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화양연화(花樣年華)
말을 몰아 신록의 나무가 우거진 숲길을 달렸다. 상쾌한 숲 공기가 콧잔등과 뺨을 어루만졌다. 한들한들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정수리와 어깻죽지에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이랴! 워, 워.〉
숲의 끝자락에서 말을 멈췄다. 길이 잘 든 말은 지시에 곧장 따랐지만 아직 부족하다는 듯 콧김을 뿜으며 두어 번 발을 굴렀다. 매일 흙먼지가 뿌옇게 날리는 대로변만 걷다가 간만에 숲을 달리니 신난 모양이었다.
그 옆에 다른 말이 멈추어 섰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다가, 청은 고개를 돌려 설명했다.
〈제가 가끔 오는 곳입니다. 속이 답답할 때나 생각이 많을 때요.〉
황자는 묵묵히 정면을 주시했다. 울창한 숲이 뚝 끊긴 자리에서부터 끝없는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그는 말에서 훌쩍 내렸다. 노련한 몸놀림이었다.
아무리 승마와 활쏘기가 지배층의 교양이라지만, 황족 중에는 항상 가마와 수레 따위만 타고 다녀 말을 타는 데 익숙지 않은 이들이 많았다. 옷차림이 워낙에 치렁치렁하여 혼자선 안장에 잘 오르지도 못했다. 승마(乘馬)와 하마(下馬)를 돕는 전용 시종이 따로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황자는 말을 다루는 솜씨가 웬만한 무관 못지않게 뛰어났다. 따로 시중을 들 필요도 없었다. 청도 말에서 내려 고삐를 쥐었다. 쌩쌩 부는 들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걸어 나갔다.
〈별것 없군.〉
황자가 짤막하게 평했다. 청이 쓰게 웃었다. 맞는 말이었다. 널찍한 들판의 풍경은 좋게 말해 가슴이 탁 트였고, 나쁘게 말하면 휑했다. 그저 무릎 높이까지 웃자란 풀들이 바람 부는 대로 누웠다 일어나길 반복할 뿐이었다. 쏴아아 풀잎 흔들리는 소리를 듣고 있자면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 적막한 기분이 들었다.
〈네. 참으로 별 볼 일 없습니다. 화려한 장식도 없고, 시끌벅적한 사람들도 없고, 웅장한 건축물도 없지요. 그래도 전하께 한 번쯤 꼭 보여 드리고 싶었습니다.〉
〈어째서?〉
〈황도도 물론 좋지요. 아름답고 요란한 것들이 가득하고, 늘 풍요로우니까요. 하지만 성벽 너머로 당장 말을 한 시진만 달려도 이런 풍경이 보입니다. 황궁과 도심이 제국의 일부이듯이, 이곳도 제국의 일부입니다.〉
〈…….〉
〈멀리 나가면 이보다 더 황량한 곳도 분명 있을 겁니다. 사시사철 눈이 녹지 않는 지방도 있고, 몇 년째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아 땅이 쩍쩍 갈라지는 지방도 있다 하고요. 하나 구중궁궐에서 일평생 살아가는 황족 마마님들께서는 잘 모르십니다. 안다 해도 서책에서 읽어, 혹은 다른 이에게 전해 들어 머리로만 알고 계실 테고요.〉
〈나를 가르치려 하는 거냐.〉
황자의 무감정한 눈동자에 언뜻 불쾌해하는 빛이 어렸다. 청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제가 어찌 감히. 당치도 않습니다.〉
〈그럼?〉
〈저는 이 나라를 사랑합니다. 번듯하고 보기 좋은 면뿐만 아니라,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면까지도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고백이었다. 청은 사랑하는 것이 몹시도 많았다. 가족과 벗들을 사랑했고, 고상한 음률과 유려한 시조를 사랑했으며, 목마를 때 마시는 차가운 차와 강가에 떠오르는 해를 사랑했다. 그는 길가에 핀 이름 없는 들꽃에까지도 아낌없이 사랑을 베풀 이였다.
그에 비해 황자의 삶은 몹시도 무미건조하고 황폐했다. 그의 처소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황궁 변두리에 있었으며, 그를 낳은 이민족 후궁은 독을 마시고 고통에 몸부림치다 끔찍한 몰골로 숨을 거두었다. 그에게 흐르는 피의 절반을 보탠 황제는 주색잡기에 빠져 흥청망청 노느라 여념이 없었다.
황자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가 사랑한다는 ‘이 나라’는 어디까지를 말하는 것인지. 과연 그 관대하기 짝이 없는 울타리 안에 썩어 문드러진 탐관오리들도, 천박한 백성들도, 방탕한 부황도, 그리고……. 자신도 포함되어 있을지.
〈그리고 언젠가는 전하께서도 사랑하게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때마침 까마득한 녹색 지평선 너머에서부터 불어온 바람이 그들의 머리카락을 길게 헤집어 놓았다. 세찬 바람에 잠시 대화가 끊겼다. 하나로 간편하게 묶은 머리칼과 옷자락이 깃발처럼 펄럭이며 나부꼈다.
황자는 청을 주시했다. 고생이라고는 전혀 모르고 자란 듯한 고운 옆 선을 느리게 훑었다. 그의 시선을 느낀 청 또한 곧 돌아보았다. 끝없이 펼쳐진 평원을 배경으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대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청이 자연스러움을 가장하여 눈을 슬쩍 돌린 탓이었다. 단정히 묶은 머리칼 아래 언뜻 보이는 귓가가 은은하게 붉어져 있었다.
〈청아.〉
황자가 느닷없이 그를 불렀다. 예상치 못한 다정한 호명에 흠칫 놀란 청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빙그레 웃고 있었다. 이상했다. 분명히 아까까지 청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이가 맞았지만, 무언가 달랐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섬뜩함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황자는 청이 아는 것보다 키가 좀 더 컸다. 그나마 언뜻 남아 있던 앳된 티를 완전히 벗은, 완전히 장성한 모습이었다. 그는 황룡을 수놓은 검붉은 장포를 걸치고 있었다. 제국에서 저 문양이 들어간 옷을 입을 수 있는 것은 단 한 명뿐일 텐데…….
그의 흰 뺨에 덕지덕지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꼭 누가 손으로 문질러 묻힌 것처럼. 그 연유를 생각해 보기도 전에 황자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나 아닌 것에게 눈 돌리지 마.〉
〈예……?〉
〈네가 말했잖아. 나를 사랑한다고.〉
〈저, 전하.〉
〈그 외에는 필요 없어. 다른 데 마음 주지 마. 네가 사랑한다 말한 것은 모두 흔적조차 남지 않도록 없애 버릴 테니.〉
청이 주춤 물러섰다. 다리가 묘하게 축축했다. 그의 시선이 무심코 아래로 향했다. 어느새 그는 먼지가 잔뜩 묻고 너덜너덜한 홑옷 차림이 되어 있었다.
엉망진창으로 뜯겨 나간 옷 아래 드러난 맨다리가 온통 피투성이였다. 옷자락 안쪽에서부터 울컥울컥 솟아오른 피가 다리를 타고 질질 흘렀다. 핏줄기가 상처투성이 발에까지 내려와 풀에 묻었다.
〈흐, 으, 으아, 아…….〉
공포에 휩싸여 팔을 마구 휘저으려 했다. 하지만 양 손목이 밧줄로 칭칭 감겨 움직이지 않았다. 낡고 더러운 밧줄에 청의 손목에서 배어 나온 피와 진물이 스며 얼룩덜룩했다.
청은 양손이 묶인 채 휘청휘청 물러섰다. 그 와중에도 출혈은 끊이지 않았다. 꾸역꾸역 쉴 새 없이 흐른 피가 그가 움직인 자리를 따라 붉은 궤적을 그렸다. 그를 물끄러미 보던 황자가, 아니, 황제가 눈매를 곱게 휘며 웃었다.
〈그래, 이제 알겠구나. 청이 네가 말한 사랑이라는 것의 의미를…….〉
미친 듯이 몸부림치다 침상에서 굴러떨어졌다. 몸이 딱딱한 나무 바닥에 부딪혀 둔탁한 소리가 났다. 이상하게도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한 박자 늦게 충격이 찾아왔다.
“헉, 흐으, 흑.”
청은 이불을 허술하게 휘감은 몸으로 바닥에 고꾸라져 한참을 일어나지 못했다. 가슴팍을 들썩이며 힘겹게 신음했다. 이불이며 옷, 머리카락이 온통 식은땀에 젖어 엉망이었다. 그때 문밖에서 타인의 기척이 느껴졌다.
“대장군, 기침하셨사옵니까?”
“흐…… 으악!”
청이 파드득 몸서리를 치며 발작했다. 전각의 허술한 나무 문을 박차고 들어온 괴한들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하나밖에 없는 눈으로 자신을 살기등등하게 노려보던 소국의 9왕자가 떠올랐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 같은 몰골로 허름한 창고에 끌려갔던 기억 또한.
그곳에서 팔다리를 밧줄에 묶인 채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수없이 폭언을 듣고 구타를 당했다. 그리고, 그리고…….
청은 9왕자 일당에게 끌려간 후에 있었던 일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모질게 얻어맞다 어느 순간 의식을 잃었다는 것만 알았다. 그 외에는 온통 캄캄한 암흑이었다. 기억이 쓰인 서책을 박박 찢고 물에 푹 담근 것처럼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하지만 그 일을 떠올려 보려 하면 이상하게 배가 아팠다. 커다란 칼을 배에 쑤셔 박아 휘젓는 듯한 통증이었다. 걷잡을 수 없이 속이 메슥거려서, 그나마 간신히 삼켰던 미음이나 물조차 죄다 토해 내곤 했다.
“대장군, 쉬시는 도중에 방해하여 송구하옵니다만, 곧 정전에서 회의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채비하시어 등청(登廳)하셔야 늦지 않으십니다. 시중을 들어 드리러 왔사옵니다.”
청이 대답이 없자, 문밖의 궁인이 다시 한번 공손하게 고했다. 청은 이를 악물고 축축 늘어지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벅벅 문질러 식은땀을 대강 닦아 냈다. 하지만 허여멀겋게 질린 안색이며 마구잡이로 떨리는 팔다리는 가릴 수 없을 터였다.
“……들어오도록.”
청이 간신히 허락의 말을 흘렸다. 세숫물이며 의복을 든 궁인들이 기다렸다는 듯 들어와 분주하게 움직였다. 채비를 모두 마치고 전각을 나설 때까지도 떨림은 멎지 않았다. 묘하게 불길했다.
* * *
우아하게 뻗은 지붕과 장엄한 기둥, 높게 솟은 마루가 위풍당당한 자태를 자랑했다. 대전의 회의장에 내로라하는 고위 무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황도를 지키는 10위(衛)를 중앙군이라 하고, 그중에서도 특히 황제 직속으로 황궁을 수호하는 군사를 금군(禁軍)이라 한다. 그 외 지방군은 각 지방을 다스리는 영주 아래에 소속되어 제국 곳곳을 방비했다. 몇 년에 한 번 얼굴을 볼까 말까 한 지방의 무관들마저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변방의 소국, 율 왕국이 멸망하고 갈 곳 잃은 백성들의 상당수가 도적이 되었다. 그들은 악에 받쳐 주변 국가에 무작정 흘러들어 가 약탈을 일삼았다. 오늘의 회의는 이를 토벌할 대책을 강구하고 병력을 배분하기 위함이었다.
“……해서, 금군 대장군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고요한 회의장 공기를 가르고 불쑥 질문이 날아들었다.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넋을 놓고 있던 청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수십 쌍의 무감정한 시선이 일제히 자신만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한 박자 늦게 깨닫고 흠칫 놀랐다.
“예, 예……?”
“듣지 못하셨습니까? 금군에서 추가 병력을 차출하여 황성 외곽의 방비를 강화하는 것이 어떠한지 여쭈었습니다만.”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청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핏기 없는 입술이 잘게 떨렸다. 그는 억지로 소리를 쥐어짜 내 대답했다.
“그, 렇게……. 하겠습니다.”
누가 보아도 정상이 아닌 이의 몰골이었다. 청에게 질문을 던진 무관의 눈이 스르르 가늘어졌다.
“혹시 아직도 몸이 편찮으신지?”
“…….”
청은 입을 꾹 다물었다. 시선을 내리깔아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눈을 애써 숨길 뿐이었다. 건장하고 우락부락한 무관들 가운데, 처연하리만치 파리한 낯빛으로 고개를 숙인 청은 몹시 눈에 띄었다. 야생의 맹수들 틈에 섞인 집짐승만큼이나 어울리지 않았다.
아무리 청이 불의의 사고를 연이어 겪으며 몸이 축났다지만, 그것은 이미 몇 해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청은 아직도 저 모양이었다. 자택에서 황궁까지 오가는 것조차 힘에 부쳐 아예 황제가 빈 궁을 내주어 들어앉혀 놓았다더니 과연 정말 병자가 따로 없었다.
대장군쯤 되면 하급 병사들처럼 몸을 쓰는 일을 직접 할 필요는 없다고 하나, 기본적으로 무관은 몸이 재산이었다. 황제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호위하는 금군 대장군으로서의 자질이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회동이 끝났다. 그러나 청은 회의의 내용을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그의 몸과 마음은 돌이킬 수 없이 망가졌다. 악몽이라도 꾸는 날에는 더했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상태가 최악이었다. 몸살기가 슬슬 오르려는지 뺨이며 눈 안이 화끈화끈하고, 의식이 자꾸만 흐릿해졌다.
금군 대장군이라는 중책을 처음 맡았을 때 청은 너무 젊었다. 또한 험난한 변경에서 매일같이 오랑캐와 싸워 온 지방의 무관들에 비해, 그는 황도의 명문가 출신으로 곱게 자라 무예를 제대로 배운 적조차 없었다. 굳은살과 흉터를 찾아볼 수 없는 흰 손이, 대장군이라기엔 지나치게 곱상한 얼굴이 수치스러웠다.
그렇기에 남들의 수십 배로 노력했다. 피도 눈물도 없다,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마귀보다도 더 악랄하다는 소리를 들어가며 일에 몰두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노력을 기울일 겨를조차 없었다. 도중에 혼절하지 않도록 의식을 유지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애초에 이 자리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자리가 아니었다. 자신처럼 쓸모없고, 추악하고, 손쓸 도리 없이 망가진 자에겐 과분했다.
“병사를 시켜 서신을 보내겠습니다.”
“추후에 또 뵙지요.”
할 일을 마친 무관들이 자리에서 우르르 일어섰다. 그들은 청을 매정하게 제치며 썰물처럼 대전을 빠져나갔다.
멀거니 허공을 바라보던 청이 뒤늦게 한 발짝 내디뎠다.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서 처소에 돌아가 자고 싶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운 모습의 그를 몇몇 이들이 미심쩍어하는 시선으로 돌아보았다.
* * *
화려한 가마가 대전 앞의 널찍한 길을 지나고 있었다. 가마에 새겨진 금빛 봉황 문양이 선명했다. 황족의 상징이었다.
대리석이 깔린 대로를 지나던 가마가 멈췄다. 가마꾼들이 조심스레 몸을 낮추어 가마를 내려 주었다. 열린 문을 통해 사내아이를 안은 유모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길이 평안을 누리소서!”
회의를 마치고 나오던 무관들이 일제히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풀어 내려놓으며 무릎을 꿇었다. 철컥, 철컥. 돌바닥에 묵직한 검이 놓이는 소리가 요란했다. 고작해야 서너 살이나 되었을까 한 아이 앞에 수십 명의 장군들이 부복하는 모습은 장관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다.
청 또한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 몸을 비척비척 움직여 예를 갖추었다. 뚝. 바닥에 식은땀 한 방울이 떨어졌다.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다른 이들에게 새파랗게 질린 낯을 보이지 않아도 될 테니.
황자였다. 황제의 유일한 아들이자 이 제국의 적법한 후계자. 이제까지는 황자가 어리고 청의 건강이 나빠 마주칠 일이 없었다지만, 기어이 그를 만나는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청은 그에게 죄인이자 원수였다. 황자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예정된 일이었다. 황자는 자신을 낳은 이가 어떤 이인지, 그의 모국이 어떤 곳인지 모른 채 자라날 터였다. 율 왕국도 율의 왕자였던 황후도 기우는 달처럼 쓸쓸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므로.
“일어나라.”
황자가 유모의 옷자락을 쭉쭉 잡아당겨 손장난을 하며 명했다. 발음은 어린아이답게 어눌했지만 제법 낭랑한 음성이었다. 수많은 이들이 그의 한 마디에 몸을 일으켰다.
“어화원(御花园)에 나들이를 가던 도중에, 마마께서 여러 장군께 인사를 하고 싶다 하여 가마를 멈추게 하였사옵니다.”
유모는 조심스레 그를 바닥에 내려 주었다. 황자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관들은 하나같이 생김이 험상궂고 풍채가 늠름했다. 이제 갓 말문이 트인 어린아이가 다가가 말을 걸기에는 영 무서웠다.
그중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자신을 돌봐 주는 궁인들만큼 푸근하고 상냥해 보이진 않지만, 그래도 다른 장군들보다는 편할 것 같았다.
황자는 한 곳을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정확히는 무관들의 무리 뒤쪽에 숨은 듯 서 있는 청을 향해. 수많은 시선이 쏠렸다. 청의 앞에 다가온 황자가 통통한 팔을 쭉 뻗었다. 안아 달라는 뜻이었다.
“아…….”
숨이 턱 막혔다. 청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 천진하게 뜨인 크고 둥근 눈매와 말랑말랑 보드라워 보이는 뺨이 다른 이를 연상시켰다.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황자를 낳은 직후 숨을 거두어 버린 황후를.
“안아 다오, 어서.”
황자가 종알대며 채근했다. 죄책감이 칼날이 되어 청의 가슴팍을 마구잡이로 할퀴었다. 어느 순간부턴가 청은 어금니에서 따닥따닥 소리가 나도록 아래턱을 떨고 있었다.
“저, 전하……. 길이…… 평안을…….”
황족을 내려다보는 무례를 범할 수 없어 일단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황자가 다짜고짜 청의 품에 달려들었다. 조그마한 어린아이가 체중을 실어 안겨 봤자 얼마나 무겁겠냐마는, 쇠약해진 몸에는 그것조차 충격이었다. 청이 이를 악물고 신음을 삼켰다.
“머리가 까맣고 보드랍구나. 그런데 옷은 딱딱해.”
황자는 하나로 묶은 청의 긴 머리카락이며 관복에 달린 장식을 만지작대며 장난을 쳤다.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유모가 묘한 표정을 했다.
황자는 은근히 낯을 가렸다. 황자궁 소속이 아닌 이에게는 먼저 안아 달라 청한 적이 거의 없었다. 심지어 아버지인 황제는 무서워 먼발치에서 보기만 해도 경기를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황자는 이상하리만치 청을 따랐다.
얼굴이 백면서생처럼 곱상하면 무엇 하는가. 황자가 천진하게 품에 안겨 장난을 치는 이는 제국 제일의 무관 되시는 분이었다. 몇 해 전 수렵제에서 금군 대장군이 홀로 흑곰을 때려잡았다는 흉흉한 일화가 아직도 황궁에 떠돌아다녔다. 아직 어린 황자가 그 사실을 어찌 알겠냐마는, 그녀 입장에서는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으응?”
청의 품에 뺨을 비비다 말고 황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 맡는 달짝지근한 향이 났다. 세상에서 제일 달콤하고 향긋한 당과(糖菓)가 눈앞에 있는 것 같았다. 황자는 본능적으로 청의 목 부근에 코를 박고 킁킁거렸다.
“좋은 냄새.”
“헉……!”
그 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거부감이 확 일었다. 청은 저도 모르게 황자를 조금 밀어냈다. 힘이 거의 들어가 있지 않은, 오로지 자기방어를 위한 몸짓이었다. 하지만 마음에 든 이의 품에 안겨 평온함을 만끽하던 어린아이를 놀라게 하는 데는 충분했다.
“아!”
이윽고 황자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였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뒤늦게 깨달은 청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흐, 으앙…….”
그 광경을 지켜보던 무관들이 경악했다.
황궁의 모두가 황자에게 잘 보이려 안달이었다. 미리부터 줄을 잘 서서 차기 황제가 될 아이의 눈에 들려는 속셈이었다. 어미 없이 외롭게 자라 정에 굶주려 있을 테니 조금만 잘 대해 주면 금세 마음을 열 터이고.
그런 와중에 청이 황자에게 매몰차게 굴어 결국 그를 울리고 말았다. 온갖 재롱을 피워서라도 비위를 맞춰야 할 상대를. 어처구니가 없었다. 황제의 신임만 믿고 한 치 앞도 모르고 설치는 건가 싶었다.
황자가 소리 내어 울어 젖히기 전에 유모가 재빨리 사태 수습에 나섰다. 안쓰러울 만큼 창백한 얼굴로 굳어 버린 청에게서 황자를 살며시 떼어 내 안아 올렸다. 울먹이는 아이의 등을 조심스럽게 토닥이며 돌아섰다.
“마마, 대장군께서는 바쁘시답니다. 일단 지금은 저와 약조하셨던 대로 어화원 나들이를 가시고, 대장군은 나중에 찾아뵐까요?”
황자를 태운 가마가 눈앞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는 무릎을 꿇은 그 자세 그대로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친절하게도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얄팍한 동정이었다. 황자를 울렸다는 큰 불충을 저질렀으니 저렇게 넋을 놓고 있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청을 부축한 무관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 그런데 이 향은 뭡니까?”
“그러고 보니…….”
그 말을 듣고 보니 과연 청에게서 묘한 향이 나는 것 같았다. 사내들이 저도 모르게 홀린 듯 다가섰다. 길쭉한 그림자들이 청의 위에 드리웠다.
“왜, 왜 이러십니까. 잠깐, 이것 좀……!”
“꽃향기입니까? 여인네들이나 쓰는 향 아닌지요?”
“과일 향 같기도 하고. 허어, 그것참 희한하군요. 꼭 환열기에 탕약도 마시지 않고 돌아다니는 음인처럼.”
“조금 더 가까이서 맡아 봐야 알 것 같소만.”
청이 얼떨결에 그들 중 한 명을 퍽 밀쳐 냈다. 하지만 체구가 하도 단단하여 민다고 제대로 밀리지도 않았다. 그는 직감했다. 지금 이자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의식 깊은 곳에 묻어 두고 있던 기억의 파편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사내들과,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음험한 웃음소리와, 발목을 잡아 억지로 벌리던 억센 손아귀와, 또…….
청이 결국 검에 손을 가져갔다. 여기가 한낮의 대전 앞이라는 사실은 이미 안중에 없었다. 칼을 휘둘러 피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몸을 지켜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청이 검을 뽑기 전에 누군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이게 대체 무엇 하는 짓들입니까? 지금 대장군께 큰 실례를 저지르고 있다는 건 알고 계십니까? 더군다나 폐하가 계신 정전이 코앞입니다. 체통을 지키십시오!”
금군 우장군이었다. 무관직은 전통적으로 다수의 양인들과 소수의 평인 사내들이 독점했다. 그 와중에 그녀만이 유일하게 양인도 사내도 아니었다.
그녀도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다른 이들보다는 침착했다. 그녀에겐 그 향인지 뭔지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다른 이들이 있지도 않은 트집을 잡아 청을 조롱하는 건가 싶은 마음에 울컥해서 나선 것뿐이었다.
“이만 처소에 돌아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처리해야 할 일은 일단 제가 대강 정리하여 보고하겠습니다.”
무관들은 얼떨떨해하는 가운데 반은 몽롱하고 반은 당황한 기색이었다. 청은 참담한 낯으로 이를 악물고 있다, 이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대전에서 돌아온 후, 청은 아무도 없는 처소의 침상 위를 뒹굴며 내내 앓았다. 의식이 깜빡깜빡 나갔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몸이 너무 뜨거웠다. 펄펄 끓는 숨을 내쉴 때마다 기도가 죄다 익어 버릴 것 같았다. 손바닥과 발바닥이 불에 덴 듯 홧홧해졌다. 아무리 해도 들끓는 열이 해소되지 않았다. 사람을 불러야겠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아, 읏……. 흐읏.”
열은 식기는커녕 시간이 흐르며 더욱 기승을 부렸다. 불을 때지 않아 싸늘하기만 하던 방 안의 공기가 점차 데워졌다. 청의 마른 손이 이불 위를 처절하게 벅벅 긁어 내렸다. 그것도 모자라 척척한 이불보에 뜨거운 뺨을 비비며 헐떡였다.
어느 순간부턴가 이부자리가 축축해졌다. 한가득 흘린 땀이 이불에 묻은 것일까, 무심결에 피를 토한 것일까, 아니면 추잡하게 실금이라도 한 것일까. 어느 쪽이든 스스로가 혐오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결국 청은 끝을 모르고 차오르는 열기에 졌다. 그는 끙끙대며 몸부림치다 말고, 몸을 한껏 웅크린 채 섧게 울었다. 눈가를 타고 줄줄 흐르는 눈물마저 뜨거웠다.
“흑, 허억, 흐, 끄윽.”
몸살이든 전염병이든 열이 오르는 원인을 알면 덜 무서우련만, 영문을 도통 알지 못하니 더욱 불안했다. 못 견디게 괴로웠다. 숨이 꼴딱꼴딱 넘어갈 때까지 소리 내어 울다가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캄캄한 어둠 속에서 서늘한 손이 불쑥 튀어나와 달아오른 뺨을 만졌다. 미미한 냉기였지만 뙤약볕이 작열하는 황무지에 내리는 비처럼 달았다.
“예락, 오전에 대전에 다녀왔다지? 그 뒤로 식사도 물리고 내내 잠만 자고 있다 하던데.”
청은 몸도 제대로 가누면서 무작정 손에 뺨을 비벼 댔다. 그러나 손은 매몰차게 청을 떠났다. 대신 잔뜩 구겨진 채 허벅지에 아슬아슬하게 덮여 있던 이불을 확 걷어 냈다. 축축한 사타구니에 바깥 공기가 닿았다.
“이런, 많이도 싸 놨군. 이부자리에 홍수라도 난 줄 알았어.”
차분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수치심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멀어지는 냉기가 아쉬웠다. 청은 눈도 못 뜬 채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애처롭게 매달렸다.
“내 예락이 발정이 참으로 단단히 난 모양이야. 그새를 못 참고 이리 질질 싸 대고.”
“흐으, 몸이, 너무, 뜨거워서……. 흐, 윽, 하아.”
울컥 설움이 북받쳤다. 청은 숨 가쁘게 흐느끼며 감은 눈꺼풀 너머로 손을 뻗었다. 어둠 속을 휘저어 무작정 상대를 찾았다. 줄줄 흐른 눈물이 침상을 적셨다.
“도와줄까?”
정신없이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 끔찍한 열기를 해소할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었다.
“숨 크게 들이쉬어 봐.”
그 명령의 의미를 생각하기도 전에 숨을 들이켰다. 그와 동시에 향이 확 밀려들었다. 온갖 향료와 꽃과 열매를 한데 집어넣고 진하게 우린 것 같았다.
“허억…….”
청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향이 너무 진했다. 향긋함을 넘어 목이 졸리고 오장육부가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전에도 맡아 본 적 있는 향이었다. 황제의 환열기 때 한 번, 꽁꽁 얼어붙은 호수 한복판의 누각에서 한 번. 고작 서너 해 전인데도 먼 옛날처럼 까마득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갑자기 왜 다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저 향을 계속 들이마시면 몸속 깊은 곳까지 샅샅이 스며들어 이상해져 버릴 것 같았다. 본능적으로 이를 악물어 숨을 꾹 참았다.
“숨 쉬라고 했지.”
“컥!”
단단한 손이 얼굴을 우악스럽게 틀어쥐었다. 턱을 으스러뜨려 버릴 것 같은 악력에 입이 억지로 벌어졌다. 청이 끅끅대며 힘겹게 공기를 마시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툭 놓아주었다.
청은 눈물에 흥건히 젖은 눈을 힘겹게 떴다. 아롱아롱 흐려진 시야로 황제가 보였다.
“흐으, 아…… 폐, 헉, 폐하.”
“응.”
“헉, 이상…… 이상한……. 향이.”
“이상하다니. 전에도 맡아 봤지 않나. 입으로는 향이 너무 진해 괴롭다고 칭얼대면서, 아래로는 수치도 모르고 좆을 벌떡벌떡 세웠지.”
“아닙…… 니다.”
“아니긴. 어서 박아 달라고 뒷구멍을 벌름거리며 보채던 것까지 다 기억하거늘.”
황제는 피식 웃었다. 청은 환열기를 맞아 놓고도 그것이 환열인 줄도 몰랐다. 서른 해 남짓한 세월을 평인으로 살았으니 당혹스러울 법도 했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다 큰 사내가 뒤를 흥건히 적시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이리도 귀여울 줄이야. 하루가 멀다 하고 청의 온몸에 자신의 여향을 들이붓고 정액을 내장에 꾸역꾸역 채워 넣고, 음기를 보충하는 탕약을 꾸준히 먹인 보람이 있었다.
처음으로 환열기를 맞은 것만으로도 이리 깜찍하게 구는데, 자신이 애를 밴 줄도 모르고 또 배게 되면 과연 청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청아, 이리 와.”
온몸에 열이 올라 발씬거리던 차에 황제가 향을 풀어 놓으니 버틸 수 없었다. 열은 식을 기미가 보이지 않고, 다리 사이에서는 자꾸 정체 모를 물이 줄줄 샜다. 이대로 정말 죽는 건가 싶었다.
청은 질식할 지경이 되어 침상 위를 엉금엉금 기었다. 질척하게 젖은 허벅지와 무릎 언저리를 따라 애액이 뚝뚝 흘렀다.
“이리 오래도.”
쿵! 둔탁한 소리가 났다. 황제가 청의 뒷머리를 잡아 침상에 처박은 탓이었다. 청은 머리채를 잡혀 무력하게 뒤로 질질 끌려갔다. 까맣게 물든 시야에 빨갛고 파란 얼룩이 졌다.
“아, 악, 흐으…….”
황제는 엎드려 괴롭게 흐느끼는 청을 뒤에서 끌어안고 아랫배를 만졌다. 청이 크게 움찔했다. 순간 황제가 배를 짓이기거나 후려갈길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이 안에 아이가 있었어. 너와 내 아이가.”
크고 따스한 손이 배를 느릿하게 문질렀다. 청은 입술을 살짝 벌린 채 굳어 버렸다. 황제의 말이 곧바로 이해되지 않았다.
“아주 작은 아이가 들어 있다가, 곧 죽었지.”
청은 남자였다. 그것도 음인이 아닌 평인 사내. 그런 그가 아이를 가지다니. 질 나쁜 농담조차 되지 못하는 이야기였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손끝이 싸늘하게 식었다. 머리는 황제의 말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지만 가슴은 아니었다. 아침에 꾼 악몽이 불현듯 떠올랐다. 다리를 타고 끊임없이 흐르던 새빨간 핏물이 눈앞을 떠나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저, 저는.”
“씨를 품을 수 있는 몸이 아니지.”
“그런데 어째서…….”
“그래, 어째서일까.”
넋을 잃은 청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황제의 손에 덮인 아랫배가 보였다. 정말로 이 안에 황제의 아이가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청은 황제에게, 황실에, 죽은 아이에게 대체 얼마나 큰 죄를 지은 것인가…….
“아이가 들어서는 건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하더군. 평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였다고.”
청은 말이 없었다. 이불에 고개를 박고 엎드린 채 색색 거친 숨을 내쉴 뿐이었다. 베갯잇을 적시는 것이 땀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
작게 부들부들 떨리는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후끈하게 데워진 공기를 타고 달콤한 향이 확 풍겼다. 환열기를 맞은 음인의 여향. 청에게서 느낄 수 있을 거라 결코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황제는 그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판판한 아랫배를 살며시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한 번도 했는데 두 번이라고 못 할까.”
* * *
공기 중에서 음인과 양인의 여향이 뒤섞였다. 두꺼운 장막 너머로 맡는 꽃향기처럼 흐릿하던 청의 향이 황제의 향에 완전히 짓눌려 잡아먹혔다.
청은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황제가 옷을 벗겨도, 질질 흐른 애액을 손에 묻혀도 구멍을 쑤셔도 사지를 바르작거리며 아, 아, 하고 넋 나간 신음을 흘릴 뿐이었다.
그는 엉덩이를 치켜든 채 무릎을 꿇고 엎드린 자세가 되었다. 엉덩이 골이며 사타구니가 흥건히 젖어 번들거렸다. 바짝 곤두선 성기와 팽팽하게 올라붙은 음낭 너머로 언뜻 황제가 새겨 놓은 용 모양 화상 자국이 보였다.
다른 음인들에 비해 청의 여향은 형편없이 약했다. 만끽하려면 살에 코를 박고 숨을 깊이 들이쉬어야 했다. 하지만 고작 그것만으로 황제는 흥분했다.
그는 청의 엉덩이 살을 붙잡아 벌렸다. 벌겋게 드러난 입구에 귀두를 툭툭 쳤다.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린 구멍이 기대감에 움찔거렸다. 침상에 이마를 묻고 흐느끼던 청이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드러난 옆얼굴이 눈물과 타액으로 엉망이었다. 그는 입술을 떨며 애원했다.
“폐하, 부디 용서를…….”
“얌전히 있어야지. 어찌 이리 투정이 심해.”
청이 후들후들 경련하는 팔로 자신의 배를 감싸 안았다. 잔뜩 달아오른 내벽이 아우성쳤다. 구멍에 힘이 들어갔다 풀어지며 벌름거릴 때마다 투명한 액이 주름을 타고 왈칵 쏟아져 나왔다.
황제가 당장이라도 성기를 박아 안을 긁어 주길 바랐다. 그러나 동시에 무서웠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뇌리를 지배했다. 황제에게서 달아나고 싶었다.
“넣으면, 임신할지도 몰라서, 흐으, 아, 안 돼, 임신하면…….”
두서없이 횡설수설하는 말이 쏟아졌다. 청은 줄곧 비이성적인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대로 황제와 교합하면 정말 또 아이가 생길지도 몰랐다. 제대로 된 아기집이 아닌 만신창이 태에 자리 잡은 아이는 곧 죽을 터였다. 청은 또다시 황손을 죽인 죄인이 되리라. 그것만은 싫었다.
황제는 성기 밑동을 붙잡고 구멍 위에 꾹 눌렀다. 찐득한 속살에 귀두가 반쯤 묻혔다. 귀두에 애액이 덕지덕지 묻었다. 입구가 미끄덩하게 벌어지는 것을 느낀 청이 화들짝 놀랐다.
“빼 주십시오. 제발……!”
“빼 달라니. 좆을 쑤셔 넣고 좆질을 해야 애가 생기지.”
“안 돼…….”
“안 돼?”
“아기가 또……. 또, 죽으면.”
“그런데 어쩌지, 청아. 이미 들어갔는데.”
꾸욱. 끝만 물려 있던 귀두가 조금 더 깊이 파고들었다. 청이 발작적으로 몸부림쳤다. 그래 봤자 온몸이 녹진녹진하게 풀려 있어 엉덩이를 씰룩대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빼 주고 싶어도 이 구멍이 내 좆을 물고 놔주질 않는데 어찌하나. 좆물을 싸 달라고 이리도 열렬히 조르니, 애가 들어서는 것도 금방이겠어.”
“으, 아…… 흐악……!”
청이 처절하게 버둥거렸다. 이불보를 맨손으로 벅벅 긁으며 달아나려 안간힘을 썼다. 황제는 그의 골반 양쪽을 움켜쥐고 잡아당겨 끝까지 박아 넣었다. 애액으로 질펀해진 내벽을 벌리고 성기가 쭉 밀려들었다.
“헉!”
황제의 사타구니가 엉덩이에 퍽 부딪치는 순간 의식이 끊어졌다 다시 돌아왔다. 청의 고개가 확 젖혀졌다. 발끝을 꽉 오므리고 등줄기를 굳힌 채 부들부들 떨었다.
한 번도 만져 주지 않은 그의 성기가 꿈틀대며 요동쳤다. 단숨에 삽입당한 충격으로 정액이 왈칵 뿜어졌다. 젖소에게서 우유를 짜내듯 거침없이 쭉쭉 쏘아져서는, 희뿌연 웅덩이가 되어 침상에 고였다.
황제는 한 팔로 침상 위를 짚고 한 팔로 청의 허리를 휘감았다. 그 상태로 청의 등에 자신의 가슴을 붙이고 퍽퍽 처넣었다. 끈적하게 들러붙는 속살을 뿌리치고 쾅쾅 때려 박을 때마다 접합부에서 묽은 액이 튀었다.
“아, 흐, 아응, 앗, 아!”
청은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저항할 정신조차 없었다. 그의 몸이 침상에 축 늘어졌다. 황제에게 붙들린 엉덩이만 어설피 치켜든 채였다. 허공에서 흔들리는 그의 성기에서 간헐적으로 맑은 물이 질질 흘렀다.
무작정 안을 쾅쾅 찧기만 하던 움직임이 바뀌었다. 각도를 달리하여 몇 번이고 귀두를 내벽에 미끄러뜨렸다. 성기가 배 안을 짓눌러 댈 때마다 숨이 막히고 속이 뒤집혔다. 성기 모양대로 배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으, 흐윽…… 헉.”
“수의가 그리 말하더군. 꾸준히 약을 먹이고 자극을 주다 보면, 흔적밖에 없는 아기집일지라도 조금은 발달할지도 모른다고.”
미끄덩한 내벽 깊은 곳에 살점이 움푹 패었다 솟아오른 부분이 있었다. 귀두로 내장을 죄다 문질러 훑지 않았다면 찾아내지 못했을 만큼 미미한 요철이었다. 그곳에 귀두가 턱 걸렸다.
“하읏!”
청이 벼락을 맞은 듯 크게 경련했다. 발바닥이 불에 덴 듯 뜨거워져 발을 꽈악 오므렸다. 그는 저도 모르게 골반을 이리저리 뒤틀고 하체를 황제 쪽으로 밀어붙였다. 엉덩이 살이 한껏 눌리며 삽입이 깊어졌다. 성기에서 또다시 정액이 뿜어졌다. 아까보다 한결 묽었다.
“여기일까?”
“아, 아니야, 아니야……. 거기 아니야…….”
청이 눈물범벅이 되어 고개를 미친 듯이 저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중얼거렸다.
“솔직히 말해야지, 청아. 그래야 씨를 제대로 넣어 주지. 응?”
“아아, 아, 아!”
청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숨이 넘어가도록 엉엉 울면서 축축한 뺨을 침상에 문질렀다. 그의 몸이 황제가 쳐올리는 대로 무력하게 흔들렸다.
황제는 아예 작정한 듯 내벽 한곳을 끊임없이 치댔다. 얼얼하다 못해 그 부분에 구멍이 뚫려 버릴 것 같았다. 안이 제멋대로 꿈틀거렸다. 성기를 으스러뜨려 집어삼킬 듯 꽉 조이던 속살이 한순간 스르르 풀어졌다 다음 순간 다시 좁아지기를 반복했다.
황제가 뒤에서부터 청의 목을 움켜쥐어 확 일으켜 세웠다. 축 늘어져 이따금 반사적으로 꿈틀거리기만 하던 몸이 강제로 끌려 올라갔다. 무력하게 목덜미를 잡힌 채, 엎드린 것도 무릎을 꿇고 앉은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거세게 흔들렸다.
도중에 움직임이 뚝 멈췄다. 배꼽 안쪽을 쾅쾅 두들기던 충격이 갑작스럽게 사라졌다. 성기는 오장육부를 명치까지 버겁게 밀어 올리며 그 자리에 얌전히 박혀 있었다.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이 밀려들었다.
“흑, 아으, 앗……!”
청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잔뜩 열이 올라 발씬거리는 내벽을 성기에 이리저리 문질렀다. 하지만 엉덩이를 소극적으로 움찔대는 것만으로는 간지러움을 해소하기에 한참 모자랐다.
“폐하, 폐하…….”
청은 우느라 숨도 제대로 못 쉬고 헐떡였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마구 흐느끼면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애걸복걸했다.
본능적으로 뒤에 힘을 꽉 주었다 풀었다. 뜨겁게 녹아내린 안이 황제의 성기를 탐욕스럽게 조르고 보챘다. 내장에 고여 있던 투명한 애액이 구멍 너머로 왈칵 넘쳤다. 허공에 미미하게 떠도는 향이 조금 더 짙어졌다.
그러나 황제는 청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청이 앞으로 고꾸라지지 않도록 목덜미를 틀어쥐고 가만히 숨을 고를 뿐이었다.
결국 청은 훌쩍이며 스스로 움직였다. 후들후들 떨리는 손을 뒤로 뻗어 황제의 골반과 허벅지 근처를 짚고 엉덩이를 들썩였다. 젖은 손가락을 빠는 듯한 소리와 함께 성기가 반쯤 뽑혀 나왔다. 속살이 기둥에 들러붙어 딸려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흐읏, 으응…….”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다시 엉덩이를 뒤로 밀어붙였다. 두꺼운 귀두가 내벽을 긁고 쭉 밀려 들어왔다. 배가 빠듯하게 불렀다. 눈앞에 하얗게 별 가루가 비산했다.
주저하던 것은 처음 몇 번뿐이었다. 미적미적 성기를 삼켰다 뱉기를 반복하며 청은 스스로 쾌감에 도취되었다. 앓는 듯 흐느끼는 듯 힘에 부친 신음이 연이어 새어 나왔다. 황제의 사타구니가 청이 흘린 것으로 흠뻑 젖었다. 성기는 물론이고 허벅지 안쪽과 탄탄하게 도드라진 복근, 치골 주위가 온통 질척거렸다.
황제를 모시기 위한 방중술을 배운 적이 없는지라 청의 움직임은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낮게 헐떡이는 신음은 교태와는 거리가 멀었고, 뼈대가 도드라진 마른 몸은 좋은 말로도 농염하다고 할 수 없었다. 황제를 간신히 받는 좁은 골반에서는 삐걱삐걱 소리가 날 것 같았다.
그러나 황제는 청에게만, 오직 그에게만 발정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러했다. 악기와 붓을 다루던 손에 대신 자지를 쥐여 주고, 예지(叡智)로 빛나는 고운 눈꺼풀 위에 정액을 흠뻑 뿌리고 싶었다. 반듯하게 앉아 시조를 읊는 소년의 곧은 허리를 붙잡아 고꾸라뜨리고, 짐승처럼 울면서 벌벌 길 때까지 범하고 싶었다.
그것은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아니, 흉악한 욕망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기승을 부렸다. 빛을 잃고 망가진 시선이 멍하니 자신을 향할 때마다, 흉터와 굳은살로 뒤덮인 마른 손이 가늘게 떨리며 자신에게 닿을 때마다 머릿속이 시뻘겋게 들끓었다.
청을 죽이고 싶었다. 적어도 팔다리 하나쯤은 으깨 놓고 싶었다. 좆을 쑤셔 박는 것만으로도 이리 귀엽게 울어 대는데, 작정하고 숨통을 끊으려 들면 청은 얼마나 어여쁜 모습을 보여 줄까.
청의 목을 쥐고 있던 황제의 손이 뱀처럼 느리게 기었다. 당장이라도 기도를 조르고 경동맥을 짓누를 것처럼, 급소를 찬찬히 매만졌다.
“하악…… 아, 흐응, 읏.”
그러나 청은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눈가가 불그스름하게 짓무르도록 울면서 본능에 따라 서툴게 요분질을 할 따름이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목덜미와 어깨에 어지럽게 들러붙었다. 등줄기와 허리에 움찔움찔 힘이 들어가는 것이 고스란히 보였다. 제법 사랑스러운 광경이었다.
황제는 청의 목을 쓰다듬던 것을 멈추었다. 이제껏 수없이 그래 왔듯이, 이번에도 살의를 단념했다. 청이 뒤로 자신의 성기를 가득 물고 내벽에 힘을 주어 기둥을 위아래로 주무르는 것을 가만히 만끽했다.
손을 앞으로 뻗어 입술 사이에 물려 주었다. 청은 입에 들어온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손가락을 물었다. 어미의 젖을 찾는 아기처럼 맹목적으로 손마디를 핥으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흥건히 젖은 샅이 철썩철썩 맞부딪쳤다.
“맛있어?”
“으, 흐읍…… 아, 아, 앗!”
“위도 아래도, 잘도 빨아 먹는군. 식사는 한술도 제대로 들지 않으면서, 내 몸엔 환장을 하고 달려들어.”
황제가 나직하게 타박했다. 뼈 있는 말이었다.
청은 황제와 겸상을 할 때면 매번 주눅이 들었다. 처연한 낯으로 황제의 눈치를 살피며 한두 숟가락 뜨는 둥 마는 둥 하다 도저히 못 먹겠다며 난색을 표했다. 그때마다 황제는 청의 턱을 붙잡고 자신의 피와 살점을 강제로 먹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청이 먹고 싶어 하기만 한다면 팔다리든 심장이든 내장이든, 뭐든지 도려내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황제의 눈을 마주한 청이 곧 죽을 듯 새파랗게 질려서 벌벌 떨었기에 그리하지 않았다. 머리채를 움켜쥐고 질질 끌어와 입술 사이에 죽이 담긴 숟가락을 처박는 것 정도로 참았다. 그는 항상 청에게 할 수 있는 모든 공을 들였다.
질척하고 보드라운 입 안을 헤집으며 다른 손으로 청의 가슴께를 더듬었다. 손끝에 빳빳이 일어선 유두가 걸렸다. 그의 유두는 양쪽 모양이 달랐다. 귀걸이가 생으로 뜯겨 나간 상처는 아물었지만, 둥글고 도톰하던 젖꼭지가 일그러졌다.
“하으, 아, 윽!”
흉이 남은 유두를 둥글리듯 문질러 주었다. 청의 신음 소리가 높아졌다. 한때 끔찍하게 다쳤던 곳을 만지는데도 싫어하거나 꺼리기는커녕 끙끙 앓으며 좆을 보챘다.
“흐읏…….”
더는 참기 힘들었다. 황제는 청의 목을 힘껏 움켜쥐어 잡아당겼다. 그의 흰 손등에 푸르스름한 힘줄이 도드라졌다. 청의 고개가 확 젖혀져 황제의 품에 쓰러졌다. 수직으로 꼿꼿이 서 있던 성기가 내벽을 세차게 짓이겼다.
“커헉, 컥!”
청이 숨이 막혀 괴로워했다. 황제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장 저 안쪽 도톰하게 올라온 부분에 귀두를 처박고 사정했다.
사정하는 도중에 성기를 쭉 잡아 뺐다가 도로 뿌리까지 때려 박고, 반쯤 빼냈다가 다시 쿵 쳐올렸다. 안을 자잘하게 쿡쿡 찧으며 정액을 모조리 싸질렀다. 잔뜩 긴장한 내벽이 바짝 좁아져서 성기가 드나들 때마다 귀두가 속살에 뚝뚝 걸렸다.
청의 창백한 얼굴이 피가 몰려 벌겋게 달아올랐다. 귀에 세찬 바람 소리가 들리고 시야가 가물가물해졌다. 황제의 성기는 사정을 마치자마자 꾸역꾸역 부풀어 올랐다. 결착이었다.
“흐, 아, 하악……!”
단말마의 절규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단단하게 팽창한 성기가 청의 뱃가죽을 밀어 올렸다. 쾌감이 불꽃처럼 세차게 터졌다. 청은 멀건 정액을 뚝뚝 흘리며 힘없이 몸부림쳤다. 눈앞의 정경이 아스라이 잦아드는 것이 끔찍한 절정 탓인지 황제가 목을 졸라 숨이 모자란 탓인지 알 수 없었다.
결착은 지독하리만치 길었다. 도를 넘은 쾌락은 고통이었다. 귓가에는 짐승처럼 헉헉대는 스스로의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목을 붙잡은 황제의 손이 너무 뜨거웠다. 괴로웠다. 쾌감이 버거워서 죽을 것 같았다.
그는 흉포하게 부풀어 오른 성기를 내장 전체로 꽈악 움켜쥔 채, 한참을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벼락을 맞아 바짝 타 버린 나무처럼. 잔뜩 힘이 들어간 허벅지가 멋대로 후들후들 경련했다. 의식이 뿌옇게 흐려졌다.
툭. 어느 순간 황제가 목을 놓아주었다. 뒤늦게 결착이 끝났음을 깨달았다. 아랫배를 가득 채우던 성기가 스르르 수그러들어 빠져나갔다. 청은 곧바로 침상에 풀썩 쓰러졌다. 곧은 목덜미에 손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헉, 허억, 흐, 헉, 쿨럭!”
성기가 빠져나가고 난 구멍이 작게 뻐끔거렸다. 발간 입구 너머로 정액이 줄줄 샜다. 그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황제는 자신의 성기를 쥐었다. 체액이 덕지덕지 묻은 거대한 성기는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흘러나온 정액을 귀두로 쓸어 모아 구멍에 도로 밀어 넣었다.
“흘리지 말고 잘 받아먹어. 그래, 옳지.”
그러다 한순간 힘을 주어 기둥을 쑥 삽입했다. 방금 절정을 맞아 흐물흐물하게 풀어진 내벽은 큰 저항 없이 성기를 물었다.
“흐앗!”
청이 화들짝 놀라 맥없이 버둥거렸다. 기진맥진한 와중에도 환열에 들뜬 몸은 착실히 반응했다. 내벽 전체가 술렁이며 홧홧한 간지러움을 해소시켜 줄 성기를 반겼다. 황제가 입맛을 다시며 웃었다.
“왜 그리 놀라. 환열이 잦아들 때까지는 하던 것을 계속해야지. 일전에 내가 환열기를 맞았을 때 네가 도와주었듯이.”
그때는 청이 쓰러지는 바람에 정사가 중단되었다. 황제는 의식을 잃은 그의 입에 성기를 쑤셔 박으며 홀로 열기를 달랬다. 하지만 이번에는 결코 그런 식으로 도망칠 수 없을 것이다.
환열기를 처음 맞는 청은 모르겠지만, 음인과 양인이 겪는 환열이란 몹시도 지독했다. 뇌를 태우고 온몸을 살라 먹는 열을 해소하기 전까진 마음대로 쓰러져 잘 수도 없었다. 몇 시간이 되었든 며칠이 되었든, 미친 듯이 쾌락을 탐닉하는 수밖에.
* * *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모든 창이 굳게 닫힌 침전 안은 낮과 밤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청은 방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아니, 나갈 수 없었다. 지독한 환열이, 그리고 황제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황제는 이따금 잠깐씩 자리를 비우기도 했지만 청은 그럴 수 없었다. 온몸을 발그스름하게 물들이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온종일 침상을 뒹굴었다.
중간중간 짧은 틈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짐승처럼 붙어먹었다. 열이 조금 잦아들면 까무룩 잠들었다가, 뒤가 다시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할 때쯤 깨어났다. 황제의 아래에 깔려 흔들리던 와중에 짤막짤막하게 정신을 놓기도 했다.
철썩!
“윽!”
청이 짧게 신음했다. 황제가 정사 도중에 그의 엉덩이를 후려갈긴 탓이었다. 갑작스러운 자극에 놀란 내벽이 성기를 콱 조여 물었다. 맨살을 모질게 얻어맞았는데 아프기는커녕 묘하게 찌르르했다. 끝날 줄 모르는 발정이 아픔마저 달콤하게 만들었다.
“정신 똑바로 안 차리지.”
황제가 청의 엉덩이를 손등으로 툭툭 쳤다. 청이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이미 땀과 체액으로 젖어 있던 이불에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흐으, 흑…….”
그는 섧게 흐느끼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개처럼 엎드려 성기를 받는 자세였다. 황제가 뒤에서 쿵, 쿵, 찍어 올릴 때마다 그의 몸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수없이 성기가 드나든 구멍이 얼얼했다.
도대체 정액을 몇 번이나 받은 것인지 셀 수도 없었다. 반나절이고 한나절이고 황제에게 시달리다 간신히 떨어지면 배 속에 고여 출렁이던 정액이 둑이 터진 듯 콸콸 흘렀다. 거기다 정액을 흘리지 않게 구멍을 잘 조이고 있으라는 명이 떨어졌다. 청은 그가 일을 처리하고 돌아올 때까지 무릎을 꿇고 엉덩이를 치켜든 자세로 뒤를 움찔대며 울어야 했다.
“청아.”
황제의 손이 청의 턱을 쥐어 고개를 돌렸다. 들썩들썩 흔들리는 시야에 침상 곁의 탁자가 들어왔다. 찻주전자며 과일 따위의 요깃거리가 놓여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있었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황제가 가져온 것일까. 아니, 궁인이 도중에 슬쩍 들어와 놓고 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네가 좋아하는 차를 가져왔어. 네가 잘 먹던 주전부리도. 아무리 환열기를 맞았어도 끼니는 챙겨야지. 제대로 먹질 않으니 기껏 들어선 아이도 금방 떨어진 것 아닌가.”
“폐하, 저는, 아이를……. 가지고 싶지 않습니다.”
청이 고개를 푹 떨어뜨리고 더듬더듬 고백했다. 몹시 주제넘은 말이라는 것을 스스로도 알았다. 잘 알고 있는데도, 이성이 흐려진 틈을 타 멋대로 속마음이 새어 나왔다.
황제는 움직임을 멈추고 그의 말을 들었다. 처음 환열이 올랐을 땐 사람의 말을 하지 못하고 입가로 침을 질질 흘리더니, 이젠 좀 살 만한 모양이었다.
“한때는 회임할 수 있는 몸을 가진 자들이 부러웠습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가질 수 없는 것을 질투했고, 그만큼 비참해졌습니다. 하지만 이젠…….”
청이 품었던 그 씨가 다른 이에게 주어졌다면, 적어도 청보다는 아이를 정성껏 지켰을 것이다. 황후나 후궁들부터, 신분 낮은 궁인들에 이르기까지. 그 누가 되더라도 청보다는 나았을 터였다.
용종(龍種)이었다. 극진한 보호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 무사히 태어났다면 황자나 황녀로서 일생을 명예롭게 살았을 아이였다. 어쩌면 황제가 될 수도 있었겠지. 그러나 피를 쏟으며 차가운 바닥을 뒹굴다, 청의 숨과 함께 아이의 숨마저 멎어 버렸다. 너무도 허무하게.
“싫습니다. 무섭습니다……. 저 같은 것한테는 너무도 과분합니다.”
“내 아이를 가지기 싫다고?”
황제가 청의 고개를 억지로 돌려 자신을 보게 했다. 턱이 으스러질 듯이 아팠다.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황제의 눈동자가 흐릿한 어둠 속에서 짙은 밤색으로 보였다.
“네게 언제부터 싫다 할 권리가 있었지?”
“흐윽…….”
“나를 사랑한다면서. 나를, 진심을 다해 사랑한다면서. 청아, 네가 그리 말했잖아. 그런데 내게 어찌 이리 무정할 수가 있어.”
“…….”
“대체 언제까지 싫다, 안 된다, 하지 말라는 말만 할 셈이야. 내게 유일한 것을 모두 내주었거늘. 내 검을 가진 것도, 내 마음을 가진 것도, 내 아이를 가졌던 것도 오로지 너뿐인데.”
“폐, 폐하. 그럼……. 그럼, 황자 전하는.”
“네가 아닌 다른 이에게 씨를 품는 것을 허락할 리가 없잖아.”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황자가 자신의 자식이 아니라고, 황제는 너무도 태연하게 고백했다. 황궁이, 아니, 온 나라가 발칵 뒤집힐 일이었다.
“혈통이니 정통성이니 그렇게 따지고 들던 것들이, 제국 순혈도 아니고 황실의 피가 섞인 것도 아닌 황자를 떠받들고 있지. 다음 황제가 될 몸이라며 벌써부터 어지간히도 굽실거리더군. 재미있지 않아?”
황제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새하얗게 질려 벌벌 떠는 청과 눈을 마주하자 웃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그는 청의 뺨에 자신의 뺨을 맞대며 화사하게 눈매를 휘었다.
“그래……. 청아. 차를 마시게 해 줄까? 아니면 과일을 먹여 줄까.”
청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넋이 나간 채 황제의 성기를 품고 흔들리며 찻잔을 입가에 대어 주는 대로 차를 마셨다. 찻물이 마구 출렁였다. 입매와 턱을 줄줄 타고 흘러내린 것까지 핥아 먹으라 하기에 침상에 고개를 처박고 젖은 이불을 핥았다.
그다음으로는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채 도자기 그릇에 담겨 있던 자두를 먹이려 했다. 차는 몰라도 씹어 삼켜야 하는 과일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청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미친 듯이 도리질했다. 흐느껴 울며 도저히 못 먹겠다 빌었다.
“헉!”
성기가 쑥 빠져나갔다. 그 자리에 차갑고 둥근 것이 닿았다. 황제는 청이 비명을 지르는 것도 개의치 않고 자두를 무작정 구멍에 욱여넣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입구 주위의 살이 한계까지 늘어났다.
둥근 과일이 내벽을 억지로 비집고 하나씩 하나씩 고개를 들이밀었다. 물기 어린 과일이 몸속에서 저들끼리 미끄덩하게 문질러졌다. 배가 더부룩하게 불러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흐아, 악, 아프, 아파…….”
“아프다니, 청아. 네 자지에서 좆물이 이렇게 질질 새는데.”
“배가, 으, 흑, 터질 것, 같…… 폐하, 제발!”
“아주 좋아 자지러지는군. 입으로 먹여 주는 건 뭐든 싫다 하더니. 사실은 입보다 후장으로 식사하는 게 더 좋았던 모양이지?”
배가 차갑고 무거웠다. 아랫배를 끌어안고 어정쩡하게 엎드린 청이 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을 때까지 들어가자 헛구역질이 났다. 황제는 그제야 선심 쓰듯 멈추어 주었다. 그러나 자두를 손수 빼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결국 청은 훌쩍훌쩍 울며 스스로 뒤에 힘을 주었다. 한참 애를 쓴 끝에 구멍이 빠듯하게 벌어졌다. 팽팽하게 벌어진 곳을 통해 표면이 번들번들하게 젖은 자두가 힘겹게 빠져나와서는, 이부자리에 툭 떨어졌다.
“으으, 응…… 아……!”
청은 자두를 하나하나 내보내며 허리를 들썩였다. 둥근 자두가 내벽을 따라 미끄러질 때마다 쾌감에 앓는 소리가 절로 났다. 바짝 곤두서 배꼽까지 올라붙은 성기에서 희뿌연 정액이 쭉, 쭉 기세 좋게 튀어 올랐다.
그가 낳은 과일 여러 개가 침상에 멋대로 굴러다녔다. 황제는 마지막 자두 하나가 나올 때까지 집요하게 지켜보다가, 진이 빠진 청을 짓누르고 성기를 도로 꽂아 넣었다.
그 뒤로는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다. 황제가 박아 올리는 대로 턱턱 흔들리면서 입에 대어 주는 당과를 무심코 베어 물었다. 입 안에 들어온 것을 허겁지겁 삼키고 목이 쉬도록 신음했다. 입술에 덕지덕지 묻은 달콤한 꿀을 황제가 모조리 핥아 먹었다.
회임에 대한 것도, 황자에 대한 것도……. 어느덧 청의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 * *
기절하듯 잠들었던 청이 부스스 깨어났다. 눈을 떴으나 여전히 정신이 몽롱했다.
요 며칠간의 기억이 드문드문 끊겨 있었다. 자다 깨어 몸을 섞고, 식사를 하다가 몸을 섞었다. 그는 황제와 눈만 마주쳐도 뒤를 적셨다. 방 안을 가득 메운 황제의 여향이 형체 없는 손이 되어 그의 몸을 더듬고 정액을 쥐어짰다.
처절하게 쾌락을 갈구한 끝에 들불처럼 온몸을 뒤덮었던 열기가 느리게 가시고 있었다. 그 자리에 욱신욱신한 통증이 남았다. 전신에 황제의 흔적이 남지 않은 곳이 없었다. 피멍이, 생채기가, 벌겋게 부어오른 자국이 살갗을 뒤덮었다.
“아…….”
절로 앓는 소리가 났다. 몸 안이 불편했다. 무심코 돌아누우려다 흠칫 놀랐다. 그의 등 뒤에서 황제가 잠들어 있었다. 여전히 청의 안에 성기를 꽂아 놓은 채였다. 청은 저도 모르게 호흡을 멈추었다.
단정하게 감은 눈매 아래 긴 속눈썹이 살며시 드리웠다. 다갈색 머리카락이 약간 흐트러져 있는 것조차 고왔다. 깨어 있을 때는 잔혹한 말을 망설임 없이 흘리는 입술이 지금은 얌전히 다물려 있었다.
꿈에나 나올 듯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어린 시절의 청이 술에 취해 황제에게 입을 맞췄던 것도 이 잠든 얼굴에 홀려서였다.
죽은 황후가 환열기를 맞아 이성을 잃고 청을 범하려 했다. 청은 그런 황후에게 칼을 휘둘렀다. 그 사건이 너무도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평생 감정을 숨기고 황제의 오른팔로 살려 했던 청의 마음이 낱낱이 파헤쳐졌고, 황후와 그의 조국이 파멸에 이르렀다. 가까운 듯 데면데면했던, 여느 군신(君臣)과 다르지 않았던 청과 황제의 관계를 근본부터 뒤흔들었다.
아니, 그 사건은 단지 낙숫물 한 방울에 불과했다. 바위를 쪼개는 마지막 한 방울. 오랜 세월에 걸쳐 차곡차곡 쌓여 온 앙금이 그때를 계기로 일시에 터져 나온 것뿐이었다. 어쩌면 모든 것은 먼 옛날, 두 사람이 연회장에서 처음 만난 순간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수많은 비참한 시간들을 거쳐, 청은 여전히 황제를 사랑했다. 그를 두려워하고 스스로를 학대하며 괴로워할지언정 한 번도 사랑하는 것을 그만두지는 않았다. 자신을 얼마든지 짓밟고 망가뜨리고 죽여도 좋으니, 그만큼은 지고한 제국의 주인으로서 길이길이 권좌를 지키길 바랐다.
이대로 황제와 한 침상에 드러누워 자는 것도, 그의 잠을 방해하는 것도 불충이었다. 청은 황제를 깨우지 않도록 무진 애를 쓰며 그의 품에서 살며시 벗어났다.
“흐읏.”
성기가 찌걱 미끄러졌다. 막 잠에서 깨어난 탓에 한껏 민감해진 속살에 굵은 기둥이 비벼졌다. 지독하게 달콤한 감각이었다. 간신히 잠깐 가라앉았던 열이 다시 오르려는 모양이었다.
청은 숨을 참았다. 그렇지 않으면 꼴사나운 신음을 내지를 것 같았다. 자는 사람을 상대로 이보다 더한 추태는 없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일으켜 안에 든 것을 빼내려 했다. 귀두가 내벽을 죽 긋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나오면 되는데.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안에 든 것이 점점 부풀고 있었다. 처음에는 착각인가 싶었다. 그러나 곧 착각이 아님을 깨달았다. 성기가 쇠로 만든 창대처럼 단단하게 발기하여 내장을 무자비하게 짓눌렀다.
“청아.”
“헉!”
뒤에서 긁히는 듯 나른한 속삭임이 들렸다. 청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미성이었던 황제의 목소리는 한 차례 극독을 마신 이후로 이따금 낮게 갈라졌다.
“나를 두고, 또 어딜 가려고.”
황제가 눈을 감은 채 청을 안아 끌어당겼다. 질질 끌려가며 절반이 넘게 빠졌던 성기가 도로 푹 박혔다. 황제는 한숨을 쉬고 허리를 툭, 툭, 약하게 쳐올렸다. 커다란 성기가 배 안을 미적지근하게 두들겼다.
“흐응, 읏, 아, 아!”
“너는 무슨 꽃을 좋아하지?”
다소 뜬금없는 말이었다. 청이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황제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꿈결을 헤매는 듯 느른히 풀린 음성으로 다시금 물었다.
“응? 청아. 무슨 꽃이 좋아…….”
“폐하, 헉, 흐으, 저, 저는.”
그 말에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명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몸 안을 집요하게 들쑤시는 감각에 신음하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꽃 이름을 허겁지겁 주워섬겼던 것 같다.
대답을 들은 황제가 희미하게 웃었다. 청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향을 깊이 들이마시다가 이를 박았다. 그의 목은 이미 졸리고 깨물린 흔적으로 엉망이었다. 시뻘겋게 얼룩진 목을 자근자근 씹으며 움직였다.
이윽고 침상 위가 다시 뜨겁게 달아올랐다.
* * *
정액과 땀으로 범벅이 되어 쓰러진 청을 욕탕에 데려가 깨끗이 씻겼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머리를 감겨 주는데도 청은 깨어나지 못했다. 황제의 맨가슴에 뺨을 기대고 늘어져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그새 몸이 식었군.”
까무러치듯 잠들어 버린 청에게서는 답이 없었다. 황제는 청의 등을 받쳐 차가워진 어깨에 물을 끼얹어 주었다.
“한기가 들면 그대, 심하게 앓을 테지. 참으로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야. 조금만 소홀히 하면 곧 죽을 듯 비실대니,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어.”
처음으로 맞은 환열기가 어지간히도 고단했던 모양이었다. 고단할 만도 했다. 청은 황제의 일거수일투족에 흥분해 뒤로 애액을 줄줄 흘렸고, 그가 향을 풀 때마다 숨도 못 쉬고 끅끅댔다. 말로는 임신하기 싫다, 무섭다 칭얼대면서 막상 좆을 넣어 주면 탐욕스럽게 집어삼켰다. 아기집이 있다고 짐작되는 곳을 긁어 줄 때는 방 안이 떠나가라 신음하며 울었다.
슬슬 청을 대장군 자리에서 해임할 때가 됐나 싶었다. 애초에 벼슬 따윈 청을 곁에 묶어 두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걸 이제껏 갑옷을 입혀 칼잡이로 썼다니. 몹시도 아까웠다. 청에게 어울리는 역할은 얇은 침의 차림으로 침상에 고이 누워 황제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청은 황제가 그의 몸을 탕에서 안아 올려 부드러운 수건으로 몸을 닦아 줄 때까지도 곤히 잠들어 있었다. 황제의 품에 안긴 청의 고개가 힘없이 툭 꺾였다.
황제는 그의 위로 스르르 고개를 숙였다. 섬뜩한 무표정으로, 바로 코앞에서 청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청이 가늘게나마 숨을 쉬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히 멀어졌다. 그는 종종 청이 숨을 쉬는지, 심장은 뛰고 있는지 점검했다. 이젠 습관이 되어 버린 행위였다.
마른 몸에 침의를 꿰어 입혔다. 머리칼에 스민 물기를 마른 천으로 닦아 내고, 향유에 적신 빗으로 끄트머리부터 느릿느릿 빗어 내렸다. 촘촘한 빗살이 두피를 부드럽게 긁는 감각에 청이 정신을 차렸다.
“공자님? 무련 공……. 아……. 폐하.”
“응.”
“송…… 송구합니다. 어찌 이런 허드렛일을 손수 하십니까……. 아니 됩니다. 고정하시옵소서.”
청은 이따금 황제의 호칭을 헷갈렸다. 황제는 청이 자신을 무어라 부르든 상관없었기에 무심히 넘겼지만, 청은 그때마다 대경실색하여 사죄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종종 정신을 놓고 멍하니 허공을 보기도 하고, 쉬운 단어조차 생각나지 않아 한참 망설이기도 했다. 당황할 때 말을 더듬는 것은 예사였다. 그는 명백히 망가져 있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것마저 기꺼웠다. 입술을 달싹이며 더듬더듬 힘겹게 말을 자아내는 청이 귀여웠다.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고 서늘한 무표정을 유지하던 예전보다는 지금이 나았다. 깨지고 금이 간 함에서 내용물이 줄줄 새어 나오듯, 청은 횡설수설할지언정 말수가 조금 늘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혼자서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혼자 하게 뒀다간 또 도중에 곯아떨어져 잘 게 뻔한데, 무엇 하러 그대에게 맡기나. 머리가 젖은 채로 자면 고뿔이 든다는 걸 모르는 어린아이도 아니고.”
“그건…….”
청이 난처해하는 기색으로 눈을 굴렸다. 그는 결국 어떤 핑계도 통하지 않음을 깨닫고 황제에게 머리를 맡겼다.
등을 보이고 앉은 그의 몸이 어색하게 굳었다. 황제의 큰 손이 빗을 쥐고 머리칼을 빗어 내릴 때마다 어깨가 가늘게 움찔했다. 무서운 모양이었다. 이리도 소중하게 다루어 주고 있거늘, 청은 황제 앞에서 항상 긴장했고 항상 떨었다.
두 사람 사이에 말소리가 잦아들고 침묵이 찾아왔다. 사악사악 머리 빗는 소리만 들릴 따름이었다. 그러나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
“황자 전하께서 내림(來臨)하셨사옵니다. 안으로 모실까요?”
문밖에서 궁인이 고했다. 원래 황족인 황자는 청을 방문하는 데 허락을 구할 필요가 없었으나, 지금은 청의 처소에 황제가 와 있다는 것을 알아서 어찌할지 묻는 것이었다.
“아…….”
청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그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황제가 대뜸 입을 열었다.
“들라 하라.”
“폐, 폐하!”
청은 지금 얇은 침의 차림이었다. 느슨한 옷깃 너머로 폭력적인 정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보였다. 심지어 침상에서 황제의 품에 안겨 빗질을 받던 도중이었다. 결코 황자에게 보일 만한 꼴이 아니었다.
“안 됩니다……! 황자 전하께서 이 꼴을 보시면.”
“얌전히 있어야지. 머리가 흐트러지지 않나.”
“부디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이대로라면 전하께 큰 무례를 저지르게 됩니다.”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된대도.”
“폐하, 제발.”
“예락.”
빗질이 뚝 멈추었다. 황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고작 이름을 한 번 불렀을 뿐이었다. 그러나 청은 입술을 파르르 떨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그때 문이 열리고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자였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지, 오늘은 유모가 보이지 않았다. 차마 대장군의 침소에까지 따라 들어갈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아장아장 걸어 들어온 황자가 청을 발견하고 반색했다. 그러나 바로 그 직후, 그를 뒤에서 껴안은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황자의 아버지이자 제국의 주인인 황제였다.
“아…… 아바마마.”
그는 황자에게 경외와 공포의 대상이었다. 폐하께서 경을 치신다는 말을 들으면 펑펑 울다가도 뚝 그쳤다. 황제의 앞에 서기만 하면 하도 심하게 떨고 경기를 해서, 간청을 드린 끝에 황자가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는 문안을 생략하게 되었다.
“인사는.”
황제는 황자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빗질을 계속하며 툭 던졌다. 한창 귀여운 나이의 아들을 대하는 아버지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무정한 어조였다. 큼직한 손이 청의 머리칼을 한 줌 쥐고 스르르 쓸어내렸다. 청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소름이 끼쳤다.
“아직도 예법을 못 익혔나?”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길이 평안을 누리소서.”
울상이 된 황자가 주춤주춤 예를 갖추었다. 문장이 길고 어려워 도중에 혀 짧은 소리가 몇 번 났다. 황제는 심드렁하게 까딱 턱짓을 했다. 황자가 짧은 팔다리를 꼼지락거려 간신히 일어섰다.
“무슨 일로 예락을 찾았지?”
“저, 그것이……. 그게.”
“할 말이 있으면 얼버무리지 말고 똑바로 하라 했을 터인데.”
청을 만나 저번에 못 부린 어리광을 잔뜩 부릴 생각에 신이 나서 예까지 왔다. 하지만 청의 처소에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인물이 있었다. 황자는 어찌할 바를 몰라 쭈뼛쭈뼛 발끝만 내려다보았다.
황후는 황자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그는 아직 어려 죽음의 개념을 잘 몰랐지만, 그것이 몹시 슬프고 무서운 일이라는 것만은 알았다.
황자는 낯선 시종과 궁인들에 둘러싸여 자랐다. 그들은 공손했지만 사무적이었다. 널따란 황궁에 가족이라고는 황제뿐이었다. 황자는 황제를 두려워하고 꺼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리워했다.
처음으로 청을 마주한 순간 황자는 강렬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는 기질이 우수한 양인으로 태어나 다른 이들보다 훨씬 향에 민감했다. 그래서 곧바로 알았다. 청의 전신에 황제의 여향이 흐리게 배어 있었다.
부모의 애정에 굶주린 아이에게는 그것조차 간절했다. 황자는 낯선 사람을 꺼리던 것도 잊고 청의 품에 맹목적으로 파고들었다. 청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의 앞에서 죄인처럼 굴었다. 그는 바짝 긴장하여 굳어 있다가, 결국은 떨떠름하게 그를 밀어냈다.
황자는 아직 어렸지만 영리했다. 그는 서럽게 울먹이면서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조금 더 강하게 밀어붙이면 청은 끝내 거부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저는, 그냥, 대장군과 이야기하고 싶어서.”
“예락은 내 신하다. 네 것이 아니라. 어찌 감히 사사로운 일로 예락의 침소에까지 드나드느냐.”
“…….”
“오늘 해야 할 글공부는 어찌하고. 예법 수업은?”
“…….”
“남휘(藍輝).”
황제는 높낮이 없는 섬뜩한 음성으로 황자를 불렀다. 고개를 푹 숙이고 오도카니 선 황자의 뺨이 서럽게 씰룩거렸다.
“세상에 공짜로 주어지는 건 없다. 무력한 어린아이에 불과한 네가 비단옷을 입고 큰 집에서 호의호식하는 것도, 네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엎드려 복종하는 것도, 모두 네게 기대하는 것이 있어서이지. 황실의 일원으로 만인 위에 군림하고자 한다면 그에 따르는 의무를 행함이 마땅하거늘.”
황제가 황자를 향해 스르르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그것을……. 소홀히 했다?”
“흐으, 흑.”
황자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그러나 크게 울음을 터뜨릴 수는 없었다. 황제가 무서워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 사이가 젖어 들어 갔다. 발아래에 작게 소변 웅덩이가 생겼다.
더는 좌시할 수 없었다. 청이 다급하게 황제를 돌아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허겁지겁 빌었다.
“폐하,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하였습니다. 일전에 제가 황자 전하께 제 처소를 방문해 주십사 감히 청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저와의 약조를 지키러 찾아오신 것뿐입니다. 모두 제 불찰입니다.”
황제가 심드렁하게 고개를 돌렸다. 섬뜩한 시선에서 간신히 벗어난 황자가 쌕쌕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전하께서는 아직 어리십니다. 그리고 폐하의 아…….”
거기까지 말하고 청은 숨을 들이켰다. 황제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황자가 자신의 친아들이 아니라던. 그는 입술을 깨물며 고쳐 말했다.
“제국의 황자십니다. 지금은 미욱한 점이 있을지언정, 장차 성장하며 고쳐 나가실 것이옵니다. 벌하시려거든 저를 대신 벌하여 노여움을 푸시고 전하는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부디…….”
“예락 그대는 참으로 사람이 물러. 깜찍한 거짓말로 황후를 감싸더니, 이번엔 황자를 감싸는군. 그대가 매몰차게 대하는 건 오로지 나뿐인 모양이야.”
그 뒤에 무슨 말이 이어질지 몰라 청이 바짝 긴장했다. 황자 대신 벌을 받으라 하면 달게 받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그저 피식 웃고는 바깥의 궁인을 불렀다. 함께 들어온 유모가 황자를 보고 사색이 되었다.
“황자의 몸이 좋지 않은 모양이다. 모셔 가라. 완전히 나을 때까진 밖에 데리고 나오지 마라.”
“며, 명 받들겠습니다! 성은이 하해와 같사옵니다.”
유모는 황자를 품에 감싸 안고 황급히 문을 나섰다. 시선을 내리깐 궁인들이 묵묵히 바닥을 닦았다. 곧 방 안에는 처음처럼 청과 황제, 단둘만 남게 되었다.
청은 그때까지도 숨을 죽이고 바짝 굳어 있었다. 혹여나 황제의 심기가 틀어져 황자에게 잔혹한 처분을 내릴까 무서웠다. 잔뜩 움츠러든 청의 등을 바라보던 황제가 낮게 웃으며 그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뼈대가 불거진 마른 어깨가 맥없이 품에 안겼다.
“왜 그리 겁을 먹었어. 내가 그대를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아무리 그대가 벌을 자처했다 한들, 잘못한 것도 없는 이를 벌할 만큼 무도하진 않아.”
말 몇 마디 한 것만으로 이리 벌벌 떠는 주제에. 두려워 황제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주제에. 청은 앙큼하게도 거짓 변명을 주워섬기며 황자를 감싸고 나섰다. 의무감이든 동정이든 뭐든, 청이 타인에게 호의를 보일 때마다 살심이 일었다. 아무리 망가뜨리고 짓밟아도 여전히 올곧은 청이 사랑스럽고 또한 가증스러웠다.
귓바퀴와 귓불에 자잘하게 입을 맞추다, 황제는 문득 참을 수 없어졌다. 청의 고개를 돌려 입술을 겹쳤다. 한 손아귀에 들어오는 갸름한 턱을 쥐고 한참이나 혀를 섞었다. 청의 숨이 거칠어지고 가슴팍이 가쁘게 오르내릴 때까지 입 안을 헤집다 놓아주었다.
“한 번쯤은.”
“…….”
“네가 내 아이를 가지는 것을, 한 번쯤은 보고 싶었어. 그런데 방금 생각해 보니, 만약 그리된다 하더라도……. 죽이지 않을 자신이 없더군.”
황제가 웃음기 어린 음성으로 속삭였다. 청은 그물에 엮인 사냥감처럼 황제의 시선에 사로잡혔다. 활짝 핀 백합처럼 곱게 웃는 얼굴 위에 꿈에서 본 모습이 겹쳐졌다.
〈나 아닌 것에게 눈 돌리지 마.〉
귓가에서 환청이 맴돌았다. 청은 눈을 질끈 감았다.
〈네가 사랑한다 말한 것은 모두 흔적조차 남지 않도록 없애 버릴 테니.〉
* * *
궁에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황제의 오른팔, 금군 대장군에 대한 것이었다. 죽을병에 걸려 앞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예전에 입은 부상이 크게 덧나 불구가 되었다. 온갖 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졌다. 황제가 그를 불러들여 궁에 살게 한 것도, 가족도 친척도 모두 잃고 혈혈단신으로 살아 병 수발을 들 사람조차 없는 충신에게 자비를 베풀기 위함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완전히 근거 없는 뜬소문은 아니었다. 대장군은 몇 해 전부터 종종 이상 증세를 보였다. 열 번 중 일고여덟 번은 건강 문제로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나오더라도 창백한 얼굴로 쓰러질 듯 말 듯 간신히 자리만 지키고 있을 따름이었다.
거기에 최근 무관들을 중심으로 불온한 소문이 퍼졌다. 대장군은 본디 관직에 나아갈 수 없는 몸인데, 그것을 속이고 이제껏 뻔뻔하게 나라의 녹을 받았다는 것이다.
제국은 인재의 등용에 차별을 두지 않았다. 남녀노소 누구든 실력만 있으면 관직을 얻을 수 있었다. 귀족과 달리 평민들은 최하급 말단부터 시작해야 했으나, 그중에도 신분의 장벽을 극복하고 고위직까지 오르는 이가 종종 나왔다.
하지만 음인은 벼슬길이 막혔다. 어느 정도 본능을 조절할 수 있는 양인과 달리 음인은 매달 맞는 환열기마다 짧게는 사흘, 길게는 이레까지 외출이 불가능했다. 게다가 조금만 관리를 소홀히 하면 곧장 여향이 새어 나와 주변 사람들의 이성을 잃게 하니 모두가 음인의 등용을 꺼렸다.
금군의 수장이 사실은 음인이었다니. 충격을 넘어 파격적이었다. 처음에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고개를 내저으며 믿지 않았다. 그러나 유언비어는 물밑에서 점차 살이 붙어 몸집을 키웠다. 그러던 어느 날, 소문이 기어이 물 위로 떠올랐다.
“송구합니다, 폐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매우 중한 사안인지라 급작스레 고하는 것을 용서하시옵소서.”
조례가 막 끝난 참이었다. 좌맹분위(左猛賁衛) 대장군이 발언권을 청했다. 퇴청할 준비를 하던 관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리로 쏠렸다.
“말하라.”
옥좌에 비스듬히 턱을 괴고 앉은 황제로부터 승낙이 떨어졌다. 금군 대장군의 자리는 황제의 오른편이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 없는 얼굴로 탁자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금군 대장군에 대한 것입니다.”
좌맹분위 대장군은 거침없이 말을 쏟아 놓았다. 그는 손을 들어 청을 삿대질했다.
“외람되오나, 이제까지 저자가 폐하를 속이고 사직을 능멸해 왔다는 것을 알고 계시옵니까?”
소리 없는 경악이 퍼졌다. 황제의 양옆에 열을 맞추어 앉아 있던 신하들이 술렁거렸다.
“아니, 그게 무슨.”
“능멸이라니요.”
청의 무표정에 처음으로 금이 갔다.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그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확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지난번에 대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청을 부축하여 일으켜 주었던 무관이었다. 청을 보는 눈빛이 혐오와 악의로 들끓었다.
내내 심드렁하던 황제가 비로소 흥미를 보였다. 그는 스르르 상체를 일으켜 바로 앉았다.
“자세히 설명하도록.”
“금군 대장군, 아니, 지예락은 음인입니다!”
귀를 의심할 만한 발언이 또다시 터졌다. 모두가 말을 잃고 그를 멀거니 쳐다보았다. 널따란 정전에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결코 쉬이 꺼내서는 안 될 말이었다. 청을 총애하는 황제의 면전에서 다짜고짜 그를 고발하다니. 그러나 저리 자신만만한 것을 보니, 확신할 만한 증거가 있음이 틀림없었다.
“사내를 홀리는 향을 풀풀 풍기는 음인의 몸으로 금군을 통솔하는 수장 자리에 앉다니요. 그런 주제에, 저자는 폐하의 신임만 믿고 황자 전하께도 오만방자하게 굴고 있습니다. 천지신명이 노하고 조정의 기강이 발칵 뒤집힐 일입니다. 마땅히 엄벌에 처해야 하옵니다.”
“그래?”
황제가 툭 던지듯 반문했다. 충격을 받기는커녕, 상석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는 얼굴에서는 한 점 동요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언뜻 지루해하는 기색까지 보였다.
전혀 믿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털어놓은 사실을.
“그럼 증거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는 작게 이를 갈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맞은편에 앉은 청을 똑바로 노려보며 그에게 다가갔다.
“무슨…….”
청이 흠칫 놀랐다. 그렇지 않아도 혈색이 나쁜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황제가 보는 앞에서 두 대장군이 대치했다. 대장군은 반사적으로 뒤로 주춤 물러서려는 청의 팔을 꽉 잡았다.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팔목 뼈가 으스러질 듯 아팠다.
“감히 음인 된 몸으로 폐하의 오른팔을 자처하다니. 죗값을 톡톡히 받아라.”
달아나지 못하도록 청을 우악스럽게 붙든 채, 그는 향을 한껏 풀었다. 상대를 몰아붙이고 굴복시키는 양인의 여향이었다. 음인이라면 제자리에 서 있을 수도 없을 만큼 짙었다.
“…….”
정적이 흘렀다. 청은 팔을 비틀어 빼내려 시도해 보았다. 하지만 우락부락한 사내의 솥뚜껑 같은 손에 잡힌 팔목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청은 다리가 풀려 풀썩 쓰러지지도 않고 꼴사나운 신음을 흘리지도 않았다. 이를 악물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낯으로 대장군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아니…….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없다.”
그가 황망하게 중얼거렸다. 팔을 붙들고 있을 뿐 상대가 아무 행동을 취하지 않자, 청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경고했다.
“놓으십시오. 어전(御前)에서 이게 무슨 망동입니까? 저와 팔씨름이라도 할 셈입니까.”
“분명히 음인이 맞는데, 어, 어째서!”
이상했다.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자제를 잃고 황제가 보는 앞에서 추한 모습을 보여야 할 청이 너무나도 멀쩡했다. 이럴 수는 없었다.
그는 아연실색하여 젖 먹던 힘까지 다해 향을 쥐어짜 냈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양인들이 무심결에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 양인들은 체질적으로 다른 양인의 향을 거북하게 느꼈다. 자신의 영역을 지키는 우두머리 수컷과도 같은 본능이었다.
“힘겨루기를 하고 싶으신 것이라면 연무장으로 나가시지요.”
“닥쳐라. 음인 주제에…….”
“그만.”
나직한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뚝 갈랐다. 황제였다. 이제껏 말없이 사태를 관망하던 황제가 그들을 향해 상체를 살짝 기울였다. 인간의 것 같지 않은 연한 색의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어느 안전이라고 짐승 새끼처럼 악취를 질질 흘려 대는가.”
“억울하옵니다. 맹세컨대 지예락은 음인이 맞습니다! 이, 이건 저자가 분명히 더러운 수를 써서…….”
퍽! 큰 소리가 울렸다. 무언가 대장군의 머리를 세게 후려갈겼다. 너무도 순식간이었다.
“크억!”
필사적으로 자신의 결백을 호소하던 대장군이 비틀거렸다. 이마를 타고 흐른 피가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그 위로 묵직한 순금 문진이 쿵 떨어졌다. 황제의 앞에 놓여 있던 것이었다.
“진위가 어찌 되었든 간에 궁에 해괴한 소문이 돌게 하여 기강을 어지럽히고, 황자에게도 무례하게 굴었다는 말이 들리는 것을 보니……. 금군 대장군의 행실에 문제가 있는 것이겠지.”
황제는 문진을 집어 던지고 난 빈손으로 옥좌 팔걸이를 툭툭 두드리며 선언했다.
“지예락을 금군 대장군직에서 해임한다. 그 자리에 금군 우장군을 앉히고, 내금위(內禁衛) 우별장(右別將)으로 하여금 우장군직을 임시로 대리하게 한다.”
“…….”
태연자약하게 흘린 것에 비해 그 말의 무게는 컸다. 또다시 충격이 좌중을 휩쓸었다. 모두가 눈을 부릅뜨고 입을 딱 벌렸다. 청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얼어붙어 버렸다. 생기가 완전히 사라진 눈으로 멍하니 황제를 올려다보는 모습이 애처로울 정도였다.
청은 누가 보아도 명백한 평인이었다. 만인의 앞에서 그 사실을 또 한 번 증명했다. 그런데 황제는 음모에 휘말린 청을 위로하기는커녕 기다렸다는 듯 그를 해임해 버렸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헛소리를 지껄여 예락을 모함한 좌맹분위 대장군은.”
무감정한 시선이 스르르 돌아갔다. 대장군이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문진에 얻어터진 머리의 통증마저 잊었다.
“문제를 제기하려거든 그에 따르는 합당한 증거가 있어야 하지 않겠나. 무작정 일러바치는 참언(讒言)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거늘. 날 불러 세워 무슨 말을 하려나 했더니, 고작 이깟 촌극을 보여 주려고 한 건가?”
간신히 정신을 차린 대장군이 황제의 앞에 달려갔다. 옥좌 아래에 무릎을 꿇고 피가 줄줄 흐르는 머리를 조아렸다. 쿵쿵 소리가 나도록 이마를 찧었다.
“폐하, 믿어 주시옵소서! 저는 그저 폐하를 위한 충심에…….”
“일어나라.”
황제가 그를 용서해 주려는 걸까. 작은 희망이 피어올랐다. 대장군이 휘청휘청 일어섰다. 황제 또한 옥좌에서 몸을 일으켜 다가왔다. 그들 사이에는 계단처럼 된 단이 있어 눈높이 차이가 났다.
“똑바로 서야지?”
황제가 살짝 웃으며 종용했다. 대장군은 이를 악물고 몸을 바로 세웠다.
퍼억! 다음 순간 강렬한 충격이 찾아들었다. 황제가 그의 복부를 무자비하게 걷어찬 것이었다. 건장한 양인의 몸이 허물어졌다. 그는 배를 끌어안고 입에 거품을 물었다. 오장육부가 모두 으스러진 것 같았다.
“다시 서.”
황제가 발끝으로 그의 턱을 들어 올리며 무미건조하게 명했다. 대장군은 간신히 그에 따랐다. 아까와 한 치도 다르지 않은 발길질이 재차 날아들었다. 시야가 시뻘겋게 물들고 허리가 절로 푹 꺾였다.
“다시.”
“억, 허윽, 컥.”
“다시.”
무자비한 폭력이 이어졌다.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러나 아무도 황제를 말리지 못했다. 공포에 질린 시선을 내리깔고 숨을 죽인 채 못 들은 척, 못 본 척 할 뿐이었다.
바닥에 흐르는 피의 양이 점점 늘어났다. 이제 정전 안에는 대장군의 여향 대신 혈향이 진동했다. 갓 흐른 시뻘건 피의 냄새가 공기를 타고 다른 이들에게 흘러들었다.
“우욱……!”
그때였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간신히 서 있던 청이 헛구역질을 했다. 몇몇 이들의 시선이 그리로 쏠렸다. 몸이 약해져 있던 차에 끔찍한 꼴을 봤으니 속이 뒤집힐 만도 했다.
“흐윽, 욱!”
그의 몸이 제풀에 맥없이 고꾸라졌다. 청은 풀썩 주저앉아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구역질은 도무지 멎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웅크린 등이 가파르게 들썩였다.
관료들은 뒤늦게 이상함을 느꼈다. 아무리 지금 병을 앓고 있다 한들, 저 남자는 황제의 오른팔로 살며 온갖 잔인한 짓을 했던 전적이 있었다. 사람의 팔다리를 자르고 배를 가르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게 하던 자가 고작 피를 좀 본 것 가지고 저렇게까지…….
“…….”
어느새 사방이 조용해졌다. 의식을 잃고 피투성이가 되어 나뒹구는 이를 발아래 둔 채, 황제가 청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 * *
용과 봉황이 새겨진 널따란 침상에 청이 잠들어 있었다. 자신이 황제의 잠자리를 차지하고 누워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냥 곤히 잠든 얼굴이 처연했다.
수의가 그의 손목을 잡아 맥을 짚었다. 고개를 갸웃하더니, 심각하게 굳어진 표정으로 몇 번이고 반복하여 진맥했다. 자신이 내린 진단을 스스로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왜 그러지?”
침상 곁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황제가 물었다. 수의는 이마의 주름이 더욱 깊게 패도록 눈을 크게 떴다. 이윽고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폐, 폐하.”
황제가 찌르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무언의 재촉이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회임이……. 맞사옵니다…….”
평생에 한 번도 겪기 힘들다는 일이, 청의 환열기를 온전히 빼앗아 가지고도 기대하지 않았던 기회가……. 또다시 찾아왔다. 기적 같은 행운인 동시에 더할 나위 없는 불운이었다.
청은 처소를 옮겼다. 그는 이제 황궁 변두리의 낡은 전각을 떠나 황제의 침소에 머물게 되었다. 황제의 침상에 누워 두꺼운 비단 금침에 파묻혀서는, 방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황제의 명이었다. 멋대로 밖을 나돌아 다니게 풀어 뒀다가는 또 어느 버러지 같은 것이 청에게 손을 댈지 모르는 일이니.
그의 회임 사실은 극비였다. 제대로 된 음인이 아닌 데다 몸 상태가 극도로 불안정하니, 혹여나 불미스러운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철저히 입단속을 해야 했다.
수의는 자신의 휘하에 있는 태의들 중 입이 무겁고 의술이 출중한 이들 몇을 비밀리에 불렀다. 의서를 뒤져 가며 연구에 몰두하고, 전국에서 회임에 좋다는 약재란 약재는 죄다 긁어모아 약을 달였다. 그렇게 만전을 기하고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다.
청의 입덧은 참으로 지독했다. 그의 배 속에 자리 잡은 것이 태아가 아니라 악귀인가 싶을 정도였다. 산과(産科)를 전문으로 하는 태의들조차도 이런 경우는 처음 본다며 난색을 표했다.
그는 자신의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을 역겨워했다. 침상에 깔린 이불 냄새가 역해 잠을 이루지 못했고, 건물의 나무 냄새와 뜰의 흙과 풀 냄새에 속이 뒤집어졌다. 심지어는 황궁에 감도는 공기조차 견디지 못했다. 눈의 실핏줄이 죄다 터지고 목으로 핏물이 넘어올 때까지 토악질을 하다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마치 이 황궁 전체를, 나아가서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 자체를 거부하듯.
이쯤 되면 차라리 유산시키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목숨이 걸린 회임이었다. 처음으로 유산했을 때 청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사경을 헤맸다. 제대로 발달하지 않은 태에 간신히 붙어 있던 태아가 떨어지며 몸이 크게 상한 탓이었다. 이번에도 그리된다면 청의 생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수 명의 태의들이 들러붙어 청을 억지로 살려 놓았다. 맹물조차 넘기지 못하는 이에게 강제로 약을 먹였다.
“제발……. 도저히, 못 먹겠습니다. 제발, 흑, 으윽, 못, 해…….”
몇 번 구역질을 하다, 청이 괴롭게 고개를 저었다. 그의 충혈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하도 울어 속눈썹이 흠뻑 젖고 눈가가 벌겋게 짓물렀다. 핏기 없이 해쓱한 얼굴에 긴 머리가 마구 흐트러졌다.
그러나 절박한 것은 태의들도 마찬가지였다. 청이 죽으면 그가 품은 황손도 죽고, 그를 돌보던 태의와 궁인들 또한 모두 황제의 손에 죽을 터였다. 그들은 청이 누운 침상 아래에 엎드려 머리를 찧으며 애걸복걸했다.
“부디 한 모금만, 딱 한 모금만 더 드십시오. 마마님, 간청드립니다. 이렇게라도 드셔야 마마님께서도, 복중의 아기씨께서도 사십니다.”
청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태의가 입가에 대어 주는 탕약을 한 모금 머금었다. 그리고 곧장 도로 게워 냈다. 결국 힘센 남자 태의 여럿이 나섰다. 청의 팔다리를 붙잡고 고개를 젖혀 억지로 약을 흘려 넣었다.
차라리 죽여 달라 애원하는 이와, 제발 살아 달라 애원하는 이들의 실랑이가 침소 밖에까지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그가 혼절했을 때는 의식 없는 이의 입을 벌리고 식도에 탕약을 들이부어서라도 어렵사리 명줄을 이었다. 가끔 태의들 중 마음 약한 자가 방문 밖에서 몰래 눈물을 훔쳤다.
그렇게 위태로운 나날이 이어졌다. 매일매일이 외줄 타기였다. 배 속의 아이는 청의 생명을 먹고 자랐다.
청이 이게 먹고 싶다 저게 먹고 싶다 패악을 부리고, 황손을 내세워 아랫사람들을 들들 볶으면 차라리 나았을 터였다. 청과 배 속의 아이가 건강히 자라 주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기쁘게 따를 수 있었다.
하지만 청은 그 정반대였다. 그는 온갖 수모를 겪으면서도 다른 이를 원망하는 법이 없었다. 사지를 붙들려 억지로 약을 먹은 날에도, 구역질을 하다 피를 한 움큼 토한 날에도 짜증 한 번 내지 않았다. 모든 기력이 빠진 멍한 낯으로 태의들의 요청에 순순히 따를 뿐이었다. 그것이 지켜보는 이들을 더욱 괴롭게 했다.
그는 하루의 대부분을 잠으로 보냈고, 깨어 있는 시간에도 자리에 누워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았다. 그나마 제정신을 되찾고 몇 마디나마 대화를 하는 시간이 황제와 함께 있을 때였다.
소리 없이 문이 열렸다. 황제가 침전 안으로 들어섰다. 반투명한 천개 너머로 침상의 모습이 보였다. 누군가 그 속에 누워 있다면 이불이 둥그스름하게 솟아야 하건만, 이부자리는 인기척 없이 납작했다.
“지청……. 청아?”
이름을 부르며 고개를 돌렸다. 황제는 곧 청을 발견했다. 어둑어둑한 먹구름이 끼었던 마음이 빠르게 개었다.
청은 창가에 놓인 의자에 기대어 앉아 졸고 있었다. 궁인들이 큼직한 나무 의자에 비단 방석을 겹겹이 깔아 푹신하게 만들어 두었다. 싹이 돋아나고 새가 지저귀는 봄이거늘, 청은 아직도 겨울옷을 입고 있었다. 두툼한 비단 아래 완만히 부푼 배가 보였다.
창 너머로부터 들어오는 봄볕이 그의 이마를 희게 물들였다. 햇살을 받으며 세상모르고 잠든 얼굴이 평온했다. 어깨 앞으로 드리운 긴 흑발이 따사로운 빛 아래 온기를 머금고 발갛게 빛났다.
청이 이렇게 푹 잠든 것이 얼마 만이었던가. 황제는 희미하게 웃었다.
“여기서 해바라기를 하다 잠이 든 게야? 아무리 방석을 덧대어 놨어도 불편할 터인데, 침상에서 자지 않고.”
그는 청이 아무 대답이 없는데도 태연하게 말을 걸었다. 허리를 숙여 청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입고 있던 용포를 망설임 없이 벗어 덮어 주었다.
“청아.”
청은 깨지 않았다. 황제는 청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색색 희미한 숨소리가 들렸다. 그는 무심코 조금 안심했다.
“황궁이 그리도 싫었어?”
청은 황궁의 공기를, 물을, 풀과 나무를 거부했다. 이곳이 끔찍하게 싫다고, 차라리 죽여서라도 내보내 달라 시위하듯이.
수의가 한 번 간청한 적이 있었다. 입덧이 너무도 심한 데다 달수가 차도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차라리 청을 다른 곳으로 보내라고. 사가(私家)든 어디든, 황궁에서 떨어진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요양하는 것이 청에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황제는 그를 일말의 여지도 없이 묵살했다.
“어딜 가려고.”
가족과 친척이 모두 옛날 옛적에 죽고 없는 청에게 달리 갈 곳이 있을 리가 없었다. 청이 머무를 유일한 장소는…….
“나를 네 손으로 이 지옥 한복판에 밀어 넣어놓고, 나를 두고 어디에 가려고 그리 용을 써.”
황제는 청의 배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러다 배에 살며시 뺨을 기대 보았다. 쿵, 쿵, 쿵. 느린 심장 소리가 들렸다. 청은 달수에 비해 배가 작았다. 태아가 영양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한 탓이었다. 청도 아이도, 지금껏 살아 있는 것이 기적이었다.
“네가 좋아하는 풍경을 보여 줄 테니, 보석도 검도 비단도 얼마든지 줄 테니, 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이 나라를, 나를 기꺼이 네 손안에 쥐여 줄 테니……. 그러니 내 곁에 있어.”
황제는 눈을 사르르 내리깔고 곱게 웃었다. 청의 품에 뺨을 비비며 속삭였다.
“죽어도 내 곁에서, 나와 함께 죽어 줘.”
청이 긴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날, 황제는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 독이 든 술을 내밀었다. 그때 그 독주는 이제 없다. 한 잔은 황제가 마셔 비우고 한 잔은 탁자에 엎질러 비웠다.
그러나 지금, 황제의 침소 장식장에는 또 다른 독주 병이 숨겨져 있다. 따르면 딱 두 잔 분량이 나오는 맹독. 언제든 너를 위해 죽을 준비가 되었다고, 나를 위해 너를 죽일 준비가 되었다고 말하듯.
황제의 침소에 머무는 청 또한 그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알면서도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황제 또한 청이 독주의 존재를 눈치챘다는 것을 알았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침소에 숨겨 둔 두 사람분의 독은 황제와 청 사이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렇지, 청아. 이제 봄이 왔으니 나들이를 가야지.”
황제가 마침 생각난 듯 몸을 일으켰다. 그는 용포째로 청을 안아 들었다. 청의 고개가 스륵 기울어 황제의 품에 기대어졌다. 뽀얀 봄볕이 둘을 비추었다. 한 폭의 그림처럼 평화로웠다. 황제의 발아래에서 섬뜩한 소리가 나기 전까진.
차르르륵. 황제가 청을 안고 걷자 바닥에 늘어진 쇠사슬이 질질 끌렸다. 방을 가로질러 거대한 뱀처럼 똬리를 튼 사슬은 청의 발목에 이어졌다. 마른 발목에 쇠로 된 족쇄가 차여 있었다. 이것이 온몸으로 황궁을 거부하는 청에 대한 황제의 답이었다.
“호숫가에 네가 좋아한다 말했던 꽃을 심었어. 네 마음에 들면 좋으련만.”
황제가 품 안의 청에게 고개를 기울이고 다정하게 속삭였다. 황제는 화사하게 미소 짓고, 청은 잠에 빠져 깨어나지 않았으며, 그의 발목에 차인 족쇄는 싸늘한 빛을 발했다. 기괴하게 뒤틀린 광경이었다.
“이제 나갈 채비를 할까? 모자란 잠은 배에 타고 나서 마저 자도록 하고.”
덜그럭, 덜걱, 덜그럭. 바닥에 금속이 긁히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청을 안아 든 황제의 뒷모습이 침소 저편으로 멀어졌다.
* * *
몸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를 둘러싼 세상이 부드럽게 출렁이고 있었다. 청은 천천히 눈을 떴다. 눈꺼풀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에 눈이 부셨다.
황궁의 호수 한복판이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꽁꽁 얼어붙어 있던 호수가 지금은 봄바람에 고요히 일렁였다. 새파란 수면 위로 셀 수 없이 많은 햇살 조각이 찬란하게 부서졌다.
뱃전 너머로 보이는 호숫가를 따라 수많은 꽃이 피어 있었다. 벚꽃, 진달래, 유채꽃, 산수유, 그리고 동백. 알록달록한 꽃송이들이 만개하여 저마다 고운 자태를 뽐냈다.
〈응? 청아. 무슨 꽃이 좋아…….〉
〈폐하, 헉, 흐으, 저, 저는.〉
언젠가 그가 황제에게 시달리며 정신없이 이름을 댔던 꽃들이었다.
“마음에 드는가?”
반사적으로 돌아보았다. 청과 마찬가지로 호수를 바라보고 있던 황제가 눈이 마주치자 살짝 웃었다. 청명한 봄볕을 머금은 눈동자가 금빛으로 물들었다.
그들은 금빛 기왓장을 얹고 기둥에 붉은 옻칠을 한 놀잇배에 타고 있었다. 널찍한 호수에 떠 있는 배라고는 이 한 척뿐이었다. 사방이 너무도 조용했다. 이따금 첨벙이는 물소리만 들렸다. 여기만 다른 세상 같았다.
전에 황제가 말한 적이 있었다. 봄이 되어 호수의 얼음이 녹고 꽃이 피면 뱃놀이를 가자고. 그 아름답다는 풍경을 내게 보여 달라고.
“성은이 망극합니다……. 잊지 않고 이리 챙겨 주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청이 비척비척 일어나 앉았다. 배 안에는 푹신한 비단 이불과 방석이 가득 깔려 있었다. 배 전체가 커다란 침상이 된 것 같았다. 거동이 불편한 청을 배려하기 위함일 터였다.
“그대와 한 약조인데 어찌 잊나.”
“옛날에 저는 반드시 폐하를 모시고 뱃놀이를 갈 거라 다짐했습니다. 처음으로 하는 꽃구경이시니 준비에 만전을 기할 생각이었습니다. 좋아하실 만한 다과와 실력 좋은 악사를 준비하고, 가장 풍경이 수려한 곳을 고르고요……. 그런데 지금은 그 반대가 되었군요.”
두툼한 이불에 기대어 앉은 청이 느릿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두 번째로 회임하여 건강이 악화된 이후로, 청이 이렇게 길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황제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집요하게 그를 응시했다.
“그때 저는 하루하루 폐하께 새로운 풍경을 보여 드리고, 새로운 문물을 알려 드릴 생각에 들떴습니다. 폐하께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기뻤습니다.”
청이 처음 6황자에게 다가간 것은 순전히 호의였다. 그러나 그 속에 얄팍한 동정이나 우월감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구중궁궐에 갇혀 황폐한 삶을 살던 이에게 처음으로 세상을 보여 준 사람이 되어 뿌듯했다.
“하지만 지금 저는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습니다. 폐하께서 베푼 자비에 기대어 하루하루 연명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폐하께서 옷과 집을 주시고 먹을 것과 약을 주시지 않으면 전 단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이제 제겐 아무런 쓸모가…….”
말끝이 힘없이 잦아들었다. 황제가 문득 손을 뻗었다. 청이 작게 흠칫했다. 황제는 옷 위로 그의 배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온기가 번졌다.
“아무것도 줄 것이 없다니. 여기에 있잖아, 그대가 줄 수 있는 것.”
“저, 저는…….”
황제가 딱 잘라 말했다.
“나는 그대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이제껏 그 어떤 쓸모도 요구한 적 없어.”
황제가 환열기를 맞았을 때, 자신은 드릴 수 있는 게 없으니 제발 다른 비빈에게 가시라고 애원하는 청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 기대한 적 없으니.〉
그리고 칼바람이 몰아치던 겨울날. 황제의 친우가, 그리고 충신이 되고 싶었다는 청의 고백에 황제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내가 언제 그대에게 그리해 달라 했지? 친우? 충신? 그딴 것, 필요 없어.〉
언뜻 듣기에는 몹시도 매정한 말이었다. 황제는 청에게 언제나 일관적이었다.
“예락 그대는 항상 생각이 많았지. 책임이니 쓸모니 오점이니, 온갖 잡다한 생각으로 골머리를 앓더군. 하나 그런 것은 모두 그대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야. 어떻게든 내 곁에 있을 정당한 구실을 찾으려고.”
이제껏 청은 어떻게든 황제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려 했다. 끊임없이 자신의 유용함을 증명해야 했다. ‘연인’은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황제를 기쁘게 할 수 있을 테지만, ‘충신’은 그렇지 않았으므로. 그렇게 해서라도 황제의 곁에 있고 싶었다. 황제의 아이를 낳지도, 그와 혼인하지도 못하는 청이 황제의 곁에 길이 머무를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꺼풀을 벗겨 내고 아무 직책 없는 몸으로 황제의 아이를 가지고 나서야 청은 비로소 깨달았다. 황제는 처음부터 청에게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황제의 오른팔이, 유능한 책사가, 뛰어난 무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모두 청이 스스로에게 채운 족쇄였다.
상대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언제까지나 자신의 곁에 두고자 하는 것. 청은 그 감정의 이름을 알았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보다는 훨씬 기괴하게 뒤틀리고 망가져 있었지만, 그래도……. 사랑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속에서 무언가 왈칵 치받아 올라왔다. 청은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럼, 폐하께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저를.”
황제는 가만히 웃었다. 울음기에 잡아먹혀 나오지 않는 청의 뒷말을 알아들었다는 듯.
“응.”
때마침 수면을 따라 향긋한 바람이 불었다. 잔잔한 금빛 수면이 떨렸다. 산들산들 따사로운 봄바람이 뱃전을 넘어 물 내음을 실어 날랐다.
호숫가를 둘러 심은 꽃나무들이 쏴아아 흔들렸다. 연홍빛, 노란빛, 붉은빛, 흰빛. 색색의 꽃비가 내렸다. 바람을 타고 날아온 수많은 꽃잎들이 배 안에까지 닥쳤다. 포근하게 깔린 비단 이불 위에, 방석에, 머리와 어깨에 내려앉았다.
“아…….”
어쩐지 눈가가 시렸다. 갑자기 불어온 바람 때문일까, 아니면 눈부시게 청량한 햇볕 때문일까. 청이 고개를 돌리며 눈을 감았다. 머리카락이 사락사락 나부꼈다.
황제는 입고 있던 장포를 벗어 청의 어깨에 걸쳤다. 황룡이 새겨진 비단옷을 단단히 둘러 준 채, 앞섶을 여미어 쥐고 살짝 끌어당겼다. 청의 상체가 힘없이 딸려 왔다. 눈을 감은 이의 입술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각도를 바꾸어 가며 몇 번이고 입술을 겹쳤다.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가쁜 숨을 모두 집어삼켰다. 청의 몸이 황제가 밀어붙이는 대로 기울기에 뒷머리를 감싸 받쳤다.
황제는 청의 어깨에 두른 용포 밑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두꺼운 옷에 감싸인 마른 몸을 매만지다 고름을 풀었다. 옷자락이 한 겹 한 겹 흘러내렸다. 청은 여전히 황제의 겉옷을 걸친 채 그 아래로 나신이 되었다.
“누가, 헉, 폐하, 누가 보면……!”
당황한 청이 고개를 저어 입술을 떼어 냈다. 그는 허둥지둥 옷깃을 여미어 몸을 가리려 했다. 놀잇배는 나무로 된 기둥과 난간이 있을 뿐 사방이 탁 트여 있었다.
호숫가를 지나던 이가 그들을 목격할지도 몰랐다. 대낮에 황궁 한복판에서 낯 뜨거운 짓을 하는 꼴을 보이다니.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그대가 수줍음이 많은 것을 내 익히 아는데, 어련히 조치를 취했지. 배를 띄운 동안은 그 누구도 호숫가에 얼씬하지 말라 명해 두었어. 뱃사공까지도. 걱정하지 마. 이 근처를 지나거나 호수를 엿보려 하는 자는 혀를 자르고 눈알을 도려낼 테니.”
황제는 태연자약하게 대꾸하며 용포 자락 사이로 드러난 청의 맨무릎을 덧그렸다. 무릎을 둥글게 매만지고 쓰다듬다 조금씩 위로 올라왔다. 크고 따뜻한 손이 허벅지를 지나 옷 안으로 파고들었다. 청이 짧은 신음과 함께 다리를 움츠렸다.
황제가 재차 입을 맞춰 왔다. 청은 도중에 균형을 잃고 풀썩 넘어갔다. 몸이 뒤로 쓰러지는 느낌에 무심코 부푼 배를 끌어안았다. 그의 몸이 이불에 파묻혔다. 한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다. 황제는 기다렸다는 듯 몸을 끼워 넣으며 입맞춤에 열중했다.
숨이 모자라 헐떡일 때까지 실컷 혀를 섞다가 아래로 내려갔다. 흉이 남아 일그러진 유두를 서슴없이 입에 물고, 반대쪽 유두를 손끝으로 비비듯 문질렀다. 쭙쭙 소리가 노골적으로 났다.
“으, 흣……. 흐윽.”
가슴 양 끝이 간지러워 견딜 수 없었다. 황제가 이따금 혀로 젖꼭지를 툭 튕길 때마다 청의 허리도 덩달아 튀어 올랐다.
어느 순간 황제의 혀끝에 달콤한 액체가 스몄다. 붉게 달아오른 청의 유두가 질척하게 젖어 있었다. 그 끝에 타액에 섞여 묽어진 유즙이 부옇게 맺혔다. 되다 만 음인인 주제에 나름대로 애를 가졌다고 젖이 도는 모양이었다.
황제는 청의 가슴에 도로 달려들었다. 판판한 가슴팍에 들러붙어 고개를 파묻었다. 혀끝을 뾰족하게 만들어 유두의 갈라진 틈을 집요하게 쑤셨다. 유즙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때까지 싹싹 핥아 먹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그는 번들번들하게 젖은 입술을 슬쩍 핥으며 만족스레 웃었다.
“…….”
청이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며 낮게 흐느꼈다. 황제의 시야에서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몹시도 흉할 게 분명했다. 요염하지도 아리땁지도 않은 사내놈이 시체처럼 낯빛이 허옇게 떠서는, 비쩍 마른 몸에 배만 부푼 꼴이라니.
어느덧 황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언뜻 조급함마저 느껴지는 손길로 청의 발목을 움켜쥐어 활짝 벌렸다. 한쪽 발목에 연하게 족쇄 자국이 남아 있었다. 벌어진 다리 사이에 서슴없이 고개를 파묻었다.
“아, 아……!”
보드라운 혀가 허벅지 안쪽에 울긋불긋하게 남은 화인(火印)을 게걸스럽게 핥다가 뒤로 쑥 파고들었다. 메마른 주름 하나하나를 적셨다. 혀에 힘을 주어 끝을 뾰족하게 만들어 구멍을 쑤셨다. 말캉한 내벽이 제멋대로 움찔거렸다.
입술이 사타구니에 짓눌리도록 혀뿌리까지 집어넣고 앞뒤로 드나들며 문질러 주자 애액이 조금 배어 나왔다. 입술을 대어 빨아 먹었다. 시큼하고 달았다.
“폐하, 아, 안 됩니다, 더럽습, 하읏!”
청이 얼떨결에 양손으로 황제의 머리를 감쌌다. 밀어내려는 건지 끌어당기려는 건지 모를 몸짓이었다. 곧고 긴 손가락 사이사이로 연한 갈색 머리칼이 흘러내렸다.
“흐응, 으, 으으…….”
젖은 구멍에 발갛게 피가 몰리고 안이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빨아 주었다. 황제가 마침내 고개를 들었을 때, 청은 이미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 되었다. 활짝 벌어진 청의 다리 사이 이불에 얼룩이 졌다. 양옆으로 넓게 벌어진 허벅지가 간헐적으로 떨렸다.
처음으로 환열기를 맞은 이후 청은 부쩍 민감해졌다. 황제가 조금만 만져도 앓는 듯한 신음을 내며 몸을 뒤틀었다. 여향을 풀기라도 하면 뒤를 흠뻑 적시고 꼴딱꼴딱 숨이 넘어가게 자지러졌다.
그러나 청이 반응하는 것은 오로지 황제뿐이었다. 다른 음인이나 양인의 체향은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오랜 세월 동안 꾸준히 공을 들여 그의 기질을 발현시킨 것이 황제여서일 것이라고, 수의는 확신 없는 기색으로 진단했다.
매사 무덤덤하고 뻣뻣하던 이가 황제의 앞에서만 나긋나긋하게 녹아 몸을 열었다. 그는 오직 황제만의 음인이었다.
“입구만 조금 빨아 줬을 뿐인데 그새 이불을 죄다 적셔 놨군. 그대가 하도 뒤를 움찔움찔 조여 대서, 배 속의 아이도 놀라겠어. 저를 품은 이가 이렇게 음탕한 이였나 하고.”
수치스러웠다. 청이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미처 가리지 못한 양쪽 귀가 붉었다.
“좆을 넣어 줄까? 그대, 고작 혀로는 만족하지 못하잖아.”
“하지만…….”
청이 본능적으로 배를 감쌌다. 몸을 일으켜 그의 위로 올라탄 황제가 생긋 웃었다.
“아이를 해칠 정도로는 하지 않을 테니까.”
황제는 청을 옆으로 돌려 눕히고 뒤에서 끌어안았다. 얼떨결에 모로 눕게 된 청이 가늘게 헐떡였다. 배가 옆으로 쏠려 숨이 막혔다. 황제가 팔을 뻗어 둥그스름하게 솟은 배를 받쳐 주었다.
배가 편해지자 다른 감각이 살아났다. 등 뒤의 황제는 한껏 발기해 있었다. 아플 정도로 딱딱해진 성기가 질척하게 젖은 엉덩이 골을 쿡쿡 찔러 댔다. 당장이라도 푹 쑤셔 박힐 것만 같았다.
청의 한쪽 허벅지를 들어 올렸다. 버거운 자세에 청이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접합부를 빤히 내려다보며 천천히 밀어 넣었다. 두툼한 귀두가 입구에 턱 물렸다가, 이윽고 안을 잔뜩 벌리고 천천히 밀려 들어갔다.
“으응, 으, 앗……!”
오랜만의 정사였다. 한껏 달아올라 있던 안이 성기의 침입을 반겼다. 굵은 성기가 한 치 한 치 들어올 때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좋았다. 내벽이 마구잡이로 옴쭉거렸다.
“옳지, 그래. 잘도 받아먹는군. 더 넣어 줄까?”
아, 아, 하는 넋 나간 신음과 함께 청의 고개가 점점 젖혀졌다. 뒷머리가 황제의 목덜미에 닿았다. 황제의 성기를 문 엉덩이에 보조개가 확 패었다 풀어지기를 반복하고, 발등에 잔뜩 힘이 들어가 뼈마디가 도드라졌다. 이대로만 있어도 절정에 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골반을 붙들고 무작정 끝까지 퍽 처넣던 이전과 달리, 황제는 도중에 뚝 멈추었다. 절반이 약간 넘게 들어간 성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삽입의 감각을 만끽하고 있던 도중에 뚝 멈추니 조바심이 났다.
때마침 바람이 불었다. 그 반동으로 선체가 잘게 흔들렸다. 출렁, 출렁. 그때마다 배 속에 미지근한 자극이 가해졌다. 내장이 간지러워 애가 탔다. 청이 자신의 배를 감싸 안은 황제의 팔을 저도 모르게 긁어 내렸다. 낮게 흐느끼며 무작정 애원했다.
“더 넣어 주세요, 더…….”
“아이가 걱정되어 못 하겠다 내뺄 땐 언제고, 이젠 더 먹고 싶어 안달이 났어?”
“으응……. 제발, 더.”
“내 예락은 음란하기도 하지. 애를 뱄는데도 이리 좆에 환장을 해서야.”
황제가 청을 고쳐 안았다. 성기가 맞물린 아래를 주의 깊게 살피며 허리를 천천히 밀었다. 바깥에 반쯤 드러나 있던 기둥이 느릿느릿 빨려 들어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귀두 끄트머리가 단단하게 부푼 아기집 입구에 툭 부딪쳤다.
“아!”
내벽이 확 조여들었다. 황제가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낮게 숨을 내쉬고 성기를 슬슬 잡아 뺐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청은 본능적으로 뒤에 꾹꾹 힘을 주어 삽입을 졸랐다.
“가만히……. 보채지 말고. 착하지.”
게으른 정사가 이어졌다. 황제는 뒤에서 청을 꼭 끌어안고 느릿느릿 허리를 놀렸다. 마구잡이로 밀어붙이는 것보다 미온적인 쾌락이 더욱 잔인했다. 좆을 더 먹고 싶어서 초조해졌다가, 깊이 넣어 주지 않는 황제가 원망스러웠다가, 마침내는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났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아무도 없는 호수는 마냥 청명했다. 사방이 적요한 가운데 헉헉대는 숨소리가 크게 들렸다.
흥건히 흐른 애액이 이불에 잔뜩 묻었다. 황제의 성기를 타고 줄줄 흘러내려 와 그의 사타구니마저 적셨다. 한 번 성기를 쑥 밀어 넣었다 빼낼 때마다 찔꺽거리는 소리가 났다.
청이 무심결에 손을 들어 귀를 틀어막았다. 귓가에 파고드는 소리가 너무 선정적이었다. 자신이 짐승보다 못한 존재가 된 느낌이었다. 적어도 짐승은 제 새끼를 배고도 짝짓기에 열중하지는 않으니.
“왜 귀를 막아. 좆질하는 소리가 듣기 싫어? 그대 뒷구멍에서 나는 소리인데.”
황제가 청의 손에 깍지를 껴 끌어 내렸다. 갈 곳을 잃고 허우적거리는 손을 등 뒤로 지그시 꺾었다. 청의 허리가 휘어졌다. 그 상태로 잔뜩 열이 오른 내벽을 자근자근 헤집었다.
뱃전 너머로 보이는 호수는 거울처럼 청명했다. 배 위에서 몸을 겹친 두 사람이 수면에 비쳤다.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아 버린 청의 눈이 충격으로 흔들렸다.
화창한 햇살 아래 둥그스름하게 부푼 배와 마른 알몸이 하얗게 드러났다. 황제가 양팔을 붙잡고 뒤에서 박을 때마다 발기한 성기가 덜렁덜렁 흔들렸다. 한껏 벌어진 다리 사이로 굵직한 성기가 쑥쑥 드나들었다. 맨몸에 어설프게 반쯤 걸친 황제의 용포가 오히려 음란함을 더했다.
꿈에 나올까 두려운 광경인데, 아이를 가진 몸으로 쾌락에 허덕이는 꼴이 추하기 짝이 없는데. 수면에 비친 스스로를 보자 성감이 이상하리만치 빨리 차올랐다. 손바닥과 발바닥에 열이 맺히고 뒷덜미가 확 뜨거워졌다.
“폐하, 폐, 하……! 흐, 으응, 아, 아……. 윽…!”
청이 이를 악물고 고개를 확 젖혔다. 한 번도 만져 주지 않은 성기에서 정액이 뚝뚝 흘렀다. 그는 사정하는 도중에도 흐윽, 끅, 흑, 하며 토막토막 끊어진 신음을 잇새로 흘렸다.
“흐읏.”
황제가 짤막하게 신음했다. 정액을 갈구하듯 꽉꽉 조여들어 들러붙는 속살을 뿌리치고 성기를 쑥 뽑아냈다. 청의 볼기를 양손으로 쥐어 잡아 벌렸다. 드러난 번들번들한 구멍은 아직도 절정의 여운으로 옴찔대고 있었다. 그 위에 귀두를 꾹 눌러 입구에 대고 사정했다.
엉덩잇살에 파묻힌 성기가 크게 꿈틀거렸다. 정액이 쭉쭉 튀어 올랐다. 엉덩이 골을 흠뻑 적시고 곧게 팬 등줄기와 도드라진 날개 뼈, 허리에도 고였다.
“하아…….”
황제가 달콤한 한숨을 쉬며 청을 끌어안았다. 청의 마른 어깨에 턱을 얹고 배를 쓰다듬었다. 그 순간 배 안에서 무언가 살짝 움직였다. 자그마한 어항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가 빠끔 내뱉은 공기 방울처럼, 작지만 또렷한 움직임이었다.
“헉……!”
황제가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청이 먼저 흠칫 놀랐다. 그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처음으로 느낀 태동이었다.
* * *
청은 푹신한 이불에 둘러싸이고 황제의 품에 안겨 실신하다시피 잠에 빠졌다. 쇠약해진 몸으로는 정사 한 번이 한계였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저녁이 되어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타오르는 석양이 수평선 끝자락에 아슬아슬하게 걸렸다.
청은 자신의 매무새를 내려다보았다. 옷을 챙겨 입을 생각도 못 하고 체액이 덕지덕지 묻은 몸으로 잠들었는데, 어느새 그는 말끔히 옷이 입혀진 채였다.
황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난간에 기대어 앉아 바깥을 응시하고 있었다. 청이 잠들어 있는 동안 그는 얼마나 오래 적막 속에 홀로 있었던 것일까. 청이 머뭇머뭇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얼마나 잤습니까?”
“예락, 이리 와 보겠나?”
황제는 대답 대신 살며시 웃으며 그를 불렀다. 어깨에 걸친 용포를 추스르며 홀린 듯 다가갔다. 고운 노을이 진 하늘에 느리게 밤이 찾아왔다. 호숫가에 피어난 꽃에도 푸르스름한 어둠이 스몄다.
이윽고 호숫가에 하나둘 불이 밝았다. 은은한 초롱불이었다. 어둑어둑한 하늘을 배경으로 무성히 피어난 색색의 꽃송이들이 등불에 비쳐 아른아른 빛났다. 검푸른 수면 위에 불빛 조각과 바람에 날려 온 꽃잎이 뒤섞여 잔잔히 떠다녔다. 장관이었다.
“어떤가?”
황제가 조용히 물었다. 청은 한참이나 호숫가의 정경에 정신을 팔고 있다 뒤늦게 대답했다. 나지막하게 새어 나온 목소리가 덜 가신 잠기운 탓인지, 혹은 다른 이유에서인지, 조금 잠겨 있었다.
“……아름답습니다. 제가 살면서 본 풍경 중 가장.”
“그대는 여기저기 유람을 다니며 온갖 진귀한 풍경을 많이 보았을 텐데도?”
“예. 남은 생 동안 이보다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멍하니 호수를 바라보는 청의 옆얼굴에도 초롱불이 맺혔다. 밤하늘처럼 새카만 눈동자 한가운데 불씨가 피어올랐다. 파리한 뺨에 발그스름한 음영이 졌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면 순행(巡幸)이라도 할까. 국토 전체를 돌면서, 방방곡곡 아름답다는 풍경이란 풍경은 모두 보는 거야.”
“따르겠습니다…….”
청은 힘없이 웃었다. 황제는 더 이상 호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애증 어린 시선이 청에게 머물렀다. 섬뜩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입매만 올려 화사한 미소를 만들어 냈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지? 그대가 앙큼하게 거짓말로 둘러대는 데는 이제 신물이 난단 말이야.”
“…….”
“거짓이 아니라고 말해. 어디에도 가지 않고, 나를 떠나지 않고, 무사히 아이를 낳고 나와 함께 순행을 나갈 거라고.”
“거짓이 아닙니다.”
“맹세해.”
“맹세하겠습니다.”
황제는 손바닥으로 청의 뺨을 감쌌다. 두 사람의 시선이 뒤얽혔다. 상대의 의중을 낱낱이 파헤치려는 듯 집요하게. 육체끼리의 교합보다도 더욱 음란했으며, 동시에 묘하게 경건했다.
펑! 퍼펑! 아슬아슬한 공기를 가르고 커다란 폭음이 울려 퍼졌다. 별 무리 같은 불꽃이 솟아올라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불꽃놀이였다.
“아…….”
청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황제와 단단히 엮여 있던 시선이 탁 풀렸다. 갈 곳 잃은 눈이 이리저리 방황했다. 그의 뺨이 파들파들 떨리는 것이 맞닿은 손을 통해 황제에게도 느껴졌다.
가시나무 울타리를 넘어 숲으로 달아나려다 황제에게 총을 맞은 이후 청은 줄곧 이러했다. 총이든 다른 것이든, 화약이 터지는 소리에 과민 반응을 보였다. 수렵제 때는 황제가 곰을 노리고 쏜 총소리에 지레 놀라 말에서 떨어지기도 했다.
“청아.”
강하게 이름을 불러 이쪽을 보게 했다. 공포에 사로잡힌 청의 시선이 무심코 황제를 향했다. 뺨을 감싸고 있던 손이 그의 귀를 틀어막았다. 폭발음이 아득하게 멀어져 더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좁아진 시야에 오로지 황제만 보였다.
황제는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청에게 고개를 기울여 입술을 맞댔다. 청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황제의 손안에서 경련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불꽃은 끊임없이 터졌다. 강렬하게 하늘을 물들이고 곧장 사그라졌다. 까맣게 불꽃이 사윈 허공을 곧장 다음 불꽃이 메웠다. 밤하늘을 밝히는 색색의 불꽃을 뒤로하고, 둘은 오래도록 입을 맞추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면 정식으로 청에게 첩지를 내릴 것이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어 반발하는 자가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상관없었다. 청이 황제와 교합하여 아이를 낳았고, 황제가 그 아이를 자신의 친자라 공인했다. 이것만큼 확실한 자격 증명은 없으리라.
청을 황후에 봉할까. 그리하면 청은 잔뜩 겁을 집어먹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몸을 사릴지도 모르겠다. 성실하고 생각이 많아 타인의 시선을 몹시도 신경 쓰는 이니까. 혹은 죽은 전 황후의 대용품이 되는 것 같아 싫다며 투정을 부릴 수도 있겠지.
그래도 괜찮았다. 황귀비든 귀비든, 다른 품계라면 얼마든지 있었다. 그중 아무거나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게 하면 될 일이었다. 어차피 품계 따위는 형식에 불과했다. 황제가 청을 형식상으로 금군 대장군에 임명했듯이.
청과 황제는 역사가 증언하는 반려가 될 것이다. 인세(人世)의 그 누구도 감히 둘을 갈라놓지 못할 것이다. 평생을 황궁의 지붕 아래에서 함께하고, 공사(公私)를 불문하고 모든 자리에서 한 이름으로 묶이다가, 죽어서까지도 한 무덤에 묻힐 것이다.
그리하여, 이번에야말로 청은 영원히 달아날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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