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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단수지벽(斷袖之癖)(외전) : 종천지모(終天之慕) (10/10)

단수지벽(斷袖之癖)(외전)

종천지모(終天之慕)

전 황후가 죽고 새로이 책봉된 황후에 대해 아는 자는 거의 없었다.

소문이야 분분했다. 어느 몰락한 귀족 가문의 마지막 핏줄이라더라, 황제 아래에서 일하던 신하였다더라, 심지어 그냥 신하도 아니고 칼과 활을 쓰던 무관이었다더라, 황후는커녕 황후의 호위 무사 정도에나 어울릴 훤칠한 체격의 사내라더라.

그러한 소문들은 죄다 앞뒤가 맞지 않는 것뿐이었다.

첫째로, 정말로 황후가 몰락 귀족이라면 황제가 그를 반려로 맞았을 리가 없었다. 해단의 황제는 소름 끼칠 정도로 철두철미한 인물이었다. 잔인하고 충동적으로 구는 것 같아 보여도 그의 결정에는 항상 철저한 계산이 뒤따랐다. 이제껏 들인 몇 없는 비빈들이 죄다 그러한 정치적 계산의 산물이었다. 그러니 이 제국의 안주인 되시는 황후께서 보잘것없는 인물일 리가 없는 것이다.

둘째로, 황후가 황제의 신하였다면 그는 필시 양인 혹은 평인일 터였다. 음인은 신하로 등용하지 않는 것이 오랜 관습이었으므로.

하지만 황후와 황제의 사이에는 이미 자식이 있었다. 출산 시에 태의들의 우두머리인 수의가 직접 산실에 들어가 아이를 받았고, 황제가 그 아이를 자신의 친자식이라 공인했다. 음인이 아닌 사내가 대체 어떻게 같은 사내와 결합하여 아이를 낳는단 말인가?

귀족이나 관료들은 내막을 알고 있는 눈치였지만 황제의 분노를 사는 것이 두려워 함구하였고, 황후의 본명과 출신이 쓰인 내명부 기록을 열람할 방법이 없는 아랫것들은 그저 온갖 상상만으로 말을 덧붙여 꾸며 내었다.

그러다 결국 호기심으로 허황된 소문을 속닥거리던 궁인들의 목이 날아갔다. 황손이 태어나고 새 황후가 책봉된 이후 궁에 피바람이 연거푸 불었다. 황제는 원래도 냉혹하였으나 황후에 관련된 일에는 그 성정이 한층 더 흉악해졌다. 황후궁에서 일하는 인선이 몇 번 갈아 치워지고, 소문에 대해 아는 이의 수가 확연히 줄고 나서야 잠잠해졌다.

황후의 봉호와 성명은 따로 있었으나 황제를 제외한 그 누구도 그를 그 이름으로 부르지 못하였다. 황제는 아랫것들이 시시콜콜 황후에 대해 떠드는 것을 혐오하였기에 황후 전하라는 칭호를 쓰기도 어려웠다. 결국 궁인들은 완곡하게 몰래 이야기를 주고받아야 했다.

황후의 처소에는 항상 두꺼운 비단 장막과 옥으로 된 주렴이 겹겹이 드리워 있었으며, 모든 문에는 빗장이, 모든 창에는 격자가 달렸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황후의 시중을 드는 이도 황후의 몸에 손끝 하나 댈 수 없었다.

온갖 귀하고 찬란한 것들에 감싸여 깊은 궁 안에서만 머무는 황후. 황제의 명으로 공식 석상에도 나서지 않는 황후. 능려궁에서 일하는 시비들조차 얼굴을 보기 힘들다는 황후. 그에 대해 궁인들은 가끔 의문을 품었다. 황제는 그를 은애하는 것일까, 증오하는 것일까.

황제가 그를 미워하여 유배형을 받은 죄인처럼 궁에 처박아 둔 것이라기에는 처우가 너무도 극진했다. 황궁에 들어오는 좋은 물건이란 물건은 죄다 황후궁으로 갔고, 황후가 마른기침 한 번만 해도 곧장 태의원의 지위 높은 의원들이 하던 일을 팽개치고 죄다 불려 왔다. 황제는 황후를 더 귀애해 주지 못해서 안달 난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황후를 너무도 아끼고 사랑한 나머지 혼자만 보고 싶어 꽁꽁 숨겨 두었다고 하기에도 무언가 이상했다. 황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제 편을 만들어 세력을 불려야만 했다. 그것은 황후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황제는 황후를 일부러 타인으로부터 고립시켰다. 궁에 가둬 놓고 다른 이들과는 말 한 마디 섞지 못하게 했다. 마치 그를 외로움에 미쳐 서서히 말려 죽이려는 것처럼.

멋모르는 아랫것들이 아무리 궁금해한들 결론이 나올 리가 만무했다. 결국 그들은 진실을 캐는 것을 포기했다. 얄팍한 호기심보다는 제 목숨이 더 소중했다.

답은 능려궁을 몇 겹으로 칭칭 휘감은 두꺼운 장벽 너머에 있었다. 당사자들만이 아는 곳에.

* * *

고운 비단옷을 차려입은 소년이 난간 앞에 섰다. 사방이 탁 트인 누각에서 훤히 보이는 풍경에 짧게 탄성을 터뜨렸다. 입궁한 이후 처음 하는 나들이에 들떠, 신분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고 인이 박이도록 들은 것도 깜빡 잊었다.

〈대장군! 풍경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궁에 이리 어여쁜 곳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소년은 천진한 기쁨으로 볼을 붉히며 돌아보았다. 저만치 뒤쪽에 검을 찬 청년이 소년을 지키듯 서 있었다. 그는 소년보다 두세 치 정도 키가 컸으며, 긴 흑발을 단정하게 묶어 늘어뜨렸다. 청년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덤덤하게 대꾸했다.

〈황후 전하, 난간에서 물러서십시오. 위험합니다.〉

〈아……. 죄송합니다.〉

당장이라도 난간에 대롱대롱 매달려 바깥을 구경할 기세이던 황후가 머뭇머뭇 물러섰다.

〈지은 지 오래된 누각입니다. 찾는 자가 드물어 관리도 다소 소홀한 편이고요. 그럴 일은 없겠으나, 만에 하나라도 난간의 이음새가 부실하여 변고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예…….〉

〈제가 누차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황궁에서는 예상치도 못한 온갖 일들이 불시에 일어납니다. 더군다나 이제 고귀한 몸이 되셨으니 긴장의 끈을 놓으셔선 결코 안 될 일입니다.〉

청이 책을 읽는 듯 무미건조한 어조로 경고를 늘어놓았다. 황후는 호되게 야단맞은 어린아이처럼 금세 기가 죽었다. 머리에 치렁치렁 달아 놓은 장신구며 화려한 비단옷이 무색하게,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시무룩하게 입을 다문 모습이 가련했다.

황후가 변방의 소국에서부터 먼 길을 와 입궁한 지 보름도 되지 않았다. 황제가 끔찍하게 싫다고, 어마마마와 아바마마가 보고 싶다고, 율에 돌려보내 달라고 엉엉 울며 식음을 전폐하는 것을 겨우 달래 놓았다.

오늘의 나들이도 그 일환이었다. 황궁의 정원을 보여 주어, 화초와 나무를 가꾸는 것을 좋아했던 황후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황후는 이역만리에 온 이후 줄곧 극도로 긴장한 상태였다. 자신의 나라를 짓밟은 제국인들에게 증오를 표하며 날을 세웠다. 하지만 청에게는 다소 경계를 풀었다. 심지어는 황제를 대면하러 가는 자리에서조차 잔뜩 겁을 집어먹어서는 청의 옷자락 뒤에 숨으려 했다. 이제껏 그를 보살피고 가르친 것이 청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청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마냥 곱게만 자란 소년 앞에서 황궁의 위험성을 운운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대신 말을 돌렸다.

〈이곳이 마음에 드십니까.〉

〈네. 황궁의 다른 곳보다도 가장 마음에 듭니다.〉

청이 잔소리를 더 할 마음이 없어 보이자 황후는 기운을 되찾았다. 그는 홀린 듯 난간 너머의 풍경에 시선을 주었다. 몹시 낯을 가리는 황후를 위해 다른 시종들은 모두 아래에 대기시켜 놓고 황후와 청, 둘만 누대에 올랐다. 저리 얼굴에 생기가 도는 걸 보니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바깥의 뜰은 다소 소박했다. 멋대로 웃자란 나무와 풀들이 새파랗게 우거졌다. 무더기로 뭉쳐 핀 꽃들 가운데 잡초와 들꽃이 드문드문 섞여 들었다.

황궁의 다른 정원들로 말할 것 같으면, 매 계절마다 달리 피어나는 색색의 꽃을 가득 심어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순금을 입힌 정자와 붉은 옻칠을 한 다리를 놓고 연못에 비단잉어들을 풀어 무릉도원 같기도 하였다. 그런 정경에 익숙해진 이들에게는 이곳이 다소 심심해 보일 터였다.

〈이곳은 궁에 있는 수많은 뜰 중에서도 작은 편입니다. 이보다 더 크고 화려한 곳도 많습니다.〉

〈하지만 대장군, 전 여기가 좋은걸요.〉

〈…….〉

〈해단의 황궁은 어딜 가나 아름다웠어요. 모든 곳이 호화롭고 웅장해서 기가 질릴 정도였답니다. 그래도 전 이 뜰이 훨씬 마음에 듭니다. 인위적으로 가지를 쳐 내지도 품종을 개량하지도 않고, 저마다 마음껏 자라고 있으니까요.〉

〈그렇습니까.〉

〈제 고국에서는 정원을 그렇게 꾸밉니다. 완벽한 형태를 만들기 위해 잎과 꽃을 잘라 내는 대신, 본질 그대로 자연스럽게 두지요. 궁의 돌담을 새파란 덩굴이 가득 뒤덮은 곳도 있답니다.〉

청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무미건조한 눈길이 시야 가득 펼쳐진 풍경을 슥 훑었다. 살랑살랑 불어온 바람이 그의 흑발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청은 다시 황후를 지키는 호위 무사의 입장으로 돌아가, 손을 검 손잡이에 얹은 채 묵묵히 섰다. 저자에게도 과연 감정이란 게 있기는 한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대장군.〉

황후가 가만히 그를 불렀다. 청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마.”

또다시 부름이 날아왔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달랐다. 앳된 티가 나기는 하였으나 교육을 잘 받은 왕족답게 차분하던 황후의 음성이 아니었다. 천진한 기색으로 잔뜩 들떠 있는 어린아이의…….

“마마!”

청이 눈을 크게 뜨며 움찔했다. 그 순간 눈앞의 정경이 휙 바뀌었다. 싱그러운 자태를 자랑하던 새 이파리들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수줍게 피어난 이름 모를 봄의 들꽃들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버석하게 마른 낙엽이 뜰에 쌓였다.

“아…….”

청이 나직하게 탄식했다. 그는 몇 년 전부터 종종 이러했다. 눈을 뜬 채로 꿈이라도 꾸는지 정신을 놓기 일쑤였다. 그러다 누군가 그를 부르거나 건드리면 필요 이상으로 화들짝 놀라곤 했다.

“참으로 어여쁩니다!”

난간에 어린 사내아이가 기대어 있었다. 맑은 소리로 재잘대며 앙증맞은 손으로 파닥파닥 손짓을 했다.

“황자 전하.”

청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꿈에서 본 풍경이 현재와 겹쳐졌다. 눈앞의 어린아이는 기억 속의 소년을 닮았다.

“마마께서도 보시어요. 나뭇잎이 아주 많이 있는데, 잔뜩, 이렇게 빨개져서는!”

눈앞에 펼쳐진 예쁜 풍경에 흥분한 황자가 바깥을 가리켰다. 짤막한 아이의 키로는 난간 너머를 제대로 볼 수 없어, 발을 걸고 기어올라 난간에 힘껏 매달렸다.

그 순간 청은 보았다. 황자가 매달린 난간이 불길하게 삐걱거리는 것을.

“전하, 위험합니다. 그만…….”

청이 아이를 부르며 한 발짝 다가섰다. 하지만 들뜬 황자에게는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삐그덕. 난간을 기둥에 고정하고 있던 이음새가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벌어졌다. 다섯 살이나 되었을까 한 작은 아이의 무게조차 견디지 못하고.

“마마……. 어, 어?”

마냥 신나게 놀던 황자는 갑자기 몸이 공중에 붕 뜨는 느낌에 당황했다. 공포에 질린 갈색 눈동자가 청을 바라보았다.

누대는 이삼 층 정도 높이였다. 주위 풍경을 한눈에 감상하기 위해 일부러 살짝 높게 만들었다. 여기서 떨어지면 십중팔구 크게 다치리라. 아주 운이 나쁘면 숨이 끊어질 수도 있었다.

“전하!”

청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았다.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곧장 바닥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난간과 함께 떨어지는 아이에게로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몸놀림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옷자락이 길게 늘어져 거치적거렸다.

한때 그는 황궁을 수호하는 금군의 수장이었다. 말을 타고 검을 들어 대군을 이끄는 황제의 오른팔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옛말이었다. 몇 년에 걸쳐 차근차근 망가지고 뒤틀린 몸이 비명을 질렀다.

“윽……!”

청은 난간이 떨어져 나가고 없는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긴 옷자락이 펄럭이며 쉼 없이 나부꼈다. 황자가 손쓸 도리 없이 추락하기 전, 허공을 향해 뻗은 청의 손이 간신히 아이를 잡았다. 그는 이를 악물고 황자를 힘껏 끌어안아 품에 숨겼다. 아이에게 가는 피해를 최대한 줄이고, 모든 것을 자신이 대신 받도록.

쿵!

이윽고 큰 소리와 함께 끔찍한 충격이 찾아들었다.

* * *

“으아앙, 흑, 훌쩍, 흐앙…….”

“전하, 이리 우시면 상처가 낫질 않으십니다.”

“흐아아앙!”

“어서 당과를 내어 오거라. 도무지 울음을 그치질 않으시니 간식이라도 올려 진정하시게 해야겠다.”

“예.”

어린아이가 서럽게 우는 소리가 궁 안을 울렸다. 궁인들 여럿이 달라붙어 황자를 보살피느라 애를 썼다.

“나 때문에 마마께서…….”

자신도 팔다리에 흰 붕대를 덕지덕지 감고 있으면서, 황자는 제 상처는 신경 쓰지도 않고 서럽게 자책했다. 황족치고는 보기 드문 태도였다. 금이야 옥이야 귀하게 떠받들어져 자란 아이들은 제 몸에 생채기 하나만 나도 온 궁이 떠나가라 떼를 쓰고 패악을 부리기 일쑤였으므로.

곧 황자의 앞에 색색의 당과가 놓였다. 달콤하고 예쁜 것들이 접시에 가득했다. 한 가지 음식을 지나치게 탐하면 군자의 도리가 아니라 하여 원래는 한 번에 한두 개밖에 먹지 못하게 하던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리 심하게 울다간 황자까지 탈진하여 쓰러질 판이었다. 황자를 돌보는 보모상궁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서 있던 궁인이 은으로 된 젓가락으로 당과를 집어 황자에게 조심스레 내밀었다.

“전하, 당과를 올리겠사옵니다.”

“필요 없다!”

앙칼진 외침이 울렸다. 황자가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얼굴로도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먹는다. 싫어! 마마께서 저리 편찮으신데 어찌 내가……. 훌쩍.”

“하오나 전하.”

“흐윽, 흐아아아앙.”

황자는 이제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울기 시작했다. 상처를 치료하느라 하나로 단정하게 묶어 놓기만 한 갈색 머리카락이 힘없이 스르르 내려와 자그마한 얼굴을 가렸다. 몹시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궁인들의 얼굴에 근심이 한층 더해졌다.

사고가 났을 당시, 건물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궁인들이 큰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달려갔다. 발견이 빨랐던 덕에 그나마 최악의 사태는 면했다. 사방에 수풀이 무성하게 우거지고 낙엽이 폭신폭신하게 깔려 있던 것도 한몫했다.

황자는 그 높이에서 떨어진 것치고는 기적적으로 멀쩡했다. 뼈가 부러지지도 내장이 상하지도 않았다. 살갗에 자잘한 생채기가 몇 개 있긴 했지만 연고를 바르면 곧 나을 수준이었다.

문제는 청이었다. 황자를 감싸고 떨어진 탓에 그는 모든 충격을 고스란히 받았다. 깜짝 놀란 황자가 청의 상태를 살피려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아이가 꼬물꼬물 일어서자 의식을 잃은 이의 팔이 툭 떨어졌다. 황자가 가장 먼저 본 것은 코와 입에서 피를 흘리며 혼절한 청의 모습이었다.

처참한 광경을 목격한 황자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비명을 지르지도 울지도 않았다. 황급히 다가온 궁인들이 사태를 수습하는 도중에도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저 멍하니 있었다.

고요히 가라앉은 황궁의 공기 중에 긴장이 퍼졌다. 청이 장막을 드리운 방 안으로 실려 들어가고 태의들이 긴 옷자락을 휘날리며 뛰어다녔다. 숨조차 제대로 못 쉬고 뻣뻣이 굳어 있던 황자는 청이 살아 있다는 말을 듣고서야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뒤늦게 터진 울음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대해단의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대해단의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길이 평안을 누리소서.”

주위가 갑작스레 고요해졌다. 분주하게 사방을 뛰어다니던 이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검붉은 비단에 황룡을 수놓은 장포를 걸친 남자가 문지방을 넘어 들어섰다.

인간의 것 같지 않은 연한 빛깔의 눈동자가 방 안을 느리게 훑었다. 그러다 시선이 한 곳에 멎었다. 다른 이들은 모두가 예를 취하느라 이마가 땅에 닿도록 몸을 낮추고 있거늘, 오직 한 명만이 딱딱하게 굳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흐읍.”

황자는 작살에 꿰뚫린 사냥감처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황제가 먼발치에서 지나가는 것만 보아도 부들부들 떨었고, 눈이라도 마주칠라치면 경기를 했다.

“…….”

황제의 시선이 자그마한 아이의 정수리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주위 사람들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전하, 어서 예를.”

황자가 멀거니 굳어 있자 곁에 부복해 있던 상궁이 소리 죽여 그를 재촉했다. 황자는 힘겹게 고개를 숙였다.

“화,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예락은?”

황제는 바들바들 떠는 황자에게서 시선을 뗐다. 팔다리에 붕대를 칭칭 감은 어린 아들이 안쓰럽지도 않은지, 그를 자연스레 무시하고 안쪽으로 걸어갔다. 침전에서 청을 돌보던 수의가 달려 나와 예를 표했다.

“아직 깨어나지 않으셨습니다. 발목이 부러지고 늑골에 금이 가, 임시로 부목을 대고 붕대를 감아 두었습니다. 허리와 어깨의 근육도 다소 상하셨습니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나…….”

“없으나.”

황제가 조용히 되풀이했다. 수의는 이를 악물고 조금 더 깊이 허리를 숙였다.

“기력을 보하는 탕약을 지어 올리고 침을 놓았는데도 여태껏 의식을 찾지 못하고 계십니다. 짐작하건대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내상을 입으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내상이라.”

“예, 소신의 좁은 식견으로는 그렇사옵니다.”

“자세히 고하라.”

공손하게 눈을 내리깔고 있던 노회한 의원이 한순간 황자를 흘긋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다시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는 몸을 웅크리고 머리를 감싸 충격을 최대한 줄여야 합니다. 무예를 익히고 군사 훈련을 받으셨던 마마께서 그것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마마께서는…….”

“…….”

“지켜야 할 것이 있어 스스로의 보호를 포기하셨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머리를 크게 부딪쳐 코와 입에서 피를 쏟으셨기에.”

황제는 수의의 말이 끝난 뒤에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어느 순간 그의 고개가 스르르 돌아갔다. 그는 섬뜩한 무표정으로 황자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아, 으으, 흐, 아바마마, 저, 저는.”

이가 부딪쳐 소리가 났다. 황자는 조그만 두 손을 바닥에 짚고 엎드린 채 덜덜 떨었다. 너무 무서워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황제가 청을 위험에 빠뜨렸다는 이유로 그를 죽일지도 몰랐다. 눈앞의 소년이 그의 아들이자 황위 계승권자라는 사실은 황제에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살아온 날이 얼마 되지 않은 황자 본인조차 그 사실을 뼈저리게 알았다.

“조사 결과는 나왔나?”

숨 막히는 침묵 끝에 황제가 태연하게 다른 말을 꺼냈다. 칼을 차고 그의 곁에 서 있던 금군 대장군이 기다렸다는 듯 나섰다. 그녀는 한때 우장군이었으나 대장군이었던 청이 해임되며 대신 그 자리에 앉게 되었다.

“병사들을 시켜 알아본 결과, 최근 누군가 일부러 난간의 못을 몇 개 빼 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이틀 전 궁인들이 청소를 위해 들렀을 때만 해도 멀쩡했던 난간이 지금은 툭 치면 떨어질 정도로 허술한 상태입니다.”

“누가 한 짓이지?”

황자는 외롭게 자랐다. 그를 낳은 전 황후는 해산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두었고, 황제는 그에게 몹시도 냉담했다. 황자는 황궁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혼자 놀았다. 어른들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또래 친구도 없는 아이가 홀로 갈 만한 곳은 뻔했다. 찾는 이가 없어 거의 버려지다시피 한 소박한 누각.

그는 정적들에게 몹시 탐나는 표적이었다. 황제의 첫 아이이자 황위 계승권을 지닌 적장자였으며, 동시에 제대로 된 가호를 받지 못하는 천덕꾸러기였으니.

그 정보를 입수한 누군가가 황자를 해치기 위해 흉계를 꾸몄다. 황자를 누각에서 떨어뜨려 불구로 만든 후, 낡은 건물에 몰래 들어가 놀다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는 핑계를 대면 그만이었다. 아예 죽어 주기라도 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계획은 순조로웠다. 다만 한 가지 변수가 있었다. 이번에 황자는 혼자가 아니었다.

오늘은 청이 그의 곁에 동행했다. 황자가 같이 단풍을 보러 가자고 끈질기게 조르기도 했고, 아무리 보모상궁과 시종들이 딸려 있다 한들 어린아이를 혼자 보내는 게 영 마음에 걸려서이기도 했다. 청이 그를 감싸고 떨어질 것이라고는 흉계를 꾸민 이조차도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정확히 범인이 누구인지는 철저히 수색을 실시하여 밝혀내어야겠으나……. 누대의 난간에 손을 쓴 것은 후궁마마들 중 한 분인 것으로 감히 아뢰옵니다.”

대장군의 말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얼어붙었다. 결코 쉬이 꺼낼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신중하고 입이 무거운 대장군이 저리 말할 정도면 거의 사실이라 보아도 무방했다.

황자가 마지막으로 누각에 갔던 것은 1주일 전이었다. 그때 바로 옆의 화원에서 후궁들이 다과회를 가졌다. 높고 사방이 트인 누각에서 혼자 노는 황자를 누군가 발견했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수준일지언정 황제 또한 명목상으로 후궁을 거느렸다. 모두 대장군 시절의 청이 손수 골라 올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제껏 제 분수를 잘 알아서 가만히 숨죽이고 지냈다. 어차피 황후를 비롯한 내명부의 모두가 공평하게 자식이 없었으며, 황제는 그들에게 극도로 무관심하여 그저 가만히 내버려 둘 뿐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황제의 총애가 애초에 주어지질 않으니 서로 질투하거나 다툴 일이 없었다. 이대로 평온한 삶을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여겼다.

그러나 전 황후가 첫 아이를 낳은 순간 처음으로 균형이 깨졌다. 그리고 현 황후가 둘째 아이를 낳았다. 후궁들은 불안해졌다. 황제가 자식을 낳았다는 것은 궁에 새로운 권력자가 탄생함을 의미했다. 이대로라면 황제가 아니더라도 황자 혹은 황녀의 손에 목이 달아날 수 있었다. 황손들이 제 생모와 자신의 기반을 굳건히 다지기 위해 다른 후궁을 제거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으므로.

그리하여 돌봐 주는 이 없는 황자가 홀로 외롭게 누각에서 놀고 있는 것을 본 순간, 누군가의 마음에 어두운 욕망이 싹튼 것이다.

“난간을 교묘히 망가뜨리려면 그에 마땅한 도구가 필요했을 거라 여겨, 창고에서 일하는 노비를 추궁해 보았습니다. 며칠 전 후궁전에서 일하는 궁인 중 하나가 밤늦게 찾아와 공구를 빌려 갔다고 합니다. 처소의 계단이 망가져 보수해야 한다는 이유로요. 다만 날이 어둡고 후궁을 모시는 시비들의 차림이 비슷비슷하여, 소속이 어디인지는 명확히 보지 못하였다 합니다.”

“……그래?”

잠깐의 침묵 끝에 황제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는 수려한 눈매 위로 드리운 금빛 속눈썹을 게으르게 깜빡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숨소리조차 크게 못 내고 꿇어 엎드린 이들을 슥 훑고,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수발 하나도 제대로 못 드는 쓸데없는 것들은 당장 치워라. 꼭 필요한 놈들만 남기고.”

“명 받들겠습니다.”

수의와 대장군이 동시에 대답했다. 잔시중을 들기 위해 남아 있던 하급 궁인들이 소리 없이 움찔했다.

“내 예락은 잠도 많고 수줍음도 많다. 어찌나 낯을 가리는지, 낯선 자들이 처소에 바글바글 모여 있으면 깨어나지 않고 줄곧 잠든 얼굴만 보여 줄 테지.”

황제는 뜻 모를 소리를 남기고 긴 옷자락을 펄럭이며 침전 안으로 들어섰다. 곧 그의 뒷모습이 아랫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침전 입구에 드리운 옥으로 만든 주렴만이 가볍게 흔들렸다.

* * *

사방이 칠흑처럼 캄캄했다. 어둠 속으로 무작정 손을 뻗었다가, 갑자기 밀려드는 끔찍한 통증에 퍼득 몸서리쳤다.

“윽…….”

버석버석하게 마른 신음이 새어 나왔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크고 날카로운 정이 이마를 쾅쾅 내려찍는 것 같았다.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이불을 벅벅 긁으며 괴로워했다.

“흐으, 헉!”

“청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일지언정 그 목소리의 주인만은 곧장 알아보았다. 청은 흐느끼듯 상대를 불렀다.

“무련, 흑, 무련 공자님…….”

“응.”

“머리가, 너무 아파서.”

“머리가 아파?”

“네에…….”

결국 청의 음성에 울음이 섞였다. 창백한 손이 이곳저곳을 마구 헤집으며 황제를 찾았다. 눈조차 뜨지 못한 채였다. 눈물에 젖은 검은 속눈썹이 무력하게 파르르 떨렸다.

황제는 그 광경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손을 잡아 주었다. 맞잡은 손을 타고 따뜻한 체온이 번졌다. 그러나 청은 황제에게 한 손을 잡히고도 진정하지 못했다. 통증을 못 이겨 입술을 마구잡이로 깨물고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울었다. 흰 침의에 감싸인 마른 어깨가 간헐적으로 경련했다.

“어찌해 줘야 할까. 내 청이가 이리 아파하는데.”

“아, 아파. 아파…….”

황제는 낮게 한숨을 쉬고 청의 옆에 몸을 뉘었다. 팔을 벌려 청을 끌어안았다. 그는 황제의 품에 힘없이 안겼다. 자꾸만 자신의 목과 가슴팍을 할퀴며 자해하려 하기에 남은 한 손마저 꼭 잡아 만류했다. 곧 죽어도 말을 아끼고 속이 썩어 문드러지도록 꾹꾹 참기만 하던 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아이를 낳을 때도 이리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진통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청은 혼수상태에 빠졌고, 나머지 과정은 의식이 없는 채로 진행되었으니.

제대로 자라지 못한 배 속의 아이는 달수에 비해 몹시 작고 약했다. 하지만 그 작은 아이마저도 청에게는 버거웠던 모양이었다. 일곱 달은 넘고 여덟 달은 못 채운 상태로 갑작스레 양수가 터졌다.

애초에 아이를 낳기 위한 몸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심신이 너무 약해진 상태였다. 청은 새하얀 얼굴이 식은땀에 푹 젖어 혼절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멎었다.

급한 호출을 받은 수의는 사색이 되어서는 예법도 잊고 미친 듯이 달려 들어왔다. 가슴을 규칙적으로 눌러 심장에 충격을 주고 입에 숨을 불어넣어, 막 피안의 문턱을 넘어가려던 이를 간신히 살려 냈다. 비통한 고함과 절박한 외침이 오갔다. 급박한 상태에 모두가 정신이 나가 있었다. 하혈한 피를 닦아 낼 여유조차 없어 침상에 피 웅덩이가 생겼다.

그 과정 내내 황제의 입장은 일관적이었다. 아이가 죽어도 좋다 했다. 아이의 몸을 토막 내고 팔다리를 모두 잘라도 좋으니, 당장 그것을 청의 안에서 끄집어내고 청을 살리라 했다. 아이의 탄생을 눈앞에 둔 아버지가 하는 말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끔찍한 명이었다.

결국 수의는 마음을 다잡았다. 황제의 생모가 나고 자란 고향, 머나먼 이국에서 배워 온 의술을 행하기로 했다. 부모에게서 받은 육신에 칼을 대는 것을 꺼려 하는 제국에서는 지나치게 패륜적이고 야만적이라는 이유로 금지된 수술이었다.

의식을 잃은 청을 약으로 푹 절여 마취시키고 배를 갈랐다. 아이는 호흡이 가냘프고 몸집이 작긴 했지만 멀쩡히 살아 있었다. 장애나 결손 또한 없었다. 황녀였다. 청을 고스란히 빼닮아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그렇게 청은 이번에도 죽지 못했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또다시 이승으로, 황제의 곁으로 끌려왔다. 고통스러운 삶이었다. 그에겐 차라리 죽음이 자비가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어찌해야 내 청이가 안 아플까. 탕약을 들이라 할까? 수의를 불러 진맥을 다시 하게 할까?”

황제가 품에 안긴 청의 등을 찬찬히 쓰다듬으며 조곤조곤 일렀다. 어둠 속에서 다정한 속삭임이 들렸다.

“아니면 이미 죽은 후궁들의 시체를 가져와 네 앞에 하나하나 늘어놓아 줄까. 그러면 조금이나마 나아질까?”

“그게…… 무슨.”

“후궁들 말이야. 몇 년 전 네가 들이라 하여 들였던 것들. 청이 네가 하도 귀엽게 조르기에 일단 들이긴 했지만, 아무 데나 놓아두고 잊고 있었는데……. 이번에 그것들이 쓸데없는 욕심을 부렸어. 건축에는 일말의 조예도 없는 자들이 용케도 난간에 수를 썼더군.”

청은 희게 질린 낯으로 굳었다. 짧은 순간 머리 안쪽을 쾅쾅 울리던 아픔마저 잊었다.

“그중에 진범이 누구인지 밝혀내는 덴 제법 시간이 걸린다지. 그래서 다 죽였어. 그러면 금군에 괜한 잡일을 시킬 필요도 없고 간단하지 않겠나.”

“…….”

“걱정 마. 황자는 안 죽였으니까……. 지금은.”

청은 말을 잇지 못했다. 메마른 입술을 힘없이 달싹이는 그를 보다가, 황제는 설핏 웃었다.

예나 지금이나 청은 쓸데없이 착했다. 쓸데없이 착해서 후궁이니 신하니 황자니 하는 것들에게까지 마음을 쓰는 것이다. 그리고 황제는 반쯤은 분풀이로, 반쯤은 재미로 그것들을 하나씩 죽였다. 네가 사랑한 것은 흔적도 없애 버리겠다고 언젠가 단언했듯이. 그때마다 청이 날개를 잘린 새처럼 파들파들 떠는 걸 지켜보는 것이 제법 즐거웠다.

“폐, 하…….”

청이 절망스럽게 신음했다. 그저 힘없이 감고만 있던 눈매가 일그러졌다.

저 작고 예쁜 머리통 속에서 또 무슨 계산이 돌아가고 있을지 뻔했다. 청은 쓸데없이 착할 뿐만 아니라 너무도 생각이 많고 성실했다. 황후로 책봉된 지금도 제 아들뻘인 황자에게 꼬박꼬박 존대를 쓰고, 황후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것 자체를 몹시 꺼려 하는 것만 봐도 그러했다.

“너는 그저 낫는 것만 생각하면 돼. 다른 일은 조금도 염려할 것 없어.”

그는 오래도록 청을 품에 안고 달랬다. 청의 두통이 서서히 잦아들 때까지, 지치지도 않고 등을 토닥토닥 어르고 이마와 뺨에 입을 맞추었다.

지독한 통증은 한참이 지나서야 사그라졌다. 갸름한 턱과 뼈대가 도드라진 목을 느릿하게 만지다가, 청이 진정된 것 같자 물었다.

“이제 식사를 해야지? 따뜻한 것으로 속을 든든히 채워야 약도 들지.”

“괜찮습니다. 지금은 생각이…….”

“매번 끼니를 소홀히 하니 도통 건강해질 생각을 않는 것 아닌가. 빈속에 약을 들이부어 봤자 다친 곳이 낫기는커녕 덧날 텐데.”

“하지만.”

“청아.”

시종일관 사근사근하던 황제가 갑자기 말허리를 뚝 잘랐다. 고작 이름을 한 번 불렀을 뿐인데, 청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소, 송구합니다. 먹겠습니다.”

“그래.”

황제는 다시 화사하게 웃었다. 청의 어깨를 끌어당겨 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무엇이 먹고 싶어? 뭘 가져다줄까, 청아.”

“저는…….”

“내 청이는 입맛이 몹시도 까다로워 하나하나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어. 산해진미를 코앞에 바쳐도 본체만체하고, 수저를 입에 대어 먹여 주려 해도 고개를 저으니. 어찌 이리 쌀쌀맞은지.”

“…….”

“그래, 너는 그나마 게살 죽을 잘 먹었지. 그것으로 할까? 게살 죽이 싫으면 연와탕(燕窩湯)은?”

청은 한참을 망설이다 아무것도 넣지 않은 흰죽을 골랐다. 두통의 잔재가 아직까지 남아 속이 메슥거렸다. 게살이든 제비집이든 넘어갈 리가 없었다.

“폐하……. 외람되오나.”

가늘게 눈을 뜬 청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황제의 옷소매 끄트머리를 살짝 붙잡고 작은 소리로 간청했다.

“등을 켜도 되겠습니까. 방이 너무 어두워서.”

황제는 아무 말이 없었다. 잠시 후 그가 묵묵히 몸을 일으켰다. 비단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났다. 그는 시종을 불러 불을 밝히라 하는 대신 직접 팔을 뻗었다. 침상 곁의 화로에 있는 불씨를 옮겨 등의 심지에 불을 붙였다. 화르륵, 타닥. 고요한 방에 심지 타들어 가는 소리가 울렸다.

“폐하?”

청이 다시금 황제를 불렀다. 황제는 습관적으로 빙그레 웃었다.

“응.”

“……아.”

그는 멍하니 넋을 놓고 있다 흠칫 굳었다. 무언가를 급히 깨달은 것처럼. 피곤함과 난처함이 공존하던 창백한 얼굴에서 표정이 싹 사라졌다.

“저……. 그게, 아무것도.”

“무얼 그리 망설여.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야지. 그래, 무슨 일이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청이 절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겨우 잦아든 두통이 다시 번졌다.

“내가 묻고 있지 않나.”

그의 어깨가 파들파들 떨렸다. 황제는 자신의 말에 청이 재깍 대답하지 않을 때마다 가차 없이 뺨을 올려붙였다. 때로는 머리채를 움켜쥐고 벽에 처박기도 했다. 곧 날아올 폭력이 무서웠다.

하지만 황제의 강압에 철저히 길들여진 그는 저항하는 법조차 몰랐다. 그저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움츠린 채 다가올 고통을 감내할 뿐이었다. 마침내 감은 시야 너머로 황제가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흐윽!”

공포에 질린 청이 발작적으로 몸서리를 쳤다. 하지만 날아온 것은 무자비한 손찌검이 아니었다.

“청아. 지금 네가 입고 있는 옷, 무슨 색이지?”

황제는 청의 뺨을 후려갈기는 대신 그의 손목을 가만히 잡아 들어 올렸다. 마른 팔을 타고 침의 자락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응? 어서 말해 보련. 무슨 색인지.”

“폐, 폐하.”

청은 이상할 정도로 당황했다. 초점 없는 검은 눈이 하릴없이 허공을 헤맸다.

“……앞이.”

황제는 그의 눈을 집요하게 들여다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비단 장막을 걷은 커다란 창 너머로 맑은 볕이 들어와 청의 옆얼굴에 스몄다. 혈색 없는 갸름한 뺨을, 먹물처럼 새카만 머리칼을 하얗게 비추었다.

화창한 아침이었다. 따로 등을 밝힐 필요가 없을 만큼. 침상 옆에서 발갛게 타오르는 불꽃이 오히려 이질적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황제에게 한 손목을 잡힌 채, 청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시든 꽃 같은 시선이 여전히 황제에게서 비껴가 있었다.

* * *

급하게 불려 온 수의가 청을 면밀히 진료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서 머리를 세게 부딪친 탓에 눈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청의 눈은 이미 한 차례 망가진 상태였다. 황후 시해 사건 때 옥에 갇혀 혹독한 고문을 받은 탓이다. 그 이후 시력이 떨어지고 종종 초점이 맞지 않아 말썽을 부렸다. 그러던 차에 또다시 큰 충격을 받으니 탈이 날 수밖에 없었다.

“머리에 충격을 받은 후에 눈이 보이지 않거나 메스꺼움을 느끼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니지만 드물지도 않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일시적인 증상에 불과합니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길어도 며칠, 빠르면 몇 시간 만에 호전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마께서는 몸이 너무 약해져 계신지라.”

황제가 다음 말을 재촉하듯 팔걸이를 느릿하게 툭툭 두드렸다. 수의는 마른침을 삼켰다. 황제에게서 불벼락이 떨어질까 무서웠다.

“송구하오나 저도……. 완치를 장담하지 못하겠사옵니다.”

“…….”

“소신이 무능한 탓이옵니다. 죽여 주시옵소서.”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러나 황제는 뜻밖에 태연했다.

“그가 눈이 멀게 되면……. 아쉽게 되겠군. 잔뜩 겁을 집어먹어선 발발 떨며 나를 쳐다보는 모습이 제법 귀여웠거늘.”

그는 눈을 내리깔고 작게 웃었다. 서늘한 눈매가 사르르 풀렸다. 지나치게 아름다워 살아 있는 인간 같지 않던 외모에 화사한 생기가 깃들었다.

“뭐 어떤가. 예락은 장님이 되어도 어여쁠 터인데.”

사실 이대로 청의 시력이 돌아오지 않더라도 큰 상관은 없었다. 오히려 청이 영원히 다른 이들을 눈에 담지 못하게 된다 생각하니 제법 구미가 당겼다. 거동이 불편하여 쉽사리 도망가지도 못할 테고.

황제 자신의 존재는 시각이 아니더라도 다른 방법으로 새겨 주면 될 일이었다. 온몸을 잔뜩 핥고 빨아 주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자신의 여향을 흠뻑 묻혀 놓고, 속에서 비린내가 올라올 때까지 위아래로 정액을 먹여 주면……. 청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오로지 그만을 생각하게 되리라.

“일단은 그의 치료에 전념하라. 금은보화에도 권력에도 관심이 없고, 그저 창밖 풍경이나 구경하는 재미로 사는 이인데 그것마저 못 하게 되면 어찌하나. 또 곡기를 끊고 투정을 부리며 엉엉 울어 버릴 테지.”

“목숨을 바쳐 명 받들겠사옵니다.”

“후궁들의 시체는 아직 황성 앞에 걸려 있나?”

“그런 줄로 아옵니다.”

“끌어 내려 눈알을 파내고 다시 걸어 놓아라. 삼족의 목을 자르고 구족의 눈을 멀게 하라.”

황제가 뒤늦게 생각난 듯 툭 덧붙였다. 대수롭지 않은 어조와 달리 그 내용은 섬뜩했다. 수의를 비롯한 신하들이 말없이 머리를 조아렸다.

청은 원래도 바깥출입을 거의 하지 않았으나 방을 나서는 일이 더욱 드물어졌다. 그는 온종일 침상에 누워 시간을 보냈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저 사방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오래도록 잠을 잘 뿐이었다.

황제가 능려궁에 들르는 횟수 또한 잦아졌다. 청을 보살피기 위해서였다. 황제는 귀찮아하지도 않고 그의 수발을 들었다. 용포 소매를 걷어붙이고 손수 청을 씻겼으며, 직접 고른 옷을 입히고 품에 앉혀 머리카락을 빗겨 주었다.

제국의 유일한 주인 되는 몸으로 자질구레한 허드렛일을 하다니, 다른 이들이 보았다면 기함할 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앞이 보이지 않게 되고 나서 청은 다른 이의 접촉에 과민 반응을 보였다. 누군가 멀리서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소스라치게 놀랐고, 시중을 들다 실수로 몸을 건드리기라도 하면 발작을 일으켰다.

짐작 가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눈을 가리고 입에 재갈이 채워지고, 손발을 꽁꽁 묶여 버려진 창고로 끌려갔던 일. 그때의 일이 청에게는 끔찍한 역린이 되었다. 아직까지도 종종 악몽을 꿀 만큼.

그는 오로지 황제가 곁에 있을 때만 안정을 찾았다. 황제는 그가 눈이 보이지 않아도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상대였다. 황제가 가진 양인 특유의 여향. 낯설고 두려운 암흑 속에서 오직 그 향만이 익숙했다.

“자아……. 착하지.”

입가에 도자기로 만든 숟가락이 닿았다. 딱 좋은 온도로 데운 죽이 흘러들어 왔다. 입 안에 들어온 것을 반사적으로 삼키고, 청은 난처해하는 기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부디 고정하시옵소서. 제가 혼자서 먹겠습니다.”

“내 그대가 혼자서는 식사도 못 하는 걸 빤히 아는데 어찌 그러나. 허공에 숟가락질을 하다 죽을 모조리 쏟아 버릴 테지.”

“하오나 폐하.”

“또 그놈의 고집이군. 그럼 어디 한번 볼까. 그대가 혼자서 얼마나 잘 먹는지.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고개를 처박아 침상에 묻은 것을 죄다 핥아 먹게 할 거야.”

“…….”

청의 표정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탁하게 흐려진 눈이 갈 곳을 잃고 흔들렸다. 다시 죽이 담긴 숟가락이 다가왔다.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벌렸다. 한 모금을 더 삼키자 크고 따뜻한 손이 잘했다는 듯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오늘은 뭘 했지?”

황제가 찾아올 때마다 매번 일과처럼 주어지는 질문이었다. 청은 그가 죽을 먹여 주는 대로 받아먹으며 느리게 기억을 더듬었다.

“일어나서도 어지럼증이 심해 계속 누워 있었습니다. 한두 시진 정도……. 아침은 먹지 못했습니다. 그, 저, 일부러 끼니를 거르려 한 것이 아니오라…….”

“응.”

“……잘못했습니다.”

“그대를 탓하는 것이 아니야. 그대가 잠이 많은 게 하루 이틀 일이던가. 아무쪼록 잘 자고 잘 쉬어서 어여쁘게 가꿔야지. 그게 그대의 유일한 쓸모인데.”

“…….”

“그리고?”

“그리고……. 궁인들이 단풍잎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단풍잎?”

“제가 바깥 풍경을 보지 못하니, 이렇게라도 가을 정취를 느끼라고…….”

황제는 침상 옆을 흘긋 보았다. 탁자 위에 빨갛고 노란 나뭇잎이 몇 개 놓여 있었다.

“그래? 단풍잎으로는 무엇을 하고 놀았지?”

“그저 손끝으로 몇 번 만져 보다 말았습니다.”

황제는 입가에 번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침상에 기대어 앉은 청이 초점이 없는 눈으로 멍하게 단풍잎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것을 떠올리니 절로 웃음이 났다. 참으로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어찌 이리 깜찍한 짓만 골라 할까 싶었다. 쭉 이렇게 귀엽게 굴어 줄 거면 진작 눈을 멀게 할걸 싶기도 했다.

“단풍을 가지고 놀고 싶었으면 내게 말하지 그랬어. 그대 침상 주변을 단풍잎으로 가득 메우라 할까? 아예 방 안에 단풍나무를 옮겨 심어 줄까?”

황제는 다정다감한 어조로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청은 바짝 긴장하여 말을 더듬으면서도 꼬박꼬박 대답했다. 도주를 포기한 사냥감에게 포식자는 한없이 너그러워졌다.

나지막한 두 남자의 목소리가 방 안을 조곤조곤 메웠다. 그릇에 가득 차 있던 따뜻한 죽이 조금씩 줄어 갔다. 기괴하게 뒤틀려 있었으나 동시에 평온한 광경이었다.

* * *

〈꺄아, 꺄!〉

까마득한 의식 저편에서 말 못 하는 어린아이가 탄성을 지르며 즐거워하는 것이 들렸다. 청은 곧바로 잠에서 깨어 눈을 떴다. 시야는 여전히 암흑이었다. 눈을 떴는지 아닌지도 확실치 않았다.

〈남월(藍月)……. 황녀 전하?〉

잠이 덜 깨어 몽롱한 정신으로도 본능적으로 상대를 찾았다. 아이는 청의 부름에 대답하듯 천진난만하게 종알거렸다.

〈아부, 브, 아!〉

황녀는 요즘 부쩍 옹알이가 늘었다. 태어난 지 반년 남짓한 어린아이가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은지, 쉴 새 없이 입술을 오물거려 소리를 만들어 냈다.

〈전하, 어찌하여 예까지. 거기 누구 없느냐.〉

당황한 청이 보이지 않는 눈으로 두리번거렸다. 아직 걷지 못하는 황녀가 이곳까지 찾아오려면 필시 누군가 동행했을 터였다. 하지만 허락도 받지 않고 침전까지 아이를 데리고 들어오다니? 뭔가 이상했다.

황실의 어른이며 나라의 안주인인 황후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청은 황자에게 매번 말을 높였다. 심지어는 제 배로 낳은 황녀에게까지도. 스스로를 황후가 될 자격이 없다 생각해서였다. 전 황후를 죽이려 하였고 황제에게 누를 끼친 죄인 주제에 황후라니. 당치도 않았다. 여태껏 꾸역꾸역 살아남아 황제의 옆자리를 꿰차고 있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아무도 없느냐! 어서 전하를 모셔 가라.〉

캄캄한 시야 너머에서는 여전히 정적만이 흘렀다. 정말로 아무도 없는 것일까. 왜 아직 첫돌도 지나지 않은 황녀 혼자서 여기에 있는 것일까.

덜컥 무서워졌다. 어린아이는 너무도 무방비하고 약했다. 몇 초만 한눈을 팔아도 크게 다치기 십상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지금 방 안에 있는 유일한 보호자인 그는 앞이 보이지 않아 황녀를 보살필 수 없었다.

〈전하? 어디에 계십니까! 누구든 어서 전하를!〉

〈흐앙…….〉

멀리서 희미하게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황녀가 어둠 속에서 홀로 울고 있었다. 청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이 이렇게 고통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다오. 거기 있거라. 내가 곧장 갈 테니까. 월아, 제발.〉

그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으면서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어설픈 몸짓으로 허우적대며 침상을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성급하게 내디딘 맨발은 바닥이 아닌 허공을 밟았다.

“헉!”

몸이 확 기울었다.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침상 아래에 고꾸라졌다. 뼈가 부러져 붕대를 감아 놓은 발목에서 날카로운 아픔이 번졌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크, 흑.”

아기가 엉엉 우는 소리가 아득히 멀어져 갔다. 그와 동시에 통증이 점차 심해졌다. 청은 말을 듣지 않는 사지를 들썩이며 몸을 일으키려 애썼다.

“허억! 아……. 으윽.”

“이런.”

괴롭게 바닥을 뒹구는 그를 누군가 가뿐히 안아 올렸다. 넓고 단단한 남자의 품이 청을 감쌌다. 순간 놀랐으나 곧 익숙한 향이 흘러들어 왔다. 청은 저도 모르게 조금 안심했다. 크고 따뜻한 손이 땀에 젖어 축축해진 청의 등을 토닥였다.

“평소엔 잠버릇이 그리 얌전하던 이가 어쩐 일로 바닥에 떨어져 앓고 있어. 악몽이라도 꾼 게야?”

“무련 공자님…….”

“응, 청아.”

나긋한 대답이 돌아왔다. 뒤늦게 눈물이 터졌다. 청은 울음기로 입매를 일그러뜨리며 자신을 안은 이의 품에 매달렸다. 서러움, 안도, 공포, 초조함. 모든 것이 뒤섞여 눈가를 타고 흘렀다.

“아이가……. 남월이, 왔었습니다. 울고 있었습니다.”

“황녀가?”

“빨리 가서 돌봐 줘야 하는데, 다치지 않게 지켜 줘야 하는데. 흐으, 흑, 보이지가 않아서,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그는 황제의 옷깃을 움켜쥐고 필사적으로 횡설수설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하도 서럽게 우느라 그 말조차 도중에 뚝뚝 끊겼다. 눈물이 줄줄 새어 나와 뺨과 턱을 적셨다. 황제는 자신의 품 안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꺽꺽대며 우는 청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황녀는 청의 침전에 온 적이 없다. 지금도 적막한 침전에는 황제와 청, 단둘뿐이었다. 지금쯤 황녀는 제 궁에서 유모가 먹여 주는 이유식을 먹고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을 터였다.

악몽을 꾸고 엉엉 울면서 매달려 오는 걸 보니 황녀가 어지간히도 걱정되었던 듯했다. 최근엔 부상 때문에 줄곧 아이를 보지 못했으니 그리울 법도 했다.

아이를 낳은 후 몇 번 보지도 못했으면서, 제대로 안아 본 적도 없고 젖을 물려 본 적도 없으면서, 이름을 부르는 것도 이성을 잃었을 때뿐이고 아이의 앞에서는 꼬박꼬박 황녀 전하라 부르며 말을 높이면서. 그래도 제 핏줄이라고, 청은 아이를 몹시 아꼈다.

황녀를 찾으며 애처롭게 우는 청을 보아도 측은지심이 생기기는커녕 흉악한 살심만이 뭉클뭉클 솟았다. 이래서 아이를 죽이지 않을 자신이 없다 했던 것이다.

“이제 괜찮아. 아무 일 없어. 착하지? 뚝.”

“하지만…….”

“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 황녀를 데려오라 하지. 그대 손으로 직접 만져 보고 목소리도 들어 봐. 황녀의 안위를 확인하고 나면, 그러면 눈물을 그칠 텐가?”

“…….”

그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황제의 가슴팍에 묻고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흠뻑 젖은 청의 귀밑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생긋 웃었다. 꽃 같은 미소에 어울리지 않는 스산함이 물씬 배어났다.

황녀는 장차 청을 아주 쏙 빼닮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계속 살려 둘 마음이 들 테니.

* * *

황제의 명을 받은 궁인들이 황녀를 데려오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황녀를 비단 강보에 감싸 품에 안은 유모가 조심스레 침전에 발을 들였다. 강보 속의 아기는 색색 잘도 자고 있었다. 가마를 타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용케 깨지 않았다.

황녀는 청의 검은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성정마저도 청을 닮아 순하고 차분했다. 얼핏 보기엔 청 혼자 낳은 아이처럼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황녀에게도 분명히 황제를 닮은 부분이 있었다. 어린아이답지 않게 또렷하여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 이목구비가 그러했고, 대리석처럼 흰 살결이 그러했다. 또한 등에 새겨진 붉은 반점이 황녀에게 흐르는 피의 정당성을 증명했다.

등과 어깻죽지 부근에 걸쳐 나타나는 붉은 반점은 선황에서 다음 황제로, 그리고 그다음 대 황제로 이어지는 군주들만의 비밀이었다. 친자가 아닌 아이를 내세워 황제를 능멸하는 삿된 수작에 넘어가지 않도록.

그러나 황제는 황자에게 붉은 반점이 없음을 알면서도 살려 두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재미있어서였다.

뭇사람들은 황가의 피라고는 한 방울도 흐르지 않는 데다 그렇게도 혐오하던 이민족의 피가 섞인 아이를 다음 대 황제랍시고 떠받들었다. 자신과 청을 제외한 온 천하가 어설픈 광대놀음에 놀아났다. 허상을 숭배하고 거짓을 찬양했다. 그것이 몹시도 우스웠다.

“그에게 황녀를 넘겨주도록.”

황제가 짤막하게 명했다. 유모는 깊게 고개를 숙이고 청에게 다가갔다.

“마마, 안아 보시겠사옵니까?”

청이 손을 뻗어 허공을 살며시 더듬었다. 멀거니 앞을 바라보는 눈의 초점이 맞지 않았다. 함부로 팔을 휘저었다 아이를 잘못 건드릴까, 손길이 몹시도 조심스러웠다.

유모는 청이 내민 손에 강보를 살짝 올려 주었다. 작고 따끈따끈하고 폭신한 것이 품에 안겨 들었다. 청은 손을 떨며 어정쩡한 자세로 아이를 안았다.

“폐하, 역시 안 될 것 같습니다. 전하께서 불편하시지 않겠습니까. 제가 서툴러서…….”

청이 난색을 표했다. 황녀가 걱정되어 섧게 울며 애원할 땐 언제고, 막상 아이를 마주하니 두려워진 듯했다. 눈치 빠른 유모가 잽싸게 나섰다.

“괜찮습니다. 마마께서 긴장하시면 황녀 전하께서도 편히 쉬지 못하십니다. 힘을 푸시고 조금만 더 편안하게 안아 주시옵소서.”

“히잉.”

청의 품에 안긴 황녀가 문득 조그맣게 칭얼거렸다. 깬 것은 아니고, 그저 잠꼬대처럼 옹알이를 한 듯했다. 그 작은 소리에도 청은 깜짝 놀라 뻣뻣이 굳었다.

“소리를……. 내셨다.”

“잠투정을 부리시는 것이옵니다. 생생한 꿈이라도 꾸고 계시나 봅니다. 아기들은 잠결에 종종 그리한답니다. 걱정하실 것 없사옵니다.”

청은 황녀를 안고도 한참이나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먼 옛날에는 귀족 도련님으로서 붓과 악기를 다루었고, 그 후에는 황제의 검이 되어 전장을 누비던 몸이었다. 아기를 안고 어르는 법을 알 리가 없었다. 조금만 힘을 주어도 황녀가 다칠 것 같아 무서웠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황제가 불쑥 팔을 뻗었다. 커다란 과일이라도 들듯 한 손으로 강보를 무심하게 받쳐 들었다. 바짝 긴장한 청의 품 안에 있던 아이가 순식간에 허공에 확 떠올랐다.

“예락, 언제까지 그렇게 얼어만 있을 셈이야.”

“폐, 폐하!”

“황녀를 직접 만져 보고 싶다 하지 않았나. 제대로 확인해야지. 아이가 무사히 잘 있는지.”

황제는 한 손으로 아이를 든 채 다른 손으로 청의 팔목을 잡아 대뜸 아이에게 가져갔다. 당황한 청이 손을 잡아 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안 됩니다, 폐하, 제발…… 헉!”

절박하게 도리질하던 청이 흠칫했다. 손끝에 보드라운 살결이 닿았다. 황녀는 꼭 말아 쥐고 있던 손을 꼬물거려 청의 손가락을 붙잡았다. 굳은살과 흉터로 얼룩진 사내의 손이 자그마한 아기 손에 잡혔다. 조금만 힘을 주어도 곧장 떨어져 나갈, 너무도 연약한 손길이었다. 하지만 청은 주술에라도 걸린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

고개를 숙이고 이를 악물었다. 빛을 잃은 눈동자가 이불 위를 내려다보는 가운데 눈시울이 점차 붉어졌다. 손가락 하나를 잡힌 채 혹여나 아이의 잠을 깨울까 봐 한참을 미동도 하지 않았다.

황제는 그 광경을 시종일관 아무 감흥 없이 지켜보았다. 청이 감당할 수 없는 큰 선물을 받은 사람처럼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제법 귀엽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묵묵히 손짓했다. 새근새근 잠든 황녀는 곧 유모의 품으로 돌아갔다. 보드랍고 작은 온기가 갑작스레 멀어지자 청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앗……!”

“이제 되었지?”

사방이 캄캄한 가운데 황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와 다름없이 나긋한 어조였지만 묘하게 날이 서 있었다.

“폐하?”

“아이의 안위를 확인하였지 않나.”

“아…….”

“예락 그대는 참으로 손이 많이 간다니까. 악몽을 꿨다고 안아 달라 보채기에 성심껏 어르고 달래 줬더니, 이젠 황녀가 보고 싶다며 엉엉 울어 버리고. 저 갓난쟁이보다도 더한 응석받이야.”

“…….”

“한 나라의 황후 되는 자가 어찌 이리 투정이 심해. 응? 지금도 나 없이는 밥 한술 뜨지 못하고, 한 발짝도 걷지 못하는데. 나중에는 숨 쉬는 것까지 일일이 살펴 주어야겠어.”

청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황녀에게 잡혀 있던 손이 허공에 어중간하게 뜬 채였다. 황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그래도 어찌할 도리가 없어. 그대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다 들어주어야지. 내 예락이 이렇게 어여쁘게 구는데.”

그는 청의 어깨를 가볍게 짚고 뺨에 입을 맞추었다. 핏기 없는 살갗에 부드러운 입술이 살며시 닿았다.

회임 기간 내내 오늘내일하던 것을, 아이를 낳은 후 잘 먹이고 잘 재워서 간신히 살을 조금 붙여 놨다. 그런데 이번에 누각에서 떨어져 크게 다치면서 도로 다 죽어 가는 병자 꼴이 되었다. 청은 깊은 호수 밑바닥에 빠져 그대로 얼어붙어 버린 꽃송이 같았다.

하지만 허옇게 떠서 골골 앓는 모습조차 예뻤다. 말을 더듬는 것도, 식은땀에 절어 신음하는 것도, 멍하니 넋을 놓고 허공만 쳐다보는 것도 고왔다. 이리 어여쁜 것을 다른 놈들이 보게 할 수 없어 내내 가둬 놓을 정도로.

“나를 봐.”

귓가에 달콤한 속삭임을 흘렸다. 어깨를 짚은 손을 통해 청이 흠칫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껏 입을 맞춘 적도, 알몸으로 사타구니를 맞대고 몸 안을 들쑤셔 댄 적도 셀 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청은 매번 수치스러워했고 매번 어려워했다. 큰 곤욕이라도 당하는 사람처럼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깨물며 견뎠다. 그럴수록 더욱 처참하게 짓이겨 버리고 싶어진다는 걸 왜 모를까.

그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참을 수 없어졌다. 턱을 감싸 쥐고 입술을 겹쳤다. 다른 손으로는 곧은 목덜미를 가만히 더듬어 내려가 옷깃 안쪽에 가려진 살을 어루만졌다. 그러나 입맞춤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입술과 혀를 몇 번 빨아 주지도 않았는데, 청이 평정을 잃고 두리번거렸다.

“황녀 전하는…….”

“내게 집중해야지.”

“전하께서 아직 계십니까?”

“글쎄, 그것이 그리 중요한가?”

방 안에 황제 외에 다른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유모와 황녀가 나가는 것 또한 듣지 못했다. 혹여나 아이가 아직 이곳에 있다면, 이 광경을 보아 버린다면…….

황제가 딴생각하지 말라는 듯 귓바퀴를 가볍게 깨물었다. 턱과 귓가에 입술을 문지르며 침의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큼직한 손이 쇄골을 쓸다가 더 깊이 들어와 유두를 툭 건드렸다.

“흐읏……!”

저도 모르게 신음이 터졌다. 지독한 자기혐오가 일었다. 자신이 낳은 아이의 앞에서 젖꼭지를 만져지며 신음하는 꼴이라니. 황녀는, 그리고 유모는 이 광경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부탁드립니다. 지금은, 여기서는 안 됩니다.”

“아예 남휘까지 불러오라 할까?”

“무, 무슨.”

“황자와 황녀를 나란히 앉혀 놓고, 그대 옷을 죄다 벗기고 무릎 꿇려 뒷구멍을 잔뜩 쑤셔 줄까. 어린것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정액 범벅이 될 때까지 박히고 싶어 그러는 건가? 황실의 웃어른으로서 참으로 훌륭한 본보기가 되겠군.”

“황녀 전하께서 듣습니다. 제발…….”

허옇게 질린 낯빛으로 비는 걸 보니 심사가 한층 더 뒤틀렸다. 황제는 그의 애원을 완전히 무시하고 마른 어깨를 쥐어 쓰러뜨렸다. 청의 몸이 맥없이 넘어갔다. 포근한 비단 이불이 그의 몸을 받쳤다. 다친 머리가 쿡쿡 쑤시듯 아팠다.

황제는 가늘게 입맛을 다시고 청의 위에 올라탔다. 긴 흑발을 마구잡이로 흐트러뜨린 채 무력하게 신음하는 이의 목덜미를 베어 물었다. 먹잇감을 씹어 삼키는 맹수 같았다.

“차라리……. 적어도, 안 보이는 곳에.”

청이 황제의 몸에 차마 손끝 하나 대지 못한 채 메마른 음성으로 읊조렸다. 체념하여 텅 비어 버린 시선이 황제의 어깨 너머 허공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이가 볼 수 있는 곳에는……. 부디 남기지 말아 주십시오.”

“뭐?”

연한 살갗을 집요하게 괴롭히던 움직임이 뚝 멎었다. 황제가 피식 웃었다.

“물고 빨고 좆질을 하더라도 아이가 못 보게 해 달라?”

청에게는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더욱 무서웠다.

“내 아래에 깔려 좆을 받는 건 괜찮고, 붙어먹은 흔적을 들키는 건 싫고?”

황제가 입술 바로 위에서 조곤조곤 속삭였다. 그의 너른 등 아래 청의 몸이 모두 가려졌다. 드러난 곳이라고는 이불 위에 힘없이 늘어진 팔다리뿐이었다.

“머리를 크게 다쳐 그런가. 그대의 본분이 무엇인지 깜빡 잊었나 본데.”

그는 짧게 한숨을 쉬고 손등으로 청의 뺨을 툭 쳤다. 말 안 듣는 집짐승을 다루듯. 힘이 들어가 있지 않은 손길이었으나 결코 상냥하지도 않았다. 청이 반사적으로 움츠러들었다. 한순간 뺨을 얻어맞는 줄 알았다.

“얌전히 침상에 누워 날 기다리고 있다가, 내가 오면 고분고분 안기는 것. 벌리라면 벌리고 빨라면 빠는 것. 그게 오로지 그대가 할 일이야. 그대의 유일한 쓸모고. 다 죽어 가는 병아리처럼 비실대는 게 안쓰러워 요새 좀 오냐오냐해 줬더니, 그새 또 기어오르지? 어디서 비싼 척 앙탈을 부려, 부리긴.”

툭, 툭. 황제의 손등이 뺨을 연달아 두드렸다.

“그대 품에 제국을 안기고, 그대 머리에 황금 관을 씌우고, 그대 손에 나를 쥐여 주었지 않나. 고금을 통틀어 그 어떤 창부도 그대만큼 높은 화대를 받진 않았을 테지. 값을 받아먹었으면 마땅히 할 일을 해.”

황제의 말을 듣는 내내 청은 입술을 가늘게 떨었다. 침상 위에 쓰러진 마른 몸이 파득파득 경련했다. 초췌한 눈초리를 타고 눈물이 흘렀다.

황제의 앞에서 그는 항상 비천하고 구차해졌다. 황제는 매번 그가 가장 추한 모습으로 바닥을 기며 애원할 때까지 몰아붙이고 나서야 만족했다. 그것을 반복하며 자존심이고 뭐고 이미 다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직은 그에게도 감정이라 할 만한 것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가슴 한복판이 날붙이로 후벼 파인 것처럼 아팠다.

“뭘 잘했다고 울어.”

황제가 무표정으로 중얼거리며 손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그 손이 청을 내려치는 일은 없었다. 문득 수의가 간곡히 올린 말이 생각난 탓이었다.

청은 이미 너무 많이 망가졌다 했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성한 곳이 없다고. 백방으로 극진히 치료해도 모자랄 판에 이 이상으로 망가뜨리는 건 절대 안 된다고.

폭력에 저항할 줄도 모르고 무방비하게 떠는 청은 사랑스러웠다. 너무 어여쁘고 귀여워서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설렜다. 그 모습을 못 보는 건 아쉽지만, 그보다 청이 완전히 망가져 버리는 게 더 아쉬웠다.

“그렇지. 황자와 누각에 나들이를 갔던 것 말인데. 내가 언제 그대에게 외출을 허락했지?”

벌을 주는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그는 청의 앞에서만은 항상 한없이 너그러워졌다.

“애초에 내게 미리 고했다면 그런 사고를 당하는 일도 없었을 테지. 예락 그대는 어찌 생각하는가?”

청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사죄를, 혹은 변명을 해야 했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대는 항상 내게만 박하단 말이야. 나와는 바깥 산책 한 번 해 주지 않더니, 황자의 부탁은 그리 쉽게 들어주고. 이젠 아예 말도 없이 쏙 빠져나가서는 누각에서 황자를 감싸고 떨어져? 주제 파악을 해야지. 누가 주인인지도 분간 못 하고 아무에게나 꼬리를 흔드는 개새끼도 아니고.”

“제가, 저, 저는…….”

“황자를 지키고 대신 죽기라도 할 셈이었나? 내게 목숨을 바치겠다 맹세했으면서. 죽어도 내 곁에서 나와 같이 죽어 주겠다 약조했으면서. 그것마저 앙큼하게 둘러댄 거짓말이었나 보군. 그대는 무엇 하나 내게 오롯이 주는 것이 없어.”

“아닙니다. 저는, 결코 그런 게.”

황제와의 나들이는 황녀를 낳기 전에 했던 뱃놀이가 마지막이었다. 그 후 청은 줄곧 병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자의가 아니었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황제는 청을 힐난하듯 잔혹한 말을 쏟아 냈다.

“황녀의 면전이라 안 된다고 했지. 그럼 황녀가 없는 곳이면 되겠나?”

“…….”

“단풍 구경이 그리 하고 싶었어? 거동도 제대로 못 하는 몸으로 좋다고 쫄래쫄래 기어 나갈 만큼? 그래. 그럼 그 나들이, 지금 가지.”

황제는 잠깐 고민했다. 청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목적지까지 질질 끌고 갈까. 청에게서 다시는 허락 없이 나가지 않겠단 말이 절로 나오도록. 철저하게 공포와 수치를 각인시켜 방 밖으로 나서는 것 자체를 꺼리도록.

하지만 머리가 아프다며 품에 안겨 서럽게 울던 청의 모습이 떠올랐다. 머리에 큰 충격을 받은 상태이니 절대로 무리시키지 말라던 수의의 간언도.

그는 청을 번쩍 안아 올렸다. 갑자기 몸이 붕 뜨는 느낌에 깜짝 놀란 청이 본능적으로 황제에게 매달렸다.

“헉, 흐읏……. 폐하!”

“청아, 단풍 보러 가야지? 아니면, 아이의 손을 잘라 단풍잎 대신 구경할까.”

청이 새파랗게 질린 낯으로 입을 벙긋거렸다. 황제는 침전을 흘긋 돌아보았다. 널찍한 방 안은 텅 비어 있었다. 황녀와 유모는 이미 한참 전에 조용히 물러가고 없었다.

쾅! 필요 이상으로 거칠게 문이 열렸다. 그 소리가 황제의 심기가 몹시 불편함을 대변했다. 그는 굳은 낯으로 청을 안고 성큼성큼 복도를 가로질렀다. 시선은 줄곧 정면을 향한 채였다. 자신의 옷자락을 꼭 쥔 채 애원하는 청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것처럼.

* * *

청은 황제의 팔에 안겨 짐짝처럼 옮겨졌다. 캄캄한 시야가 덜컹덜컹 흔들렸다. 어느 순간 서늘한 바깥 공기가 느껴졌다. 황제는 기어이 청을 침전 밖으로 데리고 나온 것이다. 맨발에 홑옷 한 벌만 걸치고 머리를 풀어 헤친 차림의 그를.

예까지 오는 동안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꼴을 보았을까. 너저분한 행색으로 들려 나가는 자신의 모습이 황제의 위신을 대체 얼마나 깎아 먹었을까. 참담했다. 자신이 황제의 약점이자 오점에 불과함을 깨달을 때마다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 아팠다.

“내려 주십시오. 폐하, 제발.”

청이 훌쩍이며 애원했다. 황제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내려 달라고?”

“제가……. 제가 걷겠습니다.”

“머리가 아파 죽을 지경이라 하더니, 이젠 그대 발목이 부러진 것조차 잊어버렸나? 혼자서는 일어설 수도 없으면서 왜 그리 떼를 써. 지금 내려 줘 봤자 나자빠져 바닥을 뒹구는 것밖엔 못 할 텐데.”

“…….”

“아니, 그래도 들어줘야지. 내 하나뿐인 반려가 하는 부탁인데. 어련히 뜻대로 하게 해 줘야지.”

황제는 선심 쓰듯 청을 내려놓았다. 엉덩이에 단단한 나무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러나 등을 받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붕대가 칭칭 감긴 맨발이 공중에 달랑달랑 떴다.

가을바람이 머리칼을 헤집었다. 그제야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황제는 그를 난간에 앉혀 놓았다. 그것도 야외에 있는 난간이었다. 궁의 뜰에 딸려 있는 정자일까, 다른 곳에 있는 누각일까.

청은 더듬더듬 난간을 붙잡았다. 몸이 뒤로 기울어 휙 떨어질까 조바심이 났다. 난간 너머에 물이 있을지 수풀이 있을지 바위가 있을지 알 수 없으니 더욱 두려웠다.

“여기는…….”

“청아, 미안해.”

사과의 말이 갑작스레 귓가에 떨어졌다. 청은 그 자세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내가 못된 말을 하여 마음이 많이 상했지?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폐하?”

“네가 내게 너무도 매몰차게 굴어 나도 모르게 그만 화가 났어. 요 앞뜰에 산보를 가는 것조차 꺼려 하던 사람이 황자와의 나들이에는 선뜻 따라나서니. 그것이 몹시 서운했어. 나는 네 웃음 한 번, 달콤한 말 한 번이 절실하여 이리도 목을 매는데.”

“사과하지 마시옵소서. 잘못했다는 말, 함부로 하시는 것 아닙니다.”

황제가 청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댔다. 서로의 코끝이 톡 닿았다.

“알잖아, 청아. 나는 성정이 근본부터 도무지 돼먹지를 못해서……. 어찌해야 내 청이가 다정한 모습을 보여 줄지 모르겠어.”

청이 헉하고 숨을 삼켰다. 농담이라기엔 도를 넘은 말이었다. 황제는 그런 청을 바로 코앞에서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처연하게 속살거리는 목소리와 달리 얼굴은 기괴할 정도로 무표정했다.

“내가 네게 바라는 건 대단한 것이 아니야. 그저 네가 고분고분 말을 잘 듣고, 내가 허락하지 않은 것은 절대 하지 않고, 얌전히 내 품에 안겨서 내가 주는 걸 받는 것뿐인데. 그것조차 너무 과분한 바람이었던 모양이야.”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모두 제가 모자란 탓입니다.”

“그래? 그럼 앞으로는 내 말, 잘 들을 테지?”

황제가 돌연 어조를 바꾸어 사근사근하게 물었다. 하지만 청의 낯빛은 이전보다 더욱 창백해졌다. 그의 아래턱이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로 떨렸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내 허락 없이 밖을 나서지 않을 거지? 다른 이에게 멋대로 마음을 주지도 않을 거고? 황자든 황녀든, 이 세상의 그 누구든. 만에 하나 그리했다가는, 나는 또 네게 못내 서운해져 버리겠지…….”

“예.”

청은 그의 말을 깊이 생각해 보기도 전에 허겁지겁 대답했다. 황제의 언사는 전에 없이 상냥했다. 하지만 고압적으로 굴 때보다 더욱 무서웠다. 등줄기 아래에서부터 섬뜩한 전율이 타고 올랐다.

“이런, 이리도 겁을 먹어선. 그렇지 않아도 흰 얼굴이 더욱 희게 질렸구나, 가엾게도.”

황제는 가볍게 웃었다. 온몸에 뻣뻣하게 힘을 주고 필사적으로 난간을 부여잡고 있는 청을 끌어당겨 안았다. 그가 마음을 바꾸어 청을 조금만 밀쳐 내도 청은 곧바로 뭐가 있을지 모르는 허공으로 내동댕이쳐질 터였다. 청은 허공을 어설프게 더듬어 황제의 옷소매를 그러쥐었다.

“부디 용서를, 제발……. 무섭, 습니다.”

“내가 무서워?”

돌아온 것은 나지막한 물음이었다. 그것이 아니라 변명하려는데, 황제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 무섭겠지. 겁이 나고 소름이 끼치겠지. 알아. 아는데……. 청아, 그래도 나는 이런 방법밖에는 알지 못해.”

“무련 공자님.”

청이 울 것 같은 얼굴로 황제를 올려보았다. 눈의 초점이 상대의 눈을 정확히 마주 보지 못하고 엇나갔다.

황제는 청의 이런 모습에 약했다. 애처로운 목소리로 무련 공자님, 하고 부르며 애원할 때면 더욱. 그는 원래도 청에 한해서만은 몹시 무르고 살가웠지만, 이럴 때면 정말로 무엇이든 내주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는 꽃이 피듯 활짝 웃었다. 이쯤 해서 멋대로 황자와 밖에 나간 것을 용서해 줄까 싶었다. 청이 이렇게 귀엽게 아양을 떠는데 그깟 잘못이 대수겠는가. 발목뼈를 다시 부러뜨리고 일부러 잘못 붙여 영영 걷지 못하게 할 심산이었으나 그러지 않기로 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위에 몇 번 입을 맞추었다. 그러다 고개를 가볍게 틀어 아랫입술을 머금었다. 퍼석퍼석 메마른 입술을 헤집고 들어갔다. 입천장을 적시고 혀를 질척하게 섞었다.

“흐읏.”

입을 맞추는 내내 둘 다 눈을 감지 않았다. 한 사람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허공을, 한 사람은 상대방의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주시했다. 어느 순간 바람에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청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물렸다.

“폐하, 누가 보기라도 하면.”

“좀 보면 어떤가. 황제와 황후의 금실이 좋으니 그들에게도 기쁜 일일 테지.”

“하오나.”

청이 뭐라 더 말하려 입을 벌렸다. 황제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입술을 틀어막았다. 가냘픈 숨이 입술 너머로 꼴딱꼴딱 넘어가는 것을 느끼며 아까 만지다 만 유두를 다시 만졌다. 손끝으로 비비듯이 건드리자 얇은 옷감 위로 유두가 도드라졌다. 긴장하고 있어서인지 몇 번 만져 주지도 않았는데 곧장 바짝 섰다.

느슨하게 매인 허리끈을 풀고 침의를 끌어 내렸다. 서늘한 공기 아래 드러난 옅은 색의 유두를 쪽쪽 소리가 나도록 빨았다. 빳빳이 곤두선 것을 혀로 튕기고 문질러 잔뜩 적셔 주었다.

“아!”

질펀하고 음탕하게 붙어먹은 지가 몇 년이 되었어도 청은 여전히 서툴렀다. 사내의 손이 허리를 움켜쥐고 옷자락을 젖혀도 겁먹은 얼굴로 눈만 굴렸으며, 가랑이를 벌려 구멍을 핥아 주면 교태를 부리기는커녕 억지로 신음을 삼켰다. 황도에서 명성을 떨쳤던 풍류 공자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흐응…….”

양 유두가 뜨겁게 젖어드는 감각에 청이 몸을 뒤로 물렸다. 귀걸이가 뜯겨 나간 흔적이 있는 쪽의 젖꼭지를 빨아 주자 한층 신음이 높아졌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의 몸이 난간 너머로 휘청 넘어갈 뻔했다.

“얌전히 있어야지. 떨어질라.”

덜컥 무서워져 황제를 꽉 끌어안았다. 비단 용포를 걸친 건장한 가슴팍과 어깨가 품에 버겁게 들어찼다. 황제는 청의 등을 마주 안아 토닥이며 하던 일에 집중했다.

청은 황녀에게 한 번도 젖을 물려 본 적이 없었다. 서른 해 남짓한 세월을 평인으로 살았던 몸이라 그런지, 그는 거의 젖이 돌지 않았다. 아이를 낳고 나서도 그의 가슴은 다른 음인들처럼 부풀기는커녕 여전히 판판했다. 황제의 손과 혀에 젖꼭지를 잔뜩 자극당하면 묽은 유즙이 조금 새어 나오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설령 젖이 차고 넘치게 나오더라도 그가 아이에게 직접 젖을 물리는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황제가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앞섶이 죄다 풀려 안쪽이 훤히 드러났다. 번들번들하게 젖은 유두에 찬 공기가 스쳤다. 황제의 손이 유두와 가슴팍, 흉터가 남은 배를 지나 아래로 내려갔다.

“아…… 아읏!”

다리를 확 움츠렸다. 졸지에 허벅지로 황제의 허리를 졸라 당기는 꼴이 되었다. 황제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귀여워 견딜 수 없다는 듯.

“왜 이리 긴장했어.”

청은 말이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입술을 깨무는 귓가가 붉었다.

“응? 청아. 좀 더 편히 있지 않고.”

“누가……. 지나갈지도, 모르고. 발이 닿지 않아서.”

높다란 난간에 올라앉은 탓에 그의 발이 달랑달랑 떠 있었다. 붕대를 칭칭 감은 발목 아래로 보이는 발등에 힘이 들어가 뼈대가 도드라졌다.

이렇게 바짝 얼어 있으니 보기에 귀엽긴 한데 안쓰러웠다. 얼른 집어넣고 좋아하는 곳을 잔뜩 얼러 줘야지 싶었다. 청은 타인의 시선이니 체면이니 하는 걸 신경 쓰며 몸을 사리다가도, 막상 안을 쑤셔 주면 좋아 자지러지곤 하였으니.

검지와 중지를 청의 입술에 물렸다. 청은 제 입에 들어온 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힘겹게 손가락을 빨았다. 젖은 입술 사이로 헐떡헐떡 가쁜 숨이 새어 나왔다.

“제대로 잘 빨아야지. 그대 뒤를 풀어 줄 것들인데.”

“읍……!”

혀와 입천장을 푹푹 찌르던 긴 손가락이 쑥 빠져나갔다. 청이 작게 헛구역질을 했다. 번들번들하게 젖은 손가락이 곧장 가랑이 사이로 파고들었다.

청은 경악했다. 황제가 그를 바깥으로 끌고 나온 것은 멋대로 나간 벌을 주기 위함이라 여겼다. 사방이 훤히 트인 곳에서 그의 옷을 벗기고 몸을 주물러 수치를 주려고. 그래서 이를 악물고 견뎠다. 여기서 삽입까지 하려 들 줄은 몰랐다.

“흐, 아, 안 됩니다. 여긴 밖입니다. 제발…….”

“벌려. 안 풀고 바로 처박아서 구멍 찢어 버리기 전에.”

뻑뻑한 구멍에 손가락을 무작정 찔러 넣었다. 청이 다급하게 숨을 삼켰다. 배 속이 확 조여들어 황제의 손가락을 물었다.

“하으, 윽.”

“숱하게 좆을 받아먹고 애까지 낳았으면서, 아직도 이렇게 구멍이 좁아서 어찌하나. 구멍 넓히는 걸 조금만 소홀히 했다간 곧장 피를 보고. 정말이지 그대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손이 안 가는 곳이 없어.”

손가락 두 개가 찌걱찌걱 소리를 내며 안을 들쑤셨다. 굵고 단단한 마디가 깊이 들어와 안쪽을 쑤셨다가 내벽을 쭉 긁으며 빠져나갔다. 잔뜩 굳어 있던 안이 느리게 풀렸다.

청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보는 눈이 있는지 아닌지 확인할 길이 없으니 더욱 무서웠다. 등 뒤에서 수풀 흔들리는 소리가 날 때마다 누가 있는 게 아닌가 싶어 흠칫흠칫 놀랐다. 그는 앞섶이 죄다 열린 침의 자락을 움켜쥐고 어떻게든 몸을 가리려 애썼다.

“무얼 가려. 누구 좋으라고.”

황제가 구멍을 들쑤시던 손가락을 확 잡아 뺐다. 그리고 청의 팔목을 우악스럽게 움켜쥐어 꺾었다. 말라 뼈가 도드라진 양 손목이 황제의 한 손아귀에 잡혀 들어갔다.

“아악!”

아픔보다 무서움이 더했다. 끔찍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눈이 가려지고 양 손목이 밧줄로 묶였던 때의. 낯선 남자가 암흑 속에서 발버둥 치는 자신을 어디론가 질질 끌고 갔다. 차가운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강제로 다리를 벌렸고, 그리고…….

속이 메슥거렸다. 이미 다 나은 지 오래인 배가 다시 아파 왔다. 쾅쾅 거칠게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귓가에서 메아리쳤다. 어느덧 식은땀으로 귀밑머리가 척척하게 젖었다.

“허억, 흡.”

두려웠다. 하지만 동시에 결코 두려움을 내색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는 청이 자신의 앞에서 자신이 아닌 다른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싫어했다. 청은 입술을 피가 맺히도록 깨물고 참았다.

“왜. 싫어?”

“아니, 아, 아무것도, 아닙…….”

“싫으면 싫다 말을 해.”

황제는 곧바로 그의 이상 반응을 눈치챘다. 9왕자 일당에게 붙잡혀 끌려갔던 때의 일. 아직도 청은 그때의 악몽에 사로잡혀 있었다. 청 스스로가 몰라도 황제는 알았다. 청을 품에 안고 잠을 청할 때면 종종 밤새 끙끙대며 앓는데 어떻게 모르겠는가.

하지만 알면서도 심사가 뒤틀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도록 무서워하는 게 빤히 보이는데, 싫다거나 그만두란 소리는 죽어도 하지 않고 그저 참기만 하는 청이 서운했다. 청이 악몽에 길이길이 시달린다면, 그 꿈에 나오는 건 오로지 자신이어야만 했다. 옛날 옛적에 죽여 없애 버린 버러지 따위가 아니라.

“말을 하라니까? 입을 꾹 다물고 아니라고만 하지 말고.”

황제는 청의 팔목을 한데 모아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 스스로의 성기를 쥐었다. 안쓰러울 정도로 떨고 있는 허벅지 사이에 허리를 끼워 넣어 달아나지 못하게 하고, 입구에 대고 성기를 툭툭 쳤다. 귀두를 구멍에 꾹 눌러 끄트머리를 살짝살짝 넣었다 빼며 간을 보았다.

이대로라면 바짝 오므라든 구멍을 뚫고 남자의 성기가 삽입될 터였다. 양손이 묶이고 눈이 보이지 않는 채로. 결국 공포에 질린 청에게서 비명 같은 애원이 터졌다.

“흐악! 아…… 안 돼, 싫어, 싫습니다. 제발 놔주세요. 무서워…….”

“…….”

“흡, 흐으, 폐하. 폐하! 어디에, 흑, 어디 계십니까.”

“응……. 여기 있단다.”

섬뜩하게 굳어 있던 황제의 낯에 그제야 고운 미소가 돌아왔다. 그는 틀어쥐고 있던 팔목을 스르르 놓고 청을 껴안았다. 덜덜 떨리는 청의 손이 필사적으로 황제를 마주 안았다.

“그래. 네가 싫어하는 건 하지 않으마. 내 청이가 싫다는데 어찌하겠어.”

흠뻑 젖은 눈가에 여러 번 잘게 입을 맞추고 속삭였다. 자꾸만 움츠러드는 이를 어르고 달래 가며 성기를 삽입했다. 아래가 벌어지는 괴로움보다도 황제에게 버려진다는 무서움이 더 컸는지, 청은 황제의 품에 고개를 파묻고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 손으로 청의 허리를, 다른 손으로 엉덩이를 움켜쥐고 어렵사리 성기를 밀어 넣었다. 구멍이 찢어질 듯 빠듯하게 벌어져 거대한 귀두를 간신히 삼켰다.

청이 아, 아, 하고 짧게 신음하며 황제의 등을 할퀴듯 끌어안았다. 짧은 손톱 끝에 용포에 새겨진 황룡 자수가 투두둑 걸렸다. 두툼한 기둥이 밀고 들어올 때마다 내벽이 그에 맞추어 씰룩씰룩 형태를 바꾸었다.

황제가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안이 너무 좁았다. 향유도 쓰지 않은 데다 야외에서 불편한 자세로 치르는 정사라 청의 몸이 굳어 있었다. 내장이 뜯어지든 말든 억지로 처박으면 못 넣을 건 없다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청아, 조금만 힘을 빼 봐. 내 좆이 네 구멍에 꽉 물려서, 더 들어갈 수가 없단다.”

“아, 아……. 읏.”

“이대로 좆대가리만 머금고 안 놔주려고? 이것도 나쁘진 않다만……. 청이 너는 좆을 한껏 쑤셔 박아서 깊은 곳을 찔러 줘야 좋아하잖아. 응?”

“헉! 흑, 으응, 배가, 아파요.”

“배가 아파?”

“너무 커서, 찢어질 것 같, 아읏! 배가, 튀어나올 것 같아서.”

“그래? 도로 뺄까?”

황제가 당장이라도 청을 난간에서 내려 주려는 듯, 그를 한 번 가볍게 추슬러 안았다. 절반도 못 들어가고 간신히 귀두만 파묻혀 있던 성기가 내벽을 푹 찔렀다. 아직 아까의 공포가 가시지 않았다. 제 배 안이 마구잡이로 쑤셔지는 것도 모르고, 청은 허겁지겁 황제에게 매달렸다.

“아뇨……. 시, 싫습니다. 가지 마세요.”

“그럼 어찌하면 좋을지 말해 봐. 청이 네가 원하는 대로.”

“안아 주세요, 계속…….”

황제는 수줍은 웃음을 베어 물고 고개를 살포시 끄덕였다. 탄탄한 남자의 팔이 청을 받쳐 안았다. 폭 넓은 비단 소맷자락에 청의 나신이 언뜻 가려졌다. 허공에 어정쩡하게 떠 있던 다친 발목을 잡아 허리에 감게 했다. 접합부를 집요하게 내려다보며 조금씩 밀어 넣었다.

묵직한 성기를 받아먹느라 한계까지 늘어난 구멍에 벌겋게 피가 몰렸다. 반쯤 물려 있던 것을 조금 빼내자 기둥에 투명한 액체가 묻어났다. 허리에 힘을 주어 도로 밀어붙였다. 인내심을 가지고, 결코 성급하지 않게.

“흐응, 아, 앗…….”

귀두부터 들이밀어 빈틈없이 꽉 맞물려 있던 내벽에 어렵사리 길을 냈다. 청이 앓는 소리를 냈다. 아까보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가 더 들어갔다. 다시 느릿하게 빼냈다 박았다. 그것을 반복할수록 흉흉하게 핏줄이 돋은 기둥이 점점 깊이 젖어 들었다.

한참 애를 쓴 끝에 겨우 절반 이상을 넣을 수 있었다. 엉덩이 사이 구멍부터 배꼽 아래까지가 온통 성기로 꽉 찼다. 숨이 막혔다. 청은 작살에 꿰인 짐승처럼 아무것도 못 하고 할딱이는 숨소리만 흘렸다. 그렇게 견디는 것이 고작이었다.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아 있던 청의 몸이 격렬한 움직임을 못 이기고 앞으로 스르르 미끄러졌다. 턱. 사타구니끼리 퍽 맞닿았다. 체중이 실려 성기가 더 깊숙이 찔러 들어왔다.

“헉…….”

“하아.”

한쪽 다리를 황제의 허리에 감은 채, 다른 쪽 발끝이 아슬아슬하게 땅에 닿았다. 균형을 못 잡고 휘청대는 청을 황제가 견고히 붙잡아 받쳤다. 그 상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턱, 턱, 턱. 일정한 주기로 내장이 짓이겨졌다. 뭉클하게 비벼지다 퍽퍽 쑤셔 박혔다. 움찔대는 구멍 안쪽에 질척한 흥분이 고였다.

“흐응……!”

내벽이 지독하게 민감해졌다. 피가 잔뜩 몰려 단단해진 귀두가 배꼽 안쪽을 마구잡이로 들쑤시는 것이 낱낱이 느껴졌다. 지나가던 궁인이 볼지도 모른다는 것, 꼴사납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릴지도 모른다는 것. 그런 생각들은 어느 순간부턴가 머릿속에서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청아. 뜰에 단풍이, 몹시도……. 곱게 물들었단다.”

안을 퍽퍽 찔러 대는 난잡한 소리가 울렸다. 그 가운데 황제가 고개를 틀어 청의 귓가에 속삭였다. 사이사이에 헐떡임이 섞였다.

“네게도 보여 줄 수 있다면, 좋으련만.”

한 번 힘주어 처넣을 때마다 간신히 바닥을 딛고 있던 청의 발끝이 들썩들썩 떠올랐다. 제대로 만져 주지도 않은 성기에서 물이 질질 샜다. 때마침 황제가 골반을 죄다 으스러뜨릴 기세로 퍼억 처박아 올렸다. 성기가 흔들려 귀두 끝에 맺혀 있던 액체가 후두둑 떨어졌다.

“우리 둘이서, 세상의 모든……. 읏,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모든 추한 것들을 보고.”

“아으으, 응……. 으, 흐윽, 읏.”

힘없이 벌어진 입에서 대답 대신 교성이라기엔 한 끗 부족한 신음이 멋대로 샜다. 스스로 귀를 틀어막고 싶을 만큼 음란한 소리였다. 발정 난 짐승이 울부짖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시야 위로 색색의 얼룩이 불꽃처럼 터져 올랐다. 굵직한 성기는 지칠 줄도 모르고 안을 후벼 팠다. 황제의 귀두가 ‘탕!’ 거칠게 찍는 자리마다 불이 붙었다. 지독하게 뜨거웠다.

“그렇게, 영원히……. 함께하자꾸나.”

배 안에서부터 시작된 지옥 불이 온몸을 태웠다. 불길은 머릿속까지 잠식했다. 의식이 몽롱한 가운데 황제가 쳐올리는 대로 덜컥덜컥 흔들리며 청은 생각했다. 어쩌면 필연이었으리라고. 이런 것으로 내벽을 틀어막고 정액을 질펀하게 싸 넣으니, 아이를 배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고. 사내든 여인이든, 음인이든 아니든……. 그 누구든 이런 식으로 범해져서는 곧장 그의 씨를 품어 버리고 말 거라고. 이성이 개입되지 않은 생각이었다.

“읏…… 흐윽!”

내내 고개를 푹 숙이고 끙끙거리던 청이 결국 치솟는 열기를 못 이기고 턱을 젖혔다. 그는 치미는 쾌감에 몸서리치며 사정했다. 한껏 벌어진 허벅다리가 벌벌 떨렸다. 바닥에 정액이 흩뿌려졌다. 칠칠맞지 못하게 흘린 희뿌연 것이 허벅지를, 종아리를 타고 내려와서는 복사뼈에 고여 떨어졌다.

청의 엉덩이를 움켜쥐고 자신의 성기 위에 퍽퍽 내리꽂던 황제의 손에 움찔 힘이 들어갔다. 손등 위에 핏줄이 섰다. 바닥을 딛고 있던 청의 한쪽 다리마저 확 들렸다. 몸이 공중에 완전히 떠올랐다.

그는 양손으로 청의 엉덩이를 받치고 허공에 띄운 채 연거푸 쳐올렸다. 방금 청이 사정했다는 것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고 무자비하게 박아 넣었다.

의지할 데가 없어진 청은 황제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어린아이처럼 매달려, 그가 흔드는 대로 무력하게 흔들렸다. 질척하게 젖은 샅이 맞붙어 철썩철썩 소리가 났다. 아래에서 밀어붙이는 움직임과 위에서 떨어지는 움직임이 미세하게 엇갈렸다.

팔도 다리도 쓸 수 없었다. 전신에서 감각이 살아 있는 곳이라곤 황제의 성기가 드나드는 구멍뿐이었다. 오로지 황제의 쾌락만을 위해 존재하는, 사지가 모두 잘린 장난감이 된 것 같았다.

“아읏……. 폐하…… 흐응, 윽, 폐하……!”

배 안을 고스란히 얻어맞는 느낌이었다. 쾅. 쾅. 쾅. 한번 박힐 때마다 온몸이 저렸다. 청은 저도 모르는 새에 줄줄 울면서 황제를 연거푸 불렀다. 그가 멈춰 주길 바라는 건지 아니면 더 해 줬으면 하는 건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풀어 헤친 앞섶 사이로 드러난 황제의 복근이 바짝 긴장했다. 청의 엉덩이에 연달아 부딪쳐 오는 허벅지 근육 또한 단단해졌다. 정액을 가득 머금고 두툼하게 부푼 귀두가 내벽 한 지점을 아플 정도로 짓이겨 사정이 임박했음을 알렸다.

“아! 아, 아! 흐으……!”

청의 신음이 도중에 뚝 끊겼다. 입을 벌리고 눈을 크게 뜬 채 우뚝 멈춰 버렸다. 속에 황제의 정액이 울컥울컥 쏟아지고 있었다. 황제의 허리에 어설프게 둘렀던 발끝이 확 오므라들었다.

사정은 집요하리만치 길었다. 정액이 내벽 주름 하나하나에 스며들도록 한참을 싸질렀다. 저 안까지 틀어박힌 성기가 꿈틀거렸다. 배가 그 모양대로 튀어나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거칠게.

“……!”

그에 맞추어 청의 성기에서 맑은 액체가 확 뿜어졌다. 꼿꼿이 올라붙은 귀두 끝에서 투명한 물이 튀었다. 물총처럼 기세 좋게 쭉쭉 쏘아진 액체가 도로 떨어져 두 사람의 배를, 사타구니를, 바닥을 수놓았다. 물을 내뿜는 내내 청의 안이 황제의 성기를 쉴 새 없이 꽉꽉 조이고 빨아먹었다.

“헉, 하아, 하…….”

황제의 어깨에 있는 힘을 다해 매달려 있던 청이 주르르 미끄러졌다. 집요한 절정 끝에 진이 빠진 몸이 파들파들 떨렸다. 황제가 그를 받쳐 안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 버렸을 터였다.

황제가 품에 안은 청을 살짝 들어 올려 성기를 빼냈다. 구멍을 버겁게 틀어막고 있던 것이 슬슬 물러났다. 하도 깊게 박아 놨던 탓에 빼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귀두까지 쑥 빠져나오고 나서도 몇 초가 지나서야 정액이 주룩 흘러내렸다.

“청아, 가만히.”

그는 청을 여전히 공중에 띄워 놓은 채 안을 쑤셨다. 검지와 중지를 찔러 넣고 양옆으로 힘주어 벌리자 구멍이 뻐끔 열렸다. 그 사이로 흥건히 싸 넣은 것들이 덩어리져 뚝뚝 흘렀다.

“이대로 좆물을 머금고 있다가 또 애를 배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청은 황제의 말에 대꾸할 기력조차도 없어 보였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황제의 목에 팔을 감고 매달릴 뿐이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산발이 된 긴 머리칼이 황제의 뺨과 목덜미를 간질였다.

“읏…….”

청이 작은 신음과 함께 몸을 떨었다. 열기가 가시고 나니 추운 모양이었다. 얇은 옷 한 겹만 걸친 데다 몸이 땀으로 젖었으니 추울 만도 했다.

“추워?”

황제가 가만히 물었다. 흰 뺨에는 정사의 여운으로 고운 꽃물이 들었고, 살짝 흐트러진 다갈색 머리칼이 이마 위로 몇 가닥 내려와 있었다. 요염한 모습이었다.

그는 청을 한 팔로 고쳐 안고 느슨하게 걸치고 있던 겉옷을 확 벗었다. 해단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의 상징과도 같은 검붉은 용포가 서슴없이 벗겨져 나갔다. 두툼한 비단으로 지은 용포를 청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폐하? 이 옷은…….”

“용포가 참으로 잘 어울리는구나.”

용포는 청에게 헐렁했다. 손을 뻗어 앞섶을 단단히 여몄다. 찬 바람이 들지 않도록.

“이리도 잘 어울리니, 네가 황제 하련?”

“…….”

우스갯소리처럼 산뜻하게 던졌으나 결코 가벼이 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청의 입술이 경악으로 떨렸다. 심장이 저 밑바닥까지 쿵 내려앉았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황제가 싫어? 그럼 황제를 손바닥 위에 둔 요부가 되려무나. 원하는 만큼 마음껏 패악을 부려도 괜찮아. 네가 주무르면 주무르는 대로, 휘두르면 휘두르는 대로 얼마든지 희대의 폭군이 되어 줄 터이니.”

청은 아연실색하여 할 말을 잃었다. 황제는 그에 개의치 않고 생긋 웃었다. 고개를 기울여 용포에 폭 감싸인 청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너를 가진 것이 나뿐이듯, 나를 가진 것도 너뿐이잖아. 그러니 청아, 네 손아귀 안에서라면 나는 함부로 망가져도 좋아.”

* * *

뿌연 모래바람이 일었다. 막사 앞에 말 한 필이 멈춰 섰다. 쉬지 않고 먼 거리를 달려온 말의 코에서 거센 김이 뿜어졌다.

무관복 차림의 청년이 말에서 훌쩍 내렸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얼굴에 피로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하나로 길게 묶은 머리카락에도 들판의 바람과 먼지가 스몄다.

〈금군 대장군을 뵙습니다.〉

병사 몇 명이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달려와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절도 있는 몸가짐이었다. 누군가 말고삐를 자연스레 받아 들었다.

청년은 젊었다. 기껏해야 스물 몇이나 되었을까 싶었다. 체격은 그럭저럭 탄탄했으나, 얼굴이 무관치고는 눈에 띄게 고운 탓에 더욱 앳되어 보였다.

그러나 그는 황제의 오른팔이자 제국 제일의 무관이었다. 황제의 명이라면 그 어떤 잔인하고 더러운 일도 망설임 없이 한다는. 해사한 외견에 속아 그를 얕보았다간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르니 항시 바짝 긴장해야 했다.

〈일어나라.〉

짤막한 명이 떨어졌다. 대장군은 항상 말수가 적고 무표정했다. 그를 시기하는 자들은 예쁘장한 장식용 인형에 칼을 들려 놓은 것 같다며 뒤에서 비웃고는 했다. 그러나 정작 그의 앞에서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서신? 내게?〉

〈예.〉

〈폐하께서 내리신 칙서는 아니고?〉

〈아닙니다. 대장군께 개인적으로 온 것이라 하였습니다.〉

청은 병사가 공손히 내미는 것을 받아 들고 막사에 들어섰다. 의아했다. 그에게 개인적인 서신이 올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청의 가문은 그의 아버지가 역적으로 몰려 멸문지화를 당했다. 청과 친분이 있던 귀족들, 생사고락을 함께할 것처럼 친근하게 굴던 수많은 벗들 모두가 매몰차게 등을 돌렸다. 청의 아버지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음을 알면서도 혹여나 자신에게까지 불똥이 튈까 두려워 모른 척했다.

반역자 집안이라는 누명을 쓴 데다 의지할 곳도 없어진 식솔들은 머나먼 지방으로 몸을 피했다. 청만이 홀로 황도에 남았다. 그는 칼바람이 몰아치는 정쟁의 한복판에 고립되었다. 믿고 따를 이라고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6황자 신무련. 피로 물든 옥좌에 갓 올라, 이제는 황제 폐하라 불러야 하는.

탁자에 서신을 올려 두자 두툼한 종이 사이에 끼어 있던 나뭇잎 하나가 툭 떨어졌다. 무심코 그것을 주워 들었다. 새빨갛게 물든 단풍잎이었다. 개중 가장 예쁜 것을 골라 보냈는지 벌레 먹거나 시든 곳 없이 말끔했다.

혹여나 바짝 마른 낙엽이 부스러질까 조심스레 놓아두고 서신을 열었다. 편지 첫머리에 쓰인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형님께서는 잘 지내고 계십니까.〉

익숙한 필체였다.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어려서부터 함께 배우고 함께 뛰놀며 자란 형제의 필체인데 어찌 잊겠는가.

청과 그의 남동생은 우애가 지극했다. 청이 쾌활하고 유들유들한 반면, 동생은 다소 고지식해 보일 정도로 올곧았다. 청은 풍류와 예술에 심취했고 동생은 활쏘기를 하거나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두 형제는 성정이 너무도 다른 까닭에 오히려 화기애애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그들의 삶은 너무도 달라졌다. 청은 6황자의 검이 되어 그에게 충성을 바치는 길을 택했고, 동생은 형과 죽은 아버지 대신 가장이 되어 식구들을 책임지는 길을 택했다. 전쟁 통에 뿔뿔이 흩어지듯 창졸간에 헤어지고 난 뒤로는 오래도록 보지 못하였다.

청은 무장을 풀지도 않고 관복에 칼을 찬 차림 그대로 막사 가운데에 우뚝 섰다. 온몸을 뻐근하게 내리누르는 피로도 잊었다. 그는 한참 동안 홀린 듯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금군의 인장이 새겨진 보호구를 찬 손으로 단정한 붓글씨를 훑었다. 이 서신을 썼을 이의 존재를 느껴 보려는 듯.

처음부터 끝까지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읽고 나서야 간신히 서신을 내려놓았다. 청은 곧장 주위를 둘러보며 지필묵을 찾았다. 답신을 쓰기 위해서였다.

신황이 등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하루가 멀다 하고 내란이 벌어지는 시기였다. 당장 오늘 밤만 해도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예정되어 있었다. 답장을 보낸다 한들 동생에게 무사히 전해질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도 보내야 했다.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딱딱한 보호구를 벗었다. 청의 양손에는 붕대가 두껍게 감겨 있었다. 이대로는 말고삐와 검을 쥘 수 있을지언정 붓은 잡을 수 없었다. 청은 붕대마저 망설임 없이 풀어 내렸다.

그 아래 드러난 맨손은 처참했다. 성한 곳이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생채기와 물집이 빼곡하게 들어차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나마 상처가 없는 부분엔 딱딱한 굳은살이 있었다.

귀족 도련님답게 뽀얗고 고와서 섬섬옥수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던 청의 손은 6황자에게 충성을 맹세한 지 몇 년 만에 철저히 망가졌다. 험한 일이라곤 해 본 적 없던 이가 악에 받쳐 검과 활을 익힌 흔적이었다.

〈…….〉

다친 손으로 붓을 잡았다. 불에 타는 듯 쓰린 통증이 일었다. 하지만 그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을 뿐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매 전투마다 팔다리가 잘리는 부상자가 속출하는데, 이깟 상처는 상처 축에도 들지 않았다.

〈나는 무탈히 지내고 있단다. 폐하의 은덕이 하해와 같아…….〉

청은 답신을 쓰기 시작했다. 피와 진물투성이가 된 손으로도 아픈 내색 한 번 하지 않고.

그가 여태껏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자신이 죽인 사람들이 매일 밤 꿈에 나온다는 말도, 지나치게 젊은 나이에 대장군이 된 청을 시기하는 이들이 그를 대놓고 배척한다는 말도, 하루하루 인간이 아닌 악귀가 되어 가는 것 같아 무섭다는 말도.

대신 계절 이야기를 하고 음식과 풍경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를 비롯한 다른 가족들의 안부를 물었다. 그는 이 순간만큼은 잔인한 학살자도 황제의 앞잡이도 아니었다. 지씨 가문의 첫째 공자이자 그의 동생이 익히 알던 다정다감한 형이 되었다.

한 문장 한 문장 써 내려가면서, 그가 두르고 있던 살기와 날 선 피로가 점차 누그러졌다. 그 자리에 오래도록 잊고 있던 온기가 스며들었다.

이로부터 반년 후. 보고 싶어도 만날 수 없어 단풍잎을 끼운 서신으로 애틋한 마음을 전하던 두 형제는 예기치 않게 재회하게 된다. 처형장 한복판에서, 각각 대장군과 죄수의 입장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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