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제1장 중추中秋 (1/16)

제1장

중추中秋

욱이 동북부 변방에서 올라온 장계를 토씨 하나 빠짐없이 꼼꼼히, 두 번을 반복해서 읽은 후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욱이 한참을 미동도 없이 앉아 있자 조례를 마친 이후에도 퇴청하지 않고 휘명전 집무실에 남아 있던 승상 조양과 시영이 그 옆모습을 힐끔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폐하,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하시옵니까? 혹, 장족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으니 그것을 걱정하십니까?”

조양의 물음에 욱이 그제야 집무실 안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을 깨닫고는 흠…… 헛기침을 했다.

“장족과 오족의 족장이 사돈을 맺은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동북부 변방의 안정에 크게 위협이 되는 일이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변방에서 조금이라도 도발적인 움직임을 보이면 탁자를 두드리며 조바심을 내고, 당장이라도 군대를 진두지휘해서 출병할 듯 들썩이던 황제가 이제 많이 차분해졌다 생각하며 조양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렇기는 하지만 동북의 성주들이 장족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으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폐하.”

“승상의 말이 맞습니다. 또한 이미 지난해에 대현성에 군사 만 명을 추가로 배치해서 국경 수비를 강화했으니, 장족이 비록 군소 부족들을 끌어 모아 세를 불린다 해도 쉽사리 경거망동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시영이 승상을 거들어 욱을 안심시켰다. 시영은 그간 종친부를 대표해서 비공식적으로 승상 회의와 휘명전 조례에 나와 중신들과 나라 안팎의 대소사를 의논해오다가 지난 연초부터는 상서령의 관직을 제수받아 정식으로 욱을 보좌하고 있었다.

“대현성에서 보내온 사절단이 오늘 아침에 황강을 건넜으니 내일 아침엔 황궁에 들 것입니다. 사절단을 이끌고 오는 자가 대현성 영주 무영준의 장자 무호 장군이니, 누구보다도 국경 근처 부족들의 상황을 소상히 알지 않겠습니까? 무호 장군이 들면 장족의 움직임과 변방 사정을 알아보시고 필요한 조치를 논의하시지요.”

보름 전 황후가 그토록 원하던 건강한 황자를 생산한 이후, 황궁의 궁문은 나라 안 각 성읍의 제후와 영주들이 보내온 사절단과 외국 사신들의 하례 행렬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황후가 황제의 4황자이며 두 번째 적자를 생산한 일은 나라의 경사이기도 했고, 궁 안팎의 세력 판도를 뒤흔드는 큰 사건이기도 했던 것이다.

4황자의 출생으로 그간 황제와의 불화와 원자의 실명으로 그 지위까지도 위태로웠던 황후는 나라의 안주인 자리를 굳히며 큰 시름을 덜었고, 한때 태화궁을 넘볼 정도로 드높던 미향궁의 기세는 확연히 꺾이고 말았다. 물론 제2황자와 제1황녀의 생모라는 향비의 지위엔 변함이 없었지만 세간의 모든 관심은 태화궁과 새로 태어난 황자에게로 쏠렸고, 성 안 귀부인들의 발길 역시 온통 태화궁으로만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불과 며칠 사이, 육궁의 후궁부터 허드렛일 하는 하인에 이르기까지 향비의 명령을 이전처럼 두려워하는 궁인은 더는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대현성에서 오는 사절이 무호 장군입니까?”

욱이 3년 전에 잠깐 보았던 무호의 모습을 떠올리며 시영에게 물었다.

“다른 일도 아니고, 황후마마의 황자 생산을 경하드리기 위한 사절이니 변방이 어지러운 중에도 후계자를 보내 충심을 보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무호 장군은 사사롭게는 폐하의 처남이 되니 정전에서 인사만 받고 보낼 것이 아니라 따로 자리를 마련하여 술이라도 한잔 내리셔야 할 것입니다.”

“…….”

정신을 차리고 보니 처첩이 일곱이라, 욱에게는 전국 각지에 버티고 있는 처남도 수십 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벼슬을 받아 황궁에 노상 드나드는 서너 명을 뺀 나머지는 궁 안에 큰 연회가 있을 때 잠깐 인사를 받으며 스쳐 지나간 정도라 욱이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는 처남은 열 명도 채 되지 않았다.

명절 연회에서 몇 번을 마주쳐도 이름이며 직함이 헛갈리고 어느 후궁의 동생인지, 또 어느 후궁의 오라비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한 다른 처남들과는 달리 예전에 딱 한 번 마주쳤던 무호는 무심결에도 그 모습이 눈앞에 한 번씩 떠오를 정도로 인상이 강렬한 사내였다.

무호는 대대로 명장을 수두룩이 배출한 대현성 영주 무 씨 가문의 후계자로 그 자신도 약관 18세에 장군의 직을 받아 아비인 무영준 장군을 보좌하며 10년째 대현성 성문을 지키고 있는 명망 높은 장수였다.

평생을 대현성 성문 위에 서서 성 밖 오랑캐들만 노려보며 전투가 있을 때를 제외하곤 영지 밖으로 백 리 이상을 벗어난 일이 없다던 무호가 본거지에서 수천 리나 떨어진 황성에 온 것은 딱 한 번, 3년 전 비의 첩지를 받은 누이동생의 입궁 행렬을 직접 호위해 왔을 때였다.

도성 최고의 덩치를 자랑하는 정 내관이 왜소해 보일 정도로 우람한 체격과 산중의 호랑이처럼 부리부리한 눈매도 위압적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욱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집안의 고명딸로 나름대로 금지옥엽이었을 누이동생을 전쟁 포로 넘겨주듯 욱에게 툭 떠밀어 보낸 그 무뚝뚝하고 무정한 태도였다.

예로부터 전란이 잦은 대현성과 무강성 일대의 사내들은 언행이 거칠고 잔정 없기로 악명이 높았다. 하지만 황제의 후비가 되어 구중심처에 들게 된 누이동생에게 잘 지내라든지, 몸조심하라는 당부의 말 한 마디 없이 싹 돌아서는 무심함은 이전엔 듣도 보도 못하던 새로운 경지였다. 그러면서도 자신에게 부족한 누이를 잘 봐달라며 큰절을 올릴 때엔 그 태도며 목소리가 커다란 호랑이가 엎드려 으르렁거리는 형상이라 당부가 아니라 협박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폐하?”

시영이 갑자기 수심에 잠긴 욱을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지난 3년간 농담으로라도 공비가 궐 안에서 편히 잘 지냈다고 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 무호가 들이닥쳐서 그간 누이동생을 홀대했다고 따지고 덤비면 어쩌나 싶어서 속으로 떨던 욱이 얼른 표정을 고치고 고개를 들었다.

“그 먼 곳에서 처남이 직접 온다니, 술 한 잔으로 어찌 대접을 했다고 하겠습니까? 별궁에서 조촐히 연회라도 열어야 수천 리를 달려온 성의에 다소나마 답례가 되지 않겠습니까?”

“지당하십니다. 대현성의 무 씨 집안은 벌써 4대에 걸쳐 동북 지방의 안정에 크나큰 공이 있는 가문이니 당연히 그 정도 대접은 하셔야지요.”

그간 후궁들에게 무심한 만큼 처가 식구들에게도 별다른 관심이 없던 황제가 후궁들 중에서도 유난히 꺼리던 공비의 오라비를 특별히 챙기는 것이 의아하긴 했지만, 지금처럼 변방의 움직임이 위험할 때에 국경의 수비를 책임지고 있는 중요한 인물을 높이 대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서 시영이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또한 공비와도 따로 만나 남매간에 정을 나누도록 배려를 해주시면 무호 장군도 왕복 한 달의 긴 원행이 더욱 보람 있지 않겠습니까? 공비도 고향에서 수천 리 먼 곳에 시집와서 그간 고적하게 지냈으니, 3년 만에 친정 오라비를 만나게 되면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그거야 당연히…… 그렇겠지요.”

한 걸음 떨어져서 잠시 관찰할 기회가 있었던 욱이 보기엔 그 남매간이 그렇게까지 정이 돈독한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꼬박 보름간 말을 달려 온 무호의 수고를 생각하면 공비도 만나고 가는 것이 인지상정이라 욱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민 내관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와 고개를 조아렸다.

“무슨 일이냐?”

“미향궁에서 상궁이 들었습니다, 폐하.”

“미향궁에서?”

“곧 점심 수라 드실 시각이 아니옵니까? 향비께서 오늘 점심 수라는 미향궁에서 드셨으면 하여 기다리고 계신답니다.”

“미향궁엔 이틀 전에 들어 점심을 들고 아이들도 보지 않았느냐? 오늘은…….”

내일 무호가 황성에 당도할 것이라니 오늘은 영운궁에 들어 공비에게 그 소식을 전하고 오랜만에 점심도 같이 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욱이 말꼬리를 흐렸다. 그사이 미향궁 큰 상궁에게서 제법 굵은 금가락지 하나를 받아 챙긴 민 내관이 재차 고개를 조아리며 더욱 간곡하게 청을 넣었다.

“향비께서 사가에서 보내온 꿩고기로 만두를 빚어 탕을 끓이셨답니다. 또한 아기씨들께서도 본궁에 들어 놀고 계신다니 잠시라도 거동을 하시지요, 폐하.”

민 내관의 권유에 요즘 한참 바닥을 빡빡 기어 다니며 자신만 보면 까르륵 웃는 공주의 모습이 떠올라서 욱이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공비야 자신이 가도 반기는 내색이 없고, 오면 오나 보다 가면 가나 보다 심드렁하기만 하니…… 오라비의 상경 소식은 내관 편에 전하고 필요한 물품이 있다면 그것도 챙겨주도록 하자고 마음을 고쳐먹은 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면 점심은 미향궁에서 들어야겠구나. 향비에게 그렇게 전하도록 하라.”

황제의 발길을 미향궁으로 돌리는 데 성공한 민 내관이 연신 굽실거리며 집무실에서 물러났다. 황후의 황자 출산으로 향비의 위세가 확연히 꺾이긴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제2황자의 생모였고 가문의 재력과 영향력 또한 만만치 않은 칠궁의 2인자였다. 때문에 그간 미향궁과 상부상조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궁인들은 적당히 눈치를 보며 미향궁으로 황제의 걸음을 돌리려고 애쓰고 있었다.

“윤 내관은 어딜 갔습니까? 아니면 번이 없는 날입니까?”

딱 봐도 민 내관이 향비전에서 뭔가 떡고물을 주워 먹고 욱을 꼬인 것이라 기분 언짢은 것을 감추지 못하고 혀를 차던 시영이 윤 내관의 행방을 물었다. 윤 내관은 미향궁 신 내관과 앙숙이 되어 아르릉거린 지 이미 오래라서 욱이 미향궁으로 가자 하면 그 발길을 막지는 않아도 욱에게 먼저 미향궁행을 권하는 일은 일절 없었다.

“윤 내관은 아침에 심부름을 보냈습니다.”

“심부름이라시면…….”

요즘 들어 아침나절에 휘명전의 상선을 궐 밖에 내보낼 일이라는 게 뻔해서 시영이 짠한 눈길로 욱을 쳐다보았다.

“위사령 집에 보내셨습니까?”

시영의 물음에 욱이 잠시 잊고 있었던 허연의 일을 다시 떠올리며 분통을 터뜨렸다.

“후궁 된 자가 제멋대로 궐 밖 사가로 뛰쳐나가서 보름이나 환궁을 하지 않는 것이 말이 됩니까? 동서고금에 이토록 어처구니없는 일이 또 있었습니까?”

“동서고금에 속국의 장수를 후궁으로 삼아 궐 안에 모셔놓은 제왕도 달리 없었으니, 비긴 것으로 치시지요.”

“형님!”

“귀인이 사가로 나간 것은 황자를 생산하느라 고생하신 황후마마를 좀 더 배려하고, 지아비 노릇 하며 좋은 시간 보내시라는 뜻이 아닙니까? 귀인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폐하께서는 태화궁엔 얼굴만 삐끔 비추시고 우화원으로 쌩하니 달려가셨을 터, 그 사람이 성품이 너그럽고 폐하를 생각하는 마음이 깊어서 그리 수를 낸 것입니다. 또한 그 사람이 아예 고향으로 돌아간 것도 아니고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서 조용히 잘 지내고 있거늘, 뭘 그렇게 조바심을 내며 아침저녁으로 상선을 보내 환궁을 조르십니까?”

“그래서 그 뜻을 존중하여 낮에는 이 궁 저 궁 떠돌아다니며 후궁을 다독이고, 밤이면 태화궁에 머물며 산모와 아이를 살피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다른 사내들은 평생 하는 일을 이제 보름 하시고 무슨 엄살이십니까? 소인도 안사람이 해산할 때마다 곁에 붙어서 온갖 수발을 다 들었었습니다.”

“형님 처지에 형수님 같은 절세미인을 얻었으면 그 정도는 당연히 하셔야지요.”

욱의 핀잔에 시영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러곤 좀 전에 당한 면박을 만만치 않은 기세로 받아쳤다.

“지아비 노릇이란 그렇게 만만치 않은 것이니, 기왕 하시는 거 한 달 꽉 채워서 산모와 아기도 돌보시고 후궁들도 챙기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지난 1년간 귀인이 폐하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중궁의 회임 이후 후궁에서는 좋은 소식이 없어서 중신들도 걱정이 많았습니다.”

“한 달이라니!”

욱이 의자에서 펄쩍 뛰어 일어나더니 집무실 안을 회오리바람이 일도록 뱅뱅 돌기 시작했다.

“듣자하니 그 사람이 위사령의 집에 죽은 듯 틀어박혀 있는 것도 아니고, 고 내관과 어울려서 날마다 저자거리 구경을 다니며 주막에 들어 술 한 잔 걸치고 귀가하는 날도 수두룩하다는데, 그러다 어느 고운 여인네와 눈이라도 맞으면 나는 뭐가 됩니까?”

“에이, 설마 그 사람이…….”

말도 안 된다는 듯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젓던 시영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심각한 눈길로 욱을 노려보았다.

“아까부터 우거지상을 하고 앉아서 그런 생각을 하고 계셨던 겁니까?”

“보름째 환궁을 거부하고 버티고 있는 것을 보면 허파에 바람이 들어도 단단히 든 것입니다. 살짝 바람기도 있고 역마살도 만만치 않은 사람이니, 저대로 두면 영 떠난다는 소리가 안 나온다는 보장이 없질 않습니까?”

욱의 횡설수설에 시영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폐하께서 변방 오랑캐들의 동향이 신경 쓰여 그렇게 노심초사 고민하고 계신 줄 알았습니다.”

“그깟 오랑캐 무리야 정 어수선하게 굴면 군사를 이끌고 나가 한판 붙으면 그만이지 고민은 무슨 고민입니까?”

욱의 철없는 호기에 내도록 둘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조양도 심호흡을 하는 척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해서 월국이 건국된 이후 하루도 평온할 날 없는 동북쪽의 정세에 관한 논의는 전란의 주범인 장족이 주변의 군소 부족과 연합해 또다시 국경을 침범할 경우엔 황제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가서 한판 붙는 것으로 허술하게 결론이 나고 말았다.

조양과 시영이 탁자에 놓인 문서를 주섬주섬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다소 허탈한 얼굴로 욱을 쳐다보았다.

“정오도 이미 지났으니 이만 미향궁으로 드시지요, 폐하. 향비께서 기다리시겠습니다.”

오후엔 대월성에서 온 사절도 접견해야 하고, 승지들과 함께 이제 가을걷이가 시작된 남쪽의 성읍의 작황과 세금에 대해 논의도 해야 하고, 지난 몇 년간 세금과 진상품을 교묘히 착복해 만금을 축재하다가 걸린 관원의 처분도 결정을 내려야 하니…… 욱에게는 아직도 길고 긴 하루 일과가 남아 있었다. 점심 든든히 먹고 잠깐 쉬어야 남은 일정에도 차질이 없겠기에 욱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님은 이대로 퇴궐을 하십니까?”

“아닙니다. 오늘은 중요한 국사가 많은 날이니 소인도 장경각에서 점심을 들고 휘명전에 다시 들 것입니다.”

“허면 미향궁에 같이 가시지요. 형님도 꿩 만두는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욱의 점심 초대에 시영이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꿩 만두도 별미지만, 그거 한 그릇 얻어먹자고 향비께 눈총을 사서야 되겠습니까? 저는 승상과 함께 장경각에서 늘 먹던 점심을 먹을 것이니 미향궁엔 혼자 가십시오.”

시영의 까칠한 대답에 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종친이 여인들의 영역인 칠궁에 출입하는 것은 비록 황제의 허락이 있다고 해도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때문에 예의범절 유난히 따지는 시영도 처음엔 어떤 경우든 칠궁에 드나드는 것을 민망한 일로 여기고 칠궁의 담장 쪽으론 고개도 돌리지 않았었다. 하지만 칠궁에 아이들이 하나둘 늘어나면서부터 어린 조카들을 향한 정이 황실 법도를 지켜야 한다는 굳은 결심을 번번이 이겼고, 그런 까닭으로 요즘 들어 시영은 아기들이 보고 싶을 때면 욱에게 먼저 칠궁 나들이를 청하는 일도 종종 있을 정도였다.

더욱이 아내인 곽여화와의 사이에 아들만 둘을 둔 탓에 정화 공주를 딸처럼 예뻐하던 시영이 미향궁 가자는 자신의 청을 시큰둥한 표정으로 거절하는 것이 수상쩍어서 욱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그리 보십니까? 안 가십니까?”

“향비가 형님께 뭔가 결례라도 범했습니까?”

“제가 그간 향비마마를 만난 것이 손에 꼽을 정도인데, 어찌 그런 일이 있었겠습니까?”

시영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역시 뭔가 있다는 확신을 굳힌 욱이 재차 시영을 다그쳤다.

“어차피 윤 내관에게 물어보면 다 알게 될 일입니다. 서운한 일이 있었으면 말씀을 하십시오. 무슨 일이든, 차후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단단히 주의를 주겠습니다.”

“아니라니까요? 공연한 말씀 마시고…….”

시영이 욱에게 밀려서 슬슬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욱도 이 일을 그냥 넘어갈 마음이 없어서 시영을 방구석까지 몰았다.

욱이 아무리 후궁에 별 관심이 없다고 해도, 한 담장 안에서 거느리고 사는 부인들의 성격을 모를 정도로 무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욱은 향비가 내명부에서 위세를 좀 부리고 황후를 갈구는 것을 굳이 나서서 단속할 마음이 없었다. 어차피 칠궁은 여인들의 세상이고 후궁이란 그런 곳이고…… 향비가 어떤 사건으로 인해 지금의 위세를 잃는다 해도 또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비슷한 행태를 보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교만이 지나쳐서 그 행패가 칠궁의 담장을 넘는 것은 또 다른 일이었다.

“아무 일도 아니라니까 왜 이러십니까? 비켜주십시오. 점심 먹으러 가야겠습니다!”

구석에 몰린 시영이 벌컥 화를 내며 욱을 밀쳤다. 하지만 욱은 꿈쩍도 않고 버티고 서서는 오히려 시영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연유를 털어놓지 않으면 점심도, 저녁도 없습니다!”

욱과 시영의 아옹다옹 실랑이가 그친 것은 집무실 문을 조심성 없이 열어젖히고 안으로 달려 들어온 윤 내관 때문이었다. 출궁할 때 입었던 외출복 그대로 다급하게 집무실로 뛰어든 윤 내관이 욱과 시영을 보고는 멈춰 섰다.

“이제 왔느냐?”

“아, 예…….”

황제가 상서령인 시영을 잡아 흔들고 있는 것을 보면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구나, 조용히 접근해서 방 안의 상황을 좀 살필 것을 내 어찌 평상심을 잃고 경거망동하여 소중한 정보 청취의 기회를 놓쳤단 말인가…… 속으로 탄식을 하며 윤 내관이 고개를 푹 숙였다.

욱이 일단 시영을 놓고 윤 내관 쪽으로 돌아섰다. 향비의 일이야 차차 알아봐도 되는 것이고 급한 일은 따로 있기 때문이었다.

“귀인은 만났느냐?”

“예, 뵈었습니다.”

“환궁은 대체 언제 한다더냐? 위사령 집 구석방으로 아예 이사를 나갈 작정이라더냐?”

“설마 그렇게야 하시겠습니까? 다만, 오랜만에 바깥바람을 쐬시니 재미있고 마음도 편하다며 당분간은 그대로 지내시겠다고…….”

“이런!”

욱이 호랑이처럼 포효하며 집무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 바람에 문 앞에 서 있던 정 내관이 화들짝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폐하?”

“당장 차비를 하라. 위사령의 집으로 갈 것이다!”

“예?”

“차비도 필요 없다! 마구간에 가서 내 말이나 끌고 오너라!”

욱이 당장 궐문을 나설 기세로 전각을 뛰쳐나갔다. 그 뒤를 정 내관, 윤 내관, 조양, 시영이 허둥지둥 쫓아 나갔다.

“폐하, 고정하십시오. 오후에 남은 일이 얼마인데, 어딜 나가시겠다는 겁니까?”

“승상의 말이 맞습니다, 폐하. 고정하시고…… 제가 이 길로 위사령 사저로 가서 귀인을 데려올 것이니…….”

오늘 오후의 일정은 더는 미룰 수 없는 중대사라 조양과 시영이 번갈아 욱을 만류했다. 하지만 욱은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휘명전 정전의 돌계단을 내려갔다.

“폐하, 잠시 걸음을 멈추십시오. 어찌 소인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그리 서두르십니까?”

윤 내관의 다급한 만류에 욱이 그제야 뒤를 돌아보며 벌컥 언성을 높였다.

“당분간 안 돌아온다고 했다면서? 말을 다 듣지 않았다는 것은 그보다 더 충격적인 전언이라도 있다는 것이냐?”

자신을 잡아먹을 듯 으르렁거리는 욱의 사나운 기세에 윤 내관이 놀라서 몸을 흠칫 떨었다.

“귀인께서 당분간은 환궁할 마음이 없다 하기는 하셨으나…….”

“구체적으로 언제까지라는 일시도 밝히지 않고 그저 당분간이라니…… 이는 과인과 별거를 하자는 뜻이 아니냐? 별거라니! 내가 왜 지은 죄도 없이 이런 봉변을 당해야 한단 말이냐?”

“폐하…….”

“황후가 해산을 하자마자 그렇게 뛰쳐나가서는 상선을 세 번이나 보내 환궁을 청해도 요지부동이니…… 이는 내 꼴이 보기 싫다는 뜻이다. 내가 산모와 아이에게 소홀할까 걱정스럽다는 것은 말짱 핑계고, 투기로 삐진 것이 아니냐? 내가 벌써 보름째 태화궁과 휘명전을 오가며 독수공방을 하고 있거늘…… 그 사람은 나를 보고 싶은 마음도 없다더냐? 이럴 거면 그간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나 된 듯 너그러운 척, 마음 넓은 척을 말든가!”

“저기…….”

조양과 시영이 욱에게 다가서다가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욱은 흥분이 지나쳐서 둘이 왜 갑자기 표정이 변했는지, 왜 손을 마구 내저으며 말을 막는지 헤아릴 겨를이 없었다.

“폐하, 고정…….”

“상선을 보내도 환궁을 못하겠다고 번번이 퇴짜를 놓으며 버티니, 내 이번 한 번은 직접 데리러 갈 것이다. 하지만 차후 또다시 이리 방자한 행실을 일삼는다면…….”

그렇게 울부짖으며 궁문 쪽으로 돌아서던 욱이 다음 순간 숨을 삼켰다. 허연이 궁문 앞에 서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연이 잠시 사가에 머물겠노라 고하고 궁을 나간 것은 약 보름 전, 황후가 하루 반나절의 모진 산고 끝에 황자를 낳던 날 저녁이었다. 황후의 해산 소식에 태화궁으로 달려간 욱은 오랜 산고로 지친 황후를 위로하고 아기를 한 번 안아본 후 여느 날처럼 우화원으로 향했지만, 그를 기다린 것은 앞으로 며칠 금란 공주의 집에 나가 있겠다는 허연의 일방적인 통보와 황후와 새로 태어난 황자를 잘 돌보라는 짧은 당부였다.

태화궁엔 황후를 돌보는 어의가 수십 명이고 궁인도 백 명이 넘는데 그 이상 뭘 어떻게 더 돌보라는 건지, 황후를 돌보는 것과 허연의 출궁이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 영문을 몰라서 욱이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허연은 고 내관을 비롯한 측근의 내관들을 거느리고는 쌩하니 궁을 나가버렸고, 그 이후 아무리 환궁을 독촉해도 꿈쩍 앉고 버티며 욱의 애를 태우고 있었던 것이다.

허연이 마당 한가운데로 성큼성큼 걸어 나오자 계단 중턱에 서 있던 욱이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곤 뒤에 서 있던 윤 내관을 힐끔 노려보았다.

“어찌 된 일이냐? 귀인은 당분간 안 돌아온다고 하더니?”

“아주 환궁하신 것은 아니고…… 소인이 간청을 드려 잠시 문후를 드신 것입니다.”

“잠시 문후라니? 귀인의 집은 황궁이거늘, 자기 집에 잠깐 들렀다가 어딜 또 간단 말이냐?”

“어찌 되었든 귀인을 모셔왔으니 소인은 소임을 다한 것이 아닙니까? 앞일은 폐하께서 잘 마무리하셔야지요.”

환관 주제에 황제에게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따박따박 제 할 말 다하는 윤 내관을 욱이 한 대 쥐어박을 듯 노려보았다. 하지만 허연이 마당 가운데로 나와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리자 곧 그에게 시선과 마음을 온통 빼앗기고 말았다.

“폐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어, 그것이…….”

녹색이 감도는 짙은 회색 도포 차림에 투박한 가죽신을 신고 팔에 가죽 각반까지 두른 허연의 모습을 욱이 홀린 듯 쳐다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연주국에서 돌아온 이후 허연은 황제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귀인이란 존귀한 지위에 걸맞게 현란한 예복과 진귀한 패옥으로 온몸을 휘감고 지냈었다. 붉은색, 비취색, 자주색, 은색, 금박과 갖은 자수…… 옛 주인이 돌아온 이후 고 내관의 의상은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해졌고, 의상에 맞춘 장신구 역시 다른 후궁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값진 것들뿐이었다. 비록 그것이 자신의 취향은 아니었지만 옷 문제를 두고 고 내관과 싸워봐야 승률은 형편없이 낮았고, 한 달에 한 번 태화궁에 갈 때 외엔 우화원에서 나갈 일도 없었기 때문에 허연은 의복에 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고 내관이 들이미는 대로 입고 걸쳤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지난 1년간 눈이 시릴 정도로 번쩍거리는 모습만 봐온 욱에게는 저자거리의 평민처럼 수수한 옷차림에, 늘 차고 다니는 팔찌 외엔 가는 금가락지 하나 끼지 않은 허연의 모습은 눈이 시원해질 정도로 청량하고 청순해 보였다.

“황후마마와 황자 아기씨는 무탈하십니까?”

“둘 다 탈 없이 잘 있네.”

홀린 듯 대답하며 욱이 허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여태 무릎을 꿇고 있던 허연을 일으켜 세웠다.

“귀인…….”

욱이 중얼거리며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인 것처럼 허연을 쳐다보았다.

“어찌 그리 보십니까? 제 얼굴에 무엇이 묻었습니까?”

허연이 욱을 슬쩍 밀며 몸을 사렸다. 눈빛도 음습하고 숨소리도 거친 것을 보니 상당한 흥분 상태라, 자칫 마당 한복판에서 입맞춤이라도 당하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반가워서 서운한 것도 잊고 달려가 맞았건만 돌아온 것은 매정한 거부의 손길이라 욱의 표정이 대번에 시무룩해졌다.

“입성이 그게 뭔가? 변방에서 전쟁이라도 치르고 왔는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저는 몸이 가벼워서 날아갈 것 같습니다.”

“행색만 보면 고 내관이 상전 같고 자네는 고 내관을 호위하는 하인처럼 보이네. 그간 사가에 있으면서 저자거리 출입도 잦았다 들었거늘…… 그 꼴을 하고 나돌아 다녔는가?”

공연히 투덜거리며 욱이 허연의 뒤에 서 있는 고 내관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고 내관은 허연과는 반대로 궁에 있을 때엔 관복만 입어야 하는 처지라 바깥출입을 할 때 걸치는 외출복은 항시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지금도 옷깃과 소매 단에는 금사로 빗살무늬를 넣은 짙은 옥색 도포를 입고, 허리엔 비취로 띠를 매고, 가죽신에까지 금수를 놓은 고 내관의 옷차림은 갈데없이 어디서 돈벼락 맞은 졸부 아들의 행색이었다.

욱의 눈총에 고 내관이 슬금슬금 허연의 등 뒤로 몸을 피했다. 허연과 함께 온 도성을 돌아다니며 번화한 거리를 구경하고 자신의 의상점에 들러서 온갖 비단을 직접 대어보며 다가올 겨울 옷 구상을 할 때엔 꿈처럼 행복했지만, 이렇게 장기간 바깥으로 돌아치다가 황제에게서 불벼락이라도 얻어맞으면 어쩌나 마음 한구석이 늘 조마조마하던 터였기 때문이었다.

만만한 고 내관에게 한소리 퍼부으려고 실룩거리는 욱의 입술을 보며 허연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곤 손을 뻗어 보름 만에 보는 욱의 얼굴을 살짝 어루만졌다.

“점심은 드셨습니까?”

“아직…… 전일세.”

허연의 은근한 손길에 잠시 전 울컥했던 것도 까먹고 욱이 고개를 저었다.

“선약이 없으시면 같이 드시지요. 수룡천변에 유명한 과자 가게에서 과자를 좀 사 왔으니 그것도 맛을 보시고요.”

“보름 만에 돌아오면서, 달랑 과자 한 봉지를 사 왔는가?”

자신을 대하는 것이 딱 네 살배기 원자 취급이라 욱이 콧김을 내뿜으며 툴툴거렸다.

“폐하의 입맛은 귀한 재료만 써서 정해진 방식대로 만드는 생과청의 과자보다는 거칠고 싼 맛 나는 저자거리의 주전부리 쪽이 아닙니까?”

“어허, 싼 맛이라니? 내 성격이 소탈하고 두려움 없는 모험 정신이 있어서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다 먹어보는 것이지!”

“폐하의 모험 정신이야 천지간에 누가 당하겠습니까? 그 정신을 발휘하셔서 며칠 전 금란 공주님이 원자께 올린 콩떡을 다 빼앗아 드셨다면서요?”

보름 만에 어렵사리 만난 두 사람이 눈물의 재회는커녕 마주 서서 까칠한 독설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다투는 것을 지켜보던 윤 내관이 앞으로 나섰다.

“폐하, 마당에 서서 이러지 마시고, 마주 앉아 점심을 드시며 천천히 회포를 푸시지요. 귀인께서도 시장하실 것입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말은 자꾸만 시비조로 나가는 것이 내심 당혹스럽던 욱이 윤 내관의 제안에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겠구나. 바로 준비를 시켜라.”

“예, 폐하. 국향원 정자에 수라를 준비시키겠습니다. 요즘 국향원 정원에 국화가 한창이니 두 분이 함께하시면 가을 정취도 배가 될 것입니다.”

국향원이라…… 거기도 가을꽃 필 때엔 제법 볼 만한 곳인데 귀인은 한 번도 가보지 못했구나 생각하며 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수행 내관들 앞줄에 서 있던 민 내관이 우물쭈물 앞으로 나섰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폐하, 미향궁에 이미 연통이 갔사온데…….”

민 내관이 슬그머니 미향궁의 일을 입에 담자 윤 내관과 고 내관이 거의 동시에 그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윤 내관은 진즉부터 민 내관이 미향궁에 줄을 대놓고 어떻게든 황제를 미향궁으로 모셔가려 안달을 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대전 내관들이 후궁과 결탁해서 서로서로 편의를 봐주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고 자신이 미향궁의 동향을 상세히 알려고 해도 끄나풀 한두 명은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에 윤 내관은 그간 민 내관의 얍삽한 행동을 그냥 두고만 보았을 뿐, 다른 제재를 가한 일은 없었다.

하지만 상선인 자신이 어명을 받아 지난 열흘 사이 세 번이나 궐 밖 위사령의 집을 드나든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민 내관이, 어렵게 모셔온 귀인이 이제 막 황제와 점심을 들기 위해 별궁으로 향할 참에 향비 얘기를 꺼내며 깽판을 놓는 것은 본분과 주제를 한참 망각한 행동이었다.

“향비마마와 선약이 있으십니까?”

민 내관의 언질에 허연이 곤란한 표정으로 욱에게 물었다. 그러자 욱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뭐 대수로울 것 있느냐는 듯 민 내관을 돌아보았다.

“미향궁에는 다음에 갈 것이다. 오늘은 아이들과 점심을 들라고 향비에게 전하라.”

그렇게 한마디 이르고는 욱이 허연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그러고는 국향원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국향원은 황룡전에서 명우당 가는 길에 숨은 듯 자리한 자그마한 정원이었다. 키 높이의 담장으로 에워싸인 국향원은 황궁 안의 이름난 정원에 비하면 특별한 볼거리라곤 없고 위치도 외져서 다른 계절에는 궁인들의 발길조차 뜸한 곳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버려져 있던 이 작은 뜰은 국화가 본격적으로 피어나는 늦여름이 되면 마치 주술에라도 걸린 듯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변모해서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끌곤 했다.

황궁에서 전각과 경관이 가장 아름다운 곳을 꼽으라면 단연 우화원이지만, 마당 한가득 가을 국화가 만발한 국향원의 정경은 또 다른 아름다움과 정취가 넘쳤다. 황궁 안엔 아름다운 전각과 정원이 곳곳에 숨어 있었지만 가을이 한창일 때엔 국향원만 한 정취도 찾기 어려운 까닭에 중추절 즈음엔 내외명부의 소소한 다과연은 대부분 국향원에서 열렸고, 비빈들의 산책도 매일같이 이어지곤 했다.

황궁에서 보낸 시간이 만 3년에 이르지만 그간 휘명전 출입조차 손에 꼽을 정도였던 허연이 한 번도 지난 적 없는 길을 지나 고개를 살짝 숙여야 지날 수 있을 정도로 낮은 문 안으로 들어섰다.

“거기 서서 무엇을 하는가? 어서 오지 않고?”

청량한 가을 햇살 아래 수만 송이의 국화가 반짝이는 국향원의 정경을 감상하느라 멈춰 선 허연을 욱이 뿌듯한 눈길로 돌아보며 재촉했다. 그때, 맑고 시원한 바람이 담장을 넘어와 욱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휘날렸다. 그와 함께 아찔할 정도로 진한 국화 향이 코끝을 스쳐 허연의 온몸에 휘감겼다. 눈부신 국화 정원 한복판에 선 욱의 아름다운 모습에 취하고, 그 향기에 취한 허연이 한순간 몰려온 현기증을 이기려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다리가 아파서 그러는가?”

허연이 꾸물거리며 움직이질 않자 욱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발길을 돌렸다.

“교자를 준비하라 이를 것을…… 내가 들떠서 그대의 몸이 편치 않은 것을 잠시 잊었었네.”

“다리가 아파서 걸음을 멈춘 것이 아닙니다.”

욱이 내민 손을 마주 잡으며 허연이 대답했다. 

“허면?”

“정원이 아름답고 금빛 국화가 폐하와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잠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해보게. 그대 마음을 빼앗은 것이 국화인가, 과인인가?”

그 짓궂은 물음에 허연이 욱을 슬쩍 노려보았다. 

“국화도 좋고 폐하도 좋지만, 사실 지금 제 마음을 다 빼앗은 것은 수라청 궁인들이 정자에 차리고 있는 점심상입니다.”

그렇게 대꾸하며 이번엔 허연이 욱의 손목을 잡아끌고 정자로 향했다.

“무슨 말이냐? 안 오신다니? 곧 오신다는 연통을 방금 받았거늘, 어디로 발길을 돌리셨단 말이냐?”

향비의 날카로운 추궁에 신 내관이 어깨를 떨며 고개를 깊이 조아렸다.

“송구하옵니다, 마마.”

“그사이 다른 전각에서 농간을 부려 폐하를 뫼셔 가기라도 했단 말이냐? 어떤 년이냐? 현비냐, 아니면 인비냐? 혹, 황후가 나를 경계하여 폐하의 행차를 막은 것이냐?”

향비가 거듭 신 내관을 다그쳤다. 

“실은 우화원 귀인이 환궁하여 휘명전에 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폐하께서…….”

“그자가 돌아왔단 말이냐?”

허연의 환궁 소식에 향비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예, 마마…….”

“멋대로 위사령의 집으로 나가 폐하께서 상선을 거듭 보내도 꿈쩍 않던 자가 어찌 들어왔단 말이냐?”

“폐하께서 오늘도 상선을 보내 환궁을 재촉하시니, 못 이기는 척 들어온 듯싶습니다. 아예 궁을 떠날 작정을 한 것이 아닌 이상 어찌 폐하의 명을 세 번이나 물리치겠습니까?”

“황궁이 제멋대로 드나들 수 있는 저자거리의 여곽도 아니거늘, 나가고 싶으면 나가고 들어오고 싶으면 들어오고…… 내일모레 마흔을 바라보는 중늙은이 주제에 폐하께서 좀 아껴주신다고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그때, 보모의 품 안에서 잠들었던 공주가 깨어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심기 불편한 참에 공주의 잠투정까지 더해지자 향비가 짜증 가득한 눈으로 보모상궁을 노려보았다.

“보모상궁이란 것이 애 하나 제대로 보지 못하고, 어찌 하루 종일 공주를 울리느냐?”

“송구하옵니다, 마마.”

향비의 책망에 보모상궁이 덜덜 떨며 연신 허리를 굽혔다.

황후가 둘째 황자를 낳은 이후 하루도 그칠 날 없는 향비의 짜증과 성화에 시달리느라 미향궁 궁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혼이 반절은 나간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향비의 불호령이 집중적으로 떨어지는 곳은 단연 공주의 유모와 보모상궁 쪽이라서 두 사람은 향비의 발소리만 들려도 어깨를 떨 정도로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다.

보모상궁이 안고 어른 보람도 없이 공주가 큰 울음을 터뜨리자 향비가 이번엔 공주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보모상궁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찌 멍하니 서 있느냐? 정신 사납다! 당장 데리고 나가거라!”

공주를 쫓아내듯 내보내고 나서도 분을 이기지 못해 씩씩거리던 향비가 기어이 차려놓은 점심상을 엎어버리고 말았다. 황후가 둘째 황자를 낳고, 그로 인해 내외명부의 모든 관심이 새로 태어난 황자에게 쏠려버린 이후 향비는 극도의 허탈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월국 남서부의 대토호인 수 씨 집안의 셋째 딸로 태어난 향비는 어려서부터 온갖 호사를 다 누리며 원하는 것은 갖지 못한 적이 없었고,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한 적도 없었다. 그렇게 명문가의 장중보옥으로 자라다 나이 열일곱에 황제의 비라는 높은 지위를 하사받고 당당하게 대화문으로 입궁을 하게 되니, 일신의 영화가 더 오를 곳이 없을 정도로 극에 달한 형국이었다.

태화궁엔 이미 황후가 버티고 있었고, 자신은 같은 날 입궁한 세 명의 후궁 중 하나일 뿐이었지만 욕심이 많고 무슨 일이든 지기 싫어하는 향비의 마음엔 황제와 불화설이 파다한 황후는 우습고 만만해 보일 뿐이었다.

진목성의 유 씨 집안이 명문가라고는 하지만 자신의 가문도 결코 처지지 않는 명가인데다, 황후가 미모나 자질이 특출 나서 그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라 요행히 나이가 자신보다 두세 살 많고 시기를 잘 만난 덕에 중궁을 차지한 것이니 뭐 대단할 것이 있으랴. 더구나 황제와 황후는 온 나라가 다 알 정도로 불화가 깊으니 비록 후궁의 처지라 하더라도 황제의 총애를 차지하고 아들만 낳는다면 칠궁의 안주인을 바꾸는 일도 어렵지 않으리라는 것이 입궁 당시 그녀의 포부였다.

게다가 입궁을 해보니 황제는 듣던 것 이상으로 젊고 훤칠한 미장부인데다 소문에 듣던 것처럼 매정한 성품도 아니었다. 황제의 태도는 빈말로도 다정하다고 하기는 어려웠지만 향비가 다른 후궁보다 앞서 회임을 한 이후로는 어느 후궁보다 미향궁을 자주 찾아 안부를 물으며 보살펴주었고, 친정 아비와 오라비에게 각각 대부와 비서랑의 벼슬을 내려 가문의 위신을 세워주기까지 했다. 때문에 향비는 황제의 마음이 황후를 완전히 떠나 자신에게로 향했다는 확신을 가졌고, 좀처럼 황제와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는 황후를 대놓고 깔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 와중에도 정신을 못 차린 황후의 친정 어미와 동생이 멋대로 우화원을 드나들며 황궁의 보물을 제 것인 양 멋대로 빼돌리다가 완전히 황제의 눈 밖에 나서 후궁은 더욱 번잡스러워졌고, 거기에 더해 자신은 순조롭게 아들을 낳은 반면 건강하던 원자는 급병을 얻어 사경을 헤매다가 결국은 눈이 멀고 말았으니, 이는 자신의 존귀함을 하늘이 알아보고 태화궁으로 가는 문을 열어준 격이라 향비는 더욱 기고만장해져서 칠궁의 실질적인 안주인을 자처하며 위세를 한껏 뽐냈었다.

향비의 생각에 황후의 폐위는 정해진 수순이고, 자신이 중궁을 차지하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매사에 무덤덤하고 잔정이 없는 황제도 자신이 애교를 피우며 감기면 싫은 내색 없이 받아주었으니 향비는 황제의 마음까지도 한 손에 틀어잡은 줄로만 알았고, 모든 일이 이토록 손쉽고 순조로우니 세상에서 자신이 이루지 못할 일이란 하나도 없다는 자신감과 교만함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하지만 황제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총비이며 곧 태자에 책봉될 제2황자의 생모라는 지위를 마음껏 즐기며 태화궁의 주인이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중, 어느 시점부터 일이 틀어지는가 싶더니 시간이 거꾸로 흐르기라도 한 듯 그간 공들여 도모했던 일이 하나씩 하나씩 무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뭔가 잘못되어간다는 느낌에 불안한 나날을 보내던 끝에 원자는 대통을 이어받기엔 부족하니 내 아드님이 반드시 태자가 되리라던 기대까지도 보름 전 황후가 4황자를 낳은 것으로 산산이 부서져 모든 일이 마치 일어나지도 않았던 듯 원상태로 돌아가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황후가 황자를 낳은 후론 황제가 태화궁에서 살다시피 하며 황후와 새로 태어난 아이를 돌보며 중궁의 체면을 단단히 세워주고 있었으니 상황은 향비가 처음 입궁했을 때보다 더 불리했다. 명문가의 영애로 태어나 풍파라곤 모르고 순조롭게만 살아온데다, 주변의 관심과 사랑을 제 한 몸에 받지 못하면 견디지 못하는 향비에게는 한순간에 뒷전으로 밀쳐진 듯 초라해진 자신의 처지가 도무지 받아들여지질 않았다.

“폐하께서 내게 어찌 이러신단 말이냐? 그깟 남첩 따위가 뭐라고…….”

“마마…….”

“그 흉악한 자가 하필이면 내가 회임하여 폐하께서 마음 둘 곳이 없으실 때에 돌아올 것이 무엇이냐? 그자가 과거의 정인이랍시고 다시 우화원을 차지하고 앉아 폐하의 성심을 어지럽히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회임 중이라 그 일을 돌이킬 방법이 없더니, 기어이 이렇게까지 되었구나.”

“…….”

“차라리 저것을 낳지를 말 것을…… 열 달간 그 고생을 하고 낳은 것이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계집아이라니…… 아예 회임을 안 했더라면 폐하의 성심을 그런 자에게 빼앗길 리도 없었을 것을…….”

향비가 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지난 몇 달간 염불처럼 외던 신세타령을 다시 시작했다.

“마마, 공주님은 폐하의 장녀이십니다. 폐하께서 공주님을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향비가 요즘 들어 입만 열면 신세타령이요, 그 시작은 황제를 원망하고 허연을 비난하는 것이지만 결론은 언제나 강보에 싸인 어린 공주를 탓하며 자신의 모든 불행이 공주로부터 비롯된 듯 덮어씌우는 것이라 신 내관이 민망한 표정으로 향비를 만류했다.

“흥, 폐하의 장녀니 독녀니, 찍어 붙이는 말은 번듯하구나. 하지만 정녕 그렇게 귀한 딸이라면 어찌 아이가 아프다고 연통을 발발이 보내도 눈먼 내관을 보내 문병을 하고 마신단 말이냐?”

“마마…….”

“애초에 황실에 공주가 무슨 소용이냐? 황자를 낳았어야 했는데…… 저것이 공주가 아니라 황자였으면 폐하께서 이전보다 나를 더욱 귀히 여기셨을 것이고, 다시 태화궁에 출입을 하시는 일도 없었을 텐데…… 우화원 그자에게 그렇게 오래 빠져 계시지도 않았을 텐데…….”

끝도 없이 넋두리를 늘어놓던 향비가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옷섶을 잡아 뜯으며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때는 9월 초순, 하늘은 한없이 높았고 한낮에도 차갑고 청량한 바람이 불어 사소한 근심 따위는 다 날릴 듯 아름다운 날이었다. 때때로 아찔할 정도로 진한 국화 향이 코끝을 스치는 아름다운 정원 복판에서 허연과 마주 앉은 욱이 먼 곳에 피어 있는 검붉은 국화를 쳐다보고 있는 허연을 힐끔거리다가 한 젓가락 집었던 볶은 국수를 앞섶에 흘리고 말았다.

“에그, 어쩌나. 기름진 국수 때문에 의복을 다 버리셨네.”

윤 내관이 얼른 욱의 앞섶에 걸린 국수 가닥을 치우고 수건으로 얼룩을 닦았다. 그러고는 빈 접시에 갖은 해물과 함께 볶은 국수를 푸짐히 담아 다시 욱에게 올렸다.

“폐하, 조 내관을 휘명전에 보내 새 옷을 가져오게 할 것이니 우선 수라를 마저 드십시오. 또한 수라를 드실 때엔 드시는 일에만 집중을 하십시오. 이렇게 어수선하게 드시다가 체증이라도 드시면 어찌합니까?”

“어…… 알았다.”

허연이 자신을 돌아보며 혀를 끌끌 차는 것을 본 욱이 민망함에 얼른 접시를 받아 들고는 국수를 입안에 쓸어 넣었다.

“무엇에 정신에 정신이 팔리셔서 음식을 그렇게 흘리십니까?”

“그럴 일이 있네.”

꽃이 가득한 정원에서 불어오는 향기로운 바람에 머리카락 휘날리며 앉아 있는 모습이 아름다워서 잠시 넋을 잃었다고 솔직히 말할까 하다가, 자신을 영 모자란 어린애 보듯 하는 허연의 눈길에 마음이 상해서 욱이 퉁명스럽게 둘러댔다.

“그럴 일이라니…… 혹 뭔가 근심이 있으십니까?”

“뭐 그냥…….”

“가만 보니 드시는 것보다 옷에 흘리는 것이 더 많으십니다. 이리하시면 옷방에 걸린 의복이 수백 벌이라 해도 어찌 감당을 하겠습니까?”

허연이 마땅치 않다는 눈길로 욱을 보며 핀잔을 날렸다. 욱이 지금 입고 있는 의복은 비록 평상복이지만 최상품의 비단으로 짓고 옷깃과 소맷자락에는 금사로 용을 수놓은 아름다운 옷이었다. 보통 때에도 욱은 황의보다는 검은색, 청색, 흑자색 의복을 자주 입었는데, 허연이 보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색은 지금 걸치고 있는 것과 같은 암청색이었다.

눈이 시원해질 정도로 짙은 푸른색 도포를 걸치고 휘명전 석대 위에 버티고 선 욱의 모습은 무덤덤한 허연의 가슴조차 설레게 할 정도로 아름다웠고, 못 본 사이에 키가 한 뼘은 더 자란 듯 보일 정도로 늠름했다.

하지만 막상 식탁에 마주 앉고 나니 점심 한 끼 먹는 데 국물 쏟고 국수 흘리고……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내심 흡족해했던 옷 한 벌을 삽시간에 버려놓는 모습에 잠시 품었던 뿌듯한 자부심이 다 날아갈 지경이었던 것이다.

“요즘 들어 장족의 움직임이 부쩍 수상하다는 장계가 자주 올라와서 그 생각 하느라 국수 몇 가닥 흘렸네. 그게 그렇게 큰 잘못인가?”

욱의 짜증 섞인 변명에 허연이 저도 모르게 풋 하고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수라를 드실 때엔 변방이 아니라 대화문 앞에 적병이 밀어닥쳤다고 해도 개의치 않으실 분이 아니십니까? 그런데 수천 리 밖에 있는 장족 때문에 입맛이 없으십니까?”

“그럴 수도 있지. 과인은 이 나라의 황제가 아닌가?”

욱의 뻔뻔한 대꾸에 허연이 못 당하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마당에 핀 국화꽃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때, 또다시 꽃향기 가득한 바람이 불어와 허연의 머리카락을 올올이 날렸다. 자꾸 날리는 머리카락이 성가시게 느껴진 허연이 반 묶었던 머리를 아예 풀어버렸다. 바람에 어지럽게 날리는 머리카락을 다시 묶으려고 손으로 대강 쓸어 올리는 허연의 모습에 한눈을 팔던 욱이 이번엔 장에 찍은 은어 튀김으로 뺨을 찌르고 말았다.

“폐하, 고정하시고 물 한 잔 쭉 드시옵소서.”

보다 못한 윤 내관이 비단 수건으로 간장 묻은 욱의 얼굴을 박박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곤 허연을 힐끔 한 번 쳐다보고는 물 잔을 집어 욱의 앞에 내려놓았다.

“아무리 귀인을 보름 만에 보시는 것이라도 그렇지…… 어찌 이렇게까지 정신을 못 차리십니까?”

“어허!”

정곡을 콕 찌르는 윤 내관의 잔소리에 욱이 발끈해서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허연과 같이 있을 때면 욱의 심성이 많이 부드러워지고, 어지간한 일엔 크게 화내는 일이 없는 것을 윤 내관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윤 내관은 별반 당황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차분하게 변명을 했다.

“수라를 이리 어수선하게 드시다가 급체하실까 염려스러워 그러지요. 귀인께서야 이제 돌아오셨으니 급히 또 어딜 가시겠습니까? 다시 우화원에 모셔두고 꽃구경 하듯 두고두고 보시면 될 일을요.”

“그것은…… 그렇지.”

그래도 허연이 일단 돌아왔으니 다행이라 생각하며 욱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는 욱과 윤 내관 사이에 오고 간 대화에 혼자 낯을 붉히고 있는 허연을 심술 어린 눈길로 노려보았다.

“말해보게. 그렇게 멋대로 처소를 뛰쳐나간 이후, 그대는 내가 보고 싶지도 않던가? 고 내관과 어울려 시장거리 구경하고 탁주로 배를 채우고, 위사령네 집 옹색한 사랑채에 끼어 지내는 것이 그리 좋던가?”

“겨우 보름이 아닙니까?”

허연의 겸연쩍은 대꾸에 욱이 정색을 하고 탁자를 손바닥으로 탁탁 두드렸다.

“겨우 보름이라니? 내게는 하루가 열흘 같았거늘…….”

“저한테는 보름이 그냥 보름 같았습니다.”

허연의 시큰둥한 대답에 욱의 표정이 확 썩어들어갔다.

“온 도성을 싸돌아다니느라 신이 났었구먼.”

“소인이 황궁에서 보낸 시간이 3년이지만, 그 대부분을 오롯이 우화원에서만 보내지 않았습니까? 오랜만에 바깥바람을 쐬고, 허름한 주막에 앉아 세상 돌아가는 얘기도 듣고…… 그토록 자유롭고 홀가분한데 어찌 좋지 않았겠습니까?”

“서방님은 이 높은 담장 안에 갇혀서 산모 수발들고 우는 아이 달래는 사이, 홀로 궁을 나가서 그렇게 홀가분하고 좋았는가?”

욱의 투정에 허연의 눈길이 한순간 엄해졌다.

“남의 처자를 돌보셨습니까? 폐하의 부인이고, 아이가 아닙니까?”

“내가 언제 처자를 돌보지 않겠다고 했는가? 누가 들으면 내가 그대에게 푹 빠져서 처자를 버리기라도 하는 줄 알겠네!”

욱의 거친 항변에 주변에 둘러선 내관들이 연달아 흠, 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가만 버려두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기세였건만 시침 딱 떼고 도리어 언성을 높이니, 아무리 지체가 높고 자신들이 뫼시는 주인이라고 해도 정도를 넘은 뻔뻔함엔 내관들도 당황할 때가 많았다.

“지난번, 향비께서 공주마마를 생산하셨을 때에 폐하께서 좀 무심하셨던 것은 사실이 아닙니까? 저도 그때는 환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라 경황이 없어 미향궁의 일을 살피지 못하고 지나쳤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향비께서 많이 서운하셨겠다 싶어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곤 합니다.”

“어차피 황궁의 법도는 사가와는 다르지 않은가? 비록 중궁이라도 회임을 하면 그날 이후로 해산할 때까지 황제의 그림자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예로부터 허다했네. 나 역시 그런 것이 법도이고 황궁 인심이라 중궁이건 후궁이건 회임을 하면 몸조리 잘하라 당부나 하고 계속 다른 후궁을 떠돌아 다녔거늘, 이제 와서 뭘 어쩌라고 이 성화인가?”

“사람 사는 곳은 황궁이건 가난한 촌부의 집안이건 다르지 않을 터, 초장부터 부인들에게 크게 원망을 사면 나중에 늙어서 고생하십니다. 더구나 폐하께서는 부인이 한두 분도 아니시니 더욱 마음을 쓰셔야지요.”

허연의 은근한 바가지에 욱이 있는 대로 인상을 쓰며 씩씩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허연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 내관이 반주로 따라준 국화주를 훌쩍 들이켰다.

“애초에 제가 궐문을 나설 때엔 아기씨가 백일은 지난 연후에 환궁하려고 했었으나…….”

“뭐시라?”

욱이 놀라서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그 바람에 앞에 놓였던 물 잔이 엎어지고 젓가락이 바닥에 떨어져서 지밀 내관들이 또 그것을 집어 치우느라 부산하게 움직였다.

“보자보자 하니, 이 사람이…… 백일이라니?”

“그만하면 황후께서도 산후에 폐하의 보살핌이 부족했다고 서운해하지는 않으실 듯싶고, 저 또한 맑은 가을 달빛 아래 호젓하게 천변을 거닐다 보면 석 달도 하루처럼 흘러가겠기에…….”

“그렇게 홀가분하면 아예 내년 봄에나 돌아오지, 왜 벌써 왔는가?”

“그간 위사령을 아침저녁으로 불러서 저를 집에서 빨리 내보라고 채근을 하셨다지요?”

허연이 욱을 슥 노려보았다. 비록 한순간이었지만 그 눈길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욱뿐 아니라 곁에 있던 윤 내관까지도 속이 서늘하게 시릴 정도였다.

“그, 그것은…….”

그간 진관우가 휘명전에 들 때마다 짜증도 내고, 억지도 부리고…… 좀 심하게 다그쳤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 욱이 말을 더듬었다.

“내가 따로 부른 적은 없고, 위사령이 제 발로 휘명전에 들었기에…….”

“매부의 직책이 위사령이니 조석으로 편전에 들어 황성 안팎의 일을 보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그야 그렇지만…….”

“능력 있고 충성스럽고…… 조정에 신하가 많다고 해도 그만한 인재는 드물거늘, 그 점잖은 사람을 어찌 그렇게 볶아치십니까? 위사령이 폐하께 시달려서 요즘 눈 밑의 검은 그늘이 사라지질 않습니다.”

허연이 계속 진관우를 두둔하며 따지자 잠시 당황했던 욱이 얼른 기세를 회복해서 반격에 나섰다.

“위사령이 내게 싫은 소리 몇 마디 들었다고 쪼로록 달려가서 그대에게 일러바치던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미안하다 사과하고 앞으로는 그렇지 않겠다고 약조를 하셔야지, 웬 엉뚱한 트집이십니까?”

“어쨌든, 그래서 결론은 나는 꼴도 보기 싫은데 진관우가 걱정이 되어 환궁을 했다는 것인가?”

“폐하가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

욱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허연이 뭐 놀랄 것이 있느냐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홀로 다니는 저자 구경이며 천변 산책이 뭐 그리 들뜨고 신이 나겠습니까? 그것도 한두 번이고 하루 이틀이지요. 크고 생소한 거리 구경이 번잡한 일을 잊고 시간 보내기는 좋았으나 매번 아쉽기도 해서, 지난 며칠은 집 안에서 책이나 보고 글씨나 쓰며 하루를 보냈습니다.”

“매번…… 무엇이 아쉬웠단 말인가?”

갑작스럽게 속이 확 달아오른 욱이 침을 꼴깍 삼키며 슬그머니 허연의 속을 캤다.

“알면서 굳이 뭘 물으십니까?”

슬쩍 핀잔을 주며 허연이 은어 튀김을 집어 욱의 입에 물렸다.

욱은 내숭 떨지 말고 속마음을 솔직히 털어놓으라고 자꾸 허연을 조르고, 허연은 그때마다 욱의 입에 편육이며 나물 무침을 밀어 넣었다. 그러면 또 욱은 답례라도 하듯 허연에게 직접 국수도 덜어주고 은어 튀김도 집어주며, 수룡천 밤나들이도 시들할 정도로 내가 보고 싶었는가, 그럼 바로 돌아와서 나를 보면 되지 뭘 그런 것을 다 참고 그랬느냐고 너스레를 떨었고 그러면 허연은 또 욱이 싫어하는 반찬을 골라서 그 얄미운 입을 틀어막았다.

“하온데 폐하…….”

욱과 허연이 살벌하면서도 화기애애하게 점심 드는 것을 시중들며 지켜보던 고 내관이 욱이 허연의 빈 잔에 국화주를 따르느라 잠시 말이 끊어진 틈을 타서 슬그머니 운을 뗐다.

“왜 그러느냐?”

그간 자기 자리를 꿰차고 허연과 신나게 놀아난 고 내관을 욱이 슬쩍 노려보았다.

“열흘쯤 전에 진목성 영주가 태화궁의 경사를 감축 드리며 남양에서 난 진주 한 상자를 올렸다고 들었습니다.”

“진주?”

욱이 되물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후가 이번에 생산한 황자는 황제의 넷째 아들이자 두 번째 적자였다. 황손의 탄생은 나라의 경사였으나 보통의 경우라면 4황자의 탄생은 그렇게까지 세간의 주목을 받을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원자가 병으로 시력을 크게 상해서 있어도 없는 신세가 되고, 후궁들이 각자의 소생을 내세워 태자 자리와 황후궁까지 넘보는 상황에서 맞은 적자의 출생은 큰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황자의 출산 직후부터 보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국 각지에서는 황실의 경사를 축하하는 사절이 끝없이 이어졌고, 그들이 바친 귀한 선물로 황실의 보고는 더 이상 빈자리가 없을 지경이었다.

“소인이 듣기론 씨알 굵은 백진주 백 개에 귀하디귀한 흑진주도 50개나 들어왔다고 하던데…….”

“생각해보니 그간 들어온 하례품 중에 그런 것이 있었던 듯도 싶구나. 헌데 그것은 왜?”

“소인이 그 진주를 좀 봤으면 싶어서요.”

“어허!”

뜬금없는 진주 타령에 허연이 엄한 표정으로 고 내관을 단속했다. 하지만 비단 못지않게 패물에도 관심이 많은 것이 고 내관의 천성이라서 욱이 그 은근한 청에 피식 웃으며 윤 내관을 돌아보았다.

“그 진주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영주당에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폐하.”

영주당은 황실 보고인 광명전에 딸린 별채였다. 광명전 본당은 각종 서화와 도자기, 조각품, 선대의 장식품 따위 커다란 물건을 주로 보관하는 데 반해 영주당은 금괴와 금붙이, 옥과 비취를 비롯한 각종 보석과 선대의 보관 등, 보다 값진 것을 간수하는 곳이었다. 윤 내관의 대답에 욱이 고개를 끄덕이며 고 내관을 돌아보았다.

“우화원 태감인 네가 광명전에서 보지 못할 것이 어디 있고 쓰지 못할 것은 또 무엇이겠느냐? 가서 보고 귀인에게 소용될 만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갖다 쓰도록 하라.”

“하이고, 폐하. 참으로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욱의 흔쾌한 허락에 고 내관이 코가 땅에 닿도록 허리를 굽혔다. 그러곤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더니 이내 등을 돌려서 국화꽃 만발한 정원의 오솔길 사이로 후다닥 내달렸다.

“고 내관을 자꾸 그렇게 부추기지 마십시오, 폐하.”

허연의 주의에 욱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뭘 어쨌다고?”

“고 내관이 경우가 없는 사람은 아니지만, 의복과 패물에 대한 집착이 남달라서 그와 관련된 일에는 정신을 놓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엄히 단속하고 주의를 줘도 마음 다스리기 어려운 사람에게 어찌 그렇게 바람을 불어 넣으십니까? 그러다 자칫 실수라도 하면 다치는 사람은 고 내관입니다.”

“자칫 실수로 다치다니, 그 무슨 맥락 없는 걱정인가? 고 내관은 그대의 태감일세. 그대 외에 어느 누가 고 내관을 벌할 수 있단 말인가?”

“페하!”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내가 언제 가장 보고 싶었는가? 수룡천변 객잔에서 흐르는 물을 보며 홀로 술잔을 들 때였는가? 아니면 썰렁한 침상에 누워 잠을 청할 때였는가? 아니면…….”

주변에 내관들이 빽빽이 둘러서 있는데 자꾸만 이상한 것을 물어보며 대답하라고 보채는 욱의 성화에 허연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곤 눈을 내리깔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폐하의 용안이야 무시로 떠올랐으나, 유독 시장통의 과자 가게 앞을 지날 때엔 바로 앞에 서 계신 듯 눈에 선했습니다.”

국향원은 그 위치가 황궁의 서쪽 가장자리였고, 광명전은 월영호 언저리에 자리 잡고 있어서 천천히 걸어가면 한 시진은 걸리는 거리였다. 하지만 고 내관은 전력으로 달려서 불과 반 시진 만에 광명전 정문 앞에 당도했다.

“고 태감 아니신가? 이제야 환궁을 하셨는가?”

광명전 관리 책임을 맡은 곽 내관이 고 내관 왔다는 소식에 얼른 달려 나와 그를 맞았다. 곽 내관은 우화원 태감으로 있는 고 내관보다 직급은 낮았지만 이제 환갑이 다 되어가는 노인이라 환관들은 누구나 그에게 말을 높이며 예를 갖췄다.

“아주 환궁한 것은 아니고, 잠시 들렀습니다. 저희 마마께서 궐 밖 사가에서 한 달은 계시고자 하니…….”

고 내관이 고개를 꾸벅 숙여 곽 내관에게 인사를 했다.

“폐하께서 그리 찾으시는데 못 이기는 척 돌아오시지 않고…… 자네 마마께서도 고집이 보통 아니시네.”

“그러게 말입니다. 두 분 기 싸움에 저와 상선만 죽을 지경입니다.”

“헌데, 마마 뫼시고 잠시 들렀으면 휘명전에 있어야지, 이 구석진 전각엔 무슨 일인가?”

곽 내관의 물음에 고 내관이 히죽 웃었다.

“다 알면서 뭘 굳이 물으십니까?”

“알다니?”

곽 내관이 모른 척 짐짓 헛기침을 했다. 지난 1년간 휘명전에 진상된 모든 패물은 대부분 황후궁, 아니면 우화원으로 보내졌고, 그중에서도 아름답고 눈에 띄는 것은 영주당을 거칠 것도 없이 바로 우화원으로 직행하는 일도 빈번했다. 더구나 요즘은 광명전에 진귀한 패옥이 넘쳐나는 시기라 곽 내관도 고 내관이 무엇을 노리고 왔는지는 대강 짐작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 보름 사이 광명전에 들어온 것들은 모두 황후의 황자 생산을 축하하는 선물인데 그것까지 고 내관에게 내주어도 뒷말이 없을지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홍옥, 취옥, 비취, 산호, 진주…… 황자마마의 탄신 축하 선물로 온갖 보물들이 줄줄이 들어왔다면서요?”

“그것은 그렇지만 그것들은 모두…….”

“폐하께서 저희 마마께 소용될 만한 것이 있으면 뭐든 갖다 쓰라고 윤허를 하셨으니 공연한 걱정 할 것 없으십니다. 광명전의 모든 보물은 황제 폐하의 것이 아닙니까?”

황제에게서 확실히 허락을 얻었다는 고 내관의 장담에 곽 내관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폐하께서 윤허를 하셨다면 문제 될 것이 무엇인가? 어서 들어오게.”

그렇게 말하며 곽 내관이 앞장서서 영주당 안으로 들어갔다.

영주당은 광명전 별채 중에서도 크기가 가장 작은 곳이었다. 하지만 그 작은 방은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보물이 쌓인 보고 중의 보고로 황제의 허락 없이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드나들 수 없는 구역이었으니, 고 내관처럼 영주당을 별다른 절차 없이 드나드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특권이었다.

보통 방 두 칸 정도 되는 작은 방은 천장까지 닿을 정도로 높은 선반이 벽을 빙 둘러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선반 위엔 크고 작은 상자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빼곡히 차 있었는데, 그 상자 속에 든 것이 하나같이 저자에선 구경도 할 수 없는 보석과 진귀한 보물들이라 고 내관은 영주당에 들어설 때마다 황홀경에 빠졌고, 이 상자 저 상자 열어서 보물을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것도 까맣게 잊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황제와 점심을 함께하는 허연을 두고 잠깐 짬을 낸 것이라 여유가 없는 탓에 고 내관은 진목성 영주가 바쳤다는 진주 상자를 열어 흑진주가 든 비단주머니만 챙겨 들었다.

“그것만 가져가는가? 천운상단에서 거북이 등판만 한 취옥도 한 덩어리 보내왔는데…….”

“제 마음 같아선 귀한 것은 무엇이든 가져다 휘감아드리고 싶지만, 저희 마마께선 너무 번쩍거리는 장신구는 꺼려하시는지라…….”

“허긴…… 진주는 여인들의 보석이라 귀인께서는 진주로 만든 것은 목걸이도, 귀걸이도 안 하신다지?”

“본래 귀족들은 사내라도 여인들만큼이나 요란하게 꾸미고 걸치는데, 왜 그리 유난하신지…….”

“그럼 그 진주는 가져다 무엇에 쓰려고?”

“이번에 마마의 겨울 외투를 새로 짓는데, 그 옷깃에 달아드리려고요.”

고 내관의 대답에 곽 내관이 어이가 없어서 허허…… 하고 웃었다.

“어지간한 귀부인들도 반지나 귀걸이에 겨우 쓰는 보석을 옷에다 꿰매드리려고 하는가? 자네도 정말 대단하네.”

“이것을 작은 홍옥과 번갈아 꿰어 옷깃에 붙이면 마치 목걸이를 하신 듯 보일 것입니다. 귀인께서는 목선도 길게 쭉 빠지셔서 목걸이도 잘 어울리실 텐데, 목에 거는 것이라면 질색을 하시니…… 저도 달리 방도를 찾아야지요.”

그렇게 대답하며 고 내관이 흑진주가 50여 개나 든 주머니를 허리에 차고 있는 전대에 넣고 허리끈을 단단히 조여 맸다.

진목성 영주가 휘명전에 흑진주를 한 주머니나 올렸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부터 고 내관은 그 귀한 것을 누가 먼저 채가면 어쩌나, 황제는 백진주, 흑진주 분간도 못하고 보석 귀한 것도 모르니 그것을 상자째 황후전으로 보내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밤에 잠을 다 설칠 정도였다.

그렇게 홀로 속을 끓이던 차, 위사령의 집에서 꿈쩍도 않을 듯 버티던 허연이 갑자기 마음을 바꿔 궁에 든 덕에 반쯤 포기하고 있었던 진주를 손에 넣게 되었으니 그것도 기쁘고, 올해는 정말 마음에 쏙 드는 작품이 나오겠구나 싶은 기대에 들떠 국향원으로 돌아가는 고 내관의 발걸음은 새털처럼 가볍기만 했다.

그렇게 나풀나풀 국향원으로 돌아가던 고 내관이 궁내청 모퉁이를 돌다가 걸음을 멈췄다.

늙은 상궁 하나가 담장 구석에 주저앉아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훌쩍이는 모습을 본 때문이었다.

“누구요?”

여러 가지 기상천외한 일도 이따금 일어나는 곳이 궁이니, 궁녀가 눈물바람을 하는 정도는 흔하고 흔한 정경이었다. 하지만 머리가 희끗희끗한 상궁이 어린 궁녀 하나 없이 홀로 다니는 것도 이상하고, 자신이 속해 있는 전각도 아니고 여러 사람 오가는 궁내청 근처에서 울고 있는 정황도 수상쩍어서 고 내관이 상궁에게 다가갔다. 고 내관이 다가서자 상궁이 얼른 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뒤로 물러섰다.

“영운궁의 권 상궁이 아닙니까?”

대답도 못하고 한없이 뒷걸음질만 치는 여인이 공비 전각의 상궁인 것을 알아본 고 내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권 상궁은 본시 공비의 유모로 평생 그녀를 돌보다가 입궁할 때에도 따라 들어온 몸종이었다. 사실 그녀는 신분도 미천한데다 정식으로 상궁의 직첩을 받은 것도 아니었기에 그 신분은 어디까지나 후궁의 수발 궁녀에 불과했다.

하지만 성질 사나운 공비가 그녀만은 친정 어미인 듯 의지하며 따랐고, 다른 전각의 궁녀들이 그녀를 위세도 없는 후궁전의 하녀라고 하대하고 타박이라도 하는 날엔 바람같이 달려와서 바로바로 응징을 하다 보니 어느새 콧대 높은 황궁의 궁인들도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꼬박꼬박 권 상궁이라고 높여 부르게 된 것이었다.

“아니, 권 상궁이 왜 이런 곳에서…… 혹 다른 전각의 궁인들에게 행패라도 당했습니까?”

재작년 여름쯤, 권 상궁에게 천한 종년이라고 막말을 했던 향비궁 내관 하나가 공비에게 따귀를 정통으로 얻어맞고 고막이 터지는 불상사를 당한 이후로 그녀에게 행패를 부리는 간 큰 내관이나 궁녀는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물으면서도 고 내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닙니다…….”

“아니라니요? 상궁이 이런 곳에서 눈물을 뿌리고 있는 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제가 늙어서 주책이지요. 여기가 어딘지 분간도 못하고 흉한 꼴을 보였으니…….”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또 울컥 설움이 복받쳐서 권 상궁이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 훌쩍거렸다. 영운궁과는 특별한 인연도 없고, 별반 호감도 없는 처지였지만 그 모습을 보니 그녀의 막막함과 슬픔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아서 고 내관도 덩달아 눈시울이 확 따가워졌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렇게 입 다물고 상황을 감추기만 해서는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는 곳이 황궁입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힘닿는 대로 도울 것이니 무슨 일인지 얘기를 하시지요.”

고 내관의 설득에 권 상궁이 울음 섞인 한숨을 토해냈다. 그러고는 자신이 궁내청 담장 모퉁이에서 울음을 삼키고 있었던 이유를 작은 목소리로 털어놓았다.

“궁내청에서…… 몇 달째 영운궁에 궁분을 내어주지 않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궁분을 주지 않다니요? 궁분이란 황제께서 후궁에 내리는 녹봉인데 그것을 주지 않는단 말입니까?”

“궁분만 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지난봄부터 식재료며 땔감이며…… 전각에 쓰이는 비품도 전혀 받질 못하고 있습니다.”

권 상궁의 하소연에 고 내관이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좌우로 갸웃거렸다. 황제의 후비에게 궁분도, 식재료도, 땔감도 주지 않다니…… 따로 황명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후궁이 이런 일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입궁 20년차인 고 내관도 처음 듣는 얘기였던 것이다.

“지난봄부터 녹봉과 비품을 일절 받지 못했다면, 그간은 무엇으로 전각 살림을 꾸렸단 말입니까? 영운궁에 남은 궁인이 얼마 없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곳이 작은 전각은 아니질 않습니까?”

“궁분도 받지 못하는 후궁의 전각에 어느 하인이 붙어 있겠습니까? 이제 영운궁에 사람이라곤 공비마마와 저 둘뿐입니다. 그나마 그동안은 지난봄에 황후마마께서 회임하셨을 때 폐하께서 하사하신 상주 비단을 한 필씩 팔아서 어찌어찌 꾸렸는데, 이젠 그나마 떨어지고…… 아침저녁으로 바람은 싸늘한데 땔감마저 다른 궁에서 다 가져갔다며 주질 않으니 저희 마마께서는 가을이 이렇게 깊도록 썰렁한 냉골에서 밤을 보내고 계십니다.”

“어찌 그런 일이…….”

이게 무슨 일인가. 지난봄부터라면 거의 반년인데 그동안 후궁이 이토록 핍박받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니……, 이것이 혹 황명이 아닌가 싶어서 잠깐 고민에 빠졌던 고 내관이 고개를 흔들어 털었다. 황제의 성품으로 후궁이 죄를 지었으면 궁을 뒤집어엎고 후궁을 내쫓았으면 내쫓았지, 이런 식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핍박하며 괴롭힐 리는 절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곤란한 일을 겪으면서 어찌 폐하께 사정을 아뢰지 않았습니까? 폐하께서 영운궁에도 여러 번 걸음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폐하께서 다른 전각에 행차하시는 만큼 영운궁에도 걸음은 하셨으나 공비께서 어전에선 입도 벙긋 못하게 하셨습니다. 어차피 마마께서 폐하께 안사람 노릇을 하시는 것도 아니고, 쓸모도 없이 황궁에 얹혀사는 처지에 구차한 사정을 굳이 입에 올릴 것 없다 하시면서…… 이렇게 살다 죽어도 팔자가 그런 것이니 아무도 탓할 것 없다고…….”

“어허! 큰일 날 소리!”

고 내관이 펄쩍 뛰며 권 상궁의 말을 막았다. 그러고는 담벼락을 따라 왔다 갔다 하며 이 기막힌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잠시 고민에 빠졌다.

궁인들이 작당을 해서 비빈을 핍박하는 이런 사태는 황제에게 고해서 상황을 명백하게 밝히고 죄인을 찾아 벌하는 것이 합당한 해결책이었으나, 실상 황궁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일이 그렇게 정상적인 방법으로 해결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게다가 이 일의 배후가 황후나 향비라면 황제에게 알려 일을 키워봐야 힘없는 공비의 처지만 더욱 고달파질 뿐이었다.

대강 흥분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정리한 고 내관이 마침 근처를 지나는 내관 하나를 붙들어 세웠다.

“고 내관이 아닌가? 귀인께서 환궁을 하셨는가?”

뭔가 골똘한 생각에 잠겨서 사람도 못 알아보고 지나치는 내관을 붙들고 보니 마침 만만한 양 내관이라 고 내관이 얼른 그를 잡아끌었다.

“인사는 뒀다 하고, 자네, 권 상궁을 영운궁까지 좀 바래다드리게.”

“응?”

다음 달에 있을 황제의 생일 축하 연회에 올릴 새로운 춤과 음악을 구상하느라 황궁 이곳저곳을 정처 없이 떠돌며 영감을 쥐어짜던 양 내관이 갑작스러운 심부름에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나는 지금 바빠서…….”

양 내관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심부름을 거절하자 고 내관의 눈길이 대번에 사나워졌다. 고 내관이 의복 제작의 천재라면 양 내관은 예악과 연회 기획의 귀재로 정평이 나 있었다. 하지만 성격은 고 내관에 비해 한참 순한 편이라 개인적인 관계에서 양 내관은 고 내관의 밥이었다.

“자네가 바쁘면 태화궁 고양이도 바쁘겠네. 영운궁이 여기서 그리 먼 곳도 아니니 이분 먼저 모셔다 드리고 볼일 보게.”

그렇게 으르렁거려서 권 상궁을 양 내관에게 맡겨 보낸 후, 고 내관이 궁내청 정문을 한 번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흠……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문 안으로 걸음을 들여놓았다.

궁내청 태감인 배 내관은 창고에서 햇곡식과 과일을 꺼내서 각 궁으로 보낼 것을 분류하는 중이었다. 칠궁의 각 전각이 주인을 맞은 이후 궁내청의 업무도 이전에 비할 바 없이 바빠졌고, 그중에서도 매일매일 칠궁에 조달할 식재료를 분류하는 일은 그 양과 종류가 많아서 내관 십여 명이 반나절은 일에 매달려야 할 정도였다. 궁내청 마당 한쪽에선 과일을 선별하는 한편 옆문으로는 저녁에 후궁의 전각으로 보낼 생선과 고기, 각종 부식이 담긴 수레가 줄줄이 들어왔고 내관들 수십 명이 그것을 내리고 부리며 바삐 오가고 있었다.

“아니, 고 내관?”

내관들 일하는 것을 감독하던 배 내관이 뒤늦게 고 내관을 발견하고는 문 앞으로 달려왔다. 허연이 다시 우화원에 들어 황제의 총애를 독점한 이후, 고 내관도 궐 안의 중요한 인물이 되어 내관들의 인사를 먼저 받으며 위세 있는 후궁전 태감의 대접을 제대로 누리고 있었다.

“귀인께서 환궁을 하셨는가? 그리 갑작스럽게 나가시더니, 돌아오실 때도 기척 없이 오시네 그려.”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나야 노상 그렇지, 칠궁에 물품이나 대면서 지내는 내게 별스럽게 잘 지내거나 못 지낼 일이 있겠는가?”

“생필품이라는 것이 자잘하고 사소한 것 같아도 말 그대로 없으면 생활을 하지 못하는 물건이니 이런 것을 관리하고 나누는 일이야말로 중책이지요. 어느 전각에 소홀하거나, 분배가 형평에 어긋나기라도 하면 곧 말이 나는 것이 궁내청의 일이 아닙니까?”

“그건 또 그렇지…….”

궁내청에 오다가다 들른 것은 아닐 터, 뭔가 필요한 것이 있나 싶어서 배 내관이 고 내관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고 내관의 성질대로 하자면 당장 배 내관에게 무슨 까닭으로 반 년째 영운궁에 궁분도 주지 않고 공비를 그렇게 핍박했는지 따져 물을 일이지만 시비를 가리는 것은 나중이라도 늦을 것이 없고, 당장 급한 일은 굶고 있는 영운궁에 식량과 땔감을 조달하는 일이었다. 그런 이유로 고 내관이 화난 기색을 감추고 침착하게 용무를 전했다.

“실은 저희 마마께서 궁을 오래 비우신 탓에 우화원에 당장 쓸 물품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 밤 처소를 덥힐 숯도 없고, 저녁거리도 없고…… 덮고 주무실 이불도 깨끗한 것이 없지 무엇입니까?”

“그렇겠구먼.”

“제가 눈치를 보아하니 귀인께서 당장은 우화원에도 못 드시고 며칠은 휘명전 근처 별궁이나 아예 휘명전 내실에 붙들려 계실 듯싶습니다. 그러니 전각을 꾸밀 물품도 좀 챙겨주십시오.”

허연이 휘명전에 붙들려 궁문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되었다는 말에 배 내관이 허허…… 하고 탄성을 토해냈다.

“요즘 들어 사람들이 자네 마마님을 일러 우화원 황귀비라 부른다더니…… 참으로 헛말이 아니구먼.”

“선배님도 농담이 느셨습니다.”

고 내관도 배 내관을 따라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지금 바로 물품을 내어주시지요. 처소를 대충이라도 단장하려면 시간이 넉넉지 않습니다.”

궁내청 책임자를 구슬려서 최상품의 식재료와 참숯 한 가마니, 본래 향비궁에 보내려고 마련해놓았던 침구와 침상에 둘러칠 두툼한 장막까지 얻어낸 고 내관이 짐을 잔뜩 진 내관 십여 명을 이끌고 궁내청을 나섰다.

“태감 나리, 어디로 가십니까? 이 길로 가면…….”

고 내관이 우화원 가는 길도 버리고, 휘명전으로 향하는 길도 그냥 지나쳐 자꾸 칠궁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힐끔힐끔 눈치만 보던 궁내청 하급 내관들이 영운궁 처마 밑에 이르러서야 결국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내가 설마 궁 안에서 길을 잃을까 걱정이냐? 잠자코 따라오너라.”

“하지만 이곳은 영운궁이 아닙니까?”

“영운궁이 칠궁 끄트머리라서 멀긴 멀구나. 무거운 것 지고 오느라 고생들 했다.”

고 내관의 시큰둥한 대꾸에 궁내청 내관들이 일제히 걸음을 멈췄다.

“태감 나리, 이 물건들은 귀인께서 쓰실 것이 아니었습니까?”

“영운궁에는 쉰 떡 한 조각 들이지 말라는 웃전의 명이 있었습니다.”

“영운궁에 허락 없이 물품을 대주었다간 저희가 다 죽습니다.”

궁내청 내관들의 반발에 고 내관이 너 잘 만났다는 듯 눈을 사납게 부라렸다.

“웃전의 명이라니? 대체 어느 웃전이 그 같은 명을 내렸단 말이냐?”

“그것은…….”

고 내관의 추궁에 내관들이 주뼛거리며 서로 눈치를 살폈다.

“공비가 지은 죄가 있어서 황제나 황후께 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면 그 일을 내가 듣지 못했을 리 없고, 너희들이 내 눈치를 볼 일도 없을 것이다. 또한 공비가 대역죄를 짓지 않고서야 폐하께서 당신의 비빈을 그리 핍박하실 리 없거늘…… 영운궁에 쉰 떡 한 조각 들이지 말라는 명이 있었다니, 그것이 대체 누구의 명이란 말이냐?”

“실은 향비께서…….”

궁내청 내관의 입에서 향비의 이름이 나오자 고 내관이 거친 콧김을 내뿜었다.

“지금 향비라고 했느냐?”

“…….”

“향비나 공비나 다 같은 비이거늘, 누가 누구의 웃전이라고 사사로이 그런 처분을 내린단 말이냐? 게다가 궁에 물품과 궁분을 끊는 것은 황후마마라도 황제 폐하의 허락이 없이는 내리기 어려운 처분이 아니냐?”

“소인들이야 각 궁에 물건이나 져 나르는 미천한 머슴이니 그런 절차까지야 어찌 알겠습니까? 궁내청 태감인 배 내관 나리가 그렇게 명을 내리며 엄하게 단속을 하시니 그 명을 따를 밖에요.”

“물건이나 져 나를 뿐, 사람 사는 도리 따위는 모른다니 잘되었구나. 배 내관만 태감이고 나는 땡감이냐? 잔말 말고 뒤를 따르거라!”

말 그대로 머슴에 불과한 하급 내관들을 상대로 시비를 가릴 일이 아니라서 고 내관이 그렇게 딱 잘라 말하고 다시 영운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고 내관의 으름장에 내관들이 자기네들끼리 눈짓을 주고받았다. 고 내관으로 말하면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우화원 귀인의 충복이니 궁내청 태감인 배 내관과는 급을 다투기도 민망한 실세 중의 실세였다.

자신들이 그런 고 내관의 명에 반발해서 들고 온 물건을 다시 궁내청으로 가지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요즘 들어 세가 확 꺾인 향비가 우화원을 상대로 시비를 걸 상황도 아니니 일단 들고 온 것은 갖다주자고 의논을 마친 내관들이 고 내관의 뒤를 따라 영운궁의 궁문을 넘어섰다.

마당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던 권 상궁이 줄줄이 들어오는 내관들과 그들이 들고 있는 물건을 보고 놀라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얼떨결에 본궁까지 같이 들어가서 권 상궁을 위로하던 양 내관도 그 뒤를 따라 나왔다.

“나리! 이게 다 무엇입니까?”

“궁내청에 들러 당장 쓰실 물건을 몇 가지 받아 왔습니다. 식재료는 못해도 사나흘은 충분히 드실 정도는 될 것이고, 숯도 좋은 것으로 한 가마니 받아 왔으니 사흘 정도는 쓰실 것입니다.”

그렇게 대답을 한 고 내관이 식재료는 찬간에 들여놓고 숯은 본궁 문 앞에 놓아두라고 내관들을 지휘하며 우화원 살림 챙기듯 들여온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저기 저것은 이불과 장막인가?”

양 내관이 커다란 이불 보따리를 메고 문 앞에 서 있는 내관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제 아침저녁으론 제법 찬바람이 부니 제대로 된 침구도 있어야 할 듯싶어서 챙겨 왔네.”

“대체 그간 영운궁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어찌 공비마마의 처소가 이토록 썰렁하고 초라한가?”

권 상궁을 데리고 온 김에 영운궁의 내실도 잠깐 들여다보고 나온 양 내관이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내실이 그렇게 초라한가?”

“권 상궁이 어지간히 쓸고 닦았는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기는 하네만…… 문갑이며 반닫이 같은 가구도 몇 가지 없고 전체적으로 단출한 것이 상궁의 처소보다 나을 것이 없네. 이불과 장막도 여름 것이 아직 그대로 놓여 있고…… 게다가 이 전각엔 권 상궁 외엔 내관도 궁녀도 전혀 안 보이니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양 내관의 물음에 고 내관이 대답 대신 푸시시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이불 보따리를 들고 서 있는 내관들을 불러 내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공비가 처소에 돌아온 것은 고 내관이 궁내청 내관들을 닦달해서 침상에 둘러쳐져 있던 얇은 여름 장막을 떼어내고서 솜을 넣어 누빈 비단 장막을 달고 있을 때였다. 거의 1년간 자신과 권 상궁 외에 다른 이의 출입이 전혀 없었던 처소에서 낯선 내관들이 대여섯 명이나 복작이는 것을 본 공비가 놀라 문가에서 주춤 멈춰 섰다.

“무슨 일이냐? 내관들이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장막이 비뚤어지지 않고 제대로 달렸는지 살펴보던 고 내관이 낮고 거친 그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마마, 이제 돌아오셨습니까?”

고 내관이 앞으로 나와 인사를 하며 습관처럼 공비의 옷차림을 슥 훑었다. 옷은 아름다운 비단으로 지었으나 소매 끝에 보풀이 일 정도로 낡았고, 머리엔 보일 듯 말듯 작은 금비녀를 하나 꽂았을 뿐, 공비의 얼굴엔 화장기조차 보이질 않았다. 검은 머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요란한 다른 비빈들의 치장과는 비교할 수 없는 단출한 차림에 고 내관이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는…….”

공비가 고 내관을 얼른 알아보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입궁한 지 이제 3년이지만 공비는 그간 고 내관을 가까이서 볼 일이 별로 없었다. 더구나 화려한 사복을 입은 고 내관은 앳된 젊은이처럼 보여서 순간 누군가 싶었던 것이다.

“소인은 우화원에서 태감직을 맡아보고 있는 고 내관이옵니다.”

“아…….”

그제야 고 내관을 알아본 공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우화원의 태감이 내 처소엔 어쩐 일인가?”

그때 권 상궁이 손으로 젖은 얼굴을 부비며 안으로 들어와 고 내관 옆에 섰다.

“마마, 실은 제가 오늘 땔감이나 좀 얻어볼까 하고 궁내청에 갔다 오는 길에 고 내관을 만났지 무엇입니까? 그런 인연으로 인사를 몇 마디 나누다가 고 내관이 영운궁 사정을 알고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붙들고 죽는소리를 늘어놓은 게로구먼.”

공비의 퉁명스러운 핀잔에 권 상궁이 고개를 푹 숙였다.

“송구합니다, 마마. 하도 답답해서 그만…….”

“그러고 다니니까 새파랗게 어린 것들까지 자네를 만만히 보고 행패를 부리는 것이 아닌가?”

“송구합니다…….”

간신히 그쳤던 울음이 다시 복받친 권 상궁이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를 죽여 흐느꼈다. 잠시 짜증스러운 눈길로 권 상궁을 쳐다보던 공비가 그녀를 끌어안고 등을 먼지 털듯 툭툭 두드렸다.

“걱정할 것 없대도 그러네. 집 떠나올 때 어머니가 챙겨주신 패물도 아직 남았고…… 형편이 정 어려워지면 그때 방법을 찾으면 되지, 설마 우리가 궁에서 굶주려 죽겠는가?”

“아기씨…….”

“그만 뚝 그치게. 앞으론 궁내청에 가도 내가 갈 것이니 자네는 공연히 그런 곳에 다니며 서러운 일 당할 것 없네.”

권 상궁을 어르고 달래는 공비의 모습은 영락없이 장성한 아들이 어미를 위로하는 정경이었다. 어린 나이에 먼 곳으로 시집와서 남편에게서 변변한 사랑과 관심도 받아보지 못한 채 후미진 별궁에서 설움을 당하고 있는 여인의 태도가 저렇게 담담하고 의연하니 내관들이 공비를 일러 무 장군, 무 장군 하는구나, 사내로 태어났으면 대현성에서 말 달리고 장검 휘두르며 거칠 것 없이 한세상 살았으련만, 여인으로 태어난 죄로 저런 장정이 봐주는 이조차 없는 후미진 별궁에 들어 속절없이 시들어가니 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고 내관이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그래, 권 상궁이 궁내청에서 쫓겨 나와 이리 훌쩍거리며 다니는 것을 자네가 보고 숯이며 침구를 가져온 것인가?”

“예, 마마. 부족하나마 몇 가지 챙겨 왔으니 우선 쓰십시오.”

“그간 우화원과는 왕래가 전혀 없었는데, 생판 남이나 다름없는 본궁에게 이리 도움을 주니 참으로 고맙네. 황궁에도 이런 인정이 있는 것은 미처 몰랐구먼.”

권 상궁을 달래 의자에 앉히고 침상에 걸터앉은 공비가 새로 놓인 솜이불과 비단 휘장을 한 번씩 어루만지며 인사를 했다. 그러자 권 상궁도 고 내관에게 거듭 고개를 숙이며 고마움을 전했다.

“저희 아씨께서 후궁에 드시고도 이토록 곤란을 겪으시는 것이 모두 제가 미련하고 만사가 부족한 탓이라 그간 몸 둘 바를 알지 못할 정도로 죄송하고 마음이 괴로웠는데 이렇게 큰 도움을 주시니 뭐라 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고 내관께서 이렇게 덕이 있으시니 뫼시고 있는 귀인께도 큰 복이 있어 그토록 폐하의 사랑을 받으시나 봅니다.”

“공비께서 이런 일을 겪으시는 게 어찌 권 상궁의 탓이겠습니까? 영운궁에 연차 좀 되고 요령 좋은 내관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이토록 난감한 지경을 당하시지는 않았을 터,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 또한 나의 실덕이니 누굴 원망하겠는가?”

공비가 이런 곤경에 처한 것은 향비의 농간이니 당연히 그녀를 원망할 일이었지만, 여기서 공비를 부추겨 향비와 싸움을 붙일 수는 없는 노릇이라 고 내관이 말을 아꼈다.

“앞으로는 여기 있는 양 내관이 자주 들어 전각 살림을 살펴드릴 것입니다.”

고 내관의 말에 옆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잠잠히 서 있던 양 내관이 벼락을 맞은 듯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아니, 나는…….”

“양 내관은 휘명전 지밀 내관이니 궁내청 태감 따위가 어찌 홀대를 하겠습니까? 앞으로 필요한 것이 있거나 곤란한 일을 당하시면 모두 양 내관에게 말씀을 하십시오. 또한 소인도 힘닿는 대로 도와드리겠습니다.”

“고맙네. 자네 주인께도 인사를 전해주시게.”

“예, 마마.”

그렇게 대답하며 고 내관이 다시 한 번 고개를 깊이 숙였다.

허연과 토닥토닥 말다툼을 해가며 점심을 마친 욱이 국화차를 들며 식후의 망중한을 즐겼다. 후궁에서 점심을 들 때, 욱의 점심시간은 아무리 길어도 반 시진을 넘지 않았다. 한 끼를 먹어도 최대한 느긋하게 미식을 즐겼던 선대의 황제들과 달리 욱은 음식을 후다닥 집어삼키는 버릇이 있어서 식사 시간이 길지 않았고, 오후의 일과도 빡빡한 날이 많아서 점심 식사 같은 사소한 일에 긴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오후 일과가 없으십니까?”

점심을 다 들고도 욱이 일어날 생각을 않고 한없이 미적거리자 허연이 수상쩍은 눈길로 물었다.

“오늘이 잔칫날도 아닌데 일과가 아주 없겠는가? 남은 일이 좀 있긴 하지만 다 자잘하고 사소한 일이니 마음 쓸 것 없네.”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자잘하고 사소한 일도 있습니까? 또한 그렇게 사소한 일이 휘명전까지 올라올 리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대꾸하며 허연이 윤 내관을 돌아보았다.

“폐하께서는 오후엔 대월성에서 온 사절을 접견하시고, 그 후엔 승지들과 함께 이제 가을걷이가 시작된 성읍의 작황과 세금에 대해 논의를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지난 몇 년간 세금과 진상품을 교묘히 착복해 만금을 축재하다가 걸린 관원의 처분도 최종적으로 결정을 하셔야 합니다.”

윤 내관의 대답에 허연이 엄한 눈길로 욱을 쳐다보았다.

“모두 다 국가의 중대사가 아닙니까? 이제 그만 휘명전으로 돌아가시지요.”

“허면 그대는 청량전에 들어 쉬고 있게. 일을 마치면 나도 바로 갈 것이니…….”

청량전은 휘명전의 부속 별채로 황제의 숲 어귀에 자리 잡은 아담한 2층 건물이었다. 황제의 숲 초입이라 조용하고 아침이면 숲 너머로 해가 뜨는 광경도 때론 장관이라 허연이 환궁하기 전, 처첩을 일곱이나 두고도 휘명전에서 허허롭게 지내는 날이 많았던 욱이 침소로 자주 이용하던 곳이 청량전이었다. 우화원도 아니고, 휘명전 지척의 청량전에 가 있으란 말에 허연이 쓴웃음을 지었다.

“용안을 뵈었으니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물러가다니…… 허면 우화원에 가 있으려는가?”

“공주님 댁에 며칠 더 머물다가 이달 말쯤 환궁을 하겠습니다.”

날씨도 좋고 바람도 시원하고, 오늘따라 점심도 꿀맛이라 느긋하게 배를 두드리며 포만감을 즐기던 욱이 다시 출궁하겠다는 허연의 대답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바로 앉았다. 그러곤 김 나간 표정으로 허연을 노려보았다.

“그게 무슨 말인가? 왔으면 아주 온 것이지, 또 어딜 나가서 언제 돌아오겠다는 건가?”

“이달 말 환궁도 일정을 많이 앞당긴 것입니다. 애초엔 일러도 폐하의 생신 즈음에나 환궁할 생각이었습니다.”

“누구 마음대로 이달 말이고 내 생일 즈음이란 말인가?”

욱이 상을 들어 엎을 기세로 들썩였다. 하지만 허연의 태도는 어느 때보다 침착했다.

“이제 폐하의 후궁엔 저만 있는 것도 아니니 그 정도는 제 마음대로 하고 싶습니다.”

“…….”

후궁 얘기만 나오면 말문이 막히는 욱이 이번에도 바로 반박을 못하고 허연을 노려보며 씩씩 거친 숨만 내쉬었다.

“그만 일어나십시오. 점심시간도 길었으니 중신들이 휘명전에서 폐하를 기다리지 않겠습니까?”

딱 잘라 말하고 허연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그만 물러갈 요량으로 욱에게 고개를 깊이 숙였다. 하지만 욱은 인사를 받는 대신 허연이 환궁한 이후, 끝도 없이 되풀이했던 원망을 다시 늘어놓았다.

“내가 후궁을 들이고 싶어서 들였는가? 애초에 장가도 들기 싫었는데, 그대가 앞장서서 혼인을 하지 않으면 곧 큰일이라도 터질 듯 서두르니 마지못해 그렇게 한 것이 아닌가?”

“제가 언제 폐하께서 혼인하신 것을 두고 트집을 잡았습니까? 그 얘기는 또 왜 꺼내십니까?”

“이 모든 사태가 모두 거기서 비롯된 것이니 하는 말일세! 또한 그대가 나를 버리고 쌩하니 연주국으로 가버리지만 않았으면 오늘날 후궁이 미어터지는 이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니, 내게 처첩이 일곱이나 생긴 것은 모두 그대 책임일세!”

“폐하께서 하신 일은 모두 폐하의 책임입니다.”

“그래서, 그게 모두 내 책임이니 자네는 들러서 밥만 먹고 나가겠다는 건가? 휘명전이 밥이나 먹으러 들락거리는 저자거리의 객잔인가?”

“폐하!”

“그만하게. 바깥바람도 보름이면 충분하지, 어찌 달을 채우려고 드는가? 이러다 다른 벼슬아치들처럼 아예 출퇴근을 한다 하겠구먼.”

욱이 더는 듣기도 싫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사실, 아까 휘명전 마당에서 허연을 보았을 때부터 욱은 점심도 귀찮고, 호젓한 별궁에 들어 그간의 회포나 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었다. 하지만 기껏 환궁한 허연을 다짜고짜 빈방에 밀어 넣었다간 사람을 가볍게 보고 함부로 한다는 원망을 들을까 두렵기도 하고, 뒤도 안 돌아보고 다시 뛰쳐나갈까 걱정스럽기도 해서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욱의 사정 따위 전혀 모르겠다는 듯 허연이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출퇴근이라…… 그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어허!”

욱이 벌컥 성을 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 틈에 허연이 욱의 손목을 획 낚아챘다.

“남은 일과로 오후도 빠듯하니 서두르시지요.”

허연에게 붙들려서 질질 끌려 나가던 욱이 국화가 만발한 정원 한복판에서 걸음을 멈췄다. 욱이 이런 식으로 버티면 힘으로는 당할 재간이 없기 때문에 허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욱을 돌아보았다.

“안 가십니까?”

“이런 법이 어디 있나? 이렇게 가버리겠다니…… 내가 지은 죄라곤 그대가 만 리 밖으로 떠나 다시 돌아온다는 기약도 없는 사이, 중신들에게 쫄리고 쫄려서 후궁을 몇 명 더 둔 것뿐인데 그 일을 문제 삼아서 시도 때도 없이 바가지를 긁다 못해 이젠 아예 집을 나가겠단 말인가?”

욱의 한탄에 허연이 어이가 없어서 입을 딱 벌렸다.

“없는 소리 지어내지 마십시오. 폐하께서 중신들에게 쫄려서 후궁을 두셨습니까? 또한 제가 언제 그 일로 바가지를 긁었단 말입니까?”

“이렇게 집 나간다고 협박을 하는 것은 바가지가 아닌가?”

“이것은 저로 인하여 그간 고적하게 지내신 마마님들에 대한 작은 배려입니다. 폐하께서 배려를 통 아니 하시니 저라도 해야지요.”

자신의 억지가 전혀 먹히지 않자 욱이 바로 전략을 바꿔 허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럼 사흘만…… 사흘만 있다 가게.”

“제가 가면 아주 갑니까? 이달 말에 환궁을 한다니까요?”

허리에 감긴 욱의 팔을 풀려고 버둥거리며 허연이 버럭 소리를 쳤다. 허연이 내관들 눈을 피해 욱을 한 대씩 쥐어박는 일은 종종 있어도 언성을 높이는 일은 좀처럼 없어서 윤 내관을 비롯한 지밀 내관들은 이러다 큰 싸움이 나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 마음을 졸였다.

“휘명전으로 돌아가서 남은 일이나 하십시오.”

“그대가 이렇게 훌쩍 가버리면 내가 무슨 흥이 나서 정사를 돌보겠는가? 나랏일이 걱정되면 내게 이러지 말게.”

“어허…….”

욱에게서 벗어나려고 애를 쓸수록 허리를 감은 팔은 더욱 죄어들었다. 성치도 않은 다리로 그 무게와 칭얼거림을 감당하기는 역부족이라 허연은 결국 욱을 끌어안고 국화가 흐드러진 꽃밭에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저런…….”

욱이 허연과 함께 국화가 허리 높이까지 빽빽이 들어찬 뜰에 엎어지는 것을 본 정 내관이 놀라서 움찔했다. 본래 욱과 허연이 사랑싸움을 할 때엔 본 척도, 들은 척도 않는 것이 지밀 내관들의 행동 방침이었지만 황제가 마당에 엎어진 것은 사안이 다른 일이었다. 급히 두 사람에게 다가가려던 정 내관의 허리끈을 붙잡은 것은 윤 내관이었다.

“눈치도 없이…….”

“상선!”

윤 내관이 정 내관의 입을 턱 틀어막았다. 그러곤 목을 쑥 빼고 꽃밭에 쓰러진 황제와 귀인의 동향을 살폈다. 어른 주먹만 한 국화꽃 사이로 뵈는 것은 분명 황제의 등판이니 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귀인일 것이고, 신음 소리나 다른 구조 요청이 없는 걸로 봐서 귀인이 넘어지면서 어딜 다친 것은 아닌 것 같고…… 그렇다면……. 대강 탐색을 끝낸 윤 내관이 정 내관을 담장 쪽으로 밀었다.

“지밀 내관들과 호위병들을 싹 데리고 담 밖으로 나가게.”

“예?”

그렇게 오래 황제를 모셨으면서도 눈치라곤 통 없는 정 내관의 옆구리를 윤 내관이 꾹 쥐어박았다. 그러곤 낮은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

“나가서 국향원 출입문을 다 닫고, 폐하께서 부르시기 전엔 숨소리도 내지 말게.”

욱에게 붙들려서 곱게 핀 국화꽃을 죄다 뭉개며 바닥에 나자빠진 허연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곤 힘을 다해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작정하고 자신을 내리누르고 있는 욱을 밀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왜 이러십니까? 놓아주십시오.”

허연이 욱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허연을 내려다보는 욱의 눈빛은 그보다 더 거칠었다. 그 눈빛에 허연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이러다 벌건 대낮에 꽃밭에서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허연이 한 번 더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욱은 거친 숨을 쌕쌕 내쉬며 허연을 노려보기만 할 뿐 움켜잡은 두 손을 놓아줄 기색이 전혀 없었다.

“좋게 말로 할 때 놓으십시오. 이러다 크게 다치십니다.”

허연의 경고에 욱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어쩌려고?”

“그런 거 궁금해하지 마시고 그냥 놓으십시오! 내관들이 망측한 오해라도 할까 두렵습니다.”

이러다 진짜 무슨 일 당하겠다는 위기감에 허연이 욱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고는 버럭 소리를 쳤다. 하지만 욱의 태도는 오히려 여유만만했고, 눈빛은 더욱 음습해질 뿐이었다.

“오해라니? 어떤 오해 말인가?”

욱이 허연의 귓가에 입술을 바싹 들이대고는 되물었다. 그 나직한 음성이 오싹할 정도로 색기가 넘쳐서 허연의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고 말았다.

허연의 몸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느낀 욱의 입가에 오만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러다 정말 부끄러운 짓을 당할 것 같은 위기감에 허연이 한 번 더 몸을 비틀었다. 그 거친 몸부림에 허연을 타고 앉은 욱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체격이나 기운은 욱이 허연을 압도했지만, 무공으로는 상대가 아니었다. 아주 조그만 빈틈, 약간의 허점만 보여도 살벌한 역습을 당할 위험은 얼마든지 있었다. 다년간의 실랑이로 허연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는 욱이 지체 없이 그 약점을 노리고 선공에 들어갔다. 허연의 두 팔을 꼼짝 못하게 내리누른 채 하얀 목덜미를 턱 물어버린 것이었다.

“아…….”

맥이 뛰는 곳을 욱에게 물린 허연이 눈앞에 캄캄해지는 극심한 현기증에 눈을 질끈 감았다. 억세게 반항하던 허연의 사지에서 기운이 쪽 빠지는 것을 느낀 욱이 보통 때엔 볼 수 없는 교활한 미소를 지었다. 별스럽게 민감한 곳이라곤 없는 허연의 몸에 딱 한 군데 있는 약점이 바로 목덜미, 지금 욱이 입을 대고 있는 자리였다.

얕은 신음을 흘리며 힘없이 뒤척이던 허연이 원망 가득한 눈길로 욱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욱은 그런 눈빛 따위 아랑곳없이 허연의 두 손목을 한 손에 움켜잡고는 옷섶을 헤쳤다. 그러곤 어깨에, 쇄골에 퍼붓듯 입을 맞췄다.

보름 만에 맛보는 허연의 입술과 목덜미, 국화 향과 함께 어지럽게 뒤섞인 체향에 취한 욱이 깊은 한숨 같은 신음을 토해냈다. 민감한 곳만 골라가며 입술을 대고 이를 세우는 욱의 교활한 공략에 허연도 맥이 탁 풀려서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그러다 허리끈에 슬그머니 와서 닿는 욱의 손길에 놀라서 퍼뜩 정신을 차렸다.

“뭐하시는 겁니까?”

“몰라서 묻는가?”

몰라서 묻는 건 아닌데, 이건 아니란 생각에 허연이 욱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벌건 대낮에, 그것도 마당 한복판에서…….”

“대낮이면 어떻고, 마당이면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내 집 마당인데…….”

“여기 폐하 혼자 사십니까? 저는 싫습니다.”

허연이 욱의 손목을 비틀며 저항했다. 하지만 허연이 손목을 비틀건 부러뜨리건 상관없이 욱도 꿈쩍 않고 버텼다.

“싫으면? 여기서 무르자는 말인가? 그렇게는 못하겠네.”

욱이 딱 잘라 말했다. 이는 보름 만에 어렵사리 잡은 기회인데다, 사실 욱은 아까 계단참에서 허연을 보았을 때부터 몸이 후끈 달아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욱이 미처 못 푼 허리끈 매듭을 이로 물어서 풀어버리는 것으로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이러다 진짜 마당 한복판에서 일을 당하고 말겠다는 위기감에 허연이 욱을 발로 밀어 차버리고 화급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한 발짝도 떼어놓지 못한 채 욱에게 붙들려서 다시 꽃밭에 엎어지고 말았다.

청명한 가을 하늘, 머리가 아플 정도로 진한 국화 향기, 쾌감과 고통이 뒤섞인 허연의 달콤한 신음 소리…… 야외에서의 정사가 욱에게 더할 수 없이 자극적인 이유는 침전의 장막 안에서는 볼 수 없는 허연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둠 속이나 등불 아래서 흐릿하게 보이는 허연의 몸은 그것대로 아름다웠지만 밝은 햇살 아래 드러난 나신은 말 그대로 눈이 부실 정도였다.

늘씬하게 쭉 뻗은 팔다리며 마른 듯 탄탄한 몸매, 예전에 전장에서 얻은 크고 작은 상처…… 그 모두가 욱이 이전에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종류의 아름다움이었고, 언제나 처음 마주했을 때와 같은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한동안 실랑이 끝에 욱이 기어이 허연의 바지를 벗겨서 국화 밭 너머로 훌쩍 던져버리고 말았다. 자신의 바지가 허공을 날다가 꽃밭 어디론가 사라지는 꼴을 지켜본 허연이 기가 막혀서 뻐끔거리다가 욱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하지만 욱은 도리어 기다렸다는 듯 허연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당장 가서 내 바지 주워오라고 호통을 치려던 허연이 예상치 못했던 기습에 당황해서 몸을 뒤로 물렸다. 하지만 욱이 그대로 허연을 덮쳐누르는 바람에 자청해서 바닥에 누운 꼴이 되고 말았다. 점심도 제대로 못 먹고 죄다 흘리던 욱이 이럴 때만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민첩하게 허연을 타고 앉았다. 그러곤 한 번 더 희고 부드러운 목덜미를 꽉 물었다.

“제발…….”

허연이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핥으며 신음처럼 한 마디를 흘렸다. 하지만 욱은 들은 척도 않고 허연의 가슴과 배, 옆구리…… 온몸을 맛보며 민감한 곳마다 이를 세웠다. 그 바람에 허연은 이게 연인과의 정사인지, 숲에 나왔다가 호랑이를 만난 건지 분간도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점심 먹다가 마당 한복판에서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싶어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던 허연이 욱의 완력과 수십 번의 입맞춤에 녹아서 축 늘어지고 말았다. 시절은 아침저녁 불어오는 찬바람에 등이 시린 가을의 한복판이었고, 욱의 손길이 닿은 것도 오랜만이었다. 게다가 욱은 허기가 져서 마치 열흘 굶은 호랑이처럼 앞뒤 없이 달려드니 이런 짐승을 붙들고 실랑이를 길게 하는 것도 부질없는 짓이었다.

허연이 더는 몸부림도 못 치고 씩씩 거친 숨만 내쉬자 욱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옴짝도 못하게 허리를 붙잡은 채 그 성기를 덥석 물었다. 이렇게까지 되었으면 승패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이 결판이 난 것이라 허연이 부끄러움과 분함, 그리고 등골이 오싹한 쾌감을 동시에 느끼며 몸을 비틀었다.

“아…….”

허연이 낮은 교성을 흘리며 허우적거렸다. 그러곤 국화꽃 줄기를 손에 잡히는 대로 한 움큼씩 뜯어내며 몸을 위로 끌어올렸다. 자신이 은밀한 곳에 입을 대면 도망이라도 치려는 듯 몸을 비틀거나 자꾸만 위로 올라가는 것이 허연의 버릇이라서 욱이 그 허리를 더욱 단단히 움켜잡았다. 그러곤 허연의 것을 목구멍 깊숙이 삼켰다. 그 자극을 이기지 못한 허연이 억눌린 신음을 토하며 경련하듯 몸을 떨었다.

욱이 입안 가득 머금은 음경을 혀끝으로 부드럽게 핥고, 때론 거칠게 조였다. 그리고 허연의 반응이 어쩐지 잠잠하고 성에 안 찬다 싶으면 이를 세워서 위협이라도 하듯 꾹 물었다. 불편하고 부끄러운데, 한편 뒷골이 아찔하도록 색스럽고 자극적인 욱의 난행에 허연은 속수무책이었다. 이쯤 되면 허연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욱이 예민한 곳에 이를 대고 으르렁거릴 때마다 그 머리나 어깨를 밀어내려고 버둥거리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조차 대부분은 아니한 만 못했다.

한동안 끙끙거리던 허연이 욱에게 붙들린 채 이른 절정을 맞았다. 그에게도 오랜만의 정사인데다 때는 한낮이요, 장소는 마당 복판이라 극심한 수치심이 도리어 자극이 된 탓이었다.

욱이 입에 잔뜩 머금은 정액을 뱉지도 않고 꿀꺽 삼켜버리자 허연이 있는 대로 인상을 구겼다. 하는 짓마다 어찌 이리 더럽고 흉악한고? 소싯적에 성 안 기방을 쓸고 다니며 온갖 난봉은 다 피웠다더니 안 좋은 것만 배워서는…… 그때, 욱이 허리끈을 풀더니 허연의 다리를 들어 자신의 허리에 감았다. 올 것이 왔구나, 결국 여기서 끝을 볼 심산이구나 싶어 허연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윽…….”

이것도 오랜만이라 욱이 몸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느낌이 생소하고 쓰라려서 허연이 한숨처럼 긴 신음을 토해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못마땅한 눈길로 자신을 노려보던 허연의 건조한 눈에 한순간 눈물이 고이자 욱이 움직임을 멈추고 눈길을 맞췄다.

“아픈가? 많이 괴로운가?”

“여기서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

대답 대신 욱이 몸을 굽혀서 허연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이렇게까지 된 마당에 욱이 순순히 물러나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라 허연도 더는 불평 없이 그 목에 팔을 감고 입맞춤을 받았다. 그렇게 허연의 완전한 항복을 받아낸 욱이 한계까지 그 안으로 파고들었다.

보름 만에 허연을 안은 욱은 거칠었다. 마치 그동안 굶주렸던 것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혹은 자신을 넓고 싸늘한 궁 안에 버려둔 것을 원망이라도 하는 것처럼 사납게 허연을 밀어붙였다. 그런 욱에게 깔린 채 속수무책으로 흔들리던 허연이 한계 이상으로 깊은 곳을 찔리고는 그 충격에 마른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허연의 모습조차 욱의 가학심만 더욱 자극할 뿐이었다.

색색의 국화꽃 위에 쓰러져 있는 허연의 모습은 이전의 어떤 것보다도 아름답고 선정적이었다. 게다가 고통도 쾌감도 이전보다 훨씬 더 민감하게 느끼며 생생하게 반응하는 몸짓이며 신음 소리, 어느새 눈물에 푹 젖은 애처로운 얼굴…… 그 모든 것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아…….”

예민한 곳을 연거푸 찔린 허연이 욱을 신경질적으로 밀어냈다. 하지만 놓여난 것도 잠시뿐, 곧바로 욱에게 붙들려 다시 그 아래 깔렸고, 한두 번 그런 실랑이가 반복되면서 정사는 더욱 거칠어졌다. 이 순간, 욱은 더 이상 거추장스러운 황의를 걸친 황제가 아니었다. 격식과 범절에 매여 말 한 마디 손짓 하나에도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한심한 사내가 아닌, 좀 더 위험하고 거침없는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마치 황야에서 나고 자란 맹수가 된 것 같은 낯선 해방감과 홀가분함에 욱이 한층 더 험악하게 으르렁거렸다. 사방은 국화 천지였고, 넓은 뜰에는 꽃향기와 차가운 가을바람만이 그들과 함께였다. 이제 거의 탈진 상태에 이르러 저항 없이 몸을 맡긴 허연의 모습은 가련한 한편 농염하기도 해서 욱의 사나운 본성을 더욱 자극했다. 황량한 벌판을 헤매다가 어렵게 만난 암컷과 교미하는 맹수라도 된 듯 절박하고 막막한 기분까지 더해진 욱이 허연을 더욱 격하게 몰아쳤다.

허연을 자비 없이 몰아붙이던 욱이 절정의 순간을 맞아 허리를 한껏 젖히며 길게 포효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리는 것 같은 쾌감과 허탈감을 동시에 느끼며 욱이 허연의 배 속 가장 깊은 곳에 자신의 것을 모두 쏟아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이미 정신을 잃고 축 늘어져 있는 허연을 끌어안은 채 그대로 꽃밭에 쓰러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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