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장 대현성에서 온 남자 (2/16)

제2장

대현성에서 온 남자

10월 상순의 수룡천변은 연중 어느 때보다 활기가 넘쳤다. 수룡천을 따라서 끝도 없이 이어진 시장엔 한 해의 막바지에 수확한 기름진 작물이 넘쳤고, 곧 시작될 긴 겨울을 날 물품을 구하려고 나온 인파로 거리는 밤늦은 시각까지 북적였다. 더구나 이번 가을엔 황후의 득남이란 경사까지 겹쳐서 먼 곳에서 사신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고, 그 행렬을 따라온 장사치들도 수만을 헤아릴 정도였다. 그런 까닭으로 그들이 들여온 진귀한 물품을 사고파느라 천변은 해가 저문 이후에도 상점에서 내건 등불로 대낮처럼 밝았다. 

오랜만에 대흥루 용화각에 모인 도성 안 한량들의 수다는 요즘 비야원에 새로 든 기생 품평에서 열흘 후로 다가온 대흥루 주최 추계 격투 경기의 우승자가 누구일지 하는 예상으로 넘어갔다가 새로운 적통 황자의 출생으로 엇갈린 진목성 유 씨 가문과 안서성 수 씨 가문의 위상 얘기로 두서없이 이어졌다.

“작년 이맘때만 해도 수 씨 가문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더니, 불과 1년 만에 역전도 이런 역전이 없구먼.”

“수 대인과 그 아들들 거들먹거리는 꼴이 눈꼴시어서 봐주질 못하겠더니만…… 요즘은 다들 두문불출 번화가엔 그림자도 비치질 않으니 내 속이 다 시원하네.”

그렇게 사내들은 닭 쫓다가 지붕만 쳐다보며 울먹이는 강아지의 형국이 된 향비의 처지를 마음껏 비웃었다. 지난 2년간은 향비 가문의 위세가 도성 안팎에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라 그에 대한 반감도 백성들 사이에서는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현비의 3황자도 있거늘, 원자께서 실명하셨다 하여 꼭 2황자에게 태자 자리가 떨어진다는 보장이 애초에 어디 있었단 말인가? 몇 달 사이에 이렇게 될 것도 모르고 나라를 벌써 물려받은 듯 유난을 떨더니…… 꼴좋게 되질 않았는가?”

그렇게 불과 며칠 사이에 확 짜부라든 수 씨 가문의 입지를 비웃던 사내들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용화각의 넓은 대청 안으로 한 무리의 사내들이 몰려들어 온 까닭이었다.

종업원의 안내로 수룡천이 내다보이는 전망 좋은 창가에 자리를 잡은 십여 명의 사내들은 한눈에 봐도 도성 밖 외지인들이었다. 대흥루 용화각 정도 되는 비싼 요리점에 들락거릴 지체라면 유행하는 비단옷을 떨쳐입고 못해도 시종 두셋은 거느리고 다니는 것이 당연했지만, 사내들은 하나같이 거친 무명으로 지은 도포와 외투 차림인데다 얼굴이며 옷이 온통 회갈색 먼지투성이라서 누가 보더라도 종일 말을 달려와 방금 도성에 당도했음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느긋하게 이른 저녁을 즐기던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사내들의 행색 따위가 아니었다. 황성은 본래 토박이보다 외지인들이 더 많이 몰려와 북적이는 곳이었고, 그중에서도 번화가인 수룡천변은 서역인들도 어렵지 않게 마주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무엇하는 자들이기에 저리 기골이 장대한가?”

“저기 가운데에 갈색 망토 입은 자가 들어오는 걸 보았는가? 정수리가 대들보에 닿을 정도가 아니던가?”

“저, 저 손 좀 보게. 저만하면 멧돼지도 능히 때려잡겠네.”

놀라서 수군수군 떠드는 한량들을 일행 중 가장 몸집이 날렵하고 얼굴빛이 흰 사내가 힐끔 돌아보았다. 잠시 눈길이 마주친 것뿐이지만 사람을 옆에 두고 다 들리도록 떠드는 것을 꾸짖는 것 같은 싸늘한 눈길에 한량들이 흠칫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서너 명 둘러앉아 점심 한 끼 먹으려면 족히 은화 한 냥은 내야 하는 비싼 요릿집에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 몰려온 것을 보면 돈냥이나 지닌 자들이 분명한데, 인상이며 태도는 아무리 봐도 장사치들이 아니니……. 잠시 자기들끼리 눈짓을 주고받던 한량들 중 하나가 옳거니 하며 자기 무릎을 탁 쳤다. 그리고 언성을 대폭 낮춰서 친구들 귓전에 소곤거렸다.

“그자들이구먼.”

“그자들이라니? 뭔가 짚이는 분야가 있는가?”

“저 덩치며 인상이며…… 무엇을 하는 자들이겠는가? 이번 무술 대회에 참가하러 온 무사들이 아니겠는가?”

사내의 단언에 다른 자들이 오호…… 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봄가을에 한 번씩 열리는 대흥루 주최 무술 대회는 각 부문을 다 합쳐서 황금 스무 냥이란 큰 상금이 걸려 있기도 하고, 거기에 더 운이 터서 상단 수뇌부의 눈에 들기라도 하면 당장 대장급 호위 무사로 채용이 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나라 안에서 힘깨나 쓴다는 장정들은 모두 몰려드는 큰 대회였다.

작년과 재작년엔 황궁 문지기 중걸이 권투에서 우승을 해서 닷 냥짜리 금 거북이를 타 갔는데, 올해도 그가 주먹계 1인자 자리를 지킬까, 휘명전 호위대장인 정 내관이 경기에서 은퇴한 후엔 장검 부문에 이렇다 할 강자가 없어서 해마다 고만고만한 검객들이 엎치락뒤치락인데 올해는 어느 운 좋은 자가 열 냥짜리 금잔을 타 갈까, 저자들이 이번 경기에 참가하기 위해 온 것이면 어느 종목인지는 몰라도 우승 후보 따위 없는 셈 치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며칠 남지 않은 큰 구경거리에 대한 기대로 한량들이 또다시 수다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중추절에서 황제 폐하의 생신날까지는 각지에서 몰려든 장사치들로 황성 거리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라고 듣긴 들었지만, 사람도 참 많고 거리도 복잡합니다, 형님.”

“장계를 들고 먼저 출발한 경수 편에 미리 방을 잡아놓았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천변에 천막을 치고 밤을 보낼 뻔하지 않았습니까?”

영재가 그렇게 말하며 옆에 앉은 경수의 어깨를 툭 쳤다. 어지간해서는 좋은 말 하지 않는 영재에게서 칭찬을 들은 경수가 어깨를 으쓱이며 씩 웃었다.

“여기가 대흥루라고, 도성에서 제일 유명한 객잔입니다. 지하엔 나라에서 제일 큰 투전장과 투기장이 있고, 3층에 있는 객실은 전망이 좋아서 도성이 다 내다보일 정도랍니다. 이 음식점도 보통 사흘 전에 예약을 않고는 국수 한 가닥 못 얻어먹을 정도로 소문난 맛집입니다.”

경수의 자랑 섞인 대흥루 소개에 몸을 틀어 창 밖의 정경을 내려다보던 사내들이 그러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대흥루가 도성에서 제일 크건 유명하건 그런 것은 안중에 없었지만, 이곳이 소문난 맛집이란 소개엔 귀가 솔깃했다.

“네 말대로 참으로 크고 번듯하다. 지난 보름간 주야로 말을 달려오느라 말도, 나도 거품을 물고 쓰러질 지경이었는데, 오늘은 허리 펴고 제대로 자보겠구나.”

무호가 경수의 수고를 칭찬하며 다시 창 밖으로 눈길을 옮겼다. 창 밖 저 먼 곳에서는 대화문의 금빛 기와가 기울어가는 오후의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번쩍거리고 있었다.

“사실 큰 형님께 이런 저자거리의 객잔이 웬 말입니까? 입경하신 것을 황궁에 알리면 황제께서 사신각이라도 내어주시지 않았겠습니까?”

영재가 그렇게 말하며 종업원이 들고 온 차림표를 받아 들었다.

“내가 외국에서 온 사신도 아니고 종친도 아닌데 사신각이 웬 말이냐? 어디가 되었건 이슬이나 피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러시겠지요. 저희가 형님을 따라다니며 무슨 호사를 누리겠습니까? 전쟁터만 아니면 어디든 감지덕지입니다.”

영재의 핀잔에 한두 명이 건성으로 웃었다. 그러곤 다들 눈을 번뜩이며 차림표에 어떤 음식이 있는지를 집중해서 살피기 시작했다.

무호가 대현성 영주이자 부친인 무영준의 명령을 받아 황궁으로 출발한 것은 보름 전이었다. 다른 성읍에서는 황후의 출산일에 맞춰 벌써 한두 달 전에 사절을 파견한 것에 비해 거리가 가장 먼 성읍인 대현성에서 보름 전에야 사절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국경의 상황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동북쪽의 거대 부족인 장족이 군소 부족 중에선 세가 큰 편인 오족과 사돈을 맺고 혼인 잔치를 보름이나 하면서 한 집안이 된 것을 거하게 축하하고 있었으니, 언제 그 기세를 몰아 성문 앞에 들이닥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국경이 위태로운 중에도 무영준이 장자이자 가장 출중한 장수인 무호를 황성에 보낸 것은 3년 전 입궁한 이후 좀처럼 소식을 들을 수 없는 고명딸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 바람에 쉬엄쉬엄 오면 한 달 보름은 족히 걸리는 길을 밤낮없이 말을 달려 보름 만에 도착한 무호 일행은 더는 한 발짝 떼어놓기도 귀찮을 정도로 곤죽이 된 상태였다. 게다가 오늘 먹은 것이라곤 황강을 건너기 전에 씹어 삼킨 빵 한 조각이 전부라 다들 허기에 지쳐서 눈자위가 퀭하게 패어 있었다.

일행이 모두 주문을 받으러 온 종업원을 붙들고 여기서 제일 빨리 되는 음식은 뭐냐, 제일 잘하는 음식은 뭐냐, 차림판에 있는 이 많은 요리가 정말 다 되는 거냐고 물어보며 혼을 빼놓는 사이, 무호가 고개를 돌려 식탁 가장 자리에 멍한 얼굴로 앉아 있는 승주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승주야.”

“예, 장군.”

“왜 그렇게 잠잠히 있느냐? 뭐라도 먹어야 할 것이 아니냐?”

무호의 권유에 승주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물 한잔 마시고 먼저 올라가 누워야겠습니다.”

승주의 대답에 차림표에 적힌 고기 요리를 종류별로 하나씩 다 주문하던 영재가 혀를 끌끌 찼다.

“많이 피곤하냐?”

“피곤하기도 하고, 속이 부대껴서 아무것도 못 먹겠습니다.”

“보름을 쉬지도 못하고 달려오느라 우리도 다 죽을 판이니, 너 같은 샌님이 중간에 나가떨어지지 않고 여기까지 쫓아온 것만 해도 용하다.”

“알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승주가 뚱하게 대꾸하며 빈 물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그대로 일어서려는 걸 무호가 불러 세웠다.

“앉아서 국수라도 한 그릇 먹어라. 종일 굶고서야 내일은 어찌 버티겠느냐?”

“저는 내일 할 일도 없는데 무슨 걱정입니까? 이제 쓰러지면 한 이틀은 못 일어날 겁니다.”

승주의 고집에 무호가 그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사람들이 무호를 까닭 없이 대현성 호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 위압적인 눈길에 승주가 머뭇거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 틈에 영재가 얼른 승주의 팔을 끌어 의자에 다시 앉혔다.

“들었는가? 저자가 장군이라는데?”

무호 일행이 주고받는 대화를 주워듣던 한량 중 하나가 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황궁 어쩌고 하는 것을 보니 지방 성읍에서 올라온 사절단인 듯싶네.”

“어느 성읍에 저런 거인이 있었단 말인가? 도성에서 덩치 크고 힘 좋기론 단연 정 내관이 1인자였는데, 저자는 그보다 한 뼘은 더 크겠네.”

그렇게 수군거리던 한량들이 음식 접시를 한 손에 두 개씩 들고 분주히 오가는 종업원들 틈을 헤치고 들어오는 낯익은 사내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이보게, 송이. 여길세!”

빈자리 하나 없이 손님이 가득한 식당을 두리번거리던 허송이 친구들을 알아보고는 설렁설렁 다가왔다. 도성 최고 갑부인 허 부자 집 골칫덩어리요, 대흥루 죽돌이인 허송은 이맘때쯤 용화각에 나와서 이른 저녁을 먹으며 친구들과 노닥거리다가 날 저물면 지하 투전장으로 내려가는 것이 정해진 하루 일과였다.

“자네, 오늘은 좀 늦었네?”

“어…… 늦게 일어났네.”

종업원들이 접시를 끝도 없이 갖다 나르는 무호 일행의 식탁을 흘끔거리던 허송이 의자 다리에 걸려 휘청거리다 겨우 중심을 잡았다.

“혼자 왔는가? 광윤이는?”

“그놈은 상서시랑으로 직을 옮긴 후엔 어찌나 바쁜 척을 하며 빼는지, 파직이라도 당하지 않고는 얼굴 보기 어려울 것 같네.”

허송이 툴툴거리며 의자를 찾아 자리에 앉았다.

“그런가? 만나면 뭣 좀 물어보려고 했는데, 아쉽구먼.”

“뭐, 나랏일 중에 궁금한 것이라도 있는가?”

허송이 건성으로 물으며 무호 일행의 식탁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십여 명이나 되는 장정들이 커다란 탁자 두 개를 붙여놓고 앉아서 산같이 쌓인 요리를 살벌하게 퍼먹는 모습도 쉽게 볼 수 없는 장관이라 좀처럼 눈이 떨어지질 않았던 것이다.

“우화원 귀인이 사가로 쫓겨 나왔다는 소문이 있던데…….”

“응?”

그제야 허송이 정신을 차리고 친구를 돌아보았다.

“황후께서 황자를 생산하신 직후에 궁에서 쫓겨나 위사령의 집 행랑채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다네. 우리 집 청지기가 그 집 머슴아이와 동향인데, 며칠 전 저자에서 만나 그 얘기를 들었다는구먼.”

“설마…… 폐하께서 우화원에만 들락거리시는 통에 칠궁의 궁문에 거미줄이 칠 지경이라고 들었거늘, 그런 일이 있겠는가?”

허송의 반문에 옆에 앉았던 다른 친구가 피식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정황을 보면 그자가 위사령의 집에 머물고 있는 것은 사실일세. 지난 보름 동안 고 내관이 거의 매일 하인들을 거느리고 나와 자기 가게를 들락거렸다네. 게다가 천변 객잔에서 술에 취해 건들거리는 것을 보았다는 자가 수두룩하니…… 고 내관은 우화원 태감인데, 우화원에 변고가 없다면 어찌 매일 궁 밖을 돌아다녔겠는가?”

“허허…….”

“황후께서 그간 칼을 갈고 계셨던 것이지. 황자 아기씨를 낳자마자 우화원부터 내치시다니…… 그분이 한 방에 여럿 보내시는구먼.”

“황후께서야 우화원뿐 아니라 육궁의 모든 후궁을 싹 쫓아내고 싶으시겠지. 하지만 우화원 황귀비니, 허 황후니 불리며 총애를 독차지하던 자가 그렇게 맥없이 쫓겨나온다는 게 말이 되는가? 황제께선 무엇을 하시고?”

“아들을 낳은 본처가 파르르 떨며 별채에 웅크리고 있는 첩년과는 한 지붕 이고 못 살겠으니 내치라고 하면 사내가 그 강짜를 어찌 당해내겠는가? 게다가 우화원은 이제 마흔이 가까운 아저씨가 아닌가? 그런 자를 한 1년 실컷 주무르셨으면 족하지, 아직 홍안의 청년인 황제께서 설마 그자와 백년해로를 하시겠는가?”

친구들의 설레발과 너스레에 복잡한 세상일과는 담을 쌓고 살던 허송이 급변하는 세상 인심을 두고 오랜만에 깊은 고민에 빠졌다.

“아닌데…… 내 얼마 전에 광윤이를 만나서 들은 얘기로는…….”

“아니기는…… 옛말 그른 것이 있는가? 사내자식 개자식이라고……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른 것이 사내가 아닌가?”

친구들의 강한 확신에 허송이 그런가?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폐하께서 소싯적부터 호색하셨던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니…… 그럴 수도 있겠구먼.”

그래도 다음에 장광윤을 만나면 한번 물어는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허송이 친구 앞에 놓여 있던 술잔을 집어 홀짝 들이켰다.

“허면 다음은 향비 차례인가? 그간 향비가 제2황자를 앞세워 황후전을 압박한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니…….”

“아무리 그래도 향비는 슬하에 황손을 둘이나 두었으니 상대하기가 그리 수월하겠나? 그 가문도 만만한 가문이 아니고…….”

“자네 말대로라면 자식 없고 세력 없는 후궁들이 먼저 보따리를 싸겠구먼.”

“우화원 귀인이 그리 맥없이 쫓겨 나온 것을 보면…… 아마도 그리 되지 않겠는가?”

여태 말없이 오리 한 마리를 통으로 들고 뜯던 무호가 먹던 오리를 접시에 턱 내려놓았다. 어느 정도 배가 찬 후엔 건너건너 자리에 모여 앉은 도성 한량들이 떠드는 소리를 다 들어가며 음식을 먹던 다른 일행들도 무호의 눈치를 보며 수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 와중에 승주만이 앞에 놓인 국수 사발에 코를 박고 국수 가닥을 입안에 꾸역꾸역 밀어 넣고 있었다. 그런 승주의 옆구리를 영재가 쿡 쥐어박았다. 그제야 승주가 고개를 들어 무호를 쳐다보았다.

“떠도는 말에 신경 쓰지 마시고 드시던 것이나 마저 드십시오, 장군.”

“…….”

“저자거리의 한량 따위가 구중심처의 일을 어찌 소상히 알겠습니까? 매일같이 외조에 드나드는 중신들도 알지 못하는 것이 내정의 일이니, 대부분은 저희들끼리 지어 퍼트리는 근거 없는 풍문일 것입니다.”

“그리 생각하느냐?”

“아무리 황제라도 죄 없는 비빈을 함부로 내치는 법은 없습니다. 또한 4대째 거친 변방에서 국경을 지키고 있는 무 씨 가문의 공로와 충정을 생각하시면 어찌 아씨를 홀대하시겠습니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느냐?”

무호가 추궁하듯 다시 물었다. 그러자 승주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젓가락으로 국수 그릇 안을 휘저었다.

“제 생각이 뭐가 중요합니까? 내일이면 입궁하실 것이니 아씨를 뵙고 어찌 지내시는지 직접 물어보십시오.”

창 밖에서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기척에 허연이 눈을 떴다. 그러곤 이 낯선 방이 어디더라 생각하며 고개를 들어 방 안을 살폈다. 아, 맞다. 여기가 청량전이라고 했었지…… 국향원에서 가마를 타고 여기까지 와서…… 몽롱한 잠결에 낮에 있었던 일을 되짚어보던 허연이 고개를 한 번 세게 털고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욱의 성화에 온 국화밭을 다 뭉개며 정사를 벌였던 낯 뜨거운 기억이 떠오른 탓이었다.

벌건 대낮에 마당 한복판에서 그런 짓을 했으니 이제 부끄러워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닌단 말인가? 아무리 지밀 내관들이 그간 황제의 지근에서 못 볼 꼴 숱하게 보며 버텨온 자들이라고 해도, 그들도 사람이니 이런 흉악한 작태를 어찌 좋은 마음으로 보아 넘기겠는가? 생각할수록 난감하고 창피하고 욱이 괘씸해서 허연이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온갖 억지를 다 부리며 칭얼칭얼 매달릴 때엔 열두 살 어린아이 같다가도 정작 덤벼들어 난봉을 피울 때엔 천하에 그런 잡놈이 다시없으니…… 그 못된 강아지를 대체 어쩌면 좋단 말인가?

욱을 원망하며 이를 빠드득 갈던 허연이 곧 긴 한숨을 내쉬며 이불을 걷었다. 한 달이면 한 달, 두 달이면 두 달, 애초에 정했던 기간을 채우고 돌아와서 바로 우화원에 들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을…… 잠깐 들어 얼굴이나 보고 갈까 하는 얕은 마음으로 돌아왔으니 이런 봉변을 당한 것이지. 또한 내가 명확하게 싫다고 거부하고 뿌리쳤으면 그쯤에서 놓아주었을 것을…… 말로는 싫다 하면서도 태도는 영 어정쩡했으니, 그렇지 않아도 바짝 달아 있는 강아지의 조바심만 더욱 부채질한 꼴이 아닌가?

순간, 허연의 눈앞에 자신을 타고 앉아 세상을 다 가진 듯 득의만면한 미소를 짓던 욱의 얼굴이 선하게 떠올랐다. 어린아이처럼 짓궂으면서도 한편 오싹할 정도로 관능적이던 그 미소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허연의 등골이 짜릿하게 떨렸다. 자신의 배 속을 다 뒤집을 듯 사납게 날뛰던 욱의 움직임이 생생했고, 그가 아직도 자신의 안에 가득 들어차 있는 것처럼 몸이 쓰리고 아팠다. 그리고 골치가 지끈거릴 정도로 진한 국화꽃 향기도 마치 현실인 듯 코끝에서 감돌았다.

나도 정신이 나갔구나. 불과 한 시진 전에 그 봉변을 당하고도 부족해서 정신을 놓고 그 일을 떠올리고 있으니…… 결국 모든 것이 다 내 탓이니 누굴 원망하랴, 스스로를 달래며 허연이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

몸을 일으키던 허연의 입에서 긴 한숨과 함께 얕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보름 만의 만남이었고, 급작스러운 상황이라 허연은 아무런 준비도 없었고…… 게다가 욱은 흥분이 지나쳐서 보통 때보다 기세가 한층 거칠었다. 그런 욱을 떠안고 거친 흙바닥을 반 시진이나 기었으니 허연의 몸이 성할 도리가 없었다. 달리는 말에서 떨어졌어도 몸이 이렇게 나가지는 않았겠다고 속으로 푸념을 하며 허연이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허리를 두드리며 침전을 나온 허연이 청량전의 작은 마당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아까부터 창 밖에 사람 오가는 기척이 부산스럽다 했더니 내관들 수십 명이 형형색색의 국화 화분을 들어 나르느라 바쁘게 오가는 중이었고, 그 덕에 박석을 빈틈없이 깔아 풀 한 포기 없던 청량전 주변이 온통 꽃밭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어쩐지 자꾸 어디서 꽃향기가 들어오더라니…… 국향원에서 당한 일 때문에 얼이 빠져서 있지도 않은 꽃향기를 맡은 것은 아니니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며 허연이 저절로 피어난 척 색색이 뒤섞여 정원을 가득 채우고 있는 국화를 멍한 눈으로 내다보았다.

“마마, 이제 기침하셨습니까?”

내관들에게 화분 놓을 곳을 일일이 일러주며 별궁 주변을 꽃 천지로 만들고 있던 고 내관이 허연을 발견하고 얼른 달려왔다.

“이게…… 다 뭔가?”

“국화꽃이 아닙니까? 폐하께서 휘명전으로 돌아가시면서 올해 국화가 어느 때보다 아름다우니 청량전에도 몇 송이 들여놓으라고 명을 내리셨답니다.”

“몇 송이라고 했는가?”

“청량전이 워낙 아담한 전각이라 그렇지, 이 정도면 많은 것도 아닙니다.”

고 내관의 대답에 허연이 땅이 꺼져라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한숨을 쉬십니까? 몸이 많이 곤하십니까?”

“꼭 이래야 되겠는가?”

“예?”

“나는 이제 국화꽃만 보면 머리가 아프고 낯이 뜨겁네.”

허연의 짜증에 고 내관이 히죽 웃었다. 고 내관이 국향원으로 돌아왔을 때, 황제의 행차는 이미 그곳을 떠나 휘명전으로 돌아간 후였다. 하지만 국화꽃 만발한 정원에서 두 웃전이 친밀한 시간을 보냈다는 얘기는 정 내관과 윤 내관 편에 전해 들은 터라 허연이 청량전 침실에서 기절한 듯 쓰러져 자는 모습을 보고도 고 내관은 별로 놀라지 않았었다.

“폐하께 심히 시달리셨나 봅니다.”

“…….”

“뭘 새삼스럽게…… 폐하께서 그렇게 덤비신 것도, 처소 밖에서 그런 일을 당하신 것도 이미 한두 번이 아니질 않습니까?”

고 내관의 지적에 허연이 아픈 곳을 꾹 찔린 듯 움찔했다.

“한두 번이 아니라니? 딱 두 번이었네.”

“이제 세 번이지요.”

“…….”

허연의 시무룩한 표정에 고 내관이 부드럽게 웃었다.

“애초에 궁에 드실 때에, 폐하께서 정말 점심 수라만 같이 드시고 마마를 궐 밖으로 내보실 줄 아셨습니까? 소인은 이럴 줄 미리 알고 마마께서 입으실 비단옷과 장신구, 수침 드실 때 입으실 자리옷까지 다 준비를 해두었습니다.”

“그랬는가?”

허연이 흠, 헛기침을 하고는 해가 막 저물어가는 휘명전 지붕 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폐하는 마마 앞에 서시면 두 분이 처음 만나셨던 스무 살 그쯤으로 돌아가버리십니다. 잘 아시면서 어찌 번번이 이토록 당황하십니까?”

“스무 살 때로 돌아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강아지로 변하시니 그렇지.”

그 대답에 고 내관이 키득거리며 허연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침전으로 드시지요. 곧 폐하께서 드실 테니 준비를 하셔야지요.”

“폐하께서는 이미 하고 싶은 것을 다 하셨는데, 또 무슨 준비를 하란 말인가?”

“점심 먹었다고 저녁밥 거르는 이를 보셨습니까? 소인이 요번에 새로 들여온 물 빠진 단풍잎 색깔 비단으로 멋이 철철 흐르는 도포를 한 벌 지었는데, 오늘 저녁엔 그것을 입으시지요.”

“이 사람아…….”

“지난 보름간 허술한 무명옷만 입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궁에 드셨으니 지체에 맞는 복색을 갖추셔야지요. 또한 자잘한 취옥을 붙여 장식한 머리끈을 하나 구해두었으니 머리는 그것으로 묶으시면 과하지도, 허술하지도 않으실 겁니다.”

“그만 좀 하게. 폐하도, 자네도 어찌 나를 이토록 지치게 하는가?”

허연이 고 내관에게 끌려 터덜터덜 침전으로 돌아가며 볼멘소리를 했다. 

달콤한 아침 공기를 들이마시며 욱이 옆자리를 더듬었다. 그러곤 요즘 들어 항상 썰렁하기만 했던 침상 위에서 따끈한 온기를 느끼고는 미소를 지었다.

“귀인…….”

욱이 웅얼거리며 침상 가장자리에 붙어 자고 있는 허연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그 바람에 곤히 자던 허연이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

“이런…….”

창 밖이 훤하게 밝은 것을 본 허연이 혀를 차며 일어나 앉았다. 그러곤 보름 굶은 끼니를 하룻저녁에 몰아 먹고 더없이 흐뭇한 표정으로 꿈속을 헤매고 있는 욱을 흔들어 깨웠다.

“그만 일어나십시오, 폐하. 날이 밝았습니다.”

허연에게 흔들려 눈을 뜬 욱이 고개를 돌려서 창 밖을 힐끔 내다보았다. 그러곤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반 시진만…… 오늘은 별로 중요한 일도 없으니…….”

욱이 중얼거리며 팔로 허연의 허리를 감았다. 허연이 담쟁이넝쿨처럼 감겨드는 욱의 손길을 떼어내고 침상에서 내려섰다. 그사이 안에서 기척을 느낀 윤 내관이 침실로 들어왔다.

“기침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안에 들어 폐하를 깨워드려야 하나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시각이 많이 늦었는가?”

“지금 막 사시가 되었습니다.”

“저런…… 오늘은 아침에 조회가 없는가?”

“조회는 없사오나, 오시에 대현성에서 보낸 사절단이 들 것입니다.”

윤 내관의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허연이 욱의 볼기를 찰싹 소리가 나도록 갈겼다. 그 바람에 놀란 욱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접견은 오시인데 왜 꼭두새벽부터 사람을 깨우고 난리인가?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겠구먼.”

욱이 투덜거리며 허연이 집어준 조린 두부를 넙죽 받아먹었다.

“사시가 꼭두새벽입니까? 아침 드시고 의관을 갖추시고…… 늦지 않게 편전에 나가시려면 시간이 빠듯합니다.”

뭘 먹일까 잠깐 고민하다가 삶은 죽순 한 젓가락을 집어 욱의 입안에 밀어 넣으며 허연이 잘라 말했다.

“신하 된 자가 사정에 따라 한두 식경쯤 기다리는 것도 흔한 일이지, 과인이 칼같이 시간을 맞춰야만 하는가?”

“먼 길 달려온 사절을 고작 늦잠 따위를 이유로 기다리게 하겠습니까? 신하가 주군에게 갖추어야 할 예가 있듯, 주군이 신하를 대하는 예도 있는 법입니다.”

“내 그동안은 동틀 녘에 일어나서 밤이 깊도록 일만 하며 지냈거늘, 피로가 쌓여 하루 정도 늦잠을 잤다 하여 나를 예절 밥 말아먹었다고 비난하는 자가 설마 있겠는가?”

20대 중반의 젊은이가 피로가 쌓여 아침에 눈도 못 뜰 지경이 되도록 시달린 당사자로, 당장 앉아 있는 것도 괴로운 허연이 눈을 번뜩이며 욱이 제일 싫어하는 반찬을 찾아 수라상을 훑었다.

이쯤 되면 저 구석에 놓인 고사리나물을 접시째 입안에 밀어 넣겠구나 생각하며 욱이 밥상에서 물러앉았다. 그러곤 윤 내관을 돌아보며 딴청을 피웠다.

“무호가 어제 입경을 했는가?”

“예, 폐하. 그와 부장들 십여 명이 대흥루에 여장을 풀었다고 합니다.”

“대흥루라니? 무호는 최전방에서 나라를 지키는 장수인데다 과인의 처남이 아닌가? 그런 자를 저자거리 객잔에 묵게 하다니…… 사신각엔 불이라도 났느냐?”

“송구하옵니다, 폐하. 무호 장군의 숙소에 관해 달리 하교가 없으셔서…….”

윤 내관의 대답에 욱이 눈살을 확 찌푸렸다.

“내가 그렇게 사소한 일까지 일일이 지시를 해야 하느냐? 그 정도는 상선이 알아서 조치를 했어야지!”

“죽여주시옵소서, 폐하.”

윤 내관이 얼른 고개를 숙이며 죄를 청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허연이 상 가운데서 식어가던 갈비찜을 집어서 욱의 입에 물렸다. 그러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윤 내관을 돌아보았다.

“지금 사신각에 누가 머물고 있는가?”

허연의 물음에 그제야 윤 내관이 숨을 트며 고개를 들었다.

“여주성에서 온 우정공 부처가 수행인들과 함께 전각 두 채를 쓰고 있고, 수 대인과 그 장남의 식솔들이 나머지 전각 세 채를 쓰고 있습니다.”

“허면 사신각에 남은 전각이 없겠구먼.”

“송구하옵니다. 우정공은 폐하의 오촌 아저씨가 되시고, 수 대인은 향비마마의 친정 아비이니 황명이 있지 않고서야 어찌 전각을 비우라 하겠습니까?”

허연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욱을 힐끔 돌아보았다. 하지만 욱은 쇠갈비 힘줄을 질겅질겅 씹으며 여전히 불쾌한 표정으로 윤 내관을 노려보았다.

“우정공 내외는 그렇다 치고, 수 대인과 그 식솔들은 멀쩡한 집을 두고 어찌 사신각에 머문단 말이냐? 사신각은 지방에서 행차한 황족이나 외국 사신들을 접대하는 별궁으로 그 비용 일체를 황실에서 충당하고 있거늘…… 내가 언제 사신각을 향비 친정의 별장으로 내주었더냐?”

“지난여름에…… 수 대인의 집에 불이 나서 행랑채며 창고를 다 태운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때 향비께서 폐하께 청하여 윤허를 얻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으십니까?”

윤 내관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욱이 주먹으로 식탁을 거칠게 내리쳤다. 그 서슬에 윤 내관도 놀라고, 허연의 등 뒤에 서 있던 고 내관도 놀라서 힉 하고 낮은 비명을 질렀다. 

“허면 그 일가가 두 달이나 사신각에서 죽치고 있단 말이냐?”

“폐하…….”

“친정집에 불이 나서 그 아비와 형제들이 당장 머물 곳이 마땅치 않으니 살 집을 구할 때까지만 사신각을 쓰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기에 그러라고 허락을 한 것이지, 거기서 아예 살라고 했겠느냐? 향비의 체면을 봐서 급한 대로 공관을 쓰라고 허락을 했으면 며칠 머물다가 살 곳을 구해 나갔어야지, 나랏돈으로 밥 먹고 내관을 하인처럼 부려가며 두 달을 뭉개다니…… 사람들이 어찌 염치도 그렇게 없단 말인가?”

허연이 흥분해서 으르렁거리는 욱의 등을 한 번 쓰다듬고는 그 손에 물 잔을 쥐여주었다.

“고정하십시오, 폐하.”

“그자들 때문에 변방에서 달려온 호랑이가…… 아니, 처남이 도성을 드나드는 장사치처럼 허름한 객잔에 머물고 있다는데 고정하게 생겼는가?”

“폐하께서 윤허를 내리셨고, 그 이후 까맣게 잊고 계셨던 일이니 윤 내관인들 어쩌겠습니까? 아무리 대전 상선이지만 폐하의 처가 식솔에게 사신각을 비우라 마라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닙니까?”

“허면, 내가 지금 공연한 트집을 잡고 있단 말인가?”

욱이 물 한 잔을 단숨에 들이켜고 허연을 돌아보았다.

“아닙니다. 신하 된 자가 공관을 사사로이 사용한 것은 큰 잘못입니다. 더욱이 사신각은 나라의 귀한 손님을 접대하는 곳으로 쓰이는 인력이며 비용이 만만치 않은 곳이 아닙니까? 하지만 폐하께서 세심하게 살피고 미리 단속을 하셨으면 이렇게 민망한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종일 휘명전에서 노래나 흥얼거리며 노는 줄 아는가? 밀려드는 나랏일에 어깨가 뻐근할 지경인데 어찌 그런 일까지 일일이 살피고 단속을 하겠는가? 그 정도는 나이 먹을 만큼 먹은 자가 양심껏 처신을 했어야지!”

“갈비 한 점 더 드시겠습니까?”

허연의 권유에 욱이 고개를 저었다.

“거기 가장자리에 놓인 백숙이나 이리 주게. 닭다리 하나 건져 먹어야겠네.”

욱의 대답에 허연이 백숙이 담긴 탕기를 욱의 앞에 그릇째 놓아 주었다. 그러고는 아직껏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윤 내관을 건너다보았다.

“자네는 미향궁에 사람을 보내 태감을 들도록 하게. 편전에 드시기 전에 하교가 있으실 것이네.”

“예, 귀인. 지금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윤 내관이 대답을 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윤 내관이 등을 돌려 막 전각을 나설 참에 욱이 그를 불러 세웠다.

“태감을 부를 것도 없다. 그냥 네가 이 길로 가서 향비에게 명을 전하라. 수 대인 일가를 이미 두 달이나 사신각에 머물도록 했으면 과인은 처가를 대접할 만큼 한 것이다. 더욱이 요즘은 각처에서 사절들이 밀려드는 때가 아닌가? 사신각에 처소가 없어서 나라와 황실의 귀한 손님이 저자를 떠돌며 방을 구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수 대인 일가로 하여금 속히 사가로 나가 신하 된 도리를 지키게 하라고 전하라.”

“예, 폐하. 허면 소인이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나랏일 한 가지를 아침 먹으며 후다닥 처리한 욱이 느긋하게 상을 물리고 후식을 기다렸다. 허연은 늦잠을 잤네, 시간이 빠듯하네 아침부터 잔소리가 터졌지만 청량전에서 몇 걸음만 나가면 휘명전이니 무호가 휘명전에 지금 들이닥친다고 해도 바로 달려 나가면 늦을 일이 없었다.

“폐하, 후식입니다.”

윤 내관이 물러간 후 상선을 대신해서 수라 시중을 들던 고 내관이 욱과 허연 앞에 수라청에서 특별히 만든 가을 별식을 올렸다. 후식을 앞에 둔 욱은 음흉한 웃음을 지었고, 허연은 이게 뭔가 싶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국화떡과 국화차입니다.”

“가을엔 역시 국화지. 국화떡과 국화차라…… 참으로 운치가 넘치는구나.”

이름을 제대로 아는 꽃이라곤 국화하고 매화밖에 없을 정도로 꽃 따위엔 아무 관심도 없으면서 참 넉살 좋다 생각하며 허연이 자주색 국화 꽃잎이 섞인 떡을 하나 집었다. 그러곤 당연히 떡도 먹여줄 줄 알고 입을 딱 벌리고 있는 욱을 한 번 노려보고는 먼저 한입을 베어 물었다. 달콤하면서도 쌉쌀한 국화 향이 입안에 가득하고 코끝에도 아른거리니 어제 낮에 당했던 난행이 다시금 생생히 떠올라서 허연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확 붉어졌다.

“그러다 목 멜라. 차도 같이 들게, 귀인.”

허연의 목덜미가 빨갛게 달아오른 까닭을 짐작한 욱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찻잔을 허연 앞에 탁 내려놓았다.

“하온데 폐하, 대현성에서 오는 사절이 무호 장군입니까?”

아침부터 국화 향 가득한 수라상에서 가시 돋친 정담이 오가는 것을 듣던 고 내관이 욱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다는구나.”

“무호 장군이 들면 편전이 가득 찬 듯 보이겠습니다.”

“너도 무호가 기억나느냐?”

욱의 물음에 고 내관이 3년 전 잠깐 보았던 무호를 생생히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거인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소인은 세상에 정 내관보다 더 크고 어깨 넓은 자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게 말이다. 호걸 중의 호걸이라고 소문만 들었지, 실제로 그렇게 기골이 장대하고 인상이 험할 줄은 나도 몰랐었다. 귀인도 한때 천하제일의 지략과 무공으로 위명이 높았으나 실물은 이토록 아름다운 미장부이니, 그도 인상은 그냥 평범할 줄 알았지.”

욱의 부끄러움을 모르는 치사에 허연이 먹던 떡이 목에 걸려서 콜록거렸다.

“무 씨 가문의 형제들이 다 그렇게 기골이 장대하고 성정이 거칠다고 하지 않습니까? 당장 공비마마만 해도 키가 귀인과 거의 비슷할 정도이시니…….”

무호에 관한 말끝에 자연스럽게 나온 공비 얘기에 욱이 푸시시 한숨을 내쉬었다.

“형제간이니 체격도 비슷하고 성격도 비슷한 것이겠지. 공비의 별호도 영운궁 호랑이가 아니더냐?”

그 호랑이가 향비의 못된 농간에 걸려서 폐궁의 구박데기로 버려진 현실이 떠올라서 고 내관도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무호 장군이 들면 공비마마도 한 번 뵙고 가려고 할 터, 며칠 전에라도 알았으면 비단옷이나 한 벌 지어 올릴 것을…… 소인이 그간 밖에 나가 있느라 궐 안 소식을 통 몰랐지 무엇입니까?”

고 내관의 한탄에 욱이 까닭을 몰라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비가 설마 옷이 부족하겠느냐? 황후가 황자를 생산한 직후 각 전각에 궁분 외에 비단 열 필씩을 따로 내려서 경사를 축하하도록 했느니라. 그것으로 옷 몇 벌은 벌써 지었겠지.”

“아, 예…….”

고 내관이 하고픈 말을 꿀꺽 삼키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간 먹고사는 일에도 곤란이 많았던 영운궁이 비단인들 제대로 받았겠는가, 그럴 줄 짐작은 했지만 폐하는 정말 공비의 사정을 까맣게 모르고 계시는구나 생각하며 고 내관이 먹은 것이 얹혀 가슴을 툭툭 두드리고 있는 허연의 등만 일없이 쓸어내렸다.

“기왕 날짜 맞춰서 입궁했으니 자네도 편전에 들어 무호를 만나보면 좋으련만…….”

황의에 면류관을 갖춰 쓰고 청량전을 나서던 욱이 아쉬운 듯 허연을 돌아보았다. 꼭 무호를 같이 만나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자신이 편전에 든 사이 허연이 다시 궁을 나갈까 봐 불안해서 걸음이 쉬이 떨어지질 않았던 것이다.

“변방에서 온 장군을 접견하시는데 남첩을 데리고 나가시면 그들이 폐하를 어찌 보겠습니까?”

“어차피 과인과 그대가 정인이라는 것은 이제 온 나라가 다 아는 일이 아닌가? 편전이건 성 밖이건 손 붙들고 같이 다닌들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시각이 다 되었으니 얼른 가십시오.”

허연의 재촉에 욱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머뭇거렸다. 욱이 좀처럼 처소를 나서지 못하는 까닭을 짐작한 허연이 결국 졌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늘은 아무 곳에도 나가지 않고 여기서 폐하를 기다리겠습니다. 그러니 걱정 마시고 대현성에서 온 무시무시한 처남도 만나보시고, 공비마마와 점심도 같이 드십시오.”

“그대도 같이 들면 좋을 텐데…….”

“어허!”

허연이 그쯤에서 욱의 어리광을 딱 잘랐다. 그러곤 등을 떠밀어 욱을 청량전 밖으로 쫓아냈다.

“담장 하나 넘으면 바로 휘명전인데, 폐하의 걸음이 정말 천근처럼 무거워 보입니다.”

늦잠에, 아침을 한 시진 꽉 채워서 먹으며 한껏 게으름을 피우다가 축 늘어져서 휘명전으로 향하는 욱의 뒷모습을 보며 고 내관이 혀를 끌끌 찼다.

“날이 갈수록 뺀질뺀질 게으름이나 피우려 하시니 큰일일세.”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정작 궁문을 나서는 욱의 뒷모습을 아련한 눈길로 지켜보는 허연의 모습에 고 내관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무호 장군이 왔다니, 공비께서 오랜만에 동기간을 만나시게 되었으니 그간의 괴로움을 조금이나마 더시겠습니다.”

“하긴, 그간 폐하께서 공비께 많이 무심하셨으니…….”

“그야 뭐, 공비께서도 페하께 만만치 않게 무심하시니 그렇다 치더라도…….”

“응?”

그렇지 않아도 향비의 전횡을 만천하에 알리고 싶어서 입이 간질간질하던 고 내관이 다시 한 번 입술을 꾹 깨물었다. 후궁에서 벌어지는 비열하고 치졸한 음모 따위, 허연은 모르는 편이 나았던 것이다.

욱이 궁문을 넘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던 허연이 발길을 돌려 내실로 들어갔다. 고 내관이 그 뒤를 따르며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러지 마시고 편전에 같이 나가보시지요. 무호 장군을 한 번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나 때문에 폐하께서 실수라도 하시면 어쩌나? 또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오랜만에 처남을 만나시는 것이니 더더욱 내가 낄 자리가 아닐세.”

“하지만 무호는 그 부친인 무영준 장군의 젊은 시절보다 더욱 무공이 뛰어나고 성정이 거칠답니다. 그가 장검을 차고 대현성 성문 위에 버티고 서 있으면 몰려오던 장족이 그냥 발길을 돌릴 정도라 하고, 동북부에 이름 높은 장수가 수백이라도 무호의 무공과 기세를 능가할 자가 없을 정도라고 명성이 자자합니다. 소인이 얼핏 보기에도 그 사람 생김새가 영락없이 호랑이가 사람으로 둔갑을 한 형상이었으니…… 가서 슬쩍이라도 한 번 보시지요.”

고 내관의 권유에도 허연은 꿋꿋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장수의 성품과 무공을 어찌 관상만 보고 알겠는가?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깊은 얘기를 나눠보든가, 날을 잡아 검이라도 한 번 섞어봐야 대강 짐작이라도 하는 것이지.”

“종일 청량전에서 할 일도 없지 않으십니까?”

“명이와 환이를 만승전에 보내 서책이나 몇 권 찾아오도록 하게. 오전에 책을 좀 보고, 오후엔 숲 속으로 산책이나 가세. 그리하다 보면 하루도 금방 가겠지.”

허연이 씩 웃으며 고 내관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우와…….”

무호와 그 수행인들이 휘명전의 정전에 들어서자 용상 좌우에 늘어선 중신들이 입을 맞춰 탄성을 토해냈다. 무엇보다 체면을 중시하고 어전에서는 진중함이 생명이란 신조를 갖고 있던 시영마저도 무호와 그 부장들의 위풍당당한 모습에 넋이 나가서 입을 딱 벌렸다.

“허허…… 기둥이 걸어 들어오네그려.”

시영의 나직한 혼잣말에 옆에 서 있던 장광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키가 한 뼘만 더 컸으면 휘명전의 대들보라도 능히 받치겠습니다.”

“살다 보니 폐하와 정 내관이 아담해 보일 때가 다 있구먼.”

“키만 큰 것이 아니라 인상이…… 지난번에 왔을 때보다 더 사나워진 것 같지 않습니까?”

“나는 무 장군을 요번에 처음 보네. 공비가 입궐할 그 즈음엔 모래바람이 너무 심해서 며칠 바깥출입을 못했었네.”

“아…….”무호가 정전 가운데에 와서 설 때까지도 정신 못 차리고 조잘거리고 있는 시영과 장광윤을 욱이 힐끔 노려보았다. 중신들이 다들 그렇게 떠들어대는 통에 휘명전 전체가 술렁거리고 있긴 했지만 시영은 바로 옆에 서서 떠드는 바람에 더욱 거슬렸던 것이다.

무호가 정전 복판에 와서 무릎을 꿇자 욱이 더는 참지 못하고 험! 하고 헛기침을 해서 좌중의 소란을 잠재웠다. 기골이 장대하다고 해봐야 한두 치 차이인 것을, 나이도 지긋한 자들이 채신없이 떠든다고 속으로 한심해하면서 욱이 무호를 돌아보았다. 그러곤 자신도 모르게 짧은 한숨을 삼켰다.

나도 어디서든 꿀리지 않는 체격이고, 딱히 저자에게 잘못을 한 일도 없는데 어찌 이리 아랫배가 살살 아픈고? 혹, 아침에 고사리나물을 너무 많이 먹은 것이 탈이 났는가?

“폐하! 대현성 우장군 무호, 폐하를 뵙사옵니다.”

흡사 호랑이 울음소리 같은 무호의 목소리가 휘명전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 목소리에 잠시 잠잠했던 편전이 다시 술렁술렁 소란스러워졌다.

“허…… 목청도 대단합니다.”

“이것 좀 보게. 나는 팔에 털이 다 곤두섰네.”

“편전에 들어 폐하께 문후를 올리는 목소리도 산중의 호랑이가 포효를 하는 것 같으니, 전장에 나서 병사들을 지휘할 때엔 그 위용이 참으로 대단하겠습니다.”

욱이 다시 한 번 시영과 장광윤에게 눈치를 주며 조그맣게 혀를 찼다. 그러고는 침착한 눈길로 무호를 내려다보았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네. 장인은 별고 없으신가? 집안은 무탈하고?”

“폐하의 성덕으로 나라가 태평하니 집안에 무슨 큰일이 있겠습니까? 아버지도 잘 계시고 집안도 두루두루 평안합니다.”

“최근 변방의 정세가 위태롭다 하여 걱정이 많았는데, 그대가 직접 와서 안부를 전해주니 마음이 놓이네.”

“미천한 소인의 집안을 걱정해주시니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대현성 무 씨 집안은 과인의 처가가 아닌가? 또한 장족은 변방의 여타 부족들 중에서도 세가 크고 거친 무리이니 항시 마음이 쓰이네.”

“소신의 가문이 폐하께 큰 은혜를 입었으니 나라와 황실을 위해서라면 목숨인들 어찌 아깝다 하겠습니까? 또한 미천한 소인이 두 번이나 황궁에 들어 폐하의 강건하신 모습을 뵈었으니 소인과 집안의 큰 광영입니다.”

“대현성이 그렇게 멀지 않고 변방이 평온했다면 그대가 좀 더 자주 입경을 했을 텐데, 얼굴 한 번 보기가 이렇게 어려우니 과인도 많이 안타깝네.”

지금의 황제는 이전의 황제나 권신들과는 달리 백성들을 지극히 아끼는 현군으로 칭송이 자자했다. 실제로 황제가 친권을 가진 이후부터는 풍년이 든 해라도 함부로 세금을 더 걷지 않았고, 흉년이 든 해나 춘궁기엔 구휼미를 아낌없이 풀어서 백성들을 돌보았기 때문에 나라 안의 사정이나 인심은 과거 어느 때보다 풍족하고 너그러웠다.

하지만 황제에 대해 들려오는 소문이 항상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특히, 뜬금없이 돌아온 연주국 대장군 허연과의 염문은 나라 안팎에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는데, 황제가 젊고 아직은 큰 실정이 없다 보니 그 반대급부로 허연과의 관계만 날이 갈수록 크게 부풀어져서 음험한 추문이 되어가고 있었다.

허연의 간섭과 질투로 인해 그가 환궁한 이후엔 후궁에 후사가 통 없다는 둥, 한때 태화궁을 넘볼 정도로 기세가 드높았던 향비조차 그 앞에서는 전전긍긍이라는 둥, 향비까지 그런 박대를 당할 지경이니 다른 후궁들은 황제의 그림자도 구경 못하고 속절없이 독수공방이라는 둥…… 대현성 같은 변방의 장터에서까지 그런 말이 돌 정도라서 사실 무호는 도성까지 오는 내내 마음이 무겁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이제 황제를 직접 알현하고 보니, 3년 전 보았던 그때보다 태도는 더 의연하고 그 눈빛엔 총기가 넘쳤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좌중을 압도하는 위엄이며 언행이며…… 어디로 봐도 남색에 빠져 천지분간 못하는 등신 같은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어서 속으로 긴 한숨을 내쉬고 있던 차, 백관이 벌여 선 자리에서 일개 후궁의 일가에 불과한 자신의 집안을 처가라고 높여 부르고 직접 부친의 안부를 물어주니, 알게 모르게 쌓여 있던 황제에 대한 섭섭함이 풀려서 굳었던 무호의 표정도 많이 부드러워졌다.

“황실에 큰 경사를 맞으신 것을 대현성의 백성 모두가 감축드리고 있습니다. 또한 영주께서도 크게 기뻐하시며 소인 편에 선물을 올리셨습니다. 비록 하잘것없는 것이지만, 영주님과 백성들의 성의이니 받아주십시오.”

무호의 말이 떨어지자 뒤에서 같이 부복을 하고 있던 그 부장들이 들고 들어온 세 개의 상자를 열어 안에 든 것을 황제 앞에 펼쳐 보였다.

“우와…….”

무호의 선물이 펼쳐지자 편전에 다시 한 번 탄성이 가득 찼다. 이번엔 욱도 모르는 사이 탄성을 토하다가 얼른 표정을 고치고 헛기침을 했다.

부장들이 상자에서 꺼낸 것은 석 장의 호랑이 가죽이었다. 천하의 귀물이 모두 모이는 황궁에선 호랑이 가죽도 그렇게 별스러운 물건은 아니었고 오히려 창고엔 수십 장의 호랑이 가죽이 쌓여 있을 정도였지만, 무호가 바친 백호 가죽은 여태 한 번도 보지 못한 크기였다.

“백호도 귀한데 게다가 이렇게 큰 것을 어찌 구했는가? 대현성 근처에 이런 호랑이가 있었단 말인가?”

“이놈은 지난 5년간 성 근처에 종종 출몰해서 나무를 하거나 버섯을 따던 백성을 해쳐온 놈입니다. 그간은 호랑이 사냥 따위 한가한 일을 할 틈이 없어 버려두었으나, 지난 가을엔 고갯길을 지나는 장꾼을 습격하는 일이 한 달 사이 세 번이나 벌어져서 소인이 직접 부하들을 이끌고 산을 뒤져 이레 만에 이놈을 잡았습니다.”

“우와…….”

이 큰 호랑이를 사냥꾼이 잡아 바친 것도 아니고, 무호가 직접 부하들을 이끌고 나가 잡았다는 말에 어느 때보다도 큰 탄성이 터져 나왔다. 황소만 한 호랑이를 직접 사냥했다는 말을 별로 자랑하는 기색도 없이 담담히 내뱉는 무호의 태도에 아까부터 원인 모를 복통에 시달리던 욱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한 방울 또로록 흘러내렸다.

“거 참…… 대단하구먼.”

대현성 호랑이란 별명이 거저 얻은 것이 아니구나, 실제로 산중을 휘젓고 다니며 저런 놈을 잡아들일 정도라면 호랑이보다 더 흉폭한 구석이 있는 자가 아닌가? 내 팔자야…… 저런 자가 처가 형님이라니, 게다가 내가 공비와 아직 초야도 치르지 않은 것을 알면 호랑이 때려잡던 기세로 내게 달려들겠구먼……. 그런 두려움에 욱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호랑이를 잡을 때, 뒤에 있는 부장들도 함께 있었는가?”

“예, 같이 온 부장들은 소인이 성 밖을 나갈 때엔 어디라도 함께 다니는 수족과 같은 자들입니다.”

무호의 대답에 욱이 그 부장들을 하나씩 훑어보았다. 키 크고 덩치 좋기는 무호가 단연 압도적이었지만 나머지 사내들도 만만치 않은 거구의 무인들이었다. 이자들에 비하면 위병들도 얌전한 서생처럼 보이겠구나 생각하며 욱이 문 옆에 줄지어 선 위병들 쪽으로 눈길을 던졌다.

위병들도 도성 안에선 나름대로 위풍당당한 무인들인데, 무호와 그 부장들을 보고 나서 바로 비교를 해보니 그 체구가 여간 홀쭉하고 날렵해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나마 내 주변에 부장들하고 비슷한 자가 있다면 정 내관하고 대화문 수문장직을 맡고 있는 중걸 정도겠구나 생각하던 욱이 눈살을 찌푸리며 문 옆을 노려보았다. 문 옆 기둥 뒤에 보일 듯 말 듯 서 있는 위병 하나를 발견한 탓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무호에 비하면 다들 세로로 반 토막이거늘, 바람 불면 날아갈 듯 비쩍 마른 저자는 누구인가? 위병 중에 저렇게 부실한 자가 있었다니……, 혹, 위병 선발에 비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공연히 못마땅한 기분이 들어서 욱은 무호 일행을 직접 인솔해 편전에 든 진관우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진관우는 다른 중신들과 마찬가지로 백호 가죽에 정신이 팔려서 아무리 노려봐야 눈치도 채지 못하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위병도 꼭 저 같은 것으로만 뽑아 채운다고 속으로 툴툴거리며 욱이 다시 문 옆의 위병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마침 욱을 힐끔거리던 위병과 눈길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그제야 투구를 깊이 눌러쓴 위병의 정체를 눈치 챈 욱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폐하…….”

욱이 한참이나 다른 데 한눈을 팔며 뭐라 말이 없자 보다 못한 윤 내관이 옥좌로 다가섰다.

“하명하신 대로 부용지 정자에 무호 장군과 부장들을 위한 오찬을 준비해놓았습니다.”

“아…….”

그제야 정신을 차린 욱이 험……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러곤 의젓한 표정으로 무호 일행을 내려다보았다.

“대현성 사내들의 용맹함과 충절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오늘 이렇게 직접 보니 과연 듣던 대로일세. 요즘 부쩍 장족의 도발이 잦아졌다기에 걱정도 많았었는데, 내 마음이 턱 놓이는구먼.”

“그리 말씀하시니 소인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폐하.”

“과인이 조촐한 오찬을 준비했으니 자리를 옮기세. 장족에 관한 일도 좀 더 듣고 싶고, 호랑이 사냥 얘기도 궁금하구먼.”

그렇게 말하며 욱이 용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부용지는 향원궁 후원에 딸린 연못으로, 그 이름에 걸맞게 봄부터 가을까지는 빽빽이 들어찬 연꽃과 연잎으로 수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고 운치가 뛰어난 궁 안의 명소였다. 본래 향원궁은 종친과 중신들을 위한 별궁으로 외조에 속한 곳이었기 때문에 보통 때의 부용지는 나랏일에 지친 중신들이 잠시 나와 바람을 쐬며 머리를 식히는 곳으로 쓰였고, 종친의 경사나 중신들의 승차를 축하하는 외조의 행사 때마다 그 연회장으로도 자주 쓰였다.

이미 깊은 가을이라 부용지에 더 이상 연꽃은 없었지만 그 잎은 아직도 시퍼렇게 수면을 뒤덮고 있었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아서 황제가 먼 곳에서 온 처남을 대접하는 연회장으로는 흠잡을 곳이 없었다. 무호가 비록 무명이 높고 공이 많은 장군이긴 했지만, 변방 성읍의 일개 장군이라는 지위만 놓고 보면 황제가 그 일행의 오찬을 부용정에 마련한 것은 그를 크게 높여서 대접하는 것이었다.

휘명전을 나와 황룡전과 대조전을 거쳐서 향원궁까지 오는 사이 무호의 부장들은 황궁의 위용과 화려함에 감탄을 금치 못했고, 무호 또한 내 누이동생이 비의 첩지를 받고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들어서 높은 대접을 받으며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그간 품어왔던 걱정과 시름을 잠시 잊었다.

“변방의 성벽을 지키는 일개 무부가 황궁에 들어 폐하를 직접 뵙는 것만 해도 크나큰 광영이거늘, 미천한 소신들에게 이렇게 성대한 오찬을 베풀어주시니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부용정에 당도한 무호 일행이 화려한 정자와 연잎이 끝도 없이 펼쳐진 연못을 두리번거리는 사이 무호가 다시 한 번 욱에게 고개를 깊이 숙였다.

“앉게. 대현성 무 씨 가문은 과인의 처가이자, 위험한 변방을 4대째 지키고 있는 충신의 집안이니 어찌 이 정도를 대접이라 하겠는가?”

그렇게 치하를 하며 욱이 먼저 자리에 앉았다.

“영운궁에 사람을 보냈으니 곧 공비도 이리 올 것이네. 오랜만에 만나는 누이동생이니 오죽 반갑겠는가?”

“수진이가…… 아니, 공비께서 이리 오십니까?”

무호가 다소 당황한 눈길로 욱을 쳐다보았다. 황궁의 법도가 엄하다니 누이를 한 번 보고 갈 수는 있을까, 사사롭게는 누이동생이지만 황제의 비이자 궁주이니 만나는 데 따로 절차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어수선해서 무호는 그 먼 길을 달려오고도 어제 저녁에 잠을 설칠 정도였던 것이다.

“허면 변방에서 3년 만에 오라비가 왔는데, 누이동생을 한 번 보여주지도 않을 줄 알았는가?”

“황궁은 법도가 엄해서 한 번 궁에 들면 비록 식솔이라도 만나기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법도가 지엄한 곳에 시집와서 걸핏하면 싸움질에, 욕설에, 시비에…… 온통 말썽뿐인 공비의 행실을 생각하면 욱도 무호에게 따지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지만 후궁 중 명문 귀족의 딸은 이미 많으니 변방에서 고생하는 무장의 집안과도 혼인을 해서 비단 무 씨 일가뿐 아니라 다른 무신들의 사기도 높이자며 대현성 무영준의 딸을 후비로 낙점한 사람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으니…… 오라비는 탓해서 무엇 하랴, 수틀리면 호랑이도 때려잡는 자인데 공연히 성질 건드렸다간 나만 손해다 싶어서 욱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황궁도 사람이 사는 곳일세. 더구나 공비는 궁녀가 아니라 과인의 후비가 아닌가? 그렇게 지체 높은 귀부인이 보름이나 말을 달려온 친정 오라비를 만나지 못한대서야 말이 안 되지.”

그렇게 대답하며 욱이 무장들에게 다시 한 번 자리를 권했다. 그러고는 윤 내관을 가까이 불렀다.

“과인의 옥배를 가져오너라. 시간이 좀 이르긴 하지만 무 장군에게 술 한 잔 내려서 그간의 노고와 원행의 수고를 위로해야겠다.”

“예, 폐하. 곧 대령하겠습니다.”

“그리고…….”

욱이 윤 내관의 귓가에 입을 바싹 들이대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기 다리 위에 늘어선 위병들 중 끝에서 두 번째 병사를 처마 밑으로 데리고 오너라. 저리 오래 두면 가을볕에 얼굴이 타겠구나.”

“예?”

그제야 윤 내관이 부용정 건너오는 다리 위에 죽 늘어선 위병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그 끄트머리에서 익히 아는 얼굴을 발견하고는 히죽 웃었다.

공비가 부용정에 당도한 것은 술이 한 순배 돌고 궁녀들이 식은 음식을 치우고 향원궁 조리각에서 방금 조리한 더운 음식을 새로 차리느라 분주한 때였다. 공비가 향원궁 후원에 들어서자 지밀 내관들 틈에 끼어 서 있던 고 내관이 수하의 견습 내관들을 달고 얼른 달려 나가서 그녀를 맞았다.

“어서 드시옵소서, 공비마마.”

“자네도 여기 있었는가?”

우화원 태감인 고 내관이 달려 나와 자신을 맞자 공비가 의아한 표정으로 연회가 벌어지고 있는 부용정을 넘겨다보았다. 황제가 오라버니를 대접하는 연회에 우화원 귀인을 데리고 나온 것인가?

대현성은 궁벽하고 척박한 곳이라 화려하고 여유가 넘치는 황성이나 여타 부유한 성읍과는 풍습이며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특히나 남색이라면 만고에 쓸데없고 흉악한 짓이라는 인식이 강했고, 무호 역시 그런 얘기가 나오면 눈살부터 찌푸리는 성격이었다. 그러니 황제가 남첩을 대동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어전이라는 것도 잊고 실언이나 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워서 공비의 눈가에 수심이 서렸다.

“소인의 소속이 본시 지밀인지라…… 오늘은 휘명전에 들어 폐하를 보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며 고 내관이 공비의 옷차림을 한눈에 싹 훑었다. 3년 만에 친정 오라비를 만나는 자리라 공비는 격식에 맞는 예복을 갖추고 있었다. 비록 새 옷은 아니었지만 화사한 옥색 예복에 백옥과 홍옥으로 깎은 비녀를 꽂은 그녀의 모습은 얼핏 상궁처럼 보이던 어제의 수수한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혹, 입을 옷도 마땅치 않아서 어제처럼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나면 어쩌나 걱정을 하던 고 내관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비단옷 몇 벌 챙겨 보내고 싶었지만 공비는 보통 여인과는 치수가 많이 달라서 이미 만들어놓은 기성품은 맞는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가? 자네가 나와 있기에 나는 귀인도 동석을 하신 줄 알았네.”

“폐하께서는 권하셨으나 귀인께서 거절하셨습니다.”

“아…….”

“어서 드시지요, 마마. 폐하와 무호 장군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공비가 부용정에 오르자 무호와 그 부장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호는 오랜만에 보는 누이동생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끈해져서 얼른 눈을 내리깔았고, 공비가 어렸을 적엔 자주 보며 누이동생처럼 보살피던 부장들도 반가움과 안도감으로 길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와중에 욱은 어째서 공비가 고 내관과 우화원 견습 내관들을 마치 자기 전각 태감과 내관들인 양 줄줄이 거느리고 나타났는지가 의아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마.”

“오라버니.”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겠습니다.”

공비와 무호가 얼마간 거리를 두고 서서 서로에게 그간의 안부를 물었다. 어전이라고 체면을 차리는 것인지, 저 집안 사람들 본래 성격이 저렇게 무뚝뚝하고 말수가 적은 것인지 모르겠다 생각하며 욱이 자기 잔에 술을 따랐다. 그때 욱의 등 뒤에 서 있던 위병이 더욱 바싹 다가오더니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그만 드시지요. 대낮부터 무슨 약주를 그렇게 드십니까?”

“3년 만에 만난 남매간의 상봉이 감격스럽지 않은가? 오늘 같은 날에 술 한 잔 아니 하면 언제 하겠는가?”

욱도 덩달아 나직하게 위병에게 속삭였다.

“좋게 말로 할 때 술잔을 내려놓으십시오.”

“그나저나 절대 안 나올 것처럼 버티더니, 그런 차림으로 나와서 기웃거릴 정도면 자네도 무호가 어떤 자인지 무척 궁금했던 모양일세.”

히죽거리며 욱이 허연에게 술잔을 넘겼다.

“궁금해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울적하게 대꾸하면서 허연이 고개를 돌리고 얼른 술잔을 비웠다.

“허면?”

“청량전에서 책이나 읽으려는데 고 내관이 어디서 비단을 한 짐이나 들고 와서는 올겨울에 지을 도포 감이나 찾아보자며 수선을 피우기에 놀라서 뛰쳐나온 것입니다.”

허연의 대답에 욱이 저도 모르게 캑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고 내관이 참 내게는 둘도 없는 충신이구먼.”

“싱거운 말씀 그만하시고 공비마마를 곁으로 부르시지요. 장군과 부장들도 그만 앉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허연의 지시에 그제야 욱이 인사 한두 마디 나누고 서먹하게 서 있는 공비를 불러 옆자리에 앉혔다. 상석으로 다가서던 공비는 위병으로 변복을 하고 욱의 뒤편에 서 있던 허연을 한눈에 알아보았고, 고 내관이 연회석에 나와 있는 이유도 비로소 깨달았다. 하지만 별다른 내색 없이 허연에게 고개만 한 번 까딱 숙이고는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공비가 자리에 앉자 욱이 무호에게 다시 술을 내리고 공비에게도 술 한 잔을 권했다.

“무호 장군이 이번에 오면서 호랑이 가죽을 석 장이나 가지고 왔네. 특히나 백호 가죽은 여태 어디서도 보지 못했을 정도로 크고 털도 풍성해서 휘명전에 모였던 모든 중신들이 다들 탄복을 했네.”

“대현성 일대는 높은 산맥이 연이은 곳이라 호랑이도 많이 있습니다.”

공비가 제법 큰 술잔의 술을 한입에 털어 넣으며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공비가 자신의 치하를 받아주는 것이 아니라 말을 턱 잘라먹자 욱이 뻘쭘해져서 더 너스레를 떨었다.

“그 큰 호랑이를 처남이 직접 잡았다는구먼. 내 영운궁에도 가죽을 보내줄 테니 자네도 한 번 보게. 보통 볼 수 있는 호랑이가 아니었네.”

“오라버니는 소싯적부터 성 근처에 호랑이가 출몰해서 백성들이 죽거나 다치는 일이 생기면 친구들을 이끌고 자주 호랑이 사냥을 다녔습니다. 소첩도 황궁에 들기 전엔 같이 사냥을 나가곤 해서 호랑이 가죽은 많이 보았습니다.”

공비의 빈 잔에 손수 술을 부어주던 욱이 그 대답에 놀라서 그만 술을 쏟고 말았다.

“호랑이 사냥을…… 같이…… 다녔는가?”

“…….”

욱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공비가 공연한 말을 꺼냈구나 싶어 머뭇거렸다. 그러자 무호가 나서서 공비의 일을 변명했다.

“마마께서 호랑이를 직접 잡은 적은 없습니다. 그냥 따라 나와서 구경을 한 것입니다.”

“그런가? ……그렇겠지.”

그만해도 간 크다, 여인이 어떻게 호랑이 사냥에 따라 나설 생각을 했을꼬,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욱이 찬물을 한 잔 쭉 들이켰다. 그때, 무호의 옆자리에서 부장들끼리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기울이던 영재가 불쑥 끼어들었다.

“공비마마께서 호랑이를 잡으신 적은 없지만 멧돼지는 종종 잡지 않으셨습니까?”

영재의 실토에 무호와 부장들이 일제히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술이 얼큰히 들어간 영재는 공비가 어렸을 적, 같이 사냥을 다니던 그때 일을 회상하느라 눈빛이 한없이 아련할 뿐이었다.

“저희 마마의 활 솜씨는 가히 천하제일입니다. 가만히 있는 과녁을 맞히는 정도는 그저 장난이고 하늘을 나는 새도 척척 떨굴 정도이니…… 소인이 대현성에서 수많은 부하 놈들을 훈련시켰어도 마마와 같은 명궁은 다시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공비가 멧돼지를 활로 잡았단 말인가?”

욱의 물음에 영재가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보통 놈이 아니고, 성 밖 백성들의 밭을 다 들어엎고 종종 사람에게도 덤비던 크고 흉폭한 놈이었습니다. 그 크고 못생긴 놈이 야산에서 몰이꾼들에게 몰리다가 하필이면 마마가 있는 쪽으로 돌진을 했는데…….”

변방 무장들의 사기 진작도 좋지만 좀 더 알아보고 낙점을 할 것을…… 내가 정말 변방에서 호랑이를 잡아 왔나 보다, 그렇게 넓고 탁 트인 곳에서 호랑이 사냥 다니고 멧돼지 잡던 여인을 끌고 와 좁은 별궁에 가두었으니 입궁하던 그때부터 그토록 상심을 했던 것이구나 싶어서 욱이 옆에 앉아 제 술 제가 따라 마시고 있는 공비를 힐끔거렸다.

“그래서…… 어찌 되었는가?”

“저희 장군께서도 놀라 다급하게 창을 던졌으나 놈의 등을 스쳐서 땅에 박히고 말았지 무엇입니까? 오히려 그 때문에 멧돼지는 더욱 흥분해서 곧 마마를 밟을 기세였는데, 마마께서는 오히려 침착하게 시위에 활을 메겨 놈에게 일격을 날리셨습니다.”

본래 계획은 무호의 호랑이 사냥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는데, 뜻밖에 공비의 멧돼지 사냥 이야기를 듣게 된 욱이 굳은 얼굴로 영재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그 한 발로 멧돼지를 잡았단 말인가?”

“그 화살이 눈에 명중해 뇌수에 박혔으니 제아무리 맹수라도 어찌 살겠습니까? 그 정도 솜씨라면 멧돼지가 아니라 호랑이라도 능히 잡았을 것입니다. 호랑이가 공비께 걸리지 않았으니 그놈들이 운이 좋았던 것이지요.”

호랑이도 피해 간 여인에게 내가 딱 걸렸구나. 어찌 이런 일이……. 속으로 한탄을 하며 길게 한숨을 내쉬는 욱의 등을 허연이 기어이 한 대 쥐어박고 말았다. 욱이 그제야 표정을 고치고 공비를 돌아보았다.

“백성들을 괴롭히는 맹수를 사냥했으니…… 그대도 나라에 공이 크구려.”

“어인 말씀이십니까? 저 좋아서 한 일을요.”

“그래도…….”

욱이 차마 말을 못 잇고 또다시 긴 한숨을 쉬었다.

공비의 멧돼지 사냥 이야기를 끝으로 오찬석엔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말발 좋은 문신들이 모여 앉은 자리라면 화제가 꼬리를 물며 오히려 너무 말들이 많아서 짜증이 날 정도였을 텐데 걸걸한 변방의 무사들은 궁녀들이 음식을 들여오기 무섭게 그릇만 비울 뿐, 어지간해서는 먼저 입을 떼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시영이나 장광윤이라도 동석을 하자고 청할 것을 잘못했다 후회하며 욱이 일없이 찻잔만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그러곤 옆자리에 앉아서 덩달아 말없이 홀짝홀짝 술만 마시고 있는 공비를 돌아보았다.

“그대의 활 솜씨가 그토록 출중한 것은 미처 몰랐네. 명문가의 영애들은 집안의 중문도 좀처럼 넘지 않으며 침선이나 서예에만 전념한다고 하기에 그대도 그런 줄만 알았지.”

“부족한 신첩이 황궁에 들어 폐하께 누를 끼쳐 송구합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공비가 또 술 한 잔을 훌쩍 비웠다. 누를 끼친 것을 알기는 아는구나. 딱히 미안한 기색은 없지만……. 속으로 투덜거리며 욱이 다시 찻잔을 집어 들었다.

“사가에 있을 때엔 그렇게 넓은 세상을 마음껏 돌아다니다 구중심처에 들었으니 참으로 답답하겠구먼. 다음 달 과인의 생일엔 오랜만에 도성 밖에 나가서 며칠 사냥이나 하려고 했었는데…… 그대도 같이 가세.”

저도 모르게 공비를 사냥 행사에 청해놓고는 욱이 속으로 헛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지껄인 것인가? 지난여름부터 사냥 일정을 잡아놓기는 했으나 그 목적은 어디까지나 귀인과 궁 밖에 나가 마음껏 말을 달리고 저녁엔 행궁에서 오붓한 시간을 갖는 것이었는데…….

“우리가 나가는 사냥은 호랑이나 멧돼지를 잡는 진짜 사냥은 아니고…… 숲에 여우 몇 마리를 풀어놓고 쫓아다니거나, 잘해봐야 사슴 한두 마리 잡는 것이 고작이라 그대 성에 차지는 않겠지만…….”

“신첩은 말 잔등에 올라본 지도, 활을 잡아본 지도 이미 오래입니다. 따라가봐야 짐만 될 것이니 마음 맞는 분과 홀가분하게 다녀오십시오.”

“그래도…….”

황제가 과거의 거친 행실을 알고도 못마땅한 내색 없이 의연한데다 오히려 마음을 써서 사냥을 같이 가자고까지 하는데 그 권유를 한마디로 딱 잘라 거절하는 공비의 냉랭한 태도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무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곤 그릇째 벌컥벌컥 마시던 탕국을 거칠게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 서슬에 욱과 무호의 부장들이 움찔 몸을 떨었다.

“마마!”

무호의 호통에 어느새 술이 얼큰히 들어간 공비가 도전적인 눈길로 그를 마주 보았다.

“왜요?”

“…….”

둘 사이가 금방이라도 뭔가 터질 듯 심상치 않자 욱이 얼른 공비 앞에서 술병과 술잔을 걷어 윤 내관에게 넘겼다. 그러곤 주의를 환기시키려고 서툰 너스레를 떨었다.

“사냥이야 아직 시일이 좀 남았으니 천천히 생각해보도록 하고…… 그러니까, 또…….”

같은 무장이라도 왕쾌가 거느리고 다니는 장수들은 말주변도 좋고 눈치도 빠르더니…… 대현성에서 온 것들은 배 속에 거지가 들어앉았는가? 어찌 이 와중에 갈비만 뜯고 있는고? 욱이 원망 어린 눈으로 귀한 궁중 음식에 정신이 팔려서 접시에 코를 박고 있는 무호의 부장들을 노려보았다. 결국 상황을 보다 못해 입을 연 사람은 허연이었다.

“요즘 장족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들었습니다, 장군. 폐하께서 국경의 상황을 많이 걱정하고 계시니 그 얘기를 좀 전해주시지요.”

차분하지만 어딘지 묵직한 위엄이 느껴지는 음성에 무호가 고개를 돌려 허연을 쳐다보았다. 무호는 아까부터 욱이 뒤를 힐끔거리며 뒤에 선 위병과 귓속말도 주고받고, 술도 한 잔 건네는 것을 유심히 보던 참이었다.

“아, 그렇지. 장족의 일을 깜빡 잊고 있었구먼. 그렇지 않아도 그대가 오면 그 일을 직접 물으려고 벼르고 있었네.”

허연의 도움으로 대화의 돌파구를 찾은 욱이 말을 이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동북 지역 변방의 상황은 도성에서 파악하고 있는 것보다 더 복잡하고 위태로웠다. 장족은 말과 양을 치며 동북쪽 성벽 바깥을 떠도는 이민족으로 한창 세력이 클 때엔 기병만 만 기를 웃도는 거대 부족이었다. 그 외에도 20여 개의 씨족이 이합집산을 반복하며 초원의 주인을 자처하고 있었고, 족장이 바뀔 때마다 부족의 성격도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돌변하곤 했다.

문제는 작년 여름부터 초원에 가축의 돌림병이 돌아서 그들이 키우던 양의 숫자가 절반 이하로 줄었고, 나이가 들어 비교적 온건한 태도를 보이던 늙은 족장이 올해 초에 의문의 급사를 당해 그 조카가 족장의 자리에 오른 것이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그 조카가 이전에도 수차례나 동북쪽에서 들어오는 상인들을 습격하고 대현성의 성문을 수시로 집적거리던 골칫덩어리라는 사실이었다.

“선대 족장은 그간 나라에서 내어준 구휼미 수만 석으로 적당히 달래고 넘어갈 수 있었으나 이자는 성격이 다릅니다. 게다가 부족의 원로들에게서 선대 족장을 살해했다는 의심까지 사고 있으니 그것을 무마시키기 위해서라도 조만간 큰 소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대현성 주변의 정세 얘기가 나오자 무호의 부장들이 그제야 들었던 수저를 놓고 대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장족의 움직임은 그들에게 가장 큰 현안이기도 했지만, 끝도 없이 이어진 진수성찬으로 이미 배를 채울 만큼 채웠던 것이다.

“그들의 군사가 현재 얼마나 되는가?”

“저희가 파악한 것으로는 명확하게 의사 표현을 하지 않은 군소 부족이 반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혼인으로 기병을 천 기나 거느리고 있는 오족을 끌어들였으니 다른 부족들도 눈치를 보며 그쪽으로 붙을 공산이 큽니다.”

“허면 이제 먹고살 양식을 대주는 온건책으로는 그자들을 회유할 수 없는 것인가?”

“돌아가는 상황으로 봐선 지금 섣불리 양식을 내주는 것은 그들의 군량미를 마련해주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지난봄부터는 성 밖으로는 일절 곡식을 내가지 않고 있습니다.”

“흠…….”

욱이 손끝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변방에서 금방 입성한 장수에게서 직접 듣는 국경의 상황은 장계를 통해 소설책 보듯 볼 때보다 훨씬 생생하고 급박하게 느껴졌다. 왕조가 시작된 이래 요즘 같은 태평성대가 없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그간의 큰 낙이었건만…… 전쟁을 피할 방법이 없단 말인가? 그런 생각에 마음이 복잡해진 욱이 고개를 돌려 허연을 돌아보았다.

“이 일은 일간 중신들을 불러 다시 의논을 하시지요, 폐하. 무호 장군과 그 부장들도 먼 길 왔으니 도성에서 며칠 더 쉬어가도록 하시고…… 후에 다시 불러 좀 더 구체적이고 자세한 정황을 들으시고 중신들과 함께 방책을 세우십시오.”

허연의 충고에 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히 오찬이나 들고 남은 시간은 향원궁에 자리를 마련해 공비와 무호가 그간 못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할 생각이었는데, 시간이 예상보다 지체된 것을 깨달은 욱이 슬슬 자리 정리에 들어갔다.

“전란에 관한 일은 논의 한두 번으로도 결론을 낼 수 없는 국가의 중대사이니 무 장군은 어명이 있을 때까지 도성을 떠나지 말고 성 안에 머물도록 하라. 그리고 과인이 상선에게 일러 사신각에 처소를 마련했으니 앞으로는 부장들과 함께 그곳에서 지내도록 하고…….”

“미천한 소신이 어찌 사신각에 머물 수 있겠습니까? 지금 묵고 있는 대흥루도 충분히 편하고 좋습니다.”

무호의 사양에 욱이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손을 내저었다.

“과인의 처남이자 나라 안에서 가장 큰 호랑이를 잡은 자네가 사신각에 머물 지체가 안 되면, 그곳에 머물 자가 누구란 말인가? 나중에 돌아가서 그 먼 곳까지 갔는데 매부가 며칠 쉬어갈 방도 한 칸 내어주지 않더라 뒷말하지 말고 사신각으로 짐을 옮기게.”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욱의 거듭된 권유에 무호와 부장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한 번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일어선 욱이 자리를 뜨기 전에 윤 내관을 돌아보았다.

“상선은 향원궁 접객실에 자리를 마련해 공비와 무 장군이 남매간의 정을 나눌 수 있도록 하라. 내가 중간에 버티고 있으니 눈치가 보여 그런가, 두 사람이 도통 말이 없구나.”

“예, 폐하.”

욱의 명령을 받은 윤 내관이 민 내관을 불러 향원궁 접객실로 공비와 무호 일행을 안내하라고 지시를 하는 사이, 고 내관은 태경이와 함께 데리고 있던 내관 아이들 반을 떼어서 공비에게 붙였다. 애초에 고 내관이 공비를 마중 나가서 모시고 들어온 것도 황제의 후비인 공비가 내관 하나 거느리지 못하고 유모만 덜렁 데리고 들어오는 민망함을 면하게 해주려는 뜻이었다.

“가서 마마를 잘 뫼시고, 장군께서 돌아가시거든 영운궁까지 뫼셔다 드려라.”

“예, 태감 나리.”

고 내관의 당부에 태경이와 네댓 명의 내관 아이들이 입을 맞춰 대답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민 내관 편에 무호 일행을 보내고 돌아서던 윤 내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 내관에게 다가왔다. 그러곤 나직하게 속삭였다.

“어찌 태경이와 아이들을 공비마마에게 달려 보내는가? 공비께 멱살이라도 잡혔는가?”

윤 내관의 물음에 고 내관이 한층 더 낮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공비마마 일로 의논을 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있다가 짬을 내어 저 좀 보시지요.”

부용정에서 바로 청량전으로 돌아온 욱은 내실에 들자마자 침상에 벌렁 누웠다.

“많이 피곤하셨나 봅니다, 폐하.”

윤 내관이 욱의 신발을 벗겨 침상 아래 놓고 탁자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면류관도 챙겨서 함에 넣었다.

“거친 변방에서만 생활하던 자들이라 예법도 어둡고 행동도 거칠어서 대하기 불편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가…… 어깨며 목덜미가 뻐근하구먼.”

그때, 잠깐 사이를 두고 내실에 들어온 허연이 돌아오자마자 누워서 꼼지락거리고 있는 욱을 마땅치 않은 눈길로 쏘아보았다.

“무호 장군과 부장들 때문에 지치신 게 아니라 대낮부터 약주를 하셔서 늘어지신 게 아닙니까?”

“술맛은 괜찮았는데…… 뒤에 철썩 붙어서 지키고 있는 어떤 위병 때문에 석 잔도 채 못 마시질 않았나?”

욱이 웃으며 허연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하지만 허연은 걸치고 있던 무구를 대강 끌러놓고 방 가운데에 놓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거운 갑옷을 걸치고 몇 시간씩 서 있었던 것도 오랜만이라 그도 다소 지쳐 있었던 것이다.

“그래, 변복까지 하고 나와서 보니 어떻던가? 자네가 보기엔 무호가 어떤 자 같던가?”

“제가 점쟁이도 아닌데 얼핏 잠깐 보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찌 알겠습니까?”

“무공이 뛰어난 자들끼리는 스쳐만 지나가도 등골이 당길 정도로 서로 느끼는 기가 있다던데…… 그런 것은 말짱 다 헛소리인가?”

욱이 공연히 툴툴거리자 허연이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그 사람 체격으로 보나 거느리고 다니는 부장들로 보나, 또한 직접 산을 뒤져 잡았다는 호랑이로 보나…… 용맹한 장수임은 틀림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욱이 재차 다그치자 허연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자에 관해 특별히 궁금하신 바가 있으십니까? 그 사람됨을 깊이 알고 싶으시면 사람을 풀어 따로 조사를 하셔야지, 저한테 관상을 보라고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 사람 눈빛에 거칠고 난폭한 성품이 보이니, 혹 분쟁을 부추기는 경솔한 성격이 아닐까 싶어서 그러네. 머리 좋고 공부 잘하는 자들이 자신의 총명함을 자랑하고 싶어하듯, 무예가 출중하고 용맹한 자들은 자신의 무용을 뽐내고 싶을 터…… 전쟁은 그런 자들에게 좋은 기회가 되지 않겠는가?”

욱이 누운 채 옷고름을 풀고 이리저리 몸을 굴려가며 용포를 벗는 꼴이 보기 싫어서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던 허연이 다소 놀란 눈길로 욱을 건너다보았다.

“무호가 피할 수도 있는 시비를 받아서 일을 키우려고 하는 것 같으십니까?”

“실로 오랜만에 나라 안팎이 평안해서 백성들이 큰 시름을 잊고 지내는 때이니 나는 되도록 이 태평함이 오래갔으면 싶지만, 그자는 생각이 다를 수도 있지.”

“…….”

오찬석에서 공비와 무호의 기세에 치여서 안절부절못하고 앉아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의외로 침착하게 상대를 파악하고 어떤 일이 가장 중요한지 판단하는 날카로움이 있구나 생각하며 허연이 속으로 작은 탄성을 토했다. 하지만 곧 두 발만 꼼지락거려 버선을 벗어 던지는 한심한 꼴에 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시각이 아직 이릅니다. 벌써 주무시려고 하십니까?”

허연이 몸을 일으켜 침상으로 다가가서 그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베개를 바로 놓아주고 이불을 끌어서 욱에게 푹 덮었다.

“낮술 몇 잔 걸쳤더니 좀 노곤하긴 하네.”

“허면 한 시진만 주무십시오. 저녁은 드셔야지요.”

허연의 다정한 눈길에 욱이 씨익 웃었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서 아직껏 허연이 걸치고 있는 갑옷의 매듭을 풀었다.

“내 여태 비단옷은 수도 없이 벗겨보았으나 갑옷은 처음이라…… 기분이 묘하구먼.”

욱의 싱거운 수작에 허연이 그 손목을 움켜잡았다.

“허튼짓 마시고 그냥 주무십시오.”

“나는 뭐…… 허튼짓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갑옷 벗고 홀가분하게 쉬라고…….”

그렇게 눙치면서 욱이 갑옷 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욱의 음란한 손길이 아랫배를 더듬자 허연이 욱을 아예 밀치고 침상에서 떨어져 섰다.

“벗어도 제 손으로 벗을 것입니다.”

“내가 벗겨준다니까 그러네?”

“폐하는 폐하의 의관이나 제대로 벗으십시오. 누워서 꿈틀거리며 구렁이가 허물 벗듯 한 자락씩 벗어 던지지 마시고요.”

“거 참…….”

“윤 내관!”

허연이 툴툴거리는 욱을 버려두고 윤 내관을 찾았다. 중문 밖에 나가 있던 윤 내관이 허연의 부름에 얼른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불러 계시옵니까?”

“지방에서 폐하께 올린 장계는 어디에 보관을 하는가?”

“최근 것은 휘명전의 문서실에 두고 오래된 것은 장경각으로 보냅니다.”

“사람을 보내 대현성에서 폐하께 올린 장계를 찾아오도록 하게.”

“대현성에서 올린 장계를…… 말씀입니까?”

윤 내관이 전혀 일할 모양새가 아닌 욱의 모습을 넘겨다보며 물었다.

“우선 최근 3년 것까지만 찾아오게. 지금 볼 것이니 바로 갖다주게.”

문 밖으로 나간 윤 내관이 휘하 내관 두셋을 불러 장경각에 가서 대현성발 장계를 가져오라는 지시를 전하는 사이, 욱이 고개를 들고 허연을 빤히 쳐다보았다.

“갑자기 장계는 왜?”

“무호에 대해 묻지 않으셨습니까? 그가 장족의 사소한 분쟁이나 움직임을 침소봉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경거망동하는 성품은 아닌지 마음이 쓰이신다니 저도 나름대로 알아보려고 그럽니다.”

“장계를 무호가 직접 쓰는 것도 아닌데 그것만 보고 어찌 그자의 사람됨을 파악한단 말인가?”

“3년간의 장계라면 그 양도 많을 터, 보다 보면 뭐라도 걸리는 것이 있겠지요.”

허연의 대답에 욱이 일어나 앉았다. 그러곤 슬쩍 허연의 눈치를 살폈다.

“설마 그 장계를 지금 보려는 것은 아니겠지?”

그 은근한 물음에 허연이 갑옷을 벗어 탁자에 내려놓다 말고 욱을 빤히 바라다보았다.

“지금 안 보면 언제 보겠습니까? 오늘 내일 중으로 중신들과 그 일을 논의하자면 당장 검토를 해봐야지요.”

“아니, 하지만…….”

“마침 할 일도 없는데 잘되지 않았습니까? 폐하께서 주무시는 동안 저는 장계나 봐야겠습니다.”

“허면 지금 나더러 혼자 자라는 것인가?”

“혼자 주무시지 않으면요? 제가 곁에서 자장가라도 불러드려야 합니까?”

허연이 욱을 노려보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어제 국화밭에서 사람을 그렇게 난처하게 만들고 청량전에 들어서도 밤새 치댄 주제에, 또다시 벌건 대낮에 자신을 침상에 끌어들이려는 수작이 새삼 괘씸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지금 허리가 이렇게 욱신거리고 몸이 곤한 것이 오랜만에 무거운 갑옷을 입고 몇 시진 서 있었던 까닭이 아니구나, 어제 종일 저 강아지에게 시달려서 진이 다 빠진 것이구나 싶어서 욱을 노려보는 허연의 눈길이 점점 매서워졌다.

“어찌 그리 노려보는가? 좀 전까지 멧돼지 때려잡던 후궁과 그 오라비 때문에 덜덜 떨다가 들어왔거늘, 이제 자네까지 왜 이러나?”

허연의 눈총에 욱이 다시 누워서 이불을 끌어 덮으며 깽…… 하고 죽는소리를 했다. 욱이 갑자기 꼬리 내린 강아지의 형상으로 낑낑거리는 모습도 우습고, 좀 전에 부용정에서 무호와 공비 사이를 중재하느라 쩔쩔매던 것이 떠올라서 허연이 저도 모르게 쿡, 웃음을 터뜨렸다. 허연은 웃는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고 얼른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눈치를 채고 기세를 되찾은 욱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 오게.”

“싫다니까요.”

“자네는 호랑이 사냥이 취미인 후궁과 처남을 둔 내가 불쌍하지도 않은가?”

욱의 떼를 이기지 못한 허연이 결국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그러자 욱이 냉큼 허연의 허벅지에 머리를 얹었다.

“참으로 대책 없는 여인이 아닌가? 호랑이 사냥을 따라다니고, 덤벼드는 멧돼지에게 화살을 날리다니…… 공비를 후궁에 들일 것이 아니라 위병대에 부장 자리라도 하나 마련해서 그리 보낼 걸 그랬네.”

“저도 놀랐습니다. 금란 공주님과 은혜 공주님만 여걸인 줄 알았는데, 공비께서는 정말 호걸이십니다.”

“자기 마누라 아니라고, 자네는 참 태평하고 차분하네.”

있는 대로 엄살을 피우고 한숨을 내쉬는 욱을 내려다보며 허연이 피식 웃었다.

“대대로 이름 높은 장군 집안의 딸이고, 그 오라비들도 모두 무공이 뛰어난 장수들이니 어렸을 적부터 격의 없이 어울려 놀다 보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공비께서 천지 분간 못하고 아무에게나 행패를 부리시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허연의 두둔에 욱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자네, 정말 공비에 대해서 들은 말이 하나도 없는가?”

“…….”

허연이 욱을 빤히 보며 고개를 저었다.

“저도 공비마마와 향비마마가 말다툼하시는 것은 한 번 본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좁은 궁 안에서 여러 사람 오가며 마주치다 보면 그 정도 시비야 얼마든지 있는 것이 아닙니까?”

허연이 지난 봄날의 새벽에 목격했던 향비와 공비의 대거리를 떠올렸다. 그때 두 사람의 기세가 자못 험하기는 했어도 흥분해서 막말을 하며 덤빈 쪽은 향비였고, 공비는 오히려 논리정연하게 이치를 따져가며 향비를 공박했기 때문에 허연에게는 공비의 성품이 그렇게까지 거칠고 난폭하다는 인상은 전혀 없었다. 다만 아직 소녀라고 해도 좋을 어린 나이에 그 뒷모습이 울적하고 외로워 보여서 그것이 오래 마음에 남았을 뿐이었다.

“향비에게 막말하고, 연비와 멱살 잡고, 내관에게 손찌검하고…… 얼마 전엔 회임한 은혜 공주하고까지 몸싸움을 벌이는 바람에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는가?”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허연의 반문에 욱이 혀를 끌끌 찼다.

“어허, 이 사람…… 소식이 아주 깡통일세그려. 다른 일은 몰라도 은혜 공주의 일만은 그냥 넘길 수가 없어 공비를 불러서 엄히 야단을 쳤고, 그 이후론 성질 죽이고 잠잠히 지내고 있네만, 그 성격에 언제까지 주변이 조용하겠는가?”

이제는 술이 다 깼는지 말짱한 얼굴로 자신이 멋모르고 궐 안에 호랑이를 들였다는 둥, 앞으로 공비가 말썽을 피우면 불러서 야단을 칠 것이 아니라 다른 후궁들에게 공비 근처엔 얼씬거리지 말라고 주의를 줘야겠다는 둥, 아까 부용정에 들었을 때에도 3년 만에 만난 오라비를 대하는 태도가 어찌나 서먹하고 냉랭한지 그 가운데에서 숨이 막힐 뻔했다는 둥…… 끝도 없이 툴툴거리는 욱이 귀여워서 허연이 쓴웃음을 지었다.

“시간이 좀 흐르면 그분도 궁에 마음을 붙이시겠지요. 폐하께서도 못마땅하게 여기지만 마시고 공비마마를 잘 보살피고 위로해주십시오. 사람은 사랑을 받으면 차분해지고 너그러워지기 마련입니다.”

“그런가?”

“순식간에 스무 살은 깎아먹은 어린애로 돌아가거나 아예 강아지로 변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일은 드물지 않겠습니까?”

허연의 핀잔에 욱이 키득거렸다. 그러곤 허연의 목에 팔을 감아 아래로 끌어당겼다. 

“자네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어린아이이고, 그다음이 강아지가 아닌가?”

“그래서 틈만 나면 그 두 가지를 다 하시는 겁니까?”

“그냥 사랑한다고 하면 되지, 공연히 투덜거리기는…….”

그렇게 말하며 욱이 허연에게 입을 맞췄다.

“무슨 일이기에 사람을 이리 끌어당기는가?”

고 내관에게 끌려와서 청량전 구석방으로 밀려 들어간 윤 내관이 옷소매를 탈탈 털며 짜증을 냈다. 지금 침전 안에선 황제가 허연과 정담을 나누는 중에 나랏일도 의논하며 속내를 다 터놓는 중이라 윤 내관은 그 이야기를 한 마디도 놓치지 않기 위해 온 정신을 집중해서 엿듣던 중이었는데, 그 중요한 일을 고 내관이 방해한 것이었다.

“상선께서는 지금 칠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십니까?”

“왜? 칠궁에 무슨 일이 있는가?”

윤 내관이 영 건성으로 되묻자 고 내관이 혀를 끌끌 찼다.

“상선께서는 천하에 모르는 일이 없는 정보통이라면서요? 그런데 칠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모르시다니…… 그야말로 등잔 밑이 어두운 격이 아닙니까?”

고 내관의 책망에 윤 내관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라고 어찌 세상일을 다 알겠는가? 더군다나 후궁의 자잘한 일은 태화궁 태감 장 내관 소관이지 내가 나설 일도 아니고……. 왜? 향비께서 또 자네를 불러서 값비싼 비단옷을 지어 올리라 명이라도 내리셨는가? 아니면 귀인께 미향궁에 문후 들라고 떼라도 쓰셨는가?”

황후가 보름 전 무사히 황자를 낳은 이후 칠궁은 쥐 죽은 듯 잠잠했다. 황후는 산후 조리를 하고 갓 태어난 황자를 돌보느라 태화궁에서 꼼짝도 않았고, 향비 이하 후궁들은 황후의 눈치를 살피며 숨을 죽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향비도 기가 많이 죽었고 입궁 이후 심심찮게 소란을 일으키던 공비도 조용하니, 윤 내관이 알기론 요즘 칠궁엔 일이라고 할 만한 정황이 없었다.

“영운궁이 지난 반년간 궁분을 받지 못했답니다.”

윤 내관이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고 내관을 빤히 쳐다보았다.

“응?”

“궁분은 고사하고 식재료와 땔감, 그 외 전각에 쓰이는 비품도 전혀 받지 못해서 그간 연초에 폐하께서 내리신 비단과 친정에서 마련해 온 패물 따위를 팔아서 연명을 했답니다. 월봉을 주지 못하니 궁인들도 모두 흩어져서 지금 영운궁에 사람이라곤 달랑 공비께서 친정에서 데려온 유모 한 명뿐이고…… 소인이 영운궁의 내실에도 들어가보았는데 벽엔 그림 한 장 붙은 것이 없고, 선반도 텅 빈 것이 허드렛일 하는 상궁의 처소보다 못한 지경이었습니다.”

이어진 고 내관의 설명에 윤 내관이 못 믿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그런 일이 있겠는가? 그간 폐하께서 영운궁에 아예 걸음을 끊으신 것도 아니고 한 달에 두세 번은 공비마마와 점심을 드셨는데 그런 기색도 없었고, 공비께서도 아무 말이 없으셨네.”

“소인도 그것을 이해 못하겠습니다. 공비께서 아무리 별말씀이 없으셨다고 해도…… 어찌 그런 눈치조차 못 채셨습니까? 점심을 영운궁 마당에서 드셨습니까?”

고 내관의 물음에 윤 내관이 뭔가 깨달은 듯 허허…… 하고 조그맣게 탄식을 토해냈다. 그간 황제가 영운궁에 행차를 했다고는 하지만 실상은 그 근처의 별궁이나 정자에 공비를 불러 간단하게 점심을 들었을 뿐이었다. 황제가 영운궁의 궁문을 넘은 일조차 없으니 지밀 내관들도 그 내실이 어떤 지경인지는 알 길이 없었던 것이다.

그제야 언제부터인가 공비 옆에는 권 상궁만 붙어 다녔던 것이며, 공비의 의복이며 비녀며 늘 보던 것이었을 뿐 새것이 없었던 사실이 떠올라서 윤 내관이 허파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만 연거푸 냈다.

“그것이 참말인가? 공비께서 폐하와 초야도 치르지 못하시고, 이후로도 눈 밖에 난 일이 많아 총애는커녕 눈총만 받으시는 처지라고 해도…… 궁내청 배 내관이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비빈의 궁분을 착복하고 그것도 모자라 그토록 핍박을 한단 말인가?”

“그것이 배 내관이 홀로 벌인 짓이겠습니까? 소인이 알아보니 모든 것이 향비의 농간이었습니다.”

“그것 참…….”

사방이 경쟁자인 후궁에서 황제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비빈이 무시와 박대를 당하는 것은 전에 없던 일도, 드문 일도 아니었다. 애초엔 명문가의 영애로 높은 품계를 받아 황궁에 들었더라도 황제의 총애를 얻지 못하거나 자식을 낳지 못하면 궁인들의 냉대를 감수하며 그늘에서 핀 꽃처럼 초라하게 시들어가는 것이 후궁들의 운명이었다.

비록 한때 황제의 사랑을 받고 슬하에 자식을 둔 후궁이라고 해도 세월이 흘러 총애가 다른 후궁에게 옮겨 가거나 그 자식이 황제에게서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하면 뒷방으로 밀려나는 서글픈 신세를 피할 길이 없었으니, 슬하에 황손은커녕 황제와 잠자리도 같이한 적이 없는 공비의 앞날이 막막하고 암울한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지금의 황제는 후궁이 여섯 명뿐이라 친정도 한미하고 외모도 그저 그런 공비조차 궁 하나를 차지하고 주인 노릇을 하는 것이지, 후궁이 길가에 늘어선 꽃처럼 많았던 선대 황제들의 시절이었으면 황제의 손길도 한 번 닿지 않은 그 같은 여인은 후미진 별채의 문간방 신세를 면할 길이 없었을 터였다. 또한 지금 당장이라도 황제가 후궁에서 쓰는 비용이 과하니 줄여 쓰라는 명령이라도 내린다면 영운궁 살림살이가 가장 먼저 반 토막이 나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따로 황명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더구나 대전 상선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후궁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불쾌하긴 했지만, 공비가 향비를 겁도 없이 건드릴 때부터 어느 정도 후환이 있을 것은 충분히 예상된 일이었다. 황후의 황자 생산으로 위세가 전 같지 않다고는 해도 향비는 여전히 제2황자의 생모였다. 그리고 그 친정 역시 부와 명예를 거머쥔 명문가였으니 다 같은 비라고는 해도 후궁 내의 서열이 공비와 같다고 할 수는 없었다.

“본래 후궁 관리는 태화궁의 소관이니 장 내관이 후궁의 일을 꼼꼼히 살폈어야 했는데 황후마마의 회임으로 경황이 없어 다소 소홀했던 모양이지. 내, 일간 장 내관을 불러 영운궁의 처우를 개선하라고 말을 전하겠네.”

이 일을 정리하자면 물정 어두운 어린 후궁이 위세 있는 후궁에게 대들다가 봉변을 당한 사건인데, 향비의 소행이 다소 과하고 어리석긴 하지만 대놓고 사람을 해치지는 않았고, 공비도 잘한 것은 없으니 크게 문제 삼을 일이 아니라고 판단한 윤 내관이 나름대로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 상선 영감…….”

“배 내관 그놈도 분별이 없지, 향비의 부추김이 있었다고는 해도 어찌 후궁의 궁분을 제놈이 다 떼어먹는단 말인가? 그놈은 오늘 저녁에라도 잡아들여서 혼찌검을 내야겠구먼.”

윤 내관의 미지근한 태도에 평소 향비에게 유감이 많았던 고 내관이 벌컥 언성을 높였다.

“이 일은 그렇게 대강 얼버무릴 일이 아닙니다!”

“아니, 이 사람이…….”

고 내관이 앙칼지게 달려들자 당황한 윤 내관이 슬슬 뒷걸음질을 쳤다.

“일을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상선께서 벼락을 맞으십니다. 좀 전에 폐하께서 공비마마와 무호 장군을 어찌 대접하시는지 상선께서도 다 보지 않으셨습니까? 폐하께서 그간 어느 처남을 그렇게 두려워하시며 말 한 마디 할 때마다 움찔움찔 놀라셨습니까?”

그도 그렇구나. 공비가 향비의 눈 밖에 나서 괴롭힘을 당한 것은 후궁의 일이지만 지금 궁 안에 공비의 오라비가 들었으니 이 일이 후궁의 담장을 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윤 내관의 표정이 다소 떨떠름해졌다.

윤 내관이 눈치 빠르고 발 빠르고, 마음만 먹으면 세상에서 캐내지 못할 일이라곤 없는 정보통이라 황제에게 크게 도움이 되는 최측근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정보로서의 가치가 없는 일이나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일엔 한없이 무덤덤한 성격이라, 폐궁지기 궁녀나 다름없는 공비를 위해 세도 있는 가문의 딸이며 칠궁의 2인자인 향비를 거스를 리 없다는 것을 잘 아는 고 내관이 한층 수위를 높여 그를 압박했다.

“더군다나 지금은 변방이 어지러워 그 같은 장수가 더욱 중요한 때이니, 무호가 공비마마의 일을 알고서 서운한 마음이라도 내비치는 날엔 환관청 수장이신 상선께서 어찌 면피를 하시겠습니까? 상선께서는 칠궁의 일이 장 내관 소관이라고 하시지만 폐하께서 그간의 일을 아시면 가까이에 있는 상선을 잡지, 며칠 전 아드님을 생산하신 황후마마의 태감을 불러 야단을 치시겠습니까?”

고 내관의 말에 윤 내관이 굳은 얼굴로 방 안을 빙빙 돌았다. 고 내관이 별로 상관도 없는 일에 이렇게 흥분하는 것은 그간 쌓인 향비에 대한 유감 때문이었지만, 지금 한 말에는 틀린 부분이 없었던 것이다. 내명부를 다스리는 것은 황후의 소임이지만, 자신은 환관청의 수장이니, 턱밑에서 일어나는 궁내청 태감의 전횡과 착복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황제에게는 통할 리 없는 변명이었다.

게다가 그 오라비가 궁에 들어 황제에게서 융숭한 대접을 받고, 오랜만에 만난 누이와 편하게 이야기 나누라며 종친들에게나 허락된 향원궁 접객실에까지 든 때에 그 말이 황제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헉…….”

허면 지금 향원궁 접객실에서 오라비와 마주 앉은 공비가 그간 궐 안에서 당한 설움과 핍박을 모조리 일러바치고 있을 것이 아닌가? 무호가 오늘 바로 대현성으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조만간 다시 들어 황제와 장족의 일을 의논할 것인데…… 어전에서도 두려움을 모르고 먹던 국그릇을 탁탁 내려놓는 그 호랑이 같은 자가 못된 후궁과 내관의 작당으로 제 누이가 지난 반년간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곤궁하게 지낸 사실을 알면…….

거기에 생각이 미친 윤 내관이 고 내관을 밀치고 방을 나섰다. 지금이라도 향원궁에 가서 공비와 무호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가는지 파악을 해서, 막을 것은 막고 수습할 것은 수습하고, 공비에게 무릎을 꿇고 빌 일이 있다면 비는 것이 더 큰 벼락을 피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상선 어르신, 지금 어딜 가십니까?”

“어디 가는지 몰라서 묻는가?”

윤 내관이 따라 나오며 비아냥거리는 고 내관을 힐끔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일간 조치를 취하신다더니…… 공비는 두렵지 않아도 그 오라비는 어지간히 무서우신가 봅니다.”

“내가 천지간에 두려워하는 분은 오직 폐하뿐일세!”

버럭 소리를 치며 청량전 마당으로 내려선 윤 내관이 흠칫 놀라서 걸음을 멈췄다. 무호 일행을 향원궁으로 안내해 갔던 민 내관이 사색이 되어 청량전 중문 안으로 달려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폐하! 황제 폐하! 무호가…… 지금 향원궁에…….”

뭔가에 크게 놀란 것이 분명한 민 내관이 횡설수설하며 마당을 가로질렀다. 그런 민 내관의 모습에 윤 내관도 혼비백산을 해서 마당에 놓인 국화 화분을 다 쓰러뜨리며 달려갔다. 그러고는 마당 중간에서 민 내관을 붙들어 우선 그 입을 틀어막았다.

“네 이놈! 지금 정신이 있느냐? 폐하께서 귀인과 함께 침전에 들어 계시거늘, 거기가 어디라고 다짜고짜 달려 들어가느냐?”

“사, 상선 영감…… 지금 이러실 때가 아닙니다. 지금 향원궁에서 큰일이 났습니다!”

기어이 공비가 그간의 일을 오라비에게 고해바쳤구나, 그래서 열 받은 무호가 이리로 쳐들어오는 중인가 보다 싶은 두려움에 윤 내관이 다리에 힘이 풀려 민 내관의 멱살을 잡은 채 주저앉고 말았다.

대현성 무 씨 집안이 변방의 무장이라 허술히 보지 말라고, 내력을 알고 보면 나라 안에서 제일 무서운 호랑이 소굴이니 너희 마마님 잘 달래서 경거망동이 없도록 하라고 미향궁 태감인 신 내관에게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건만, 그 못돼 처먹은 고자 놈 때문에 내가 요절이 나게 생겼구나…… 그런 걱정에 앞이 막막해서 말문이 막힌 윤 내관을 대신해서 고 내관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큰일이라니? 왜? 무호 장군이 당장 폐하를 뵈어야겠다고 소란이라도 피우고 있는가?”

“그게 아닐세. 그런 일이 아니고…….”

뭐가 되었든 이 일은 황제에게 되도록 숨기는 것이 상책이란 판단에 윤 내관이 다시 민 내관의 입을 틀어막았다.

“언성을 낮춰라! 폐하께서 들으시겠다!”

“이 일은 폐하께서도 아셔야 합니다!”

“네놈이 오늘 내가 죽어나가는 꼴을 보려고 이러느냐? 폐하께는 절대 비밀이다. 무슨 일이건, 내가 지금 향원궁으로 가서 수습을 할 것이다.”

거듭 입단속을 하며 윤 내관이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 얻어걸린 대전 상선의 벼슬이며 얼마 만에 만난 황제다운 황제인가? 철딱서니 없는 후궁들의 다툼 따위로 신임을 잃는대서야 말이 안 되지! 지금 바로 가서 후궁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 줄 몰랐다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각별히 주의하겠다고 싹싹 빌면 무호도 사람인데 설마 나를 죽이기야 하겠는가? 또한 공비는 어차피 황궁에서 평생을 보낼 사람이니 누이의 처지를 생각해서라도 한 번은 넘어가주겠지…….

“상선 영감, 제 얘기를 좀 들어보시고…….”

“뭐가 되었건, 내가 해결을 한다지 않았느냐?”

어쨌든 민 내관을 중간에 잡아서 큰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윤 내관이 그를 질질 끌고 마당을 가로질렀다. 그때, 환이와 명이가 국화꽃 가득한 청량전 마당으로 뛰어 들어왔다.

“마마! 귀인마마!”

“마마! 향원궁에서 큰일이 났습니다!”

두 견습 내관이 그렇게 소리치며 호랑이에게 쫓기는 토끼처럼 전각 안으로 바쁘게 달려 들어갔다. 미처 손쓸 틈도 없이 아이들이 전각 안으로 사라져버리자 윤 내관은 이번에야말로 망연자실해서 마당 복판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마마!”

“마마! 큰일 났습니다, 마마!”

자꾸 들어붙어서 치근덕거리는 욱을 베개로 두들겨 진압하던 허연이 갑작스러운 아이들의 난입에 얼굴을 붉히며 침상에서 내려섰다.

“웬 소란이냐? 어전에 들 때엔 중문 앞에서 고한 연후에 허락을 받고 들어야 한다고 그리 일렀거늘…….”

허연이 욱의 눈치를 살피며 아이들을 타일렀다. 이제 허리끈만 풀면 오늘도 일은 다 성사된 것이었는데, 아이들의 소란으로 김이 나간 욱이 환이와 명이를 노려보며 조그맣게 “네 이놈들!” 하고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아이들은 무엇을 보고 놀랐는지 욱의 눈총 따위는 아랑곳없이 거친 숨을 헐떡거렸다.

“향원궁에서 큰일이 일어났습니다! 무호 장군께서…….”

무호의 이름이 나오자 욱이 그제야 무슨 일인가 싶어서 침상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러곤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바라다보았다.

“무호가 왜? 무슨 일이 있느냐?”

“쓰러지셨습니다!”

환이와 명이는 아직도 어리고 성격도 활달해서 별것 아닌 일에도 크게 수선을 피우다가 고 내관에게서 야단을 맞는 일이 자주 있었다. 이번에도 그런 일이려니 생각하며 저고리 고름을 고쳐 매던 허연도 놀라서 아이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냐? 무호가 쓰러지다니?”

“향원궁 접객실에서 공비마마와 이야기를 나누시다가…….”

“두 분이 말다툼을 좀 하셨는데 갑자기 공비께서…….”

아이들의 두서없는 설명에 욱이 놀라서 침상에서 내려왔다.

“왜? 공비가 철딱서니 없는 소리를 지껄여 무호가 뒷목이라도 잡았느냐?”

아이들 못지않은 욱의 수선에 허연이 혀를 끌끌 차며 말을 잘랐다.

“무호는 이제 갓 서른 된 젊은이입니다. 공비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건, 무호가 뒷목을 잡고 넘어갈 나이는 아니질 않습니까?”

“공비가 무슨 짓을 했으니 무호가 쓰러진 것이 아닌가?”

그렇게 대꾸하고는 욱이 아이들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곤 대체 공비가 무슨 짓을 했기에 황룡전의 기둥만큼이나 거대하고 기세등등한 제 오라비를 뒤로 넘겼는지 궁금해서 침을 꼴깍 삼켰다.

“공비와 무호 장군께서 말다툼을 하셨는데 그러다 공비께서 무호 장군을…….”

일이 이쯤 되자 허연도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명이를 다그쳤다.

“장군에게 뭘 어찌 하셨느냐?”

“한 대 치셨습니다.”

명이의 대답에 욱과 허연이 의아한 눈길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공비가 비록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하다고는 해도 여인치고는 그렇다는 것이지 체구는 허연보다 조금 작은 정도였다. 그러니 뭔가 남모르는 괴력이 있다면 모를까, 무호 같은 장사를 한 주먹에 쓰러뜨릴 정도는 절대로 아니었던 것이다. 욱과 허연의 미심쩍다는 표정을 본 환이가 명이의 설명이 부족했음을 깨닫고 얼른 말을 보탰다.

“공비께서 장군에게 돌려차기를 날리셨습니다!”

“그 한 방이 장군의 관자놀이에 제대로 들어가는 바람에 장군이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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