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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련괴격(牽攣乖隔) (8/10)

견련괴격(牽攣乖隔)

침소 창문이 바람이 불 때마다 삐걱대기 시작했다. 온종일 쌩쌩 불어닥치는 칼바람을 못 이기고 창틀의 목재에 금이라도 간 모양이었다.

사실 이제껏 무사히 버틴 것만 해도 용했다. 이 전각은 하나부터 열까지 성한 곳이 없었다. 가시나무 울타리를 둘러쳐 놓았을 때는 허물어지기 직전의 냉궁과 다를 바 없었으며, 시종들이 이것저것 세간을 가져다 꾸민 지금도 그리 나아지지는 않았다. 망가져 제구실을 못하는 꼴이 꼭 자신의 처지 같았다.

청은 밤새 삐걱거리는 소음을 들으며 잠을 설치다가 새벽녘이 되어서야 까무룩 옅은 잠에 빠졌다. 아침이 희뿌옇게 밝아 올 무렵 누군가 처소 문을 두드렸다. 저 소리가 창틀 흔들리는 소리인지, 다른 소리인지 곧바로 구분하지 못했다. 그는 이불을 덮고 웅크린 채 죽은 듯 눈을 감고 있다가, 문 두드리는 소리가 한층 커진 뒤에야 힘겹게 정신을 차렸다.

식량과 물건을 가져다주러 온 궁인들일까? 그들은 문 앞에 서서 들어가도 되는지 정중히 여쭙고 나서야 실내에 발을 들여놓았다. 궁인들은 결코 저렇게 대놓고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황제일까? 그는 황궁 내의 어디를 가든 문을 두드릴 필요가 없었다. 항상 기별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는 제 할 일만 마치고 바람처럼 훌쩍 떠났다.

청은 무거운 몸을 힘겹게 일으켰다. 겉옷조차 걸치지 않은 몸 위로 싸늘한 겨울 아침 공기가 스몄다. 침침한 눈을 깜빡이며 비틀비틀 방을 나서, 간신히 문을 열었다. 살을 에는 삭풍이 몰아닥쳤다. 텅 빈 문간과 황량한 앞마당, 흐린 하늘이 한눈에 들어왔다.

“묻고 싶은 것이 있어 왔습니다.”

표정을 굳히고 입술을 지그시 깨문 황후가 그의 눈앞에 있었다. 다른 궁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담장 너머에서 가마를 세워 놓고 기다리고 있으리라.

고운 빛깔의 담비 털로 만든 외투와 장갑, 도톰하게 솜을 채워 넣고 금실로 자수를 놓은 비단옷까지. 고작 얇은 침의 한 벌 걸쳤을 뿐인 청과는 몹시 대조되는 차림이었다. 작고 도톰한 입술 사이로 새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황후 전하를 뵙습니다. 길이 평안을 누리소서.”

이게 무슨 상황인지 생각하기도 전에 청은 반사적으로 무릎을 꿇었다. 엎드린 자세로 깊게 고두하여 예를 표했다. 황후보다 키가 커 그를 내려다보던 청이 몸을 낮추자 눈높이가 역전되었다.

“사절단 자격으로 황궁에 머물고 있는 동복형님에게 들었습니다. 대장군의 이름을 듣자마자 대경실색하더군요.”

황후는 청에게 일어나라는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곧장 본론을 꺼냈다. 명백한 고의였다. 청은 서리가 낀 돌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그의 말을 들어야 했다.

“내가 제국의 황후로 책봉되는 것을 반대하던 율의 신하들을……. 대장군께서 잔인하게 죽였다지요.”

“…….”

“손목과 발목을 하나씩 자르고, 자를 손발이 없으면 눈알을 파내고, 그러고도 끝까지 안 된다 저항하면 혀를 뽑았고요. 사실입니까?”

처음 안 것들이었다. 제국과 율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도, 황후는 자신의 궁에서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위협이 닿지 않는 왕궁 깊은 곳에서 차를 마시고 꽃을 돌보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정치나 군사 같은 어렵고 복잡한 이야기는 잘 알지 못했고 그다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에게 전쟁은 그저 추상적으로 무섭고 슬픈 것이었을 뿐, 그 면면이 얼마나 잔혹한지까지는 몰랐다.

그가 처참한 현실을 깨달은 것은 사경을 헤매다 깨어난 9왕자에게 청의 이름을 흘렸을 때였다. 그것을 듣자마자 9왕자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을 부릅뜨며 경악하더니, 이내 분노로 이를 갈았다. 해단 제국의 금군 대장군 지예락. 율 왕국인들에게는 흉신악살의 대명사나 다름없는 이름이었다.

“예, 사실입니다.”

청은 순종적으로 눈을 내리깐 채 곧잘 대답했다. 황후에게 제국의 법도와 규율을 알려 줄 때와 다르지 않은 차분한 음성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절망이 밀어닥쳤다. 이 남자를 한순간이나마 믿고 의지했던 것이 잘못이었다. 청은 처음부터 자신의 구원자도 조력자도 아니었다. 황제보다도, 아니, 황제보다 더 지독한 악인이었다.

“이……. 역겨운 위선자.”

명확히 말하자면 청은 위선자(僞善者)조차 되지 못했다. 그는 선(善)을 가장한 적이 없었으므로. 황후에게 그는 항상 악역이었고 죄인이었다. 그러나 청은 황후의 말을 정정하는 대신 침묵을 지켰다.

“그런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르고도 후회한 적이 없습니까? 당신 때문에 죽어 간 율의 무고한 백성들에게 미안하지도 않나요?”

“예.”

청이 짤막하게 대꾸했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덤덤한 무표정이었다. 그의 대답을 듣는 순간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황후의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도톰한 장갑 한 짝을 스르륵 벗어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 아래 드러난 맨손을 들어 청의 뺨을 힘껏 때렸다.

황후가 조금만 더 험하게 자랐다면 따귀를 때리는 대신 주먹을 날렸을 터였다. 멱살을 잡거나 발길질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격투술을 배운 적도, 저잣거리 시정잡배들의 몸싸움을 목격한 적도, 누군가를 때려 본 적도 없었다. 그가 할 줄 아는 공격이란 이 정도였다.

한 번으로는 성이 풀리지 않았다. 황후는 분을 못 이겨 미친 듯이 손을 휘둘렀다. 짝! 짜악! 텅 빈 전각에 뺨 때리는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하아, 하아, 하…….”

결국 제풀에 지친 황후가 숨을 헐떡이며 손을 내렸다. 평소에 거친 일이라곤 전혀 해 보지 않아서 곱고 뽀얗던 손이 온통 빨개졌다. 누가 보면 역으로 청이 황후에게 손찌검을 했다고 오해할 만한 광경이었다.

꽁꽁 얼어붙은 뺨에 발갛게 물이 들고 머리카락이 산발이 되도록 가만히 맞고만 있던 청이 조용히 손을 뻗었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장갑을 주워 들고 황후의 맨손을 조심스럽게 받쳤다. 방금 전까지 장갑에 감싸여 있어 보드랍고 따뜻한 황후의 손과 달리, 굳은살과 흉터가 새겨진 청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황후가 무심결에 움찔했다.

“전하, 날이 춥습니다. 옥체가 상하십니다.”

그리 말하며, 청은 황후의 맨손에 고이 장갑을 끼워 주었다. 방금까지 황후가 그를 모질게 때렸다는 사실을 아예 지워 버린 듯한 정중한 태도였다.

“…….”

소름이 끼쳤다. 황후의 낯이 확 일그러졌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다시금 손을 치켜들었다. 황후가 낀 겨울용 털장갑은 몹시 호화로웠다. 금줄을 늘어뜨리고 온갖 보석을 달아 우아하게 꾸몄다. 그는 자잘한 장식이 많은 장갑을 낀 손으로 청의 뺨을 내리쳤다.

짜악!

처음으로 청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그는 내리깐 눈을 파르르 떨며 통증으로 이를 악물었다. 황후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장갑 표면에 피가 묻어 있었다. 그제야 청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보석에 긁히고 금줄에 쓸려 한쪽 뺨과 입가가 피투성이였다.

“그래요, 당신은 폐하께서 시키는 것이라면 뭐든지 했지요. 사람을 죽이고 나라를 멸망시키고, 심지어는 몸까지 내주었지 않습니까. 당신에겐 자존심도 수치심도 없습니까? 폐하께 부정한 마음을 품은 것으로 모자라, 그런 더러운 짓까지 하다니…….”

황후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비난했다. 한평생 청렴하고 도덕적으로 살라고 교육받은 그에게 비역질은 차마 입에도 담을 수 없는 역겨운 행위였다. 양인은 음인과 짝을 짓고, 평인은 평인 남녀끼리 짝을 짓는다. 그것이 당연한 이치 아닌가.

뺨에서 배어 나온 피가 삭풍에 차게 식는 것도 모르고 묵묵히 있다가, 청이 고개를 들어 황후를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무슨 그런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듯 침착한 어조였다.

“그분께서 명하셨습니다. 그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황후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상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미쳤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것도 아주 차분하고 평온하게 미쳐 있었다. 대장군이 황제에게 몸과 마음을 바쳤다는 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닌 진실이었다.

“대장군께서는……. 죽어도 극락에는 못 가시겠군요. 곱게 죽지도 못하실 거고요.”

황후는 혐오와 거북함으로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렸다. 홧김에 던졌지만 뼈 있는 말이었다. 청은 언제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냐는 듯 다시 고개를 숙였다.

“감히 바라지 않습니다.”

적반하장으로 차라리 화를 내고 고함이라도 질렀으면 나으련만, 상대가 이렇게 순순히 나오니 더욱 가증스럽고 섬뜩했다. 까닭 모를 울분이 끓어올라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제대로 된 인사도 남기지 않고 휙 돌아 나갔다.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은 청을 뒤로하고.

* * *

눈앞에 붉은 과일이 가득 담긴 그릇이 놓였다. 청은 탁자 앞에 우두커니 앉아서 과일을 내온 시종이 깊게 절을 하고 물러나는 광경을 멍하게 지켜보았다. 알이 크고 통통하게 잘 익은 산딸기였다. 한여름에나 나는 과일을, 그것도 밭에서 키우는 딸기가 아닌 야생 산딸기를 이 엄동설한에 어찌 구해 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예락, 그 상처는 어찌 된 거지?”

퍼뜩 정신이 들었다. 맞은편에 앉은 황제가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눈길이 생채기투성이 뺨에 닿았다. 황후에게 뺨을 맞으며 장갑에 긁힌 상처였다.

“폐하, 저, 그것이.”

청이 우물쭈물 말끝을 흐렸다.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황후는 그의 윗사람이자 황제의 반려였다. 황제의 그 무엇도 아닌 청이 황후의 흠을 들추어 일러바치는 것은 불충이었다. 그 어떤 구실을 붙여도 황제와 황후를, 겉보기에는 흠잡을 데 없이 이상적인 한 쌍의 부부를 이간질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넘어져서…… 조금 긁혔습니다. 앞마당을 거닐다가, 발이 엉켜서 그만…….”

청이 어설프게 둘러댔다. 차마 황제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떨어뜨린 채였다. 말을 하면서도 서툰 거짓말이 곧바로 발각되는 것은 아닌지 조마조마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반응은 뜻밖에 미적지근했다. 황제는 의자 등받이에 나른하게 몸을 기대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대는 참으로 칠칠맞지 못하군.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어. 막 걸음마를 뗀 어린아이도 아니고, 어찌 대장군이라는 자가 자갈 하나 없는 평지에서 넘어지나. 지금도 손이 많이 가서 골치인데 나중에는 아예 발을 땅에 딛지 못하게 종일 안고 다녀야 할 판이야.”

“송구합니다…….”

“그보다 무엇 하고 있나. 어서 들지 않고. 그대가 요즘 통 입맛이 없는 것 같아 부러 준비했거늘.”

황제가 빙긋 웃으며 산딸기를 턱짓했다.

“못 먹어 낯빛이 허옇게 뜬 데다 상처까지 있으니 차마 못 봐 줄 지경이 되었어. 그나마 있는 쓸모라고는 그 얼굴밖에 없는데 그것마저 상하면 어찌하나. 잘 먹어서 살도 좀 붙이고, 어여쁘게 가꿔야지.”

입술을 깨물고 마음을 후벼 파는 비난을 묵묵히 듣다가, 청은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성은이 망극합니다.”

머뭇대다 산딸기 하나를 집었다. 그러나 입술을 벌리는 순간 욱신거리는 통증이 확 번졌다.

“읏…….”

그는 무심결에 눈살을 찌푸렸다. 황제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그를 집요하게 바라보며 종용했다.

“먹으라니까?”

안간힘을 써 보았지만 피딱지가 앉은 입술을 달싹이는 것이 전부였다. 산딸기가 들어갈 정도까지 벌리는 것은 무리였다. 입 안이 죄다 붓고 터져 새콤한 과일은커녕 멀건 죽도 못 넘길 지경이었다.

“기껏 귀한 과일을 구해다 눈앞에 차려 줬더니, 이젠 먹는 것조차 스스로 못 하겠다고? 고작 넘어져 조금 긁힌 것치고는 엄살이 지나친데.”

“…….”

“다른 이유로 다친 것은 아니고? 가령…… 다른 이에게 해코지를 당했다든가.”

황제는 고개를 살며시 기울였다. 등골이 오싹했다. 청은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시선을 산딸기에만 고정했다.

“혹시나 그런 거라면, 예락, 그자의 얼굴 가죽을 도려낼까? 쇠로 된 틀로 입을 벌려 고정해 놓고 이를 모두 뽑을까? 땅에 머리를 처박아 이목구비가 모두 뭉개질 때까지 얼굴을 갈아 버릴까?”

“아닙니다. 그런 일은, 결코……. 없었습니다.”

“하면 무슨 연유일까. 아하, 그래. 과일이 마음에 안 들어 그러는 건가?”

산딸기를 가져왔던 궁인의 모습이 퍼뜩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황후에게 맞은 상처가 너무 아파 못 먹겠다 하면 황후가, 과일이 마음에 안 들어 먹기 싫다 하면 궁인이. 청이 황제의 권유를 거부하는 한 누구든 끔찍한 일을 당할 터였다. 결국 청은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마음에…… 듭니다.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청은 억지로 산딸기 하나를 물었다. 황제는 느슨히 팔짱을 끼고 손끝으로 의자 팔걸이를 툭, 툭, 느릿하게 두드리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간신히 피가 멎은 입가가 투둑 소리를 내며 도로 뜯어졌다. 엉망진창으로 찢어진 상처에서 피가 비쳤다.

그러나 너무 서두른 나머지 마음만 앞섰다. 안쪽이 퉁퉁 부어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는 입으로 황급히 과육을 베어 물려 하다가, 엉성하게 입술에 물려 있던 산딸기가 떨어졌다. 톡. 작고 붉은 과실이 탁자 아래 바닥에 나뒹굴었다. 청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와 동시에 팔걸이를 가볍게 건드리던 황제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먹기 싫으면 말을 하지 그랬나. 싫다고 입에 문 것을 뱉어 버리다니. 묶어 키우는 개새끼도 이따위로 굴지는 않겠어.”

“아닙니다……. 먹기 싫은 것이 아니라.”

“그게 아니면? 저것을 도로 주워 먹기라도 하겠다고?”

황제가 가만히 되물었다. 평소처럼 조곤조곤한 말투였지만 묘하게 날이 서 있었다. 청은 직감했다. 황제는 심기가 상당히 불편한 상태였다. 그것이 자신이 거짓으로 댄 형편없는 핑계 때문인 것 같아 한층 불안해졌다. 당황한 기색으로 입술을 달싹일 뿐, 청은 끝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황제는 산딸기가 가득 든 접시를 들어, 서슴없이 바닥에 쏟아부었다. 작고 둥근 열매들이 와르르 떨어져 사방으로 굴러갔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은 두 남자의 발치에 산딸기가 가득했다.

“폐, 폐하…….”

“뭘 그리 놀라. 그대가 짐승처럼 네발로 기며 바닥에 떨어진 것을 먹고 싶어 하는 것 같기에 그리해 준 것뿐인데.”

“…….”

“어서 먹어 봐. 이 계절에는 천금을 주어도 구할 수 없는 것을 아주 어렵게 구했어. 오로지 그대를 위해서.”

청은 망설였다. 바닥에 쏟은 음식을 먹게 하는 것은 노비에게조차 내리지 않는 몹시 모욕적인 벌이었다. 그러나 머뭇거림은 길지 않았다. 그에겐 상처 입을 자존심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자존심이 있었다면, 한겨울에 바깥에서 뺨이 붓고 입가가 터지도록 황후에게 뺨을 맞지도 않았을 터였다.

그는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앉아 있던 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마구잡이로 바닥에 흩어진 산딸기 중 하나를 집으려 했다.

“윽!”

황제가 발을 들어 그의 손등을 세게 짓밟았다. 단단하고 두꺼운 신발 밑창 아래 깔린 손이 으스러질 듯 아팠다.

“예락, 분수를 지켜야지. 세상 어느 개새끼가 앞발로 먹이를 집어 먹나?”

머리 위에서 태연한 지적이 내리꽂혔다. 청은 이를 악물고 뻣뻣이 굳은 상체를 어렵사리 낮추었다. 얼굴이 바닥에 쏟아진 산딸기를 향해 점차 가까워졌다. 위에서 그 광경을 빤히 지켜보던 황제가 발뒤꿈치로 그의 뒤통수를 퍽 찍어 눌렀다. 청의 몸이 확 고꾸라졌다. 그는 황제의 다리 사이 바닥에 고개를 들이박게 되었다.

“허억…… 큭…….”

그는 네발짐승처럼 엎드려 숨을 헐떡이면서 작은 과일을 물었다. 새콤달콤한 과즙이 상처투성이 입 안에서 톡 터졌다. 순간 눈가에 눈물이 핑 돌 만큼 아팠다. 그러나 억지로 참고 꾸역꾸역 씹어 삼켰다. 그는 이미 귀족으로서의, 대장군으로서의 긍지를 잃은 지 오래였다. 그리고 마침내 인간으로서 가진 최후의 존엄성마저 산산이 부서졌다.

황제는 흐뭇하게 웃었다. 거짓임이 빤히 보이는 변명을 주워섬기며 앙큼하게 둘러대는 꼴이 괘씸했지만, 그가 가져다준 과일을 얌전히 먹는 모습을 보니 화가 풀렸다.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그는 손을 뻗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가만히 넘겨 주었다. 바닥에 꿇어 엎드린 청의 얼굴이 드러났다. 허옇게 질려서 피딱지가 덕지덕지 앉아 있던 입술에 산딸기 과즙이 스며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앙탈이 심하고 고집이 센 게 흠이나, 생김새가 이리 어여쁘니 너그러이 참아 줄 만했다. 이런 개라면 침상에 묶어 두고 길러도 괜찮을 것 같았다.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던 황제의 손이 얼핏 청의 입가를 스쳤다. 과즙이 묻은 입술을 살짝 벌려 그 사이로 엄지를 밀어 넣었다.

“읏……!”

갑작스레 불쑥 파고든 손가락이 입 안의 여린 살을 느리게 더듬고 헤집었다. 목 뒤쪽을 타고 찌르르한 전율이 퍼졌다. 청은 산딸기를 먹던 것도 잊고 몸을 바짝 굳혔다. 단단한 손끝이 엉망으로 찢어지고 부어오른 상처를 짓이기고 긁어내릴까 봐 무서웠다.

때마침 창밖에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덜컹! 망가진 창틀이 큰 소음을 냈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청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입 안에 든 것을 반사적으로 깨물어 버렸다. 어설프게 물고 있던 손가락이 콰득 소리가 나게 씹혔다.

“창이 말썽이군. 왜 진작 고쳐 달라 하지 않았지?”

황제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입술 사이에서 손을 빼냈다. 타액으로 번들번들하게 젖은 엄지 끝마디에 선명한 잇자국이 나 있었다. 무심결에 어찌나 모질게 물었는지 시뻘겋게 피가 맺혔다.

청의 얼굴이 혈색이란 혈색은 죄다 빠져나가 새하얗게 질렸다. 황제의 몸에 상처를 내다니, 당장 목이 잘려도 이상하지 않을 중죄였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횡설수설했다.

“폐하, 죄, 죄송합…… 죄송합니다.”

“당장 사람을 시켜 손보아야겠어. 창틀이 망가져 찬 바람이 고스란히 드는데, 이대로 겨울을 어찌 나려 그러나.”

“제가 잘못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청아, 내 손이 마음에 들었어?”

망가진 기계처럼 사죄의 말을 반복하던 청이 움찔 굳었다.

“요즘 음식이란 음식은 입에 대는 족족 죄다 게워 낸다지. 입덧을 하는 황후보다도 더 유난이라던데. 한데 내 손가락에는 좋아서 달려드는군.”

청의 몸이 조금씩 떨렸다. 그는 감고 있던 눈을 힘겹게 떴다. 이윽고 의자에 걸터앉아 그를 내려다보고 있던 황제와 눈이 마주쳤다. 황제는 뺨을 붉히며 수줍게 웃고 있었다.

“내 살이 먹고 싶었으면 말하지 그랬어. 얼마든지 내주었을 텐데. 먹기 좋게 살점을 도려내어 줄까? 아니면 아예 뼈째 씹어 먹을 수 있도록 손가락을 몇 개 잘라 줄까?”

다정한 동시에 섬뜩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청의 뇌리에 한 가지 가정이 스쳤다. 청이 가시나무 울타리 너머로 달아나 죽으려 했을 때, 황제는 그에게 총을 쏘고 숲을 헤매면서까지 제지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청이 굶어 죽으려 한다면 황제는 그의 입에 자신의 피를 흘려 넣고 살을 먹여서라도 막으려 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황제가 벌건 잇자국이 난 손가락으로 청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누른 탓이었다. 청이 눈꺼풀을 파르르 떨고 입술을 작게 움찔거릴 때마다 황제의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홀린 듯 몇 번이고 입매를 쓸고 매만져 보다가, 머리칼 사이로 손을 넣어 뒷머리를 감싸며 입을 맞추었다.

* * *

“으읍…… 흡.”

억눌린 신음이 터졌다. 딱딱하고 굵은 기둥이 입천장을 찔러 헛구역질이 났다. 입 안의 상처가 홧홧하게 아팠다. 청은 몸을 뒤로 빼며 무의식적으로 입에 머금은 것을 뱉어 내려 했다. 황제의 손이 그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숨이 막혀 도리질 치는 청의 뒤통수를 성기 위에 처박았다.

“컥!”

간신히 약간 빠져나갔던 성기가 도로 콱 틀어박혔다. 상처가 도로 터졌는지 입 안에서 피 맛이 났다. 청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황제의 성기를 물었다. 우악스럽게 청의 뒤통수를 짓누르던 손에 힘이 빠졌다. 황제는 그의 머리를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자신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고 앉은 청의 등과 어깨가 가파르게 들썩였다. 산딸기즙으로 발갛게 물든 입술을 한계까지 벌려 자지를 물고 헐떡이는 모습이 제법 귀여워 보였다. 조그만 부리를 벌린 아기 새 같았다.

“흡, 흐, 읏…… 큽…….”

청의 여윈 뺨이 불룩하게 솟아올랐다. 두툼한 귀두가 입 안쪽 살을 긁으며 움직일 때마다 튀어나온 뺨의 형태가 바뀌었다. 그 위를 타고 눈물이 줄줄 흘렀다. 다친 곳이 어지간히도 아픈 모양이었다.

그러나 행위를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마당에서 넘어져 긁힌 상처일 뿐이라고, 먼저 거짓말을 한 것은 청이었다. 청이 먼저 사실을 털어놓기 전까지는 황제도 그 장단에 맞추어 줄 생각이었다. 아파 죽을 지경이면서도 필사적으로 참는 청이 발칙하고 사랑스러웠다.

“맛있어?”

황제가 희미하게 웃으며 물었다. 청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거대한 성기가 입 안을 가득 메우고 목구멍까지 찔러 숨 쉬는 것조차 힘겨웠다. 황제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나긋하게 속삭였다.

“음식을 통 먹으려 하질 않으니 좆물이라도 먹여야지. 응? 네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잖아. 저번에도 한 방울이라도 더 마시려 허겁지겁 내 좆을 빨았으면서…….”

황제는 단단한 신발을 신은 발로 청의 다리 사이를 지그시 밟았다. 발을 슬쩍슬쩍 움직이며 발기하지 않은 성기를 옷 위로 느리게 굴렸다.

“흐, 으읏……!”

청이 크게 움찔했다. 순간 성기가 짓밟혀 터져 버리는 게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황제가 발로 성기를 살며시 누르며 문질러 줄 때마다 그의 허벅지가 파들파들 떨렸다. 바닥에 맥없이 늘어져 있던 손이 황제의 무릎 위를 짚었다. 상대를 밀어내려는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손 뒤로 돌려. 어딜 허락도 없이.”

성기를 밟은 발에 꾸욱 힘이 들어갔다. 청이 헉, 하고 밭은 숨을 들이켰다. 그는 팔을 뒤로 돌려 벌벌 떨리는 손끝으로 양손을 어렵사리 맞잡았다. 청은 우악스러운 발길에 꾹꾹 밟히며 서서히 발기했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거북하고 고통스러운, 체벌 같은 행위일 뿐인데. 반쯤 일어선 성기가 황제의 발밑에서 꺼떡거렸다.

“헉, 흐읍…….”

피하려 해 보았자 제자리에서 몸을 움찔움찔 뒤트는 것이 전부였다. 바닥에 꿇어앉은 청의 아래에서 산딸기가 짓이겨져 무릎과 정강이에 온통 붉은 물을 들였지만, 정작 그는 인지하지 못했다.

황제는 느긋하게 청의 입 안을 즐겼다. 숨이 막혀 견딜 수 없어진 청이 고개를 물릴 때마다 머리채를 잡아 도로 끌어왔다. 뒤통수를 눌러 억지로 좆을 삼키게 하면 괴로워하면서도 복종했다.

따뜻하고 말캉말캉한 혀 너머로 성기를 연거푸 집요하게 찔러 넣었다. 그것을 몇 번 반복하자, 결국 좁은 목구멍이 미끄덩하게 벌어져 귀두 끄트머리를 간신히 삼켰다. 청이 색색 버거운 숨을 내쉴 때마다 성기를 꽂아 넣은 목구멍이 경련하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오지 않기를 바랐던 끔찍한 절정이 마침내 찾아들었다. 청의 엉덩이가 본능적으로 들썩였다. 황제의 성기를 문 턱에 바짝 힘이 들어가고 목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크윽, 읏, 흐, 윽!”

그는 목구멍이 성기로 틀어 막힌 채 딱딱한 신발에 사타구니를 밟히며 사정했다. 잔뜩 짓눌린 성기에서 정액이 꿀럭꿀럭 새어 나와 옷을 적셨다. 황제는 그의 사정이 끝날 때까지 집요하게 성기를 문질렀다.

“정말 개새끼나 다를 바 없군. 가도 된다고 허락한 기억이 없는데 혼자 멋대로 질질 싸기나 하고. 자지를 밟아 주는 게 그리 좋았어?”

청은 눈도 못 뜬 채 흐느꼈다. 흥건히 젖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성기를 한가득 머금고 서럽게 울어 대는 얼굴이 흉포한 욕망을 부추겼다.

황제는 청의 머리를 자신의 다리 사이에 꽉 눌렀다. 청이 버둥거리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더, 더, 더 깊게 밀어 넣었다. 꽉 조여진 목구멍을 억지로 벌리고 성기가 꾸역꾸역 들어갔다. 저 깊은 곳까지 한 번 찔러 넣었다가 다시 쑥 빼냈다. 청의 뒤통수를 붙잡고 앞뒤로 거세게 움직였다. 청은 무릎을 꿇고 앉아 무력하게 흔들렸다. 과격한 움직임에 등 뒤로 맞잡은 손이 몇 번이고 풀릴 뻔했다.

“큭…… 허윽, 으, 흑…… 억……!”

숨을 전혀 쉴 수 없었다. 커다란 기둥이 거칠게 처박힐 때마다 시야가 새까맣게 점멸하고 명치가 욱신욱신 아팠다. 의식이 가물가물해질 때까지 입 안을 짓이기다가, 황제는 청의 목구멍 깊은 곳에 사정했다. 울컥울컥 싸 넣던 도중에 성기를 쑥 빼냈다. 길고 굵은 기둥이 혓바닥과 입천장을 죄다 긁으며 빠져나왔다.

“쿨럭, 컥…….”

청이 헐떡이며 연거푸 기침을 했다. 미처 못 삼킨 정액이 입가를 타고 질질 흘렀다. 입 밖으로 빠져나오고 나서도 사정이 멎지 않았다. 쭉쭉 쏘아져 나온 정액이 힘겹게 기침을 하는 청의 얼굴에 마구잡이로 튀었다. 속눈썹에 진득하게 맺히고 콧잔등에 후두둑 뿌려졌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황제는 자신의 성기 밑동을 붙잡고 귀두를 청의 얼굴에 문질러 남은 정액을 처발랐다. 뺨의 상처가 희뿌옇게 덧씌워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황제는 자신의 정액을 뒤집어쓴 채 헐떡이는 청의 얼굴을 흡족하게 뜯어보았다.

“잘 받아먹으라고 싸 줬더니, 칠칠맞지 못하게 줄줄 흘리기나 하고. 하나부터 열까지 손이 안 가는 데가 없어.”

그는 자신의 다리 사이 바닥에 주저앉은 청의 고개를 들게 하고 긴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살살 닦아 주었다. 제국의 그 어떤 옷보다도 고귀하고 우아한 황제의 비단옷이 정액 범벅이 되었다.

“옷도 벗어야지?”

황제의 시선을 눈치챈 청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옷을 입은 채로 사정해 버린 탓에 사타구니에 작게 얼룩이 져 있었다.

“오줌싸개 어린애 같군.”

머리 위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청은 수치심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푹 숙였다. 머뭇거리다 결국 간헐적으로 떨리는 손을 옷고름에 가져갔다. 황제가 지켜보는 앞에서 옷가지가 하나하나 벗겨졌다.

이제껏 황제의 앞에 나신을 드러낸 것이 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청은 매번 자괴감과 모멸감을 느꼈다. 풍만하고 굴곡진 여인의 몸도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음인 사내의 몸도 아닌, 굵은 뼈대가 불거진 데다 비쩍 말라 흉물스러운 몸뚱이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성기를 가리던 속곳을 벗자 귀두 끝에서부터 축축한 얼룩에까지 투명한 액이 길게 늘어졌다. 옷감 안쪽이 정액으로 질척하게 젖어 엉망이었다. 지독하게 수치스러웠다. 청은 허둥지둥 옷을 마저 벗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제 그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되었다.

“일어나.”

“흐으, 읏…….”

오래도록 무릎을 꿇고 있었던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청은 휘청거리다 간신히 중심을 잡고 섰다. 황제는 아래를 풀어 헤치고 성기만 드러낸 차림 그대로 의자에 나른하게 걸터앉아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한 번 사정했음에도 불구하고 흉흉한 성기는 여전히 꺼떡꺼떡 일어서 있었다.

관례를 치르기 전의 청은 누가 보아도 그저 곱상하게 잘생긴 귀족 도련님이었다. 그 이후에는 체격이 커지고 선이 굵어져 제법 청년 무관다운 모습을 갖추었다. 그러나 지금은 둘 다 아니었다.

안색이 희게 질린 데다 몸은 살이 빠져 호리호리했으며, 풀어 헤친 긴 머리칼 너머로 보이는 눈초리는 항상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정액에 젖은 입술을 파르르 떨며 흐느끼는 꼴이 처연하기 짝이 없었다. 허벅지에는 채찍질을 당한 상처가 남아 있고, 한쪽 유두에는 청옥 귀걸이가 꽂혔다. 황제의 정부. 지금의 청은 딱 그 꼴이었다.

“요 며칠 물 한 모금 못 넘겼다더니, 그 와중에 좆물 만들어 낼 기운은 있었던 모양이야?”

황제는 사정을 마치고 힘이 빠진 청의 성기를 가볍게 건드렸다. 가축의 생식기를 점검하듯 무감정한 손길이었다. 청이 흐윽, 하고 애처롭게 신음하며 몸을 움찔했다.

“뒤돌아.”

청은 비틀대며 그의 말에 따랐다. 옅은 흉터가 군데군데 보이는 등과 허리, 엉덩이가 눈앞에 드러났다. 황제는 청의 엉덩이를 툭툭 치며 명했다.

“직접 넣어 봐.”

“헉…….”

“이 구멍으로 내 좆을 삼킨 게 몇 번인데, 이젠 혼자 할 줄도 알아야지.”

“폐, 흐으, 폐하…….”

“아니면 이번엔 산딸기를 뒤로 먹여 줄까? 더 들어가지 않을 때까지 듬뿍 욱여넣으면 배가 잔뜩 불러 오겠지. 그 상태로 좆을 박으면 속에 든 산딸기가 죄다 터져 후장에서 즙을 질질 흘릴 터이고. 그래, 그것도 제법 나쁘지 않겠어.”

하염없이 아래만 내려다보고 있던 청의 시야에 바닥에 나뒹구는 산딸기 열매들이 들어왔다. 양손 가득 모아도 넘칠 정도로 많았다. 저것들이 자신의 내장에 우글우글 들어찬 광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렇게 할까? 응? 청아.”

황제는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선 청을 향해 가만히 물었다. 언뜻 청에게 결정권을 주는 것 같았지만, 사실 처음부터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아, 아니요, 흐으, 제가, 읏, 넣…… 겠습니다.”

청은 주춤주춤 다가가 황제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뒤로 손을 뻗어 황제의 성기를 쥐었다. 한껏 성이 난 뜨끈뜨끈한 기둥이 잡혔다. 그는 서툴게 황제의 성기 위에 주저앉으려 했다. 아까 싸지른 정액이 묻어 있어 귀두가 번들거렸다. 꼿꼿이 선 굵은 성기가 구멍 위에서 몇 번 미끄러졌다.

“한두 번 해 본 것도 아닌데 어찌 이리 어설피 굴어. 구멍에 힘 빼고…… 엉덩이 더 벌려서. 좆대가리를 제대로 물어야지.”

황제가 나직하게 핀잔을 주었다. 그러면서도 청에게는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삽입을 도와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청은 안간힘을 쓰며 악전고투했다. 어정쩡한 자세를 취한 그의 허벅지와 종아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다른 때에는 황제가 그의 허리를 잡고 들어 올려 강제로 성기 위에 주저앉혀 버렸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리에 힘이 빠져 더는 버틸 수 없을 것 같을 때쯤, 결국 정액이 질척하게 묻은 입구에 성기 끄트머리가 힘겹게 물렸다. 처음 고개를 디밀고 나자 다음은 조금 더 수월했다. 체중이 실려 귀두가 미끄덩하게 파고들었다.

“아, 앗, 흐으…….”

골반과 내벽을 벌리며 성기가 느리게 길을 냈다. 회음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청의 허벅지가 한층 더 심하게 떨렸다. 커다란 기둥이 내장 안으로 슬금슬금 밀고 들어오는 감각이 적나라했다. 점차 배가 불러 왔다. 장기가 죄다 뻐근하게 짓눌려 찌릿찌릿했다.

자꾸만 깊어지는 삽입이 두려웠다. 그는 필사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짚을 것을 찾았다. 차마 황제의 몸을 받침대 삼아 체중을 지탱할 수는 없어, 가까스로 의자 팔걸이를 붙잡았다.

“아으, 흣, 으윽, 흐, 아, 아……!”

청은 드문드문 잘린 신음을 토하며 숨 가쁘게 헐떡였다. 구멍의 주름이란 주름이 전부 펴지도록 빠듯하게 삼켜 보았자 절반이 한계였다. 그는 기둥을 어설프게 뒤로 문 채 몸을 들썩였다. 체중을 실어 힘겹게 내려앉았다가, 허리와 엉덩이를 안쓰러울 정도로 파들파들 떨며 도로 뽑아냈다. 뻑뻑한 속살이 성기에 들러붙어 함께 딸려 나갈 것 같았다.

“으읏…… 흐, 윽.”

정직하게 위아래로만 움직이다가, 단단한 귀두가 명치를 턱턱 치받아 올리는 느낌에 덜컥 무서워졌다. 이대로 무방비하게 찔리다간 성기가 배 안을 망가뜨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은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몸을 조금씩 뒤틀었다. 성기가 수직으로 퍽퍽 꽂혀 드는 것을 피하려 골반을 비틀고 허리를 이리저리 돌렸다. 성기를 삼켰다 뱉어 내는 각도가 미묘하게 바뀌었다.

황제는 은은하게 홍조 어린 얼굴로 나른하게 기대앉아, 그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곧게 골이 팬 등허리가 힘겹게 움찔거렸다. 어떻게든 성기를 얕게 받으려 수를 쓰는 게 빤히 보였다.

“…….”

그는 피식 웃었다. 살살 해 줄 마음이 생기기는커녕, 애처롭게 벌벌 떨며 이리저리 피하는 꼴이 더욱 가학욕을 자극했다. 청이 몸을 뒤틀 때마다 구멍이 씰룩거리고 내벽이 자잘하게 옴쭉대며 성기를 쥐어짰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생각해 낸 게 고작 이런 거라니. 어찌 이리 깜찍한 짓만 골라 할까 싶었다.

“자지 제대로 삼켜. 끝만 오물오물 씹어서 대체 어느 세월에 끝을 보겠다고.”

황제는 큼직한 손을 들어 엉덩이를 철썩 내리쳤다. 청이 낮게 흐느끼며 몸을 굳혔다. 의자 팔걸이를 움켜쥔 마른 손등에 푸르스름하게 핏줄이 도드라지는 것이 보였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황제는 청이 엉덩이를 내려 성기를 베어 무는 때에 맞추어 허리를 힘껏 쳐올렸다. 청의 몸이 앞으로 왈칵 쏠릴 만큼 세차게. 쾅. 겨우 절반쯤 물려 있던 성기가 내벽 깊은 곳까지 단숨에 처박혔다. 배 안을 주먹으로 후려갈긴 것 같은 충격이 찾아들었다.

“흐, 아, 아악!”

청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자지러졌다. 컥컥 숨넘어가는 소리가 뒤이어 연거푸 났다.

“허억, 흐, 아윽, 찌, 찢어질 것, 같……. 아, 안 돼, 흐악!”

“안 되긴…….”

황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퍽퍽 기계적으로 쳐올렸다. 청이 의자 팔걸이를 붙잡고 간신히 버티는 것마저 신경에 거슬렸다. 그는 청의 양팔을 움켜쥐고 뒤로 확 꺾어 버렸다. 졸지에 체중을 분산할 곳을 잃은 청이 황제의 사타구니 위에 털썩 주저앉게 되었다. 성기가 명치를 정통으로 퍼억 짓이겼다. 헛구역질이 났다.

“우윽, 흐, 헉!”

황제가 쉬지 않고 퍽, 퍽, 박아 올릴 때마다 어정쩡하게 벌어진 청의 허벅지 사이에서 성기가 털렁거리며 흔들렸다. 바닥에 묽은 액이 하나둘 떨어졌다. 충격을 못 이겨 청의 몸이 자꾸 앞으로 턱턱 떠밀렸다. 상체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한껏 숙여졌으나, 황제가 뒤에서 팔을 붙들고 있어 바닥에 고꾸라지는 참사는 면했다.

그러다 황제는 아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청이 비틀대며 엉겁결에 따라 일어섰다. 청의 엉덩이 살이 눌릴 때까지 바짝 밀착하여 성기를 깊게 밀어 넣은 채였다.

“청아, 걸어 보련? 저 침상까지…….”

황제가 그의 등 뒤로 몸을 낮추어 조곤조곤 속삭였다. 꺾인 팔이 빠질 듯 아팠다. 청이 흑, 하고 신음하며 어정쩡하게 허리를 굽혔다. 배 안에 든 성기가 낱낱이 느껴졌다.

“도중에 좆이 빠지면 처음부터 다시 걷게 할 거야.”

“헉, 허억…….”

청은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열 걸음 정도 앞에 있는 침상이 몹시도 멀게 느껴졌다. 그는 힘겹게 한 걸음 내디뎠다. 산딸기가 짓이겨져 드문드문 붉은 물이 든 바닥 위로 맨발이 놓였다. 추포된 죄인처럼 양팔을 붙잡혀 등 뒤로 꺾여서는, 큼직한 성기에 꿰뚫린 채였다.

황제와 체격 차이가 있어, 청은 속에 품은 성기를 놓치지 않으려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야 했다. 기둥이 내벽을 타고 찌걱 미끄러질 때마다 흠칫 놀라 구멍을 바짝 조였다.

“흑……. 흐으, 으, 윽, 읏……!”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내디딜 때마다 종아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청의 맨다리를 타고 누구의 것인지 모를 체액이 줄줄 흘러 바닥을 적셨다. 희멀건 목덜미와 등에 온통 땀이 배었다. 몸이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황제는 절박하게 꽉꽉 조여드는 내벽의 감촉을 즐기며 청의 걸음에 맞추어 느리게 걸었다.

그 짧은 거리를 가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황제와 청이 몸을 겹친 채 지나온 길을 따라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있었다. 침상이 어느덧 팔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황제는 청의 목을 잡아 침상에 내동댕이치듯 찍어 누르며 그 위로 올라탔다. 아슬아슬하게 물려 있던 성기가 다시 쑥 파고들었다. 그 상태로 체중을 실어 거칠게 쾅쾅 박아 넣었다. 숫제 청을 침상과 자신 사이에 처박아 짓눌러 버릴 기세였다.

“흐으, 헉, 커억…….”

황제의 너른 등과 길게 늘어진 옷자락에 가려, 뒤에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의 아래에 깔려 힘없이 버둥대는 청의 종아리와 맨발뿐이었다. 잔뜩 힘이 들어간 발끝이 새하얗게 질려 오므라들었다.

엎드린 채로 오래도록 황제를 받다가, 침상에 마구잡이로 짓이겨지고 비벼지던 그의 성기에서 정액이 질질 흘러나왔다. 청은 자신이 사정한 것도, 이불이 흠뻑 젖어 들어 가는 것도 몰랐다. 그저 배가 꽉 눌려 몹시 숨이 막혔고, 뒤로 꺾인 팔이 욱신거리다 못해 얼얼했으며, 한껏 좁아진 내장을 퍽퍽 쑤셔 대는 황제의 성기에 정신이 없었다.

“아, 아, 아아……!”

기나긴 절정이 그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그는 입가로 타액을 줄줄 흘리며 망가진 기계처럼 신음했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이 초점을 잃고 침상 위를 더듬었다.

“후우…….”

황제는 길게 숨을 내쉬며 청의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귀두가 입구에 턱 걸릴 정도로 길게 빼냈다가 저 안까지 밀어 넣으며 크게 움직였다. 굵은 핏줄이 울퉁불퉁하게 돋아난 성기가 질척하게 젖어 있었다.

“먹여 줄까?”

청은 황제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물음에 대답해야만 이 끔찍한 쾌락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네, 네에…….”

그는 제대로 다물리지도 않는 입술을 달싹여 허겁지겁 대답했다. 발음이 질질 샜다.

“먹고 싶은 것, 얼마든지 말해. 내 좆물이든, 살이든, 심장이든……. 뭐든 다 내줄 테니.”

“머…… 머, 먹여 주십시오, 흐으, 폐하, 폐하 좆물…… 아아, 읏, 허억……!”

“그래, 청아, 흐읏, 그렇게…….”

황제의 말끝이 잇새로 사그라졌다. 그는 이를 악물고 허리를 크게 털어 힘껏 쑤셔 박았다. 조여드는 내벽의 저항을 뿌리치고 저 안까지 들어가 사정했다. 배꼽 바로 아래쪽에 정액을 싸지르다가 도중에 성기를 끄트머리만 남기고 쑥 빼내 입구 부근에서 남은 것을 쏟아 냈다. 내장 깊은 곳부터 구멍 바로 앞까지, 내벽 전체가 정액으로 질척해졌다.

“……!”

청의 고개가 확 젖혀졌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입이 무력하게 벌어진 채였다. 그는 신음조차 내지 못하고 고요하게 울부짖었다. 잔인한 쾌락이 내벽을 벅벅 긁어 대고 성기 뿌리 안쪽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눈앞이 쉴 새 없이 희고 파랗고 빨갛고 노랗게 번쩍였다.

사정을 갓 마치고 이불에 파묻혀 있던 그의 성기에서 맑은 물이 울컥울컥 뿜어져 나와 침상을 적셨다. 정액이 스며들어 있던 이부자리에 또다시 얼룩이 졌다. 얼룩의 면적이 하도 넓어, 청의 사타구니는 물론이고 아랫배와 허벅지까지 축축해졌다.

쾌락은 끔찍하리만치 천천히 물러갔다. 한참을 바들바들 떨며 미온적으로 몸부림치다가, 등 뒤로 꺾였던 팔이 풀려나고 나서야 청의 이성이 약간 돌아왔다.

“황후가 아침에 이곳에 들렀다지. 황후와 함께 산책하다 발이 걸려 넘어지기라도 한 모양이야……?”

황제가 자신의 아래에 깔려 엎드린 그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나지막하게 물었다. 사정의 여운으로 목소리가 달짝지근하게 풀려 있었다. 노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청은 그에게 안긴 채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소름이 쫙 끼쳤다. 찬물을 끼얹은 듯 모골이 송연해졌다.

“날이 이리 추운데 산책은 왜 하나. 지금도 툭하면 비실대는데, 눈이 내리기라도 하면 땅이 얼어붙어 더 쉬이 다칠 테지. 그러니 청아, 봄이 되기 전까진 안에만 얌전히 있어…….”

황제는 거짓말을 한 것을 꾸짖지도 않고, 황후와 무슨 대화를 했느냐 캐묻지도 않았다. 그저 그렇게만 속살거리며 청의 뺨에 자신의 뺨을 가만히 맞댈 뿐이었다. 다친 뺨을 타고 독약 같은 온기가 번졌다.

* * *

그 뒤로 청은 황제의 말마따나 처소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이전에도 그는 누군가 찾아 주지 않으면 온종일 죽은 듯 방에 틀어박혀 있었으므로.

청은 삶을 포기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죽을 기운 또한 없었다. 사는 것이 힘에 겨웠으나 죽기에도 지쳤다. 아주 오래 잠을 자고, 누워서 멍하니 천장과 벽을 응시하다가, 가끔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어느 날은 눈이 내렸다. 자고 일어나 보니 창밖이 온통 새하얬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세차게 내린 눈은 어느덧 두 뼘이 넘는 높이로 쌓였다. 사락사락 눈 내리는 소리에 바람 소리며 창틀 덜컥이는 소리가 모두 묻혔다. 제국에서 가장 화려하고 치열한 장소인 황궁 한복판이거늘, 이곳만은 전혀 다른 세계 같았다.

소복이 쌓인 눈은 살짝 녹았다 얼기를 반복하며 단단히 다져졌다. 풀 한 포기 없이 멀겋게 맨땅이 드러나 있던 앞마당이 투명한 수정 같은 빙판이 되었다. 물끄러미 창밖의 정경을 바라보다가, 청은 피식 웃었다. 바깥이 저 지경이니 이젠 나가고 싶어도 못 나갈 판국이었다.

종일 하는 일이라고는 이불 속에 축 늘어져 있는 것뿐인데 온몸이 아팠다. 시도 때도 없이 속이 메슥거렸고, 아무리 자도 참을 수 없이 졸렸다. 눈발을 헤치고 설원을 가로질러 말을 달리던 고작 1, 2년 전의 자신은 어디로 갔나 싶었다.

앙상하게 시들어 버린 나뭇가지처럼 이제 자신도 시들 일밖에 없겠다 생각할 무렵, 빙판을 덜컹덜컹 울리며 마차 한 대가 처소 문 앞에 당도했다. 청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비틀비틀 일어섰다.

“이랴!”

털옷을 입고 가죽 장갑을 낀 시종이 익숙한 솜씨로 고삐를 당겨 마차를 세웠다. 여기까지 오는 사이에 새빨갛게 코끝이 얼었다. 그는 문간에 모습을 드러낸 청을 향해 공손하게 절을 올렸다. 말이 새하얀 콧김을 뿜으며 가볍게 발을 굴렀다.

마차 옆면에 찍힌 황룡 문양이 선명했다. 이 제국에서 황룡의 상징을 쓸 수 있는 것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황제가 직접 보낸 마차였다.

* * *

황궁 한복판에 위치한 널따란 호숫가가 꽁꽁 얼어붙었다. 황궁의 연회 장소로 즐겨 쓰이는 누각이 얼음 호수 위에 홀로 쓸쓸히 솟았다. 다른 계절에는 탁 트여 있던 창이 지금은 솜을 넣어 누빈 천으로 막혀 있었다.

청이 황제를 처음 만났던 장소도 바로 이곳이었다. 흥청망청 이어지는 연회 도중에 심드렁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저만치 가장자리에 있던 6황자를 발견한 것이다.

다른 이들은 겉으로는 쉬쉬하면서도 뒤에서는 6황자를 비천하고 불길하다 손가락질했다. 하지만 청은 그런 소문에 전혀 연연하지 않았다. 기이하리만치 밝은색의 눈동자와 머리카락도, 아무 표정 없는 무미건조한 얼굴도, 조금도 꺼림칙하지 않았다.

그저 상대가 순수하게 궁금했다. 누구는 술과 요리에, 누구는 음악에, 누구는 권력에. 모두가 각자의 욕망에 가득 취해 들떠 있는 이 연회장에서 오직 청과 6황자, 단둘만이 지루해 죽겠다는 눈을 하고 있었으므로.

“봄이 되고 꽃이 피면, 호수에 배를 띄울까?”

나지막한 물음이 그의 정신을 일깨웠다. 넋을 놓고 있던 청이 소리 없이 움찔했다.

“예……. 예?”

그는 언젠가부터 황제의 말 한 마디, 손짓 한 번에 필요 이상으로 놀라게 되었다. 맹수의 털끝만 보여도 지레 겁을 집어먹고 도망치는 초식 동물처럼. 그뿐이랴.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허공만 보고 있기 일쑤였으며, 멋대로 정신을 놓았다고 혼이 날까 봐 다급히 대답하다 말을 더듬기도 했다. 이전의 날카롭고 진중하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예락 그대가 약조했지 않나. 꽃이 피는 계절에 나를 뱃놀이에 데려가 주겠다고. 그대도 나도, 이제껏 정무를 보는 데 바빠 나들이 한 번 가지 못했지.”

황제가 생긋 웃으며 덧붙였다. 누각 중앙에서 타닥타닥 타오르는 화롯불이 그의 흰 뺨에 발그스름한 음영을 드리웠다.

화로 위에 놓인 쟁반에는 둥그스름하게 쪄 낸 꿀떡이 있었다. 떡 안에 잔뜩 넣은 꿀이 추위에 식지 않도록 불 위에 올려 상시 따끈따끈하게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 옆에는 김이 폴폴 피어오르는 찻주전자와 뜨겁게 데운 술병이 나란히 놓였다. 달짝지근하게 졸인 꽃 모양 과자도 보였다. 이 계절에만 즐길 수 있는 사치스러운 다과상이었다.

“꽃잎이 휘날려 물 위에 흩어지는 풍경이 그리 아름답다지?”

“아…….”

자신이 그런 말을 했는지조차 가물가물했다. 꽃잎, 봄, 뱃놀이. 지금의 청과는 너무도 먼 단어들이었다.

“두세 달 정도면 슬슬 날이 풀릴 테지. 그때쯤 뱃놀이 준비를 하라 일러야겠군.”

황제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에 덧씌운 바람막이 사이로 어렴풋이 호수의 풍경이 보였다. 타오르는 화롯불만 멀거니 응시하던 청이 무심코 되물었다.

“제가……. 그때까지 폐하의 곁에 있을까요?”

말없이 호수를 내다보다가, 황제는 스르르 고개를 돌려 청을 향했다. 섬뜩하리만치 아무 표정 없는 얼굴이었다. 연한 색의 눈동자에 불꽃이 비쳐 기이한 빛으로 일렁였다.

무심코 눈을 들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오싹한 전율이 비단 방석에 앉은 발끝에서부터 타고 올라 순식간에 정수리까지 닿았다. 뒤늦게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것인지 깨달았다. 청의 어깨가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로 크게 들썩였다.

“아, 아닙…… 아닙니다, 폐하.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예락. 그대 처소의 창문, 망가진 지 꽤 되었던데. 처마에선 물이 새고, 화로엔 제대로 불이 붙지도 않고.”

황제는 들고 있던 술잔을 상에 달칵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청은 한 번 더 흠칫했다. 갈 곳을 잃은 시선이 하염없이 바닥을 더듬고, 입술이 파들파들 떨리기 시작했다.

“왜 진작 고쳐 달라 하지 않았지?”

“…….”

“내 곁을 떠나려고? 어차피 봄이 오기 전에 떠날 테니 고칠 필요 따윈 없다 생각해서?”

“…….”

“나를 떠나서 어디로 가려고. 황도에 있는 그대 저택으로? 아니면 다른 곳으로?”

가만히 눈을 내리깐 채 조곤조곤 말하다 말고, 황제는 제풀에 희미하게 웃어 버렸다. 속내가 어떻든 간에 엷게 미소 짓는 얼굴만큼은 단아하기 그지없었다.

“이 나라에 그대가 달리 발붙일 곳이 있을 것 같은가? 제힘으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주제에, 그 몸으로 어딜 가겠다고. 몇 발짝 가지도 못하고 맨땅에서 발이 엉켜 볼썽사납게 고꾸라지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

한참 침묵을 지키던 청은 고개를 숙였다. 해묵은 자괴가 가슴을 찢어발기고 마구 할퀴어 놓았다.

“압니다. 저는 이젠…… 갈 곳이 없습니다. 갈 수도 없게 되었고…….”

이제 그는 황제에게 아무런 쓸모도 없게 되었다. 목숨 걸고 악착같이 지켰던 오른팔로서의, 충신이자 책사로서의 역할마저 잃어버렸으니.

지금이야 황후가 회임 초기라 안정을 취해야 하는 탓에 욕구 해소용으로 청을 찾는다지만, 계절이 바뀌어 아이가 태어나면 황제는 그의 존재 따위는 영영 잊게 되리라. 다 죽어 가는 흉한 몰골의 사내놈 따위보다야 갓 태어난 자신의 아이가 훨씬 소중하고 어여쁠 터이니.

“그러니, 그러니까……. 제가 먼저 폐하를 떠날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청이 먼저 떠나려 하지 않더라도 다른 무언가가 그를 기어이 황제에게서 떼어 놓을 터였다. 청은 자신이 살아서 이 겨울을 무사히 넘길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피처럼 새빨간 과녁에 꽂힌 화살 세 발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자꾸만 이상 증세를 호소하는 몸도 그 믿음을 뒷받침했다.

그는 이제껏 황궁에 수없이 피바람을 일으켰다. 수많은 이의 원성과 증오를 들었다. 그 업보로 마지막까지 궁 안에서 죽어 궁에 묶인 잡귀가 될 모양이었다.

“폐하께서 똑같이 사내를 안으셔도……. 음인을 안으면 운우지락(雲雨之樂)이 되지만 평인을 안으면 계간(鷄姦)이 됩니다.”

“…….”

“지금 저는 폐하의 허물이고 오점입니다. 신하로 두고 부리지 않으실 거라면, 내치지도 않으실 거라면…… 차라리……. 차라리.”

“그대가 어째서 내 허물이고 오점이지?”

청의 말을 묵묵히 듣던 황제가 대뜸 물었다. 너무도 근본적이고 기초적인 물음이라 오히려 말문이 막혔다.

“저, 저는 후사를 생산하지도 못하고…….”

“후사라.”

뜻밖에 황제는 노여워하지도 불쾌해하지도 않았다. 그는 비스듬하게 턱을 괴고 일렁이는 화롯불을 지켜보다가, 문득 피식 웃었다.

“필요 없어. 이따위 더러운 피를 남겨서 무엇 하려고.”

그가 대수롭지 않게 던진 자학적인 말을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서늘한 경악이 퍼졌다. 무의식적으로 한 가지 의문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럼 황후가 가진 아이는?

“예락 그대는 쓸데없는 생각이 너무 많아. 그 작은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지. 주자감(胄子監)의 학자들도 그대처럼 시시각각 골머리를 앓진 않겠어.”

느슨한 자세로 기대어 있던 황제가 스르르 몸을 일으켜 바로 앉았다. 비단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마치 커다란 뱀이 바닥을 기는 기척 같았다.

“허물이니 오점이니 그런 것을 시시콜콜 따졌으면, 애초에 그대를 받아들이지도 않았지. 그래, 그대도 마찬가지일 테고.”

“하지만, 폐하…….”

“청아.”

황제가 그의 말을 도중에 잘랐다. 청은 위태롭게 흔들리는 눈으로 입을 다물었다. 황제의 목소리는 그에게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속박이었다. 나지막하게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주술에라도 걸린 듯 꼼짝할 수 없게 되었다.

“아무 생각 하지 마. 지금만큼은.”

따뜻하고 큰 손이 청의 눈을 가렸다. 청은 입술을 살짝 벌린 채 그대로 굳었다. 시야가 온통 캄캄해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할 말을 찾지 못해 황망하게 달싹이던 입술 위에 이윽고 타인의 입술이 닿았다. 처음에 꽃잎을 머금듯 입술 위를 가볍게 문지르다가, 망설임 없이 파고들어 왔다. 황제는 청의 턱을 단단히 붙잡아 끌어당겼다. 상대방의 혀가 목구멍을 틀어막고 혀를 휘감아 뽑을 것 같았다. 청은 황제가 밀어붙이는 대로 떠밀렸다. 상체가 점차 뒤로 기울다가, 마침내 바닥에 등을 대고 풀썩 쓰러졌다.

그 순간 황제에게서 시원한 향이 터져 나오듯 퍼졌다. 향이 너무도 짙어, 코와 입에 콸콸 쏟아 넣는 것 같았다. 철철 흘러넘친 향이 청에게 듬뿍 묻었다. 입술에 묻고 맞닿은 가슴팍에 묻고, 머리칼에까지 스몄다.

“헉!”

숨이 턱 막혔다. 몸속의 장기가 죄다 요동치는 것 같은 충격이었다. 한순간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다시 돌아왔다.

한 번 맡아 본 적 있는 향이었다. 그때는 그저 황제의 옷에 스민 향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날따라 의복을 관리하는 궁인들이 실수라도 했는지, 지나치게 향이 진하게 배어들어 버린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그 향이 어째서 지금 갑자기…….

“흐읏, 아…… 흐, 윽!”

청은 눈이 가려진 채 황제의 아래에서 힘겹게 발버둥 쳤다. 본능적으로 상대를 피하려 몸을 뒤틀고 맨손으로 바닥을 벅벅 긁어내렸다. 배 안이 불이 붙은 것처럼 뜨거워졌다.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황제는 청이 괴로워하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한참이나 그의 입 안을 집요하게 헤집었다. 볼 안쪽을 핥고 혀끝으로 혀 아래 여린 살을 질척하게 쑤셨다. 젖은 점막을 빨고 문지르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는 청이 거의 질식 직전에 달했을 때쯤에야 느릿하게 놓아주었다. 번들번들하게 젖은 입술에 핏기가 돌았다.

“허억, 흐, 으…… 햐, 향이, 읏, 너무 진해서…….”

청이 아래턱을 파들파들 떨며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절박하게 몰아쉬었다. 자제하지 못하는 눈물이 눈가를 타고 줄줄 흘렀다.

“향?”

황제가 조용히 되물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청은 그저 미친 듯이 고개를 저으며 자꾸만 몸을 움츠렸다.

그는 청을 느릿하게 훑어보았다. 공황 상태에 빠져 어찌할 줄을 모르는 얼굴을 빤히 주시하다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긴 옷자락 아래, 그의 앞섶이 불룩하게 솟아 있었다. 부풀어 오른 성기를 옷감째로 움켜쥐었다. 큼직한 손아귀에 잡힌 성기에서부터 불길이 확 치솟았다. 청이 벼락을 맞은 듯 크게 경련했다.

“으, 헉!”

청이 필사적으로 황제에게서 물러나려 했다. 이대로 상대에게 잡혔다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씹어 먹힐 것 같아 무서웠다. 그는 손과 발로 바닥을 짚고 어설프게 뒤로 기어 달아났다. 바닥에 넓게 퍼진 연청색 옷자락이 그의 처절한 움직임에 따라 스르륵 움직였다. 아주 조금씩, 어렵사리 간격이 벌어졌다.

발목이 우악스러운 힘으로 덥석 잡혔다. 순식간이었다. 청은 등으로 바닥을 길게 그으며 달아난 거리만큼을 도로 질질 끌려왔다. 황제는 부러뜨릴 듯 세게 움켜쥔 발목을 잡아 다리를 벌렸다. 멋대로 몸을 움츠리지 못하도록 그 사이에 자신의 허리를 끼워 넣어 단단히 고정했다. 그는 청에게로 몸을 숙이며 탄식하듯 속삭였다.

“아무 생각 하지 말라 했거늘, 또 내 곁에서 떠날 궁리를 하지. 매정하게도.”

“떠, 으읏, 떠나려 한 것이…… 아니…….”

“향이니 뭐니 하는 거짓말을 하며 발발 기어 달아나는데, 그게 떠나려 한 게 아니면 뭐지?”

“그런 게, 폐하,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럼?”

“제, 제발. 놓아, 주십, 흑, 숨을 쉴 수가 없, 허억……!”

누각 안에는 향이랄 게 없었다. 물론 상에 차려 둔 주전부리에서 달짝지근한 향이 어렴풋이 나긴 했지만 저리 괴로워할 만큼은 못 되었다. 굳이 꼽자면 황제 자신이 풀어 놓은 여향뿐인데, 그것은 청이 결코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황제는 10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 청을 자신의 향에 푹 절였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용서해 줬지만, 청과 단둘이 있을 때면 습관적으로 그에게 집요하게 향을 끼얹었다. 내 것이라 낙인을 찍기라도 하듯.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청이 황제의 오른팔이라 함께 있는 시간이 길다 보니 향이 옮은 거라 여겼지만, 가끔 향에 민감한 이들 몇몇은 경악한 기색으로 청을 슬금슬금 피했다.

물론 청은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일방적이고 음습한 행위였다. 애초에 알아주길 바라지도 않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황제의 향을 흠뻑 뒤집어쓰고서도 정작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덤덤한 얼굴을 하는 것도 꽤 귀여웠으므로.

“청아, 좆은 왜 세웠어?”

이제 청에게는 황제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손을 들어 필사적으로 자신의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당장이라도 상대를 밀쳐 내고 싶은데 그럴 수 없으니 자신이 숨을 참는 수밖에 없었다.

“대답 안 하지.”

“헉…… 흐윽…….”

숨이 모자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데도 청은 손을 떼지 않았다. 저리 죽고 싶어 하는데, 아예 목을 졸라 죽여 버릴까. 황제는 잠시 고민했다.

새로 지은 비단옷을 입히고 누각에 불러다 간식을 먹였다. 혹여나 찬 바람이 들어 청이 앓을까 봐 불도 넉넉히 때었다. 봄이 오면 뱃놀이를 가자 약속하기까지 했다. 죽이지도 않고, 장기를 파내거나 이목구비를 훼손하지도 않고, 팔다리도 곱게 잘 보존해 놓았다. 한껏 공을 들여 지극정성으로 아껴 주었다.

그런데도 청은 필사적으로 자신의 숨통을 틀어막고 고개를 저었다. 같은 공기조차 마시기 싫다는 듯. 황제가 건드릴 때마다 소스라치게 발작하며 몸을 뒤로 물리기도 했다. 말로만 떠나지 않겠다 맹세할 뿐, 청은 발목을 잡혀 무력하게 떨면서도 어떻게든 황제를 거부하고 달아날 궁리만 했다. 참으로 무정하고 야속했다.

“내가 그간 널 너무 예뻐했지?”

새삼 후회되었다. 진작 어디 한두 군데쯤은 망가뜨려 놓을 걸 그랬다. 응석을 받아 주고 아껴 줬더니 참으로 가관이었다. 수렵제 땐 제 주제를 모르고 외간 사내와 붙어먹으려 들더니, 이젠 가당찮은 변명까지 해 가며 앙탈을 부리지 않는가.

“달아날 핑계를 댈 거면 제대로 댔어야지. 자지를 벌떡 세우고 놓아 달라고 칭얼대 봤자 소용이 없거늘.”

황제는 느긋하게 자신의 옷 매듭을 풀었다. 스르륵 풀려 나오는 허리띠에 둥근 요패(腰佩)가 노리개처럼 달려 있었다. 순금으로 조각한 용이 허공에 늘어져 작게 흔들렸다. 그는 허리띠를 바닥도 아니고 상 위도 아닌 화로 위에 올려 두었다. 옷감이 그을리고 금이 뜨겁게 달아오를 것을 생각도 하지 않는 무심한 행동이었다. 두꺼운 비단옷이 그의 어깨와 등을 타고 풀썩 떨어졌다.

그는 고개를 낮추어 청의 손등 위에 입을 맞추었다. 숨을 단단히 틀어막은 손을 뚫고 향이 스며들어 왔다. 청의 등허리가 크게 펄떡였다.

“아으, 흡, 으읏…….”

전에 황제가 그의 안에 최음제를 들이부었을 때와 비슷했다. 다만 쾌감의 성질이 달랐다. 그때는 약물을 써 억지로 불러일으켰다면, 지금은 아랫배 깊은 곳에서부터 절로 피어올랐다.

황제는 청의 옷고름을 풀어 내리며 입맞춤에 열중했다. 손등 위부터 시작해서 입술이 점점 내려갔다. 몸 곳곳에 입을 맞출 때마다 격렬한 반응이 돌아왔다. 허리와 엉덩이, 허벅지가 이리저리 마구 뒤틀리고 들썩였다. 그러면서도 감히 황제를 밀어낼 수 없어, 잔뜩 힘이 들어가 굳은 발끝을 허공에 쳐들고 움찔움찔 떨기만 했다.

따뜻하게 데워진 누각의 바닥 위에 청의 옷가지가 펼쳐졌다. 자신의 옷자락을 이불 삼아, 다리를 활짝 벌리고 알몸으로 누워 바르작대는 모습이 제법 봐 줄 만했다. 수직으로 곧게 선 성기가 그의 움직임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다.

“내 청이가 왜 발정이 났을까.”

황제는 중얼거리며 청의 허벅지를 움켜쥐었다. 엉덩이를 잡아 눈앞에 구멍이 훤히 드러나도록 벌렸다. 비좁은 골반이 억지로 열리며 뻐근한 통증이 가해졌다. 청이 입을 틀어막은 채 끅끅대며 흐느꼈다. 눈앞에 드러난 구멍에 중지를 푹 쑤셔 넣었다. 손마디 끝까지 삼킬 정도로 깊게.

“흐…… 흐으, 읏……!”

청의 엉덩이가 크게 경련했다. 내벽이 일제히 조여들어 황제의 손가락을 꽉 감쌌다. 입구가 쉴 새 없이 씰룩대는 게 육안으로도 보였다. 조금만 자극을 가하면 뒷구멍으로도 애액을 질질 흘려 대는 음인과 달리, 청의 안은 여전히 뻑뻑했다. 하지만 지금은 왠지 평소보다 뜨겁고 미끈거리는 것 같았다.

삽입한 손가락을 앞뒤로 찌걱찌걱 움직였다. 황제의 흰 손등에 언뜻 핏줄이 돋았다. 내벽을 득득 긁어 줄 때마다 엉덩이와 허벅지 근육이 간헐적으로 긴장하며 볼기가 오목하게 패었다.

“그래서, 무슨 향이 났어? 응? 청아, 말해 봐.”

“아, 안 돼, 으읏, 윽, 이상해…… 아으, 흐, 헉!”

“제대로 말을 해야 알지.”

속도를 높여 안을 퍽퍽 쑤셔 주었다. 청의 아랫배가 판판하게 굳어졌다. 안에 든 손가락을 놓치지 않으려 본능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모, 잘, 모르, 모르겠습…….”

“향이 진해서 숨을 못 쉬겠다 울었으면서, 무슨 향인지도 모르나?”

“아, 아아…… 아, 아!”

청이 하체를 띄워 엉덩이를 황제의 손에 무작정 밀어붙였다. 툭 불거진 손마디에 엉덩이 살이 힘껏 짓눌렸다. 찐득한 속살이 황제의 손가락 형태를 따라 일그러졌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내벽을 후벼 주면 될 것 같은데. 간질간질한 곳을 손가락으로 긁고 비벼 주면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애가 타고 몸이 달았다. 구멍이 움찔대며 손가락을 쭉쭉 빨아먹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하지만 황제는 청의 아랫배를 짓누르며 손가락을 매정하게 쑥 뽑아냈다. 길고 곧은 손가락이 투명하게 젖어 있었다.

“흣, 아으, 응.”

청은 저도 모르게 애원하듯 고개를 들었다. 초점 없이 흐려진 눈이 절박하게 허공을 더듬었다. 온몸이 축 늘어진 가운데, 물고 있던 것을 잃은 구멍만이 애처롭게 벌름거렸다.

“왜 이리 발정이 났지…….”

황제는 다시금 혼잣말 같은 물음을 되풀이했다. 칭얼대는 어린아이를 어르듯 조곤조곤한 어조였다. 아직까지도 고집스럽게 입을 틀어막고 있는 청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자신의 성기를 쥐었다. 호박색 눈동자에 음습한 열기가 어렸다.

흉흉하게 발기한 성기로 구멍 위를 툭툭 두드렸다. 간을 보듯 기둥과 회음을 누르다가, 귀두에 고여 있던 맑은 액체를 처덕처덕 처발랐다. 불그스름한 귀두가 엉덩이 골 사이에서 질척하게 미끄러졌다. 귀두를 구멍에 맞추고 허리에 힘을 주어 한 번에 끝까지 퍽 처넣었다.

“……!”

청의 등이 확 휘어 허공에 풀썩 떠올랐다 떨어졌다. 그의 눈이 한껏 커졌다. 코와 입을 감싼 손이 어느 순간 툭 떨어졌지만 인지하지 못했다.

발발 떨리는 내벽이 꾹, 꾹, 꾹, 점차 좁아졌다. 황제의 성기를 딱 맞게 물고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탐욕스럽게 조여들었다. 배꼽 바로 아래까지 가득 찬 성기를 어떻게든 더 꽉 물어 보려고 내장 전체가 아우성쳤다.

황제는 청의 발목을 쥐어 다리를 활짝 벌리게 한 채, 한껏 열린 가랑이에 철썩철썩 사타구니를 치댔다. 성기가 들락날락하는 움직임에 따라 청의 아랫배가 오르내리는 것이 고스란히 보였다. 속살을 가르며 성기를 쑥 밀어 넣으면 뱃가죽이 불룩하게 부풀었다가, 쫀쫀하게 들러붙는 내벽을 뿌리치고 쭉 뽑아내면 다시 내려앉았다.

한 번 처박을 때마다 청의 성기와 음낭이 덜렁대며 흔들렸다. 신음 소리가 점차 위태롭게 높아졌다. 황제의 손아귀에 잡힌 발끝이 하얗게 질린 채 확 오므라들었다 펴지기를 반복했다.

향은 어느 순간부턴가 느껴지지 않았다. 저번에도 그랬다. 아주 잠깐 났다가 청이 이성을 잃을 때쯤 금세 사라졌다. 하지만 이미 불이 붙은 흥분은 향이 가신 후에도 도무지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청아, 좋아?”

“아으읏……. 흐으, 읏, 응.”

“내가 박아 줘서…… 하아, 좋아?”

“조, 으…… 흐읏, 조, 좋…… 하윽!”

“한데 왜 자꾸 달아나려 해. 자꾸 핑계를 대고, 거짓말을 하고.”

“폐, 폐하, 배 안이 이상…….”

“괘씸하게도.”

“흐응, 배…… 배가, 아, 아……!”

바깥은 여전히 고요하고 적막했다. 화로에서는 타닥타닥 평온하게 불이 타오르고, 이따금 황량한 삭풍이 처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가운데 누각 안에서 질척한 정사가 이어졌다.

찌걱찌걱 소리가 나도록 성기를 박아 넣다 말고, 황제는 옆으로 흘긋 시선을 주었다. 화로 위에 올려 둔 비단 허리띠가 눈에 들어왔다. 가장자리에 늘어진 끝자락을 쥐어 통째로 들어 올렸다. 뜨겁게 달구어진 요패가 요요하게 빛났다.

“청아.”

청이 눈물이 엉겨 붙어 축축하게 젖은 눈을 억지로 뜨려 했다. 시야가 어룽져 황제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알 수 있었다.

“나를 떠나려 하지 마.”

그는 웃고 있었다. 흰 뺨을 곱게 붉히고, 더할 나위 없이 화사하게.

절절 끓는 열기가 벌어진 허벅지 위에 와 닿았다. 황제는 체온이 높아 몸이 따뜻한 편이었지만, 이렇게까지 뜨겁지는 않았다. 뭔가 이상했다. 청은 거세게 몸부림쳐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황제가 조금 더 빨랐다. 한껏 달아오른 순금 패가 허벅지에 깊게 눌렸다.

“흐악……! 아, 흐, 허억, 윽!”

아픔을 못 이긴 청이 비명을 지르며 발악했다. 사지가 미친 듯이 펄떡였다. 황제는 그를 단호하게 눌러 제압했다. 그 상태로 허리를 한 번 추어올렸다. 찔꺽, 퍽. 쇠 말뚝 같은 성기가 배 속을 세게 찍었다.

“아아, 악!”

마구 흔들리는 청의 성기 끝에서 정액이 팍 뿜어졌다. 뿌연 액이 허공에 쭉, 쭉, 튀어 올랐다. 가파르게 들썩이는 가슴팍과 배에 질질 흘러 길을 냈다. 다리를 움츠렸다 벌릴 때마다 허벅지 사이에 묻은 것이 길게 늘어졌다.

청은 겨울이 가고 봄이 되어도, 그 이듬해 봄이 와도, 계절이 수십 번 바뀌어도, 죽어서도 황제를 떠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영원히 황제의 곁에 머무르리라.

호수의 얼음이 녹고 호숫가에 꽃이 피는 날, 청은 황제와 함께 뱃놀이를 갈 것이다. 만약 봄이 오기 전에 청이 죽으면 시신을 곱게 단장시켜 뱃전에 뉘어서라도 배를 띄울 것이다. 아니, 애초에 황제는 청에게 죽음을 허락지 않을 것이다.

“괜찮아, 쉬이, 착하지.”

황제가 울부짖는 청을 토닥여 달래며 요패를 떼어 냈다. 여린 살에 처참한 화상이 또렷이 남았다. 찬란히 빛나던 황룡이, 오로지 황제만이 쓸 수 있는 상징이, 울긋불긋한 적룡(赤龍)이 되어 청의 허벅지 안쪽에 새겨졌다.

“흐윽, 헉…….”

너무 아파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청은 맹목적으로 황제의 품에 파고들었다. 희게 드러난 맨상체에 매달려 널찍한 등을 마주 안았다. 황제의 가슴팍에 눈물이 드문드문 묻었다.

고통에 일그러진 시야 한쪽에 언뜻 황제의 어깻죽지 뒤쪽에 있는 붉은 반점이 비쳤다. 황제의 맨몸을 보기란 쉽지 않기에, 그와 수없이 몸을 섞은 청조차도 이 반점을 보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화로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 붉게 칠한 과녁 테두리, 흐르는 피. 온갖 새빨간 것들이 환영처럼 반점 위에 뒤섞여 겹쳐졌다. 불길한 색채가 머릿속에서 어지러이 소용돌이쳤다.

“청아, 내 곁에, 만, 있어. 흐읏……. 쓸데없는 생각일랑, 하지 말고. 응?”

황제는 청을 꽉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청의 내장을 죄다 가르고 명치까지 틀어박혀 있던 성기가 꿀럭꿀럭 둔하게 요동쳤다. 뒤늦게 깨달았다. 황제는 사정하고 있었다. 청의 안에 성기를 깊숙이 박아 넣은 채, 아픔에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청을 감상하는 것만으로 절정에 달한 것이다. 줄줄 새어 나온 정액이 아랫배를 묵직하게 메우고 내벽을 흠뻑 적셨다.

“또 달아나려 하면, 다음번엔 불에 달군 인두를 뒤에 쑤셔 넣을 테니…….”

가만가만 속삭이는 황제의 목소리는 몹시도 다정했으며, 동시에 한 점 거짓을 찾아볼 수 없이 진실했다.

* * *

황제는 술병을 들어 스스로 잔을 채웠다. 제국의 주인 되는 몸으로 자작을 하면서도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술은 그새 조금 식었지만 마실 만했다.

그의 허벅지를 베고 청이 웅크려 누워 있었다. 황제의 용포(龍袍)를 이불 대신 덮은 채였다. 짙은 붉은색 비단 아래로 산발이 된 긴 머리칼과 파리한 얼굴이 보였다. 죽은 건지 기절한 건지 알 수 없는 몰골이었다.

“청아, 네 말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

황제는 술잔을 든 채 청을 내려다보았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넘겨 주고, 손끝으로 뺨과 눈가를 살살 매만졌다. 잠든 청의 낯빛이 누각을 둘러싼 호수처럼 창백했다. 마치 꽁꽁 얼어붙은 수면 아래에 빠졌다 나온 사람 같았다.

“10년을 넘게 내 곁에 머무르면서도 눈 하나 깜짝 않더니, 어찌하여 이제 와서 향을 운운해. 또 깜찍한 거짓말로 둘러대려는 게야? 그게 아니면.”

아무도 찾지 않는 외딴 전각에 청을 처박아 두고서도 황제는 이따금 짜증이 났다. 그가 모르는 곳에서 청이 생각하고, 말하고, 숨 쉬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차라리 청을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깊은 물속에 담가 놓고 싶었다. 황제의 눈이 닿지 않을 때에는 꽁꽁 얼려 두었다가, 그가 보고플 때만 꺼내어 만날 수 있도록. 자신이 찾지 않을 때엔 청을 죽였다가, 자신이 보는 앞에서만 살리고 싶었다. 몸은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항상 그의 손아귀 안에 있길 바랐다. 내내 멈추어 있던 심장이 오직 그만을 위해 뛰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 상관없겠지. 어느 쪽이든.”

그는 간단히 결론지었다. 양인이니 음인이니 평인이니,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애초에 그에게는 이것저것 고르고 따질 겨를 따윈 없었다. 그가 청을 택한 것이 아니라 청이 그를 택한 것이었으므로.

홀로 술잔을 기울이는 황제와 잠든 청의 옆에서 화롯불이 적막하게 타올랐다. 바깥세상과는 동떨어진, 묘하게 평온한 풍경이었다.

“폐하, 금군 우장군 위희림입니다. 중대한 일이 발생하여, 쉬시는 도중에 감히 아뢰옵나이다.”

그때 누군가 문밖에서 고했다. 목소리가 평정을 잃고 불안하게 흔들렸다. 황제는 빈 잔을 내려놓으며 태연히 대꾸했다.

“들라.”

이윽고 문이 열리고 문간에 드리운 바람막이 천이 걷혔다. 금군 정복 차림에 옆구리에 칼을 찬 젊은 무관이 성큼성큼 들어왔다. 그녀에게서 차디찬 겨울바람 냄새가 났다.

황제의 앞에 깍듯이 절을 올리고 일어나려던 찰나 시야에 무언가 들어왔다. 그녀는 소리 없이 경악했다. 황제의 심기를 거스를 것을 각오하고 여기까지 찾아온 목적마저 순간 잊어버렸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건강 문제로 부재중이라 몇 달 동안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자신의 상관이, 어째서 황제의 옷을 덮고 그의 다리를 베고 누워 있는 것인지.

“용건.”

짤막한 물음이 던져졌다. 얼이 빠져 우두커니 서 있던 우장군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청에게서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운의전에 불이 났습니다.”

그녀는 애써 침착함을 가장하여 보고했다. 가만히 술을 따르던 손이 뚝 멎었다.

“황후는?”

“조금 놀라셨지만 다행히 무사하십니다. 복중의 용종께서도요. 운의전의 궁인들이 불을 발견하자마자 전하부터 재빨리 대피시켰습니다. 지금은 근처의 다른 궁에서 안정을 취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아직 불길이 잡히지 않은지라.”

황제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로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내 자리에서 스르르 일어섰다. 청의 머리가 푹신한 비단 방석 위에 툭 떨어졌다. 하지만 그는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저, 외람되오나, 폐하. 대장군께서는…….”

“그냥 두게. 저리 곤히 자는데 깨워 무엇 하나.”

황제가 덤덤하게 명했다. 우장군은 할 말을 잃었다. 궁 전체가 발칵 뒤집혔는데, 황궁을 방어하고 황족을 수호하는 사명을 지닌 금군의 수장을 고작 그런 이유로 자게 내버려 두다니. 상식 밖의 일이었다.

“시종에게 일러두도록. 바닥이 식지 않도록 불을 넉넉히 때다가, 예락이 깨고 나면 처소에 데려다주라고.”

“예.”

“찬 공기 한 번 들이마신 것으로도 곧잘 앓아눕고, 맨땅에서도 종종 나자빠지는 이라. 하루가 멀다 하고 비루먹은 병아리처럼 비실대니 신경을 안 쓸 수가 있나.”

“명 받들겠습니다…….”

우장군이 복잡한 표정으로 잠든 청을 흘긋 돌아보았다. 못 본 사이에 그녀의 상관은 너무도 많이 변했다. 예전의 청이 잘 벼린 강철 장검 같았다면, 지금의 청은 곳곳에 이가 나가고 금이 간 얼음 비수 같았다. 봄이 오면 한 줌의 물이 되어 형체도 없이 녹아 버릴.

그러나 상념은 길지 않았다. 한시가 급했다. 그녀는 누각을 뒤로하고 몸을 돌렸다. 호화로운 지붕이 불쑥불쑥 솟아난 황궁의 하늘. 그 위로 시커먼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 * *

대전(大殿) 앞에 셀 수 없이 많은 관료들이 질서정연하게 늘어섰다. 높은 돌계단 위에 황제와 황후의 모습이 보였다. 이 풍경을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황후의 책봉례였다.

청은 붉은 융단이 깔린 널찍한 대로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다른 신하들은 모두 줄을 맞춰 길 양옆으로 정렬해 있는데, 오직 그 혼자만 잘못 놓은 장기짝처럼 툭 튀어나왔다. 심지어 그는 홑옷을 입고 머리를 풀어 늘어뜨린 차림에 맨발이었다. 어째서 자신이 갓 잠에서 깨어난 것 같은 꼬락서니로 책봉례 한복판에 있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 까마득히 높은 단 위에 올라선 황후와 황제는 휘황찬란한 혼례복 차림이었다. 금색과 적색, 흑색. 화려한 비단 위에 황실의 위엄을 나타내는 갖은 자수가 놓였다. 언뜻 보기에는 그린 듯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황후는 품에 아기를 안고 있었다. 거리가 먼 데다 강보에 싸여 있어 자세한 생김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혼례복과 갓난아이라니,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하지만 청은 위화감을 눈치채지 못했다.

멀리서 청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던 황후와 황제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황후와 황제, 그리고 어린아이까지. 세 사람은 호화로운 처마가 만드는 그늘 아래로 들어갔다. 초라한 몰골의 청을 단 아래에 내버려 둔 채로.

〈폐…… 폐하?〉

넋을 잃고 불러 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돌아보지 않았다. 몹시도 무서워졌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청은 손쓸 도리 없이 망가졌다. 황후를 충동적으로 베어 버린 이후, 그는 막강한 권력도 튼튼한 육체도 예리한 지성도 모두 잃어버렸다. 그런 그를 유일하게 찾아 주는 것이 황제였다. 그런 황제에게까지 버림받으면 그는 이제 정말로 살아 있을 가치가 없어지게 될 터였다. 아무도 필요로 해 주지 않는 버러지 같은 삶을 사느니, 차라리 죽어 땅에 묻혀 비료가 되는 것이 더 유용할 테니.

버림받고 싶지 않았다. 홀로 남겨지고 싶지 않았다. 비참하고 잔인한 고독 속에서 몸부림치고 싶지 않았다.

〈폐하!〉

청은 붉은 융단 위를 맨발로 무작정 달렸다. 필사적으로 거리를 좁혀 자꾸만 멀어져 가는 황제를 따라잡으려 했다. 그러나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발목에 묵직한 쇳덩이를 매달아 놓은 것 같았다. 물속을 걷는 듯 몸이 축축 늘어졌다. 그는 몇 번이나 허우적거렸다. 그러다 결국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안 돼, 제발…….〉

맥없이 쓰러진 청이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황후와 황제는 끝까지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결국 그들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앞만 보며 꼿꼿이 서 있던 신하들이 몸을 돌려 청을 주시했다. 잘 만든 인형처럼 아무 표정 없는 얼굴들이었다. 죽은 생선처럼 탁한 빛을 띤 수천 개의 눈알과 시선이 마주쳤다. 소름이 쫙 끼쳤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그들은 일제히 활을 들어 올렸다. 수만 개의 화살촉이 빼곡하게 청을 겨누었다. 황후와 황제가 모습을 감춘 이상 대전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길게 깔린 붉은 융단 위에 서 있는 것은 오로지 그 혼자뿐이었다. 수렵제의 사냥감이, 혹은 살아 있는 과녁이 된 느낌이었다.

〈아…….〉

청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신하들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시위를 당겼다. 청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핑! 피잉! 화살이 포물선을 그리며 쏘아졌다. 피할 수도 달아날 수도 없었다. 그저 하늘을 가득 수놓은 화살 비가 자신에게로 날아드는 것을 절망스럽게 지켜볼 뿐.

차갑고 단단한 화살촉이 심장에 틀어박히는 것을 느낀 순간, 청은 꿈에서 깨어났다.

“허억!”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튕겨져 나온 상체가 힘없이 고꾸라졌다. 그는 자신의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다급히 헐떡였다. 식은땀으로 이마와 목 뒤가 온통 축축했다.

그렇게 한참 숨을 고르고 있으려니 싸늘하게 식어 있던 손발에 점차 온기가 번졌다. 뒤늦게 정신이 돌아왔다. 청은 눈을 들어 주위를 살폈다. 창문을 모두 틀어막아 아늑하고 따뜻한 전각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혼례복을 입은 황제와 황후도, 강보에 싸인 갓난아기도, 활을 겨눈 신하들도 없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한복판에서 화롯불이 평화롭게 타올랐고, 그의 머리맡에는 솜을 잔뜩 넣어 푹신푹신한 비단 방석이 깔려 있었으며, 화로의 열기에 따뜻하게 데워진 술병과 찻주전자가 나란히 놓였다. 잠들기 전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단 한 가지를 제외하고.

“……폐하.”

불안한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널찍한 누각에는 청 외에 다른 사람의 기척은 없었다. 사방이 무서울 정도로 고요했다. 그는 곧장 평정을 잃었다. 허옇게 질린 입술이 떨리고, 초점 없는 눈동자가 사방을 더듬었다. 두려워 미칠 것 같았다.

“폐하, 어디 가셨습니까……. 흐으, 대체 어디에.”

청은 쩍쩍 갈라진 음성으로 황제를 부르짖으며 힘겹게 일어섰다. 그가 덮고 있던 황제의 용포가 스르르 미끄러져 떨어졌다. 그러나 청은 그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그는 맨발로 나무 바닥을 밟으며 비틀비틀 나아갔다. 앞뒤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문을 벌컥 열었다. 살을 에는 찬 바람이 기다렸다는 듯 불어닥쳤다.

“대장군, 기침하셨사옵니까. 깨어나시면 처소까지 모시라는 명을…… 대장군!”

시종들이 기겁했다. 이 혹한의 날씨에 청이 얇은 옷 한 벌만 어설프게 걸치고 맨발로 걸어 나온 탓이었다. 그들은 대장군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는 무례를 저지르지 않으려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청은 그들의 부름을 전혀 듣지 못하고 미친 듯이 사방을 둘러보았다.

얼어붙은 호수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스산하게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따라 그림자가 일렁였다. 휘몰아치는 칼바람에 머리칼이 길게 나부꼈다. 그 어디에도 그가 찾던 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청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 * *

황후가 무사히 몸을 피했다지만, 운의전에 붙은 불은 쉽사리 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멀리서도 시뻘건 불길이 보일 정도로 세차게 타올랐다. 운의전의 궁인들만으로는 불을 끄기에 턱도 없었다. 황족과 비빈의 수발을 들 최소한의 인원을 제외하고 남은 이들을 죄다 불러 모았다. 그러고도 불길을 잡을 수 없었다.

시기가 너무 나빴다. 하필 건조하기 그지없는 한겨울이었다. 거칠고 메마른 바람이 쌩쌩 불어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러다간 운의전을 홀랑 태우고 다른 건물에까지 옮아 붙을 판이었다.

근처의 연못이며 호수가 죄다 꽝꽝 얼어붙어 물을 퍼 올 수도 없었다. 힘깨나 쓰는 장정들이 뛰어나가 우물물을 긷고 지하수를 담아 날랐지만 한계가 있었다. 결국 급하게 정과 망치를 가져와 연못 표면의 얼음을 깨기 시작했다.

초유의 비상사태에 황궁의 모든 이목이 운의전으로 쏠렸다. 청이 머무는 전각 주변은 그야말로 텅 비었다. 황궁 변두리라 중요한 중앙 부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귀한 분이 머무는 것도 아니니, 그나마 몇 없는 궁인을 남김없이 싹 동원한 것이었다.

황궁 전체가 어수선한 가운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는 청만이 전각에 조용히 틀어박혀 있었다. 항상 그러했듯이.

덜컹. 입구 쪽에서 큰 소리가 났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침상에 웅크려 있던 청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바깥을 향했다. 걸핏하면 삐걱거리며 속을 썩이던 창틀은 황제의 명으로 말끔히 고쳐졌다. 그러니 창이 흔들리는 소리는 아닐 터였다. 황제가 청을 찾아온 것일까. 뒤틀린 희망이 피어올랐다.

“폐하……?”

청이 스르르 몸을 일으켰다. 그는 초점도 제대로 맞지 않는 눈으로 휘청대며 홀린 듯 침전을 가로질렀다. 그러나 그가 방을 나섰을 때 마주친 것은 황제도, 황후도, 시종들도, 그가 아는 그 어떤 사람도 아닌…….

“네놈이 지예락이냐.”

한쪽 눈을 안대로 가린 낯선 남자였다.

불길한 긴장이 혈관을 타고 퍼졌다. 청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그제야 시야가 조금 맑아졌다. 안대를 쓴 남자를 필두로 뒤에 덩치 큰 사내 몇 명이 더 보였다. 하나같이 무기를 들고 얼굴을 복면으로 가린 것이, 도저히 잡일을 하러 온 시종들로는 보이지 않았다.

“금군 대장군, 지예락?”

남자가 다시금 물었다. 한쪽밖에 보이지 않는 눈에서 숨길 수 없는 적의가 스멀스멀 배어 나왔다. 청이 다시금 뒷걸음쳤다. 얼마 못 가 발뒤꿈치가 뒤쪽의 벽에 툭 부딪혔다. 그는 무심코 옆을 곁눈질했다. 벽에 걸린 검이 눈에 들어왔다. 황제가 청에게 하사했던, 그리고 그가 황후를 베는 데 썼던 보검이었다.

청의 시선이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검을 향한 것을 눈치챈 남자가 재빨리 외쳤다.

“막아!”

큰 소리가 났다. 모든 것이 순식간이었다. 사내 몇이 청을 향해 달려드는 것과 동시에 청이 몸을 날려 칼을 손에 쥐었다. 서슬 퍼런 칼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뻘건 피가 허공에 확 뿌려졌다.

“크악!”

사내 중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부지불식간에 팔이 베였다. 통째로 잘리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로 상처가 깊었다.

침입자들이 움찔 놀라 물러섰다. 예상 밖이었다. 그들이 상대할 이가 제국 제일의 무관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자세한 인상착의까지는 전달받지 못했다. 자연스레 우락부락하고 험상궂은 근육질의 중년 사내를 떠올렸다.

그래서 청을 처음 조우했을 때 사람을 잘못 찾은 게 아닌가 싶었다. 갸름한 얼굴에 긴 흑발을 늘어뜨린 청년은 누가 봐도 대장군과는 거리가 멀었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서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는 모습이 처연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처연하고 고운 생김의 청년은 검을 쥐자마자 돌변했다. 사람을 향해 날붙이를 휘두르는 데 아무런 망설임이 없었다. 한두 명 베어 본 솜씨가 아니었다.

“누구냐.”

청은 피 묻은 장검을 고쳐 쥐며 물었다. 목소리에 헐떡임이 섞여 있었다. 그간 훈련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더니, 고작 칼 한 번 휘두른 것으로 숨이 찼다.

“벽리건.”

신(晨)씨가 해단의 국성이듯, 벽리(碧梨)씨는 율의 국성이었다. 청이 눈을 크게 떴다.

“네놈이 짓밟은 나라의 왕자고……. 네놈이 망가뜨린 아이의 형이다.”

율의 9왕자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한 글자 한 글자에 억눌린 증오를 담아 씹어 뱉었다. 청의 저항이 의외로 거세어 잠시 당황했던 괴한들이 이내 다시 대열을 갖추었다. 청은 벽을 등지고 열 명에 가까운 수의 남자들에게 둘러싸였다.

“저놈을 잡아라. 다치는 것은 상관없으나 죽이지는 마라.”

9왕자가 차게 웃었다.

“저놈은 결코 곱게 죽어선 안 된다.”

아무도 찾지 않는 외딴 전각 안에서 혈투가 벌어졌다. 벽과 바닥, 가구 위에 길게 피가 뿌려졌다. 그러나 청의 저항은 길지 않았다. 애초에 적의 머릿수가 너무 많았다.

누군가 휘두른 곤봉에 어깻죽지를 맞았다. 뒤쪽에서 날아온 공격이라 미처 대비하지 못했다. 속이 확 뒤집히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청은 몸을 웅크리고 무심코 양팔로 아랫배를 감싸 안았다. 왜 그랬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본능적으로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직후 또다시 충격이 찾아들었다. 등 뒤를 세게 걷어차인 청이 고통스럽게 신음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배를 감쌌던 팔이 무력하게 풀렸다.

“커, 윽……!”

등 한가운데가 우악스럽게 밟혀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딱딱한 신발 밑창이 청의 손을 짓이겼다. 우드득. 끔찍한 소리가 났다. 그의 손을 떠난 검이 저만치 날아가 바닥을 뒹굴었다.

청이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그를 둘러싼 사내들의 발이 보였다. 억지로 시선을 들자 9왕자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경멸 어린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때는 청이 정복자이고 9왕자가 피정복자였으나, 지금은 형세가 역전되었다.

“폐하를, 해하러…… 온 거냐.”

“글쎄.”

9왕자가 무심하게 응수했다. 그 순간 청의 눈에 불이 확 일었다. 그저 날아드는 공격을 방어하기에만 급급하던 청이 처음으로 노골적인 살의를 드러냈다. 그는 핏발 선 눈으로 상대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죽여 버리겠어…….”

9왕자는 대답 대신 발을 들어 청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퍼억! 정확히 갈비뼈 아래의 급소를 노린 공격에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청의 의식이 빠르게 흐려졌다.

* * *

대낮부터 솟아오른 불은 운의전의 대부분을 태우고 한밤중이 되어서야 겨우 꺼졌다. 새까맣게 타들어 간 단아한 건물을 보며 모두가 탄식을 금치 못했다.

“운의전을 수색해라. 불이 일어난 원인이 무엇인지, 재 한 톨 놓치지 말고 샅샅이 뒤져 찾아내라. 황후와 황손의 안전이 걸린 일이다.”

추상같은 명이 떨어졌다. 수십 명의 병사들이 타고 남은 건물의 잔해를 뒤지는 동안, 황제는 말이 없었다. 그저 의자 등받이에 등을 느슨히 기대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무표정이었다. 지그시 시선을 내리깔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옆얼굴이 인간 같지 않았다. 황후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나 황제가 자신이 꾸민 계략을 알아챈 것이 아닐까 두려웠다.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모든 것은 불길이 수그러듦과 동시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터였다.

아슬아슬한 정적이 흘렀다. 초조함을 못 이긴 황후가 저도 모르게 무릎에 덮인 담요를 쥐어뜯고 발끝을 꼼지락거릴 때쯤, 황제의 명을 받고 나갔던 이들이 돌아왔다.

“폐하, 수색을 마쳤사옵니다. 바닥에 흩어진 잿더미와 타다 만 대들보, 그을린 기왓장 하나하나를 속속들이 뒤졌습니다.”

황후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그러나 워낙에 많은 부분이 타 버려 조사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멀쩡한 곳에서도 누군가 일부러 불을 지른 증거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운의전 소속의 궁인들을 모두 취조하였습니다만, 달리 수상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황제는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 길게 드리운 속눈썹 아래로 보이는 밝은색의 눈동자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 속에서 어떤 계산이 오가고 있을지, 그 누구도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황후와 병사들, 시종들까지. 모두가 그에게 주목했다. 이번 일을 그저 불운한 사고로 치부할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현장에도 증좌가 없고, 궁인들도 결백하다라. 그렇다면 황후와 가까이 지내던 이들에게 물어보아야겠군. 여태껏 운의전을 뻔질나게 드나들었을 테니, 혹여나 무언가를 목격했을 수도 있겠지.”

다소 뜬금없는 결론이었다. 누군가가 고의로 운의전에 불을 질렀다 가정한다면, 보통은 황후와 적대적인 이들을 먼저 떠올리기 마련이었다. 황후의 측근들을 불러 무엇 하겠는가. 그들은 황후를 해칠 이유가 전혀 없는데.

하지만 동시에 일리 있는 주장이기도 했다. 황후는 황궁 내에서 두루두루 고립되어 있었다. 그는 원래 성격이 소심하고 낯을 많이 가려 바깥 걸음을 거의 하지 않았다. 게다가 몇 달 전엔 자객의 칼에 베여 오래도록 누워 있었고 지금은 회임 초기라 몸가짐을 극도로 조심하니, 더더욱 인간관계가 좁아졌다. 그를 달가워하지 않는 자들이야 많겠지만, 산 채로 불태워 버리고 싶어 할 만큼 증오하는 이는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니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서는 역으로 황후를 가장 아끼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역시 황제 폐하의 식견은 헤아릴 수 없이 깊다며, 몇몇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의 고국에서 온 사절단을 불러오도록. 한 명도 빠짐없이.”

황제가 지시했다. 모두가 그의 명에 납득했다. 그러나 그중에 단 한 명, 낯빛이 새하얗게 질리는 이가 있었다.

“제국의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길이 평안을 누리소서.”

급히 불려 온 사람들 수십 명이 황제의 앞에 절을 올렸다. 하나같이 제국에서는 흔히 보기 힘든 이국적인 차림을 하고 있었다. 황궁에 임시로 머무르고 있는 율의 사절단이었다.

“일어나라.”

팔걸이에 턱을 괴고 걸터앉은 황제가 짧게 명했다. 사절단은 그제야 쭈뼛쭈뼛 어색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들에게 황제는 조국을 짓밟은 극악무도한 약탈자였다. 동시에 조국을 살리기 위해 몸을 던져 애원해야 할 유일한 구원자이기도 했다. 그들의 표정이 증오와 간절함, 그 사이 어디쯤에서 어정쩡하게 굳어졌다.

“그대들도 알다시피, 오늘 운의전에 불이 났었다.”

화재 소식을 이미 들었는지, 사절단은 저마다 황후를 흘긋흘긋 돌아보며 그의 안위를 살피기에 바빴다. 동시에 자신이 왜 여기에 불려 왔는지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기색이었다.

“혹여나 황후가 화재에 휩쓸려 잘못될까 몹시 염려했거늘, 천운이 도와 황후도 배 속의 아이도 무사하다 하더군. 참으로 다행이야.”

말만 들으면 회임한 반려를 애틋하게 걱정하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내내 황제는 소름 끼치게 무표정한 낯으로 비스듬히 턱을 괴고 있었다.

“왜 그러지? 설영의 안위를 직접 확인시켜 줬지 않나. 기쁘지 아니한가?”

“성은이 망극합니다. 폐하의 하해와 같은 은덕에 모두가 감개무량하여 말을 잇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모두가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머뭇대는 가운데, 강 어의가 나섰다. 감사 인사가 청산유수처럼 매끄럽게 나갔다. 율의 왕궁에서 평생을 일하며 쌓은 연륜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황후와 그의 눈이 아주 잠깐 마주쳤다. 그러나 다음 순간 강 어의는 태연하게 시선을 비껴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황제가 보는 앞에서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아 봤자 좋을 것이 없었다.

“한데 이번 일이 그냥 사고인지, 아니면 누군가 황후를 노리고 흉계를 꾸민 것인지……. 도무지 판가름할 수가 없단 말이지.”

흉계. 결코 흘려들을 수 없는 단어가 나왔다.

“만약 누군가 고의로 불을 지른 것이라면, 철저히 발본색원(拔本塞源)하여 범인을 잡아 엄벌에 처해야지. 이번에야 운이 좋아 황후가 무사하였다지만,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화를 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으니.”

더할 나위 없이 옳은 말이었다. 그러나 어딘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사절단의 그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대들은 혹시 짚이는 게 있는가? 뭐든지 좋으니 성심껏 말해 주게.”

황제는 자신의 앞에 머리를 조아린 이들을 느릿하게 둘러보며 물었다.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황제는 율 왕국을 속국으로 받아들인 이후 줄곧 사절단에 소속된 이들을 방치해 두었다. 그들은 이제껏 황제에게 율 왕국을 도와 달라 간청하기는커녕 그의 옷자락 끄트머리 한 번 못 보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들을 친히 불러다 황후와 안부 인사를 하게 해 주고 수사에 도움을 청하기까지 하다니. 황제의 속내를 전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몇 명인지, 각자 어떤 직책을 맡고 있는지, 어떤 심정으로 제국까지 왔는지. 황제는 전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을 게 분명했다. 황제에게 그들은 그저 황궁 구석에 핀 곰팡이 덩어리이자 하찮은 버러지 떼에 불과할 터였으므로.

“그런데.”

머리를 푹 숙이고 침묵을 지키는 이들을 하나하나 내려다보다가, 황제가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하나가……. 비네?”

스산하게 흘러나온 중얼거림을 듣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스르르 시선을 돌렸다. 황후를 향해서. 연한 빛깔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가 발끝에서부터 찰랑찰랑 차올랐다.

“설영, 그대의 동복형제는 어디 갔나?”

“저……. 저는 잘, 모,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겠다?”

이가 절로 따닥따닥 부딪쳤다. 황후는 떨고 있다는 것을 숨기려 필사적으로 이를 악물었다. 계획에 허점은 없었을 텐데. 이번 일은 끝내 범인을 찾지 못해 우연히 일어난 사고로 마무리되고, 9왕자는 궁의 모두가 불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 재빨리 할 일을 마치고 감쪽같이 돌아와야 할 터인데……. 대체 어디서부터 틀어진 것일까.

“이, 이제 기억납니다. 황도의 의원에게 간 것 같사옵니다. 제 형은 최근에 눈을 다쳐서, 꾸준히 치료를 받아야 하는지라…….”

황후가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내내 지루한 듯한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황제가 처음으로 피식 웃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표정이 놀랄 만큼 싸늘하게 굳었다.

“우장군.”

그는 고개를 확 돌려 우장군을 찾았다. 아까까지의 나른한 태도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검을 차고 묵묵히 출입문 앞을 지키던 우장군이 재깍 부름에 응했다.

“예, 폐하. 부르셨나이까.”

“예락의 안위를 확인, 아니, 그를 이곳으로 데려오도록. 지금 당장.”

사라진 왕자의 행방을 추궁하던 와중에, 갑자기 대장군을 데려오라니. 쉬이 이해되지 않는 지시였다. 도중에 너무도 많은 설명이 생략되어 있었다. 그러나 황제는 굳이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리할 필요도 여유도 없었다.

“명 받들겠습니다.”

우장군은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바람처럼 뛰어나갔다. 잘 길들인 군마를 타고 밤이 내린 황궁의 대로를 달렸다. 황궁 변두리에 있는 작은 전각을 향해.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황제에게 임무의 결과를 보고하는 목소리가 충격과 불안으로 언뜻 흔들렸다.

청이 사라졌다. 전각 안에 가득한 핏자국과 몸싸움의 흔적만 남기고. 또다시 자신을 떠나려 하면 인두로 뒤를 지져 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았는데. 자신이 없는 곳에서 살아 숨 쉬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조차 견딜 수 없이 아까운데. 청은 기어이 떠나 버렸다. 매정하게도.

“설영. 지금부터 황도의 의원이란 의원은 모두 샅샅이 뒤질 터인데, 그 어디에서도 그대의 형제가 발견되지 않으면…….”

황후는 뻣뻣한 고개를 억지로 들어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활짝 핀 꽃처럼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상황에 맞지 않게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광경이라 오히려 기괴했다. 황제는 사절단을 곁눈질했다. 그 시선을 받은 이들의 낯빛이 시체처럼 푸르죽죽해졌다.

“하루에 한 명씩, 이자들의 목을 베어 머리를 율에 보낼 것이오. 좋은 새해 선물이 되겠군.”

* 견련괴격(牽攣乖隔) :

마음은 서로 끌리나 몸은 멀리 떨어져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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