드문 물방울이 떨어졌다. 물 자국은 침상으로 곧장 이어졌다. 황제는 물 흐르듯 자연스레 침상에 올랐다.
“청아, 내가 없는 동안 혼자서 잘 있었어?”
가지런히 덮인 비단 금침 아래에 누군가 누워 있었다. 황제는 그의 위로 서서히 상체를 기울였다. 가만히 눈을 감은 청의 얼굴에 아무 표정 없는 황제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코끝이 닿을 듯 말 듯 한 간격까지.
그는 소름 끼치게 무표정한 낯으로,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그대로 머물렀다. 샛노란 시선이 청의 이목구비를 집요하게 훑어보았다. 잠시 후 황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청에게서는 침전을 나서기 전 손수 듬뿍 묻혀 놓은 여향 외에 다른 향은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이 없는 동안 그 누구도 허락 없이 청에게 손대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 얌전히 잘 있었던 모양이야.”
황제는 그의 얼굴을 찬찬히 어루만졌다. 근래에 몸이 너무도 많이 축나서, 갸름한 얼굴이 황제의 한 손 안에 다 들어올 듯했다.
“이리 오래 자고도 아직도 더 자고 싶은 게야? 이제 곧 겨울도 끝이거늘, 잠만 자다가 봄을 맞겠어.”
청의 뺨에 툭, 물방울이 하나 떨어졌다. 황제의 젖은 머리칼에서 흐른 것이었다. 무심코 손을 뻗어 엄지로 물방울을 슥 훔쳐 냈다.
“내 청이는 잠도 많지…….”
황제는 스스로 옷고름을 풀었다. 딱 한 겹 걸치고 있던 얇은 욕의가 스륵 흘러내려 허물처럼 떨어졌다. 탄탄한 근육이 잡힌 맨등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살결이 대리석처럼 흰 가운데, 어깻죽지 뒤쪽에 새겨진 붉은 반점이 눈에 띄었다. 설원 한복판에서 타오르는 불처럼 선명하고 이질적이었다.
맨몸이 된 황제는 청이 덮고 있던 이불을 들추고 파고들었다. 길게 기지개를 펴는 범 같은, 혹은 담장을 넘는 구렁이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는 청의 위에 올라타 창백한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귓불을 가볍게 물었다 놓고 목에 고개를 파묻기도 했다.
얼핏 보기에는 한 이불 속에서 몸을 겹치고 야릇한 밀회를 즐기는 정인들 같은 모습이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둘 중 한 명은 움직이지도, 눈을 뜨지도, 말을 하지도 않는 상태라는 것이었다. 그 차이점 하나로 애틋하기는커녕 기괴하고 섬뜩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 되었다.
“지청, 청아.”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마치 청이 깨어서 그의 말을 듣고 있기라도 한 듯. 의식이 없는 이에게 중얼중얼 말을 거는 모습이 마치 시체를 상대로 대화하는 것 같았다. 청의 뺨을 쓰다듬고 귀밑머리를 쓸어 넘겨 주던 손이 스르르 아래로 내려왔다. 손끝으로 목의 여린 살갗 위를 가볍게 덧그리다가, 어느 순간 목덜미를 콱 움켜쥐었다.
“같이 죽을까?”
황제가 가만히 중얼거렸다. 대수롭지 않은 일을 권유하는 것처럼, 몹시도 태연한 어조였다.
“응? 왜 답이 없어. 그리도 서운했던 게야? 내게 대꾸 한 마디 해 주는 것마저 꺼려질 만큼.”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청의 흰 얼굴이 더욱 허여멀겋게 질리고 숨이 뚝 멈추었다. 그는 용서해 달라 애원하지도, 잘못했다고 울며 사죄하지도 않았다. 손안에서 느리게 뛰던 약한 맥박이 조금씩 희미해져 갔다. 황제는 무심히 손을 놓았다. 청의 머리가 베개 위에 도로 툭 떨어졌다. 목에 벌겋게 손자국이 남았다.
“내가 그간 널 어지간히도 서운하게 한 게로구나. 힘들게 내 애를 뱄는데 알아주질 않으니, 잔뜩 토라져서 황궁 밖 먼 곳으로 달아난 게지? 그러고도 마음이 풀리질 않아서 내게 잠든 얼굴만 보여 주는 것이고.”
그는 청의 뺨에 자신의 뺨을 맞대고 횡설수설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내겐 나쁜 피가 흘러서, 나쁜 생각밖에 하질 못해. 네가 말한 사랑이라는 것도 나는 잘 알지 못해서……. 하지만 청아, 내겐 너뿐이라는 걸 알잖아.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을 다 가졌어도, 네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란 걸 알잖아.”
청의 고개가 힘없이 꺾였다. 자꾸만 축 늘어지는 몸을 단단히 추슬러 안았다.
“그래서, 네가 자는 동안 네 화를 풀 방도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어. 내가 너와 함께 죽으면…… 그러면 네 화가 풀릴까?”
물음을 던지고, 황제는 가만히 청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그것밖에는 달리 방도가 없을 것 같구나.”
살아서 이렇게 엇갈릴 바에 차라리 청과 함께 죽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러면 적어도 청의 숨이 언제 끊어질지 몰라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될 테니. 문득 망국의 어의가 죽어 가며 토한 저주가 떠올랐다. 청과 사이좋게 지옥에 떨어지라니. 이보다 더한 덕담은 없었다. 어차피 그에겐 지금껏 살아온 모든 날이 지옥이었다.
“네가 내게 약조하였지. 봄이 오면, 물가에 벚꽃이 만발하면 뱃놀이를 가자고.”
그는 청의 베갯머리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고이 쓸어 넘겼다. 드러난 눈가에 입을 맞추고 배시시 웃었다.
“네가 깨어나기 전까진 봄이 오지 않을 거야. 궁의 꽃이란 꽃은 모조리 뿌리째 뽑아 버렸거든…….”
슬슬 겨울이 물러가고 있었다. 호수에 두껍게 언 얼음이 깨어져 물길이 나고, 날이 한결 풀렸다. 나뭇가지에는 벌써 듬성듬성 새순이 돋기도 했다.
그러나 그 어느 곳에도 꽃봉오리는 보이지 않았다. 눈에 띄는 모든 화초를 뽑고 꽃나무를 베어 황궁의 봄을 뒤로 미룬 탓이다. 청이 깨어나지 않는 한, 아무리 많은 나날이 흐르더라도 궁에는 영영 꽃이 필 일이 없을 터였다.
황제는 양손으로 청의 뺨을 감싸고 고개를 틀어 입을 맞추었다. 맞닿은 입술이 버석하게 말라 있었다. 입천장과 혓바닥을 질척하게 훑어가며 미동도 없이 잠잠한 입 안을 헤집었다.
청이 입은 침의를 활짝 벌리고 훤히 드러난 몸에 입술을 묻었다. 살이 빠져 툭 불거진 쇄골을 진득하게 핥았다. 귀걸이가 뜯겨 나간 상처가 덜 아문 유두도 빨았다. 연한 빛깔의 젖꼭지를 쪽쪽 빨자 얼핏 피 맛이 났다.
마른 가슴팍을 지나 판판한 배로 내려왔다. 한때나마 황제의 씨를 품고 있었던 곳이었다. 비록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아주 작은 태아였을지언정, 청과 황제의 아이였다. 옆구리를 살짝 깨물고 골반을 입술로 문지르며, 황제는 문득 생각해 보았다. 배 속의 아이가 무사히 자라 태어났다면 어떠했을지를.
그는 이제껏 후사를 바랐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일국의 황제이니 수많은 비빈을 들여 황손을 잔뜩 생산하는 것이 의무이거늘, 자신의 씨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청의 피가 절반 섞인 아이라면 하나쯤은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돌보는 거야 비어 있는 궁에 적당히 넣어 두고 아랫사람들을 시키면 될 것이고. 청은 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한 성격이라, 아이가 있으면 아무리 싫어도 그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모두 소용없는 이야기였다. 청도 황제도 형태도 갖추지 못한 채 명을 달리한 아이도, 저승에서나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황제는 마침내 청의 사타구니에 이르렀다. 양 허벅지를 잡아 한껏 벌렸다. 마른 다리가 맥없이 벌어졌다. 그는 발기하지 않은 성기를 떡 주무르듯 주무르며 입에 물었다. 부드러운 귀두를 잔뜩 핥아 주었다. 말랑말랑한 요도 구멍을 혀끝으로 꾹꾹 눌러 쑤셨다. 음낭이 척척하게 젖도록 빨다가, 기둥 전체를 입 안에서 굴렸다.
고요한 방에 성기를 게걸스레 빠는 소리가 울렸다. 황제가 한껏 풀어 놓은 여향이 가득 퍼졌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향에 짓눌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였다.
기껏 벌려 놓은 것이 무색하게도 힘이 들어가지 않는 청의 다리가 다시 스르르 흘러내렸다. 결국 황제는 청의 종아리 한쪽을 자신의 어깨에 걸쳐 고정했다. 그 상태로 애무에 열중했다.
진득하게 핥아 댄 끝에 말간 귀두에 벌겋게 피가 몰렸지만 청은 기어이 발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청의 온몸을 물고 빨면서 황제는 흥분했다. 아니, 흥분이라 말하기에 모자랐다. 그는 발정하고 있었다.
황제는 상체를 슬쩍 일으켰다. 어깨에 걸쳐진 청의 다리가 딸려 올라가며 몸이 위로 들렸다. 아래로 늘어진 성기와 어설피 벌어진 가랑이가 낱낱이 드러났다. 그가 직접 찍은 낙인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번엔 엉덩이 사이로 드러난 구멍에 혀를 묻었다. 손아귀 가득 엉덩이 살을 쥐고 잡아 벌리자 구멍이 힘겹게 벌어졌다. 뻑뻑하게 말라 있는 곳에 혀를 쑤셔 넣고 내벽을 적셨다. 집요하게 안을 핥아 대자 희미하게나마 찌걱찌걱 소리가 났다.
황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아래에 깔린 청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무방비하게 늘어진 사지와 세상모르고 잠든 얼굴을 눈에 담았다.
“네가 내게 이리 고분고분했던 적이 있었던가.”
청은 그의 아래에서 항상 괴로워했다. 뭘 어떻게 해도 아파하고 두려워하니, 좋다는 소리 한 번을 듣기가 몹시도 어려웠다. 심지어 잠들어 있을 때 성기를 처박아도 이리저리 몸을 뒤채고 끙끙대며 앓았다. 그가 잠자리에서 이리 얌전하게 따랐던 적은 아무리 기억을 뒤져 보아도 없었다.
하지만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역시 청은 울고불고 비명을 지르고 몸부림치고 피와 타액과 정액을 질질 흘리는 게 더 예뻤다.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면서도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제발, 제발, 하며 애원하는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엉덩이를 띄워 올리고 검지와 중지로 구멍을 몇 번 쑤셨다. 그새 제법 풀린 구멍이 손가락을 찔꺽찔꺽 잘도 받아먹었다. 의식이 없으니 근육이 이완되어 몸이 쉽게 열렸다.
황제는 아래를 빤히 내려다보며 성기를 들이밀었다. 흠뻑 젖은 입구에 귀두가 맞물렸다가, 이윽고 압력에 못 이겨 벌건 속살을 벌리며 꾸역꾸역 밀려 들어갔다. 굵고 곧게 뻗은 기둥이 조금씩 내벽을 메웠다. 그는 그 과정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읏…….”
짤막한 신음을 삼켰다. 퍽퍽 치댈 때마다 청의 발끝이 황제의 어깨 너머에서 무력하게 흔들렸다. 젖은 머리카락 끝에 맺힌 물방울이 청의 얼굴과 몸에 간헐적으로 떨어졌다.
기괴하고 일방적인 정사가 이어졌다. 청은 망가진 인형처럼 황제가 흔드는 대로 흔들렸고, 황제는 의식 없는 이의 내장에 성기를 쑤셔 넣으며 흥분했다. 시체를 범하는 것만큼이나,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그보다 더 소름 끼치는 광경이었다.
청을 침상에 짓눌러 버릴 기세로 위에서부터 쑤셔 넣다가, 어느 순간 그의 엉덩이를 한 팔로 받치고 번쩍 안아 올렸다. 청의 몸이 황제의 품에 툭 기울어 쓰러졌다. 황제가 곱게 빗어 놓았던 머리칼이 마구잡이로 흐트러졌다.
그는 그대로 침상 옆의 벽에 청의 등을 밀어붙였다. 쿵. 둔탁한 소리가 났다. 청은 황제와 벽 사이에 끼어 허공에 뜬 처지가 되었다. 물먹은 솜처럼 축축 늘어지는 허벅지를 움켜쥐어 허리에 억지로 감게 하고 다시금 성기를 쳐올렸다. 턱, 턱, 턱.
“흐, 읏, 하아……. 청아.”
뺨을 살포시 붉힌 황제가 달콤하게 속삭였다. 자신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아무런 대답이 없는 청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강제로 고개를 들게 했다. 고개가 젖혀져 울긋불긋하게 얼룩진 목이 훤히 드러났다.
성욕인지 식욕인지 모를 것이 돌았다. 참을 수 없었다. 황제는 이를 세워 목덜미를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콰득. 생살 씹히는 소리가 적나라했다. 목이 졸린 자국 위에 뻘겋게 잇자국이 추가되었다.
수없이 벽에 몰아붙여진 청의 등이 발갛게 물들었다. 황제는 성기를 빼지 않은 채로 청의 몸을 확 돌려 다시 침상에 찍어 눌렀다. 벽에 어설프게 떠 있던 몸이 침상에 내동댕이쳐지며, 그 충격으로 반쯤 물려 있던 성기가 쭉 파고들어 와 내벽 저 깊숙이 꽂혔다.
푹신한 이불 위에서 새카만 머리칼과 물기를 흠뻑 머금은 다갈색 머리칼이 얽혔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열기가 뒤섞였다. 꾹 힘주어 박을 때마다 따뜻하고 습한 속살이 성기를 빠듯하게 거머쥐었다.
다리를 허리에 감게 한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황제는 이부자리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청의 팔을 잡아 올렸다. 손목이 힘없이 툭 꺾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고분고분 딸려 오는 팔을 자신의 목에 두르고, 코앞에서 청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헉…… 하아.”
황제의 젖은 입술 사이로 달뜬 숨결이 새어 나왔다. 청을 깔아 누르다시피 한 채로 성기를 퍽퍽 박아 넣는 허벅지와 엉덩이에 근육의 윤곽이 잡혔다. 등줄기가 탄탄하게 긴장했다. 사정의 전조였다.
들썩들썩 흔들리던 청의 뺨에 황제의 머리카락에서 흐른 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서슴없이 닦아 냈다. 이번엔 이마에 한 방울이 또 떨어졌다. 또 닦아 냈다. 그리고 다시, 뺨에 한 방울. 이번에는 아까와 달리 미적지근했다. 욕탕 바깥의 공기에 차갑게 식어 버린 머리칼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
황제는 아주 잠깐 멈추었다. 절정 직전의 쾌락으로 양 뺨에 홍조가 오르고 입매가 단단히 굳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아무런 감정 없는 메마른 시선이 오싹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속눈썹 끝에 미처 떨어지지 못한 물기의 잔재가 아주 작게 맺혀 있었다. 비 오는 날 처마 끝에 맺힌 빗방울처럼. 그는 가만히 청의 뺨을 쓸어 물방울을 닦아 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 절정이 찾아왔다. 황제는 내벽을 가르고 들쑥날쑥 움직이던 성기를 어느 순간 확 뽑아냈다. 정액이 후두둑 튀어 청의 위에 뿌려졌다. 가슴팍에, 배에, 성기와 사타구니에 떨어진 희끄무레한 정액이 맨살을 타고 질질 흘러 이불을 적셨다.
도착적인 정사가 끝났다. 황제는 이를 악문 채 천천히 숨을 골랐다. 청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 * *
꽃이 피지 않는 봄이 지나갔다. 그리고 뙤약볕이 내리쬐는 여름이 찾아왔다.
달수가 찰수록 황후의 배가 점점 불러 왔다. 이제는 만삭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첫 회임인 데다 원체 몸이 약해서 온갖 고생을 다 했는데도, 불행인지 다행인지 배 속의 아이는 주위 사람들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 착실히 자랐다. 그가 시종들의 도움 없이 혼자서는 걷는 것도 힘들어졌을 무렵, 병사들의 추격을 따돌려 가며 국경 근처까지 도망쳤던 9왕자가 드디어 잡혔다.
운의전이 도저히 손쓸 수 없이 새카맣게 타 버린 이후, 황후는 다른 궁으로 옮겨 생활하고 있었다. 어차피 황궁에 빈 궁이야 셀 수 없이 많았으니 개중 마음에 드는 곳을 고르기만 하면 되었다.
수많은 미인들을 옆에 끼고 주지육림(酒池肉林)을 즐겼던 선황에 비해 지금의 황제는 거느린 비빈의 수가 현저히 적었다. 거의 없다 해도 무방할 수준이었다. 그 몇 없는 이들조차도 정치적 계산에 의해 들인 것이 명백한 자들뿐이었다. 심지어 황제는 그들의 존재조차 까맣게 잊은 듯 적당한 궁을 내주고는 한참을 방치했다. 아마 그들은 황제보다도 금군 대장군의 얼굴을 더 많이 보고 그와 더 많은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애초에 시종이나 내관, 호위 무사 따위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사내를 보기 힘든 환경이었다. 게다가 지아비인 황제는 냉담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니 그들이 신변잡기를 일일이 챙겨 주며 자상하게 구는 대장군에게 묘한 호감을 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한때 황후가 그러했듯이.
내명부 사정이 이 지경이니, 황제가 즉위한 지 몇 해가 되었어도 황손이 탄생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황후가 보란 듯이 회임하였다. 이로써 황제가 진정으로 총애하는 것은 황후뿐이라는 설이 공고해졌다.
아무 예고도 없이 황후궁의 문이 벌컥 열렸다. 수십 명의 궁인들이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황후의 출산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라 모두가 극히 예민해져 있었다. 다짜고짜 황후가 머무는 처소의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황제였다. 황궁의 어디든 허락 없이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자 제국의 주인. 깜짝 놀란 이들이 바닥에 엎드려 이마를 조아렸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길이 평안을 누리소서!”
“황후는?”
“이제 막 오수에서 깨어나셨사옵니다. 지금은 침전에서 차를 들고 계시온데…….”
때마침 황후가 문을 열고 나왔다. 겹겹이 차려입은 화려한 비단옷으로도 크게 부푼 배를 가릴 수 없었다. 그는 시종의 부축을 받으며 한 발 한 발 힘겹게 걸음을 떼다가, 황제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폐하? 어찌 기별도 없이.”
황제는 그의 뒷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는 한 손에 무언가를 움켜쥐어 질질 끌고 있었다. 제법 크고 무거워 보였다. 처음에는 낡고 더러운 가죽 자루인가 싶었다. 황제가 황후궁에 왜 이런 것을 손수 가져왔을까 어리둥절하던 차에…….
“악!”
시종 하나가 반사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질질 끌려온 자리를 따라 지저분하게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가죽 자루인 줄 알았던 것은 사람이었다. 쓰레기 같은 넝마를 걸치고 먼지와 피로 전신이 얼룩진, 팔다리가 모두 잘려 나가고 없는 사람.
“우욱…….”
황후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는 옷소매로 입을 가리며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궁인들이 경악에 빠져 술렁이는 와중에도 재빨리 그를 부축했다. 황제는 멱살을 쥐어 잡아끌고 온 이를 황후의 발치에 내던졌다. 풀썩. 피비린내와 오물 썩는 냄새를 비롯하여 온갖 악취가 진동했다. 사방에서 황급하게 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폐, 폐하, 이게, 대체 무슨.”
“설영, 반갑게 인사해 줘야지?”
황제가 사르르 웃으며 턱짓했다. 그의 손 또한 검붉은 피 얼룩이 덕지덕지 묻어 엉망이었다.
“오랜만에 하는 형제 상봉이니.”
“네……?”
황후가 넋이 나간 채 대꾸했다. 황제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그의 고개가 아래로 삐걱삐걱 내려갔다. 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는 끔찍한 몰골로 바닥에 뒹구는 이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더러운 것이 덕지덕지 묻어 굳어 버린 머리카락 사이로 얼핏 얼굴이 보였다. 생김새가 낯익었다.
“형님…….”
황후는 그를 알아보았다. 황제의 감시를 피해 몰래 청을 살해하고 돌아오겠다던, 그 이후로 줄곧 행방이 묘연하던 자신의 형이었다.
“자아, 어서. 혈육 간의 회포를 풀라고 친절히 데려다주기까지 했는데, 어찌하여 그리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해.”
황제가 의아하다는 듯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여름이라 하나로 간소하게 묶기만 한 다갈색 머리채가 스륵 흘러내렸다. 그는 손을 들어 건성으로 머리칼을 넘겼다. 그의 뺨과 머리카락에 드문드문 피가 묻었다.
“차라도 한잔 마실 텐가? 그대의 고국은 찻잎으로 유명했지 않나. 두 사람에겐 좋은 추억거리가 될 테지. 아, 팔이 없어서 차를 못 마시나?”
“형, 님……. 윽!”
황후가 비틀거리며 한 발짝 내디뎠다. 그 순간 갑자기 배를 쥐어짜고 뒤트는 통증이 찾아왔다. 그의 몸이 제자리에 푹 고꾸라졌다. 다른 이들이 양옆에서 다급하게 그를 받쳤지만, 바닥에 쓰러져 나뒹구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흐으, 배가, 아, 윽…… 아아악!”
“마마, 괜찮으시옵니까? 마마!”
순식간에 궁 안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방에서 다급한 외침이 오갔다. 낯빛이 허옇게 뜬 궁인들이 식은땀을 흘리며 달려갔다. 바닥에 팽개쳐진 9왕자의 몸뚱이도, 그리고 심지어는 황제마저도 한순간 사람들의 이목에서 빗겨 갔다.
“파수(破水) 하셨습니다. 예정일은 한 달도 더 남았을진대 어찌하여…….”
“마마를 산실로 옮겨야 하옵니까?”
“아니, 그럴 시간이 없다. 산파를 여기로 불러!”
“마른 수건이 더 필요합니다!”
“마마,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제 말 들리시옵니까?”
“악…… 너무 아파, 윽, 흐악!”
그 가운데 황제만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물살을 거슬러 우뚝 솟은 바위처럼. 그는 느긋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모든 상황이 우스꽝스러운 연극처럼 느껴졌다.
황후의 진통은 꼬박 만 하루 동안 이어졌다. 지독한 난산이었다. 아무리 음인이라도 애초에 사내의 몸인지라, 모든 출산 과정이 여인보다 몇 배는 위험하고 고통스러웠다. 혹시라도 황후가 잘못될까 봐, 황궁의 태의란 태의들이 죄다 불려 와 그를 보살폈다.
9왕자는 소리 소문 없이 치워졌다. 사지가 없어 거동을 하지 못하고 버르적대는 그를 병사들이 어디론가 데려갔다. 바닥에 묻은 오물과 피를 닦아 내자 황후궁 안은 언제 그런 끔찍한 일이 있었냐는 듯 말끔해졌다.
황후궁 위로 새빨갛게 노을이 지고 밤이 찾아들었다. 여전히 아이는 태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이 밝고 낮이 되었다. 눈부신 햇빛이 처마 아래 선명한 그늘을 드리울 무렵, 갓난아이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황후궁 안을 메웠다.
“아이……. 아이는?”
황후가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고개만 돌려 아이부터 찾았다. 오랜 산고에 시달려 안색이 초췌하고 온몸이 식은땀으로 푹 젖었다. 도톰한 비단 강보에 싼 아이를 들여다보며 상태를 확인하던 유모가 빙긋 웃었다.
“경하드리옵니다, 마마. 건강한 황자님이 탄생하셨습니다.”
황후는 절박하게 팔을 뻗었다. 유모는 그의 품에 아이를 조심스레 안겨 주었다. 허겁지겁 강보 안을 들여다보았다. 꼬물대는 갓난아이가 그 안에 싸여 있었다. 연약한 황후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토실토실하고 튼튼한 아기였다. 황제의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황제가 비빈과의 사이에서 처음으로 본 황자였다. 큰 탈이 없다면 황태자로 책봉되어 제국의 다음 황제가 될 터였다. 이 아이가 그의 생존을 보장하고 무한한 부와 권력을 가져다주리라.
아이의 눈동자가 짙은 갈색이라고 유모가 확인해 주었다. 머리카락은 아마 갈색과 검은색 사이 어디쯤이지 않을까. 갈색 머리라면 황제를 닮은 것이고, 검은 머리라면 황후를 닮은 것이라 하면 될 테니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아이의 생김새 그 어디에도 출생의 정당성을 의심할 만한 구석은 없었다.
9왕자를 보고 크게 놀라 쓰러져 진통이 온 것 또한 요행이었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해산 예정일과 실제 날짜가 다소 맞지 않아, 혹시 의심받으면 어쩌나 하고 하루하루 마음 졸이던 와중이었다. 충격을 받아 조산한 것이라는 좋은 해명거리가 생겼다.
머리를 굴려 모든 경우의 수를 따져 본 황후는 저도 모르게 안심했다. 그리고 바로 그다음 순간 자괴감을 느꼈다. 갓 태어난 자신의 아이를 보며 정치적인 계산부터 했다는 사실에, 친형제의 비참한 최후마저 철저히 이용했다는 사실에.
하지만 돌이키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 버렸다. 황후는 눈을 질끈 감아 아이를 외면했다.
* * *
간만의 경사에 황궁 전체가 들썩였다. 빠르게 소문이 퍼져 나갔다. 수많은 이들에게서 축하 인사와 선물이 들어왔다. 황후의 몸조리를 핑계로 방문객을 모두 거절하였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수없이 드나드는 이들로 황후궁 문턱이 닳아 없어질 지경이었다.
황후가 어느 정도 몸을 추스르고 안정을 찾았을 때쯤, 황제가 그의 궁을 찾았다. 때마침 황후는 갓 태어난 황자와 함께 있었다. 머리맡에 아이를 뉘어 놓고 토닥이던 황후가 황제를 발견하고 다급하게 일어나려 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길이 평안을…….”
“되었소. 앉게. 몸도 성치 않은 사람이.”
“성, 성은이…… 망극합니다.”
별것 없는 일상적인 대화일 뿐인데, 고작 말 몇 마디 섞은 것만으로 무서워졌다. 황후는 황제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떨리는 손을 등 뒤로 슬쩍 숨겼다.
이제 그는 별 볼 일 없는 망국의 빈털터리 왕족이 아니었다. 황손을, 그것도 장차 황태자로 책봉될 황자를 낳은 몸이었다. 설령 9왕자가 청을 죽이려 했던 사건에 황후가 연루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 한들, 황제는 그를 함부로 어찌할 수 없었다. 황자의 탄생이 주는 권력은 그만큼 컸다.
그에겐 충분히 당당해질 자격이 있었다. 그런데도 오랜 시간 동안 고수해 왔던 의기소침한 태도를 버리기 쉽지 않았다.
“태의의 말로는 황자가 아주 건강하다 합니다. 달수를 다 못 채우고 나온 아이인데도 다행히 아픈 곳 없이 무사하고요.”
황제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친자식을 보는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강보에 싸인 아이를 한 번 훑었을 뿐이었다. 제풀에 초조해진 황후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이리도 튼튼하고 발육이 빠르니, 역시 폐하의 핏줄답습니다.”
개월 수에 비해 황자의 몸집이 큰 것을 얼버무리기 위한 변명이었다. 그 위에 아이가 무사히 태어난 것을 기뻐하는 부모의 가면을 덮어씌웠다.
“그렇군.”
황제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는 쉬라는 말을 짧게 남기고 자리를 뜨려 했다.
열 달 동안 갖은 고생을 해 가며 목숨을 걸고 아이를 낳았는데, 황제의 진심 어린 애정까지는 아니더라도 형식적인 총애나마 받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정작 황제는 너무도 심드렁한 태도를 보였다.
그 순간 속이 확 뒤집혔다. 줄곧 공포심 밑에 꾹꾹 억눌려 있던 증오가 일거에 터져 나왔다.
“폐하, 제국의 황자이기 이전에 폐하의 아들입니다.”
항상 황제의 앞에서 초식 동물처럼 움츠러들어 있기만 하던 황후의 음성에 처음으로 울분이 섞였다. 뒤돌아 방을 나서려던 황제가 그 자리에 가만히 멈춰 섰다.
만약 청이 평인이 아니라 음인이어서 황제의 아이를 낳았다면, 그때도 황제는 이렇게 반응했을까? 아니, 결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이 정도로 비참하게 그를 등한시하지는 않았으리라. 거기까지 생각하자 더욱 화가 치밀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어찌 한 번도, 단 한 번도 안아 보질 않으십니까. 천신만고 끝에 태어난 귀한 자식인데, 어찌 이름조차 지어 주지 않고 그냥 가 버리려 하십니까!”
황제는 여전히 등을 보인 채 요지부동이었다. 조마조마한 정적이 흘렀다. 황후가 이를 악물고 말을 이었다.
“전, 그래도 폐하께서…….”
전에도 한 번 하려던 말이었다. 왜 자신을 황후로 맞아들였느냐고 물으러 황제의 집무실까지 찾아갔던 때에. 그때는 황제가 두렵고 목숨이 아까워 턱 끝까지 차오른 물음을 억지로 삼켰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그는 이미 한계까지 몰렸다. 애틋한 연정과 간절한 소망이 사라진 자리에 악만 남았다.
“겉으로는 다소 차가워 보이실지언정 내면만큼은 순수하고 고결하신 분일 거라 믿었습니다.”
이윽고 황제가 스르르 돌아보았다. 황후는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린 채 황제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가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하지만, 역시 어미의 천한 핏줄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군요.”
황제는 완전히 몸을 돌려 황후를 마주 보고 섰다. 인간 같지 않게 무감정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예락에겐 왜 그랬어.”
모욕적인 말에 반응하는 대신,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졌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자식을 그리 소중히 여기는 이가, 어째서 예락이 품은 아이는 쉽게 죽였지?”
“무슨 말씀이신지 전 모르겠습니다.”
“왜 모른 체를 하시오. 그대가 직접 시킨 일이지 않나. 그대의 형에게.”
“…….”
“그대의 형 또한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발뺌을 하였지. 팔다리를 하나씩 자르며 물어보았더니 나중에는 친절하게도 죄다 털어놓더군. 설영 그대가 처음으로 제안했고, 탁주백 홍원익이 힘을 빌려주었고, 자신이 실행에 옮겼다고.”
황제가 억양 없는 목소리로 사건의 전말을 읊었다. 황후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발뺌하기엔 이미 늦었음을 직감했다. 대신 오기로 바락바락 언성을 높였다.
“그, 그렇다고……. 고작 그런 일로, 저를 내치기라도 하시겠습니까? 제국의 황후이자 황자를 낳은 절. 전 직접 그를 해치지 않았습니다. 기껏해야 말 몇 마디 흘린 것뿐입니다!”
“그때 예락은 내 아이를 품고 있었소. 황자였는지 황녀였는지, 잉태된 지 얼마나 되었는지도 모른 채 한 줌 핏물이 되어 버렸지만.”
황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었다. 청은 의심할 여지 없이 명명백백한 평인이었다. 황제가 향을 듬뿍 발라 놓은 비녀를 품고 황궁까지 오면서도 전혀 몰랐고, 황후가 환열기를 맞아 향을 줄줄 흘릴 때도 한참 후에나 간신히 알아챘다. 그런 그가 어떻게 황제의 아이를 밴단 말인가?
청이 평인이라 믿었기에 아무 거리낌 없이 9왕자에게 그의 살인을 사주했다. 평인 주제에 사내에게 범해지며 쾌락을 얻는 역겨운 작자라고, 감히 비역질로 황제를 홀려 황실의 기강을 어지럽히려 했다고. 죽을 때까지 범하고 짓밟아 최대한 처참한 최후를 맞게 해 달라 간청했다.
“아쉽군요. 몇 달은 더 기다렸다 거사를 치를 걸 그랬습니다.”
그러나 혼란은 길지 않았다. 청이 무엇이었든 간에, 그가 품은 아이는 이미 죽었고 그 또한 곧 죽을 테니까. 황후는 이가 따닥따닥 부딪칠 정도로 떨면서도 황제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아이가 많이 자랐을 때 죽여야 그가 더욱 괴로웠을 텐데요. 그래야 제 고통을 10분지 1이나마 알지 않겠습니까.”
황제가 느릿하게 다가왔다. 황후가 반사적으로 크게 움찔했다. 그러나 황제는 그에게 손을 대는 대신, 옆에 누운 아이를 들어 올렸다. 쪼글쪼글한 갓난아이가 강보를 벗어나 배냇저고리만 입은 차림으로 달랑 들려 허공에 떠올랐다. 주먹을 꼭 말아 쥔 조그만 손이 천진하게 바동거렸다. 너무도 작고 약해서, 황제가 손아귀에 힘을 주는 것만으로도 머리통이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
“폐, 폐하!”
“나는 선황과 전혀 닮지 않았어. 하지만 그는 나를 보자마자 곧바로 자신의 친자식이 맞는다고 인지하였다더군.”
황제는 그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몹시도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황후가 황망하게 올려다보았다.
“그대 말마따나 나는 천한 핏줄을 타고나서…… 황자로 받아들여 봤자 좋을 게 없을 텐데. 이름 모를 이민족이 낳은 아이 따위 전혀 알지 못하니, 당장 내쫓으라 명하면 되었을 텐데도.”
“그게 무슨…….”
“왜 그리하였을까? 그대도 궁금하지 않소?”
조곤조곤 말을 이으며, 황제가 아기의 목을 가만히 쥐었다.
“헉!”
황후가 기겁했다. 순간 황제가 아이의 목을 꺾어 죽여 버리는 게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황제는 아이를 죽이는 대신 목을 살짝 앞으로 젖히고 배냇저고리 매듭을 풀었다. 옷 너머로 보드랍고 통통한 맨살이 드러났다. 아이의 어깨와 등은 깨끗했다.
“황실의 핏줄을 타고난 이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이곳에 붉은 반점이 있거든.”
황후는 입을 벌린 채 얼어붙었다. 역대 황제들의 어깻죽지에 반점이 있는지 없는지 같은 건 알지 못했다.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황제는 그의 앞에서 한 번도 옷을 벗은 적이 없었다. 심지어 교합할 때조차도 허리춤만 풀어 헤치고 제 할 일을 한 후에 훌쩍 떠나 버렸다.
이제껏 감쪽같이 속여 왔다고 생각했는데,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하여 간신히 성공했다고 여겼는데. 사실은 모든 것이 근본부터 잘못되어 있었다. 황제는 모두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으면서, 황후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그를 조롱했다. 하찮은 것이 빤히 보이는 수를 쓰며 살아 보겠다고 버둥거리는 꼴이 우스웠으리라. 황제가 참을 수 없이 증오스러웠다.
황제는 가만히 웃었다. 하지만 웃음은 아주 잠깐이었다. 다음 순간 그의 표정이 놀라우리만치 스산하게 굳었다.
“지금 이 시간을 기하여 율의 이름을 지도에서 완전히 지울 것이오. 도시와 마을과 성이, 왕실의 피를 이은 자가 단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
“그대 형은 발정제를 먹인 짐승 우리에 처넣어 숨이 끊어질 때까지 범해지게 할 것이고, 사절단은…… 그래, 머리를 베어 율에 보내려 해도 이젠 그럴 수 없겠군. 조만간 율이 통째로 사라질 테니. 그럼 잘린 머리를 장대에 꽂아 황성 앞에 걸어 놓을까?”
너무도 잔혹하고 끔찍한 말들이 태연하게 줄줄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대는 결코 죽이지 않을 것이오. 그대 말대로 제국의 황후이자 황자를 낳았는데, 쉬이 죽여선 안 되지.”
그는 황후의 옆에 아이를 고이 뉘어 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는 조그만 입술을 오물거리며 새근새근 잠들었다.
“그만 쉬시오. 많이 고단할 터인데.”
“폐하……. 폐하!”
뒤늦게 정신을 차린 황후가 처절하게 외쳤다.
“차라리, 차라리 죽여 주십시오. 더는 싫어요. 사는 게 끔찍합니다. 이곳은, 황궁은 지옥과 다를 바 없습니다. 사람을 집어삼키는 지옥요! 이렇게 사느니 조국과 함께 죽겠습니다.”
황제는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느닷없이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몹시 우스운 농담을 들었다는 듯 한참을 웃고 또 웃었다. 눈을 휘며 화사하게 웃는 얼굴이 더없이 섬뜩했다.
“내가 왜? 왜 그래야 하지?”
황후는 할 말을 잃었다. 미쳤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눈앞의 남자는 인간이 아니었다. 괴물이고 악귀였다. 인간이라면 결코 이럴 수는 없었다.
“더러운 피가 섞인 게 불쌍해서 폐하께 연민을 품었사온데, 그게 제 잘못이었습니다. 짐승만도 못한 인간 같으니라고. 폐하를 증오하고 이 제국을 증오합니다!”
황제는 태연하게 몸을 돌렸다. 황후가 뒤에서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며 저주를 퍼붓는 것이 들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가 문지방을 넘을 때까지도 한 맺힌 발악이 이어지다가, 두꺼운 문을 닫자 더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목이 쉴 때까지 처절하게 악을 쓰던 황후가 침상에 풀썩 엎어졌다. 우아한 광택이 도는 비단 이불을 쥐어뜯으며 갈라진 소리로 흐느꼈다.
지금은 세상을 뜨고 없는 고국의 아바마마와 어마마마도, 자애로운 형님과 누님들도, 그의 시중을 들어 주던 아랫사람들도. 모두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지저분하고 복잡한 일 따윈 알 필요 없이, 귀염둥이 막내 왕자로서 주위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꽃처럼 곱게 웃고 있기만 하면 된다고.
그래서 그 말대로 했다. 왕궁 깊은 곳에 틀어박혀 비단옷을 차려입고 화초니 차니 하는 예쁜 것들만 보며 지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참혹했다. 그는 제국에 끌려와 무능한 허수아비니 허울뿐인 황후니 하는 소리를 들으며 갖은 수모를 겪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번엔 힘을 좇기로 했다. 권력이라는 것이 그리도 대단한 것이라면 그까짓 권력, 얻어 주겠다고 이를 악물고 다짐했다. 그를 비웃던 자들에게 보란 듯이 복수하고 싶었다.
하지만 황제는 잔인하게도 그의 조국을 남김없이 짓밟아 멸망시키겠다 선언했다. 심지어 그에게 죽음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아무런 야심도 품지 말고 그저 어여쁘게만 있으라 하기에 그리했더니, 사실은 그것이 틀렸다고 한다. 그래서 힘을 얻으려 했더니 그것 또한 틀린 선택이었다 한다.
고통받는 조국의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임신을 계획했고, 친형제의 한을 풀어 주고자 청의 살인을 사주했다. 그게 뭐가 그리 큰 잘못이란 말인가?
“그럼 대체……. 내가 어떻게 했어야 한단 말이야. 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황후가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모든 것을 잃고 밑바닥까지 떨어진 자 특유의 광기가 배어 나왔다.
발작적인 웃음이 터졌다. 그는 이부자리를 짚으며 비칠비칠 몸을 일으켰다. 시야 한구석에 강보에 싸인 아기가 들어왔다.
“결국 이리될 것이었다면 나는 왜 그 수모를 겪어야 했지? 역겨운 이민족 사내와 몸을 섞고, 열 달씩이나 괴로움을 견디고……. 그래, 이리될 줄 알았으면, 그랬다면 이 아이 따위는 애초에 낳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황후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아이에게 향했다. 아이의 위로 어두침침한 그늘이 드리워졌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아이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입술을 오물거릴 뿐이었다.
“너만……. 없었어도.”
손을 뻗어 아이의 목을 쥐었다. 너무도 작고 어려서, 황후의 가냘픈 손에도 목 전체가 잡히고 한참 남았다. 서서히 아이의 목을 졸랐다. 손이 사시나무 떨리듯 마구 떨렸다.
그러나 황후는 끝까지 모질지 못했다. 그는 불에 덴 듯 손을 탁 놓았다. 아이를 죽이려 했던 손을 꽉 움켜쥐어 품에 안고 오열했다. 속에서 쥐어짜 내는 듯한 울음이었다.
“흑, 흐으…… 으흐흑…….”
자신을 낳은 이가 자신을 해치려 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평온하게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 * *
“마마. 쉬시는 도중에 송구하오나, 잠깐 들어가도 되겠사옵니까? 황자님께 젖을 먹일 시간이 되었사온지라.”
침전 문밖에서 유모가 공손하게 고했다. 안에서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황자와 함께 낮잠이라도 자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황후의 잠을 방해하는 한이 있더라도 신생아의 수유 시간은 꼬박꼬박 지켜야 했다. 결국 유모는 실례를 무릅쓰고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들어가겠습…… 마마, 황후 마마!”
강보에 싸인 황자가 널찍한 침상을 홀로 차지한 채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그 옆에, 하늘하늘한 옷자락 아래로 드러난 흰 발이 두 개……. 허공에 떠올라 힘없이 흔들렸다.
* * *
커다란 창을 통해 봄볕이 한가득 쏟아져 들어왔다. 휘영청 떠오른 보름달처럼 둥근 창틀이 햇빛을 머금어 은은하게 빛났다. 바야흐로 동장군이 가시고 봄기운이 스며드는 시절이었다. 황도에서 유명한 고급 찻집은 간만에 나들이를 나온 귀족들로 발 디딜 곳 없이 붐볐다.
청과 6황자는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장기판을 사이에 둔 채였다. 담소를 나누는 소리, 찻물 따르는 소리, 다기 달그락대는 소리로 사방이 어수선하거늘, 그들 주변에만 평온한 침묵이 머물렀다.
청은 짐짓 심각해하는 낯으로 장기판을 노려보았다. 그의 앞에 놓인 찻잔은 미지근하게 식은 지 오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깔끔하게 패배를 선언했다.
〈제가 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진영 정중앙에 있던 장기짝을 가볍게 튕겼다. 장군[將]이라 쓰인 말이 맥없이 툭 돌아갔다.
〈그래도 다른 벗들과 장기를 두면 이기는 때도 제법 있는데, 도저히 공자님께는 당해 낼 수가 없습니다. 어찌 한 번을 안 져 주십니까.〉
그가 밉지 않게 투덜거렸다. 황자는 대답 대신 심드렁해하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청도 곧 장기에 흥미를 잃었다. 애초에 전쟁 놀음 따위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이제 곧 꽃이 피겠군요. 어서 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날이 풀리길 겨우내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지요.〉
창 너머로 보이는 나뭇가지에 꽃봉오리가 소담스레 맺혔다. 식은 차를 마시다 말고, 황자가 입을 열었다.
〈어째서? 어차피 봄은 매년 오는 것 아닌가.〉
〈매년 오니 더욱 기다려지는 것이지요. 이 계절엔 천지가 알록달록 산뜻하니 어디를 그려도 훌륭한 산수화가 됩니다. 향긋한 꽃과 과일이 있고, 저자에 길거리 악사들이 하나둘 나오고, 축제와 연회가 잔뜩 열리고요. 봄에는 제가 사랑하는 것들이 많아 좋습니다.〉
〈사랑한다라.〉
〈예. 없으면 못 살 것 같은……. 아니, 물론 숨을 쉬고 심장이 뛰니 살 수야 있겠지만,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기분이 들게 만드는 것들요.〉
〈…….〉
황자는 말이 없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언제나 그렇듯 알기 어려웠다. 그에게도 사랑하는 것이 있을까.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무련 공자님, 봄이 되면 함께 뱃놀이를 가시겠습니까? 요 앞 강가에서 보는 꽃이 그리 아름답습니다.〉
〈뱃놀이?〉
〈혹시 싫어하시는지요?〉
〈가 본 적이 없어서.〉
황자가 덤덤하게 고백했다. 청은 어찌 반응할 것인가. 황족으로 태어나 아직도 뱃놀이 한 번 못 가 봤냐고 깜짝 놀랄까, 아니면 황족이면서도 옥에 갇힌 죄수보다 못한 삶을 산 그를 불쌍히 여겨 동정할까.
〈그렇습니까? 그럼 정말로 경치가 좋은 곳으로 모셔야겠군요.〉
하지만 황자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그의 대답을 들은 청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첫 꽃구경이시니, 반드시 평생 남을 만한 추억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아예 해주(諧州)부터 원주(苑州)까지 배를 타고 유람을 갈까요? 아, 귀한 몸이신지라 궁을 함부로 오래 비울 수 없으시지요. 그러면…….〉
청은 차를 마시던 것조차 까맣게 잊고 탁자 맞은편의 황자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이런저런 계획을 늘어놓는 그의 눈이 순수한 열의로 빛났다. 뽀얀 햇살이 탁자 위로 들이쳐 청의 옆얼굴을 말갛게 물들였다.
황자는 시종일관 시큰둥해하는 무표정이었지만, 딱히 그를 제지하지도 않았다. 원래 타인이 눈앞에서 얼쩡대며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건 질색이었다. 그러나 생기 있고 사근사근한 청의 음성은 듣기에 제법 나쁘지 않았다.
청의 아버지가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목이 잘리기 보름 전의 일이었다.
* * *
청은 천천히 눈을 떴다. 머리가 띵하게 아프고 온몸이 천근만근같이 무거웠다. 오래 잠들어 있는 동안 기나긴 꿈을 꾼 것 같았지만 꿈의 내용까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널따란 천장에 새겨진 장식이 눈에 들어왔다. 금으로 조각한 용과 봉황이 웅장한 자태를 자랑했다. 황제가 업무를 보는 대전과 황제가 기거하는 침전에서만 쓸 수 있는 문양이었다. 등불도 초도 켜져 있지 않아 방 안이 어둑어둑했다. 창이란 창에 죄다 덧문을 닫고 빗장을 걸어 놓은 탓에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그는 잠기운이 남은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이며 고개를 돌렸다. 침상 옆의 탁자에 황제가 앉아 있었다.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턱을 괸 채였다. 잠기운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예리하게 날이 선 얼굴이었다.
“청아, 잘 잤어?”
황제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목이 꽉 잠겨 있었다. 어두운 방에서 가만히 앉아 잠든 청을 지켜보며, 그는 대체 얼마나 오래 기다렸던 것일까.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폐……. 폐, 하.”
청은 형편없이 갈라진 소리로 그를 불렀다. 귀를 통해 들리는 스스로의 음성이 몹시도 생경하게 느껴졌다. 말하는 법을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사람처럼.
“응.”
조곤조곤한 대답이 돌아왔다. 어슴푸레한 그늘이 드리워 황제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뒤늦게 주변의 기물이 눈에 들어왔다. 탁자 위에 도자기 병이 하나, 술잔이 두 개 놓여 있었다. 황제가 청을 기다리며 홀로 술이라도 마시려 했던 것일까. 그러나 술병은 뚜껑이 고이 닫혀 있고 잔에도 무언가를 따른 흔적이 없었다. 기껏 술을 준비해 놓고 왜 마시지 않았을까. 어째서 잔은 두 개가 있는 것일까. 의문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황제가 단단히 밀봉되어 있던 병 입구를 열고 술을 따랐다. 맑은 액체가 쪼르륵 흘러나와 잔을 채웠다. 그가 가만히 눈웃음을 치며 청에게 권했다.
“같이 마실까?”
명확히 짚을 수는 없지만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늑하고 캄캄한 방도, 태연자약하게 말을 건네는 황제도……. 모든 것이 너무도 평온했다. 그렇기에 오히려 기괴했다.
청이 비척비척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몇 번이고 도로 고꾸라질 뻔했다. 그는 바짝 말라 버린 입술을 달싹여 간신히 물었다.
“폐하…… 그 술. 무엇……. 쿨럭, 무엇입니까?”
병에 든 술은 정확히 두 잔 분량이 나왔다. 텅 빈 병 입구에서 투명한 액체 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황제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독이야. 한 잔으로 족히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
청은 조용히 경악했다.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황제를 향해 다급히 팔을 뻗었다. 그러나 오래도록 굳어 있던 몸이 제대로 움직일 리가 없었다. 그는 맥없이 허우적대다 침상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쿵! 둔탁한 충격이 전신에 퍼졌다. 청은 바닥에 나동그라져 헐떡이느라 잠시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격한 움직임에 흐트러진 얇은 침의 위로 마른 등과 어깨의 윤곽이 도드라졌다.
“뭐 하고 있어. 어서 와서 앉질 않고. 돌이켜 보니 내 너와 잔을 맞댄 지가 너무도 오래되었어. 오랜만에 같이 술 한잔 마실까 하여 깨어날 때까지 기다렸지. 옛 생각도 나고.”
황제는 고개를 기울이고 턱을 괸 채 청을 향해 다정하게 속삭였다. 황제의 말은 농담도 협박도 아니었다. 그는 더할 나위 없는 진심이었다. 그 어떤 애원도 통하지 않을 터였다.
“폐하…….”
쓰러진 청이 고개를 들어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황제는 여전히 아까 그 자세 그대로 앉아 있었다. 청의 얼굴이 참담한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위태로운 정적 끝에 청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말을 듣지 않는 다리를 질질 끌고 거의 기다시피 하여 황제를 향했다.
조금씩 힘겹게 간격이 좁혀졌다. 머리가 헝클어지고 바닥에 긴 옷자락이 쓸렸다. 황제에게 다가가는 내내 청은 넋이 나가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문득 한 가지 가설이 머리를 스쳤다. 황제는 줄곧 독이 든 병을 앞에 둔 채 청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혹여나 청의 숨이 끊어지면, 그도 이 독을 마시고 청과 함께 죽으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무 근거 없는 직감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가설에 묘하게 믿음이 갔다.
마침내 그가 의자를 짚고 몸을 끌어 올려 황제의 맞은편에 간신히 앉았다. 황도의 찻집에서 마주 앉아 장기를 두었던 때처럼. 그러나 그때에 비해 지금은 모든 것이 너무나 달라졌다. 실내를 가득 메우는 봄 햇살도, 활기차게 떠드는 사람들도, 봄을 맞아 들뜬 공기도 없었다. 두 사람의 앞에는 향긋한 찻잔 대신 독이 든 술잔이 놓였다.
“헉, 허억.”
고작 그 거리를 온 것만으로도 턱 끝까지 숨이 찼다. 전신이 사시나무처럼 후들후들 떨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청의 앞에 독배가 놓였다. 그의 눈동자가 하염없이 흔들렸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황제는 태연자약하게 자신의 잔을 들어 청의 잔에 가볍게 부딪쳤다. 질 좋은 도자기끼리 만나 맑은 소리가 났다. 그는 눈을 내리깔고 가만가만 읊조렸다.
“청아,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사랑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밖에 없겠구나.”
“흐으, 흐, 읏…….”
청의 아래턱이 파르르 경련하고 숨이 점차 거칠어졌다. 목이 메어 왔다. 까닭 모를 울음기가 북받치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술잔에 손을 뻗었다. 그는 차마 황제를 마주 보지 못해 시선을 떨어뜨렸다. 손에 쥔 잔 안에서 독주가 출렁이며 요동쳤다. 잠잠하던 표면이 마구 이지러지고 파문이 수없이 생겨났다.
고개를 푹 숙이고 이를 악문 채 덜덜 떠는 청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황제는 설핏 웃었다. 집착도 분노도 광기도 담겨 있지 않은 그저 편안한 웃음이었다.
황제는 자신 몫의 잔을 들어 망설임 없이 쭉 들이켰다. 목울대가 가볍게 움직였다. 맑은 액체가 흘러내려 간 길을 따라 식도가 타는 듯 뜨거워졌다. 술 때문인지 독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탁. 텅 비어 버린 잔을 내려놓고, 황제는 젖은 입술을 혀끝으로 느릿하게 핥으며 청을 지그시 마주 보았다. 이제는 네 차례라는 듯.
“헉……!”
청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어쩔 줄 몰라 탁자 위를 방황하던 시선이 손에 들린 잔에 멎었다. 심장이 터질 듯 불안하게 뛰었다. 그는 마침내 안쓰러울 정도로 손을 떨며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파리한 입술에 잔 가장자리가 닿을 듯 말 듯 가까워졌다.
청은 황제가 내린 죽음을 마시려 하고 있었다. 긴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자마자 황제와 함께 또다시 죽으려 하고 있었다. 눈시울을 발갛게 적시고 절박하게 헐떡이면서도, 황제의 잔인한 명을 기어이 거부하지 않았다.
이것이 청이 말하던 사랑일 터였다. 그가 청에게, 청이 그에게 바치는.
이제껏 머릿속에서 청을 온갖 방법으로 수천수만 번 죽였으면서, 숨이 끊어진 시신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도 수없이 상상했으면서……. 결국엔 원점이었다. 10년이 넘는 세월을 거쳐, 결국 그는 청의 고집에 졌다. 애초에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청을 빤히 지켜보다가, 황제는 불쑥 손을 뻗었다. 막 청의 입 안으로 흘러 들어가려는 술잔을 쳐 냈다.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벌어진 돌발적인 행동이었다. 술잔이 탕 소리를 내며 탁자에 엎어졌다. 안에 든 내용물을 죄다 쏟으며 데굴데굴 구르다 결국 바닥으로 떨어졌다. 청이 허공에 손을 들어 올린 자세 그대로 어정쩡하게 굳었다.
원래는 그의 몫까지 빼앗아 마실 심산이었다. 그런데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겨우 잔을 쳐 낸 것이 전부였다.
“큭…….”
황제가 고개를 푹 숙였다. 저 깊은 속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치받아 올라왔다. 독주가 흐른 탁자 위에 시뻘건 피가 후두둑 떨어졌다.
“폐하!”
청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제 몸도 성치 않아 비틀대는 주제에, 필사적으로 탁자 건너편으로 다가오려 했다. 황제의 몸이 스르르 기울어 의자에서 쓰러졌다. 청이 다급히 그를 받쳤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를 끌어안고 바닥에 주저앉은 청이 미친 듯이 고개를 저으며 횡설수설했다. 울컥울컥 넘쳐흐른 피가 청의 옷자락을 적셨다.
“폐하, 아, 안 돼……. 안 됩니다. 안 돼요, 공자님……. 제발, 무련 공자님!”
긴박하다 못해 처절하게 느껴지는 부름이었다. 그것이 황제의 의식이 까맣게 잦아들기 전 들은 마지막 소리였다.
* * *
어둠 속에서 아주 작은 숨소리가 들렸다. 한껏 집중하여 귀를 기울여야만 들릴 정도로 가냘픈 호흡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이어졌다. 귀로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황제는 스르르 눈을 떠 옆을 돌아보았다. 곤히 잠든 청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황제의 곁에 모로 누워 있었다. 계절도 시각도 짐작할 수 없는 어둑어둑한 침전이 그의 뒤로 보였다. 묘한 기시감이 느껴지는 정경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청은, 침전에 바닥에 쓰러진 그를 끌어안고 절규하던 청은 곧 숨이 넘어갈 듯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청은 그보다 얼굴이 더 상했다.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파리한 뺨에 속눈썹이 애달픈 그늘을 드리웠다. 바짝 말려 책장에 끼워 둔 꽃잎도 이보다는 싱그러울 터였다. 꼭 옛 시대의 비빈 같았다. 죽은 황제의 관에 함께 순장되었다는.
황제는 숨을 죽이고 청에게로 고개를 기울였다. 자그마한 숨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살아 있었다. 그 많은 괴로움과 아픔과 절망을 뛰어넘어, 청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
청아. 그렇게 불러 보려 입을 열었다. 바로 눈앞에 있는 청이 너무도 그리워, 이름을 부르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았다. 하지만 목구멍에서는 말소리 대신 색색 바람 새는 소리만이 날 뿐이었다. 그와 동시에 목을 할퀴고 후벼 파는 통증이 찾아들었다.
진하게 달인 탕약 냄새가 방 안에 진동했다. 이렇게 성심성의껏 약을 달여 먹이고 간호를 해도 아직 낫지 않은 걸 보니, 그가 마신 독이 독하긴 어지간히도 독했던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황제는 몸을 돌려 그를 마주 보고 누웠다. 어둠 속에서 청의 이목구비를 집요하게 주시했다. 가만히 감긴 눈매를, 해쓱하게 야윈 뺨을, 살짝 벌어진 입술을 오래도록 보고 또 보았다.
달아날 틈은 그간 얼마든지 있었으리라. 독을 마신 황제가 사경을 헤매는 동안 훌쩍 떠나면 그만이니. 하지만 청은 어디에도 가지 않았다. 목숨을 끊지도 멀리 가 버리지도 않고, 다시 의식을 되찾을지 아닐지도 모르는 황제의 곁에 머물렀다. 무저갱에서 벗어나 자유를 되찾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스스로 버렸다.
황제는 이제껏 청을 수도 없이 죽이고 싶었다. 청만 떠올리면 마음이 흉악하게 일그러지고 뒤틀려서 도무지 주체할 수 없었다. 이 살기등등한 충동은 기어이 둘 중 누군가가, 혹은 둘 모두가 죽어야만 끝날 것 같았다. 청의 팔다리를 부러뜨리고 오장육부를 짓이기고, 그리고……. 청의 숨이 완전히 멎을 때까지 그 어여쁜 얼굴에 몇 번이고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러나 이 순간 처음으로 그는 청과 함께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 지옥 같은 삶을, 서로가 서로의 가장 큰 불운이 되어.
“콜록.”
청이 작게 기침을 했다. 바르르 떨며 몸을 웅크리는 것이, 잠결에도 어지간히 추웠던 모양이다. 바짝 움츠러든 마른 어깨가 처연했다. 그러고 보니 방 안이 묘하게 서늘했다. 황제의 시선이 침소 벽 쪽에 놓인 화로로 향했다. 한때 화르르 타올라 방 안을 데웠을 화롯불이 거멓게 사위어 있었다. 다 타 버린 숯이 재가 되어 불씨 위를 덮고 있는 탓이리라.
황제는 무심코 침상에서 일어나려 했다. 화로 안을 뒤적여 불씨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밑에서부터 턱 걸린 듯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청이 길게 늘어진 황제의 소맷자락을 베고 자고 있었다. 청은 도무지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감히 황제의 옷자락을 깔고 누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마냥 깊이 잠든 얼굴이 천진하게까지 보였다.
시종을 불러 화로에 불을 지피게 하는 것도, 청의 잠을 깨우는 것도 선택지에 없었다. 그는 상체를 반쯤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전히 한쪽 소매를 청에게 내준 채였다. 탁자 위에 놓인 보검이 눈에 띄었다. 아마도 청이 올려 둔 것이리라.
팔을 뻗자 손끝이 간신히 검 손잡이에 닿았다. 손안에 들어온 검을 뽑았다. 스르릉. 섬뜩한 소리와 함께 칼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드러운 비단 소매는 너무도 쉽게 잘려 나갔다. 이 제국에서 오로지 단 한 사람만 입을 수 있는, 존귀하기 그지없는 용포를 서걱서걱 자르면서도 그는 아무런 망설임이 없었다.
황제는 한 손에 칼을 든 채 침상에서 내려섰다. 뚝 잘린 소맷자락을 베고 잠든 청을 뒤로하고, 캄캄한 방을 가로질러 화로를 향해 다가갔다. 고요한 실내에 저벅저벅 발소리가 울렸다.
이윽고 짙은 어둠을 가르고 새로운 불꽃이 피어올랐다.
* 단수지벽(斷袖之癖) :
남남 간의 애틋한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